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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8일 09시 09분 등록


저자 연구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1904.03.26~1987.10.03)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로,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아일랜드계의 독실한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는 성당에서 복사로 활동했을 정도로 성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하지만 여섯 살 때 봤던 인디언 공연에 끌리고 자연사 박물관에 있던 토템 기둥에 빠지면서 신화 탐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우연이 이끄는 삶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1924년에 가족들과 함께 유럽 여행을 갔다 오는 배에서 만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인도의 명상가 겸 철학가)와 불교, 힌두교 등을 논하면서 인도의 종교와 철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추후 비교신화학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29년 말에는 아버지와 카리브해 크루즈 여행을 하다가 역시 배에서 만난 아델 데이비스(미국 작가, 영양학자)와도 깊은 친분을 맺었다. 훗날 그녀로부터 존 스타인벡을 소개 받아 그와 함께 살아있는 그들의 영웅(Ed Ricketts, 미국 해양생물학자)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도 했고, 교수가 된 후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대표작들 - <천의 얼굴을 한 영웅>, <신의 가면> 등을 출간하기 전에 신화의 이미지를 차용한 소설을 먼저 썼다고 하니, 참으로 우연을 도약으로 승화시킨 삶을 산 표본이라 하겠다

 

조셉 캠벨은 처음에는 다트머스 대학교에 입학해서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했으나, 곧 자신이 인간에게 관심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고 콜럼버스 대학교로 옮겨 영문학과 중세문학을 전공한 뒤에 프랑스 파리대에서 중세 프랑스어를, 독일 뮌헨대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다. 공부를 마친 뒤, 1929년에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대공황으로 인해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캠벨은 뉴욕의 우드스탁이라는 곳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5년간 외상으로 구입한 책을 읽으며 동, 서양,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비교, 연구해서 미국 최고의 신화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4년에 사라 로렌스 대학교에서 신화를 가르치는 교수가 된다. 이 후 1972년에 은퇴할 때까지 38년간 비교신화 등을 가르쳤는데, 이 곳에서 제자였던 무용가 진 애드먼을 만나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았다. 두 사람은 49년의 결혼 생활 동안 서로 매우 사랑했다고 하는데, 둘 사이에 자식은 없다.

 

사라 로렌스 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초기에는 신화적 주제를 기반으로 한 소설을 주로 썼는데, 이 이야기들은 캠벨의 사후에 <신화적 상상 (Mythic Imagination>이라는 유고집으로 출판되었다.

1949, 그의 나이 47세 때 미국에 신화 열풍을 일으킨 <천의 얼굴을 한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을 시작으로,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1972), <야생 수거위의 비행 (The Flight of the Wild Gander)>(1969),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 4부작(1959~1968)과 그의 신화 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의 이미지 (The Mythic Image)>(1974) 등을 저술했다.

 

 

빌 모이어스 (Bill Moyers: 1934.06.05 ~ )

빌 모이어스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정치 해설가이며 한 때 (1965~67) 백악관 대변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CBS, PBS, NBC 등 주요 방송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당대 석학들을 인터뷰해 대중에게 그들의 삶과 학문 성과를 쉽게 소개하는 데 독보적인 역량을 보였다.

1986년에 빌과 그의 아내는 Public Affairs Television’를 설립하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을 제작하는데, 그 첫 작품이 바로 이 책 <신화의 힘>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조셉 캠벨과 함께 나눈 대담이다. 1시간 분량의 인터뷰로 6회가 제작되었는데 1988년에 PBS에서 방영된 후 신화에 대한 대중의 큰 관심을 가져왔고 시청자들의 요청에 의해 캠벨의 사후에 대담집 <신화의 힘>이 출판 되었다.

<신화의 힘>에서 빌 모이어스는 단순히 미리 준비된 질문을 보고 읽는 인터뷰어가 아니라 조셉 캠벨로부터 신화의 핵심적인 기능에 대한 답을 이끌어내거나, 성경과 신화를 비교하는 대담을 나누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신화와 종교에 대해서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기에 가능했다.

 

번역가 이윤기 (1947.05.03 ~ 2010.08.27)

번역문학가, 소설가 그리고 신화학자. 영어도, 종교학도 전공하지 않았지만 그는 20여년간 200권이 넘는 책을 번역하였는데 특히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 움베르트 에코의 번역과 <신화의 힘>,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등 신화학 전문 번역으로 유명하다.

그의 소설 첫 데뷔작은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하얀 헬리콥터>지만 그 이전에 번역부터 시작하여 이미 번역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지는 않았으나 1991년 미국으로 건너가 1996년까지 미시간주립대학교 국제대학 초빙연구원을 지냈으며, 1997~2000년 동대학교 사회과학대 비교문화 연구원을 지냈다.

이후에는 번역보다는 창작 작품 쓰기에 집중하여 장편소설 <하늘의 문>(1994), <햇빛과 달빛>(1996), <뿌리와 날개>(1998), <나무가 기도하는 집>(1999), <그리운 흔적>(2000) 등을 썼고, 소설집 <나비넥타이>(1998), <두물머리>(2000), 산문집 <무지개와 프리즘>(1998), <어른의 학교>(1999),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2000), <이윤기가 건너는 강>(2001) 등을 출판했다.
1998년 중편소설 <숨은 그림 찾기 1>로 제29회 동인문학상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한국번역가상과 소설집 <두물머리>로 제8회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

8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10 그리스 신들 따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대단히 현대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11 “~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우리의 교육은 직관보다는 합리적 사고, 감성보다는 이성이 우월하다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나는 타고난 기질도 그렇거니와 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스스로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는 합리적 사고며 이성이며 다 소용없더라. 그냥 마음이 좀 더 끌리는 쪽으로 가더라. 직관의 힘을 믿자.

 

12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구도자보다는 영웅이 더 위대할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영웅보다 구도자의 삶에 더 끌린다. 영웅의 그릇은 아닌가 보다.

 

12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13 “그는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해골에게 새 생명을. 너무나도 적절한 비유다. 나도 언젠가 이런 비유를 할 수 있게 되기를

 

14 저널리스트들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워나갈 수 있는 희한한 면허증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렇다. 우리 저널리스트들은 평생 교육의 전당에서 세월을 보내어도 좋은, 참으로 재수가 좋은 사람들이다.

한 때 저널리스트가 되기를 꿈꾸었고, 공부했던 사람으로 매우 공감한다. 저널리스트는 못 되었지만 지금의 나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걸 좋아하고, 깊이가 없는 얕고 다양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나도 재수가 좋은 사람일까?  

 

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 끄는 것은 아니라오.”

 

15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스스로의 삶이 유혹이 되는 삶. 어떻게 되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으로 보여주는 것. 지난 한 달간 지속적으로 보았던 삶이다.

 

18 영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인간의 믿음에 관련된 문학에서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인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해방되지 못하면 세계의 종교는 (오늘날 중동과 북아일랜드에서 그렇듯) 타인에 대한 능멸과 공격의 수단밖에는 되지 못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그는 이것을 영원의 가면이라고 이름한다. 영원의 가면은 그 영광의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言表)한다,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

 

21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또 한번 지난 한달간 지겨울 정도로 들었던 삶 자체가 유혹이 되는 삶이 떠오른다. 역시 난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28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28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많은 사람들이 완벽을 꿈꾸고, 완벽하게 준비된 후에야 실행하려고 한다. 그래서 평생 못 움직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이고 불완전한 모습이 사랑스럽다니왠지 잘 못 살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 곧 삶의 의미하는 걸까? 말이 어려워서 즉 번역이 잘 안 되서 이해가 어려운 건지 의미 자체가 어려운 건지도 잘 모르겠다. 제대로 이해하면서 책을 읽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30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5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사춘기 의례가 필요한 까닭이 거기에 있지요. 원시 사회에서는 이빨을 쪼아낸다거나 몸에 상처를 낸다거나 할례(割禮)를 베풀거나 하는 사춘기 의례가 있었어요. 이러한 의례를 거치면 어린이의 몸은 더 이상 어린이의 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38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雜學家)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학자들을 이렇게 부르면 큰일납니다만)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캠벨은 당연히 신화 전문가라고 생각했는데 스스로를 전문가가 아니라 잡학가라고 부른다. 얕게 많이 알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과 흥미를 갖고 배우고자 하는 내가 모델로 삼아야할, 추구해야할 길이 아닌가 싶다. 훨씬 인간적이라고 하시니참으로 다행이다 싶다.

 

46 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에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 숲속에는 식물의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됩니다.

동물이 의식이 있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식물도 의식이 있다니그동안 우리집에서 얼마나 많은 식물을 말려 죽였던가. 반성해야겠다.

 

47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 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54 제 막내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번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겁니다.

 

58 나는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에서 봅니다. 거기에서는 서양의 3대 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 받고 합니다. ?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들은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를 열어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 고리는 폐쇄 회로인 것이지요. 각기 우리야말로 선택된 백성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그러게. 결국 하나의 같은 신인걸. 저 세 종교만 그럴까? 우리는 같은 신을 다른 모습으로 부르고, 형상화하고 있을 뿐인데, 나의 신만 진정한 신이고, 너의 신은 틀렸다고 한다. 이건 다르다도 아니다. 결국 같은 신이다.

 

74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75 신화의 세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重婚)의 신화도 있고, 단혼(單婚)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 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 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 도덕률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삶의 법 같은 것 말이지요.

 

76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 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여러 기능 중에서 내가 꼭 배우고, 내 삶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기능이다.

 

76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이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77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필요하지만 가능할지, 다소 회의가 드는 부분이다. 설마 스타워즈같은 헐리우드 영화가 이런 기능을 하게 될까?

 

80 “~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 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 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결국 백인들은 인디언으로부터 시애틀을 획득했고, 현재의 시애틀은 MS, 스타벅스 등 세계적 대기업의 고향이 되었다. 이 기업들은 시애틀을 사랑하고 잘 보살피고 있을까?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졸업 후 가장 입사하고 싶었던 기업이 있고, 그래서 가장 살고 싶었던 도시 중의 하나라 왠지 정이 갔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86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왜 이 책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 독실할 기독교인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는지 알겠다. 한국 기독 교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당장 이단이라고 몰릴 것이 분명하다.

 

87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88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보면서, 이 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우리 삶에서 의미심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나는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낮잠을 잘 때를 빼고는 악몽을 꾸는 편은 거의 없다. 대부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생생하게 떠오를 때는 해몽을 찾아보는 경우도 있는데, 나쁜 꿈이라 예상했던 경우도 의외로 좋은 꿈인 경우가 많다. 내가 항상 좋은 꿈을 꾸어서가 아니라 해석을 좋게 하는 것 같다. 역시 꿈보다 해몽이다.

 

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꿈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89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눈 덮인 길에 첫 발자국을 내는 용기. 다른 사람에게 롤 모델이 되어주는 용기.

이렇게까지 되기는 힘들겠지만 영웅이 열어준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정도의 용기는 갖도록 하자.

 

92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이 책의 어려운 내용 중에서도 특히나 이해가 안 되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94 “하느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96 뱀은 끊임없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문득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뱀 역시 삶에 대한 놀라움과 섬뜩함 같은 이미지를 지닙니다.

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100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對極)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102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육체에 사는 자라고 한답니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장을 쓰신 분은 정확히 이해하면서 쓰신 걸까? 원문을 보면 이해가 갈까?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문장이다.

 

105 어느 날 자기라고 하는 신이 내가 있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자기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두려움을 느꼈더랍니다. ~ 영원이라는 것을 인식했으니까요. 그래서 이 자기왜 내가 두려워하느냐? 존재하는 것은 나뿐인데하고 생각했더랍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번에는 외로워지면서, 다른 하나가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일더라지요. 욕망을 느낀 것이지요. 그래서 이 자기가 부풀어, 둘로 나뉘어 각각 남성과 여성이 되어서는 이 세상을 낳았더랍니다.

 

106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처음 교리를 배울 때 많이 하는 질문이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신인데 왜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먹을 거라는 걸 예상치 못하셨나?’ 또는 왜 처음부터 그들이 못 먹게 만들지 않으셨나?’ 여기서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답이 나온다. 결국 인간은 금제를 깨트리고, 불복하는 자유 의지를 갖고 있어서 인간이다. 신이 우리를 그렇게 하라고 만드셨다. 깨트리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114 신화에 관한 선생님의 작업은 저의 신앙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제 믿음을 그때까지 갇혀 있던 문화의 감옥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115 나는 토요일마다 신부님께 고해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토요일만 되면 한 주일 동안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시시콜콜한 죄를 모두 생각하게 되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이럴 걸 그랬다 싶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나는 1년에 고해성사를 딱 2번 밖에 안 하는 날라리 신자이지만 매번 같은 고민을 한다.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몇 달 동안에도 별로 죄를 짓지 않았고 고백할 것도 없는 듯 한데, 그것조차 신의 기준으로 보면 오만함의 극치의 죄다. 그러니 고백성사를 볼 때 매번 뻔한 말만 하게 된다. 정말 단 한번이라도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라고 고백해보고 싶다.

 

116 모든 종교에는 일장일단이 있지요. 즉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일 수도 있고 저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은유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운유라는 것을 오해하여 사실로 해석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됩니다.  ~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 데 잇는 표현법입니다.

 

117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알파요 오메가인 우리의 바탕자리로의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이런게 접신의 경지인가? ‘써야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이루어 나간다…… 언젠가는 나도 경험해볼 수 있는 경지일까?

 

123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125 카톨릭 의례에서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성찬식(聖餐式)입니다. 이 성찬식에서 신도들은, ‘이것은 구세주의 살이고 피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내면을 향합니다. 그 내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역사(役事)하는 거지요. 교회는 이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상을 가르칩니다. 바로 이 명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체험하는 거지요. 성찬식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다릅니다. 내면을 향하고 있지요.

나 스스로를 돌아볼 때 성찬식보다는 고백성사 후에 이런 느낌을 갖는다. 의례적인 고백성사라도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은 후에 새로 시작한다는, “내면을 향한다는느낌을 갖게 되더라.

 

133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 나는 아직 유치한 발상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던가 보다.

 

133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134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138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至福)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결국 천복을 좇으면 현세에서 천국을 경험한다는 그런 말인건가?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43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을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 문제의 해답도 신화에서 배웠어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빛을 내는 전구(電球)인가, 전구가 수레가 되어 실어 나르는 빛인가……

 

158 거미가 아름다운 거미줄을 만들 때, 그 아름다움은 거미의 심성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거미줄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거미가 지닌 본능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삶이 지닌 아름다움 중에 어느 정도가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일까…… 어느 정도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일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지요.

 

162 젊은이들은 제 손으로 그 의례를 만듭니다. 그래서 불량배들이 작당을 하여 설치고 다니는 등의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 불량배의 동아리가 되는 등의 행태는 결국 입문 의례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대학 입학했을 때, 학과와 동아리에서 했던 각종 입문 의례가 떠오른다. 바가지의 술을 한번에 다 마시기, 물에 들어가기 등. 무식하고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아 보이는그것 때문에 동아리를 탈퇴할까 고민까지 했던 그런 의례들이었는데, 사회의 입문 의례가 사라져서 이런 의례들을 만들었던거였나?

 

163 성인식이 입문자를 정신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입문자 개인이게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인식을 거치면, 소년은 전혀 다른, 씩씩한 성인이 되어 제 몫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바보같다고 생각했지만 바가지의 술을 다 마시고 나면,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진정으로 그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속감 같은 게 들긴 했던 것 같다.

 

164 소녀는 초경(初經)을 맞으면서 여자가 됩니다. 여자에게는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거죠. 말하자면 자연이 여자에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초경을 맞으면서 소녀는 여성으로의 변모를 거치는데, 그럼 입문 의례가 없지 않아요? 하지만 알려진 바로는 초경을 치른 여자에게도 입문 의례가 있었다고 해요. 조그만 오두막 안에서 며칠 동안 명상을 하면서 여자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기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오두막에서 무엇을 하는 거죠?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한 몫의 여자가 되는 거지요. 여자라는 게 뭡니까? 생명을 나르는 수레 아닙니까? 생명이 여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생명을 낳고 먹여서 기릅니다. 여자의 힘은 대지의 여신이 지닌 힘과 동일시 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이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소년에게는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외부의 힘이 소년을 성인으로 입문시키고, 개인보다 위대한 무엇인가를 섬기게 하는 것이지요.

 

175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잇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잇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4.     희생과 천복(天福)

178 수우족 인디언이 칼루메트’, 즉 파이프(長竹)를 들면, 먼저 하는 일은 하늘을 향하여 연기를 한 모금 뿜는 것입니다. 태양에게 첫 모금을 마시라고 보내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는 늘 네 방향을 향하여 각각 인사를 보냅니다. 마음의 얼개가 이렇게 된 상태에서 지평선을 향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향해 인사를 보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은 우리네 삶과는 다른 것이지요.

 

179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朝刊)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179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내 삶에는 여백은 많은데, 여백을 그냥 여백으로 흘려보내는 것 같다. 여백이 창조의 포란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처럼 아무것도 안 하는 여백을 유지한다면 앞으로도 창조를 낳기는 어려울텐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책을 읽다 보면 천복을 찾게 될까? 이 또한 알 것도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189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189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섰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나의 버킷 리스트에는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읽기가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녀가 쓴 책들은 제대로 된 책이라고 믿는데….. 소설도 해당된다면 연구원 과정을 마친 후 이 버킷 리스트를 클리어 해보자.

 

195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완벽한 개체입니다. 동물은 가죽에 싸여 있지요. 우리가 동물을 죽이면 이 동물은 영영 죽고 맙니다. 그 동물에게는 그것이 곧 끝입니다. 그러나 식물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식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잇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경우 대궁을 자르면 다른 순이 나옵니다. 기지치기는 식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하고 말합니다.

한철 예쁘고 죽은 줄 알았던 포인세티아에 새로운 잎이 나올 때 깜짝 놀랐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장식용인 빨간 잎은 안 나오고 푸른 잎만 나오고 있다. 빨간 잎은 1회성인가? 아무튼 식물의 생명력을 보고 진심으로 놀랐다.

 

203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 농경문화권에서 그 제물은 곧 신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땅에 묻히고 거름이 됨으로써, 거름이 되어 곡물을 기름지게 가꿈으로써 곧 우리의 양식으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났지요? 바로 그의 육신에서 영적인 양식이 나옵니다.

 

204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209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는 사자(死者)의 신이자 사자의 심판자인 동시에 생명을 생성시키는 신이기도 해요. 이것은,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부활의 기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과도 일맥상통. 지금 나의 삶에 가장 필요한 메타포이다.

 

212 “그는 근본이 하느님의 본체이시나 하느님과 동등하게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음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

이것이 삶이라는 분열된 현장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인 것이지요.

 

213 아벨라르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에다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멀어버린 인간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救主)가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견해가 바로 불일치의 상처로 고통을 당한다는, 중세의 성배왕(聖杯王) 관념에 반영됩니다. 여기에서 상처받은 자는 다시 구주가 됩니다. 성배왕의 고통은 인류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성의 잠을 깨우는 것이지요.

213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 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기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214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역시나 죽어야 하는구나.

 

216 “아하, 이것이 바로 어미의 상징적인 모습이거니…… 새끼를 위해서는 제 몸을 떼어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이 모습……”,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어머니가, 어머니 대지의 상징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낳으신 분이자, 그 살로 우리를 먹이신 분입니다. 우리 어머니의 몸이 곧 우리의 양식인 것이지요.

너무 지나친 상징이 아닌가 싶다.

 

218 인자(人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 쪽으로 열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받는 자는 인간을 조잡한 육식동물에서 참 인간으로 바꾸어 놓을 만한 어떤 본을 보이기 위해 우리에게 옵니다. 이 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민입니다.

 

220 “하느님이 순종치 아니 하는 모든 사람을 거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거든 용감하게 죄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큰 죄인은 연민하는 하느님을 크게 깨달은 자인 셈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역설과 삶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아주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성경에 이런 비슷한 표현들이 꽤 있다. ‘큰 죄인은 연민하는 하느님을 크게 깨달은 자라거나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다. 스스로를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라 이런 표현들이 진심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 옛날 예수님 시절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런 심정이었겠지.

 

222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 합니다.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이 천복을 모르고 산다. 성공이라도 하는 사람마저도 소수다. 그런데 성공해도 따분한 인생이라니….. 천복도 못 찾고 성공도 못하는 인생은?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사는 삶,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삶. 매우 매력적인 말이나 지금까지는 그닥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직 멀었다.

 

224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눈빛이나 낯빛은 몰라도 말이 없던 사람이 말문이 트이는 경우는 많이 봤다. 그런데 꼭 천복이 아니라 본인이 관심이 있는 취미 주로 돈 쓰는 취미에 관한 이야기에도 눈빛이 달라지고 말문이 트이더라. 천복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좀 더 달라질지 궁금하다

 

225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 돈이 중요하겠어요, 천복이 중요하겠어요?

부모가 시키는 건 아닐지라도 부모님이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는 경우는 많은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동양권이나 자식을 키우는데 부모의 (시간적, 물질적) 리소스가 많이 드는 경우에. 우리 세대는 좀 달라질까?

 

226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7 선생님은 천복을 좇는 그 순간 순간에 혹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에게는 그럴 때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

천복을 쫓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시크릿>‘~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문구가 떠오르는 글귀다. 창세 때부터 나를 기다리던 길이라니…… 물론 이것도 메티포겠지만 너무 거창하게 느껴진다.

 

5.     영웅의 모험

231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와 출산 때 죽은 어머니는 똑같이 최고천(最高天)을 배정받지요. 말하자면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니까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는 것’,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지만 최고천을 배정받을 만 한 것 같다.

 

233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235 지역 영웅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지역 신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역 신은 자신에게 정복당한 백성들에게는 원수가 될 테지요. 영웅이냐, 괴물이냐는 우리 의식의 초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지요.

한 민족에게는 영웅이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238 아테나 여신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가서 아버지를 찾으라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를 찾는 일은, 젊은 영웅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아버지를 찾는 일은 곧 자신의 이력, 자기의 이름, 자기의 근본을 찾는 일입니다. 이런 모험은 자진해서 하는 법입니다.

 

239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어쩌면 영웅의 기질이나 자격 같은 것이 우리에게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킨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246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251 전설적인 영웅은 큰 일을 한 사람, 무엇을 세운 사람인 경우가 보통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 새 종교를 세운 사람, 새 도시를 세운 사람,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세운 사람인 것이지요.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이미 세워진, 완성된 곳보다는 아직 불완전한 그래서 가능성, 잠재력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는 모험. 내가 늘 동경하던 모험이다. 현실에 너무 빨리 안주하고 주저앉은 것 같다.

 

257 욕망과 공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로 이 두가지 감정에 지배됩니다. 욕망이 미끼라면 죽음은 낚시 바늘인 것이지요. 아담과 이브는 흔들리고 맙니다. 그러나 석가는 흔들리지 않아요. 아담과 이브는 이로써 자식을 가지고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석가는 삶의 공포에서 놓여나는 방법을 가르치지요.

 

263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다닐 때 내가 그렇게도 휴가만 손꼽아 기다리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까?

 

263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역시 책 속에 길이 있구나. 많이 읽자.

 

265 “컴퓨터를 끄고, 기계를 끄고, 너의 느낌에 따라 너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

식당에서 밥을 한 번 먹으려 해도, 처음 가는 곳에 여행을 갈 때도 일단 인터넷을 검색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봐야 안심이 된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맛있다 해도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별 다섯개를 줘도 내가 관심이 없는 곳이면 아무 소용없는 것을…… 다른 사람의 취향에 따른 식사나 여행이 아닌 나의 마음이 가는 여행을 하고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자주 흔들린다.  

 

269 영웅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련을 겪으면서 무서운 밤바다를 여행해야 합니다. 이 무서운 밤바다 여행에서 이 어둠의 에너지를 극복할 방법을 깨닫게 되면 마침내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지요.

역시나 고통없이 얻는 것도, 깨닫는 것도 없다는 것은 진리.

 

270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싶다.

 

272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어쩜 2주 전 칼럼에 썼던 딱 그 내용이다. 10여년 전에 내가 친구와 했던 일이 바로 금기를 깨고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을 해보자는 거였는데…… 마침 함께 했던 친구는 용문신을 했었는데, 그때 그 친구는 용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럴리는 없었겠지만 왠지 심상치 않은 우연이다. 그 때 서른을 맞는 의식으로 했던 내 안의 금기 깨기. 앞으로도 두려워하지 말고 내 안의 용을 죽이자.

 

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273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나를 엄중히 감시하고 다그치는 또 다른 나, 그게 바로 내가 죽여야 할 용이었구나. 하루 빨리 없애도록 하자.

 

276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죠.

 

278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직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뿐 아니라 스핑크스의 저주도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279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口號)였지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리 없지요. ~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화 대사인줄만 알았는데,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죽기에 좋은 날’, 어떤 날이었을지 궁금하다.

 

284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낙타에게 그대의 미래, 낙타를 순치(순치)하는 수많은 강제[must]인 겁니다. 낙타는 이 순치를 통하여 인류의 동물에서 문명화한 인류의 동물로 변모합니다. 그러나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285 개중에는 날 준비가 끝났는데도 제자를 계속해서 학교에 잡아두는 스승도 있어요. 이렇게 되면 제자는 아주 다루기 까다롭게 되어가면서 결국은 스승을 험담하게 되지요. 이건 전적으로 스승의 잘못입니다. 스승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합니다.

스승뿐 아니라 이런 부모, 이런 상사도 아주 많은 것 같다. 제자가 또는 부하 직원이 본인을 뛰어넘을까봐 날 때인거를 알면서도 모른척 잡아두는 스승이나 상사도 많다.

스승을 뛰어넘지 않는 제자는 스승을 욕보이는 제자다.’ 라고 말씀하셨던 구본형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스승의 날을 앞도고, 참된 스승도 제대로 된 제자도 보기가 어려운 듯 하다. 나는 그런 제자였는가? 참된 스승이 없다 탓하기 전에 내가 스승을 빛 낸 제자였는지 먼저 반성해보자.

 

286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 밖에 없지요.

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내가 언제 행복한지 관찰하고 기록하는 연습을 해 보자.

 

296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涅槃)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수성)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297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 또한 그만큼 큽니다.

‘The greater the temporary pain, the greater the eternal gain’,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苦盡甘來. 동서양이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면 맞는 말인 듯 하다.

 

299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부처가 말한 니르바나는 바로 이러한 종류의 평화의 중심점입니다.

 

301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 그러나 타인에게 자비의 문을 열고 온 가슴으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요.

 

302 깨달음의 경험은 성자나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군요.  

 

303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결국 내 삶의 영웅이 되기 의해서는 고통을 겁내지 않고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냐에 있다. 5장은 다른 부분에 비해서 좀 이해가 쉽다.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311 우리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 몸, 우리 육체의 형상과 이 만물을 짓는 에너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315 교황이 되어본 남성은 많아도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어본 남성은 없잖아요. 서로 맡는 역할이 따로 있는 겁니다. 여성을 보호하는 것, 그때는 그게 남성이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서로 맡는 역할의 다름, 차이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갈수록 퇴보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322 두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에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333 “예수님 안에서는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 ~ 만일에 예수가 우리 존재의 근원이라면 우리 모두가 곧 예수의 생각이자 마음인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육화(肉化)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334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버지로부터 본성을 받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 같다.

 

336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337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사람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나의 천복을 따를 때 누가 어떤 협박을 할까? 아마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나 협박의 종류는 가족 특히 부모의 기대에 어긋났다는 실망이 아닐까? 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삶과 행동이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348 “저와 파울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랜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맞춤을 나누는 대목을 읽다 말고 저와 파울로를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러고 나서는 그날 그 책을 한 줄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349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이지요.

349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이런 거지요.

 

350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350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험으로부터만 구하는 지혜가 진정한 지혜일지는 잘 모르겠다. 사회가 개인을 기르고 꽃피게 하기 위해서 기능해야 한다는 시각은 정말 부럽다.

 

355 바로 눈과 눈의 만남인 거지요. 그래서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 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

 

359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조셉 캠벨의 이상주의적 생각이 잘 드러난다. 매우 이상주의자였던 듯 하다.

 

364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쪽을 발견했을 때, 여기에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364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역시나 이상주의자적인 면모가 보인다.

 

365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367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368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문득, “나는 이 사람을 전부터 알고 있다”, 혹은 이 사람을 좀 더 일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에 관한 자기 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 미래에 대한 반응인 것 같아요. 미래는 우리에게 미래의 모습을 이럴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준다는 거지요. 시간의 신비, 시간의 초월성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굉장히 심오한 신비와 만나게 되지요.

이런 느낌이 미래에 대한 반응이라니…… 심오한 신비는 맞는 것 같은데, 참 신선한 시각인 것 같다.

 

373 어머니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떠나보내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지요. 어머니는 , 그 영적인 스승의 말에 따라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주다보면 결국 자기 아들도 포기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373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8.     영원의 가면

37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신의 일에 그것도 많이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380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나 된 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도 없고 도 없어요.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버린 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신의 은유적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곧 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라고 하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382 우리는 하느님이기는 하느님이되, 자아에 집착한 상태로의 하느님인 것이 아닐, 우리 자신이 비이원적(非二元的) 초월자와 하나가 되는 깊디깊은 존재의 차원에서만 하느님인 겁니다.

 

383 예수가 지금 이 세상에 있다면 기독교인일 것 같습니까?

우리가 아는 종류의 기독교인은 아닐 겁니다. 명상을 통해서 고도로 영적인 신비와 만나는 은수사(隱修士)나 수녀들이 있는데, 예수도 아마 그런 기독교인이 될 겁니다.

나도 몇 번 했던 질문이다. 은수사나 수녀까지는 몰라도 흔히 볼 수 있는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 신자가 아닐 것은 확실하다.

 

384 “믿사오니, 저의 믿음 없음을 깨우치소서.”

오늘도 이런 기도를 하고야 말았다.

 

393 우리의 정신 안에는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지요. ~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 다른 나라나 문화권에 따라 사람은 참 다른데, 또 많이 비슷하기도 하다. 이래서 여행이나 다른 문화권의 친구를 사귀는 게 재미있다.

 

394 우리는 신의 이미지에 따라 만들어졌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원형이에요.

 

396 다른 사람들도 똑 같은 앎에의 갈망을 체험하고, 인류의 언어를 초월해 있는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신앙을 돈독하게 할 망정 신앙에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군요.

 

398 두번째 경기 때인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기게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졌어요. ? 계주(繼走)인데, 내 앞을 뛰던 선수가 나에게 바통을 넘겨 주었을 때, 상대편 선수는 나보다 30야드쯤 앞서 있었어요. 그런데도 나는 이긴다고 확신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길 걸 미리 알고 있었어요. 이게 나의 절정 경험입니다. 그날은 어떤 선수도 나를 이길 수 없었어요.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어요. 내 평생 그날의 두 경기만큼 내가 완벽하게 해낸 것은 없습니다. 온 몸으로 온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경주를 끝낸 그 경험을 나는 잊을 수가 없어요.

신내림같은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비슷한 순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이런 느낌과는다른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하다.  

 

399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 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 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

 

409 필멸(必滅)의 팔자와, 우리 안에 있는 초월적 영생불사의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413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성인이 되면 기본적으로 본인의 의식주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느라 다른 사람에게 기생하는 삶, 많이 본 것 같은데 설마 그런 사람들이 천복을 얻은 삶을 사는 건 아니길 바란다.

 

413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

 

415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라 불린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과 신화와 종교에 식견이 높은 저널리스트인 빌 모이어스가 신화에 대해 나눈 대담을 정리한 책이다. 처음부터 책을 만들기 위해 쓰여진 글이 아니고, 6회의 TV 대담 프로그램을 편집한 책이라 전반적으로 볼 때 중복되는 부분이 다수 있고, 흐름이 매끄럽지 않거나 저자의 의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도 상당수 눈의 띈다.

 

l  목차

이 책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PBS 대담 프로그램은 각 한 시간 분량의 6회분이었다. 각 에피소드의 타이틀은 The Hero's Adventure (영웅의 모험), The Message of the Myth (신화의 메시지), The First Storytellers (첫번째 이야기꾼), Sacrifice and Bliss (희생과 천복), Love and the Goddess (사랑과 여신), Masks of Eternity (영원의 가면) 이다.

그런데 6회를 여섯 개를 8개의 장으로 나누면서 ‘2. 내면으로의 여행‘6. 조화 여신의 은혜가 추가되고 이 장에 해당되는 내용들이 각 에피소에서 잘라져 나와 두 장으로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중간에 잘린 듯한 부분과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부분들이 다소 있다. 그냥 6장으로 출판했더라면 어땠을까? 각 장의 내용이 조금 많더라도 오히려 이해하기는 더 쉽지 않았을까 싶다.

l  보완이 필요한 점

이 책은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질문과 대답을 거의 그대로 글로 옮긴 수준이다. 아니 오히려 방송으로 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둘 사이의 케미스트리가 책에는 옮겨지지 않아서 책보다 방송을 보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웠다. 말과 화면을 문자로 전환했을 때 빠진 부분도 있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빠진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빌 모이어스는 일상 생활을 통해 종교적인 지식이 매우 풍부하고, 그간의 조셉 캠벨과의 교류를 통해 신화에도 꽤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인터뷰어와 20세기 최고의 신화학자라고 하는 조셉 캠벨과의 대담을 기본 지식이 부족한 일반 독자가 따라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내용 자체가 어렵거나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려워진 부분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어려운 내용이다. 둘의 대담 중의 인용부분을 별도로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책 속에 등장하는 그림에는 제목만 있고, 그림에 대한 설명은 따로 없이 해당되는 대화가 발췌되어 있는데, 그냥 그림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편집자의 품이 더 들긴 했겠지만 독자의 이해를 훨씬 도왔을 거라고 예상한다.

l  이 책의 장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종교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같은지, 다른 지역의 신화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l  내가 저자라면  

방송을 볼 때는 비언어적 표현(non-verbal language)과 자료 화면이 적절히 배합되어서 오히려 책을 읽는 것보다 이해가 쉬웠다. 그런데 언어적인 부분만 문자로 옮기다 보니 오히려 더 어려운 책이 되었다. 내가 저자라면 대화를 그대로 옮기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다시 글로 작성해서 책으로 출판했을 것 같다. 대담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을 떨어질 수 있겠지만 신화를 처음 접하는 독자가 너무 어려워서 몇 장 읽다가 흥미를 잃지 않게, 쉽게 진행할 것 같다. 그리고 동양의 신화를 인도만이 아닌 동아시아 (,,) 국가와 동남아시아 국가로까지 확대했을 것 같다. 그러면 비슷하지만 또 다른 신화의 면도 비교가 되어서 훨씬 풍부하고, 비서구문명권 독자에게까지 큰 호응을 얻는 책이 되었을 거라고 본다.   

l  내가 번역자라면

최초 번역이 1992년도에 되었음을 감안할 때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한자 사용이 많다. 심지어 한국 문학이나 일반인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자도 꽤 있어서 어떤 단어들은 사전을 찾아봐야했다. 내가 번역자라면 한자의 사용을 가능한 자제하고 쉬운, 현실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번역했을 것 같다.

그리고 책을 원본 없이 번역본만 읽어보고 배경지식이 없는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 정확하게 이해가 되는지 확인해 봤을 것 같다. 만약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역자주등의 형식으로 보충 설명을 추가했을 것 같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 TV 대담을 책으로 편집하는 것도 방대한 세계의 신화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도 매우 어려웠을 거라 예상한다. 어렵기는 했지만 신화와 종교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어서 책을 읽는 동안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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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0 07:49:17 *.124.22.184

저와 생각이 비슷하네요. ㅎㅎ

수정님 보면 순간순간 제 모습이 보여요. '네 안에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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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2 14:35:54 *.152.162.147
네 저도 웨버님 글 보면서 깜짝 놀랄 때도 있어요. 내가 쓴 글인가 해서... ㅎㅎ
비슷한 생각과 느낌을 공유할 수 있으면서도 또 저와 다른 점은 배울 수 있어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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