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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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9일 20시 17분 등록
저자 소개

전문가란 무엇인가? 구본형은 <사자같이 젊은 놈들>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의 조도와 각도, 혹은 기계와 장비의 사용법 등을 익히는 것은 기술로 테크닉의 영역이다. 이 일을 아주 잘 하면 훌륭한 사진기사라 불릴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담을 것인가?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예술가다. 사진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표현하는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사진작가라고 부른다."

구본형은 변화경영전문가였다.  그가 전문가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변화경영에 대한 확고한 사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내부에 품고 있던 그것은 사진기사를 뛰어넘은 예술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정말 전문가일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전문가에 대한 자기 정의를 가능하게 하고, 실질적으로 어떻게 해야 전문가가 될 수 있는지 진심으로 가르쳐주었다는 점에 있다. 그가 내린 전문가의 정의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좋아하는 일을 잘 하는 일로 발전시켜 그것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하든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이다.

"노력의 8할을 자신의 특성에 집중하라. 자신의 특성 중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특성을 활용하라. 예를 들어 사물의 어두운 부분을 보는데 능한 사람은 비판기능과 숨어 있는 덫을 파악하는 분야로 특화하라. 지금까지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꾸짖어 사물의 밝은 부분을 볼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하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의 일갈은 과거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과거의 관습으로 시작하고 이내 좌절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것은 마흔 이전의 구본형 본인의 모습이기도 했으며,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낯선 곳에서의 아침>,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로 이어지는 그의 초창기 저서들은 새로운 장르의 일상적 삶을 창조하라는 외침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또한 그가 이루어낸 실천적 개혁이자 자기 혁명이기도 하다. 그의 글을 읽고 가슴 뜨거움에 변화를 결심한 사람이 한둘이던가? 그는 남들의 피를 데우는 타고난 선동가였다.

그와의 첫 만남은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였다. 풋내기 신입사원으로 자기 개발서를 옆에 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구본형은 공병호와 함께 1인 기업가의 1세대로 그 유명세를 알리고 있었고, 그의 책들은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흔한 자기개발서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른 책들보다는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나 그것이 나의 일상으로는 침투되지 못 했다. 단순히 직장내에서 직업적인 성공을 위한 열망으로 책을 접하던 나에게 그는 나의 삶과 별 관련이 없는 성공한 작가에 불과했다. 

이제 시간이 지나 내 삶에 대한 이해와 갈망이 깊어진만큼 그에 대해서 예전에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고 있다. 
그는 변화가 삶에 녹아있던 사람이었다. 세월의 흐름에 본인의 변화를 맡기는 것이 아닌, 자기자신의 변화에 세월을 흐름을 동조시킨 진정한 자기 혁명가였다.

그의 책들을 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체가 변화했음을 알수 있다. 변화경영전문가에서 변화경영사상가를 거쳐 변화경영시인으로 가는 작가의 스스로의 변화가 글속에 녹아져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참다운 자기 스스로를 찾아가는 변화의 여정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2년 8월, 그가 죽기 불과 반년전에 남긴 <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은 신화를 통해 변화경영을 전달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녹아 있다. 그는 아폴론과 음색으로 자웅을 겨루었던 그 오만한 마르시아스였다. 또한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예술과 태양의 신 아폴론이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삶으로써 스스로의 이름을 찾아간 과정은 오디세우스와 다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변화경영시인을 향한 그의 향해는 그의 나이 59세에 중단되고 말았다. 캠벨이 말한 삶의 지복을 누리고 간 사람, 구본형은 삶의 경험으로 자신을 충만히 살다간 진정한 이 시대의 스승이 아닐까.

"이 순간의 햇살을 즐기자. 어차피 가져갈 수도 없는 시간이니.
멈춰라 시간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란 말이냐?"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신화는 가면 너머 존재하는 인간의 붉은 욕망들과 다툼을 야생의 언어로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리하여 '꽃처럼 피어나는 그 솔직함과 진실함 앞에 기만에 찬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개인의 무의식 속 원초적 욕망과 억제된 사회적 질서 사이의 깊고도 끈질긴 다툼

> 신들의 전쟁, 신과 인간의 갈등과 화해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간의 기나긴 투쟁과 화합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프롤로그 1
신화 독법에 관하여

p10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하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 조셉캠벨 <신화의 힘> p303

p12
그래서 신화는 시인 것이다.

>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 조셉캠벨 <신화의 힘> p411

"시는 하나의 말없음표 ...... 그 말없음표로 자신의 가장 내밀한 것은 표현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감정이나 깨달음 같은 것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류시화 <한줄도 너무 길다>

언어너머의 진리를 표현하기에는 언어는 많은 한계를 가진 도구이다. 그나마 언어를 사용하는 표현수단중 시가 가장 나은 편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시의 특성이 생략에 있기 때문이다. 그 생략의 여백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읽는 이에게 주는 울림과 깨달음은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다.

p13
자연은 선악을 넘어서 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자연은 모든 모순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신화를 읽을 때는 선악에 갇히면 안 된다.

> 처음 원초적인 신화의 문법을 접하고 당혹스러움이 있었다. 세상을 선악의 프레임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신화를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 선악의 프레임을 걷어내고 신화를 바라보는 것이 자기 자신의 무의식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해줄 듯 하다.

옭고 그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왜곡된다. 무수한 삼라만상이 옳고 그름을 넘어선 영역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고대 에페소스 출신의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단상> 102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며, 정의롭다. 인간들만이 어떤 것은 그르고 어떤 것은 옳다고 말한다."

> 개미나 모기, 미생물과 인간의 관계와 유사할 듯 하다.

신화는 원시적 사고가 지어낸 어리석은 미신이 아니라 갖가지 문화에 의해 왜곡되기 전 인류의 원형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의식이 억압하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우리의 내면을 통찰하게 하는 통로다.

> 의식이 억압하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 하지만 실상 우리는 무의식에 의해 더 많이 억압받고 영향을 받고 있다.

p14
신화는 모험을 통한 변화의 이야기다.

> 구본형 스승이 신화에 탐닉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롤로그 2
신화 속 '야생의 사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p17
인류의 고추 이야기 속에 위장되어 감춰진 인류의 성기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다.

> 자극적이라고 외면하면 안 된다. 똑바로 쳐다봐야 볼 수 있다.

p23
행복 속에는 희망이 없다. 이미 행복한 사람은 희망하지 않는다.

그렇구나. 판도라의 상자 따위는 애초에 없었구나. 판도라 자신이 바로 그 상자였구나!

> 인간 자체가 판도라의 상자인 셈이다.

p24
판도라는 인간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갈등을 일으키는 두뇌와 같았다.

p25
남자가 어머니 상을 버리고 천생연분의 신부를 맞이하게 됨으로써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기 시작한다. 비로소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삶이라는 시련이 시작되면서 남자는 자기가 아버지와 동일하다는 사실, 즉 자기가 아버지와 동일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증폭이며 자각이다.

> "그들은 위대한 아버지 뱀의 몸 <안에서> 어머니를 잃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상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상상의 중심(즉 세계의 축)에다 젖가슴 이미지 대신 남근을 세운다. " -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한 영웅> p180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과 샘처럼 고이는 시간 - 크로노스

p31
그리스 신화는 '자식을 잡아먹는 아버지'라는 끔찍한 상징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적이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는 과거를, 아들은 현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p34
판도라의 뚜껑이 열리면서 시간이 흘러나왔고, 시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p36
바쁜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머슴일 뿐이다. 무엇에 시간을 충분히 쓸 것인지 아는 사람이 시간의 주인이다.

> 머슴으로 40년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직장에서 가정에서 아직은 머슴의 신분이다. 머슴이 삶의 주인으로 탈바꿈하는 대각성의 순간을 위해.

p37
이 순간의 햇살을 즐기자. 어차피 가져갈 수도 없는 시간이니.
멈춰라 시간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란 말이냐?

>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란 말이냐?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너의 삶을 살것이냐? 

p38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긴 글을 쓰고 있지만, 아이들은 긴 설명도 필요 없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멈추고 싶은 순간에 "얼음"하고 외친다.

> 얼음! 그리고 땡! 이렇게 쉬운 말을 우리는 왜 하지 못 하고 사는지


애욕, 그 엉큼한 환락과 헌신하는 사랑 사이 - 아프로디테

p39
신기한 것은 시간과 욕정이 모두 우라노스의 성기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 시간에 대한 욕구는 곧 삶의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 다시 말해 불로장생의 욕망을 의미한다. 살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번식함으로써 내 몸 안의 이기적인 유전자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는 결국 하나의 욕구일 수밖에 없다.

p47
시간에 갇힌 인간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빛의 속도로 움직일때 시간이 멈춘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문인들은 사랑이 절정에 이를 때 그 사랑이 시간을 멈추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캠벨의 <신화의 힘>에 나오는 중세 음유시인들에 대한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p49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서로찾기>라는 시 속에서 "너(여자)는 내(남자) 속에서 산을 찾고, 나는 너의 몸에서 배를 찾는다"라고 절묘하게 표현했다.

사랑이란 새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경과 슬픔과 고통이라는 물로 수없이 세탁되어도 변하지 않는 천과 같은 것이다.

> 안타깝게도 '변하지 않는 천'이란 것은 없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 천'이 아니라 천 자체가 가지고 있던 따뜻함이라는 본질과도 같다. 목도리가 빨고 빨아서 넝마가 된다 한들, 주인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단, 주인이 목도리를 걸레로 취급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p50
육체의 애욕이 영혼의 사랑과 합일하게 될 때, 인간은 시간을 넘어 대를 잇게 된다. 필멸의 육체로 상징되는 거품, 바로 삶 그 자체를 사랑할 때 시간은 결코 우리를 절멸시키지 못하리니 우리는 후대로 이어진다. 삶을 사랑하지 못 하는 자, 불임이니 시간에 의해 절멸될 것이다. 사랑만이 사랑을 낳게 되고, 그 사랑을 이어감으로써 우리는 시간에 대항할 수 있게 된다. 육체가 죽어도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남아 있는 한, 그 사람은 사라지지 않는 불멸이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사랑으로 남는 존재들이다.

> 아! 이 얼마나 멋지고 간드러지는 표현이 아니던가!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변화, 또 다른 나를 창조하는 무한 에너지 - 제우스

p51
그러나 인간은 신의 저주인 이 변화를 창조의 힘으로 변용시킴으로써 영웅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p54
제우스의 편력은 모험과 전쟁, 그리고 정복을 상징화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많은 여인들과 몸을 섞은 것은 그리스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여러 토속 종교와 섞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단군신화에서 화웅과 결혼한 웅녀의 신화가 그러하다. 그래도 우리 신화는 인간적이다. 100일동안만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 되고, 도중에 포기해도 돌로 변하거나 신의 분노를 사서 처참한 죽음을 맞거나 하지 않는다. 내가 동화로만 우리나라의 신화를 접해서 아직 뭘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오비디우스가 신화를 하나의 개념, 즉 변신 이야기로 파악한 것은 '변화와 변신'을 인간 세상의 작동원리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극복의 기술을 습득한 자들이며, 새로운 삶으로 탄생하는 데 성공한 인물들이다. 이 구도가 바로 신화의 기본적 틀이다.

p59
창조를 자아에 적용한 자들만이 변신에 성공한다.

p60
우주적 기운이라는 말에 당황할 것 없다. 한 그릇의 바닷물 안에 바다의 성분이 다 들어 있고 벼룩 한 마리 속에 생명의 원리가 다 들어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그 안에 우주와 자연을 품고 있다.

> 우리가 가는 길이 신화이고, 우리 안에 신이 있다는 믿음만 있으면 우주라고 하는 것은 더이상 거창할 것이 없다.

p61
긴 겨울이 찬바람과 함께 휘몰아쳐 온몸은 추위로 얼어붙는다. 그러나 마지막 담쟁이 잎처럼 견딘다. 적어도 10년을 견디고 1만 시간을 채워야 한다.

견뎌내지 못하면 위대함도 없다.


'아무도 아닌 자'에서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모험 - 오디세우스

p67
폴리페모스가 동료들에게 "아무도 아니(nobody)가 내 눈을 멀게 했어"라고 아무리 외쳐봐도, '아무도 아니'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사건은 종결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오디세우스가 배를 타고 떠나면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 것이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그 때부터 진짜 항해를 시작하였다.

> 아무도 아닌 자에게는 아무런 의무나 삶의 핍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이 생기는 순간 고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회에서 불리는 이름, 학교에서 불리는 수험생이라는 이름, 직장에서 직급과 직무로 불리는 이름까지 - 이름은 고난의 성격과 유형을 결정지어주며, 우리에게 그에 따라 살아갈 것을 강요한다. 

p68
재미있는 점은 '도시의 파괴자인 이타카의 오디세우스'라는 진짜 이름이 알려지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아들 폴리페모스의 기도를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10년 동안 포세이돈이 퍼붓는 갖가지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이제 오디세우스에게 주어진 모험이 된 것이다. 10년의 고난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오디세우스의 진짜 이름은 '도시의 파괴자'에서 '귀향하는 바다의 항해자'로 진화를 거듭한다.

> 오디세우스가 원래의 이름을 말해주면서 그의 고난이 시작되지만, 그 고난은 진정한 이름을 알아가기 위해 신이 내린 시련이었던 셈이다. 

p69
신과 인간의 다른 점은 신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진짜 이름을 가슴 깊숙이 품고 그 이름으로 권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한다. 진짜 이름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되어 그럭저럭 살고 있는 것이다.

> 나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개발문화전문가라는 것이 나의 진짜 이름일까? 일단은 그렇게 정의해놓고 시작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바가 없다. 더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p70
그 진짜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이 삶이다. 분석심리학의 아버지 카를 융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였다."


자기애, 다른 사람의 눈 속에서 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 - 나르키소스

p76
'다른 사람의 눈 속에서 나를 찾아보기'는 중요한 자기 경영의 원칙이다.


배고픔, 너의 죽음으로 공양된 나 - 에리직톤

p83
스티브 잡스는 성공을 바라는 젊은이들에게 "늘 배고파해라 stay hungry"라고 말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점점 더 많이 쌓아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룬 것을 거부하라는 뜻이다.

p84
삶은 다른 것을 죽여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생명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이 고뇌를 단박에 끊어버린 인물이 바로 키르티무카인 것이다.


분노라는 이름의 야수를 길들이는 법 - 아킬레우스

p97
분노는 퍼부어지는 대상보다 그것을 담고 있는 양은그릇에 더 해를 끼치는 산과 같다.

p98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때에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목적을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화를 내기란 대단히 어렵다 - 아리스토텔레스

> 정말 화가 날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구절을 되새기며 화를 내려고 하면 솟아올랐던 분노가 많이 정화될 것 같다.


혐오, 뒤집으면 엄청난 창조 에너지 - 피그말리온

p106
평생을 철학의 감시자로 철학하는 자들의 사유 방식을 감찰했던 인물이 바로 니체였다. 그에게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였다.

p110
세상을 혐오하는가?
사랑할 만한 나만의 세상 하나를 만들자.
그러면 그 세상을 사랑하게 되리라.

삶을 혐오하는가?
사랑할 만한 삶 하나를 만들자
그러면 못 견디게 그 삶을 사랑하게 되리라.

운명을 미워하는가?
미칠 듯 빠져드는 운명 하나를 만들자
그러면 순명의 삶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리라.

우리가 미워하고 혐오한 것이 사실은 깊은 곳에서 샘솟는 사랑이었을까?
아마 그러하리라. 더욱 더 그러리라 믿게 되었다.


희망없는 일의 무수한 반복, 그 부조리를 극복하는 힘 - 시시포스

p116
매번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로 밀어올려야 하는 무의미한 일을 매일 반복해야 하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삶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카뮈는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p117
나의 삶, 나의 반항, 나의 자유를 최대한 느끼는 것, 이것이 최대한으로 사는 것이다. 매일 무익한 일에 나를 바치는 삶은 허망하고 쓸데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배당된 삶의 바닥을 반항과 자유의 열정으로 맨 밑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퍼올리며 사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비극 속에서도 항상 깨어 있는 인간 시시포스야말로 인간의 참다운 모습이다.

p118
그리고 어느 날 고난에 찬 기나긴 길을 걸어온 오이디푸스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이 듦과 내 영혼의 위대함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이 좋다고 느끼게 한다."

> 해탈하셨습니다. 오이디푸스님. 열반에 드실 시간입니다.


아름다움, 모든 것이 결국 너에게 굴복하나니 - 헬레네

p120
아름다움의 단위  = 헬렌helen. 
1밀리헬렌 = 배 한 척을 띄울 수 있는 아름다움. 
트로이전쟁 그리스 총 전력 = 배 1천 척 =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쏟아부은 힘

p127
여성은 왜 '악마의 문'인가? 남성을 유혹하여 파괴하기 때문이다. 거친 야생의 남성은 부드러운 여성 속에서 죽는다. 예외가 없다. 그렇다면 여성은 왜 또 '천국의 문'인가? 파괴하여 남성들의 감각을 깨우고, 파괴 속에서 그들이 새로운 자신으로 잉태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 여성이 가지고 있는 자궁의 힘, 즉 새로 태어남의 기적이다

> 캠벨의 <신화의 힘>에서 타락의 책임을 여자가 지게 된 이유를 캠벨은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라고 말한다.  타락했던 우리가 결국 돌아가는 곳은 태어났던 그 곳 어머니의 자궁안이며, 이는 캠벨의 말을 빌리면 사랑의 은혜이자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다.

p128
"인간은 동굴의 좁은 입구를 통해 만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인식의 좁은 동굴 문을 박살낸다면, 만물은 그 자체의 무한한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낼 것이다"  - 윌리엄 블레이크


허영, 사랑하는 것을 숨기고 아껴두지 못하는 자의 비극 - 니오베

p134
"식물에게 물을 너무 많이 주면 죽어버리고, 등잔에 기름이 너무 가득하면 불이 꺼진다. 마찬가지로 정신작용에서 공부와 지식과 재료가 너무 과하면, 아는 것이 잡다하게 너무 많아서 거기에만 사로잡히게 되니, 사리에 맞게 자력으로 풀어볼 힘을 잃게 된다. 지식의 무게 때문에 학자는 허리가 굽어지고 곱사가 되는 것이다." -  몽테뉴 <수상록>

> 차면 비고, 부풀면 줄어들고, 올라가면 내려온다. 파괴하려거든 끝까지 몰고 가고 보존하려거든 중용을 지켜라 -도교 격언

p136
이 세상에 자신이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처럼 위험한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은 곧 그 보물을 잃고 말 것이다.

p137
흐르는 물은 매일 그렇게 조금씩 나아간다. 매일 읽고 매일 써라. 매일 하지 않으면 물은 대지의 어딘가에 스며들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결코 강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작은 개울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 만고의 진리!


거짓이 만들어내는 역설적 생산성 - 바투스 영감과 헤르메스

p145
작가란 거짓으로 진실을 밝히려는 무모한 자들이다. 그들은 기가 막힌 허구를 만들어내어 진실보다 더 강한 임팩트를 줌으로써 삶을 비춰보려 한다. 그래서 카뮈는 말한다. "진실은 빛과 같아 눈을 어둡게 한다. 반대로 거짓은 아름다운 저녁노을처럼 모든 것을 멋지게 보이도록 한다." 그런 뜻에서 모든 작가는 노을빛 '구라쟁이'다. 탁월한 '구라'가 위대한 작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 구라쟁이의 길로 가자. 노을빛 구라로 사람들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만들어보자. 구라로 인해 내 삶과 그들의 삶이 진실이 되는 순간 작가는 태어난다.

p147
따라서 수시로 구라와 진실의 세계를 들락거려야 한다. 둘 사이의 심연을 건너는 외줄 다리 하나는 늘 확보해두어야 한다. 작가도 현실을 살아야 하는 것이며,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자신의 삶 자체를 이야기로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탐욕에게 먹이를 주는 자들의 최후 - 미노스와 미다스

p153
정치권력자로서 서임의식을 치르면 신의 대리인이라는 겉옷을 입은 것이니,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면 신의 분노를 사 재앙을 당하게 되리라. 이것이 미노스의 신화가 품고 있는 상징성이다.

p154
권력은 음식과 같다. 만들어지기까지는 신선한 재료로 요리되지만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부패하기 시작한다. 절대 권력일수록 더 심한 악취를 내게 되어 있다.

> 고이면 썩는 법이다. 더군다나 그 고인물이 탐욕으로 오염된 것이라면 부패의 속도는 더 빨라지기 마련이다.

p155
지상에서 한 실수를 저승에서는 결코 범하지 말라는 신들의 배려였거나, 아니면 인간의 탐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지옥의 판관으로 삼아 죄진 자를 가려내어 벌주는 임무를 맡기기 위한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p158
세속에 무관심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자연에 탐닉한다

> 오래전에 읽었던 한 작가의 에세이집이 생각난다.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작가인데, 사실 별로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였다. 단순히 책 제목과 서문에 마음이 끌려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작가가 바로 자연에 탐닉하는 부류였다. 말로는 무소유를 외치지만, 본인 시골집 화단의 꽃과 나무에 대한 욕망은 무소유를 노래하는 작가의 본새는 아니였다.

p159
살까 말까 망설일 때는 사지 마라. 돈이 굳는다. 그러나 할까 말까 망설일 때는 해라.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 내 좌우명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할까말까 50대 50이면 하는 쪽을 택한다. 살까 말까 망설여지면 사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후회는 남지만, 하지 않았던 것에서 오는 후회가 더 크고, 사서 하는 후회가 더 컸던 경험에서 오는 지혜라고나 할까. 솔직히 말하면 살까 말까 망설일 때 사지 못했던 이유는 돈이 없어서... ㅜ.ㅜ

p160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비문을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두어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말은 사실 "나는 죽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일반인의 범주에서는.


사랑과 집착, 그 미묘한 경계 위에서 - 카밀라

과도함을 덜어내는 황금률, '메덴 아간' - 네메시스와 솔론

p174
네메시스는 '신들의 의분'을 뜻한다. 즉, 인간의 지나친 행복이나 왕들의 교만, 부자의 오만을 벌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네메시스가 인간에게 신의 보복을 내리는 방식은 과도함을 부추겨 결국 그 과도함으로 멸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p179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있는 기둥에는 '메덴 아간 Meden Agan'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솔론의 말로 전해지는데, 그 말은 '어떤 것에도 지나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그의 현명함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잠언이다.

p182
어제의 영웅은 내일의 폭군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추구하든 그 정점의 끝에서 관성으로 더 나아가는 것은 과도함이다. 그곳이 막다른 곳이다. 정점에서 그 곳을 버리고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메덴 아간을 기억하라.

> 일단 정점까지라도 한번 가보기나 하자. 


파멸로서의 오만과 창조 에너지로서의 오만 - 마르시아스

p183
탐욕이 집착을 만들고, 집착은 과도함을 낳고, 과도함은 오만을 통해 질주한다. 그리고 파멸.

p186
신의 경지에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 즉 휴브리스 hubris 는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교훈을 만들어 냈다.

> 휴브리스는 역사학자 토인비가 과거의 성공을 우상화함으로써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역사해석학적 용어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 원류는  신화에 유래한 말이며, 신에 대한 모욕이나 무례한 행위 등으로 이끄는 극도의 자존심이나 자신감을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후에 처벌을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p190
아폴론이여,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와 마르시아스를
그 사지의 덮개 속에서 벗겨냈을 때처럼
그대의 영감을 불어넣어주소서 - 단테, <신곡> 천국 제 1곡 중에서

중세 사람들이 신의 경지에 이르려는 욕망을 파멸에 이르는 휴브리스라고 판단할 때, 르네상스 사람들은 그 오만을 순수한 예술가의 정신과 영혼의 힘으로 해석했다.

인간의 오만은 늘 신의 경지에 이르고 싶어 했다. 그것은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산고의 통증을 동반하지만, 예술의 정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오만이 있다. 하나는 과거의 성공을 우상화하는 오만이다. 그 끝은 파멸이다. 모든 성공한 것들의 파멸 속에는 우상화된 오만이 숨어 있다. 이때 오만은 성장을 멈추게 하는 치명적 악덕이다. 또 하나의 오만은 신으로부터 가혹한 징벌을 당하더라도 '신의 경지에 다다르려는 오만'이다. 이는 껍질이 벗겨지는 산고의 고통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창조적 진보를 계속하게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 '신의 경지에 다다르려는 오만'을 부릴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정신병자들 빼고 말이다. 일단은 밥은 안 먹어도 그것만은 해야 한다는 그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p192
자신을 끝까지 올리기 위해서는 하늘로 오르려는 꿈을 가져야 하는데, 이 때 '신에게 닿으려는 마르시아스의 오만'이 강력한 성장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천박한 속물들에게 조소하라 - 미노스와 체세나 추기경

골육상쟁의 신화가 되풀이되는 이유 - 로물루스와 레무스

p213
키루스 2세는 인간이란 복종하기 싫어하는 동물이라고 이해했다. 복종하기 싫어하는 인간을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인물이 바로 키루스 2세였다.

자기를 경영한다는 것은 먼저 가치를 배우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그 행위가 자신의 가치체계에 부합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내가 나의 잔혹한 독재자였으니 - 팔라리스

p218
그래서 가장 잔인한 자는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상처 입은 사람이며, 가장 가혹한 자는 불안에 떠는 심약함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잔혹한 제거는 불안에 떠는 나약한 자들의 극단적인 무기였으니, 추격당하고 쫓기는 자가 필사적으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심되는 상대를 먼저 무차별적으로 제거하려는 데서 잔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시인을 "격렬한 고통을 가슴 속에 품고 있으나 탄식과 비명이 입술을 빠져나올 때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p219
시인은 세상의 슬픔을 제  슬픔으로 공명하는 자들이며, 구원을 노래하되 스스로 구원자가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자들이다.

p222
변화란 무엇인가? 나를 가둔 청동황소의 문이 밖에서 잠긴 것이 아니라 안으로 잠겨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나를 가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가 나의 독재자였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안으로부터 청동황소의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잔인한 형구를 푸른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대화와 소통이 실패하는 곳을 채우는 힘, 폭력 - 아가토클래스

p225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아가토클래스의 성공비결
"(...) 요컨대, 가해 행위는 한 번이면 족하다. 짧은 시일 안에 끝낼수록 대중의 분노는 쉽게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은혜는 민중이 오랫동안 음미할 수 있도록 조금씩 베풀어주어야 한다. ..... 왜냐하면 대중은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으로 예상했던 자로부터 오히려 은혜를 입게 되면 보통 때 은혜를 받는 것보다 몇 배 더 감읍하기 때문이다."

> 민중을 개돼지로 생각하는 가치를 드러낸다. 우리 나라 정치가들이나 공무원들 중 아직도 마키아벨리를 신봉하는 이들이 있다.

p226
대중이란 무엇인가? 울보 아니면 분노하는 자에 불과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귀족이란 누구인가? 권력을 빼앗기고 냉소주의가 된 자들이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인식이었다.

이 책은 군주를 위해 썼지만 군주를 위한 조언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매우 특별한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군주론은 그래서 거꾸로 읽어야 한다. 다스리기 위해서 읽기보다는 나를 다스리는 자들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해 읽을 때 훨씬 재미있다.

> 그렇다. 민중을 개돼지로 생각하는 폭압에 항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p227
자기를 잘 경영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속성에 얽매이지 않는다. 권력을 휘둘러 사람들을 패는 무자비한 독재자의 '가끔의 선심'에 안심하지 않으며, 거짓 선지자의 목소리에 감읍하여 울며 광란하는 지지자가 되지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대하는 분노한 자로서만 머물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교사에 넘어가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타인의 명령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군중이 되지도 않는다.

p229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출 때는 겉을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나를 비추어볼 때는 그 속을 볼 수 있다. '감어인'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경어인'이라고 하기도 한다. 둘 다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본다'는 뜻이다.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 오이디푸스

p238
오이디푸스가 알지 못하는 일, 즉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 찾아가는 과정은 결국 '내가 모르는 나'를 추적하는 과정이었다. 나의 존재의 근원이면서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을 찾아나서는 것을 상징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 오디세우스의 '나를 찾는 모험'과 다른 점이 있을까? 하나는 결국 해피엔딩이지만, 다른 하나는 비극적였다는 것?

그러나 내내 진실을 외면해오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빼버린다. '내가 모르는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다. 육신의 눈을 빼버리자 '참 나'에 대한 내면의 눈이 떠지게 되었다.

> 대(大)비극이자 대각성의 순간이다.

p240
자기도 모르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그 길에서 만나는 무수한 자아에 감탄하고, 스스로 펼쳐지는 가능성에 놀라워하는 삶이면 좋겠다. 매일 살아 있음으로 기뻐하고 매일 새로운 자신을 창조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는 인생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 아무런 이유가 없다! 가즈아! 소리치고 돌아서면 어느새 많은 이유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서있음을 깨닫는다.  개혁과 혁명이 필요한 순간이다.


불복종, '자기만의 길'을 걸어 '모두의 길'을 터놓는 힘 - 안티고네

p244
그러나 그 법을 내리신 이는 신이 아니며, 확고한 하늘의 법을 왕의 법이 넘을 수 없는 것이지요. 내가 신들 앞에서도 인간의 법을 어긴 죄인일 수는 없어요.

> 인간으로 태어난 서글픔

p247
일탈은 대가를 요구한다. 고독이라는 벌이다.

그래서 자기혁명가는 자기 안에 자신만의 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신의 이름을 뭐라 부르든 신의 법칙과 자신의 법칙을 동일시하는 것, 이것이 고독을 이기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p248
영웅은 자신의 성공을 사회와 더불어 나눔으로써 자신이 걸었던 가시밭길을 다른 사람도 걸을 수 있는 길로 만들어 놓는다. 다른 사람이 걸음으로써 길이 아니던 것이 길이 된다.


'나도 모르는 나', 그 미로 속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실타래 - 아리아드네

p256
삶을 이끄는 추동력은 도덕률 앞에서 부조리하고 구역질나는 디오니소스적 추악함이 되고 만다. 산산이 부서지는 이 삶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그것은 삶의 부조리에 대한 구역질나는 감정과 생각들을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마법이다.

p258
삶이라는 미로, 운명이라는 미지 속에서 내가 어떤 경우에도 놓쳐서는 안 되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무엇일까? 나에게만 보이는 그것,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하지만 어쩌면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은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유불능', 생각없음에서 퍼져나가는 '일상의 악' - 다이달로스

p264
사람들과의 연결은 혁명적으로 증진되었으나, 우리는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을 버려두고, 만남중에 수시로 스마트폰을 보면 서로의 존재를 모독하고 서로의 부재를 확인한다. (...) 전자책을 다운로드하여 읽는 듯하더니 잠시 후 스마트폰에 연결된 다른 통로로 오뉴월 삼베 바지 속의 방귀처럼 수시로 새어나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 한번 갔던 길을 다시 찾을 수 없어 길치가 되고, 노래의 가사를 기억하지 못해 시를 잊었다. 결국 자기 자신의 메모리를 잊어버렸다.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자 '생각하지 않는 죄'가 전염병처럼 범람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친구를 왕따시키는 것이 그 친구에게 어떤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 배려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다. 그럴 줄 몰랐다는 것이다. 친구를 생각 없음으로 희생시키고, 자신도 그 생각 없음 속에서 희생되어 간다. 이는 단순히 가해자의 처벌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되찾아주지 못한다면 생각 없음이 주는 악은 모든 평범한 일상을 뒤덮게 될 것이다.

> 글이 글에 연하여, 생각이 생각을 낳는 글쓰기의 전형이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당시의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그 생각에 흐름에 동조해본다.

p266
아이히만의 특징은 '순진한 무사유', 즉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이별, 닿는 순간 사라지는 이 미칠듯한 부재 - 오르페우스

p273
다 왔다고 생각한 안도의 순간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본다. 에우리디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아차, 에우리디케는 사라진다, '닿는 순간 사라지는 이 미칠 듯한 부재', 이것이 바로 모든 예술가들의 비극이다.

p275
삶을 통해 얻었던 진귀한 체험들과 보석 같은 깨달음 역시 얻었다고 믿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할 수 없다. '에우리디케의 얼굴에 머물던 오르페우스의 마지막 시선' 그 시선으로 살 수 밖에 없다.

정신적 공명은 우리가 필멸의 개념을 가슴에 안고 있을 때 가장 잘 찾아온다.

p276
내일 죽음을 가정할 때 오늘의 삶이 더 없이 진해진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들은 필멸의 인간을 부러워할 것이다.


우주의 에너지를 불러들일 나만의 '탯줄'을 찾아서 - 안타이오스

p280
운명이 나를 집어던지게 하라.
던져질 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리니,
추락이 나의 재생이고
칭송이 나의 파멸이다.

p284
자기를 잘 경영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자신의 힘의 원천에 끊임없이 맞닿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내 내면의 혈류를 타고 끊임없이 피로 흐르는 내 힘의 원천은 어디서 오는가?"


고난, 교활함을 통찰로 발효시키는 삶의 여정 - 오디세우스

p289
이렇게 인류의 문명은 야만과 원시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모든 문명은 원시를 품고 있는 것이다.

p295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너의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고 나서야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기를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아름다운 모험을 선사했다.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리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다.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다.
길 위에서 너는 지혜로운 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가 가르친 것을 이해하리라.

p296
예술가들이 오디세우스를 매력적인 소재로 여기고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다루는 이유는 오디세우스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의 모험이 인간의 인생역정을 상징하는 보편적 소재이기 때문이다.


복수, 필요해서 너를 사랑한 자를 믿지 마라 - 메데이아

p308
남자들이여, 여인을 배신하지 마라. 메데이아가 찾아가리라

여인들이여, 그대를 필요로 하는 남자를 믿지 마라.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은 이아손 같은 자들이다.

> '~이기 때문'에 하는 사랑은 오래 가지 못 한다. '~에도 불구하고'가 많아질수록 사랑은 더욱 굳건해지는 법이다.


외눈과 백 개의 눈 사이, 불균형을 다스리는 통섭의 눈 - 아르고스와 폴리페모스

p312
하나의 눈으로 자신과 상대의 거리를 가늠하지 못한 채, 그렇게 밖에는 사랑할 수 없었으므로, 폴리페모스에게는 상대에 대한 개념도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다.

자기경영은 두 개의 시선이다. 두 개의 대극적 가치를 다 볼 수 있는 균형의 눈을 가지는 것이다.

p314
눈이 100개에서 밖으로는 사방팔방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내면을 향하여 눈을 감으면 자신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다.

p315
다양성이 갈등과 불균형으로 남아 서로 싸우게 될 때 우리는 혼란스럽다. 제우스가 노린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를 거세해버리려 할 때, 이 싸움은 끝이 없으며 평화와 성장은 요원해진다.

p316
통섭은 비빔밥 형식의 단순 융합이 아니다. 통섭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을 제공하는 발효와 같은 현상을 동반한다.


에필로그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나는 인간

p325
인간은 자기 안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는 동물이다. 자신의 인생으로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지 고뇌하는 동물이다.

신화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너머 그 사실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

> 잘 조직되어 있지 않다는 점만 제외하면 종교와 유사하다.

p328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인간의 시선으로 쓰여진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신에게 뒤집어씌운 이야기들, 인간의 시선으로 쓰여진 신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인간,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숨겨진 내면 모험을 즐겨보려는 시도였다.

신은 우리 안에 자신을 숨겨두었다. 인간은 신이 선물한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담고 태어난 모순덩어리이지만, 영웅적인 내면 여정을 통해 갈등과 충돌을 대통합하여 위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동물이다. 그 이야기는 삶이라는 잉크로 쓰여진다. 삶만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위대한 손이다.



내가 저자라면

<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은 구본형이 들려주는 신화 이야기라기보다는, 신화를 통해 구본형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시 말해 신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구본형의 변화경영전도서이다. 개인적으로 문장 하나하나 시와 같은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 책은 또 다른 신화 관련 저서인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와 세트로 볼 수 있는데, 고인이 직접 저술한 마지막 저서들이기도 하다. 그만큼 스승의 마지막 필력이 이 책에 녹아있다. 책의 원래 구성순서, 목차는 다음과 같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과 샘처럼 고이는 시간 – 크로노스
애욕, 그 엉큼한 환락과 헌신하는 사랑 사이 – 아프로디테
변화, 또 다른 나를 창조하는 무한 에너지 – 제우스
'아무도 아닌 자'에서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모험 – 오디세우스
자기애, 다른 사람의 눈 속에서 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 – 나르키소스
배고픔, 너의 죽음으로 공양된 나 – 에리직톤
분노라는 이름의 야수를 길들이는 법 – 아킬레우스
혐오, 뒤집으면 엄청난 창조 에너지 – 피그말리온
희망없는 일의 무수한 반복, 그 부조리를 극복하는 힘 – 시시포스
아름다움, 모든 것이 결국 너에게 굴복하나니 – 헬레네
허영, 사랑하는 것을 숨기고 아껴두지 못하는 자의 비극 – 니오베
거짓이 만들어내는 역설적 생산성 - 바투스 영감과 헤르메스
탐욕에게 먹이를 주는 자들의 최후 - 미노스와 미다스
사랑과 집착, 그 미묘한 경계 위에서 - 카밀라 
과도함을 덜어내는 황금률, '메덴 아간' - 네메시스와 솔론
파멸로서의 오만과 창조 에너지로서의 오만 – 마르시아스
천박한 속물들에게 조소하라 - 미노스와 체세나 추기경 
골육상쟁의 신화가 되풀이되는 이유 - 로물루스와 레무스
내가 나의 잔혹한 독재자였으니 – 팔라리스
대화와 소통이 실패하는 곳을 채우는 힘, 폭력 – 아가토클래스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 오이디푸스 
불복종, '자기만의 길'을 걸어 '모두의 길'을 터놓는 힘 – 안티고네
'나도 모르는 나', 그 미로 속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실타래 – 아리아드네
'사유불능', 생각없음에서 퍼져나가는 '일상의 악' - 다이달로스 
이별, 닿는 순간 사라지는 이 미칠듯한 부재 - 오르페우스
우주의 에너지를 불러들일 나만의 '탯줄'을 찾아서 – 안타이오스
고난, 교활함을 통찰로 발효시키는 삶의 여정 – 오디세우스
복수, 필요해서 너를 사랑한 자를 믿지 마라 – 메데이아
외눈과 백 개의 눈 사이, 불균형을 다스리는 통섭의 눈 - 아르고스와 폴리페모스


책의 구성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것들이 각각의 독립적인 장을 이룬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얘기는, 상자를 열자 온갖 추악하고 나쁜 것들이 상자에서 빠져나와서 인간세상을 타락하게 만들었는데, 그 상자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이 바로 희망이였다 - 라는 얘기인데, 이 책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속의 내용물들은 단순한 인간의 감정에서부터 인간사의 여러 측면까지 그 다루는 바가 실로 다양하다. 실제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저자가 그리스 신화의 특징을 가지고 인간의 성정과 인생에 대입하고 상상력을 가미해 나름대로 구성한 것이다. 그럼 저자가 주목한 판도라의 상자안의 내용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각각의 장이 독립적인 이야기들이여서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으나, 그 순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맨 처음은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올림포스의 신들이 탄생하는 첫번째 스토리인만큼 무엇보다도 첫 타이틀을 장식할 자격이 충분하다.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시간은 결정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그 다음 순서로 애욕이 등장하는 것은 조금 의외의 구성이다. 신화를 논함에 있어 아프로디테와 사랑을 빼놓을 수는 없으나, 그 순서를 배치함이 단순히 우라노스의 성기에서 시간과 욕정이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이라면 너무 단순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은 나의 짧은 생각이였다. 시간에 대한 욕구는 살고자 하는 욕구에 다름아니다. 이는  번식함으로써 유전자의 영원을 유지하려는 욕구와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시간 다음에 애욕이라는 장이 오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신화뿐만이 아니라 인간 사는 세상에 있어서도 애욕과 사랑은 거의 모든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다루어야 하는 것이 맞다. 신화 속에서 사랑이라는 녀석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아프로디테의 관능이었다가, 에로스의 열병 같은 사랑으로 덮져오기도 하고, 헤라여신의 모습으로 현현되는 결혼과 가정이라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애욕 다음 장부터는 이제 저자의 주특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신화를 통한 변화경영의 메시지에 주력하고자 했다면, 변화와 전환이라는 특성을 가진 장들을 별도의 파트로 구성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좀더 설명하자면,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발견했듯이, 책의 앞부분은 부정적인 것들, 다시 말해, 탐욕, 질투, 배고픔, 허영, 오만등을 다루는 장을 배치하고, 뒷부분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주제를 다룬 장들을 배치하는 것이 어땠을까? 그래서 내가 한번 구성해본 목차들은 다음과 같다.

파트 1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과 샘처럼 고이는 시간 – 크로노스
애욕, 그 엉큼한 환락과 헌신하는 사랑 사이 – 아프로디테
아름다움, 모든 것이 결국 너에게 굴복하나니 – 헬레네
사랑과 집착, 그 미묘한 경계 위에서 - 카밀라 
이별, 닿는 순간 사라지는 이 미칠듯한 부재 - 오르페우스
자기애, 다른 사람의 눈 속에서 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 – 나르키소스
배고픔, 너의 죽음으로 공양된 나 – 에리직톤
분노라는 이름의 야수를 길들이는 법 – 아킬레우스
혐오, 뒤집으면 엄청난 창조 에너지 – 피그말리온
허영, 사랑하는 것을 숨기고 아껴두지 못하는 자의 비극 – 니오베
거짓이 만들어내는 역설적 생산성 - 바투스 영감과 헤르메스
탐욕에게 먹이를 주는 자들의 최후 - 미노스와 미다스
대화와 소통이 실패하는 곳을 채우는 힘, 폭력 – 아가토클래스
천박한 속물들에게 조소하라 - 미노스와 체세나 추기경 
복수, 필요해서 너를 사랑한 자를 믿지 마라 – 메데이아
'사유불능', 생각없음에서 퍼져나가는 '일상의 악' - 다이달로스 
골육상쟁의 신화가 되풀이되는 이유 - 로물루스와 레무스
내가 나의 잔혹한 독재자였으니 – 팔라리스

파트 1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마자 인간들을 타락으로 빠뜨리고 죄악으로 오염시키고자 먼저 빠져나간 것들이며, 파트 2는 그래도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들로 이루어 진다.

파트 2
변화, 또 다른 나를 창조하는 무한 에너지 – 제우스
'아무도 아닌 자'에서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모험 – 오디세우스
희망없는 일의 무수한 반복, 그 부조리를 극복하는 힘 – 시시포스
과도함을 덜어내는 황금률, '메덴 아간' - 네메시스와 솔론
파멸로서의 오만과 창조 에너지로서의 오만 – 마르시아스
불복종, '자기만의 길'을 걸어 '모두의 길'을 터놓는 힘 – 안티고네
'나도 모르는 나', 그 미로 속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실타래 – 아리아드네
우주의 에너지를 불러들일 나만의 '탯줄'을 찾아서 – 안타이오스
고난, 교활함을 통찰로 발효시키는 삶의 여정 – 오디세우스
외눈과 백 개의 눈 사이, 불균형을 다스리는 통섭의 눈 - 아르고스와 폴리페모스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 오이디푸스 

변화와 전환, 그리고 도전을 상징하는 신화들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희망의 또다른 모습들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들로 인간사와 인생의 모든 측면을 설명하고 비유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각 장의 포멧은 단순하다. 신화 이야기로 시작해서, 구본형 자신의 이야기로 끝난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빛이 나는 이유는 신화 이야기와 구본형의 이야기 사이에 놓인 번뜩이는 통섭과 통찰 때문이다. 신화나 역사를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과거들로부터 가슴 뛰는 미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비교, 비유나 직선적인 교훈이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과 통섭이 필요하다. 이 책이 구본형에 의해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을 보면서 스승의 글에 감탄하며, 이 인간을 언젠가는 뛰어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내가 부릴수 있는 최고의 휴브리스인 셈이다. 또한 니체가 얘기한 그대로, 스승을 빛나는 하는 제자가 되기 위함이다.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너의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고 나서야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기를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아름다운 모험을 선사했다.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리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다.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다.
길 위에서 너는 지혜로운 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가 가르친 것을 이해하리라.

-콘스탄티누스 카바피 <이타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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