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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8일 10시 36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나는 영웅의 여정 이전의 그가 어떤 씨앗을 숨기고 살아왔으며, 어떻게 영웅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관심이 많다. 난중일기를 기록하기 전의 이순신은 어땠을까?

 

이순신은 1545 4 28일 한양의 건천동에서 출생했다. 이정(본관:덕수)과 초계 변씨 사이의 4 1여 중 셋째 아들이었다. 그가 태어난 집터는 현재 명보극장과 가까운 곳으로, 서울의 충무로역과 을지로3가 전철역을 있는 길 위에 위치한다.

 

같은 동네에 살았고, 평생 순신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유성룡은 어릴 적 이순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일화가 있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컸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유난히 능했다.”

 

그의 아버지 이정은 자신의 아버지(이순신의 할아버지) 백록이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충을 겪은 후, 아예 벼슬을 외면하고 산 인물이다. 그리하여, 아예 서울을 떠나 아내의 친정이 있는 아산의 백암리, 현재 현충사가 있는 방화산 기슭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다른 양반집 자제들과 마찬가지로, 이순신 또한 두 형과 함께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22살부터 시작한 무술이 그의 관심을 더 끌었던 듯하다. 당시 사회가 무()를 천시하는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무인으로서의 길을 택한다.

 

이순신은 이웃 동네에 살던 전 군수 방신의 딸과 21세에 혼인하고, 이 상주 방씨 부인과의 사이에 3 1녀를 두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한 명의 아내가 더 있었는데, 바로 무과에 응시하여 낙방한 후 얻은 해주 오씨이다. 그녀와의 사이에는 22녀를 두었다. 28살에 처음으로 무과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낙방을 하고 만다. 하지만, 4년 후에 다시 도전하여 병과 4등으로 급제하였고, 그 해 12월에 한남 삼수 동구비보의 권관에 임명되었다.

 

3년의 임기를 오지에서 보낸 그는 35세에 서울로 돌아와 훈련원의 봉사로 재직한다. 이때 그에게는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데, 다름 아닌 자신의 상관인 병조정랑 서익이 제의한 부당한 인사청탁을 거절한 것이다. 이에 서익은 나쁜 감정을 갖게 되고, 후에 결국 보복을 당하게 된다. 이처럼 곧은 이순신은 결국 서울 생활 8개월 만에 다시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그리고 9개월 후 전남 고흥읍의 발포(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만호로 수군과의 인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서익이 이순신을 모함하는 장계를 올린 것으로 인해 결국 파면되고 만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다행이 다음해 5월에 복직되어 한 동안 일 없이 지내다가 이듬해 5월에 다시 훈련원 봉사로 임명된다. 훈련원에서 14개월을 보낸 그는 함경도 남병사의 군관으로 북청에 부임했다가 3개월만인 10월에 경흥 건원보의 권관에 임명되었다. 1583 10월에는 여진족 추장 울지내를 잡는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포상을 받기는커녕 이 일로 북병사 김우서의 모함을 받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한다. 같은 해 118, 그는 아버지 이정은 죽음을 맞이하나, 이순신의 이를 다음해 1월에야 알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와 3년 상을 치렀다.

 

탈상을 마치고는 사복시 주부로 임명되었다가,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16일 만에 조산보 만호로 임명된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한다. 그리나 여진족의 침입으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생기자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첫 번째 백의종군을 명 받는다. 이런 부분까지 보면 그는 그다지 탄탄대로로 잘 풀린 군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1588 1월 백의종군이 해제되었고, 6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지내다가 이듬해 2월 전라감사 이광의 부름을 받는다. 군관겸 조방장 자리였는데, 이것이 그가 상관에게 인정받는 첫 무대가 된다. 같은 해 12월에는 정읍 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이때부터 온전하게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된다. 그의 어머니와 두 형이 남긴 조카들과 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2 2월에 그는 진도 군사로 발령받는다. 그런데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 가리포(완도) 첨사, 전라좌수사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승진의 단계를 무시한 발탁이었는데, 유성룡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213,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자리인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부임하게 된다.

 

1592 4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그 해 1 1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인 1598 11 17일까지 7년 동안의 병영 생활을 몸소 보고 듣고 행한 대로 일기에 남겼다.

 

1597 10 25,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333척의 일본 함대 중에서 공식기록이었던 1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1598년 음력 11 18일에 조선 수군 70여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5천명이었다.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과 함께 1598년 음력 11 19일 새벽부터 노량 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도독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는 일본으로 빠져나가려던 왜군 500여 척을 상대로 싸워 하룻밤 새 그 절반가량인 200여 척을 격파했다.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정오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계속 추격하였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다가 탄환을 맞았는데 치명상이었다. 그는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전사하였다. 당시 도주하던 150여 척의 왜군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 동안 조선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 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충무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를 세웠다. 1688(숙종 14)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오늘날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복식이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각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과 함께 1,2위에 선정된다.

 

2. 가슴을 무찔러 들어오는 구절

 

임진년 (1592)

60. 선창으로 나가 쓸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 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2천여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서 우후 이몽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함께 새 봄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 나는 이순신 장군도 경치를 구경하고, 장관이라며 감탄하는 것이 자못 신기했다. 아름다움을 즐기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어떤 능력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여유를 갖는 것이 사람을 더 깊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아닐까? 마치 예술가의 눈으로 말이다.

 

계사년 (1593)

93. 이 날 영남에서 옮겨온 귀화인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 등이 명부에 오른 격군 80여 명이 고망갔다고 보고하면서도, 뇌물을 많이 받고 붙잡아 오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군관 이봉수, 정사립 등을 몰래 파견하여 70여명을 찾아서 각 배에 나눠두고, 김호걸, 김수남 등을 그날로 처형했다. - >>덤덤하게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기분이 어땠을지?

98. 유지는 그 자체가 곧 왕명

100. 얕고 좁은 곳에 걸려 적에게 습격 당한 것은 매우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101. 원수사는 그 흉악하고 음험함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102. 경상수사의 군관과 가덕 첨사의 사후선 2척이 섬 사이를 들락날락하는데, 그 하는 꼴이 황당하므로 묶어서 영남수사(원균)에게 보냈더니 수사가 크게 화를 냈다. 그의 본뜻은 군관을 본어 어부가 건진 사람의 머리들을 찾아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 원균 너무 심하다. 사실 윗사람이 저러고 있는 것을 보면 더 꼴보기가 싫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게 아랫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건가? 아니면 그것이 자기 나름대로 오래 직장?생활을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건지 민폐다. 스스로에 대해 냉정하게 봐주었으면 좋겠다.

103. 원균이 공로를 탐하여 백성의 머리를 베어다가 왜적의 머리로 보고하였다. 2 28일자에 원균의 군관들이 섬을 오간 것도 그러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104.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북로(함경도)로 간 왜적들이 설한령(함남 평북 사이 총전령)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개성까지 왔다가 평안도로 되돌아갔다는 기별이 왔다. 통민한 심정을 이길 길 없다. >>전쟁 전체를 굽어보고 슬퍼하다

106. 원영공(원균)도 왔다가 크게 취하여서 돌아갔다. –

>>반면 이순신은 이런 쪽에 정말 관심이 없다. 그는 소위 말해서 아첨 같은 것을 하는 편이라기 보다는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하긴 이순신의 내력을 조사하다보니 그가 매우매우 강직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이순신도 나름대로 찾아내게 된 거라 생각된다.

 

112-113. 대장의 명령은 오히려 신중히 하여 가볍게 내려선 안될 것이니, 일이 비록 뒤의 것을 생략할 만큼 급속히 해야 할 것일지라도 인심과 형세를 살피고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기획은 일의 순서와 경중을 잘 따져야 한다. 그러나 크고 작은 것들이 뒤로는 모두 하나로 엮여 있어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가 무척 많다. 아무리 잘 생각해보아도 쉽지가 않다. 여러 사람의 말을 잘 들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 정리된 문구다.

 

129.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오래 체류하는 것은 교묘한 계책을 내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던 차에 일마다 이와 같으니, 더욱 더 탄식이 일고 눈물에 잠겼다.

140. 전년부터 옥과의 향소는 군사를 다스리는 일을 신중히 하지 않은 탓에 결원을 많이 내어 거의 백여명에 이르렀는데도 매양 거짓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오늘 사형에 처하여 효시하였다. 거센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웠다.

>> 일모도원, 해는 저무는데 갈길은 멀다. 도와주는 사람은 주변에 없다.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마음이 일어난 모양이다 .

149. 밤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고 홀로 뜸 밑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혼자 있는 시간을 꼭 확보하려 했던 것 같다. 그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으로, 시간을 들여 당면한 것들을 생각해보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다양한 시선에서 바라보는 방법을 몸에 들이는 것도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와도 잘 맞을 것 처럼 보였다.

159-160. 원사(원균)가 망녕된 말을 하며 나에게 도리에 어긋난 짓을 많이 하더라고 말했다. 모두가 망녕된 짓이나,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아침부터 아들 염의 병도 어떠한지 모르는데다가 적을 소탕하는 일도 늦어지고 마음의 병도 침중하여 밖으로 나가 마음을 풀고자 하였다.

165. 원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로 가기를 독촉하였다. 참으로 음흉하다고 할만하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다 내 보내고 다만 7,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다 이따위이다.

>> 아무래도 원균은 상사로 모시고 일하기 힘든 성격이다. 그는 아무것도 지원해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돕는 상사다. 아마도 원균의 관심사는 직접적으로 공을 세우는 것보다 자신을 내치지 않게 자기의 상사들을 묶어두는 것인 것 같다. , 원균은 자신의 명예를 오래 보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은 것 같다. 그러니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음해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의 입지를 좁게 만드는 형세다.

171. 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도다. 만 번 죽을지라도 한 번도 살기를 돌아보지 않고 분하고 분함이 그치지 않는다.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남자다 진짜

172. 추악한 적에게 함락된 지 장차 두 해가 되어 가는데 국가를 회복할 시기는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 읽을수록 익숙한 것과의 결별 생각이 많이 났다.

 

갑오년 (1594)

216.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가는데 이별하는 심회가 그윽하다.

218. 아내의 언문 편지에는 어들 면이 더위 먹은 증세로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마음이 애타고 답답하다.

>>아이들을 깊게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분명 그는 이런 심정에 대해 아들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눈빛이 그려지는 듯 하다.

223. 궂은비가 내리고 큰바람이 부는데 종일 그치지 않았다. 울이 가는데 어려울 것 같아 염려되었고, 또 면의 병이 어떠한지 궁금하였다.

233.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간의 인사를 마치고서 함께 이야기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었다. 원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가소로웠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 밑에 훌륭한 장수며 공을 세운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고 한다.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도 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을 열세로 몰아갔던 것은 선조에게 아주 큰 책임을 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좀 이야기가 다른 데로 셌는데,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쨌든 목적이 같은 사람들은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오해든 뭐든 풀리기 마련인 것 같다.

238. 삼 년 동안 해상에서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다만 험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 때문에 가볍게 나아가지 않을 뿐이다.

>>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고보면 신뢰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 나가서 아무리 잘 싸우고 있고,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줘본들 그 효과가 오래가지 못한다. 못난 선조!

245.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칠 일이 길한지 점을 쳤다. 첫 점은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는 것이었고, 다시 점을 치니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점도 치고 꿈도 쓰고. 그리고 좋게 나오면 안심하고. 나쁘게 나오면 떨치기 힘들어 한다. 좋은 징조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매사에 그런 방식으로 외물을 대한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기회가 보인 걸 수도 있다.

257. (운명을) 피하기 어려움

>> 그것은 이미 적혀 있으므로. 이미 바꿀 수 없기 때문에.

 

257.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배를 더욱 늘리고 무기를 만들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257. 삼가 생각건대 살고 죽는 것에는 상도가 있으니, 정해진 운수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이 장차 이르려고 하는데 저의 충정을 다하고자 합니다.
>>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음으로 임하면 살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너는 무엇을 지킬 것이냐? 무엇으로 남고 싶은가? 거기에 자유라고 대답한다면 너무나 연약한 답변이 될 것이다.

258.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백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번 이기고 한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 불변의 정론이다. (손자)

 

을미년 (1595)

268. 경상수사 원균이 선창에 왔다는 말을 듣고, 순천부사가 공사간의 인사를 하려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가 잠시 후에 불러 들였다. 이들과 함께 좌석에 앉아 술을 권할 때 말이 매우 잔혹하고 참담했다.

268-169. 삼경에 꿈을 꾸니 선군께서 와서 분부하기를 “13일에 회를 초례하여 장가보내는데 알맞지 않는 것 같구나. 비록 4일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는 완전히 평소 때와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일기초)

285. 도망한 왜놈 망기시로가 우거진 풀 숲 속에 엎드려 있다가 붙잡혔고바로 망기시로를 압송해 오게 하고 삼도에 나누어 맡긴 항복한 왜놈들을 모두 불러 모아 즉시 머리를 베라고 명하였다. 망기시로는 조금도 난색이 없이 죽으러 나왔다. 참으로 독한 놈이었다.

289. 비가 퍼붓듯이 오는데 종일 그치지 않았다. 혼자 대청 가운데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배영수를 불러 거문고를 타게 했다. - “나는 그에게도 인간적인 한계가 존재했다는데 안도했다. 인간이 없는 영웅이었다면, 사랑하거나 존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병신년 (1596)

359. 우수사와 경상수사도 함께 앉아서 아우 여필이 가져온 술에 함께 취했다. 가리포 첨사와 방답 첨사도 같이 마셨는데,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이날 밤 바다에는 달빛이 차갑게 비치고 티끌 한 점 일지 않았다. 다시 땀을 흘렸다. - “풍류

374. 편을 갈라 활을 쏘았는데, 경상순찰사 편이 162점이나 졌다. 종일토록 매우 즐겁게 보내고 촛불을 켜들고 돌아왔다.

375. 새벽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보니, ‘화살을 멀리 쏜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삿갓을 발로 차서 부순 것은 삿갓이 머리에 써야할 것이나 발로 걷어 채인 것이니, 이는 적의 괴수에 대한 것으로서 왜적을 모조리 무찌를 징조라 하겠다. - “꿈의 기록 점치기

 

정유년 I (1597)

411. 한밤중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429. 이날은 여필의 생일인데 혼자 변방에 앉아 있으니 품은 생각이 어떠하겠는가.

437. 종 경이 물건을 사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종 경이 돌아왔다.

442. 저녁에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어머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더욱 심하여 밤이 깊도록 잠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445. 소나기가 급히 쏟아졌다. 아들 열이 떠나가는데 고될 것을 많이 걱정하여 침묵의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

446. 나는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447. 노량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볼어 왔기에 패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 “리더십의 핵심 = 모범

451.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 “전시의 꿈 중 뒤숭숭한 것이 많은 모양

455.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456-457.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게 하니, 군중의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459-460.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무려 2백여 척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향해 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3여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 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460. 중군의 영하기(군령 내리는 기)와 초요기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왔다.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 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고 하였고, 다시 불러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과 교전하는 사이를 곧장 들어가니,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고, 안위의 격군 7,8명은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니 거의 구할 수 없었다.

 

정유년 II (1597)

477.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만 적합하고 곤임(장수)을 맡길 수 없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478-479.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잇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81. 이번 일은 실로 천행이었다.

486. 이날 밤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 한 점 일지 않는데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뒤척거리며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었다.

486-487.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통곡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이경에 비가 내렸다.

487.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통곡하지도 못했다.

 

 

3. 내가 저자라면

사려 깊은 무게감. 글은 글쓴이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담담하고 섬세한 성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하다. 무슨 말이 필요한지? 난중일기를 읽는 내내 이 담담한 저자와 대화를 해볼라 했는데, 내가 지닌 모든 부침이 사실은 견딜만한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 안정적인 묵직함에도 나름의 감정의 높낮음은 있다. 한번 활쏘기 시합을 해서 정말 잘 쏘았을 때는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스코어를 자세하게 적기도 하고, 어디서 조선군이 지고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비통해하기도 하고, 전쟁의 참상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는 것도 읽힌다. 그럼에도 여전히 장군님 앞에서는 별로 이야기할만큼 대단한 게 많지 않다. 설령 나는 그 소용돌이 중앙에서 마구 휘둘리고 있을지라도.

 

아쉬운 점이라면, 난중일기는 담백함이 특징이지만, 사건이 다소 담담하게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사실 전쟁이야기는 조금 사건 중심으로 재구성되었을 때 더 도드라지게 표현될 수 있는 부분임에도 그 부분이 아쉽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고증과 수많은 이야기꾼들의 과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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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1 10:35:53 *.246.146.22

담백하죠... 그만큼 행간에 쓰인 인간 이순신의 고뇌가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고...

딱 한번 빵! 터진 대목이 있는데, 꿈 속에서 첩이 바람폈다고 기분 나빠하던 대목.

아! 이장군도 사람이었구나 싶어서. ^^

이순신 장군에 관해서라면 역사와 야사가 얽혀 어제 일인듯 얘기되던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지라 난중일기는 참 의미깊은 기록이더라구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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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6 08:34:45 *.50.21.20

맞아요. 글자 사이에 숨어있는 인간적인 고뇌에 숙연해지고, 읽는 사람도 어쩐지 아프고...ㅠ

저도 통영에 갈 때마다 친근한 느낌이 들었는데,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면 더욱 가깝게 느껴지실 것 같아요. 

부족한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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