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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3일 00시 12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사람이 태어나 한 평생을 살다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때, 그럴 때 뒤에 두고 오는 이들은 그 사람과 보냈던 시간을 회상하며 그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을 할까? 리오 휴버만의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두고 다음과 같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리오는 아주 친절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게임을 무척 즐겼는데, 주로 테니스를 치는 것과 포커 놀이, 그리고 스크래블(단어짜맞추기 놀이)에 열광했다” 고. 함께 대화를 나눌 때면 언제나 대화의 주제는 정치에서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산책하며 걸을 때는 항상 상대방의 팔을 가볍게 붙잡은 채로 걸었다고 한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특히 강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조금 의아스럽게 다가왔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1903년 New Jersey의 Newark에서 11명 중 막내로 태어나, 성실한 지식인 중산층 부모를 둔 덕분에 휴버만은 무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공교육의 혜택을 누리며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그가 여름방학 때마다 쌓은 각종 현장 경험을 살펴보면 훗날 그가 사회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11살 때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근무했던 셀률로이드 공장을 비롯해, 영업 일을 했던 월스트리스 브로커리지와 네딕 음료 회사, 유리공장, 전기 기술자 보조원, 우체국, 전보 회사 경비직 등의 값진 경험. 이러한 거친 경험 속에서 오히려 휴버만은 누구보다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마치 슬픔을 알아야 기쁨의 참 맛을 알 수 있듯이. 노동자의 보이지 않는 고통과 드러나지 않는 심정, 그리고 표출되지 않는 바람들을 휴버만보다 더 잘 헤아려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는 열 여덟에 교사 자격증을 취득해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스물넷에 고등학교 교사인 동창 Gertrude Heller와 결혼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신혼 여행 목적지인 캘리포니아까지 히치 하이킹 하며 갔다는 것. 그 당시 그의 하루 일과는 쉴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고 그는 고백했다. Newark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면, 버스와 기차를 타고 뉴욕대학에 강의하러 갔다가 다시 Newark로 돌아와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뉴욕으로 이사해 진보적 성향이 강한 사립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는데, 지식 축적뿐 아니라 자립심 길러주기에 더 초점을 뒀던 이 학교가 그 당시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휴버만은 바로 그 진보적 성향 때문에 이 학교에 머물렀다. 그는 열과 성을 다해 그 학교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의 나이 스물 아홉에 <가자, 아메리카로!>를 출판했다. 이는 출판 즉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후에 세계사를 다룬 역사 교과서를 집필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서 그는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 진학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그의 회사 Monthly Review(MR)를 창업하기 전까지 Scholastic Magazine, PM, US Week등의 편집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이렇게 다양한 언론사에서의 경력을 쌓으며 만난 Paul Sweezy와 함께 1949년 마침내 MR을 창업하기에 이른다.

MR은 휴버만의 개인 아파트에서 처음 탄생했다. 그 곳에서 스위지와 휴버만, 그리고 그의 아내는 MR 잡지가 세상에 전해줄 내용들, MR의 비젼, 출판과 관련된 모든 절차 등을 계획 및 기획함으로써 MR을 기업의 형태로 꾸려나갔다. 시대적 위협이었던 냉전과 마녀사냥이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휴버만의 뛰어난 출판 노하우, 사회주의에 대한 고갈되지 않는 열정, 그리고 가끔식은 어처구니없는 상상력 덕분에 그들은 MR을 통해 미국과 전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 그리고 성인들에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교육을 제공하고자 한 것이 MR의 첫 번째 비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만의 리더십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직접 고안해 많은 사람들에게 강의하기도 했다.

그가 쌓아 온 다양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하나의 커다란 물줄기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사회를 위하는 마음과 열정이었다. 사회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나 그 많고 많은 사람 중 휴버만은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본인의 경력이 “노동자들의 교육자”라고 망설임 없이 이야기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를 문제삼고 도전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MR의 웹사이트를 방문해 보면, 독자들을 위한 아래와 같은 인사말이 남겨져 있다.
“우리는 본 잡지를 구입할 수 없는 독자들과 본 잡지를 구하기가 마땅치 않은 곳에 거주하는 분들을 위해, 이곳에 무료로 기사를 게제합니다…….(생략)” 이것은 휴버만이 함께 산책을 할 때 상대방의 팔을 가볍게 붙자고 걷는 것에 맞먹는 세심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의 사회주의자 휴버만. 그에게도 여느 평범한 사람처럼 친구들이 자주 부르는 애칭이 있었다. 바로 Huby(휴비). 그가 스물 아홉에 남긴 유산 덕분에 나는 내 나이 스물일곱에 처음으로 미국 역사를 그나마 체계적으로 훑었다. 그것도 매우 재미있게. 아무리 시대를 소란스럽게 살았다고 해도, 남겨진 후세가 기억하는 것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우리들 가슴에 남는 것은 결국 사회에 대한 따뜻한 마음, 그리고 그것이 남긴 여운이라는 것.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은 손에 쥐면 그만이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과 열정이야말로 끝까지 전해질 값진 유산이기에.

그래서 5월의 봄비와 함께 휴비 할아버지에 대한 심심치 않은 고마움도 함께 내리고 있다.

<내 마음에 들어온 인용문>

“폭 3000마일, 길이 1500마일의 이 거대한 자석은 지상에 존재하는 온갖 유형의 인간들을 끌어들였다” (p. 17)

“런던에서 방금 도착한 보오덴호. 선장은 윌리암 하버트. 농부, 목수, 제화공, 대장장이, 벽돌 제조공, 벽돌 쌓는 직공, 톱질공, 재단사, 콜셋 제조자, 도살자, 의자 제조공, 기타 각종 직인을 포함하여 고용살이에 적당한 젊은 사람들이 도착했음. 적당한 가격에, 혐금이나 밀가루 빵이나 밀가루와 교환하고 있으니 필라델피아의 에드워드 혼에게 연락 바람” (p. 21)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오랜 시간 동안 심사숙고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멀고 먼 낯선 땅에 정착하기를 꿈꾸게 했을까?” (p. 25)

“어떤 사람이 미구겡 도착해서 당바닥에 떨어진 20달러짜리 금화를 보았으나 그것을 주으려고 몸을 구부리는 대신 발로 차버렸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지? 그게 진짜 금이라는 걸 모르나?” “물론 알죠” 그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미국에선 어딜 가나 금이 무더기로 쌓여 있어서 마음대로 가질 수 있다는데 뭣하러 부스러기를 줍습니까?” (p. 28)

“그렇게 그들은 왔다. 자의로 오는 사람들이나 타의로 보내지는 사람들이나…… 그 많은 사람들은 이 곳에 도착한 뒤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p. 33)

“그러나 가장 슬프고 비통했던 것은 불과 2~3개월 사이에 같이 있던 사람들 중 반이 죽었다는 것이다…… 100여명 되던 가운데서 남은 사람은 50명도 채 되지 않았다” (p. 41)

“후에 흑인 노예의 수입이 금지되었을 때 남부에서는 피부색이 검은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북부에서는 반대로 그것이 어느 면에서는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리적 환경이 서로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p. 57)

“모든 식민지 주민들은 계급과 소유재산에 따라 일정한 권리가 있거나 없거나 했다. 계급과 재산. 그것은 사람들이 언제 무엇을 하든 거의 항상 따라다녔다” (p. 62)

“부자들의 지배권에 대해 도전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변경 개척자들은 정책 결정에 대한 발언권을 요구했다. 그들은 법을 만드는 데 그들 자신이 참여할 권리를 요구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미국적 사고방식은 변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p. 67)

“변경의 생활은 위험하고도 고달팠다. 문명의 부드러운 손길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미개인들과 싸우고 나무를 베고 옥수수를 심고 가구를 짜는 거친 생활이었다. 고된 일뿐인 개척생활로 그들은, 정확히 말해서 그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강인해졌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았다. 이곳에서는 특정 계급의 지배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더 훌륭하지 않았다” (p. 69)

“식민지 주민들은 무엇이 대영 제국의 발전을 돕는 것이며, 무엇이 서인도 제도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을 부자로 만드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그들 자신이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제국의 법을 지켜서 잘 살 수 있다면, 그런 법은 지켰다. 그러나 잘 살기 위해서 법을 어겨야 한다면, 그런 법은 지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돈지갑에 구멍이 뚫리느니보다는 제국의 법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 나았다”
(p. 82)

“영국은 영국을 위해 식민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반면, 식민지는 식민지를 위해 식민지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p. 85)

“전쟁은 1783년 끝났지만 혁명은 계속되었다. 전쟁은 미합중국 국민들의 정부의 변화를 의미한 것이었지만, 혁명은 국민들간의 공존하는 방식의 변화를 의미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서민층이 쟁취하고자 했던 것 중 일부가 혁명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고. 곳곳에서 미국인들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와 평등, 인간의 권리 등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다.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자명의 진리로 받아들인다’” (p. 116~117)

“혁명이란 말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 중의 하나는 ‘변화’이다. 미국 혁명은 미국인들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구시대의 유럽 국가들에게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오지 않았던 것이며, 또한 미국으로 하여금 ‘자유국가’라는 평판을 갖게 한 것이다” (p. 120)

“황야와의 그러한 투쟁이 개척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투쟁은 그들에게 자립을 가르쳐 주었다. 자신의 두 손으로, 오로지 자신의 힘에만 의존해서 낯선 상황과 맞섰고 그리고 정복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살 곳을 해결했다. 동부를 떠나면서 고향과의 관계도 끊었다……. 황야와의 투쟁은 그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믿었다” (p. 151~152)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 발명가가 된다” (p. 152)

“대평원으로의 이동은 계속되었다. 1890년, 최초로 대서양과 태평양이 각 주로 채워져 연결되었다. 변경의 종말이 온 것이다” (p. 201)

“1789년 영국 공장의 노동자였던 사뮤엘 슬레이터가 몰래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새로운 기계의 설계도를 갖고 왔다-그의 머리 속에 넣어서. 로드아일랜드의 포터킷에서 그는 아크라이트의 설계에 따라 최초의 완전한 방적공장을 세웠다…… 산업혁명은 이와 같이 미국으로 상륙했다” (p. 204)

“노예들은 동이 트자마자 일어난다……. 그들은 이와 같이 날이 저물 때까지 일을 계속하고 어두워서야 그들의 숙소로 돌아온다. 빵도, 쌀밥도, 생선, 고기, 감자, 버터 따위는 전혀 없다. 그저 옥수수 죽과 물뿐……” (p. 226)

“우리의 경작 인들은 그들의 땅에서 단물만 빼먹고 나면, 땅에 휴식을 주거나 거름을 주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지력을 회복시키려고는 하지 않고 서부로 더 멀리 떠나버린다. 또 다른 처녀지를 찾아서” (p. 230)

“300만~400만의 인간들을 심각한 저항에 부딪치지 않고 노예로 부리는 것이 가능했을까……. 아니, 가능하지 않았다. 미국의 어느 역사책에서도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많은 노예의 반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진압되었다” (p. 243)

“양 지역 간의 분쟁은 공업의 북부와 농업의 남부 간의 상반된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공업의 북부에 유리한 것은 농업의 남부에 불리했고, 마찬가지로 농업의 남부에 유리한 것은 공업의 북부에 불리하였다” (p. 247)

“1861년 4월 12일, 전쟁은 터졌다. 4년 동안의 오랜 전쟁이 양측에 숱한 사상자를 내면서 계속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을 가리켜 ‘부자들의 전쟁에 빈자들의 싸움’이라고 불렀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p. 262)

“자원, 인력, 기계, 그리고 자본ㅡ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울려 미국을 세계제일의 부국으로 만들었다. 남북전쟁과 함께 권력을 장악한 자본가들이 원동력 구실을 했다…… 그들은 미국을 개발했다. 때로는 정당한 방법으로, 때로는 부정한 방법으로 그들은 부자가 되었다……그들은 미국의 진정한 지배자들이 되었다” (p. 270)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대 공업국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대 농업국으로도 성장했다……. 구 세계의 자본가들에게 나날이 늘어가는 빚을 미국이 갚을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농업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p. 279)

“회사가 커질수록 그 힘도 커진다. 그 힘은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힘이 통제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p. 313)

“재산이 1위였고, 인간의 생명은 2위였다. 그것이 마찰의 한 원인이었다” (p. 318)

“미국의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투쟁들ㅡ 막대한 재산을 파괴했고 많은 생명을 앗아간ㅡ 중의 일부는, 최종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고용계급이 노동조합을 부인하고 조합과의 단체교섭을 거절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이 같은 진실이 좀더 널리 수긍되고 있지 않은 것은 오로지 고용주들이 여론을 조성하는 기관들인 신문, 학교, 교회 등을 장악해 왔기 때문이다” (p. 334)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길고 격렬한 투쟁에서 미국 법원은 가진 자의 편이었다”
(p. 341)

“17세기 초의 미국은 황금의 해 1929년의 미국과는 매우 달랐다. 야만인과 야수들만이 살고 있던 황야가 세계 역사상 전대미문의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 3백 년 간의 대 변모는 옛날 통속소설 작가의 환영을 받았을 스릴 만점의 성공담이 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 이야기에 ‘무일푼에서 백만장자’로 라는 걸맞은 제목을 붙였으리라” (p. 361)

“1929년 10월 이후에는, 이야기의 제목이 거꾸로 ‘백만장자에서 무일푼으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1930~32년의 무서운 불황의 시기에, 세계 최대의 부국은 ‘병든 나라’였다. 미국의 어디에서나 빈곤을 읽을 수 있었다…… 대도시에서는 늘어나는 수백만의 인구들이 있지도 않은 취직자리를 찾아 헤맸다……. 농장에서는 농작물이 산더미 같이 쌓이고 있었다……. 은행은 연이어 문을 닫았다……. 자선단체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나, 그들의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p. 365)

“이러한 고도로 발달된 최첨단의 자본주의가 미국 국민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몇몇 사람들이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배를 계속하는 한, 임금을 낮추고, 능률을 증진시키고, 경쟁자를 밀어내고, 가격을 고정시키고, 해외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벌이는 등,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싸울 것임을 의미한다” (p. 378)

“1932년 11월의 선거가 다가왔을 때, 국내 사정은 예전 어느 때보다도 악화되어 있었다…… 노동자는 실업으로 찌들어 있었고, 농민은 농업의 공황으로 허덕이고 있었고, 중산층은 은행의 파산으로 저축 금을 잃고 경제적인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1932년 11월 8일, 미국 국민은 미 합중국의 대통령으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를 선출했다” (p. 384)

“기업가의 자유방임(Laissez-faire), 우리에게 간섭 말라’는 교리는 물러갔다. 대신 그 자리에 ‘도와 달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망한다’는, 정부 개입의 관념이 들어섰다…… 증권을 판매함에 있어서 ‘사는 사람이 주의하라’는 원칙은 물러갔다. 대신 그 자리에는 ‘ 파는 사람이 주의하라’는 관념이 들어섰다. 불안정이 따르는 전통적인 ‘거치른 개인주의’의 관념은 물러갔다. 대신 안정의 관념이 들어섰다. 빈민을 구제하는 일은 자선사업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교리는 물러갔다. 대신 그 자리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헌법에 씌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시민을 기아로부터 지키는 것은 연방 정부 본연의 의무’라는 관념이 들어섰다. 뉴딜 정책은 관념의 혁명이었다” (p. 386)

“진실로 요구되었던 것은 거대한 규모의 영구적인 공공지출계획에 즉각적으로 착수하는 것이었다. 국가의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완전히 이용하게 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윤제도의 폐지를 위한 영국적인 계획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뉴딜 정책이 했던 것은 실업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향으로 불완전한 한 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경제적인 혁명이 아니었다” (p. 418)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은, 통상협정 계획은 수축하는 해외시장을 미국의 무역에 개방시키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상협정 계획의 핵심은 상호간의 관세특혜였다”
(p. 474)


<내가 저자라면>

<가자, 아메리카로!>는 본래 학생들을 주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쓴 역사서라고 한다. 그만큼 어렵지 않게 쓰여 졌다는 의미일 것이고, 따라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후에 성인들에게도 읽힐 수 있게끔 수정되었으며, 사회주의 노동 운동이 한창일 당시 노동자들에게는 반드시 한 번쯤 읽어야 할 책이었단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으니 시원하게 터지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사람들이 아마도 많았으리라 짐작해본다.

개인적으로는 미국 역사를 한 번에 연결시켜 훑어보기는 처음이라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게 읽었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의 막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미국인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과 흘러야 했던 피와 땀, 황야의 개척자들이 후세를 위해 일구어 놓은 많은 유익들이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고 보면 무엇이든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잘하는 나라는 없구나 라는 생각을 새삼 또 하게 된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지켜야만 하는 것들이 있고, 몸집이 크기에 더욱 더 지킬 것이 많다는 것.

그러나 단일민족국가와는 거리가 먼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이루어낸 연합체이므로 그 속에서 발생하는 창조라는 긍정과 충돌이라는 부정 또한 공존함을 간과할 수가 없다. 절묘하게도 이 글을 쓰는 지금 미국에서 유학중인 동생이 여름방학을 맞이해 귀국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부는 지금도 인종차별이 만연해 있고, 사람들의 선입견이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택시 기사들 대부분이 흑인이고, 청소부들은 거의 다 러시아인, 네일케어와 마사지 같은 서비스 업종은 주로 베트남인, 그 외에 히스패닉계가 사회적 사다리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생한 보도를 해준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찾아 볼 수 있는 백인들.

자본, 화폐, 부. 이것의 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했던 미국인들이기에 그들이야말로 자본주의의 DNA를 대대로 물려받아 오늘날 자크 아탈리가 말하는 새로운 ‘거점’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겠구나 싶다. 그리고 엘빈 토플러 또한 미국인이기에 그의 최근 미래 저서의 제목이 ‘부’의 미래이었나 보다라는 뜬금없는 생각도 든다.

<가자, 아메리카로!>의 가장 아쉬운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제목의 번역이다. 왜냐하면, 원제 We, the People은 분명 미국민들 자신들의 입장에 서서 스스로를 바라보며 붙인 제목인 데 반해 번역된 가자, 아메리카로! 는 밖에서 미국을 바라보는 외부인들 입장이 대변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즉, 미국민들의 자부심이 담겨있는 제목이어야 하건만, 마치 미국을 가기 위한 일종의 안내책자와도 같은 분위기가 풍기게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리오 휴버만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은 것은, 그도 분명 사회적 사다리의 중간 이상인 특권층에 속했을 터. 그 특권의식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고 스스로 깨어있기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휴버만이 그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어린 시절 쌓았던 많은 현장 경험이었다. 엘빈 토플러와 마찬가지로 그는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에 진실이 주는 힘이 담겨 있다고나 할까. 알고 말하는 것과 모르고 말하는 것은 천지 차이일테니까. 그가 만약 21세기인 지금도 토플러처럼 살아 있다면 과연 미국을 두고, 그리고 세계를 두고 무엇이라고 말했을지 내심 궁금해진다.

그가 지지했을 많은 아이디어 중에 아마 롱테일 경제학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80/20 의 법칙보다는 긴꼬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IP *.129.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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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5.13 12:47:20 *.114.56.245
세월의 깊이가 삶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번 느낀다. 오윤씨가 내가 리오 휴버만을 통해 또한 번의 방랑과 도전을 꿈꾸었다면 오윤씨는 그의 삶에 대한 온기에 눈을 크게 떴음을 갈 수로 ㄱ익어가는 사유의 세계에 박수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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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5.14 16:01:34 *.99.241.60
어쩌면 유목민 기질이 가장 다분한 민족이고
많은 것을 이루었으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는 나라같았습니다.
제목 부분에 대하여는 동감입니다.
2001년도에는 금서도 없었는데, 그냥 원제목 그대로 붙이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미래학자나, 과거 역사학자나 모두 세상을 사랑하고
열려있는 열정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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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2007.05.15 03:10:11 *.6.5.237
최 선생님... 어디선가 소장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젊음을 중년처럼 살면, 중년이 됐을 때는 젊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왠지 저에게 해당되는 말씀 같아서요 ^^ 연구원 생활한 지 이제 겨우
몇 달 됐지만, 이미 많이 변해있는 제 자신을 가슴깊이 느낍니다~

영훈 오라버니... 미래를 여행하다 과거를 여행하고 있으려니까
뭔가가 계속 연결되는듯한 기분이 듭니다. 결국 E.H. Carr가 말했듯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끊임없이 서로 소통하는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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