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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8일 02시 39분 등록

난중일기

1 저자에 대하여-이순신:1545.04.28(인조1)~1598.12.16(선조31)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셨습니다. 지금은 평안하십니까?”

 

어렸을 때부터 가장 많이 듣는 위인의 이름 중 한명일 것이다. 너무 많이 들어 많이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만들어 왜적과 싸웠다는 것 말고는 별로 알고 있는 사실이 없었음에 놀랐다. 그리고 장군은 태어날 때부터 장군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사실은 그도 똑 같은 인간의 내면을 가진 사람임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인간의 길과 장군의 길이 번뇌의 길이었음을 그리고 두려움의 길이었음을 알게 되었기에 그의 용감함이 더 빛이 난다. 삼도수군통제사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었기에 그의 행보 또한 탄탄 대로였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시절은 그것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갖은 모함과 박해, 역경 속에서 일관된 그의 우국지성과 항상 죽기를 각오하고 전장에 나선 장군의 두려움과 용기가 참으로 빛을 발한다.

<순신장군의 출생과 삶>

아버지는 정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의 후손으로 조선에 들어와 주로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이 기묘사화의 참변을 겪게 된 뒤 아버지 정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내 가세도 기울어져 있었다. 1545 3 8(양력 4 28) 당시 한성부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인 상주방씨와의 사이에 회··면 등 3형제와 딸을 두었고, 서자로 훈·신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다.

1576 식년무과에 급제,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부임.

1579 2월 훈련원봉사가 됨,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

1580 7월 발포수군만호가 됨.

1582 1월 군기경차관 서익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첫번째로 파직되었으나 그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봉사가 됨

1583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1월 함경북도 훈련원참군이 됨, 부친사망.

1586 1월 사복시주부에 임명.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자 16일 만에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로 천거됨

1587 8월 오랑캐의 습격에 패한 죄로 하옥.

1589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의 군관이 됨, 조방장, 11월 선전관 겸직, 12월에는 정읍현감이 됨 1590년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만포진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모두 대간들의 반대로 취소됨

1591 2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됨. 부임 후 왜구의 내침을 염려하여 바로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후일 철갑선의 세계적 선구로 평가될 거북선의 건조에 착수함.

<이순신장군과 임진왜란>

1592 4월 옥포해전

1592 5월 합포해전, 사천해전

1592 6월 당항포해전

1592 7월 한산도 대첩

1593 2월 웅포해전

1594 3월 제2차 당항포해전

1594 10월 장문포해전

1597 7월 칠천량해전

1597 8월 어란포해전

1597 9월 벽파진해전, 명량해전

1598 7월 절이도해전

1598 10월 장도해전

1598 11월 노량해전

<이 책을 읽고>

<칼의 노래>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서도 그러기를 기대했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몰입도가 떨어져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지만, 뒤로 갈수록 고뇌하는 장군의 모습에서 <칼의 노래>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아서 이해하기가 한결 좋았다. 어떤 느낌을 쓴다고 하더라도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을 감히 표현하기를 삼가하련다.

이 땅에 피로 얼룩지지 않은 곳이 한 발자국이라도 있을까? 지금 이 시대를 만난 것을 감사하며, 더불어 이 시대를 만들어 주신 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2 내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005 그는 항상 죽기를 각오한 자세로 임전하였으니, 이른바 견위수명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005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나온다

임진년 1592

025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불성실하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031 나라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033 2( 10시쯤)에 영남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의 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036~037 “남해현령(기효근), 미조항 참사 김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김축)등이 왜적의 소식을 한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12시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비록 물러나 피한들 한반도 안이건만, 눈 가리고 세상을 다 가렸다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구나!

044 그러나 한해가 장차 바뀌려 하는데도 아직 적을 섬멸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 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045 큰 적(왜적)이 각 도에 가득하여 무고하게 당한 백성은 몇 십만 명인지 알 수 없지만, 모두 그 독해를 입었습니다. 종사와 도성도 보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면 애통함이 불에 타고 칼에 베이는 것과 같습니다.

046~047 국가가 저 호남과는 마치 제나라의 거.즉묵과 같은 것이니, 이는 바로 온몸에 폐질이 있는 자기 <기맥만 남아 있는> 구하기 어려운 다리 하나만을 간신히 간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장군의 간절함이 그리고 장군의 애 닮음이 느껴진다.

계사년 1593

054 삼도의 군사가 동시에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 웅포에 이르니, 왜적들은 어제와 같았다. 나아갔다 물러갔다 하며 유인했지만,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뒤쫓았으나 잡아 섬멸하지 못했으니, 어찌할꼬!

055 아침 식사 후 삼도의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수사(원균)는 병으로 오지 않고, 전라좌우도의 장수들만이 모여 약속했다. 다만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니, 그 입에 담지 못할 바를 어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 어란포 만호 정담수와 남도포 만호 강응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술을 함부로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욱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얄밉다는 말로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들. 한심한 사람들이로다.

057 사도첨사(김완)을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만호, 녹도가장, 좌우별장, 좌우돌격장, 광양2, 흥양대장, 방답2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매복하게 하고, 모든 배들로 하여금 유인케 하니, 과연 적선 10여척이 뒤따라 나왔다. 경상도 복병선 5척이 재빨리 수없이 쏘아대니, 왜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죽었다. 한 놈의 목을 베고 났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꺽이어 마침내 뒤따라 나오지 못하였다.

059 그리고 우도의 여러 장수들의 배들은 번번치 못한 것을 골라 동쪽으로 보내어 역시 상륙하는 체하게 하였다.   이런 전략으로 왜적들이 당황하여 갈팡질팡할 때 전선을 모아 곧바로 뜷고  들어가니, 적들은 세력이 나뉘고 약해져서 거이 섬멸되었다. 발포의 2선과 가리포의 2선이 명령도 안했는데 돌입하다가 얕은 곳에서(암초에) 걸려 적에게 습격당한 것은 참으로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062 배의 뜸 아래에 웅크리고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 속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그의 마음을, 그의 생각을 1/10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을까?   

066 영해의 여러 성들은 적의 위세만 보고도 달아나 무너지니, 적들이 석권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다. 임금님의 수레는 서쪽으로 옮겨가고 백성은 짓밟히고 살육을 당했으며, 연이어 삼경이 함락되고 종사가 폐허가 되니, 오직 우리 삼도수군은 의리를 떨쳐 죽음을 바치려 하지 않는 이가 없건만 기회가 알맞지 않아 뜻한 바램을 펴지 못하였다.  이제 다행히 명나라 조정이 천하 대장군 도독 이여송을 파견하여 10만 병마를 거느리고 왜적을 소탕하여 멀리 쫒아내고 이미 삼도를 회복하였다고 하는 바, 신하된 자는 너무 기뻐서 날뛰며 무어라 말할 바를 모르고, 또 죽을 곳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위에서는 연이어 선전관을 파견하여 앞길을 막아 숨은 적들을 살육하여 한척도 돌려보내지 않게 하시고, 또 간곡한 하교가 5일만에 재차 이르렀는데, 마침 충심을 떨쳐 한 몸을 잊고 싸울 때를 당하였다.  그러나 어제 적을 만나 지휘할 때 교묘히 피하여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았는데, 너무도 통분하였다. 즉시 마땅히 규율에 따라 처벌하여 했으나 이전 일이 오히려 많고 또한 거듭 명령한 법이 있을 뿐아니라, 더욱 힘을 내어 병가의 일에 힘쓰라고 분부하셨기에 우선 그 죄를 용서하고 적발하지 않았으니 감별(조선 시대에,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에 보내던 공문)안에 갖춘 사연대로 일일이 받들어 행하라.

070 다만 요즘 도내의 인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징발하는 명령을 내릴지라도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와 같으니 어떻게 통제를 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을 늦추고 한번이라도 휴가를 얻게 해준다면 인심이 필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정예한 수군과 잡색군중에 지원하는 자를 모집하여 이들로 하여금 힘을 기르도록 휴가를 가게 하였고, 8월 초에는 모두 거느리고 사또 앞에 달려가서 지휘를 받으려 죽음으로써 결전하고자 합니다. 군량과 군기는 경상도에서 재차 임전했을 때 거의 다 썼으니, 또한 움직이기가 어려운 걱정이 생겼습니다. 사또께서 해가 뜰 때 전쟁에 나아가 국가의 수욕을 참지 못하고 다시 군사를 일으키어 나라의 치욕을 씻어주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심력을 다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건만, 인심을 이러하기만 하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대장의 명령은 오히려 신중히 하여 가볍게 내려선 안될 것이니, 일이 비록 뒤의 것을 생략할 만큼 급속히 해야 할 것일지라도 인심과 형세를 살피고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072 혹심한 더위에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삼가 사모하는 마음 간절한 따름입니다. 전에 앓던 학질과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가뭄과 더위가 이렇게 심하여 강여울도 매우 얕아져서 더욱 적을 도와주게 되었으니, 드디어 독한 왜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는 것을 촛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할 따름이며,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두 번이나 안부 편지를 받고 곧바로 나아가 뵈려고 하였으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억지로라도 달려가려고 하면 증세가 헐어 뭉그러지려고 하여 두려움에 주저하다가 이렇게 돼버렸으니,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또 인심은 이미 무너져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혹 징집에 응하는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혼자서는 나아갈 수 없는 일입니다.

074 분함도 부끄러움도 참을 수 없고, 득실과 성패가 서로 이같이 멀기만 하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군사를 일으켜 국가의 치욕을 씻는 것이 지금에 급급한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신중히 하여 함부로 경솔하게 싸워서는 안될 것입니다. 형세를 살펴보니 근심에 괴로워하며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습니다.

075 요행과 만일이란 실로 병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장군의 철저함이 느껴집니다.

078 ~ 079 요즘 이 도의 인심을 살펴보면, 한번 징집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해도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하고 있으며, 연해의 사람들도 거의 이미 흩어져 달아 났습니다. 또 하는 말이 바닷길을 따라 가서 관서지방(평안도와 황해도 북부)으로 옮겨 간다면 되돌아올 것으로 기약하기 어렵고, 바닷가 땅에서는 방어할 사람도 없으니 앞으로는 적의 소굴이 될 것이며, 부모처자가 다시 만나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심의 이산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었으니, 무엇으로 통제하여 모을 수 있겠습니까.

081 ~ 082 이 곳의 적세는 요즘 다른 흔적은 없고, 연일 정탐해보면 굶주린 빛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뜻이 반드시 곡식이 익으면 이를 저축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방비는 곳곳이 허술하여 도무지 방어하여 지키는 형세가 없습니다. 왜놈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수군인데 수군으로서 싸움에 나서는 자가 없고, 수령이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어도 조금도 감독할 뜻을 가지지 않으며, 군량은 더욱 의뢰할 곳이 없어 온갖 생각을 해봐도 조처할 방도가 없으니, 수군에 관한 한가지 일도 그 형세상 장차 행하기 못할 것입니다. 저와 같은 이의 한 몸은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 나라 일에 있어서는 어찌 하오리까. 전라도에 새로 온 관찰사와 원수조차도 군관을 보내어 연해에 있는 수군의 양식을 곳간째 떨어 싣고 가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도의 먼 바다에 나와 있어서 어떻게 조치 할 길이 없고 사세가 이렇게까지 심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오리까. 만약 특별히 수군 어사를 보내어 수군에 관한 일을 총괄하여 단속하게 한다면 그 형세는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장계를 올렸으나 아직 조정이 의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종사관 정경달이 둔전을 감독하는 일에 심력을 다하였지만, 전 관찰사의 공문에는 관찰사 이외에는 둔전을 계속 경작할 수 없고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하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정경달이 이제는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그 감독하던 일도 앞으론 허사가 될 것 같아 근심스러울 따름입니다.

084 글로 적기를 생각하면서도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세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다시 계속한다.

088 이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자려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닭이 울 즈음에야 선잠이 들었다.

089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 신음하던 중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무르는 것은 무슨 교묘한 술책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았던 차에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더 탄식이 일고 눈물에 잠겼다.

092 수사 원균이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대군을 동요하게 했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흉포하고 패악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놈들이 어딜가나 있지. 지금 이 나라에 원균과 같은 놈은 누구일까?

093~094 예물을 주자,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더니 받고는 매우 기뻐하며 두번 세번 감사하다고 했다. 명나라 관원과 선전관은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았다. 아침에 통역관 표현을 다시 오라고 청하여 명나라 장수가 행하려는 바를 물었다. 그런데 명나라 장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려고만 한다고 하였다.

097 가소롭다. 명나라의 고관이 보낸 화공무기인 화전 1,503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한다니 그 잔꾀가 심하여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남해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수사부터도 그러하니 어찌하랴!

099 막 활쏘기를 하려는데, 비가 많이 왔다. 온 배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어 앉을 만한 마른 곳이 없다. 한심스럽다. 각도의 군사가 많아야 5천을 넘지 못하고 군량도 거의 다 떨어졌다고 했다. 적도들의 발악이 날로 더해 가는데 일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하랴!

100 경상수사 원균이 웅천의 적들이 혹 감동포를 들어올지도 모른다면서 공문을 보내어 토벌하자고 하였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

101 옥과의 향소(수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관)는 전년부터 군사를 다스리는 일을 엄격히 하지 않은 탓에 결원을 많이 내어 거의 백여 명에 이르렀는데도 매양 거짓으로 보고했다. 그래서 오늘은 사형에 처하여 목을 높이 메달아 보였다. 거센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웠다.

102 아침에 왜적을 토벌할 공문을 작성하여 영남수사 원균에게 보냈더니, 술에 취하여 정신이 없다고 핑계대며 대답이 없었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휜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나온다는 말이 이 책의 어디에서나 읽을 수 있다. 장군의 효성이 참으로 감탄할만하다.

107 연일 비가 내려서 적들이 물에 막혀 악독한 짓을 못하는 것을 보면 하늘이 호남지방을 잘 돕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다.

108 “적도들이 진주성 동문 밖에서 무수히 진을 합쳤는데, 큰비가 연일 내려 물에 막혀 있고, 독하게 날뛰며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물이 적진을 침몰시켜려고 하여 적은 밖으로 군량과 구원병을 받을 길이 없으니, 만일 대군이 합력해서 공격한다면 한꺼번에 섬멸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 양식이 떨어졌으니 우리 군사는 편히 앉아서 고달픈 적을 대하는 셈이어서 그 형세가 마땅히 백 번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또한 도와주고 있으니, 수로에 있는 적이 비록 5,6백척을 합하여 오더라도 우리 군사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112 남해로 왕래하는 사람 조붕에게서 “적이 광양을 친다는 말에 광양 사람들은 벌써 관청과 창고를 불질렀다”는 말을 들었다. 그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다.

113 이 날 밤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실은 왜적들이 아니고, 영남의 피난민들이 왜군차림을 가장하고 광양으로 마구 들어가서 여염집을 분탕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왜적이 아니라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주성에 관한 일도 또한 헛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주의 일만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닭이 벌써 울었다.

>전장에 앉아서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가르는 일도 참으로 고되리라. 장군의 단 5분의 휴식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114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의 말에 ‘적도들이 무수히 창원 등지로 가더라’고 했다”하였다. 그러나 남들의 말은 다 믿을 수 없다. 저녁에 오수성이 광양에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광양의 적에 관한 일은 모두 진주와 그 고을 사람들이 그런 흉계를 짜낸 것이다. 고을의 창고는 아무것도 없고 마을은 텅 비어 종일 돌아 다녀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게 되었는데, 순천이 가장 심하고, 낙안이 그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116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장군, 오늘은 무슨 생각으로 밤을 달빛처럼 밝히셨습니까? 장군의 외로움이 그리고 두려움이 은빛 반짝이는 평온한 물결과 함께 느껴지는 밤입니다.

118 저녁에 진주에서 피살된 장병들이 명부를 광양현감(어영담)이 보내왔는데, 이를 보니 비참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탐후선이 본영에서 들어왔는데, 병사의 편지 및 공문과 명나라 장수의 통첩이 왔다. 그 통첩의 내용이 참으로 괴상하다. 두치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게 물리어 달아났다고 하니, 그 거짓말을 형언할 수 없다. 상국(명나라)사람이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말하기에 족하리요. 통탄할 일이다.

120 사도 첨사(김완)가 복병했을 때에 사로잡은 포작 10명이 왜군 옷으로 변장하는등 하는 짓이 심상치 않아 추궁을 하였다. 어떤 근거가 있을 듯하더니 경사우수사(원균)가 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발바닥을 10여대씩 때리고는 놓아주었다.

122 저물녁에 우수사(이억기)가 배에 와서 하는 말이, “방답첨사 이순신이 부모를 뵈러 가겠다고 간청했지만, ‘여러 장수들을 보낼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하였다. 또 우수사 원균이 망년된 말을 하며 나에게 도리에 어긋난 짓을 많이 하더라고 말했다. 모두가 망녕된 것이니,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아침부터 아들 염의 병도 어떠한지 모르는데다가 적을 소탕하는 일도 늦어지고 마음의 병도 침중하여 밖으로 나가 마을을 풀고자 하였다.

125 오늘은 추석이다.

>422년 전의 우리 나라의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석이라는 명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그 때의 조상들은 평화를 누구보다도 바랬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우선적으로 한 끼 배부르게 먹기를 바랬으리라. 음식이 흔하고 모든 것이 흔한 세상에 살면서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 죄스럽다.

130 해가 저무니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서 창문을 닫지 않고 잤더니, 바람을 많이 쐬어 머리가 몹시 아플 것 같다. 걱정스럽다.

132 ○ 하나, 오랑캐의 근성은 경박하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하여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죽기를 각오한 마음으로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므로, 아군의(정예하게 훈련되지 않은) 나약한 무리들을 일시에 달아나니 어찌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할 수 있겠는가.

134 ○ 하나, 지난해 변란이 일어난 뒤로 수군이 전투한 것이 수십 차례나 되는데, 큰 바다에서 교전하면 그 적들은 무너져 파괴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우리는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136 ~ 139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내리는데 마음을 다했는지의 여부를 기회와 사정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혹은 먼저 진격하기를 주장하다가도 돌진하여 싸우게 되는 때가 되면 사랑하는 이를 돌아보고 살기를 탐하여 중도에서 빠지는 자가 있었고, 혹은 공로와 이익을 탐하여 승패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다가 적의 손에 걸려들어 마침내 나라를 욕되게 하고 몸을 죽게 하는 우환을 만든 자가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많이 볼 수 있다.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 이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도 본다.

칼날 휘두르며 이르는 형세가 비바람과 같으니 흉도의 남은 넋들도 달아나 숨고

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 도다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하는 마음 그지없네.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임금의 수레는 서쪽으로 가고 종사는 폐허가 되니 사방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기운을 빼앗기어 백성들의 희망도 절로 끊겼다.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지만 몸소 시석을 무릅쓰고 나아가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어서 몸을 바쳐 나라에 은혜를 갚으려는데, 지금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갑오년 1594

143 숨을 가쁘게 쉬어서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니 감춰진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아침식사 후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두세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역시 장군의 어머님이시다.

145 만호 이여념과 수사의 군관 전윤이 와서 만났다. 전윤이 말하기를 “수군을 거창으로 붙잡아 왔는데, 이편에 들으니 원수(권율)가 방해하려 한다”고 했다. 우스운 일이다.

예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한탄한들 무엇하랴! 여기서 그대로 잤다.

>남의 공을 시기하는 일만 없어도 세상이 이리 어지럽지는 않을 것 같다.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살을 에듯이 추웠다. 각 배에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우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하겠다.

152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심유격이 벌써 화친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수 없다.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져드니 한탄스럽다.

156 영의정(유성룡)의 편지도 가지고 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염려하며 애쓰는 일을 들으니 감개함과 그리움이 끝이 없다.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는 것이었다.

>작은 이익을 보기 위해 큰 이익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157 ~ 158 창평(백유향)등의 수령은 악행을 덮어 주고 포상하도록 고한 것이었다.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나랏일이 이러고서야 싸움이 평정될 리가 만무하다. 천장만 쳐다볼 뿐이다. 또 그 가운데에는 수군 일족에 대한 징발과 장정 넷 중에 둘은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심히 비난하였다. 암행어사 유몽인은 나라의 위급한 난리는 생각하지 않고 담나 눈앞의 임시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남쪽 지장의 억울하다고 변명하는 말만 들으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위하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164 그것을 가져다가 살펴보았더니 명나라 도사부 담종인의 금토패문이었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하였다.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시켜 패문에 대하여 답서를 작성하게 했건만 글꼴이 말이 아니었다. 원수사가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내게 하였지만 그 역시 못마땅하였다. 나는 병중에도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군관 정사립을 시켜 써 보내게 했다.

176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침침하여 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177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저녁에는 큰비가 내려 밤새도록 지붕이 새어 마른 데가 없었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쳐하는데 고생스러울까 매우 걱정되었다.

183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갔다. 작별할 때 마음이 아득도 하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저녁 바람이 몹시 사나와져서 걱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고 그대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헤어졌다.

184 또 아내의 편지에는 면이 더위를 먹어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괴롭고 답답하다.

188 빗발이 삼대 같아서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190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의 평안하심은 알았으나, 면의 병세는 중하다고 하였다. 몹시도 애타지만 어찌하랴. 영의정 유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번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만들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 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더욱 심해서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204 이 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구나, 김양간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하는 뜻이 많이 담겨 있었다. 원수사의 일은 매우 회괘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년을 두고 한탄할 일이다. 군양군수가 병으로 돌아갔는데, 보지 못하고 보냈으니 더욱 유감스러웠다. 10시경부터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206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3년 동안 해상에서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가볍게 나아가 칠 수 없을 뿐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209 하나는 진도군수의 파면을 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군, 육군을 서로 바꾸어 징발하지 말 것과 수령들을 싸움터에 내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뜻은 자못 눈앞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210~211 홀로 앉아 간 밤의 꿈을 기억해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와 눈앞에서 주춤 섰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다.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장군의 절절함이 현몽하였구나!

215 일찍 선봉을 장문포 적의 소굴로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문을 써서 땅에 꽃아 놓았는데, 그 내용은, “일본은 명나라와 바야흐로 화친하고자 하니, 서로 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놈 한명이 칠천 산기슭으로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곤양군수가 불러들여 배에 태우고 물어보니, 영등포 왜적이었다.

216 음양의 조화가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재난이라고 할만하다. 오늘은 아버님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고 홀로 방에 앉아 있으니, 슬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리오.

226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설이다.

228~ 229 왜놈이 두려워하는 바는 수군이지만 수군으로서 싸움에 나서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동류들을 모아 옮겨 다니며 구걸하는 무리가 곤란한 상황에 놓이고 군사들도 양식을 보지 못하고 질병이 또 성하여 사망하는 일이 줄을 이으니, 누차 이러한 내용을 갖추어 원수와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냈으나 조금도 답변이 없었습니다. 임금에게 급히 고한 것도 한두 차례가 아니었으나 또한 시행하라는 명령도 없었으니 백방으로 생각해보아도 방어하여 지킬 길이 전혀 없습니다. 수군의 한 가지 일도 그 형세가 장차 파하여 그만두게 될 듯합니다. 저와 같은 이의 한 몸은 만번 죽어도 진실로 달갑게 여길 것인데, 나라 일에 있어서는 어떻겠습니까. 수군은 사소한 군량일지라도 연해의 고을에 저장해 두었거늘, 관찰사와 원수가 군관을 보내 곳간을 뒤져 실어 갔습니다. 저는 타도의 먼바다에 있어서 미처 조치를 하지 못하여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을미년 1595

239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세웠다. 새벽에는 여러 장수들과 색군들이 와서 새해인사를 했다.

263~264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265 사량 만호(이여념)가 와서 양식이 떨어졌다고 보고하고 바로 돌아갔다.

266~267 조형도가 무고하여 장계하되, “수군 1명에게 날마다 양식 5, 7홉씩을 준다”고 했다니, 인간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놀랍다. 천지간에 어찌 이처럼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272~273 경사우병사(김응서)에게 임금님의 명령서가 왔는데, “나라의 재앙이 참혹하고 원수가 사직에 남아있어서 귀신의 부끄러움과 사람의 원통함이 온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사한 기운을 재빨리 쓸어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있으니 통분하다.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가 팔을 걷고 절치부심하며 그 놈의 살을 찢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하여 진을 치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도리에 어긋난 말을 지껄이는가, 또 누가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높여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호강화하자는 말을 하여, 명나라 조정에까지 들리게 해서 치욕을 끼치고 사이가 벌어지게 했음에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도다.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려도 아까울 것이 없거늘, 오히려 관대히 용서하고 돈독히 타이르며 경고하고 책망하기를 분명히 하였다.

287 북쪽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하더니

남쪽에 와서도 죽고 삶을 함께 했네

오늘 밤 달빛 아래 한잔 술 나누고 나면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지겠구려

>그 이별이 잠깐의 헤어짐인지 생사를 넘나드는 헤어짐인지를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슬픔이 느껴진다.

292 이 날밤 바람은 몹시도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은 대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리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었다.

296 아버지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혼자 앉아서 그리워하니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달랠 길 없다.

병신년 1596

307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를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는 쾌가 나왔다. 다시 점쳤더니, ’임금을 보고 모두들 기뻐하는 것과 같다‘는 좋은 쾌가 나왔다.

새벽 2시쯤 꿈을 꾸었는데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영의정(유성룡)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둘이 다 의관을 벗어 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 걱정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 놓았다. 이윽고 비바람이 억세게 퍼붓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계속하는 사이, 만일 서쪽의 적이 급히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빈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를 되풀이하며 걱정하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

311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또 여벌로 옷 한 벌씩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했다.

322 또 전라도 수군 중에 우도의 수군은 좌도와 우도를 왔다갔다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성원하라는 명령도 있다고 했다. 우스운 일이다. 조정에서 계책이 이럴 수가 있는가. 체찰사가 계책을 내놓은 것이 이렇게도 실속이 없단 말인가. 나라의 일이 이러하니 어찌할 것인가

330 자정쯤에 잠이 들었는데 땀이 흘러 옷을 적셨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잤다.

333 새벽에 부산 사람이 들어왔는데, 명나라 사신(이종성)이 달아 났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336 이날 아침 남녀문을 통해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없지만 다만 믿기 어려웠다. 이 말은 벌써부터 퍼졌었는데 아직은 확실한 기별은 오지 않았다.

339~340 이 날은 어머님의 생신인데 헌수하는 술을 한잔도 올리지 못해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나가지 않았다. 오후에는 우수사가 집무보는 공관에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다. 이날 저녁에 문충공이 부요에서 왔다. 조종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조정이 4월 초1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슬프고도 애석하다.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스스로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생각에서였다.

341 부산의 허내은만의 고목이 왔는데, “가등청정이란 왜적이 벌써 초10일에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갔고, 각 진에 있는 왜적들도 또한 장차 철수해 갈 것이며, 부산의 왜적들은 명나라 사신을 모시고 바다를 건너가려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고 했다.

344 비가 계속 내렸다. 저녁 내내 홀로 수루 위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루이니라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무재등이 만든 화살로 흰 굽에 톱질을 넣은 것이 1천여개, 흰 굽 그대로인 것이 87십여개.

361 늦게 대청으로 나가 활 몇 순을 쏘다가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활쏘는 것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거북이처럼 움츠러들기에 곧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냈다. 저물 무렵 경사수사가 와서 문병하고 갔다. 밤에는 낮보다 갑절이나 앓아 신음하며 밤을 보냈다.

368~369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10시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면 기쁘게 해 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그 고을에 이르니 이호문, 이지남등이 찾아와서 폐단이 오로지 수군에 있다고 말했다.

375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내 옷을 벗어주었다.

정유년 1597

387~388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다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적었다.

친구 오종수가 일을 맡아서 정성껏 해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지 못하겠다. 관에 대해서만은 서운한 생각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군수가 들어와서 행상을 준비해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진심으로 상복 만드는 일 등을 돌봐 주니 슬프고 감사한 마을을 어찌 말로 다하랴.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기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389 일찍 길을 떠나면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394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밖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95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하늘이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 가. 왜 어서 죽지 않는지.

396 (원균)이 온갖 계약을 꾸며 나를 모함하여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401~402 안은 본디 죽을 죄도 아닌데 여러 번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하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지금과 똑같구나!

413 명나라 사람 섭위가 초계에서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 사람 주언룡이 일찍이 일본에 사로잡혀 갔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적병 10만명이 벌써 사자마나 대마도에 이르렀을 것이며, 소서행장은 의령을 거쳐 곧장 전라도를 침범하려 할 것이요, 가등청정은 경주, 대구 등지로 진을 옮기고 그대로 안동으로 가려고 할 것이다”고 했다.

416 저녁에 종 경이 한산도에서 돌아왔는데, 보성군수 안흥국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놀랍고 슬픈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놀라 탄식할 따름이다. 적 한 놈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으니 통탄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하랴.

421 이 밤은 달빛이 대낮 같이 밝아서 어머니를 그리는 슬픔으로 울다가 밤늦도록 잠을 못 이루었다.

새벽에 열과 변존서를 보낼 일로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일찍 아침식사를 하였는데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며 떠나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구례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염려된다.

424 늦게 변의정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는데, 그 꼴이 형편없어 어리석고 용렬해 보였다. 후미진 촌에 사는 사람인지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니라. 그러나 이 역시 소박하고 순후한 모습이다.

425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수군에 있었는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427 점심을 먹은 뒤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와 영등포만호 조계종등 10여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은 이가 없었다. 경사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하던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장의 잘못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430~431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랴, 비통할 따름이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이른 아침에 선전과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440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의 여러 배을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고 했다. 그러고서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1마장쯤 물러나 있었고,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으나, 내 백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차 다가와서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영화를 위해 만든 장면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우습다.

441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것 같으냐?“고 했다.

>도망가도 손바닥 안이거늘, 어딜 가겠다는 것이냐? 여기서 나와 같이 죽자구나! 그것이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는 방법이거늘.

444~445 , 슬프도다, 그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이 떠나고자 했는가. 떠나면 또 어디로 가려했던가. 대저 신하 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를 길은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사의 위태함은 마치 머리털 하나에 천군(3만근)을 매단 것과 같아서, 이는 바로 신하 된 자가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떠난다는 말은 진정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될 것이거늘, 하물며 어떻게 입밖에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강을 위한 계책을 세운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쇠한 몸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되 일의 형세가 여기까지 왔으나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 주장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선 그들의 계책(화친)을 따라 자신이 그 사이에 간여하여 일을 낱낱이 꾸며 맞추어가며 죽음 속에서 살길을 구한다면, 혹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이치가 있을 것이다. 강의 계책은 이러한 데서 나오지 않고 또 나가기만을 구하고자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내맡기고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속정유년

450 아침 식사 후에 길을 떠나 옥과 경계에 이르니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쓰러져 가득하며 남녀가 서로 부축하여 갔다. 그 개탄스런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 하였다.

453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가서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쳤건만, 조정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455 새벽 6시경에 적선 8척이 갑자기 습격하여 여러 배들이 겁을 먹고 후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경을 명령하니, 여러 배들은 회피하지 못하고 적선을 쫓아 단숨에 갈두까지 나갔다. 그러나 적선이 멀리 도망쳤기에 끝까지 따라가지는 않았다.

456 늦게 배설은 적이 많이 몰려올 것을 염려하여 도망가려고 하기에 그 관하의 여러 장수들이 불러서 데려오려고 하였다.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때라서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취할 방법이 아니어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소지를 올렸는데, 병세가 몹시 위중하여 조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육지로 내려가 조리하라고 결재해서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육지로 내려갔다.

458 벽파진으로 돌아와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오늘밤에는 반드시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니 모든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다”하고 두 번 세번 거듭 당부하고 헤어졌다. 10시경에 왜적이 과연 야습을 해 와 탄환을 계속 쏘며 공격하였다. 내가 탄 배가 곧바로 앞장서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온통 흔들렸다. 적의 무리들도 감히 범할 수 없음을 알고 네 번이나 나왔다가 물러났다 하면서 화포만 쏘다가 자정이 지나서는 아주 물러갔다.

460 여러 장수들을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리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61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달아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턴 배는 벌써 2마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지와 현자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마치 바람과 천둥처럼 맹렬하였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고 하였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장면.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장면

462~463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좋아 날뛰면서 “정말,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시체를 토막 내어 적에게 보이게 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었다.

465 병조의 역자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 왔는데, 아산 고향 집이 이미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고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469~470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을 살아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10시경에 비가 내렸다. (중략)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이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다. 이 슬픔을 가늠할 길이 없다. 그저 큰 사람의 가슴이 무너지고 세상이 빛이 꺼졌을 것 같은 헤아림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지 못하는 이 사내는 장군이기 이전에 한 사내이고 아버지인 것을. 그 사내의 슬픔이, 그 사내의 통곡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듯 하다. 시대의 아픔이로구나!

482~483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쫓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진에서 용감하다는 것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아니다. 예법에도 원칙을 지키는 정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으니, 꼭 고정된 법만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방편을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유지와 함께 고기반찬을 하사하셨는데, 마음은 더욱 비통하였다.

무술년 1598

502 이날 밤 삼경(자정 경)에는 이순신이 배 위에서 꿇어앉아 하늘에 축원하기를, “오늘은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원컨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축원을 마치고는 스스로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노량으로 진군하였다.

>항상 죽기를 각오한 자세로 임전하였으니….오늘 밤은 장군의 죽음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고 싶습니다. 이제 편안하신지요?

503 그리고 친히 시석을 무릅쓰고 손수 스스로 북을 치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아 쓰러졌는데, 운명하기 직전에 휘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도독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져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하였다. 그리고 남민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기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할 적에는 남중(영남)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 와서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계상(고을 경계 위)에까지 통곡의 행령이 끊이지 않았다.

505 나는 진실로 장군의 마음을 아나니 어찌 화를 두려워해서 삶을 가벼이 한 것이랴, 진실로 적을 섬멸하여 임금에게 보답하였으니 비록 만번 죽을지라도 그 또한 광영된 것이네.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은 백성을 섬기는 것과 같다던 명량의 대사가 생각난다. 이 대사를 소위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심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508~509 남쪽을 바라보면 아득하기만 하여 어디에 호소할 길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이 사람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을 생각하면 슬픔과 근심만이 가득하고 병이 심하여 글쓰기조차 어려워 갖추지 못했습니다. 다만 존체를 잘 보전하시어 멀리서 바라는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라나이다. 삼가 바라건데 마음이 어지러워 갈피를 못 잡고 두서없이 쓴 것을 살펴주십시오.

510 삼가 생각건대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장벽이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국가가 없는 것입니다.

>호남의 의미가, 호남의 정체성이 이것이었구나! 오늘은 호남인들이 부럽다.

3 내가 저자라면

연구원의 책을 읽으면서 북리뷰를 가장 하기 힘들었다. 장군의 심정을 나의 말로, 나의 글로 표현하는 것이 두려웠다. 다 표현할 수 없을뿐 아니라, 군더더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두려움과 아들로서의 효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애정이 저마다 제 자리에 있기 힘들었다. 장군으로서 살기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었으며, 이리 저리 도망가고 싶었던 마음 또한 장군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도망가 목숨을 부지한들, 그 삶 또한 죽음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장군을 알고 있었기에 도망갈 수 없었다. 괴롭지만 장군으로서의 삶을 선택했고, 그 선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장군의 삶 아니었을까? 나는 무슨 복으로 지금의 세상에 태어났단 말인가?

<목차와 차례>

임진년

계사년

갑오년

을미년

병신년

정유년

속 정유년

무술년

<좋았던 장과 절>

정유년, 속정유년, 무술년이 마음을 많이 후벼 파는 구나!

469~470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을 살아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10시경에 비가 내렸다. (중략)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이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다. 이 슬픔을 가늠할 길이 없다. 그저 큰 사람의 가슴이 무너지고 세상이 빛이 꺼졌을 것 같은 헤아림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지 못하는 이 사내는 장군이기 이전에 한 사내이고 아버지인 것을. 그 사내의 슬픔이, 그 사내의 통곡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듯 하다. 시대의 아픔이로구나!

502 이날 밤 삼경(자정 경)에는 이순신이 배 위에서 꿇어앉아 하늘에 축원하기를, “오늘은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원컨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축원을 마치고는 스스로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노량으로 진군하였다.

>항상 죽기를 각오한 자세로 임전하였으니….오늘 밤은 장군의 죽음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고 싶습니다. 이제 편안하신지요?

505 나는 진실로 장군의 마음을 아나니 어찌 화를 두려워해서 삶을 가벼이 한 것이랴, 진실로 적을 섬멸하여 임금에게 보답하였으니 비록 만번 죽을지라도 그 또한 광영된 것이네.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은 백성을 섬기는 것과 같다던 명량의 대사가 생각난다. 이 대사를 소위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심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보완점>

1 임진왜란의 전쟁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요약한 페이지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2 그 시대의 지도가 첨부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3 역자주에서 난중일기 필사본분석과 문맥교감을 병행하여 번역한 것을 구분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기록의 힘은 위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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