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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9일 01시 24분 등록
가게에서 손님을 받으며, 필사를 하다. 새벽에는 그리 손님이 많지 않다. 이곳 미아리는 취객들의 고성과 나이트에서 만난 남녀들이 지분거린다. 서울 강북구 미아리와 이집트의 미이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난 이 이질감을 사랑한다. 난 장사를 하면서,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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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공국의 선제후選帝候 아우구스트 3세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 크리스티네 공주는 1738년 드레스덴의 왕궁을 떠나 양兩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통합한 왕국)의 카를로스 부르봉 왕에게 시집을 갔다.
 
재기발랄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마리아는 나폴리의 궁전과 정원을 샅샅이 뒤져 여러 점의 조각상과 조각품을 찾아냈다. 그 작품들은 베수비오 화산의 마지막 폭발 이전에 발견된 것이었는데, 일부는 우연히 나머지는 델뵈프 장군의 주도 하에 발굴된 것이었다. 
 
이들 토르소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왕비는 유물을 더 찾아달라고 왕을 졸랐다. 베수비오 화산은 1737년 5월 대폭발 때 산기슭이 뚫리고 봉우리 일부가 날아가버렸는데, 그 후 1년 반이 지나도록 나폴리의 푸른 하늘을 인 채 얌전히 서 있었으므로 왕은 왕비의 청을 들어주었다. 
 
탐사는 델뵈프 장군이 발굴을 중단했던 지점에서 재개하기로 즉각 결정되었다. 왕은 로코 지오아키노 데 알쿠비에르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스페인 출신의 기사로서 왕실 공병대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알쿠비에르는 27 발굴에 필요한 일꾼과 장비와 폭파용 화약을 마련했다. 
 
어느 맑은 날 아침, 일상의 활동을 한창 펼치고 있던 두 도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종말을 맞이해야 했다. 산사태로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 위로 폭우가 쏟아져 화산재와 용암이 함께 뒤섞였다. 이렇게 진흙과 섞인 용암이 헤르쿨라네움을 덮쳤다. 진흙용암은 큰 길, 작은 길을 휩쓸며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지붕을 덮고, 마치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문과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폼페이는 달랐다. 진흙홍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밀려오는 진흙더미를 피하는 길은 달아나는 방법뿐이었지만, 폼페이는 처음에 가벼운 화산재가 비처럼 내렸으므로 털어낼 수 있었다. 그런 다음 화산암 조각들이 떨어졌고, 그 다음에는 수 킬로그램의 경석輕石들이 떨어졌다. 눈앞에 얼마나 엄청난 위기가 닥쳤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손을 쓰기에 너무 늦었다. 내려앉는 유황증기는 크고 작은 틈새를 뚫고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점점 숨이 막혔고, 얼굴을 덮은 수건 아래로 유황증기는 구름이 되어 밀려들었다. 자유와 공기를 찾아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머리 위로 가득히 떨어지는 화산암 조각에 놀라 도로 들어갔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지붕이 무너졌고, 사람들은 매몰되었다. 몇몇은 잠시 목숨을 부지했다. 계단의 기둥 아래 또는 홍예 복도에 우으린 채 공포의 30분을 보낸 후, 결국 밀려오는 유황증기에 질식하고 말았다.
 
24시한 후 태양은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부근 18킬로미터 지역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논밭은 묻혔다. 아프리카, 시리아, 이집트까지 화산재의 일부가 날아갔다. 이제 베수비오 산에서는 가느다란 연기만이 한 줄기 솟아올랐고, 하늘은 푸른빛을 되찾았다. 33
 
한 곳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방에서 놀던 일곱 명의 아이들이 놀란 표정으로 죽어 있고, 다른 곳에는 서른네 사람과 염소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염소는 목에 달린 방울을 요란하게 울리며 집 안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집 안으로 들어가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을까? 재빨리 대피하지 않고 망설인 사람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용감한 사람도, 신중한 사람도, 힘 센 사람도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헤라클레스처럼 건장한 남자도 발견되었다. 아내와 열네 살 난 딸은 그 사람보다 앞서 달려 나갔지만, 그 사람은 가족을 지킬 수 없었다. 세 사람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아마도 쓰러진 헤라클레스는 마지막 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증기를 맡고 쓰러져 몸을 뒤틀다. 뻡은 후 재에 덮이고 말았다. 덕분에 유해는 형태가 보존되었고, 학자들은 그 위에 석고를 끼얹었다. 사람의 윤곽이 드러났다. 어느 폼페이 사람의 실물로 만든 조소였다. 
 
파묻힌 집에 버려진 사람, 낙오한 사람이 문고 길이 다 막힌 사실을 알고 도끼를 들어 벽을 치기 시작했을 때, 그 집에서는 어떤 소리가 울려퍼졌을까? 벽 뒤로도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른 벽을 뚫었지만, 또 다시 돌 더미에 맞닥뜨렸을 때 그 사람은 어떤 비명을 질렀을까? 35
 
빙켈만은 여전히 발굴 현장 답사 허가를 못 받고 있는 상태였고, 박물관에 가봐야 전시물을 스케치할 수도 없었으므로 신부의 말이 점점 더 가슴에 와 닿았다. 마침내 빙켈만은 감독관을 매수해 이런 저런 유물을 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고대 미술을 포괄적으로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생각이 고루한 국왕은 사티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로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다리가 둘인 염소, 호색의 상징)를 익살스럽게 그린 선정적인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아 모든 작품을 당장 로마로 옮기고 철저히 차단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빙켈만은 그 그림을 볼 수 없었다. 
 
빙켈만은 이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1762년에 첫 공개 보고서 <헤르쿨라네움의 발굴 유물에 관하여> 를 발표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다시 헤르쿨라네움과 박물관을 둘러본 후 두 번째 공개 보고서를 발표했다. 빙켈만은 두 저서에 피아기 신부에게서 얻은 정보를 시사하는 내용을 포함시켰으며,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두 번째 보고서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나폴리의 부르봉 왕실에까지 전해지자, 빙켈만에 대한 분노가 봇물을 이루었다. 그 어려운 박물관 관람을 허락했것만 이렇게 못된 짓을 하다니! 물론 빙켈만의 공격은 정당했다. 그의 격분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황들은 모두 무의미해졌다. 41
 
방금 던진 물음들은 그 과정에서 저절로 답을 찾을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번거롭게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고학의 애로점과 방범론에 희망의 빛을 던진 몇 가지 사항은 미리 짚고 넘어가겠다.
 
로마의 미술품 거래상인 아우구스토 얀돌로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에트루리아 시대의 호화 석관을 개봉하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석관의 덮개를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침내 덮개의 한쪽이 들렸고, 똑바로 세운 후 반대쪽으로 넘겼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나는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으며, 죽을 때까지도 눈앞에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석관 안에는 젊은 전사가 완전 무장을 한 채 팔 다리를 곧게 뻗고 누워 있었다. 투구, 창, 방패, 정강이받이까지 갖춘 모습이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본 것은 해골이 아니라 마치 방금 묻힌 것처럼 형태를 온전하게 유지한 사람의 몸이었다. 그 모습은 한 순간 반짝하고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횃불을 비추자 불빛에 모든 것이 흐트로지는 듯했다. 투구는 오른쪽으로 굴렀고, 둥근 방패는 갑옷과 함께 주저앉았으며, 정강이받이는 하나는 오른쪽으로, 하나는 왼쪽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백년을 견딘 몸뚱이가 공기와 닿는 순간 가루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던 것이다. 횃불에 비친 허공에 금가루가 떠다니는 듯했다.'47

헤로도토스의 문학작품은 오늘날에도 고대의 미술품과 그 작가와 그 연대를 확인하는 데 유이간 정보가 솟구치는 샘으로 통한다. 어느 시대에 속하건 고대의 작가가 쓴 문학작품은 해석학의 초석이 된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이 그런 문학작품으로 인해 오류를 범하는 일도 결코 드물지 않다. 문학작가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밋밋한 사실이 아니라 심오한 진실이다. 그들에게는 신화는 물로 역사까지도 단지 소재일 뿐이다. 이 소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빚고, 자신의 이야기를 끼워 넣어 예술을 창좋하는 일이 바로 그들의 소임 아닌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문학 작가들을 가리켜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학문적 정확성을 벗어난 문학의 자유를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고대인들도 현대인들 못지않게 거짓말을 많이 했다. 그리고 고고학자는 거짓말로 우거진 고대의 덤풀을 힘겹게 헤치며 길을 찾는다. 이를테면 피디아스는 금과 상아로 올림포스 산의 제우스 상을 조각했는데, 그 작품의 제작연대를 확인하는 일에는 피디아스의 죽음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를 놓고 학계에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에포로스는 피디아스가 감옥에서 죽었다고 주장했고, 디오도르는 도망쳤다고 주장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엘리스에서 처형당했고, 필로코로스는 그곳에서 여생을 평안하게 보냈다고 주장했다. 새로 발견되어 1910년에 공개되니 파피루스에 의해 필로코로스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55

슐리만은 예순한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고향에 머물게 되었다. 이미 발굴 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던 시기였음에도 그는 못된 브라덴킬의 무덤을 조사해보고 싶었다. 슐리만은 자신의 저서<이타카>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열 살 때인 1832년 크리스마스에 나는 트로이 전쟁의 주요 사건과 오디세우스와 아가멤논의 모험에 관한 글을 써서 아버지께 선물로 드렸다. 36년이 지난 후 내가 그 지역에 관한 글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되릴라고는 그때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트로이 전쟁의 무대이자 호메로스에 의해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들의 조국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행운을 누렸다'

슐리만은 언젠가 호메로스 이야기에 나오는 머나 먼 나라를 찾아내고 그 연구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소년 시절의 꿈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은 그가 쓴 편지와 두 편의 자서전에 잘 나타나 있다. 

슐리만은 그리스어 공부를 뒤로 미루었다. 그리스어의 마법이 다 풀리고 나면 학문적 연구에 필요한 기본기를 갖추기도 전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슐리만은 18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현대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 6주만에 터득했으며, 그 후 3개월 만에 6각운으로 쓴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59

슐리만의 시대에 호메로스는 멸망한 세계의 음유시인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이 아닐 것이라는 의구심과 더불어 그가 쓴 서사시의 내용도 진실성을 의심받았다. 훗날 학자들은 호메로스를 두고 최고의 종군기자라는 대담한 표현을 썼지만, 그 시절 학자들의 견해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프리아모스 왕의 성채를 둘러싼 전투 보고서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 신화로 치부하기까지 했다. 

<일리아스>는 '멀리까지 맞히는 아폴론'이 아카이아(고대 그리스의 동맹국)진영에 치명적인 질병을 퍼뜨리는 일로 시작하지 않는가? 제우스 자신도 '백합처럼 흰 판의 헤라'와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가? 신들도 인간처럼 부상을 당하고, 심지어 여신 아프로디테는 청동으로 만든 창끝에 찔리지 않는가?

위대한 시인이 쓴 신화와 전설, 신과도 같은 시인의 광휘가 번쩍이는 작품이라는 평가는 시인들 사이에서만 인정받았다. 

<일리아스>의 배경이 되는 그리스는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나라가 틀림없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역사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그 시긴의 그리스는 작고 소박한 나라였다. 화려한 궁전도, 막강한 힘을 자랑한 왕도, 수천 척의 전함으로 무장한 함대도 없었다. 이러한 상관관계에서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 미개한 시대가 이어졌고, 그 시대에 이어 다시금 헬레니즘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가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차라리 트로이는 인간 호메로스의 문학적 영감이 창조한 허구의 세계라고 믿는 편이 쉬웠다. 

하지만 이렇나 학문적 고찰도 슐리만의 믿음을 흐리지는 못했다. 63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숨김없는 사실로 이해했다. 

메두사의 머리가 박힌 아가멤논의 방패, 머리 셋 달린 뱀의 모양을 한 방패 띠, 극도로 상세하게 묘사된 전차, 무기들. 슐리만은 이 모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ㅇ낳고 그리스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 아킬레우스, 파트로클로스, 아이네이아스와 같은 그 모든 영웅이, 그들의 행적과 우정, 사랑과 미움이 모두 지어낸 이야기란 말인가? 슐리만은 그들 개개인이 실존 인물이었다고 믿었다. 이 점에 있어 슐리만의 생각은 위대한 역사가 헤로도토스나 투키디데스와 일치했다. 이 두 사람은 트로이 전쟁이 역사상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고, 전쟁에 참여했던 모든 인물은 실존 인물이었다고 줄곧 주장했다. 

이와 같은 신념 아래 백만장자 하인리히 슐리만은 마흔여섯 살이 되던 해에 현대 그리스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아카이아 제국으로 갔다. 그곳 이타카에서 만난 어느 말편자 대장장이가 자신의 가족을 소개했다. 부인의 이름은 페넬로페였고 아들들은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쿠스라고 했다. 그 이름들을 듣는 순간 슐리만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날 저녁 마을 광장에서 돈 많고 기이한 어느 외국인이 3000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후손들에게<오디세이>의 스물세 번째 연을 읽어주었다. 감동이 북받쳤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와 함께 마을 사람들도 울었다. 남자도 울고 여자도 울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사실이었다. 

아무튼 슐리만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오직 매료된 마음 하나만으로 성공을 일구어낸 사례가 있었는가? 거듭도니 행운은 유능한 자에게 찾아온다는 말도 이 경우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고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슐리만이 유능한 사람이었는가? 다시 말해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는가? 적어도 그가 발굴을 시작한 후 처음 몇 년 동안만 놓고 본다면 선뜻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그에게는 누구보다 많은 행운이 따랐다. 65

호메로스는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 있었고, 포세이돈과 아폴론이 페르가모스 성벽을 쌓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언덕 중앙에 신전이 있을 것이고, 그 주위로 신들이 쌓은 성벽이 있을 것이었다. 슐리만은 언던에 삽자루를 내리꽂았다. 장벽이 나타나 작업을 방해했다. 슐리만은 그 장벽을 중요치 않게 생각하고 허물었다.그러자 무기와 가재도구, 장신구와 단지들이 나왔다. 그곳에 부유한 도시가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슐리만이 발견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엇다. 하인리히 슐리만의 이름을 세계 만방에 떨치게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리움 노붐의 유적지 아래 다른 유적지가 있었고, 그 아래로 또 다른 유적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 언덕은 마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야 하는 거대한 양파와도 같았다. 각 층은 서로 다른 시대의 유적으로 보였다. 민족들이 살고 또 죽었다. 도시들이 건설되고 다시 몰락했다. 칼과 불이 광란했고,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을 교체했다. 이렇듯 멸망한 도시 위에 새로운 도시가 일어서기를 거듭했다. 

매일 기적 같은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호메로스의 트로이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던 슐리만은 시간이 흐르면서 동료들과 더불어 무려 일곱 개의 몰락한 도시를 발견했고, 여기에 훗날 두 개를 더 보탰다. 세상 사람들이 전혀 몰랐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과거의 세계를 아홉 개나 목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아홉 개의 도시 가운데 어느 것이 호메로스의 트로이였을까? 가장 아래층이 선사시대의 유적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그 층에서는 금속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가장 아래층이 가장 오래된 시대에 속하고, 가장 위층이 가장 후대의 유적이라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71

슐리만의 눈은 확신으로 차올랐다. 사실 그의 추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꽤 많았다. 슐리만은 '이 시체들은 말 그대로 금과 보석으로 덮여 있었다'고 쓰고는, 평범한 사람이 죽었는데 이런 보물을 함께 묻었겠느냐고 물었다. 부장품 가운데는 값비싸고 우수한 무기도 있었다. 어둠의 제국에서도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해 망자들은 철저히 무장하고 있었다. 슐리만은 시체를 급하게 태운 표시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고 지적했다. 장의사는 불길이 시체를 다 잡아먹을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살인자는 범행의 흔적을 한시바삐 없애버리려는 조급한 마음에 얼른 잔돌과 흙으로 시체를 덮었다. 보물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부장했다손 치더라도, 매장 상태나 무덤 자체만 놓고 보면 망자의 위엄을 손상한 듯이 보이지 않는가? 어느 모로 보나 망자를 홀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더러운 짐승의 썩은 시체를 버리듯 초라한 구덩이에 던져버리지 않았나?' 망자를 미워했던 살인자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슐리만은 자신이 인정하는 권위자들, 즉 옛 작가들에게 지지를 구했다.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를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는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앗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다시피 슐리만의 이론은 맞지 않았다 .물론 그가 발굴한 유적은 왕실 고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가멤논과 그의 친구들이 묻혀 있던 무덤은 아니었다. 그 무덤은 그들보다 400년은 더 앞서 간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다지 큰 의미를 띠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슐리만이 잃어버린 과거를 향해 또 한 번 큰 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이다. 82

독일의 철학자 헤르더가 말했듯이 빙켈만이 그리스의 비밀을 멀리서 보여주었다면, 슐리만은 그 태고의 세계를 직접 열어서 보여주었다. 슐리만은 고고학을 연구실의 석유등 불빛 아래에서 과감히 그리스 하늘의 태양 아래로 끌어냈다. 전통 문헌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선사시대로 한 발을 내디뎠고, 전통 학문에 선사시대를 추가해 학문의 영역을 넓혔다. 

저돌적인 작업 방법과 빠른 속도, 거듭된 성공, 학자도 아니고 사업가도 아닌 모호한 신분, 그러면서도 양쪽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 '광고와도 같은 성격'의 책 출판.....전 세계의 학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독일은 특히 심했다. 슐리만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시기에 학자들의 연구실에서 쏟아져 나온 트로이와 호메로스관련 출판물은 90편에 이른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하계의 소동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학자들이 슐리만에게 퍼부은 신랄한 공격의 핵심은 그가 아마추어라는 사실이었다. 정통파 학자들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들의 삶을 피곤하게 만ㄷㄴ다. 슐리만에게 가한 공격은 원칙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이와 관련된 인용을 덧붙여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먼저 아마추어라는 이유로 공격하는 것에 단단히 화가 철학가 쇼펜하우어의 말부터 들어보자. 88

슐리만은 네 번째 발굴 작업을 하던 1890년 세계 각국의 학자들을 자신의 언덕으로 초대했다. 그는 스카만드로스 골짜기 언덕에 판자로 오두막을 짓게 하여 열네 명의 학자들이 쓸 숙소를 마련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의 학자들이 슐리만의 초대에 응했다. 그 가운데는 루돌프 피르호도 있었다. 그들은 눈앞의 광경에 압도되어 슐리만과 되르펠트의 견해가 옳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슐리만은 수많은 고대 유물을 소장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었다. 그 보물은 슐리만이 죽은 후 유언데 따라 그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나라로 가게 될 것이었다. 슈리만은 처음에 그리스 정부에, 그 다음에는 프랑스 정부에 소장품을 제공했다. 그리고 1876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어느 남작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 보앴다. '사람들이 제가 수집한 트로이 유물의 값을 물어오면 몇 년 전만 해도 8만 파운드를 불렀습니다. 저는 20년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고 러시아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이므로, 제가 소장한 유물을 러시아에서 보관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로부터 5만 파우드만을 요구하는 바이며, 필요하면 4만 파운드까지 낮출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슐리만이 애초부터 가장 사랑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에 대해 가장 큰 호감을 드러낸 것은 그곳에서 가장 큰 메아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독일의 신문은 슐리만에게 인색했지만 영국의 <더 타임즈>는 언제나 지면을 할애해주었다. 심지어 글래드스톤 영국 수상은 슐리만이 쓴 미케네 책의 서문을 직접 써주기도 했다. 93

그리고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가 그곳을 다스렸다고 한다. 전설적인 미노스 왕은 대단히 강력한 군주였으며, 옛 사람들은 오직 그의 영광만을 이야기했다. 

에반스는 크노소스를 발굴했다. 지표면 바로 아래에서 성벽이 나타났다. 에반스는 몇 시간 만에 발굴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몇 주가 지났을 때 에반스 앞에 드러난 폐허의 잔해는 무려 800제곱미터에 이르렀다. 해가 지날수록 땅속에 파묻힌 궁궐의 잔해는 점점 더 많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땅의 면적은 2만 5000제곱미터였다. 

궁궐의 구조는 분명햇다. 티린스와 미케네에서 발견된 궁궐 유적과는 외양상 큰 차이를 보였지만 분명 유사성도 있었다. 

한 가운데 위치한 가장 큰 정방형의 궁을 중심으로 건물이 사방으로 날개를 뻗고 있었다. 성벽은 바람에 건조시킨 벽돌로 쌓았고, 기둥이 받치고 있는 지붕은 평평했다. 그러나 각 층의 방과 복도와 호른 너무도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미로에 관한 전설을 모르더라도 건물을 본 순간 미로라는 말이 떠올랐다. 전설에 의하면 다이달로스가 미노스 왕에게 처음 미궁을 지어주었는데, 그것이 모든 미로의 표본이 되었다고 한다. 

에반스는 미노스 왕궁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지체 없이 세상에 알렸다. 제우스의 아들이자 아리아드네와 파이드라의 아버지이며, 흉측한 황소인간 미노타우로스와 함께 살았던 미노스 왕의 미궁을 발견한 것이다. 103

크기가 버킹검 궁과 맞먹는 이 건축물에는 배수로와 호화로운 욕실, 환기장치, 배수구, 수직 쓰레기 배출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설들도 당시 사람들의 포즈, 패션 등 그들의 모습에 비하면 현대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시대의 그림을 한번 보자. 사람들의 움직임은 우아하고 여유롭다. 나른한 기분으로 정원 의자에 기대앉은 여인들이 장갑 한 짝을 만지작거리며, 파리 사람을 연상시키는 매혹적인 눈빛과 표정으로 담소를 나눈다. 이 숙녀들이 수천 년 전에 살다 간 사람들이다. 믿을 수 있겠는가?

정말로 그토록 오래 전의 모습인지 분명히 확인하고 싶다면 남자들을 한 번 보라. 남자들은 예외 없이 허리에 로인 클로스(허리에 감아 고정시키는 요포)밖에는 걸친 게 없다. 

그림들은 '배운 것 없는 우리 인부들조차 그 마법의 효력을 느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에반스는 말했다. 그 그림들 가운데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모티브, 즉 황소 위에서 뛰는 사람도 자주 등장했다. 

무용수인가? 곡예사인가? 이와 똑같은 그림이 티린스에서 발견되었을 때 슐리만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때 슐리만은 황소와 제물과 피비린내 나는 사원에 얽힌 전설을 암시하는 그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에반스는 미노스 왕이 다스렸던 땅을 밟고 서 있었다. 황소 같은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함께 살았던 왕의 땅. 그 전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107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 크레타의 풍요로웠던 민족의 근원과 종말을 둘러 싼 문제는 고고학을 비롯해 역사 초기를 연구하는 모든 학문에서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다. 

호메로스에 의하면 크레타에는 다섯 민족이 살았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미노스 왕은 그리스 사람이 아니었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 사람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를 가장 많이 연구한 에반스는 아프리카의 리비아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믿었다. 슐리만의 오랜 동료 되르펠트는 1932년 여든 살의 나이에 에반스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크레타-미노스 미술의 발상지는 페니키아라고 주장했다. 이 미술은 에반스의 주장처럼 크레타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싼 찬반의 미로에서 우리를 빼내줄 아리아드네의 실은 어디 있는가?

어쩌면 문자가 그 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에반스는 문자 때문에 크레타로 갔다. 그는 1894년에 이미 크레타 최초의 문자에 대한 설명을 발표했고, 그 외에도 그림문자를 새긴 수많은 기록물을 발견했다. 크노소스에서는 선형 표기체제의 문자를 새긴 점토판을 2000개나 발견했다. 그러나 독일의 언어학자 한스 옌젠은 1935년에 발표한 <과거와 현재의 문자>에서 철저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냉철한 결론을 내렸다. '크레타 문자의 해독은 아직도 초기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조차도 확인되지 않았다'110

7월 2일 나폴레옹은 이집트 땅을 밟았다. 사막을 가로지른 끔찍한 행군 끝에 병사들은 나일 강에서 목욕을 할 수 잇었다. 7월 21일 희뿌연 새벽안개를 뚫고 카이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속에 우뚝 솟은 알 아즈하르 모스크는 둥근 지붕과 400개의 미나레트(이슬람 사원의 첨탑)로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한 장명을 보는 듯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의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수많은 장식들. 금사, 은사 세공으로 치장한 너무나 화려하고 마법과 같은 이슬람의 세계, 그 옆 누런 모래가 휘날리는 사막에, 차분한 보라 빛을 발하는 모카탐 언덕 맞은편으로 거대한 건축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돌아선 사람의 옆모습처럼 차갑게 다가왔다. 돌이 된 기하학, 침묵하는 영원, 이슬람이 생기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세계를 묵묵히 지켜본 증인들. 기자의 피라미드였다. 

병사들은 넋을 놓고 바라볼 시간조차 없었다. 카이로는 죽은 과거 속에서 마법을 걸어 미래를 손짓하고 있었지만 그들 앞에는 전쟁이라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 맘루크 부대(노예병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나타난 것이었다. 수만의 기병들, 최고로 훈련된 힘찬 말들, 번쩍이는 야타간(이슬람의 장검), 그 선봉에는 스물세 명의 고관을 거느린 무라드 베이(터키 고관의 이름 뒤에 붙이는 경칭)가 녹색 터번을 쓰고 백조처럼 하얀 말을 탄 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피라미드를 가리켰다. 나폴레옹은 대중의 심리를 잘 아는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맞선 유럽인이었다. 그 순간 나폴레옹은 외쳤다. '병사들이여! 4000년의 역사가 그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120

모험과도 같은 행군은 이집트 남동부 아스완의 제1폭포까지 계속되었다. 엘레판티네 섬에서는 기둥으로 둘러친 아멘호테프 3세의 매혹적인 신전을 그렸다. 이 신전은 1822년에 허물어졌다. 드농이 그린 탁월한 그림은 이 신전에 대한 유일한 기록으로 남았다. 드제 장군의 부대는 세디망에서 무라드 베이를 죽이고 승리를 쟁취했다. 병사들이 노획한 맘루크 부대의 장신구로 부자가 되어 귀향할 때, 도미니크 비방 드농 남작은 자신이 그린 수많은 그림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것이야말로 값진 노획물이었다. 드농의 예술적 감수성은 낯선 세계를 접한 뒤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가 그린 그림의 정확성은 열정으로 인해 조그의 손상도 입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도 표현주의도 모른 채 '수공업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어떤 세부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고 묘사했던 옛 동판화가들의 작품처럼 학문에 필요한 사실성을 철저히 지켰다. 이렇게 드농의 그림은 연구하고 비교하는 학자들에게 가치를 가늠하루 수 없는 많은 자료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이 자료를 근거로 이집트학의 바탕이 된 <이집트 기록>이 완성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카이로에 이집트 연구소가 건립되었다. 드농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다른 학자와 예술가들은 이집트 땅 위의 유물들을 측량하고 계산하고 연구하고 수집했다. 그 유물들은 그대로 방치된 채 온통 수수께끼로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굳이 삽을 들고 땅속을 파낼 이유가 없었다. 125

유명한 골상학자 요제프 프란츠 갈은 감탄과 조롱, 존경과 비방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의 두개골 이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떠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의 한 모임에서 갈은 젊은 대학생을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갈은 그 학생의 머리를 보고는 이렇게 외쳤다. '와! 대단한 언어천재야!' 갈이 소개받은 열여섯 살의 청년은 당시 라틴어와 그리스어 외에 동양어를 6개나 할 줄 알았다. 갈이 그 사실을 알리는 없었다. 미리 잘 준비해둔 사기성 발언이었을까?

19세기에는 테카르트의 어린 시절 일화를 캐내는 데 열을 올린 일종의 전기가 유행이었다. 데카르트는 세 살 때 유클리드의 흉상 앞에서 '하!' 했으며, 천재의 필적을 찾아내기 이해 괴테의 세탁물 영수증을 모았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첫 번째 골상학자의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 같고, 두 번째 데카르트의 이야기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일화의 수준은 이 정도였다. 일화라는 데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는가?134

샹폴리옹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므로 그의 형이 1801ㄴ녀에 그르노블로 데리고 가 직접 가르쳤다. 그의 형은 재능 있는 문헌학자이자 고고학 애호가였다. 열한 살의 샹 폴리옹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빨리 배웠을 뿐 아니라 매우 잘했으며, 히브리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도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었다. 형 자크 조셉 샹폴리옹은 본인 역시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가문의 명예를 빛낼 동생의 재능을 생각하고 한 발 물러났다. 자크 조셉은 자신의 이름을 샹폴리오 - 피작이라고 고쳤다가 나중에는 그냥 피작이라고만 불렀다. 같은 해에 장 푸리에가 샹폴리옹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푸리에는 이집트 출정에 참가한 유명한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였고, 카이로의 '이집트 연구소'리록 담당이었으며, 이집트 정부의 프랑스 특사, 사법부 수장, 학술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푸리에는 이제르 지방의 부지사가 되어 그르노블에 거처를 정하고, 저명한 거물급 인사들을 자신의 주변에 불러 모았다. 푸리에는 학교를 시찰하던 중 프랑수아 샹폴리옹과 논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린 소년을 기억하고 집으로 초대해 수집한 이집트 유물들을 보여주었다. 검은 머리칼의 소년은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돌에 새겨진 가장 오래도니 상형문자에 넋을 잃었다. '이거 읽을 수 있어요?' 푸리에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제가 읽을 거에요' 몇 년 후 제가 크면요!' 어린 샹폴리옹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훗날 샹폴리옹은 이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 말을 들으면 생각나는 소년이 또 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제가 트로이를 찾겠어요'라고 말했던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샹폴리옹 또한 확신에 차서 신들린 듯이 목표만을 좇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얼마나 다른가? 137

샹폴리옹은 공부에 전념했다. 사교의 도시 파리의 유혹을 모두 물리치고 도서관에 파묻히거나 연구소에서 연구소로 뛰어다녔다. 그르노블의 학자들로부터 여누를 위탁하는 편지가 쇄도했고, 샹폴리옹은 그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산스크리트어와 아랍어를 공부했고, 드 사시가 '동양의 이탈리아어'라고 한 페르시아어도 익혔으며, 그 외에 다른 동양어와 그 방언들을 거의 모두 배웠다. 그러는 가운데 틈틈이 형에게 중국어 문법책을 써주기도 했는데, 그 일은 순전히 심심풀이였다. 

샹폴리옹은 아랍의 정신에 푹 빠졌다. 그의 목소리는 변했다. 모임에서 만난 아랍인은 샹폴리옹이 자신과 같은 아랍인인 줄 알고 몸을 굽혀 인사했다. 샹폴리옹의 이집트에 관한 지식은 온전히 학습을 통해 얻은 것이었음에도 당시 가장 유명한 아프리카 여행가 소니미 드 마넹쿠르가 놀랄 만큼 충분한 수준이었다. 샹폴리옹과 대화를 나누던 마넹쿠르는 '내가 아는 나라를 나만큼이나 잘 알잖아!라고 외쳤다. 

샹폴리옹은 겨우 일 만에 콥트어를 말하고 썼다. '나 자신에게 말할 때는 콥트어로 말한다........'연습을 위해 사적인 글은 모두 콥트어 민중 문자로 썼다.144

손에는 르누아르의 책이 들려 있었다. '상형문자의 해독이라고? 깃발을 너무 일찍 꽂으셨군!' 샹폴리옹은 판단할 능력이 충분했다. 르누아르가 주장한 이야기는 죄다 헛소리였다. 자유로운 창작이고, 상상과 지식을 과감하게 섞은 것이었다. 게다가 방법도 틀렸다. 

그러나 충격만큼은 대단했다. 샹폴리옹은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샹폴리옹은 죽어 있는 그림에게 말을 시키는 일과 자신이 이미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쳐 잠이 든 샹폴리옹은 사나운 꿈에 시달렸다. 환영 속에서 쉬쉬 소리를 내며 이집트의 목소리가 말했다. 샹폴리옹은 신들린 사람이었다. 상형문자의 마법에 걸린, 그 마력에 홀린 사람이었다. 힘겨운 삶에 가려 가끔은 잊었던 그 사실이 꿈을 통해 확연히 드러났다. 

샹폴리옹의 꿈은 한 가지 일을 완성하는 데 있었다. 그 성공은 손에 곧 잡힐 것만 같았다. 성공을 향한 꿈은 쉬지 않고 부풀었다. 그러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12년이 더 흘려야 한다는사실을 당시 열여덟살의 청년은 알지 못했다. 타격이 타격을 불렀다. 그의 머릿속에는 상형문자와 파라오의 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자신이 국가반역죄로 쫓겨나게 될 줄은 더구나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149

프랑수와 샹폴리옹의 형 피작은 예전부터 나폴레옹에게 반했었지만 이제 완전히 그에게 빠져버렸다. 나폴레옹은 기밀 비서를 원햇다. 시장이 피작을 소개했는데, 고의로 그의 이름을 '샹폴레옹'이라고 잘못 말했다. '참으로 좋은 징조로군. 내 이름과 절반이 같으니 말이야' 하고 나폴레옹은 말했다. 프랑수아 샹폴리옹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나폴레옹은 샹폴리옹에게 무슨 일은 하느냐고 물엇고, 샹폴리옹은 콥트어 문법연구와 사전 편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샹폴리옹은 열두 살 때부터 신처럼 군림하는 지배자들을 접해왔으므로 나폴레옹 앞에서도 딱히 흥분하지 않았다. 반면 나폴레옹 황제는 이 젊은 학자에게 매료되어 오랜 대화를 나누었고, 두 가지 저서 모두 파리에서 출판하겠노라고 약속하며 황제다운 아량을 베풀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던지 황제는 다른 날 샹폴리옹을 만나러 도서관을 찾았다. 그리고 샹폴리옹의 언어연구로 거듭 화제를 돌렸다. 이런 일은 몇 날 며칠에 걸쳐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다시금 세계정복을 꾀하려던 참이었다. 

두 이집트 정복자가 서로 마주한 상황이었다. 한 사람은 나일 강의 나라를 자신으 정치적 계획에 포함시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 당시 나폴레옹은 경제적 수익을 영구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1000개의 수문을 건설할 생각이었으므로, 새로운 열정을 불사르며 콥트어에 관한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콥트어를 새로운 국민 공용어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했다. 또 한 사람은 이집트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사라진 옛 제국을 머릿속에서 수천 번이나 그려왔으며, 훗날 자신의 지식과 이성의 힘으로 그 제국을 정복할 사람이었다. 154

당시에는 상형문자에 시니적 향락주의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유대교 신비주의와 신비적 직관을 중시하는 그노시스파의 비법이나 일상의 편리를 위한 농경, 상업, 행정 관련 지식들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성서의 구절도 새겨져 있다고 보았으며, 노아의 홍수 이전에 쓴 문학이라는 추정도 있었다. 또 칼데아어, 히브리어, 심지어 중국어로 된 논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159 이러한 경향에 대해 샹폴리옹은 '이집트 사람들은 표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언어가 없었다는 소리냐?'고 말했다. 

로제타석을 해석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호라폴론의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올바른 해석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호라플론이 간 것과는 반대의 길이었고, 샹폴리옹만이 그 길을 갔다. 

위대한 정신적 발견은 한 가지 문제데 대해 끝없이 사고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정신을 훈련한 끝에 얻는 결과다. 따라서 그 발견의 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 순간은 의식과 무의식, 뚜렷한 집중력과 후릿한 몽상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번개처럼 스치는 착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무리 기발한 생각이라도 그 생각에 이르기까지 쏟은 노력의 역사를 알게 되면 기발하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일단 원리가 밝혀진 후에는 오류가 너무나 명백해지고, 착오는 찾을 수 없으면 문제도 간단해 보인다. 따라서 호라플론을 맹신하는 학계의 의견에 샹폴리옹이 반대 의견을 들고 나온 것이 어떤 의미를 띠는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샹폴리옹은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 학자들과 일반 대중이 호라폴론을 추종한 이유는 중세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존중하거나 그보다 훗날 신학자들이 교부들의 권위를 존중하듯이 호라폴론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호라폴론의 주장 말고 다른 가능성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상형문자는 분명히 그림문자였다. 160

이제는 시대마다 글을 쓰는 방향이 각기 달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만 개의 파피루스가 유럽으로 건너왔다. 무덤과 기념물과 신전에서 매번 새로운 새김글을 발견할 때만다 사람들은 유창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샹폴리옹이 저술한 <이집트어 문법>은 저자 사후(1836 ~ 1841년)파리에서 출간되었다. 그 다음에는 이집트어 사전을 편찬하기 위한 초기 시도였던 <기록>과 <기념물>이 나왔다. 이러한 성과와 후대 학자들의 연구를 발판으로 학문은 해독하는 단계에서 글을 쓰는 단계로 한 걸음 나아갔다. 이는 꼭 필요한 걸음은 아닐지언정 대단히 자랑스러운 걸음이었다. 영국 시드넘 수정궁의 '이집트 정원'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의 이름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정원에는 '건립에 부치는 글'을 상형문자로 새겨놓았다. 그리고 독일의 이집트 학자 리하르트 렙시우스는 기자에 있는 쿠푸(케옵스)왕의 피라미드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이름과 통치자의 지위를 상형문자로 쓴 현판을 설치했다. 빌헬름 4세는 이집트 원정을 준비한 바 있다. 

샹폴리옹은 자신이 연구한 나라를 서른여덟 살이 될 때까지 오직 새김글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물들의 입을 열게 만든 사람은 바로 샹폴리옹이었다. 이제 그의 첫 이집트 답사 여행을 따라가 보자. 165

당시 사람들의 수집 열정은 대단히 뜨거웠찌만, 그 열정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유물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따라서 발견보다는 파괴가, 지식을 얻기보다는 손해를 불러일으킨 경우가 많았다. 벨초니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때 약간의 전문지식을 키우기는 했지만, 유물을 얻으려는 욕망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봉인된 묘실을 열기 위해 공성 망치로 벽을 깨부술 정도였다. 

하워드 카터는  '벨초니가 발굴과 작업에 사용한 방법에 대해 우리는 정당성을 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지면을 통해 밝혔다. 현대 고고학자들이 들으면 머리칼이 곤두설 방법을 썼는데도 하워드 카터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벨초니가 살던 시대와 그가 해낸 두가지 일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다. 벨초니는 처음으로 고고학 연구의 고리를 꿰었으며, 그 사슬은 아직도 이어져 있다. 

1817년 10월 벨초니는 테베 근교 비반 엘 - 물루크에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는 길이가 100미터난 되는 세티 1세의 무덤도 있었다. 세티 1세는 리비아, 시리아, 히타이트를 정복한 람세스 대왕의 아버지다. 당시 그가 발견한 관은 화려했지만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이미 3000년 전부터 비어 있었는데, 원래 그 안에 있던 미라의 행방을 추적하는 모험은 벨초니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설화석고로 만든 그 호화석관은 지금 런던의 손(Soane)바굴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분묘의 발견으로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그 발굴은 20세기에 와서야 절정에 이르렀다. 175

연대기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이집트와 관련된 정보의 출처를 처음부터 면미히 조사해야 하겠지만, 현재 연대기 작성의 근거가 될 만한 최초의 자료는 이집트 세베니토스의 사제 마네토가 쓴 <이집트 회고록>이다. <이집트 회고록>은 기원전 30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2세의 통치 기간(알렉산더 대왕의 사망 직후)에 그가 기록한 이집트의 역사다. 

그 기록은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와 유세비우스, 요세푸스가 요약하고 발췌한 글만이 그 기록을 대변할 뿐이다. 마테토는 자신이 알고 잇던 파라오들을 30대에 이르는 '왕조'로 나누어 길고 긴 명단을 작성했다. 

마네토는 그 누구도 하지 않은 3000년이라는 긴 세월에 대한 정리를 최초로 시도했다. 이 일은 마치 현대의 사학자가 전승된 자료와 전통만을 토대로 트로이 전쟁 당시의 그리스 역사를 쓰는 일과 같았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에게는 수십 년에 걸쳐 오로지 마네토가 작성한 명단밖에 기댈 근거가 없었다. 

'고고학'이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고대에 관한 학문을 총칭한다. 유물과 새김금 등 이집트 관련 자료가 대단히 풍부했기에 이집트만을 집중 연구하는 특수 분야가 탄생했고, 이 분야의 학문을 렙시우스 이후 '이집트학'이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의 고대에 관한 학문은 '아시리아학'이라고 한다. 181

부자 티는 모든 것을, 살아 있는 동안 누렸던 모든 것을 죽어서도 빠짐없이 누리고자 했다. 물론 모든 묘사의 중심은 티 자신이었다. 부자 티는 노예나 하층민들보다 세 배, 네 배는 컸다. 신체적인 비례에서도 하층민과 힘없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그의 힘과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었다. 

벽화와 부조에 나타난 모습은 매우 단순화시켜 선으로만 묘사되어 있지만, 세부적인 사항까지 모두 보여주었다. 그림들이 보여주는 것은 부자의 한가롭고 편안한 삶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아마를 처리하는 사람, 풀을 베는 사람, 노새를 치는 사람, 타작을 하는 사람, 곡식을 키질 하는 사람이 있었다. 4500년 전의 방시그로 배를 건조하는 전 과정도 나와있었다. 통나무를 다듬고, 널빤지를 가공하고, 달구와 끝을 다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4500년 전의 방식으로 배를 건조하는 전 과정도 나와있었다. 통나무를 다듬고, 널빤지를 가공하고, 달구와 끝을 다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톱, 손도끼, 심지어 도래송곳까지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연장들의 묘사가 정확했다. 금을 녹이는 사람이 당시 고온의 용광로에 불을 피우던 방법도 알 수 있었다. 조각가와 석공, 갖바치가 일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티 같은 관리가 휘두르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그림도 여러 점 있었다. 앞잡이들이 조세 또는 부채 결산일에 촌장들을 티의 집 앞으로 질질 끌고 와 거칠고 난폭하게 목을 졸랐다. 선물을 바치려는 농부의 부인들과 제물을 끌고 와 도살하는 하인들의 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티의 사생활을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듯 낱낱이 볼 수 있었다. 190

고고학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사람들 가운데는 일찍이 천재적이 재능을 보인 사람이 대단히 많다. 슐리만은 상점 견습생 시절에 6개 국어를 할 줄 알았고, 샹폴리옹은 열두 살 때 정치 문제를 논했다. 그리고 고고학계의 위대한 측량가이자 해석가인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피트리는, 그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한 신문 기사에 의하면, 열살 때 이미 이집트학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때부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집트의 땅속 깊이 묻혀 있는 유물을 꺼내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ㄸ아속에 묻히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경외심과 지식욕을 잘 조절하여 이집트의 흙 한 알 한 알을 '긁어내야'한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1892년 플린더스 피트리가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런던의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인데, 내용이 독특해서 여기에 인용했지만 확인된 내용은 아니다. 그때 피트리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으므로 결코 이른 나이는 아니었다. 194

피라미드 축조의 의미는 이집트의 '특벼란 종교적 믿음'을 이해해야만 알 수 있다. 이 말은 다신교인 그들의 종교 형태 또는 사제의 지위나 소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집트인들이 믿는 신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으며, 의식과 교리와 사원은 '고왕국' '중왕국''신왕국'을 거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집트의 특별한 종교적 믿음이란 그들 종교의 바탕이 되는 사상을 가리킨다. 이집트인들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인간의 삶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믿었다. '저승'은 곧 하늘과 땅을 넘는 곳에 있는 세상이며, 죽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저승에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죽을 때에도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집트인들은 이 점을 매우 중요시했다. 정상적인 생존의 조건에는 한마디로 현세의 삶에서 사용했던 모든 것이 포함된다. 튼튾나 집, 배고픔과 갈증을 풀어줄 양식, 하인, 노예, 관리 등 매일의 일상에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특히 육신을 보존하는 일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육신을 부패시키는 모든 요인에 대비한 완벽한 보호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육신의 죽음 후 자유로이 떠도는 '영혼'이 한때 깃들었던 육체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이 영혼을 이집트에서는 '바'라고 한다. '바'와 더불어 수호졍령인 '카'도 망자의 육신에 찾아든다. '카'는 인간이 타고나는 생명력의 화신을 일컫는데, 육신이 죽더라도 '카'는 죽지 않고 계속 살아서 망자가 '저승'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을 보존한다. 

이러한 사상은 두 가지로 구체화되었다. 시신의 방부처리와 요새와도 같은 무덤 축조였다. 모든 피라미드는 그 안에 숨긴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요새였으며, 모드 적에 대비해, 모든 모독 행위와 소요에 대비해 두겹, 다섯 겹, 열 겹으로 방비했다. 202

매우 큰 건축물을 매우 작은 단위를 이용해 측량하는 일이 놀랍기는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샤르트르 성당이나 퀼른 대성당을 센티미터 단위로 관차라면 장확한 덧셈, 뺄셈, 곱셈을 통해 상상도 못할 천문학적인 수치를 얻게 된다. 파이도 더는 '루돌프의 수(파이를 처음 발견한 16세기 네덜란드 수학자 루돌프 판 코일렌의 이름을 따 부르는 말)'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견해도 분명 이러한 차원에서 나왓을 것이다. 파이는 이집트 사람들이 피라미드를 지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이집트인들이 매우 높은 수준의 천문학적, 수학적 지식을 (이를테면 태양까지의 거리 등 우리가 19세기나 20세기의 현대 학문에 의해 비로소 얻은 지식)거대 피라미드를 짓는 데 사용했다는 사실이 증명되더라도, 그 사실이 이러한 수치를 신비주의와 연관시키거나 그 수치에서 어떤 예언을 이끌어낼 근거는 되지 않는다. 

1922년 독일의 고고학자 루드비히 보르하르트는 거대 피라미드를 면밀히 연구한 끝에 <기자의 거대 피라미드를 둘러싼 숫자 신비론에 대한 반론>을 발표해 마침내 신비주의자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피트리는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물러서지 않는 고고학자였다. 그의 집요함과 끈기는 1889년 아메넴헤트 3세의 무덤을 발견할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208

우리는 투트모세 왕이 실제로 얼마 동안이나 고이 잠들어 있었는지 모른다. 단지 이집트 역사를 기준으로 계산해볼 때 그 기간이 그다지 오래지 않았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투트모세 왕의 미라는 어느 날  딸과 다른 사람들의 미라와 함께 무덤에서 끌려나왔다. 그 미라들을 끌어낸 사람들은 도둑은 아니었다. 도둑들로부터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바위 무덤도 더는 안전하지 않았다. 

왕들의 무덤은 바위 속에서 점점 서로 가까이 붙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경비원들은 집중적인 감시를 할 수 있었고, 주의가 산만해지는 일도 방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둑질은 계속되엇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겨우 사후 10년 또는 15년 만에 약탈당했다. 투트모세 4세의 무덤도 왕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둑이 들었다. 그 도둑들은 심지어 벽에 낙서, 은어, 고대의 사투리 등을 새겨 '방명록'을 남기기도 했다. 무덤의 훼손이 어찌나 심했던지 100년 후 신앙심 깊은 호렘헤브 왕은 재위 8년에 카이라는 관리에게 명해, '고故 투트모세4세의 무덤을 서부 테베의 부유한 주거지역에 다시 축조하도록 했다.

무덤 도굴은 제20왕조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람세스 1세와 2세, 세티 1세와 2세의 막강한 통치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 후 즉위한 아홉 명의 람세스 왕들은 이름만 위대할 뿐이었다. 그들의 통치력은 약했고, 언제나 위협받았다. 뇌물과 부패는 새로운 형태의 엄청난 권력을 형성했다. 220

그러나 이 재판도 '계곡'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약탈을 막지는 못한것 같다. 우리는 재판 기록을 통해 아멘호테프3세, 세티1세, 람세스2세의 무덤이 침탈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카터는 '그 후에 이어진 왕조에서는 무덤을 보존하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계곡'에서 벌어진 도둑질의 암울한 파노라마를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그 계곡은 기괴한 사건을 지켜봐야만 했다. 도둑들의 모험은 대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분명 몇 날 며칠에 걸쳐 계획을 다듬었을 것이다. 한밤중에 은밀히 바위 골짜기에 모여 무덤 경비원을 매수하거나 실신시키고, 어둠 속에서 대담하게 땅을 판다. 좁은 구멍을 뚫고 묘실로 들어가, 흐릿한 불빛 아래 미친 듯이 집어갈 만한 보물을 찾은 후, 동틀 녘이 되어서야 노획물을 챙겨 돌아간다. 우리는 이 모든 상황을 상상할 수 있으며,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왕은 자신의 미라를 위신에 걸맞게 값비싼 장식품으로 치장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위엄을 훼손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유혹은 너무도 컸다. 부자가 되고픈 욕망을 채우고도 남을 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물은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찾은 사람의 차지였으며, 도둑은 이르든 늦든 그 길을 찾고야 말았다.'225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위대한 유적은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한 이후 다시 한 번 전 유럽을 긴장과 흥분으로 들뜨게 만들었다. 

이에 버금가는 놀라운 유물이 이미 몇 년 전에 발견되었는데, 그때는 다이르 알-바흐리 계곡에서 매우 기이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룩소르의 꼬불꼬불한 뒷골목에서 귀중한 이집트 파피루스를 손에 넣은 미국인을 기억할 것읻. 파피루스를 감정한 유럽의 전문가는 그 물건이 의심의 여지없는 진품이며 대단히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파피루스를 입수한 경로를 캐물었다. 기분이 매우 좋아진 미국인 수집가는 유럽에서는 자신의 물건을 누구도 빼아지 못한다는 확신이 들자 신이 나서 자랑을 감추지 않았다. 전문가는 미국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상세히 적어 카이로에 보냈다. 희대의 고분도굴 사건을 파헤치는 과업에 불을 붙인 것이다. 

카이로 박물관의 가스통 마스페로 교수는 유럽에서 온 편지를 받고는 두 가지 점에서 충격을 받았다. 첫째, 또다시 값진 유물이 자신의 박물관을 피해갔다는 사실이다. 이미 6년 전부터 골동품 '암시장'에 매우 희귀한, 학문적으로 대단히 가치가 높은 소품들이 매우 은밀하게 나돌았던 것이다. 운 좋게 그런 물건을 구입한 사람들이 이집트 밖 어딘가에서 구매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밝힌 후에도 누가 그 물건을 암시장에 내놓았는지는 도무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230

그의 눈앞에는 고대의 강력한 통치자들의 육신이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부룩시는 때로는 기면서, 때로는 걸으면서 그곳에 아모세1세(기원전 1550 ~ 기원전 1525)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모세 1세는 '양치기의 왕(이민족 통치자라는 뜻의 이집트 말을 역사가 마네토가 '양치기의 왕'으로 오역한 데서 나온 말)'이라는 야만적인 힉소스인들을 영구적으로 퇴치한 일로 높이 평가받는다.(그런데 오늘날의 연구는 그 사건과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과는 무관하다는 가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곳에는 아멘호테프1세의 미라도 있었다. 아멘호테프 1세는 훗날 테베의 네크로폴리스 전체를 지키는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관 속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이집트 통치자들의 미라가 있었다. 그 다음 순간 브룩시 베이는 횃불을 손에 든 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누르기 힘든 격한 감동에 사로잡혀 몇 분을 그대로 있었다. 위대한 두 통치자의 미라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 두 왕의 명예는 고고학이나 역사학의 도움 없이 수천 년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우리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들은 투트모세 3세와 람세스 2세, 바로 람세스 대왕의 시신이었다. 모세는 유대 민족의 율법을 전한 사람이며, 그 율법은 서구의 율법이 되었다. 이 두 통치자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제국을 오래 지킬 줄도 알았다. 238

여기서 '미라'에 관해 몇 가지 알아보자. 이 낱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이미 한 번 언급한 바 있는 12세기 아랍인 여행가 아브드 알 라티프가 쓴 글을 읽으면 그 뜻을 확실히 알 수있다.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의료용으로 싸게 팔았다. 무미야mumiya 또는 무미야이mumiyai는 아랍어 단어로 아브드 알 라티프에 의하면 역청이나 바위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물을 뜻한다. 이 물은 페르시아의 데라브게르드에 있는 '미라 산'에서 나온다. '역청과 몰약myrrh의 혼합물'이라고도 하는 '미라'는 16세기와 17세기 유럽에서 매우 활발하게 거래되었으며, 19세기까지도 약국에서 부러진 데나 다친 데 쓰는 치료제로 팔렸다. '미라'는 살아 있을 때 잘라낸 머리칼과 손톱을 의미하기도 한다. 머리칼과 손톱은 신체의 일부이므로 사람을 상징해, 맹세나 저주에 쓰였다. 오늘날 '미라'라고 하면 거의 전적으로 방부처리된 시신, 특히 고대 이집트의 '귀하신 몸'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자연적' 미라와 '인공적'미라가 있었다. 자연적 미라는 특별한 처치 없이 적합한 조건으로 인해 부패하지 않고 유지도니 시신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팔레르모의 카푸친 성당, 그레이트 세인트 버나드 성당, 브레멘 대성당의 납으로 지은 묘실에 안치된 시신이나 크베들린부르크 성에 있는 시신들이다. 그 구분은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다. 인공적인 처치를 하지 않은 미라도 썩 잘 보존되었는데, 연국 결과에 의하면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모래와 공기가 무균상태기 때문이다. 모래 속에서 발견된 미라드른 관도 없고 내장을 제거한 흔적도 없었지만 방부처리한 시신에 못지않게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나뭇진, 역청, 여러 가지 향유와<린드 파리루스>에 나와 있는 '렐레판티네의 물, 에일리티야스폴리스의 소금, 킴 시市의 우유'를 사용해 방부처리한 미라드른 시간이 흐르면서 심하게 부패되거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엉켜 붙었다. 241

정확히 100년 전 벨초니도 람세스 1세와 세티 1세, 에이에, 멘투 - 헤르 - 코르셰프의 고분들을 발굴한 후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나는 비반엘 - 물루크의 계곡에는 내가 최근에 발견한 무덤 외에 다른 무덤이 남아 있지 않다고 확신한다. 나는 이곳을 떠나기 전에 또 다른 무덤을 찾기 위해 내 모든 힘을 다 쏟아부었지만 허사로 끝났다. 내가 직접 연구한 바와 무관하게 영국의 솔트 영사도 내 확신을 증명해주었다. 솔트 영사는 내가 그 계곡을 떠난 후 4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나와 마찬가지로 무덤을 더 찾으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벨처니 이후 27년이 흐른 뒤에 프로이센에서 대규모 원정대를 '왕가의 계곡'에 파견해 철저한 측량을 실시했다. 원정대의 대장은 리하르트 렙시우스였다. 원정대가 철수할 때, 렙시우스도 이제 계곡에서 발견될 만한 것은 모두 다 발견되었다고 단정했다. 그럼에도 19세기 말에 로레와 데이비스는 서로 잠깐의 간격을 두고 '왕가의 계곡'에서 새로운 고분들을 발견했다. 이제 '계곡'의 모래알은 문자 그대로 세 번씩 체로 거륵호 세 번씩 뒤집은 상태였다. 고대유물청 청장 마스페로 교수도 카르나본 경에게 내주는 발굴 허가서에 서명하면서 사실상 그 허가서는 불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으며, 곁에 있던 다른 학자도 마스페로를 거들었다. '계곡'에서 이제 더는 유물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이유였다. 

카터는 왜 이런 상황에서도 고분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까? 게다가 아무 무덤도 아니고, 어떻게 어떤 왕의 고분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있었을까? 카터는 데이비스가 발견한 유물을 직접 보며 스스로 알아낸 바가 있었다. 253

기대에 부풀었더 마음이 가라앚았다.그러나 두 번째 문 앞의 자갈을 치우면 치울수록 긴장은 더욱 고조되어 갔다. '결정적이 순간이 왔다.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왼쪽 상단 구석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고 카터는 기록했다. 

카터는 쇠꼬챙이를 집어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꼬챙이는 빈 공간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카터는 몇 차례 불꽃 실험을 통해 가스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구멍을 넓혔다. 

모든 관계자들이 구멍으로 몰려들었다. 카르나본 경, 그의 딸 레이디 에블린, 그리고 이집트학 학자 아서 콜린더. 콜린더는 새 유물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굴을 돋기 위해 달려왔다. 카터는 불안한 동작으로 성냥을 그었다. 초에 불을 붙인 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손이 떨렸다. 기대와 궁금증으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카터가 구멍 가까이 얼굴을 대고 마침내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순간, 구멍을 통해 뜨거운 공기가 훅 빠져나왔다. 촛불이 펄럭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잠시 후 희미하게 펄럭이는 불빛에 눈이 적응되자 여러 가지 형상과 그림자와 색깔이 차례로 구분되었다. 두 번째 봉인문 뒤로 물체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물체의 모습은 점점 더 뚜렷해졌다. 그 광경을 본 카터는 무슨 말을 했을까? 황홀감에 젖어 탄성을 터뜨렸을까? 아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터 옆에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그 시간은 영원과도 같았다. 260

그 작업은 전실과 묘실 사이의 돌벽을 허무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에는 첫 번째 황금 납관함을 분해했다. 그 안에 함이 또 하나 있었고, 두 번째 함 안에 함이 또 하나 들어 있었다. 

카터는 이제 관을 발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세 번째 납관함의 개봉과 그에 이은 또 하나의 발견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흥분을 억누르고 세 번째 함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가 힘겹게 일한 이 긴장된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함에 묶여 있던 노끈을 끊고 귀중한 봉인을 제거한 후 빗장을 당겼다. 문을 열자 납관함이 또 나타났다. 그 함도 다른 함들과 같았지만 세 번째 함보다 더 화려하고 더 잘 만들어져 있었다. 고고학자로서 이보다 더 감격적인 순간이 있을까? 우리는 또 다시 물음에 직면했다. 이 안에 무엇이 있을까? 극심한 흥분 속에 나는 봉인이 없는 문의 빗장들을 하나씩 당겼다. 마지막 문이 서서히 열렸다. 우리 눈앞에 그 함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마어마한 황색 석영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경건한 손으로 방금 닫은 듯 손대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잊지 못할 황홀한 순간은 함을 덮은 금에서 내뿜는 번쩍이는 빛으로 더욱더 고조되었다. 석관의 발치에 한 여신이 보호하듯 팔과 날개를 펼이고 있었다. 마치 침입자를 막으려는 듯했다. 우리는 이 의미심장한 표시 앞에서 경외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275

관을 열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들었다. 그 사이에 일어난 자잘한 사건들과 세부사항을 여기서 열거할 수는 없다. 그 작업은 지루했고, 좁은 공간에서 일을 하다 보니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칫 잘못 건드리거나, 도르래를 잘못 놓거나, 버팀목이 부러지기라도 한다면 보물은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첫째 관의 뚜껑과 마찬가지로 둘째 관의 뚜껑에도 오시리스의 모습으로 화려하고 장엄하게 치장한 젊은 파라오가 누워 있었다. 셋째 관도 마찬가지였다. 관을 여는 작업에 관여한 사람드른 모두 관의 무게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무덤의 놀라운 일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버튼이 사진을 찍고, 카터가 파라오의 어깨를 두른 작고 둥근 깃과 보호용 아마포를 걷어 내자 첫눈에 어마어마한 무게의 비밀이 풀렸다. 길이 1.85미터의 셋째관은 두께가 2.5밀리미터에서 3.5밀리미터의 어마어마한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금값을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이 놀라운 사실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곧이어 또 벌어진 놀라운 사실은 관을 조사한던 학자들에게 불안한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둘째 관을 열 때부터 장신구들이 습기 때문에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둘째 관과 셋째 관 사이의 틈을 보니 그 속에 시커멓고 단단한 덩어리가 거의 뚜껑까지 차올라 있었다. 금 구슬과 파이앙스 구슬로 꿴 두 겹의 목걸이는 역청 같은 이물질로 덮여 있었다. 그 이물질은 깨끗이 제거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문제가 학자들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보아하니 미라에 연고를 지나치게 많이 바른 모양인데, 그 때문에 미라가 어떤 화를 입지나 않았을까? 278

투창카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1926년 절정에 달했다. 그 해 3개월 동안 투탕카멘의 고분을 찾은 관광객의 수는 1만 2300명에 이르렀고, 270개 단체가 실험실을 견학했다. 

일반적으로 신문이란 세상에 나도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알리는 매체이다. 게다가 보통의 신문사라면 모든 보고서와 칼럼을 이집트학 전문가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다. 여러 형태의 취재를 통해 말과 글로 전달되는 부정확한 내용이 신문지상에 실리면서 투탕카멘에 대해서도 오보가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신문의 속성상 무미건조한 뉴스만 다루기보다는 센세이션을 일으킬 특종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법이니까. 미비한 부분은 상상력으로 때우면 그만이었다. 

'파라오의 저주'라는 기이한 이야기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출처를 알아낼 수는 없다. 그 이야기는 30년대까지도 거듭해서 전 세계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이를테면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는 대형 피라미드를 둘러싼 신비주의나, 끊임없이 사람드의 입에 오르내리는 '미라 밀알'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다. 미라 밀알 이야기란 이집트 고분에서 발견된 3000년, 심지어 4000년이나 된 씨앗이 아직도 발아력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지금 심어도 싹이 난다는 전혀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다. 285

보타는 이러한 조건에 걸맞게 작업을 진행했다. 그의 작업 방식을 되짚어 살펴보면, 보타는 분명 어떤 계획이나 대범한 가정을 바탕으로 작업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기심 섞인 막연한 희망만으로 일을 시작했다. 보타가 발굴에 성공했을 때는 세상 사람들 못지않게 그 자신도 놀랐다. 보타는 저녁마다 사무실을 닫고 모술 주변을 돌며, 집요하게 정보를 채취했다. 집집마다 찾아가 지치지도 않고 똑같은 질문을 해댔다. 골동품 있습니까? 옛날 항아리나 단지는요? 이 외양간에 쓴 벽돌은 어디서 구했나요? 이 항아리 파편에는 특이한 쐐기 표시가 있는데 어디서 난 겁니까?

보타는 눈에 띄는 유물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그러나 그 물건의 출처를 캐물을 때마다 사람들은 어깨만 으쓱하며, 알라는 위대하므로 이런 물건을 천지에 뿌리셨으니 둘러보면 알 거라는 말뿐이었다. 

보타는 유물이 많이 매장된 장소를 물어물어 알아내는 방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삽을 들고 이단 가장 멋진 언덕을 파기로 결심했다. 쿠윤지크 언덕이었다. 300

개척자 보타의 두를 이어 호스틴 헨리 레이어드가 니네베를 발굴한 후, 어느 대담한 영국인에 의해 설형문자 해독에 필요한 지식은 매우 풍부해졌다. 그는 니네베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오직 새김글을 베끼기 위해 도르래를 타고 암벽을 내려갔었다. 그 후 발굴의 결과와 발견, 해독, 언어학과 고대사 전반에 걸친 기본지식과 새로운 이론들을 통합하여 단 10년 사이에 매우 튼튼한 학문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19세기 말경에는 발굴 결과를 바로 바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학문적 장비가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재미있게도 설형문자 해독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는 학문적 호기심 또는 학문적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었다. 그 첫걸음을 내디딘 사람은 패기만만한 스물일곱 살의 독일 청년이었다. 그는 1802년 괴팅겐의 시립학교 보조교사이던 시절에 설형문자의 첫 자모10개를 읽을 거라고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시대를 통틀어 마땅히 천재적이라 할 만한 방법으로 내기에서 이겼다. 재미있지 않은가?

설형문자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설형문자의 사본을 맨 처음 유럽에 보낸 사람은 이탈리아의 여행가 피에트로 델라 발레였다. 프랜시스 애스턴은 1693년에 <철학회보>를 통해 설형문자 두 줄을 발표했는데, 페르시아 주재 동인도 회사의 대리인이었던 프랄워라는 사람이 베낀 글이었다.308

그로테펜트가 작업에 이용할 만한 예비지식은 다음과 같았다. 페르세폴리스의 새김글들은 매우 다양한 특징을 보인다. 어떤 점토판에 세 종류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확연하게 세 단으로 나뉘어 옆으로 나란히 적혀 있었다. 학자들은 이미 페르세폴리스의 통치자들인 옛 페르시아 사람들에 대해 특히 그리스 역사가들의 저술을 통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으며, 젊은 인문학자 그로테펜트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원전 540년에 키루스 왕이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처음으로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세워, 바빌로니아를 영원히 역사에 묻히게 만든 일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 새김글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정복자의 언어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나아가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가운데 놓고 보는 일반적인 습관을 고려할 때, 가운데 단이 바로 이 고대 페르시아 언어로 쓴 글을 가능성 또한 대단히 높았다. 그 글을 살펴보면 눈에 띄는 부호군 한 개와 개별 기호 한 개가 있는데, 이 기호와 부호군은 대단히 여러 차례 나온다. 그 부호군은 '왕'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이는 여타의 기념비학에서도 내세우는 결론이었다. 개별 기호는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그은 쐐기인데, 그것은 쉼표와도 같이 말을 분할하는 부호로 보았다. 이것이 전부다. 밝혀진 사실은 놀라우리만치 적었다. 심지어 새김글을 읽을 때 어느 쪽에서 시작해야 하는지도 확실치 않을 만큼 가설은 빈약했다. 왼쪽에서부터 읽어야 하는지, 오른쪽에서부터 읽어야 하는지는 말할 나위도 없었고, 점토판에서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조차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313

두 강 사이의 땅은 터키 지배하에 들어갔고, 새로 온 태수가 부임했다. 고대 로마의 작가들이 전해준 이야기 가운데는 터키 태수들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태수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다스릴 땅을 오로지 착취의 대상으로만 보고, 백성들은 젖소나 닭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으며, 그 닭이 황금 알을 낳기를 바랐다. 

모술의 태수는 아시아 특유의 방법으로 백성들을 착취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마치 이야기책에 나오는 못된 인물의 화신과도 같았다. 외모또한 그랬다. 그는 외눈에다 귀도 하나밖에 없었으며, 작은 키에 몸집은 뚱뚱했다. 게다가 얼구른 온통 마마 자국으로 덮여 괴물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쳤다. 그의 행동은 꼴사납고 거친 데다, 항상 매복하고 기습을 노리는 사람과도 같아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영리한 사디스트였다. 극악무도한 장난에 재능이 있었다. 그가 부임한 후 처음으로 실행한 공무 가운데 하나는 주민들에게 '치아세'를 부과한 일이었다. 서구의 가장 무거운 '소금세'도 '치아세'에는 한참 못 미치는 액수였다. 태수는 그 마을의 음식이너무 더러워 이가 상하고 빠졌으니 그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치아세를 거두었다. 그래도 이 일은 앞으로 벌일 일을 앞두고 부려본 투정에 지나지 않았다. 태수는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의 처벌 방법은 약탈이었다. 그는 수많은 도시와 마을을 불에 태워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그곳 주민의 재산을 강탈했다. 

폭정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약자들의 소식통이 아닌가? 337

면담은 성사되었다. 그리고 레이어드는 한 중동의 파샤가 얼마나 다양한 면모를 수시로 바꿔가며 보여주는지 알게 되었다. 파샤는 맹세하듯 두 손을 들어보이며, 레이어드가 하는 일을 돕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정말로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감탄할 뿐이다. 나는 유럽인을 존경한다. 그래서 유럽인 청년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내일도, 평생토록, 알라가 부를 때까지 친구로 남기바란다. 그런데 거기서 발굴을 계속하겠다고? 그건 안된다. 그 땅은 옛 이슬람교도들이 매장된 곳이다. 둘러보면 비석이 보일 것이다. 독실한 신도들이 보기에 당신이 하는 일은 모독이다. 그러니 독실한 신도들은 유럽인 청년인 당신뿐만 아니라 파샤인 나한테도 반기를 들 것이다. 그러면 나 또한 멀리서 온 친구를 더는 보호할 수 없다...'

그 면담은 굴욕적이었다. 굴욕만 당하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저녁이 되어 오두막 앞에 쪼그리고 앉자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분명해졌다. 파샤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레이어드는 곧바로 언덕으로 말을 달렸다. 그곳에 이슬람 신도들의 비석이 있다는 폭군의 주장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실이었다. 좀 외딴 지점 한군데 비석이 있었다. 레이어드는 언짢은 기분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지 말았엉 했다. 그 비석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어야 했다. 레이어드가 파샤를 만나러 가기 하루 전날부터 그럴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누워 있지 말아야 했다. 344

레이어드의 가장 큰 고민은 이 날개 달린 거상 몇 점을 런던으로 운반하는 문제였다. 그 해 여름은 흉작이었으므로 모술 근방에 도둑 떼가 들끓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레이어드는 그동안 많은 친구를 사귀었지만, 이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다. 

어느 날 아랍인과 칼데아인 한 무리가 모술 근교의 반쯤 썩은 배다리로 몰려다. 그들은 거대하고 둔중한 차량 한 대를 밀고, 끌고, 잡아당겼는데, 힘센 들소 한 쌍이 끌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괴물 같은 수레는 레이어드가 모술에서 서둘러 맞춘 것이었다. 레이어드는 첫 운반 대상으로 황소와 사자 각 한 점을 골랐다. 그 두 점은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고 가장 작기도 했지만, 사용할 만한 장비가 미비한 상황에서는 그것만 운반하는 데도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단지 황소상 한 점을 출토해내기 위해 발굴현장 전체를 다 파야했다. 그 구덩이의 길이는 30미터, 너비는 5미터, 깊이는 7미터나 되었다. 레이어드는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아랍인들에게 이 일은 민족축제였다. 브룩시 베이가 이집트에서 죽은 왕의 미라를 나일 강을 따라 카이로로 옮길 때, 슬픔에 싸인 원주민들이 통곡으로 왕을 배웅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아랍인들에게 이 사건은 귀청이 찢어지도록 환성을 지르며 즐거워할 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토록 들뜬 분위기 속에 거상을 실은 수레가 서서히 굴렀다. 

그 날 저녁 레이어드가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셰이크 아브드 알 라흐만이 동행했다. 352

이때가 기원전 612년 이었으므로 니네베가 수도로 존립한 기간은 9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9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 명성이 2600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유지되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 도시를 그토록 위대한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었을까? 잔혹성과 권력, 향락과 문명, 발전과 돌연한 멸망, 무모한 죄악과 응분의 처벌이 공존했던 도시가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알고 있다. 발굴자와 설형문자 해독자의 업적을 종합한 결과 오늘날 우리는 센나케리브와 아슈르바니팔 두 통치자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조와 후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니네베는 오로지 살인과 약탈, 탄압, 약자에 대한 착취, 전쟁, 그리고 온갖 잔혹행위로 어우러진 도시로 알려졌다. 통치자들은 오로지 폭력으로 다스렸고, 유혈 폭동으로 대를 이었으며, 따라서 자연사한 통치자가 거의 없고 더 심한 폭군이 그 뒤를 이었다. 

니네베는 아시리아의 로마였다. 막강한 도시, 대도시, 세계적인 도시였다. 어마어마한 궁전과 거대한 광장, 넓은 도로가 건설된 도시였고, 전대미문의 신기술이 승리를 자랑한 도시였다. 또한 극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한 도시였다. 유혈 폭동으로 얻은 권력이든, 혈통이나 작위에 의한 권력이든, 돈이나 폭력 또는 이 모든 요인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손에 쥔 권력이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매를 맞으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천민들의 도시였다. 363

조지 스미스는 1872년에 호르무즈드 라삼이 박물관에 보낸 점토판을 앞에 두고 앉아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아시리아 - 바빌로니아 문학에 후대의 위대한 문학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할 훌륭한 작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조지 스미스는 기본적으로 노력파 학자였고, 예술에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아시리아 - 바빌로니아의 문학작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별관심이 없었다. 스미스가 해독을 시작하자마자 그의 온 마음을 빼앗은 것은 그 이야기, 내용이었다.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이었다. 일어난 사건이었고, 형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미스가 해독에 진전을 보면 볼수록 그를 더욱더 흥분시킨 이야기는 점토판 텍스트에서 단지 곁들인 말로만 나와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야 나오는 이야기였다. 

스미스는 힘센 길가메시의 위대한 행적을 좇았다. 그는 숲에 사는 엔키두 이야기를 읽었다. 엔키두는 어느 사제가 초인적인 길가메시를 누르기 위해 정부를 시켜 도시로 불러낸 사람이다. 그러나 막강한 두 영웅의 싸움은 무승부로 끝나고,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많은 일을 했다. 백향목 숲의 잔인한 지배자 훔바바를 죽였고, 길가메시를 사랑한 이슈타르 여신을 신들이 거칠게 모욕하자 그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스미스는 계속 읽어나갔다. 엔키두가 어떤 끔찍한 병에 걸려 죽었는지, 길가메시가 엔키두를 얼마나 애도했는지, 그리고 똑같은 운명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영생을 얻으러 간 곳이 어디인지 읽었다. 힘들게 해독하면서,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슈팀을 찾아 갔다. 옛날 신들이 모든 인간 종족을 벌하였으나, 우트나피슈팀만은 가족과 함게 그 벌을 피해 영생을 얻게 되었다. 우트나피슈팀은 오늘날 모든 인류의 시조였던 것이다. 374

그 당시 이탈리아의 거리는 안전하지 않앗다. 그러나 오히려 콜데바이는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아 오히려 실망한 듯했다. '10년 전만 해도 도둑을 만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지금은 최소 수준으로 격감했다. 우리는 신전 앞으로 난 길에서 위험해 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다리를 쩍 벌리고 서서 겁을 주고 있었다. 구리 빛 얼굴 위로 두 눈이 이글거렸다. 그는 테가 넓고 끝이 뾰족한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뿐만 아니라 몸에 걸치고 있는 것 모두가 요란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토록 화려한 색채는 중탄산나트륨의 스펙트럼에서나 본 것 같다. 우리는 잽싸게 근처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사람도 따라 들어왔다. 우리는 흔들리는 긴 귀걸이가 인상적인 여주인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몇 시나 되었는지 물었는데, 그때 이 남자가 독일어로 이렇게 말했다. '다섯 시꺼정은 안즉 15분이나 남었구먼요.'그는 베니스 출신이었는데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에서 많은 일을 했으며, 도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로베르트 콜데바이는 1897년 10월2일에 친구에게 바빌론으로 여행을 가게 될 거라고 귀뜸하며 '보안 유지'를 요구했다. 여행은 미루어졌다. 그러나 1898년 8월2일에 콜데바이는 같은 친구에게 베를린 박물관 총감독인 리하르트 쇠네가 이끈 회의에 관해 편지로 알렸다. '바빌론을 발굴할걸세!!' 그는 느낌표를 두 개나 붙였다. '지금 나는 원정대를 위한 지침서를 구상하고 있다네. 이벌 발굴은 일단 1년 동안 진행될 예정이네. 나는 바빌론에 관한 보고서에서 5년 예정의 작업에 대해 50만 마르크의 경비를 청구했고, 첫해의 경비로 14만 마르크를 청구햇네' 그리고 9월 21일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발굴단 단장이 되었네. 매월 600마르크씩 받게 되었어....이제는 집을 떠날 수 있을 거야. 16년 전에 누군가 나더러 바빌론을 발굴하라고 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친놈 취급했을걸세' 386

이 두 벽돌담 사이의 공간은 흙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아마도 외벽의 꼭대기까지 흙이 차 있었을 것이다. 그 벽의 두께는 사두마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성벽에는 50미터 간격으로 망루가 솟아 있었다. 콜데바이는 내벽에서 360개의 망루를 확인했다. 크테시아스는 외벽에 250개의 망루가 있었다고 기록했든데, 이제 그 기록은 충분히 믿을 만했다. 

콜데바이가 발굴한 이 성벽은 세계 역사상 단연 최대의 도시 방어 시설이었다. 이 성벽은 바빌론이 중동 전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니네베보다도 더 큰 도시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동쪽에 굳건한 장벽으로 바빌론을 둘러싸게 만들었다. 그 벽 아래로 구덩이를 파고 석회와 벽돌로 둑을 쌓게 했으며, 둑 옆으로는 튼튼한 장벽을 산처럼 높게 쌓았다. 성벽에 넓은 통로를 내고 백향목에 구리를 입힌 여닫이문을 달았다. 악의를 품고 쳐들어오는 적군을 어느 쪽에서든 막을 수 있도록 바다의 성난 파도와도 같은 큰물로 이 나라를 둘러쌌다. 이 해자를 넘는 일은 큰 바다를 건너는 일과도 같다. 해자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 옆에 흙으로 둑을 쌓고, 둑은 벽돌로 지은 내벽으로 둘러쌌다. 나는 정교하고도 굳건한 방벽을 쌓아 바비론을 요새로 만들었다.'394

레너드 울리는 슈바드 여왕의 무덤에서 살해당한 궁녀들이 두 줄로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줄 맨 끝에는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악사, 하프 연주자였다. 그의 두 팔은 상감세공으로 장식된 값비싼 악기 위에 놓여 있었다. 치명적인 최후의 일격을 당하는 순간까지 소중한 악기를 꼭껴안고 있었으리라. 여왕이 누운 관대 바로 옆에는 두 사람의 유해가 맞아 쓰러진 모습 그대로 웅크리고 있었다. 

한 가지로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여기 쓰러진 사람들은 죽은 왕에게 인간으로서 바칠 수 있는 가장 큰 것, 목숨을 바쳤다. 레너드 울리가 서 있는 곳은 위식적으로 자행된 순장의 현장이었다. 아마도 광신적인 사제들이 그들의 나라를 신의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강행한 일인 듯했다. 시신이 누운 상태로 보거나 발굴 현장의 모든 정황으로 보아 이 궁인들, 병사들, 노예들은 자신이 섬기던 통치자의 뒤를 결코 자발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남편이 죽으면 자발적으로 화형장의 장작더미 위로 오른 인도의 미망인들과는 경우가 달랐다. 이곳의 희생은 살육이었다. 죽은 왕의 명예를 위한 피 비린내 나는 처형이었다. 417

스페인군은 땅이 울리도록 발을 구르며 힘차게 전진했다. 

그들이 중앙대로에 접어들자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무리지어 마주오고 있었다. 황금 지휘봉을 든 세 사람의 고관 뒤로 귀족들이 따랐다. 그들의 어깨 위에서 황금 가마 한 대가 흔들렸다. 오색 깃털로 짠 가마의 닫집天蓋은 수많은 보석이 박혀 있었고, 가장자리는 은테를 두르고 있었다. 가마를 멘 귀족들은 맨발이었으며,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침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무리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키가 크고 날씬한,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가마에서 내렸다. 일반 백성들보다 하얀 얼굴빛에 길지 않은 검은 머리는 매끄러웠으며, 수염도 가늘었다. 진주와 보석으로 수놓은 외투 자락을 목덜미에서 여미고 있었고, 그가 신은 황금 샌들은 복사뼈 옆에서 금띠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두 명의 귀족에게 호위를 받으며 앞으로 다가올 때, 하인들은 그의 발을 더러워지지 않도록 면 깔개를 발 앞에 놓아주었다. 아스텍 제국의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이렇게 코르테스 앞에 섰다. 428

코르테스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아니 딘디언의 증원으로 266명으로 불어난 무리를 이끌고 티에라 칼리에테 평원으로 내려갔다. 비가 억수 같이 퍼붓고 폭풍이 몰아쳤다. 코르테스의 정찰병이 나르바에스가 셈포알라에 도착햇다고 보고했다. 이제 그 두 사람은 사이에는 오직 강 하나만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르바에스 역시 전투경험과 전황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코르테스를 저지하기 위해 저녁 무렵 강기슭으로 내려왔다. 극심한 폭풍우에 병사들이 투덜거렸다. 나르바에스도 이런 날씨에 코르테스가 강을 건너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 병사들의 불평을 들어주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부대는 코르테스에 비해 훨씬 더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잇었다. 나르바에스는 다시 마을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그날 밤 강을 건넜다. 적의 보초는 기습을 당햇다. 그날은 1520년 오순절이었다. 코르테스는 직접 선두에서 지휘하며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병사의 수도, 무기도 열세인 그의 무리는 '에스피리투산토(성신의 이름으로)!'를 외치며 무기와 병사로 가득한 나르바에스의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441

스페인군의 선봉이 교량이 파괴된 두 번째 운하에 도달했을 대 이동용 교량은 어디에 있었는가? 후미에서 교량을 찾는 소리로 알게 되었다. 그 어떤 소식보다 더 끔찍한 소식이었다. 병사들이 교량 위로 오르자 교량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물속으로 가라앚아, 비로 물러진 강바닥의 흙속에 처박혀 끌어낼 수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순간까지 조직적이던 철수는 그 순간부터 도주가 되었다. 지금까지 군대이던 집단은 이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몇몇 개인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반대편 기슭으로 가기 위해 맨발로 또는 말을 타고 물에 뛰어들어갔다. 짐과 무기와 몸에 지녔던 금은 밤의 어둠 속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서 이 엉망진창으로 변해버린 전투 상황을 상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다. 스페인군 가운데 부상 없이 빠져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전해진 모든 이야기에 의하면 코르테스는 진정으로 기적과도 같은 용맹을 떨쳤다는데, 그 또한 부상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침이 흐릿하게 밝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스페인군이 제방을 건너자 아스텍 전사들은 적군을 추적하고 타도하는 일보다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챙기는 데 더 열중했다. 스페인군의 총사령관은 그제야 인원을 점검할 수 있었다. 이날 밤의 병력 손실에 대해 동시대인들이 진술한 내용은 제각각이었다. 중간 값에 의하면 스페인군이 3분의 1로, 동맹군인 틀락스칼라군이 4분의 1 또는 5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451

그 책은 갈린도라는 장교가 쓴 직무 보고서였는데, 1836년에 중앙아메리카 정부의 위탁을 받아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기록이었으며, 대부분은 갈린도 자신의 견해로 채워져 있었다. 갈린도는 그 책에서 대단히 오래된 매우 특이한 건축물 이야기를 했으며, 그 유적이 유카탄 반도와 중앙아메리카의 밀림에 있다고 밝혔다. 

한 군인이 쓴 무미건조한 설명이 스티븐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그는 더 많은 자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과테말라의 사학자 도밍고 후아로스가 쓴 책을 발견했는데, 그 책은 프란시스코 데 푸엔테스라는 사람의 글을 인용하고 있었다. 456

스티븐스와 캐서우드는 인디언 안내인과 짐꾼을 대동하고 출발했다. 곧 숲이 나타났다. 숲 속으로 들어가자 그들의 머리 위를 녹색의 바다가 덮었다. 두 사람은 그제야 자신들보다 앞서 그곳을 여행하거나 탐험한 사람이 왜 그리 적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보다 300년 앞서 코르테스는 이와 유사한 숲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무성한 나뭇잎들이 던지는 그림자가 너무도 짙어, 병사들은 발이 어디를 밟는지도 모른 채 걸었다!' 말이 습지에 빠져 진흙이 배까지 차올랐다. 스티븐스와 캐서우드는 말에서 내리다 가시나무 넝쿨에 긁혀 손과 얼굴이 찢어졌다. 찌는 듯한 더위에 몸은 축 늘어졌고, 소택지에서 떼지어 날아다니는 모기들 때문에 짜증이 났다. 스티븐스보다 100년 앞서 스페인의 여행가 동 후안과 우요아는 이 열대의 내륙 기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날씨는 사람의 기운을 갉압먹었다. 산욕을 치르는 여자들은 죽기도 했다. 황소들은 살이 빠지고, 암소들은 젖이 나오지 않았으며, 암탉들은 알을 낳지 않았다....' 그곳의 자연은 코르테스와 두 스페인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처음부터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전쟁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바람에 외교적인 임무 수행은 아예 불가능해 스티븐스는 호기심에 따라 모험하는 일밖에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ㄷ.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스티븐스는 되돌아갔을 것이다. 461

스티븐스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부근의 모든 주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멋진 결단을 내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폐허 도시를 얼마에 팔겠소?'

'돈 호세는 내가 그의 늙고 가련한 부인을 사겠다고 말했더라도 그렇게까지 놀라고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부인은 우리가 치료해준 류머티즘 환자였다. 그는 우리 둘 가운데 누가 제정신이 아닌지 잘 모르는 듯했다. 내가 그 땅을 사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내 말을 의심했다. 그 땅은 그 정도로 쓸모가 없는 땅이었다'고 스티븐스는 기록했다. 

돈 호세는 무척이나 치근치근했으므로 스티븐스는 자신이 한 제안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지못해 신분증을 모두 펼쳐 보였다. 인격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이고, 탐험하는 학자이며, 강대국 미합중국의 대리공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였다. 읽고 쓸 줄 아는 미겔이라는 사람이 서류를 큰 소리로 읽었다. 당당하던 돈 호세는 미겔이 다 읽기를 초조하게 기다린 후, 좀 더 생각해본 다음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미겔은 또 서류를 읽어야 했다. 그래도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스티븐스는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가운데 고대 도시 코판을 매입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그 방법은 정글 마을 주민들의 정서를 제대로 판단한 사람만이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스티븐스는 돈 호세를 설득시킬 장면을 연출하기로 결심했다. 마치 그로테스크 영화에서 따온 듯한 장면이었다. 471

학자들은 오로지 마야의 역법을 연구하는 데만도 평생이 걸렸다. 거듭된 연구를 통해 달력의 비밀이 깊이 파고든 결과, 이제까지도 충분히 놀라게 만든 이 문명은 또 한 번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마야의 달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달력과도 구조가 달랐으며, 더 정확했다. 세부사항은 생략하고 핵심나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마야의 달력은 먼저 스무 개로 엮은 날짜 표시로 이루어진 것이 있다. 각 표시는 1에서 13까지의 수와 결합하여 도합 260일을 나타낸다. 이 달력을 이른바 '촐킨Tzolkin'이라 하고, 아스텍인들은 '토날라마틀Tonalamatl'이라했다. 두 번째 방법은 18개의 달 표시로 된 달력이다. 각각의 달이 20일을 표시하고, 여기에 5일을 표시하는 또 하나의 달 표시를 더한다. 이로써 365일로 되어 있는 마야의 한 해를 표시했는데, 이른바 '하압Haab'이었다. 487

정글의 유물 앞에 선 학자들이 바로 이런 상황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를테면 코판의 건축물이 키리구아의 건축물보다 얼마나 더 오래되었는지를 빨리 알아낼 수 있었지만, 이 두 도시가 유럽식 역범으로 따졌을때 몇 세기에 건설되었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다음 과제는 마야 연대기와 우리 연대기의 상호관계를 밝히는 일이었다. 그 연구가 거의 완성되어갈 시점에 개별 날짜의 해독은 점점 더 정확해졌는데, 이러한 연구 결과와 맞물려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다. 그 문제는 한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둘러싼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였다. 버려진 도시에 서린 비밀에 관한 문제였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달력을 개발한 민족인 그 달력의 노예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야 민족은 그들의 대형 건축물들을 필요할 때 지은 것이 아니라, 달력이 지으라고 명령할 때 지었다. 즉5년, 10년, 20년 마다 새 건축물을 짓고 건축일자를 표시했다. 종종 이미 지은 피라미드 주위에 또 하나의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새로운 달력으로 교체하면서 그 건축물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일이었다. 이런 일은 수백 년에 걸쳐 절대적인 규칙성을 유지하며 계속되었다. 깍아 새긴 날짜가 그 사실을 증명햇다. 이런 규칙성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재앙뿐이었다. 아니, 다른 곳으로 이주해버리는 경우에는 규칙이 깨질 수 있다. 492

얼핏 보아 순전히 꾸며낸 듯한 이 이야기 때문에 톰슨은 엄청나게 골머리를 앓았다. 그는 그런 이야기에서도 언제나 역사적인 핵심을 찾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톰슨은 평저선에 올랐다. 나중에 잠수할 때 쓸 배였는데, 이미 고요한 물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톰슨은 기중기를 세워 둔 지점에서 18미터 또는 그 이상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절벽같이 솟은 우물 안벽에 배를 정박한 후 우연히 보트 너머로 시선을 던지니 어떤 광경이 톰슨의 눈에 띄었다. 톰슨은 바로 우물에서 나왔다. 그것은 전해 내려온 옛 이야기 속의 여인 사절단에 얽힌 비밀을 풀어줄 열쇠였다. 

제물을 바치는 우물의 수면은 빛을 비춰도 굴절하지 않을 만큼 어둡고 탁했다. 물색은 때때로 갈색에서 옥색으로 바뀌었고,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가끔 피처럼 붉게 변하기도 했다. 물위에 뜬 보트에서 뱃머리 너머로 수면을 바라보니, 나는 마치 '큰 골짜기와 많은 언덕'을 들여다보는 듯 했다. 사실 그것은 내 머리 바로 위로 솟은 언덕과 바위의 오목한 부분이 수면에 비친 그림자였다. 다시 정신을 차린 여인들은 물 밑에 동족들이 많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그들이 여인들이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골짜기와 산을 살피려고 나아가자, 그 아래 여인들의 동족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도 대답을 했다. 그드른 보트를 보려고 우물가에 기대 선 인부들이었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조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우물 아래로 향했고, 수면에 닿은 후 다시 위로 올라갔다. 물론 나는 못 알아들었지만 그들에게는 분명 정겨운 고향의 말소리였다. 나는 이 사건에서 전승된 옛 이야기에 대한 설명을 찾았다. 506

'전사의 신전' 앞에 뱀 기둥 두 개가 서 있다. 뿔난 머리를 바닥에 박고, 주둥이는 크게 벌린 채, 뒤로 뺀 몸뚱이를 위로 올리고 있다. 옛날에는 그 꼬리 위에 신전의 지붕이 얹ㅎ 있었다. 이 뱀들 앞에 서면, '전사의 신전'앞에 서면, 아니 치첸이트사에 있는 거의 모든 마야 건축물 앞에 서면 분명히 확신하게 되는 사실이 있다. 치첸이트사의 미술은 코판, 팔렝케, 피에드라스 네그라스, 우악삭툰의 건축물에 표현된 미술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신제국의 미술은 구제국의 미술과 구별되지 않는가? 학자드른 금석학을 연구했다. 여기서는 선을 저기서는 장식을, 여기서는 신으 마스크를 저기서는 역범교체를 검토하고 비교했다. 그리고 치첸이트사의 건축물을 지은 사람은 마얀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곳에 반영된 정신은 마야의 정신이 아니고, 그곳에 나타난 지식은 마양의 지식이 아니다!  

대체 어디서 다른 정신이 들어왔다는 말인가? 누가 들여왔다는 말인가? 학자들은 멕시코로 시선을 돌렸다. 아스텍 제국은 고찰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아스텍 제국은 마야 제국에 비해 훨씬 후대의 제국이었다. 그리고 아스텍 민족이 멕시코 땅에 쳐들어왔을 때 그곳에는 이미 지은 지 대단히 오래된 건축물이 있었다. 

마야 민족의 막강한 문명이 외부 영향에 무릎을 꿇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역사적 증거는 없는가? 디에고 데 란다와 같은 안내자가 어디 있을까? 위대한 '건축의 대가'인 신비한 민족에 대해 막연한 암시라도 해준 사람이 진정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스텍의 왕자 익스틀릴크소치틀Ixtlilxochitl은 대단히 놀라운 사람이었다. 517

위대한 이 세 제국을 서구의 고대 세계와 비교해보면 영향력의 구도를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독일의 멕시코학자 테오도르 빌헬름 단첼이 자신의 논문에서 두 대룩의 고대 세계를 비교해보았다. 

'아스텍 문명과 마야 문명의 특징은 종종 서구의 고대 세계와 비교를 통해 부각되는데, 이러한 비교에 따르면 아스텍은 로마에 해당되고, 마야는 그리스에 해당된다. 이 비유는 전체적으로 보아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마야 민족은 실제로 여러 공동체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이들 공동체는 서로 반목했고, 때때로 공동의 적과 싸워야 할 때만 단결했다. 마야 제국은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조소, 건척, 천문, 산술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다. 

이에 반해 아스텍 민족은 호전적이었다. 톨텍인들은 아스텍 민족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톨텍인들은 에트루리아족(로마 제국 이전에 이탈리아 반도에 살았던 민족으로 로마 제국에 흡수됨)에 비견될 만하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어온 독자는 비교를 다르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톨텍 또는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에 살았던 종족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맡은 역할은 수메르인과 마찬가지로 발명가였다. 마야 민족은 바빌로니아 민족과 같이 우수한 발명품의 혜택을 누리며 문화제국을 건설했다. 아스텍 민족은 호전적인 아시라이 민족과 나란히 세울 수 있다. 그들은 발달한 한문으로 이익을 챙겼지만, 그 학문은 순전히 권력으로 활용되었다. 527 이런 비교를 계속하자면, 번영의 절정에서 스페인에 의해 목이 잘린 수도 멕시코는 페르시아에 의해 목이 잘린 아시리아의 호화찬란했던 수도 니네베와도 같다. 528

지난 세기 이후 발굴 사례는 10년을 주기로 대폭적인 증가를 보엿다. 다만 무의미한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을 뿐이다. 몇몇 학자들은 오직 한 지역을 발굴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클로드 셰페르는 고대 아시리아의 항구도시 우가리트 발굴에 몰두했고, 독일의 쿠르트 비텔은 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인 하투사스에 평생의 열정을 바쳤다. 

고고학 전문가와 아마추어들이 유물이라고는 나올 것 같지 않은 대도시 중심부나 얼음으로 덮인 산꼭대기에서 발굴에 성공해 대중을 놀라게 하는 일이 거듭 일어났다. 이미 오래전에 알려진 발굴 현장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다시 발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트로이다. 1930susdptj 1939년까지 블레전이 히사를리크 언덕을 발굴한 후, 만흔 사람들이 이제 그곳에 더는 출토도리 유물이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2005년에 작고한 튀빙겐의 선사학자 만프레트 코르프만이 이끄는 국제 연구티밍 1988년에 트로이를 다시 발굴하여 얻은 성과에 전 세계가 다시 한 번 놀랐다. 이때 최초의 공식적인 발굴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과 그의 업적이 학계의 관심을 새삼 일깨웠다. 물론 '프리아모스의 보물'이 숨겨진 은신처에 대해서도 다시 관심이 집중되었다. 보물 보관 장소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모호해졌는데, 마지막으로 자취를 남긴 곳은 베를린 동물원에 판 대공포 벙커였다. 그 후 '프리아모스의 보물'은 1993년에야 비로소 모스크바 푸슈킨 박물관에서 '재발견'되었다.540

1984년 터키 남해안에서 발견한 난파선 덕분에 뜻밖에도 청동기 후기의 무역세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우루부룬 곶 앞에서 침몰한 그 배는 길이악 약 15미터인 범선인데, 아마도 동쪽에서 와서 미케네 서부로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선적된 화물은 특기할 만했다. 10톤이 구리괴와 1톤의 납괴, 즉 청동 생산에 필요한 재료가 정확한 비율로 실려 있었다. 그 외에 레벤테 도자기와 장신구가 있었고, 이집트의 장신구와 유리, 아수르의 인장, 미케네의 무기와 도자기, 심지어 발트 해에서 난 호박 구슬도 잇었다. 귀중품으로는 아프리카 산 오목, 상아, 수정, 마노, 파이앙스, 타조알 세 개가 있었고, 물론 금도 있었다. 이와 같이 울루부룬의 난파선은 청동기 후기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펼쳐진 원자재 무역과 귀중품 교역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최초로 제공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그리스 해안에서 홀로 잠수하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 잠수부가 '푸른 박물관'에서 처음 건져 올린 유물은 암포라(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쓰던 양쪽 손잡이가 달린 단지)였다. 그 잠수부는 용감한 프랑스인 자크 이브 쿠스토였는데, 수중 호흡기를 발명하기도 한 쿠스토는 수중 고고학의 개척자다. 지중해 연안에서 침몰한 고대의 난파선은 수백 대에 이른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 549

그 밖에도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유물의 연대, 출처, 진위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연과학적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연 과학과 정신과학의 경계에 있는 고고지질학에서는 동위원소 분석, X - 선형광분석, 열중성자 연대측정 등의 방법을 실험실에서 성공적으로 활용하고 잇다. 물리학자들이 개발한 지구자기학적 탐광 덕분에 고고학자들은 처음으로 지표면 아래 무엇이 묻혀 있는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주거지인지, 무덤인지, 성벽인지, 위성사진도 이미 지표면의 유물을 분석하고 복원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데, 아수르의 도시설계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모든 현대적인 방법을 통해 고고학 연구는 질적으로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대폭 증가했다. 특정 지역에 대해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연구 자료가 출토되다 보니, 순수한 학문적 작업인 정리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유물은 출토되자마자 박물관이 새로이 매잘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좋은 일도 있었다. 과거에는 밀교와도 같던 고고학이 일반 대중에게도 개방된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일반인들도 고고학적인 문제에 참여하고 있다. 현대인들을 질식시킬 듯한 일상의 문제들은 한걸은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탈진 상태에 이른 현대인들은 과거로 눈을 돌렸고, 지난날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고고학적인 문제에 관한 일반인의 참여는 그 범위가 더 넓어지고 그 요구가 더 절실해졌다. 이런 관심은 이집트에 건설할 댐으로 인해 일부 유물이 안타깝게도, 대단히 안타깝게도 물에 잠길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을 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힘을 발휘했다.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한 유물은 아부심벨의 거대 바위 조각과 거의 100점에 이르는 다른 유물이었는데, 이들 유물은 인류의 가장 오래고도 중요한 미술작품들이다.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 목청을 높였다. 큰 기관에서 작은 학교의 학급에 이르기까지 기금을 마련했고, 유네스코의 개입으로 스무 개가 넘는 국가가 함께 뭉쳤다. 아부심벨을 구하기 위해!

무슨 말을 더 할까?

발굴은 전 세계에서 계속될 것읻. 미래의 100년을 차분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과거의 5000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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