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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9일 10시 01분 등록

일의 발견 / 조안B.시울라 지음

1. 저자에 대하여

약력 (Biography)

조안 B. 시울라(Joanne B. Ciulla)는 리치몬드 대학, 젭슨 스쿨(the Jepson School)의 설립 멤버 중 한 명으로, 현재 같은 학교의 석좌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적 관점에서의 윤리학(ethics),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갈등 해소(conflict resolution), 리더십 등을 강의하고 있다. 또 예술사가, 찰스 존슨 박사와 함께 ‘예술가와 리더(artists & leader)’란 새로운 주제의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열정적이며 창의적인 강사로서 2003년 버지니어 고등교육 주의회로부터 우수 교수상(the Outstanding Faculty Award)을 수상하기도 했다. UN 국제 리더십 아카데미 리더십 연구 분야의 유네스코 석좌 교수를 역임했으며, 라샬 대학,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와튼 스쿨, 옥스포드 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시울라 교수의 연구 주제는 리더십 윤리학, 비즈니스 윤리학, 국제 리더십과 노동 철학 등이며, 주요 저서로는 ‘윤리, 리더십의 핵심(Ethics, The Hearts of Leadership)’, ‘일의 발견(The Working Life; The Promise and Betrayal of Modern Work)’, ‘리더십의 윤리학(The Ethics of Leadership)’ 등이 있다. 그리고 비즈니스 윤리학 교과서인 ‘정직한 일(Honest Work: A Business Ethics Reader)과 ‘도덕적 리더를 향한 모험(The Quest for Ethical Leaders; Essays in Leadership Ethics)을 공저했다.

그녀는 다양한 범위의 주제로 전 세계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여러 대학과 회사, 정부 등에서 윤리와 리더십 프로그램에 대한 컨설팅을 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세계 경제 포럼, 브루킹스 연구소, 아스펜 연구소 등에서 연설했으며, 여러 TV,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2. 일의 발견 (The Working Life; The Promise and Betrayal of Mordern Work)

시울라 교수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일의 발견’은 아마존닷컴(Amazon.com)의 2000년 비즈니스 분야 베스트 10위 중 2위에 선정되었다. 아마존닷컴의 섹션 에디터인 알란 J. 화이트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시울라는 독자들에게 ‘일의 매력과 일의 변화된 중요성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제공한다. 역사, 신화, 문학, 팝 문화, 실제 경험 등 다양한 범위를 포괄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해 그녀는 ‘일의 다양한 의미 또는 의미 없음(the many meaning of work or its meaninglessness)’을 탐구했다.”

그리고 리더십 전문가 워렌 베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진지하고, 깊은 생각이 담긴 중요한 책이며,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 즉 일터가 갖는 의미에 관한 책이다. 시울라의 글은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은 당신 자신의 삶을 성찰하도록 사정없이 강요하며,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독창적이다.”

화이트와 베니스의 평처럼 이 책은 다양한 범위를 아우르는 저자의 폭넓은 성찰을 통해 일과 삶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을 통째로 뒤흔든다. 그녀의 차분하지만 열정 넘치는 설명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책장을 덮을 때쯤 당신은 불현듯 ‘내가 힘들게 달리고 있는 이곳이 사실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쳇바퀴일 뿐’임을, 혹은 ‘두 발로 굳건히 버텨 서 있다고 생각한 이 곳이 사실은 텅 빈 허공일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왜냐면 그 곳이 바로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 저자 소개는 변경연 3기 연구원 김도윤님의 글을 염치 불구하고 인용합니다. 꾸벅~ ^^;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프롤로그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p9

이제 기업들은 고용인들을 하나의 행복한 대가족으로 변화시키고자 시도하는 문화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업상의 저녁식사, 회사의 맥주파티, 스포츠 행사, 친목 행사 등의 명목으로 고용인들의 여가시간을 빼앗음으로써 노동자의 소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의미를 만들어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경영진은 고용인들이 자신의 더 많은 부분을 필요이상으로 일에 투자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들을 시도했다. 평범한 일이 의미 있어 보이도록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힌 것이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경영진의 슬로건은 ‘질’, ‘헌신’, 그리고 ‘팀워크’였다. 이 모든 경영 수단들은 조직 내에서 일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통제하기 위한 시도였다. p13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일이 갖는 우선순위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을 위해 희생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진정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p14

이 책은 일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p15

1. 일의 의미와 역사

‘왜 일하는가?’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합니다.’ p19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은 그의 저서<일이 사라졌을 때> 윌슨에 따르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 욕구를 충족 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일은 규율, 소속감, 규칙성, 자기 효능감 같은 다양한 심리적 .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p20

'실직의 문제점은 당신이 단 하루의 휴가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p22

오늘날 대부분의 학생들이 직업을 갖기 위해 교양교육을 받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론적으로 볼 때 교양은 일하는 방법이 아닌,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가는 단순한 ‘자유 시간’ 이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특정한 일을 하기 위한 기회이다. 직업을 잃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p23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p24

인간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점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후’에도 스스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p24

일은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은 규율과 정체성, 가치를 제공한다. 일은 우리의 시간을 조직하고 우리의 삶에 리듬을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준다는 점이다. 몇몇 사람들이 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p25

살린스는 불만에 차서는 ‘원시사회가 문화를 형성하거나 발전시키지 못한 이유는 엄밀히 말해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게으름 때문이다.’ 남아프리카 원주민인 부시맨은 그에게 물었다. ‘세상에 몽고몽고넛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리가 씨를 뿌려야 하지요?’ p27

고대의 작가인 이솝은 일과 삶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들을 자신의 우화 속에 요약했다. 그의 우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을 연상시키며,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여전히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방식에 대한 도덕적 교훈을 얻는다. p28

성공한 사업가들을 대중들에게 개미로만 여겨지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단순한 사리사욕을 넘어서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일할 때 훨씬 더 감탄한다. p30

맨더빌 <꿀벌의 우화> p31

부자에게 검약이 미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들이 돈을 쓰지 않는다면, 가난한 자들은 실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만성적인 실업의 시대에 검약은 미덕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기꺼이 맨더빌의 시를 인용했다)
맨더빌의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고 베짱이처럼 소비함으로써 최대의 선을 가져오는 것이다. p32

개미와 같은 노동자는 최우선의 가치로 여긴다. 그는 적당히 흥미로운 직업을 갖고 있고,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 데 쓰며, 신중한 선택에 따라 경력을 쌓아나가고, 일 외의 활동에는 웬만해선 참여하지 않으며, 휴가도 거의 가지 않고, 요행수를 바라는 법도 없다. 개미와 같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은퇴를 위해 저축하며, 남은 20년 동안 이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삶의 45년 내지 50년 동안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저당 잡힌다. 토마스J . 스탠리와 윌리엄 D. 단코가 행한 ‘미국 백만장자 연구’ p32

개미는 돈을 쓰거나 물건을 소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대신에 매일매일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개미는 더 적게 쓰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일한다.
개미는 미래를 위해 살지만, 막상 미래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개미가 갖고 있는 인생 계획의 장점은 그의 검소한 생활이 그를 곤궁으로부터 구하고, 늘 비상시를 대비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개미 전략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열심히 일해 돈을 번 후, 40세에 은퇴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p33

네 가지 함정
첫째, 이솝 우화의 개미와 달리 개미 베짱이들은 참을성이 없고, 만족을 지연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개미베짱이들은 ‘빨리’돈을 벌고자 한다. 둘째, 그들은 일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왜냐하면 돈을 모이는 대신, 점점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생활방식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셋째, 문제는 개미 배짱이 들이 자신의 모든 시간과 돈을 일에 투여함으로써 친구, 배우자, 자녀와의 관계를 해치는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다. 개미베짱이의 배우자는 그가 ‘이른 은퇴’를 즐길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개미 배짱이 들은 돈벌이에 너무나 중독되어 있어서, 자신의 재정적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도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거나, 혹은 일 자체와 돈을 모으는 즐거움에 중독될 수도 있다.

개미와 개미베짱이는 모두 미래의 풍요로운 삶을 상상하며 일한다. 그러느라 현재의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분명, 일은 그들에게 도구적인 가치를 지닌다. 은퇴하면 ‘일로부터의 해방’과 ‘행복’이라는 상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삶 전체를 일에 바친다. 그러나 은퇴할 무렵이 되면 진정한 행복은 애쓰고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일에서 벗어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단지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일은 그것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습관이 된다. p34

버나드 수츠는 자신의 저서<베짱이의 놀이, 삶, 유토피아>
베짱이는 놀이를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으로 정의한다. 개미가 일을 도구적인 활동으로 여기는 것과 달리, 베짱이에게 놀이는 그 자체로 목적이다. p35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놀이를 ‘생산적인 일’ 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일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놀이를 어떤 목적을 가진 것으로 정당화한다. 긴장을 풀기 위해 스쿼시를 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테니스를 치며,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위해 골프를 친다.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권투를 하고, 심장혈관계의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하는 식이다. 게임과 스포츠에서의 격렬한 경쟁은 놀이의 초점을 승부로 이동시키는데, 이것은 놀이를 일과 유사한, 도구적인 것으로 만든다. p36

'만약 당신이 개미처럼 산다면, 즉 나이 들어 쇠약해질 때까지 일해서 돈을 저축한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인생인가?‘ p37

태국어 에서는 ‘일’을 뜻하는 단어와 ‘파티’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문화는 ‘재미’를 뜻하는 ‘사눅(sanuk)’에 큰 가치를 둔다. p53

'일(work)' 고대 영어의 명사 워르크(woerc)와 동사 위르칸(wyrcan)으로부터 파생된다. p54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력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일’은 노동의 산물을 나타내는 명사이지만, 노동을 일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노동’은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사함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일’은 다양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의 대상을 가리킨다. p57

어떤 언어에서는 일을 나타내는 단어가 사실상 ‘고통’을 의미한다. ‘일’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트아바이유(travail)'의 어원은 라틴어인 ’트리팔리움(tripalium)‘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트리팔리움은 말에 편지를 박기 위해 말의 다리를 묶어놓는 세 개의 기둥을 가리킨다.  이후 이 단어는 일종의 ’고문‘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그 후 다시 ’일‘이라는 의미로 변화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일‘이라는 뜻의 파노스(panos)는 분쟁, 처벌과 동의어이며, ’슬픔‘을 나타내는 라틴어 단어인 포에나(poena)의 어원은 일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파행되었다. 성경의 히브리서에서 ’일‘을 나타내는 단어와 ’노예‘를 나타내는 단어는 동일하다. ’일‘을 뜻하는 독일어’아르바이텐(arbeiten)'은 원래 ‘고통’과 ‘분쟁’을 뜻하는 단어였다. 영어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는 16세기 이루에는 출산의 고통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p58

14세기에 ‘job'이라는 단어는 덩어리나 조각을 의미했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한 바리의 짐을 뜻하게 되었다. ‘업무’란 영구적인 고용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을 의뢰받거나 잠시 고용되는 것을 가리켰다. 그것은 또한 영리를 목적으로 행해진 것을 의미했다. p60

‘업무’와 ‘일’의 또 다른 차이는 일은 보수를 받는 것과, 받지 않고 행하는 활동까지 가리키는 반면, ‘업무’는 보수나 소득을 얻는 일에만 구체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다. p61

'업무‘라는 단어는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도구적인 활동을 나타낸다. p62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저주’ 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떠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p65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p66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이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었다. p68

그리스도는 직업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권고하면서, 우리는 음식에 대해서조차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p71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던 ‘일’이 두드러지게 긍정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이다. p74

성 베네딕트에게 일은 직업이나 소명(calling)이 아니라, 일종의 ‘눈에 보이는’ 기도였다. 일에 대한 생각이 베네딕트 수도회의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라는 규범에서 신도교의 ‘일하라, 그리고 기도하라’의 개념으로 그 우선순위가 바뀌기까지는 이후 다시 약 1,0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p75

'창조로서의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 했다. 고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고된 노동으로 몰아넣은 사기꾼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인류가 운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영웅이 된다. p81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는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하는 법이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가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노동자 가치가 증가한 반면 노동자들의 절망 역시 더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지표이다. p84

루터를 비롯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부량과 실직은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발생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적 결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루터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게으른 거지와 부랑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집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개념과 ‘휴식과 쾌락에 대한 혐오’는 칼뱅과 루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노동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칼뱅에게 있어 일은 은총의 상징이자 구원의 수단이었다. p85

칼뱅 자신이 사치스러운 소비에 대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부 사람들의 노동윤리가 ‘우리는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믿음에서 ‘우리는 물건을 사기 위해 태어났다’는 믿음으로 변화할 것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노동자들을 똑같이 존중하도록 가르쳤다는 점이다.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p86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우리가 일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구원을 찾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p86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일을 베루프(Beruf), 즉 ‘소명’으로 정의했다. 소명은 일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다.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개념은 일에 영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그것은 결코 일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명으로 인해 평범한 생활 속에 금욕주의가 생겨났고, 이것은 세속적인 행복의 추구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p87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가 일의 도덕적 가치를 형성해온 과정을 살펴 보았다.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카톨릭 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험(simple dignity)'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일, 즉 소명으로서의 일 개념은 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일은 일종의 기도가 되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적이 되었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일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p88

우리가 물려받은 노동윤리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가지 개념이 융합된 것이다.
첫 번째 개념은 공정함과 사회적 책임의 원칙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루터와 칼뱅의 독특한 견해로 일‘자체’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도록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훌륭하고 수양이 된 사람이다. 공정함, 개인의 탁월성, 개인의 선함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으로부터 일은 ‘고역’이 라니라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적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p90

다니엘 디포의 소설<로빈슨 크루소> p90
크루소가 ‘소질’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소명 혹은 그가 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p91

1719년에 출판된 <로빈스 크루소>는 존 로크와 애덤 스미스에게 발견되는 ‘근대적 경제인(modern economic man)'의 원형이 되었다. 그는 프로텐스탄트 노동윤리의 모든 미덕을 구체화할 뿐 아니라, 인간은 일과 자급자족을 통해 행복을 발견한다는 믿음을 몸소 구현한다. 오늘날 우리는 크루소의 유산을 공유한다. ‘합리적 경제인’은 섬처럼 고립된 존재이다. 그는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고, 영원히 충족되지 못한 채 무엇인가를 더 필요로 한다. 크루소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할 것이고, 어떤 인간이 될 것인지에 대해 실용적이면서도 낭만적인 환상을 갖고 있었다. 크루소에게 일은 삶의 수단을 공급하는 ‘동시에’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는 약속인 것이다. 18세기, 벤자민 프랭클린은 프로테스탄트의 관점과 계몽주의의 이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노동윤리를 만들어냈다. 프랭클린은 부가 사회에 이득이 되고 개인에게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p92

프랭클인 에게도 여전히 부에 이르는 길은 신중함, 근면, 검약이었다. 특히 훌륭한 품성은 성공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열한 가지 미덕을 열거하는데 절제, 침묵, 규율, 결단, 성실, 중용, 청결, 평정, 순경, 겸손이 그것이다. 그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또한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 p93

콘웰 목사는 도덕적 충고와 사업상의 건전한 충고를 혼합했다. 18세기와 19세기의 노동윤리 옹호자들은 강한 도덕성이야말로 부에 이르는 열쇠라고 설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데일 카네기가 1936년에 쓴 <카네기 인간 관계론>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학’이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된 것이다. p100

마르크스는 일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인간의 욕구로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다. p103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일이 유급고용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p104

'일의 의미‘에 대한 모리스의 흥미로운 통찰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드는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될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희망의 개념은 훌륭한 직업의 필수조건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p105

‘전문가(professional)'라는 단어는 원래 성직에 들어가는 사람이 공식적인 선서를 하는 데 사용된 ’공헌하다(profes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종사자가 공식적인 서약이나 맹세를 엄숙히 해야 하는 사업이나 직업을 의미하게 되었다. p107

전문직의 근저에는 세 가지 기준이 존재했다.
첫 번째, 모든 전문직은 공식적인 기술교육과 그러한 훈련을 확인시켜주는 일정한 제도적 인증 과정을 요구했다. 두 번째 기준은 전문직에서 사용하지 위한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전문가는 그 전문직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데 이용되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증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 전문직을 특별한 직업으로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아마도 일에서의 자율성과 공평한 서비스일 것이다. p108

대중이 전문가들의 비윤리적 행위에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 서약’을 맺는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사업가처럼 행동하거나 그런 행동을 강요받을 때 문제는 발생한다. 앨리엇 크라우제는 저서<조합의 죽음>에서 전문직은 단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그들은 전문직의 특권을 잃었을 뿐 아니라, 장인과 전문가에게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인 도덕성마저도 포기하고 말았다. p109

전문가와 장인들의 덜 고귀한 측면은 훈련 및 진입 과정의 복잡함이 그들 집단에게 특정 지식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중세의 석공들은 자신들의 건축 기술을 비밀로 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며, 조합은 결국 마을을 독점하였다. 법학과 의학을 비롯한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독점을 유지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혹은 라틴어처럼 죽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가령 법률 서류들이 우리가 흔히 쓰는 ‘일상언어’로 작성되어 있다면 당신은 소송을 위해 변호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학자들은 그들 학문 분야의 구성원 자격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해 ‘전문 용어’를 사용한다. 대중들이 흥미로워할 주제에 관한 학술적인 저서나 연구인데도 오직 동료 학자들만 이해할 수 있게 쓰여진 경우도 많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p109

장인과 전문가는 이상적인 유형의 노동자로서의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그들은 일과 여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둘째, 그들의 일은 그들 존재의 직접적인 확장이다. 그들 자신은 곧 자신이 하는 일이며, 그들은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셋째,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모두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그들이 일을 하고 있을때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p110

노동윤리에 있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거의 모든 세대의 구성원들이 다음 세대는 자신들만큼 열심히 일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p111

노예와 농노들, 그리고 지독하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힘없는 사람들에게 노동윤리는 결코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일과 노동윤리 뒤에 숨겨진 궁극적인 환상, 즉 낭만적 환상에 이끌린다. p111

‘일과 관련된 문제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옳다. p112

2.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불쾌하지만, 노예제도는 매혹적인 관리법의 전형이다. 그것은 일꾼들에 대한 완전한 소유와 통제를 의미한다. 노예제도는 필요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의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는 ‘살아 있기’ 위해 일한다. p118

뉴잉글랜드 바깥 지역의 초기 백인 이주자들은 절반 이상이 계약제 하인이나 무임도항 이주자들로 미국에 왔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결국 고용이란 자유와 기회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노예 상태를 의미하였다. p122

우리는,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들이 만약 ‘착취당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못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착취의 논리’에 쉽게 빠져든다. 일하는 원숭이들에 대한 풍자적인 보고서 - 그 기사는 이러한 형태의 ‘고용’이 인간에 의해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는 게 잡이 원숭이 같은 몇몇 종들의 멸종을 막아준다고 지적한다. 식민지 시대의 개척자들과 오늘날의 일부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 호주의 토착민이나 부족민들을 다루는 자신의 방식을 정당화하는 모습은 이 원숭이의 사례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들은 비록 농부가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기는 하지만, 원숭이들은 특히 서식지 대부분을 농부들에게 빼앗긴 이후 그들끼리 야생의 생태계에 남겨지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p130

이러한 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이러한 극단적인(그리고 다소 사소한) 사례는 착취의 논리가 사람들의 욕구를 해결해주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이용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착취 - 누가 권력을 갖는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p131

존 로크와 애덤 스미스는 고용인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미스는 일꾼들이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이 아니라 일터에서 상실한 자유의 대가로 보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자유의 상실  p131

폴 퍼셀은 자신의 책<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라고 주장한다. p132

사람들은 직업에서 더 많은 통제권을 갖도록 해주는 전문 지식을 얻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희생한다. 과거 젊은이들은 장인의 도제로 수년을 보냈는데 이것은 사실상 ‘계약고용’이었다. p133

장인의 가치와 힘은 무언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비밀은 장인들에게 힘과 자율성을 주었다. p135

산업화가 장인들의 힘과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일이 갖는 의미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p136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생산업자들은 미국인 숙련 노동자의 ‘태도문제(attitude problem)'와 싸워야 했다. 숙련된 미국 태생의 일꾼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일하고 싶어 한다. p137

'슈미트‘ <과학적 경영의 원리> 테일러 p141

슈미트는 지시에 따랐고 하루에 47.5톤의 무쇠를 운반했다. 60% 더 많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40%나 더 많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노동자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든 돈을 위해서든 혹은 두 가지 모두 때문이든, 그들 역시 슈미트와 똑같이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테일러가 <과학적 경영의 원리> p142

이 책이 노동과 생산에 대한 엄격한 통제에 관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러시아 판에 주를 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나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한때 테이러의 미망인을 만나 그의 사진을 요청한 적이 있는 베니코 무솔리니 들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p143

과학적 관리법의 네 가지 기본 요소는 고용주의와 고용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첫째, 과학적 관리법은 중앙집권화 된 계획과 일의 순차적 단계들을 정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과거에 사람이 먼저였다면, 미래에는 체계가 먼저일 것이다.’ 둘째, 과학적 관리법은 각각의 작업을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쪼갰다. 셋째, 과학적 관리법은 경영진에게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도록 요구했고, 각각의 노동자들은 업무 수행을 면밀히 감시받게 되었다. p143

넷째 요소는 고용인이 지시받은 대로 일하도록 하기 위한, 주의 깊게 고안된 임금 체계에 기초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논문<왜 생산자들은 대학생을 싫어하는가?>에서 협력이란 노동자들이 ‘지시를 받았을 때 의문을 제기하거나 제안하는 일 없이 신속히 지시받은 대로 일하는 것’을 의미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p144

1915년부터 1918년 사이에 노동 생산성은 10%나 떨어졌고 산업 현장은 계획적 결근, 동맹파업,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노조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애국심이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 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낼 수는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p146

복지 자본주의에 대한 영감은 노동 불안에 대한 두려움, 높은 이직률로 인한 비용, 자선 단체들, 그리고 대외관계 등을 포함한 여러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복지 자본주의의 이면에 자리 잡은 일반적인 생각은 고용인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의 이익이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닌, 고용주의 이익과 결합되는 공동체에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p146

복지 자본주의와 미국식 제도는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고, 1930년대 대공황이 오자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분명한 것은 임금 노동자들의 복지를 고용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p149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은 고용인들의 태도와 감정이 어떻게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접근법에서 일은 육체적 과정 이상의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때 일의 동기는 돈 말고도 더 많은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인간관계 관리 기술은 과학적 관리법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 p150

메이오는 심리학이 고용인들의 충성심을 얻어낼 수 있도록 경영자들을 도움으로써 고용인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조직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호손 연구는 경영서 목록의 한 부분에 영원히 자리 잡았다. p154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집과 차, 그리고 고급 주방설비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자아의 침몰’이라든지, ‘권위에의 복종’ 같은 작은 모욕들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했다. 그들은 ‘직장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하고자 했다. 계약제 하인과 산업 노동자가 장시간의 육체노동을 그들의 알량한 아메리칸 드림과 교환했다면, ‘조직인(organization man)’은 영혼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p158

20세기 중반에 이르자 대기업에서 일의 문제는 곧 ‘소외의 문제’였다.
피터 드러커는 1946년에 출간한 선구적인 책<회사의 개념>에서 ‘회사는 사회의 대표적 기관’이라고 주장했다. 회사는 미국인들의 열망과 신념을 충족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것, 즉 ‘제네럴 모터스(GM)사에 이익이 되는 것’은 실제로 사회에도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p159

<회사의 개념> 드러커는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기업을 오랫동안 옹호해왔다. 드러커는 이윤을 지향하고 불가피하게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회사에,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키고 산업 시민을 양성하는 무모한 책임을 부여하는데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드러커는 대표적인 사회 기관으로서 회사가 사회의 가치와 열망에 부응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사가 이러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는 몇 가지 장애물이 존재한다. p160

경영 연구자들은 외적 보상에 개의치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열정적인 인간 행동과 헌실을 고취시키는 잡히지 않는 영혼, ‘기계 안의 유령’을 찾기 위해 인간의 정신을 점점 더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기업 경영자들은 또한 일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이 전쟁 중에 보았던 것과 같은 헌신을 창조해낼 명분이나 사명, 혹은 일련의 이상을 찾아내야만 했다. p161

1950년대에 C, 라이트 밀스 같은 사회 비평가
밀스가 보기에, 사무직 노동은 어떤 면에서 비숙련 노동보다도 못했다. 그는 ‘계약노예들(paroles)’ 은 육체적으로는 고생스럽더라도, 적어도 집에 가면 자유인 반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뿐 아니라 개성까지도 팔아치워야 한다고 말했다.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now little man)’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밀스에 따르면, ‘새로운 작은 사람’은 반 영웅적이고, 자신의 역사를 알지 못하며, 어려운 시기에 회상할 만한 황금기를 겪어보지 못했다. p162

밀스에 따르면, 일의 상당수가 파편화되고 무의미해져서 계급 이동성과 향상의 여지가 거의 없는 대규모 복합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한 개인이 자기 발전(혹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가 실행될 수 없다. 인사 부서가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를 대신하고, 근로 의욕이 그동안 일하는 동기로 작용했던 도덕성을 대체했다. 직장 내의 정서를 통제함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고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밀스는 사무직 근로자가 조직의 목적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조직에 의해 심리적으로 강요당하며, 자신의 개성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후 일 외의 부분에서는 천박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워진다고 주장했다. p163

밀스의 유명한 책 <화이트칼라>는 1951년에 출간
<조직인>에서, 위리엄H.와이트
데이비드 리스먼이 1950년에 출간한 책<고독한 군중> p164

이 책 속의 ‘타인 지향의 생활: 보이지 않는 손에서 악수하는 손까지’라는 장에서, 리스먼은 타인 지향적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공예 기술보다는 사람 다루는 기술을 더 강조했고, 은행계좌의 잔고보다는 교제비를 더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일은 재미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관리자들은 비서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사장과 고객들을 기쁘게 하는 ‘악수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타인 지향적 사람은 회사에 우선적으로 속하고,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는 더 얕게 뿌리내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와이트가 말한 ‘조직인’의 이면에 있는 성격 유형이다.
와이트는 조직을 비판하면서 개인에 대한 사회의 압력을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사회윤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윤리는 조직의 충성 요구를 합리화하고, 진심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는 고용인들에게 ‘헌신하고 있다는 느낌’과 ‘만족’을 준다. 이러한 윤리에는, 집단은 창조성의 원천이며 개인은 궁극적으로 소속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경영학 분야에서 일하는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그러한 소속감을 창출하는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는 믿음이 포함된다. p165
직장에서는 여전히 ‘팀’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하고 있고, 집단의 가치가 강조된다. 누구도 창조성의 상실이나,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의 정체성에 종속되는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오늘날 경영 이론가들은 집단과 팀이 모든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것의 토대라고 믿는다. p166

고든 인성 검사(Gordon personal profile)
와이트가 보기에 인성 검사는 개인의 자율성과 사생활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많은 고용인들은 그러한 검사를 자기 인식 및 발전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심리 검사는 내적인 자아를 명확히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문제는 우리가 직장에서 그러한 검사를 받게 되면, ‘자기인식’을 얻은 대가로 ‘자기 노출’과 어쩌면 ‘부당한 분류’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 와이트는 독자들에게 ‘조직과 싸울 것’, 그리고 회사의 순응 요구에 말려들지 말 것을 권고한다. p168

대규모 조직에서 일에 관한 진정한 혼란은 1960년대 ‘권위주의적인 고용주’ 모델이 ‘감성적인 경영자’ 모델에 자리를 내주면서 시작되었다. 맥 그리거의 책<기업의 인간적 측면>이 출간되었을 무렵, 전국훈련연구소에서는 T-집단, 혹은 훈련 집단을 개발했다. 이것은 결국 ‘감수성 훈련’, ‘참 만남 집단’, ‘협력 집단’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다른 집단으로 발전한다. p170

'참여경영‘과 ’감성적인 경영자 만들기‘라는 취지는 그러듯하게 들렸지만 일은 더욱 복잡해졌다. 친절하고 우호적인 경영자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조직 내의 권력과 힘의 경계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것을 그저 감추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풍요한 사회>에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아니라, 교육 수준이 높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의 사람들이 갖는 포부하고 주장했다. p171

매슬로는 일부 사람들의 욕구는 도식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했다.
매슬로의 도식에서 벗어난 이러한 예외들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독특성을 나타낸다. p172

확실히 피라미드의 아래층에 있는 욕구들은 고용인들에 대한 권력을 항상 고용주들에게 제공해주었다. 욕구야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전부’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 이상, 가치가 갖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p172

H.E.W. 연구는 사람들이 흥미로운 일과 일에서의 발언권, 그리고 직무를 잘 수행 할 수 있는 기회를 원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일에서 봉급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들은 만족을 원했다. p174

H.E.W. 보고서는
최우선으로 나온 것이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 다음 세 가지는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도움과 설비, 정보, 그리고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권한이었다. 높은 보수는 다섯 번째를 차지했으며 직업 안정성은 일곱 번째였다. p175

두 사람은 결국 테네시 주 볼리바르에 있는 자동차 백미러 제조업 체인 하먼 오토모티브 사이서, 근로자들 스스로 일에 대해 더 강력한 통제권을 갖도록 하는 실험을 해보자는 데 동의했다.
‘볼리바르 프로젝트’
볼리바르 프로젝트에서는 고용인들의 직업 안정성을 증대시키고, 그들이 근로 조건 및 훈련에 대한 결정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70년대에 이러한 종류의 프로그램은 ‘근조자 참여’ 혹은 ‘직장 민주주의’라고 불렸다. 오늘날 기업에서는 이것을 ‘권한위임(enpowerment)' p177

하먼 오토모디브 사는 고용인들에게 일에 대한 실질적인 발언권을 주었을 뿐 아니라, 용접에서 피아노 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관한 강의를 공장 내에서 제공했다. 근로자들은 그날의 생산 할당량을 다 채운 후 강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일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심지어 지역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은 직장에서의 생활이 퇴근 후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추가적인 증거가 되었다. 마을에서는 최초의 보육 시설이 문을 열었고, 공장의 근로자들은 지역사회 최초로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성가대를 만들었다. 생산성을 향상되었고 장기 결근은 감소했다. 노사관계도 급격히 호전되어 회사는 이전 계약이 만료되기 4개월 전에, 이미 전미자동차 노조와 1975년 계약을 체결했다. 일부 사람들은 볼리바르의 실험이 실패하기를 은밀히 바라고 있었으며,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 실험은 몇몇 노조 지도자들과 유사 산업의 경영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만약 실험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조합원들과 근로자들에 대해 갖는 힘과 권위의 정당성에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볼리바르 프로젝트는 경영자들이 민주적인 직장을 운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실패했다. 그는 자신들의 가장 큰 실수는 생산 할당량을 채운 근로자들의 귀가를 허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p178

볼리바르 사례을 보면서 서투른 회사의 경영 실패와 통제를 벗어난 고용인들에 대해 비난하기는 쉽다. 또한 ‘고용인들은 책임과 통제력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X경영 이론이 옳다는 결론으로 비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동자 참여와 회사의 교육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일은 때로 진정한 자유 시간, 특히 직업 안정성이 확보된 상태에서의 자유시간과는 경쟁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일터에 있는 것보다 혼자 지내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점이다.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부가가치’를 창출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고 믿기를 바라지만, 사실 고용인들에게 그것은 ‘자유를 상실한 대가’이다. p179

고용인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주는 데 있어 예상치 못한 한 가지 문제는 경영진이 어리석은 전략적 결정을 내렸을 때 근로자들 역시 사업에 대한 나름의 이해에 기반 하여 좌절하고 분노할 수 있다는 점이다. p180

완전한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한, 근로자들에게 있어 일의 가장 힘든 부분은 정서적인 노력이다. p181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무언가를 마지못해 생산하고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매일 상업화된 개별화와 쾌활함, 친절함에 노출되어 있다. p183

1980년대에는 수많은 최신 경영 방법들이 엄청나게 유행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경영자의 업무가 고용인들에게‘의미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점점 더 많은 근로자들이 일에서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지식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80년대가 되자, 일은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며 흥미로운 것처럼 보였으며 직장은 마치 행복한 ‘대가족’인 듯했다. p187

그것이 실재하는 것이든 가장한 것이든, 기업윤리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회사의 관심은 1980년대에 그야말로 번성했다. 하버드나 와튼 같은 주요 경영대학원들은 그러한 주제에 대한 강의를 들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6년까지,<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75%가 ‘사명선언문’이나 ‘윤리강령’을 갖고 있었다. 윤리강령에 대한 관심이 1980년대에 높아진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부 회사들은 부정적인 보도, 추문, 소송, 불법 활동들에 대해 염려했다. p188

일반적으로 소규모 회사들은 비싼 컨설턴트들을 고용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경영학 실용서를 통해 컨설턴트의 조언을 거의 무료로 얻을 수 있다. p189

미국의 경영학 교과서들은 다른 국가의 경영대학원(M.B.A)강의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미국에서 경영학 학위를 받고는, 유행하는 경영학 개념들을 자기 나라에 전파한다. 미국의 대규모 컨설팅 회사들과 유명한 경영학과 교수들 대다수는 경영에 대한 ‘새로운’ 미국식 아이디어를 전 세계에 보급한다.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경영학의 최신 경향을 외국으로 실어 나른다. 한편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자금 지원을 받은 경영학 연구가 과연 객관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실손의 견해가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또한 조직 내의 힘, 권력, 갈등에 관한 질문들이 왜 경영학 교과서나 대중문화에서 논의되는 일은 드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러한 책과 이론들은 경영자들에 ‘대한’것인 동시에, 경영자들을 ‘위한’ 것이다. p190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그리고 주로 일본과의 세계경쟁에 의해 많은 기업들이 황폐화되었던 1980년대에 경영자들은 좋은 충고를 갈망했다. 1980년대의 경영학 서적들은 경영자들을 고무시켰고, 그들에 대한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책들이 ‘이윤’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 베스트셀러였던 경영학 서적들은 기업 지도자를 ‘회사’라는 세계의 지배자이자, 사랑스러운 지도자로 그려냈다. 기업과 정부의 권위적 인물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결여된 상태에서 ‘사랑스러운 지도자’는 분명 매력적인 이미지였다.

이처드T.파스칼과 안토니 아토스가 쓴<일본의 경영기법>
윌리엄G.오치의 <Z이론>
이 모든 책들은 경영자들이 다정하고 온화한 선사(; ?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케네스 블랜차드와 스펜서 존슨의<1분 경영> p191

<초우량 기업의 조건>
<초우량 기업의 조건>은 분명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경영서였다. p192

테렌스 E.딜과 앨런A.캐네디의 <기업문화>
‘강한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는 일을 더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 ’딜과 케네디는 강한 문화를 가진 기업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은 위대한 조직에 속해 있다는 데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초과 근무를 하거나 한층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며 독자들을 확신시켰다. p193

딜과 케네디는 강한 기업문화가 고용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구조와 가치체계, 그들이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회사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 등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해준다고 생각했다. p194

대기업은 고요인들 에게 ‘가치’와 포부, 사교 모임, 공동체, 그리고 우정을 제공했다. 복지 자본주의의 초기 노력들은 IBM과 같은 대기업들이 제공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훌륭한 복리후생제도들은 고용인 본인과 자녀, 그리고 노부모의 건강을 보살폈다. 직원을 위한 원조 프로그램은 약물남용 프로그램에서 가족 문제에 대한 원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강한 기업문화의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자동 조절되는 사회 체제라는 점이다.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일과 소득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p195

로버트 하워드
<놀라운 새 일터>
하워드는 놀라운 새 일터를 감정과 힘의 관계가 미묘하게 얽힌 조직으로 표현했다. 경영진이 우호적이고 피상적인 평등주의 속에 계급제도를 감추고 의미와 가치, 감정의 지배를 통해 일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하워드의 놀라운 새 직장에서는 도넛 타임이나 맥주 파티 같은 사교 모임들이 의사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마법에 걸린 회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의 업무와 이러한 사교생활에 참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p196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가 말한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조직에서 일터는 그다지 유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곳에서는 힘과 통제의 관계가 명확했다.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면 될 뿐 자아를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고용주가 더 많은 돈을 지불하거나 더 적은 돈을 지불하겠다고 위협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일을 하고, 단순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이다. 테일러가 이야기 했던 무쇠 나르는 사람‘슈미트’는 육체적. 정신적 긴장 아래서 일했지만 상사에게 미소 지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무쇠를 나르기만’하면 되었다.
엘드리지 클리버다 저서<갇힌 영혼> p197

1980년대, 퍼시픽 벨 사는 자사의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은 자랑 스러워 했다.
찰스 크론은 ‘크로닝(kroning)'이라고 불리게 된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p198

'제3의 법칙(law of three)'에 기반
400만 달러의 비용이 든 이 프로그램에 대한 두 달간의 조사 결과, 고용인들은 프로그램이 자기들을 ‘세뇌’시키려는 시도라고 불평했다고 위원회는 보고했다. 조사 결과 모든 고용인들이 퍼시픽벨 사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표현하는 ‘동시에’ 경영진에 불신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p199

존 미클스웨이트와 애드리언 울드리지는 자신들의 책<주술사들>에서,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경영 이론들이 있으며, 그들이 서로 모순되곤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컨대 어떤 이론은 독특한 기업문화일수록 좋은 것이라 말하고, 다른 이론은 다문화적인 기업일수록 좋은 기업이라고 말한다. 한 이론은 ‘질(quality)'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론에서는 중요한 것은 ’속도‘라고 말한다. 경영학 이론의 유행 주기는 10년에서 1년으로 짧아졌다. p201

1950년대 고용인들은 조직에 순응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들의 감수성 훈련을 경험했다. 1980년대, 그들은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회사의 사교 모임에 참여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제 훈련은 ‘팀 만들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고용인들은 방 안에서 마룻바닥을 기어다니기 보다는 넓은 야외에서 로프에 매달려 있게 되었다. 야외에서 공동체 훈련을 실시하는 아웃워드 바운드(Outward Bound)같은 프로그램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서운 육체적 경험에 함께 직면하도록 함으로써, 리더십을 가르치고 팀워크를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p203

'팀워크‘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경영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커다란 ’신( r)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팀‘이라는 단어는 재미와 도전, 그리고 스포츠 영웅주의라는 개념을 일터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모두 이 팀에 함께 있고, 경쟁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개념은 흥분을 불러일으키며, 그것은 또한 사람들의 소속욕구에 부응한다. p203

'일‘을 스포츠에 비유하는 것의 또 다른 이점은 그것이 극적으로 뛰어난 기술, 목적에 대한 고귀한 헌신, 그리고 완벽함에 대한 열망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오늘날 스포츠 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요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 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용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 팀처럼 행동하도록 장려한다면,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반어적인지에 주목한다. 대형 스타가 게임과 팀의 급료 전부를 차지하는 프로 농구는 팀워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팀은 ‘문화’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사회적 통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팀에서 일하는 것의 매력 중 하나는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준다는 점이다. MIT의 폴 오스터만 교수는 1992년부터 1997년 사이에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품질과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팀을 활용했던 회사들은 팀원들이 노조를 결정하지 않는 이상, 팀과 수익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또한 팀을 사용했던 회사들은 그렇지 않은 회사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해고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 사례를 보면 직장에서 팀으로 일하는 것과 이웃의 농구팀에서 활동하는 것 간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p204

컨설턴트인 존 카젠바흐
회사 내의 팀들은 대부분 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분 좋게 느끼기 위해 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의 집단’에 불과하다. p204

팀워크는 조직 내에서 발생하는, 생존을 위한 진짜 투쟁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작업팀 이끌기> 킴볼 피셔
진정한 스포츠 코치는 격려하고, 도움을 주고, 용기를 복 돋워준다. 그러나 그들도 때로는 이기는 침을 만들어낼 때에만 인정받는 불패한 파시스트처럼 행동할 수 있다. 코치와 팀 플레이어의 관계는 대개 아버지와 자식, 혹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이다. ‘코치’라는 단어는 전체 팀뿐만 아니라 개개인들에게도 진심 어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낭만적인 이미지를 수반한다. 그것은 보살핌과 관심을 약속한다. p205

워너 기어의 사례
‘근로자 참여 서클(EICs: employee involvement circles)'
'품질관리 서클이 처음 생겼을 때 나는 그것들이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전에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의사소통을 경험하고 있다.‘
회사는 EICs와 함께 이익 공유(profit-sharing)프로그램을 실시했다. p207

1985년 워너 기어 사에서는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그러나 그해 7월 EICs를 실행시키고 있던 워너 기어의 경영진에조차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은 채, 보그-워너 사는 선박 및 산업용 기기 제조 공장을 웨일스의 켄픽 지방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1980년대의 경영 이론들 중에서 종합적 품질경영(TQM; Total QUALITY Management)만큼 열렬히 신봉된 것은 없었다. 아마도 이것은 사람들이 TQM의 기본 원칙을 엄마 품에서부터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애초에 똑바로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식 경영, 품질관리 서클, 집단 역동성, 팀워크, 리더십, 기업문화, 그리고 통계적 품질관리를 모두 하나의 꾸러미 안에 말아 넣었다. p 208

‘종합적 품질 포럼(Total Quality Forum)’ p209

'TQM'이라는 이름은 해군 심리학자인 낸시 워렌이 만들어낸 것이다.
‘말콘 볼드리지 국가품질상(Malcolm Baldrige National Quality Award)' p210

TQM의 이면에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제대로 행한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포함한 ‘장인윤리의 회복’이라는 고귀한 정신이 존재한다. p211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신뢰와 헌신,, 충성과 같은 단어들이 경영서 들의 표지를 장식했다. 품질의 이면에 있는 ‘마술’은 그것이 효과적인 경영 수단일 분 아니라 도덕적 의미를 가진 단어라는 면에서도 좋았다. TQM에 따르면, 모든 단계에서 윤리적 지도자들의 존재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 점은 다른 모든 경영 프로그램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p213

질문으로 다시 데려간다. TQM을 비롯한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다시 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는가? 그것들은 약속했던 모든 것 - 권한위임, 훈련, 팀 구성원이 되는 기쁨 -을 주었는가? p214

리엔지니어링은 일련의 과업들이 한 사람에 의해 행해질 수 있도록 조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29세기의 경영 이론 전체를 마감하면서, 과학적 관리법과 리엔지니어링은 모두 생산 속도에 관심을 가졌다. 여전히 ‘시간은 돈’이다.

마이클 해머와 제임스 챔피
<리엔지니어링 기업혁명 : 혁명 선언문> p215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계속해서 ‘코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리엔지니어링 기업혁명>이 발간된 지 2년 후 해머는 저서<리엔지니어링을 넘어>에서, 왜 현대의 축구팀이 리엔지니어링 된 조직의 ‘거의 완벽한 본보기’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한 장을 할애했다. p216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 <시간 묶기>라는 자신의 책에서, 알리 러셀 혹실드 아메르코에서, 자신이 3년에 걸쳐 여섯 가족을 대상으로 행한 조사 결과를 보고한다.
몇몇 사람들은 집에 있기보다는 직장에 머물기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217

여성들이 직장을 도피처로 사용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p218

 몇몇 사람들은 직업상의 포부를 위해,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단지 직장에서의 일이나 직장의 친구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근로시간을 줄이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에게 가정생활은 일 다음으로 지루한 것이었다. p219

1990년대 중반의 많은 미국인들에게 저녁 뉴스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대량학살이나 치명적인 새 바이러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꿈의 구장’이었던 회사에서 해고당한 정장 차림의 중년 백인 남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게 잘린 사람들을 합친 숫자는 무시무시했다. 시어스는 5만 개의 일자리를 줄였고, AT&T는 4만개, 코닥은 1만 6,800개, 보인은 1만 5,000개, 그리고 IBM은 6만3,000개를 줄였다. 이들 대다수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거나, 회사의 파산으로 인해 실직을 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부는 경제 회복기 - 주식시장은 폭등하고 있었고, 생산성은 향상되었다 - 에 직장을 잃었다. 그들은 회사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치우고 싶어 했기’ 때문에 직장을 잃은 것이다. 그들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p220

그들은 회사에 충성하는 조직인 이었다. 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뉴욕 타임스>지는 51세인 스티브A, 홀터슨의 삶이 실직 이후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묘사했다. p221

1990년대의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는 실제 경영에 있어서는 구조조정을 강조했던 반면, 당시의 경영서 들과 경영학적 수사법들은 ‘헌신’, ‘충성’, ‘신뢰’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p223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은 근로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있었거나 의심해온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즉, 고용주들과 경제는 변덕스러우며, 당신은 조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체이스 맨해튼의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한 직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이전만큼 흔쾌히 노동 문화에 흡수되지 않는다. 직장은 나에게 돈을 지불하지만 나를 마음대로 하지는 못한다. 직원 야유회 같은 것을 나에게 요구하지 말라.’ 직장을 ‘하나의 대가족’으로 만들려는 1980년대의 시도는 많은 근로자들이 의심했던 대로 모두 거짓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처럼 ‘집이란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고/언제든 당신을 받아주어야 하는 곳’이다. 우리는 이젠 그렇게 해줄 직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고용인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p225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은 중간 소득자들이 받는 임금이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으며, 하위 소득자들의 임금은 실질적으로 하락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데이비드 고든은 저서<살찌고 비열한>
다시 말해, 기업들은 지난 20년간 자신들의 이윤을 고용인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대중은 기업의 이윤과 중역들의 보수는 증가하지만 자신들의 임금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p227

1997년과 1998년 사이, 중역의 임금은 평균 12.3% 오른 반면 평균적인 미국 근로자의 임금은 3.5%증가했다. 1998년 CEO 들은 약 열 명 중 한 명꼴로 200만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 1999년 노돈 조합 단체인 페이 워치(Paywatch)는 CEO의 급여는 너무 빨리 오르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더는 놀라지 않는다.
구조조정이 쓸데없이 많은 현장 관리직을 없앨 것이라는 광범위한 믿음과는 달리, 데이비드 고든의 연구는 미국 기업에서 실제로는 관리직 숫자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든은 정체된 임금이 더 많은 감독자를 필요로 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만약 근로자들이 기업의 열매를 고유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직업 안정성이나 꾸준한 임금 상승을 약속받지도 않는다면, 그리고 직업안정성이나 꾸준한 임금 상승을 약속받지도 않는다면, 그들은 무슨 동기를 가지고 그들의 상사처럼 열심히 일하겠는가?’ 그는 이러한 사태가 ‘채찍 전략’을 요구한다고 결론 내린다. 즉, 근로자들이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제대로 일하지 않으니, 그들을 위협하거나 혼내줄 관리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p228

<던랩의 기업 수술> p229

<포브스>나 <포춘>같은 경영 분야의 정기 간행물들이 영웅적인 기업 지도자들을 너무 오랫동안 찬양해왔기 때문에, 그들의 어마어마한 연봉에 놀랄 사람은 거의 없다. p230

고위 관리자들은 특별한 의식이나 칭찬, 현금 이외의 보수가 비 관리직 근로자들에게 가장 큰 자극이 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한 특별한 의식이 칭찬은 업무의 질적 성과와 결합된 승진과 더불어 중간 관리자들에게도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고위 관리자들 스스로에게 가장 큰 유인은 품질 성과와 결합된 ‘현금 보상’이라고 응답했다. 엘튼 메이오의 시대 이후 경영진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돈을 덜 주면서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까?’ 였다. 연구 결과는 월급 인상이 반드시 사람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근로자들은 자신의 성과에 대해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된 이유가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p231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을 더 그럴듯해 보이게 하는 것은 착취이다. 회사의 이윤을 창출한 대가로 근로자들에게는 파티나 열어주고, 고위 관리자들에게는 엄청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지급하는 조직에는 무언가 부정직한 것이 있다.
승자독식의 사고방식
이것이 지난 백 년간의 경영학이 이룬 최종 업적인가? 기업들은 마침내 근로자들로 하여금 더 적은 돈을 받고도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기계 안의 유령’을 찾아낼 것인가? 지난 백 년간, 경영학의 발전이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기는 했다. 과학적 관리법은 풍부한 소비재를 싼값에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직장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하도록 근로자들을 설득해냈다. 온정주의적인 실천과 회사의 복지 급여를 특징으로 하는 복지 자본주의의 유산은 근로자들, 특히 사무직 근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회사에 충성하도록 만들었다. 노동조합은 회사가 ‘꿈의 구장’인 근로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효과적인 근로자 동기부여의 방법은 심리학이 아니라 경제학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기계 안의 유령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무시무시한 망령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경제이다. 이 새로운 유령은 예측 불가능하고 비논리적이면서, 경영행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부 경영자들에게는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는 것만이 목표가 된다. p232

생산성과 품질을 놀랍도록 향상시키고,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회사의 능력은 훌륭한 경영 이론 덕분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라는 노동윤리 때문일 수 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일을 하도록 만드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p234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 경영진은 사업의 실패를 두려워하고, 혹시 놓치는 것이 있을까봐 직원들이 휴가를 갈 때 조차 노심초사한다. 결국 근로자들은 소진되거나 자멸할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더 오랜 시간 동안 일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마치 결승선이 없는 경주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경주에 남아 있는 것이다.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는 이러한 두려움의 노동윤리 앞에서 빛을 잃었다.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 달리 두려움의 노동윤리는 구원의 희망을 약속하지 않는다. 단지 좀 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좌절한 실직자들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에게 소리쳐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경영자들이나 정치가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세계경제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직한 근로자들은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초점 잃은 분노를 품는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그들의 회사를 보다 경쟁력 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회사를 보다 경쟁력 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삶은 혼란에 빠진다. p235

스콧 애덤스의 만화 ‘딜버트’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것은 ‘경영진으로 승진한 바보들’의 이야기였다. p236

고용인들은 한편으로 두려워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냉소적이 되어감에 따라, 자신들이 느끼는 바를 고용주들에게 전혀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냉소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단결하여 조합을 형성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에, 혁명론자들 보다도 함께 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대신에 그들은 봉급을 받을 때 수동적인 저항과 비웃음으로 침묵의 파업을 행한다. p238

노조는 여전히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권력관계를 평등하게 유지해주는 유일한 단체이다.
퓨에스테인의 아름다운 공장 p241

퓨어스테인
‘만약 당신이 사람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복지 혜택을 준다면 그들은 당신을 위해 생산할 것이다. 온정주의의 부정적인 면은 고용주가 고용인들을 때로는 아이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p242

3. 일과 삶

경제학자인 줄리엣 쇼어는 저서<과로하는 미국인>에서 지난 20년간 여가와 휴가는 감소한 반면 노동시간은 얼마나 증가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추정에 따르면, 미국 근로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1969년에 비해 163시간이나 증가했다. 1987년, 여성은 1969년보다 평균 305시간이나 더 오래 일했다. 자유시간은 1973년 이후 주당 26시간에서 17시간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가 되어, 거의 40%나 감소했다. p247

1980년대에, 가장 빈곤한 10%의 사람들은 가장 부유한 10%보다 하루에 두 시간씩 더 일했다. 1991년에 이르면, 가장 부유한 10%의 근로자들이 가장 빈곤한 10%보다 하루 30분씩 더 일하고 있었다. p248

노동윤리의 구성요소인 시간은 돈과 행위의 동의어이다. 오래된 아날로그시계는 뭔가 좋은 구실을 가지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는 시간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이 시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볼 수 있다. 현대의 디지털시계는 시간을 전후(before or after)의 일련 사선 자체로만 묘사한다. 그것은 앞으로만 나아갈 뿐, 당신이 ‘어디까지’ 왔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시간은 그저 축적되는 질서 정연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p249

무엇보다도 우리는, ‘시간은 돈’이라는 관념 아래서 살아간다. p250

생물체 내의 시간 주기를 조사하는 시간 생물학자들은 체온과 신진 대사율이 시간에 대한 개인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아이들의 체온은 더 낮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이는 아이들이 오랫동안 차를 타고 가면서 ‘아직 멀었어요? 언제 도착해요?’라는 똑같은 질문을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나이 든 사람들은 체온이 더 높아서 시간을 더 빨리 흘러가는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거의 모든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p250

시간이 돈이고, 소비자 중심주의가 욕구의 즉각적인 만족을 강조하는 시간 지향적인 사회에서 기다림은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어려운 부분이다. 우리 문화에서 시간은 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업과 사건들이 재빨리 지나가게끔, 그리하여 기다림을 최소화하도록 설계한다.
그러나 일을 더 빨리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는 빠르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곳을 가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속도에 집중할수록 서로에 대한 인내심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빠르게 돌아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자유시간이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반면 속도는 흥분을 가져온다. 로버트 레빈
그는 보스턴과 뉴욕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더 느린 갊의 속도를 지닌 마을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보다 스스로의 삶을 더 행복하고, 더 나은 것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254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더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더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p255

산업화 이전의 노동자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여기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여가가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p256

현대의 일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p263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 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일정한 노동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p264

근무시간 자유 선택제는 어떤 면에서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경영 혁신이다. p265

소스타인 베블런이 묘사했던 유한계급과 대조를 이룬다. 베블런은 사람들이 확실한 여가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확실한 일’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낸다. 로렌스 셰임즈는 흥미로운 일은 사치품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들이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일하는 부분적인 이유는 ’그 일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쓰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환상을 갖고 있으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에 탐닉한다. p274

샘 킨은 자신의 책<열망>
일과 소비가 사람들을 규정하게 되면서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는 쇠퇴한다. 일이 사람들을 지배라면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성적 구별이 사라지며, 시장 원칙만이 추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 한다’. 그러나 자유시간이 엇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p275

세바스티안 디 그라치아는 <신간과 일, 여가에 대하여> 일이 우리를 고상하게 만들고 피로하게 하고 부유하게 만들어줄지라도, 정작 우리를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여가’하고 주장했다.
디 그라치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여가 개념을 20세기에 적용했다.
‘여가와 자유시간은 서로 다른 두 세상에 존재한다............, 자유시간은 특정한 종류의 시간을 계산해내는 특별한 방식을 말한다. 여가는 존재의 상태, 인간의 조건을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마음가짐, 혹은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상상력 풍부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p277

신교도들은 일을 ‘미덕’과 연관시킨 반면 여가는 ‘악덕’과 관련시켰다. 중세의 휴일은 음악과 춤, 음주를 위한 시간이었으나,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는 묵도와 명상을 위한 날이 되었다. p278

디 그라치아에 따르면,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신교도들과 고용주의들은 아마도 여가보다는 오락에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오락(amusement)'을 ’어떤 것으로부터 주의를 흩뜨리거나 다른 것으로 돌리는 즐거운 일‘로 정의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가 ’뮤즈(muse)'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뮤즈는 ‘깜짝 놀라거나’ 혹은 ‘멍하니 응시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p279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용주들은 토요일 휴가를 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고용인들이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1900년대 초 메사추세츠 주의 한 회사는 교회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근로자들에게 사내에서 독서와 글쓰기, 혹은 다른 가치 있는 활동을 통해 ‘시간을 보람차게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의 공장 소유자들은 음주와 도박을 금했으며, 근로자들을 사악한 오락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루 12시간, 주 6일 근무를 정당화했다.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산업화 초기 시대의 영국 노동자들은 여가시간을 음주, 싸움, 투견과 같은 동물싸움에서의 내기 등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p280

대중오락(mass entertainment)은 수동적인 여가를 제공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이 일종의 사회적 통제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대중오락은 일로 복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한다.
TV를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누군가가 ‘나는 정말이지 TV를 좀더 볼 수 있도록 휴식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거의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나뭇조각으로 카누를 만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원하지만, 단지 TV를 더 많이 보기 위해 여가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
대중오락은 우리가 간절히 바라거나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아무 때나 즐기다가 그만둘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재미있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남기지는 않는다. p282

TV는 시청자에게 어떠한 정신적 노력도 요구하지 않으며 굳이 줄거리를 기억할 필요도 없다.
리브친스키는 TV시청에는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노력이 거의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은 ‘TV응시(stsring)'라고 불려야 한ㄴ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오락을 원한다. p283

1900년대 초의 한 연구는 가장 비천하고 임금 수준이 낮은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어디에서 가장 많은 여가를 보내는지 알려주었다. 그들을 술집에서 맥주로 그날의 노동을 씻어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흥미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흥미로운 여가를 추구하고, 지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여가에 만족하곤 한다. p284

소비는 개혁가들이나 고용주들, 혹은 정부의 어떤 계획보다도 더, 일과 자유시간의 관계를 단단한 매듭으로 연결한다.
소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약할 때조차 일을 해야 할 ‘필요’를 창출한다.
십대(teenager)들 조차 자신의 여가를 소비와 교환한다.
점차 자신이 원하는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하는 ‘중산층 십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p287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십대의 학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호기심 많고, 상상력 풍부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시기에 ‘적응된 온화함(adjusted blandness)'을 심어줄 수 있다는
그린 버거와 스타인버그의 주장이다. p288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 보다 더 중요하다. 가족을 부양하거나 대학에 가기 위해 경험하는 일이 옷이나 CD플레이어를 사기위해 하는 일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목적 자체가 더 영구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가와 소비재를 교환하는 십대들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일과 소비의 패턴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 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부모를 비롯하여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p289

프레드 히르슈는 <성장의 사회적 한계> 사람들이 상품과 서비스로부터 얻는 만족은 그들 자신의 소비가 아니라 타인들의 소비에 의해 결정된다고 썼다. ‘이웃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다 보면’ 욕망은 무한해 진다. 줄리엣 쇼어의 최신작<과소비하는 미국인>
우리는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과 경쟁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를 막힘없는 소비와 부채, 더 긴 노동시간의 순환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쇼어는 이 순환의 고리 속에 빨려 들어간 사람들은 ‘소비가 삶의 의미와 만족까지 줄 것이라고 점점 더 기대하게 된다’ 고 이야기 한다. p290

주디스 윌리엄슨은 <열정의 소비>에서, 시장이 우리의 열정을 소비하고, 그것이 더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받지 못하도록 무장해제 시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돈은 당신이 돈을 번 방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숨겨준다. 우리는 국세청에 시달리는 시민이자, 자녀들에게 무시당하는 부모이며, 인정받지 못하는 배우자이자, 무기력한 근로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p292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가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과 여가 간의 질적인 차이가 거의 없다. p293

어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보수를 받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보수 없이 하려고 했건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게 되면 그 활동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이 감소하게 된다고 연구자들은 보고하고 있다. 심리학자인 에드워드 데시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비슷한 실험을 했다. 실험 대상자들은 재미있는 퍼즐을 하도록 요구되었는데, 그들에게 그 대가로 외적인 보상을 지불하자 그들 역시 자신의 과업에 흥미를 잃는 듯했다. ‘과잉정당화 효과(overjustification)' 사람들은 이미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추가적인 대가를 지불 받으면 필요 이상의 것을 얻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p294

집단인 K.K.K가 이 소식을 듣고, 동네 아이들을 선동해서 매일 가게 앞에 가서 모욕적인 욕설을 하라고 시켰다. 첫째 날, 아이들이 나타나자 재단사는 가게 앞으로 나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나에게 욕을 할 때마다 25센트짜리 동전을 주마.’아이들은 기뻐했다. 다음 날, 아이들이 나타났을 때 재단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욕할 때마다 10센트를 주마’‘ 많은 아이들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다. 셋째 날, 재단사는 아이들에게 5센트를 주었고, 그 다음날에는 1센트를 주었다. 다섯째 날, 아이들이 나타나자 재단사는 말했다. ’더는 너희들에게 돈을 주지 않겠다.‘ 그러자 아이들은 투덜대며 대답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우리도 이제 여기 와서 욕하지 않을 거에요.‘
아이들의 욕설을 상업적인 거래로 변화시킴으로써, 현명한 재단사는 아이들의 비열한 즐거움을 약화시켰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대가로 돈을 받아본 아이들은, 이전처럼 단순히 즐거움만을 위해 그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돈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
여가는 자유롭고, 자기 결정에 의한 것이며, 즐겁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원할 때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다.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원할 때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다.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과 어울리는 것, 소설책을 읽거나 단지 공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여가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p295

의미 있는 일의 본질과 그에 대한 욕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철학적 질문의 모태가 되는 질문에 직면해야만 한다. 즉,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p296

'조직이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한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의미 있는 일과 의미 있는 삶, 그리고 행복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가 될 것이다. p297

밀란 쿤데라는 <웃음과 망각의 책>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을 놀려댄다. p299

택시기사
쿤데라는 이 남자를 ‘글쓰기광’, 즉 낯선 사람들을 위한 책을 쓰는 것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외로움이나, 친구 또는 가족들로부터의 단절감을 느낄 때 그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구한다.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 한다. p300

지크문트 프로이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정신 질환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는 순간, 그는 이미 병에 걸린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 즉 리비도(libido)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리비도에는 다른 무언가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슬픔과 우울로 이어지는 일종의 동요가 그것이다.
심리치료자이자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E,플랭클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의미치료(logotherapy: 이 이름은’의미‘하는 뜻의 그리스어인 ’로고스‘로부터 파생 되었다. 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원동력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의미치료는 환자와 마주하여, 환자와 삶의 의미를 추구하도록 재교육한다. 프랑클은 쾌락과 고통이 아닌, ’가치‘가 사람들을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변화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만,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가치를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p301

이러한 경향은 우리가 신뢰하는 친구들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 얼마나 서툴러졌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마음의 습관>에서, 로버트 벨라  ‘치료적 사회’ p302

삶의 의미에 관해 질문할 때 대중적인 책들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그들을 격려해주고 해답을 주기를 원한다. 치료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가치가 개입된 대화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에 의지하여 이 질문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나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레오 톨스토이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시작한다. p303

모든 종교는 신비적 요소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에 관한 해답을 준다. 신앙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는 동시에, 그 질문을 제거해 버린다. 사람들의 삶이 억압적이고 혼란스러워질 때, 그리고 그들의 문제 대해 세속적인 해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신앙은 희망과 위로를 제공한다. 그것은 삶에 질서와 평온을 되찾아준다. p304

놀랍게도,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현대 철학자는 거의 없다’ p305

삶의 의미라는 문제는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삶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인 듯하다. 즉,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우리의 에너지와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의미는 ‘개인의 인식’이다. p306

우리는 삶의 가치나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한다. 최상의 답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삶을 온전히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가치와 의미는 삶에 임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초점에 의해 ‘드러 난다’ p308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p309

착센트미하이
‘몰입(flow)' p311

칙센트미하이
첫째, 우리의 문화는 일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행복해하면서도, 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가치로 말미암아 그 사실을 인정하기 못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일에서의 절정 경험이 우리의 목적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적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당신이 몰입을 경험할 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고 있음을 잊는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칙센트미하이의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통할은,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에서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p312

20세기가 끝날 무렵, ‘그 이상의 것’에 대한 분명한 갈망이 경영학 서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영학 서적에서는 ‘정신(spirit)'이나 ’영혼(soul)'같은 단어들이 제목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이클 노박의 저서<소명으로서의 기업>
몇몇 자수성가 이야기들을 덕망 있는 사업가가 되는 비결과 뒤섞은 그의 책은 사업에서의 성공을 신의 은혜와 연결시키는, 전통적인 신교도의 논리를 펼친다. p313

찰스 핸디의 책<헝그리 정신><은 기업의 영적 공허함에 대한 탄식이다.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p315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으로 출현한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p317

영성에 대한 이러한 욕구 뒤에 고용주의와 고용인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생겨나는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숨겨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직장에서의 영성’은 대중 심리학과,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경영학 이론이 항상 해왔던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즉,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것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목적의 힘: 삶과 일에서 의미 창출하기>의 저자인 리처드 라이더 p318

직장 내의 기도 모임은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고용인들의 욕구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의 징후이다. 진짜 문제는 일이 그들의 에너지와 시간뿐 아니라 일 이외의 의미 있는 활동과 공동체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박탈한다는 점이다. 만약 고용주들이 ‘그 이상의 것’에 대한 고용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한다면 그 해답은 기도 모임이나 영혼 발견 세미나에 있지 않다. 고용주들은 ‘직장의 구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고용주들이 유일한 비난의 대상은 아니다. 많은 고용인들이 실제로 게을러졌고, 그들은 고용주들이 자기 삶의 많은 부분들을 책임지도록 기꺼이 내버려두었다. p319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그곳은 다만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하는 장소일 뿐이다. 회사나 사회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인정해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마저 개인적으로 그들 주변의 의미를 ‘밝히지’ 못하는 이상,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p320

의미 있는 일은 의미 있는 삶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조직’에 행해지는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종교직과 같은 일부 직업들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직업들조차도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의미를 발견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p322

나는 현대의 경영자들이 올바른 직장을 ‘만들기’보다는 개인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비판해왔다. 경영학에서의 이러한 심리적 접근과 20세기 복지 자본주의는 직장 내에서 정의를 보장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노조의 궁극적 쇠퇴라는 한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의 경영 기법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일이 점차 우리 삶의 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부자들의 소득은 상승한 반면 중산층의 임금은 물가상승률을 간신히 따라잡는 정도였고 저소득층의 실질 임금은 오히려 하락했다. 중역들(성공했건 그렇지 않건)과 평균적인 근로자의 임금 차이를 보면, 현재의 ‘일’은 그다지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 p325

근로자들은 자신의 실수 뿐 아니라 경영자 및 경제의 실수와 ‘불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소위 자신의 일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도 자신들의 ‘고용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질책한다는 것이다. p326

기업의 입장에서, 정직한 직장이 되기 위한 첫 단계는 ‘심리적 조작’이나 ‘공허한 선전’ 에 해당하는 경영지침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경영자들은 젊은 근로자들이 헌신이 부족하고 고용을 단기적으로 여긴다며 초조해하곤 한다. 이들이 고용을 단기적으로 여기는 것은 20대라서, 혹은 게으르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실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경제가 보기에는 튼튼하더라도 항상 변덕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번 잃어버린 신뢰와 선의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p327

정직한 직장은,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p328

과거의 사회계약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어떤 것일까? 조직은 직업 안정성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보의 공유를 약속할 수는 있다. ‘정직한 직장’이란 고통스러운 진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들이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이 ‘근로자들을 성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그는 장기적인 관계야 말로 헌신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며, 한 회사에 장기간 복무하는 것이야말로 인격 발달의 중요한 열쇠라고 가정하고 있다. p329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고 존중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을 ‘신뢰’한다. p330

경영 이론가와 고용주 들은 ‘일을 잘하는 고용인일수록 자기 삶을 희생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p331

많은 사람들은 오랜 근무시간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트레스와 외로움, 그리고 가정해체로 인해 고통  고 있다. 왜 그런가?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비 욕구를 억누르는 일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매혹적인 물건들은 우리를 직장에 묶어두며, 때로는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현재의 젊은이들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아리스토텔레스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즉, 생활 속에서 선택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학예(liberal arts)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p332

보다 광범위한 질문은 ‘우리는 자신의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것만큼의 가치를 갖는 가?’이다.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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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3 #60.영혼의자서전(하)-카잔차키스 미나 2012.06.26 3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