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찰나
  • 조회 수 3344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8월 25일 11시 55분 등록

1.제목: 장자


장자책.jpg 


- 출판사: 현암사

- 풀이: 오강남

 


2.저자 : 장자 (기원전 369?-기원전 286)


 장자.jpg


중국 고대 도가(道家)의 사상가. 이름은 주(). ()에서 태어났으며 몽() 출신이다. 노자(老子)의 사상을 이어받고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대성시킨 사람이라고 하여 노장사상가(老莊思想家)라고 일걸어진다. 동시대에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재성은 의심스럽다. 전국시대 말기, 도가의 사상가들이 원본 장자(莊子)를 편찬할 때, 이것을 장주(莊周)에게 가탁(假託)하여 장자라 명명한 것인 듯하다. 장자는 공자맹자보다 노자와 함께 장자가 존중되기에 이르렀던 한대 초기에, 전국 말 이래의 도가의 논저(論著)를 부가하여 성립한 것으로서, 통일된 체계는 없지만 도가 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볼 수 있다.

대략 기원전 370년이나 369년에 태어나 300년이나 280년 사이에 죽었다고 한다. 그 중에 369~286년을 가장 믿을 만하다고 한다. 결국 장자는 제나라가 송나라을 멸망시킨 해가 286년인데 이를 보지 못한 것 같다.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칠원리라는 하급관리를 지냈다. 태어난 곳은 몽()으로 지금의 하남성 귀덕부 상구현 부근이라 하며 그 곳에서 칠원리 (漆園吏--옻나무 밭을 관리하는 하급 관리)를 지냈고 집안이 가난하여 하천 관리인에게 식량을 얻으러 갔다고 한다. 그의 조국인 송은 약소국으로 주변국가에게 침략을 당했으며 상황은 가혹하고 불안과 부자유 그리고 어두은 현실 뿐이었다. 장자의 생계수단이 칠원리인 것을 보면 소생산자였고 평민계층이었다.(하층의 지식인) 사상의 발생은 관리인으로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독서, 유람, 관찰, 상상의 기회를 가졌고 대자연과 다방면의 하층 노동자들과 접한 것이 장자사상의 형성 배경으로 본다.전국시대인 BC300년 무렵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며, 칠원(漆園)의 말단관리가 된 적이 있을 뿐 대개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초()의 위왕(威王)이 장자의 소식을 듣고 초빙하였으나 그는 "돌아가시오. 나를 모독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도랑 안에서 혼자 즐기며 놀지 나라를 가진 자에 의해서 얽매이지 않고 종신토록 일을 맡지 않음으로써 내 뜻을 즐겁게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자의 철학은 묵자와 같이 소생산자의 사상적인 정서를 대표한다.

 

 

그 기본적 사상의 중심은 당시 지배자의 지위에서 몰락하고 있던 사상가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삶에 얽힌 근심과 고난으로부터 관념론적으로 도피하려고 한 인생론에 있다.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근심의 근원인 자기의 육체정신을 버리고 '허정'(虛靜), '염담'(恬淡)의 심경에 도달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침해받지 않는 자유독립을 얻어 세계의 밖에서 초연하게 노니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한 사람이 '진인'(眞人)이다. 이 인생론의 근저에는 세계는 불가지의 실재인 ''()의 표상이라는 세계관과, 개념적 인식과 가치판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고 철저한 무지(無知)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지식론이 깔려 있다.

 

이 지식론은 명가(名家)의 궤변이나 전변(田騈)의 제물설(齊物說)의 비판적 섭취에서 성립, 얼마 후에는 세계관과 혼합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은 ''()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존재론, 우주 생성의 전설을 받아들여 태초의 '혼돈'=''로부터 세계가 유출하였다고 하는 우주생성론 및 음양 오행설을 채용하여 물()의 생사(生死)를 기()의 집산으로 설명한 자연론 등이 전개되었다. 장자의 새로운 부분에는 위와 같은 생각에 기초하여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인민을 통치한다고 주장한 정치 사상도 있다.

 

후세에 노자와 함께 부를 때 노장(老莊)이라 부른다. 도교에서는 남화진인(南華眞人), 또는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 부르기도 하며, 장자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 부른다. 삼국지연의에서 황건적의 지도자 장각에게 도를 전수하는 선인이 바로 남화노선(장자)이다.

 

도가(道家)의 대표자인 장자는 도()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보았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고,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이므로 자연(自然)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적 사고를 지니고 있던 사상가이다.

 

그의 저서인 장자는 내편(內編) 7, 외편(外編) 15, 잡편(雜編) 11로 모두 33편으로 구성되었으며,그 중 내편이 비교적 오래되었고 외편과 잡편은 후학(後學)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추측된다. 저자의 인식에 대한 철저한 상대성은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나비의 꿈'(胡蝶之夢)에 잘 나타나 있다.

"언젠가 나 장주는 나비가 되어 즐거웠던 꿈을 꾸었다. 나 자신이 매우 즐거웠음을 알았지만, 내가 장주였던 것을 몰랐다. 갑자기 깨고 나니 나는 분명희 장주였다. 그가 나비였던 꿈을 꾼 장주였는지 그것이 장주였던 꿈을 꾼 나비였는지 나는 모른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음은 틀림없다. 이것을 일컬어 사물의 변환이라 한다. "

그리하여 노자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으로 돌아갈 것과 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 옮긴이 : 오강남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 종교학 박사 학위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역임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 역임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더불어 종교너머, 아하!’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이해와 분석을 담은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종교 너머, 아하!가 있으며, 최근 인생과 종교에서의 깨달음을 담은 움켜쥔 손을 펴라,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펴냈다. 번역서로서는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예수 하버드에 오다, 등이 있다.

 

 

-참조

http://www.yes24.com/24/AuthorFile/Author/125367

http://ko.wikipedia.org/wiki/%EC%9E%A5%EC%9E%9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89547&cid=41978&categoryId=41985

http://www.yes24.com/24/AuthorFile/Author/109020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독자들에게 >>

 

-7 김치찌개, 운명적 해후

 

-7 중국고전 번역가로 유명한 웨일리(Arthur Waley)장자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심오하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 장자를 읽기 전에 >>

 

 

 -17 일반적으로 도교(Taoism)라 하는 것은, 엄격하게 따져, ‘도가 사상도교 신앙으로 양분할 수 있다. 도가사상이 인간의 내면적 초월과 자유를 추구한 것이라면, 도교신앙은 주로 육체의 장생불사를 우선으로 생각한 것이다. 도가 사상의 근간은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다. 그래서 후대에 와서 그것을 흔히 노장 사상이라고 한다. 노자의 사상은 도덕경이라는 책에서, 장자의 사상은 장자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 곽상이 편집한 장자가 바로 우리가 지금 보는 장자라는 책이다.

그때까지 떠돌아 다니던 여러 가지 사본들을 정리하여 65000여자 33편으로 줄여서 편집

-21노자와 장자의 기본적인 차이점들은 무엇인가?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나는 점을 몇가지만 들어보자.

 

첫째, 노자의 도덕경이 주로 간략한 어록이나 시나 아름다운 산문 형식인데 반하여, 장자는 주로 이야기 형식이다.

 

노자가 자상하면서 근엄한 철인의 풍모를 지녔다면, 장자는 투철한 눈매로, 때때로 크게 껄껄 웃고, 가끔은 험두고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모습을 지녔다고 하겠다.

 

둘째, 노자의 도덕경은 어느면에서 정치 지도자를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 참여를 염두에 두었다. 노자가 도가적 정치실현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장자는 도가적 의 완성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셋째, 노자가 도를 주로 생성변화의 근원으로 파악하고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궁극적인 귀착점이라고 강조한 데 반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근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변화에 몸을 맡겨 함께 흐르거나 그대로 변하기를 더욱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은 주로 도의 생()하는 측면을 말하였는데, 장자는 도의 화()하는 기능을 부각한다.

 

변화 그 자체의 중요성이다. 근원을 알고 변화를 하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 소인가?

 

-22 장자가 우리에게 보내는 초대장

그러면 장자는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무엇을 가르쳐주려 하는가?

엄격히 말하면 가르쳐주려는 것이 없다. 무엇을 가르쳐주기 보다는 우리가 떠받드는 상식적인 고정관념, 이분법적 사고 방식, 거기에 기초를 둔 맹목적인 가치관, 윤리관, 종교관 등을 우리에게 스스로 깊이 살펴보게 해서 이런 것들의 내재적 모순과 불합리함을 발견해 없애도록 도와 줄 뿐이다. 우리 얼굴을 씻어주고 단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거울을 들어주는 셈이다. 좀 어렵게 말하면 장자는 한가지 체계적인 인식 내용 (cognitive contents)'을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일깨움(evocativeness)'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깨달을 때, 우리는 부자연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풀려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장자에서도 , 노자의 도덕경에서와 같이, 인위적이고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런 모든 행동을 초극한 상태, 분별지, 소지, 차별지 등 모든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넘어선 상태, 야심과 욕망과 우월감 등 일체의 자의식을 극복한 상태, 이런 빈 마음의 상태에서 도와 하나가 되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신나는 삶, 힘있는 삶, 풍요로운 삶, 력이 넘치는 삶, 절대적인 자유의 삶으로 이끄는 장자의 초청을 발견한다.

 

스스로 깨달아야 하리라.

 

-23 구속론적 관심 (soteriological concern)

 

 


<< 1편 자유롭게 노닐다(逍遙遊) >>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고

 

-26 이 첫부분과 장자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화이위조(化而爲鳥)()이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장자의 주제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변화의 가능성과 그 실현이다.

 

-27 장자첫머리는 이처럼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실존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는 인간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다. 속이 후련하다.

 

-27 여기 나오는 알, 물고기, 붕새가 겉으로 엄청나게 달라 보이는 것들이지만 본질을 보면 본래 따로 독립한 사물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물고기나 붕새도 본래는 알이었다. 그렇게 큰 것들도 조그만 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씨알을 품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무한한 가능성을 자각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런 무한한 가능성은 IQ라는 하나의 잣대로 모두 폄하되고, 이론적 지식을 가진것으로만 인간을 평가했는데 인간은 그 이상의 많은 가능성을 가지는 존재다.

 

 

매미와 새끼 비둘기

 

-31 가까운 숲으로 놀러가는 사람은 세끼 먹을 것만 가지고 가도 돌아올때까지 배고픈 줄 모르지만,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하룻밤 지낼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달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매미나 새끼 비둘기 같은 미물이 어찌 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조금 아는 것(小知)으로 많이 아는 것(大知)을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小年)으로 긴 삶을(大年)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준비할것에는 이런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32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이 매미와 새끼 비둘기 같은 존재이다. 동안 인간의 조건으로 숙명처럼 뒤집어 쓰고 다니던 실존적 한계의 껍질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훌훌 날아다닐 수 있게 된 사람들의 초월적 삶은 우리 보통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눈이 어두운 우리에게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도대체 뭘 먹자고 저렇게 높이 날아다닐까? 정신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실존적 한계의 껍질이 마치 내 옷인양 입고 다녔는데, 이제 그 껍질을 벗어 버려야 겠다. 그 껍질마저 나의 일부였지만 이제는 그것을 벗고 나와야 하리라.

 

-33 같은 도가 사상가로 장자보다 먼저 살다 간 노자는 도덕경에서 ,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몹시 비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가치를 제대로 모르기에 웃음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동안 도를 듣고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제는 도를 듣고, 힘써 행하려 해보자. 그것만이 살길이다.

 

-34 마침내 우리도 붕새처럼 변해 자유를 누려야 하겠지만, 당장은 매미나 새끼 비둘기처럼 어리석은 짓이나 말아야겠다. 그러고 나서 차분하게 이런 편견과 선입견을 나날이 없애 가는도의 길을 걸으며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금의 부자유한 삶의 모습을 직시하고, 붕새처럼 이를 초월해서 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이 참으로 신나는 삶이 된다는 것을 꿰뚫어 봐야 하겠다. 이런 자각이 건전하고 싱싱한 종교를 추구하는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붕새처럼 초월해서 살아가야 하리라.

 

-36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든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든 이런 이야기의 일차적 목적은 우리들에게 정확한 역사적, 혹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정보(information)를 제공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변화(transformation)를 일깨우려는 것임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37 그런 큰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이 기체역학상 가능하냐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붕새의 변화와 초월과 자유에서 우리가 가진 실존의 한계를 초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고, 우리 스스로 변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자유의 네 단계

 

 

-40 최종의 절대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바로 구경究竟에 이른 지인(至仁)이요, 신인神人이요, 성인聖人이다. 달리 표현하면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없고, 공로가 없고,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아나 공로나 명예의 굴레에서 완전히 풀려난 사람들이다.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유기, 유공, 유명에 집착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능같은 것인데, 이제는 이런 집착에서 벗어나, 무기, 무공, 무명해질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하리라.

 

 

막고야산의 신인

 

 

-48 도덕경의 말처럼 함이 없는 삶(無爲之爲)’을 실천한다. 이런 사람이 한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사람들이 그 행동을 알지 못한다.

 

 

송나라 모자 장수와 요 임금

 

 

-50 쓸모없음의 더욱 큰 쓸모(無用之大用)의 진리

 

 

큰 박과 손트는 데 쓰는 약

 

-52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한 가지인데, 한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고, 다른 쪽은 무명빠는 일빡에 못했으니, 똑같은 것을 가지고 쓰기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게 아닌가?

 

 

쓸모 없는 나무?

 

 

-55 사물은 쓰기에 따라 쓸모 있기도 하고 쓸모 없기도 하다는 것이다. 장자의 이런생각을 비본질론적 견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머리 속에 이미 형성된 쓸모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쓸모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55 세상에 버려야 할 것, 쓸데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비본질론적 견해를 다른 말로 해서 시각주의적 접근(Perspectival approach)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제대로 된 시각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리라.

 

 

-57 아무튼 이처럼 궁극 변화, 초월, 절대 자유, 해방을 말하는 장자의 가르침이 논 갈고, 길쌈하고, 아기 기저귀 갈고, 장사하고, 돈벌고, 출세하는 일에는 분명 쓸모가 없겠지만, 그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현상계의 실상을 궁구하고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꿰똟어 보게 해줄 뿐만 아니라, “주고받기와 시비와 깔고앉음과 깔리움밖에있을 수 없는 인간의 정황, 이 숙명적 실존의 한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풍요하고 자유롭고 싱그럽게 사는 일에 쓸모가 있다면, 이 어찌 저 자질구레한 일들의 쓰임새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궁극 변화, 초월, 절대 자유, 해방 진정으로 풍요하고 자유롭고 싱그럽게 사는 일에 쓸모가 있게 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리라

 

-57 변혁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 다음에 나오는 제2편의 중심과제이다.

 

 

 

<< 2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 (齊物論) >>

 

 


-59 이 편의 주제는 우리가 우리의 실존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립의 세계에서 대립을 초월한 하나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의 세계, 실재의 세계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사물의 한쪽만 보는 우리의 상식적, 분석적,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에서 사물의 진상을 전체적으로 볼수 있는 예지와 직관과 통찰을 체득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60 이때의 하나는 다양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화와 일치를 의미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한쪽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양쪽을 다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일한 것이 보기에 따라 크기도 하고 동시에 작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비是非를 넘어서는 세계, 제일, 제동, 여일의 세계, 서양의 중세 사상가 쿠자누스가 말한 양극의 조화가 이루어진 세계,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나는 나를 읽어버렸다

 

 

-62 오상아(吾喪我)장자의 핵심 개념에 속한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려, 내가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63 꼭 막힌 자의식에서 탁트인 우주의식으로 변한 것이다. 근본적인 의식 변혁으로 희랍어의 메타노이아이다.

 

나는 잊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Obliviscor, ergo sum)

 

불교에서는 명상을 할 때 몸과 마음이 완전히 정지한 상태를 유지하라고 가르치는데 이를 산스크리트어오 사마타(samatha)라고 한다. 그러면 거기서 사물에 대한 직관과 통찰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산스크리트어로 비파샤나라고 한다. 마음과 몸이 완전히 조용하게 가라앉은 것이 정이고, 그렇게 되어 눈이 밝아진 것이 혜이므로 이를 정혜(定慧)라고도 한다. 이른바 삼매(三昧, samadhi)와 반야(般若, prajna)이다.

 

-64 아무튼 자기를 잃어버리고 비운 상태, 이른바 상아, 무아, 망아, 망기라는 자기초월의 경지에 들어가야 비로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수인식능력의 활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물론齊物論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곧 일체의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차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얻는 것이다

 

스스로 몰입해서 빠져드는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이 단계를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스스로 좀 더 깊어져야 직관을 얻을 수 있으리라.

 

-64 이론에 따라 지적知的으로 추구하는 한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스스로를 잃어버린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하늘의 퉁소 소리

 

 

-68 형태가 없는 형태, 존재가 아닌 존재, 소리가 아닌 소리

 

 

지적 활동과 감정의 작용

 

-70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여러 가지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기에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이런 것들이 나타날 턱이 없지. 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이나 이런 변화가 나타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구나.

 

-72장자에는 마음을 묘사하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크게 두가지로 나누면 1)이분법적 상식의 세계에 머물러서 변하지 못한 마음, 곧 분별심으로서의 마음 2)이를 초월한 마음, 곧 이쪽저쪽을 함께 보는 성인의 마음이다. 이 문단에서는 아직 성인의 마음으로 변하지 못한 일상적 마음의 상태와 그 작용을 묘사했다. 장자는 이런 일상적인 마음, 우리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주관한다고 착각하고 그 이상의 존재를 모르는 마음이 바로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고, 이런 마음의 불완전함을 깨달아 이를 잃고 초극해야 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참주인 (眞宰)-진재(재상재)

 

 

-75 마음이 몸보다 나은가?

 

-75 참주인을 왜 알아보지 못하며, 알아보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는 무엇인가?

 

말을 한다는 것은

 

 

-79 모두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처럼 자기가 만져 본 일방적이고 부분적인 단견을 내세워 서로 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코끼리가 구렁이처럼 생겼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눈을 뜨고 코끼리를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눈을 떠야 구렁이 같은 면과 기둥 같은 면을 다 본다. 이를 일러 밝음()’을 얻음이라 한다.

 

지금까지는 내가 본 것, 내가 안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많이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무의미한 짓은 이제 그만 두고 밝음을 얻도록 해야겠다.

 

이것저것

 

-81 사물은 모두 저것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모두 이것아닌 것이 없다. 자기를 상대방이 보면 저것이 되는 줄을 모르고, 자기가 자기에 대한 것만 알뿐이다. 그러기에 이르기를 저것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저것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것저것이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방생方生이라는 것이지

 

늘 이것 아니면 저것. 그런 것 때문에 많이 싸웠다. 하지만 이것과 저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떤 관점으로 접근해 나가느냐의 차이였다.

 

-81 [하늘의 빛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동시에 저것이고 저것은 동시에 이것이다. 성인의 저것에는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다. 그러면 저것이것은 따로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저것이것이 상대적 대립관계를 넘어서서 없어지는 경지를 일컬어 도의 지도리道樞-지도리 추, 나무 이름 우)’라 한다. 지도리이기에 회전의 중심에서 무한한 변화에 대응한다. 옳음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요, 그름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 그러므로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밝음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설 수 있고, 꿰뚫어볼 수 있는 밝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83 장자가 여기서 이 말을 인용한 것은 혜자의 궤변 철학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말장난을 하자거나 어느 한 편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우려면, 사물의 한 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위한 구속론적 관심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사물을 이렇게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것이고, ‘도의 지도리에서 보는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이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밝음이다. 중세 철학자 쿠자누스가 말한 ‘Coincidentia oppositorum'(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이다.

 

 

손가락과 말

 

 

-89 이와 같은 이유로 작은 풀줄기든 큰 기둥이든, 추한 사람이든 서시든, 사물은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 야릇한 것이라도, 도의 견지에서 보면 모두 통하여 하나가 된다. 나누어짐이 있으면 이루어짐도 있고, 이루어짐이 있으면 허물어짐도 있다. 모든 사물에는 본래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따로 없이 모두 통하는 하나이다. 오로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모두 통하는 하나를 깨닫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차별의 ] 범주 대신 [양쪽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것에 머무를 수 있다.

보편적인 것이란 쓸모있음을 말한다. 쓸모있음이란 통함이고 통함이란 즐김이다. 즐김은 도에 가까움이다.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라 한다.

 

 

-90 도는 절대적이므로 가장 큰 것보다도 더 크고, 동시에 가장 작은것보다도 더 작다. 도는 매듭이나 경계, , 구분, 꿰맨줄이 없는 전체’, ‘온전함’, ‘하나’, ‘포괄자’, ‘분별되지 않은 것’, ‘무조건 적인 것’, 인간의 생각이 전혀 먹혀 들어갈 수 없이 빈 것’, 보통 사물과 완전히 달라 그냥 사물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물이 도와 하나라고 생각하면 거기엔 장단, 고하, 미추, 시비 등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여러 번 지적한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의 특성인 양극의 조화라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보는 능력이 필요하므로, 원래 익숙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보았다가 이제 다른 각도로 보도록 노력을 해야 하리라.

 

 

조삼모사

 

 

-91 사물이 본래 하나임을 알지 못하고 죽도록 한쪽에만 집착하는 것을 일러 아침에 셋이라 한다.

 

-92 깨치지 못한 인간들이 사물의 양면을 동시에 보지 못함과 궁극 실재가 하나임을 모르는 것을 지적한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함축한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92 ‘하늘의 고름이란 의인의 밭에도 고르게 비를 내리는 하늘의 공정함이고, ‘두 길을 걸음이란 시비 등 이분의 세계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경지이다. 이런 것은 역시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인시因是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신이 끼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색안경을 이제는 벗어야 한다. 그래야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기리라.

 

 

세 가지 지극한 경지

 

 

-94 옳고 그름을 따지면 도가 허물어진다. 도가 허물어지면 욕망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루고 허물어지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이룸과 허물어짐이라는 것이 따로 없는 것 아닐까?

 

-95 성인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현란한 빛을 없애려 한다. 그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구별하려 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에 머문다. 이것이 바로 [대립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 ‘밟음()’이다.

 

 

도에는 경계도 이름도 없다

 

 

-108 도덕경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라고 했다.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 말로 하지 않는 변론(不言之辯)과 도라고 할 수 없는 도를 아는 사람(不道之道), 이런 사람이 은근한 빛을 감추고 있는 하늘의 보고寶庫이다.

 

이런 엄청난 모순적인 관계를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이미 말하면 또 그것은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고수단계로의 반열에 오른다면 좋겠다.

 

 

요 임금과 세 나라

 

 

-110 해는 우리의 이성을 상징하고, ‘은근한 빛은 이성을 초월한 경지를 의미한다고 보고, 아직 이성의 영역에 머무는 한, 도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는 실체를 깨달아야 하리라

 

 

앎과 모름

 

 

-112 ‘보편타당진리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런 보편타당한 진리를 기준으로 하여 사물을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판가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어떤 잣대로 사물을 이것과 저것으로 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판단은 모두 각자의 처지에 따른 것이므로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잣대로 분별심을 내지 말고, 절대화하지 말고, 그저 들어보고 이해해나갈 수 있도록 하자.

 

 

사람과 미꾸라지

 

 

-114 내가보기에, 인의仁義의 시작이나 시비是非의 길 따위의 것은 [결국 이처럼 주관적 판단 기준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 번잡하고 혼란한데 내 어찌 이런 것이나 따지고 앉아 있겠는가?

 

상대적이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의니 시비니 하는 것도 모두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환경과 상황에서 형성된 임의적, 주관적 규범이지 ,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절대적인것인양 얼마나 오랫동안 의미 없는 애기들을 하고 있었는지. 이에 대해서 큰 각성을 해야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하리라.

 

여희의 후회

 

 

-123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마시기 직전,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간다. 나는 죽음의 길, 너희들은 삶의 길, 어느 길이 더 좋은 것인가 신만이 알것이라고 한말을 연상키셔 주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장자는 죽음 자체를 찬양한 것이 아니다. 장자 전체를 통해서 보이듯이 삶이든 죽음이든 어느 한쪽을 절대시하여 어느 한쪽에 집착하는 거을 경계한 것이다. 장자는 삶과 죽음은 사계절이 바뀌는 것과 같이 자연스런 변화 과정일 뿐이므로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고 슬퍼할 것이 없듯이 에서 죽음으로 변화하는 것에 야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것이리라.

 

-123 옛날의 에서 새로운 , ‘변화되지 않은 에서 변화된 로 넘어가는 정신적 변화를 이야기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금의 익숙한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 자기 중심적인 내가 자기에게 해방된 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익숙하고 편한 예전의 를 떠나 보내는 것이 마치 죽는 일처럼 싫은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이런 일상의 에서 놓여나기 위해 신앙의 도약을 감행할 수 있다.

 

그래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용기이리라. 세상에 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없었던 것도 아니듯이

 

-125 영적 죽음과 부활

여희나 프시케처럼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에 안주하지 말고,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 로 탈바꿈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영적 죽음과 부활. 이런 단계를 이제 거쳐서 다시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꿈에 술을 마시며

 

 

-126 드디어 크게 깨어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바탕의 큰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어쩌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전의 삶의 시간속에서 벗어나 무지의 세계에서 다시 도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일지도

 

-127 꿈이 꿈인 줄 알려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 삶이 꿈인 줄 알려면 이 삶에서 크게 깨어나야(大覺)'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범속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큰 깨어남, 큰 깨달음, 큰 깨침이 없기 때문에 이 인생의 꿈속에서 그것이 꿈인줄로 모르고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과 마소 치는 사람을 차별하고, 부자와 가난한자를 차별하고, 출세한다. 돈을 번다. ’남보란 듯 살아본다하면서 아등바등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삶이라고 주장하니 그야말로 꼭 막혀도 한참이라는 것이다. 공자도 구작가도 꿈이고, 이렇게 모두가 꿈이라고 하는 장오자 자신도 꿈인데

 

우리에게 삶이 꿈이며 여기서 크게 깨어나야 한다고 설득력있게 가르쳐 깨닫게 해줄 사람이 있다면, 비록 만세에 한 번 정도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 귀중함을 생각하면 아침저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자주 나타난다고 할 정도라는 것이다.

 

스스로 대각하여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논쟁이 되지 않음은

 

 

-131 모든 의견은 결국 각자의 견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른바 보편 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러 번 지적한 대로 사각주의입장 없는 입장을 말한다

 

의견은 각자의 생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그걸 듣고 감정에 휩싸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엷은 그림자와 본 그림자

 

 

-133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망량(罔兩,엷은 그림자)은 자신이 본 그림자(, 본 그림자)에 완전히 의존하면서도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본 그림자만 가지고 독립성이 없다느니 지조가 없다느니 나무랐다는 점이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딴 사물에 의존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망량처럼 그 사실을 모르고 어떤 사람은 영처럼 그것을 안다.

 

나도 명량처럼 왜 그런지도 모른채 휘둘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영처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 왜 내가 외부에 흔들리게 되는것인지

 

 

나비의 꿈

 

 

-134 사물의 변화 (物化)

 

-137 종이와 구름, 구름과 종이, 장자와 나비, 나비와 장자, 서로 넘나 들어 그야말로 자유자재이다. 이것이 이른바 물화物化이다. 이런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일은 반드시 꿈을 매개로 하지 않아도 된다. 사물을 깊이 통찰하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사물을 고정한 무엇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서로 어울려서 함께함을 볼 수 있다. 꿈은 우리에게 이런 세계가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상징적으로 암시해주는 매체 노릇을 해주는 셈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세계는 이 편 서두에서 말한 나를 잃어버린 상태(오상아)’에서 진정으로 체득할 수 있는 세계요, 이런 세계를 체득할 때 쓸데없는 아집, 편견,국지주의, 자기 중심주의, 일방적 단견, 오만등에서 풀려나 관용과 아량과 트임과 조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세계에서 노닐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가 이렇게 길고 어려운 논의를 통해 우리에게 일러주려고 한 결론인 셈이다.

 


 

<< 3편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養生主) >>

 

 

 

삶에는 끝이

 

-141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아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입니다

 

주객이 전도외었는지도 모른채 그냥 달리고 있었다. ? 남들이 열심히 달려가니까.

하지만 이제는 좀 더 다른 시점으로 접근을 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143 도덕경48장에서도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이라고 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이나 단견 같은 이분법적이고 일방적인 의식으로 얻은 지식을 하나하나 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런 것을 더 얻지 못해 안달하며 쏘다니면 이야말로 위엄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앎을 버림(unknowing)', 혹은 배운 것을 버림(unlearning)'에 이를 때 ,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여기서도 결국 지식이 아닌 직관으로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음을 말한 셈이다.

 

지식이 오히려 스스로를 고정관념과 편견에 쌓이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히려 알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직관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나가야 한다.

 

-144 사회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 같은 것은 좋지 않다는 뜻인가? 이런 질문에 장자는 찬찬히 미소를 지으며, 훌륭한 일일 수 있다. 정의를 위해 힘껏 싸워 보아라. 결국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그러고 나서 스스로 더욱 근본적인 일이 있음을 발견하라.” 고 타이르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시간은 싸우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이제 알겠다. 그리고 근본적인 일이 있음을 이제 발견했으니 그것을 더욱 더 매진해보자.

 

 

144 표피적 행동이 아니라 의연하고 묵직하게 중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이편에서 강조한 양생의 요체인 셈이다.

 

-145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거기에 몸을 맡기라

 

 

포정의 소 각뜨기

 

 

-146 문혜군이 말했습니다. “참 훌륭하도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요리사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 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에 따를 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 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단순히 기술에서 도의 단계로 넘어서는 것이다.

 

-147 훌륭한 요리사는 해마다 칼을 바꿉니다.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요리사는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동안 이 칼로 소를 수천마리라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칼날은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 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빈 것처럼 넓어,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 그러기에 19년이 지났는데도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서 갈려 나온 것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육과 뼈는 닿은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 시선은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흐뭇한 마음을 칼을 닦아 갈무리를 합니다.

 

도의 단계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마치 물 흐르듯이 ... 그리고 남과 공유하기 위해서는 깨달은 도의 경지를 이렇게 묘사해볼 수 있어야 하리라

 

 

노자의 죽음

 

 

-160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어쩌다가 세상을 떠난 것도 순리이기 때문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님의 매닮에서 풀려나는 것(懸解)’이라 했네.“

 

삶과 죽음 이 모두 순리이다. 그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지. 남처럼 살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굳이 남처럼 살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하지만 이제는 이런 것에서 현해(懸解)를 해야 하리라.

 

 

장작과 불

 

 

-163 죽음을 두려워 하거나 사후 문제에 신경 쓰는 일에서 해방되는 것이 양생의 중요한 길임을 시사하고 있다.

 

 

 

<< 4편 사람 사는 세상(人間世) >>

 

 

 

 

섣불리 덤빌 수 없다

 

-170 옛 지인(至人, 참사람)들은 먼저 스스로 도를 굳힌 뒤에 남을 도왔다. 자기 하나 확실히 갖추지 못하고서 어떻게 포학한 자의 행위에 간여할 수 있겠는가?

 

먼저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 남한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170 더구나, 너는 덕이 어떻게 녹아 없어지고, 못된 앎이 어디서 생기는지 아느냐? 덕은 이름을 내려는 데서 녹아 없어지고, 못된 앎은 서로 겨룸에서 생긴다. 이름을 내려는 것은 서보 삐걱거리는 것이고, 못된 앎은 겨루기 위한 무기이다. 둘 다 흉한 무기라 완전한 삶을 위해서는 써서 안 될 것들이다.

 

 

정치적 준비 태세

 

 

-178 안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일상적인 고정 관념, 이분법적 사고, 성견을 너무 과신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식의 변화같은 근본적이고 내면적인 준비, 참된 준비 태세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참된 준비-마음 굶김

 

 

-179 안회가 말했습니다. “부디 마음의 재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에 마음으로 듣지 말고, 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마음의 재(心齋)’니라.

마음으로 들어라는 것은 들어봤어도 기로 들어라는 것은 처음 들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이리라. < 마음 <

 

 

-181 어구는 다르지만 다 같이 우리의 욕심, 분별심, 이분법적 의식, 일상적 의식, 자기 중심 의식인 보통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이를 초월하는 초이분법적 의식, 빈 마음, 새로운 마음을 갖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181 이렇게 도가 들어오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을 마음을 굶기는 것, ‘심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 작용이나 인식 작용을 초월하여 빈 마음, 새로운 마음으로 도와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 이를 통한 새로운 하나가 되는 그것이 중요하리라.

 

심재할 때

 

 

-183 안회가 말했습니다. “제가 심재를 실천하기 전에는 안회라는 제 자신이 실재처럼 존재하지만, 심재를 실천하여 제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을 비움(’)이라 하는 것입니까? ‘

 

-183 걷지 않고 자취를 안남기기는 쉽지만, 걸으면서 자취를 안남기기는 어려운 일. 사람을 위해 일할 때는 속이기 쉬우나, 하늘을 위해 일할 때는 속이기 어려운 일. 날개로 난다는 말은 들었겠지만, 날개 없이 난다는 말은 못들었을 것이다. 앎이 있어 안다는 말은 들었겠지만, 앎이 없어 안다는 말은 못들었을 것이다.

 

저 빈 것을 보라.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

행복은 고요함에 머무르는 것.

머무르지 못하면

이를 일러 앉아서 달림이라 하느니.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이나 앎을 밖으로 하라. 그러면 비상한 힘도 들어와 머물 것이니,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 야 말할 나위도 없지. 이것이 만물의 변화라는 것이니, 우 임금, 순임금도 여기에 의거했고, 복희, 궤거도 이를 평생 실천 궁행 했다. 하물며 그만 못한 우리 보통사람들이랴.

 

고요함에 머무를 수 있어야 했는데, 머무르지 못했다. 그래서 늘 분주하기만 했고, 그속에 행복의 순간은 너무 짧았다. 그러기에 이제는 머무를 수 있어야 하리라.

그리고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게 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잘 관찰해 봐야 하리라

 

-185 이를 위해서는 고요에 머물러야한다. 가만히 앉아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을 모으는 일이 기본 요건이다.

 

좌망坐忘이 마음의 구심운동이라면 좌치坐馳는 마음의 원심 운동인 셈이다.

 

-186 ‘앎이 없이 안다는 말은 영국에서 씌인 작자 미상의 유명한 책 The Cloud of Unknowing을 생각하게 한다. 앎을 버림(unknowing)', 곧 무지를 통해서만 참된 앎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지란 물론 이분 세계에서 우리가 얻은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앎을 비우는 것이고, 이렇게 비운 상태에 이르렀을 때 참된 앎이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참된 앎을 가져다 주는 무지를 중세 사상가 쿠자누스는 박학한 무지(docta ignorantia)'라고 했다.

마지막 문단에서는 우리의 귀와 눈을 안으로통하여 깊은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보게 하고, 우리의 일상적 의식에 속하는 마음이나 거기에서 나오는 앎을 밖으로 하여버릴 때,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초월적인 힘이 발동하리라고 했다. 이런 신비한 힘이 들어와 작용하는 체험을 해야 비로소 정치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사에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내면 세계를 통한 앎의 가치. 우리는 그동안 그것을 너무 무시해 왔다. 그래서 이제 그 가치를 이제는 찾아야 하리라.

 

-18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장자가 정치 참여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종교인은 정치와 무관하게 살아야 한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삶의 궁극적인 차원에 관심이 있는 종교인이라면 정치 문제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간디 옹의 말처럼 종교가 정치와 무관하다고 하는 사람은 종교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정치에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에 참여하는 마음, 자세가 문제이다. 장자는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을 굶겨’, 내면에서 솟는 초월적인 힘을 체험한 뒤에 삶의 현장으로 나가 사람들을 도우라고 한 것이다.

 

-187 유교 경전 대학에서도 정치에 참여하여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궁극의 이상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 사물을 궁구하고(格物), 앎의 범위를 극대화하고 (致知)하고,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인격을 도야한(修身) 사람만이 가정을 잘 꾸리고(齊家) 나라를 다스리고 (治國),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平天下)” 고 가르쳤다.

송대 이후 신유학에서는 처음 두 단계인 격물치지를 의식의 변화, 초월적인 밝음의 획득으로 해석했다.

이런 전통들이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지금껏 붙들고 있는 우리의 자의식을 말끔히 비우고 진정으로 남을 위한 존재로 탈바꿈할 때 우리의 사회 참여가 이웃과 사회와 세계를 위해 진정으로 향내 나는 산제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격물치지를 통한 의식의 변화단계까지 이루어야 하리라. 의식의 변화없이는 지금의 단계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자의 조언

 

 

-192 자기 마음을 섬길 때 슬픔과 기쁨이 눈앞에 엇갈리어 나타나게 하지 말고, 불가능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운명으로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덕의 극치입니다. 신하나 자식된 사람이 부득이한 일을 당하면 사물의 실정에 맞게 행하면서, 자신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삶을 기뻐하고 싫어할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일에 대해서도 너무 안달하면서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될 일이면 되는 것이고, 안될일이면 안되는 것이기에 그것을 꼭 나의 능력과 결부시켜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편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그것이 기뻐하고 싫어할 필요도 없는 것같다.

 

-193 격언에 이르기를 평소 그대로 전하고 과장된 말을 전하지 않으면 안전할 수 있다

 

말이 한단계만 지나도 과장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 자체로 전달되고 공유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남의 말을 할 때 꼭 자기의 생각을 덧붙이는데 이는 지양해야할 자세다.

 

-194 격언에 이르기를 군주의 명령을 고치지도 말고, 이루려고 너무 애쓰지도 말라고 한 것입니다. 도를 넘는 것은 쓸데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명령을 고치거나 꼭 이루려고 너무 애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좋은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좋지 못한 일은 절로 되어 고치지도 못하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십시오. 부득이한 일은 그대로 맡겨두고, 중심을 기르는데 전념하십시오. 이것이 최고입니다. 무엇을 더 꾸며서 보고할 것 있겠습니까? 그저 그대로 명을 받는 것 뿐.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일에 있어서 중심을 자꾸 놓치고, 주어진 명령을 고치면서 자신의 생각을 너무 많이 부쳤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해야 한다.

 

-195 이렇게 자신을 잊고생사에 초연한 태도를 지니면 어디로 가든 문제될 것이 없으니,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으면 걱정말고 제나라로 가라는 말이다.

 

-196 “바꿀 수 있는 것에는 바꿀 능력을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예지를 주시옵소서.” 라고 한 어느 성자의 기도가 생각난다.

 

-196 공자의 입에서 이처럼 도가의 중심 사상인 망아(忘我), 승물(乘物), 유심(遊心), 탁부득이(託不得已), 양중(養中)등의 가르침이 술술 나왔다. 바로 무위의 가르침이다.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무위의 가르침은 책 전체를 흐르는 기본 사상이다.

 

 

세 가지 비유

 

 

-203 이 세 이야기는 영공의 태자같이 좀 모자라고 난폭한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할 일을 그림 그리듯이 생생하게 묘사했다. 첫째, 달려오는 수레를 향해 팔뚝을 휘두른 사마귀 이야기는 불의하지만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 앞에서 우리 개인은 어쩔 수 없이 한 마리 사마귀에 불과하다는 슬픈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우리의 이상이 아무리 높고 갸륵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현실적 능력의 한계를 무시하고 무모한 짓을 하다가 쓸데없이 희생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보다 더 어리석다, 좀 더 사리를 깊이 살피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힘도 없으면서 겁 없이 대드는 행동을 뜻하는 당랑지부’, ‘당비당차도 여기서 나온 성어다.

무모하게 덤비는 것이 아닌 현실적 한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호랑이 길들이는 이야기는, 성질이 사나운 사람도 그 성질을 잘 알아 거기에 맞춰 가면서 이끌면 고분고분해지는데, 성질을 거스르면 살기를 드러내 덤벼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상대방의 성질을 맞추어 주되,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 등을 잘 알아 잘 구슬려야 한다는 것이다. 성질에 맞추는 것이 하는 짓을 무조건 방임하라는 것은 아니다. 먹이를 통째로 주거나 산채로 주지 않는 것도 사나운 성질을 방임하거나 조장하는 대신, 물의 흐름을 좇아 물을 다스리듯이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능력이다. ‘함이 없이 함이다.

 

무대포로 덤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리라

 

셋째, ()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말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사소하고 엉뚱한 실수 하나로 자기의 의도와 달리 그 동안 해준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갈 뿐 아니라 말에게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받는 사람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것인지 받는 사람이 필요한 것을 해줘야지 자신만의 생각으로 접근해서는 안되리라.

 

둘째와 셋째 이야기에서는 특히 시간 맞춤이 중요함을 암시하고 있다. 호랑이 사육사는 시간을 맞춰’() 먹이를 주고, 말을 사랑한 사람은 시간을 못 맞춰(不時)’말을 때렸다. 모든 일에 적기가 있음을 알고 잘 맞추라는 것이다. 영어로 타이밍, 희랍어로 카이로스, ‘때를 따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장석과 사당 나무

 

 

-206 목수 석이 집으로 돌아오자, 사당 상수리 나무가 꿈에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를 무엇에다 비교하려는고? 저 좋다는 나무들에다 비기는가? 아가위나무, 참배나무, 귤나무,유자나무 따위? 열매가 익으면 뜯기고 욕을 당하지, 큰가지는 꺽이고, 작은 가지는 찢기고, 그런 나무들은 자기들의 [열매 맺는] 재능 때문에 삶이 비참하지. 하늘이 준 나이를 다 못살고 도중에서 죽는 법이니, 스스로 세상살이에서 희생을 자초한 셈이라. 모든 것이 다 이와 같은 것이지.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쓸모없기를 바랐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완전히 그리 되었으니, 그것이 나의 큰 쓸모일세. 내가 쓸모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클 수 있었겠는가? , 그대나 나나 한낱 하찮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대는 상대방만을 하찮다고 한단 말인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가까운 쓸모없는 인간이 어찌 쓸모 없는 나무 운운한단 말인가

 

쓸모없음의 쓸모가 얼마나 큰지 몰랐다. 늘 당장의 쓸모만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은 상대방을 하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쓸모없음의 가치를 재인식해봐야 하리라

 

 

나무들의 재난과 점박이 소의 행복

 

 

-213 ‘쓸모 있는나무는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잘려 죽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나무의 목적이란 오로지 천수를 누리고 나서 시들시들 말라죽는 것 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각자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현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하게 조그만 쓸모에만 집착해서 살아가는 일, 한 살이라도 더 먹기전에 공무원 임용고시다 사법고시다 무슨 자격시험이니 하는 것에 합격하는 것만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여기고 거기에 목을 매고 사는 일은 곤란하다는 뜻이리라.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런 일을 통해서 어제까지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기 실현을 이루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쓸모,각자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재능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하리라.

 

 

곱추의 특권

 

 

-215 일반적으로 훌륭한 덕이라고 떠드는 통상적이고 일률적인 가치 체계나 사고 방식등을 무조건 숭상하거나 거기에 지배 받는 일이 없이, 자신의 처지에서 욕심이나 허세부리지 않고 자유롭고 차분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청복인가 하는 뜻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기준과 잣대로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달라지는 것인데, 하나의 기준과 잣대로 세상을 보다 보니 이분법적인 사고로 나뉘어 질 수 밖에 없고,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기준과 잣대가 나에게 맞는 것인지 원론적인 것을 먼저 더 고민해봐야 하리라.

 

미친 사람 접여의 노래

 

 

-218 사람들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고 있어도 쓸모 없음의 쓸모(無用之用)’는 모르고 있구나.

 

-220 장자든 누구든 정신적인 영웅은 조셉 캠벨의 말처럼 인습을 등진 사람이다. 그래서 인습대로 사는 사람에게 정신적 영웅은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미친 사람처럼, 우스운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이제는 제대로 된 잣대를 가지고 살아야 하리라. 남들이 뭐라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기에 이제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하리라.

 

-221 장자에서 말하는 쓸모 없음의 쓸모란 이런 의미에서 유용성의 극대화를 말한 셈이다. 궁극적으로는 지인의 경지에 이르기 이전의 모든 유용성은 진정한 유용성이 아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크게 유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으로 내면적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 떠 받드는 자질구레한 유용성이나 실용성에 정신을 팔지 말고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굶기는 심재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유용하기 위해서는 심재를 통해서 내면을 다지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리라.

 


 

<< 5편 덕이 가득함의 표시(德充符) >>

 

 

 

-223 노자의 도덕경도를 어머니로 표현하는 등 여성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뜻에서 현재 여성 운동가들의 성서(聖書)’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장자는 불구자가 도를 실현하고 덕을 발휘하는 데 아무 장애가 없다는 것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실증했다는 점에서 장애인들의 성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왕태와 공자

 

 

-226 상계가 말했습니다. “외발인 그분이 선생님보다 훌륭하다니, 보통사람들과는 큰 거리가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씀은 어떤 것인가요?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죽고 사는 일이 큰일이지만, 그런 것으로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다.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꿈쩍하지 않는다. 거짓이 없는 경지를 꿰뚫어보고, 사물의 변천에 요동하지 않는다. 사물의 변화를 운명으로 여기고 그 근본을 지킨다.

 

상계가말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다름의 입장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지만, 같음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귀나 눈이 옳다고 하는 것과 상관하지 않고, 덕에서 나오는 평화의 경지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 사물에서 하나 됨을 보고, 그 잃음을 보지 않는다. 그러니 발 하나 떨어져나간 것 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지.

 

발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을 흙덩어리 떨어진 것으로 비유를 하다니.... 도의 경지를 이루면 육체의 한계성에 대해서 굳이 매달리지 않을 것 같다.

 

 

-228 공자는 왕태가 성인의 경지에 있는 이유를 열거하였는데, 첫째는 그가 생사에 초연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아 설령 천지개벽 같은 상황이 닥쳐온다 하더라고 꿈쩍하지 않는 의연하고 의젓한 사람이며, 셋째로는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간디가 말한 진리파지를 실현한 사람, 궁극적으로 여실, 진여, 실상, 실재, 타타타를 체험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추남 애태타

 

 

-246 진정한 사람됨은 몸이 아니라 그 몸을 움직이는 무엇’, ‘때묻지 않은 본연의 인간성이라는 것이다. 애태타는 비록 외모가 지극히 흉하지만 그 본바탕에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이 준 본래의 재질, 본래의 바탕을 일러 ()‘라고 하고 이를 온전히 지키는 것을 재전(才全)‘이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인간답게 하는 기본요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고, 살아 있으나 죽은 삶과 같다는 것이다.

 

이제 자신의 재를 발견하고, 그것을 재전할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러한 삶을 누려야 하리라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252 그러므로 덕이 뛰어나면 외형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안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습니다. 이런 것을 정말로 잊어버림(誠忘)’이라 합니다.

 

잊어야 할 것을 잊어야 했는데 지금껏 그렇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254 맹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집에서 키우는 닭이나 개를 잃으면 그것을 찾아 사방을 헤매면서도, 마음은 잃어도 무관심이고, 또 꼬부라진 무명지가 아프지 않을 뿐 아니라 살아가는 데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펴 줄 의원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진나라에서 초나라를 멀다 하지 않고 찾아가는데 정작 마음이 꼬부라진 것처럼 중요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것을 부지류(不知類), 곧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줄 모르는 무지라고 했지만, 장자식으로 말하면 진짜 잊어버림인 셈이다. 요즘말로 하면 우선순위의 뒤바뀜이라고 할까.

마음공부가 중요한데 어디서 이것을 하라고 얘기하는 데가 없다. 학교나 사회나 당장의 쓸모에 대해서만 너무 급급하니, 당장의 쓸모가 아니면 그것을 쉽게 생각하는데, 이제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하리라.

 

성인에게는 세상에서 중요시하는 지, , , 네가지가 필요 없다고 한다. ‘는 지식, ‘은 예의 범절 등 사회적 규약, ‘은 사람을 얻고 사귀는 일, ‘은 기술이다. 성인은 를 화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도덕에 따라 사람을 사귀고 인심을 얻는 것은 교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고, 솜씨를 부리는 일을 장삿속으로 치부하여 모두 쓸데 없는 것으로 본다고 한다. 꾀하는 일도, 쪼개는 일도, 잃는 일도, 돈데 대한 관심도 없으니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그동안 적당히 보상받고, 적당히 유지하는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서 내린 평가는 다르게 평가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집중하면서 살아가야 하리라.

 

 

무정과 유정

 

 

-257 내가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다는 것. 언제나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삶에다 억지로 군더더기를 덧붙이러 하지 않는 것을 이름일세.

 

붙일 필요도 없는 군더더기를 많이 붙이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군더더기를 삶에서 빼야 하리라.

 

-258 물론 성인이라고 해서 목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인도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되 보통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과 다르다. 첫째 성인은 그런 기쁨과 슬픔에 압도되어 헤어날 수 없음을 정도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의 말을 빌리면, “기뻐하되 거기에 빠지지 않고, 슬퍼하되 정신을 못 차릴 정도가 되지 않는다.” 는 것이다. 둘째 기뻐하고 슬퍼하되 그 기쁨과 슬픔이 나의 이해 관계에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체의 이기심이나 집착, 사감없이 느끼는 순수한 감정이 무정이다. 따라서 무정이란 감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통 감정을 넘어선 감정이란 뜻이다. 그야말로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하듯이 애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달하고 탁 트인 마음, 빈 마음에서 작용하는 티 없는 감정의 흐름일 뿐이다.

이런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끄덕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부동심, 평등심, 영어로 'equanimity' 같은 것이다. 외부 상황에 속을 태우지 않고 언제나 차분한 마음으로 정신적 자유를 구가하는 상태이다. 어느 선사가 노래한 것처럼, 호수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가 제 그림자를 호수 위에 드리우되 일부러 하지 않고, 호수도 기러기의 그림자를 비추되 일부러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둘다 무심히드리우고 무심히 비출 뿐이다.

이런 경지가 있는 줄로 모르고 일상적인 분별심,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의식에 매달려 안달복달, 시비곡직, 좋고 나쁨을 캐고 앉아 있으면 결국 혜자처럼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엎드려 졸기나 하는 창백한 지성, 활기 잃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속에 있는 신을 밖으로 내쫓는 일이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알랑 비탈(elan vital), 우리 속에 잠재한 생명력, 그 활기를 잃어버린다는 뜻인가?

 

이 편은 어떤 육체적 조건이나 외부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무정無情의 경지, 어떤 고정관념이나 집착에서 벗어나 의연하게 마음의 참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은 셈이다. 다정도 병이런가?

 



<< 6편 큰 스승(大宗師) >>

 

 

 

진정한 앎

 

 

-262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하늘과 함께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앎이 아는 것으로 그의 앎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완합니다. 이리하여 하늘이 내린 수명을 다하여 중도에서 죽는 일이 없는 것, 이것이 앎의 완성입니다.

 

앎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완하여 앎이 아는 것으로 될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늘이 내린 나의 수명을 다하여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완성한 후에 죽을 수 있으면 이 생에서의 삶을 잘 살다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진인

 

 

-265 옛날의 진인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습니다.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연히 갔다와 의연히 돌아올 뿐입니다. 그 시원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끝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다가, 잊어버린 채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를 일러 마음으로 도를 해치는 일이 없고, 사람의 일로 하늘이 하는 일에 간섭하려 하지 않음이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인입니다.

 

-266 장자에서는 계속 생사가 아니라 사생이라 하고, 여기서처럼 의연히 갔다가의연히 돌아온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나서 죽는 일보다는 죽었다가 다시 나는 일이 더 자연스런 표현이었던 모양이다.

 

 

 

죽고 사는 것

 

 

-272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밤낮이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과 같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 모든 사물의 참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늘마저 아버지처럼 여기고 몸 바쳐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늘보다 더욱 뛰어난 것을 위해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임금마저 자기들보다 낫다 여겨 목숨을 바치는데, 하물며 임금보다 더욱 참된 것을 위해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된 것을 쫓아 그 길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리라.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276 대지(大地)는 나에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삶을 좋다고 여기면 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삶과 죽음이 다른 것 같지만 결국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삶이 즐거우면 죽음마저 편안히 받아들이고, 삶이 고달프면 죽음에 임해서도 많은 후회속에서 쌓이게 된다.

 

 

큰 스승

 

 

-278 성인은 천지와 하나 된 상태, 도라는 전체의 눈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얻음과 잃음이 따로 없는 경지에서 산다. 따라서 일찍 죽는 것이 잃음이 아니고, 죽는 것이 더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평안한 마음,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이런 사람이 우리의 스승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사람이 본받는 도,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도야말로 가장 큰 스승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도란 무엇인가?

 

도란?

 

-280 무릇 도가 실재라고 하는 믿을 만한 증거는 있지만, 그것은 함도 없고(無爲) 형체도 없습니다. (無形).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가 없습니다.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근본으로 하고 스스로를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부터 본래 있었습니다. 귀신과 하늘님을 신령하게 하고, 땅을 내었습니다. 태극보다 높으나 높다하지 않고, 육극보다 낮으나 깊다 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으나 오래되었다 하지 않고, 옛날보다 더 오래 되었지만 늙었다 하지 않습니다.

 

도의 이 미묘한 세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길을 가다보면 알게 되리라..

 

-281 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 없다. (可傳而不可受). 도를 터득한 사람이 말로 전하기는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그것을 정말 알아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도는 자본자근(自本自根)이라 했다. 그것은 아무것에도 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만물은 유대(有待)’인데 반하여 도는 무대(無待)’라는 것이다. 현대말로 하면 자존(自存)인 셈이다. ‘스스로에 의함이란 뜻이다. 도가 모든 존재의 근원(Ungrund)이요,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지금그러함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여우가 가르치는 득도의 단계

 

 

-284 성인의 도란 성인의 재질이 있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 역시 더 쉬운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신중하게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그는 세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이레가 지나자 사물을 잊습디다. 사물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아흐레가 지나자 삶을 잊게 되었습니다. 삶을 잊게 되자 그는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었습니다.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자 그는 하나를 불 수 있었습니다. 하나를 보게 되자 과거와 현재가 없어졌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없어지자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는 것 하나 잊은 것이 없었다. 세상도, 사물도, 삶도..... 그래서 내가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둘씩 잊어버리도록 해보리라. 죽음도 삶도 가벼워 지는 단계로 까지

 

-284 식의 심화과정 또는 득도(得道) 일곱 단계

1)외천하에서 시작하여 2)외물 3)외생을 거쳐 4) 조철의 단계와 5) 견독의 단계에 이르고, 여기서 6)무고금, 무시경의 경지와 7)불사불생, 곧 사생의구별이 없어지는 경지를 맛보는 단계로 끝맺음을 분명히 밝혔다. 여기서 ()’()’과 같이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몇몇 주석가는 외생(外生)’은 곧 망아(忘我)’라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여기에 특히 주목할 것은 여우가 무엇을 특별히 가르쳤다고 하는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다. 옆에서 지켜보았다는 것뿐이다. 도덕경2장이나 장자』 「덕충부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불언지교(不言之敎)’를 수행했다는 뜻인가?

아무튼 이 단계를 좀 더 자세히 따져 보면, 일정한 수련을 통해 일상적 의식에서 비일상적 의식으로 들어가므로, 우선 외부 세계, 물질 세계를 잊어버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삶 자체, ‘라고 하는 것 자체를 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단계들은 전체적으로 잊음, 비움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완전히 잊어버리면, 갑자기 새로운 의식이 생겨나 사물을 꿰뚫어보는 형안이 열려 밝음을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후 마지막으로 하나를 보게 된다. 여기서 ()’은 물론 하나()’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엄격히 말하면, ‘하나를 본다에서 궁극적으로 하나와 하나가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경지에 이르면 하나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 하나를 보는 주체와 그 봄의 대상이 되는 객체의 주객분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 그 하나 안에 포함될 뿐이다.

 

이제 스스로 깨쳐나가야 하리라. 아무리 훌륭한 선생을 만나도 스스로 깨쳐나가려는 노력이 업으면 그것을 이룰 수가 없으니, 그것을 스스로 해나갈 수 있어야 하리라

 

-287 물론 서양의 신비주의와 여기 장자에서 말하는 체험이 같은 것이냐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편의상 여기에 대한 한가질 설만을 예로 들면, 스탠포드 대학의 이열리 교수는 서양기독교의 신비주의를 연합의 신비주의(mysticism of union)'라 하고, 힌두교나 불교의 신비주의를 일치의 신비주의(mysticism of unity)'라 한데 반하여, 장자의 신비주의를 세계 내의 신비주의(intraworldly mysticism)'라 했다. 물로 이런 설은 참고할 수는 있어도 꼭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288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이런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288 삶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삶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합니다. 사물을 대할 때, 보내지 않는 것이 없고,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며, 허물어뜨리지 않는 것이 없고, 이루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를 일러 어지러움 속의 평온이라 합니다. 어지러움 속에 평온이란 어지러움이 지난 다음에는 온전한 이룸이 있다는 뜻입니다.

 

-289 한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 있으면, 그것은 한 생명으로 끝나고 말지만, 그것이 썩으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모두 무의식으로 가득한 현재의 가 죽어 없어질 때 우주적 의식(cosmic consciousness)'을 지닌 진정한 ‘, ’우주적 나가 새로 탄생한다는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진리르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죽음이 있어야 부활을 이룰 수 있다. 그것이 없으면 스스로를 늘 당장의 쓸모에 휩쓸리다 말 것이다.

 

-290 도의 전수과정을 말하고 있다. 여기 나온 이름을 우리말로 풀어서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1) 글씀 2)구송함, 3) 잘 살펴봄, 4)잘 알아들음, 5) 일을 잘 실천함, 6) 노래를 잘함, 7)그윽함 8) , 9)시원(始原) 등이다. 시원의 도가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알려졌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일까? 혹은 누구나 이런 과정을 밟아 올라가면 결국도에 이른다는 뜻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우리 인간이 도를 들을 수 있는 최초의 창구는 역시 이라는 지적이다.

물론 불립문자라는 말과 같이 도가 문자에 갇혀 있을 수는 없고, 또 문자 자체를 진리 자체라고 오해하면 큰일이지만, 문자가 우리에게 도를 터득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의미에서 결코 문자를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문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손가락을 달로 오해하면 곤란하지만 손가락이 우리에게 달을 보게 해주는 한, 없어서는 안될 수단이다.

글을 읽되 거기에 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 오래 구송하고,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살핀 다음,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 거기에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 조요하고 텅빈 경지를 체험한 다음 시원의 도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기막힌 이야기이다. ‘도가구계(道家九階)’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최초의 글의 중요성. 글을 통해서 깨닫고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단계를 밟아나가다보면 시원의 도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

 

 

사생존망이 일체임을 터득한 네 벗

 

 

-292 “누가 없음으로 머리를 삼고, 삶으로 척추를 삼고, 죽음으로 꽁무니를 삼을 수 있을까? 누가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이 모두 한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사람과 벗하고 싶네. ”

 

-294 자사가 물어 보았습니다. “자네는 그게 싫은가?”

천만에. 싫어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하여 닭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새벽을 깨우겠네. 내 오른팔이 차츰 변해 활이 되면, 나는 그것으로 새를 잡아 구워 먹겠네. 내 뒤가 점점 변하여 수레바퀴가 되고 내 정신이 변하여 말이 되면, 나는 그것을 탈 터이니 다시 무슨 탈 것이 필요하겠나. 릇 우리가 삶을 얻은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우리가 삶을 잃는것도 순리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르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여들 틈이 없지. 이것이 옛날부터 말하는 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는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오램을 이기지 못하는 법. 내 어찌 이를 싫어하겠는가? ”

 

이제는 사물에 얽매이지 말고, 순리에 살다 가는 것이다.

 

-296 아무튼 살아 있어도 살아 있어서 좋고, 죽어도 거꾸로 매달림에서 풀려나니좋고, ‘사생존망지일체(死生存亡之一體)’를 터득한 사람이다.

 

-297 자래가 말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동서남북 어디를 가라해도 그 명을 따르는 것. 음양이 나를 죽음에 가까이 가게 하는데 듣지 않는다면, 나는 고집스런 자식, 음양에 무슨 죄가 있나. 대저 대지는 내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하지. 그러니 삶이 좋으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 밖에.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죽음은 쉬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삶에 더 힘써야 하리라.

 

-300 요점은 여기서 말하듯 사생존망지일체(死生存亡之一體)’라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데 따라 삶에 나타나는 우여곡절에 대한 우리의 안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무 전체주의적 해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물론 이런 통큰 생각을 가지려면 집주인이 모든 것을 알아서 잘 처리해 줄것이라는 데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듯, 우리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에 안달하지 않으려면, 여기에 나오는 도나 조물자’, 혹은 조화자가 결국은 만사를 선한길로 이끌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형이상학적 믿음이 있을 때 삶이 그만큼 듬직해지지 않을까?

 

삶의 이끌림에 따라 자신의 길을 조용히 가는 것이다.

 

 

세상 밖에서 노니는 세벗

 

 

-303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어찌 삶과 죽음의 우열을 따지겠는가? 여러 가지 물질을 잠시 빌려 몸을 이루는 것. 간이니 쓸개 같은 것도 잊고, 귀니 눈이니 하는 것도 놓아둔 채, 끝과 시작을 반복할 뿐. 그 시작과 마지막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을 잊고 티끌과 먼지 밖에서 유유히 다니고, ‘함이 없는(無爲)에 자유로이 노닌다. 이런 사람들이니 어찌 구차스럽게 세속의 예 따위를 따라가면서 뭇사람의 눈에 띄려 하겠는가? “

 

삶이라는 것은 잠시 몸을 빌려 있다 가는 것이니, 많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305 ‘하늘의 소인이 사람에게는 군자요, 사람의 군자가 하늘에는 소인이라한 것이다.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평가는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궁극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는 중요하리라.

 

-306 장자에서 윤리적 가치로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있는데, 그러면 비윤리적인것으로는 될 수 있다는 뜻인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윤리적인 것으로도 안되지만 비윤리적인 것으로 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윤리적 가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윤리적 가치가 완전히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처럼 유린의 한계를 말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윤리적인 것을 모두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 가치를 완성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으라는 뜻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유가적 가치가 아니라 ()’유가적 가치를 강조한 셈이다.

 

지금까지는 도가가 반유가적 가치라 피상적으로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초 유가적 가치가 맞는 얘기인 것 같다.

 

 

맹손재

 

 

-308 지금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깨어난 상태인지 꿈꾸는 상태인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낫고, 웃음을 즐기는 것보다는 사물과 어울리는 것이 더 나으니, 사물과 편안히 어울려 변화를 잊은 채 텅빈 하늘로 들어가도록 하라.“

 

 

앉아서 잊다

 

 

-314 공자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좌망(坐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대통)과 하나 됨.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좌망입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가 없지. 변화를 받아 막히는 데가 없게 된다. 너야말로 과연 어진 사람이다. 청컨대 나도 네 뒤를 따르게 해다오.

 

-314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이런 것을 잊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생래적인 무지뿐이라면 잊고 버리고 할 것도 없다. 따라서 잊어버린다는 것은 잊어버리기 전에 먼저 획득함이 있고, 그 후 이런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 이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합리적 사고를 초월한 단계는 합리적 사고에도 미치기 이전의 단계와 분명히 다르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합리적 의식’ ‘합리적 의식’, ‘()합리적 의식‘pre-rational', 'rational' , 'trans-rational'로 삼분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pre'’trans'를 구별하지 않는 것을 ‘pre/trans fallacy'라 할 수 있다.

인의, 예악을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아직 안된다고 했다. 이런 외부적인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소위 망외(望外), 망물(忘物)이라 할 수 있다면, 내부적인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잊는 것을 망내(忘內), 망기(忘己)라 할 수 있는데 이 둘째 잊음까지 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좌망이다.

 

 

 

<< 7편 황제와 임금의 자격(應帝王) >>

 

 

 

-321 참된 지도자는 그런 인위를 넘어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얻은 그 감화력으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알 듯 모를 듯 이끌어 가는, 노자식 무위의 정치, 가만둠의 정치, 무심의 정치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최소한으로 다스리는 것이 최선의 다스림이라는 원칙에서 궁극적으로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사람이다.

 

순임금과 태씨

 

-326 건오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이가 스스로 원칙과 표준과 의식과 규례를 만들어 내면 사람들이 듣고 교화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

접여가 말했습니다. “ 그건은 엉터리 덕이다. 세상을 그렇게 다스리는 것은 마치 바다 위를 걸어서 건너고, 강에다 구멍을 파고, 모기 등에다 산을 지우는 것이다. 성인이 다스리는 것이 어디 밖을 다스리는 일인가? 먼저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나서 행동하고 일이 제대로 되는가를 확인하는 것 뿐이다. 새는 하늘높이 날아야 화살을 피하고, 들쥐는 사당 언덕 밑을 깊이 파고들어야 구멍에 피운 연기 때문에 밖으로 튀어나와 잡히거나 파헤쳐져 잡힐 걱정에서 벗어난다. 자네는 오히려 이 두 미물보다 못하군.

 

먼저 심재를 통해서 스스로를 다스린 다음에 남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다스릴 필요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밖을 보고 뭐라하고 스스로 닦지를 않았기에 늘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328 지도자가 될 요건으로 1)마음을 담당하게 하라 2)기를 막막하게 하라 3)일을 자연스럽게 하라 4)‘를 버리라 했다. 결국 자기처럼 무명(無名), 무기(無己), 무공(無功)의 경지에 이르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된다고 했다.

-330 노자가 대답했습니다. “명철한 왕의 다스림이란,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그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만물에 미쳐도 백성들이 그에게 굳이 기대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한 것으로 알고 기뻐하기 때문이라. 이런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서 있고, 없음()의 세계에 노니는 것이다.”

 

무당 계함과 열자와 그의 스승 호자

 

-333 호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너에게 도의 껍데기만 가르치고 아직 그 알맹이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는 내가 가르치는 도를 다 터득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암탉이 많아도 수탉이 없으면 어떤 달걀이 나오겠느냐? 너는 그 [알맹이도 없는]도를 가지고 세상과 겨루어 필경 세상이 너를 믿게 되리라 생각했더냐?

 

알맹이가 나오기까지 거쳐야할 단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말자. 더 이상 그것은 회피의 대상의 아니라 극복 또는 초월의 대상인 것이다.

 

거울 같은 마음

 

-344 이름에 매이지 말고,

꾀의 창고 되지 말고,

쓸데없는 일 떠맡지 말고,

앎의 주인 되지 마십시오.

 

무궁한 도를 체득하고 없음의 경지에 노니십시오. 하늘에서 받은 바를 완전히 하고, 터득한 것을 드러내려 하지 마십시오. 역시 비움뿐입니다. 지인(至人)의 마음씀은 거울과 같아 일부러 보내지도 않고 일부러 맞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대로 응할 뿐 갈무리해 두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물을 이기고 상함을 받지 않습니다.

 

-345 계속해서 지도자의 자격과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했다. 첫째 이름에 매이지 말라. 명함을 크게 박아 가지고 다니며 거들먹거리거나 자기 선전에 골몰하지 말라. 둘째 꾀의 창고가 되지 말라. 모략과 지략, 음모를 꾀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버리라. 소위 ‘Think Tank'라는 것도 조심할 일이다. 밀실정치, 요정정치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셋째, 쓸데없는 일 떠맡지 말라. 이것저것 감투 쓰지말고 공적 위주로 무슨 프로젝트다 이벤트다 떠벌리지 말라. ’무위의 위를 염두에 두라. 넷째, ’앎의 주인이 되지 말라. 잔꾀나 지모의 주인이 돼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부정적인 방법을 버리고 무궁한 도, 사물의 근본을 체득하고, 없음의 경지, 비움의 경징에서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을 하라. 이것이 바로 마음을 거울처럼 한다는 뜻이고 충고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지인의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울은 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비출 뿐, 밉다고 쫓아 보내고 예쁘다고 받아들이는 짓을 하지 않는다. 앞에 나타난 것이 슬프다고 함께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을 비췄다고 제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출렁거리는 것을 보여준다고 같이 출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잔잔히 떠오르는 대로 비추는 거울, 이것이 자유인의 고요하고 잔잔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장자에서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사상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거울의 비유가 장자에서 처음 발견된것이라고 보고 있다. 거울비유는 나중에 불교 및 신유학에서도 즐껴쓰는 아날로지(analogy)가 되었다. 중국 화엄종의 사조 징관의 법계현경이라는 책이나, 선종의 육조 혜능이 거울을 소재로 삼아서 지은 게송은 유명하다.

 

혼돈에 일곱 구멍

 

-349 우리에게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본래의 순일성(Primordial Simplicity)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이 근원으로 되돌아감(going vack to the origin)이요, 복락원(paradise regained)이요, 귀향(homecoming)이요, 귀일이요, 복귀요, 원시반본이요, 귀명이요, 영어의 at-one-moment, re-conciliation, re-union등등의 낱말이 상징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 때 옛날의 는 진정한 로 다시 태어나는 변혁의 긴 여정을 완성하는 것이다.

 


 

<< 부록외면·잡편에서 중요한 구절들 >>

 

 

 

오리 다리, 학의 다리

 

-354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길게 늘여 주어도 괴로움이 따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주어도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자를 것이 아니며, 본래 짧은 것은 늘일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인의가 사람들의 본래적 특성일 수 있겠습니까? 을 간춘 사람들, 괴로움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본래의 특성을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인을 갖추고 예를 갖춰야 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런면에서 좀 벗어나 본래의 특성을 인정해 줄 수 있도록 해야 하리라.

 

우물안의 개구리

 

-359 북해약이 대답했습니다.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없지요. 한 곳에 갇혀 살기 때문이오. 여름 벌레에게 얼음 이야기를 할 수 없지요.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오. 마음이 굽은 선비에게 도를 이야기할 수 없지요. 한가지 가르침에 얽매여 살기 때문이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양 매달렸는데, 이제는 그런것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367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을 보고도 모두 정적으로 생각하고 인간 관계만 살벌하게 한다는 이야기이다.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사에서도 상대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데 쓸데없이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를 해치거나 불리하게 하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속에 잠재한 열등감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수가 많다.

 

열등감이 사람을 발전시키는 원동력도 되지만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열등감을 스스로에게서 벗어나는것이 필요하다.

 

장자 아내의 죽음

 

-371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네. 아내가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냐? 그러나 그 시작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본래 삶이란 게 없었네. 본래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 형체도 없었던 것이지.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변해 죽음이 된 것인데, 이것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의 흐름과 맞먹는 일, 아내는 지금 큰 방에 편안히 누워 있지. 내가 시끄럽게 따라가며 울고 불고한다는 것은 스스로 운명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울기를 그만 둔 것이지.”

 

본래 삶이란 없었던 것이다. 그저 빈손으로 잠시 왔다가 가는 것이기에 이에 대해서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다새의 행, 불행

 

-373 뱁새가 황새처럼 되는 것도, 황새가 뱁새처럼 되는 것도, 모두 무리이다. 그것은 각자의 천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남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본성 그대로 살고, 본성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본성대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과 허리띠

 

-383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입니다.

 

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

 

-387 여기 옮기지는 않았지만 장자가 한 대답의 요점은 결국 쓸모없음만을 일방적으로 좋게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쓸모가 있거나 없거나 어느 한쪽에도 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쓸모있고 없고를 떠나 허심, 무심의 경지, 집착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 자유자재로 한 경지가 궁극의 자리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쓸모 있음과 없음 모두 집착하지 않은 허심, 무심의 경지의 단계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이군.

 

빈 배

 

-388 “배로 강을 건너는네

빈 배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습니다.

그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떠내려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한번 소리쳐저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 번째 소리치는데,

그 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게 마련.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습니까?

 

 

미녀와 추녀

 

-390 양자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명심하라. 어진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 어진 행동을 한다고 하지 않으면 어디 간들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도 의식하지 않은채 자연스럽게 행동이 나오게 되는 그 단계까지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하리라. 지금은 아직 그렇지 못하게 의식적으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려야 하리라.

 

의연한 손숙오

 

-394 “나는 오는 것을 물리치지 아니하고 떠나는 것을 불잡지 않을 뿐입니다. 얻고 잃음은 나와 관계없는 것. 그러기에 걱정하는 기색이 없을 뿐입니다.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395 집착이 없어 허허로운모습이다. 집착을 버리는 일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는 일 같은데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다. 이를 요즘말로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법구경에서는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데서 벗어나야 정말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게 되는데, 그것에조차 가벼워질 수 있어야 하리라.

 

쓸모 있는 땅, 쓸모 없는 땅

 

-412 쓸모 없는 것을 알아야 쓸모있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의 죽음

 

-415 장자가 죽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장자가 이를 듣고 말했습니다. “내게는 하늘과 땅이 안팎 널이요, 해와 달이 한쌍 옥이요, 별과 별자리가 둥근 구슬이지러진 구슬이요, 온갖 것들이 다 장례 선물이다. 내 장례를 위해 이처럼 모든 것이 갖추어져 모자라는 것이 없거늘 이에 무엇을 더 한다는 말인가?”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먹을까봐 두렵습니다.”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땅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되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나 개미의 밥이 되거늘 어찌 한쪽 것을 빼앗아 딴 쪽에다 주어 한쪽 편만 들려하는가?

 

이정도의 가치 전도가 이루어져야 진정 장자가 아니겠는가!

육신에 매달릴 것이 없으면 그 이후의 것에도 매달릴 필요가 없는것이기에...

 

 


<<      후기    >>

 

 


-417 물고기 잡는 틀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 물고기를 잡았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

덫은 토끼를 잡기 위한 것, 토끼를 잡았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

말은 뜻을 전하기 위한 것, 뜻을 전했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

나도 자기 말을 잊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 뜻을 다하고 나면, 일체의 형식에 머무르지 말고 그것을 잊고 그것에 매이지 않아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4. 내가 저자라면


신영복의 강의에 이어 노자의 도덕경그리고 장자의 장자를 읽어보니 그동안 살아오면서 뭔지 모를 의문점이나 답답함 등이 풀리는 기분이다. 서양화에는 존재하지 않는 동양화의 여백의 미를 보는 기분이었다.

자기 계발서등을 읽다보면 당장에는 쓸모 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시간이 지나면 벽에 부딪치게 된다. 당장의 급급함만을 해결하려고 했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전체적인 그림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갈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는데 장자는 그런것에 대해서 충분한 얘기를 해주는 것 같다.

사람도 무궁한 생성변화의 과정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것이다. ,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듯 사람또한 그러한 것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어도 우리가 그것에 크게 메이지 않고, 슬퍼하지 않듯이 인생의 삶또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것이 전부인양 매달리고 집착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동안 자신의 천성을 찾을 시간은 사회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하나의 국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지보수 인력이 필요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천성은 적극적으로 본인이 찾아가야 하는데 장자는 그런면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동안 노장사상은 유교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고 자세히 몰랐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예를 어기는 것을 무례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가 있기전에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굳이 예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지 알았다. 하지만 유교의 단계를 거쳐서 그것조차 초월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나 편견, 종교관등을 다시 한번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의 단계를 거치기 위해서는 의 단계를 거친후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난 그것을 피하고,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가려고 하니 그것조차도 말이 안되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 갭이 늘 있었는데 그 갭조차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회피하지 말고 스스로 하나씩 직면해보고, 궁극적으로는 이런 것에 메이지 않고 변혁을 통해서 자유로워져야 하리라.

재미있는 것은 장자가 자신의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공자와 안회의 입을 통해서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마치 공자가 도교를 인정해서 설명하는 식이 되어서 생각없이 보는 사람들에게는 장자의 사상인지 공자의 사상인지를 헷갈리게 할수도 있어서 상대적인 거리감을 줄였다.

 

1편의 소요유(逍遙遊)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 한계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초귺해서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변혁의 날개를 달아서 물고기가 새가 되듯이 의식의 변혁을 얘기한다.

 

2편의 제물론(齊物論)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더 큰 의미로 접근하고 이해하는 차원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깨달아서(대각), 스스로의 무지와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것인지 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일단 꿈을 깨어봐야 알 것이다.

 

3편의 양생주(養生主)에서는 기존의 가치체계, 고정 관념, 사회 제도 등 일체의 정신적, 사회적, 육체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해서 포정의 칼을 통한 도의 경지, 죽음은 결국 놓임이라는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

 

4편의 인간세(人間世)는 유용한 쓸모있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다스리는 심재에서부터 출발하여 쓸모없음의 쓸모를 만들어가야 함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당장의 쓸모 때문에 연연해하다가는 쉽게 쓰여지고 가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이 깨달음을 준다.

 

5편의 덕충부(德充符)에서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무정의 마음을 통해서 참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 해주었다.

 

6편의 대종사(大宗師)에서는 큰 스승이란 이며, 득도를 위한 단계, 그리고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사생존망의 단계까지 가서 사는 것, 죽는 것 조차도 변화의 하나로 자연의 순리대로 인식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7편의 응제왕(應帝王)에서는 최소한의 가르침으로 최선의 가르침을 할 수 있는 황제와 임금의 자격 요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1) 전체적인 뼈대와 목차

 

 

-목차

 

독자들에게

장자를 읽기 전에

 

1편 자유롭게 노닐다(逍遙遊)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고

매미와 새끼 비둘기

자유의 네 단계

요임금이 나를 허유에게

막고야산의 신인

송나라 모자 장수와 요 임금

큰 박과 손트는 데 쓰는 약

쓸모 없는 나무?

 

2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 (齊物論)

나는 나를 읽어버렸다

하늘의 퉁소 소리

지적 활동과 감정의 작용

참주인

굳은 마음

말을 한다는 것은

이것저것

손가락과 말

조삼모사

세 가지 지극한 경지

있음없음

털끝과 태산

도에는 경계도 이름도 없다

요 임금과 세 나라

앎과 모름

사람과 미꾸라지

이해득실에 무관

성인의 경지

여희의 후회

꿈에 술을 마시며

논쟁이 되지 않음은

엷은 그림자와 본 그림자

나비의 꿈

 

3편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養生主)

삶에는 끝이

포정의 소 각뜨기

외불 우사

못가의 꿩

노자의 죽음

장자과 불

 

4편 사람 사는 세상(人間世)

독재에 항거하기

섣불리 덤빌 수 없다

정치적 준비 태세

참된 준비-마음 굶김

심재할 때

자고의 고민

공자의 조언

거백옥의 충고

세가지 비유

장석과 사당 나무

거목과 신인

나무들의 재난과 점박이 소의 행복

곱추의 특권

미친 사람 접여의 노래

 

5편 덕이 가득함의 표시(德充符)

왕태와 공자

신도가와 정자산

무지와 공자와 노자

추남 애태타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무정과 유정

 

6편 큰 스승(大宗師)

진정한 앎

진인

성인은

옛날의 진인은

죽고 사는 것

물고기는 물에, 사람은 도에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큰 스승

도란?

도를 터득한 사람들

여우가 가르치는 득도의 단계

사생존망이 일체임을 터득한 네 벗

세상 밖에서 노니는 세벗

맹손재

! 내 스승

앉아서 잊다

운명일 따름이겠지

 

7편 황제와 임금의 자격(應帝王)

순임금과 태씨

무당계함과 열자와 그의 스승 호자

거울 같은 마음

혼돈에 일곱 구멍

 

부록외면·잡편에서 중요한 구절들

오리 다리, 학의 다리

하백과 북해약

우물안의 개구리

진흙 속에 꼬리를

원추와 올빼미

물고기의 즐거움

장자 아내의 죽음

바다새의 행, 불행

술취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기 활

싸움 닭 기르기

귀신같은 솜씨를 지닌 목수

신과 허리띠

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

빈 배

미녀와 추녀

참된 화공

의연한 손숙오

송아지 같이

도는 어디에나

누구 발을 밟았느냐

다스리는 일은 말을 기르듯이

재주를 자랑하면

달팽이의 양쪽 뿔

약간의 물만으로도

쓸모 있는 땅, 쓸모 없는 땅

치질을 고쳐주고

장자의 죽음

 

후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로마자 찾아보기

 

2) 감동적인 장절

 

-221 장자에서 말하는 쓸모 없음의 쓸모란 이런 의미에서 유용성의 극대화를 말한 셈이다. 궁극적으로는 지인의 경지에 이르기 이전의 모든 유용성은 진정한 유용성이 아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크게 유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으로 내면적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 떠 받드는 자질구레한 유용성이나 실용성에 정신을 팔지 말고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굶기는 심재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284 식의 심화과정 또는 득도(得道) 일곱 단계

1)외천하에서 시작하여 2)외물 3)외생을 거쳐 4) 조철의 단계와 5) 견독의 단계에 이르고, 여기서 6)무고금, 무시경의 경지와 7)불사불생, 곧 사생의구별이 없어지는 경지를 맛보는 단계로 끝맺음을 분명히 밝혔다. 여기서 ()’()’과 같이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몇몇 주석가는 외생(外生)’은 곧 망아(忘我)’라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여기에 특히 주목할 것은 여우가 무엇을 특별히 가르쳤다고 하는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다. 옆에서 지켜보았다는 것뿐이다.

 

 

-290 글을 읽되 거기에 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 오래 구송하고,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살핀 다음,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 거기에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 조요하고 텅빈 경지를 체험한 다음 시원의 도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기막힌 이야기이다. ‘도가구계(道家九階)’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314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이런 것을 잊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생래적인 무지뿐이라면 잊고 버리고 할 것도 없다. 따라서 잊어버린다는 것은 잊어버리기 전에 먼저 획득함이 있고, 그 후 이런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 이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합리적 사고를 초월한 단계는 합리적 사고에도 미치기 이전의 단계와 분명히 다르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합리적 의식’ ‘합리적 의식’, ‘()합리적 의식‘pre-rational', 'rational' , 'trans-rational'로 삼분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pre'’trans'를 구별하지 않는 것을 ‘pre/trans fallacy'라 할 수 있다.

인의, 예악을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아직 안된다고 했다. 이런 외부적인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소위 망외(望外), 망물(忘物)이라 할 수 있다면, 내부적인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잊는 것을 망내(忘內), 망기(忘己)라 할 수 있는데 이 둘째 잊음까지 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좌망이다.

 

-349 우리에게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본래의 순일성(Primordial Simplicity)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이 근원으로 되돌아감(going vack to the origin)이요, 복락원(paradise regained)이요, 귀향(homecoming)이요, 귀일이요, 복귀요, 원시반본이요, 귀명이요, 영어의 at-one-moment, re-conciliation, re-union등등의 낱말이 상징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 때 옛날의 는 진정한 로 다시 태어나는 변혁의 긴 여정을 완성하는 것이다.

 

-371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네. 아내가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냐? 그러나 그 시작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본래 삶이란 게 없었네. 본래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 형체도 없었던 것이지.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변해 죽음이 된 것인데, 이것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의 흐름과 맞먹는 일, 아내는 지금 큰 방에 편안히 누워 있지. 내가 시끄럽게 따라가며 울고 불고한다는 것은 스스로 운명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울기를 그만 둔 것이지.”

 

-373 뱁새가 황새처럼 되는 것도, 황새가 뱁새처럼 되는 것도, 모두 무리이다. 그것은 각자의 천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남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본성 그대로 살고, 본성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387 여기 옮기지는 않았지만 장자가 한 대답의 요점은 결국 쓸모없음만을 일방적으로 좋게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쓸모가 있거나 없거나 어느 한쪽에도 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쓸모있고 없고를 떠나 허심, 무심의 경지, 집착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 자유자재로 한 경지가 궁극의 자리라는 것이다.

 

3) 보완점

주해를 하면서 용어에 대해서 희랍어, 히브리어, 산스크리트어로 까지 설명을 해주는데, 오히려 설명을 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자를 연구하신 분이 장자의 사상은 갖지 않고, 자신의 지적 허영을 내세운듯한 기분어서 어느 부분에서는 집중하지 못하고 더 산만하게 만든다.

 

 

4) 이 책의 키워드는?

 

절대자유, 변화, 초월, 실존적 한계의 초극, 궁극 변화, 해방, 예지와 직관과 통찰, 오상아(吾喪我) , 물화物化, 대각(大覺) , 심재(心齋), ‘쓸모 없음의 쓸모(無用之用)’, 무정無情, 참자유, 좌망, 부활, 변혁 , 일깨움

 

 

 

IP *.113.77.12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