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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5일 07시 39분 등록

<백범일지>

2014.09.15 이동희

 

1. 지은이에 대하여 : 김구 (1876 ~ 1949)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7. 11()~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 (),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의 가문은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의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서울 부근에 이사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고 어머니는 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 없는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세 때에 당시 열에 아홉은 사망하였다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가난과 양반들의 속박 밑에서 국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는 길만이 양반들로부터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채를 서당으로 만들고 이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느꼈다. 이후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섭렵했다. 이듬해(1893)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1894년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고 동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아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병사를 지휘하여 해주성을 공략,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1895년 동학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규율을 잃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자 선생은 연소의 몸으로 이를 수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선생은 당시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하루는 고선생이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예로부터 흥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또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망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궐내까지 침입하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保國)하는 길밖에 없다.

 

이에 선생도 비분에 못이겨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고 선생은 “청국이 갑오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니 선생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고 청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하직 인사차 안진사에게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다다라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김이언 의병진의 소속으로 1895년 동짓달 초에 고산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다짐한 선생은 해서 거유 고능선 선생의 말을 듣고 청국을 조사하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인사차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에게 들른 선생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선생의 사진(왼쪽)과 임시정부 주석 시절에 선생이 서명한 태극기(오른쪽)

 

1895년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로 한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을미사변에 뒤이은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으로 의병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하고 안악으로 되돌아 오던 중에 1896 2월에 치하포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후(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이 선생의 집에 난입하여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는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선생을 쇠사슬로 포박 후 해주옥에 가두었다. 선생은 동년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어 경무관 김윤정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방청을 감시하는 일인 경관 도변(渡邊)에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애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꾸짖자 도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김 경무관은 사건이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감리사 이재정으로 하여금 직접 심문케 하여 감리사가 심문을 개시코자 함에 선생은 먼저 그를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 김창수는 산촌의 일개 천생이나 국모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뜻)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귀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록(임금님의 총애와 봉급)을 도적질 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

 

그러자 감리사, 경무관,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때 감리사는 선생에게 하소연 하듯 “창수(昌洙)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비길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하고 경어를 쓰니 옥 사정들의 대우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에 눈을 떠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사형은 면하였지만 석방은 되지 않자, 선생은 탈옥을 감행한다. 그리고는 충남 공주의 마곡사에 들어가 법명 원종으로 출가하게 된다. 사진은 마곡사의 모습

 

선생은 1897 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8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이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난 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다. 법무대신이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황제의 칙재를 받았다. 황제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 때문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의 하나가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나아가 임금께 보인 즉 황제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가 인천에 가설되고 감리서에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늦게 되었던들 황제의 명령이 인천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일제의 눈치 때문에 석방이 되지 않자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 3 9일 밤 탈옥하여 수원, 목포를 거쳐 함평에 도착, 그곳에서 15일간 묵었다. 그리고 보성, 화순, 순창, 담양을 거쳐 올라와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모든 세상의 잡념이 식은 재와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출가(법명: 원종(圓宗)하게 되었던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예불법이며 천수경, 심경을 외우고 보각서장을 배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은신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므로 선생의 본색이 들어나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900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 지었다. 1901 12월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교육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힘썼다.

 

선생이 장연에서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국내사정은 서구 열강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야기시킨 후 ‘한일의정서’, ‘한일협정서’ 등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등 침략의도를 드러냈으며 마침내 1905 11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자 선생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준, 이동녕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상소투쟁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장기적인 구국운동은 청소년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황해도로 내려와 문화권 초리면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원을 지냈으며 최광옥이 세운 면학회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여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몰두하였다. 또한 1908년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신민회의 황해도 간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안태국등과 함께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다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워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도 대표를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황해도에 선생을 선정하였다. 대표들은 각각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약으로 돌아온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 1 5일 일제는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됨에 따라 선생도 일경에 피체되어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어 2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수감 중에 안명근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 형이 병과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고 백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자를 따서 호를 삼은 것으로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선생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1919 3 1일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되찾기 위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선생은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에 도착하여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에 몸을 싣고 4일만에(1919. 4. 13) 상해 포동나루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자 마자 신익희, 윤현진, 서병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나이를 고려하여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경무국장은 농공상국, 지방국, 비서국 등과 함께 내무총장의 보좌기구로써 소관업무는 경찰업무와 도서출판, 저작권 그리고 위생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왜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업무도 병행하였다. 같은 해 선생은 서병호, 안정근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이사에 피선되어 활약하였으며 1920 11 9일에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1922 7월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주비회의 알력과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자금 횡령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선생은 안창호, 김덕진, 신익희, 차이석 등 여러 지사들과 동년 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최선의 방책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의 위기를 타개코자 노력하였다. 또한 1922 10월에는 조상섭, 김인전, 손정도, 양기하 등과 회합하여 조국독립에 필요한 실력준비로 군인양성 및 전비조성을 목적으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발기인이 되어 동월 28일 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열어 이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한국노병회는 한국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전쟁비용을 조성하여 독립군과 전쟁비용이 목적한 수준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하되, 그 전이라도 국가 또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개시한 때에는 이에 참가하여 출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1923 5월 국민대표회의 윤해, 신숙 등 소수인이 대표회의 이름을 팔아 임시의정원의 직권과 체면을 손상케 하니 동년 6 6일 선생은 내무총장으로부터 내무부령 제1호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 내용은 “소위 만민대표회에서 6 2일 연호 및 국호를 정한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다. 2, 3차 귀순을 권유하였으나 일향 고집하여 이와 같이 헌법을 제정함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함이다.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유업의 신기를 보유할 직권으로서 소수인의 집회 등 6 2일 이래 일체의 불법행위를 엄금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시 해산을 명한다”라 하였다.

 

동년 12 26일에는 상해교민단 의용대의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24 4 9일 국무총리 노백린이 사임하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였다가 동월 24일 이동녕이 국무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동년 6 2일에는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6 3 20일 한국노병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고 동년 12 14일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자 윤기섭, 오영선, 이규홍으로 신 내각을 조직한 후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임시 정부는 일본의 극심한 탄압, 젊은층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의 심취, 자금난 등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1928 3 25일 선생은 이동녕, 안창호,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조소앙, 엄항섭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으며 1929 8 9일 상해교민단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침체에 빠져 있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계의 활성화를 위해,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는 날로 팽창되어가고 있는 일제에 대항해서 싸울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인물난과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임시정부로써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특무공작이라고 결정하였다. 이에 한 몸을 나라에 바칠 애국투사를 선정하여 적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거나 중요기관을 파괴하고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으며 특무공작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국무위원으로서 재무장의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그리하여 1932 1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의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동경 앵전문 밖에서 일왕을 저격하게 하여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으며 동년 4 29일에는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의거를 일으켜 일군 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 대장 등 다수의 장성 및 고관들을 폭살케 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미국인 피치의 집에 은신해 있던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가흥의 저보성 집으로 피신하여 광동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던 중 1933년에 장개석주석의 면회요청을 받고 안공근, 엄항섭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가서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공관에서 장개석을 면회하였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①한국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할 것 ②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지원 및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③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사관을 양성할 것 등의 조약을 맺고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무관양성소를 특설하여 한인교관으로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역전의 명장들을 교관으로 초빙, 한인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도 중, 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제1기생 2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민족주의와 공산주의 합작)이란 단체가 구성되어 국무위원 7인 중 5인이 이에 참가하게 되자 임시정부 운영은 매우 곤란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1935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6인이 강소성 가흥에서 의정원 비상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을 보선하니, 선생은 다시 국무위원에 피선되어 임시정부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이듬해(1936)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일군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를 진강(鎭江)으로 옮겼다가 1937년에 다시 장사로 이동하였다. 1938 5월 장사 남목청에서 민족주의 3당 통일회를 개최하고 3당 대표자가 회의를 하던 중 간소배의 사주를 받은 흉한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은 즉사하고 선생은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하였으나 1개월 동안 입원하여 천우신조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1939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으로 옮긴 뒤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여 직할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국사특파단을 섬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으로 옮긴 뒤 다시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 11월에 중국정부는 한국광복군의 일체 활동을 승인하고 무기와 일체 경비 등을 지원해 주기로 하는 대신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을 체결하고, 이어 12 9일에는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본격적으로 대일항전에 진력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944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한, 미 간 군사의 합의를 이끌어 이른바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을 위한 곤명 주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군전략 특수공작대) 본부와 ‘한미군사합작 합의사항’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는 한편 미국의 원조로서 본토상륙을 위한 군사기술훈련소를 강소성 정부가 있는 입황(立煌)에 설치하고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5 8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이 피나는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고 있다. 자력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동년 11 23일 선생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6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자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 1월에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5월 제2차 미, 소 공위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안을 지지하였다. 1948 4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 6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의거 서거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국가보훈처 자료 참조>

 

2.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백범 출간사

 

P14

끝에 붙인 <나의 소원>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미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을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P14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 대부분은 생존해서 독립의 일에 헌신하고 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최광옥, 안창호, 양기탁, 현익철, 이동녕, 차이석, 이들은 모두 이제 없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P15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 나는 만족하게 생가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P1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상 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P22

우리 조상들은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하여 김자점의 족속임을 숨기고 일부러 상놈 노릇을 하였다. 양반의 문화생활을 접어두고 농사 짓고 임야를 개척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보니 완전히 판 박힌 상놈이 되었다.

 

P22

조선시대 군제에는 역둔토 외에 군역전이란 토지가 있었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이 토지를 경작하다가 유사시에는 징병령에 따라 군에 나가는 제도이다. 우리 조상은 텃골 북쪽 고개 넘어 왼쪽에 있는 권역전을 경작한 이후 완전히 ‘패를 찬 상놈’이 되었다. 군역전을 경작하다 완전 상놈이 된 것은 문()을 존중하고 무()를 천하게 여기는 조선시대의 나쁜 풍습 때문이었다.

 

P24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P27

아버님이 사람을 잘 때리셨던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고 순전히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서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P29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추태는 상놈의 본색이요 행위라 하겠다.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한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P30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 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 며 주저 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P32

어렸을 때 나는 유달리 키가 작아 나뭇짐을 지고 다니면 마치 나뭇짐이 걸어가는 것 같았다. 나무하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그 동네 큰 서당에서 밤낮 책 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2.시련의 사회 진출

 

P38

나는 과거 길에서 불쾌한 느낌과 비관적인 생각만 품은 채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과 상의하였다.

“제가 어떻게든 공부로 입신양명하여 강가.이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하였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해가 이와 같은즉, 제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 강.이씨를 압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엽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 하오리까. 또한 큰 선비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집안이 이같이 가난하니 앞으로 서당 공부를 그만두겠습니다”

 

P38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 부격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 빈격. 흉격밖에 없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 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P39

그런데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 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 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P42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이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P43

나의 도력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은 황해도는 물론이고 평안남북도에까지 펴져 연비가 수천에 달하였다. 나는 황해도.평안도의 동학당 중 나이 어린 자로 가장 많은 연비를 가졌기 때문에 별명이 ‘아기접주’였다.

 

P51

안진사는 비밀리에 나를 조사하고 난 뒤, “군이 나이 어리지만 대담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을 터이지만, 군이 만일 청계를 침범하다가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는 후의에서 밀사를 보냈다고 한다. 나는 즉시 참모회의를 열고 논의한 결과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P52

그런데 나의 부하 가운데 촌락으로 내려가 재물과 보물을 약탈하다 발각되어 엄한 형벌을 받으면 도망가서 이동엽의 부하가 되는 자들이 증가하여 나의 세력은 나날이 줄어들었다.

 

P53

이동엽은 영장 이용선만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돌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가 “이용선은 나의 지휘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다. 만일 이용선이 죽을죄가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죄이니 나를 총살하라”고 큰소리로 호령하였다.

 

P58

특히 안진사는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당시 조정 대관들 중에 글로써 항쟁하던 자들도 처음에는 안진사를 악평하였지만, 얼굴만 마주 대하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경외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관찰로도 그는 퍽 소탈하여 무식한 아랫사람들에게도 교만한 빛 하나 없이 친절하고 정중하여 위아래 모두 더불어 함께 하길 좋아하였다. 안진사는 면모도 맑고 수려하였지만 다만 주량이 과하여 코끝이 빨간 것이 흠이었다.

 

P61

당시 나의 심리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P62

고 선생은 내 마음에 그러한 고통이 있음을 극히 동정하는 말로 위로해 주셨다.

“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물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P62

고 선생의 말씀은 내게 위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리던 아이가 어머니 젖을 빨아먹는 것과 같았다.  나는 고선생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시면 앞으로 갈 길에 대한 모든 것을 선생님 보시는 대로 교훈하여 주십시오. 마음을 다해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자네가 그 같이 결심하였으면, 내 눈빛이 미치는 데까지, 자네 역량이 있는 데까지 내 모든 역량을 다할 터이니 젊은 사람이 너무 상심 말고 매일 나와 같이 노세. 갑갑할 때는 우리 원명이와 산 구경도 다니며 놀게.

 

P63

선생은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3.질풍노도의 청년기

 

P69

평양에서부터 함흥에 도착하기까지 있었던 일 중에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강동 어떤 시장에서 하룻밤 지내다가 칠십 노인 주정뱅이에게 이유 없이 매를 맞았다. 억울하기는 하였으나, 원대한 목적을 품고 먼 길을 가는 처지에 사소하게 잘못 만난 일을 마음에 둘 바 아니라 하여, 한신이 회음의 시정잡배에게 당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서로 위로하였다.

 

P75

곳곳에 두세 집 내지 여남은 집까지 모여 산림을 개척하고 오막살이를 짓고 거주하는데, 인심이 극히 순후하여 거기 말로 '앞내 나그네'가 왔다 하면 무척 반가워들 하였다. 한 동네에 들어가면 제각기 맞아들이고, 남녀노소가 모여서 고국 이야기를 하라고 조르기도 하며, 이 집 저 집에서 다투어 음식을 대접하였다.

 

P79

나는 미안한 마음에 같이 걸어서 가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걱정 말라고 하며 불과 10리만 가면 관마를 잡아탈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말 위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서씨의 뜻을 보면 장래 교제할 좋은 기회가 되겠으니 같이 지내는 것이 극히 좋겠으나, 먼저 길을 떠난 김형진에게 이 사실을 알릴 길이 없었다. 또 김이언이 의병을 일으킨다고 하니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생각이 앞섰으므로, 기약 없이 금주로 가서 서씨 집에 머물러 있을 마음이 없었다. 말에서 내려 서군에게 물었다.

 

P80

그러나 나는 관찰로는 진정한 마음의 용기는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이언 보다는 그의 동지로서 초산 이방을 지냈다는, 김규현이란 사람이 의리도 있고 계책도 잘 세우는 것 같아 보였다.

 

P83

나는 김형진과 몇 걸음 후퇴하면서 상의하였다. "김이언의 금번 실패는 영원한 실패라 다시 사람들을 모으지 못할 거요. 그러니 저들과 같이 퇴각할 아무 필요가 없소. 이렇게 낯선 행색으로는 잡히기 쉬울 것이니, 잠시 강계성 부근에서 몸을 피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94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 “그렇다.

.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 아니었더냐?

.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P98

그런 다음 이화보에게 필기를 갖고 오게 해서 몇 줄의 포고문을 썼다. 먼저 왜놈 죽인 이유를 "국모보수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라고 밝히고, 마지막 줄에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 써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 벽에 붙였다.

 

P100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

 

P102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아버님은 고향이 있는 집과 세간살이를 다 팔아가지고 인천이든지 서울이든지 내가 가는 대로 따라다니며 일이 되어 가는 상황을 보시기로 하고 일단 고향으로 가셨다. 어머니만 나를 따라서 인천으로 동행하셨다.

 

P105

어머님은 비록 농촌에서 생장하셨지만 무슨 일이나 잘 감당해내셨고 특히 바느질에 능하셨다. 무슨 일이 손에 잡히셨을까만,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감리서 삼문 밖에 있는 개성사람 박영문의 집에 들어가셔서 이제까지의 일을 잠시 이야기하고 그 집 동자꾼으로 써 달라 부탁하셨다. (, ) 덕분에 어머님은 하루 세 끼 감옥에 밥 한 그릇씩을 갖다 주기로 하는 조건으로 고용이 되셨다. 압뢰가 밥을 받아 넣어 주면서 “ 네 모친도 의지할 곳이 생겼고, 네 밥도 매일 세 끼를 들여 줄 터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함께 갇힌 죄수들도 그것을 매우 부러워하였다.

 

P105

옛사람들은 말하기를 “슬프다. 부모님께 나를 낳으시느라 고생하시었다” 라 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적에도 많은 고생을 하셨고, 또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천중만금의 고생을 하셨다.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P108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P109

이재정, 김윤정을 위시하여 수십 명의 참석 관리들이 내 말을 듣는 광경을 보니. 제각기 얼굴이 달아올라 홍당무 빛을 띠고 있었다. 이재정이 마치 하소연 하듯 내게 말했다.

“ 창수의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 내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마음도 비할 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신문하여 위에 보고하려는 것인즉, 사실이나 상세히 말씀하여 주시오 “

 

P110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아까 네가 신문을 받고 나온 뒤에 경무관이 돈 150냥을 보내고 네 보약을 먹이라고 하더라. 오늘부터는 주인 내외는 물론이고 사랑 손님들도 나를 매우 존경하며 대하고, 또 옥중에 있는 아드님이 무슨 음식이든지 자시고 싶어하거든 말만 하면 다 해주겠다고 한다.

P 114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문화. 경제.도덕.교육.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시대 과제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인 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그러나 창수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이 신지식을 구하여 장래 국가에 큰 일을 하여야 하오”

 

P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 ‘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9

그런데 어머님은 음식을 손수 들여넣어 주시면서도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셨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르게 한 것이다.

 

P12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4. 방랑과 모색

 

P154

중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며,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수나 곤충에게까지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전날 밤 나를 찾아와 자기 상좌가 되어 달라고 할 때에는 지극히 공손하던 하은당부터 “얘, 원종아”를 기탄없이 부르고, “생긴 것이 미련스러워서 고명한 중은 되지 못하겠다. 얼굴이 어쩌면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나가서 물도 길고 나무도 쪼개거라” 한다.

 

P155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약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곧 호법선신께 의뢰하여 물리쳐야 하는 것이었다.

 

P165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P180

,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P181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P182

나는 상놈의 딸은 고사하고 정승의 딸이라고 재물을 따지는 결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작은 아버지는 형님도 없는 가정에 자기의 힘으로 조카를 결혼시키는 것을 당연한 의무요 영광으로 알았다. 그런데 내가 굳이 사양하자 크게 노하셔서 낫을 들과 나를 향해 달려드시는데, 어머님께서 겨우 가로 막았다. 나는 그 틈에 도망쳤다.

 

5.식민의 시련

 

P215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양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P218

해서 각 군에서 체포되어 경성으로 이송되는 인사 중, 송화의 반정 신석충 진사는 재령강 철교를 건너다 강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신석충은 본시 해서의 저명한 학자요 대자선가였다.

 

P219

왜놈이 한국을 강점한 후 첫번째로 국내의 애국자를 망라하여 체포한 것이다. 황해도를 중심으로 먼저 안명근을 잡아 가두고는, 계속하여 전 도내의 지식계급과 부호를 일일이 압송하였다.

 

P221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고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P222

나는 결심에 결심을 더하여 나의 혀끝에 사람의 생사가 달렸다는 것을 각오하였다. 어느날 또 끌려 신문실에 갔다. 왜경이 물었다.

 

P238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P244

정신은 정신대로 잘 보존하지만, 왜놈에게 소.말이나 야만인 대우를 받는 나로서 당시 의병들의 자격을 평론할 용기가 있을까? 지금 내가 의병 죄수를 무시하지만, 그 영수인 허선생. 이선생의 혼령이 나의 눈앞에 출현하여 엄중한 질책을 하는 듯싶다.

‘옛날 의병은 네가 보는 바와 같이 무식한 것들이니 국가에 대한 의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나, 너는 일찍이 고후조에게 의리가 무엇인지 가까이서 배웠고, 그이에게서 배운 금언 중에 삼척 동자라도 개나 양을 가리켜 절을 시키면 크게 노하며 불응 한다는 말을, 강단에서 신성한 제2세 국민에게 연설하던 네가, 머리를 숙여 왜놈 간수에게 예를 하느냐?

네가 항상 암송하는 고인의 시 가운데,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짖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 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P244

명색이냐 의병이든 도적이든, 왜놈에 순종하는 백성이 아니라고 인정하여, 종신이니 10년이니 감금하여 두는 것으로도 족히 의병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으냐? 남아는 의로 죽을지언정 구구이 살지 않는다고 평일에 어린 학생을 가르치더니, 네가 금일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 네가 개 같은 생활을 견뎌 지내고서 17년 후에 공을 세워 죄를 갚을 자신이 있느냐?

 

P246

근 일고여덟 달 만에 면회하는 어머님은 태연하신 안색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 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

 

P264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P267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 지어준 ‘뭉우리돌’이다.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는 지사 중에 왜놈의 가마솥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뭉우리돌 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P267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라하고 호를 白凡이라고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蓮下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6.망명의 길

 

P283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P285

나는 안씨에게 정부의 문지기를 청원하였다. 이유는 , 종전에 본국에 있을 때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순사 시험과목을 혼자 시험쳐 본 결과 합격하기 어려움을 알았던 스스로의 경험과, 허영을 탐하여 실무에 소홀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P288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고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P289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백범일지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P295

젊은 나이에 글 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10년 동안 임시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1919)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떠돌던 말과 같이, 몇몇 동지와 더불어 고성낙일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를, 독립운동도 부진하고 나이가 죽을 때가 가까워졌으니, “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운동을 계획하던 때 <백범일지>상권을 기술하였다.

 

P298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을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두 번이나-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어 인천옥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리고 17년 후 다시 인천 감옥으로 돌아와 인천항 축항 공사를 할 때- 자살하려다 실패하였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고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1.상해 임시정부 시절

 

P300

해외 우리 한인들도 어디에 거주하든지 정신으로나 행동으로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그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소위 한일합병의 참된 의미를 그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단군 개국 이후 명의상으로 이민족의 속국이 된 때도 있었고, 우리 스스로도 이씨가 왕씨를 혁명하고 스스로 왕이 된 전례가 있었다. 때문에 왜놈에게 병탄당해도 당.. . 청의 시대와 같이, 우리가 완전 자치를 하고 명의상으로만 왜의 속국이 되는 것으로 아는 동포가 대부분이었다.

 

P309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1919)에는 국내외가 일치하여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세계사조가 점차 봉건이니 사회주의니 복잡해지면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계에도 사상이 갈라지고, 음양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 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P311

(형권)이 시베리아에 도착할 시기를 맞추어 이동휘는 비서장인 김립을 밀파해, 한형권을 종용하여 금괴를 임시정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서 빼돌렸다. 김립은 이 금괴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 그러고서 자기는 상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

 

P315

동북 3 성의 정의.신민.참의부와 임시정부의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임시정부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 3부는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 뒤 3 부가 점차 할거하여 군정.민정을 합작하지 않고 세력을 다투어 서로 전쟁까지 하였다.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고 함은 바로 이를 가리킨 격언이라 할 수 있다.

 

P318

원년(1919)에서 3~4년을 지내고 보니, 열렬하던 독립운동자 가운데 하나 둘씩 왜놈에게 투항하거나 귀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러한 자들은 임시정부 군무차장 김희선과 독립신문사 주필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등을 위시하여, 점차 그 수가 늘어났다.

 

P318

또한 처음에는 열성으로 큰 뜻을 품고 상해에 온 청년들도, 점점 경제난으로 인하여 취직하거나 행상에 종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때 상해 우리 독립운동자의 수가 천여 명이었던 것이 , 차차 줄어들어 겨우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최고기관인 임시정부의 현상을 족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P322

“저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 상해에 假政府 있다기로 일전에 상해로 왔습니다. 상해에 도착하여 여기저기 다니다 전차표 검사원에게 임시정부의 위치를 물어보니, 그가 보경리 4호로 가라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경성 용산 출생으로 성명은 이봉창이라 하였다.

 

P323

“제(이봉창)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P324

이봉창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계획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일어에 익숙해서 일본에서 지낼 때에는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성명을 기노시타 쇼조라 행세하였습니다. 이번 상해에 오는 도중에도 이봉창이라는 본성명을 쓰지 않았으니, 앛으로도 일본인으로 행세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을 준비하실 동안, 제가 철공을 할 줄 아니 일본인의 철공장에 취직하면 높은 월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P325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

 

P326

사진관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내 얼굴에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P331

어느 날, 동포 박진의 종품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는 윤봉길 군이 홍구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다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제가 채소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일전쟁도 중국에서 굴욕적으로 정전협정이 성립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P331

“저는 이제부터 가슴이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P336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 시간 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 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

 

3.피신과 유랑의 나날

 

P351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한......가 시대에 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보다 남쪽지방 명조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이었던가. 필시 환상으로 국가의 계책이나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런 일이 아니리오.

 

P352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P352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혈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P353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4.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P367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P379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하셨다. 종전에 우리나라는 노복을 사용하였으나, 국가가 병탄된 뒤 경향에서 동포들의 양심 발동으로 “내가 일본인의 노예가 되어 어찌 차마 동포를 종으로 사용하랴”하고 자연히 노복제를 물리치고 고용제를 사용하였다.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을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P387

비통하고 슬프도다! 하느님이 진정 무심하신가. 어린 아들, 어린 딸도 왜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러고도 인간이란 말인가. 나라를 잃은 이래 왜구에게 일가족이 도륙됨이 무릇 몇백 몇천 집이랴만. 기미 3.1운동 이래 상해 운동가들이 당한 것에서는 이명옥 군이 당한 비극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무릇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노니, 광복 완성 후 이명옥 일가를 위해 충렬문을 수안 고향에 세워서 영구히 기념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

 

6.해방 전후의 대륙

 

P395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차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라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 온 것입니다. “ 이 말에 한인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국 인사들까지도 감격에 넘쳤던 모양이다.

 

P398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하는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P399

우리 광복군은 계획하였던 자기 임무를 달성치 못하고 전쟁이 끝나 실만 낙담하는 분위기에 잠기었고, 반면 미국 교관과 군인들은 매우 기뻐하여 질서가 문란한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P403

중경에서 폭격을 당할 때에 중국의 국민성이 위대한 것을 깨달았다. 높고 큰 건물이 삽시간에 재가 되는데도, 집 주인들은 한편으론 가족 중 피살자를 매장하였고, 다른 한편으론 생존자들은 불 붙지 않은 나머지 기둥과 서까래를 모아 임시 가옥을 건설하였다. 그 일을 하는 중에 웃는 얼굴로 비장한 빛을 보이지 아니하므로, 나는 그들을 볼 때 이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 동포들이 저 지경을 당하였다면 어떠할까? 화가 나느니 성이 나느니, 홧김에 술을 마신다 성난 김에 싸움을 일으킨다 하여, 소란만 일으키고 태만하지나 않을까.

 

7. 조국에 돌아와서

 

P409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후손들이 왜적의 악정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하였던 바와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들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망시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반면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져 집이 땅같이 낮게 붙어 있었다. 동포들의 생활 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

 

P410

도착 즉시 윤봉길.이봉창.김경득의 유가족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신문에 보도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자제는 덕산으로부터 찾아왔고, 이봉창 의사의 질녀가 서울에서 찾아오고, 김경득 선생의 아들 윤태는 이북에 있는 관계로 오지 못하고 그 친딸과 친척 등은 강화.김포 등지로부터 찾아와서, 기쁜 마음과 슬픈 마음으로 서로 대면하였다.

 

나의 소원

 

민족국가

 

P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P424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P425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의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 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 동포의 크고 아름 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거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P425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알력.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나, 이래 가지고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P426

만일 우리가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인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서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P426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튼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정치이념

 

P426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이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P427

우리나라의 양반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거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무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P429

나는 노자의 무위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으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을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P430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 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P430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P431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P432

대한 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P432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이 태탕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 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이란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한편의 대 서사시이다. 격랑의 한말 일제 식민 시대에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한 인간의 모습과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동지로서, 제자로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완성된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한 사람이 어떻게 큰 인물로 성장해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책이다. 물론 백범 김구라는 인물이 우리 민족에 공헌한 바가 큰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같다.

 

책의 서술은 김구의 성장과 사회진출과 변화된 세상에 맞게 자기의 나아갈 바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간 순서대로 잘 정리하였다. 실화를 잘 곁들여서 상황을 잘 드러나게 묘사하였으며 그 와중에 본인의 생각과 결심 그리고 실천한 바를 잘 나타내었다. 무엇보다 본인의 심란한 마음을 표현하며 공감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다.

 

책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을 따라가며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참고서적으로 근대사와 독립운동사 같은 책을 읽고 본 책을 읽는 다면 이해가 빠르고 그 결심과 고뇌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단어는 "결심하였다"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작심삼일에 익숙해져 있다. 진정한 결심을 해본 적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결심이란 마음을 굳게 정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리라.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결심한 바가 있으며 이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한데 근래 이 결심이란 것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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