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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11시 02분 등록

기억 꿈 사상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옮김,| 김영사, 2007.


1. 저자에 대하여


■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

출생/사

1875.7.26. 스위스 투르가우 주 로만스호른 근교 보덴 호숫가의 캐스빌 / 1961. 퀴스나흐트 자택에서 사망

활동분야

스위스 정신의학자, 분석심리학 창시자, 대학교수

 

• 발 자 취 •  

• 저 서 •

1886. 바젤 김나지움 입학

1887. 신경증 발작 일으킴

1895 바젤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의학 공부. 1900년 4월 국가고시로 학업 마침

1896. 부친 사망

1903.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 이후 다섯 자녀를 둠. 

     오이겐 블로일러 교수가 이끄는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 보조의사가 됨

1905. 1913년까지 취리히 대학 의과대 강사

1906.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서신교환 시작

1909. 병원 그만두고 퀴스나흐트의 새 집에서 개인병원 개업.

     9월 프로이트와 미국 클라크 대에서 강연. 명예박사학위 받음

1910. 국제정신분석협회 회장 취임

1912. 「리비도의 변용과 상징」에서 프로이트와 상이한 견해를 분명히 밝힘

1914. 동료들과 국제정신분석협회 탈퇴

1916~18. 베트란트 주 샤토-되에서 영국 국제포로수용소 위생장교로 근무

1920. 북아프리카 여행

1923. 모친 사망. 볼링엔 탑 건축 시작

1924 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 거주지 여행

1925. 아프리카 여행. 동아프리카 엘곤 산 밑 엘곤 사람들을 찾은 후 수단 경유 이집트로 감

1928.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연금술 연구 시작

1930. 에른스트 크레치머가 회장으로 있는 심리치료사협회 부회장이 됨

1932. 취리히 시가 주는 문학상 수상

1933. 크레치머 사임 후 회장. 취리히 연방공업대학에서 강의. 아스코나에서 에라노스 학회 출범

1934. 국제심리치료의사협회 창설

1935. 취리히 연방공업대학 명예교수 임명.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받음

1937. 예일대에서 “심리학과 종교”에 대해 테리 강연.

     인도 영국령 인도 정부 초청으로 캘커타, 바리나시 알라하바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받음

1942. 취리히 연방공업대학 교수 사임

1943. 바젤 대학 심리학과 정교수로 임명

1944. 심근경색으로 교수직 사임

1945. 제네바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받음

1948. 취리히에 카를 구스타프 융 연구소 설립

1955. 취리히 연방공업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받음, 엠마 융 2월 27일 사망

1959. BBC 방송과의 인터뷰 “나는 신을 압니다”

1960. 85세 생일을 계기로 퀴스나흐트 명예시민이 됨

1902. 소위 신비현상의 심리학과 병리학(취리히 대학 박사학위논문)

1934. 심리학과 종교

1942. 파라겔수스

1944. 심리학과 연금술

1946. 심리학과 교육, 전이의 심리학

1948. 정신의 상징

1850. 무의식의 형성

1951. 아이온상징 역사의 연구

1952. 변용의 상징, 욥에 대한 답변

1953. 뉴욕에서 융 전집 출간 시작

1954. 의식의 뿌리

1955~56. 결합의 신비 1.2권

1957. 기억, 꿈, 사상 집필 시작

1958. 현대의 신화부터 전집 출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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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에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

……


최초의 인간은 땅에서 유래하지만, 두 번째 인간인 내적 인간은 ‘하늘에서’,

즉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유래한다.”

- 융의 묘비에 씌어진 글-



■ 정 아저씨~!


이 아저씨...좀 끌린다.

 아니, 그가 살고 있는 집이 더욱 끌린다. 살고 있는 집, 그가 작업하는 공간인 탑. 호숫가에 자리한 집, 미로같고 문명의 기구들을 들이지 않은 그 탑. 거기서 생활하는 그의 삶을 통째 훔치고 싶다.

 미국 유학을 하신 선배가 교수님과 번역서를 출간하기로 하고 번역하면서 Jung이라는 이 명칭을 계속 정이라고 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융님을 모르다니’하며 속으로 놀랬지만, Jung를 융으로 읽는다는 것 빼고 내가 융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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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볼리엔 탑 / 85세 생일에 모인 융의 가족들>



 그저 프로이트에 이은 심리학자로, 정신분석학자로, 의사로 알고 있던 융은 많은 부분 다르게 다가왔다. 그토록 원형과 집단무의식에 집착하던 융의 모습이 조금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고나 할까. 물론,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다가왔던 이야기는 좀 할말이 따로 있지만...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고 놀랐다.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었는가. 이렇게 조각품을 잘 만드는 사람이었는가. 그는 매우 손재주가 있다. 예술적인 감각이 있다. 그는 이것들을 모두 단순하게 작업했고 무의식의 일련에서 행한 것이라 하지만 보고 있는 나에게는 경탄까지 일으키게 했다. 그가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예술가 쪽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그와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가 의사였다는 점이 그의 진로에 영향을 미쳤으니 분명 집안에 화가가 있었다면, 예술가가 있었다면 달랐을 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기질이 예술가적 기질보다는 학자풍이라는 생각도 든다.

 융의 아버지는 개신교 개혁파 목사이며 박사학위를 가진 문헌학자이며 신학자였다. 어머니는 바젤의 유명한 목사 가문 프라이스베르크 출신이었고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는 바젤 대학 교수이자 의사였다. 할아버지는 대학교수와 의사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고 외할아버지 프라이스베르크 역시 그러하였다고 한다. 그가 말하듯 그의 뿌리는 그러했다.

 “영혼은 오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의 나이는 수백만 년을 헤아린다. 개인의 의식은 땅 속에 있는 다년생 뿌리로부터 자라나 계절에 따라 개화하고 결실을 맺는 꽃과 열매에 불과하다. 뿌리의 존재를 함께 고려하는 사람은 진리와 보다 더 일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뿌리는 모든 것의 모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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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이 그린 그림, 1917년  좌, 필레몬을 비롯한 여러 인물과 지구 /우,  칼을 든 기사>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융은 1875년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1902년 취리히 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로서 취리히 대학 교수였던 정신의학자 오이겐 블로일러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프로이트와 교류하였고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까지 역임한다.

 하지만 무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로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활동영역을 구축해갔다. 특히 그는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중점으로 연구하였고 문화사 및 종교사적 비교 작업을 함께 했다.

 그의 생애동안 융은 다양한 철학자들에게 매료되기도 했고 심리학과 정신의학 분야에 대한 연구를 위해 다양한 독서의 세계에 있기도 했다. 그가 의학을 선택한 것은 그의 조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 에빙의 정신의학교과서를 처음 보고, 심리학 및 정신의학 분야가 자신의 적성에 가장 맞는 분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을 마친 후 보조의사로서 부르크휠츨리 병원에서 일하면서 이 병원의 엄격한 규칙을 묵묵히 따라고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융의 노력은 병원장의 신임을 얻게 되고 파리 유학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이에 융은 1905년 취리히 대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고, 부르크휠츨리 병원의 수석의사가 되었다. 의사로 일하면서 1913년까지 취리히 대학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처럼 공부만 하고, 책만 읽고, 비사교적이고 엄숙하였을 것만 같은 융은 대학시절 사교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학생단체 “초핑기아(Zofingia)"의 회원으로서 열정적인 춤꾼이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아버지의 이른 죽음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상황이 그의 기질을 온전히 드러내기를 어렵게 한 듯하다. 그는 학비를 모으기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내가 된 엠마에게도 의사 자격을 얻은 후에야 청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엠마의 부모가 결혼을 허락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융은 취리히 대학 강사를 하던 무렵 자신의 이후 생애와 창작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두 만남을 갖게 되는데 샤프하우젠 출신의 젊은 스위스 여성 엠마 라우셴바흐와 ‘스승’이자 한때 친구로 지내게 되는 비엔나의 지크문트 프로이트이다. 융은 아내 엠마와의 만남을 이렇게 전한다. 융은 대학에 다닐 때 14세의 엠마를 그녀의 집에서 잠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엠마를 보자마자 “깊은 충격을 받았고”, 곧 그녀가 미래의 아내라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1903년 결혼한 부부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곧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엠마의 인간적인 성숙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고 게다가 엠마는 점차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노련한 심리치료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융은 자신의 아내 엠마가 죽은 뒤 너무나 큰 고통과 충격에 힘들다고 말하는데, 애정 깊고 사려 깊은 엠마라는 반려자가 없었더라면, 카를 구스타프 융의 삶과 작품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와의 대결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융에 대한 책을 쓴 게른하르타 베어는 적고 있다.

 여기서 결혼하고 곧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혔다는 것이 바로 샤비나 슈필라인과의 관계가 아닌가 한다. 놀랍게도 그토록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오랫동안 기다려 청혼한 아내와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융은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바로 자신의 환자 샤비나 슈필라인이다. 샤비나는 융의 정신과 환자로 융은 그녀에게 Talking cure(대화치료)를 적용하는데 이 치료 방법의 위험성이 환자가 의사에게 가지게 되는 애착 혹은 의사가 환자에게 가지는 애착이라 한다. 어쨌든 샤비나는 단순한 정신과 환자가 아니었고 후에 자신의 이론을 구축한 심리학자가 된다. 이들의 관게에 프로이트가 가세하면서 당시에는 삼각 스캔들로싸지 퍼졌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엠마 덕분이 모양이다. 엠마의 생애도 더불어 궁금해진다.


 그리고 융에게 영향을 미친 프로이트는 융보다 19세 연상이다. 프로이트 이론에 매료된 융은 당시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에도 프로이트에 대한 옹호와 지지를 표명했고 이것은 프로이트와의 서신교환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융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고 융 역시 프로이트를 따랐다. 그러나 곧 그들은 견해 차이를 보였고 융은 프로이트의 한쪽 면에만 치우친, 그리고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우는 태도에 환멸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편지를 통해 결별했다. 정신분석학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고있던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그동안의 친구와 친지들을 떠나가게 했고 사람들은 융의 책을 쓰레기라고 말하며 등을 돌렸다. 그는 학회도 탈퇴하며 그의 길을 가기로 했다.

 융의 다양한 연구 속에 동양철학과 종교에 대한 관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만다라를 그리기도 하고 만다라가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아갔다. 만다라는 그에게 날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자기' 상태와 연관되는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융은 그것이 어떤 핵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고, 그 기간에 '자기'에 관한 생생한 개념을 더욱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융은 만다라를 그리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실제 그는 만다라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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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렸다는 융이 그린 최초의 만다라>


  그는 자신의 생애를 가리켜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그의 인생을 지배한 무의식은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용이었던 것이다. 융은 죽기 전 인터뷰에서 기자의 신을 믿느냐고 물음에 "나는 신을 압니다."라고 답했다. 무의식을 통해 그 자신도 충분히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융은 스위스 주간지 「벨트보헤」와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과 자신의 활동을 다음처럼 평가했다.

 “나는 인간 및 시대의 질병을 다루고, 고통의 현실에 맞는 치료수단을 생각하는 의사입니다. 정신병리학적인 연구를 하며 나는 역사적인 상징과 형상들을 무덤의 먼지 속에 깨워 일으켰지요. 나는 환자들의 증상을 치료를 통해서 없애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이라기보다 약간의 현명함과 자기관찰과 무의식적 경험에 대한 신중한 종교적 고찰입니다.”


참고자료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카를 융, 생애와 학문, 다이드리 베어, 열린책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옮긴이 서문


p9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이 융 자서전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셈이다.


p9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자기실현(Selfstverwirklichung)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는 ‘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들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p10 그는 신을 가리켜 ‘위대한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p11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다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나의 생애는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은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p12 나는 내가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p12 인간은 자신이 제어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지배하는 일종의 심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생애에 대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p13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생명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허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p14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활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의 생애는 외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빈약한 편이다. 나는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공허하거나 실제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생을 사로잡은 꿈...유년시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p26 그후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 나중에는 인생 초기의 이러한 인상들이 수정되었다. 나는 친구를 믿었다가 그들로 인해 실망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 당시 습진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고 부모의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암시하는 어두운 전조가 둘러싸고 있었다. 1878년의 이 병은 부모의 일시적 별거 때문이었을 것인데 그 무렵 어머니가 여러 달 동안 바젤 병원에서 지냈고 그것은 결혼생활의 실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친척아주머니가 돌봐주고 있을 때인데 어머니의 오랜 부재가 융을 힘들게 했다고.


p27 마치 그녀가 우리 가족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만 속해 있는 듯싶었다. 또한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신비한 것들과 내게는 알려지지 낳은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Anima)의 한 측면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생소한 느낌과 그런데도 그녀를 처음부터 알아온 것 같은 감정은 나에게 훗날 여성적인 것의 본질을 나타내는 여성상의 특징이 되었다.

⇒ 당시 하녀 또한 융을 돌봐주었는데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의 행동을 기억하며.


p30 이러한 불길한 유추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주 예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크고 다정하고 자비로운 새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검은 프록코트와 높은 모자에 광택나는 검정구두를 신고 검은 상자를 나르는 음울한 사람들과 연관되었다.


p31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초의 꿈을 우연히 꾸었다. 그 꿈은 이를테면 일생 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그때 나는 서너 살이었다.

⇒ 그가 꾼 꿈을 오래동안 생각하다 그 기이한 형상이 일종의 남근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남근상이라는 것을 알기 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고. 남근상의 추상적 의미는 그것이 스스로 남근이 발기되듯 수직으로 보좌에 서 있다는 사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초원의 구멍은 아마도 무덤을 의미할 것이고 무덤 자체는 일종의 지하사원이고, 그곳의 녹색 커튼은 초원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커튼은 녹색식물로 뒤덮인 지구의 신비를, 양탄자는 붉은 피.


p34~35 아무튼 그 꿈속의 남근상은 보통은 언급되지 않는 지하의 신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나의 젊은 시절 내내 그런 의미로 남아 있었는데, 누가 ‘주 예수’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해서 말할 때마다 다시 생각나곤 했다. ‘주 예수’는 나에게 결코 온전한 실체가 될 수 없었으며,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전폭적으로 사랑할 만한 대상도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예수의 대역인 그 지하의 신이 자꾸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주어진 무시무시한 계시였다.


p35 나에게 ‘주 예수’는 어쩐지 일종의 죽음의 신처럼 여겨졌는데, 예수가 밤의 유령을 물리쳐주는 점에서는 도움이 되었으나, 그 자신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투성이 시체가 되었기 때문에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늘 찬양을 받는 그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나는 남몰래 의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장례식을 항상 연상케 하는 검은 프록코트와 광택나는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주로 ‘사랑하는 주 예수’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p37 유년시절의 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대 이를테면 땅에 묻히는 매장식이 거행된 것이었다. 내가 다시 땅에 나오기까지는 여러 해가 지나갔다. 지금 나는 그 일이 가능한 한 많은 빛을 어둠 속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그때 나의 정신적 삶이 무의식적인 출발을 한 것이다.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p47 30년이 지난 후에 나는 다시 그 비탈에 올라서보았다. ..그것은 마치 다른 세계와 다른 시간으로부터 온 기별처럼 낯설게 여겨졌다. 그것은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충격적이었다. 내가 심취했던 유년시절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었으며, 나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계속 굴러가며 점점 더 멀어져가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만 것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잃지 않기 위해 그 장소에서 억지로 몸을 돌려야 했다. 나는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유년시절의 영원성이 번개와도 같이 내게 깨달아졌기 때문이다. 


p49 이러한 행위의 의미 또는 그와 같은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왜냐하면 나의 자신감이 그 비밀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51 이러한 회상을 함으로써, 전통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의 마음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영혼의 고태적 구성요소가 있다는 확신이 처음으로 나에게 생겼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학창시절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p59 ‘주 예수’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차츰 불가능해지기는 했지만, 열한 살 때부터 신의 관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

p67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너는 누구냐?


p68 한순간 갑자기,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 나온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안개의 벽 같은 것이 나의 등 뒤에 있었고, 그 벽 너머에는 아직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나에게 내가' 생겨났다. 이전에도 내가 존재하고는 있었으나 모든 일이 단지 우연히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이제 여기 있고, 내가 이제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옆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지금은 '내'가 스스로 하고자 한다. 나의 내부에 '권위자'가 자리잡았다.


p74 생각에 구멍이 뚫리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말자. 무언가 무서운 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결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왜 안 되는가? 왜냐하면 너는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지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p77 아담과 이브는 최초의 인간들로서 부모가 없었다. 하느님에 의해 직접 그의 의도대로, 그들이 그러했던 모습 그대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하느님이 창조한 대로 존재해야 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그들이 다르게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피조물이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완전한 것만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함으로써 최초의 죄를 범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느님이 그들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은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를 말로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전지한 하느님은 인류 최초의 부모가 죄를 범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 이와 같은 생각이 융을 지독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하느님 자신이 그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p78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도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p84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과 사원


p87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 이런!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 되고 믿어야 해." 나는 생각했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알아야 한다.'


p89 속으로는 언제나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부모의 아들로서 학교를 다니고 다른 많은 아이보다 그렇게 썩 영리하거나 주의 깊지도 않으며 근면하거나 단정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못한 아이였다. 또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어른으로 정말 늙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믿지 않고 인간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p90 그 무렵에는 물론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압도적인 예감과 강렬한 느낌은 받았다. 내가 혼자 있는 순간이면 곧바로 이러한 상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며 참다운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두 인격의 어머니


p95 그 무렵 나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며 내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해답을 찾아야만 하는 문제가 나에게 제기되었다.


p6 처음부터 나는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내 생애에서 그것을 실현해야만 될 것처럼 여겨졌다. 나로서는 결코 증명할 수 없었던 어떤 내적 확신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있었으며, 그때 답을 준 자는 이미 항상 있었고 지금도 항상 있는 존재였다. 그 ‘다른 인물’과의 대화는 나의 가장 심오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 흘리는 전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황홀경이었다.


p97 나는 혼자서 놀았고 혼자 돌아다니며 공상하면서 나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품고 있었다.


p104 그때 삼위일체에 관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는 나의 관심을 끄는 뭔가가 있었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는 문제였는데, 그 모순이 내 마음을 끌었다.


p10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은 인간적이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다.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p109 종교를 전체와의 유일하고 의미있는 관계로 여겼던 나의 종교관은 붕괴되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일반적인 신앙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누구하고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나의 비밀’과 관련을 맺을 뿐이었다. 그것은 역겹기도 하고, 아주 나쁘게 말하면 천박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것은 일종의 악마적인 웃음거리였다.


악의 기원


p112 나는 그로부터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견해가 나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종교란 하느님이 나와 함께 이루는 그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하느님 편에서의 행위로 나는 다만 거기에 맡겨져 있을 뿐이었다. 하느님은 나보다 강하기 때문이었다.

⇒ 1869년에 간행된 비더만(Biedermann)의 <기독교 교리>, 비더만의 <하느님의 본질>이라는 장에서, 하느님은 ‘인간 자아와 유사하게 상상될 수 있는 인격’으로서, 그리고 또한 ‘세계를 포괄하면서 세계를 전적으로 초월하는 고유의 자아’로서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119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없으며 신이라는 관념의 선재성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잠재적으로는 인간 안에 본래부터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우리의 “정신적 능력은 그토록 숭고한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어느 일정한 수준까지는 이미 발달되어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p122 악마가 본래부터 악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명백한 모순, 즉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도 원래는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주장은 그것이 설명하려고 하는 악이 이미 자만심이라는 악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 지적을 읽고 대단히 흡족했다. 그밖에 악의 기원은 ‘설명되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것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 그 말은 그도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숙고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p128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p131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나무들은 특히 신비로웠으며 나에게는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숲은 사람들이 생명의 심오한 의미와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p136 나는 가난이라는 것이 불리한 점도 아니며 고통의 주된 원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138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신’은 나의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p142 하느님 자신이 어떻게 한 인간을 영적인 세계질서로부터 떼어내 신성모독을 하도록 저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p142 나 자신이 성실치 못해 버림을 받은 듯이 여겨졌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너는 속이는 자다. 너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너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어.… 또한 하느님 자신이 어떻게 한 인간을 영적인 세계질서로부터 떼어내 신성모독을 하도록 저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를 받아들이고 그 것을 참아내는 법을 배워야만 해.”


p144 교회공동체라는 말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p148 그 곳에는 더 이상 안과 밖이 따로 없고 나와 타인,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조심스러움과 소심함도 없었다. 땅과 하늘, 세계와 그 안에서 ‘기고 날고’, 돌고, 올라가고, 떨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p152 말을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운명적인' 이상한 감정에 싸이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막 내 앞에 나타났는데도 마치 우리가 하나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와 함께 걷고 있구나.'


p156 '정신'이란 물론 내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주 희석된 공기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겨졌다.

 

아름다운 시간들...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p168 제2의 인격은 파우스트 속에 인격화된 바와 같이 중세의 은밀한 일체감을 느꼈고, 아마도 괴테의 심금을 깊이 울렸을 흘러간 시대의 유산과도 그러한 일체감을 느꼈다. 그러므로 괴테에게도 제2의 인격은 하나의 실재였다. 이 사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p170 나는 제1의 인격이 빛을 운반하는 자이며 제2의 인격은 그림자처럼 제1의 인격을 따라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과제는 그 빛을 지키고 그 '투철한 생명력'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었다.


p173 나와 제2의 인격 사이에는 분열이 생겼으며, 그 결과 나는 제1의 인격 쪽으로 기울었고, 그만큼 제2의 인격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제2의 인격은 적어도 어느 정도 자율적인 인격임을 암시하게 되었다.


p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p180 한번은 아버지가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신앙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고 화까지 치밀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교회와 그 신학적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는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아버지가 하느님에게 직접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길을 막아버리고는 의리없이 아버지를 버리고 말았다.


p185 한번은 어머니가 나를 향해서인지 주변 공기를 향해서인지 ‘제2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너를 위해서 돌아가셨구나.”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p192 나는 그리스도를 전면에 내세워 그를 하느님과 인간의 드라마에서 결정적인 유일한 인물로 만드는 견해에 대해 동조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견해는 그리스도가 죽은 후에는 그를 낳았던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대신할 것이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견해와도 전적으로 모순되었다.


p201 파우스트가 나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p202 철학자들은 온통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을 늘어놓고, 정작 사실들을 가지고 답변해야 할 때는 침묵해버리기 일쑤였다.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p213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 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이다.


p217 나는 나의 숙명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만큼, 그 정도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자서전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되었어야만 했느냐에 관해 환상을 엮어나간다든지 생애를 위한 변명을 쓰는 그런 잘못 말이다.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이 셈이다.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p230 우리는 개선이나 치료가 어느 정도 오래 지속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나는 그와 같이 불확실한 가운데 일하는 것에 대해 늘 저항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환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내가 결정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환자 스스로 어떤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가는지 환자 자신으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p235 누가 도덕적 지각없이 몰래 죄를 짓고 발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벌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때로는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그 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p241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꿈의 분석


p249 나의 분석에서는 이론적 전제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p250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 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p253 꿈은 의식적인 태도에 대한 보상 바로 그것이다.


p253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p254 그것은 당신이 우선 당신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 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당신이 올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가 올바르게 되겠습니까? 당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를 확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p259 환자 편에서 전이가 일어난다든지 의사와 환자 간에 다소 무의식적인 동일시가 일어날 때에는 때때로 심령심리학적 성질을 지닌 현상이 야기될 수도 있다.


p261 이러한 경험에서 중요한 점은 원형적인 상황(이 사례에서는 죽음이라는 상황이지만)과 관련하여 종종 관찰되는 전형적인 동시성 현상이다.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이미 그날 저녁 내내 보통 때의 기분하고는 유난히 달리, 이상하게도 마음이 어수선하고 신경이 예민했던 것이다.


p264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좀 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인격발달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p270 오늘날 소위 신경증 환자들 가운데는 이전 시대라면 신경증, 즉 자기 자신과의 분열을 겪지 않았을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이 신화에 의해 조상들의 세계와 여전히 관련을 맺고 있고, 그리하여 단지 바깥에서 보는 자연이 아닌 실제로 체험하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그러한 시대와 환경에서 살았다면, 그들은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를 면했을 것이다.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있고,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p270 그들의 표면적인 증상은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벌어져 있는 틈이 메워지는 순간 사라진다. 이러한 분열을 자신에게서 깊이 느끼고 있는 의사는 무의식의 심정 과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심리학자가 빠지기 쉬운 자아팽창의 전형적인 위급상황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p271 그러므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일종의 구획심리학을 계발한다. 감정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지성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경증을 앓고 있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불화


p276 억압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 점에서는 프로이트가 옳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Trauma)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p279 나로서는 그러한 성에 대한 단호한 평가가 그의 주관적 전제와 어느 정도로 연관되어 있는지, 그이 성이론이 입증 가능한 경험과 어느 정도까지 연관되어 있는지 분명치 않았다. 무엇보다 영혼에 관한 프로이트의 태도는 나에게 몹시 수상쩍게 여겨졌다.


p281 왜냐하면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학적 판단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개인적인 권력충동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p281

p284 성욕은 역시 프로이트에게 신성한 힘이었으나 그의 용어와 이론에서는 성욕을 예외없이 생물학적 기능으로 표현해놓았다. 그가 성욕에 관하여 말할 때의 떨리는 어조만이 그의 내부에서 깊은 울림이 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결국 그는 성욕 역시 내면에서 보면 영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했다.


p285 프로이트는 왜 자신이 성에 관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해야만 하는지, 왜 그러한 생각이 자신을 그토록 사로잡고 있는지 한 번도 자문해보지 않았다. '해석의 단조로움'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 혹은 아미도 '신비주의적'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자신의 또 다른 면으로부터의 도피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가 그러한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자신과의 일치에 이를 수 없었다. 그는 무의식 내용들의 역설과 모호성을 보지 못했으며,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모든 것은 위와 아래가 있고 안과 밖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밖에 관하여 말할 때, 프로이트가 그랬듯이, 전체의 반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무의식에서 반작용이 일어나는 법이다.


p287 신성한 힘이란 어떤 면에서는 진실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성한 힘의 체험은 사람을 고양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추락시키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성욕이 신성한 힘이며 그것은 일종의 신이면서 악마라는 심리학적인 진리를 좀 더 고려했다면, 생물학 개념의 한계에 갇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니체도 인간존재의 바탕을 좀 더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면, 아마도 감정의 과잉으로 세계의 가장자리 밖으로 나가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p295 나의 말에 프로이트는 기묘한 시선, 의심이 가득 담긴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 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 말 속에 이미 우리 관계의 종말이 예시된 셈이었다. 프로이트는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웠다.


p301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식물이 가능한 한 자라나려 하고 동물이 가능한 한 먹이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똑같이, 꿈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러한 생명의 형태들은 우리의 눈을 속이려고 하지 않으나, 우리 자신이 근시안이어서 스스로를 속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지 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무의식과 무의식의 직접적 표현인 꿈을 자연의 과정으로 여겼다.


p310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후 나의 모든 친구나 친지들은 나를 떠나갔다. 사람들은 나의 책을 쓰레기라고 내놓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었고, 이것으로 사태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 오직 리클린과 메더 둘만이 내 곁에 머물렀다.


p311 성은 지하세계의 영의 표현으로서 아주 중요하다. 그 영은 ‘신의 또 다른 얼굴’, 즉 신의 이미지의 어두운 면이다. 지하세계의 영의 문제는 연금술의 사고세계를 탐구한 이후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p311 그가 우리 문화에 준 충격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꿈을 무의식과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인정함으로써, 잃어버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진 가치를 과거와 망각으로부터 되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무의식 정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p316 그 무렵 나는 이상하게도 명료한 정신상태 속에서 내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제 신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모든 문을 열려고 하는가?” 그러자 갑자기 내가 무엇을 이뤄왔는지 의문이 생겼다.  “너 자신은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p318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환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p326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만일 내가 감정에 나 자신을 내맡겼더라면 무의식의 내용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어쩔 수 없이 신경증에 걸렸을 것이고, 결국 무의식의 내용이 나를 파괴했을 것이다. 나의 실험을 통해 나는 점정 배후에 숨은 이미지를 의식화시키는 것이 치료의 관점에서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는지 알았다.


p327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환상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나 자신을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해야만 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저항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무척 불안하기도 했다. 자기 제어력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신과 의사로서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자기들 것으로 삼았을 위험성이 있었다.


필레몬과의 대화


p335 필레몬과 또 다른 환상의 형상들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필레몬은 내가 아닌 다른 힘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환상속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내가 의식에서 생각하지 않은 것들을 말했다.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그라는 것을 정확히 지각했다.


    그는 내게 설명하기를, 내가 나의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의 견해로는 그 생각들이 숲속의 짐승이나 방 안에 있는 사람, 공중의 새처럼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당신이 방 안에서 사람들을 본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그 사람들을 만들었다거나 당신이 그 사람들에게 만든 책임이 있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츰 나에게 정신적인 객관성, ‘마음의 진실’을 깨우쳐 주었다.


p338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구루로 삼지만, 늘 영혼을 구루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p340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라고 불렀다.


p341 매일 저녁 나는 글쓰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실한 글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적어 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p342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p343 오늘날 나는 아니마와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그런 감정을 갖게 되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했을 것이다. 오늘날 내게는 그 관념들이 직접 의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무의식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내면의 이미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나의 꿈을 통해 직접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중개자가 필요하지 않다.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p345 삶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언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언어가 삶을 대체하려고 시도한다면 언어뿐 아니라 삶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p346~347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이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그런 비현실성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방황하고 침체되어 있던 때이긴 하지만, 내가 체험한 모든 것은 나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됨을 나는 항상 알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폭넓게 채우고자 노력했다.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였다.


p349 영혼, 즉 아니마는 무의식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은 사자(死者)집단과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신화적인 ‘죽음의 나라’, 즉 조상의 나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 속에서 영혼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영혼이 무의식 또는 죽음의 나라로 되돌아간 셈이 된다.

    소위 ‘영혼의 분실’ 현상과 일치한다.


p356~357 만다라가 참으로 무슨 의미인지 나는 차츰 깨달아갔다. 그것은 '형성, 변환, 영원한 마음의 영원한 재창조'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즉 인격의 전체성이었다. 모든 것이 잘 돼가면 조화로우나 자기기만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의 만다라 그림들은 날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자기' 상태와 연관되는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p365 나는 내적 체험에 관해 역사에서 예시의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 나는 "나의 가설이 역사 속에서 어디에 나타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그런 증거를 찾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내 생각을 증명할 수가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연금술과의 만남은 나에게 결정적인 경험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때까지 부족했던 역사적 기반을 나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이었다.


p366 연금술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통해 비로소 그노시스주의와 역사적인 연결이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로써 과거와 현재 사이에 연속성이 생기게 된 셈이었다. 연금술은 하나의 중세 자연철학으로서 한편으로는 과거 즉 그노시스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 즉 현대 무의식의 심리학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p366 연금술철학에서는 여성원리가 두드러져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 역할을 했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나의 심리학적 발견의 핵심도 이와 같은 내면의 변환과정 즉 개성화였다.


p372 나는 곧 분석심리학이 연금술과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의 경험은 나의 경험이었고, 그들의 세계는 어떤 의미로는 나의 세계였다.

    내 무의식의 심리학은 역사에서 대응물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이제 나의 심리학은 역사적 토대를 얻게 되었다. 연금술과의 비교는 그노시스주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신적 연속성과 함께 나의 심리학에 실체성을 부여해주었다.


p374 그때 나 자신에게 던진 첫 질문은 “무의식과 더불어 무엇을 하는가?”였다. 거기에 대한 회답으로 저술된 것이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였다.


p378 나는 무의식이 변환하기도 하고 변환을 야기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을 배워서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무의식 내용에 대한 자아의 관계에 의해 정신의 변환과 발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 개인의 경우 그 과정을 꿈이나 환상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집단적인 세계에서는 그것이 반영된 표현이 특히 다양한 종교상징의 변환에서 발견된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변환과정에 대한 연구와 연금술의 상징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는 '개성화의 과정'이라는 내 심리학의 중심개념에 이르게 되었다.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p388 상처 입은 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듯이 치료자는 자신을 치유한다. 특기할 일은 꿈에서 결정적인 활동이 죽은 자에 의해 행해진다는 사실이다.


p397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그 글들은 내가 살아온 동시대 세계에 대한 보상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식세계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p404 처음부터 탑은 나에게 성숙의 장소였다. 즉, 그 안에서 내가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로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자궁, 모성적 이미지의 장소였다. 탑은 내가 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미리 예감했던 것의 실험, 즉 개성화의 표현으로 이어졌다. 청동보다도 오래갈 기억의 징표였다. 그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처럼 느껴져 나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쳤다. 건축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단편적으로 그때그때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들만 좇아서 일을 했다. 그래서 내적인 연관성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꿈속에서 탑을 지은 셈이었다. 나중에야 비로소 나는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형태, 즉 정신적 전체성의 상징을 이루게 된 것을 알았다. 마치 오래전에 뿌린 씨가 싹이 트는 것처럼 그 일이 전개되었다.


p405 나는 전기를 쓰지 않고 벽난로와 화덕에 손수 불을 지핀다. 저녁에는 옛날 등잔에 불을 붙인다. 수도도 없어 나는 펌프로 직접 물을 긷는다. 장작을 패고 음식을 요리한다. 이런 단순한 일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런데 단순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볼링겐에서는 고요함이 나를 에워싸고 사람은 ‘겸허하기 그지없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산다.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생각들, 그에 따라 먼 미래를 내다보는 생각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여기서는 창조의 고통이 완화되며 창조성과 유희성이 거의 하나로 어울린다.


p406 여기 돌이 있네. 보잘것없는 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연금술사 아르날두스 드 빌라노바, (1313년 죽음) 의 가틴어 시구절-

⇒ 이것은 융이 돌에 새겨넣은 최초의 글이다. 이 글은 무지한 자들로부터 경멸당하고 배척되는 연금술사의 돌을 묘사하고 있다.


카르마


p417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넘겨진 비개인적인 카르마가 가족에게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나는 조상들에게 숙명적으로 던져졌으나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물음에 내가 대답해야 하며, 지나 간 세대가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긴 것을 내가 완성하거나 계승해야만 할 것같이 늘 여겨진다.


p421~422 옛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이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고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찿던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우리도 그만큼 더욱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힘을 다하여 개인의 근원과의 단절이 심화되도록 부추긴다.

    그러면 각 개인은 집단의 한부분으로 단지 ‘중력의 혼(니체가 말한 집단정신)’을 따라 가게 된다. 앞을 향한 개현, 즉 새로운 방법 또는 ‘묘안’을 통한 개혁은 지금 당장은 확실하겠디만 길게 볼 때는 의심스러우며 어떤 경우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즐거움,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대부분 실재의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그에 반해 역행을 통한 개혁은 일반적으로 비용이 덜 들고 더 오래가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 개혁은 보다 단순하고 확실한 과거의 길로 돌아가며 신문, 라이오, 텔레비전, 그 외 겉으로 보기에 시간을 아낄 만한 온갖 신기술을 최대한 적게 이용하기 때문이다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p433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격정으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그 격정에 의해 그들의 생이 영위되고 있다. 그들의 의식은 한편으로는 공간에서의 방향설정과 외부에서 받은 인상을 전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에서의 방향설정과 외부에서 받은 인상을 전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인 충동과 격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성찰을 하지 않고 자아는 독립성이 결여되어 있다.


p434 나는 늘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무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꿈의 형태 이외로는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


p439 아직도 현존하는 생의 가능성에 대한 추억이다. 우리가 그것을 순진하게 다시 체험해보려고 한다면 야만으로 전락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잊는 방향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갈등의 형태로 다시금 우리와 마주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의식 속에 붙잡고,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 것인가, 잊혀진 것을 회복할 것인가, 두 가지 가능성을 두고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 충분한 이유 없이 다시 그러한 발언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p440 의식은 전체에 대한 조망이 없으므로 대개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사실 확인으로 그쳐야 하며, ‘자기의 그림자’와의 충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회답은 앞으로 진전되는 미래의 연구에 맡겨두어야 할 것이다.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p441 비평의 수단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대상의 외부에 관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 관점은 특히 그 성격상 어떤 다른 학문분야보다도 훨씬 주관적인 경향을 가진 심리학적 사항들에 아주 유용하다. 예컨대 우리나라를 밖에서 볼 기회를 한 번도 갖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나라의 특성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밖에서 본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는 말이다


p443 나는 그에게 왜 백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p450 그 순간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 확신감과 ‘위엄’이 어디서 나오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보존자인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고 지도록 돕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순전히 질투심으로 인디언의 순진함을 슬쩍 비웃고 우리가 그들보다 영리하다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p451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우리가 온갖 유럽의 합리주의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우리 자신을, 한쪽은 넓은 대륙의 초원으로 다른 한쪽은 잔잔한 바다로 기울어지는 저 고적한 고원의 맑은 공기 속으로 옮겨놓을 때,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세계의식성을 버리고 그 대신 그 너머에 놓여 있는 세계 무의식성과 더불어 끝이 없는 듯이 보이는 지평을 확보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견해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p452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p456 나는 단지 그의 세계가 까마득한 수천 년 전부터 나의 세계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p457 연금술에서는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 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p469 문제는 그가 여기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전체성 속에 존재하면서 짐승 떼와 함께 돌아다니는 남편의 ‘자기장’의 중심이 되고 있느냐 하는데 있는 것 같았다. 이 ‘소박한’ 여인의 정신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의식적이므로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


p470 현대사회에서 동성애가 맡은 역할은 대단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모성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일부는 자연의 합목적적 현상이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p489 내가 인도에서 주로 몰두한 것은 악의 심리학적 성질에 관한 물음이었다. 이 문제가 어떻게 인도의 정신생활에 의해 통합되는가 하는 것은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p490 기독교인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에 빠진다. 이에 반하여 인도인은 선과 악의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거나, 명상이나 요가로써 이러한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p491 자신의 열정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p495 나는 부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부처에게 ‘자기’는 모든 신을 넘어서, 특히 인간실존과 세계의 정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 자체의 측면뿐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인식도 함께 포괄하고 있다.


p497 그러나, 역사적 발전은 ‘그리스도 모방’으로 이어져, 개인이 전체성에 이르기 위해 자기 고유의 숙명적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간 길을 본받아 따라가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부처를 신앙적으로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부처는 모방의 대상인 모범상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부처 자신의 이념은 약화되었다. ‘그리스도 모방’이 기독교 이념의 발전을 치명적으로 가로막은 것처럼 말이다. 부처가 바로 그 통찰로 인해 브라마의 신들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도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은 신들이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소위 ‘기독교적’ 서구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대신 세계파괴의 가능성으로 내닫고 있다.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p507 남자의 아니마는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에 깊이 물들어 있다. 아니마는 과거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남성이 그의 선사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남성 속에서 대신 보충해주고 있다. 남성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이미 있었던 모든 삶이 아니마다.


p508 사람들이 이미 있던 무의식 내용을 의식에 통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말로 표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논의할 필요가 없는 주관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사실이며, 그 사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다.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p517 내가 살아온 인생은 자꾸만 시작도 끝도 없는 역사처럼 여겨졌다. 나는 나 자신이 하나의 역사적 단편, 앞서거나 뒤따른 본문도 없이 책에서 잘려진 장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의 인생은 긴 사슬에서 가위로 잘려진 것처럼 보였고, 많은 물음은 해답이 없는 채로 남았다. 무슨 이유로 그와 같이 진행되었을까? 왜 나는 그런 가설들을 가지고 왔는가? 나는 그것으로 무엇을 이루었는가? 그 결과가 무엇인가?


융합의 신비


p524 그때 나는 왜 사람들이 공간을 채우는 신성한 영의 ‘향기’에 관해 말하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말할 수 없이 신성한 영이 그 방에 있었다. 그 현상을 설명한 것이 <융합의 신비>였다.


p525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는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 상태의 지복이라고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객관적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시간으로 쪼개질 수도 없고 시간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도 없었다. 그 체험은 우선 하나의 상태, 즉 사람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감정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제와 동시에 오늘과 내일 존재한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한 현재이며,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그래도 하나였다. 감정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지나간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한 만족이나 실망이 모두 포함된 하나의 총체, 다채로운 전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지각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였다.


p526 감정적인 관계는 강요와 예속으로 부담을 주는 열망의 관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그로 말미암아 상대방과 우리 자신이 부자유하게 된다. 객관적인 인식은 감정적인 연관성 너머에 있다. 이 사실이 중요한 비밀로 여겨진다.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만 진정한 융합이 가능하다.


p527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p528 나는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온갖 평가를 뛰어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옳으냐 그르냐 하는 범주는 항시 존재하지만 그것은 구속력이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존재가 주관적인 평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가 또한 존재하는 생각으로서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도 전체성의 현상에 함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p532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지식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p534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인생이 현존을 넘어서 무한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훨씬 더 이성적으로 잘 살며 더욱 편안해질 것이다 사람은 수백 년을,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이 헛되이 분주하기만 하는가?


p536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 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 마치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범위를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동시성현상과 예언적인 꿈, 예감 들을 생각해보라.


p542 회피할 수 없는 질문자가 그에게 다가오고 그는 이에 답해야 한다. 그가 죽음에 관한 신화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은 그가 들어갈 어두운 구덩이 외에는 아무것도 그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화는 그의 눈앞에 다른 이미지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것은 유익을 주며 정신을 풍성하게 하는 사후세계 삶의 이미지들이다. 그가 이 이미지들을 믿거나 약간만 선회하더라도 그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무(無)’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두 사람 다 불확실성 속에 있다. 그런데 전자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고 있고, 후자는 본능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이며 후자에게 이로운 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p546 죽은 자의 혼령들도 그들이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던 것만 ‘알고’ 그 외에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 속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애쓴다.


p558 내가 보기에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자들, 다시 말해 그들 뒤에 살아남아서 계속 변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물음에 대한 회답을 얻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은 자들은 전지(全知)하나 모든 지식을 임의로 활용할 수 없고 단지 육체에 갇힌 살아 있는 사람들의 혼으로 흘러들어가는 일만 가능하다는 듯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죽은 자에 비해 유리하다. 즉, 명쾌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단일성과 무한성


p560 서양인으로서는 정적이기만한 세계의 무의미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의미를 전제해야 한다. 동양인은 이런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이 그 전제를 구현 한다.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


p562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이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p570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나다. 그가 깨어난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p572 인간의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p573 우리 시대는 모든 강조점을 이생의 인간에 두어왔다. 이로써 인간과 그의 세계의 신들림이 초래되었다. 독재자들이 출현하고 그들이 온갖 재앙을 가져오게 된 원인은, 영리하기 그지없는 지성인들의 근시안으로 인해 인간에게서 내세적인 것이 박탈된 데 있다. 그런 사람들처럼 인간은 무의식성의 제물이 되어버린다.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p580 선과 악(또는 불완전함)이 상대적이라고 해서 선악이라는 범주가 가치가 없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며 특유한 심리적결과가 뒤따른다. 다른 데서 내가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행해지거나 의도되거나 생각되는 온갖 잘못은 세계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 마음을 응징할 것이다.


p581 윤리적 결단이 요구한다면, 버릇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도덕적인 선이라고 알려진 것을 경우에 따라 피하고 악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선악의 대극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방성에 대하여 우리는 도덕적 형태를 갖춘 인도철학의 ‘네티 네티(neti-neti : '아니다 아니다’라는 뜻으로 부정의 부정, 즉 부정을 통한 긍정을 시사하는 말이다. 우파니샤드철학 이래 ‘절대’는 ‘네티 네티’에 의해서만 인식된다고 한다-옮긴이)’의 모본을 가지고 있다. 이로써 윤리규범은 경우에 따라 불가피하게 지양(止揚)되고, 윤리적 결단은 개인의 판단에 맡겨진다. 이런 생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심리학 이전 시대에도 이미 ‘의무의 충돌’이라는 말로 늘 제기되었던 내용이다.


p596 통찰이 생기지 않는다면 사색은 의미가 없다. 사색은 예컨대 물병자리 시대의 경우처럼 객관적 자료가 있는 곳에서만 의미가 있다.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p601 그럴듯한 비밀의 필요성은 원시단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의 비밀은 결속을 위한 시멘트 역할을 해준다. 사회적인 단계에서 비밀은 개별 인격들의 결속 부족을 효과적으로 보상하는 데 의미가 있다. 개별 인격은 타인과의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일성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감으로써 반복해서 분열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개성을 의식하는 개체가 되려는 목표에 이른다는 것은 거의 가망이 없는 오랜 수련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통과의례를 거친 우수한 개체들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공동체 역시 사회적으로 분화된 정체성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무의식적인 정체성에 의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p604 개인적인 목표를 따르면서도 집단성에 보조를 맞추려는 자는 누구나 신경증적인 사람이 된다. 그러한 ‘야곱’은 천사가 더 강한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천사가 야곱과 싸운 후에 다리를 절었을 거라는 이야기는 없었던 것이다.


p612 마음의 역동성 밑바닥에 양극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넒은 의미의 대극문제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을 모두 포괄하는 심리학적인 토론에서 다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점들은 당연히 전문분야의 독자적인 특징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심리적인 문제제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여기서는 더 이상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고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학적 근거와 의미에서 고찰되는 것이다.


p617 원형적 진술들은 본능의 전제조건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진술들은 이성적으로 논증된 것도 아니고 이성적인 반론으로 제거될 수도 없다. 그것들은 예전부터 세계상의 일부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세계상이란 레비 부륄이 절절하게 명명한 대로 ‘집단표상’인 것이다. 확실히 자아와 그의 의지가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아가 하고자 하는 것은 대개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원형적 과정을 실제적으로 고려하면 종교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다. 종교가 심리학적인 관찰방식을 감당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p620 우리는 소위 가장 깊은 뜻에서 우주 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희생제물이거나 수단과 도구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따옴표 속에 넣은 것은 그 말이 단지 열망, 선호, 총애, 소원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개체보다 우월한 전체, 하나인 것, 나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부분으로서의 인간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전체에 압도당하고 있다. 그는 찬성하거나 분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그 속에 갇혀 있고 에워싸여 있다. 언제나 그는 거기에 좌우되며 그것에 기인하고 있다.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p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p627 정말이지 나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창피스럽게도 어떤 힘이 우리 심장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를 정말 사랑한다. 그것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순간이다. 나 자신이 희생 제물이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데몬이 사람이 빠져나가도록 해주면서 그와 함께 복된 모순을 가져다준다.


p629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는 거칠고 잔혹하며 동시에 신성한 아름다운을 지니고 있다.


p630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편집자의 말


p633 나에 관한 책은 항상 일종의 숙명적인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무언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나 자신으로 하여금 미리 어떻게 쓰도록 한다든지 미리 계획을 세우도록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자서전도 지금 벌써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고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하나의 필수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을 하루라도 중단하면 그와 동시에 불쾌한 신체적 증상이 따라온다. 그러나 내가 그 작업을 하면 금방 그 증상은 사라지고 머리가 아주 맑아진다.


p635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수(精髓)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p636 항상 그랬듯이 내 인생에서 모든 외적인 것은 우연한 것이고, 오직 내적인 것만이 실체성이 있으며 결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숙명적이네. 그 결과 외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들은 모두 희미해졌네. 아마도 ‘외적인’ 경험들은 한 번도 실재가 된 적이 없거나, 아니면 단지 나의 내적 발달단계와 일치할 때만 실제가 되었을 것일세. 내 존재의 이러한 ‘외적인’ 발현들 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나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네. 그것은 내가 모든 정력을 기울여 그러한 일들에 참여했기 때문인 듯이 여겨지기도 하네.


p643 ‘자서전’은 내가 연구하고 노력하여 얻은 빛에 비추어 살펴본 나의 생애입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상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나의 생애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글로 써온 내용의 정수이며 그 반대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느냐와 내가 어떻게 글을 쓰느냐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노력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자서전’은 단지 소문자 아이(i)의 윗점, 즉 전체를 완성하는 최후의 한 점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3. ‘내가 저자라면’


■ ‘기억, 꿈, 사상’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옮긴이 서문-자서전 문학의 백미

 

일생을 사로잡은 꿈-유년시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학창시절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너는 누구냐?

자연과 사원

두 인격의 어머니

악의 기원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아름다운 시간들-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꿈의 분석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불화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필레몬과의 대화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카르마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융합의 신비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단일성과 무한성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편집자의 말-A. 야페

카를 구스타프 융 분석심리학 개념 및 용어

 

 

이 책은 자서전이기에 융의 생애가 담겨 있다. 융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연대기적 순서로 나열하여 그의 생애와 순간들을 담고 있다. 다만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이자 비서에 의해 집필되고 정리된 것이다.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기 때문에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책은 융의 유년기부터 말년까지를 회고하는, 연대기적 흐름으로 서술되고 있다. 다만 그 개별적인 내용들은 시간적인 흐름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일련의 사건이나 체험에 대한 융의 내적 체험들을 중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내적체험을 중심으로 서술하다 보니 이것은 그것을 겪었던 당시의 느낌과 생각에서 변화된 생각,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이후의 일들이 얽혀서 기술되는 형태이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대체로 비슷한 형태로 글이 전개가 되고 있다. 그가 어렸을 적 혹은 당 시기에 맞닥뜨렸던 내적체험에 대한 기억과 분석. 어릴 적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 그 장면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을 시도하는 그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다. 무엇에나 의미를 붙이고 설명하려는 것은 역시 그의 표현대로 자기실현의 과정이었을 터, 그 무수한 자기실현의 과정들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어떤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의 꿈이나 맞닥뜨린 체험의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그에 대한 해석들,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서도 그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 보완점이라기보다는.


이 책은 융의 제자이자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이 82세가 된 1975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를 엮은 것이다. 이른바 자서전이다. 특히,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기 때문에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자서전이기에 융의 생애가 담겨 있다. 융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대기적 순서로 나열하여 그의 생애와 순간들을 담고 있다. 처음에 융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출간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후 출간 조건으로 동의했다 한다. 어쨌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이것을 죽은 후에 출간하기를 바랬던 걸까.

 이미 자신의 할 이야기들은 충분히 다양한 논문과 저서를 통해서 했고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서도 꺼려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그의 이전의 무의식의 이야기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을까. 외적 사건들보다는 내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은 그래도 ‘외적 사건’들을 말하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이 책의 제목 '기억, 꿈, 사상'처럼 기억과 꿈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단지 관찰 대상이 융 자신의 내밀한 것이었다는 특징만 있을 뿐 우리가 자서전이라는 데서 기대하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기대하지 못한다. 어쨌든, 자서전이라는 것이 생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은 그의 저서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의 생각과 경험과 그것에 심층으로 들어간 이야기들은 이미, 보아 왔는데, 알고 있는데란 생각을 하는 것은 왜인지. 좀더 가십적인 이야기거리를 찾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무의식에 대한 해석도 해석이지만 그냥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찾아낸 것은 왜 슈필라인의 이야기는 없는가였다. 한 개인의 자서전이라기보다 분석심리에 관한 또 하나의 사례가 들어간 논문이라고 해야 할까.

 융 자신 외적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없고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기에 그러한 별로 없는 외적 사건을 겪을 때의 내적인 체험과 의식이 궁금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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