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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5일 01시 24분 등록

<장자>

1 저자에 대하여: 장자

내가 슬퍼하고 운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모른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슬퍼하기를 멈췄다."         -부인의 상 앞에서-

 

BC 4세기에 활동한 중국 도가 초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본명은 장주(莊周). 그가 쓴 〈장자〉는 도가의 시조인 노자가 쓴 것으로 알려진 〈도덕경 道德經〉보다 더 분명하며 이해하기 쉽다. 장자의 사상은 중국불교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의 산수화와 시가(詩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장자는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다. 어느 날 장자는 자기가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잠을 깨니 내가 꿈을 꾸고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고 지금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장자는 이처럼 상식적인 사고 방식에 의문을 품고 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가르침 따위는 하잘것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노자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으로 돌아갈 것과 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장자의 생애

장자의 생애는 그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한대(漢代)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 ?~BC 85)은 그의 〈사기〉 열전에서 장자의 생애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전국시대 송()나라의 몽(지금의 허난 성) 상추 현)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주()이며, 고향에서 칠원(漆園)의 하급 관리를 지냈다. 그는 초()나라 위왕(威王 : ?~BC 327) 시대에 활동했으므로,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존경받는 유교사상가인 맹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열전에 의하면 장자의 가르침은 주로 노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만 장자가 다룬 주제가 훨씬 광범위하다고 한다. 장자는 자신의 문학적·철학의 천부적재능을 발휘하여 유가와 묵가(墨家 : 謙愛說을 주장한 묵자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을 반박했다. 또한 유가의 가르침을 반박한 어부·도척·거협 등을 썼으며, 상상으로 지어낸 〈외루허 畏累虛〉·〈항상자 亢桑子〉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장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저서 〈장자〉(〈남화진경 南華眞經〉이라고도 함)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장자〉는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4세기에 읽히던 〈장자〉는 53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그 이후 수많은 판본이 나왔으며 〈장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때문에 본래의 내용이 불분명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장자〉 내편(內篇 : 1~7) 7편은 대부분 장자 자신이 지은 것이 분명하지만, 외편(外篇 : 8~22)과 잡편(雜篇 : 23~33)은 그 자신이 쓴 것도 일부 있는 듯하나 대부분 위작(僞作)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장자〉의 내편과 외편에 나오는 일화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일화로 본 장자의 인품

장자는 이 일화 속에서 개인의 안락함이나 대중의 존경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예측불허의 괴팍한 성인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의복은 거칠고 남루했으며 신발은 떨어져나가지 않게 끈으로 발에 묶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비천하거나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친한 친구인 혜시가 부인의 상을 당한 장자를 조문하러 와서 보니, 장자는 돗자리에 앉아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장자에게 평생을 같이 살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의 죽음을 당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자,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내가 죽었을 때 내가 왜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아내에게는 애당초 생명도 형체도 기()도 없었다. 유와 무의 사이에서 기가 생겨났고, 기가 변형되어 형체가 되었으며, 형체가 다시 생명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이제 삶이 변하여 죽음이 되었으니 이는 춘하추동의 4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내는 지금 우주 안에 잠들어 있다. 내가 슬퍼하고 운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모른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슬퍼하기를 멈췄다."

장자의 임종에 즈음하여 제자들이 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려고 의논하고 있었다. 이것을 들은 장자는 "나는 천지로 관()을 삼고 일월(日月)로 연벽을, 성신으로 구슬을 삼으며 만물이 조상객이니 모든 것이 다 구비되었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고 말하면서 그 의논을 즉시 중단하게 했다. 이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 매장을 소홀히 하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고, 땅속에 있으면 땅속의 벌레와 개미의 밥이 된다. 까마귀와 솔개의 밥을 빼앗아 땅속의 벌레와 개미에게 준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위와 같은 장자의 기괴한 언동은 그의 숙명론에 대한 깨달음과 직결되어 있다. 장자에 의하면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 즉 도()로 통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나의 모습을 비춰준 장자

스페인 여행 후 생각보다 많은 후유증이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체력은 물론이고 시차에 적응이 되질 않아 낮에는 졸리고 밤에는 말똥말똥 눈이 떠져 의식의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고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낮 시간에 피곤하고, 예민해지고 짜증이 있는 대로 나서 당황스러웠다. 장자와 스페인은 자유와 변화라는 화두를 놓고 보았을 때 퍽이나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컨디션의 난조 때문인지 일맥상통하는 면이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건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며 앞으로는 빡센 장기여행을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게 된다.

장자를 읽으며 안달복달하거나 종종거리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닌 나의 못마땅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 모양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많이 가질수록 집착이 강해지고, 행복할수록 욕심이 많아진 나의 모습이 보였다. 스페인 여행 후 바닥난 체력과 예민해진 감성은 신경질의 극을 달렸고,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구나! 싶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1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예전의 나로 돌아옴을 느낀다. 수 없이 많은 나의 모습을 장자를 통해 다시 한번 비춰본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007 이렇게 신나는 책을 읽어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은 김치찌개의 맛을 모르고 한평생을 마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김치찌개가 제게 가장 맛있는 음식이듯이 한마디로 <장자>는 저에게 가장 신나는 책입니다.

>오강남씨와 같이 풀어나갈 장자가 기대된다.

007 중국 고전 번역가로 유명한 웨일리는 <장자>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재미있는 책이라고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009 그 후 일단 <장자>에 손을 대고 얼마 동안은, 먹는 둥 마는 둥, 자는 둥 마는 둥, 일주일 여섯 시간 강의하는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장자에서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꿈을 꾸면서도,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도 그야말로 앉으나 서나장자 생각뿐. 정말 신들린 듯했습니다.

>’미쳐야 미친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미치지 않고서는 어는 것에도 도달할 수 없고 이룰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미쳐본적이 있는가? 자유롭다는 것과 미친다는 것은 공통분모가 있다. 그 무엇에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몰입의 자유, 미치는 자유를 한번 느껴보고 싶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미치면 되지 않겠는가? 이 시간이 지나면 미치지 않고 흘려 보낸 지금이 얼마나 아쉽고 화가 날까? 알면서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어리석고 헛똑똑이라는 증거이다. 실천하지 않는 앎이 무슨 소용인가? 피터 드러커박사도 행하는 것이 진정한 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017 일반적으로 도교라 하는 것은, 엄격하게 따져, ‘도가 사상도교 신앙으로 양분할 수 있다. 도가 사상이 인간의 내면적 초월과 자유를 추구한 것이라면, 도교 신앙은 주로 육체의 장생불사를 우선으로 생각한 사상이다. 그래서 후대에 와서 그것을 흔히 노장 사상이라고도 한다.

018~019 장자의 도가 사상이 중국 철학사에서 문학, 예술 등에 큰 여향을 끼쳤지만, 특히 당대에 와서 그것은 선 불교를 꽃피우는 직접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선승들, 특히 9세기 임제야말로 장자의 진정한 계승자라 여겨질 정도이다.

020 아무튼 처음에는 노자 철학과 장자 철학이 따로 발전해 오다가 기원전 2세기경에 합쳐서 한 학파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나온 <회남자>에 처음으로 노장이라고 합쳐서 한 철학 체계로 다루었다

021~022 그러면 이 둘 사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기본적 차이점들은 무엇인가?

첫째, 노자의 <도덕경>이 주로 간략한 어록이나 시나 아름다운 산문 형식인 데 반하여, <장자>는 주로 이야기 형식이다. (중략) 장자는 투철한 눈매로, 때로는 크게 껄껄 웃고,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모습을 지녔다.

둘째, 노자의 <도덕경>은 어느 면에서 정치 지도자를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 참여를 염두에 두었다. (중략) 장자의 일차적 관심은 무엇보다 개인이 내적으로 성장하고 깨닫기 위해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자가 도가적 정치실현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장자는 도가적 의 완성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셋째, 조금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노자가 도를 주로 생성 변화의 근원으로 파악하고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긍극적인 귀착점이라고 강조한 데 반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근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변화에 몸을 맡겨 함께 흐르거나 그대로 변하기를 더욱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넷째, 노자도 그 당시에 많이 알려진 경구나 속담을 가끔 인용하였지만 대체로 자기의 생각을 홀로 개진한 데 반하여, 장자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들, 특히 이론학파들과 부단히 대화하고 대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첨예하게 전개하였다.

022~023 그러면 장자가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무엇을 가르쳐 주려 하는가? (중략) 무엇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우리가 떠받드는 상식적인 고정 관념, 이분법적 사고 방식, 거기에 기초를 둔 맹목적인 가치관, 윤리관, 종교관 등을 우리에게 스스로 깊이 살펴보게 해서 이런 것들의 내재적 모순과 불합리함을 발견해 없애도록 도와 줄 뿐이다. 우리 얼굴을 씻어 주고 단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거울을 들어 주는 셈이다. 좀 어렵게 말하면 <장자>는 한 가지 체계적인 인식 내용을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일깨움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깨달을 때, 우리는 부자연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풀려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인위적이고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런 모든 행동을 초극한 상태, 분별지, 소지, 차별지 등 모든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넘어선 상태, 야심과 욕망과 우월감 등 일체의 자의식을 극복한 상태, 이런 빈 마음의 상태에서 도와 하나가 되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신나는 삶, 힘있는 삶, 풍요한 삶, 활력이 넘치는 삶, 절대적인 자유의 삶으로 이끄는 장자의 초청을 발견한다.

1편 자유롭게 노닐다

025 <장자> 1편은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닐다라는 제목이 보여 주듯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고대 문헌에서는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맨 앞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편에서 말하는 절대 자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변화초월’. 이것이 <장자> 전체의 주제이며 가르침의 궁극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장자한테 끌리나보다. 내가 좋아하는 자유와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고

026 ‘화이위조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장자>의 주제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변화의 가능성과 그 실현이다.

027 여기서 붕새는 이런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을, 그리고 그 거침없는 비상은 이런 변화변혁을 이룬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초월을 상징한다. <장자> 첫머리에 이처럼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실존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는 인간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다. 속이 후련하다. (중략)

첫째, 이런 엄청난 변화가 자연과 동떨어진 어떤 초자연적 힘이나 장기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거나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날듯이 모두 자연 안에서, 그것에 순응하고 힘입어, 가능했다는 것이다. 초자연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래적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발현해서 생긴 일임을 말한 셈이다.

둘째, 여기 나오는 알, 물고기, 붕새가 겉으로 엄청나게 달라 보이는 것들이지만 본질을 보면 따로 독립한 사물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물고기나 붕새도 본래는 알이었다. 그렇게 큰 것들도 조그만 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씨알을 품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무한한 가능성을 자각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나에게 있는 씨를 어떻게 현실화 할 것인가? 첫째는 나를 믿어야 할 것이고, 둘째는 믿음에 꾸준히라는 노력을 의심 없이 가하면 될 터인데….의지의 부족인가? 동기부여의 부족인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스페인을 갔다 와서 나를 한발 떨어져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투덜거리는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계획하고 실천하고 흥분되고 즐거운 모습과 어울린다.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긍정적으로 살고 싶다.

028 3. <저 아래 땅 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고, 티끌이 날고, 생물들이 서로 숨을 불어주고, 하늘은 푸른데, 그것이 하늘의 본래 색깔입니까? 끝없이 멀기 때문에 프르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까? 붕새가 높이 떠서 내려다보니까 이처럼 까마득하고 푸르게 보일 뿐입니다.

4. 괸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물 한 잔을 방바닥 우묵한 곳에 부으면 그 위에 검불은 띄울 수 있지만, 잔을 얹으면 바닥에 닿아 버리고 맙니다. 물이 얕은데 배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거침이 없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매미와 새끼 비둘기

031 가까운 숲으로 놀러 가는 사람은 세 끼 먹을 것만 가지고 가도 돌아올 때까지 배고픈 줄 모르지만,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하룻밤 지낼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중략) 조금 아는 것으로 많이 아는 것을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으로 긴 삶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가? 내 눈에 들어오는 시야가 전부인양 착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소견을 얼마나 무시하고 하찮게 여겼던가? 누군가에는 내가 매미고 비둘기 일텐데

032 아침에 잠깐 났다가 시드는 버섯은 저녁과 새벽을 알 수 없습니다. 여름 한철 사는 메뚜기는 봄과 가을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짧은 삶입니다.

>나의 삶도 누군가에게는 짧은 삶일터인데….짧은 삶도 충실하게 살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구나!

033 그저 악착같이 돈이나 벌어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살겠다고 하는 이 건전한 상식외에 무엇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부한다. 우리야말로 건실한 현실주의자들이라고.

>나도 한때 이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지. 나의 경제력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 돈이 무서운지 모를 때사람은 무엇이든 겪어봐야 한다니까. 지금은 경제력과 삶의 질을 어느 선에서 만족하고 주변과 타협해야하는지 고민중.

038~039 그러므로 지인은 자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신인은 공적에 무관하고, 성인은 명예를 탐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이르지 못했구나!

039~040 첫째는 아직 변하지 못한 상식인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껏해야 과장, 군수, 장관, 국무총리 따위 사다리를 하나하나 오르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이를 향해 일로 매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렇게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일을 모르고 인간의 한계 밖을 넘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므로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송영자 같은 사람이다. 송영자는 송나라의 사상가로 <맹자>, <순자>에도 등장한 인물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로, 전쟁의 근본 원인이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비난을 싫어하는 속물 근성때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런 것을 초월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자신이 칭찬이나 비난에 육중한 바위처럼움직이지 않고 영광과 치욕을 분별해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초연한 경지에 도달했다.

셋째는 열자와 같은 사람이다. 열자는 세상사에 초연할 뿐 아니라, 바람을 타고 아무데나 마음대로 떠다니는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한 절대 자유의 경지는 아니다. 자유자재로 노닐다가 15일이면 돌아왔는데 그것은 15일마다 불어오는 새 바람을 기다려야하기 때문이었다.

넷째, 사람이 열자처럼 살기도 어렵지만, <장자>의 궁극적 이상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돼 무한한 경지에 노니는 절대 자유의 단계이다. 아무것에도 기대되 않는완전한 자유를 민끽하고 구가하는 무애의 삶이다.

이렇게 최종의 절대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바로 구경에 이른지인이요, 신인이요, 성인이다.

요 임금이 나라를 허유에게

042 “해나 달이 떴는데도 켜 놓은 관솔불 빛은 헛된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께서 위에 오르셔야 세상이 바르게 될 터인데, 제가 아직 임금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있으니, 청컨대 세상을 맡아 주십시오.”

043~044 어느 주석가는 요 임금이 나라를 다스려 쌓은 공을 허유에게 돌리려 했다는 뜻에서 망공한 듯하지만, 자신이 한 일을 알리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망명하지 못했고, 한편 허유는 임금의 자리라는 명예를 탐하지 않아서 망명에 이르렀지만, 그 자리를 거절하고 한 몸의 안위에 집착해 망기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했다.

막고야산의 신인

046 ‘미쳤다는 것이, 자유롭게 노니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 보통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고, 접여 자신이 미친 척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전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장자>는 여기서도 이 미친 사람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048 신인은 그야말로 무공한 사람, 공로 운운하는 데서 풀려난 사람이다. 따라서 요.순 임금처럼 한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존경과 칭찬을 받는 사람들은 이런 신인에 비하면 그 몸에 낀 때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신인은 못되더라도 요.순 임금과 같은 인격을 갖추었으면.

송나라 모자 장수와 요 임금

050 결국 요 임금이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은 이 신인들의 함이 없는 함때문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쓸모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 신인들이야말로 쓸모 없음의 더욱 큰 쓸모라는 진리를 실증해 준다.

큰 박과 손 트는 데 쓰는 약

052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한 가지인데, 한 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고, 다른 쪽은 무명 빠는 일 밖에 못했으니, 똑 같은 것을 가지고 쓰기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게 아닌가? 자네는 어찌하여 다섯 섬들이 박으로 큰 술통을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놓고 즐길 생각을 못 하고, 깊이가 너무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만 걱정했단 말인가? 자네는 아직도 작은 <일만 생각하는> ‘쑥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네 그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고지식해지고 융통성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너무 작은 마음에 매달려 큰 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나의 쓰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웅크리고 앉아 있는 시간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쓸모 없는 나무?

055 아무튼 혜자의 본질론적 견해에 입각한 유용성 시비에 대해 장자는 유용성을 여러 가지 시각과 차원에서 봐야지 어느 한 쪽의 어느 한 차원에서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물은 쓰기에 따라 쓸모 있기도 하고 쓸모 없기도 하다는 것이다. 장자의 이런 생각을 비본질론적 견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속에 이미 형성된 쓸모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쓸모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모든 나무는 기둥감이어야 한다거나, 굽은 나무는 땔감으로 쓸데가 없다고 하는 고정 관념을 벗으면, 어느 나무든 쓰임새는 무한하다. (중략) 이런 비본질적 견해를 다른 말로 해서 시각주의적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나도 장자의 비본질적 견해 즉 시각주의적 접근을 갖고 싶다. 어쩌면 처음부터 본질적 견해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을 뿐이고 그것으로 인해 나의 시각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056 “동네 안에 늙은 나무는 왜 서 있습니까? 사람들이 그늘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도 하지만 또 쉬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 살림도 하지만 상상의 세계도 갈구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해묵은 밤나무나 느티나무 가지의 그늘입니다…..젋은이들의 도시의 맘몬의 졸병으로 끌려가는 이 때에 느티나무가 찍히는 날 앉아서 쉴 그늘을 잃은 마을의 늙은 혼은 두견새가 되어 뒷동산으로 날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늙은 나무가 찍히고 거기 깃들었던 혼은 산으로 도망갈 때, 마음에 남는 것은 주고받기와 시비와 깔고앉음과 깔리움 밖에 있을 것이 없습니다.

057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생명을 하루하루 먹고 사는데 써 버리고 말 것이냐 더 원대한 일을 이루는 데 사용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암시했다고 볼 수 없을까? (중략) 매미나 새끼 비둘기, 메추라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가는 붕을 비웃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시야를 넓혀 큰 세계를 보고, 사물의 더 크고 참된 쓸모를 찾으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 초대에 응해 계속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자.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긴 하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꿈으로 한 발, 더 원대한 일로 한 발 나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일생을 밥과의 전쟁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처럼 비참한 것이 어디 있을까? 나는 원대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원대하지 않더라도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2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

이 편의 주제는 우리가 우리의 실존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립의 세계에서 대립을 초월한 하나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의 세계, 실재의 세계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사물의 한쪽만 보는 우리의 상식적, 분석적,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에서 사물의 진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예지와 직관과 통찰을 체득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060 제목을 어떻게 풀든 논의의 초점은 제에 있다. 제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로 한다고 하여 각각 다른 사물을 일률적으로 획일화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때의 하나는 다양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화와 일치를 의미한다. (중략) 동일한 것이 보기에 따라 크기도 하고 동시에 작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비를 넘어서는 세계, 제일, 제동, 여일의 세계, 서양의 중세 사상가 쿠자누스가 말한 양극의 조화가 이루어진 세계,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눈에 씌웠던 눈가리개를 벗긴 셈이다. 이럴 때 우리는 숙명으로 뒤집어쓰고 있던 제약의 굴레를 벗고, 붕새처럼 구만 리 창공을 날아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붕새의 자유를 나도 누리고 싶다. 양극의 조화를 나도 누리고 싶다. 얼마나 멋진 철학적 통찰인가?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062 북과 남이 대조를 이루고, 물고기와 사람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둘 다 변화를 이야기한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다만 그 변화를 제1편에서는 북명의 물고기가 붕새가 되는 외형적 변모로 상징했는데 제2편에서는 남곽의 자기가 그것을 내가 나를 잃었다고 하는 내면적 변혁으로 표현한 것이 다르다.

062~063 여기 이 오상아 <장자>의 핵심 개념에 속한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려, 내가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중략) 우리의 비본래적인 자아, 작은 자아에서 풀려나 본래의 자아, 큰 자아가 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런 변화를 의식 상태로 설명하면, 일상의 이분법적 의식 세계에서 벗어나 초이분법적 의식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꼭 막힌 자의식에서 탁트인 우주 의식으로 변한 것이다. 근본적인 의식 변혁으로, 희랍어의 메타노이아이다. 뒤에 나오는 마음 굶김이나, ‘앉아서 잊어버림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다.

063 불교에서는, 명상을 할 때 몸과 마음이 완전히 정지한 상태를 유지하라고 가르치는데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사마타라고 한다. 그러면 거기서 사물에 대한 직관과 통찰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산스크리트어로 비파샤나라고 한다. 마음과 몸이 완전히 조용하게 가라앉은 것이 정이고, 그렇게 되어 눈이 밝아진 것이 혜이므로 정혜라고도 한다. 이른바 삼매와 반야이다. 여기서도 이것과 비슷한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064 아무튼 자기를 잃어버리고 비운 상태, 이른바 상아, 무아, 망아, 망기라는 자기 초월의 경지에 들어가야 비로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수 인식 능력의 활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물론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곧 일체의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차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얻는 것이다.

하늘의 퉁소 소리

067~068 마치 모든 실체에 형태를 주지만 그 자체는 형태가 없는 형태’, 모든 존재를 있게 하지만 그 자체는 존재가 아닌 존재와 같이 여기서도 하늘의 소리란 모든 소리를 나게 하지만 그 자체로는 소리가 아닌 소리이다.

068 첫째, 우리는 모두 제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소리는 결국 우리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게 하는 하늘의 힘, 도의 힘이 내는 퉁소 소리인 셈이다.

둘째,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하늘의 소리는 다른 소리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소리들 속에 있는 소리, 들리지 않는 소리라는 것이다. 좀 전문적인 용어로 하면 하늘의 소리는 초월하며 내재하는 무엇이요, 모든 것과 하나이면서 다른 것이요, 다르면서도 하나인 무엇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소리와 땅의 다양한 소리를 들을 때 그 속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는 우리 몸의 귀로 들을 수 없다. 그것은 남곽자기처럼 바로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새롭게 열리는 영적인 귀로만 들을 수 있으므로,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들어 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우리 자신을 잃어 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닐까?

071 시비를 가리며 논쟁하고, 악착같이 이기려 하고, 그러면서 쓸데없는 데 기력을 다 쓰느라 가을 낙엽과 겨울 나무처럼 쇠잔해져 소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가끔 이런 부정의 기운이 나를 지배할 때가 있다. 내 안의 에너지가 겨울 나무처럼 쇠잔해지는 것을 몸소 실감한다. 그런 기분이 들때면 어떻게든 떨쳐버릴려고 노력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밝음, 긍정성을 지향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잘 조절이 되지 않을 때가 아주 가끔 있는데 참으로 힘든 시간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을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어떻게 그 부정의 기운으로 살아 갈 수 있는지가….내가 만약 긍정적이지 않았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지 못하고 과거에 대한 분노로 얽매여 살았다면 나는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075 마음이 몸보다 나은가? ‘몸도 쇠하고 마음도 함께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기에 마음이라고 나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몸은 약한데 마음은 건강하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예전에는 어떠한 상황에도 불굴의 의지가 존재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서로가 영향을 많이 주고 받는 듯 하다. 조금만 몸이 아파도 마음이 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지면 안 아프던 몸도 아픈 것 처럼 비명을 질러댄다. 서로가 완전하게 컨트롤이 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있다면 신의 경지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77 이런 분별심, 성심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비를 따지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정신적 병폐 때문에 나의 참주인’, 나의 참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078~079 도는 자질구레한 이룸에 가리고, 참말은 현란한 말장난에 가리었다. 그리하여 유가와 묵가가 시비를 다투어, 한 쪽에서 옳다 하면 다른 쪽에서 그르다 하고, 한쪽에서 그르다 하면 다른 쪽에서 옳다 하는 것이다. 이들이 그르다 하는 것을 옳다하고, 이들이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들의 옳고 그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밝음이 있어야 한다.

079~080 모두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처럼 자기가 만져 본 일방적이고 부분적인 단견을 내세워 서로 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코끼리가 구렁이처럼 생겼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눈을 뜨고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눈을 떠야 구렁이 같은 면과 기둥 같은 면을 다 본다. 이를 일러 밝음을 얻음이라 한다.

>그 동안 내가 했던 많은 말들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내가 본 세상이, 내가 느낀 세상이, 내가 들은 세상이 다 라고 생각하고 얼마나 많은 조언을 쏟아 내었던가? 그들은 공감가지 않는 나의 말들이 소음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 말을 줄이고 말에 신중해야 함을 더 뼈저리게 느낀다.

92~93 ‘하늘의 고름이란, 의인의 밭에도 고르게 비를 내리는 하늘의 공정함이고, ‘두 길을 걸음이란 시비 등 이분의 세계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경지이다. 이런 것은 역시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인시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중에 원숭이에게 돌을 던지거나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재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두 원숭이들이 아닌가.

>남의 모습 함부로 비웃으면 안 된다. 비웃게 되는 연유 또한 대부분이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남을 보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비춰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21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미혹 아닐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어려서 집을 잃고 돌아갈 줄 모름과 같은 것 아닐까? (중략) 죽은 사람들도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126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지. 심지어 꿈속에서 해몽도 하니까. 깨어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 드디어 크게 깨어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바탕의 큰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항상 깨어 있는 줄 알고, 주제넘게도 그러함을 분명히 아는 체하지.

>꿈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시간도 짧다. 모든 것이 관망이 된다. 꿈처럼 인생을 살면 안될까?

134 옛날부터 장자를 몽접주인이라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나비꿈 선생이다.

137 궁극적으로 이런 세계는 이 편 서두에서 말한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진정으로 체득할 수 있는 세계요, 이런 세계를 체득할 때 쓸데없는 아집, 편견, 국지주의, 자기 중심주의, 일방적 단견, 오만 등에서 풀려나 관용과 아량과 트임과 조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 세계에서 노닐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가 이렇게 길고 어려운 논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한 결론인 셈이다.

3편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

139 이렇게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식욕, 자존심, 자기중심주의 같은 일체의 인위적,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 자연의 운행과 그 리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생명력이 활성화하고 극대화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이른바 기대지 않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북돋는 일’,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153~154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 <희랍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거기서도 소위 성공한 지성인 사업가로 등장하는 상전이 불학무식인 하인 조르바의 신나는 삶, 거침이 없는 삶에 감복하여 결국 춤추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으로 끝이 난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어떤 것일까? 전통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다.

>객관적으로 성공하는 삶을 살 것인가? 즐기는 삶을 살 것인가? 꼭 성공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나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후자를 선택하겠다. 남들 눈에 성공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의 사회적 욕망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부와 명예와 지위를 다 가졌으면서도 즐길 줄 모르는 인생이라면 그것만큼 비참한 인생은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부와 명예의 노예와 같은 삶이다. 즐길 줄 아는 삶. 그렇다면 나는 진정 즐길 줄 아는가? 아직 No. 스페인에서 나의 즐김의 능력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서나 즐길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투덜거리는 사람에 불과했다. 나는 아직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인 듯 하다.

160 어쩌다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어쩌다가 세상을 떠난 것도 순리이기 때문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님의 매닮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했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진정으로 이리 보낼 수 있는 내공이 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4편 사람 사는 세상

167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물론 마음을 굶기는 것으로 사회나 정치에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비우고 도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라는 것이다. 이 편은 장자가 세상과 완전히 무관하게 사는 은둔주의나 도피주의를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참여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는 곳이기도 하다.

174~175 결국 아무리 인류애니, 애국애족이니 하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조금이라도 자기의 이기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를 냉철히 살펴보고, 속으로 조금이라도 꿀리는 것이 있으면, 이런 일이 본인에게나 남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바울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남만을 생각하는 아가페 같은>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다.

>지당한 말씀. 공익을 포장지로 내세웠지만 훤히 보이는 그 속을 어찌 감출꼬.

181~182 이렇게 새로운 의식에 도달하는 길이 무엇인가? 공자는 우선 마음을 하나로 모은 다음, 귀 대신 마음으로 듣고, 다음엔 기로 들으라고 했다.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대상을 인지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 모든 것을 수용하니 이렇게 텅 빈 기로 사물을 대하면 그 빈 곳에 도가 들어온다. 이렇게 도가 들어오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 마음을 굶기는 것, ‘심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 작용이나 인식 작용을 초월하여 빈 마음, 새로운 마음으로 도와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189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성공을 바라지 않고 하는 일은 드물다. 성공하지 못하면 반드시 사람에게 괴로움을 당할 것이고, 성공하면 음양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을 사람은 덕을 가진 사람뿐이라.

 

5편 덕이 가득함의 표시

223~224 노자의 <도덕경>이 도를 어머니로 표현하는 등 여성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뜻에서 현재 여성 운동가들의 성서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장자>는 장애인이 도를 실현하고 덕을 발휘하는데 아무 장애가 없다는 것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실증했다는 점에서 장애인들의 성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229 마음의 문제라면 그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인가? 공자는 왕태의 마음이 명경지수와 같다고 했다. 남의 눈치나 칭찬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실현만을 위해’, 차분하고 조용히 정진했을 뿐인데도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이런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훌륭한 성인이라면 승천이라도 할 수 있을 터이니 그러기 전에 한 번이라도 만나야겠다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235 지체 높은 재상 정자산이 외발이 전과자 신도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지금까지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 달라고 비는 처지가 되었다. 정자산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사람을 오로지 외모로만 판단하는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한다.

>나의 부끄러움도 묻어난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겠지만, 그 사람의 지위와 외모로 판단하는 은연중의 습관은 언제쯤 없어질까? 이를 극복하고 싶다.

246 진정한 사람됨은 몸이 아니라 그 몸을 움직이는 무엇,’ 때묻지 않은 본연의 인간성이라는 것이다. 애태타는 비록 외모가 지극히 흉하지만 그 본바탕에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이 준 본래의 재질, 본래의 바탕을 일러 라고 하고 이를 온전히 지키는 것을 재전이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인간답게 하는 기본 요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고, 살아 있으나 죽은 삶과 같다는 것이다.

>애태타….매력적이구나!

6편 큰 스승

263 우리 보통 인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견해에 사로 잡혀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우리 일생을 통해, 이런 저런 선입견에 한번 길들면 그것을 만고불변하는 진리처럼 떠받들고 산다. 말하자면 세뇌된 상태이면서도, 이런 상태를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살아가는 셈이다. 이러한 우리의 무지와 착각과 오류를 지적해서 우리를 일깨워 줄 사람이 누구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진인이 등장한다.

284~285 아무튼, 성인의 도란 성인의 재질이 있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 역시 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신중하게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그는 세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이레가 지나자 사물을 잊읍디다. 사물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아흐레가 지나자 삶을 잊게 되었습니다. 삶을 잊게 되자 그는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를 보게 되자 과거와 현재가 없어졌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없어지자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88 삶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삶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합니다. 사물을 대할 때, 보내지 않는 것이 없고,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며, 허물어뜨리지 않는 것이 없고, 이루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를 일러 어지러움 속의 평온이라 합니다. 어지러움 속에 평온이란 어지러움이 지난 다음에는 온전한 이룸이 있다는 뜻입니다.

300 우리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에 안달하지 않으려면, 여기에 나오는 도나 조물자,’  혹은 조화자가 결국은 만사를 선한 길로 이끌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형이상학적 믿음이 있을 때 삶이 그만큼 듬직해지지 않을까?

>안달하는 삶이 싫다. 작은 일에도 전전긍긍, 안달복달 하는 모습이 싫으면서도 어느 순간엔가 보면 나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대상이 다를 뿐이다. 조물자, 조화자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302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입니까? 바른 행동은 전혀 없고, 자기들의 외모도 잊어버린 채 주검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입니까?”

>나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누군가의 죽음이거늘이것에 초연해지지 않으면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안달복달하는 삶을 살게 될까? 인생을 하늘의 시간으로 본다면 일찍 죽는 것도 찰나의 삶이요, 천수를 누리는 것도 찰나의 삶이거늘, 100년도 못사는 삶으로 갖은 욕심을 부리며 자연을 불안해 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내가 욕심이 많이 지나쳤구나! 역시 욕심은 가질수록 번뇌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알겠다.

7편 황제와 임금의 자격

321 참된 지도자는 그런 인위를 넘어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얻은 그 감화력으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알듯 모를 듯 이끌어 가는, 노자식 무위의 정치, 가만 놓아둠의 정치, 무심의 정치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최소한으로 다스리는 것이 최선의 다스림이라는 원칙에서 궁극적으로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사람이다. 이런 다스림은 실재의 세계를 그대로 체득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는 뜻에서 플라톤이 그의 <공화국>에서 말한 철인왕을 연상케 한다.

>정말 이런 지도자가 현실에서 가능할까? 소규모라면 몰라도 한 국가를 통치하면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323 왕예가 모른다고 한 것은 왕예야말로 정말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도덕경> 56장에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예로부터 궁극 진리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통감하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진리에 대해 이것이다’ ‘저것이다’ ‘여기있다’ ‘저기있다함부로 떠드는 사람은 그것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셈이다. 진리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면서 혼자만 안다고 착각하는 일이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다.

324 이처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진리의 전달 수단으로서 말의 불완정성을 절감하기 때문에 말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또 부끄럽구나. 그렇지 말의 한계를 많이 느끼며 살았다. 그럼 무엇으로 진리를 전달 할 것인가?

326 성인이 다스리는 것이 어디 밖을 다스리는 일인가? 먼저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나서 행동하고 일이 제대로 되는가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새는 하늘 높이 날아야 화살을 피하고, 들쥐는 사당 언덕 밑을 깊이 파고들어야 구멍에 피운 연기 때문에 밖으로 튀어나와 잡히거나 파헤쳐져 잡힐 걱정에서 벗어난다. 자네는 오히려 이 두 미물보다 못하군.”

327 이렇게 겉으로 단속하고 규제하여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기더러 산을 지고 가지 바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중략) 지도자는 먼저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그 감화 아래서 모두가 저절로 되어 가도록 하고, 그렇게 잘 되어 가는 것만 확인하는 정도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의 정치,’ ‘놓아둠의 다스림이다.

328 ‘무명인은 망명하여 이름 같은 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무관의 신사’. 세상을 초탈한 성인이나 지인이다.

>여지껏 나를 지켜준 것은 나의 이름이었지만, 지금 나의 이름은 자유로움에 걸림돌이 된다. 만약에 이름을 바꾸거나 이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바뀔 수 있을까?

329~330 (양자거와 노자의 대화) “여기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메아리처럼 민첩하고, 기둥처럼 든든하고, 사물을 뚫어 보고, 머리가 명석합니다. 그러면서도 도를 배우는 데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히 명철한 왕에 비견할 만합니까?”

성인과 비긴다면 이런 사람은 고된 종이요, 일에 얽매인 재주꾼에 불과하오. 몸을 지치게 하고, 마음을 졸일 뿐이지. 호랑이나 표범의 무늬는 사냥꾼을 끌어들이고, 재주 부리는 원숭이나 너구리 잡는 개는 목줄에 매이게 되는 것. 이런 사람을 어찌 명철한 왕에 비길 수 있다는 건가?”

명철한 왕의 다스림이란,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그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만물에 미쳐도 백성들이 그에게 굳이 기대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한 것으로 알고 기뻐하기 때문이라. 이런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서 있고, 없음의 세계에 노니는 것이다.”

331 참된 지도자는 이슬처럼 공기처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백성들 뒤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다스린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 이름을 들먹이지 않고만사 이렇게 잘 되는 것이 마치 자기들 스스로 잘해서 그런 줄 알고 기뻐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342 아직 배움을 시작하지도 못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사실 자체가 배움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열자는 이제 요상스런 신통력에 홀리지 않고 참된 도의 길에 들어서서 실상을 찾는 공부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무속의 경지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거울 같은 마음

344 이름에 매이지 말고,

꾀의 차고 되지 말고,

쓸데없는 일 떠맡지 말고,

앎의 주인 되지 마십시오.

345 (지도자의 자격과 지녀야 할 마음) 첫째, 이름에 매이지 말라. 명함을 크게 박아 가지고 다니며 거들먹거리거나 자기 선전에 골몰하지 말라. 둘째, 꾀의 창고가 되지 말라. 모략과 지략, 음모를 꾀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버리라. 소위 ‘Think Tank’라는 것도 조심할 일이다. 밀실 정치, 요정 정치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셋째, 쓸데없는 일 떠맡지 말라. 이것저것 감투 쓰지 말고 공적 위주로 무슨 트로젝트다 이벤트다 떠벌리지 말라. ‘무위의 위를 염두에 두라. 넷째, ‘앎의 주인이 되지 말라. 잔꾀나 지모의 주인이 돼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부정적인 방법을 버리고 무궁한 도, 사물의 근본을 체득하고, 없음의 경지, 비움의 경지에서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을 하라. 이것이 바로 마음을 거울처럼 한다는 뜻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외편.잡편에서 중요한 구절들

358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은 위대한 앎으로, 모든 참된 앎의 출발점이다.

362 이렇게 자기 것만을 유일한 무엇이라 믿는 것까지는 자유이지만, 그런 잘못된 확신 때문에 드넓은 바다처럼 훌륭하고 신나는 세계에 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구나 자기의 것을 최고라고 생각하고 딴 사람들을 보고 자꾸 들어와 보라고 강요하는 열성은 딴 사람들을 더 없이 성가시게 한다.

>나의 예전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는구나!

367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사에서도 상대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데 쓸데없이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를 해치거나 불리하게 하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속에 잠재한 열등감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수가 많다.

>그 사람의 마음은 분명히 지옥이리라. 하지만 본인만 지옥에 살고 있는지 모르리라.

384 부부고 사랑한다고 주문 외우듯 외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실상 상대방을 아직 나와 떨어진 개체로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방을 완전히 잊지 못하는 것은 아직 꼭 맞지 않았기 때문이란 뜻인가?

>그런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와 떨어진 개체로 의식한다고 해서 그게 사랑은 아니지 않은가? 나와 떨어진 개체로 존중해주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 아닐까?

387 긍극적으로는 쓸모가 있거나 없거나 어느 한쪽에도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쓸모 있고 없고를 떠나 허심, 무심의 경지, 집착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 자유자재 한 경지가 궁극의 자리라는 것이다.

391 훌륭하면서 그리고 훌륭한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요, 이렇게 훌륭할 때 어디 가서라도 환영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393 참된 예술가는 내면적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이기에 궁극적으로 인습이나 통상적 형식에 전혀 구애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401~402 아무튼 친한 사람끼리 판에 박은 듯한 격식을 넘어설 때 비로소 예가 완성된다는 것을 말했다는 데 별 차이가 없다. (중략) 지금까지 계속 강조해 온 바와 같이 인간 관계나 윤리적 영역에서도 분별, 구별, 이분, 이원, 대립, 차별의 차원을 초월해야 한다는 말이다.

415~416 “내게는 하늘과 땅이 안팎 널이요, 해와 달이 한 쌍 옥이요, 별과 별자리가 둥근 구슬 이지러진 구슬이요, 온갖 것들이 다 장례 선물이다. 내 장례를 위해 이처럼 모든 것이 갖추어져 모자라는 것이 없거늘 이에 무엇을 더 한다는 말인가?” (중략)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되고, 땅 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되거늘 어찌 한쪽 것을 빼앗아 딴 쪽에다 주어 한쪽 편만 들려 하는가?”

죽음과 삶을 초탈한 사람이 죽은 후 장사 지내는 일 같은 것을 신경 쓰겠느냐는 가르침으로 장자 이야기를 끝맺는 셈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장자….멋지다.

3 내가 저자라면

오강남씨의 두 번째 책이다. <도덕경>을 워낙 재미있게 읽은 터라 장자에 대한 기대도 컸던 듯 하다. 하지만 장자는 스케일이 너무 커서 그런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었으며 <도덕경> <장자>의 구분이 애매모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장자를 쓰기 위해 매 순간을 몰입한 오강남씨의 노력과 태도는 실로 부러웠다. 나는 무엇을 위해, 무엇에 대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미칠 수 있을 것인데, 나는 무엇에 미칠고.

<목차와 뼈대에 대하여>

독자들에게
『장자』를 읽기 전에


1편 자유롭게 노닐다(逍遙遊
)
2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 (齊物論
)
3편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養生主
)
4편 사람 사는 세상(人間世
)
5편 덕이 가득함의 표시(德充符
)
6편 큰 스승(大宗師
)
7편 황제와 임금의 자격(應帝王
)

부록| 외면·잡편에서 중요한 구절들

<좋았던 장과 절>

역시 1편이 가장 신선하고 재미있고 좋았다.

025 <장자> 1편은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닐다라는 제목이 보여 주듯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고대 문헌에서는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맨 앞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편에서 말하는 절대 자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변화초월’. 이것이 <장자> 전체의 주제이며 가르침의 궁극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장자한테 끌리나보다. 내가 좋아하는 자유와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027 여기서 붕새는 이런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을, 그리고 그 거침없는 비상은 이런 변화변혁을 이룬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초월을 상징한다. <장자> 첫머리에 이처럼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실존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는 인간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다. 속이 후련하다. (중략)

첫째, 이런 엄청난 변화가 자연과 동떨어진 어떤 초자연적 힘이나 장기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거나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날듯이 모두 자연 안에서, 그것에 순응하고 힘입어, 가능했다는 것이다. 초자연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래적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발현해서 생긴 일임을 말한 셈이다.

둘째, 여기 나오는 알, 물고기, 붕새가 겉으로 엄청나게 달라 보이는 것들이지만 본질을 보면 따로 독립한 사물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물고기나 붕새도 본래는 알이었다. 그렇게 큰 것들도 조그만 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씨알을 품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무한한 가능성을 자각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나에게 있는 씨를 어떻게 현실화 할 것인가? 첫째는 나를 믿어야 할 것이고, 둘째는 믿음에 꾸준히라는 노력을 의심 없이 가하면 될 터인데….의지의 부족인가? 동기부여의 부족인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스페인을 갔다 와서 나를 한발 떨어져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투덜거리는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계획하고 실천하고 흥분되고 즐거운 모습과 어울린다.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긍정적으로 살고 싶다.

028 3. <저 아래 땅 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고, 티끌이 날고, 생물들이 서로 숨을 불어주고, 하늘은 푸른데, 그것이 하늘의 본래 색깔입니까? 끝없이 멀기 때문에 프르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까? 붕새가 높이 떠서 내려다보니까 이처럼 까마득하고 푸르게 보일 뿐입니다.

4. 괸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물 한 잔을 방바닥 우묵한 곳에 부으면 그 위에 검불은 띄울 수 있지만, 잔을 얹으면 바닥에 닿아 버리고 맙니다. 물이 얕은데 배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거침이 없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032 아침에 잠깐 났다가 시드는 버섯은 저녁과 새벽을 알 수 없습니다. 여름 한철 사는 메뚜기는 봄과 가을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짧은 삶입니다.

>나의 삶도 누군가에게는 짧은 삶일터인데….짧은 삶도 충실하게 살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구나!

033 그저 악착같이 돈이나 벌어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살겠다고 하는 이 건전한 상식외에 무엇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부한다. 우리야말로 건실한 현실주의자들이라고.

>나도 한때 이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지. 나의 경제력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 돈이 무서운지 모를 때사람은 무엇이든 겪어봐야 한다니까. 지금은 경제력과 삶의 질을 어느 선에서 만족하고 주변과 타협해야하는지 고민중.

038~039 그러므로 지인은 자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신인은 공적에 무관하고, 성인은 명예를 탐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이르지 못했구나!

<보완점>

*스케일이 너무 커서 허황되기까지 하다.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이 떨어진다.

*오강남씨가 쓴 두 번째 책을 읽었다. <도덕경>에 이어 <장자>. 물론 노자와 장자를 노장사상이라고 일컫고 둘의 구분이 어찌보면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으나, <장자>의 책에서 아직 <도덕경>의 그림자가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앉으나 서나 모든 시간을 <장자>에 몰입했다고 적고 있으나 온전히 <장자>로 서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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