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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30일 11시 57분 등록

 

저자 연구

구본형

그는 책의 프로필에 스스로를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는변화경영사상가라고 소개한다. 또한 그는 변화경영의 시인이 되어 시처럼 유혹이 되는 삶을 살고자 했다. 가장 실용적이고 효율을 중시하는 경영에 사상과 시라니, 얼핏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구본형은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 IBM에서 20년간 경영 혁신의 기획과 실무를 총괄했다. 말콤 볼드리지 국가품질경영 모델을 IBM의 단위 조직에 적용시키는 국제 심사관으로, 호주, 대만, 홍콩, 중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태평양 조직들의 경영혁신과 성과를 평가하고 자문했다. 변화의 현장, 최첨단에 있으면서 변화경영 전문가로 사내에서 커리어를 확고히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전환의 몸부림을 가장 잘 볼 수 있었고, 이런 변화가 기업의 세계뿐만 아니라 개인의 직업의 세계에서도 벌어지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빨리 캐치할 수 있었다.

이런 깨달음으로 직장에서 일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던 중에, 그동안의 경험과 배움, 깨달음을 담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집필하고, 드디어 IBM 밖의 세상에서 변화경영전문가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낯선 곳에서의 아침>, <월드 클래스를 향하여> 등을 쓴 후에 1인 기업가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확신한 후, 익숙했던 IBM을 떠나서 변화경영 전문가의 삶을 시작했다.

IBM을 떠난 후의 삶은 저자가 그렇게도 소망하던,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신과 가족을 위한 시간을 최우선으로 하고 일은 그 뒤에 남는 시간에 배치하는 이상적인 삶이었다. 그는 1주일에 3일만 강연을 하고, 이틀은 자유롭게 쓰며 나머지 이틀은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1년에 한달은 스스로에게 휴가를 주어 여행을 즐겼다. 

그렇게 1인기업가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살면서도 직장을 다니던 시절부터 습관을 들인 새벽 4~6시의 글쓰기를 지속하고, 1 1책 쓰기라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나갔고, 결국 10년 동안 14권의 책을 썼고, 그 전에 썼던 3권을 더해 모두 17권의 저자가 되었다.

초기에는 1인기업가로서 주로 개인의 변화에 집중하는 저작과 강연활동을 했다면 이후에는 점차 경영과 인문, 특히 신학을 통섭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신화학과 경영학은 서로 통섭될 수 있을까? 지금 나는 그 가능성을 실험 중이다. 경영학의 핵심은 사람과 비즈니스를 잇는 관계의 실용학문이다. 그동안 경영은 외부적 조건을 바꾸어줌으로써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려고 시도해왔다. 그러나 승진, 인정, 보상 등을 통한 외부적 동기부여는 단명하며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내면적 꿈과 욕망을 건드려줄 때 자생적인 열정이 생기고 추진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신화는 인류라는 집단이 꾼 꿈을 다룬다. ~ 경영이 인간의 꿈과 무의식을 이해하게 된다면 가장 근본적인 동기부여 방식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삶을 영웅의 삶으로 창조해가는 변화의 여정에 개인들이 스스로 참여하게 할 수 있다. 진화된 동기부여 방식이 스스로를 발견해가는 두려운 모험에 뛰어들 수 있도록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 본문 317 페이지

 

2005년부터는 개인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원 프로그램을 만들어, 1년에 10명 정도의 연구원을 선발해 총 2년간의 수련 후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낼 수 있도록 수련했다. 이렇게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나를 만날 수 있는 레이스라고 불리는 수련과정을 통해, 2013년까지 100명에 이르는 연구원을 양성했으니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도우려는변화경영사상가인 저자의 꿈은 아름답게 이루어졌다.  

 

 그는 좋은 아빠였다어릴 때부터 주말에 아빠를 따라 집을 나서는 것이 좋았다지금 돌이켜보면 구경하는 아빠의 산책 방식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지도도 계획도 없이 ‘오늘은 거기를 가볼까?’하는 정도의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엘 가는 동안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을 마음으로 읽어 들이는 것이다. 할 일 없는 일요일 오후면 아빠와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 교보문고를 가는 것이 일과였다나는 거울로 되어있던 천장을 통해 사람들의 정수리를 올려다보며 걸어 다녔다그러고는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한 무더기 골라 양 손 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아빠가 출장을 갈 때면 집으로 엽서가 왔다내 이름으로 오는 엽서가 제일 좋았다아빠는 늘 출장간 나라에 대해가족들에 대해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 썼다. (중략)

우리는 가방을 꾸려 남도로 여행을 갔었다원래 석가탄신일 연휴를 이용한 2 3일 코스였는데 여행이 너무 좋아서 휴가를 하루 더 냈다그곳에서 우리는 아주 조용하고 한적한 수문해수욕장과 창문으로 바다가 보이는 해수탕집과 메타세콰이아 가로수가 끝을 모르고 늘어서 있는담양으로 가는 18번 국도를 발견했다좀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파도가 일렁이는 환한 모래사장 앞에서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며 화해했다그것도 여행의 좋은 점이었다매년 석가탄신일 연휴를 이렇게 보내자고 약속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 구해언, 구본형 선생님의 둘째 딸,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저자 연구 중에서 발췌

 

그의 가장 큰 미덕은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 사랑하는 딸에게도 이렇게 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본인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다. 자신이 말한대로 날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이 쓰일 곳을 마음대로 배분하며, 그 일의 가치가 빛나는 일을 하고, 스스로의 삶을 즐기다 보니 따라하고 싶은 삶, 삶 자체가 유혹이 되는 삶을 살았다. 그 결과 제자나 자식은 물론 한번도 본적이 없는 독자의 삶까지도 바꿀 수 있었다.

길을 잃고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연히, 자신의 안에서 스스로 불을 켤 수 있도록 잠시 불을 빌려주는 예기치 않은 쏘시개 불꽃이 되는 삶’, ‘시처럼 사는 삶을 추구한다고 했던 구본형.

그의 삶은 길지 않았지만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저서와 연구소 프로그램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불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의 시처럼 유혹이 되는 삶은 지금까지도 꺼지지 않고 살아있음이 틀림없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신화는 가면 너머 존재하는 인간의 붉은 욕망들의 다툼을 야생의 언어로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리하여 꽃처럼 피어나는 그 솔직함과 진실함 앞에 기만에 찬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얼굴을 붉히게만든다. 만일 우리가 서로 다투는 이 원형질의 욕망들을 잘 판독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자아에 대한 새로운 시계(視界)를 확보함으로써 건강한 자기경영의 진보가 가능할 것이다.

 

프롤로그

   1. 신화 독법(讀法)에 관하여

11 그리스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추상적인 개념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의인화시켜 신이라 불렀다. 그렇게 해서 신과 인간의 행적은 장대한 서사시가 되었다. 신화 속의 신들은 몸을 입고 나타난 자연과 우주의 힘이 되었던 것이다.

 

11 에로스는 화살을 쏜 적이 없고, 에리니에스는 핏물을 흘리며 누군가를 증오하지도 않고, 보복하기 위하여 내 뒤를 쫓지도 않는다.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분노와 증오와 보복은 지금’, ‘여기에’,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강남역 사거리와 광화문 앞에서, 요동치며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화는 죽은 옛 것이 아니라 살아서 진행되는 지금의 날것인 것이다.

신화는 인간을 벗긴다.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인간의 원시를 보여준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날것들을 신에게 뒤집어씌운 이야기다. 동시에 인간의 미덕과 통찰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상징을 통해 벌거벗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작년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며 가장 아쉬웠던 점이다. 왜 지금 신화를 읽어야하는지, 신들은 왜 이리 비겁하고 찌질하고 잔인한 건지도대체 내가 왜 이런 찌질이들의 이야기를 읽어야하는 건지, 읽으면서 내내 의문이었다.

 

13 둘째, 신화는 자연과 우주를 반영한다. 자연과 우주가 바로 우리의 본성이다. 다만 내면에 깊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 자연은 선악을 넘어서 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자연은 모든 모순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신화를 읽을 때는 선악에 갇히면 안 된다. ‘신이 뭐 이래라며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신화 속 신은 곧 우주이고 자연인데, 어떻게 지금 우리 시대의 인간적 기준을 따르겠는가? 옳고 그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왜곡된다. 무수한 삼라만상이 옳고 그름을 넘어선 영역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13 신화는 영적 순례이며 산스크리트어로 길이라는 뜻으르 가진 마르가(marga)’라고 할 수 있다. ,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신화다. 꿈은 개인화된 신화이고, 신화는 인류 전체가 꾸는 공통의 꿈이다.

 

14 신은 그를 찾는 이에게는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기를 원하는 반면,

진심으로 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기를 원한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그를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14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변화의 정수다. 신화는 모험을 통한 변화의 이야기다. 나의 신화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없는 평범한 삶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내 안에 신의 세계를 구현해가는 과정이다. 스스로 주도하고, 고난과 맞서고,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작은 왕국 하나를 건설해가는 이야기다.

 

15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서도 두려워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기도> 중에서

 

  2. 신화 속 '야생의 사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23 행복 속에는 희망이 없다. 이미 행복한 사람은 희망하지 않는다. 배부른 사람처럼 이미 채워졌고, 나른한 사지처럼 늘어졌기 때문에 희망을 갖지 않는다. 종종 채우고 또 채워야 하는 욕망이 지속될 뿐이다. 오직 불행 속에만 희망이 있다. ~ 희망은 결핍과 불행과 고통 속에서만 자라나는 환각이다. 그러니 희망이 있어야 할 자리는 모든 불행, 모든 악덕, 모든 결핍이 있는 곳이다. 그것이 아직 상자 속에 남아 있는 이유도 다른 불행의 씨앗들은 이미 다 발아하여 그 숙주를 무한히 괴롭히고 있지만, 희망만은 미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여전히 마음의 상자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다.

희망이 있어야 할 자리는 모든 불행, 모든 악덕, 모든 결핍이 있는 곳이라면, 행복 속에는 희망이 없는 것이라면, 그냥 희망이 없는 삶이 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결국 불행 속에서 희망하는 것이 행복이 아닌가?

 

25 판도라가 없었다면 이 세상은 시간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 즉 신들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인간의 삶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세상에 삶을 가지고 온 것은 여자였다. 그러므로 단명하여 필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들은 모두 판도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들의 선물 꾸러미인 인간 선물상자, 판도라 그 자체가 탐구되어야 한다. 판도라는 여자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삶 자체를 상징한다.

 

26 지금 어떠한 삶 속에 있든지 우리는 살아내야 할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 희망이 등불이 되어 우리를 이끈다. 우리를 괴롭힌 것이 우리를 낫게 하고, 우리를 타락하게 한 것이 우리를 청결하게 하고, 단명한 것이 영원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과 샘처럼 고이는 시간_크로노스

29 인간이 시간을 알게 되자, 유한해졌다. 영원히 살 수 없는 필멸의 운명이 되고 말았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판도라를 통해 세상에 시간을 풀어놓음으로써 인간에게 검은 죽음을 선물했다. 따라서 삶이 시작하는 순간, 죽음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단명한 삶 속에서 늙어가고 이내 사라지는 비극 속에서조차 신들이 질투할 만한 삶의 방식을 찾아내려 애썼다. 끝날 수밖에 없기에 더욱 절절하고, 사라지기에 더욱 아름다운 몰입과 황홀을 찾아낸 것이다.

 

31 그리스 신화는 자식을 잡아먹는 아버지라는 끔찍한 상징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적이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는 과거를, 아들은 현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현재는 과거가 자신을 막아 현재일 수 없게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간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과거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아버지의 세대는 사라지고 아들의 세대가 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아들은 다시 아버지가 되고 아들에게 죽임을 당해 사라지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 제 아비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게 될 운명이라는 신탁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희망이 있어야 할 자리는 모든 불행, 모든 악덕, 모든 결핍이 있는 곳이다.

아버지를 과거로, 아들을 현재로 비유하니 바로 이해가 된다. 이런 이해 없이 신화를 그대로 읽다보니 그리스 신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낸 그리스인을 폐륜아로 오해하는 오류가 일어났었다.

 

35 유피테르(Jupiter)가 그대에게 더 많은 겨울을 나게 하실지,

혹은 이것이 인생의 마지막 겨울일지 알 수 없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바다의 파도는 맞은편 바위를 조금씩 닳아 없애니

그대가 현명하다면 지금 포도주를 체로 거르게.

먼 미래의 욕심을 가까운 내일의 희망으로 바꾸게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시샘하여 멀리 흘러가나니

지금을 즐기게, 내일이란 말은 가능한 한 믿지 말고.

 호라티우스, <송가> 111,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 책을 쓰고 보내셨던 그 겨울이 마지막 겨울인 것을 알고 읽으니 마음 한 편이 싸한 느낌이 든다. 지난 겨울은 나에게 몇 번째 남은 겨울이었을까?

 

36 살아 있음의 떨림을 기뻐한다. 시간을 연속된 선으로 이해하지 않고, 점들로 인식한다. 그리고 각 점마다 그것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보려고 한다. 각 지점에서의 인생을 시처럼 살려고 애쓴다. ~ ‘카르페 디엠’,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오직 지금만이 선물이다.

 

37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란 말이냐?

 

38 인간은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찰나의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임을 체득했다. 그러나 체념하고 절망하지 않았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창조하여, 영원한 신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순간에의 황홀을 자신의 삶에 선물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긴 글을 쓰고 있지만, 아이들은 긴 설명도 필요 없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멈추고 싶은 순간에 얼음하고 외친다. 그러면 앞에 서 있는 놀이 상대는 말할 것도 없고, 삼라만상이 모두 멈춰서야 한다. 어린 시절 그렇게 많은 순간들에 빨려들어 수시로 얼음을 외쳤건만, 어른이 되어 얼음하고 외칠 만한 황홀한 순간을 가졌던 것은 언제였던가.

얼음 땡에 이런 의미가내게 세상이 얼음이 되었던 황홀한 순간은…? 대충 생각해도 10년은 넘은 것 같다.

 

애욕, 그 엉큼한 환락과 헌신하는 사랑 사이_아프로디테

43 아프로디테가 거품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발상이다. 욕정은 거품처럼 커진다. 낯 뜨거운 애정 행각은 모두 이 은밀하기도 하고 뻔뻔하기도 한 욕정 속에서 탄생한다. 서로 탐닉하는 사람들은 거품 속에 있다. 모든 것이 부풀려져 보인다. 눈에 콩깍지가 끼어 스스로 들뜨고 상대를 들뜨게 만든다. 감정적 탐닉에 빠져들어 둘만의 황홀경을 벗어날 수 없다.

 

47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의 엉큼한 환락은 그것으로 끝나버리기도 하지만, 종종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 싹터 피어나곤 했다. 애욕이 사랑으로 승화되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을 알아내게 되었다. 시간에 갇힌 인간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빛의 속도로 움직일 때 시간이 멈춘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문인들은 사랑이 절정에 이를 때 그 사랑이 시간을 멈추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49 사랑이란 새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경과 슬픔과 고통이라는 물로 수없이 세탁되어도 변하지 않는 천과 같은 것이다. 사랑은 또한 불길이다. 불은 태운다. 가슴을 데우기 위해 사랑해야지 그 사랑이 절대 집을 태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않는다. 그 대신 이미 함께하는 상대방에게 새로운 사랑을 찾아낸다.

 

50 그러나 육체의 애욕이 영혼의 사랑과 합일하게 될 때, 인간은 시간을 넘어 대를 잇게 된다. 필멸의 육체로 상징되는 거품, 바로 삶 그 자체를 사랑할 때 시간은 결코 우리를 절멸시키지 못하리니 우리는 후대로 이어진다.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 불임이니 시간에 의해 절멸될 것이다. 사랑만이 사랑을 낳게 되고, 그 사랑을 이어감으로써 우리는 시간에 대항할 수 있게 된다. 육체가 죽어도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남아 있는 한, 그 사람은 사라지지 않는 불멸이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사랑으로 남는 존재들이다.

 

변화, 또 다른 나를 창조하는 무한 에너지

51 변화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린다. 모든 것을 뒤흔들고 바닥을 뒤집어 엎어 뒤죽박죽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변화는 어제의 생각이 어긋나고, 어제 권장되었던 행동이 비난받는 부조리를 우리에게 선물함으로써 우리의 평화를 위협한다. ~ 그러나 인간은 신의 저주인 이 변화를 창조의 힘으로 변용시킴으로써 영웅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54 변화는 익숙한 것을 파괴함으로써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환경과 조건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삶을 강요한다. 우리는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 과거의 나로부터 변신해야 한다. 결국 변신이란 주어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나를 바꾸어가는 진화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변화가 요구되는데 변신에 성공하지 못하면 멸종된다. 반면 변신에 성공하면 영웅이 된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극복의 기술을 습득한 자들이며, 새로운 삶으로 탄생하는 데 성공한 인물들이다. ~

결국 영웅이란 주어진 변화에 창조적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58 인간은 기존의 자아를 버리면 어떤 사람으로도 변신하여 살아볼 수 있다. 세상은 무대이고 우리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자기경영은 연출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알고 있는 자아를 버려 새로운 자아에 이르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약하여 자신이 그리는 새로운 인물이 되어볼 수 있다. ~ 우리는 언제나 가면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 결국 가면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 가면은 진정한 자아를 가리는 거짓 등 나쁜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가면과 공존할 수 밖에 없다면 결국 가면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실제로 가면은 아니지만 비슷한 정도의 메이크업으로 나를 가리고 그게 진짜 내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그냥 그게 나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믿자. ㅎㅎ

 

61 견딤, 침묵의 10년 동안 끈질기게 그 삶에 달라붙어 있다.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은 엎어지고 자빠지며 그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는 뜻이며, 나는 찾아가는 두려운 모험에 몸을 내맡겼다는 뜻이다. 아직 자신의 때는 오지 않았다. 세상에 내버려진 고독 속에서 내면으로부터 뭉글거리며 피어나는 의심과 싸워야 하고 타인의 냉소 속에서 견뎌야 한다. 긴 겨울이 찬바람과 함께 휘몰아쳐 온몸은 추위로 얼어 붙는다. 그러나 마지막 담쟁이 잎처럼 견딘다. 적어도 10년을 견디고 1만 시간을 채워야 한다. ~ 견뎌내지 못하면 위대함도 없다.

 

아무도 아닌 자에서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모험_오디세우스

63 삶이란 결국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기나긴 모험인 것이다. 삶의 모험이 없는 자, 아무도 아닌 자로 살 수밖에 없다.

 

67 이름은 날 때 부모로부터 받는다. 인생을 시작하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축복만이 있을 뿐, 그 이름 속에는 아직 아무런 삶도 담겨 있지 않다. 텅 빈 그릇 같다. 살아가면서 이 빈 그릇 같은 이름 속에는 가지가지의 사유와 삶의 경험이 담기게 되고, 그 이름은 비로소 그 이름이 상징하는 삶으로 내용물을 채워가기 시작한다.

 

68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는 삶으로밖에는 보여줄 수 없다. 진짜 이름을 갖게 되기까지 인생의 모험은 계속된다. 인생 없이는 진짜 이름도 없다. 인생이 곧 이름이다.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하게 되면서 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전에 나의 이름은 그냥 흔해 빠진, 한 반에 한 명 이상을 있는 그런 이름에 불과했다. 그러다 그 이름의 보편성이 가진 가치를 이해하게 되면서 자기애도 시작됐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지어주신 이름이 진짜 내 이름이고, 내 인생이다.

 

69 살고 있으나, 그 속에 내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모험을 시도할 때 자기 혁명은 시작된다. ~

그 진짜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이 삶이다.

 

자기애, 다른 사람의 눈 속에서 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_나르키소스

75 나르키소스가 호수의 물결 위로 고개를 숙여 제 얼굴을 볼 때마다, 호수 또한 나르기코스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호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죽어 더 이상 호수로 와 제 얼굴을 비춰보지 않게 되자, 호수 또한 그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다. 호수는 그것을 슬퍼한다.

 

75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사랑은 시작한다. 몹시 사랑하는 상대의 눈 속에서 나를 볼 수 있을 때, 그 모습이 아름다워 스스로 도취하게 될 때, 그 사랑은 서로를 높여준다. 서로의 눈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나르키소스는 호수를, 호수는 나르키소스를 못 견디게 그리워할 때, 냉혹한 자기애가 상대의 눈 속에서 녹아내려 사랑이 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 나 자신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둘의 사랑은 온전한 것이다. 이 경이로운 자기 체험을 지혜의 원천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존재는 더 높은 곳으로 고양된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진실일 수밖에 없다.

 

배고픔, 너의 죽음으로 공양된 나_에리직톤

82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다. 배고픔은 늘 현재의 배고픔이다. 과거에 먹은 그 무수한 음식이 지금의 배고픔을 상쇄해주지 못한다는 점, 이것이 바로 인간이 끊임없이 밥에 매달리는 이유다. 과거의 포만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 똥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 전 내 얘기다. 다이어트 하느라 조금 먹어서 항상 배고픈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배가 고프면서도 그 공복감이 좋아서 많이 먹지 않았었다. 그런데 얼마전 막 살이 찌는 시기에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아니 실제로 배가 고픈건 아니고 배는 부른데 그냥 계속 먹고 싶었다. 한동안 불쾌한 배부름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먹었다. 다행히 이번달에 <꿈토핑 더비움>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 시간을 끝냈다. 이제 다시 살짝 배고픈 공복감을 즐기고 있다. 공식적인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앞으로도 공복감을 즐기고 싶다.

 

83 스티브 잡스는 성공을 바라는 젊은이들에게 늘 배고파해라(Stay hungry)”라고 말했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말고, 점점 더 많이 쌓아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룬 것을 거부하라는 뜻이다. ~ 배고픔의 상징성 중 하나는 자신을 몰아쳐 끊임없이 성공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듯, 성공과 승리를 먹어치운다.

 

84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산다. 삶은 다른 것을 죽여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생명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이 고뇌를 단박에 끊어버린 인물이 바로 키르티무카인 것이다.

매일 세 끼 식사를 통해 우리는 이 삶의 의식을 치른다. 육체를 가진 우리는 밥을 떠날 수 없고, 밥 속에는 그렇게 많은 눈물이 들어 있다. 다른 것들의 죽음으로 공양된 우리, 우리의 삶을 위해 죽어준 것들의 희생에 책임을 져야 하기에 오늘의 삶은 소중하다. 막 살 수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이 곧 삶의 기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삶이 고단하다 해서 삶에 불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키르티무카, 다른 것을 먹을 수 없어서 자신을 뜯어먹어야 했던 아귀,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자아라는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괴물, 그를 통하지 않고는 각성도 대오도 부처도 없다는 괴물.

 

85 우리 삶의 목적은 세속의 성공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삶의 기쁨으로 순간순간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 죽어준 것들에게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다. 식탁 위에 놓인 것들을 바라보며 키르티무카를 통하지 않고는 부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어 기쁜 날, 식탁에 앉아 잠시 감사한다.

너를 죽여 먹음으로써 내가 살아나는 오늘, 기쁨으로 오늘을 다시 한 번 살아보리라.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이 되어보리라.”

 

분노라는 이름의 야수를 길들이는 법_아킬레우스

93 “~ 아킬레우스여, 신을 두려워하고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그분보다 더 동정 받아 마땅하오. 나는 세상의 어떤 사람들도 차마 못한 짓을 하고 있지 않소!

내 자식을 죽인 사람의 얼굴 앞에 손을 내밀어 간청하고 있으니 말이오.”

 

95 전쟁은 인간을 돌아보지 못하게 한다. 각자 자신의 신의 정의를 믿고 상대에게 악행을 저지르게 마련이며, 남을 죽이고 다시 그 칼로 자신을 죽이게 되는 것이 전쟁이다.

 

95 격노는 인성을 빼앗고 후회할 행동을 하게 한다. 더욱이 어떤 분노의 기억은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월과 함께 익어갈 뿐이다. 그 기억이 아무리 희미해지더라도 언제고 다시 분노의 불길로 치솟아오를 불씨를 품고 있다.

요즘 격노로 유명해진 한 가족이 떠오른다. 그들은 격노가 있은 후에 후회는 커녕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 불씨 정도가 아니라 그냥 불을 품고 산 건 아닌지

 

97 “만일 누군가가 나를 가혹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행위이며, 그의 버릇이고 그의 성정(性情))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나의 성정이 있다. 나는 나의 성정이 훨씬 인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성정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99 6계 시인 오마르 워싱턴(Omar Washington)에게 배워온 것

화가 나면 화를 내라. 화를 낼 권리가 있다. 그러니 참을 수 없으면 참지 마라. 그러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대해도 좋다는 권리를 허락한 것은 아니다. 화를 내되 잔인해지지 마라. 화를 너무 참으면 똥을 오해 참는 것과 같다. 가끔 방귀를 뀌어야 시원하다.

맞다 오래 참으면 변비에 걸릴 뿐이다. 뀌어야 할 때는 뀌어야지ㅎㅎㅎ

 

100 우리에게 모든 순간은 다 마지막이다. 그러므로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마지막 인사는 그것을 미워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이다. 지금 말이다.


100 8계 양수리 연못에서 배운 것

분노는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화해야 한다. 양수리 연못을 생각하라.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니 흐린 물웅덩이도 신비한 연못이 된다. 오직 바보들의 마음속에서만 살아가는 분노도 꽃이 될 수 있다. 분노가 갈 곳이 없으면 실망과 좌절로 남게 된다. 그러나 분노를 나를 위한 좋은 변화에너지로 바꿔내면, 뜨거운 가슴으로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 된다. 분노에게 길을 터주어 연꽃을 피우는 정기가 되게 하라 


혐오, 뒤집으면 엄청난 창조 에너지_피그말리온

106 진리를 사랑한다면 사랑할 만한 진리를 만들어내야 하고, 정말 친구를 사랑하려면 사랑할만한 친구를 만들어내라는 것이다. 사랑을 원하는가? 그러면 사랑할 만한 대상을 창조하라! 이것이 그의 충고였다. 위대한 사람은 사랑할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찾아다니지도 사랑을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사랑은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만 내 집안에 있는 파랑새인 줄 알았는데, 사랑도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었구나. 마흔이 넘도록 헛 산 것 같다 


109 우리는 누구나 염원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깎아, 단 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스스로의 피그말리온이다. 사랑할 만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날마다 갂아내고 다듬어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랑은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사랑이 된다 


110 삶을 혐오하는가?

사랑할 만한 삶 하나를 만들자.

그러면 못 견디게 그 삶을 사랑하게 되리라 


희망 없는 일의 무수한 반복, 그 부조리를 넘어서는 힘_시시포스

116 매번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로 밀어올려야 하는 무의미한 일을 매일 반복해야 하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다


116 만일 삶이 살아야 할 가치가 없다면 그 해답은 자살이다. 카뮈에 따르면, 자신이 삶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멜로드라마적인 고백이 바로 자살이다. ~ 카뮈는 자살을 거부한다. 그것은 회피이기 때문이다. 또 부조리를 비켜가는 모든 행위, 터무니없는 희망, 신과 초월적 이데아를 받아들이는 종교로의 도피 역시 비겁한 일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는 인간의 조건인 부조리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그냥 말장난 같다. 부조리 직시니 뭐 그런 어려운 말 안 써도 삶은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 어쩌면 철학자나 작가들은 너무 쉬운 걸 어렵게 접근해서 답을 못 찾고 길을 잃는, 찾더라도 알아들을 수 없는 답을 찾는 사람들이 맞는 것 같다.


117 나의 삶, 나의 반항, 나의 자유를 최대한 느끼는 것, 이것이 최대한으로 사는 것이다. 매일 무익한 일에 나를 바치는 사람은 허망하고 쓸데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배당된 삶의 바닥을 반항과 자유와 열정으로 맨 밑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퍼올리며 사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비극 속에서도 항상 깨어 있는 인간 시시포스야말로 인간의 참다운 모습이다.

자기경영은 무익하고 희망 없는 일에서 기쁨을 보는 것이다. 매일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이다. 온힘을 다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위가 산의 정상에서 다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작년 이맘 때 나는 시시포스를 소재로 칼럼을 쓰면서 1년간 매일 바위를 굴리는 일을 하겠지만 나의 노력이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나의 손에는 노력의 결과물이 아직 없다. 그런데 1년간 매일 바위를 굴리긴 했던가? 다시 북리뷰를 하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118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다 채우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유한한 운명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떨림에 감사하게 된다. 주어진 삶, 그것이 무엇이든 정면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인간의 삶이다.


                아름다움, 모든 것이 결국 너에게 굴복하나니_헬레네

119 아름다움이야말로 치명적이다. 여자들도 잘 안다. 너무도 잘 안다.


125 에바(Eva) , 즉 이브라는 이름이 전도(顚倒)되어 Ave가 되었다. 여성은 남자를 유혹하여 악마에게 인도하는 지옥의 문이었으나, 신의 어머니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성모는 천상의 여왕이며, 순수한 영혼인 천사들의 찬송과 기도를 받는다. 여성은 남자의 구원이 되었다.

동서고금, 나이를 초월해서 남자들은 여자를 정말 이런 시각으로 보는건지 궁금해진다.


128 우리를 가두는 좁은 인식의 문을 깨뜨리는 것, 이것이 파괴다. 과거의 우리는 깨어지지만, 우리의 인식은 새롭게 개안한다. 그러므로 파괴는 부활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죄로 이끌었던 여성성은 다시 인간을 그 죄악에서 구해낸다. <신곡> 속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은 단테를 구원으로 이끈다. 괴테는 신비의 합창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으로 <파우스트>를 끝낸다.


허영, 사랑하는 것을 숨기고 아껴두지 못하는 자의 비극_니오베

129 허영은 경박한 미인 판도라에게 딱 어울리는 빛나는 장신구다. 동시에 허영은 모든 악덕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장 물들기 쉬우면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속성이다.

선악을 가리지 않고 최고가 되려다 보면 종종 아끼는 것을 잃고 통곡하게 되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소중한 것을 깊이깊이 숨기고 겸손을 알게 되었다.


작년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가장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났던 신화 이야기가 바로 니오베 이야기였다. 니오베의 무지는 자식을 자랑하는 맛에 사는 많은 엄마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 엄마도 그러니까. 나 또한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자 쓸데 없는 노력,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것이 다시 나의 기쁨이던 시간도 있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장 물들기 쉬우면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속성. 최고가 되려다 보면 종종 아끼는 것을 잃고 통곡하게 되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소중한 것을 깊이깊이 숨기고 겸손. 가슴에 새겨둘 말이다.


134 기막힌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나고, 좋은 집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든 그 집을 자랑하고 싶어 하듯 학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박식해진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늘어놓길 좋아하게 마련이다. 박학한 지식은 이내 그 사람의 자랑이 된다. 더욱이 학식은 아 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고 남이 훔쳐갈 수 없는 것인데다, 설사 훔쳐간다 하더라도 내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으니 자랑하기에 더욱 좋다. 그러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하면 할수록 천하고 비속하고 상스러워지는 것을 보면, 지식이 현명함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님이 확실하다.


135 자기를 잘 경영한다는 것은 진정 사랑하는 것을 가슴의 가장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하고 아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이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처럼 위험한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은 곧 그 보물을 잃고 말 것이다.

 

거짓이 만들어내는 역설적 생산성_바투스 영감과 헤르메스

145 작가란 거짓으로 진실을 밝히려는 무모한 자들이다. 그들은 기가 막힌 허구를 만들어내어 진실보다 더 강한 임팩트를 줌으로써 삶을 비춰보려 한다. 그래서 카뮈는 말한다. “진실은 빛과 같아 눈을 어둡게 한다. 반대로 거짓은 아름다운 저녁노을처럼 모든 것을 멋지게 보이도록 한다.” 그런 뜻에서 모든 작가는 노을빛 구라쟁이. 탁월한 구라가 위대한 작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147 우리는 얼마나 많은 꿈과 그리움과 상상 속의 인생을 살아왔던가! 꿈은 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현실이며, 상상이라는 점에서 허구다. 그러나 꿈은 진정 우리가 바라는 현실의 가능태라는 점에서 미래의 현실이다. 반면 미래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직시하는 용기를 가지지 못 할 경우엔 왜곡되고 굴절돼 보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148 삶은 거짓과 진실의 실로 짜여진 직물과 같아 거짓은 어두움으로, 진실은 밝음으로 각기 삶을 채색하게 된다. 기만에 찬 거짓의 삶에 통곡하자. 그 통곡이 거짓을 버리게 할 것이다. 진실로 다가온 새로운 삶을 껴안아보자. 두렵지만 받아들임으로써 위대한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탐욕에게 먹이를 주는 자들의 최후_미노스와 미다스

157 많이 가진 자의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그것이 바로 탐욕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는 가장 가난한 사람도 즐길 수 있는 빵 한조각을 먹을 수도, 물 한 모금을 마실 수도 없었다. 모든 세상은 황금으로 변해버렸고 오직 황금만이 존재할 뿐이다. 탐욕은 그 자신을 황금으로 만들어 굳어지는 순간에나 끝이 날 것이다


158 세속에 무관심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자연에 탐닉한다. 그리고 그 탐욕은 끊임없는 배고픔으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 인간의 진보는 탐욕과 집착, 그리고 과도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의 행복을 채워지지 않는 불행으로 만들곤 했다.

불가에서 말하는 무소유조차 무소유에 대한 탐욕과 집착으로 보일 때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 그렇겠지


159 균형감의 부재는 모든 어리석음의 근본 원인이다. 가장 많이 얻은 자도 탐욕스러운 자고, 가장 많이 잃은 자도 탐욕스러운 자다. 인간은 탐욕을 벗어날 수 없다. ~ 그러나 인간은 탐욕을 더 나은 차원의 삶에 이르는 에너지로 씀으로써 행복한 불행에 이를 수 있다. 아직 가지지 않은 것을 염원하는 자, 영원히 행복할 것이고 또한 영원히 불행할 것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것과 인생을 탐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그 섬세한 경계에 서서 늘 우리의 삶이 탐욕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망할 수 있기를 바란다.


159 살까 말까 망설일 때는 사지 마라. 돈이 굳는다. 그러나 할까 말까 망설일 때는 해라.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새로운 경험은 삶의 지평과 다양성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지루한 삶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나도 그런 원칙이 하나 있다. 성당에서 헌금을 낼 때, 5천원을 낼까, 만원을 낼까, 망설여질 때는 그냥 큰 금액, 만원을 낸다.


160 돈 버는 데 시간을 지나치게 쓰지 마라. 먹고살고, 일 년에 두 번 두 달 정도 아내와 세상을 여행할 수 있고, 몸이 아프거나 특별한 일을 당해 쓸 수 있는 약간의 저축이 있으면 된다. 이 정도면 이미 지나치게 부자인지 모른다. 그 이상 벌려 하면 마음을 써야 하고, 쓸데없이 바쁘고, 염려와 걱정으로 보내는 시간이 늘 것이다.

나의 꿈도 돈 버는 데 많은 시간을 쓰지 않는 삶이다. 1주일에 10~20 시간 정도면 좋겠다. 그러고도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단가를 높이거나, 많이 쓰지 않는 삶을 살면 된다. 어떤 것이 더 쉽고, 나에게 맞는지살아보면 알겠지. 


사랑과 집착, 그 미묘한 경계 위에서_카밀라

166 불교는 집착을 경계한다. 버림으로써 깨달음의 세계로 간다. 무명옷에 걸망 하나 둘러메고 산길 들길을 바람과 구름처럼 떠돈다. 그렇게 다니다가 날이 저물면 산사에 머물고, 어쩌다 도반(道伴)을 만나면 운수형제가 되지만 다음날 새벽 홀로 길을 떠난다. 버림과 떠남이 마음의 평화다. 인연을 만들지 않으니 집착이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인연이니 경중이 없다

과도함을 덜어내는 황금률, ‘메덴 아간’_네메시스와 솔론

175 낙소스인들은 공로를 세운 폴리크리테에게 큰 명예와 수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던 폴리크리테는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받고 너무나 많은 명예의 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숨이 막혀 문간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과도함을 벌하는 네메시스의 보복을 받은 것이다.

과도함은 언제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환경과 조건이 된다. 달이 차면 그 과도함을 이기지 못해 이울기 시작하고, 겨울이 살을 에는 추위로 절정에 달할 때 봄이 다가오는 것처럼 하나가 가득 차 그 힘이 절정일 때, 이미 그것은 새로운 국면으로 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와 비슷한 말이겠지.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서는 무게를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무게를 못 견뎌서 죽는다. 지나친 것 같지만 이 편이 직관적으로 확 와 닿긴 한다


180 메덴 아간은 옳고 그름을 섞어 적당히 타협하여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관계를 다루는 중요한 기준이다. 이해관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니 양쪽의 입장과 처지를 모두 염두에 두고 존중하는 것이다. 이해관계의 극단으로 가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이 되겠지만, 적절히 개입하면 가운데서 중재할 수 있다. 중재가 어려운 것은 그것이 고도의 심리적인 기술이어서가 아닐, 그 중재의 과정에서 사심을 갖지 않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솔론을 신뢰했던 이유는 그가 스스로의 탐욕을 자제할 수 있는 사람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메덴 아간의 원칙을 자신에게도 적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잣대는 누구에게나 공정했다 


181 재물을 갖는 것은 좋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얻기는 싫다.

왜냐하면 그렇게 쌓인 재산은 언제든 반드시 재앙이 될 것이므로.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에서 


182 하나의 트렌드가 과도해지면 역()트렌드가 생겨 균형을 맞추게 된다. 변화란 우주가 과도함을 다른 형태로 전이시키는 과정이다


182 그러므로 변화는 끊임없이 두 개의 세계를 넘나든다. 늘 변하는 세계와 불변의 질서 사이를 말이다. 변화에 성공한 사람은 어제의 나를 십자가에 매달 수 있으며, 미래의 나와 화해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어제의 영웅은 내일의 폭군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가 무르익으면, 그 경계에서 다른 새로운 기운이 만들어진다.

미래는 새로운 기운 속에 숨겨져 있다. 무엇을 추구하든 그 정점의 끝에서 관성으로 더 나아가는 것은 과도함이다. 그곳이 막다른 곳이다. 정점에서 그 곳을 버리고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메덴 아간을 기억하자.



186 내기에 진 마르시아스는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신에게 도전한 오만함에 대한 죄값으로 아폴론은 그를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산 채로 껍질을 벗겼다. 아마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러 이야기 중에서 가장 엽기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끔찍한 이야기는 신의 경지에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 즉 휴브리스(hubris)는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교훈을 만들어냈다.

이 정도에 비할 순 없지만 나도 올해 초에 나의 건강을 지나치게 자신하고 오만하다 그 죗값으로 크게 아팠다. 그때는 힘들고 살찍 좌절도 했지만 그 정도 죄값에서 끝난 게 다행이다. 그 때 아프지 않았더라면 점점 더 오만해지다 마르시아스 정도의 죗값을 치렀을지도 모르겠다.


190 인간의 오만은 늘 신의 경지에 이르고 싶어 했다. 그것은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산고의 통증을 동반하지만, 예술의 정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191 결국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오만이 있다. 하나는 과거의 성공을 우상화하는 오만이다. 그 끝은 파멸이다. 모든 성공한 것들의 파멸 속에는 우상화된 오만이 숨어 있다. 이때 오만은 성장을 멈추게 하는 치명적 악덕이다. 또 하나의 오만은 신으로부터 가혹한 징벌을 당하더라도 신의 경지에 다다르려는 오만이다. 이는 껍질이 벗겨지는 산고의 고통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창조적 진보를 계속하게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 신을 닮으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은 신이 우리에게 준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삶을 바쳐 그것이 빛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192 아직 배우는 사람일 때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대신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면 오만을 경계할 수 있다. 배울 때는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왔을 때는 목표 수준을 높이 잡고, 이에 도달하기 위해 오만을 성장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 자신을 끝까지 올리기 위해서는 하늘로 오르려는 꿈을 가져야 하는데, 이 때 신에게 닿으려는 마르시아스의 오만이 강력한 성장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193 초점화된 집중, 이것이 창조적 오만이며, 마르지 않는 휴브리스다. 위대한 오만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부분에서만 전력을 다하여 신과 싸우려는 자세다.

 

천박한 속물들에게 조소하라_미노스와 체세나 추기경

195 우리는 비웃음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고,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시도를 꺾는지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조소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결국 다른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 무진 애를 쓰게 된다. 그러나 때때로 세상의 천박한 속물들을 조롱함으로써 통쾌한 웃음으로 복수를 시도한 사람들도 많다. 비웃음은 비웃음으로 되갚아지거나, 그저 웃음 한 번으로 가볍게 소멸된다.

 

골육상쟁의 신화가 되풀이되는 이유_로물루스와 레무스

205 가장 가까운 것이 적이 되기 쉽고, 적이 되었을 때는 피붙이가 가장 잔인하다. 얻을 게 없으면 서로 존경할 일이 없고, 가진 것이 많으면 가장 추악한 탐욕전이 벌어진다.

 

213 자기를 경영한다는 것은 먼저 가치를 배우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그 행위가 자신의 가치체계에 부합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익을 보면 먼저 그것이 정의로운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돈은 되지만 그것이 가치에 위배되는 행위를 요구한다면 거기서 물러서야 한다. 이것이 자기경영이다.

 

내가 나의 잔혹한 독재자였으니_팔라리스

219 상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장 어려운 곳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모멸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탐험가라는 상징을 품고 잇는 사람은 가장 위험하고 불편한 곳으로 제 발로 즐겨 떠난다. 탐험가란 그건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자신의 삶을 어떤 상징으로 삼지 못한 사람들은 더럽고 가난하고 위험한 곳에 처하게 되면 이내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들에게 가난과 위험은 불운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육체적 형벌이며 정신적 멸시와 모멸에 불과하다. 스스로의 가치와 의미를 갖지 못하면 결국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인은 시인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우나 자신의 운명에 즐겨 따른다.

 

222 변화란 무엇인가? 나를 가둔 청동황소의 문이 밖에서 잠긴 것이 아니라 안으로 잠겨 있음을 깨다든 것이다. 나를 가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가 나의 독재자였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안으로부터 청동황소의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잔인한 형구를 푸른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다시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나를 풀어줌으로써 진정한 내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 한 개인이 변화를 경영해가는 방법이리니, 입안에서 터져 턱을 타고 넘쳐흐르는 과즙을 즐기듯 삶을 즐기리라.

 

대화와 소통이 실패하는 곳을 채우는 힘, 폭력_아가토클레스

229 가장 좋은 상급의 대화는 말하기에 대해 아무런 부담 없이 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터져나오는 경우다. 나는 그저 상대의 이야기에 몰입한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이 순간 나의 말하기란 그 사이 막간에서 터져나오는 박수갈채 같은 것이다.

 

230 대화의 끝은 관계의 끝을 말한다. 무관심에 이르거나, 상대의 의사와 관계없이 내 주장을 강요하는 언어의 폭력이 되거나, 말로 안 되니 힘으로 하겠다는 무력시위에 이르게 된다. 두 집단의 관계가 이 지경에 이르면 결국 전쟁으로 번진다. 폭력이란 대화의 실패에서 오는 강제적 개입에 다름 아니다.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_오이디푸스

238 오이디푸스가 알지 못하는 일, 즉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 찾아가는 과정은 결국 내가 모르는 나를 추적하는 과정이었다. 나의 존재의 근원이면서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을 찾아나서는 것을 상징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범인이 밝혀졌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진실은 그것을 아는 자에게 고통을 줄 뿐이라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러나 진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각기 다르다. 진실 앞에서 이오카스테는 죽음을 선택했다. 진실을 직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내 진실을 외면해오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빼버린다. ‘내가 모르는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다. 육신의 눈을 빼버리자 참 나에 대한 내면의 눈이 떠지게 되었다.

 

239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 모든 생명은 자신의 운명을 따른다. 나에게도 내가 바꿀 수 없는 나의 운명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섭섭하거나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승리를 쟁취했다고 여기곤 하지만 승리와 패배 모두 미리 예견된 것이다. 나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의 일이며, 그렇다고 실망할 것도 없는 것이 삶이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당장 고통스럽고 힘들 때도 있지만, 인생 전체로 보아 그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닐 때가 더 많았다. 오히려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이루어졌을 때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 운명의 친절한 안배였다는 생각도 든다.

 

239 인간은 어디에 있든 신이 있으라고 한 자리에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어디에 잇든 아름다움으로 가는 길은 열려 있다.

 

240 자기도 모르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그 길에서 만나는 무수한 자아에 감탄하고, 스스로 펼쳐지는 가능성에 놀라워하는 삶이면 좋겠다. 매일 살아 있음으로 기뻐하고 매일 새로운 자신을 창조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는 인생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불복종, ‘자기만의 길을 걸어 모두의 길을 터놓는 힘_안티고네

247 자기혁명은 종종 사회가 인정하는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안티고네처럼 자기만의 법칙을 따름으로써 세상의 일반적 법칙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허용범위의 일탈이다. 일탈은 대가를 요구한다. 고독이라는 벌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는 큰 길을 가는 대신 자신의 오솔길을 헤쳐갈 때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바로 자기를 혁신하려는 사람들이 마주치게 되는 고통인 것이다.

 

248 그렇게 홀로 신의 비호를 받으며 자신의 길을 간다. 그리고 승리한다. 그 후 자기혁명가는 사회로 귀환할 수 있게 된다. 그때 비로소 자기만의 법칙이 일반을 위한 성공의 법칙으로 더해지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영웅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영웅은 자신의 성공을 사회와 더불어 나눔으로써 자신이 걸었던 가시밭길을 다른 사람도 걸을 수 있는 길로 만들어놓는다. 다른 사람이 걸음으로써 길이 아니던 것이 길이 된다. 길을 그렇게 만들어진다.

 

나도 모르는 나’, 그 미로 속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실타래_아리아드네

253 테세우스의 길을 밝혀주던 아리아드네는 그가 떠나자 예상치 않은 삶의 미로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디오니소스가 찾아오고,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되었으니 이제 아리아드네의 미로는 디오니소스가 되었다.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라는 운명의 실타래를 따라 자신의 삶이라는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었다.

 

254 모든 이에게 즐거움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사냥꾼이기도 한 디오니소스는 그의 행보 하나한가 온통 고통으로 점철된 유일한 신이다. 그는 포도나무처럼 매년 가지치기를 당한다. 추운 겨울, 옹이진 죽은 나무둥치의 갈래갈래 찢어진 껍질처럼 디오니소스도 매년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매년 부활한다. 기쁨에 가득 차서 다시 살아나며, 죽어야 할 자들에게 죽음이 희망이라는 믿음을 준다. 부활을 통해 죽음보다 더 간한 생명력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에는 두 번 태어난 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258 삶이라는 미로, 운명이라는 미지 속에서 내가 어떤 경우에도 놓쳐서는 안 되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무엇일까? ~ 문득 나는 그것을 믿고 운명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실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까? 갑자기 이 알 수 없는 미래에 내 가슴이 뛴다. 미래를 알 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이렇게 멋진 흥분일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러니 살아봐야겠다. 다시 살아봐야겠다.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한 번 다시 살아봐야겠다.

 

사유 불능’, 생각 없음에서 퍼져나가는 일상의 악’_다이달로스

266 아이히만의 특징은 순전한 무사유(無思惟)’, 즉 생각하지 않음에 잇다.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는 사유의 불능이 바로 그의 무서운 죄였던 것이다. 아렌트는 경고한다. “사회적 환경에 제약된 양심을 품고 이상주의로 무장된 인물이 생각할 수 없는 사유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얼마나 가공할 일이 벌어지는지 아이히만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이별, 닿는 순간 사라지는 이 미칠 듯한 부재_오르페우스

275 삶은 에우리디케처럼 사라질 것이다. 붙들 수 없는 것이다. 삶을 통해 얻었던 진귀한 체험들과 보석 같은 깨달음 역시 얻었다고 믿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할 수 없다. ‘에우리디케의 얼굴에 머물던 오르페우스의 마지막 시선그 시선으로 살 수밖에 없다. ~

오늘 죽을 것처럼 산다.’ 나는 이것을 한 가지 정신적 공명의 원칙으로 세워두었다. 정신적 공명은 우리가 필멸의 개념을 가슴에 안고 있을 때 가장 잘 찾아온다. 영원히 사는 신들은 어느 날도 특별하지 않다. 그들은 무한히 계속되는 지루함의 평화 속에 있다. 그러나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모든 것이므로 특별하고, 특별할 수밖에 없다. ~ 만일 오늘만의 삶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산다면 매일 이별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내 마지막 날을 매우 유쾌하게 상상한다. 나는 그날이 축제이기를 바란다. 가장 유쾌하고 가장 시적이고 가장 많은 음악이 흐르고, 내일을 위한 아무 걱정도 없는 축제를 떠올린다.

 

276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것은 단명한 것들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 그럴 것이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피워내는 몰입, 그리고 이내 사라지는 안타까움.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를 빛나게 한다.

 

우주의 에너지를 불러들일 나만의 탯줄을 찾아서_안타이오스

281 조선 시대 명필로 최흥효란 사람이 있었다. 그가 과거 시험장에 가서 답안을 쓰는데 우연히 한글자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체와 똑같아졌다. 그는 답안을 쓰다 말고 물끄러미 그 글자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글자가 아까워 답안지를 제출하지 못하고 그냥 품에 넣어왔다. 그는 우연히 써진 글자 하나를 아껴,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온 것이다. 최흥효에게는 글씨가 땅이다. 그것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284 나는 아직 미친 듯이 나를 다 써본 적이 없다. 젊었을 때도 무엇엔가 미치고 싶었으나 그때는 미쳐야 할 그것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미친 듯이 빠져드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 짝이 없었다.

 

고난, 교활함을 통찰로 발효시키는 삶의 여정_오디세우스

293 삶이란 때때로 자신의 의도대로 순항하는 것 같다가도 알 수 없는 운명의 폭풍 속에 내던져지기도 한다. 때때로 탐욕이 나를 이끌기도 하고, 때로는 불행이 나를 각성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섹스가 육체를 달아오르게 하고, 사랑이 내 가슴을 채우는가 하면, 미움과 증오 혹은 허탈함과 무의미가 가슴을 온통 채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 살아서 떠나온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복수, 필요해서 너를 사랑한 자를 믿지 마라_메데이아

303 배신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자 그녀의 마음속에서 마녀의 본성이 이글거리며 되살아났다. 어려움에 처해 도움이 절실했던 사람을 사랑한 것이 얼마나 큰 함정이었는지 그녀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신이 필요 없어지는 날, 사랑처럼 보이던 것들은 사라지고, 그동안 쏟았던 모든 헌신들 또한 헛되어버렸으니, 배신감은 지독한 통증으로 그녀의 가슴을 찔러왔다.

 

308 남자들이여, 여인을 배신하지 마라. 메데이아가 찾아가리라.

여인들이여, 그대를 필요로 하는 남자를 믿지 마라.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은 이아손 같은 자들이다.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필요로 하는 남자를 사랑하라. 그에게 당신이 필요하지 않아도 그는 당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외눈과 백 개의 눈 사이, 불균형을 다스리는 통섭의 눈_아르고스와 폴리페모스

309 불균형이 세상에 흘러나오게 되자 인간은 제대로 걷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무수한 가치들이 부딪히면서 서로를 주장하자 자아는 갈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인간은 불균형 속에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중용의 길을 찾아냈다. 동시에 그들은 가지가지의 갈등과 불협화음들을 통섭하여 더 높은 차원의 조화를 이루어냈으며, 조화는 음악처럼 아름다웠다.

 

312 자기경영은 두 개의 시선이다. 두 개의 대극적 가치를 다 볼 수 있는 균형의 눈을 가지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정신은 서로 모순되고 갈등하는 것들을 받아들여 더 좋은 것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의 눈으로 본 것으로 모두를 대변하면 편협해지고, 한 개의 귀로 들은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억울한 일을 만들게 된다. 두 개의 눈으로 두루 보고, 두 개의 귀로 이 입장 저 입장을 헤아려 듣고, 안에서 가지런히 정돈하여 하나의 입을 통해 표현하면 지혜롭다 할 수 있다.

 

315 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질문을 가진 사람들은 훨씬 더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답에 갇히면 질문을 두려워하게 되고, 따라서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킬 수 없다. 답이란 길과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넓은 길이 되듯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답이 된다. 그러나 성공이란 늘 특별한 것이고, 특별한 생각을 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답만을 그하려 하지 말고 라고 묻고,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가는 수련을 하다보면 어느새 자신이 특별한 시선과 다양한 질문을 포용할 수 있는, 정신적 폭이 넓은 사람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318 일과 삶의 불균형도 통섭의 개념으로 연구해보자

좋은 직업은 밥과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 , ‘좋은 직업=+존재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러나 밥과 존재는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갈등관계에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존재가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하다보면 밥이 충족되지 못한다.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고독한 길을 적어도 10년은 걸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10년을 걷다보면, 한 분야에서 두드러진 전문가가 되고, 팬과 마니아가 생기게 된다. 자신의 고유 틈새시장을 장악하게 되면서 밥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드디어 밥과 존재가 화해하게 되는 좋은 직업, 즉 천직을 얻게 된다. 존재에서 시작하여 밥을 통섭해가는 루트다.

 

에필로그_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나는 인간

325 운명에 맞서 모험을 떠나고, 살아 있는 동안 매순간을 살아 있음의 감탄으로 채우려고 애쓸 때, 운명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 우리는 삶을 후회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삶다운 삶을 매순간 즐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때 자신의 삶이 유일한 이야기로 전환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로소 한 사람의 삶이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는 것이다.

 

327 인식의 동굴에 갇혀 있는 어제의 나를 깨부수는 것이 의식혁명이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우주적 나를 통나무 판이 갈라지고 얼음 호수가 깨지듯, 벼락처럼 그렇게 깨달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자기혁명이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모든 대극이 녹아 융합되는 장엄한 신화의 세계로 자신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328 삶만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위대한 손이다.

 

 

내가 저자라면

작년 이맘 때 토마스 불핀치 (Thomas Bulfinch)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 신화 입문서로는 좋은 책이지만, 각각의 에피소드가 너무 단순화 되고 배경 설명이 부족해서 인물의 연결이 부족하고 이해가 안 됐었다. 뭔가 비하인드 스토리나 다른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설명이 없이 이야기만 읽고 끝나다보니 읽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은 그런 찝찝한 느낌을 잘 보완한 이야기 책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느끼거나 겪는 욕망과 감정, 불행, 행복 등을 신들의 경험과 에피소드로 풀었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판도라의 상자 속에 들어있던 불행과 연결시킨 독특한 구성, 한 편이 너무 길지 않은 것도 좋다.

내가 아니라 옛날 먼 나라에 살았던 멍청하고 잔인한 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으니, 부끄러움 없이 인간의 욕망을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신화 속 이야기 뒤에 이에 대한 인간적, 그리고 자기경영적 해석을 덧붙여 읽는 재미와 사유거리를 더해주고 있다. 한 신(신화)에 여러 버전이 있을 경우, 이를 소개하는 방식도 좋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신화를 몇 천 년 전에 벌어진 죽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살아있는이야기로 부활시킨 점이다.

작년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며 가장 큰 불만은 이야기의 어려움과 읽다 만 것만 같은 찝찝함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불만은 찌질하고 잔인한 신들의 이야기를 읽는 자체였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말한 잘못된 독법으로 신화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찌질했던 신들에게 연민이 생기기도 하고, 나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어려운 이름 때문에 헷갈리고, 정신 없이 읽다가 팽게 친 <그리스 로마 신화>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작가가 남자인지라 어쩔 수 없이 책 전반에 걸쳐 남성적 시각이 지배하고 있는 점이다. 여성 작가의 눈으로 여신들에 관해서 쓴 책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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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15:08:33 *.130.115.78

선생님을 넘넘넘 존경하지만 어쩔 수 없는 아쉬움...


여성작가의 눈으로 쓴 여신들의 이야기를 찾던지, 그도 맘에 차지 않는다면

음...직접 쓰는 수 밖에 없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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