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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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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2일 21시 56분 등록
1.저자에 관해서
색다른 여행을 했습니다. 저자를 따라서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내 의식의 깊은 곳까지도 함께 엿보는 가슴 뛰는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물론 저자가 여행도중에 이야기 했듯이 그는 ‘20세기를 지나온 관찰자 입장에서 기억의 역사지도 따라 자전거 여행을 하는’ 역사가였지만 저는 어쩔 수 없는 ‘다소 낭만적이고 고답적인 생활인인지라 중간 중간에 저자의 손을 놓고 좀 더 그 곳에 푹 빠져 몇 일을 더 지내고 싶은 공간적 장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냉철한 역사가였습니다. 자기의 뿌리를 넘어선 넓은 영토를 바라보는 코스모폴리탄적이고 아직도 우리와 함께 이 촉촉한 지구의 대지를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자 홉스 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여행은 그가 태어난 1917년 이집트에서 시작해서 그가 자라고 역사적 이해를 바라는 역사학자로서의 자리매김을 한 영국, 그리고 세계 각국이라고 표현되어지는 지구 곳곳을 누볐습니다. 그는 또한 20세기를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 만큼 그가 걸어온 길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격변의 시대였지요. 단지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 했던 전쟁, 혁명의 시대를 두루 거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불안과 풍랑의 역사 한가운데에서도 재즈 음악에 심취하고 시를 즐겨 읽으며 또한 그가 한 말에 의하면 ‘삼라만상을 보는 틀을 제공한 마르크스주의’를 뿌리치지 못하는 우리 이웃의 아저씨요.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가슴 따뜻한 학자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일찍 여위고 어머니 뿌리의 삼촌과 이모의 영향력 밑에서 자라 정서적인 측면을 비롯하여 주어진 상황이 긍정적 이지는 아니했음이 명백함에도 그는 그러한 상황을 특유의 긍정과 냉철함으로 지금의 위치를 마련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슬픔이 아닌 탐조의 즐거움였다’는 저자의 고백에 다소 의아해 했지만 그의 진솔함을 믿기로 했습니다. .

저자가 1930년 초 생활한 영국에서는 재즈에 빠져 밤새워 공연을 보고,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매료 당한 시대라고 여행 중 설명한 대목의 뒤에는 ‘6년 반 동안의 군 입대는 잃어버린 시간’ 즉 그 전쟁은 허망의 전쟁 이었다‘는 2차대전을 가슴으로 안고 뒹군 우리 시대의 역사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교육자로서 대부분을 지낸 두 대학 중에서 하나인 런던 기계학원의 후신인 버벡 칼리지에서 만난 젊은이들과의 소통의 시간을 이야기 할 때는 그가 참다운 교육자요, 인간애를 가진 노학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요즈음 서로 간에 소통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은 가요? 학교든 강연장이든 만남의 장소든 소통은 저 구석에 숨어서 눈치나 살피는 저녁 석양을 마주하고 있는 노파의 눈물과 같은 시대입니다.

나의 지나온 과거의 무게가 감당해 내기 힘들 정도로 어렵고 가슴 아팠음을, 그리고 그 생채기가 무슨 진주인양 감싸 안고 품고만 있었는데 저자는 이러한 나를 더 넓은 세계로의 문을 나서는 버팀목의 생채기로 승화시켜 주었습니다. 음악을 포함한 예술 전반을 순수 예술 그 자체로 보기를 고집한 나에게 ’사회 안에서 예술가와 예술이 차지하는 역할과 성격‘을 이해하는 안목을 길러준 예술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공산당에 50년 동안 적을 둔 우리 시대의 역사학자 홉스 봄과의 짧은 시간 긴 여행 동안 살펴 본 그의 모습입니다.

2. 나를 멈추게 한 책 속의 글귀

〈 에필로그 〉
파스칼이 말한 “머리가 모르는 가슴의 사연”,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인연이 깊거나 자기가 선택한 집단한테 느끼는 정서적 일체감에 내가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체감은 다른 누구에겐가 맞서서 정의되는 것이므로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와는 이질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것은 참극으로 이어진다. (p 669)

역사에 필요한 것은 기동성과 넓은 영토를 내려다보고 실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서 자기의 뿌리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다. (p 667)

〈 18 지구촌에서 〉
내가 영국에서 교직생활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보낸 이유의 하나는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바로 들어 온 보통 젊은이와는 달리 나이도 많고 더 성숙하고 배우려는 열의가 굉장한 남녀 학생을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런 학생들과 대면하면 정말로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학교로 와서 구내식당에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고 그 전에도 한 두시간 수업을 들었을 테고 내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다시 한 시간 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학생들한테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는 강의에 흥미를 갖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버벡은 좋은 학교였다. 특히 학생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p 487 )
- 이러한 강의가 우리 곳곳에 살아 숨쉬기를 바라면서

나는 정말이지 즐겁고 편안하게 살았다. 여행도 많이 다녔고 아내도 나이를 들면서 점점 더 같이 다닐 때가 많았는데 우리의 여행은 일과 발견과 휴가와 색다른 경험과 오랜 우정이 하나로 녹아든 것이었다. 아무리 가난에 찌들어 살고 늘 재앙과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도 웃을 줄 알고 적어도 농담을 던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로 나는 재미있게 살았다.(p 507)

〈 머리말 〉
다시 말해서 자기 몸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바깥에 설 줄 아는 능력이 이성을 신뢰하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능력 다음으로 중요하다. ---- 철학자 아그네스 헬러가 말한 대로 역사는 “ 일어난 일을 밖에서 기록하는 것이고 회고록은 일어난 일을 안에서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계의 인정을 받으려는 책이 아니라 감사와 사과를 담은 책이다.(p 13)

〈 1- 프롤로그 〉
과거는 또 다른 나라지만, 그기서 한 때 살았던 사람들에게 흔적을 남겼다. 과거를 풍문으로만 들었을 뿐 스스로 깨우치기에는 너무 어렸 던 사람에게도, 또 워낙 역사와는 담을 쌓고 살아가도록 구조화된 문명 안에서 자라다 보니 과거에 대해서 ‘하찮은 퀴즈’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과거는 흔적을 남겼다. 그렇지만 자서전을 쓰는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히 옛날로 다시 가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지도에 담는 것이다. (p 27)

〈 2-빈과 유대인 소년 〉
나는 조상들이 믿었던 종교의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심정적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 한미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연대를 요구하는 작지만 호전적이고 문화적으로 낙후했으며 정치적으로 공격일변도로 나아가는 민족국가에는 더더욱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20세기 말부터 유행이 되었지만, 나치의 대학살에 기대어 유대인은 사상 유례가 없는 박해를 받은 집단이라고 세계 양심에 호소하는 “희생자”의식에 나까지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는 겨레의 휘장을 달지 않고 나라의 깃발을 달지도 않는다. (p 54 )

〈 3-힘들었던 시절 〉
이쯤에서 아들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피하지 말고 아버지에 대해서 한마디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여간 어렵지 않은 숙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을 대부분 내가 일부러 까먹는 쪽을 택했다고 말 하는 것이 정확 하겠다.
집근처에 있던 작은 산으로 아빠와 산책을 갔던 짧지만 강렬한 기억, 그리고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 한 두개 정도 (p 60 )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가 일급 작가라는 생각은 안 듣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없지만 어머니는 시도 썼다. 10대 그 시를 읽고 내가 그레틀 이모한테 별로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이모가 펄쩍 뛰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내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이나 대상에 대해서도 나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그때부터 생각한 모양이다.( p 77 )

〈 4-베를린 : 바이마르의 종식 〉
베를린 생활을 하면서 나는 일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아니면 누가 보아도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또 이제는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나도 알지만 학생 때부터 헌신했던 정치적 활동 없이는 인생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삭제한 글이 컴퓨터 하드디스크 어디엔과 남아서 전믄가의 손으로 복구되기를 여전히 기다리는 것처럼, 10월 혁명의 꿈은 아직도 내 안의 어디엔가 남아 있다. 나의 꿈은 포기했지만, 아니, 거부했지만, 그것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p 103 )

〈 6-섬나라에서 〉
마지막 동전 한 닢까지 탈탈 털어버리고 나서야 우리는 말 못할 희열을 느끼면서 인도는 딱딱했지만 발걸음도 가볍게 동이 터오는 어둑어둑한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첫사랑을 느낄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보니 나는 보나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단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은 절대적 감성을 길러 준 것이 바로 재즈였다. ( p 140 )

마르크스주의가 마약처럼 뿌리치기 어려웠던 까닭은 사상이 워낙 총체적이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삼라만상의 이론”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삼라만상을 보 는 틀”은 제공했다. 무기체와 유기체의 본성을 인간세계와 연결하고 집단과 개인을 연결하고 끝없이 유동하는 세계에서 모든 상호 작용의 기본 이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다.
( p 166 )

〈 7-캐임브리지 〉
캠 강의 가운데가 불룩 솟아오른 다리에 서서 거침없이 펼쳐진 후원의 잔디와 경이로운 내부시설을 감쪽같이 숨기면서 을씨년스러워 보이기만 하던 고딕 예배당 뒷모습의 완벽한 조화, 그리고 18세기의 단아한 품위가 돋보였던 건물 깁스의 모습을 나는 195년 이후로 인생의 어느 시기에든, 어느 계절이든, 낮이든 밤이든 바라보지 않은 적이 없다. 그리고 그때마다 처음과 똑같이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p 175 )

〈 8- 파시즘과 반전 투쟁 〉
유럼이 아직도 파국으로 치닫던 시절에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보냈던 학창시절을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되돌아보아도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줄기차고 꿋꿋하게 희망과 확신을 잃지 않고 뛰었다.( p 200 )

내가 그를 좀 더 자주 보았을 때 그의 유일한 낙은 책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워낙 속세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조금이라도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은 더욱 그를 흠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결코 자기를 들어내지 않았다. 아무도 부인 못할 한 가지 사실은 그의 논리가 아주 명쾌했다는 것이고 그가 던지는 말에는 권위가 깃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 p 209 )

〈 9- 공산주의자가 되다 〉
공산주의는 이제 죽었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소련을 전범으로 하여 만들어진 대부분의 체제와 사회는 1917년 10월 혁명의 유산이었고 우리한테 꿈을 심어주었지만 이제는 물질적으로도 삭막한 폐허만 남기고 깡거리 허물어져서 공산주의라는 구상자체에 처음부터 처음부터 허물이 있었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내기 어렵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라는 신념에서 자극을 받았던 사람들이 이룩한 업적과 “공산주의자가 정복하지 못할 요새는 없다.” 는 믿음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p 216 )

코민테른시절의 공산당은 노동계급에 뿌리를 두었고 노동계급의 이익과 열망을 대변한다면서 때로는 바른 소리를 할 때조차도 이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공산당은 레닌이 말하는 “직업혁명가” 중심이었다. ( p 217 )

공산당의 매력은 다른 조직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낸다는데 있었다. ( p 224 )

지금까지는 권력을 잡지 못한 공산주의자에 관해서 썼다. 탄압이 아니라 특권을 누렸던 공산주의 체제라는 아주 다른 상황에 살았던 공산당원의 경우는 어떨까? 그들은 국외자가 아니라 내부자였다. 대개는 국민한테서 반감을 사면서 한 나라에서 저항세력이 아니라 지배세력으로 살았다. 경찰은 그들의 적이 아니라 하수인이었다. 혁명 이 후의 찬란한 미래는 그들에게는 꿈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었다. ( p 240 )

옛날이 되었건 요즘이 되었건 무조건 따르고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던 게르하르트 실퍼트 같은 2세대 공산주의자든 자기들의 이념을 믿었고 또 대부분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모두 역사학자였다. ( p 246 )

〈 10- 전쟁 〉
공병으로 지내는 동안 나는 압도적으로 잉글랜드 인이 많았던 노동자들 속에서 섞여 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거칠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들의 올곧음과 어튼 소리에 대한 경멸감과 계급의식과 동지애와 협동정신을 평생도록 존경하게 되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 p 266 )

그는 친절을 이렇게 베푸는 것이라는 본보기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한없는 이해심과 우정으로 나를 따뜻하게 해주었다. 내 독일어도 고쳐주었을 것이다.( p 280 )

그 곳은 재앙의 자리였다. 그렇지만 그 피의 자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여전히 죽음이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는 시실이었다. 그곳은 비극의 자리기보다는 희망의 자라였다.( p 285 )

그들은 얼룩말처럼 줄무늬가 간 얼굴을 하고 소시지 같은 살점이 뺨에서 늘어진 얼굴을 하고 병동을 걸어 다닌다. 희망이 무엇인지는 이런 병원에 와서 보아야 비로소 실감이 간다.
.( p 285 )

〈 11- 냉전 〉
부헨발트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말하는 사람을 그 당시 보지 못했다. 나중에 동료가 되고 친구가 된 사람도 있었지만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수용소에 있었던 티를 내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의 하루하루는 다른 누군가의 죽음으로 사들인 것이라고 한참 세월이 흐르고 나서도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p 295 )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위에 있다는 신념과 확신도 그대로 있었고 공산중의의 이념이 이 세상을 바꾸어 놓으리라는 믿음도 여전했지만 우리의 희망, 아니 적어도 나의 희망은 발트베야민이 말한 파국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진보의 폭풍에 휘말려 날개를 접을 수 없는 “역사의 천사”처럼 불가피한 비극의식과 맞닿아 있었다.

〈 12- 스탈린과 그 후 〉
결정을 내리는 러시아인과 그렇지 않는 러시아인 사이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우리끼리 농담 삼아서 한 소리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머리털부터가 달랐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머리털은 머리위로 빳빳이 섰거나 아니면 하도 세워서 나중에는 빠져버렸다. 결정을 내리지 않는 사람은 이마위로 가느다란 직모였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농경 사회였던 곳에서 어느새 지식인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p 329 )

〈 13- 40대에 맞는 전환기 〉
눈에 확 들어오는 사건도 없었고 극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별 볼일 없는 고개를 넘고 나서야 비로소 역사에서건 삶에서건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을 체험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들 때가 있다. ( p 359 )

명망 높은 학자의 삶은 드라마로 가득 찬 것이 아니다. 설령 드라마라 하더라도 그것은 관직에 몸 담았던 사람의 삶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직접 뛰어들었던 사람들에게나 흥미를 끌 수 있을 내용이다. ( p 363 )

〈 14- 웨일즈의 크니흐트 기슭 〉
클러프가 생각한 환경은 “아름다운”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 p 388 )

전통 웨일즈 사회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은 영혼이나 지성으로 정해졌다. ( p 400 )

〈 15- 1960년대 〉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여야한다”라는 구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규범이라면 덮어놓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유토피아를 읽어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정부에 대해서든 교사에 대해서든 부모에 대해서든 우주에 대해서든 젊은 반항자들의 심리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은 누구한테서도 간섭받고 싶지 않다는 그런 구호였다. ( p 412 )

〈 16- 정치 관람자 〉
그는 군림하기위해서 태어난 사라밍 아니라 저항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지배자들의 몰염치에 맞서 민중을 지키는 “민중의 수호자”였다. ( p 444 )

이 나라처럼 불의와 불평등 속에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데서 부자들이 자기들 말고 남한테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뭐란 말인가? 복지를 잠식하고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을 보호하전 장치가 퇴화하게 방치를 해도 정치적 불이익을 두려워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나빴다고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회주의권이 사라지고 나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 p 458 )

〈 17- 역사가들 속에서 〉
역사가는 아무리 먼 과거를 다룬다 하더라도 과거를 탐구하다보면 결국 현재와 눈앞의 사안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또 현재와 눈앞의 사안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역사를 이해 한다는 것은 전문가에게만 아니라 시민에게도 중요하다. 모름지기 역사가라면 자기와 똑 같은 역사가들만 읽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 ( p 462 )

〈 20- 프랑코에서 베를루스코니까지 〉
이탈리아는 우리에게 좋은 나라였다. 아름다운 곳에서 우정을 안겨주었고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가 얼마나 놀라운 창조력을 지닌 나라인가를 끊임없이 일깨워 주었다. 청춘을 넘기면 보통 사람은 웬만해서는 살아있다는데서 순수한 희열을 맞보기 어렵지만 이탈리아는 그 드문 기쁨의 순간을 열어주었다. ( p 578 )

3. 내가 저자라면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저자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시간적 공간적 긴 여행을 하는 것은 기쁨이자 때로는 인내를 요하는 수도승의 길일 수도 있었다. 40대를 달리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작은 눈으로나마 어느 정도의 인생 여정의 흐름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구릉을 지나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나고 언덕인가 싶으면 또 계곡도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로서는 이해하기조차도 힘든 질곡의 세월을 몸으로 안고 20세기를 살아온 저자는 다소 지루하지만 우리를 역사적 이해의 여행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본인은 짧은 개인적 역사를 책 속에 접목시켜 나름대로 앞장의 지루함을 나 나름의 눈으로 재 편성해가면서 읽어나갔다. 역사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픈 저자의 바램을 때로는 다소 실망시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작가 개인의 역사 속에서 가족의 역사를 찾아보고 그리고 역사 속에서 작가가 찾으려고 노력한 예술을 ‘순수한 예술 그 자체로서의 예술’로 바라보려는 의도도 가졌다. 물론 우리의 역사 속에 녹아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을 작가의 생에서 농밀하게 나타나 우리 개개인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견고화된 사고의 틀을 흔들어 주는 데는 좋은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저자도 언급을 했듯이 명망 높은 학자의 삶은 드라마로 가득 찬 것이 아니다. 설령 드라마라 하더라도 그것은 관직에 몸 담았던 사람의 삶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직접 뛰어들었던 사람들에게나 흥미를 끌 수 있을 내용이다. ( p 363 ) 역사가를 따라 역사기행을 하는 층은 실로 다양하다. 역사가 나름대로의 목적의식과 의도가 있겠지만 ( 냉철한 이성으로서
여행을 한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특히 애착이 가는 부분, 즉 시간적 공간적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장소 또는 시간에서 여행자 모두가 함께 공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휴식도 필요하다. 앞장의 장황한 가이드식 설명에 잠시 휴식을 주었더라면 독자들에게 ‘역사속의 나’를 생각해 보고 그리고 긴 역사의 흐름 속의 한 정점에 서 있는 우리 사회 전체 속의 관계 지음에서 우리 자신을 또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내가 여행을 이끌어 나간다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여행 중 잠시나마 현재의 위치로 되돌아와 담소를 나누는 역사기행의 형태로 편성해 보았음직하다. 긴 가족사 이야기 중 지금의 저자 가족과의 관계와 잠깐 연관지어 생각해보는 것이라든지 때로는 저자가 언급한 예술부분에서도 현재의 예술 속에서 역사의 흐름을 잠깐 읽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역사가라면 자기와 똑 같은 역사가들만 읽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 ( p 462 )
고 저자도 말하지 아니했는가? 역사는 역사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책 전반에 구성된 다소의 지루함을 위의 방법으로 감히 언급해 보았다.

그러나 작가의 진솔하고 성실한 안내 속에서 쉼 없는 인간에의 애착과 역사 속에서의 나를 의식하면서 작가를 따라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편협된 나의 역사의식을 다시 정립시키고 말로 설명되어지는 역사 여행이 아니라 몸소 체험하고 함께 뒹굴며 여행할 수 있는 좋은 지적 경험 이었다 빅토리아 자녀 훈육법의 설명에서는 현대의 자녀교육과 학교교육을 함께 고민해 보고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가는 작가의 정신적 신체적 성장 부분에서는 지금, 한 부모 가정, 조손가정이 겪고 있는 현실적 아픔이 다음 역사 속에서는 어떻게 녹아 날지 또한 고민해 보았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 잇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실과 맞물려 돌고 돈다는 작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역사기행을 생생한 체험의 장으로 이끌고 나간 작가의 훌륭한 솜씨와 그 생생한 현실적 표현 기법에 감사를 전하면서 냉철하지만 그러나 따뜻한 눈으로 역사 속의 한 부분을 거닐고 있는 이 지금의 순간을 한없이 사랑한다. ( 2007.03.11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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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2 22:37:29 *.140.145.63
님의 리뷰를 읽고 있노라니 저자와 무언의 교감을 나누어가며 함께
여행하는 님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책을 통해서 저자와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건 좀 더 몰입하셨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을런지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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