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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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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3일 22시 3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은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그는 1904년 뉴욕 주 화이트플레인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로마가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관련서를 탐독했고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였다. 그는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27년 캠벨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이후 2년 동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공부한다. 1929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만, 대학 측의 반대로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때마침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불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캠벨은 이후 5년 가까이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 그리고 습작에 몰두한다.

 

이후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벡, 리치 러브조이,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했으며 캔터베리 스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1934년에 캠벨은 미국의 명문 여자 대학인 새러 로렌스 칼리지에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고, 1972년 퇴직할 때까지 38년 동안 재직했다. 그리고 그 사이인 1938년에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했다.

 

캠벨은 어려서부터의 관심사였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지속해 명성을 얻는다. 그의 대표작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949>은 세계 각지의 시화 속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주저인 4부작 <신의 가면 1959-1968>을 비롯하여 <신화와 함께 하는 삶 1972> <신화의 이미지 1974> 그리고 최후의 역작인 총 2 5권의 <세계신화지도 1983-1989> 등을 펴냈다.

 

하지만 조지프 캠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1988)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캠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조지프 캠벨은 1987 10 30,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 아내인 진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지프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천복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깨달음

 

캠벨은 자신의 천복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방황했다. 하지만 그는 조급해 하지 않았고 자신의 천복의 길에서 그의 천복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대공황시기인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서 5년간 칩거하며 책만 읽었다. ‘나는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가 니체를 언급해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앍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칸트로 읽었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P88)

 

이후 그는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소형차인 포드 모델 A를 타고 미국 대륙을 횡단했다. 서부 해안에 도착한 그는 여전히 실업자 신세였고 새너제이에 사는 지인 아이델에게 연락을 하게 된다. 그렇게 그녀의 형부이자 소설가인 존 스타인벡을 만나게 되었고 리츠 러브조이, 에드 리케츠와 교류하게 되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존 듀이를 공부했는데 캠벨은 카멜도서관에서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꺼내 읽게 되었고 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껏 평생 삶에 대해 아니라고 말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그래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캠벨, 그의 위트가 우리를 웃게 만든다.

 

캠벨은 그의 책 <신화와 인생>에서 특유의 유머와 위트로 우리를 웃게 만든다.

 

가령 시의 경우, 우리는 젊은 시절 내내 셰익스피어와 밀턴의 작품을 공부하고, 나중에 가서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짧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도대체 뭐람.’(P383)

 

스승님께서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랬지. 네가 곧 하나님이니라.” “그리고 만물이 역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만물이 역시 하나님이니라.” “그렇다면 그 코끼리도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아무렴. 코끼리 역시 하나님이지. 하지만 너는 왜 그 코끼리의 머리 위에서 비키라고 소리치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게냐?”(P310)

 

그건 내게 깜짝 놀랄 만한 경험이었고, 아마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암스트롱의 달 착륙 바로 직전에 있었던 아폴로 호의 우주비행 당시, 휴스턴의 지상관제센터에서 이렇게 물었다. “누가 조종하고 있나?” 그러자 우주선에서는 이런 대답이 날아왔다. “뉴턴!”(P199)

 

그 순간, 나는 그 주머니칼을 손에 넣기까지는 전혀 몰랐던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 즉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도 전혀 모른 채 그걸 외상으로 샀을 때의 기분이야말로 최고였다는 걸 말이다.(P227)

 

그가 생각하는 동서양의 차이

 

1904년 생인 캠벨이 파악하는 동서양의 차이는 아마 현재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서양문화에서는 행동을 위한 가치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자아가 발당해 있지만 동양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자아의 개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동양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일만 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가치 평가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동양인들은 스승을 찾아가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지 않지만 서양인은 단단한 자아라는 껍질 때문에 자신의 자아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불행해 진다고 말한다.(P306-307)

 

신화 속에서 인생을 발견한 사나이, 조셉 캠벨

 

<신화의 힘>에 이어 <신화와 인생>을 읽으며 학자 캠벨의 모습뿐 아니라 인간 캠벨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지독한 방황의 시간을 겪으며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친밀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항상 진지한 얼굴로 심각하게 신화에 대한 이야기만 할 것 같은 그가 쏘아대는 유머와 위트의 화살을 맞으며 즐겁기도 했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미국의 명문 여대의 교육 철학이란 내가 졸업한 여자대학의 그것과 비슷하게 현모양처의 양성이었을 것임을 감안해도, 자신의 가르침의 의도는 제자들이 인생 여정의 후반부에 세계를 읽을 수 있는 영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는 그의 고백은 왠지 씁쓸하기만 하다. 더욱이 신화에 대한 연구와 가르치는 일을 자신의 천복으로 삼으며 평생을 살았을 것 같은 그가 그들을 가르치는 내 일상의 일 역시 맨 처음의 흥분이 가시고 난 다음부터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는 고백은 놀랍기만 했다. 자녀를 두지 않고 예술가인 아내와 평생을 함께 했던 탓인지 모성의 위대함과 아이를 낳은 여성 예술가들의 영적 도약을 간과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그는 신화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길을 발견하고 뚝심 있게 그 길을 끝까지 걸어낸 사나이가 아닌가! 그가 들려줄 신화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진다.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본 영웅의 여정]
http://www.youtube.com/watch?v=8AG4rlGkCRU
 

[참고자료]

<신화의 힘> <신화와 인생> 저자 소개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Joseph Campbell Foundation (http://www.jcf.org/new/index.php?categoryid=11)
유튜브 http://www.youtube.com/watch?v=8AG4rlGkCRU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P7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네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캠벨 철학의 근간이다. 물질이란 없다. 모든 것이 장이다. 그러한 구별과 제한은 단지 우리 마음 속에만 있을 뿐이다.

 

P8 조지프는 이 세미나를 마치면서 다들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을 운명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 한 사람이 지닌 놀라운 힘의 장에서 우러난 진정한 인간성이야말로 그가 모두에게 준 선물이었다. 파르치팔과 마찬가지로, “그는 천사도 성직자도 아니었다. 용기와 동정심이라는 한 쌍의 덕,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의리라는 덕을 갖추고 모험을 떠나며 행동하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은총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덕목에서 확고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마침내 성배를 손에 넣게 된다.”

 

P9 그는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이며, 영혼과 육체에 있어 죽음과 부패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그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누군가 우리를 향해 이기적이라고 말할 경우, 십중팔구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우리가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 폭을 제한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을 제한하게 되고, 그런 제한이 지나치면 우리 역시 세계의 경찰관’,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상자 밖으로 남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P9 우리를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즉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 위해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뒤에야 우리는 애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부과한 제한을 넘어 나아가도록, 그리고 각자의 길로 나아가도록 해 줄 수 있다. 최종 목표는 이 세례를 바로잡기 위해 바깥으로 투사되었던 그 에너지를 안쪽으로 돌려 스스로를 바로잡는 스스로의 진로를 따라 나아가고, 여러 세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춤추는 바로 그 경지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P11 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신들은 우리를 향해 열 걸음을 다가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한 걸음, 여정의 그 영웅적인 첫 걸음은 여러분의 울타리 바깥으로 또는 그 가장자리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는 가끔 심지어 도움을 받고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발걸음을 먼저 내딛어야만 한다

 

P11 카를 융과 마찬가지로 조지프는 노년기를 인생의 감소기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개의 시기로 보았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노년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융의 말마따나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P12 조지프는 우리가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저 바깥의 어떤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굳이 다른 어딘가로 가거나 어떤 무언가를 혹은 어느 누군가를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바로 여기있다, 바로 여기있다, 바로 여기있다.” 오로지 필요한 것이라곤 의식의 전환뿐이다.

 

P13 “자기발견의 사자는 사사건건 너는 할지니라고 주문하는 그 용을 죽여야만 한다.”

 

P13 “왜 저 나무들 아래를 걷다 보면 항상 크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돋아나는 것일까? 월트 휘트먼은 묻는다. “생각건대 겨울과 여름 내내 그 나무들 위에 걸려 있던 생각들이 마침 내가 지나갈 때 과실처럼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P20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P20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

 

P21 만약 우리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우리를 단단히 잘못 짚은 셈이다. 이 세게는 완벽하다. 그것은 혼란의 도가니이다. 이 세계는 항상 그렇게 혼란의 도가니였다. 우리를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P22 우리는 스스로가 계획해 두었던 삶을 기꺼이 내팽개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니까.

 

P22 지옥이란 말라붙은 삶이다.

 

P23 현재의 형상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다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

 

P23 파괴가 있은 다음에 창조가 있다.

 

P25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다.

 

P26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P27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 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

 

P28 여러분의 진정한 의무는 공동체로부터 멀리 떠나 여러분만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P29 “너는 할지니라고 하는 용을 죽여라. 그 용을 죽인 사자는 비로소 아이가 된다.

 

P29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 여러분은 지난 날을 내팽개쳐라.

 

P30 여러분이 긍정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은 결국 부정적으로 경험될 것이다.

 

P30 여러분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P32 보석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의 여정에 담긴 목표는 영혼에서 여러 층위를 발견하고 그것을 파헤쳐 마침내 여러분 자신이 붓다의 의식이며 그리스도라는 신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 여정이다.

 

P33 심연 속으로 내려감으로써 우리는 삶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분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곳, 거기에 여러분의 보물이 묻혀 있다.

 

P33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않을 것이다.

 

P36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P36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P37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소년이 입문제의를 행할 때 이런 조언을 얻었다.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 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P43 기독교와 유대교는 귀양살이의 종교다. 인간은 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P43 주된 서양 종교의 역사는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종교들 역시 이 같은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느 전설이나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에덴동산이나 뱀, 나무, 대홍수 같은 것은 실제로 없었다.

 

P45 여러분이 오로지 사랑 때문에 결혼한다면 그 결혼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è  캠벨의 <신화의 힘>에서 결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은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이거다, 하고 오는 게 있어요. 그러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떤 존재가 이게 바로 그것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P48 어머니가 마치 그 아들에게 있어서는 투사 형성 요인의 최초 보유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그 딸에게 있어서 그렇다. 여성은 남성적 요소에 의해 보충되며 따라서 그녀의 무의식은 이른바 남성적 각인을 지니게 된다. 이는 남자와 여자 간의 상당한 심리학적 차이로 귀결되고, 따라서 나는 여성에 있어 투사 형성 요인을 정신이나 영혼을 의미하는 아니무스라고 불러왔다.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만나면, 아니무스는 강력한 검을 뽑고, 아니마는 환상과 유혹의 독을 내뿜는다. 그 결과는 항상 부정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둘은 나란히 사랑에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P49 그것이 바로 아니무스의 방식이다. 여성 자신도 할 수 있지만, 대신 남성에게 위임하는 그 어떤 일을 투사하는 것이다. 존재 가치로는 (여자에 비해) 그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지만, 남자는 특화된 신체를 지닌 기계나 다름없어서, 그런 일을 너끈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여러분 속에 있는 힘을 자각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힘에 의해 가능한 행동이 여성으로서의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남성에 의해 더 적절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곧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다.

 

P51 ‘아모르는 오른쪽 길(승화시키는 영, 정신, 인간 공동체)도 아니요, 왼쪽 길(자연의 자연발생, 음경과 자궁의 상호 자극)도 아니며, 바로 앞에 있는 길, 눈의 길이며 눈이 심장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P51 눈과 마음이 완전화 조화를 이룰 때, 이 둘이 하나의 결의로 단단하게 뭉쳐질 때, 그때 눈으로 들어와 마음으로부터 환영 받는 것에서 완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P53 사랑이 멀리 있으면 삶도 멀리 있다. 사랑은 정확히 삶만큼 강력하다.

 

P54 영혼은 상처의 치유법을 알지만, 그 치유법은 아픔을 준다. 때로는 애초의 상처보다도 그것의 치유가 더 많은 아픔을 주지만, 만약 그걸 견딜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더 강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써 여러분은 보다 넓은 (삶의) 기반을 찾은 셈이기 때문이다.

 

P55 파멸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기회인 양, 도전인 양 다가가라. 여러분이 그 순간에 사랑을 낙담이 아니라 가져온다면, 여러분은 힘이 거기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P55 여러분은 마치 어마어마한 실패인 양 보였던 파멸 직후의 순간들이 사실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만들어 준 사건이었음을, 그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 벌어지는 일 가운데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è  돌이켜보면 내가 겪었던 힘든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증오했던 그 덕분에 나의 전환을 앞당길 수 있었고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어정쩡한 상태로 그 곳에 머물며 나 자신을 위안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벌어지는 일 가운데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지나고 나면 모두 신의 뜻이었다.

 

P55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야 곧이어 계시가 나타난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온통 어둠인 것처럼 보일 때, 새로운 삶이, 하나같이 내가 필요로 하던 것들이 나타난다.

è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때이다. 어둠 속에서만 빛은 밝게 빛날 수 있다. 새로운 삶을 열어 젖히려면 현재의 삶이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으로 가라앉은 바로 그 때이다.  

 

P56 신화의 이미지에 별자리처럼 박혀 있는 그 오랜 깨달음들의 한 가지 훌륭한 점은 그 깨달음들 덕분에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P57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는 사회에 봉사한다. 이것은 종속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우리는 내면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해방이다.

è  젊은 날 나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꿈꾸었다. 내면은 중요하지 않았다. 외면이 바로 내면이라 생각했다. 내 인생의 전반기, 나는 사회에 종속되어 충실히 봉사했다. 이제 나는 내면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해방되었다.

 

P58 노년에 이르면 여러분은 긴급한 일과로부터 해방되고, 그 무엇보다도 더 생생한 자신의 기억 시스템 속으로 침잠한다. 여러분의 부모님과 함께 했던 중대한 순간들이 이제 거기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순간들이 중요해진다. 그것은 관계란 어떠했는지를 조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명확한 순간들이다.

 

P59 노쇠의 시기에 이르러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감사하고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죽음을 항해 나아간다.

 

P60 힌두교에서 비슈누 신에 대한 종교는 곧 사랑의 종교다. 비슈누 식으로 사랑을 분석해 보면, 사랑에는 다섯 가지의 단계와 함께 그 각각의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이 하나씩 있다. 깨달음을 찾고 성취하는 모든 훈련은 이 경로의 에너지로부터 수행될 수 있다.

사랑의 첫 번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이것은 두려움의 종교다. 여러분은 신의 존재에 대해 아직 자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것은 저기 있지만, 당신은 여기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사고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를 헌신할 만한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다.

두 번째 단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우리가 즉 서구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이 두 번째 단계의 사랑의 모델은 친구 대 친구, 가령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라든지, 또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어떤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행동으로서 사랑을 경험할 때마다 여러분은 제1단계에서 벗어나 제2단계로 진입하는 셈이다.

세 번째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이것은 친구 대 친구의 사랑에 비해 훨씬 친밀하고 강력한 사랑이다. 이것은 성스러운 힘이 여러분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자각되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사랑의 네 번째 단계는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로, 여기서는 자웅동체의 또는 다른 한쪽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신을 발견하고, 이제는 이 친밀하면서도 가장 오래 지속되는 종류의 관계 속에서도 신이 발견된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의 다섯 번째에 이르는데, 이것은 강박감에 사로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서는 오로지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된다. 르 포(광인), 즉 사랑에 몰두한 까닭에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 주인 대 하인 > 친구 대 친구 > 부모 대 자녀 > 배우자 대 배우자 > 절대적인 사랑

 

P63 스스로의 열정을 따를 때, 사회의 도움은 사라진다. 여러분은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이제는 완전히 혼자니까.

è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나를 감싸주던 큰 우산 하나가 사라졌다. 기십만원을 납부하던 국민연금은 일시 중단해야 했고 의료보험은 남편의 직장의료보험의 부양인 중 하나로 예속되었다. 회사에서 나오던 명절 선물도 더 이상 배달되지 않으며 자동차 보험료, 유류비도 내가 조달해야 한다. 이제 사회의 도움은 이제 사라졌다. 완전히 혼자 해결해야 한다.

 

P65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이런 열광적인 경험이 벌어지면 여러분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배우자에 대해 이전과는 뭔가 다른 종류의 관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지금 여러분이 수립하고 있는 관계의 구체적인 측면 속에 있는 어떤 깊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순수한 열광은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인생에는 또한 가치 있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들을 배양하기 시작하면, 이런 순수한 열광을 (한편으로는) 완화시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을 반드시 잃어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결혼에 있어서의 비결이다.

 

P67 성공적인 결혼은 혁신적인 삶을 함께 이끄는 것이며, 열려 있는 것이며, 계획표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낙하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 때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P68 이처럼 민감한 것에 대해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내 생각엔 여기서 고결한 마음이란 것은 사랑이 무엇이냐에 대한 일종의 단서가 아닐까 싶다. 고결한 마음이란 발상은 그 사람에 대한 책임감과 관계되어 있다. 만약 책임감이 없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뭔가를 하는 것이다.

 

P68 사람이 평생에 한 번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결혼이다.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삶이 내게 달려 있다는 의미임을 수긍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차마 결혼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P69 맨 먼저 여러분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 생각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며, 자신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분이 자신의 강박감에 사로잡힌 열성을 제어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상태라면,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결혼에 부적격한 상태다.

 

P69 내 생각에 결혼이란 상대방을 책임지고 사랑함으로써 상대방과 진정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것, 즉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P72 여자는 삶(생명)샤크티(sakti), 즉 에너지이다. 남자는 그 에너지에 올라타 다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삶을 향해 직접 지시해서는 안 된다.

 

P73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P77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행동이 자신과 그 타인이 사실은 하나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데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타인과 별개라는 이차적인 자아의식 때문에 행동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토대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라는 더 크고 더 참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P79 신화는 우리 안에 있는 힘들을 합쳐 줄 수 있는 실마리다.

 

P79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 신화는 우주의 지도 또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가령 우리가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대지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화는 특정한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지지하며 정당화한다.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십계명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화는 우리가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삶의 여러 단계를 통과하고 감당할 수 있게 해준다.

 

P82 나는 이제껏 돈에 관해 완전히 무심한 삶을 살아왔다.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돈이 따라오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삶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è  나는 돈을 따라 살아왔다. 연봉이 더 많고 복지제도가 더 좋은 회사로 전직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 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돈을 따라가다 보니 돈은 얻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돈을 제외한 내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P83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돈이 있건 없건 간에. 돈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돈을 잃을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P83 삶의 에너지로서 경험되는 돈은 실제로 명상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을 축적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돈에 몰두한 삶으로부터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매우 놀라웠다.

 

P84 여러분은 자신이 육성해 온 이득을 잘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것들을 놓칠 경우, 여러분은 대략 10년쯤 지나서 부정적인 반작용을 경험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이 하나의 문턱에서 또 다른 문턱으로 움직일 때에는 차라리 점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아래로 내려갈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이 피어날 것이다. 여러분의 중심으로부터 잠재력을 다음 모험에 필요한 미래 예측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P86 여러분이 단순히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해 학위과정을 밟고 있다면, 그런 열등감은 벗어던져라. 왜냐하면 열등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P87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P89 물론 가끔은 나도 거의 정말 거의’ – ‘젠장, 차라리 누가 나보고 뭘 해야 한다고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유는 의사결정을 수반하는 것이고, 각각의 결정은 운명적인 결정이다.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시스템이 열망하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어떤 것을 외부 세계에서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다.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 수 있는 삶이었다.

è  내가 필요했던 것은 얼마간의 휴식과 새로운 목표였다. 그리고 함께 목표를 향해서 전진할 수 있는 동료와 이끌어줄 수 있는 스승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얻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삶이란 말인가?

 

P90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è  나는 작년부터 나의 천복을 찾는 길에서 도처에서 적시에 나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그 길을 앞서 간 사람들이었고 내가 더 효과적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며 기막힌 사람들이었다.

 

P92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정말로 어찌할 수 없다. 내겐 정말 아무런 철학도 없었다.

è  내가 회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조언을 들었지만 그것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나의 철학이 없었다.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계속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내 철학을 갖게 되었다. 가끔 흔들리기도 하지만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겠다.

 

P93 에드.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껏 평생 삶에 대해 아니라고 말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그래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P97 괴테의 걸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에는 여러분이 방랑을 하면서 갖가지 경험과 사람들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사실 여러분이 경험하는 삶도 바로 그런 식이다. 그 무엇도 고정적인 것은 없으며, 그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은 가능성이며, 모든 것이 단서이며,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이로운 일이다. 마치 여러분들의 코가 여러분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그와 같은 여행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놀라운 순간들을 향해 나아가는 셈이다. 가령 내가 카멜 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을 뻗어 한 권의 책, 그러니까 내 인생을 뒤바꾼 책을 발견한 것처럼. 정말로 그랬다! 그때의 방랑은 주위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니는 기회, 또한 여기라면 정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에 대한 느낌을 얻는 기회였던 것이다. 

è  지금 생각해보면 예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지금의 길을 암시하기 위한 단서들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꿈벗 여행에 가고, 글쓰기 모임에 가입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연구원에 지원했던 일련의 과정들이 지금 나의 길을 인도하기 위한 단서들이었나 보다.

 

P98 그 중에서도 가장 진지한 것은 사다리 맨 위까지 올라가서 나서야 전혀 엉뚱한 벽에 사다리를 세워 놓았음을 깨달을 때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한다.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그런 다음에 아이구, 다시 사다리를 내려와서 또다시 제대로 세우고는곧이어 사다리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냥 여기저기 부딪치며 왔다 갔다 한다.

è  나 역시 그랬다. 사다리를 중간쯤 오르고 나니 전혀 엉뚱한 벽에 사다리를 세워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올라간 수고와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 그냥 그 사다리를 끝까지 올라가 볼까 생각도 했다. 중간 정도의 높이였지만 내려다 보는 전망도 나쁘지 않았고 사다리도 제법 튼튼했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갈 수로 그곳에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내려왔다. 내려오고 나니 어디에 사다리를 세워야 할 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어 다가왔다. 내가 조심해야 할 것은 비슷한 곳에 다시 사다리를 세우거나 아니면 캠벨의 말대로 사다리 따위는 잊어버리고 일상에 파묻혀 지내는 것일 것이다.  

 

P99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의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로,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è  내 문제는 너무 생각이 많다는 것이다. 모든 걸 느낌보다는 생각으로 결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결정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내 유머감각이 살아나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시간과 장소, 바로 그곳, 그때가 내가 행복한 장소며 시간이라는 것을.

 

P99 진짜다. 이건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다. 여러분을 옥죄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리면, 여러분은 마치 룰렛 바퀴 위의 공처럼, 자신이 어디에 안착할 것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룰렛 공은 결코 , 여기 내려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라.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 나의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생각일 뿐이니까.

è  난 항상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의식하면서 살았다. 멋진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커리어우먼의 모습이 바로 내가 생각한 내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게 계속 체면을 걸었다. ‘이게 바로 네가 원하는 바로 그거야? 행복하지? 정말 잘했어 또 달리란 말야.’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행복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 자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주입된 사람들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는 바보같이 그들의 생각에 세뇌되어 인생 전반기의 시간을 모두 바치고 말았다.

 

P100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생각을 치워 버려야 희열이 온다.

 

P100 우리 아버지야말로 정말 훌륭한 분이셨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나왔을 때, 아버지 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예언하건대,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 될 거다.” 아버지는 물론 그 책을 결코 펼쳐 보지도 않으셨지만, 당신 아들이 뭔가 큰일을 해냈음을 아셨던 것이다.

è  우리 아버지도 정말 훌륭한 분이시다. 내가 나의 첫 책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면 아마 캠벨의 아버지와 똑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 책을 읽지는 않으실 것 같다.

 

P103 삶을 창조하는 이 모험에서 성취의 기준은 여기서 검토한 이야기 각각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더불어 과거의 진리들, 목표들, ‘의미에 대한 교조들, 은총을 버리는 용기가 될 것이다. 세상을 향해서 죽고 내부로부터 태어나는 용기가 될 것이다.

 

P104 바로 여러분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이러저러한 또는 다른 삶의 자질구레한 것에 대한 집착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P104 무엇이 여러분을 영적 성취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가? 나는 내 삶이 언제 중심에서 멀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바로 내 삶의 진정한 중심잡기로부터 나를 탈선시키는 어떤 업적이나 시스템과의 관계에 내가 과도하게 집착할 때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언제 정도를 걷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내 속에 가진 것 중에서도 최고로 여겨지는 것들과 만사가 조화로운 관계를 유재할 때이다.

è  나는 언제 중심에서 멀어지고 언제 정도를 걷고 있다고 느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정도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P104 성배 전설에서 말하는 황무지란 뭔가 (의례적으로) 마땅히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또는 반드시 해야만 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è  나는 황무지에서, 그리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 것 충실히 해내며 살아왔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졸업을 하고,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너는 할지니의 세계를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았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아주 지쳐 손 까닥 할 힘 조차 남아 있지 않은 나는 발견하게 되었다. 이젠 너는 할지니는 듣고 싶지 않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살아 갈 것이다.

 

P105 고귀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발적으로 행동하며, 황무지를, 너는 할지니의 세계를 회피하게 될 것이다.

 

P105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두렵지 않아. 그것이 설사 큰 잘못이고, 평생에 걸친 잘못,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아. – 스티븐 디덜러스

 

P105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느낌이 없을 경우, 여러분은 그저 삶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살아가는 셈이다. 여러분이 (의례적으로)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바와 정반대되는 행동이 바로 공감이다. 성배를 발견하는 사람은 그 장소에 온 사람인 동시에 공감의 삶을 사는 사람을 상징한다. 공감의 역동성을 자신의 동기로 삼는 사람만이 성배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나와 너의 동일성에 관한 자연스러운 인식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성배의 중심이다.

è  직장생활을 딱 10년 하고 나니 살아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일을 바꾸어버렸다. 그러면 나아질 줄 알았다. 얼마간은 괜찮았다. 하지만 다시 일을 바꿔도, 새로운 일을 해도, 살아 있다는 느낌은커녕 지쳐가기만 했어. 공감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다.

 

P105 융의 표현대로, 개성화를 위해서는, 즉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다양한 역할의 가면을 언제, 어떻게 쓰고 벗을지 알아야 한다. 개성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중심을 찾아야 하고, 그에 따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해로운 것을 통제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고정된 역할의 일반적인 가면무도회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è  그래서 나도 나의 사회적 가면을 벗어버렸다. 세련된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은 커리어우면의 가면과 하이힐을 벗고 화장도 지워버렸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고 청바지를 입고 배낭을 메고 걸었다. 그제야 살아 있다는 느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게 내 본래의 얼굴이었던 모양이다.

 

P107 결국 모든 삶은 전체의 실현, 즉 자아의 실현이다. 때문에 그 현실을 개성화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삶은 그것을 실현하는 각각의 운반자에 매여 있으며, 운반자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운반자는 개별적인 운명과 목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했을 때에야 비로소 삶을 이해할 수 있다. –

 

P108 동양과 서양을 막론한 모든 종교 체계에서 공인된 신화의 형태는 의식을 통해 제시되며, 개인은 헌신과 믿음의 경험을 통해 이에 반응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그렇지 못하다면 어떨까? 그 신화적이고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형태의 전통 전체가 그 사람 속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어떤 진정성 있는 반응을 일개우지 못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가장 일반적인 해결책은 위장하는 것, 자신의 부족을 탓하는 것, 믿는 척하는 것, 믿기 위해 분투하는 것, 그리고 남들을 모방하면서 진정성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 등이 있다. 반면 진정으로 창의적인 방법이 하나 있으니, 나는 이를 종교와 반대되는 예술의 방법, 다시 말해 이러한 권위 있는 질서를 전복시키는 방법이라고 지칭한다.

 

P108 조이스의 소설에서처럼, 그리고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처럼, 진보의 열쇠는 내부에 있는 무언가를 강조하는 것에 놓여 있다.

 

P108 영혼에게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하는 그물이라도 또 다른 사람, 즉 자신의 한가운데(중심)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향후의 모험을 위해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옷이 된다.

 

P109 내 경험은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나는 내가 성배의 성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è  누군가가 말한 성공의 정의와 비슷하다. ‘성공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P110 내 지론은, 여러분도 거기 도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 이미 거기 도달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거기서 내쳐지기가 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여러분이 뭔가를 하도록 원하고 있는 반면, 여러분은 이 세상이 원하는 바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러분에게 내적 만족을 제공함으로써 여러분을 (성에서) 내쫓기지 않게 만들어 주는 행동의 분야를 발견하는 것이다.

 

P111 영웅의 여정은 항상 부름으로 시작된다. 인도자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아라. 너는 지금 잠든 땅에 있다. 깨어나라. 여행을 떠나라. 저곳에 너의 의식의, 또한 너의 존재의 온전한 측면이 있건만, 아직 한 번도 손댄 적이 없었다. 그러니 너는 여기서 그냥 머물 것이냐? 아니, 그렇게 하는 건 너에게 충분치가 않다.” 그렇게 해서 여정이 시작된다.

 

P111 부름은 곧 어떤 사회적 지위로부터 떠나라는, 즉 여러분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찾으라는, 즉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속박되어 있을 때에는 찾기가 불가능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중심을 잃은 상태가 되며, 스스로가 그렇게 중심을 잃은 상태라고 느낄 경우, 여러분은 때를 맞이한 것이다.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때,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 여러분은 문턱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위험한 모험이니, 이는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관한 지식의 영역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è  나도 부름을 받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중심을 잃었다고 느끼고 있었고 이 무거운 사회적 옷을 벗고 잃어버린 무엇을 찾아야 할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P112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은 (지금 본인에게) 요구되는 모험이 끝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하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è  나도 부름을 받았지만 떠나기를 주저하며 지지부진하게 머무르고 있을 때, 내 안에 분노가 사그러들지 않음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타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P112 하지만 만약 지금 여러분이 따르는 모험이 본인의 진정한 모험이라면, 또한 그것이 여러분의 깊은 영적 필요 또는 준비에 적합한 것이라면, 여러분을 돕기 위해 마법의 인도자가 나타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올해는 모두들 이 여행을 나설 예정이라고 하니, 나도 그냥 따라가야지하고 말한다면, 인도자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모험은 여러분 자신의 내부에서 곧바로 솟아나야만 한다. 여러분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모험을 향한 부름이며,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는 아무런 안전도, 아무런 규칙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è  모험을 시작하자 정말 동화같이 마법의 인도자들이 나타났다. 천복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용기였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이 길을 가겠다는 용기와 의지, 그것이 이제 나에게 필요한 그것이었다.

 

P113 여러분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여러분은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며, 밤바다로 출항을 개시하는 셈이다. 그 와중에 부딪치는 바위며, 좁은 관문이며, 그와 유사한 것들, 다시 말해서 예와 아니오, 즉 대립자의 쌍을 나타내는 것들을 지나가야만 한다. 이 세계를 둘러싼 벽들이 잠시나마 확 트이는 듯한 순간이 있을 것이며, 여러분은 (그 벽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뛰어오르라! 가라! 문들은 대개 너무나도 빨리 닫혀 버리기 때문에, 여러분이 탄 말의 꼬리를 잘라 먹기 일쑤다. 여러분은 손발이 잘릴 수도, 가진 것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è  나를 둘러싼 벽들이 확 트이는 순간을 잠시 보았다. 내가 열망하는 것들이 하나씩 이루어지자 내 안에 가능성을 나도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문은 빨리 닫혀 버리니 전 속력으로 돌진해 그 문을 통과해야겠다.

 

P113 이제 그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여러분은 더 많은 도움은 물론이고 점점 더 어려운 시험과 마주칠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이 계속 해서 매달려 왔던 것들을 점점 더 많이 포기해야만 한다. 그 마지막은 완전한 포기, 전적인 양보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삶에서 경험한 것은 물론이고 이것은 무의식으로의 이행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여러분이 전혀 모르는 행동의 장 속으로의 이동이다. 무슨 일이건 일어날 수 있으며, 그 일은 여러분에게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다.

 

P114 여러분이 더 깊이 들어갈수록, 여러분은 궁극적인 깨달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저항 역시 더 강력해진다. 여러분은 억압된 것들로 이루어진 영역에까지 내려가게 되는데, 여러분은 그 억압 체계를 반드시 지나가야만 한다. 물론 그 무엇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마법의 도움이다. 영웅은 이곳에 이르러서 자신의 초인적인 여정 내낸 자신을 도와 준 자비로운 힘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P116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을 황무지로 도로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성 없이 살아가는 곳으로. 그 선물을 도로 가져와서, 그것을 합리적인 삶 속에 통합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P118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여러분은 결코 모험을 완결할 수 없다. 숲에 들어가야 할 때가 있고 돌아와야 할 때가 있는 것이며, 여러분은 그게 언제인지를 알고 있다. 여러분은 용기가 있는가? 여러분이 숲에 들어갔다가 되돌아오려고 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P118 이것이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방식이며, 여기에서 맨 마지막은 여러분이 영원히 휴식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알고, 사랑하고, 베푸는 것이다. 그 휴식의 순간은 그 모든 것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비록 여러분이 이 세계의 밖에서 활동하고 있더라도, 여러분의 내부에는 완전한 마음의 평정과 휴식의 순간이 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고통에 빠지게 된다.

 

P118 이 세계가 마치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을 때, 여러분이 자신의 희열에 매달리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야말로 살아남는 삶이니.

 

P120 융은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그 중 전반은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힌두인들이 말하듯 “’마르가를 따라가서” – 여기서 마르가란 길, 즉 여러분이 겪은 인간 경험의 발자취를 말한다. – 여러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삶으로 가는 시기이다. 그러고 나서 완전한 해방이 찾아온다. 분노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è  마흔이 가까워지자 나의 관심은 내부로 향하게 되었다. 외부적인 내 모습보다는 나의 정신적 충만함이 더 필요해졌다.

 

P122 전형적으로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니체가 구분한 단계에 따르면 낙타는 짐을 잔뜩 싣고 나면 제 발로 일어나 사막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사자로 변신한다. 사자의 임무는 너는 할지니라는 이름의 융을 죽이는 것이다. 이 자기발견의 사자가 용을 죽이고 나면, 용 속에 묶여 있던 에너지는 이제 여러분의 것이 된다. 중년이 되어서까지도 여전히 착하게 굴면 이득을 얻고, 나쁘게 굴면 벌을 받게 된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뒤처진 것이다.

 

P122 여러분이 만약 융이 말한 두 번째 단계, 즉 삶의 후반부에 들어섰다면, 여러분의 목표는 여러분이 심장 차크라에서 들은 을 불러오는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성취에도 관심이 없고 위신에도 관심이 없는 여러분의 삶을 형성하고 구조화하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P123 변화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든지 옛허물을 벗어 버리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뱀처럼 허물을 벗는데, 하필이면 그 중 일부를 꽁무니에 그대로 남겨 놓고 싶다고 치자.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뒤에 매달린 것이 바로 근심이다.

 

P124 가장 권할 만한 것은 점진적 출가다. 이는 여러분이 하던 일을 천천히, 그리고 단계적으로 중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불가피한 경우, 여러분은 몇 가지 작은 책임을 여전히 지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거기 다른 책임들을 덧붙여서는 안되지만 말이다. 여러분이 거기 다른 책임들을 덧붙인다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은 여러분의 새로운 족쇄가 될 것이다.

è  내가 지고 있던 여러가지 책임 중에서 가장의 책임은 내려 놓았다. 하지만 엄마의 책임은 내려 놓기가 어려울 것 같다. 이제 그 외의 책임들은 더 이상 지고 싶지 않다.

 

P130 이제 우리는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실체는 우리 안에 사는 것이다 두 가지 종류의 음식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물질적인 부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 가령 우리가 먹는 식물과 동물 은 세속의 음식이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의 영적인 부분에 여양을 공급하는 영적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

 

P134 나는 여성 특유의 경험이란 이처럼 뭔가를 견뎌 내야 하는 것임을, 따라서 기기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인내, 즉 견디는 힘임을 깨닫게 되었다.

 

P134 소년은 남자임을 드러내야만한다. 반면 소녀는 여자임을 깨달아야만한다. 삶이 그녀를 압도하는 것이다.

 

P137 참가자들은 각자의 마지막 보물을 포기하는 순간 모크샤즉 해방을 실제로 경험했다.

 

P137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내게 있어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한 것은 바로 그 실제 경험이었다. 그것은 행복한 참여의 감정이었다. 일찍이 나 자신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져 버림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포기한 보물을 향한 우리의 감정을 실제로 바꿔 놓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집착 없이도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더욱 증대시킨 것이었다. 정말이지 놀라웠다.

 

P141 천장의 전구가 모두 빛의 수레이듯, 아래에 있는 우리 모두는 저마다 의식의 수레이다. 하지만 전구에게는 빛의 질이 가장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는 의식의 질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을 덧없는 육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기 육체를 단순한 의식의 수레로 여기고, 의식을 우리 모두를 통해 현현하는 존재로 여길 수도 있다.

 

P142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 오비디우스

 

P149 내가 보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여기, 즉 여러분이 살아 있는 이 유일무이한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149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은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개념이 그런 사실을 빛바래게 만드는 것 같다. 여러분으로선 차리리 지금, 바로 여기서 행복한 편이 더 낫다.

 

P157 ‘차크라바퀴라는 뜻이다. ‘차크라는 또한 연꽃이란 뜻의 파드마로도 불린다. 그런 것이 일곱 개인데, 그 중 세 개는 골반 부근(척추 밑, 성기, 배꼽)에 위치하고, 세 개는 머리(심장, 후두, 미간)에 위치하고, 나머지 하나 심장 차크라 는 그 사이에, 즉 심장의 박동이며 숨의 박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박동이 있는 커다란 구멍(정수리)에 위치한다.

 

P160 4 차크라인 아나하타는 부딪치지 않음이고, 심장의 높이에 있다. 이것은 종교적 삶의 시작이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깨달음이며, 그 이름은 곧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소리를 지칭한다. 심장 차크라는 영적 차원으로 가는 입구이다. 모든 것이 신비의 은유다. 모든 것이 신비의 은유인 그 지점에 일단 여러분이 도달하면, 이 하위의 힘들은 정화된다.

 

P162 ‘타트 트밤 아시’, 네가 바로 그것이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유리판을 사이에 둔 채로 여기에 주체가, 또 여기에 객체가 있다. 다시 말해 영혼과 신이 있는 것이다. 그 유리판을 없애 버리고 나면, 여기에는 주체도 객체도 더 이상은 없다. 객체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주체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P163 나는 을 듣는다. 나는 신이 도처에 있음을 안다. 성스러운 에너지는 여전히 내 주위에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P167 “가장 좋은 것은 말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말의 범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관해서는 차마 무엇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P168 요가의 첫 번째 잠언은 다음과 같다. “요가는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속적인 유동체로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연못의 수면과도 유사하다. 둘러싼 세계의 갖가지 형상들은 단순히 시간의 장 속에서 왔다가 가는 이미지들을 투영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모두의 아래에는 형상들의 본질적인 형상이 있는 것이다. 그 연못을 고요하게 만든다면, 즉 바람을 물러가게 하고 물을 말게 한다면, 그러한 정지 상태에서 여러분은 그 모든 변화하는 형상 아래에 있는 완벽한 이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P169 이것이 구루가 하는 일이다. 내 모습은 마음에 새기고, 나하고 똑같이 되거라. 이는 혼자 하는 수행과는 정반대의 방법인 것이다.

 

P169 채식주의는 생명을 향한 가장 큰 모독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오로지 도망칠 수조차 없는 것들만 먹는다,

 

P170 물론 여기서의 교훈은 바로 우리 모두가 염소처럼 살아가는 호랑이라는 것이다. 오른쪽 길, 즉 사회적 부문을 우리가 염소로서의 성격을 배양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신화 은유로 이해해야 적절할 듯한 는 여러분이 호랑이로서의 자기 얼굴을 인식하게끔 인도해 줄 것이다.

 

P171 그렇게 되면 그게 바로 계시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는 우리를 보디사트바의 방법 즉 영원에 근거하되 시간의 장 속에서 움직이는 자의 방법 의 마지막 공식으로 이끌어 간다. 시간의 장은 곧 슬픔의 장이다. “모든 삶은 슬품으로 가득하다.” 정말 그렇다. 여러분이 슬픔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그 슬픔을 다른 어디론가 옮겨 가기만 하면 된다. 삶을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런 삶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러분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영원을 자각한다. 여러분은 해방되고, 또 그런 한편으로 다시 속박된다. 여러분은 바로 여기서 아름다운 공식이 나오는데 –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여러분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손상이나 성취조차도 초월하는 장소를 발견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P174 ‘는 깨어나는 의식이다. ‘는 꿈의 의식이다. ‘은 깊고도 꿈조차 없는 잠의 의식이다. 아움은 하나님의 광휘의 소리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롭고 중요한 것이며 일단 한번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매우 간단하다.

 

P175 꿈의 비밀이란 주체와 객체가 똑같다는 것이다. 객체는 스스로 빛을 발하며, 유동적인 형체를 취하고, 의미에 있어서도 다의미적이다. 그것은 여러분의 꿈이며, 여러분의 의지의 현시이며,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그것에 의해 놀란다. 이것은 무의식과 자아의식의 관계이다. 자아의식은 무의식에 대해서 알아야 하며, 꿈은 의식하는 마음을 향해 무의식이 하는 이야기의 어휘다. 하지만 꿈에서나 환상에서나 주체와 객체는 똑같다.

 

P176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P177 그것에 관해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P177 핵심은 침묵 속에서 들리는 이 아움이 모든 것을 알려 준다는 점이다. 만물은 그것이 현시이다. 이제 여러분은 내부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움직이면서 영적 삶을 지니는 비결은 언제든지 모든 것에 들어있는 아움 소리를 듣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성취와 달성을, 그리고 여러분이 찾던 보물을 찾기 위해 더 이상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있다.

 

P185 어떤 것을 가리켜 그것이라고 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원성을 지니게 된다. 반면 는 이원성이 아니다. 그것은 비이원적인 자각이다. 그러한 자각을 가지고 일을 하면 온 세상을 삶과 기쁨으로 환해진다. 만물을 로 파악하며, 그것들의 삶을 깨닫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종교적인 명상에 함축되어 있는 최고의 진술이다.

 

P187 여러분의 삶에 있어 크나큰 중요성을 지니게 될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첫 만남에서부터 장차 뭔가 벌어질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P188 감각이란 뭔가가 존재함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사고란 그게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감정이란 그 가치를 우리에게 평가해 알려 주는 기능이다. 직관이란 우리가 그 대상이나 그 상황에 내재된 가능성을 예측하게 해 주는 기능이다. 따라서 감정은 가치에 대한 내부의 안내자이다. 하지만 그 판단은 보통 외부적인, 경험적인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P189 상징학이란 것이 놀라운 까닭은 융이 말한 그 네 가지 기능이 거기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융은 다섯 번째의 것, 즉 그 한가운데 있는 것을 가리켜 초월적 기능이라고 지칭한다. 상징은 여러분이 바로 이 기능을 공략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P190 절대 진리의 관념 즉 사고하려는 인간 정신의 상대성의 범위 너머에 이른바 절대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을 나는 진리 발견의 오류라고 부른다. 만약 자신의 또는 자기 구루가 이른바 절대진리 – “바로 이거야!” – 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니체의 말마따나 개념의 간질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즉 어떤 관념을 지니게 됨으로써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다.

 

P192 여러분의 악덕을 포기하지 마라. 그 악덕이 여러분을 위해 일하게 하라. 여러분이 오만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오만을 없애지 마라. 그것을 여러분의 영적 탐구에 활용하라.

 

P193 따라서 힘과 공간 두 가지가 숭고함을 연출하며,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 자아는 위축된다. 이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여러분 자신이 더 작아질수록, 여러분은 더 많은 숭고함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P201 그 육체들이 간 곳은 외부 우주가 아니라 내부 우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은유적인 여정에 의해 암시되는 바는 영혼에 있어서의 마음의 귀환이다. 즉 여전히 육체를 지닌 채로, 그 초월적인 근원 그 안에서 특정한 삶의 신비가 이 시간의 장 중에 떠올랐다가 머지 않아 그 근원 속으로 돌아가 용해되는 의 완전한 지식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P202 여러분이 하나님을 단순히 심리적인 기능 또는 요인으로 환언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까지만 가고 더 이상은 가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갖고 있는 한, 여러분은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을 상기하다.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

 

P204 이제껏 어떠한 지상천국도 발견되지 못했으니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영혼의 동산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이야기에 묘사된 것처럼 그곳의 네 가지 신비스러운 강은 그 한가운데 있는 공통의 원천으로부터 네 가지 방향으로 흘러나가는데, 이것이야말로 C. G. 융이 원형적 이미지라고 부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발적으로 생성된 심리적 상징으로 꿈에서나 신화 및 제의에서나 모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P205 그렇다면 무엇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동산 바깥에 있게 만드는 것일까? 바로 여러분의 두려움과 욕망이다. 붓다는 바로 이 두 가지를 초월했다. 두려움과 욕망의 유혹에 대해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붓다는 그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그 밑에 앉아서 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방이다.

 

P206 불교에서는 우리가 두려움과 욕망의 세계 속에서, 다시 말해 마야, 즉 환영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도상학에서는 이것이 바로 타락이다. 구원은 이러한 두려움을 없애고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의 행위를 통해 이 세상을 긍정함으로써, 이 세상에 기쁘게 참여함으로써 그것을 경험한다.

 

P206 시간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단 한 번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에덴동산의 비밀을 찾아내야 한다. – 로렌 아이슬리

 

P207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과 언약을 맺었으니, 이들은 지상에서 유일하게 거룩한 인종 사실상 유일하게 거룩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런 자격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관한 전통적인 대답은 최근(1970 3 10)에 이스라엘에서 재확인된 바 있다. 이 신화적으로 영감을 받아 세워진 국가의 완전한 시민권을 얻기 위한 최우선 요구사항을 (이스라엘 정부가) 다음과 같이 규정했기 때문이다. 바로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라고 말이다.

 

P209 토템, 종족, 인종에 대한 숭배, 그리고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종교는 미움을 사랑으로 억제하는 것의 심리학적 문제에 대해 오로지 부분적인 해결책만을 표상한다. 즉 이것들은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입문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 속에서는 자아가 절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가 더욱 증대한다. 오로지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대신, 개인은 자신의 사회 전체에 대해 헌신하게 된다. 그 와중에 세계의 나머지(즉 그때까지만 해도 인류의 더 큰 부분)는 그의 동정과 보호의 영역 바깥에 남겨지는데, 왜냐하면 그곳은 그의 하나님이 보호하는 영역 바깥쪽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가지 원칙의 극적인 분리가 일어나는데, 이는 역사의 여러 페이지가 매우 풍부하게 보여 주는 바와 같다. 즉 광신자는 자기 마음을 청결히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오히려 세상을 청결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P210 오늘날 세계 각국의 사회 대부분은 사실상 성서에서 비롯된 전통 그 외의 다른 전통에 속한 사람은 모두 배제되는 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산주의자의 형제단 말고도 이 세상에는 유대인 공동체, 기독교 공동체, 이슬람 공동체 등이 있다. 유대교의 경우에는 전도의 열망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다른 세 가지 즉 이슬람교, 기독교, 공산주의 는 전도를 지상과제로 삼는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그 각각은 완벽한 세계 정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쇼가 아닐 수 없다. 이 세계를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è  이 글을 읽으며 가슴이 후련했다. 전도라는 미명아래 그악스럽게 달려들어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한 사람들에게 나는 많이도 시달렸다.

 

P211 불교에서 삶의 목표란 니르바나(열반)적인 삶의 경험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쁨으로 참여한다.” 신조를 따른 종교에서 삶의 목표란 십중팔구 계율을 준수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슬람교에서 삶의 목표란 바로 그 종교의 이름 속에 들어 있다. 이슬람이란 바로 순종’,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과 숭배이다. 역사적 행위의 측면에서 보자면,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똑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둘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을 새로 만들려고 한다.

 

P214 사탄은 뭔가를 범할 수 있는 자아의 축도다.

 

P214 페르시아 시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그 이후에) 사탄은 관연 무슨 힘으로 견딜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들이 발견한 답변은 이러한 것이었다. “일찍이 내 앞에서 사라져라!’하고 말했던 하나님의 목소리에 대한 추억으로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환희였으나 지금은 사랑의 고통이 된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절묘한 영적 고통의 이미지인가!

 

P216 지옥의 문제는 불이 여러분을 소진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변화의 불만이 그럴 수 있다.

 

P216 만약 지옥이 황무지라면, 연옥은 여러분이 고통의 장소를 떠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여전히 고통 중에 있지만, 가능한 깨달음을 탐색하는 중이기도 하다. 이제는 더 이상 절망이란 없다. 성스러운 공간 또는 도피처를 갖게 되려면, 우선 여러분은 어떤 작은 행동의 땅, 또는 거럴 만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그곳은 황무지가 아니며, 거기에는 암브로시아의 작은 샘도 있다. 그것은 곧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이다. 그것은 여러분 속에 기쁨을 넣어 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를, 자신의 의도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소망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작게나마 기쁨이 거기 있게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성령에 반대하는 죄는 바로 절망이다. 성령은 여러분이 깨닫도록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며, 절망은 아무것도 나올 수 없도록 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지옥이다.

 

P216 기쁨이 있는 장소를 찾으라. 그러면 기쁨이 고통을 태워 버릴 것이다.

 

P217 당신이 오로지 흑인이라는 사실만 갖고서 당신의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들을 계속 들먹이며 비난한다면, 당신은 인간이 됨으로써 얻은 다른 특권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만 흑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직 인간이 되지는 못한 셈이죠.

 

P218 그것은 내게도 큰 교훈이었으며, 그렇게 남의 동정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즉효약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다시 말해 그는 이제껏 자기만의 지옥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라고 스스로 설정한 것 너머를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è  지인들이 나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면 어떤 말을 해줘야 하나 고민하곤 했다. ‘, 불쌍한 친구, 이해가 가네. 그건 정말 힘든 일이지.’라고 동감만 해줘야 할까? 나는 항상 뭔가 솔루션을 주려고 했는데 가끔 그들은 화를 내곤 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냥 내가 함께 공감해 주길 원하는 것일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감보다는 즉효약을 그들에게 주고 싶다. 그들이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P219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악의? 무지? 오만? 사랑?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P220 아래로 뾰족한 삼각형은 장애로 경험되거나 또는 열린 문으로 경험되거나 둘 중 하나다. 여러분이 그 심리적 의미와 효과를 정신적 변화로서 인식하게 되면, 여러분은 그 장애물을 열린 문으로 바라보게 된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장애가 되는 듯 보였던 모든 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 그것이 여러분의 변이를 위한 수단임을 깨달음으로써 말이다.

 

P222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노력해야 할 일은 바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과 사랑이 보다 더 크고 더 큰 지평을 얻게 하는 것이다.

 

P222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을 의식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P223 조이스는 <율리시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다섯 개의 손가락을 통과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대문이고, 그렇지 않으면 문이다.” 우리가 접하는 어려움 역시 닫힌 문이 아니라, 오히려 활짝 열린 대문으로의 변화 가능성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리라.

 

P223 여러분이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차단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어떤 구체화된 상징에 있다고 여겨질 경우, 명상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체계적인 훈련이 된다. 이상적인 명상의 기능은 구체화된 답변을 초월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P223 여러분을 가로 막는 상징을 발견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상징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의 중요성에 부합되는 사고와 경험의 양태를 찾아내도록 하라. 그 상징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그 상징을 제거할 수 없다.

 

P225 상징이 구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것으로 해석될 때, 그것들을 계시를 낳게 된다.

 

P230 그 상징이 도대체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지 못하면, 그것은 단지 명령으로서 거기 있을 뿐이며, 그런 일들은 계속해서 더 많이 지속될 것이다. 이 복잡한 분야에서 여러분이 자신의 정신을 사용할 수 없다면, 나로선 여러분이 과연 어떻게 그걸 잘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P230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 권위자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P231 신을 선택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들은 무수히 많다. 여러분의 신을 선택하라. 여러분이 숭배하는 신이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신이다.

 

P234 남들이 여러분에게 행한 어떤 일들의 관점에서 여러분의 운명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P236 따라서 여러분이 만약 세상 속에서 거하는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바로 인간 속에서 찾으면 된다. 즉 하나님을 향해, 우주를 향해, 또는 이와 같은 종류의 어떤 것을 향해 비난을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념은 이른바 인간 속에 실제로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특성에 관한,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이미지일 뿐이니까

 

P237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상상의 존재의 이미지에 투사된 것은 사실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실상 그때그때 인간이 처한 조건이 반영된 거울 속 이미지라는 것이다.

è  김용규의 <서양문화를 읽는 코드, >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구약과 신약의 신의 모습이 다른 이유는 인간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237 어느 누구도 궁극의 환희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립자의 쌍들을 초월한 것이므로,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경험했다면, 그곳에는 이미 어느 누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 객체, 그리고 모든 대립자의 쌍들을 초월한 신비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지상의 신비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P239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 계발이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교회는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돕지 않는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은유적인 사건들을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승천은 내부로 향한, 신화적 여정을 표시한다. 그리고 처녀수태는 인간에게 있어서 영적 삶의 탄생을 지칭한다.

 

P241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에 대한 수많은 해석은 그 관계를 강조하지는 못하고, 대신 그 사건의 참화를 강조하기만 했다. 여러분이 그 참화를 강조하면, 여러분은 누군가 비난할 사람을 찾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대인을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이 이어진다면, 그건 결코 참회가 아니다.

 

P242 십자가는 의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들이 우리에게로 내려온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통(십자가를 놓음, 즉 가로지름)인 것이다.

 

P242 바울로의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에서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격을 계속 유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자격을 내어놓고 그 대신 종의 형상을 취했으며,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했다고 썼다. 이것은 세계의 고통에 관한 기쁜 긍정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이 세계의 고통과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와중에 신성한 존재의 광휘를 간파하는 것이다.

 

P243 영웅의 죽음과 부활은 오래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위한 모델이다.

 

P247 부활절과 유월절은 완벽한 상징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새로운 삶에 부름을 받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삶은 아주 뚜렷이 규정되지는 않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매달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삶으로의 여정, 즉 우리 모두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여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과거를 놓아 버려야만 한다.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진실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P258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여러분 자신의 삶의 조화를 위해 중요하다. 여러분의 성스러운 고안에서는 만사가 여러분의원동력의 형태로 작용한다. 그리고 다른 누구의 원동력도 아니다.

 

P258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니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 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쁨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 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 본인이 알건 모르건 간에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è  잡동사니들이 쌓여있지만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은 방, 나의 크고 작은 성취들을 모아 놓은 내 블로그, 내 퀼트 작품들을 모아 놓은 침실 구석, 나에게 이런저런 길을 보여준 책들이 쉬고 있는 책장. 이런 곳들이 내겐 지금 성스러운 피난처이자 암브로시아의 샘이 있는 공간인 것 같다.

 

P259 우리 모두에게는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과 즐거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런 이후에는 거의 모든 것이 지속적이고 늘어나는 기쁨이 된다.

 

P260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P260 어른이 되고 나면, 여러분은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반드시 재발견해야 한다. 긴장, 정직의 결여, 그리고 비현실적인 감각은 여러분 삶의 잘못된 힘을 따름으로써 나타난다.

 

P262 여러분의 삶이 놀이가 아니라면, 또는 여러분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다면, 그때는 그만 두도록 하라!

è  직장생활 10년이 지나자 삶은 놀이가 아니었다. 아무런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놀이를 그만두는데 4년이 걸렸다.

è   

P262 명상을 할 때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즉 여러분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이다. 명상의 자세는 봉인하는 자세이며, 규칙적인 호흡은 여러분을 내부로 향한 탐험을 더욱 북돋운다. 이 세계는 봉인되고, 여러분은 독립적인 실체가 되는 것이다.

 

P263 여러분은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그런 봉인 프로그램을 가져야만 한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하루에 한 번, 또는 한 시간에 한 번씩이라도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여러분이 장차 내적 삶을 지니려 한다면 그것은 절대 필수인 셈이다. 그것이 제공하는 바는 여러분 안에 잇는 영원한 것이 시간의 장으로부터 해방되는 여유공간이다.

 

P265 여러분이 일단 자기만의 성스러운 공간을 갖고 나면, 여러분은 (필요할 때면) 어느 장소든지 간에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성스러운 공간에 어디에나 있다고 말할 정도가 되려면,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우선 명상 훈령이라든지 성스러운 공간의 경험을 통해서 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성스러움이란 주위의 대상과의 은유적 관련성이다.

 

P270 여러분이 제대로 된 길로 접어든 경우에는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 기적적으로 문이 열리는 것이다.

 

P271 내가 던진 질문은 이러했다.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고, 모든 것이 성스러운 광휘라면, 어떻게 우리는 무지나 잔인함이나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과 나의 경우, 우리는 라고 합니다.”

 

P271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너머, 즉 여러분이 자신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일별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가 비롯되는 원천의 장이다.

 

P275 여러분은 불교가 엘리트 종교일 뿐만 아니라 대중종교임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중종교라면 마땅히 명상을 위한 기반을 제공해야만 한다. 따라서 불고에는 사리 숭배의 오랜 역사가 있다.

 

P278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 들어가서 네 할 일을 하라. 그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슬픔을 본질이라고 인식하라. 시간이 있는 곳에는 슬픔도 있게 마련이니.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없앨 수는 없지만,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선택을 할 수는 있다.

 

P279 ‘자신의 존재(사트바)가 곧 깨달음(보디)인 자를 의미하는 보디사트바라는 용어는 실론의 팔리 경전의 초기 어휘들에서 깨달음을 향하여 가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한 자, 다시 말해서 자신의 전생을 살고 있는 붓다, 미래의 붓다를 가리켰다. 한편 사스크리트 경전에서는 그 용어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깨달음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멸의 축복을 거부한 자, 그리하여 환전한 지식의 소유자로서 이 세상에 남아 만물의 횃불, 안내자, 자비로운 구세주 노릇을 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P280 보디사트바 아발로키테시바라는 한쪽 귀에 여성의 귀걸이를 걸고, 다른 쪽 귀에는 남성의 귀걸이를 걸었는데, 이는 자비 또는 동정을 표상한다. 아발로키테시바라라는 이름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의미는 자비를 품고 세상을 내려다 보는 자라는 뜻이다. 아발로키테시바라는 종종 두 명의 여성 형상을 앞에 대동하고 나타나는 남성으로 그려지는데 타라라고 하는 그 여성들을 보디사트바의 눈에서 흐르는 자비의 눈물 한 명을 오른쪽 눈에서, 또 한 명은 왼쪽 눈에서 을 의인화한 것이다.

 

P281 또 다른 현시에서 아발로키테시바라는 1천 개의 손을 마치 휘광처럼 자기 주위에 지니고 다니는데, 그 각각의 손바닥에는 눈이 하나씩 달려 이 세상의 갖가지 슬픔을 꿰뚫어 본다. 마치 예수의 양손이 못 박혀 꿰뚫린 것처럼 말이다. 이 두 가지는 대등한 상징이다. 예수는 곧 보디사트바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도의 경우에는 그리스도를 아무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일무이한 현시이자 유일한 글로 받아 들이는 것은 아니다.

 

P283 이제 여러분은 불교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계속해서 명상하십시오. 즉각적인 깨달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정신은 천천히 깨달음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방법에만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명상을 하는 중에 여러분의 의식이 확장되고 변화되면, 그때 가서 여러분은 모든 길들이 타당한 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P285 여러분이 뭔가를 욕망하고 뭔가를 두려워할 때, 그것이 바로 유한이다. 붓다가 겪은 세 가지 시험 욕망, 두려움 그리고 의무 은 시간의 장에서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것들이다. 유한과 영원을 판별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의 주위를 밀폐 봉인하게 되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안에서 변하지 않는 정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니르바나를 성취한 것이다. 그 정적인 장소는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히 타오르는 불길이다.

 

P286 니체는 우리가 반드시 자기 힘의 4분의 3만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것이 바로 판별이다.

 

P288 어떠한 관념도, 어떠한 개념도, 어떠한 이름도 최후의 장애물이다. 우리의 종교는 모두가 이러한 이미지에만 매달리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 신을 넘어 서지 못했다. 정점은 곧 신을 넘어서는 것이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시적인 것은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영원한 것은 단지 은유에 불과하다.

 

P290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P292 요가 교단의 규율과 경험은 니르바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느니라. 교단의 탈 것은 너희를 저편 물가로 데려다 주기 위한 방편이며, 일단 저편 물가에 도달하고 나면, 너희는 뗏목을 버리고 모두 잊어버려야 마땅한 것이니라.

 

P296 한때 시인을 지망했던 사람이었다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여러분이 만약 영적 체험을 하고 나면 말로는 차마 그것을 묘사할 수가 없다. 다만 그 체험에 대한 실마리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 체험이기 때문이다.

 

P297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을 경험하고 또 영과 의사소통한다.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 속에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영을 완전히 추구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곧 죽음임을 안다.

 

P298 두려움과 욕망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나는 상황이 내 계획대로 되기를 욕망하고, 그런 욕망은 나로 하여금 다른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게 바로 그것이다! 이게 바로 삶이다! 바라보라! 기운이 넘치지 않는가? 심리학적 변화란 이처럼 이전까지만 해도 애써 견뎌 내야 했던 것을 이제는 알고,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P300 핵심 문제는 여러분의 마음에서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여러분이 돌아온 마을은 바로 여러분이 떠난 마을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 여정은 아직 완수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이라고 간주한 장소로 돌아오는 것이고, 똑 같은 직업으로 돌아오는 것이지만, 반드시 똑 같은 위치로 돌아와야 할 필요는 없다.

 

P300 일시적으로나마 삶을 뒤로 함으로써, 여러분은 스스로를 삶에 바치는 것이다. 세속적 이득에 대한 욕망과 상실에 대한 공포로 인해 여러분은 스스로를 삶에 내어주는 데에서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P304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며, “샨티, 샨티, 샨티(평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숭고의 관점, 다시 말해 자아에 관한 의식과 그 관계를 모두 소멸시킨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 없이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슬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P304 삶이란 항상 슬픔으로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è  삶도 바꿀 수 있지 않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몇몇 사람으로 인해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삶의 전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P305 만약 내 안에 이런 종류의 힘, 즉 역사의 물결에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나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니체는 말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침을 뱉을 때에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침을 뱉을 때, 그 침이 (나한테 되돌아 오지 않고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 다른 누군가의 눈에 맞는다면, 여러분은 곧 붓다가 될 수 있다.

 

P306 불교도들이 흔히 그렇듯 나 역시 현재 속에서 미래가 어떤 식으로 건 암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대문에 그런 징후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동시에 매우 놀라운 일이다.

 

P306 서양의 전통에서 우리는 그런 고정된 패턴에 맞추어 행동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자아 행동을 위한 가치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가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프로이트는 자아(에고)현실 원칙이라고 일컬었다. 이것은 여러분이 현실’ – 진실이 아니라 과 연관을 맺도록 해준다. 다시 말해 여러분의 삶의 개별적 환경, 그리고 그런 환경과 여러분의 관계가 바로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서양문화에서는 자아, 즉 가치평가 원칙이 발달했다.

반면 동양에서는 이와 반대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시킨 일만 하게 되며, 오로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앞에 놓아 준 것만을 갖게 된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시킨 일만 하게 되면, 여러분의 자아는 발전하지 않는다. 결국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자아의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아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자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개인적 가치평가라는 것도 없다.

è  다양한 책에서 동서양의 차이점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가끔은 너무 오래 전의 동양의 모습을 일반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에서 동서양의 육아 스타일의 차이점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상 동서의 모든 선진국에서 존 보울비 이후 양육의 애착 유형은 거의 보편화되었고 각 문화는 이런 새로운 육아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전통을 덧붙인다.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미국 문화에서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데 양육의 초점을 맞춘다. 반면에 아시아 문화, 특히 중국, 한국, 일본처럼 아이를 키울 때 자율적 개인보다는 더 큰 사회 속의 복잡한 관계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는 문화에서는 자존감보다 자기 비판 능력을 기르도록 강조한다.(P168)

 

P307 따라서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전혀 없는 동양인은 깨달음을 찾기 위해 이처럼 가족을 떠나 스승을 찾아가고, 자신의 자아라는 작은 공 또는 조개껍질을 가져가서는 스승에게 그걸 깨뜨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스승은 작은 망치, 즉 요가 훈련을 꺼내 들고, 그리하여 – “” – 그의 자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인은 자아를 함께 가져간다. 그리고 스승에게 그걸 깨뜨려 달라고 부탁하기는 하지만, 스승이 앞서와 똑 같은 작은 망치를 꺼내 ! ! !”하고 40년 넘게 두들겨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서양인은 그저 점점 불행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P308 라마크리슈나가 이른바 원숭이의 길이라고 부른 것이 우리의 문화에서는 이른바 불교도의 가운데 길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자기 속에서 성스러운 장소의 대응물 격인 중심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굳이 숲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그 중심으로부터 여러분 자신의 평안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닐 수 있다. 결국 여러분은 그 중심에 근거하고 살아가면서, 여전히 이 세상과 관계하며 남아있을 것이다.

 

P310 아무렴. 코끼리 역시 하나님이지. 하지만 너는 왜 그 코끼리의 머리 위에서 비키라고 소리치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게냐?

 

P310 지혜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두 가지 모두 세상의 견해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P311 그는 브라흐만들에게는 브라흐만으로 나타나고, 상인들에게는 상인으로 나타나며, 곤충들에게는 곤충으로 나타나는 등, 각자에게 그것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P312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느끼는 힘 융 식으로 말하자면 아니무스 은 사실상 여성의 힘이 특화된 상태, 다시 말해 그 힘이 응용된 상태인 것이다.

 

P316 힌두교의 입장에서는 여성이 샤크티’, 즉 척추를 따라 올라오는 뱀의 힘이며 삶의 에너지의 본질이다. 여성은 활성자이며, 남성은 단지 혼자 있고자 할 뿐이다. 남성은 심리학적으로 다른 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만, 이 힘의 장이 사라지고 나면, 이제는 남성이 활성화된다.

 

P318 현대 종교 중에서도 가장 남성지향적인 이슬람교에서는 여성을 기껏해야 아들을 낳기 위한 수단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남성의 기능은 대부분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P319 가령 마천루로 가득 찬 도시를 건설한다거나, 달에 로켓을 보내는 등의 극적이고 현저한 남성적 활동을 우리가 매우 강조함으로 인해, 이제는 여성들조차도 오로지 남성의 목표와 미덕만이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남성의 업적만이 모두에게 적절한 목표이며 중요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

 

P320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그 자체다.” 여성은 그것 자체이고, 남성은 여성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 그 자체인 곳 안의 장을 꾸며 줄 뿐이다.

 

P320 남성의 기능은 행동하는 것이다. 여성의 기능은 존재하는 것이다. 여성은 그것이다. 여성은 어머니 지구다.

 

P327 역사 전반에 걸쳐 있는 사례에서 여성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답변이 불충분했던 바 다시 말해서 여성은 자연과 사회가 기대한 바를 행했지만, 마침 상황이 너무 불모이고 나빴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모험에의 부름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만약 어떤 여성이 성취의 장에 들어서는 남성의 과업을 수행한다면, 그녀의 신화는 본질적으로 그 남성 영웅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P327 남성의 만다라의 중심 이미지는 종종 빛을 방사하는 보석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그런 중심 이미지가 아이 자신의 영적 출산으로 낳은 아니 를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여성의 신체적 특성의 심상이 영적인 형상으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다.

 

P328 내가 알기로는 여성들이 이처럼 비인습적인 삶의 방식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분야는 물론 학계를 제외한다면 예술계뿐이다. 나 역시 이 일을 하면서 이른바 정신 노동의 세계에 있는 여성들을 여럿 알게 되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결코 예술 분야의 여성들만큼 풍부한 성취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의 성취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반면, 예술가의 성취는 오히려 과정을 중요시하므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

 

P329 문학을 통틀어 여성의 모험을 다른 작품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여성은 이미 그것이며, 여성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각하느냐 뿐이기 때문이다.

 

P329 남성은 반드시 행해야만 한다. 남성은 반드시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길은 곧 고통의 길이다. 여성은 그저 있기만 하면 된다.

è  정말 그럴까? 여성은 그저 있기만 해도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대학졸업 후 전업주부 생활을 오래 한 내 친구들은 남편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의 길을 찾는데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여성도 자신의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P330 조각가라는 내부의 여성이 자신의 힘의 도구인 망치와 끌을 발견한 경우, 말 그대로 거기에만 하루 종일 매달릴 수가 없다면 진지한 예술가로서 그녀의 이력은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의 예술을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만다.

è  그렇다면 남자들은 육아의 책임을 온전히 여자에게만 부담시키고 하루 종일 자신의 일에 매달려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혹 여성의 출산과 육아의 경험들이 오히려 자신의 예술에 영감을 주어 도움이 되지는 않은가? 해리포터 시리즈로 세계적인 거부가 된 조엔 롤링은 이혼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지금은 작고하신 소설가 박완서는 전업주부로 살다 마흔이 넘어 등단했지만 주옥 같은 작품을 쏟아내었다. 여성은 오히려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겪으며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지 않는가?

 

P330 즉 여성에게 주어진 본성 속에는 여성이 다루어야 할 훨씬 더 무거운 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녀에게 생리가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되며, 그때부터 소녀는 여성이 된다.

 

P332 내가 이 젊은 여성들을 가르칠 때, 나는 그들을 문헌학자나 역사학자로 탈바꿈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뭐 하러 이런 것들을 가르친 걸까? 대부분은 결국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일상의 일 물론 그들이 가르치는 내 일상의 일 역시 맨 처음의 흥분이 가시고 난 다음부터는 전혀 즐겁지가 않았지만 을 처리하느라 바쁠 텐데 말이다.

è  캠벨은 37년간의 선생 노릇이 처음 몇 년을 제외하고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것은 밥벌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고, 그 시간 이외에는 자신의 성스러운 공간에서 암브로시아가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며 견디어 왔다는 것인가?

 

P332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즉 그들은 장차 가정을 꾸릴 것이고, 그들이 50대에 이르면 자녀들도 독립해서 나름의 가정을 꾸림으로써 그들도 혼자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의도는 어떻게 하면 인생 여정의 후반부 동안에 세계를 읽을 수 있는지 그에 관한 영적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되었다.

è  맙소사. 젊은 날에도 영적 메시지의 해독은 필요할 텐데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 역시 여자에게는 영웅의 여정 그 자체가 아니던가? 나는 여자를 위한 자기계발서는 남자와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삶은 남자와 달리 특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때문에 고려해야 하는 많은 것들(예를 들면 아이들, 건강, 관계)을 남자와 다르게 관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P334 남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여러분은 분리를 겪는다. 여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둘이 아닌, 포용하는 특성이 존재한다.

 

P338 나는 주요한 여성의 힘과 미덕이 바로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이기적 고립의 결여, 다시 말해 참여에의 포용이다. 우리는 모두의 존재 기반이기도 한 보편적 공통성에 대한 포용성이 바로 공감이다. 자발적 감정을 인식하고, 포용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힘이다.

 

P341 처녀의 유혹과 매력 마하야나의 이미지에서 표상된 여성의 형상 을 통해서 그는 마침내 우주의 아름다움의 니르바나적 은혜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 경전을 이해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경험한 바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깨달음을 얻었다.

 

P351 삶의 목표는 환희다.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P352 조이스는 이른바 적절한 예술부적절한 예술을 구분한다. ‘적절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실제로 예술에 속하는 바를 의미한다. 반면 부적절한 예술이라는 것은 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봉사하는 예술을 말한다. 적절한 예술은 정적인 것이며, 따라서 심미적으로 도취되는 반면, 부적절한 예술은 활동적이며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여러분을 욕망으로, 아니면 두려움과 혐오로 이끈다는 의미다.

 

P358 예술의 기능이란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소진 가능한 것을 열어젖힘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광휘 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과 똑 같은 광휘- 가 환히 비치게 하는 것이다.

 

P369 여러분이 설교대 위에 서 보지 않은 한, 여러분은 자신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거기 서 있으면,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다치게 할 수 없다. 여러분은 뱃머리에 선 것이며, 저 아래에 있는 바다의 표면을 가르고 나아가려는 참이다.

 

P371 학생은 그 기술을 분석하고 시도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체득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사람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P372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규칙들이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녹아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P327 내가 일찍이 받았던 것과 같은 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이들이 문필이나 편집이나 또는 그와 유사한 분야로 진출하겠다고 할 경우, 나는 그들이 아직 완전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책을 쓰는 동안 나는 편집 쪽 일을 도와줄 똑똑한 청년들을 고용한 바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독일어도 모르고 프랑스어도 모르고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내가 젊어서 받은 교육의 혜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 막대한 양의 공부가 (거대한 빙산처럼) 모조리 물속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물 위에 나온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è  이것이 바로 연구원 수련 과정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비록 수면 위에는 빙산의 일각 밖에는 보이지 않더라고 이를 지탱해주는 거대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 이 때문에 강도 높은 훈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P327 책 한 권을 쓰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è  이것이 바로 글쓰기에 대해서 배우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했지만 분명 망설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때가 바로 글쓰기에 대해 배운 지식과 글쓰기에 대한 신념으로 그 고개를 넘어야 할 순간일 것이다.  

 

P378 무용수들이 말년에 들어서 이루어야만 하는 커다란 전환이 있다. 춤이라는 것을 더 이상은 공연이나 전시와 같은 방식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마치 새의 울음소리처럼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 오로지 신체가 그런 범위까지만 춤을 추는 것이 좋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변화로부터 삶이 도출될 것이다.

 

P379 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다. 왜냐하면 예술을 사실 예배이기 때문이다.

 

P380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여러분을 궁지에 빠뜨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나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거야라고 말하고, 그 신념을 고수한다면,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은 혹시 직업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삶을 얻기는 할 것이며, 그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P380 운명의 수레바퀴에서는 지혜가 한가운데를 가리킨다. 젊음은 가장자리를 가리킨다.

 

P381 여러분이 직장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여러분의 고용주는 여러분을 더 높은 지위로 승진시키려 할 것이다. 여러분은 이전보다도 더 많은 것을 직업에 바쳐야 하며, 여러분은 더 많은 봉급을 받겠지만, 새로운 책임으로 인해 여러분의 자유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내 조언을 이렇다. 승진을 받아들이지 마라. 기본 수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위에 더 많은 무더기를 얹어 놓지는 마라. 왜냐하면 자신의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작업에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결국 대학 행정부에 소속되고, 그러면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소비하고 만다.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è  내가 그랬다. 사다리를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나의 시간은 고스란히 회사에 바쳐야 했고 어느 순간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소비하고 탈진해 버렸다. 나는 그 과정이 성공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이제 다시 그런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P382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건강 모두를 유지하면서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매일 몇 시간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여러분이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만큼 그 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시간씩 더 자신에게 하락하되, 단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할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한다.

è  밀폐 봉인된 은신처에서 그 누구의 침입도 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은 꼭 필요하다. 캠벨의 말대로 이 시간을 위한 에너지 역시 꼭 남겨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간을 에너지 충전을 위한 잠으로 보내게 될 테니까.  

 

P382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그러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간에 그 시간 동안은 거기 앉아 있어야 한다.

è  글은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답으로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쓴다.’ ‘엉덩이로 쓴다고 답한 이유가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필요한 시간 만큼 앉아서 써야 한다.

 

P383 창조적 모험은 항상 무모하다. 이는 심지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하는 가장 간단한 일에서도 그렇다. 괴테의 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작가의 슬럼프 이것은 작가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대한 거부나 마찬가지다 에 빠진 어느 젊은 작가에게 흥미로운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다. 실러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의 문제는 시적 요소가 그 스스로를 드러낼 기회조차 갖기 전에 비판적 요소를 끌어냈다는 점입니다.” 가령 시의 경우, 우리는 젊은 시절 내내 셰익스피어와 밀턴의 작품을 공부하고, 나중에 가서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짧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도대체 이게 뭐람.’

 

P383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P384 말 그대로 문을 계속 붙잡아 열어 두고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들이야 계속해서 나타나겠지만, 여러분이 일찍이 한번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하려면 그 문을 계속 열어 두어야 한다.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문장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비판을 미루어 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 놈을 죽여 버려라.

 

P385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P385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특정한 사람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더 이상의 관객이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크나큰 촉진제가 된다.

 

P386 흔히 말하는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두라는 것이다.

 

P386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라. 페가수스, 곧 시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P387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일을 비판의 두려움 없이 계속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움직일 것이다. 여러분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여러분은 기쁨을 느끼기 위해 1인치도 더 움직일 필요가 없다. 기억하라. 붓다의 세 번째 시험은 바로 다르마’, 즉 의무이며, 남들이 여러분에게 하라고 기대하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그것은 검열에 대한 두려움이다.

 

P389 여러분이 마을 안에 머무를 경우, 마을이 여러분을 돌봐 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모험을 떠날 경우, 시의적절한 때에 가는 것이 분별 있는 행동이다. 여러분이 삶에서 무엇엔가 뒤늦게야 압도된 경우라든지, 불이 켜졌을 때 이미 여러 가지 책임을 떠맡고 있을 경우라면, 이것은 진짜 문제가 된다.

è  천복은 일찍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날의 방황이 더 바람직한 것 같다. 책임질 것들이 잔뜩 있는 상황에서 나의 길을 찾겠다는 가장은 다소 무모해 보인다. 나 이외에 가장의 짐을 질 수 있는 남편이 있음에 감사하고 아직 나의 길을 찾기에 늦지 않기를 소망한다.

 

P390 간혹 예술가는 창조적으로 뛰어듦으로 매우 환희를 느끼게 되는데, 이를 여러분은 삶에서 유리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요가에서 문제 되는 것 가운데 하나다. 깨달음이 찾아오면, 삶에서 유리되고, 여러분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것은 예술가이지만 아직 자기 삶에서 그 깨달음을 적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P390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못할 것이다.

 

P399 성스러운 공간이란 다시 말해 사물이 그 어떤 실용적 용도도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곳이다. ‘그렇게 오는’ – ‘성스럽게 넘쳐나는’ – 어떤 것에 관한 명상을 통해, 즉각적인 실용적 용도가 없는 우리 자신의 측면이 앞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P404 일단 여러분이 상징을 이해하게 되면, 여러분 역시 어디에서나 상징을 볼 수 있으리라.

 

P404 “진정한 상징은 우리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가며, 원주의 다른 지점으로 데려가지는 않는다. 상징을 통해서 인간은 효과적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 다른 사람들,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 토머스 머튼

 

P410 “신을 예배하려는 자는 우선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할지니라.”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신이 주의를 집중하려는 신들에 상응하는 의식의 층위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에서 성부는 여러분의 주의가 집중되어야 하는 신이다. 여러분은 성자이고, 성부를 아는 자이다. 그리고 성령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표상한다.

 

P413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P425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들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P425 거대한 풍파 속에서도 신과 같은 침착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마치 디오니소스가 표범에 올라타고도 갈가리 찢기지 않은 것처럼

 

P426 신화는, 또는 달리 말해서, 신화와 종교는 위대한 시이며, 그와 같이 인식할 경우에는 십중팔구 사물과 사건을 관통해서 서로 완전하며 전체인 어떤 존재또는 영원의 편재를 가리킨다. 이런 기능에 있어서 모든 신화, 모든 위대한 시, 모든 신비주의적 전통은 합치한다.

 

P426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소년이 입문제의를 행할 때 이런 조언을 얻었다. “삶의 길을 가다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 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è  구렁이라는 것이 보기에는 넓어 보여도 넘고 나면 별거 아닌 경우가 많다. 구렁은 넘은 사람은 다른 구렁도 넘을 수 있지만 그 구렁에서 주저 앉은 사람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P427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주관적 의미에서 보자면 오래되고, 영원하고, 끊임없는 신화이며, 기억되는 과거나 투사되는 미래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이는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럴 것이다. 즉 특정한 민족들의 아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를 이 아름다운 행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 각자 자기 나름대로, 모두와 (경계 없이) 하나가 되어 의 중심으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P430 중요한 것은 신화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의 의미, 다시 말해서 신화를 통해 캠벨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P430 캠벨의 사상을 굳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힌두교-불교 전통에 근거한 일종의 범신론이라 할 수 있다.

 

P430 캠벨은 인생의 어떤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까지도, 가령 삶과 선뿐만 아니라 죽음과 악까지도 포용하고 인정하라고 역설한다.

 

P431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희열을 따라,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선한 것뿐만 아니라 더러운 것까지 포용하면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P433 나 역시 나만의 희열을 따르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노라고. 그러나 후회는 없노라고.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의 힘>에 이어 이 책도 캠벨의 저서가 아니다. 1983년 한 달 동안 에설린 연구소에서 열린 작은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을 다이앤 K. 오스본의 필기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기존의 캠벨 저서의 관련 인용을 발췌 수록한 선집이다. <신화의 힘>보다 인간 캠벨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이게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가 신화를 공부하며 어떻게 인생의 길을 찾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아쉬운 몇 가지가 눈에 들어 온다.

 

우선 책의 뒤 쪽에 배치된 역자의 말을 앞쪽으로 옮기면 좋겠다. 다이앤이 쓴 들어가는 말과 다소 겹치는 내용은 있지만 <신화와 인생 사용설명서>의 역할로 이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조언은 유용하다. 또한 그의 사상과 주요 주장에 대해서도 잘 요약을 해주어서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앞 쪽의 아포리즘들은 뒤 쪽에 배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역자의 말대로 아포리즘들이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3장의 내용을 읽고 아포리즘을 음미해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다.

 

또한 434-456페이지의 주석을 관련된 각 페이지에 넣어주면 좋겠다. 김용규의 <서양문화를 읽는 코드, >의 경우 각주를 관련 페이지에 넣어주어 찾기도 쉽고 내용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각 조각글들의 소제목을 달아 주면 좋겠다. 1,2,3장을 현세에서의 삶, 깨달음을 향한 길,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로 크게 나누기는 했지만 보다 잘게 쪼갠 테마도 눈에 들어온다. 여성에 대한 그의 견해도 흥미롭고, 노년의 양상, 결혼의 의미, 글쓰기에 대한 명상, 꿈의 의미도 되새김질할 만 하다.

 

내가 저자라면 캠벨 사상의 정수들을 쏙쏙 뽑아 실천 가이드를 만들겠다. 예를 들면 천복을 찾고 그 길을 가는 법, 나만의 성스러운 공간을 만드는 법,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법, 영적이고 조화로운 결혼생활을 하는 법, 책을 읽고 나의 생각으로 정리하는 법 등등. 사람들에게 그가 터득한 신화 속에서 인생의 길을 찾는 법을 보다 자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사람들도 천복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인상 깊은 예화]

염소처럼 살아가는 호랑이(p167-170) : 신화는 자기 얼굴을 인식하게끔 인도해 준다.

하나님만 사랑한 사탄(p213-214) : 한 때는 환희였으나 지금은 사랑의 고통이 된 영적 고통

니르바나에 도달을 설명하는 하인리히 침머의 일화(p288-293) : 뗏목을 버리고 모두 잊어라

코끼리와 하나님(p309-310) : 진리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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