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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3일 11시 23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 캠벨,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캠벨의 첫 책이 궁금했다.

Wikipedia에 따르면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최초의 저작은 <Where the Two Came to Their Father: A Navaho War Ceremonial>(1943, 39). 이는 Navajo(서남아메리아 원주민 부족 이름)의 젊은 두 영웅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공연에 관한 책으로, 캠벨은 원주민 이야기에 대한 해설을 담당했다. 캠벨은 이 이야기를 후에 신화의 보편적 우주적 상징구조와 인디언 이야기의 세부사항을 실증해가는 토대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대한 신화학자의 첫책이라고 하기에 적지 않은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분명해진 것이 있다. 역시 캠벨은 한순간도 자신의 실을 놓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구나.

캠벨은 이듬해(1944, 40) 소설과 핸리 모턴 로빈슨과 함께 <피네간의 경야를 푸는 열쇠>(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라는 비평서를 저술한다. 캠벨은 이 작업을 통해 자신의 대표적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 45)의 기본 개념인 영웅의 여정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1910, 6) ‘인디언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한 호기심 만만한 소년을 세상이 제대로 알아보는데는 4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던 거다. 4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의 양도 양이지만 그 밀도는 또 어떠했는가? 우드스톡에서의 치열했던 5년을 잊었는가?

공부다운 공부라곤 이제 딱 1년 해놓고 벌써부터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물들어가는 어리석은 너에게 말하고 싶다. 그냥 네게 고여 있는 것만큼을 정성껏 퍼낼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니겠니? 첫 책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마라. 멀고 먼 그 길을 지치지 않고 갈 수 있기 위해 잠시 쉬며 마시는 시원한 물 한잔 같은 거다. 그 물 한잔의 힘으로 또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니겠니? 충분히 평가받지 못할까를 두려워할 에너지가 있다면 충분히 퍼올리고 있는가를 살펴보아라. 감추려고도 말고 보태려고도 말고 딱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를 그려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성공인 것이다.

첫 책은 바로 너를 위한 지도다. 너는 너이기에 늘 같은 패턴을 그리게 되어있다. 네가 너를 믿을 수 없다면 그 지도는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다음에 또 비슷한 길을 걷게 될 미래의 네가 의심없이 참고할 수 있는 정직한 지도 만들기. 그것이야말로 지금 네 존재를 가득 채워 마땅한 유일한 미션임을 늘 기억했으면 한다. 미옥아. 늘 너를 지켜보고 있는 나를 믿어도 좋다. 너를 아프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 영원히.

2011. 4.2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리뷰중에서

http://www.bhgoo.com/2011/index.php?mid=r_review&search_keyword=%EB%AF%B8%EC%98%A5&search_target=nick_name&page=2&document_srl=113730

미옥아. 내가 7년 더 지켜봤는데 걔 진짜 괜찮은 애더라. 더불어 스승의 어휘를 빌어 만들게 될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들을 위한 인생 지도’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도 완전히 요긴하게 잘 쓰였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근데 말야. 솔직히 이번 리뷰 읽으며 전율을 느꼈어. 걘 대체 어떻게 이렇게도 족집게 같은 예언을 할 수 있었던 걸까? 아니 글케나 명료했던 감각이 어떻게 그리 흐려질 수가 있는지가 더 궁금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 기회에 다시 확인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현자도, 세계 제일 바보천치도 내 안에 다 있다는 것> 여전히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 둘의 목소리의 결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좀 덜 헤매며 살 수 있으려나? 아니 좀 맘편히 헤매며 살 수 있으려나?

 

2. ‘내가 저자라면

 

출발

모험에의 소명

o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짐

- 의미를 잃어버린 일상 _ 이런 게 삶이라면 버리고 싶다.

- <마법세계>로부터의 초대장_ 익숙한 것과의 결별, 꿈벗 여행

소명의 거부

o 익숙한 것들에의 집착

- <마법세계>의 초대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음

- 허황된 <마법>에 빠져들어 가까스로 구축해놓은 일상의 안정을 잃게 될까봐 두려움

세상과도 자기와도 단절된 반죽음 상태의 지속

초자연적인 조력

(2010.1~2)

o 마지막 기회라는 계시

- 거부할 수 없는 몸의 신호 _ 연구원 응시

- 장애가 기회로 _ 연구원 레이스

첫 관문의 통과

(3)

o 스승과의 만남 _ 연구원이 되다(3)

고래의 배

(4)

o 연구원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휴직

- 사회적, 경제적 기득권의 포기

입문

시련의 길

(4~5)

o 끝을 알 수 없는 나락(4~5)

- ‘를 지탱해 왔던 외피의 파열

- 고삐풀린 감성의 폭주

- 지금이라도 그만둬야하는 것 아닐까?

o 추락하는 나를 구해준 스승의 한마디

- 두려워 마라. 네 안의 힘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여신과의 만남

(6~8)

o 아낌없는 자기연소의 희열

- 天福 체험

- 다시 차오르는 존재감

유혹자로서의 여성

(8~9)

o 天福 vs 현실, 선택의 유혹

- 둘 다 갖고자 하면 다 잃게 될지도 몰라

-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아버지와의 화해

(11)

o 나의 기쁨과 세상의 기쁨이 조응하는 신비한 체험

- 현실 : 가시화된 존재의 과제

- 자아와 현실은 같은 대상을 부르는 다른 이름

궁극적인 홍익

(9~1)

o 스스로의 기쁨으로 세상을 기쁘게 하라

(행복 = 자존감 x (소통)2 )

- 꿈과 현실의 단계적 화해, 가정경영일지

귀환

회귀의 거부

(2)

o 출간 거부

- 굳이 글로 표현할 필요 있을까?

- 오해받는 건 아닐까?

- 내가 왜 그런 모험을 해야하는 걸까?

외부로부터의 원조

(3)

o 마법의 메시지 from 스승과 동료

- 졸업여행에서에서 브리다, 데미안, 해리포터까지

o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회귀 관문의 통과

o 지금 이 순간!!

두 세계의 스승

o 그날을 위해.. ^^


지난 1년간의 연구원 수련과정을 영웅의 여정에 대입해보았다. 칼로 자른 듯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각 단계마다 그 안에 작은 사이클을 내포하고 있어 도표로 표현하기가 부적합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해놓고 보니 명료해지는 고마운 메시지가 있다.

연구원 수련도 일생이라는 커다란 여정의 톱니에 맞물린 하나의 작은 톱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잘 살아낸 하루가 잘 살아낸 인생을 만들 듯 첫 책 출간이라는 과제로서 완성되는 이 작은 톱니의 미션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야 삶이라는 톱니도 그만큼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것이구나. 내 삶의 어느 순간보다 치열했던 지난 1년과 그리고 더더욱 그러할 또 1년은 나를 데려다 놓을 지점은 어디쯤일까?

천리길을 한걸음에 가겠다는 허황된 욕심과 정체조차 규명할 수 없었던 지독한 두려움이 다시 나를 잡아끌 때 멈추고 돌아와 확인할 수 있는 지도가 되어줄 것 같다. 여기에 그날의 지친 나를 위해 친절히 한 구절을 덧붙여 놓아야겠다.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네가 그토록 원하는 삶의 자유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니라.

2011. 4.2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리뷰중에서

 

8년의 행적이 모이니 한결 명료해진다. 내 안에 마이크를 기다리는 목소리들이 줄 서있는 것이 느껴지지만 주말 넘 잘 놀다 들어와 시간이 없다. 결론만 말하자면 위 <저자소개>의 내용과 이하동문. 나에게로부터 받은 신탁은 그야말로 정확히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 일단 칼럼 올리고 돌아와 다시 찬찬히 정리해봐야겠당. ^^;;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BEST)

머리말

(5)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_ 명심할 것!!

(6) 상사성을 이해하면 상이성은 일반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믿어지지 않는 정도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 _ ! 공감, 즉 사랑의 제1원칙이 아닐까?

프롤로그 _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19)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뚫려 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은 채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잔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 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_ 그래서 뽕맛이라고 하는 걸게다.

(21) 의사의 역할은, 신화나 동화에서 주문으로 무서운 모험의 시련과 위기에 몰린 영웅을 도와주는 노현자의 역할과 같다. 의사는 갑자기 나타나, 무서운 용을 죽일 수 있는 빛나는 마법의 칼이 어디 있는지 일러주고, 영웅을 기다리는 신부와 보물이 쌓여 있는 성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며, 영웅의 치명적인 상처에다 고약을 발라주고, 마침내 원수를 물리치고는 어느 황홀한 밤에 모험을 떠난 길을 되짚어 정상적인 생활이 기다리는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_ 그래서 돌아오려면 표지를 남기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우리가 그렇게나 탐내는 아리아드네의 실도 그냥 왔던 길임을 알려주는 표시일 뿐이잖아요? 현자는 물론 그 모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일테죠? ^^ ★★

(22) 이러한 제의의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인 삶의 패턴은 물론, 무의식적 삶의 패턴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변형의 문턱을 넘게 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_ 어느쪽이든 편한쪽부터 시작하세요.

(23) 그가 이 꿈을 꾼 것은, 분석을 믿고 자신을 친모 복합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_ 결국 열쇠는 내담자가 갖고 있다. 믿음을 얻지 못한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은 없다.

(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25) 나 개인을 괴롭혔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모험에의 두려움을 돌이켜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 곡곡, 그리고 문명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련의 상투적인 변신이야기일 뿐이다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_ 나는 이걸 무엇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이라고 보지 않는다. 복종보다는 화해가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_ 복종이란 단어에 엄청난 거부반응을 보이던 때가 있었구나. 오히려 깜짝 놀라게 된다.

(29)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 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 뿐이다 _ 자기정화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이겠지?

(30)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놓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변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의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역을 평생토록 우리 내부에 간직한다. 우리 유아기의 도깨비들과 은밀한 협력자들, 어린 시절의 마법이 모두 여기에 있다. 뿐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어도 의식할 수없는 삶의 잠재력, 우리들 자신의 또 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황금의 씨앗은 마르는 법은 없다. 우리가 상실해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생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도 가능하다...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세대, 나아가서는 우리의 문명 시대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을 얼마간이라도 건져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저 위대한 천품의 시혜자, 시대문화의 영웅(한 나라뿐만이 아닌 세계 역사상의 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35) 귀가 안팎으로 열린 사람에게만 들리는 희미한 소명의 모험길로도 들어설 뜻을 세운 사람답게, 예사롭지 않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초라하고 질척한 거리>를 홀로 가야 했다. _ 사람이 이렇게 많아도 역시 외롭다. 번역되지 않은 나만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정말로 나밖에는 없단 말인가..._ 힘들었겠다. . 나의 전 인격을 품어안아줄 내 안의 나를 만나기 전의 나. 안쓰럽고 안쓰럽다.

(38)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_ 이 순간 나를 숨쉬게 하는 희망의 빛줄기.★★★ _ 이제는 내가 쥐고 있는 이 것들이 보물지도이자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자 구원이다.

 

2. 비극과 희극

(42) 행복을 다루는 동화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에 거덜 날 운명에 놓여있다...해피엔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超絶性으로 읽히어야 한다...과거에는 삶과 죽음이 투쟁하던 곳에서 이제는 영속적인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vs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희극과 비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인 것이다 ★★ _ 빛과 그림자인 것.

(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_ 나는 딱 나같은 위험을 앞두고 있는 누군가를 위한 지도를 만들고 싶은 거다.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내 글에서 위안과 용기를 얻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단 하나의 희망. 그 희망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고단한 작업을 이리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는 나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_ 가시적인 이면을 설명해주는 일, 아니 우선 스스로에게 설명해내는 일이 내게 주어진 역할임을 이제는 알겠다.

(44)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3. 영웅과 신

(46) 정각을 이루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그 보리수 아래, 부동의 자리에 앉았다.

(48) 정각은 말로써는 전할 수 없고 오직 정각에의 방법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가르침의 궁극적인 요체는 침묵 속에서만 전수된다...과학의 진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세워진 논증할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에 전달이 가능하지만 제의, 시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까지 인도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조용한 체험으로써만 가능하다.

(50) 영웅의 모험...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55)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_ 데미안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 ★★★

 

4. 세계의 배꼽

(55)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60) 가정의 난로, 신전의 제단은 땅이라는 바퀴의 중심이며, 만유의 어머니의 자궁인바, 이 어머니의 불이 곧 생명의 불이다.

(62) 미덕 역시, 최고의 직관 앞에서는 케케묵은 훈장의 읊조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

 

1부 영웅의 모험

1.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72) 소명은 언제나 변용의 신비,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념과 정서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

(78) 부왕의 이런 조처는 오히려 그 시기를 빨리 익게 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이 젊은 왕자는 육체적 쾌락에 진력을 내고, 다른 경험에 목말라했기 때문이었다. 왕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찾아나설 준비가 되는 순간, 적당한 전령관이 때맞추어 나타났다. _ 신탁을 거부하려는 안간힘은 오히려 그 신탁이 더 빨리 더 온전하게 성취되도록 돕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2. 소명의 거부

(81)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그렇긴 하나, 미노스 왕처럼 이 모험의 주인공 역시 초인적인 노력으로 예사롭지 않은 제국을 건설하는데엔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집을 짓건, 그가 짓는 것은 죽음의 집이다. 자기의 미노타우로스를 숨기는 퀴클롭스식 미궁일 뿐이다. _ 완전 공감!

(85) 다프네...유아기 고착...이런 사례들은, 당사자가 유아기적 당사자가 유아기적 자아, 그리고 유아기적 정서 관계 및 이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사자는 유아기의 벽에 갇혀 있다. 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는 문턱을 지키는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서, 그들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_ 그러니까 영웅은 일단 유아기의 환상(에덴동산)에서 탈출한 뒤 자력으로 그 세계를 재현해내는 인물이라는 이야긴가 보다. 재현해내려면 원형의 이미지를 생생히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나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3. 초자연적인 조력

(96) 영웅이 빠져드는 환각은 곧 안식처이며,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이다...이 약속은 현재를 지탱하게 하고 과거와 미래까지 주관한다. 이러한 약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러 단계에 이르는 삶의 문턱을 넘으면서, 그리고 삶을 자각하면서 무산의 위기를 겪지만 보호 세력은 항상 영혼이 지성소에, 심지어는 이 세상의 낯선 사건에 내재하거나 그 배후에 존재한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98) 보호자인 동시에 위험한 적이며 모성적이기도 하고 부성적이기도 한 이 후견과 방향 제시의 초자연적 원리는 그 내부에서 무의식의 모든 다의성을 통합한다.

(105) 이렇게 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삶을 거부하던 카마르 알 자마의 운명은 의식적인 의지의 협력이 없이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4. 첫 관문의 통과

(111) <오코주무(꿈꾸는 자, 꿈을 통해서 말하는 자)>라는 단어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동류들과는 달리 대단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를 일컫는다. 이들이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은 정글에서나 꿈속에서 정령을 만나거나 죽음과 재생의 체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5. 고래의 배

(124)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_ 이게 이륙의 가장 정확한 설명이 아닐까?

 

2. 입문

1. 시련의 길

(133)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지않는 상징적인 것들(능히 여행 당사자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주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정화>에 이르는 길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 될> 때인 것이다. 우리 개인이 가진 과거의 유아적 심상이 분리, 초월, 변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_ 자기 안의 아이를 만나야 변화시킬 수도, 성장시킬 수도 있다.

(139) 수메르 여신 이난나의 황천행

(140) 네티는 에레쉬키갈로부터, 이 하늘의 여왕에게 일곱 문을 열어주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들어가는 사람은 관례상 문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어야 한다. ★★★ _ 괜찮은 의식이다!!

(143)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

(143) 시련은 첫 관문이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

(143) 영웅은 용을 죽여야 하고 몇 번이고 위험한 장애물을 넘어야한다. 그 동안 영웅은 몇 차례의 예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일시적이긴 하나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며, 이상향을 엿보게 된다 ★★ _ 연구원 과정이 바로 이런 예비적인 승리를 체험할 수 있는 영웅의 여정테마파크인 것이다.

 

2. 여신과의 만남

(145)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이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의 속 영원의 바다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148) 그러나 우리의 심상이 기억해 낸 어머니가 항상 자비로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공격적인 환상을 투사하고 그러면서도 반격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무심하거나, 이르기 어려운 어머니도 있고 구속하고, 금지하고, 벌주는 어머니도 있으며 자기에게 묶어두기 위해 아이의 성장을 싫어하는 어머니도 있고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험한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거세 콤플렉스) 바라던 어머니 이긴 하나 가까이해선 안 될 어머니도 있다(오이디프스 콤플렉스). 따라서 어머니 중에는, 성인의 유아기 기억이라는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가 때로는 엄청난 힘을 행사하는 <나쁜> 어머니도 있다. 이런 어머니는 아르테미스처럼 우아하면서도 고약한 여신으로 존재한다. 아르테미스(디아나)가 젊은 사냥꾼 악타이온을 철저하게 파멸시킨 예는 정신과 육체의 차단된 욕망의 상징 안에 얼마나 엄청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151) 여신은 생의 불길로 늘 붉다. 지구, 태양계, 먼 우주의 은하까지 이 여신의 자궁 안에서 팽창한다. 왜냐하면 이 여신이 세계의 창조자, 영원한 어머니, 영원한 처녀이기 때문이다. 이 여신은 포옹하는 것을 포옹하고, 자양하는 것을 살지게 한다.

(152) 이렇게 해서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물론 우주적인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을 통합한다.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의 어머니를 똑 같이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숭배자의 정신은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감상과 증오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고, 유치한 인간이 자신의 행, 불행에 연결지어 멋대로 가른 <><>따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본성의 법과 상으로 존재하는 불가해한 실재를 향해 그 마음을 열게 된다 ★★★

(152) 여신은 다름 아닌, 절대 절멸의 공포와, 비인격적이지만 모성적인 평화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주적인 권능, 우주의 전체성, 대립물의 조화였다. 시간의 강이 사람의 흐름으로 바뀌면 여신은 순식간에 창조하고, 보존하고, 파괴한다. 이 여신의 이름은 <검은 존재>, 즉 칼리다. 별명은 <존재의 바다를 건네주는 나룻배>. ★★

(153) 신화학의 심상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153 _ 여성으로 인격화 되어 감정적으로 해석되기 쉽지만 여자는 삶 자체의 상징일 뿐이다. 이 삶을 알게 되는 존재가 영웅이며, 여신이 영웅을 안내하긴 하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 없다는 것은 여정은 어디까지나 영웅 자신의 프로젝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따끔한 일침으로 느껴진다.

(154)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

(156) 나는 王道라고 합니다. 타라의 왕이시여! 내가 바로 왕도입니다. 가십시오....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왕도가 그렇다니? 아니 인생이 그렇다는 뜻이다. ★★★★★★

(156) 여신은, 악타이온의 동물적 욕망으로도, 퍼거스의 결벽에 가까운 도사림으로도 파악되지 않았다. 오직 니일의 부드러움에 의해서만 그 정체가 드러났다 ★★

(157)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모험 당사자가 청년이 아닌 처녀일 경우에는, 그 재능이나 아름다움이나 욕망으로 보아 불사신의 배우자가 되기에 마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상의 남편은 그녀에게 하강하여,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를 자기와 동침하게 한다. 만일 여자가 이 배우자를 싫어하면,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 그녀의 편견은 바로 잡히게 되고, 그녀가 바라던 존재라고 생각되는 경우 그녀의 욕망은 평화를 성취한다 _ 동침을 축자적으로 해석하던 시절, 홧김에 캠벨을 던져버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 역시 상징이었던 거다. 요즘 새로운 감각의 열림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3. 유혹자로서의 여성

(159)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_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자가 영웅.

 

4. 아버지와의 화해

(173) 두 쌍둥이 영웅은 이 네 방향의 상징으로 시험을 당한다. 즉 그 방 안에 있는 자들의 결점과 제약 조건에 동참할 수 있는 여부를 시험당하는 것이다. _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고 있는 요즘, 미친 듯이 시험을 치러내고 있다. 의미를 알면서도 힘든 건 또 어쩔 수가 없나보다.

(178) 비법 전수자(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람), 유아기의 부적당한 카텍시스(리비도가 특수한 사람, 물건, 또는 관념을 향하여 집중 발현되는 현상)으로부터 놓여난 입문자에게만 의식의 상징을 베풀게 되어 있다. 이런 입문자라야 자기 강화라는 무의식적(혹은 의식적,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동기나 개인적인 선호나 혹은 증오 때문에 정당하고 비개인적인 힘을 오용할 가능성이 업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요컨대,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 _ 선발의 기준이었으려나? _ 다시 읽으니 느낌이 새롭다. 그러나 수련을 하기도 전에 유아기의 부적당한 카텍시스로부터 놓여난 입문자가 얼마나 있을까?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 중에 서서히 조금씩 놓여날 수 있는 것 아닐까? 여기서 입문은 그야말로 진짜 입문을 말하는 것인 듯하다.

(181) 연장 세대가 상징적인 가르침을 베푸는 긴 기간 동안, 입문자는 연장 세대가 흘리는 신성한 피만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소년은 사람의 피 이외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_ 극단적인 단절이 필요하다는 의미인가?

(190) 자기 모순적인 아버지의 신비...바라코차는 만유의 신이며 만물의 창조자다. 그런데도 지구에 내린 그의 모습을 전하는 전설에는 그가 누더기 차림에 손가락질이나 받는 거지로 등장한다... 만물 속에 숨어 있어서 그 영혼이 빛을 발하지 않으나, 뛰어난 지력을 가진 명민한 자의 눈에는 보인다 ★★★ _ 을 갖기 위해 이리도 애를 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192)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192 _ 내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 예뻐보이고 싶은 욕망, 칭찬받고 싶은 욕심, 멋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그러니까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자꾸만 눈치보고 주저하게 만든다. 잘라낸 줄 알면 또 자라나고 없앴다고 생각하면 다시 생겨난다. ... 완전한 나로 설 수 없다면 다 허무한 것임을 알고도 이러는 내가 좀 싫어지려고 한다. _ 그런 마음들이 자라기 쉬운 환경에서 나고 자랐으니 어쩔 수 있겠는가? 그들도 다 살아보겠다는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니 무조건 탓할 이유도 없다. 다만 이런 욕망들이 존재를 지배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잡초처럼 자꾸만 올라오는 그 마음들과 싸울 에너지가 있다면 그 힘과 시간에 얼른 호미들고 나가 싹싹 베어주자. 그리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문제라서가 아니라 원하는 작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이 아무리 어렵고 또 귀찮다고 해도 아킬레우스마저도 피할 수 없는 대자연의 신비를 거슬러보려고 말도 안 되게 용쓰는 것보다야 훨씬 수월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무엇을 택할지는 순전히 본인의 몫이겠지만.

(192)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_ 알쏭 달쏭..._ 이제는 알 듯도 하다.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 그렇다. 나를 이만큼이라도 편하게 만들어준 것은 내가 그리도 징글징글 미워하던 바로 그것들이었다. 한순간이나마 보았던 근원을 너무 자주 잊고 산다면, 아마도 또 딱 적당한 타이밍에 나는 그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체험을 수차례 반복하고도 같은 패턴의 일깨움 밖에는 얻을 수 없다면 그 삶은 정말 너무나 가엽지 않는가? 읽고 쓰고 명상하는 것은 보았던 그 장면을 스스로에게 일깨우기 위함이다. 이제 그만 맞아야 움직이는 수준을 졸업할 때도 되었으니까.

(194) 그의 말은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으로 <예언된> 것을 능가하는 그 뭔가를 <목격한> 사람의 말이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_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직접 체험해보면 짐작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일 수 있다. 함부로 예단하지 말 일이다.

 

5. 신격화

(196) 관세음보살..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 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의 무량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신의 은혜 안에서 중생을 돕는 존재로, 중생의 존재 안으로 삼투한다. 따라서 광대한 부처의 정신적 왕국 도처에서 그에게 하는 기도는 모두 가납된다. 그는 다양한 모습으로 일반 세계를 왕래하며, 그를 필요로 하는 중생, 기도하는 중생에게 나타난다. 그는 팔이 둘인 인간의 모습을 비롯, 팔이 넷, 여섯, 열둘, 혹은 천 개인 초인간적인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왼손에는 늘 이 세상이라는 蓮花를 들고 있다.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

(197) 이 귀한 손으로 그는 만물을 쓰다듬고 다독거린다. ★★★

(198) 관음은, 凡人과 현자에게 두루 신성한 존재다. 왜냐하면 관음이 세운 맹세에는, 세상을 구제하고 세상을 버티는 심오한 직관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과 찰나의 구별에 대한 자각을 표상한다. 합리적인 마음에 의해 자각된 이 구별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한 마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서 용해되어 버린다. 이때 체득되는 것은, 찰나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 즉 동일의 비이원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이라는 사실이다. _ 순간이 곧 영원이다.’ 왜 이게 전에는 전혀 안 들어왔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200) 여성을 다른 형태로 후퇴시켰다는 사실은 완전성에서 이원성으로의 타락을 상징한다. 이어서 선악의 이원성이 나타냈고, 하느님이 걸으시던 낙원에서의 추방과 낙원의 울타리가 세워졌다. <낙원은 대립적인 것이 공존하는 곳> 이었는데, 이제 인간은 이 낙원의 울타리에 이해 하느님에 대한 환상과 하느님 형상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206)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도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_ 그러고 살 수 있을 만큼 건강했던 거다 _ 성경의 문법을 알 것 같다. 사람을 낚는 문법. 미션을 제시하고 듣는 이의 수준에서 가장 절급한 것들을 그 대가로 내건다. 그러고 보면 이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유혹의 수사법. 누가 어떤 마음으로 쓰느냐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는 거다.

(207) 구세주가 전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고, 힘써 저나했지만 실천만을 끝내 꺼렸던 복음은 하느님은 사랑이며, 하느님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며,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그의 아이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209) 우리가 참으로 싸워야 할 전장은 지리적인 전장이 아니라 심리적인 전장이다.

(211) 나는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그리고 사랑이 하나임을 깨달았다. ★★★★★★★★★★★★★★★★★★★★★★★★★★★★★★★★★★★

(213) 보살에 대한 첫 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구유적 성격이다. 이 보살과 만남으로써 분명히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 서로 만난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보살 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끈다>는 뜻이다...우주를 움직이는 힘인 세 겹 불의 마지막 여신의 결정적인 순간까지 구세주는 홀연 거울에 둘러싸인 듯이 凡人과 같이 살고자 하는 자기 고유의 육체적 의지, 정상적인 욕망과 적의가 인도하는 대로, 현상적인 원인과 결과와 방법에 둘러싸여 살고자 하는 의지의 마지막 환상을 목격한다...보살 신화의 세 번째 경이로움은, 첫 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 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

(215)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215) 그는 제 악몽에 쫓기며 스스로 겁에 질린 존재를 자비로이 여긴다. 그는 일어나 그들에게로 돌아와 에고를 초월한 중심으로서 그들과 함께 거한다. 에고를 초월한 그를 통하여 <>은 자체를 현현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위대한 <대자대비로운 행위>. 왜냐하면 이 행위로 인해 중생은 자신의 욕망적의미망이라는 세 겹의 불을 그고, 이 세상이 바로 열반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이의 자유를 위해 <선물의 물결>을 쏟아낸다. 이러한 속세의 삶이 곧 열반이 겨냥하는 바다. 이 양자는 털끝만큼도 다를 바 없다 _ 얼른 숙제를 마치고 그곳으로 가고싶은 마음뿐이었다. 대충하면 또 유급할지도 모르니까 고생스럽더라도 최선을 다해 깔끔히 해내야겠다. 그래서였구나. 나를 다 쏟아 붇는다면서도 왠지 모를 결핍이 느껴졌던 이유가. 나의 마음은 이미 이곳에서 떠나버린지 오래였던 거다. 마음은 벌써 그곳에 보내두고 여기에선 근근히 주어진 과제만을 해치우려는 생각뿐이었다. 고통마저도 즐겨보자고 잘난척해대면서도 실은 싫었던 거다. 얼른 면하고 싶었던 거다. 이제 알겠다. ‘그곳이란 바로 여기와 다르지 않음을. 그곳에도 기쁨이라는 금가루를 얻기 위해선 또 어쩔 수 없이 고통이라는 모래벌판을 헤매야 한다는 것을. 고통을 기쁨으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을 체화하지 않는다면 운이 좋아 그곳에 갈 수 있다고 해도 지금과 나아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바로 지금, 여기에 가진 것을 다 걸어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불살라버리는 거다. 일단 해보고 다음을 이야기하도록 한다! _ 7년 전의 나, 똑똑했구나! ^^

(218) 중국의 선인들 중 지상 낙원의 여선으로 여신 시왕무, <거북이의 황금 어머니 >가 있다. 이 여선은 향기로운 꽃, 보석의 흉벽, 황금의 벽에 둘러싸인 채, 쿤룬산에 있는 궁전에서 산다. 시왕무는 서풍의 진수로 빚어져 있다. 정기적인 <복숭아 잔치(복숭아가 익었을 때만 열리는데, 이 복숭아는 6천 년에 한번씩 익는다)>에 초대받은 내객들은 보옥의 호숫가에 있는 정자와 별관에서 황금의 어머니의 딸들로부터 대접을 받는다. 아름다운 샘에서는 물이 솟는다. 손님들은 봉황의 골수, 용의 간을 비롯한 갖가지 고기를 맛본다. 복숭아와 술은 불사를 약속한다. 보이지 않는 악기가 연주하는 음악, 피멸의 인간이 아닌 불사의 신선이 부르는 노래가 들린다. 눈에 보이는 처녀들의 춤은 찰나에 누리는 영원의 기쁨을 표상한다.

(219) 다도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축소된 우주를 명상하고, 그 축소된 우주와 불사의 선인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위대한 다도의 달인은 천상적 경이를 체험된 순간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이어서 이 경험은 그 다실에서 가정으로 확산되고, 가정에서는 국가로 침윤했다 219 _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구도도 바로 이 것이다. 내가 책과 사람속에서 체험한 경이를 내 가정으로 확산하고, 또 사회로 확산해보고 싶은 거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경이의 물줄기가 끊이지 않도록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 _ 이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흠흠...이제 정말 책이든 뭐든 잘 보이는 곳에 정리해 놓아야할 이유가 명확해진다. 목적은 오직 하나, 나 자신을 깨워내기 위함이다!!

6. 홍익

(233) 유치한 이야기가, 형이상학적 교리의 신화적 해석에 붙여질 때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는가는 저 유명한 동양 세계 신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_주의하자!

(242) 그대 아내를 그대 품 안에서 복되게 하라 _ 내 가정을 먼저 복되게 하자!

(242) 인도에서도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영상불사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 스승은 현세의 쾌락에 진력할 것을 권한다. 이를 견딜 수 있는 자만이 다음 단계에 입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_ 뭐든 제 때 제 때 소화하자!

(248)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_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이미 온전한 세상을 알아볼 수 있는 감각뿐이다.

(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에 대한 자각이다. 단테가 정신적 모험을 마지막 한 걸음까지 마치고 천상의 장미에 싸인 삼위 일체 신의 상징적 환상 앞에서 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성부, 성자, 성신의 형상을 두루 경험한 그에게도 아직 한 가지 경험이 더 유보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베르나르가 내게 눈짓과 함께,

저 위를 보라는 듯 미소짓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나의 눈이 점점 밝아지면서,

저 지존의 빛줄기로 속으로,

자꾸만 빨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내가 본 환상은, 말로 할 수 없었으니,

말이 그 나타난 바에 승복하고,

기억 또한 압도당했다.

우파니샤드, <눈이, 말이, 마음이 하릴없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이를 남에게 가르칠 방도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도 같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까지 초월해 있다.>

이것은 최고의, 그리고 궁극적인 시련이다. 영웅의 시련일 뿐만 아니라 신 자신의 시련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성자와 성부가 동시에 적멸에 든다. 이는 인격과 가면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격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어느 환자의 삶의 에너지로부터 끌어낸 허구적인 꿈이 그러하듯이 지상적인 것이든 천상적인 것이든 이 세상의 모든 형체는 불가해한 신비, 즉 원자를 조립하고 별들의 궤도를 통제하는 권능을 가진 우주적 힘을 반영한다. ★★★★★★★★★★★★★★★★★★★★★★★★★★★★★★★★★★★★★★★★★★★★★★★★★★★★★★★★★★★★

 

3. 귀환

1. 귀환의 거부

(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_ 제발 내가 쓰는 책이 내 인생을 역전시켜줄 수 있기를...제발!! _ 7년전에 기대하던 전리품과는 전혀 다른 성과지만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삶의 질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나 자신과 가족들은 새로운 시각이라는 전리품의 수혜를 제대로 누릴 수 있었다. 그 세계가 이미 흠뻑 채워졌기 때문일까? 어느새 가족의 경계너머로 몸을 보내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경계너머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지금. 그야말로 매 순간이 모험이다. 매 순간이 첫 경험. 달의 인력에 따라 들고나는 바닷물처럼 짜릿한 피로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하루하루가 거듭되는 시간들. 그래서 좋냐고 묻는다면 망설임없이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이것이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56)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제 길을 찾아 신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분들은 저를 동아리로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끝납니까? 안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들을 비롯한 이 세상의모든 피조물은 모두, 주님이신 신이시여, 당신의 손으로 꾸미신 계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피조물들이 태어나고, 고통을 받고, 나이를 먹고, 죽는 헛된 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동안 그들은 죽음의 주재자와 맞서다 갖가지 정도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 모두가 당신에게서 온 것입니다.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저 역시 당신의 희롱에 말리어 이 세상의 제물이 되고, 허물의 미로를 방황하고 자아 의식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렸습니다. 이제 원하옵건대, 당신의 실제(끝없고 자비로운)를 피난처로 삼아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소서_ 완전 동감이다!! 그러니 많이 가지려고 아등바등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가진 것도 다 버리고 싶은 이 마당에..._ 아이들이 잘 사는 것만 보고 나면 더 이상 미련이 없을 것 같다. 역시 내가 아직 살고 싶은 이유는 아이들이었던 거다.

(257) 그는 그 동굴을 나와 높은 산을 올라간 다음 고행에 들어갔다. 고행만이 모든 존재의 형상과의 마지막 인연으로부터 그를 해탈로 이르게 할 터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무추쿤다는 회귀하는 대신 이 세상으로부터 한 차원 더 떨어진 곳으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감히 그의 결심이 무분별하다고 할 것인가?★★★★★★★★★★★★★★★★★★★★★★ _ 거부라기보다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기껏 만들어 갖고 내려가 웃음거리가 된다면 그땐 정말 견딜 수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_ 다행인걸까? 이제는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두렵지는 않은 것 같다. 덕분에 한 걸음을 옮길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세상으로 귀환하고 있는 걸까? 세상으로부터 물러서고 있는 걸까? 있는 힘을 다하고 나면, 남은 힘을 다 쓰고 나서야 비로소 이를 수 있는 그곳을 향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어쩌면 귀환 역시 그곳으로 향하는 여정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결국 그런 것이었다. ‘귀환은 모험의 성과를 인정받는 보상의 단계가 아니다. 결국 그곳에 이르기 위한 또 다른 고행의 과정일 뿐이었던 것이다.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얻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이 목적인 과정이다. 그러니 얻음이 아니라 잃음이 기쁨인 것이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 목적인 것이다.

 

2. 불가사의한 탈출

 

3. 외부로부터의 구조

(269) 영웅은 외부의 지원을 빌려 초자연적 모험에서 귀환하는 수가 있다. 말하자면 이 세계가 합세하여 그를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외부 세계가 이렇게 하는 것은, 지칠 대로 지친 영웅에게, 힘겹게 도달한 지복의 땅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_ 그저 쉬고 싶을 듯

(275) 남아라비아의 위대한 모성신으 바로 여성적 태양인 일라트.

(276) 아마데라스는 미적 정화 작용을 통하여 자기 내부의 신적인 미덕의 계발에 힘쓰는 등 신으로 내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섬김으로써 신성에 귀일하고 있었다...여신 아마데라스의 신성한 자기 숭배

(277) 아마데라스는 수메르 최고 여신 이난나의 동양판. 이난나, 이쉬타르, 아프로디테, 베누스...이들은 서양 역사 태동기의 선진문화에 아마데라스가 낳아놓은 판박이들의 이름이다...이집트에서 이 아마데라스는 작은 개자리 시리우스의 여신이 되어 강 유역을 비옥하게 하는 나일 강의 범람을 예고해 주었다.

 

4. 귀환 관문의 통과

(281) 두 세계, 곧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삶과 죽음, 밤과 낮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영웅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영웅은 그 모험을 완성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갇힘으로써 우리들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 생활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_ 아버지로부터, 스승으로부터 사랑을 받기만 하고, 그들의 아픔과 고단함을 보듬어드리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라도 빚을 갚고 싶었던 것은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교육팀을 꾸릴 용기를 내었던 것도 그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스승께 받은 사랑을 되갚지는 못해도 내리 전하기라도 해야겠다. 더불어 이 기회에 각자의 세상에서 리더이자 스승으로 살고 있는 도반들이 현장의 고단함을 치유받을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벌써 세 달이 흘렀다. 남편의 지지와 격려 덕에 여한없이 몰입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보람있는 시간이었지만 드는 에너지도 만만치 않았기에 식구들, 특히 남편에게 소홀해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하긴 하지만 그리해서라도 마음의 묵은 짐들을 덜어내는 것이 결국은 오래 함께 할 남편에게도 좋은 일이라며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늘 새벽 어제 저녁 결혼기념일이라고 무리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른 출근준비를 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니라 여기 내 눈앞의 이 남자였구나! 우리 집의 아버지이자 리더인 그의 고단함을 알아보고 또 보듬어줄 힘을 주기 위해 아버지와 스승은 내게 그리도 넘치는 사랑을 주셨던 거였구나!

가만히 일어나 남편의 등을 꽉 안으며 말했다. “남편, (미안해. 몰라봐서. 아니 자꾸만 까먹어서 미안해.) 사랑해. 그리구 고마워. 내가, 그리고 아이들이 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거 다 당신 덕분인 거 알지?” 영문 모르는 남편, 순간 놀란 듯했지만 곧 몸을 돌려 나도 고마워. 당신이 내 옆에 있어줘서.” 이 세계와 저 세계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또 하나의 전리품을 획득하는 순간! 늘 기대했던 이상의 승리가 기다리는 모험. 내가 모험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인가 보다! ♥♥♥♥♥♥

(282)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초월의 세계에서 보내진 은총은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어버리니, 다른 영웅이 나와 말씀을 새롭게 설명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하지만, 인류가 약삭빠르면서도 우매했던 몇천 년 세월을 통해 수십만 번 제대로 가르쳐지기도 했고, 그릇 가르쳐지기도 했던 것을 어떻게 다시 가르친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영웅의 궁극적인 숙제다.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하나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2차원의 평면으로 3차원의 형상을 나타낼 것이며, 다차원의 의미를 3차원의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한쌍의 대립물에 대한 정의의 시도가 무의미한데, 어떻게 <그렇다><그렇지 않다>는 말로 이를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영웅의 깨달음의 핵심내용)을 설명한단 말인가? _ ~! 캠벨 할아부지. 어떻게 아셨어요. 바로 그게 지금 제 고민이에요. 그래도 진짜로 다행인 건 확실해요. 제가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는 것이...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요? . ? _ 설명할 것 없다. 깨달은 만큼 실천해서 보여주면 그만이다. 보여주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282)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 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밤에 꿈으로 꿀 때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정신으로, 전 날 밤에 했던 기도를 후회한다. 그러나 어느 정신적 산과의가 <시메나와>를 쳐놓고 퇴로를 차단한다 해도, 시간 속에서 영원을 표상하고, 시간 속에서 그 영원을 지각하는 작업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_ 귀환은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에 이르기 위한 또 다른 고행의 과정일 뿐이었던 것이다. 돌아오지 않고 그 세계에 머물러 버리는 것은 삶의 완결을 포기하는 일에 다름이 아니다. 잘 전달할 수 있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지만 결과에 연연할 이유가 없는 이유다. 길위에서 힘을 다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286) 그는 의식적으로(깨어있는 상태에서) 무의식의 왕국(깊은 잠)으로 내려갔고 잠재의식적 경험치를 깨어 있는 자신의 인격에 통합시킬 수 있었다.

(291)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립 반 윙클은 무엇을 체험하고 왔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귀환은 한낱 우스개로 끝나고 만다. 오이신은 자신의 저승 체험을 알고 있지만, 자기의 중심이 저승에 있다는 걸 잊어버렸기 때문에 역시 전락하고 만다. 카마르 알 자만은 그중에서도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 속한다. 그는 깨어 있는 채로 깊은 잠이라는 천복의 은혜를 체험했고, 믿어지지 않는 모험이라는 튼튼한 액막이를 지니고 빛의 세계로 귀환했기 때문에 일상의 엄연한 환멸에 직면하고도 자기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_ 모험의 순간을 기억해야한다. 기억하기 위해선 기록해야한다. 이 기록은 나를 일상의 환멸로부터 지켜줄 액막이가 되어줄 것이다. 내가 지난 1년의 체험을 책으로 남겨야 하는 절실한 이유다. _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경험과 느낌을 여과없이 남겨보도록 하자!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294)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이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_ 역시 기록해야한다는 결론!!

 

5. 두 세계의 스승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의미를 실어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306)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자기 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307)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부동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 _ 명심하자! 무대의상이 마음에 안 든다고 배역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좋은 배우라고 할 수 있겠니?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다면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갖는 게 우선이야. 그리고 제일 먼저 배우인 자기의 본질을 간파해내야겠지. 그다음엔 자기가 맡고 있는 배역의 핵심을 파악하는 거야. 그래서 배우의 본질과 배역의 핵심을 아름답게 섞어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훌륭한 배우 아니겠니? 니가 되고 싶다는 게 그런 사람 아니니? _ 지금도 그렇다. 내게 주어진 현장을 최대한 활용하여 깨달음에 이르고, 나아가 열반에 도달하면 그걸로 족하다.

 

6. 삶의 자유

(308)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자기 삶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영웅은 햄릿이나 아르쥬나처럼, 불가피한 죄악의 거부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_ 작년 이맘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글귀중 하나다. 모든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한다. 내가 뭐라고 남을 희생시킨단 말이야. 어쩌구. 한참을 너무 괴로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참으로 다단한 곡절을 거치고야 비로소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고마운 일이었다. _ 육체를 받아 태어난 하나의 생명체로서 가진 자원을 활용하는 우선순위를 메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308)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 _ 귀환의 시기의 주문!!

(309)

착한 엘핀이여, 슬퍼하지 마시라.

하기야 그대보다 더 불만스러울 자가 어디 있으랴.

절망한들 이득이 없는데도

사람은 저에게 득될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거품이 이는 이 바닷가에서는

내 비록 작고 약하나

환란의 날이 임하여 그대에게 득 될 바를 어찌 3백 마리의 연어에 다 견주겠느냐

(313) 시인의 노래 중 대부분은 자기에게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에 다 바친 것이다. 자기의 개인적인 내력을 밝힌 것은 마지막 한 연에 지나지 않는다. 듣는 자들은 자기 내부에 있는 불멸의 존재에게 눈을 돌리고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탈리에신은 마귀를 두려워했지만, 바로 그 마귀에 의해 삼켜졌고, 그래서 재생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4. 열쇠

(316) 원래 살던 오두막이나 성에서 떠난 신화 속에 영웅은 꾐에 빠지거나, 납치당하거나 자진해서 모험의 문턱에 이른다. 여기에서 영웅은 길을 안내할 그림자 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만난다. 영웅은 이를 퇴치하거나 이 권능을 지닌 존재와 화해하여 산 채로 암흑의 왕국으로 들어가거나(골육상잔, 용과의 싸움, 제물 헌납, 혹은 호부에 의지하여), 적대자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의절, 고난). 이 문턱을 넘어선 영웅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한 힘에 이끌려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경우에 따라 위협을 받기도 하고(시련),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조력자).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다다르면, 영웅은 절대한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긴 보상을 받는다. 이 승리는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과의 성적 결합(신성한 결혼), 창조자인 아버지에 의한 인정(아버지와의 화해), 그 자신의 신격과,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가로채기(신부 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원래 이 승리는 자기 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은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영웅은 도망치고, 부정적인 세력의 추격을 받는다.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웅은 혼자서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 그가 가져온 전리품은 세상을 구원한다(불사약) _ 일상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던 지선은 우연히 마법학교 모집공지를 보게 된다. 이런 것도 다있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으나, 그날 이후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파온다. 이리저리 통증의 원인을 찾아보려고 애쓰던 지선은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마법학교 입학원서를 작성해본다. 거짓말처럼 없어진 통증. 그제서야 마법학교가 그녀에게 다가온 새로운 삶의 모습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결심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휴직결정에 대한 가족과 동료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가족들은 그녀가 무모한 결정을 후회하게 될까봐 걱정했고 동료들은 그녀의 휴직결정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 지선은 이같은 주위의 완강한 반대에 잠시 혼란스러워하지만 결정을 되돌리기에 그녀의 마음은 이미 너무 먼 곳까지 가버린 것이다.

결국 휴직하고 마법학교에 입학한 그녀. 막상 들어온 마법학교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린다. 수업내용과 클레스메이트들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에 대한 실망까지 겹쳐 그녀는 자신의 결정이 잘 못된 것은 아니었나 후회를 하기 시작한다. 이런 그녀의 방황을 눈치챈 그녀에게 마법학교 교장은 네 두려움이 아무리 클지라도 너는 분명히 이겨낼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마치 마법처럼 그녀의 지친 마음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정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하자 그녀는 본격적인 성장괘도에 오른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수련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삶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고, 자신의 감각기관을 최적화해 세상이 보내는 메시지를 받는 수련을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선 위대한 마법사들과의 수업을 통해 원만함을 최고 미덕으로 삼는 조직에 적응하느라 스스로도 잊고 지내던 그녀만의 특별한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자신의 기쁨과 세상의 기쁨이 조응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체험 이후 그녀의 일상은 아마 전에 살던 그곳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일 수 없다. 자신의 체험을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결국 또 다시 봉인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흐르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깨끗한 물도 반드시 썩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신비한 체험의 세계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때로는 그 어려움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혼자서 체험의 신비를 즐기다 그것이 다할 즈음 세상에서 사라지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유혹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소명이 발견한 깨달음을 끊임없이 외부로 퍼나르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지극히 그녀다운 방식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은 그녀의 메시지로 인해 조금씩 아름다움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드디어 영광스런 귀환에 성공한 것이다.

(317) 유입되는 신화는, 이를 유입하는 지방의 풍경과 관습과 신앙에 따라 윤색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틀거리가 빗나가게 되기도 한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들이 무수히 재연되다 보면 고의적이든, 우연이든 와전과 전위가 불가피하다.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이야기의 어떤 요소는 무의미하게 되거나, 때로는 상당히 기술적으로 부수적인 해석이 첨가되기도 한다.

 

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331)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자. _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자라는 의미겠지?

(332)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

 

2. 우주의 순환

(338) 우주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꾸지 않는 至福의 단계다.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 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마음 속에 있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_ 굳이 도해하자면 연구원 과정은 첫 번째 단계, 스스로 두 번째 단계를 거쳐 이라는 결과물로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음이 드러난다.

 

3. 허공에서 공간

(342) 모든 피조물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귀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화는 비극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이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화 체계의 문법을 숙지하고 나면 비극적이란 표현은 천만부당하게 느껴진다. _ 전체 안에서 삶을 바라보면 조급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어진다.

 

4. 공간의 내부에서 _ 생명

(357)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하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은 하나라는 자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정의 체험은 우주의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이러한 것을 체험한 남성이나 여성은 쇼펜하우어의 이른바 <도처에 널린 것을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모습으로 둔갑해서 이 세상을 한유하며>, <, 놀랍도다, 놀랍도다>로 시작되는 우주적 합일의 노래를 부르는 경지인 것이다

 

5. 하나에서 여럿으로

(360) 티아마트는 원초적인 심연 자체, 그리고 원래는 신들의 어머니였으나, 지금은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인 혼돈의 여성적 화신이다.

 

6. 창조의 민화

(372) 광대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는 승리하나, 그들 자체나 그들의 업적은 무대가 초월적인 차원으로 옮겨지면 간단히 사라지고 만다 _ 결국 풍요로운 광대냐 고단한 영웅이냐의 선택이란 말인가? _ 이제는 다르게 읽힌다. ‘본질을 꽤뚫을 수만 있다면 비록 그것을 대중에게 전하는데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의미없는 헛수고로 삶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큰 수확인가!

 

2. 처녀 잉태

1. 어머니 우주

2. 운명적 모태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390) 고만고만한 마을에서 한 처녀가 태어나는데 이 처녀는, 자기 세대의 오점이 하나도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으로 자란다...원초적인 심연의 휴경지로 남은 그녀의 자궁은, 만반의 준비가 다 된 상태에서, 일찍이 을 살찌웠던 근원적인 권능을 부른다.

마리아여, 축복을 받으라. 네 자궁은 하느님께서 거하실 차비가 끝났음이라. 하늘에서 빛이 내려 너에게 거할 것인즉, 그 빛은 너로 인하여 세상을 비출 것이다 _ 말씀(구세주)을 전하는 통로

(392) 파르바티가 대답했다. <그분은 당신과 같은 인간의 마음 저쪽에 있습니다. 가난뱅이인지는 모르나 그분은 부의 원천입니다. 무서운 분인 동시에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뱀으로 만든 옷이든 보석으로 수놓은 옷이든, 입는다면 마음대로 벗기도 할 것입니다.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시바는 내 사랑이십니다.> ★★★★

 

4. 미혼모의 민화

 

3.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398) 이들의 권능은, 정상적인 인간의 육체가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앞질렀다. 영웅적인 업적이나, 인류 문화의 기초 작업은 다 이런 시대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러한 업적은 원형적 인간 및 초인간에 의해서만은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다...이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월우의 화신이나, 운명의 팔괘라는 초월적인 지혜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희망에 따라 행동하는 완전한 인간 정신이었다 ★★★_ 초인간적인 능력을 타고 태어난 영웅이 아니라도 하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그리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399) 후앙 티는 꼬박 석 달간이나 계속되는 꿈을 꾸었는데, 이때 그는 몽중에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했다. 두 번째의 긴 꿈에서 그는 백성을 가르치는 능력을 얻어 깨어났다. 그는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자연의 힘을 통제하는 것을 가르쳤다. ★★★★★★★ _ 영웅의 깨달음이 사람들에게 유용해지는 가장 명료한 지점이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자연의 힘을 통제하는 것일 터이다.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400)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

(402) 영웅의 첫 번째 과업은, 우주 발생적 순환의 그 전단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과업은, 심연에서 일상의 삶으로 귀환하여 조물주적 잠재력을 가진 인간적인 변환자재자가 되는 것이다. _ 우주 만물의 근원은 우리는 하나.

(409)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인 외부로 던져졌다. 어느 경우든 그를 당혹케 하는 것은 미지의 암흑이다. 이곳은 의외의 존재, 자비로운 동시에 심술궂은 존재의 영역이다...이 어린 세상의 신참자는, 헤아리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권능이 있음을 배운다. 신화는 그러한 체험을 견디고, 거기에서 살아나오는 데는 범상하지 않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개가 힘이 세고, 영리하고, 또 지혜롭다. _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견디다 보면 저절로 깨우치게 되는 그 무엇이 아이의 변신을 위한 핵심 성분이라면 참으로 희망적이지 않는가!

 

3. 전사로서의 영웅

(420) 이제 길을 떠나 아내될 만한 동류를 찾고자 합니다. 동류들과 겨루어 제 힘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도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들과 사귀어 그들 식으로 살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원컨대 저를 축복하소서.

 

4. 애인으로서의 영웅

(428)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이 여성은 수만은 용을 죽인 영웅의 애인이며, 질투심이 강한 아버지로부터 유괴되어 온 신부며, 부정한 애인으로부터 구출된 처녀다. <영웅과 영웅의 상대역인 여성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처녀는 영웅 자신의 <다른 한쪽>이다.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처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이미지다. 그러나 영웅이 자기의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사상에 현혹될 때, 영웅은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

(431)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432)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434) 영웅 모험의 목표가 미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때, 여기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상징 체계는, 시험 및 정체 고백의 상징 체계다.

(434) 근원에 접한 영웅은 중심의 정적과 조화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437) 자기 치적의 은총을 초월적이며 근원적인 존재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황제는 마땅히 자기가 누릴 바를 누린다는 입체적인 환상을 품는다. 이런 자는 더 이상 두 세계의 중재자일 수 없다

 

6. 구세주로서의 영웅

(440)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 _ 끊임없는 순환. 기쁨과 슬픔, 빛과 그림자의 끊임없는 순환. 비가 오면 비를 맡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맡으며 제 갈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삶인 것이다.

(441)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7. 성자로서의 영웅

(443) 삶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할 영웅의 유형..성자, 고행자, 출가자로서의 영웅..<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안에서 살고, 소식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 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값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_ 이런 사람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8. 영웅의 죽음

(456) 존재의 제법은 무상하다. 정진하여 해탈에 이르도록 하여라. 축복받은 자는 첫 번째 無我에 이른다. 첫 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두 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두 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세 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세 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네 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네 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공간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知覺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으로 들어간다.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과 감각의 휴식 상태에 이른다. ★★★

 

4. 소멸

1. 소우주의 끝

(462) 인간의 모든 단계의 삶을 경험하고, 마침내 우주적 알이란 벽을 깨뜨릴 수 있게 된다. 단테의 <신곡>은 이 단계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연옥편>은 육신의 욕망과 행위에 얽매인 영혼의 참담함을, <정화편>을 육신의 경험이 영혼의 경험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천국편>은 정신적 자각의 단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_ 나는 지금 <정화>의 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 같다.

 

2. 대우주의 끝

(465)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1. 變身 自在者

(478) 신화체계...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신화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다.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480)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잠재적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그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

(480)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_ 엄마 : 아이들에게 사랑의 원형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아내 : 믿음직한 파트너, 정서적 에너지원, 직원 : 재능을 통한 공헌, 작가 : 영혼의 심지에 불을 밝힌다...아직은 <존재할> 자격이 부족해 보인다. 노력하자. 정확히 묘사할 수 있어야 실행에 옮길 수 있음을 명심하자! _ 보기에도 버거워보이던 엄청난 역할들 속에 파뭍혀있던 나. 7년이 지난 지금, ‘직원이라는 역할을 자원봉사자라는 역할로 대체했다. 엄마와 아내 역할을 즐겁게 소화하는 중이다. 이제는 당당히 엄마와 아내로서는 당당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더불어 나로서도 조금은 더 확고히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공부는 끝이 없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움직이는 이유다.

(480) 의식은, 견디기 어려운 계절과 풍요의 계절을 함께 거느린 이 놀라운 한 해의 주기를 함께 찬미했고, 일 년의 주기는 인간 집단의 계속되는 삶의 순환을 표상한다.

(482) 이런 명상을 통해 입문자는 자기의 심층에 이르고, 마침내 그 껍질을 뚫고 엄청난 자각에 이른다. 그런 경지에서 되돌아 나올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경지에서 미합중국, 어디어디에 사는 모모 씨라는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사람도 없다. 요컨대 사회와 의무는 분리된다. 자기 자신을 위대한 인간으로 발견한 아무개 씨는 내성적이며 초연한 인간이 된다. 이것이, 나르키소스가 호수를 내려다보는 단계이며, 부처가 보리수 아래 앉아 명상을 하는 단계다. 그러나 이 단계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필요한 단계이지 목적은 아닌 것이다.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이 단계가 끝나면 입문자는 본질 자체처럼, 고삐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돌게 된다. 뿐인가? 세계라는 것 역시 그 본질이다. 개인의 본질, 세계의 본질...이 둘은 하나다. 이때부터 은거, 은둔은 필요없다. 영웅이 어디를 떠돌든, 그가 무슨 짓을 하건 그는 자기의 본질적 실재에 머문다. 그에겐 세상을 보는 완전성에 이른 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분리 및 은둔이 있을 수 없다. 사회적 참여가 결국에는 개인의 내부에 있는 전체를 깨닫게 하듯이 추방으로 인한 유랑이 영웅을 전체에 내재하는 자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 _ 아직도 눈앞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내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아직 내 안의 영웅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이다. 더 버리고 더 깨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해진다. 아직도 두렵기만하다. 어찌 이리도 힘겹단 말이야. 영웅의 여정이란._이제는 조금 더 초연할 수 있을 듯하다. 움켜쥐고 사린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여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또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살게 되어 있다는 것, 그 모진 고통 속에 애타게 찾아헤메던 기쁨을 여는 열쇠를 찾게 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모습으로 100%예단할 수 있는 미래라나 없다는 것, 어떤 도약도 비약도 가능하다는 것. 그 도약의 방향은 순전히 이 순간에 대한 경험의 질에 달려있다는 것. 그러니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알알이 즐기는 것 말고 지금 여기서 해야할 다른 일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덕분일 것이다.

 

3. 오늘날의 영웅

(488)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적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인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 _ 절망과 시련에서 도망치지 말자. 절망과 시련을 실패의 징후로 해석하지도 말자. 그저 알아차릴 수 있으면 된다.

 

역자후기

(490) 스스로를 감전 체험으로 인한 帶電體라고 감히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믿음은 私的이다 _ 어떤 느낌인지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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