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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6일 00시 48분 등록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구본형

200451세에 처음 쓰고 2007년 개정한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는 저자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한다. 쉰 살이 넘어 5010년의 아름다운 풍광을 10개 그려볼 수 있게 된 것도 이 책 덕분이라며.

“50살이 되던 날 아침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앞으로 50대의 10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난 10년을 회고할 때 참 잘살았다고 생각할 만한 열 개의 장면이 있다면 그게 뭘까? 일단 1년에 한 권씩 책을 쓰는 일입니다. 열권의 책을 끊임없이 쓰는 저자가 되자. 둘째는 나만의 방식으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내자. (중략) 그리고 좀 더 많은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 일 년에 두 번은 열흘 정도씩 긴 여행을 가겠다. 이런 다짐 열 가지가 있어요. 그일 외의 다른 것에는 시간을 쓰지 않았더니 내가 바라는 삶에 가깝게 살 수 있더라고요.” 라며 인터뷰 기사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미래의, 혹은 과거의 10년을 위해 (History도 아니고, Herstory도 아닌)Me-story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변화경영연구원 지원서가 개인사였던 것이 이런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자서전은 나이 먹어 쓰는 회고록이고, 통상 죽기 전에 한 번 쓰는 것이다. 그러나 10년에 한번씩 자신의 인생을 결산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구본형은 40대의 10년부터 시작하게 되었지만, 만일 20대나 30대부터 기록할 수 있었다면 훨씬 젊은 시절에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 적어도 그때 10년 후의 세계를 예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한 개인의 역사라고 인식했으면 한다.”

혁명사를 전공한 저자답게 평범한 개인의 미시사(微視史)는 본인이 남기지 않으면 유실된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자신의 세계도 없다. 기록의 형태는 일기여도 좋고, 메모여도 좋고, 홈페이지여도 좋고, 사진첩이어도 좋고, 이 책 같은 자서전의 형태여도 좋다. 무엇이 되었든 개인의 역사는 스스로에 의해 편찬되어야 한다. 이것이 군중 속에서, 군중으로, 흔적 없이 매몰되어 가는 자신을 잊지 않는 길이다. 사라진 문명이 되지 않는 것, 나아가 남은 시간을 찬란한 문명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 프로젝트(Me-story Project)가 절실한 이유다.” 라고 개인의 역사를 쓰기를 권유한다.

 

그래서 My-story가 아닌 Me-story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59세에 돌아가셔서 을 쓸 수 없었을 거다. 아마 살아계셨다면 을 이야기하는 책이 지금은 출판됐으리라.

 

첫 책은 자기계발서, 이번 책은 자서전, 다음 책은 여행기, 마지막은 편지글. 같은 저자의 다양한 형식의 글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이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프롤로그

나는 40대의 10년을 기록하여 내 개인사에 대한 첫 번째 실록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야기를 기술하는 방식은 역사와 소설의 중간 형태를 취하기로 했다. (16)

한 번쯤 개인사를 정리해서 글로 남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장 지난 10

마흔아홉이 거의 저물어갈 때 이 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21)

나의 마흔아홉이 저물어갈, 올 가을 이후 이런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마흔 살은 오래 끓어 걸쭉해지기 시작한 매운탕이다. 바야흐로 인생의 뼛속 진국이 우러나오는 시기다. (21)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들이 얼마 전에 물었었다.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난 지금이 좋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철이 들었고 세상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고민했다.

마흔은 한 움큼 잡히는 옆구리 살에서 시작한다. 술 취한 다음 날 아침이 괴로워지고 숙취가 길어지면 마흔도 익어간다. 읽기 위해서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고 신문을 점점 멀리 보내면서 마흔의 황혼기로 접어든다. 조금씩 내려앉은 잇몸, 새벽 2시의 불면증 당혹스러운 건망증, 우두둑거리는 어깨 관절뼈 소리를 들으며 어느덧 마흔 아홉이 지나간다. (22)

마지막을 제외하고 다 해당된다. 마흔 아홉이 안지나서인지 마지막은 해당이 안 된다. 불면증은 개인차가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의 궤멸은 늘 내부로부터 온다. (22)

마흔이 넘으면서부터 가끔 불면에 시달려야 했다. 이유는 분명치 않다. 분명치 않은 모호함이 나를 불쾌하게 했다. (23)

나도 간혹 그러긴 했지만 이유는 분명했다. 너무 생각이 많을 때였다. 그래서 일어나 노트에 생각들을 정리하고 나면 다시 잘 수 있었다.

내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찾아오면 싸우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24)

어쨌거나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 (24)

불면증은, 적어도 나를 찾아온 이놈은 약간 묵직한 음률을 좋아하는 것 같다.... 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괜찮다. (25)

불면은 내게 또 다른 고독을 즐기게 해주는 방법이다. (25)

갱년기가 오면 불면증 때문에 힘들어할 수 있다고 한다. 대처법을 생각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불면을 즐기는 방법으로 거대한 프로젝트 하나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남은 시간동안 내가 인생 전체를 놓고 이루어야 하는 이미지에 대해 그려보기로 했다. (26)

지식은 지식에 적용됨으로써 증식된다. 그리고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체험한다. (26)

50대가 되기 전에, 노인의 모든 특성이 나타나는 그 끔찍한 나이가 오기 전에, 아직 젊음이 늦여름처럼 무더운 이 40대에 마지막 폭염 같은 사랑으로 성년의 절정을 매듭짓고 싶어한다. (27)

글쎄, 이건 잘 모르겠다. , [은교]에서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없이 소리쳤던 주인공이 생각난다.

하긴 예전 직장 생활할 때 40대였던 부장님이 주위에 다들 배우자말고 이성친구들이 있다고 하긴 했다. 그 당시 30초반이었던 나는 40대가 되면 다 그런가보다 했었다.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가축이다. 그러나 반밖에 길들여지지 않아 늘 울타리 밖으로 튀어나가고 싶어한다. (30)

재미있는 비유다. 남자의 욕망을 합리화시켜주는...

절실하게 바라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한다. ‘이내 스스로를 함부로 던져 망가뜨리고만다. (30)

현실은 늘 죽음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오직 삶만이 현실의 위력에 눌려 죽어지낸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현실적으로밖에 살지 못했던 그 초라한 현실을 후회한다. (31)

첫 오프모임 과제로 작성한 유언장 내용을 보니 딱 맞는 말이다. 감사와 안타까움으로 후회가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현실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야 초란한 현실이지만 살 때는 그것만을 위해 살게 된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자제와 절제를 현명함으로 불렀던 그 어리석음은 또 어떻게 하랴. (31)

이 또한 균형이 필요한 것 같다. 그렇다고 자제와 절제 없이 욕망대로 살 수는 없다.

마흔조차 흘러간다. 무엇을 했단 말인가! 무엇을 이루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흔 살은 성취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라는 점이다. (32)

마흔이란 나이가 젊지만은 않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나이여서인 것 같다.

마흔 살에 들어서면서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눈이다. 신문을 자꾸 멀리 두게 되고, 깨알 같은 글씨를 볼 때는 끼고 있던 안경을 머리 위로 재빨리 얹게 된다. (32)

난 이거보다 더 심하다. 근시, 원시에 난시까지. 그리고 안구건조증. 눈에 관한 한 총집합이다. 어쩔 땐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이 든다. 에고...나이듬이 힘든 건 없는데 눈만은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 가장 마흔다운 것은 건망증이다. ... 무언가 잊은 것은 분명한데 그게 뭔지 모를 때도 있다. (34)

일상에서의 건망증은 괜찮다. 이 건망증이 강의 중에도 나타난다. 분명 어떤 얘기를 하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는데 정작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뭔지 그새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40대의 모든 부정적인 현상을 나열하는 것은 노화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죽음에 다가가는 어둠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육체적 쇠퇴가 주는 또 다른 성숙한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었다. (35)

나는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곧잘 낙관적인 정신적 전환에 성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 이것이 나의 강점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36)

나와 같은 점이다. 나 역시 이렇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난 그 일의 좋은 점을 알아차린다. 그러면서 해결책이든 수용이든 맘 편히 받아들인다.

40대는 이제 특별한 사회적 상징을 담은 단어가 되었다. 그것은 가장 정력적인 나이에 버려진 나이다. (37)

마흔은 앞으로 길게 남은 인생을 책임질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38)

너무 어린 나이에 뒷방 노인이 된 마흔이여. (38)

 

2장 마흔 살

지나간 과거에서 아무것도 건져내지 못할 때 마흔 살 남자는 낙엽처럼 부서지는 허망함 속에 서 있게 된다는 것을 너희처럼 새파란 것들은 알 수가 없는 거야. (44)

나이든 사람 중 나이가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 있다. 일명 꼰대.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이런 투의 말이다.

일밖에 없는 일꾼은 성공한 실패자가 되고, 부유한 노예가 되고, 가족에게 미안한 가장이 되고, 늘 바쁜 아비가 되어 무자비한 사다리의 꼭대기를 향해 질주한다. (44)

누군가의 칭찬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무엇인가 정말 괜찮은 것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45)

그럴까? 칭찬에 연연하는 것이 그저 그 칭찬에 맞게 살려고 하게 되는 것인가. 난 칭찬 덕분에 지금이 있고 얻게 되었는데... 이것과는 다른 의미인걸까.

마흔이 되었을 때, 내게는 나의 세계가 없었다. 내 삶은 줄거리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창조적 주체가 아니었다. 그저 짜여진 일과 속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46)

그래도 난 마흔이 되기 전에 마흔을 터닝 포인트로 준비를 하고 전혀 다른 분야를 도전하고 배웠다는 거다. 그래서 지금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또 나머지 생을 위해 또 다시 기웃거리고 있다.

지금 있는 곳의 위치를 알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우선 내가 있는 이곳을 객관화할 수 있는 지도 같은 것을 보고 싶었다. (47)

마흔이 되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지치게 된다. 일상의 걱정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 가장 필요한 내적 성찰이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 마흔 살이 되면 문제를 끼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러니까 빼도 막도 못 하는 시기다. (48)

일 때문에 놀이를 포기하고 책임 때문에 순수한 자유를 반환하게 되는 일상적 경험을 통해, 마흔 살은 개인을 군중과 대중 속의 이름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넘어, 자유와 전통적 권위 사이의 힘 겨루기를 넘어, 진정한 사회화를 겪게 되면서 보수화된다. (49)

마흔이 집에서는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책임감을 갖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중간 관리자의 지위로 또한 책임감을 갖게 되는 나이는 맞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만족만을 추구할 수는 없게 된다. 하지만 보수화되는 나이는 좀 이른 것 같다. 마흔은 갈등하는 시기가 맞는 것 같다. 이때의 사고와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보수도 되지만 깨어있는 노년기를 보내기도 한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50)

무슨 근거로 아주 소수라고 하는 지 모르겠다. 저자가 만나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님 그럴 것 같은 것에서 추측한 것인지.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으나 내가 본 마흔은 구체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지내서 인지도 모르지만...

사람마다 인생의 시간표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이미 30대에 마흔 살의 조짐이 나타난다. 반면에 마흔을 지나 한창 인생이 익어가는데도 마법의 환상에 빠져 있는 젊은 중년도 있게 마련이다. ... 요즈음에 그런 꽃들이 더 많이 늘어난다. (51)

실제로 마흔 살은 무엇인가를 많이 해놓은 시기이기도 하다. 극히 가난한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빚에 쪼들리는 것도 아니고, 감옥에 갇혀 자유를 속박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51)

맞다. 마흔 정도면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느끼는 사람조차 이뤄놓은 것이 많다. 단지 그냥 삶에 치여서 그저 일상의 반복으로 살아왔느냐 나름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살아왔느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외형으로 보이는 삶만으론 이야기할 수 없다.

위대한 인생의 그림이 마흔이 되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적인 관심이 자신에게서 가족에게로, 자식에게로 전이되는 것이다. (52)

마흔이 넘어서는 여성들은 이때 깨어난다. 여성의 마흔 살은 남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남자는 마치 지는 해처럼 시들지만 여자들은 뜨는 보름달처럼 절정을 향해 달린다. (52)

~ 남자의 마흔과 여자의 마흔이 다른 거였구나.

중년의 여성은 남성으로 변한 여성이다. 성숙한 여성은 남자가 잃어버린 남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 여성은 현명해지고 다소 교활해지며 강해진다. (53)

익히 들어왔던 이야기다. 호르몬 분비가 그렇다고 하는. ‘교활쾌활로 읽었다. 난 마흔 이전에 남성으로 변한 여성이었다. 건설 분야에서 일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들은 숨어있는 자신의 힘과 재능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의지하여 일어선다. ... 그러나 모든 여성이 사회화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 정신적 에너지를 자기 안의 대상을 공격하는 데 쓰게 됨에 따라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53)

마흔이 넘으면 불운과 실수에 대하여 스스로를 용서하게 된다. (54)

마흔 살은 융통성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보는 긍정적 지혜가 위로가 되는 시절이다. (54)

마흔까지 살아보니 세상살이 뭐 그리 절망적이지도 않고 살면서 부딪히며 해결해나가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너무 미리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는다.

마흔 살 너머의 창조는 학습과 훈련과 가벼운 정신적 태도의 산물이다. (55)

그래서 마흔에도 발잘적인 불꽃같은 창조성을 지닌 사람을 우린 동경하면서도 이질감을 느끼는가 보다.

마흔이 되면 악에 대해서조차 관용적이 된다. 이것은 중년의 융통성이고 미덕이 된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쉽게 도덕적 모호함에 관대해진다. 선과 악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가지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더 관용적이 되는 반면 덜 도덕적이 된다. 그리하여 도덕적 상대주의를 옹호한다. (56)

이게 도덕적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라기보다 본인들 편하게 생각해서 나이듬이 특권적이라 여기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관용적이 되는 것보다 더 고집스럽게 되던데 이 또한 저자와는 다른 생각이다.

40대의 중년도 사회에 불만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분노를 표시할 수 없다. 그들 자신이 바로 그 무능하고 부패한 권위 체계의 일부이며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57)

이건 저자의 40대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 지금의 40대는 자칭, 타칭 386세대로 민주화를 이룬 세대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세대가 다르면 다르게 나타나는 모습을 모든 40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이 따른다. 개인사에 사회사가 연결되기 때문이다.

융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이 쓰고 있던 사회적 가면, 즉 페르소나는 중년이 되면 붕괴한다. 그리고 내면을 향해 들어가도록 강요한다. (57)

이상과 현실의 사이, 3의 지점,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자리, 스스로를 놀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58)

여기까지가 내가 여기저기서 찾아낸 마법의 책에 나오는 마흔 살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이 서술들의 일부가 잘못된 기술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59)

이 부분을 읽고 위의 내 생각들이 잘못 본 것이구나 했지만 이어지는 글에서 나와는 다른 이유이더라. 인생을 연극에 비유한 것에 대한 저자의 다른 생각이었다.

내게 마흔은 각성의 시기였다. 나는 40대의 10년 사이에 이루어지는 위대한 종결과, 똑같이 위대한 새로운 인생에 대해 말하고 싶다. (61)

전환과 변곡, 이 두 단어야말로 40대를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언어이다. (61)

나는 사람들이 복권을 사듯 살아가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 그들은 위험부담을 줄이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잃어도 좋은 푼돈만 투자했다. (62)

마흔 살은 가진 것을 다 걸어서 전환에 성공해야 한다. (62)

이런 문구 때문에 저자의 책을 본 독자들이 대책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나보다.

 

3장 직장생활

퇴직금은 적었지만 변화경영에 경도된 지난 20년 자체가 내게 남은 막대한 유산이었다. (69)

나는 이 인기 없는, 그러나 모두를 괴롭히는 과제에 집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69)

다른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생각에서 출발한다. 우리 사회가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게 강요받다보니 더욱 고정화되고 생각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남들과 다름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회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로 튀지 말고 평범하게 남들처럼을 지향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평가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지고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가지고 평가하게 마련이다. (70)

승진과 돈은 매력적인 것이지만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71)

직장 생활을 하며 두 가지가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취업포털 잡코리아 20115년 이상 근무한 직장인 630명을 설문조사했다. ‘귀하가 업무 전성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문항에 대한 답변 중 49.9%스스로 일이 즐겁게 느껴져서가 가장 많았다. 의외로 승진은 7.3%, 파격적 연봉은 4.4%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가난은 냄새로부터 온다. 가난의 냄새는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왔고 조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고착되었던 것 같다. (72)

결핍이 꽃을 아름다운 꿈 안으로 몰아넣어 준 것이다. (72)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동기로 결핍은 중요하다. 나에겐 책이 그랬고 배움이 그랬다. 그런 면에서 요즘의 아이들은 특히 경제적 결핍이 없어 무언가 해야겠다는 동기가 생기지 않는 것 같다. 대신 불행하게도 애정 결핍이나 정서적 결핍은 더 심하다. 경제적 결핍을 채우기 위해 맞벌이를 하고 아이들은 정서적 결핍을 겪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일자리는 증발하고 있었다. 오래된 일자리가 사라지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규직 일자리가 점점 줄고 있었다. (74)

평생직장은 사망했고, 평생 직업은 끝없는 학습으로만 가능한 움직이는 타깃이 되고 말았다. (75)

끊임없이 배워야하는 시대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그 배움의 도구가 결국 읽고 쓰기이다. 우리의 교육이 잘못 가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읽고 쓰기가 아닌 획일적, 주입식 지식교육.

무엇인가 다가오고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지고 다시 다른 그림이 닥쳐드는 홀로그램의 세계가 우리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75)

지금의 하기 싫은 일을 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일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직장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80퍼센트는 되어 보였다. (77)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대변되는 일들이 많다. 그 중에 하나이다.

회사의 경영진들은 늘 개탄했다. 남아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은 나가고, 나가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은 늘 남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78)

내가 중소기업에 있을 때 항상 부족한 층이 중간 관리자였다. 신입사원은 일처리면에서 부족한데 얼마든지 채용가능하고 실무에 능하면서 신입사원 업무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직종이면 어디서든 필요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임원급은 변동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요한 사람들은 떠남을 늘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80)

정신적으로 가장 성숙한 40대 중반에, 아직 활력이 넘치는 중년에, 새로운 세계로 나와야 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도전이기도 했다. (81)

불안은 오히려 나를 흥분시켰다. 이 여행이 나만의 여행이 아니라 가족 모두를 데리고 떠나는 가족여행이라는 것이 가장 부담스러웠다. (83)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을 무척 부끄러워했다. (84)

의외다. 저자가 연구원 제도를 만들고 매년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으면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순수한 관계이기 때문에 괜찮았으려나.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적인 일이 아니다. (84)

세일즈가 도망치는 고객에게 달려들어 창을 꽂는 것이라면, 마케팅은 짐승이 다니는 길에 온갖 화려한 미끼를 주렁주렁 단 덫과 올가미를 놓아두는 것이다. (85)

미리 이루어진 설득, 무너진 자기방어를 유혹이라고 부른다. (85)

자신을 변화경영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새로운 직업을 하나 만들어낸 셈이다. (87)

조직과 개인의 변화가 필요할 때 누군가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고,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88)

그러니까 어떻게 연락을 해왔는지, 어디에 변화경영 전문가라고 이야기했는지 이 대목을 읽어봐도 알 길이 없다.

한때는 공부를 더 해볼까도 고려했지만 그만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해놓은 것들을 읽고 분석하며 해석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88)

나는 박사과정을 하지 않은 이유가 박사학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석사나 박사나 과정의 내용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논문은 다르다. 그러니 최소 5년 이상이 걸린다. 지금 나이에 5년이란 시간을 들여 학위를 받는 것보다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더 값지다고 여겼다.

전문가는 학위와 자격증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과거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끊임없는 자기학습에 의해 날마다 새로워질 뿐이다. (89)

학위와 자격증이 전혀 필요 없진 않다. 그 과정 중에 얻는 것도 있다. ‘자기학습에 의해가 자칫 시야를 좁힐 수가 있다. 내가 아는 전문가 중에 대학 중퇴를 하신 분이 있다. 그 분은 개인적으로 많은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해서 아는 지식도 많고 경험도 많은 분이다. 그런데 혼자 책으로 한 공부의 한계가 있다. 모든 분야를 잘 알 것 같지만 의외로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있는 것도 많았다. 배움은 서로 다른 수준들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저자도 석사과정까지는 마쳤기에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회사를 나올 때 내 나이는 마흔 여섯이었다. ‘사오정을 막 지나 아주 평균적인 시기에 나온 셈이다. (90)

나는 마흔 한 살에 회사를 그만뒀다. 원래 계획보다 2년이 늦었다. 지나고 돌이켜보니 그만두길 잘했다. 수입은 1/10로 줄었으나 얻은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유도 없는 우연한 흐름이 곧잘 필연적 운명으로 이어지곤 했다. (91)

나 역시 그랬다. 건설 분야에서 독서교육으로 전환은 아이가 크면서 생긴 교육에 대한 관심이었고 아이에게 맞는 책을 고르고 싶은데 모르니 알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책에 대한 결핍이 채워지기 시작하니 재미있었다. 더 큰 교육으로 넓혀갔다. 교육과정, 교과서, 입시, 진로까지.. 이젠 각 개인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 다른 것에 관심이 생겼다.

 

4장 얼굴-페르소나

얼굴은 놀랄 만큼 유연한 물체다. ...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우리 신체 가운데 늘 벌거벗고 나타나는 부위다. (98)

화장품 가운데 으뜸은 역시 세월이다. 세월은 피부를 거칠게 하고 주름을 길고 깊어지게 한다. (99)

생각은 머리를 통해 눈에 나타난다. 눈은 엄밀히 말하면 두뇌가 밖으로 나온 기관이다. 그러니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눈에 표현되게 된다. 눈이 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100)

얼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눈이다. 사람들은 쌍커풀이 있는 눈을 선호한다. 그래서 성형한 사람들의 눈이 대부분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개성이 없어졌다.

머리 역시 얼굴이고,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스타일을 바꿈으로써 전체의 인상을 다르게 해줄 수 있다. 머리카락이 없다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스타일의 수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102)

자신의 머리에 만족하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 곱슬은 곱슬이라 곧은 머리를 갖고 싶어하고, 직모는 곱슬머리를 갖고 싶어하고, 머리숱이 너무 많아서 싫어하고 등등...

어쩌면 몸 전체에 난 털의 총 수는 사람마다 비슷할 지도 모른다. 정해진 개수를 가지고 나누는 분배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105)

그런 것도 같다. 왜냐하면 머리카락이 부족한 사람들을 보면 다른 부위에 털이 많더라. 남편도 머리카락은 적고 대신 온몸에 털이 많다.

나는 다혈질이기 때문에 교양이 있는 사람처럼 처신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107)

의외다. 많이 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혈질이라니.

나는 절대로 아부 같은 것을 못한다. 나이 들고 교활해져 이제는 가끔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그건 좋은 말 정도일 뿐이고, 아부라 할 만한 정도는 못된다. 이런 비사교성과 비사회성도 내 코가 우뚝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107)

갑자기 허영만의 []이 보고 싶어졌다. 난 얼굴에 대해 이렇게 하나하나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봐서 못생기지 않았으면 됐지 한다. 하긴 내 외모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다. “차갑게 생겼다.” 심지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도 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생긴 걸 어쩌겠나 싶어서다.

하긴 나는 에너지가 펄펄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인생에 대하여 약간 시무룩한 편이어서 맥이 없어 보이는지도 모른다. (109)

다혈질인거와는 다른 건가? 잘 모르겠다.

어리숭해 보이는 것이 훨씬 큰 장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110)

내 얼굴은 다른 사람의 얼굴과 같았다. 그것은 해골에 인피를 씌운 죽어 있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내 생각의 죽음을 상징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았다. 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111)

현대인은 무표정이 너무 당연해 보인다. 혼자 웃거나 화내는 사람, 즉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긴다. 문자나 톡으로 아무리 웃긴 이모티콘이나 문자를 보내도 표정으론 짐작할 수 없다.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의 정신은 조금 미칠 수 있다. 자유에 대한 욕망은 늘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113)

산다는 것은 자신을 재료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115)

세속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종교를 선택한 경우에도, 종교적 도그마에 갇히면 인형이 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다른 종교를 용납할 수 없게 된다. (116)

그렇다. 서로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종교에 대한 폐쇄성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종교인들의 답답함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은 어설픔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움과 긍정의 표상이다. (117)

저자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남과 다름이 자랑스러움이라. 글쎄 난 이것은 자칫 오만으로 빠질 수 있어 경계해야하는 부분이다. 남과 다름은 그저 다름으로 끝나야 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회원 중에 이런 모습이 보인다. 단지 선택으로 사교육을 하지 않음이고 그것이 남과 다름인 것인데 이걸 자랑스러움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럼 사교육을 하는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니 비난도 아니고 자랑스러움도 아니다 그저 다름이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에 왔다. (118)

 

5장 가족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정 하나를 만드는 것, 이것이 몇 년 전부터 내 삶이 의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가 되었다. (123)

아비 역시 스승과 친구의 역할을 모두 해야 하는 것 같았다. (124)

부로로서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 너머 함께 즐기고 어울리며 공유하는 친구로서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124)

부모는 자녀의 나이에 따라 다른 모습이어야 하더라. 어릴 땐 지켜주고 보호하는 보육자, 커서는 삶의 동반자까지 그래서 어렵다.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것이 갈등이 없는 가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싸우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어울려 밤낮을 함께하니 갈등도 없고 싸움도 없이 지낼 수는 없다. 나는 갈등에 대해 늘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갈등은 마음이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125)

사람사이에서 갈등은 당연하다고 나도 생각한다. 소통이 된다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관계와 소통이 빠진 갈등은 그저 갈등일 뿐이다.

사교성이 떨어지는 부부여서 우리는 딸아이의 사교성을 늘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지나치지 않은 적당한 부드러움이 돋보이는 아이다. (127)

그런가 하면 작은 아이는 좀 엉뚱한 면이 있다. 나를 빼닮았다. 생긴 것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다. 약간 느린 것도 그렇고, 시험운이 없는 것까지 닮았다. ...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128)

나도 현이와 참 많이 닮았다. 얼굴은 아니지만 성격적인 면에서 그렇다. 생활습관이나 사고하는 것은 전혀 안 닮았는데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키우면서 힘들지 않았다.

오늘은 무엇을 함께 먹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나는 그런 일들을 즐겼다. (130)

나도 이래야 하는데, 난 이런 고민이 힘들다. 먹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 것에서는 최소한으로 하고 싶다. 못해서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 이리 그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려운지 모르겠다. 잘 먹는 가족들을 보면 즐겁고 또 하고 싶고 그래야 하는데 잘 먹는 가족들을 보면 즐겁기는 한데 거기까지다. 음식 하는 것을 항상 고민하던 엄마의 영향일까. 알 수 없다.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면 잘 되지 않는다.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제 자식을 가르치는 일이다. 감정이 격해지고 더듬거리며 장황하게 된다. (131)

그런 면에서 엄마표를 하는 엄마와 아이는 참 대단한 거다.

나는 의미를 찾는 사람이고 나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이다. ... 나는 멀리 보는 것을 좋아한다. (133)

내 아이들은 내게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적절하고 현명한 세상의 여러 방법이 있지만, 나는 나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려는 경향이 많다. (133)

어쩌면 10년쯤 후에는 지금의 ‘1인 기업이 부녀가 함께 경영하는 ‘2인 기업이 될지도 모르겠다.(134)

2004년 이 책을 쓰고 10년이 안 된 2013년에 돌아가셨다. 독자로서 봐도 안타까운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아내와 나의 관계에서 신혼 초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싸우고 난 후 화해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극히 짧아졌다는 점이다. (135)

오히려 우리 부부는 신혼 초에 싸우지 않았다. 분가를 하고 가장 많이 싸웠다. 우리 문제라기보다 부모님, 가족과 연관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린 절대 며칠씩 말을 안 하거나 각방을 쓰거나 집을 나가거나 하지 않았다. 왠만하면 그날을 넘기지 않았다. 서로 답답해서 말을 안 하고는 못 버틴다. 이젠 좀 현명해져서 예민한 얘기는 기분 좋을 때 슬쩍 얘기한다.

나이가 들면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세계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학교와 친구들의 세계가 가장 중요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136)

보통 중학교를 시작으로 이런 모습들을 보인다. 그걸 또 인정해줘야 하고 그래서 부모들은 나름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나는 마음껏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올 때 자신과 한 약속 가운데 하나였다. (137)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은 그들의 시간과 맞아야 하지만, 내가 일하는 시간은 어느 때고 좋다. (138)

남편에게 예전에 했던 말이다. 부모님만 기다려주지 않는 게 아니라 아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이가 필요할 때 같이 해줘라. 하지만 현실 여건이 안 되는 부모도 있다. 마음은 있으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당장 벌지 않으면 안 되는 계층도 있으니까 말이다. 어쩜 그런 부모들에겐 이마저도 있는 사람의 여유로 보여지겠구나 싶다.

나는 시간의 불모지를 내게 불하했다. 그리고 가장 귀중한 나만의 시간대로 만들었다. (138)

지방 강연이 가장 많이 열리는 곳 가운데 하나가 경주였다. ... 그래서 우리는 경주지역을 가장 많이 다녀왔다. (141)

경주에 사는 동기 기상씨가 생각났다. 혹 저자가 살아있었다면 자주 봤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낮 동안 떨어져 있는 것보다는 함께 시간을 더 많이 보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강연여행이었다. (143)

우리는 딱 한 가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정치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모처럼의 기분을 망치게 되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재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이 그렇다. (144)

정치가는 그럴 수 있지만 정치이야기는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이 세상에 정치가 아닌 것이 없는데 말하지 않는다고 끝이 아닌 것을.

난 친구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사람에게 가는 정이 적어서가 아니라, 수줍어하고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내성적 성격 때문이다. (145)

삶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친구들이다. (146)

난 연락하는 초, , 고 동창들이 별로 없다. 오히려 대학이후 사람들과 가깝게 지낸다. 지금과 학창시절의 내가 다르기 때문일까. 여하튼 결국 동갑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을 친구라 생각한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예의를 지킬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이다. (147)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혼자 그 긴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짐을 각자 지고 함께 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함께 있으면 훨씬 낫다. (147)

6장 자연

봄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꽃샘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겨울보다 추운 바람이 줄기차게 불어댄다. 꽃샘바람은 이른 봄옷을 걸친 성급한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153)

그래서 난 봄에 오히려 감기에 걸린다. 옷을 챙겨입음에도 그렇다. 봄이 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봄이면 졸음과 피곤함이 같이 온다. 그 변덕스런 날씨도 한 몫 한다.

자연이 우리를 설득하는 방식은 늘 같다. 먼저 우리를 감탄하게 하여 혼을 빼놓는다. 상상 너머의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다음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을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한 후 신의 음성을 불어넣는다. (157)

저자는 자연친화지능이 높은 듯하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서보다 훨씬 묘사와 감정이 잘 드러난다. 나는 화초를 좋아하고 기르는 것도 잘한다. 하지만 자연물에 나의 감정이입은 잘 안한다. 나는 여행기를 쓰더라도 아마 사람과 사건 중심이 될 거다.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160)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죽음도 삶의 하나이다.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그러니 부정할 것도 슬퍼할 것도 아니다. 잘 죽을 수 있도록 잘 살면 된다.

사랑 자체가 온갖 변화를 다 껴안고 있는 복잡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삶이다. (161)

때때로 나는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가 가장 마음이 편한 때다. (164)

난 아직 이런 느낌을 가져보지 못했다. 단지 안개 낀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면서 자연의 무서움을 실감하긴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오래된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새로운 시도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하는 것도 수없이 보아왔다. (166)

나무와 나는 어쩌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낸다. (166)

나는 다른 사람을 찾아다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나에게는 발이 없다. 나는 한 곳에 서 있다. 나는 나무와 같다. 스스로의 그늘을 만들고 열매를 키워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고 찾아오게 하는 것이 훨씬 나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7)

변화경영연구소, 꿈벗, 단군의 후예 등 모든 프로그램이 이와 같은 방식이다.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찾아온 사람이기에 훨씬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건 사실이다.

나무는 또한 해마다 새로운 자신을 분만시킨다. ... 이것이 나이테다. (169)

나에게 낙엽은 내 책이다. 꽃과 나뭇잎, 그리고 열매는 나무의 일 년의 삶이다. 내 책도 내 일 년의 삶의 기록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내 일 년도 떨어진다. 그리고 열매를 남기듯 나도 내 책을 남긴다. (170)

~ 이래서 일 년에 한 권의 책을 출판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었구나.

 

7장 건강

마흔이 되면 특히 육체적 연습이 중요해진다. 건강관리가 중요한 일상의 한 부분이 된다. ... 출근하듯 운동을 한다. (180)

제자가 잘나야 스승이 위대해진다. (183)

죽음은 생명과 함께 시작된다. 또한 생명은 죽음과 함께 다시 시작한다. 이것이 생명의 순환이다.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 (184)

철학은 의학을 선도한다. 생각이 늘 기술을 선도한다. (187)

문명은 인류가 여성화되는 과정이었다. ... 여자들은 가축을 길들였고, 마지막으로 남자를 길들였다. (188)

결국 환경도 남성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를 살리는 것이 에커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이 개인의 역사도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동물로 태어나 사회 속으로 던져진다. 그리고 자연과 문명 사이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188)

개인의 삶은 다양하지만 개인의 역사는 늘 자연과 문명의 갈등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189)

마흔은 죽음이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영적인 나이의 시작이다. (199)

영적인 것보다 주위에서 죽음을 많이 보게 되면서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친인척, 주위의 지인들의 죽음과 질병들이 그 어느 나이보다 가까이에 있다.

 

8장 길에서

나는 지금 과거의 한 사건과 미래의 한 사건 사이에 있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고 하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 하나는 추억이고 하나는 꿈이다. 추억과 꿈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 진 것들이다. (206)

사람들은 과거에 갇히는 것만큼 미래에 갇힌다. 추억으로서의 역사와 꿈이라는 소설은 둘 다 인생에 중요한 것이다. (207)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과거시제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일을 과거시제로 쓰는 순간 내게 이미 일어난 일이 된다. (208)

11기 동기가 2020년의 미래를 현재시제로 11기 전체가 책을 출판했다는 내용을 쓴 글이 있다. 이렇게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보다.

내 인생의 결말, 그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무엇이든 꿈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209)

나도 나의 결말을 꿈꿔봐야겠다. 9, 10년 단위의 구체적 목표는 세워보지만 마지막을 생각해보진 않았다. 막연히 매일매일 잘 살면 끝도 나쁘지 않겠지 하는 정도다. ‘나는 교외의 한적한 곳에서 남편과 함께 자연의 변화를 느끼며 여유롭게 살았다.’

나에게는 내 꿈에 대한 믿음이 있다. 다만 훌륭한 상상과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지금의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210)

꿈은 시간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다. (211)

욕망이 꿈을 만들고 꿈은 믿음에 의해 현실적 개념이 된다. (211)

때때로 또 갈림길 앞에 서서 망설일 것이다. 어쩌면 길인지 조차 분명치 않은 희미한 길 앞에서 되돌아가야 한다는 어둠 속의 속삭임 때문에 당황할 것이다. (216)

인생에서 항상 선명한 길만 보인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항상 가변의 상황이 존재한다. 그래서 잠시 쉬면서 어디쯤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해 발간된 책은 일 년 동안의 내 관심사였다. 책 한 권이 나오면 내 일 년 동안의 정신적 여정이 정리된 것이다. (217)

나는 정확한 성격이 아니다. 이야기를 시간별로 차곡차곡 정리하고 쌓아두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218)

늘 자신에게 비추어 자신을 발견하려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221)

사소한 일이 주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인생의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222)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행복은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아니 오래 지속된다면 그건 병적인 것이다. 행복의 순간이 많을수록 좋겠지만 행복도 양보다 질이 우선한다. 행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길은 없다. 이것이 길이다. 하루가 길이다. 하루가 늘 새로운 여정이다. (223)

 

9장 집, 공간

나는 늘 책이 가득한 서가가 있는 서재 속에 앉아 있는 나를 그리워했다. (229)

나 역시 항상 서재가 커서 맘껏 책도 꽂고 책상도 넓고 큰 것을 두고 싶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로망이다.

황제 쿠빌라이는 자신이 꿈속에서 본대로 궁궐을 세웠고, 시인의 꿈은 현실 속에 시를 남겼다. (231)

이게 가능하구나. 꿈에서 쓴 시를 깨고 나서도 쓸 수 있고, 꿈속의 글을 깨어나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게. 그만큼 몰두했기 때문일까. 난 대략적인 글의 스토리는 기억이 나긴 하지만 세세한 것까진 기억이 나지 않았었다. 자기 전 고민하던 것들이 꿈속에선 명료해진다. 그러면 일어나서 그 기억을 가지고 글을 쓴다. 그럼 정말 잘 써지긴 한다.

갑자기 문명의 어원에 재배하다, 양육하가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문명은 자연에 역행하는 것이다. ... 재배한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이것을 문명이라 한다. (240)

문명(civilization)이 아니라 문화(culture). 땅을 갈다 에서 16세기 르네상스에 문화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자연에 역행하는 문명과는 다르다.

나의 무거움의 대칭점에 서 있는 벚꽃의 화사함을 좋아하나 보다. (246)

일을 하면 한 티가 나야 그 기쁨이 배가 된다. (249)

눈으로 확인이 되는 것이 있어야 그렇다. 그래서 뭔가를 자꾸 보여주기 식이 되나보다.

개 역시 사랑과 싸움을 통해 자라난다. (253)

특히 나처럼 홀로 1인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에게 집은 작업장이고, 직장이며, 사무실이고, 일상이 이루어지는 훌륭한 세계이기도 하다. (254)

그래서 좋으면서도 반대로 일상과 일이 구분되지 않아 집중이 안 된다. 집안일이 눈에 보이고 피곤하면 눕게 되고 뭔가 다른 것을 하게 된다. 난 일부러 집에서 나와 집중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오히려 인터넷이 안 되는 곳이 좋을 때도 있다. 아직 저자처럼 맘에 드는 공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0장 학습

내가 떠나온 사회에서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확보하는 순간 과거 생활의 장점들이 나를 공격했다. 나는 아무런 소속감이 없었다. 안전을 지켜줄 울타리도 없어졌다. 매일 지겹도록 만나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동료들도 사라졌다. (259)

가장 힘든 것이 소속감과 수입이 없어지는 것이다. 성인이 직장이라는 울타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듯 아이들이 학교가 싫음에도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남이 가지 않는 길에 대한 불안은 누구든 같다.

자유는 또한 불안이고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할 일을 찾아야 하는 부담을 안겨주었다. (260)

두려움은 또한 강렬한 힘으로 작동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 열심히 일하도록 했다. (261)

회사에 다닐 때보다 훨씬 더 창조적이어야 했고, 더 열심히 학습해야 했다. 나 이외의 다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를 보호해줄 아무런 울타리도 없었다. (262)

그동안 여유를 가지고 살았던 것을 기술한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성공은 채찍이다. 쉬지 못하게 날카롭게 살을 파고들어 찢어놓는 주마가편의 바로 그 채찍이다. 채찍을 잊은 성공은 반복과 진부함 속에서 퇴락하게 된다. (263)

취미가 직업으로 바뀌면서 순수한 호기심과 재미를 읽어버린 전문가들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경계해야 했다. (264)

바쁘다는 것은 지우개와 같다. 모든 기억을 지우고 그리움을 지우며 의미를 지우고 생각을 지운다. 바쁘다는 것은 사람을 그저 움직이게 한다. (265)

의미있는 바쁨도 있다. 지금의 내가 그렇고 그동안의 나도 그랬다. 그 바쁨 중에서도 잠깐의 여유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놀면서도 바쁘다.

한 번도 살기 위해 일을 버린 적이 없다. 놀기 위해 산적도 없다. 그래서 살기 위해 산 적이 없는 것이다. (265)

나는 어떠한 줄거리도 없이 쓰기 시작한다. 그저 방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268)

방향만을 가지고 쓴다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을 말하는 지 모르겠다. 비유를 들어 설명했지만 그것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읽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270)

글을 쓴다는 것 혹은 책을 쓴다는 것은 편집이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100% 자기의 생각과 경험만으로 책을 쓸 수는 없다. 물론 가능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 본 책의 글, 영화 등등이 다 책의 소재가 되고 표현이 된다.

학습을 통해 우리는 늘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돌연 자신이 속했던 사유의 세계를 떠나 전혀 이질적인 사유의 쾌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271)

그래서 어떤 책을 보면 좋겠냐는 질문에 불편한 책을 보라고 답하는 작가가 있다. 이렇게 모임이나 커리큘럼이 있는 것이 나쁘지 않다. 혼자 읽다보면 자기가 선호하는 주제만 읽게 된다.

학습은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71)

저자의 권위에 눌려 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해한 것을 생활 속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도 바쁜 일인데, 언제 그들의 중언부언을 들어줄 시간이 있겠는가? (273)

왜 나는 저자의 책에게 이런 느낌을 받을까.

글을 쓰는 스타일도 자유롭다. 논문처럼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글쓰기를 싫어한다. (275)

그럴 수 있다. 나 역시 논문 형식 글쓰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지도교수가 언어학교수이면서 형식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라 더욱 그랬다.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은 니체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는 변신의 힘이며, 가장 극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는 단호한 유혹에 따라 늘 떠나야 할 곳은 알지만 도착할 곳을 모르는 배를 타고 있었다. (279)

새로운 장르의 일상적 삶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실천적 개혁이고 혁명이었다. (283)

강연을 할 때는 새로운 개념을 던지고 반응을 본다. 어제 읽고 좋았던 사례를 소개하고 역시 그 반응을 본다. ... 반응 테스트에서 합격한 개념과 사례들은 다시 적절하게 강연의 내용을 구성하는 소도구로 편성된다. (285)

강연을 할 때 그동안 읽은 책은 많은 도움이 된다. 강사의 주관적 이야기보다 신뢰를 준다. 그래서 많이 읽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봐야한다.

첫 번째 도전은 실패를 이기는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실패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도전은 매일 실험을 즐기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실패도 성공도 사라진다. (289)

 

11장 일

수없는 반복을 통한 훈련이 아니라 수없는 변화를 통한 훈련이 내 방식이다. (295)

어떤 이론도 어떤 조언도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설득하기는 어렵다. (297)

맞다. 자신이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서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듣는 사람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득이 안 된다.

나를 변화시켰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내 하루가 바뀌었는지를 물으면 확실해진다. (298)

글쓰기는 우선 모방이다. 많은 글을 읽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고는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299)

모방의 또 하나의 요령은 한 작품을 모방하면 표절이고, 여러 작품을 모방하면 연구이다.’ 라는 노회한 충고를 기억하는 것이다. (300)

글쎄. 이건 글 자체로의 의미는 아닌 것 같다. 표절을 모르고 한 것도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모방하라는 것일까.

글쓰기는 또한 혁명이다. 모방만 가지고는 좋은 글쓰기로 완성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연결해야 한다. (300)

내가 배우는 방법으로 가장 그럴듯한 것이 배운 것을 나의 언어로 정리하여 책을 쓰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 나는 책을 읽고 감동적인 곳을 골라내어 내 방식으로 걸러 재편하는 데 꽤 능숙하다. ... 책을 볼 때 변화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집중한다. (302)

나는 아직 나의 언어로 정리하는 것이 미숙하다. 연습이 필요한 부분이다. 앞으로 책을 볼 때 교육독서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집중하려고 한다.

처음 해본다는 것은 기회를 선점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선점만큼 강력한 브랜드 전략은 없다. (303)

내가 관심을 가지는 교육과 독서는 기회의 선점에서는 뒤진다. 그래서 기존과는 다른 시도를 해보려 한다. 두 가지 다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고 계속되어질 것이며 현재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명 다룰만한 주제이다.

자신의 강점과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기질이다. ... 나는 매우 내향적이며 직관적 기질에 가깝다. (304)

저자는 INFP. 변경연 선배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 유추해봐도 직관이 남다른 것 같다. 나는 ESFJ이다. 많이 다르다고 느꼈는데 이유가 있었다. MBTI가 아닌 에니어그램으로 기질을 찾아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성공에는 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쪽지에 적힌 대로 끊임없이 익히는 것일 뿐이다. (310)

누구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인물을 얻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313)

나는 말보다는 문자가 지니는 조용한 설득력을 더 좋아했다. (315)

우리는 유일함을 통해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비범한 사람으로 자신을 안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치 않은 위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 (316)

저자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한다고 했다. 이런 이유에서인가보다.

다시 배우는 불편과 새로 배우는 흥미를 반죽하면 일상은 다시 깨어나고, 일은 같은 일이지만 새로운 얼굴로 다가온다. (317)

강연은 쏟아내는 작업이다. 쏟아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보다 많으면 이내 밑천이 딸리게 마련이다. 이것은 치명적 결함이다. 지적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너무 바쁘면 안 된다. (319)

강연을 하기 위해선 하는 시간의 10배를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한 강연을 맥락을 가지고 이어가야 하며 적절히 사례도 넣어야 한다. 필요하면 신문기사, 동영상, 영화의 한 장면 등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무제한이기 때문에 그 만큼 많은 준비를 할수록 좋은 강연이 된다. 하지만 시대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간혹 매번 똑같은 강연을 하는 강사도 있다. 대상이 달라지면 내용이 달라져야 함에도 똑같은 경우 듣는 사람들도 알게 되고 결국 만족하지 못한 강연이 된다.

좋은 내용이었지만 내 강연은 고작 그 강연장 안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들은 강연장을 벗어나는 순간 모든 것을 잊었다. 이것이 좋은 말의 한계였다. (321)

하지만 언젠가 또 생각이 나기도 할거다. 그 당시에 잊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인기를 추구하는 자는 인기를 잃음으로 결국 불행해지거나 스스로의 왜곡에 빠지기 쉽다. 지지자로 둘러싸인다는 것이 위험한 이유이다. (325)

자기 것이 아닌 것은 탐이 나더라도 마음을 접는 것이 좋다. ... 그 대신 나에게 적합한 강연 스타일을 만들어야 했다. (327)

이 역시 기질과 성격에 따라 다르다. 나도 아예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는다. 우선 어색하다. 내가 어색하면 청중은 더 하다. 다행히 난 말을 잘하는 재능을 타고 났다. 그냥 그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된다. 뭔가 계획을 세우고 의도를 가지고 하면 그걸 염두에 두느라 이상해진다.

강연장을 떠나 그들이 일상 속에서 변화를 실천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강연은 실패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좋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332)

나도 이런 마음으로 강의한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나의 강의가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좋다.

어디에고 하루를 바꾸고 일상을 바꾸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에게 우연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내 역할이다. (335)

변화는 달콤한 과정만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336)

나는 청중 모두를 위해 강연하는 것이지만, 그 강연은 결국 그들 가운데 누군가를 위한 강연일 뿐이다. (338)

가장 잘하는 분야에서 실수하거나 마음에 차지 않으면 매우 불쾌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이때 자신의 분야가 나를 찌르는 비수가 된다. 그러므로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한다. (340)

강사는 강연 중에 청중의 반응으로 강연이 잘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끝나고 난 후 부정적인 피드백 하나에도 상처받는다. 그럼 처음엔 불쾌해서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 부정적 피드백이 강사를 키워주는 자양분이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강사는 부정적 피드백을 고마워해야 한다.

내 유전자 속에는 장사꾼의 유전인자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341)

나와 같은 점이다. 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지만 그걸 한 번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럴 듯하게 포장을 해서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오히려 부족하고 어려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줄 수 없을까 고민한다.

나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또한 전보다 훨씬 자유롭다. 시간을 마음대로 배정할 수 있고,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쓰고 있다. (341)

나 역시 그렇다. 물론 저자는 그런 삶에 경제적 안정까지 갖추고 있지만, 나는 아직 경제적 안정까지는 아니다. 언젠가 그것도 따라오리라.

 

세 개의 에필로그,

하나.

다시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것이다. 이것이 내 첫 번째 계획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계획이었다. (348)

나는 세 가지 종류의 시간의 강줄기를 만들어 냈다.

하나는 나를 위해 흐르는 시간의 강이다. 이 시간의 강물 위에서 나는 읽고 생각하며 자연과 만나고 쓴다. 이것은 고독한 시간이다. (349)

또 하나의 시간의 강줄기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 가족을 위해 늘 시간을 남겨놓았다. (350)

세 번째 시간의 강줄기는 세상과 내가 만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대체로 책과 강연과 홈페이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350)

40대를 나는 나를 위한 시간은 배움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그 배움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또 다시 그 배움에서 가르침으로 만났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부모님들을 가르쳤다. 직접 수업과 강연으로. 그러고 보니 나의 40대는 배움과 가르침을 빼곤 이야기할 수 없다.

 

.

나는 인생을 참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자신에게 분노하며 늘 긴 여행을 선망했다. (353)

지칠 때까지 일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일에 대해 늘 아니오라고 말할 자세가 되어 있다. 일은 늘 내일 해도 좋은 것이다. (356)

아마 이런 건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이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를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

한 곳에서 살던 짐을 꾸리고, 다른 곳에서의 삶을 위해 다시 짐을 푸는 시기가 내겐 바로 마흔이었다. 하나의 세계가 닫히면서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위대한 시기였다. (357)

오늘을 새로 받은 또 한 번의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361)

결과와 목적을 늘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 정말 나의 목적은 하루를 잘 사는 것이다. (361)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절실한 목적은 없다. 모든 것을 버릴 정도의 각오도 없다. 그렇게까지 해야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직은.

하루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생활고나 가난 때문이 아니다.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363)

이건 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당장 하루 벌어 하루 생활하는 사람이 존재하기도 하고, 꼭 그렇게 까진 아니더라도 생계가 어려운 사람은 하루를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런 계층에겐 저자의 책은 호사일 수 있다.

 

평설 내 인생의 역할모델 구본형 따라하기

 

구본형도 혼자 놀기의 귀재다. 그는 우울이 찾아오며 우울과 놀고, 권태가 찾아오면 권태와 논다고 말한다. (368)

언행일치가 그의 가장 큰 덕목이다. (370)

이것만큼은 나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하니 이렇게 연구원 모임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겠지.

기록하라. 기록함으로써 나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라. ‘나의 이야기(Me-story)’는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한 기록이다. (372)

이제 세상은 위인들의 것이 아니다. 이름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이 주목받는 시대다. 게다가 후세도 중요하지만, 아직 내가 살아있는 당대가 더욱 중요하다. 나의이야기를 고쳐 쓸 시간이 남아 있을 때 나의 이야기를 써라. (373)

50쪽을 쓰고 나니 글을 쓴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글쓰기는 내향적인 나에게 좋은 표현 도구였다. 다행히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대가 되었다. (374)

개인사에 더 살을 붙이고 쓰면 글 쓰는 게 재미있을까. 개인사를 다시 한 번 살펴봐야겠다.

평생교육이나 자기실현 분야에서 많은 문화적 수요가 터져 나올 것이다. 잘하면 내가 활동할 수 있는 틈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74)

나도 그럴 것이라 여긴다. 누구든 자기만의 강점을 살려 틈새를 찾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너의 책을 써라. 무엇을 알기 때문에 책을 쓰는 것이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375)

여기 구본형이 자신의 기질을 묘사한 내용이 있다. 누군가 이것과 흡사한 기질을 갖고 있다면, 더욱더 그의 방법론을 따라 해볼 당위성이 커진다. 자신과 같은 유형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은 바로 지금의 자신처럼 사는 것이라고 구본형이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378)

INFP인 저자와 ESFJ인 나는 같은 거라고 F밖에 없다. 그럼 다른 길을 찾아야 하나. 기질이 달라도 가능한 것 같다. 선배 연구원들을 보면 전혀 다른 기질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더라.

 

한명석 연구원의 평설을 보며 같은 글을 보고도 다른 느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고 나는 언제나 혼자 놀 줄 아는 사람에게 끌린다.’ 하나의 문구로 자신의 자녀, 저자, 본인을 연결해서 쓰고 있다. 이런 글쓰기 좋다.

 

내가 저자라면

 

바꾸고 싶은 것들

2장 마흔 살은 이분법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야 한다. ‘젊은 사람들은~’ ‘마흔의 나이에는~’ 사람을 규범화시키고 세대로 나누는 것이 이해하기는 좋다. 같은 공감대가 있고 같은 시대적 배경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하지만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규격화시키기에는 너무 많은 예외가 존재한다. 저자가 변화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도 그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흔 예찬론이다. 마흔이 가지고 있는 단점보다 장점에 너무 치우쳤다. 물론 나 역시 연륜과 경험으로 마흔에 훨씬 많은 사고의 전환과 도전을 했다. 하지만 모든 마흔이 이렇게 훌륭하진 않다.

 

자서전이지만 잘 읽히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자선전이면 개인적인 사례와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수사는 매우 정서적이고 은유적임에도 스토리가 없다. 반대로 추상적인 이야기가 많으니 반복되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자서전의 형식대로 써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나는 IBM이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것을 목격했다.”는 글보다 어떤 점들 때문에 그랬는지 구체적인 사례 한 가지만이라도 들어서 글을 썼으면 훨씬 독자들로서 공감을 하면서 봤을 것이다. 20년의 직장생활이라고 했지만 어디서도 실생활처럼 보이는 글은 없었다.

기업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 유형의 특징을 항목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의 실제적 행동과 말을 표현했으면 좋았을 거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과 차이점을 모르겠다.

 

저자는 본인이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 삶이 남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의외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삶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책을 쓴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의 삶과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섣부를 수 있다. 특히 자서전 형식이면 그저 자신의 삶을 담담히 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자라면 특히 자서전 형식이라면 그저 그 나이 땐 그랬다. 그게 중요했고 어디서 영향을 받아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정도면 좋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내가 자서전을 쓴다고 누가 읽을까가 먼저 의문스럽다. 아직 자서전은 나의 글쓰기 형식엔 해당되지 않는다.

 

구성에서 4얼굴부분은 너무 긴 것 같다.

내가 저자라면 장별 구성을 키워드 식으로 하는 것보다 나이순으로 해서 그 안에 가족, 마흔 등등의 내용을 섞어서 사건 중심으로 썼을 것이다. 그래서 마흔의 초반과 중간, 말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이도록 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만약 키워드로 쓴다면 좀 더 큰 카테고리로 묶는 것은 어떨까. 그럼 반복되는 것이 줄었을 거다.

 

사람이야기가 없다. 온통 자연과 감상뿐이다. 나는 있으나 우리가 없다. 아마 저자가 퇴사 후 나에 대해 몰두하고 있어서 인가보다. 하지만 내가 저자라면 난 사람이야기를 중심으로 쓰겠다. 그리고 그 사람이 모여 만든 사회에 대해서도 쓰겠다.

 

반영하고 싶은 것들

6장을 읽기 시작하면서야 각 장 시작에 있는 글들이 모두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을 알았다. 뒷부분까지 주루룩 읽었다. 처음 1,2장을 읽었을 땐 그저 하나의 짧은 글인가 했다. 신선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11장으로 나누어 쓰고 각각에 글로도 보이는 특이한 방법이다.

 

저자의 글은 변화라는 키워드를 항상 생각하며 쓴 것이라 했다. 그래서 반복되는 내용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난 여기서 나만의 키워드를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을 지금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그런 키워드 하나쯤은 있다. 그걸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면 그 키워드에 한해서는 전문가가 될 것이다.

 

저자는 제일 마지막 평설을 연구원에게 부탁해서 실었다. ‘애정이 있는 객관성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제자가 스승의 글을 솔직하게 평설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마냥 좋다고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한 발 떨어져서 보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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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6 20:48:57 *.39.23.32

그렇군. 나도 규격화 하는 부분이 많은데.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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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6 21:11:57 *.44.162.136

와우 재미있는 발췌 시도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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