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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7일 14시 05분 등록

1.제목: 난중일기


난중일기.jpg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 출판사: 민음사

- 옮긴이: 노승석

 

2.저자 : 이순신

이순신.jpg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이다. 그런 추앙은 그를 수식하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집약되어 있다. ‘성스럽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지만, 천부적 재능과 순탄한 운명에 힘입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 측면은 악성으로 불리는 베토벤이나 시선이백(李白)과 대비되어 시성으로 지칭되는 두보(杜甫)의 삶과 작품을 생각하면 수긍될 것이다.

 

 

-가계와 어린 시절

이순신은 조선 인종 1(1545) 38(음력 기준)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그와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와 요··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다. ‘()’은 돌림자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는 아들들이 그런 성군을 섬긴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순신이 성군을 만났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의 한 전범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의 가문은 한미하지는 않았지만 현달했다고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의 선조들은 우뚝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관직과 경력을 성취했다. 우선 6대조 이공진(李公晉)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3)를 지냈다. 가장 현달한 인물은 5대조 이변(李邊, 1391~1473)으로 1419(세종 1) 증광시에서 급제한 뒤 대제학(2)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관직을 지내고 82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그런 신하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소속되는 영예를 누렸고, 정정(貞靖)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증조부 이거(李琚)1480(성종 11)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5)과 병조참의(3)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비교적 순조롭고 성공적인 출세를 이어왔던 이순신의 가문은 그러나 조부 때부터 침체하기 시작했다. 조부 이백록(李百祿)과 아버지 이정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당연히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 주요한 까닭은 이백록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간주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기묘사림이 시행한 별과(別科)에 천거된 120명 중 한 사람이었다. 기묘사림에 포함되는 인물들의 명단과 간략한 전기를 담은 [기묘록 속집]에서는 진사 이백록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소했다고 적었다. 이런 가문의 상황에 따라 혼인한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되는데, 외조부 변수림(卞守琳)도 과거와 벼슬의 경력이 없었다.

 

몇 살까지라는 확실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이순신은 태어난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이순신은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뛰어난 인물을 만났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었다. 서로 세 살 차이인 두 사람은 그 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에서 조선을 구원하는데 각각 문무에서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조선 태종의 가장 큰 치적은 세종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듯이, 유성룡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순신을 적극 천거하고 옹호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의정의 혜안은 나라를 멸망에서 건졌다.

 

아직 어렸고 나중에는 상당히 다른 길을 걷게 된 두 사람이 그때 어떻게 어울렸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뒤 유성룡은 신의 집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선조실록] 선조 30127)”고 선조(宣祖)에게 아뢸 정도로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런 기억에 따라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인상 깊게 회고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인생의 방향 등도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유년 시절에만 국한된 관찰은 아니라고 추정되는데, 유성룡이 기억하는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기개가 넘쳤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은 그 눈을 쏘려고 했다는 대목은 어린 아이로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례하거나 거칠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 혼인과 급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그 뒤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아산은 지금 그를 기리는 대표적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와 묘소가 있어 그와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이 풍습은 자연히 부인과 그의 집안인 처가(외가)의 위상을 높였다. 가장 익숙한 사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친정이 있던 강릉(江陵)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 뒤 1565(명종 20)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했다. 장인은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는데, 과거 급제 기록이 없고 군수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그렇게 현달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 1567년 출생), 이울(李蔚, 1571년 출생), 이면(李葂, 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그동안 이순신은 문과 응시를 준비해 왔다. 10세 전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보면 그는 10년 정도 문학을 수업한 것인데, 무장으로는 드물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여러 유명한 시편을 남긴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쌓은 데는 이런 학업이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인 1년 뒤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서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는 유성룡의 회고는 이때의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5년 뒤인 1572(선조 5) 8월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무장으로서 이순신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시작되었다. 그는 1576(선조 9) 2월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그의 나이 31세였으며,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일생 전체가 그러했지만, 이때부터 부침이 심하고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험난한 관직 생활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9)이었다. 동구비보는 험준한 변경이었다. “석문과 사곡은 호랑이들의 소굴로 우리 영토를 엿보네. 골짜기가 갈라져 하늘은 틈이 생겼고, 강이 깊어 땅은 저절러 나뉘었네(石門與蛇谷, 虎穴窺我藩. 峽坼天成罅, 江深地自分)”라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시([동구비보를 지나며(過童仇非堡)], [학봉속집] 1)는 그런 거친 환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 동안 근무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운 뒤 1579(선조 12)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 8)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5)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가 반대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즉각 불리한 인사조처로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많은 위인들이 그렇고 바로 그런 측면이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지만, 이순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처음 표출된 그런 자세는 일생 내내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징비록]에서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고 썼듯이, 그런 현실적 불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역사의 보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4)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때의 사건이었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그러나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권력이나 재력 같은 인간의 주요한 욕망은 궁극적으로 어떤 자리나 직위의 획득과 관련된 측면이 많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높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면 권력이나 재력도 그만큼 팽창하기 때문이다. ‘지음(知音)’이라는 오래된 성어가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그 사람을 알아주고 후원하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며, 그 사람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겨우 9세 차이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했을 때, 부적절한 정실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그 기록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7)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6)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이순신의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3)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2월 진도군수(4)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3)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3)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변방의 말직만을 전전하다가 삶을 마감했을 장수도 분명히 적지 않았을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역정은 수준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앞에 다가왔지만 거의 대비하지 않았던 거대한 국난을 생각하면, 전쟁 직전 그가 북방의 말단 장교가 아니라 남해의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공교로운 천행이었다.

 

-임진왜란-승전과 백의종군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선조 25) 4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2) 선조는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22). 개전 두 달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왜란에서 이순신은 임진년 5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18일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크다고 할만한 고난이 닥친 것은 1597(선조 30) 1월이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그 날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인용자. 이하 같음)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 아들 울(-이순신의 차남),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같은 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喜壽), 이상(貳相,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동지 곽영(郭嶸)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주목하고 뛰어난 통찰력과 감동적인 문장으로 표현했지만, 이 날의 일기는 이순신의 내면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자료의 하나로 생각된다. 일기는 기본적으로 자신만의 내밀한 기록이다. 후세에 공표될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그럴 의도를 담은 일기도 적지 않고 [난중일기]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평가되지만, 그럼에도 이 날 그의 문장은 전율과 놀라움을 안겨준다.

 

그 글에서 작성자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을 적었다. 그동안 승전을 거듭해 국망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갑작스레 압송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은 사람에게서 상상할 수 있는 고통과 억울함과 분노는 철저하게 제어되어 있다. 그는 오직 사실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동했고, 승리의 원동력과 그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는 한 관찰과 평가는 정곡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 짧은 일기는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이순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의종군을 시작한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413). 그는 나흘 동안(416~19)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했다. 이때의 일기, 특히 맨 마지막 구절은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마음을 느끼게 한다.

 

16일 병자.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中方浦)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정유재란-복귀와 전사

 

그동안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16)과 전주(825)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3). 임명 교서에서 국왕은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다.

 

그 함대를 이끌고 한 달 뒤 그는 명량(鳴梁)해전에 나아갔고(916),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그때 그의 마음과 자세는 전투 하루 전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글씨에 담겨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속히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이순신의 절망과 피로는 셋째 아들 이면의 죽음으로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수많은 죽음을 집행했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52세의 아버지는 다시 한번 통곡했다.

 

(10) 14일 신미. 맑았다. ····· 저녁에 사람이 천안(天安)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열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정신 없이 뜯어보니 겉봉에 통곡두 글자가 써 있는 것을 보고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어질지 않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어찌 이렇게도 어그러진 이치가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밝은 해도 빛을 잃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지금 내가 살아있은들 장차 뉘게 의지한단 말인가. 부르짖으며 슬퍼할 뿐이다. 하룻밤을 보내기가 한 해 같다.

 

거대한 전란과 그 전란의 가장 중심에 있던 인물의 생애는 동시에 끝났다. 1598(선조 31) 11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왜란도 종결되었다. 그뒤 구국의 명장을 국가에서 추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604(선조 37) 선무(宣武) 1등공신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책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793(정조 17)에는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고 2년 뒤에는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그는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국가적 시책은 그의 위상에 부동의 공식적 권위를 부여했지만, 견고한 갑각 안에 가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측면과는 달리 이순신의 인간적 내면을 깊이 조명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것은 김훈의 [칼의 노래](2000)일 것이다.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비평과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둔그 소설은구체적인 서사보다는 이순신의 마음과 생각을 추적한 작품이다.

 

작가는 오래 전부터 주관이 배제되고 사실만이 남은 문장을 쓰고 싶었는데, [난중일기]에 그런 문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순신의 마음과 문장을 이렇게 파악했다. “암담한 패전 소식이 육지로부터 전해오는 날, 이순신은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고 썼다. 슬프고 비통하고 곡을 하며 땅을 치고 울고불며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다. 거기에 무슨 형용사와 수사학을 동원해서 수다를 떨어본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를 당할 도리가 없다. 이것은 수사학의 세계가 아니라 아주 강력한 주어와 동사의 세계다.” 그는 그것을 죽이는 문장이라고 말했다.

 

-원균과의 불화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원균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출처 필요]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의 내용에 대한 입장차가 심하며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진위 및 당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 에서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장 제독으로 추앙하는 반면 원균은 조선 수군을 아주 매장한 최악의 무능 제독으로 평가한다.

 

부경대 환경해양대학 이상윤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임란 개전초기 당시 부산 방어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소관이었는데 일본선 7백척이 엄습하자 원균은 전함 1백 척을 스스로 불사르고 남해 노량진으로 도주하였던 바, 이때 전라도 좌측 해상 방어를 맡고 있던 이순신이 원균의 구원 요청에 즉각적인 출격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부산 앞바다의 수백 척에 이르는 일본함대에 맞서기에는 당시 30척의 이순신함대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였고 원균은 이때부터 더욱 이순신을 미워하였다고 했다.

 

-임진왜란 종전과 전사

 

명량 대첩

15971025(음력 916),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333척의 일본 함대 중에서 공식기록이었던 1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노량 해전과 전사

1598년 음력 1118일에 조선 수군 70여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5천명이었다.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음력 11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는 일본으로 빠져나가려던 왜군 500여 척을 상대로 싸워 하룻밤 새 그 절반가량인 200여 척을 격파했다.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정오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계속 추격하였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다가 탄환을 맞았는데 치명상이었다. 그는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전사하였다. 이 때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과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도 함께 전사했다.[16] 당시 도주하던 150여 척의 왜군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 동안 조선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

 

- 이순신이 한말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전선수과 미신불사즉 불감모아의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 명량 해전을 개시하면서

 

此讎若除 死即無憾 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 금일고결사 원천필섬차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마라.

 ─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참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5210

ko.wikipedia.org/wiki/이순신

https://mirror.enha.kr/wiki/%EC%9D%B4%EC%88%9C%EC%8B%A0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해제 >>

 

-10 이순신은 임진년 57일 옥포해전에서 왜적과 첫 교전을 벌여 왜선을 분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 후에도 승전의 기세를 잃지 않아 수년에 걸친 당포, 한산도, 명량 등의 여러 해전에서도 전공을 세울 수가 있었다. 무려7년동안의 일이었는데, 난중일기란 바로 그 기간에 진영중에 있으면서 기록한 진중 일기인 것이다. 곧 임진년 11일부터 무술년(1598) 1117일까지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기록하였다.

 

-11 이순신은 항상 대비하는 정신으로 생활하였다.

 

-11 항시 전투가 따르는 현실속에서 나라를 위해서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긴박한 전쟁중에도 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항상 위기에 대처해기 때문에 수십 차례의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유비무환의 자세가 있었기에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12 난중일기란 이름은 정조때 초고본을 해독하여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할당시 편찬자인 규장각 문신 윤행임과 검서관 유득공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정조의 위대함을 여기서 느낀다. 선조이후 여러왕을 거쳤지만 난중일기가 나올때까지의 많은 시간이 걸렸다.

 

 

-13 난중일기내용은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내용, 공문을 발송한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형한 사건, 장계를 올린 일 등이며, 그 중에는 장계 초안 및 서간문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간간이 삽입되어 있다. (임진, 계사, 갑오일기) 또한 공사간의 인사 문제와 가족에 대한 안부 걱정, 그리고 진중 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 등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로 하였다. 간혹 시와 문을 지어 적기도 하였고, 옛 시문과 병서를 인용한 글과 이순신 자신의 별호인 일심(一心)’을 연습한 낙서도 있으며, 명나라 장수의 이름과 그들로부터 받은 물품 목록도 적혀있다.

 

-21 정조는 임자년(1792) 윤음에서 우리나라를 재건하게 한 황은(皇恩)을 길이 생각하고 우리나라 충신에게 미치어 빗머리에 전자(篆字)를 써서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 “요즘 이충무유사를 읽으면 노량해전을 회상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다리를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을 하게 된다. (중략) 충무가 남긴 사적을 요즘 내각에 명하여 전서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그것이 활자로 인쇄되거든 그 한 본을 이 충렬사에 간직해 두면서 제사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역시 훌륭한 임금은 인재를 알아보게 되어 있다. 그것이 현재의 인물이든 과거의 인물이든 알아내게 된다.

 

<< 임진년(1592) >>

 

 

-49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 계사년(1593) >>

 

-77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한 마음 그지 없네

 

-97 요행과 만일이란 병가(兵家)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병가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의 자세이리라. 요행과 만일을 기대했던 것에서 이런 것은 없는 것이다. 자기가 한 만큼의 결실이 이루어지리라. 허황된 기대에서 벗어나 치밀한 노력에 의해서 진행되어야 하리라.

 

 

<< 갑오년(1594) >>

 

 

-147 작은 이익을 보고 돌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219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 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히라.

 

인재는 주변의 상황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을 탓하기에 앞서서 주변을 살피며 늘 준비를 하려는 자세가 역시 남다르다. 난 이런 상황이면 일찌감치 남탓을 하면서 남도 안하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어 하면서 그만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의를 지닌 자의 뜻은 아무도 꺽지 못하는 것 같다.

 

-219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움에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나를 아는 것의 중요함. 만고의 진리임에도 늘 우선순위에 밀렸는데 이제는 먼저 나를 알아야 하리라. 그리고 적이 아니라 같이 해나갈 수 있는 방안을 찾아봐야 하리라.

 

-222 쓸쓸히 바라보며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흐르네

배를 부린 몇 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누구에게 능히 평정을 맡기리오

배를 몰던 몇 해의 계책은

이제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중원 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 몰아낸 곽자의 사모하네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슬픈 마음은 쓸개가 찢기고

쓰라린 가슴은 살을 에는 듯

긴 한숨 거듭 짓노라리

눈물만 자꾸 흐르네

쓰라린 가슴은 쓸개가 잘리고

슬픈 마음은 살을 에는 듯

산하가 참혹한 빛을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태평세월 이백년에

화려한 문물은 삼천가지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평정을 맡길 인재 없도다

여러 해 바다 막을 계책 세우노라니

중원 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 몰아낸 곽자의 사모하네

 

이순신 장군의 애타는 마음과 힘겨움이 구구절절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자신은 몸이 아픈데도 참혹한 현실을 스스로 딛고 나라를 지키려는 그의 마음이 정말 눈물겹다. 과연 나라의 주인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 을미년(1595) >>

 

 

-257 아직도 요사한 기운을 재빨리 쓸어 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는 분통함을 모두 절감하고 있다.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가 팔을 걷고 절치부심하며 그 놈의 살을 찢고 싶지 않겠는가!

 

-270 선 수사(선거이)와 이별할 때 짧을 시 한수를 지어 주었다.

 

북방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했더니

남방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네

한잔 술 오늘 밤 달빛 아래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의 슬픈 정만 남으리

 

이별의 애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전쟁터에 나가게 되면 생사를 알 수 없고, 다음번에 만나리라는 기약도 없었기에 이런 애절한 마음을 잘 표현하였다.

 

-277 기망하는 말들은 무엇으로도 형상하기 어려우니 천지 사이에는 이 원흉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 병신년(1596) >>

 

 

-316 가뭄이 너무 심했다. 근심과 고민을 어찌 다 말하랴

 

전쟁에 가뭄까지 걱정하면서 국민을 걱정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324 어제 아침 곡포 권관 장후완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평산포 만호(김축)에게 제때에 진에 도착하지 않은 까닭을 문책할 때에, 날짜를 정해주지 않았기에 오십여 일을 물러나 있었다고 답하였다. 해괴하기 짝이 없어서 곤장 서른 대를 쳤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이순신장군의 벌은 곤장으로 처리를 하였고, 군법을 엄히 하려고 했다.

 

-342 원공의 흉악한 행동은 여기에 적지 않겠다.

 

원균의 횡포가 어디까지였기에 이랬는지 더 궁금해진다

 

 

<< 정유년(1597) I >>

 

 

-356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깊은 마음으로 표현하였다.

 

-362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되는 천애의 땅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받는 것인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에도 같은 것이 없을 터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어머니 돌아가심에 대한 슬픔도 큰데, 우는것도 제대로 못하니 얼마나 속이 탓을까. 시대의 안타까움이다.

 

-368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백전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 한다는 것이리라.

 

돈으로 죄의 경중을 다루는 것은 시대가 지나도 남아 있는 악습이다. 돈에 구속되지 않고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을 적당한 곳에 제대로 된 곳에 쓸 줄 알아야 하고, 이런 악습들은 고쳐져야 하리라.

 

-390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원균이 얼마나 심한 짓을 하였기에 살점을 뜯어먹고 싶다는 표현을 하였을까. 상상초월의 인간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고, 그러한 인간들로 인해서 시달리고... 역사속의 굴레는 이렇게 계속 굴러가는 것일까

 

 

<< 정유년(1597) II >>

 

 

-407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시의 군율의 엄중함.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 그 엄중함은 더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416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의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 고 하였다.

 

명량 영화에서 나왔던 강렬한 이미지가 생각이 난다.

그런데 나는 삶에서 지금 죽고자 하는 것일까 살려고 하는 것일까? 그동안 살려고만 하니 죽어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죽고자 노력해서 새로운 나로 거듭나야 하리라.

 

-424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이경에 비가 내렸다.

아들 잃은 슬픔이 구구절절이 녹아들어 있다. 달려가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얼마나 답답함을 느꼈을까! 아들 잃은 아비의 마음이 가슴 아프다.

 

-435 전진(전쟁 진터)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고 하였다. 전진에서의 용감함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법에도 경(,원칙)과 권(, 방편)이 있으니, 꼭 고정된 법만을 고수할 수 없는 것이다. ()은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권도(權度, 방편)를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명량 영화에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우리에게 12척의 배로도 200척을 이길 수 있다고 한 이순신 장군의 대사가 생각난다. 그만큼 전쟁터에서 용감함은 중요한 것이리다. 삶의 전쟁터인 현실에서도 그 얘기는 마찬가지이리라.

 

 

<< 무술년(1598) >>

 

 

-446 나의 임무는 철수하라고 호령함을 맡은 것이었다. 앞에 있는 배들의 함성이 하늘에까지 시끄럽고 대포 소리는 우레와 같아서 호령을 듣지 못하였다.

 

 

 

4. 내가 저자라면

 

지난 달 명량영화를 보고, 난중일기를 기대를 하면서 봤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 명량영화를 다시 보았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더 진한 감동이 왔다.

정유년에 심한 고문을 받고, 백의종군을 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들의 죽음을 맞이등 인생의 한 면으로 봐서는 불행한 일들의 연속이었는데도 그 힘든 상황을 견뎌내고, 12척의 배로 삼백척이 넘는 배를 상대로 싸움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이순신 장군을 보면서 왜 성웅이라고 불렸는지 알 것 같다.

위인들이라고 하면 그의 결과적인 행동으로만 평가되는데 난중일기가 있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강인함 못지않게, 자신의 몸이 아픈것, 어머니에 대한 효심, 아들에 대한 사랑 등 인간적인 면모를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철저했기에 군율은 지엄한 것이다하여 군율에 있어서는 철저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전시 상황이었기에 군율의 준수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한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전선수과 미신불사즉 불감모아의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12척의 배로 진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그 용기는 백배, 천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자신의 목숨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진짜 해보일 용기와 지략이 있을까? 난 용기도 없고 지략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전투만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지략도 없으면서 일단 하면서 헤쳐나가자고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하지 않는 자를 욕하고 있었던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 명량 해전을 개시하면서

 

모든 것을 비우고 임하는 자세와 기세는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금을 욕하고 상황이 안좋다고 시절을 탓하기만 한다. 이순신이 나라를 걱정하고, 시절을 탓하긴 했지만 그는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운명을 알았기에 그 힘든 상황을 타개 하기 위한 노력을 해나갔으리라.

 

 

1) 전체적인 뼈대와 목차

 

 

-목차

역자 서문

해제

일러두기

 

<완역 난중일기>

임진년(1592)

계사년(1593)

갑오년(1594)

을미년(1595)

병신년(1596)

정유년(1597) I

정유년(1597) II

무술년(1598)

 

 

<교감본 난중일기>

교감본 임진일기

교감본 계사일기

교감본 갑오일기

교감본 을미일기

교감본 병신일기

교감본 정유일기 I

교감본 정유일기 II

교감본 무술일기

 

<난중일기 교감기>

교감본 임진일기

교감본 계사일기

교감본 갑오일기

교감본 을미일기

교감본 병신일기

교감본 정유일기 I

교감본 정유일기 II

교감본 무술일기

 

참고문헌

충무공 이순신 연보

찾아보기

 

 

2) 감동적인 장절

 

-219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움에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416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의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 고 하였다.

 

-424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이경에 비가 내렸다.

 

 

 

3) 보완점

개인의 일기를 그냥 해석하다보니 감동이 떨어지는데 완역 형태보다는 역사적 사실과 같이 매칭해서 풀이를 해주면 더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4) 이 책의 키워드는?

유비무환, 필사즉생 필생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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