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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5일 00시 22분 등록

백범일지

1. 저자에 대하여

 

김구.

 

그는 거북이를 닮았다. 본명 창수에서 거북 구자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구절에서 나는 무릎을 쳤다. 그것참 요새 대세 아이돌들만큼 이름을 착착 달라붙게 지었다. 사실 백범일지를 보기 전까지는 잘 모르는 위인이라고만 생각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나라 잃은 김구 표정이라는 관용어에 등장하는 뭐 그런 정도의 인용만 있었을 뿐이었다. (사용례: 어제 소개팅 했는데 소개남이 내 얼굴을 보고 나라 잃은 김구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백범일지를 읽고 나니, 뭐 이런 대단한, 감당은 안될 것 같지만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며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백범일지를 읽고 김구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호불호가 나뉘는 것 같지만, 나는 지금 이 시점에 백범일지를 읽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계 연수로 2주를 밤낮없이 놀고 공부하고 왔더니 도저히 뭔가 제대로 해볼 의욕이 없었는데, 그의 일지를 읽으며 아주 설렁설렁 하고 있던 마음을 다시 벼리게 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직업을 시간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종교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시작하는 사람이 몇 안되어 온갖 직책을 다 맡아 하다가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됐다.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구안동김씨의 익원공파이나 대단한 집안은 아니었고 그냥 평민 수준의 가정생활을 하였다. 유년시절 이름은 김창암이었으나 1893 18살에 동학에 입교하면서 이름을 김창수로 바꿨고, 이후 191237세때 비로소 김구로 개명했다. 구 자도 龜에서 로 바꾼다.

 

젊은 김구(당시 김창수)시절 치하포 사건이 큰 비중을 차지 한다.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여관방에는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 있었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중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폭행한 뒤 살해했다.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감옥에서 김구는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김창수가 재소자에게 옥에서 글을 가르치면서 감옥이 서당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일부는 김창수에게 밥을 얻어먹을 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글공부에 참여하였다. 간수의 소개로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

 

1898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풀밭과 걸식, 민가에 숨어 생활하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하은당을 은사로 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형문을 받았고,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17년 형은 5년으로 감형되어 1916년에 출감했다. 1912년에는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를 구()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

 

19193·1운동 직후 김구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다. 9월 통합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김구는 임정 내무부 경무국장에 취임하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하였다. 이후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계획했다.

 

1940 3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병사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석(主席)에 선출되었다. 그해 승인거부되었던 구미외교위원부를 다시 승인하고 이승만을 구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9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되었고, 그해 9월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1945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인()이 폐질환으로 병사했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1945 8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광복 소식을 접했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11 4일 장제스 중국 총통은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전별식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에게 명하여 미화 20만 달러(현시가 20억여 원)의 금액을 김구에게 전달했다. 수십년간 대일항전의 동지로 지내온 김구에 대한 최후의, 가장 파격적인 지원이었다. 장제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김구에게 20만달러라는 거액을 쥐어준 데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 향후 일종의보은’을 다짐받는 의미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김구는 이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실패했다. 당시 김구·김규식 등은 임정 대표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다. 해방과 함께 정권을 인수한 미군정이 또다른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여운형, 박헌영과 인공 내각의 견제를 위해 임시정부가 정부 의 명칭을 쓰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미군정은 김구의 개인경호원과 광복군에게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하였으나 장제스가 준 돈 20만 달러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945. 12월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

 

1949 6 26, 12 36,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절명하였다. 안두희가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사망 당시 김구의 나이는 향년 74세였다.

 

2. 가슴을 무찔러 들어오는 구절

23. 우리 집안의 내력을 살펴보면 문사도 없진 않았으나 높이 떨친 경우는 찾아볼 수 없고 대체로 불평분자가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짜 어사질로 체포되어 해주 관아에 구속되었다가, 어느 서울 양반의 청탁 편지로 겨우 형벌을 면하였다고 한다.

>> 최하위 계층까지는 않았으나, 김구 선생의 경우 집안이 양반은 아닌 상놈의 집안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자신의 출신 때문에 어디서 기가 죽거나 하지 않았던 것이 무척 신기했다. 좋은 자신감이라고 생각되었다.

 

24.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 알밤 태몽이었구나. 자서전에 태몽을 적어둔 것은 처음 보았는데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24. 집안 어른들은 아버님께 소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 용마루로 올라가 소 울음소리를 내라고 했지만 아버님은 선뜻 따르지 않았다. 할아버지 형제분들이 다시 호통을 쳐서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난 후에야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 역자주에 따르면 난산일 때 산모의 고통을 나누기 위한 평안도, 해서지방 의식이라고 한다. 통일이 된다면 이런 것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려나? 생각했다.

 

24. 나는 서너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어머님께서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와 같이 대나무침으로 따고 고름을 파내어서 내 얼굴에 마마자국이 많다.

>> 김구 선생의 사진을 보면 얼굴이 좀 얽어있는 것이 느껴졌었는데, 그 원인을 알게 되어 재미있었다. 어렸을 때의 일을 부모님과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또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26. 13역자 백범은 가난하지만 사촌들이 일찍 죽어 가문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나중에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백범과 그의 부모는 7대 독자라 주장하였다.

>> 당시에는 아들을 더 귀하게 여겼으니, 7대 독자라면 무시무시하게 귀한 아들이었겠다. 고단한 삶이 시작되려는 낌새가 느껴진다.

 

27. 아버님이 사람을 잘 때리셨던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고 순전히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 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 김구의 의협심이 아버지의 경우에는 좀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물렀던 것 같다. 그러나 가정적인 아버지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구는 시대의 불만을 풀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인데, 그러는 과정에서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양해를 구해야만 하는 삶을 살았다. 비슷한 기질의 아버지는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정도의 규모였으니 말이다.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과 같은 성격이라는 표현은 김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33. 그러나 통감, 사략을 읽을 때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으리오라던 진승의 말, “칼을 뽑아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행동, “빨래하는 부인에게 밥을 얻어먹었다는 한신의 사적등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양어깨가 들썩거렸다.

>> 공감이 많이 되는 부분이었다. 오래된 책을 읽는 것이 이래서 좋았던 것 같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떠올릴만한 인물과 사건 하나만 기억하고 있어도 나를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 놀랍다. 사람의 용기란 작은 것으로부터도 비롯될 수 있는 것 같다.

 

39.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 관상을 공부하려다 그만두게 된 이유가 내 상이 너무 못나서라니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년시절 부분을 읽을 때면 김구 선생의 약간 엉뚱함?이 적나라하게 나타나서 즐거웠다.

 

62. 고선생이 저처럼 나를 사랑하지만, 참으로 내게 저토록 고명한 선생의 사랑을 받을 만한 소질이 있는가? 내가 선생의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 해도 종전에 과거니 관상이니 동학이니 하던 것과 같이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한다면, 내 자신이 타락됨은 둘째요, 고선생과 같이 순결한 양반에게까지 누를 끼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 그래요. 맞아요. 그런 마음 들죠. 잘해야 되는데. 내가 그만한 사람일까?

 

62.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 실패하고 실수하고 그러면서 자기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지.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다시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좀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다. 그게 인생이라 생각된다.

 

63.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듯하였다.

>> 괜찮은 방식이다. 기질은 강점을 더욱 개발시킬 수 있는 훈육이 좋으나, 경서로 채우는 지덕체의 경우는 비어있는 곳을 채워 온전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

 

65. 자기 지위를 보전할까.

>>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으로 많은 참극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깨닫는다.

 

 

94.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 그렇다.

.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 현실 직시를 하는데 자문자답이 즉효다.

 

100. 아버님도 다시 강권을 아니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

>> 이쯤 되면 김구도 대단하지만, 대단한 부모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신변을 고려하지 않는 사랑? 아들에 대한 믿음? 헌신? 이런 것들을 완전히 넘어서는 부성애라는 것이 느껴졌다. 부모의 영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15.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실사구시, 박지원 때도 나왔었지만, 가치평가와 더불어 일상을 이롭게 하는 것에 모든 학문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읽기 전과 후가 변하지 않는 학문은 가치가 없다. 일상을 개혁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것은 부지런히 모방해야 한다.

 

135. 인천감옥 특별방에서 2년 동안 지내던 연극의 1막이 내리고 지금은 방앗간 잠으로 제2막이 열리는구나.

>> 탈옥했다는 것은 평생 도망 다녀야 할지도 모르는 운명을 의미하는데 그는 그런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다. 앞으로 밖에 달릴 줄 모르는 바퀴 같다. 삶을 비관하지 않는 것은 김구의 큰 장점인 것 같다. 아마 이 긍정이 호인과 범부를 나누는 기준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139. 나는 먼저 탈옥해서 단신으로 쉽게 달아나려다가, 그의 애걸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이중의 험지로 다시 들어가 위험지대를 다 면케 해준 것이었는데, 지금 내가 빈손으로 자기를 찾았을 줄 알고 금전상 해를 입게 될까 봐 거절하는 구나. 그 사람의 행실인즉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도 정확하고 포기도 빠르다. 그릇이 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자기에게 섭섭하게 한 것을 금방 잊기에도 좋을 것 같다. 그 사람의 행실인즉,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 것이니, 그 사람은 그렇게 생기고 태어난 사람이니, 그리 오래 고민할 것도 없다. 툭툭 털고 잊어버리자.

 

153.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솔직하고, 즐겁다. 회고록이기 때문인건가? 진지한 부분에도 심각한 것은 없다. 이런 성품은 정말 닮고 싶다.

 

161.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못한다는 격으로 훈장이 한편으로는 나를 꾸짖고 또 한편으로는 그 시객을 타일러 근근히 일이 조용하게 해결되었다.

>>제가 죽일 놈이군요. 요런 전법도 상당히 유용하게 먹히는 것을 알 수 있다.

 

171. 군자는 알고도 속아줄 수 있다. <맹자>

>> 유치한 함정에 걸어 들어가는 것은 얕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진위를 알 수 없을 때 정면돌파하는 것은 플랜 B는 없어도 실속을 차릴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호랑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을지라도 들어가서 되돌아보면 그 자리가 다른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으니까.

 

221.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 마찬가지로 나는 나에게 물었다. 지금의 삶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며 변경연으로 뛰어들어왔던 내가, 나에게 일을 시키는 팀장급이나 회사의 오너들처럼 밤을 새우고, 주말을 가리지 않고 글을 쓴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여행을 다녀와서 좀 느슨해져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연구원으로 반년정도 살고 나니 이제 스스로에게 자만한 것은 아니었나. 나의 글이 매너리즘의 늪속으로 곤두박질 친 것은 아니었나. 나는 지금 얼마나 절실한가. 글의 결과물이 아니라 나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222. 과연 질풍에 굳센 풀을 알 수 있겠다. 당초에 명근 형이 한순직을 나에게 소개할 때에는 용감한 청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위난할 때 꺾이는 것이 어찌 한순직 혼자 뿐이랴.

>> 위기에 닥쳐봐야 사람의 진가를 안다고 했다. 그래, 그전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 맞다. 작은 위기들에서 사람의 됨됨이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사람을 만나는 과정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222. 나는 결심에 겨심을 더하여 나의 혀끝에 사람의 생사가 달렸다는 것을 각오하였다.

>>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까무러칠 정도로 얻어맞고 있는데, 이제 그만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걸 그냥 버티고 있다니그런데 백범일지를 읽다보면 어디선가 나에게서도 그런 용기가 생겨난다. 나도 모르게 그래요, 김구샘, 잘 버티고 계셔요! 라든가, 안돼요,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면! 이렇게 그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225.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평소 우리 한인의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지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 최악의 상황에서도 위안 삼을 만한 사실은 꼭 한가지씩 있다.

 

237. 5년 이하는 세상에 나갈 소망이 있으나 7년 이상은 옥중귀신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육체로는 복역을 하나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처럼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낙천 생활을 하기로 했다.

>> 하 진짜 이 사람들 대단하다. 아예 삶을 포기한 것인가? 죽음 앞에 놓인 한정된 삶에도 품격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239. 왜놈이 나를 뭉우리돌로 인정하는 것은 참 기쁘다.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곘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 뭉우리돌. 누군가의 삶에 불편한 존재가 되겠다. 옳은 것을 위해서, 해야할 과업에 대하여.

첨언을 하면 새삼스러운데 백범일지를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다.

 

257. 3일 굶어 도적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자 드물다 하나,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다. 한두 명의 좀도둑은 가능하지만 수십 명 수백명의 집단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데에는 반드시 지휘 명령을 보내는 기관과 주동인물이 있어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한 인물이 있다하면 자격과 지량이 정부 관리 이상의 인격자라야 할 것이니, 연구 조사하여 볼 필요가 있다 해서 연구한 것이나, 끝내 단서를 얻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 집단의 유지는 명분이 아닌 조직력에 있다. 그것은 일종의 기술인 것이다.

 

261. 각 도 각 지방 책임 유사에게 노사장이 매년 각 분설에서 자격자 한 명씩을 정밀 조사하여 보고케 합니다. 그 자격자란 것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가 맑고,

셋째, 담력이 강실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이상 몇 가지를 갖춘 자를 은밀히 보고하면, 설의 지도부에서 보고 올린 유사도 모르게 다시 비밀조사를 하여, 조사가 서로 부합될 때 그 설 책임 유사에게 맡겨 합격자를 도적놈으로 만듭니다.

 합격자는 물론 자기에게 대하여 보고를 하거나 조사하는 것을 완전히 모르게 합니다. 책임 유사가 노사장의 분부를 받들어 자격자에게 착수하는 방법은, 먼저 그 자격자가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알아보고, 여색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미색으로, 술을 즐겨 마시는 자에게는 술로, 재물을 좋아하는 자는 재물로 극진히 정을 베풀어 환심을 사서 친형제 이상으로 정의가 밀착케 된 후 훈련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법의 일단을 말하면, 책임자가 자격자와 같이 어디 가서 놀다가 밤 깊은 후 같이 돌아오다 어떤 집 문 앞에 와서 책임자가

그대가 잠시 동안만 이문 밖에서 기다려 주면 내가 이 집에 들어가서 주인을 보고 곧 나오겠다.’

고 요청하면, 자격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문 밖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섰을 것이외다. 갑자기 안마당으로부터

 

도적이야! 고함이 일어나고 그 집 주위로 벌써 포교가 달려들어, 우선 문전에 서 있던 자격자를 포박하고, 안바당에 침입하였던 책임자를 포박하여 가지고, 깊은 산골로 끌고 가서 신문을 개시합니다. 주로 자격자에게 대하여 70여 종의 악형으로 고문을 해서, 자기가 도적이라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흔적 없이 죽여버리고, 끝끝내 도적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자는 포박을 푼 후 외진 곳에 데리고 가 며칠간 술과 고기를 잘 먹여가지고 입당식을 거행합니다.

 입당식에는 책임 유사가 정석에 앉고, 자격자를 앞에 꿇어앉히고 입을 벌리라 한 뒤, 칼을 빼 그 끝을 입 안에 넣고 자격자에게

위아래 이빨로 칼끝을 힘껏 물라

호령합니다. 그리고 칼을 잡았던 손을 놓고 나서 다시

네가 하늘을 쳐다보아라. 땅을 내려다보아라. 나를 보아라.’

호령한 뒤, 다시 칼을 입안에서 빼 칼집에 넣고 자격자에게

너는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사람을 안즉 확실히 우리의 동지로 인정한다.’

라고 선고합니다.

 식을 마친 후에는 입당자까지 영솔하여 예정 방침에 의해 정식으로 강도질 한 차례를 하고, 빼앗은 장물을 신입당원까지 고르게 나누어줍니다. 몇 차례만 동행하면 완전한 도적놈이 됩니다.”

>> 혹시라도 나중에 스토리물을 쓰게 된다면 이런 디테일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 잘라놓기로 한다. 멋진 이야기다.

 

267. 거북 구를 아홉 구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민증번호부)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 그는 담금질 당한 사람이다. 독립투사도 삶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삶이 단련한 검과 같다.

 

288.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 그런데도 궁한 것을 개의치 않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사람이 가진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스스로를 현재의 나로만 평가하지 않는 자세를 배운다.

 

296. 철혈남아

철혈은 이론이 아니라 몸을 던져 수행하는 실천적 행위를 말한다. 백범은 이봉창 윤봉길 등 실천 운동가를 기리며 철혈남아라는 휘호를 즐겨썼다.

>> 책에 실린 백범의 휘호를 보는데 가슴이 뜨거워진다.

 

307.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 그랬을 것 같다. 그리고 엄청 사람좋아보이는 작고 처진눈으로 엄청 예리하게 관찰하고 다녔을 것 같다. 보통사람은 확실히 아니야.

 

335. 다음날이 4 29일이다. 새벽에 윤군과 같이 김해산의 집에 가서, 마지막으로 윤군과 식탁을 같이하여 아침밥을 먹었다. 윤군의 기색을 살피니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농부가 논밭일을 나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 자던 입에 일부러 밥 먹는 것을 보며 할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윤봉길도 대사를 앞두고 태연히 잘 먹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시대의 요구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뚜렷하게 그려진 인물들은 모두 하나하나 비범하다. 자신의 운명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담담함이 있다. 그게 용기 아닐까.

 

349. 식후에 따라가 보니 암석 위에 동전 한 개를 놓을 만한 우묵하게 패인 자리가 있었다. 거기다 지남침을 들여놓으니 과연 지북침이 되었다. 나는 광물학을 모르나 필시 자석광이나 자철광인 듯 하였다.

>> 나에게 힘이 있어 자석에게 방향을 가리키게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혹은, 자석광이나 자철광이 놓인 움푹 패인 곳으로 사람들을 데려가 자기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주는 역할이라도 하면 좋겠다. 지금은 내가 그 움푹 패인데 들어가 있는 기분이다. 아직 바늘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351.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한당송원명청, 각 시대에 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보다 남쪽지방 명조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이던가. 필시 환상으로 국가의 계책이나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런 일이 아니리오.

>> 현실적인 기술을 갈고 닦지 않은 이론은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설령 변화시키더라도 그것은 가장 필요한 것이 되지는 않을 수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1) 뼈대

교감원칙

일러두기

백범 출간사

상권

, 신 두 아들에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 시련의 사회 진출

3. 질풍노도의 청년기.

4. 방랑과 모색

5. 식민의 시련

6. 망명의 길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6. 해방 전후의 대륙

7. 조국에 돌아와서

 

나의 소원

백범 연보

인물 찾아보기

 

2) 잘된 점

자서전은 흔히 연대기적으로 기술되어 읽기도 쉽고 재미있다. 

뼈대의 독특함 보다는 그 내용 서술에서 드러나는 호방한 기질이 아주 유쾌한 사람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3) 보완점

다만 상권 하권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조금씩 겹치는 것도 있어서 사족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김구의 다큐멘터리나 위키백과를 찾아보면 생각보다 백범일지의 내용이 약간씩 잘못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 제법 있다. 자서전을 쓸 때 후대에서 세밀한 눈으로 면면히 찾아보게 될텐데 내가 아는대로 남김없이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부담스럽다. 


4) 키워드

의협심, 능동적임, 낙천,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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