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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6일 02시 34분 등록



『쉽게 읽는 백범일지』 김구지음 도진순 역어 옮김. 2005년 돌베개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연보
아래의 백범 연보는 쉽게 읽는 백범일지에 수록된 것이다.

1. 『백범일지』원문의 연기 착오를 대폭 정정하여 연보를 작성하였다.

2. 가급적 달까지 표시하여 선후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같은 달에 일어난 사건은 ; 로 연결하였다.
3. 백범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일반 시사 사항은 [ ] 안에 정리하고 음영 처리하였다.
4. 건양 원년 (1896) 이전은 음력, 그 이후는 양력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양 ․ 음력을 적시하였다.
5. 주어가 없는 경우는 백범의 활동을 의미한다.


1876년(1세) [2월: ‘한일수호조규’조인] 음력 7월 11일(양력 8월 29일): 해주 텃골에서 태어남. 아명은 창암.
1878~79년(3~4세) 천연두를 앓음. 얼굴에 벼슬자국 생김.
1880~82년(5~7세) 강령 삼가리로 이사갔다 텃골 고향으로 다시 돌아옴.
1883~86년(8~11세) 아버님, 도존위에 천거되었다가 3년이 못되어 면직.
1887년(12세) 양반이 되기로 결심, 과거를 위한 서당 공부 시작.
1888~89년(13~14세) 아버님, 갑자기 전신불수 되었다가 호전되어 반신불수, 부모님은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김창암은 친척 댁을 전전.
1890~91년(15~16세) 부모님과 더불어 고향 해주 텃골로 돌아와 서당 공부 재개.
1892년(17세) 과거 낙방. 관상 공부하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 병법서 탐독, 가문 어린이를 모아 1년간 가르침.
1893년(18세) 동학 입문, 김창수로 개명.
1894년(19세) [1월: 전봉준의 고부민란 발행. 5월: 전주화약, 6월: 청일전쟁 발발] 가을: 김창수, 동학접주 첩지를 받음. [9월: 동학농민군 2차 봉기. 10월 22일~11월 12일: 동학군 공주 우금치에서 대패]. 11월 27일(양력 12월 23일): ‘팔봉접주’로 해주성 공격에 선봉에 나서지만 실패. 12월 [전봉준, 순창에서 잡혀 경성으로 압송] 김창수 부대, 동학군 이동엽의 공격으로 대패. 이후 3개월간 몽금포로 잠적.
1895년(20세) 2월: 청계동 안태훈 진사에게 의탁. 스승 고능선을 만남. 5월: 김형진과 함께 청국 만주까지 감. [8월: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11월: 김이언 의병에 참가하나 패배.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하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 [11월 15일: 단발령 공포. 11월 17일: 건양으로 연호 개정, 양력 사용]
1896년(21세) [1월: 전국 각지에 을미의병 일어남. 2월 11일: 고종, 아관파천] 3월 9일: 김창수,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를 죽임. 6월: 해주옥에 투옥. 8~9월: 인천으로 이송되어 세 차례 심문 받음. 10월 22일: 법부,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 고종은 최종 판결 보류.
1897년(22세) 김주경이 김창수 구명 운동을 벌이지만 실패.
1898년(23세) 3월: 탈옥, 대신 부모님이 투옥됨. 삼남으로 도피. 늦가을: 공주 마곡사에서 스님 원종이 됨.
1899년(24세) 4월: 해주에서 부모님 상봉. 5월: 평양 영천암 방장으로 걸시승 생활. 9~10월경: 환속, 해주 고향에 돌아옴.
1900년(25세) 2월: 강화 김주경의 동생, 진경의 집에서 3개월 동안 훈장 생활. 유완무와 그의 동지들을 만남. 이름을 구로 고침. 11월: 고능선 선생과 구국 방안 대한 논쟁.
1901(26세) 1월 28일(음력: 1900년 12월 9일): 아버님 사망.
1902년(27세) 음력 1월: 여옥과 맞선을 보고 약혼.
1903년(28세) 음력 1월: 약혼녀 여옥 병사. 음력 2월: 아버님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 평양에서 열린 그해 겨울 사경회 참여.
1904년(29세) 장련 사직동으로 이사. 여름: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에 참여, 안신호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 광진학교 설립.
1905년(30세)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 김구, 경성 상동교회 모임에 참여, 전덕기․이준․이동녕․최재학 등과 함께 상소, 공개 연설 등 구국운동. 12월: 황해도로 돌아와 신교육 사업에 매진.
1906년(31세) 11월: 최광옥과 함께 안악면학회 조직. 12월: 최준례와 결혼.
1907년(32세) [4월: 신민회 조직. 7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 전국적인 의병운동. 8월: 고종 퇴위, 순종 즉위]
1908년(33세) 장련에서 신천군 문화로 이사, 서명의숙 교사. 안악으로 이사, 양산학교 교사. 해서교육총회를 조직, 학무총감이 됨.
1909년(34세) 황해도 각 군을 순회하며 계몽운동. 10월: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살. 김구, 이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한 달여 만에 불기소 처분. 12월: 재령 보강학교 교장 겸임; 나석주․이재명 등과 만남. [12월: 이재명, 경성에서 이완용을 습격]
1910년(35세) 둘째 딸 화경 태어남.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 공포] 12월: 경성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신민회 회의에 참여. 안명근, 양산학교로 김구를 찾아옴.
1911년(36세) 1월: 일제, 안악 사건을 조작, 황해도 일대의 민족주의자 총검거. 김구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함. 7월: 김구, 징역 15년 선고 받음;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죄수번호 56호), 의병과 활빈당 등을 만남.
1912년(37세) 15년형이 7년으로 감형.
1914년(39세) 7년형에서 다시 5년으로 감형. 출옥을 대비하여 이름을 구로, 호를 백범으로 고침. 인천감옥 이감, 인천항 건설 공사에 동원.
1915년(40세) 둘째 딸 화경 죽음. 8월: 김구, 가석방.
1916년(41세) 문화 궁궁농장 추수 검사, 셋째 딸 은경 태어남.
1917년(42세) 2월: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됨. 셋째 딸 은경 죽음.
1918년(43세) 11월: 아들 인 출생.
1919년(44세) 3월: [3․1운동 발발] 3월 29일: 김구, 상해로 망명.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월: 김구,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됨.
1920년(45세) 8월: 아내 최준례, 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옴.
1922년(47세) 어머님, 상해로 옴. 차남 신 출생. 9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됨.
1923년(48세) 6월: 김구, 국민대표회의 해산령 내림.
1924년(49세) 1월: 아내 최준례 사망. 6월: 김구, 임시정부 노동국총판을 겸임.
1925년(50세) [3월: 임시정부, 이승만 면직안 의결; 박은식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 7월: 박은식, 임시정부 대통령 사임] 8월 29일: 나석주 의사, 백범의 생일상을 차려줌. [9월: 이상룡, 임시정부 국무령에 임명됨] 11월: 어머님, 차남 신을 데리고 귀국.
1926년(51세) [6월: 국내 6․10만세운동. 12월: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 12월: 국무령 홍진 등 임시정부 전 국무위원 총사직; 김구, 임정의 국무령에 선출됨.
1927년(52세) 9월: 장남 인을 고국으로 보냄. 3월: 임시정부,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 김구, 국무위원에 선출됨.
1928년(53세) 3월: 김구, 『백범일지』 상권 집필 시작; 임시정부를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미주 교포들에게 편지 보내기 정책을 실시함.
1929년(54세) 5월: 『백범일지』상권 탈고. 8월: 김구, 상해 교민단 단장이 됨.
1930년(55세) 1월: 김구,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 창당.
1931년(56세) [9월: 만주사변 발발] 10월: 김구, 일본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창단, 이봉창 의거 계획을 세움.
1932년(57세) 1월 8일: 이봉창 의사, 일황 히로히토에게 수류탄 투척. [1월 29일: 상해사변 발발. 3월: 만주국 성립] 4월 29일: 윤봉길, 상해 홍구공원 의거. 김구, 피치 씨 집에 피신. 5월: 김구, 상해 탈출, 가흥․해염 등으로 피신;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로 옮김. [10월: 이봉창, 교수형으로 순국. 12월: 윤봉길, 총살형으로 순국]
1933년(58세) 5월: 김구, 장개석 면담. 11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 설치.
1934년(59세) 4월: 9년 만에 어머님과 아들 인․신을 만남. 낙양분교의 한인특별반 중지. 가흥의 여뱃사공 주애보를 남경으로 데려와 동거. 12월: 남경에서 한인특무독립군 조직.
1935년(60세) [4월: 민족혁명당 결성 운동, 임정무용론 대두. 7월: 민족혁명당 결성] 10월: 임정의정원 의원 16인, 가흥 남호에서 선상 비상회의, 이동녕․김구․조완구 등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 임시정부의 김구 시대 개막. 11월: 김구,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한국국민당을 조직. 임시정부, 항주에서 진강으로 옮김.
1936년(61세) 8월 27일: 김구,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진중음을 휘호로 씀. [12월 12일: 장개석, 서안에서 장학량에 의해 구금(서안사변)]
1937년(62세) [6월 4일: 김일성, 보천보 습격. 7월 7일: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 발발. 11월 20일: 장개석, 천도 발표] 김구, 임정 대가족과 호남성 장사로 피난. [12월 13일: 일본군, 남경 점령 및 대학살]
1938년(63세) 5월: 남목청에서 이운환의 저격을 받음. 7월: 임시정부, 광주로 옮김. 10월: 임시정부, 유주로 옮김. [일본군, 한구․무창․광동 등 함락]
1939년(64세) 3월: 임시정부, 사천성 기강으로 옮김. 4월: 어머님 곽낙원(81세) 사망.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40년(65세) 2월: 임시정부 대가족, 토교로 이사. 5월: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 한국국민당이 통합하여 한국 독립당 결성. 9월: 임시정부, 중경으로 옮김 ; 광복군 성립 전례식. 10월: 임시정부, 헌법 개정 ; 김구, 주석으로 선출됨.
1941년(66세) 10월:『백범일지』하권 집필을 시작. 11월: 임시정부, 「대한민국 건국 강령」발표.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 개전]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
1942년(67세) 3월: 임시정부, 「3 ․ 1절 선언」으로 중 ․ 미 ․ 영 ․ 소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 10월: 김원봉 등 좌파, 임시정부에 참여.
1943년(69세) [9월: 이탈리아, 연합군에 항복. 11월: 미 ․ 영 ․ 중 3국 거두,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 논의]
1944년(70세) 2월: 임정, 서안에서 미군 도노반 장군과 회담. [8월 15일: 일본 항복, 9월: 국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10월: 이승만 귀국] 11월: 김구를 포함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제1진 귀국.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임시정부 환영회, [모스크바 3상 회의] 김구, 신탁통치 반대 총동원위원회를 조직.

1946년(71세) 2월: 김구, 비상국민회의 조직, 반탁운동 [3월: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6월: 이승만,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발언] 7월: 김구, 이봉창 ․ 윤봉길 ․ 백정기 3의사의 유골을 효창원에 모심. 10월: 좌우합작 7원칙 발표 ; 김구, 이에 대한 지지성명 발표.
1947년(72세) 1월: 김구,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조직, 제 2차 반탁운동 전개. 3월: 김구, 건국실천원양성소 개설. 5월: 김구,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 불참을 성명. [9월: 한국문제 UN에 이관됨] 10월: 한국독립당, 남북대표회의 의결. [11월: UN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의 한반도 총선 가결] 12월: 장덕수, 피살 ; 김구, 암살의 배후로 의심 받음 ;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
1948년(73세) 1월: 김구,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 의견서 발표. 2월: 남북 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의 김일성 ․ 김두봉에게 보냄. 4월: [제주도 4 ․ 3 사건 발생] ; 김구, 북행하여 남북연석회의 참여. [5 ․ 10 총선거] 7월: 김구, 북한의 단정 수립도 반대한다는 성명 밝힘 ; 통일독립촉진회 결성 ;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1949년(74세) 1월: 김구, 서울에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 ; 백범학원을 세움. 3월: 창암학원 세움. [5월: 국회프락치 사건] 월 26일 낮 12시 36분: 안두회의 총에 맞아 경교장에서 운명. 7월 5일: 국민장 거행, 효원장에 안장.

♣ 저자에 대한 생각
6월 오프 때 사부님은 세계사의 한 장면과 개인사의 역사가 어떻게 연관이 되었는지 살펴보고, 지나온 어떤 순간의 도약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라고 하셨다.
오프가 끝나고 돌아와 나는 이 책을 다시 한 번 그런 관점으로 읽어 보았다. 백범 김구의 개인사가 곧 한나라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게 된 계기. 하나의 대의명분으로 칠십 평생을 살다간 김구의 인생을 다시 살펴보았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처럼 그는 처음부터 김구가 아니었다. 시대의 필요에 의해 탄생된 영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김구는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시키고자 노력했으며, 사회 안에서 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점이 오늘 우리가 그의 일지를 읽게 되는 까닭일 것이다.

다음 인터뷰 내용은 해방후, 귀국한 김구가 평생을 바쳐 지키려 노력한 그의 조국의 당시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함이 실린 인터뷰기사를 읽으면서 어쩐지 목이 메었다. 칠십평생을 바쳐 지키려 한 그의 조국은 그가 마음껏 일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김구는 그런점에서 불운한 사상가였고, 대개의 독립투사처럼 그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지고 말았다.

1945. 11. 26. / 눈과 귀가 있으매 듣고 보아서

문 : 그간 국내정세는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통일전선 결성에 노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선생의 포부는 어떠하신지요?

답 : 아직 자세한 사정을 몰라서 오늘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전선을 결성하는데 있어 내가 이승만 박사보다 나은 생각을 갖고 왔으리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아는바와 같이 국내와 연락이 없었고 국내 사정에 어두운 만큼 현실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다음날로 미루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다만 국사를 위해 노력해온 신문기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이 시간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문 : 통일전선에 있어 먼저 민족반역자와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소리가 높은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통일전선을 결성하는데 있어 불량한 분자가 섞이는 것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일이 있을 줄 압니다. 위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전후가 동일할 것입니다.

문 : 선생은 장차 국내정세를 어떤 방법으로 파악하시려는지요?

답 : 눈과 귀가 있으매 듣고 보아서 잘 판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문 : 어제 밤 환국 제일야의 감상은 ?

답 : 내가 혼이 왔는지 육체가 왔는지 분간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문 : 선생은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셨다고 발표되었는데.

답 : 우리나라에는 현재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관계로 대외적으로는 개인자격이 될 것이나 우리 한국사람 입장으로 보면 임시정부가 환국한 것입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백범 출간사
p.3.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언제 죽음이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이를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권이다.
p.4-5.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p.6.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기에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층민 백정과 평민의 범부를 의미하는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만한 것은 대한 사람이면, 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p.10. 아울러 이 책에는 본문의 내용과 관련되는 사진과 자료, 그리고 백범의 동선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도 등을 100컷 이상 첨부하였다. 이것으로써 시작적 효과도 높일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범마저 기억하지 못했던 관련 인물 ․ 유적 ․ 자료들을 찾아내어, 『백범일지』본문에 다양한 역동성을 부여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나도 많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독자들은 우선 이러한 사진 ․ 자료 ․ 지도만 일별해 보아도, 개항기부터 해방 이후까지의 격동기에 한반도와 중국 대륙 곳곳에 남겨진 백범의 자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상권
인 ․ 신 두 아들에게
p.17. 너희들이 다 자랐으면 부자간에 따뜻한 대화라도 나누겠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내 나이 벌써 쉰셋인데 너희는 겨우 열 살 전후의 어린아이들이니, 너희들의 나이와 지식이 더할수록 나의 정신과 기력은 약해질 따름이다. 또한 나는 이미 일본에 선전포고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다.
이 일지를 기록하여 전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나는 너희들이 역사상 많은 위인들을 배우고 본받기를 원한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면 아비의 삶을 알 길이 없겠기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오래된 사실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아 유감스럽지만, 일부러 지어낸 것은 없으니 믿어 주기 바란다.
황해도 벽촌에서의 어린 시절
상놈이 된 집안 내력과 양반에 대한 울분
p.21.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난산으로 태어난 개구쟁이
p.21-23. 상황이 다급해지자 집안 어른들이 아버님께 소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 용마루로 올라가 소 울음 소리를 내라고 했지만 아버님은 선뜻 따르지 않았다. 할아버님 형제분들이 다시 호통을 치셔서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난 후에야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것은 부부가 난산의 고통을 함께 나누도록 하는 고향의 풍속이었다.
집이 가난한데다 나이 겨우 열일곱에 아이를 얻었으니, 어머님은 항상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셨다. 젖이 부족해서 암죽(곡식 가루를 밥물에 타서 묽게 끓인 것)을 끓여 먹이기도 했고, 아버님이 나를 품고 이웃 산모에게 가서 젖을 얻어 먹이기도 하셨는데, 먼 친척 알머니인 핏개댁은 밤늦은 시각에도 싫어하는 표정 없이 젖을 주셨다고 한다. 내 나이 열 살 때쯤 그분이 돌아가셨는데, 텃골 동산에 있는 그분 묘를 지날 때마다 나는 경의를 표하곤 했다. 나는 서너 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어머님께서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와 같이 대나무 침으로 따고 고름을 파내어 내 얼굴에 마마자국이 많이 생겼다.
다섯 살 때, 집안 어른들을 따라 우리 가족은 강령군 삼가리로 이사하여 두 해 동안 살았다. 우리 집은 깊은 산 입구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있었다. 밤에는 종종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문 앞을 지나다녔으므로 밖에 나갈 수 없었지만, 낮에는 이웃동네 이생원 댁 아이들과 놀다 오곤 했다. 하루는 그 집 아이들이 해주놈 해려 주자고 공모하여 이유 없이 나를 매질하였다.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그 집 아이들을 다 찔러 죽일 결심으로 달려갔다. 앞문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눈치 챌까 봐 칼로 울타리를 뜯고 들어갔는데, 마침 안마당에 있던 처녀가 놀라 제 오라비에게 일렀다. 나는 다시 실컷 얻어맞고 칼까지 빼앗겼다 집에 돌아와서는 칼을 잃어버린 탓에 부모님께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내내 시치미를 ㅔ었다.
또 하루는 집에서 혼자 입이 궁금하던 차에, 집 앞으로 엿장수가 지나가며, “헌 그릇이나 부러진 숟갈로 엿 사시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엿은 먹고 싶었으나 “엿장수가 아이들 자지 베어 간다”는 어른들 말씀을 들어온 터라 겁이 나서 방문을 걸어 놓고 엿장수를 불렀다. 주먹으로 문구멍을 뚫고 아버님이 쓰시던 좋은 숟갈을 분질러 절반만 구멍으로 내밀었다. 엿장수도 엿을 한 주먹 뭉쳐서 들이밀어 주었다. 맛있게 엿을 먹고 있는데 아버님이 들어오셔서 반동강 난 숟가락을 보셨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 아버님은 다시 그런 짓을 하면 엄벌하겠다고 꾸중만 하셨다.
그 후 어느 날, 아버님께서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넣어 두고 나가시는 것을 보았다. 혼자 심심한데다 앞동네 구걸이 집에서 떡 파는 것을 알았기에 돈을 전부 꺼나 온몸에 감고 떡집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삼종조부를 만났다.
“이 녀석, 돈 가지고 어디 가느냐?”
“떡 사 먹으러 가요.”
“네 아비가 보면 큰 매 맞는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p.24. 한 번은 여름에 장맛비가 와서 근처에 작은 내가 흐르게 되었다. 나는 붉은 물감과 푸른 물감을 꺼내 다 풀어 넣고, 푸른 내 붉은 내가 서로 만나며 섞이는 장관을 구경하다가 어머님께 매를 몹시 맞았다.
파란만장한 실패와 단련의 성장기
과거 낙방, 양반의 꿈은 무너지고
p.30. “소생은 아무개이옵는데, 먼 시골에 살면서 과거 때마다 참석하여 금년 칠십 살입니다. 다음 과거에는 참석하지 못하겠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합격하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p.30-31. 이렇게 해서 정선생님이 짓고 다른 선생님이 쓴, 아버님 명의의 과거 답안지를 새끼줄 망 사이로 감독관에게 들여보냈다.
그러고 나서, 과거 부정에 얽힌 이런저런 말을 많이 들었다. 시험장의 사환이 과거 답안지를 한 아름 도적질해 갔다는 이야기, 글도 모르는 자가 남의 글을 베껴 자기 것으로 제출했다는 이야기, 글 모르는 부자가 큰선비에게 몇천 냥씩 주고 글을 사서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서울 아무개 대신에게 편지를 부쳤으니 합격한다고 자신하는 사람, 감독관의 수청 기생에게 좋은 비단 몇 필을 선사하였으니 꼭 붙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자도 있었다.
p.31. 아버님이 관상서인 『마의 성서』한 권을 빌려다 주셨다. 나는 독방에서 이것을 공부하였다. 관상서를 공부하려면 먼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부위와 개념을 익힌 다음, 다른 사람 얼굴로 확대 적용해 나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 나는 두문분출하고 석 달 동안 내 얼굴을 면밀히 관찰하였다.
p.32.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동학군이 동학군에 패하다
p.41-42. 내 나이 열아홉 살이던 갑오년 섣달 경, 나는 며칠 동안 몸에 열이 오르고 두통이 심하여 방에 누워 있었다. 패엽사 주지스님이 문병을 와서 나를 자세히 보더니, “홍역도 치르지 못한 대장이구려!” 했다. 그는 영장 이용선을 시켜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자신이 직접 치료를 전담하면서 나이 든 여승에게 나를 간호케 하였다.
적장의 집에서 만난 스승 고능선
p.46. 당시 내 마음은 매우 절박한 상태였다. 과거장에서 낙심하고, 관상 공부에서도 실망하였으며, 동학당이 되어 ‘새로운 국가’, ‘새로운 국민’을 꿈꾸었으나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실패한 패장 신세가 되어 겨우 생명만 부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장래를 생각하면 대체 어디다 발을 디뎌야 할지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러니 과연 내가 고선생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오히려 선생께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앞섰다. 나는 마음에 있는 그대로 말하였다.
“선생님! 저는 불과 스무 살에 실패를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질과 품성을 밝히 보시고 좋은 점이 있으면 사랑해 주시고 교훈도 해 주십시오. 그리하지 못한다면, 저의 발전은 고사하고 선생님의 높으신 덕에 누만 끼치고 말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p.48. 그날부터 나는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겠고, 고선생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날마다 고선생 사랑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선생은 책을 차례대로 가르치지 않고,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 주고 빈 구석을 채워 주는 구전삼수의 방법을 이용하셨다. 선생은 주로 의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아무리 뛰어난 재주와 능력이 있어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 실행 ․ 계속의 세 단계를 밟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특히 선생은 과단성 없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결점이라 여기셨는지, 과단성이 없으면 모든 일이 쓸데없다 하시며 다음 구절을 힘주어 설명하셨다.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p.49.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지만, 백성과 신하가 모두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의 힘이 대궐까지 파고들어 대신들을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 나라를 제2의 왜국으로 만든 것 아니겠는가? 그런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일만 남았네.”
김이언 의병도 실패하고
p.60. “김이언의 이번 실패는 영원한 실패라, 다시 사람들을 모으지 못할 거요. 그러니 저들과 같이 도망갈 필요가 없소. 잠시 강계성 부근에 몸을 피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질풍노도의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치하포 단독 의거
p.68.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p.69. “그렇다. 그러나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을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첫 번째 투옥, 인천으로 이감
p.76. 나진포에서 배를 탔다. 병신년 7월 25일, 달빛이 없어 천지가 캄캄하고 물소리바에 들리지 않았다. 강화도를 지날 때 쯤, 순검들이 마음 놓고 잠든 사이에 어머님이 조용히 입안엣말씀으로, “네가 이제 왜놈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맑고 맑은 이 물에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함께 다니자”고 하시며 내 손을 끌고 뱃전으로 나가셨다.
“어머님은 자식이 이번에 죽을 줄 아십니까?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죽였으니 하늘이 도우실 테지요.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그저 위안하는 말로 들으시고 다시 내 손을 잡아 끄셨다. 자식의 말을 왜 안 믿으시냐고 한 번 더 간곡하게 말씀드리자 그제야 투신할 결심을 버리고 말씀하셨다.
“너의 아버님과도 약속하였다. 네가 죽는 날이면 우리 둘도 같이 죽자고.”
p.78. 어머님은 옥문 앞까지 따라오셔서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님은 비록 농촌에서 자라셨지만 무슨 일이나 잘하셨고 특히 바느질에 능하셨다. 무슨 일이 손에 잡히셨을까만 자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감옥에 하루 세 끼 밥을 넣어 주는 조건으로 감리서 밖 박영문의 집에 고용되셨다. 옛사람들이 “슬프다, 부보님께서 나를 낳으시느라 고생하시었다”고 노래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때도 많은 고생을 하셨고,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또 천배 만배의 고생을 더 겪으셨다.
신문장에서 영웅이 되고, 옥중에서 왕이 되다
p.79-80. “만국공법 어디에 통상화친조약을 맺은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라는 구절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살면 몸으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나라의 치욕을 씻으리라!”
p.82.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나를 강도로 대우해도 잠잠히 입 다물고 있었다. 허나 오늘 정당하게 내 뜻을 말했는데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느냐? 땅에 금만 그어 놓고 감옥이라 해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당초 도망할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 죽인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밝히고, 또 내 집에서 석 달이 넘도록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려고 내게 이리 나쁜 대우를 하느냐?”
p.83. 제 2차 신문일(1986년 9월 5일)에도 간수의 등에 업혀 옥문 밖을 나섰다. 사방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길에 가득 찼고, 경무청 안에도 각 관청의 관리들과 항구의 유력자들이 다 모은 모양이었다. 담장 꼭대기와 지붕 위까지, 경무청 뜰이 보이는 곳은 어디나 사람들이 다 올라가 있었다. 법정에 들어가 앉으니 김윤정이 슬쩍 내 곁을 지나가며, “오늘도 왜놈이 왔으니 기운껏 호령을 하시오” 한다. 나는 전에 다 말하였으니 다시 할 말이 없다며 신문을 끝내고, 뒷방에 앉아 나를 넘겨다보고 있던 오타나베를 꾸짖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는 면회 오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대개 이런 말들을 하였다.
p.84. “오늘 저 사람들이 창수의 사진을 찍으러 왔으니, 주먹을 쥐고 눈을 부릅뜨고 사진을 찍으시오.”
그런데 사진을 어떻게 찍을지가 문제가 되어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였다. 결국 청사 내에서 찍는 것은 허락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 사진을 찍게 하였다. 왜놈은 내게 수갑을 채우든지 포승으로 얽든지 하여 죄인의 표시를 내 달라고 부탁했지만, 김윤정은 폐하의 분부가 없는 이상 김창수의 몸에 형구를 댈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왜놈이 다시 애걸하니, 내 옆자리에 포승을 놓고 사진 찍는 것으로 겨우 허락해 주었다. 나는 며칠 전보다 기운이 좀 돌아와 있었으므로 경무청이 들썩거릴 정도로 큰소리를 질러 왜놈을 꾸짖고 구경꾼들을 향하여 고함고함 쳤다.
신지식을 접하고 교수형을 면하다
p.90. 해방 후 고종릉을 참배하는 백범(1946년 7월 24일) 백범의 사상적 궤적은 동학, 의병, 애국계몽운동 등을 거치면서 고종과 왕실에 대한 인식에 일정한 변화를 겪는다. 치하포 사건은 왕실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고, 고종도 교수형을 최종 재가하지 않아서 김창수는 탈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개화사상을 접한 김창수는 탈옥 이후 스승 고능선을 만나 임금과 탐관오리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국권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백범은 환등기로 고종 대황제의 어진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국궁을 시키는 등 우호적인 입장으로 다시 바뀐다.
p.91. “오늘 관리들뿐 아니라 전 항구의 객주 32명이 긴급 회의를 열고 통지문을 돌렸는데, 집집마다 몇 사람씩이든 엽전 한 냥씩을 준비해 김창수의 교수형을 보러 오라고 하였소. 거기서 모은 돈으로 김창수의 몸값을 쳐주되, 부족한 액수는 32객주가 보태서 김창수를 살리고자 하였소. 그러나 지금은 천행으로 살았고, 아마 며칠 안에 궐내에서 다시 은혜로운 명령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마시고 계시오.”
눈서리가 내라다가 갑자기 봄바람이 부는 듯하였다. 밤에 옥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벌벌 떨던 죄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좋아서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방망이로 차꼬 등을 두들기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푸른 바지저고리 죄수복 차림으로 춤도 추면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이 마치 배우들의 연극장 같았다.
동료 죄수와 관리들은 나를 보고 참말로 영웅이라며 놀라워하였다. 사형일인데도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였으니, 이는 필시 선견지명이 있기 때문이라고들 하였다. 어머님도 그날 밤 감리서의 전갈을 받고서야 비로소 이 일을 알게 되셨다. 이 일로 인해 누구보다도 어머님이 당신 아들을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셨다. 전에 강물에 같이 빠져 죽자고 하셨을 때 내가 결코 죽지 않을거라고 한 일을 기억하시고, “내 아들은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다”고 확신하게 되신 것이다. 어머님뿐 아니라 아버님도 같은 신념을 갖게 되셨다.
탈옥, 조롱을 박차고 나가다
p.94.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요.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 물고기가 아니리.
나라에 대한 충도 부모에 대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님을 생각하소서.
p.96. 당초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우리 국법에 범죄 행위로 인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때 왜놈을 죽이고 내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오로지 내 힘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군주(고종)께서도 나를 인정하고 계신다. 법부의 전보로 사형 추진을 정지시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감리서와 경성 각 관아에 탄원하여 받아 낸 답변들을 보아도 나를 죄인으로 지목한 것은 없다. 인천사람 중 내가 옥중에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게다가 김주경은 자기 전 재산을 탕진해 가며 나를 살리려 하였다. 결국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5년간의 방랑과 모색
동지를 찾아서
p.101. 나는 시흥 가는 길을 택하여 경성으로 갈 작정이었다. 내 행색은 누가 보든 도적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감옥에서 장티푸스를 앓은 후 머리털이 전부 다 빠져 소위 솔잎상투로 꼭대기만 노끈으로 졸라매고 수건으로 동인 채였고, 옷은 두루마기도 없이 바지저고리 바람이었다. 의복만 본다면 가난한 사람은 아니지만, 새로 입은 옷에 보기 흉하게 흙이 묻어 있어, 스스로 살펴보아도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p.102. 그런데 동네 가운데 디딜방앗간이 있고 그 옆에 볏짚단이 있었다. 볏짚을 안아다가 방앗간에 깔고 누우니, ‘인천감옥 특별방에서 2년 동안 지낸 연극의 제1막이 내리고, 이제 방앗간 잠으로 제 2막이 열리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p.106. ‘오늘 살인을 하고 가는구나. 그자가 밤에 내 얼굴을 대하면서 심히 무서워하더니 제 자식을 안아다가 강변에 버리고 도망한 것 아닌가?’
고기 먹고 사를 짓는 장발의 걸사승
p.111. 하룻밤 사이, 청정법계에서 속세의 만 가지 생각이 다 없어진 듯하여 중이 되기로 승낙하였다. 얼마 뒤 사제 호덕삼이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거리더니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p.112. 종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짐승이나 곤충에게까지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전날 밤 자기 상좌가 되어 달라고 부탁할 때는 그렇게 공손하던 하은당부터 “얘, 원종아”하고 기탄없이 부르고, “생긴 것이 미련스러워서 이름 높은 중은 못 되겠다. 어쩌면 얼굴이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나가서 물도 긷고 나무도 쪼개거라”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상놈의 껍질을 벗고 남보다 뛰어난 양반이 되어 그동안 당한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도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이 되고 보니 그런 생각이야말로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만일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싹트고 자라면 부처님께 의뢰하여 물리쳐 내야 하는 것이다.
‘하도 많이 돌아다녔더니 나중에는 별세계 생활을 다 하겠다.’
이런 생각에 혼자서 웃다가 탄식도 하였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장작도 패고 물도 길었다. 하루는 앞내에 가서 물을 지고 오다가 물통 한 개를 깨뜨렸다. 하은당이 어찌나 야단을 치던지, 보다 못한 보경대사가 한탄하였다.
p.116. 내 생각에도 방주가 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며 구걸하기도 너무 죄송스런 일이었다. 최재학과 같은 학자와 함께 지내면 내 공부에도 도움이 되겠고, 먹고 사는 걱정도 없어질 터이며, 숨어 지내는 본뜻에도 방해가 안 될 거라는 생각에 바로 승낙하였다. 나는 혜정과 함께 영천암으로 가서 일을 대충 정돈하고 방 하나를 정하여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p.117. 염불하는 대신 시를 외웠다. 종종 평양성에 가서 최재학 등 시객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밤에는 대동문 옆에 가서 면을 먹었다. 처음에는 소면만을 먹다가 나중에는 고기가 들어 있는 육면을 그대로 먹었다. “손에는 돼지머리를 들고, 입으로는 거룩하게 경전을 외는 꼴”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지은 시가 평양 기생들의 노래 곡조로 불렸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평양에서는 나를 ‘걸시승 원종’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스승, 아버님, 미혼처와 영원히 이별하다
p.127-128. 아, 슬프다!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만에 하나라도 내게 아름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구전심수하신 훈육의 덕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 애통하다!
p.131. 나는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다. 요즘 세상에서는 여자라도 무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 공부는 스무 살 전에 해야 하니 1년이라도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두 어른은 처녀가 긔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집으로 돌아와 어머님과 작은 아버님께 약혼 사실을 말씀드렸다. 두 분 모두 처음에는 믿지 않으셨으나 어머님이 직접 가셔서 약혼 여부를 알아 오시자 작은아버님은 “세상에 참 어수룩한 사람도 다 있다”고 하셨다.
나는 곧 『여자독본』과 같은 책을 대강 만들고 지필묵까지 준비하여 미혼의 처를 가르쳤다. 당시 나는 처가에 오래 있으면서 가르칠 형편이 못 되었다. 집안일도 돌봐야 했고, 아버님 탈상 후 신교육에 헌신할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종서 등 여러 사람을 만나러 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나 틈만 나면 처가에 가서 가르쳤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교육
황해도 순회 교육운동과 두 번째 투옥
p.149. 안중근 의사
1895년 백범은 청계동에서 세 살 아래인 안중근을 처음 만났다. 백범이 애국계몽운동을 하고 있던 1907년, 안중근은 연해주로 망명하여 주로 무력투쟁에 참가하였다. 1909냔 안중근은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끊어, 죽음으로써 구국 투쟁을 벌일 것을 맹세하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고, 그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3월 26일 사형되었다. 현재 효창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허묘가 있다. 사진 상단에 적힌 일본인 추종자의 글에 “안중근의 한 방이 천지를 진동시켰다”는 구절이 있다.
이재명 의사에 대한 회한
p.152. 이완용 암살을 시도했던 이재명 의사
이재명 의사는 1904년 하와이로 가서 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노 처단을 결의하자, 이를 위해 귀국하였다. 1909년 11월 하순, 평양에서 그는 동지들과 매국노 이완용 처단을 결의하고 12월 12일 상경하였다. 백범이황해도에서 이재명 의사를 만난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12월 22일 매국노들이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재명 의사는 11시 30분경 명동성당 문밖에서 칼로 이완용을 찔러 중상을 입히고 체포되어 1910년 9월 30일 24세로 순국하였다.
일제의 모진 감옥에서 백범이 되다
세 번째 투옥, 고문에서 얻은 교훈
p.156. 나는 나라가 망하기 전 구국사업에 성심성력을 다하지 못한 죄를 받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어려운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야 할 신조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참된 신하를 안다”고 한 옛 가르침과,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사육신과 삼학사에 대해 가르쳐 주신 고능선 선생의 말씀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p.162. 왜놈이 신문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가혹한 고문이다. 채찍과 몽둥이로 온몸을 두들겨 패고 두 손을 등 뒤에 포개고 오랏줄로 결박하여 천장의 쇠고리에 연결한 뒤, 둥근 발판 위에 세웠다가 발판을 빼 버리면 몸이 공중에 매달리면서 질식하게 된다. 그런 다음 결박을 풀고 찬물을 끼얹어 숨이 돌아오게 한다. 또 화로에 쇠막대기를 벌겋게 달구었다가 온몸을 지지기도 하고, 손가락 크기의 마름모꼴 나무 막대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나무 양끝을 노끈으로 동여매기도 한다. 사람을 거꾸로 매단 후 콧구멍에 냉수를 부어 넣기도 한다.
p.163. 몸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놈들은 나를 달아매고 때릴 때는, 조선시대 박태보가 보습단근질을 당하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했다는 일화를 기억했다. 겨울철이라 겉옷만 벗기고 속옷은 입힌 채로 때리는데, 나는 “속옷을 입어 아프지 않으니 다 벗고 맞겠다”고 자청하여 알몸으로 매를 맞아 살가죽에 온전한 데라곤 없었다. 바로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 음식 냄새를 맡을 때면,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해서 밥을 받아먹을까, 또 아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을 해다 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중국 한나라 때 소무가 흉노에게 잡혀 19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굶주리면서도 옷 솜털을 씹어 먹으면서까지 끝내 절의릴 지켯다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또한 허기진 알몸으로 고문받으면서 “몸은 욕보일 수 있을지언정 정신은 뺏을수 없다”고 소리쳤던 전날의 기개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다가 내게서 이간의 성정은 사라지고 짐승 같은 본능만 남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였다. 바로 이때 그놈이 나를 아카시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극진히 우대하며 신문한 것이다.
기약없는 15년형, 교육 건국의 꿈은 무너지고
p.
마음가짐의 대변동, 계몽운동을 넘어서
p.174. ‘의병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니 국가에 대한 의무도 너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찍이 고능선 선생에게 의리가 무엇인지 배웠고, 또 삼척동자라도 개나 양에게 절하라고 시키면 응하지 않는다고 2세들에게 가르치던 네가, 왜놈 간수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느냐? 지금 왜놈이 주는 콩밥과 붉은 옷 때문에 네가 왜놈에게 순종하는 거싱더냐? 명색이야 의병이든 도적이든, 왜놈에게 종신형이나 10년형을 받고 갇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히 의병으로서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 남자는 의로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지 않는다고 어린 학생을 가르치던 네가 지금은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 네가감옥 안에서 왜놈에게 순종하는 개 같은 생활을 견디고서, 15년 후 감옥을 나가면 공을 세워 순종한 죄를 갚을 자신이 있느냐?’
도적에게 결사의 비법을 배우다
p.177-178. “평소 귀 단체의 조직과 훈련 등을 연구해 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도적을 박멸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후일 나랏일에 참고하기 위함이니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비밀결사의 시원과 유래가 여러 백년이 되어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소. 그러나 우리의 기강이 엄밀하여, 나라가 망하고 사회 기강이 여지없이 추락한 오늘날에도 ‘벌의 법’과 ‘도적놈의 법’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자부합니다. 노형을 북대로 생각하고 여러 말로 물은 것은 미안합니다. 이제 노형이 물어본 기관에 대해 먼저 설명하고, 이어 조직 ․ 훈련 ․ 실행의 몇 가지 예를 말씀하오리다.
누가 도적질을 좋은 직업으로 알고 하겠소. 대개는 불평자의 반동적 심리에서 기인한 것이외다. 조선시대 이전은 상고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 이후 도적의 계파와 시원은 이렇습니다. 고려 말 이성계가 나라를 세웠을 때, 두문동 72인과 같이 고려왕조에 충성하고 신왕조에 협조하지 않은 저사들이 비밀리에 연락하여 동지를 모았습니다.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운 것을 바로 세우며, 새 왕조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보복적 대의를 표방하고, 조선의 국록을 먹고 백성을 착취하는 양반과 부자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였소. 그런데 나라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 이름 붙이고 500여 년간이나 압박하고 죽이려 해 온 것이외다.”
p.178-179. 그중 강원도에 근거를 둔 기관을 ‘목단설’이라 하고, 삼남에 있는 기관은 ‘추설’이라 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북대’는 무식한 자들이 임시로 작당하여 민가를 털고 약탈합니다. 그러니 목단설과 추설끼리는 초면에도 오래된 동지처럼 서로 인정하고 돕지만, 북대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적대시하여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형시킵니다.
목단설과 추설의 최고 수령은 ‘노사장’이고, 그 아래 총무를 보는 자와 각 지방 주관자를 ‘유사’라 합니다. 양설이 같이하는 공동대회를 ‘큰 장 부른다’고 하고, 각기 단독으로 부하를 모으는 것을 ‘장 부른다’고 합니다. 전에는 매년 한 차례의 큰 장을 불렀으나, 지금은 재알이(왜놈)가 하도 심하게 구는 탓에 없애고 말았습니다. 큰 장을 부른 뒤에는 어느 고을을 털든지 큰 시장을 칩니다. 큰 장을 부르는 본래 뜻이 도적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설의 공사를 처리하는 데 있기 때문에, 그때 시위 삼아 한 차례 하는 것이외다.
큰 장을 부를 때는 각 도 각 지방의 책임자에게 ‘부하 누구누구 몇 명을 파송하라’고 통지합니다. 흔히 큰 시장이나 사찰로 부르는데, 통지를 받으면 어김없이 돌림장수나 중 ․ 상주 ․ 양반행차 ․ 등짐장수 등 형형색색 별별 모양으로 가장하여 출정합니다.
p.179-180. 한 예를 들면, 그전에 하동 화개 장날에 큰 장을 부른 적이 있습니다. 사방에서 장 보러 오는 사람이 몰려들 때 도적들도 섞여 들어왔지요. 시장이 한창일 때 비단으로 맵시있게 꾸민 상여가 들어왔습니다. 상주 삼형제의 상복 입은 사람과 호상하는 사람들이 따르고, 상여꾼도 일제히 소복을 차려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시내에 들어가서 큰 주점 뜰에 상여를 세운 다음, 상주들은 죽장을 짚고 상여 앞에서 ‘아이구! 아이구!’하며 곡을 하였지요. 그런데 상여꾼들에게 술을 먹일 때 호상객 한 명이 개고기 국 한 그릇을 사 가지고 상주에게 권했습니다. 상주가 온순하게 ‘무슨 희롱을 못해서 상제에게 갯국을 권하는가? 그리 말라’ 하여도, 호상인이 기어이 먹으라고 강권했습니다. 온유하던 상주들도 차차 화를 내기 시작했지요.
‘아무리 무례한 놈이기로 초상하는 상제더러 객국을 먹으라느냐?’
‘친구가 권하는 갯국을 좀 먹으면 어떠냐?’
이렇게 하여 차차 싸움이 되었습니다. 다른 호상인들은 싸움을 말린다고 야단 치고, 장사꾼들의 눈이 다 그리로 쏠려 웃고 있을 때, 상주 삼형제가 죽장을 들어 상여를 부수고 널의 뚜껑을 획 잡아 젖혔습니다. 본즉 시체는 없고 5연발 장총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상주 ․ 호상꾼 ․ 상여꾼이 총 한 자루씩을 들고 사방 길목을 막고는 시장에 놓인 돈과 집에 쌓아 둔 부자 상인들의 돈을 전부 빼앗아 가지고 쌍계사에서 공사를 마치고 헤어졌습니다.
노형이 황해도에 사셨다니, 연전에 도적 떼가 청단장을 치고 곡산 군수를 죽였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내가 총지휘 하여 도당을 이끌었습니다. 양반 행차로 가장하여 네 사람이 끄는 사인교를 타고 하인들을 늘어 세워 따르게 하고는, 호기롭게 시장 사무를 마치고, 곡산 군아를 습격하였습니다. 군수 놈이 하도 백성을 절단 내길래 죽여 버렸지요.
p.180-182. 우리의 근본이 비밀결사인 만큼 조직 방법은 충분히 설명해 드리기 어려우나, 노형이 단서를 얻지 못했다는 점부터 말씀드리지요. 도당은 수효만 많고 정밀치 못한 것보다는 수효가 적어도 정밀한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각 지방 책임유사에게 노사장이 매년 각 분 설에서 자격자 한 명씩을 찾아내서 보고하게 합니다. 그 자격 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남녀관계)가 깨끗하고, 셋째 담력이 강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등입니다. 이상 몇 가지 자격 갖춘 자를 은밀히 보고하면, 설의 지도부에서 올린 유사도 모르게 다시 비밀히 조사하여, 합격자를 그 설 책임유사에게 맡겨 도적놈으로 만듭니다. 물론 당사자는 전혀 모르게 합니다. 책임유사가 먼저 그 자격자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보고, 여색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예쁜 여자로, 술을 즐기는 자에게는 술로, 재물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재물로 극진하게 베풀어 환심을 사서 친형제 이상 가까워지게 한 후 훈련을 시작합니다.
방법 중 하나를 말하면, 책임자가 자격자와 같이 어디 가서 놀다가 밤 깊은 후 같이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어떤 집 문 앞에 가서 ‘그대가 잠시 문밖에서 기다리면 내가 이 집에 들어가 주인을 보고 곧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격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서 있을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안마당에서 ‘도적이야!’ 하는 고함이 들리고 집 주위로 포교가 달려들어 문전에 서 있던 자격자를 먼저 포박합니다. 그리고는 안마당에 침입하였던 책임자도 묶어 깊은 산골로 끌고 가서 신문을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70여 가지나 되는 악형으로 고문을 합니다. 만일 자기가 도적이라고 마랗면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죽여 버리고, 끝끝내 도적이 아니라고 고집하면 포박을 푼 후 외진 곳에 데려가, 며칠 간 술과 고기를 잘 먹이고 입당식을 거행합니다.
입당식 때는 책임유사가 정석에 앉고 자격자를 앞에 꿇어앉힌 후, 입을 벌리라 하여 칼을 빼서 입 안에 넣고 ‘위 아래 이빨로 칼끝을 힘껏 물라’고 호령합니다. 그리고 칼을 잡았던 손을 놓고 나서 다시 ‘하늘을 쳐다보아라. 땅을 내려다보아라. 나를 보아라’ 호령한 뒤, 칼을 입안에서 빼 칼집에 넣고 ‘너는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사람을 안즉 확실히 우리 동지로 인정한다’고 선고합니다.
입당식을 마친 후에는 예정 방침에 따라 신입당원까지 이끌고 정식으로 강도질을 한 차례 합니다. 그리고는 빼앗은 장물을 고르게 나눠 줍니다. 이렇게 몇 차례만 함께 하면 완전히 도적놈이 됩니다.”
“동지가 사방에 흩어져 움직이니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서로 만났을 때 충돌을 피하기 어려울 터, 무엇으로 서로를 표시하고 알아봅니까?”
“그렇지요. 자주자주 고치므로 영구히 정해진 것은 없으나 반드시 표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 어떤 여관에 큰 상인 몇 명이 숙박한 것을 알고 밤중에 침입하여 재물을 약탈한 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갑자기 낯을 땅에 대고 꿈적 않는 한 사람이 있었지요. 그가 반벙어리 말로 ‘에구, 나도 장 담글 때 추렴돈을 석냥 내었는데요’하고 우리끼리 통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놈이 방자스럽게 행동하니 저놈부터 동여 앞세우라’ 하여 끌고 가서 물어본 결과 확실히 동지였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 동지까지 장물을 같이 나누는 것이 법입니다.”
“도적질한 물건을 분배하다가 싸움이 되어 발각되거나 체포되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것은 결점이 아니오?”
“그것은 소위 북대의 소행입니다. 우리는 절대 그런 추태가 없습니다. 첫째 우리는 도적질을 임시로 자주 하는 것이 아니고 1년에 한 차례, 많아야 두세 번밖에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장물은 예로부터 정한 규칙에 따라 백분의 몇은 먼저 노사장에게 보내고, 그 다음 얼마는 각 지방에서 공용으로, 나머지 얼마는 사고를 당한 유족의 구제비로 씁니다. 크게 모험을 감수한 자에게는 장려금까지 줍니다. 그런 다음 나머지를 똑같이 분배하므로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또 우리 법에는 1) 동지의 처첩을 간통한 자, 2) 체포당하여 신문 받을 때 자기 동료를 실토한 자, 3) 도적질할 때 장물을 몰래 숨긴 자, 4) 동료의 재물을 강탈한 자 등 네 가지는 사형에 처합니다.
포교를 피하여 멀리 도망가면 혹시 살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한테서 사형을 받으면 빠져나가기 어렵습니다. 도적질하기 싫든지 나이가 많아 물러나기를 원하면, 동지가 급할 때 자기 집에 숨겨 주는 조건에 응한다는 서약을 받은 뒤 행락을 면제해 줍니다.”
“행락이 무엇이오?”
“도적질을 일컬어 행락이라 합니다.”
p.183. “만일 행락을 하다가 포교에게 체포되면 살려 낼 방법이 없습니까?”
“여보, 만약 우리가 잡히는 족족 다 죽는다면 여러 백 년 동안 우리 근거가 ㄷ 없어졌을 것이오. 우리 떼설이(떼도적)는 민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청과 군대의 요직에도 있습니다. 어느 도에서 도적이 잡혔다는 보고가 서울로 올라가면, 가짜 도적인 북대는 지방에서 처결하게 맡기고, 바른 도적 곧 설에 속한 자는 서울로 압송합니다. 그때 동료를 실토한 자는 사형시키고, 자기 사실만 털어놓은 자는 기어이 살려서 옷과 밥을 주고 출옥시킵니다.”
전격적인 망명과 상해 임시정부
마흔 살에 가출옥하다
p.191.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 함이었더냐?”
나는 무조건 죄를 빌었다. 어머님도 어머님이거니와, 아내가 어머님께 말씀드려 술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었다.
농장 감독으로 뜻을 숨기고
p.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소
p.20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청사
1919년 4월 10일 상해 김신부로에서 임시의 정원 회의가 처음 열린 곳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그후 임시정부는 상해에서만 여러 차례 장소를 옮겼다.
사상 혼란기의 내무총장
p.207. 1921년 1월 상해에서 개최한 국민대표대회는 일본 ․ 조선 ․ 중국 ․ 러시아 등 각 곳에서 온 다양한 계파의 한인단체 대표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그중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상해파 공산당이 서로 경쟁적으로 민족주의 대표들을 분열시키려 했다. 이르쿠츠크파는 현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새 정부를 만들자는 ‘창조파’이고, 상해파는 현 임시정부를 고치자는 ‘개조파’ 였다.
결국 국민대표대회는 깨어지고, 창조파는 임시정부와 별도의 ‘한국정부’를 조직하였다. 김규식이 이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지만, 러시아가 허용하지 않으므로 무산되고 말았다. 호의에서 공산당 두 파가 서로 싸움을 벌이니,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창조 혹은 개조를 주장하며 사태가 시끄럽게 되었다. 1923년 6월 내가 임시정부 내무총장의 직권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발표하니 비로소 시국이 안정을 찾았다.
무정부 상태의 국무령
p.212. 애초에 나는 임시정부의 문지기 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는 경무국장 ․ 노동총판 ․ 내무총장 ․ 국무령 ․ 국무위원 ․ 주석으로 중임을 거의 다 역임하였다. 이것은 나 개인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인재난과 경제난 때문이었다. 명성이 쟁쟁하던 집안이 몰락하면, 그 고대광실이 걸인의 소굴이 되는 것과 비슷한 형편이었다.(중략)
크리스마스 때는 적어도 몇백 원어치의 물품이라도 사서 불란서 영사와 공무국과 서양인 친구들에게 선물하였다. 아무리 곤란한 중에라도 14년 동안 연중행사로 이렇게 한 것은 임시정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라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혈혈단신이 되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p.216. 아내가 입원했을 때 인이도 병이 중하여 공제의원에 입원하였으나 아내 장례 후 완전히 나아 퇴원하였다. 당시 신이는 겨우 걸음마를 익히고 젖을 먹을 때였다. 아내가 없자 어머님은 신이를 우유로 기르셨는데, 밤에는 당신의 빈젖을 물려 재우셨다. 신이 차차 말을 배울 때는 단지 할머님만 알고 어머님이 무엇인지 몰랐다.
p.216-217. 고국에서도 어머님은 밤낮 상해에 있는 자손을 잊지 못하시고 생활비를 아껴 적은 금액이라도 보내셨다. 그러나 그것은 화로 속의 한 점 눈송이처럼 별 보탬이 되지 못했다. 내 사정을 알아채신 어머님께서 민국 9년(1927,52세) 다시 인이까지 본국으로 보내라고 명하셨다. 인이까지 귀국시키니, 상해에서 나는 다시 혈혈단신으로 한 점 딸린 식구도 없게 되었다.
p.217. 내 육십 평생을 돌이켜 보면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합이 없고 궁하면 귀함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직위가 올라가 귀해져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나라가 독립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지 모르겠으나, 하늘 아래 넓고 큰 지구에 한 치의 땅도,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옛날 중국의 한유는 가난 귀신을 쫓아 버리려고 「송궁문」을 지었다지만, 나는 차라리 가난을 벗하며 사는 「우궁문」을 짓고 싶다. 그러나 문장가가 아니므로 그 역시 할 수 없다.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p.223. 상권을 쓸 당시 나는 근 10년 임시정부를 지키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운동이 점점 힘을 잃어 정부라는 이름마저 지키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해 지는 외딴 성에 슬픈 깃발 날리듯 암담한 시기였다. 독립운동도 자 안 되고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 무슨 일이든 과감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된 독립 운동을 새롭게 할 목적으로, 미국 ․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려 경제적 후원을 부탁하였고, 피 끊는 의사 들을 찾아내어 의거를 계획하면서 『백범일지』상권을 집필하였다.
p.226.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묻는다면, 제일 큰 소원은 독립 달성 이후 본국에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다. 그것이 안 된다면, 작은 소망은 임시정ㅂ를 후원한 미주 ․ 하와이 동포들이라도 만나 보고 돌아오다 비행기에서 시신을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에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 또한 어렵다.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두 번이나 -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어 인천감옥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리고 17년 후 다시 인천감옥으로 돌아가 인천항 건설 공사를 할 때 - 자살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안명근 형도 서대문감옥에서 굶어 죽으려고 결심하여 3~4일 동안 이런 저런 핑계로 음식을 끊었지만, 간수가 눈치를 채고 의사에게 보인 후 안명근을 강제로 묶어 입을 벌린 다음 계란을 풀어 넣었다. 이처럼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쉽지 않다.
칠십 평생을 돌이켜 보니,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대륙을 진동시킨 이봉창과 윤봉길
불행히 명중하지 못했으나
p.233.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와의 짧은 만남
p.
홍구공원의 쾌거
p.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라며 내 시계와 바꾸자고 하였다. 나는 기념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내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피신과 유랑 속의 민족운동
위기일발의 상해 탈출
p.248. 세상에 이상한 일도 다 있다. 4 ․ 29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해에 있는 일본인들의 유인물에 “김구 만세!”라고 쓴 내용이 뿌려졌다는데, 실제로 얻어 보지는 못하였다. 일본인이면서 우리에게 돈을 받고 정보를 주는 자도 여러 명 있었다. 이번 정보도 일본 영사관의 일본인 관리가 보내 준 것이었다.
별장 생활과 산수 구경
p.
여뱃사공 주애보와 선상 생활
p.
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p.
9년 만의 모자 상봉
p.260. 어머님은 크게 노하여 “내 아들을 찾는 일은 내가 그대네 경관보다 나을 것이다. 언제는 출국을 허가한다 하기에 살림살이를 다 처분하였는데 이제 와서 출국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니, 남의 나라를 빼앗아 이같이 하고도 오래갈 줄 아느냐?”라고 말씀하시고 흥분하여 기절하셨다. 경찰은 어머님께 다시 물었다.
“여전히 출국할 뜻이 있는가?”
“그같이 말썽 많은 출국은 하지 않겠다.”
전시도 중경의 임시정부와 광복군
공동묘지의 지하회장이 되신 어머님
p.273. “어서 독립이 되도록 노력하고, 독립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서 고향에 묻어라.”
대한민국 21년 4월 26일, 어머님은 50여 년간 고생만 하시다가 독립이 되는 것도 보지 못하시고 손가화원에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셨다. 그곳에서 5리 가량 되는 화상산 공동묘지에 석실을 만들어 어머님을 모셨다. 매장지 가까이에 어머니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인 수십 명의 무덤이 있었다. 어머님은 살아 계실 때에도 나이가 제일 많으셔서 대식구의 어른 대접을 받으셨는데, 돌아가신 뒤에도 ‘지하회장’이 되신 듯 싶었다.
왜적의 항복,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p.281-282. 7년간의 중경 생활을 마치게 되니 감개무량하여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남안 화상산에 있는 어머님의 묘소와 아들 인의 묘지를 찾아가 꽃을 바치고 축문을 읽은 뒤, 묘지기에게 돈을 후하게 주고 잘 관리해 달라 부탁하였다. 그리고 가죽상자 8개를 구입하여 임시정부 문서를 정리하였다(이 여덟 상자의 문서는 한국전쟁 중 유실되었다.).
조국의 산천과 동지를 찾아서
삼의사 유골 봉안
p.293. 속세에 일을 돌아보니
오히려 꿈속의 일만 같도다.
서부지역 순방
p.302-303. 중경에서 어머님이 운영하시면서 “내 원통한 마음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시던 최후의 말씀을 떠올리니, 이날 이 자리에서 같이 옛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줄 미리 아시고 하신 말씀 같아 슬픈 말을 진정키 어려웠다.
지금 어머님은 낯선 중경의 화상산 남쪽 자락에 손자 인과 함께 누워 계신다. 영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나와 같이 환영을 받으신다면 그나마 위안이 되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나의 소원
정치이념
p.312. 나는 노자의 무위 사상을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지만, 정치에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빠른 진보를 보이는 것 같지만, 끝내 병통이 생겨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자신의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p.314. 이 세상에서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을 대강 짐작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초를 향하여 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동포 각 개인이 충분한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정치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p.318. 이상에서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다.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 자손에게 이러한 나라를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 나라 지역의 기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 하는 민족이라 하였다.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진다면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3. 내가 저자라면
어릴 때 단숨에 읽었던 백범일지를 다시 읽는 것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난중일기를 읽고 장군의 고뇌하는 세세한 감수성의 결이 느껴졌다면, 백범일지는 호방한 김구의 기개가 느껴지는 일기였다. 또한 김구가 태어난 황해도 해주는 내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한지라 더 친근감이 느껴졌다.

♣출간된 백범일지들
1928년 상해에서 상권이 쓰여지고 1941년 중경에서 하권이 쓰여졌다. 이후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여러 판본의 출현, 독립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김구의 자서전으로 회고록 형식의 자녀를 위해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라고 김구는 기술하고 있다. 또한 시일이 지난 사건을 후에 기술한 것이므로 약간의 오류가 존재한다며 “내가 지나온 기록 중에 연월일자를 기입한 것은, 나는 기억하지 못하겠으므로 본국의 어머님에게 서신으로 물어서 쓴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백범일지의 여러 판본에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국사원본, 1947년 출판 등이 있다. 김구가 환국한 후 여러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국한문 혼용이며, 이광수가 현대 문체로 의역 및 윤문했다. 이광수가 편집에 간여하는 과정에서 원본의 2/3분량으로 축소되었으며 일부학자들이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후 20여개 출판사에서 복간되었다.
*『(원본) 백범일지』, 서문당, 1989
: 종래의 축약판과는 달리 문자 그대로 백범일지 전량을 완전 수록
* 윤병석 직해,『(직해) 백범일지』, 1995
: 김구의 유족들이 친필『白凡逸志』를 공개하여 출간한 것
: 원본 일부가 해독되지 못했으나, 새로운 백범연구의 장을 마련함
: 백범의 독특한 의식세계를 진솔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음

돌베개에서 출간된 『쉽게 읽는 백범일지』는 다른 어떤 책보다 잘 읽혔다. 상하권을 함께 묶고, 적절한 이미지가 삽입되어 이해를 도왔다.

♣끊임없이 앎을 추구하는 지적인 호기심.
백운방 텃골에서 가난한 농사꾼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차도 스승을 제대로 모실 수 없던 우여곡절을 겪다 17세에 과거에 응시하나 낙방한다. 기존의 과거시험의 병폐에 회의를 느낀 그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동학과 만난다. 양반 상놈 구분 없이 평등하다는 동학은 그를 사로잡았고 동학의 '아기 접주' 가 된다.
막연하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원했던 김구에게 새 지평을 열어 준 것은 동학이었다. 1893년 동학에 입도한 후 18세의 나이로 수 백명의 수하를 거느리게 된 김구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관군에게 패한다. 또한 20세에는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김이언과 함께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런 과정은 훗날 김구가 임시정부의 조직을 이끄는 초석이 된다.
♣ 첫 번째 도약 - 자신의 역사를 새로 쓴 우발적 행동
21세였던 1896년 3월 여행 도중 황해도 한 주막에서 아침을 먹던 김구는 조선인 복장을 하고 있던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때려죽이고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선언한다. 석달 후 체포된 김구는 인천으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나, 고종 황제의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집행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시켰다.
이 사건은 애국심에 불타오르는 청년이 일인이 국모를 시해했다는 소식에 비분강개해서 일으킨 비계획적인 우발적 사건이었다. 이사건이야말로 김구의 그후의 일생의 그림을 완성시키는 밑그림이 된다. 김구 자신도 김창수에서 김구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김구의 개인사가 우리나라의 역사로 기록되는 도약의 순간이었다.

♣ 인간에 대한 사랑- 휴면기
1898년 동료죄수들과 탈옥 후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김구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된다. 승려복을 입었으나 이미 국가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되어 버린 김구는 답답함을 느끼고 방법을 모색한다.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을 하며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이시기의 김구는 살인범으로 쫒기는 신세였음에도 민초를 돌아보고 그들을 계몽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무지몽매한 국민을 교육시키고자 했던 것은 그 자신이 신학문에 서 개안한 과정에서 깨달은 것을 되돌려 주고자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범이 나에서 우리로 시야를 더욱 크게 확장시켜간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재수감된다. 1915년 출옥한 후에는 동산평 농장의 농감으로서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 27년간의 망명생활
1919년, 3·1만세 운동후, 일본 경찰들의 감시가 심해지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김구는 중국의 상해로 간다. 상해에 도착한 김구는 안창호를 만나 '내가 일찍이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께 소원하기를, 우리나라 정부가 서거든 내가 그 집 마당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해 달라고, 그러니 내가 임시정부의 문지기 노릇을 꼭 해야겠소' 라고 말한다. 결국 경무국장의 자리에 앉으며 김구의 기나긴 망명생활 의 27년이 시작된다. 내무·외무·법무 등 각 부처를 두고 정부의 모양새를 갖추었던 당시, 안창호는 국무총리의 일을 맡고 있었다.
이시기의 김구는 임시정부의 살림을 꾸려가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2년도 아니고 27년을 한가지 목적을 위해 전력투구한 이당시의 삶은 유리알처럼 투명해 보인다.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광복군을 조직하고,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등으로 분열되어 갈등이 많았고, 63세였던 1938년 김구 자신도 임시정부 내 불평세력이자 공산주의자인 이운환에게 총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지만 이후 가슴에 입은 총상은 그를 내내 괴롭힌다. 1945년 8.15 광복 후에 귀국하여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김구가 만난 조력자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애국심을 가져야, 우리 나라 좋은 나라가 될 수 있겠다는 바람에서 감옥에서 이름을 구(九)로 고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지은 그의 첫 번째 조력자는 지난 번 칼럼에서 썼듯이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는 곽낙원은 김구의 평생에 걸친 독립운동에 든든한 뿌리였다. 김구를 면회 와서 '나는 네가 경기 감사가 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너는 이제 나 하나의 아들이 아니라, 이 나라의 아들이다' 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김구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던 안태훈 진사, 이또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 고능선 선생은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으로서의 도약- 암살
1949년 6월 26일 당시 안두희는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가 김구를 저격한다. 그 배후의 사실진위여부는 아직도 명쾌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칠순의 김구는 생을 마감하고 국민들은 비통함에 잠긴다. 살아서 애국의 대명사였던 김구는 죽음까지도 평범하지 않아 근현대사에 기록되는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이순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구도 명분 있는 죽음을 늘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같은 민족에게 당한 죽임에 김구는 어찌 생각했을까 애석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 그는 또 한번의 도약을 했다고 여겨진다.

♣ 맺는 말
국모인 민비가 시해 되었다는 소식에 비분강개하여 왜장을 칼로 찌르게 된 김구. 그것이 그의 삶의 변곡점이 되었다면, 죽는 날까지 그 목적을 위해 달려간 그 지난한 세월을 지속시킨 힘은 무엇이었을런 지 내내 생각해 보게 된 책 읽기였다.
전년도에 근현대사 답사 중에 경교장을 둘러보았다. 강북 삼성병원안에 그 건물이 속해 있는 것도 이상스러웠지만 그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병원의 처사에 또 놀랐다. 저격 당시 깨진 유리창이며, 대중을 향해 연설하던 발코니를 보며 백범이 살았다면 그 격변의 정치사를 새로 쓸 수 있었을까를 유추해봤다.

지난 2월 손학규 대표와 정동영 전 장관이 회동을 했는데 그 자리는 정 전 장관이 "당에 남아 조력자 역할을 하겠다"고 밝힌 직후 손대표가 요청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손 대표는 당을 위해 정 전 장관이 나서서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고, 정 전 장관은 "화합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김구 선생께서 독립된 나라에서 문지기라도 해봤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무튼 저도 그런 생각이다." 라고 말했다.
이해득실을 따져 분당과 탈당의 행태를 마다하지 않던 그네들이 ‘나라를 위해 임시정부의 문지기라도 하겠다’던 김구선생의 말씀을 빌어 윤색시키다니, 그 기사를 읽고 실소를 금치 못하며 한편 씁쓸했던 기억이 되살아온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언젠가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

내가 가는 길을 아무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현대인에게는 는 그야말로 금언서가 되는 선생의 가르침이다.

- 나의 소원 중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1947년 백범 김구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나,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聖人)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大韓)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春風)이 태탕(鋏蕩)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各員)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이상에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어니와,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漢土)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孔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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