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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5일 09시 14분 등록

장자


오강남, 현암사, 1999.


1. 저자에 대하여


■ 장자莊子 ■

출생/사

BC 369 중국 송나라 몽읍(蒙邑:허난성[河南省] 商邱縣 근처) ~ BC 289년경으로 추정. 정확학 생몰연대 미상.

활동분야

중국 고대 사상가

 

• 발 자 취 •  

• 저 서 •

본명, 주(周)

맹자와 비스한 시 활약한 것으로 전하며 관영인 칠원에서 일한 적 있었으나 이후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음. 초나라 위왕이 재상으로 맞으려 했으나 사양함

10여만 자에 이르는 저술 완성


……

   “쓸모없음을 알아야만 함께 ‘쓸모있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법이네. 땅은 정말로 넓고 큰 것이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사람일 쓸모를 느끼는 것은 단지 자신의 발이 닿고 있는 부분뿐이라네. 그렇다면 발이 닿는 부분만을 남겨두고 그 주변을 황천, 저 깊은 곳까지 파서 없앤다면, 그래도 이 발이 닿고 있는 부분이 쓸모가 있겠는가?”

……

<장자>


장자

 




■ 내 다리 냅둬!


 혼란의 시대에는 단순명료해질 수 없는 걸까. 사상의 맞물림들이 아득하다. ‘혼란’이라는 단순하고 절대적 상황에서 내적인 단순함이 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장자의 사유가, 그의 은유와 비유로 가득한 문장들이 이해가 됨직도 하다.

 춘추 전국 시대의 많은 사상가들이 그러하듯이 역시 정확한 출생연대가 기록되지 않고 있는 장자의 이야기들을 읽는다. 당연 학창시절엔 공자와 맹자에 묻혀 조금 더 나아가서는 노자에 밀려 있던 사상가다. 내 기억으로는 어느 순간 장자의 열풍이었고 그러한 바람이 무슨 연유인지 궁금했던 때도 있더랬다. 그저 시대적 상황과 함께 생각하지 않고서도 편안히 읽을 수 있는 글이구나, 싶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을 대략 보다보니 그들 사상의 진보를 떠나 통찰을 떠나 사상가들의 행적은 비슷하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탓일까. 내겐 똑같은 옷을 입은 이들이 줄지어 앉아 생각해보면 별 차이 없는 이야기들을 떠들어 대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서로의 사상들의 논박의 물고 물림의 관계가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깊이 있게가 아니라 가벼운 바람처럼 읽었나 보다. 가벼운 바람처럼......

  

 장자는 다른 여타의 사상가들처럼 본명은 따로 있다. 주(周)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가 활약하던 당시에도 위대한 사상가, 철학자로 알려져 있었더랜다. 도가(道家)의 사상가로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전해져 노자 사상의 종속물로 생각하다 이번 기회에 분리를 시키게 된다. 동양철학사에서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글쓰기를 했다고 하는데 이런 그를 독립적으로 보지 않는다면야 저~지하에서 나를 얼마나 야속타 할꼬.

 한때 벼슬을 한 적도 있긴 했지만, 벼슬을 그만둔 후에는 왕의 부름을 마다하고 저술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초나라 위왕이 대표적인 사람으로 장주를 재상으로 삼기 위해 사자를 보내 귀한 선물들로 그를 꼬시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장주는 “천금은 큰 이익이고 귀족과 재상이란 지위는 존귀한 자리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도시 밖의 예식에서 희생으로 쓰인 소를 본적이 없는가? 수 년 동안 배불리 먹인 후에, 그 소에게 무늬가 있는 옷을 입히고 조상의 묘로 끌고 간다. 그 순간에 그 소가 자신이 단지 버려진 송아지이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즉시 나가라. 나를 더럽히지 마라.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 평생토록 나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나의 뜻을 유쾌하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장주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보면 제자들이 그에게 후한 장례식을 치러주려고 하자 “나는 하늘과 땅을 속 관과 겉 관으로 생각하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생각하며, 별들을 구슬들로 생각하고 만물들을 장례 예물로 생각하고 있다. 나의 장례 용품에 어찌 빠진 것이 있겠느냐? 너희들은 이것에 무엇을 추가하려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먹을까 두렵습니다.” 장자는 말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에게 먹힐 것이고, 땅 아래에서는 나는 개미와 땅강아지에게 먹힐 것이다.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 개미와 땅강아지에게 주려고 하니, 너희들은 어찌 그렇게 편파적이냐!”고 했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장자를 야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구절을 읽고 그냥 넘겼다가 다시 글을 읽고 나서 되돌아보니 그런듯하다.


 p21 아무튼 노자가 자상하면서 근엄한 철인의 풍모를 지녔다면, 장자는 투철한 눈매로, 때로는 크게 껄껄 웃고,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모습을 지녔다고 하겠다.


■ 저서 『장자』에 대해

  

 서기 1세기 경에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장자>가 전체 52편으로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고  사마천의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편에서는 장자가 10여 만 언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위진 시대 사상가 곽상(郭象)이 편집한 것으로 총 33편 6만 4606자로 이루어져 있고 <내편>, <외편>, <잡편>으로 묶여 있다. 그리고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이 실려 있다. 학자들은 이 중 <내편> 7편은 장자가 작성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 외의 편들은 장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이들이 기록한 일종의 논문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내편>은 1편 「소요유(逍遙遊)」, 2편 「제물론(齊物論)」, 3편 「양생주(養生主)」, 4편 「인간세(人間世)」, 5편 「덕충부(德充符)」, 6편 「대종사(大宗師)」, 7편 「응제왕(應帝王)」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기본적 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통칭할 수 있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이어주거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그것을 잘라주면 그들을 해치게 되듯이 인위는 자연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즉, 인간의 마음은 시대적 상황이나 환경에 의해 좌우되고 지식이 형성되지만 이러한 지식들은 시대적 상황이 다른 것만큼이나 보편타당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그러한 지식에 입각한 행위를 인위(人爲)라고 한다. 장자는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보며 도는 일(一)이며 대전(大全)이므로 그의 대상이 없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하다. 도는 모든 곳, 똥, 오줌 속에도 있다고 보는 견해를 가진다.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만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고 인간은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자유는 천지만물과 자아사이의 구별이 사라진 지인(至人)이라야 누릴 수 있다. 이 지인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천지만물들과도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된 사상이다.

 이러한 장자사상은 위진현학(魏晉玄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으며 남북조 시대에 성행한 반야학(般若學)과 당나라 선종(禪宗)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특히 현종(玄宗)은 그에게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하여 <장자>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이름으로 읽혔다고 한다. 장자의 이러한 초탈사상은 자연주의 경향이 있는 문학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 오강남 ■

출생/사

 

활동분야

작가. 교수

 

• 발 자 취 •  

• 저 서 •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취득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

‘종교너머, 아하!’의 이사장

『도덕경』『장자』『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종교 너머, 아하!』

『움켜쥔 손을 펴라』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 번역서 •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귀향』『예언자』 

『예수 하버드에 오다』 등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장자 [莊子] (두산백과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장자를 읽기 전에


p17 윤리와 실용을 강조하는 유교의 가르침을 양陽이라 한다면, 좀 더 신비한 내면을 강조하는 도교의 가르침을 음陰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보완하는 관계로 조화와 균형을 이상으로 삼는 동양인의 정신적 필요에 부응해 온 셈이다.

⇒ 윤리와 실용보다 신비한 내면에 더 끌렸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면 이는 영원히 끌림으로 나올 것들. 눈을 돌아 현실을 보면 더욱 그렇게 되는. 그리하여 또 한편의 눈으로는 끌림이 거부되는.


p21 노자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하는 엄숙한 선언으로 『도덕경』 첫머리를 시작한 데 반해, 장자는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 하였습니다.” 하는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아무튼 노자가 자상하면서 근엄한 철인의 풍모를 지녔다면, 장자는 투철한 눈매로, 때로는 크게 껄껄 웃고,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모습을 지녔다고 하겠다.


p22 장자의 일차적 관심은 무엇보다 개인이 내적으로 성장하고 깨닫기 위해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자가 도가적 ‘정치’실현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장자는 도가적 ‘삶의 완성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근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변화에 모을 맡겨 함께 흐르거나 그대로 변하기를 더욱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은 주로 도의 ‘생’하는 측면을 말하였는데, 『장자』는 도의 ‘화’하는 기능을 부각한다.

     그러면 장자는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무엇을 가르쳐 주려 하는가? 엄격히 말하면 가르쳐 주려는 것이 없다. 무엇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우리가 떠받드는 상식적인 고정 관념, 이분법적 사고 방식, 거기에 기초를 둔 맹목적인 가치관, 윤리관, 종교관 등을 우리에게 스스로 깊이 살펴보게 해서 이런 것들의 내재적 모순과 불합리함을 발견해 없애도록 도와 줄 뿐이다.

⇒ 엄격히 말하면 가르쳐 주려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려 하오?


p23 장자는  인식내용(cognitive contents)을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리나 일깨움을 목적으로 한 책이다.


p23 모든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넘어선 상태, 야심과 욕망과 우월감 등 일체의 자의식을 극복한 상태, 이런 빈 마음의 상태에서 도와 하나가 되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신나는’ 삶, 힘있는 삶, 풍요한 삶, 활력이 넘치는 삶, 절대적인 자유의 삶으로 이끄는 장자의 초청을 발견한다.


p25 절대 ‘자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변화’와 ‘초월’, 이것이 『장자』 전체의 주제이며 가르침의 궁극 목표라 할 수 있다.

⇒ 절대 자유란 과연 무엇인고. 최근 그리스인 조르바, 그 자유를 얘기하는데, 그 자유가 자유인가라는 물음.


제1편 자유롭게 노닐다


p26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이라 하였습니다.


p27 붕새는 이런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을, 그리고 그 거침없는 비상은 이런 '변화'나 '변혁'을 이룬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초월'을 상징한다. <장자> 첫머리는 이처럼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실존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p28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거침이 없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p29 여러 종교를 살펴보면 거의 모두, 바람은 ‘신바람’이라고 할 때처럼, 우리 속에서 움직이는 생기 같은 것을 의미한다. 희랍어의 ‘프뉴마’, 히브리어의 ‘루악’, 산스크리트어의 ‘아트만’, ’프라나’ 그리고 한문의 기는 모두 바람이나 숨이나 생기를 뜻한다. 특히 히브리 지혜서에 나오는 창조 설화를 보면, ‘신령한 바람’이 혼돈 위에 안장서 마치 알을 품고 있는 새와 같이 만물에게 각각 생명의 기운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P30 종교사에서 거의 모든 종교는 우주의 바람, 이 바람이 사람에게 작용해서, 그것이 사람을 신바람이 넘치는 사람, 생기에 찬 사람,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유인이 되게 한다는 기본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종교는 우리에게 외친다. “바람을 타라. 생기를 찾아라. 그리하여 활기찬 삶을 살아라.” 이것이 건조하고 무의미한 인간의 현존을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이라는 것이다.

⇒ 강신주도 장자를 이야기하며 이 바람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오강남도 그렇다. 바람에 꽂힌 이들. 그러나 얘기의 방향은?

   그러나 대붕은 단순히 거대한 바람만을 기다리는, 다시 말해 바라에 철저히 의존하기만 하는 그런 존재가 결코 아니다. 대붕은 자신의 온 힘을 다해서 구만리 상공으로 비약하려고 매번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순간 대붕 스스로 구만리 높이로 올라서야만 비로소 그는 자신의 밑에 바람을 둘 수 있다. 따라서 곤이라는 물고기에서 붕이라는 새로운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대붕이라는 새가 가지는 상승과 비약에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계속된 실패와 좌절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날고자 하는 의지를 관철시킬 때 비로소 어느 순간 대붕은 구만리 높이로 우뚝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이런 경우에만 대붕은 자신을 떠받치는 바람을 타고,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 장자의 대붕은 모든 자잘한 것들을 한꺼번에 날려 버릴 바람을 타고 유유히 푸른 하늘을 활공할 것이다. 강신주, p35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p33 노자도 『도덕경』에서,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몹시 비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 나, 못난 사람인거야?


p34 극도로 '엄청난 진리'는 본래 '역설적'이어서 형식 논리에 사로잡혀 명석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웃음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웃음거리가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도 붕새처럼 변해 자유를 누려야 하겠지만, 당장은 매미나 새끼 비둘기처럼 어리석은 짓이나 말아야겠다. 그러고 나서 차분하게 이런 편견과 선입견을 나날이 없애 가는 도의 길을 걸으며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금의 부자유한 삶의 모습을 직시하고, 붕새처럼 이를 초월해서 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이 참으로 신나는 삶이 된다는 것을 꿰뚫어 봐야 하겠다.


p37 『장자』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문자적 진리’를 안겨다 주려는 책이 아니라 ‘상징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상징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 손가락의 생물학적 성격이나 물리적 구조에만 관심을 쏟으면 달을 볼 수 없다.

     상징을 문자로 읽으면 그 환기적 기능, 영어의 ‘evocative’ 기능이 완전히 죽어 버리고 싸늘하게 죽은 문자만 남는다. 바울의 말과 같이, “문자적인 것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다.

    이렇게 ‘상징’을 넘어서 ‘상징이 가리키는 바’를 바라볼 때 우리는 ‘변해서’ 새로운 실재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붕새의 변화와 초월과 자유에서 우리가 가진 실존의 한계를 초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고, 우리 스스로 변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 은유와 비유에 관한 글을 어려워한다는데 내 글은 어떠한가 잠시 생각해봄.


p38 지인은 자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신인은 공적에 무관하고, 성인은 명예를 탐내지 않습니다.

⇒ 이런, 나, 지인과 신인과 성인이다. 근데 뭔가 씁쓸하군.


p39 이들은 이렇게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일을 모르고 인간의 한계 밖을 넘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므로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 메추라기처럼 시야가 좁기 때문에 자기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들과 실현한 사람들을 비웃기까지 한다. “도대체 어디로 저렇게 날아간단 말인가”하고.

⇒ 가능성이 무한하기 때문이겠지. 그 무한성이라는 것이 너무 멀잖아. 유한한 인생에.


p40 사람이 열자처럼 살기도 어렵지만 『장자』의 궁극적 이상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돼 무한한 경지에 노니는’절대 자유’의 단계이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구가하는 무애의 삶이다.

     자기가 없고, 공로가 없고,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연연해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아나 공로나 명예의 굴레에서 완전히 풀려난 사람들이다.


p47 물고기에게 땅에서 걷는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없고, 음치에게 모차르트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 줄 수 없다.

⇒ 얘기는 해 줄 수 있지 않나?!?!


p48 완전한 무위의 상태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세상을 이롭게 한다. 『도덕경』의 말처럼 ‘함이 없는 함’을 실천한다.


p50 결국 요 임금이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은 이 신인들의 ‘함이 없는 함’ 때문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 신인들이야말로 ‘쓸모없음의 더욱 큰 쓸모’라는 진리를 실증해 준다.

⇒ 쓸모. 있음과 없음을 가르는 기준. 어쨌든 하나가 기준이 되고 있잖아.


제2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


p55 세상에 버려야 할 것, 쓸데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비본질론적 견해를 다른 말로 해서 ‘시각주의적 접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이 시각에 따라 다르다. 달리 보고 있다. 그러나 깔때기가 거르듯 동일한 시각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p57 궁극변화, 초월, 절대 자유ㅡ 해방을 말하는 장자의 가르침이 논 갈고, 길쌈하고, 장사하고 돈 벌고 출세하는 일에는 분명 쓸모가 없겠지만 그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현상계의 실상을 궁구하고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꿰뚫어 보게 해줄 뿐만 아니라 “ 주고받기와 시비와 깔고 앉음과 깔리움밖”에 있을 수 없는 인간의 정황, 이 숙명적 실존의 한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풍요하고 자유롭고 싱그럽게 사는 일에 쓸모가 있다면, 이 어찌 저 자질구레한 일들의 쓰임새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p57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생명을 하루하루 먹고사는데 써 버리고 말 것이냐 더 원대한 일을 이루는 데 사용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암시했다고 볼 수 없을까?

     매미나 새끼 비둘기, 메추라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가는 붕을 비웃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시야를 넓혀 큰 시계를 보고, 사물의 더 크고 참된 쓸모를 찾으라는 것이다.

⇒ 참 이런 말들, 너무 들어서 이젠 감흥이 없네.


p59 이 편의 주제는 우리가 우리의 실존적 한계성을 궁극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립의 세계에서 대립을 초월한 ‘하나’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방법은? 사물의 한쪽만 보는 우리의 상식적, 분석적,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에서 사물의 진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예지와 직관과 통찰을 체득해야 한다.

⇒ 사물에 대해 다양하게, 다각도로 바라본다. 그리고 예지와 직관과 통찰을 체득했다. 그래서? 이것이 전부가 된단 말인가? 다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p60 제목을 어떻게 풀든 논의의 초점은 ‘齊’에 있다. ‘齊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로 한다고 하여 각각 다른 사물을 일률적으로 획일화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때의 ‘하나’는 다양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화와 일치를 의미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한쪽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양쪽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시비를 넘어서는 세계, 제일, 제동, 여일의 세계 서양의 중세 사상가 쿠자누스가 말한 ‘양극의 조화’가 이루어진 세계 즉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눈에 씌웠던 눈가리개를 벗긴 셈이다. 우리는 숙명으로 뒤집어쓰고 있던 제약의 굴레를 벗고, 붕새처럼 구만 리 창공을 날아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 창공을 날아가는 자유. 날아가는 것은 자유로운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날개가 가진 이가 난다면, 그것은 날개로부터 자유로운 것인가?


p60 동일한 것이 보기에 따라 크기도 하고, 동시에 작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비를 넘어서는 세계, 제일, 제동, 여일의 세계, 서양의 중세 사상가 쿠자누스가 말한 ‘양극의 조화’가 이루어진 세계,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눈에 씌웠던 눈가리개를 벗긴 셈이다. 이럴 때 우리는 숙명으로 뒤집어쓰고 있던 제약의 굴레를 벗고, 붕새처럼 구만 리 창공을 날아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p62 여기 이 ‘오상아’는 『장자』의 핵심 개념에 속한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려, 내가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吾는 어떤’나’고, ‘我’는 어떤 ‘나’인지에 대해 글자의 어원을 다지는 등, 주석가들 사이에 설이 분분하지만, 쉽게 말하면, 우리의 비본래적인 자아, 작은 자아에서 풀려난 본래의 자아, 큰 자아가 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 내가 나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린지 오래건만 진정한 내가 되지 못하였다. 아직 본래의 자아를 찾이 못하였다.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것과 자아를 찾는 것은 다른 것이니까.


p63 이런 변화를 의식상태로 설명하면, 일산의 이분법적 의식 세계에서 벗어나 초이분법적인 의식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꽉 막힌 자의식에서 탁트인 우주의식으로 변한 것이다. 근본적인 의식변혁으로 히랍어의 ‘메타노이아’이다. ‘마음 굶김’이나 ‘앉아서 잊어버림’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다.


p63 옛 자아가 죽고 진정한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옛 나를 장사 지내고 새로운 내가 무덤에서 나오는, 깊은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다. 불란서 철학자 데카르트가 라틴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지만, 여기서는 “나는 잊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일상의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버릴 때 진정한 나, 온전하게 된 내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p64 이것이 바로 제물론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곧 일체의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차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얻는 것이다


p64 이론에 따라 지적으로 추구하는 한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스스로를 잃어버린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p65  "땅덩어리가 뿜어내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것이 불지 않으면 별일 없이 고요하지만, 한번 불면 수많은 구멍에서 온갖 소리가 나지. 너도 그 윙윙하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산의 숲이 심하게 움직이면, 큰 아름드리나무의 구멍들, 더러는 코처럼, 더러는 입처럼, 더러는 귀처럼, 더러는 목이 긴 병처럼, 더러는 술잔처럼, 더러는 절구처럼, 더러는 깊은 웅덩이처럼, 더러는 좁은 웅덩이처럼 제각기 생긴 대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 화살이 씽씽 나는 소리, 나직이 꾸짖는 소리, 숨을 가늘게 들이키는 소리, 크게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깊은 데서 나오는 듯한 소리, 새가 재잘거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내지. 앞에서 가볍게 우우 - 하는 소리를 내면, 뒤따라서 무겁게 우우 - 하는 소리를 내고. 산들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하지. 그러다가 바람이 멎으면 그 모든 구멍은 다시 고요해진다. 너도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 구부러지거나 살랑살랑 흔들리기도 하는 것을 보았겠지."

⇒ 소리, 소리들이 이 세상에 있지, 들었겠지. 저 소리들을.


p66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란 무엇입니까?"  "온갖 것에 바람을 모두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제1편의 바람이 우리가 타고 ‘신바람 나게’ 날아가게 하는 바람이라면, 여기 나오는 바람은 퉁소 속으로 통과하면서 소리를 내듯 속으로 불어 우리를 움직이는 내면적 바람인 셈이다.


p67 이처럼 우주의 온갖 사물은 각각의 모양과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인간은 이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내보내느냐에 따라 나름대로 다양한 소리, 생각, 의견, 심리 작용, 감정, 정서 상태와 다양한 정도의 생동성과 생명력 등을 얻는다. 하늘 소리는 그 자체로 독립된 소리가 아니라 인간과 대지가 이처럼 다양한 소리를 내도록 해 주는 바로 그것, 그 자체로는 들리지 않지만 모든 소리들이 근원이 되는 바로 그것. 바람 혹은 기 그 자체, 바람이나 기의 근본인 도와 도가 발휘하는 힘을 의미한다.

⇒ 풍차언덕에서 이 소리들을 좀 들어볼려고 했건만..


p67 하늘 소리는 그 자체로 독립된 소리가 아니라 인간과 대지가 이처럼 다양한 소리를 내도록 해 주는 바로 그것, 그 자체로는 들리지 않지만 모든 소리들이 근원이 되는 바로 그것. 바람 혹은 기 그 자체, 바람이나 기의 근본인 도와 도가 발휘하는 힘을 의미한다.


p68 하늘의 소리는 다른 소리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소리들 속에 있는 소리, 들리지 않는 소리라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는 초월하며, 내재하는 무엇이요, 모든 것과 하나이면서 다른 것이요, 다르면서도 하나인 무엇이다. 하늘의 소리는 우리 몸의 귀로 들을 수 없다. 그것은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새롭게 열리는 영적인 귀로만 들을 수 있으므로 하늘의 퉁소소리를 들어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우리 자신을 잃어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 영적인 것을 무조건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진 않아도 되긴 하지만, 저자의 양력으로 인해 그렇게 간다. 이런 고정관념을 탈피해야 본래적 자아가 된다는 것일텐데.


p72 장자는 이런 일상적인 마음, 우리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주관한다고 착각하고 그 이상의 존재를 모르는 마음이 바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고, 이런 마음의 불완전하므로 깨달아 이를 잃고 초극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p75 마음도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덧없이 쇠망해 가는 여러 사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참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p77 뒤집어 말하면 이런 분별심, 성심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비를 따지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정신적 병폐 때문에 나의 ‘참주인’, 나의 ‘참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p78 유가와 묵가가 그르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이들이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들의 옳고 그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밝음이 있어야 한다.


p79 이 같은 일은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볼 수 있다. 모두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처럼 자기가 만져 본 일방적이고 부분적인 단견을 내세워 서로 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코끼리가 구렁이처럼 생겼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눈을 뜨고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눈을 떠야 구렁이 같은 면과 기둥 같은 면을 다 본다. 이를 일러 ‘밝음’을 얻음이라 한다


p81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됨이 있기에 안 됨이 있고, 안 됨이 있기에 됨이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 하지 않고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p82 시비를 따지는 병폐를 고치려면 ‘밝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서 나오는 일방적 편견을 버리라는 것이다.


p83 아버지만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없이는 아버지도 있을 수 없으므로 아들도 아버지를 낳는 셈이다. 아버지도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고, 아들도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방생'이라고 했다.


p85 길은 다녀서 생기고 사물도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다. 어찌해서 그렇게 되는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해서 그렇지 않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물에는 본래 그럴 까닭이 있고, 그럴 가능성이 있지.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럴 수 없는 것도 하나도 없다.


p88 장자는 철두철미 '비본질론적' 견해를 내세웠다. 만물에는 고정한 실체나 본질이라는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각각의 사물은 독립한 개체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여기서도 인드라망인가. 얽히고 설킨 관계.


p90 논리적으로 유추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물의 가장 깊은 차원을 체험적으로 꿰뚫어 보는 형안이 열려야 진정으로 볼 수 있는 무엇이라고 한다.


p91 성인은 옳고 그름의 양극을 조화시킨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고르게 하는 ‘하늘의 고름’에 머문다, 이를 일러 ‘두 길을 걸음’이라고 한다. -


p92 ‘하늘의 고름’이란 의인의 밭에도 악인의 밭에도 고르게 비를 내리는 하늘의 공정함이고, ‘두 길을 걸음’이란 시비 등 이분의 세계에서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는 경지이다. 사물의 본질을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인시’의 문제라는 것. 우리 중에 원숭이에게 돌을 던지거나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재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두 원숭이들 아닌가?

⇒ 그렇지요...


p97 성인은 “가르지 않는다”고 하고, 또 “멈출 줄 안다”고도 하였다. 멈출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분을 넘어선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 ‘희고 검음’, ‘영광과 오욕’ 등 일견 대립하는 것들을 함께 껴안을 때 ‘갓난아기’의 상태, ‘무극’의 상태, ‘통나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p98 '시작'이 있으면 아직 '시작하기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또 '아직 시작하기 이전의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있음'이 있으면 '없음'이 있게 마련이다. 또 ‘있음 이전의 그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이 있어야 한다.

⇒ 참...말들이란...그러니까 사상이란 철학이란 하염없는 말장난같기도 하고.


p102 털끝이 태산보다 클 수 있고, 태산이 털끝보다 작을 수 있다. 무한히 작은 도에서 본 털끝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큰 도에서 본 태산은 무한히 작기 때문이다. 시간도 마찬가지. 도는 아무리 긴 시간보다도 더 길고 아무리 짧은 순간보다도 더 짧다.

     사물을 양쪽 관점에서 동시에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천하」 편을 보면 혜자의 열 가지 역설 중에 셋째 것에 해당된다. 거기에 “하늘도 땅과 같이 낮고, 산도 늪지와 같이 평평하다”고 했다.


p103 이렇게 사물을 볼 때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따라서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모든 것이 나와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혜자의 열가지 역설 중의 마지막 것인데, 혜자는 “만물을 두루 사랑하면 하늘과 땅이 나와 하나”라고 했다.

⇒ 만물을 두루 사랑하라는 것은 해탈일까.


p104 이렇게 구분하고 따지고 변론하고 시비를 가리면서 “부산하게 쫓아다니지 말고”, ‘순수이성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넘어서는 직관으로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하라 타이른다.


p105 사실 도에는 경계가 없고 말에는 실재가 없다.


p107 『도덕경』 제1장 첫 줄에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 말이 없어져 버린 상태이다. 전통적인 용어를 쓰면 언어도단이요 언설을 떠난 상태인 것이다.


p108 철학자 파스칼도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지 “철학자와 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고 했다. 도는 마음에 간직하거나 체험으로 알아야지 사변이나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따지면 영원히 절대타자일 수밖에 없다.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 ‘말로 하지 않는 변론’과 ‘도라고 할 수 없는 도’를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은근한 빛’을 감추고 있는 하늘의 보고’이다.

     도를 말하려면 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도에 대해서 뭔가 말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자체가 도를 전혀 모른다는 증거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도덕경』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 그걸 아는데 이런 구구절절한 해석을 보고 있으니...


p109 성인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함’이다”하는 문장 뒤에 들어갈 것이 여기 잘못 들어왔다고 했다

 

p125 여희나 프시케처럼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에 안주하지 말고,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 ‘나’로 탈바꿈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가능성에 대한 집착이 벗어남을 어렵게 하는 것 아닐까


p127 장자는 삶이 꿈이지만 그 속에 그 나름의 실재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p127 문제는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꿈이 꿈인 줄 알려면 꿈에서 깨어나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범속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큰 깨어남, 큰 깨달음, 큰 깨침이 없기 때문에 이 인생의 꿈속에서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 꿈에서 깨지 않고 있고 꿈을 꾸지 않고 있다.


p128 우리 범속한 인간들은 우리의 삶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이런 것을 꿈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괴상하게 여겨 일소에 부친다.


p131 모든 의견은 결국 각자의 견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른바 보편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 장자의 견해...핵심.


p134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라 한다.

⇒ 이것이 ‘장자’하면 나온 대표적인 그 이야기 호접몽인가.


p135 지금 그 꿈에서 깨어난 상태를 다시 꿈꾸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이른바 그 깸에서 다시 한 번 깨어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깸에서 깨어나는 것이 큰 깨어남, 대각이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장자는 대각한 사람이다.


P135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이것과 저것으로 갈려 독립한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도 여러 번 지적했다.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 서로 어울려 잇는 관계, 꿈에서 보는 세계와 같이 서로가 서로가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나오기도 하는 ‘꿈 같은 세계’이다.

⇒ 내가 너이고 너가 나이고.


p136 이런 세계는 만물이 상호 합일하고, 상호 침투하는 세계, 만물이 상호 연관하고 상호 의존하는 세계, 만물이 상호 변화하고 상호 연기, 상호 존재하는 세계를 말한 것이다.


p136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종이는 종이 아닌 요소만으로 된 셈이다. 그러니까 “종이는 종이다.”하는 대신에 “종이는 구름이다”, “종이는 나무다”, “종이는 다이아몬드다”, “종이는 종이 아닌 것이다.”하는 편이 더 적절한 말이다. 종이와 구름 구름과 종이, 장자와 나비, 나비와 장자, 서로 넘나들어, 그야말로 자유자재이다. 이것이 이른바 물화이다.

⇒ 한없이 어딘가에 빠지는 것.


p137 사물을 깊이 통찰하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사물을 고정한 무엇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서로 어울려서 함께함을 볼 수 있다. 꿈은 우리에게 이런 세계가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상징적으로 암시해 주는 매체 노릇을 해준 셈이다.


p137 궁극적으로 이런 세계는 이 편 서두에서 말한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진정으로 체득할 수 있는 세계요,

⇒ 어떤 경우에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진정 어느 것을 택할까.


p139 이렇게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식욕, 자존심, 자기중심주의 같은 일체의 인위적,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서 자연의 운행과 그 리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생명력이 활성화하고 극대화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이른바 ‘기대지 않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북돋는 일’,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제3편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


p142 독일작가 괴테가 쓴 『파우스트』에 나오는 주인공 파우스트처럼 철학, 법학, 의학, 신학 등 인간이 알아야 할 모든 학문을 다 섭렵하고도 모자라 악마에게 자기 혼을 팔아서라도 우주의 신비를 알아보겠다는 끝없는 지식욕 같은 것은 위험하다는 것일까?

⇒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라는 유치환의 생명의 서를 되뇌다 보면 참 서글퍼진다. 그까짓 지식욕으로도 풀리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해.


p142 아무튼 순전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일방적 지식 추구는 위험한 일이므로, 오직 중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몸도 보전하고 삶도 온전하게 되고, 모두 화목하게 지내게 되고,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네 가지가 곧 ‘보신’, 전생’, ‘양친’, ‘진년’이다.


p142 노자도 “마음은 비우고 배를 든든하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튼튼하게” 하고, “지식도 없애고 욕망도 없애고, ….. 함부로 하겠다는 짓도 못 하게” 하라고 했다. 소위 ‘무지’, ‘무욕’, ‘무위’를 가르치고, 이렇게 하면 세상에서 안 되는 것이 없으리라고 했다.


p143 도와 하나가 되려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이나 단견 같은 이분법적이고 일방적인 의식으로 얻은 지식을 하나하나 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런 것을 더 얻지 못해 안달하며 쏘다니면 이야말로 위험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앎을 버림’, 혹은 ‘배운 것을 버림’에 이를 때,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여기서도 결국 지식이 아닌 직관으로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음을 말한 셈이다.

⇒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하지 말라는 말이 몇 번을 나오는가. 사실 사상의 핵심은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반복된 단어에 이제 식상해질려 한다. 달리 해석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나?


p144 장자에게서 더욱 근본적인 것은 착한 일을 한다, 나쁜 일을 피한다, 하는 등 의식적 가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표피적 행동이 아니라 의연하고 묵직하게 '중도를 따르는 것'이다.


p144 그렇다면 사회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 같은 것은 좋지 않다는 뜻인가? 이런 질문에 장자는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훌륭한 일일 수 있다. 정의를 위해 힘껏 싸워 보아라. 결국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그러고 나서 스스로 더욱 근본적인 일이 있음을 발견하라”고 타이르지 않을까? 장자에게서 더욱 근본적인 것은 착한 일을 한다, 나쁜 일을 피한다, 하는 등 의식적 가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표피적 행동이 아니라 의연하고 묵직하게 ‘중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이 편에서 강조한 양생의 요체인 셈이다.


p145 희랍 사람들이 다이몬이라 하고, 로마 사람들이 지니우스라 한 것, 영어의 ‘것트’, 우리말로 표현하면 좋은 뜻으로 ‘육감’ 혹은 ‘뱃심’을 따르라는 것쯤으로 볼 수 잇을 것이다. ….몸의 등줄과 옷의 등심이 모두 중앙에 있듯이 우리의 행동이 이리저리 치우치지 않고 증정이나 중용을 지키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우리의 잔꾀에서 나오는 고의나 계략 같은 것이 전혀 없이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 우리 깊은 속에서 솟아나는 어떤 활기나 기백에 따라 올바르게 나타나는 행동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잇지 않을까? 한마디로,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거기에 몸을 맡기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146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고 그 소리는 설컹 설컹, 칼 쓰는 대로 설뚝설뚝 완벽하 음율, 무곡 ‘뽕나무 숲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 다스리는 우두머리에 맞춰 율동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다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에 따를 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 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 장인의 경지...


p150 정이 ‘정력’이라고 할 때처럼 성인의 활동력을 지탱해 주는 기본적인 요인이고, 기가 ‘기운’이나 ‘원기’라고 할 때처럼 사람을 건강하게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 한다면, 신은 ‘신난다’고 할 때처럼 사람에게 활기와 흥을 돋워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150 옛날 선사들은 깨침에 이르는 단계를 두고, 산과 물을 보는 경우, 첫째,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하는 단계, 둘째,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고 하는 단계, 셋째,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하는 단계를 말하였는데, 포정이 거친 삼 단계라는 것이 이와 비슷한 것일까?


p153~154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 『희랍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거기서도 소위 성공한 지성인 사업가로 등장하는 상전이 불학무식한 하인 조르바의 신나는 삶, 거침이 없는 삶에 감복하여 결국 ‘춤추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으로 끝이 난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어떤 것일까? 전통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다.


p156 어느 화가가 남녀의 사랑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릴 때, 두 남녀가 침실에 같이 있는 장면을 소상하게 그릴 수도 있고, 단순히 댓돌 위에 고무신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양을 그릴 수도 있다. 전자를 ‘서술적’묘사라 한다면, 후자는 ‘암시적’, ‘환기적’기법이라 할 수 있다.


p160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어쩌다가 세상을 떠난 것도 순리이기 때문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님의 매닮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했네.”

⇒ 그렇다라도.....


p163. "손가락으로 불을, 지피면, 손가락은 그것으로 할 일을 끝낸 것. 불이 계속 타든지 꺼지든지 우리는 알 필요가 없다", "기름은 땔감으로 타 없어지지만 불 자체는 계속 이어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p164 이 편에서 주목할 것은 ‘해우’와 ‘현해’에서 보듯이 ‘解’가 중요한 글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解’는 해체한다. 푼다. 벗어난다는 뜻이다.


p165 이렇게 상식 세계를 벗어나 사물을 한 차원 높은 데서 전체적으로 보라고 강조한 점에서 제2편 「제물론」의 주제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요즘 많이 논의하는 ‘해체주의’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이데거가 『장자』를 좋아한 것도 이런 뜻에서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일체의 고정 관념이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라는 것…. 사실 누구인들 좋아하지 않으랴.

⇒ 고정관념을 심어준 그 틀을 깨버리는 것. 그것 또한 환경의 영향.


제4편 사람 사는 세상


p170 옛 지인들은 먼저 스스로 도를 굳힌 뒤에 남을 도왔다. "자기 하나 확실히 갖추지 못하고서 어떻게 포악한 자의 행위에 간여할 수 있겠느냐?"

     덕은 이름을 내려는 데서 녹아 없어지고, 못된 앎은 서로 겨룸에서 생긴다. 이름을 내려는 것은 서로 비걱거리는 것이고, 못된 암은 겨루기 위한 무기이다. 둘 다 흉한 무기라 완전한 삶을 위해서는 써서 안 될 것들이다.

⇒ 그러니 ‘나를 잃어버림’은 안되지 않는가.


p172  네가 너를 믿어 주지도 않는 사람에게 솔직한 말만 하다가는 반드시 그 포악한 사람의 손에 죽을 것이다.


p174 속으로 조금이라도 꿀리는 것이 있으면, 이런 일이 본인에게나 남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p179 안회가 말했습니다. “부디 ‘마음의 재’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마음의 재’니라.”

       재라는 글자의 본래 뜻은 ‘굶다’이다. ‘목욕재계’라 할 때처럼 의식으로 하는 재는 물론 술이나 고기, 파, 마늘 등 자극성 음식을 피하는 것이다.


p183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네가 위나라에 들어가 그 새장에서 노닐 때, 이름 같은 데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받아 주거든 소리내고, 받아주지 않거든 잠잠하라.


p183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이나 앎을 밖으로 하라. 그러면 비상한 힘도 들어와 머물 것이니, 사람들이 모여든 다는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이것이 만물의 변화라는 것이니, 우 임금, 순 임금도 여기에 의거했고, 복희, 궤거도 이를 평생 실천궁행했다. 하물며 그만 못한 우리 보통 사람들이랴."


p185 이렇게 몸은 앉아 있으니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를 ‘좌치’라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좌망’과 맞서는 개념이다. 좌망이 마음의 구심 운동이라면 좌치는 마음의 원심 운동인 셈이다.

⇒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좌망의 상태에 빠져보고 싶다.


p186 앎을 버림 곧 무지를 통해서만 참된 앎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지’란 물론 이분 세계에서 우리가 얻은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암을 비우는 것이고, 이렇게 비운 상태에 이르렀을 때 참된 앎이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p187 장자는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을 굶겨’, 내면에서 솟는 초월적인 힘을 체험한 뒤에 삶의 현장으로 나가 사람들을 도우라고 한 것이다.


p189 성공하든 실패하든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을 사람은 덕을 가진 사람뿐이라.

⇒ 아님 아무 생각이 없거나, 의욕이 없거나 하는 사람.


p192  "자기 마음을 섬길 때 슬픔과 기쁨이 눈앞에 엇갈리어 나타나게 하지 말고, 불가능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운명으로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덕의 극치입니다."


p194 너무 지나치게 다그치면, 상대방은 반드시 좋지 못한 마음으로 이에 반응하게 됩니다.


p195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십시오. 부득이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두고, 중심을 기르는 데 전념하십시오. 이것이 최고입니다. 무엇을 더 꾸며서 보고할 것 있겠습니까? 그저 그대로 명을 받드는 것뿐.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p196 안명론은 니체가 말한 ‘운명을 살아함’과 비슷하다고 할까. “바꿀 수 있는 것에는 바꿀 능력을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예지를 주시옵소서.” 라고 한 어느 성자의 기도가 생각난다.


p200 우선 자신의 몸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중심을 지키라는 것이다.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신의 기본적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

⇒ 잃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하기도 하고 잊지 않기도 해야 하고. 사상이란 참.


p200 물은 동그란 그릇에 들어가면 동그랗게 되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뜨거우면 김이 되어 날아가고, 차가워지면 얼음으로 굳고. 이렇게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물이 ‘물임’과 ‘물됨’을 잃는 일이 없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적응하는 것 그 자체가 물의 정체성이다.


p201 바울도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했다.


p208 마르틴 부버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물을 ‘나와 너’로 보는 것도 시원치 않은데, 당신은 사물을 ‘나와 그것’으로 보고 그것을 당신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본단 말인가 하는 식이다. 더구나 장석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본다면 장석이야말로 죽을 날이 가까워 오는 ‘쓸모 없는 인간’이 아닌가. 그러니 사물을 대할 때 함부로 쓸데 있다 없다를 속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p209 쓸모 없음 자체가 궁극 목표가 아니라 일단 쓸모 없음으로 자기를 보전하여 더 큰 쓸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p211 쓸모없음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쓸모가 결국 '신인'의 경지임을 함의하는 것. 신인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 유용성의 기준으로 따져보면 가장 쓸모 없는 존재이다.


p213 조급하게 조그만 ‘쓸모’에만 집착해서 살아가는 일,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공무원 임용고시다 사법고시다 무슨 자격시험이다 하는 것에 합격하는 것만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여기고 거기에 목을 매고 사는 일은 곤란하다는 뜻이리라. 지금 당장 누구의 주관적 ‘쓸모’의 기준에 따라 쓰이지 않더라도, 심지어 요즘 많이 논의되듯 ‘명예퇴직’을 당하더라도, 그렇게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박하게 이해한 실용주의나 실리주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어느 의미에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길 일이라는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런 일을 통해서 이제까지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루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한편으론 또 그것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것도 그렇다. 도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보편 타당성은 상황에 따라 다르기에 하나라 할 수 없다며!


p218~219 그만두오, 그만두오. 덕으로 남 대하는 일. 위태롭다. 위태롭다. 

       모두 땅에 금을 긋고 그 안에서 종종걸음 옥신각신하는 세상에서 어느 한편을 위해 ‘쓸모 있으려’ 애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고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접여는 가시나무가 무성한 길을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가더라도 가시가 막거나 해치지 않는 삶을 산다고 했다. 구애받지 않는 삶, 해를 받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세상에서 입을 모아 떠받드는 ‘쓸모 있음의 쓸모’를 넘어서서 ‘쓸모 없음의 쓸모’를 터득할 때 가능한 일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 구애받지 않는 삶.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나는 사상가는 될 수가 없는가.


p220 정신적인 영웅은 일단 '인습'을 등진 사람이다. 인습대로 사는 사람에게 정신적 영웅은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미친 사람처럼, 우스운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 완전 미친 사람도 되기 어렵고, 정신적 영웅도 되기 어려우니, 아 고단한 삶이여. 인습이여, 관념이여.


p220 장자든 누구든 정신적인 영웅은 조셉 캠벨의 말처럼 일단 ‘인습’을 등진 사람이다. 그래서 인습대로 사는 사람에게 정신적 영웅은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미친 사람처럼, 우스운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p221 궁극적으로 지인의 경지에 이르기 이전의 모든 유용성은 진정한 유용성이 아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크게 유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으로 내면적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 떠받드는 자질구레한 유용성이나 실용성에 정신을 팔지 말고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굶기는’ 심재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p223 노자의 『도덕경』이 도를 어머니로 표현하는 등 여성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뜻에서 현재 ‘여성 운동가들의 성서’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장자』는 불구자가 도를 실현하고 덕을 발휘하는 데 아무 장애가 없다는 것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실증했다는 점에서 ‘장애인들의 성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 헐. 뭔가 거북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인지...


제5편 덕이 가득함의 표시


p226 "다름의 입장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지만, 같음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p227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춰 볼 수 있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p229 첫째는 그(왕태)가 생사에 초연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아 설령 천지개벽 같은 상황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꿈쩍하지 않는 의연하고 의젓한 사람이며, 셋째로는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닌다’는 것이 결국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발 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남의 눈치나 칭찬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실현만을 위해’, 차분하고 조용히 정진했을 분인데도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이런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자기들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자기를 따르는 신도의 머릿수나 지지하는 사람의 투표 수에 따라 일희일비하면서 오로지 자기나 자기 집단의 종교적, 정치적 세 확장에만 혈안이 된 요즘 세태와 얼마나 대조적인가?


p232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편안하게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덕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지.

⇒ 아모르 파티?!


p234~235 신도가 자신도 남이 자신을 업신여기면 화가 나는 것을 보면 자신도 아직 ‘나’라고 하는 의식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모양이라며 그럴 때마다 백혼무인 선생님에게 가서 그런 마음을 씻어 평정을 되찾고 자의식을 줄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p239 이렇게 율법주의의 껍데기에 갇히면 어느 누구도 설득할 수가 없다고 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는 의식’에 도취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p240 왕필은 “공자는 무(無)와 하나가 되었기에 그것이 가르침이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 어쩔 수 없이 유(有)만을 말했지만, 노자와 장자는 유의경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에게 모자라는 바를 계속 이야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241 그 어미를 사랑한 것은 그 몸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몸을 움직이는 무엇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p244 애태타는 ‘나서서 주창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동조할 뿐’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화이불창’이다. 이것은 ‘나’라는 자의식에서 완전히 풀려난 상태를 의미한다. 물 같은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둥근 그릇에 들어가면 둥글어지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추우면 얼고, 더우면 증발하고 이것은 완전히 ‘빈 배’가 된 상태 ,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가는”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p248 “그러면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평평한 것은 물이 완전히 고요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은 안에 고요를 간직하고 밖으로는 출렁거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을 이룬 사람은 조화를 이룬 사람으로,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지 못합니다.”


p249 상황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는 마음, 거울 같은 마음으로 마음의 조화와 평정을 유지하여 트인 마음, 즐거운 마음, 봄날처럼 안온하고 느긋한 마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바로 주어진 재질, 우리의 본바탕을 온전히 지키는 일, ‘재전’이라는 것이다.

     ‘훌륭한 덕의 사람은 이처럼 자기 덕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낼 것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묵묵히 살아갈 뿐인데 사람들이 모여든다.

⇒ 마음, 마음. 살아가는 것은 결국 마음을 다스리는 일. 어디로 갈까요, 내 마음, 어디로 흘러갈까요.


p252 덕이 뛰어나면 외형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안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습니다. 이런 것을 '정말로 잊어버림'이라 합니다.


p254 외모에 마음 쓸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외모 때문에 성형외과의 문전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마음을 쓰고, 신경을 써야 할 내면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이니 어찌 된 일이냐는 것이다. 이처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으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한심한 ‘진짜 잊어버림’이라는 이야기이다.


p255 성인은 자신을 하늘에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 하늘이 알아서 먹여주고 길러 주는데, 일부러 설치면서 허우적거릴 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다.


p256 성인은 사람의 모양을 지녔지만 사람의 정이 없습니다. "내가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다는 것. 언제나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삶에다 억지로 군더더기를 덧붙이려 하지 않는 것을 이름일세."


p257 “도가 얼굴 모양을 주고, 하늘이 형체를 주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는데 지금 자네는 자네의 신을 겉으로 드러내 놓고 정력을 쓸데없이 소모하면서,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네.


p258~259 체의 이기심이나 집착, 사감없이 느끼는 순수한 감정이 무정이다. 따라서 ‘무정’이란 감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통 감정을 넘어선 감정’이란 뜻이다. 그야말로 “정일랑 두지 말라. 미련일랑 두지 말 자.” 하듯이 애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달하고 트인 마음, 빈 마음에서 작용하는 티 없는 감정의 흐름일 뿐이다.

     일상적인 분별심,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의식'에 매달려 안달복달, 시비곡직, 좋고 나쁨을 캐고 앉아 있으면 결국 혜자처럼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엎드려 졸기나 하는 창백한 지성, 활기 잃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 가끔, 세상만사 모든 것이 의미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논리도 분노도 애증도 무위도.


p259 어느 선사가 노래한 것처럼, 호수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가 제 그림자를 호수 위에 드리우되 일부러 하지 않고, 호수도 기러기의 그림자를 비추되 일부러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둘 다 ‘무심히’드리우고 무심히 비출 뿐이다.

⇒ 모든 것에 무심할 수 있을까. 조금은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듯도.

 

제6편 큰 스승


p263 우리 보통 인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우리 일생을 통해, 이런 저런 선입견에 한번 길들면 그것을 만고불변하는 진리처럼 떠받들고 산다. 말하자면 세뇌된 상태이면서도, 이런 상태를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살아가는 셈이다.


p267 참된 자기를 잃고 참됨이 없는 사람은 딴 사람을 부리지 못합니다.


p269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 우뚝하나 무너지는 일이 없고, 뭔가 모자라는 듯하나 받는 일이 없고, 한가로이 홀로 서 있으나 고집스럽지 않고, 넓게 비어 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p271 진인은 무엇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대립, 상극, 이원론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이것도 저것도’하는 ‘하나 됨’의 경지, 막히고 걸리는 것 없는 통전적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한마디로 유연하고 탄력성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p276 대지는 나에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삶을 좋다고 여기면 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p277 도와 하나 되면 살아도 거기, 죽어도 거기. 밤중에 죽음이 찾아와 우리의 생명을 도둑질해 간다 해도 결국 숨을 데가 없으니 거기가 거기. 죽음이니 삶이니 하는 구분이 있을 수도 없고, 잃으니 찾느니 하는 대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가능하게 된다.

⇒ 도를 아십니까 때문에 도라는 말이 문득 문득 안좋게 느껴진다. 그런 것이 아닌데.


p279 궁극적으로는 이런 사람이 본받는 도,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도야 말로 가장 큰 스승이라는 것이다.


p280 도란?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는 없습니다.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가 없습니다.


p281 도는 체험의 영역이지 말의 대상일 수 없음을 말한다. ‘터득할’ 것이지 ‘떠들’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 ‘떠들고‘ 있는가? 여기서는 “도는 이것이다.”하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도에 대해서는 떠들 수 없다고 떠들고 있을 뿐이다. 도는 자본자근이라고 했다. 앞에도 나온 것처럼 모든 것이 그것에 의지해 있지만 그것은 아무것에도 의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소위 만물은 ‘유대’인데 반하여 도는 ‘무대’라는 것이다. 현대말로 하면 ‘자존’인 셈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라틴말로 ‘aseitas’라는 것이 있다. ‘스스로에 의’이란 뜻이다. 도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지금 ‘그러함’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 체험의 영역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말들을 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느낄 시간이 없이 흘러간다.

 

p285 삶을 잊게 되자 그는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었습니다.

⇒ 나도 삶을 잊게 되고 싶다.


p290~291 글을 읽되 거기에 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핀 다음,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


p293 여기 『장자』에서 말하는 참된 벗이란 선과 덕을 바탕으로 한 우정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맺는 벗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생관이나 세계관의 차원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는 벗, 한번 같이 웃기만 해도 속마음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벗이 진정한 벗이라는 뜻이다. 참된 의미의 ‘길벗’이라야 참된 벗이라는 것이다.


p294 내 왼팔이 점점 변하여 닭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새벽을 깨우겠네. 내 오른팔이 차츰 변해 활이 되면, 나는 그것으로 새를 잡아 구워 먹겠네. 이렇게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오램을 이기지 못하는 법. 내 어찌 이를 싫어하겠는가?


p295 무릇 우리가 삶을 얻은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우리가 삶을 잃는 것도 순리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르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여들 틈이 없지. 이것이 옛날부터 말하는 ‘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는 말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오램을 이기지 못하는 법. 내 어찌 이를 싫어하겠는가?”


p296 인생을 살면 몇 백 년을 살겠는가? 하늘에 비하면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한 것을. 길게 살았다 짧게 살았다 따지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p297 이제 하늘과 땅이 큰 용광로이고 조화가 큰 대장장이라면, 무엇이 되든 좋은 것 아니겠는가? 조용히 잠들었다가 홀연히 깨어나는 것."

⇒ 조용히 잠들었다 홀연히 깨어나는 것, 홀연히 살아가다 조용히 잠드는 것!


p299 『장자』에서는 인간이 행한 행위에 따라 내세가 결정된다는 인과응보라든가 업보를 같은 사상이 없다. 모두 자연이 그 순리에 따라 적절한 길로 만물을 변화시킬 따름이라는 것이다.

⇒ 순리가 무엇인고.


p300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사물을 이런 전체의 맥락 속에서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일 하나하나로 그때그때마다 희희낙락하거나 전전긍긍하거나 애절복통한다.


p305  "이상스러운 사람이란 보통 사람과 비교해서 이상할 뿐, 하늘과는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의 소인이 사람에게는 군자요, 사람의 군자가 하늘에는 소인이라' 한 것이다."


p305 물고기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에서 서로 잊는다.


p308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낫고, 웃음을 즐기는 것보다는 사물과 어울리는 것이 더 나으니, 사물과 편안히 어울려 변화를 잊은 채 텅빈 하늘로 들어가도록 하라."


p310 눈먼 자는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수놓은 옷의 색깔과 상관이 없다. "스승은 만물을 이루어 놓지만 스스로 의롭다 하지 않고, 만세에 혜택을 베풀지만 특별히 편애하는 일이 없고, 옛날보다 오래되었으나 늙지 않고, 하늘을 덮고 땅을 받들고, 여러 가지 모양을 깎아 내지만 재주를 부리지 않네. 여기가 바로 자네가 노닐어야 할 곳일세."


p314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과 하나됨.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좌망입니다."


p318~319 그저 인간의, 나의 어쩔 수 없음을, 그 한계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어리석게 무엇을 탓하며 마음을 상하지 말자. 그저 최선을 다할 뿐. 그러나 만사여의 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자. 이른바 ‘기대 중독’에서 헤어나라 하는 식이다. 말하자면, 주어진 한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극복하는 길을 채택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서 말한 것은 앞에서도 여러 번 지적한 것처럼 운명론이 아니라 안명론이다.


제7편 황제와 임금의 자격


p322 참된 지도자는 그런 인위를 넘어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얻은 그 감화력으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알듯 모를 듯 이끌어 가는, 노자식 무위의 정치, 가만 놓아둠의 정치, 무심의 정치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최소한으로 다스리는 것이 최선의 다스림”이라는 원칙에서 궁극적으로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사람’이다.


p327 지도자는 먼저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그 감화 아래서 모두가 저절로 되어 가도록 하고, 그렇게 잘 도어 가는 것만 확인하는 정도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의 정치’, ‘놓아둠의 다스림’이다.

    새도 화살을 피하려 하늘 높이 날 줄 알고, 들쥐도 잡힐까봐 사당 밑에다 살자리를 마련하는데, 사람들도 도의다, 법령이다, 규정이다 하고 못살게 굴면 어디로 피하게 마련이니 제발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스릴 생각은 아예 말라는 것이다.


p328 "마음을 담담한 경지에서 노닐게 하고, 기를 막막함에 합하여 하시오. 모든 일의 자연스러움에 따를 뿐, '나'라는 것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하오. 그러면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오."


p328 "명철한 왕의 다스림이란,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그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만물에 미쳐도 백성들이 그에게 굳이 기대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한 것으로 알고 기뻐하기 때문이라. 이런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서 있고, 없음의 세계에 노니는 것이다."

⇒ 명철한 왕을 보고 싶다,


p331 참된 지도자는 이슬처럼 공기처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백성들 뒤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다스린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 ‘이름을 들먹이지 않고’, 만사 이렇게 잘 되는 것이 마치 자기들 스스로 잘해서 그런 줄 알고 기뻐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 참된 지도자를 보고 싶다. 지도자가 되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리더쉽 교육도 얼마나 많은데. 지도자들은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그저 명예와 권력이라니.


p339 "아까 나는 그 사람에게 내가 근원에서 아직 나오기 이전의 본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근원 속에서 나를 비워 사물의 변화에 그대로 따라,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고, 물결치는 대로 흘렀지. 그래서 그가 달아나 버린 것이다."


p342 거기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사람처럼 대접하고, 좋고 싫은 일이 따로 없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열자가 이제 남녀를 구분하고,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고,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가르는 일체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초월했다는 뜻이다.


p342 아직 배움을 시작하지도 못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사실 자체가 배움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p344  이름에 매이지 말고  꾀의 차고 되지 말고, 쓸데없는 일 떠맡지 말고, 앎의 주인 되지 마십시오.


p345  이름에 매이지 말라. … ‘무위의 위’를 염두에 두라.

      ‘앎의 주인’이 되지 말라. 잔꾀나 지모의 주인이 돼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부정적인 방법을 버리고 무궁한 도, 사물이 근본을 체득하고, 없음의 경지, 비움의 경지에서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을 하라. 이것이 바로 마음을 거울처럼 한다는 뜻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거울은 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비출 뿐, 밉다고 쫓아 보내고 예쁘다고 받아들이는 짓을 하지 않는다. 앞에 나타나 것이 슬프다고 함께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을 비췄다고 제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출렁거리는 것을 보여 준다고 같이 출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잔잔히 떠오르는 대로 비추는 거울, 이것이 자유인의 고요하고 잔잔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p347 "사람에겐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이런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 줍시다." 했습니다. 하루 한 구멍씩 뚫어 주었는데, 이레가 되자 혼돈은 죽고 말았습니다.

⇒ 혼돈이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가. 내 몸속에도 혼돈이 나갈 길을 만들어야 할까. 혼돈을 가득 채워버릴까.


p349 옛날의 ‘나’는 진정한 ‘나’로 다시 태어나는 ‘변혁’의 긴 여정을 완성하는 것이다.


부록 : 외편, 잡편에서 중요한 구절들


p359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없지요. 한 곳에 갇혀 살기 때문이오. 지금 당신은 좁은 강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비로소 당신이 미미함을 알게 되었소. 이제 당신에게 큰 이 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구려."

⇒ 결국 자신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프레임을 넓혀야 하는 것.


p362 이렇게 자기 것만을 유일한 무엇이라 믿는 것까지는 자유이지만, 그런 잘못된 확신 때문에 드넓은 바다처럼 훌륭하고 신나는 세계에 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구나 그 바다 이야기는 자기가 여태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세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신비'이지만 그것을 듣고 기절초풍할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p364 “원컨대 나랏일을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쥔 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듣자 하니 초나라에는 죽은 지 삼천 년이나 된 신령한 거북이가 있는데, 왕께서 그것을 비단으로 싸서 상자에 넣고 사당 위에 잘 모셔 두었다 하더군요. 이 거북이 죽어서 뼈를 남겨 귀히 여겨지기를 바랐을까요, 살아서 진흙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었을까요?


p367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사에서도 상대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데 쓸데없이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를 해치거나 불리하게 하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p368 "자,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자네는 나더러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냐고 했지. 이 말은 자네가 이미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는 것을 알고 물은 것이네. 나는 호숫가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네."


p369 물고기와 하나가 되면 물고기의 즐거움이 곧 나의 즐거움이 아닌가.


p371~372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변해 죽음이 된 것인데, 이것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의 흐름과 맞먹는 일.  "아내는 지금 '큰 방'에 편안히 누워 있지. 내가 시끄럽게 따라가며 울고 불고한다는 것은 스스로 운명을 모르는 일이라. 그래서 울기를 그만 둔 것이지."


p372 장자는 간디가 말한 일종의 진리파지를 체험했다고 할까, 진실의 깊은 면을 통찰할 때 죽음의 본질을 깨달아, 결국 울고불고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있었다면서 혜자의 오해를 풀어 준다. 여기서도 죽음을 자연스런 변화의 일부로 본다. 죽음을 계절의 변화와 같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 오히려 죽음을 극복한다는 이야기이다. 순명이요, 안명이요, 아모르 파티이다.


p375 ‘의식이 온전’하다는 것은 의식이 둘로 나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의식이 주와 객으로 완전히 나누지 않은 갓난 아기는 침대에서 떨어져도 웬만해서는 다치지 않는다. 술취한 사람이나 갓난 아기의 의식 상태는 ‘주객 미분’으로 온전한 것이고, ‘하늘로부터 얻은 온전함’은 ‘주객 초월’로 운전한 것이다.


p377  기왓장을 놓고 내기 활을 쏘면 잘 맞고, 허리띠 고리를 놓고 쏘면 주저하게 되고, 황금을 놓고 쏘면 마음이 혼란해진다. 기술은 마찬가지인데, 뭔가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 있어서 그 외면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무릇 외면적인 것을 중시하면 내면적인 것에 허술해질 수밖에 없다.

       ‘달생’ 편의 주제는 마음이 주객으로 분리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모으는 것, 전일, 전신, 허심, 무심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 내기 활을 쏜 사람은 상품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져 이런 마음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직 이런 외적 조건에 좌우되어 흔들리는 것은 ‘기술’의 단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에 나오는 목수 재경의 이야기에서 재경이 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할 수 있게 된 준비 과정 중의 하나가 “축하나 상을 받고 벼슬이나 녹을 타고하는 생각을 품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도’를 따르는 경지이다. ‘궁술’과 ‘궁도’의 차이이다.


p380 덕이 온전한 상태, 완전한 허심, 무심에서 생기는 내면의 힘이 겉으로 허세를 부리는 공격 자세를 압도한다는 얘기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원리이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예로부터 나무를 깎아 만든 닭을 정신 수양을 위한 좌우명처럼 몸 가까이 지니면서 내면적인 힘을 배양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p381 저는 거를 만들 때 기를 함부로 소모하지 않고, 반드시 재계를 하고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사흘을 재계하고 나면 축하나 상을 받고 벼슬이나 녹을 타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닷새를 재계하고 나면 비난이나 칭찬, 잘 만들고 못 만들고 하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이 때가 되면 오로지 기술에만 전념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외부적인 요인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완성된 거를 보게 된 후야 비로소 손을 대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둡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과 하늘이 합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드는 것들이 귀신같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p382 숲에 들어가 나무의 본래 성질을 살펴 모양이 더할 수 없이 좋은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서 완성된 거를 보게 된 후야 비로소 손을 대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둡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과 하늘이 합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드는 것들이 귀신이 같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기가 나오는 것은 일체의 외부적인 일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완전히 한 점에 집중한 상태에서 '초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하늘과 하늘이 합한다고 한 것은 내 밖에 있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하늘이 합한다는 것이고 주객이 합일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렇게 독립한 개체인 내가 없어지고 하늘과 도와 하나가 되어 만들기 때문에 “ 그가 만든 것들이‘ 실은 그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신 같은 솜씨‘라고 찬탄 하는 것이다.


p383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입니다.


p384 인간의 사랑이란 이렇게 본래 붙었다가 잘려 나간 다른 쪽에 대한 동경이라고 한다. 아무튼 떨어져 나간 제 짝을 찾아 찰칵하고 들어맞으면 ‘천생연분’이라 삐걱거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의식한다는 것은 삐걱거린다는 것인가? 물론 상대방을 잊을 정도로 서로 완전히 편하게 지내는 것과 등한히 여기거나 업신여기면서 잊어버리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크게 다를 것이다.

⇒ 모일수록 쉽게 흩어지고, 이룰수록 잃는 것도 많아지며, 모날수록 깎이기 쉽고, 높을수록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법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부부일수록 쉽게 다투고 원수지간이 되지 않는가. ‘모날수록 깎인다’는 말에서는 쓸쓸함이 느껴진다. 오로지 올곧은 절개와 청렴함만 지키려는 사람들 중에 화를 면한 사람이 많지 않다. -왕멍의 쾌활한 장자읽기, p432


p387 궁극적으로는 쓸모가 있거나 없거나 어느 한쪽에도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쓸모 있고 없고를 떠나 허심, 무심의 경지, 집착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 자유자재한 경지가 궁극의 자리라는 것이다.


p389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습니까?


p393 예술이란 물리적 사실보다 내면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림은 붓을 자연스럽고 순간적으로 움직여 그려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 이야기라고 했다. 참된 예술가는 내면적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이기에 궁극적으로 인습이나 통상적 형식에 전혀 구애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 예술가에 가해지는 이러한 고정관념은 좀 벗어날 수 없을까.


p394 손숙오가 대답했다.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오는 것을 물리치지 아니하고 떠나는 것을 붙잡지 않을 뿐입니다. 얻고 잃음은 나와 관계없는 것. 그러기에 걱정하는 기색이 없을 뿐입니다.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구나 그 영예가 지위 때문인지 나 자신 때문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위 때문이라면 나하고는 상관이 없고, 나 때문이라면 그 지위와는 상관이 없는 것. 나는 그저 의연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려 하는데, 어느 겨를에 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는 일 같은 데 마음을 쓰겠습니까? -<전자방> 21:13


p395 집착을 버리는 일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는 일 같은 네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다. 이를 요즘 말로 하면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법구경』에는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듯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장자는 아무데도 얽매이지 않는 허허로운 마음을 중요하게 본 데 반해, 공자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심을 핵심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p396  너는 네 모습을 바르게 하고, 눈길을 하나로 모으라. 하늘의 화기가 이를 것이다. 네 앎을 없애고 네 의식을 하나로 모으라. 신이 찾아와 머물게 되고, 덕이 너를 아름답게 하고, 도가 네 안에 살리라. 너는 새로 난 송아지처럼 사물을 보고 그 이유를 묻지 않게 될 것이다.


p401 장터에서 남의 발을 밟으면 실수를 정중히 사과하지만, 형의 발을 밟으면 따뜻한 손길을 주기만 하고, 어버이의 발을 밟으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됩니다.


p408 체념이란 본래 '체' 곧 진리를 깨달아서 생기는 안달하지 않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을 뜻한다.


p410 도움이 당장 필요한 사람에게는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적기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자는 사람 무서울 것 없다고 했지만, 도와 달라고 할 때 나중에 보자는 사람, 정말 믿을 것 없다.

⇒ 그렇지. 도와달라고 할 때 도움을 주는 이에게 믿음과 애정이 가지.

 

p411 혜자 "자네의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 "쓸모 없음을 알아야 쓸모 있음을 말할 수 있지. 땅은 한없이 넓지만 사람에게 쓸모 있는 땅은 발이 닿는 만큼뿐일세.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남겨 놓고 그 둘레를 모두 황천에 이르기까지 다 파 없애면 그 쓸모 있다는 땅이 그래도 정말 쓸모 있는 것일 수 있겠는가?"


p415 “땅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되고, 땅 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되거늘 어찌 한 쪽 것을 빼앗아 딴 쪽에다 주어 한쪽 편만 들려 하는가?

⇒ 장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한 말이란다. 그까짓 장사 따위에 신경쓰겠는가.

  “죽음의 세계는 위로는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신하가 없다.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운행도 없어 느긋하게 천지자연의 무한한 시간을 봄과 가을로 삼으니 비록 임금 노릇하는 것이 아무리 즐겁다 해도 이보다 더 즐거울 수는 없다. 내가 어찌 임금의 즐거움을 버리고 인간 세상의 고생스러움으로 다시 돌아가겠는가?”



3. ‘내가 저자라면’


■ ‘장자’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제1편 자유롭게 노닐다(逍遙遊)

 

제2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齊物論)

 

제3편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養生主)

 

제4편 사람 사는 세상(人間世)

 

제5편 덕이 가득함의 효시(德充符)

 

제6편 큰 스승(大宗師)

 

제7편 황제와 임금의 자격(應帝王)

 

후기 

 

 

 장자는 총 33편 6만 4606자로 이루어져 있고 <내편>, <외편>, <잡편>으로 묶여 있다. 그리고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이 실려 있다. 이와 같은 구성은 위진 시대 사상가 곽상(郭象)이 편집한 것이라 전하고 있다.

 서기 1세기 경에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장자>가 전체 52편으로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고  사마천의<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편에서는 장자가 10여 만 언을 썼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곽상이 편집한 것, 즉 오늘날 전해지는 <장자>는 원문이 일정 부분 소실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실된 것인지, 곽상이 편집하면서 빼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학자들은 이 중 <내편> 7편은 장자가 작성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 외의 편들은 장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이들이 기록한 일종의 논문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내편>은 1편 「소요유(逍遙遊)」, 2편 「제물론(齊物論)」, 3편 「양생주(養生主)」, 4편 「인간세(人間世)」, 5편 「덕충부(德充符)」, 6편 「대종사(大宗師)」, 7편 「응제왕(應帝王)」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장자의 구성을 볼 때, 이 책은 장자의 <내편>을 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자가 직접 썼다는 <내편>의 내용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을 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추가로 <외편>과 <잡편>의 몇 구절을 뽑아 그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니까 뼈대는 <내편>에 대한 저자식의 풀이이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중요한 것은 제일 처음에 제시된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처음이라 보다 꼼꼼하게 읽어서인지 제1편 소요유 편이 제일 인상에 남는다. 제목도 “자유롭게 노닐다~”이다.

 붕새와 메추라기 이야기는 여러 생각할 거리들을 만들어줬고 그와 더불어 다른 장자 책의 해석과 풀이와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편에서 나오는 바람이야기가 왜 닿는지. 지금 이 책을 읽는 시점에선 소요유 편의 붕새와 메추라기 이야기와 더불어 바람이야기가 내 맘에 얹어진다.


■ 보완점이라기보다는..


 오래 전 한문으로 쓰여진 다른 나라의 글을 해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장자에 대한 해석을 단 많은 책들이 있듯이 결국 세상의 모든 책들은 자기식대로 소화하고 읽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의 특징은 물론, 장자에 대한 오늘날의 시각, 현대적 의미의 해석을 가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요즈음의 책들이 다 그러하니 이 책이 가지는 뚜렷한 특징이라고 보기엔 미흡하다. 그렇다면 뭘까. 저자의 프로필을 보면 더욱 쉽게 이해가 되는데 이 책은 장자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인 특징이다. 아마도 기독교인들은 보다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라면 멈칫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편으론 장자 원전 자체가 지나치게 은유적이고 비유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여기에 기독교적인 해석이 들어가 더욱 그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더욱 몽롱해진다는 이야기다. 좀더 명쾌함이 필요하지 않나.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 이해, 영적인 해석에 덜 노출된 나 혼자만의 문제일까.

 원문을 해석하고 풀이하면서 반복적으로 단어를 쓰는 경향이 있다. 해석의 폭이 일관적이라고 해야 할지, 좁다고 해야 할지, 거듭 반복된 문장과 단어가 내용에 대한 일관됨을 견지할 수는 있지만 부족하다는, 미흡하다는 느낌이 반복적으로 들게 했다. 프레임의 차이일 수 있을 것이고 몇 번 거듭됨 때문인지 강신주와 왕멍의 장자 해석이 더 일깨움으로 다가왔다. 글이란 어찌어찌 해도 코드라는 것이 있구나 생각한다.  ‘코드’를 물리치는 책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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