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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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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21일 00시 12분 등록
역자 서문
이 책은 우리들이 흔히 보아온 역사책과는 다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의 역사책 속에서 볼 수 있는 소위 "위인들"은
결코 아니다. 갖가지 어려움에 고통받고, 여러 종류의 전쟁에서 싸우고,
피와 땀과 눈물로 미국을 건설한 보통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어린이들,
즉 민중이다. 이 책은 그들 민중의 이야기다.

저자 리오 휴버만에게는 역사란 날짜라든가 전쟁 또는 "영웅들"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그런 고물들을 주입시킬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역사시간은 무엇이 일어났는가 보다는 왜 그것이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로 대부분의 시간이 채워졌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의 주제는 현재의
문제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했다.

저자 서문

그동안 나는 매년 출판되는 역사책들을 주의깊게 바라보면서 마땅히 중점이
두어져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곳 - 전쟁이 아닌 노동자, "지도자"가 아닌
민중 _ 에 중점을 둔 책이 있을까 하여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책은
나타나지 않았다. (1932 첫 출간 이후 1964년 3월의 신판서문중에서)

선의(善意)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진정 요구되었던 것은
새로운 손길이 아니라 새로운 정책적 대안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미국은 약속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최근까지도 오직 정상(頂上)의
사람들에게만 실현되었다. 그 약속이 우리 모두에게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아메리카의 꿈은 분명 현실이 될 수 있다.
그것을 하루 빨리 실현시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1947 1월 서문)

1장 가자, 아메리카로!
미국은 그 시초부터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었다.
사람들은 지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미국의 해안가로 끌려 들어왔다.
멀리서 가까이서, 더운 지방에서 추운 지방에서, 산지에서 평지에서,
불모의 사막에서 비옥한 들에서, 폭 3,000마일, 길이 1,500마일의
이 거대한 자석은 지상에 존재하는 온갖 유형의 인간들을 끌어들였다.

제일 먼저 온 것은 북구인 (北歐人)들이었다.
300년이 채 안 되는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왔다.
어떤 때는 1년 동안에 100만 명이 오기도 했다.

길이가 90피트가 될까말까 하고 너비 26피트에 300톤밖에 안 되는
돛단배로 대서양을 건넌다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웬만한 이유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위에 묘사된 모든 고난들을 겪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친척들, 친구들, 그리고 고향 집의 모든 즐거움과 위안과
안락으로부터 이별하는 슬픔을 크게 보상하고도 남을 만한 약속된 미래가 여행의 끝에 있어야만 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은 늙었고 미국은 젊었다. 유럽의 토양은 오랜 세월 동안 갈아먹은
것이었지만, 미국의 땅은 아직 사람의 손이 닿아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처녀지였다.

이 땅은 넓을 뿐만 아니라 토질도 좋았다. 이곳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농지가 있었다.

위험과 고남을 무릅쓰고라도, 가자, 아메리카로!

"마이클, 이곳은 참으로 멋진 나라다. 이곳에서는 누구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고, 마음내키는 대로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아무도
체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자, 아메리카로!

앞에서 이미 말했던 것처럼, 이민을 가야 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다가,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도와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모든 절차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필요한 모든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협력해 주며, 때로는
여권까지 갖추어 주고, 끝으로 적절한 배까지 안내해 준다면- 그렇다면.
가자, 아메리카로!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사람들은 미국에 마음이 끌렸고, 그들 자신의 자유
의사로 미국으로 왔다. 그러나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어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계약 노예노동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단지 뱃삯을 갚기 위해
4년에서 7년 동안 계약을 맺고 자발적으로 자기를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그룹은,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강제로 배에 실려 바다를 건너 노예로 팔려지는 .... 런던의 거리는
유괴자들로 들끓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 도착한 뒤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2장 새출발

그들이 처녀림에서 최초로 찍어낸 나무로 즐겨 지었던 통나무집들은,
우선 집이 설 만한 넓이의 땅을 약 2피트 깊이로 네모지게 판 다음 .....
그 위로 나무 껍질로 된 지붕이 올려졌는데, 밤나무 껍질을 네모나게 이어서
만들거나 혹은 자작나무 껍질 널판지를 겹쳐지게 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북부 지역에서는 해안에 인접한 애팔래치아 산맥이 이곳에 와서는 바다로부터
200마일이나 떨어지게 된다. 바닷물은 많은 구름을 만들어 냈고,
구름은 산맥에 부딪혀서 많은 비를 만들어 냈고, 비는 수천 년 동안 산맥을
씻어내어 기름지고 넓은 훌륭한 평야를 이루었다.
흙을 실어 내려왔던 강들은 산맥 쪽에서는 급경사를 이루었지만
해안에 이르러서는 넓어지고 평평해졌다.
이 강들은 당시의 작은 배에 알맞은 길이었으므로 배를 타고 내륙 깊숙이
몇 마일이고 갈 수 있었다.
비교적 규모가 큰 플랜테이션 농장들은 배의 운행이 가능한 강들의 양쪽에
줄지어 위치해 있었다. 배들은 연안 도시에서 짐을 내리지 않고
강을 타고 내륙으로 몇 마일이고 들어오면서 이들 농장의 개인 부두에
멈추곤 했다.

잎담배! 이것이 남부 식민지 중 가장 오랜 버지니아의 생활의 숨결이었다.
그러나 잎담배는 토양을 빨리 고갈시키는 아주 예민한 작물이다.
농장주들의 생활은 매우 호화스러웠고 대부분 빚을 지고 있었다.
남부의 생활은 전부가 잎담배의 잎사귀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것이 1760년까지의 버지니아의 모습이었다.

어떤 사람의 행동방식이 하나의 습관으로 발전되고 나면 그것을 뜯어고치기는
몹시 어려워진다.

1619년 최초로 제임스타운에 흑인 노예선이 도착한 이래 1690년까지는
식민지 전역에 약 2만 명 가랴의 흑인 노예가 분포되어 살고 있었다.
북부에서는 그들을 사용해 보았으나 집에서 부리는 하인을 제외하고는
그 지방의 일에는 적합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 일에는 그들이 안성맞춤이었다.

인디고(마디풀科 식물인 쪽 등에 들어 있는 색소성분)

뉴잉글랜드의 강들은 남부에서처럼 그렇게 넓고 거침없이 흐르는
고속도로가 되지 못하며, 더 짧고 더 좁은데다가 물살은 더 빠르고
여러 군데에서 폭포로 흐름이 절단된다.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또 한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은, 뉴잉글랜드의
땅에는 돌이 많다는 시실이다.

이 지방에서 몇 백 마일쯤 동쪽으로 가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어장이라 할
수 있는 뉴펀들랜드 대륙붕이 있다. 이윽고 해안은 대구,연어 청어,고등어 등을
싣고 돌아오는 고깃배들로 붐볐다. 유럽의 카톨릭 국가들은 고급 생선의 영구적인 시장이었고, 싸구려 생선은 서인도제도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이 그들의 노예들을 먹이기 위해 사갔다.
그 바다에는 대담한 뉴잉글랜드인들이 열심히 쫓던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고래였다. 당시 고래기름은 그 수요가 컸다. 또한 향유고래의 머리에서는
경랍초를 만드는 노르스름하고 흰색의 밀랍과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경랍초는 수지 獸脂 양초보다 더 잘 타고 불빛이 더 환했으므로 훨씬 우수했다.

빗전이 계란 껍질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공중으로 20피트나 치받쳐지는 동안
선원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피범벅으로 소용돌이치는 물거품 속으로 뛰어내린다.


3장 모든 인간은 평등한가.

부자들으 지배권에 대해 도전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투표권을 갖고 있던
소농들이 이따금씩 도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짜 도전은 변경 (邊境)에서
왔다. 변경 개척자들은 정책 결정에 대한 발언권을 요구했다.
그들은 법을 만드는 데 그들 자신이 참여햘 권리를 요구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미국적 사고방식은 변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럽에서도 이러한 사상이 논의된 바는 있었으나 처음으로 실천에 옮겨진 곳은
미국이었다. 그것은 후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매우 중대한 사상이었다.

4장 당밀과 차(茶)

잘 살기 위해서 법을 어겨야 한다면, 그런 법은 지키지 않았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돈지갑에 구멍이 뚫리느냐보다는 영국의
법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 나았다.

1763년 가을 인디언 추장 몬티악이 이끄는 인디어들의 대폭동이 있었다.

차 조례는 식민지 주민들로 하여금 밀수입한 차보다는 동인도 회사의 차를
사서 마시게 하자는 계획이었다. 밀수입된 차가 싸다 해도 동인도 회사
차는 그보다 더욱 싸게 팔면 될 것이다.

사무엘 애덤즈는 이렇게 말했다. "아메리카는 이미 독립국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그 사실을 선언하지 않습니까?"

1776년 7월 4일, 의회는 독립선업문을 채택했다.

제 5장 더 완전한 연방을 이루기 위하여
미국의 주밀들 중 2/3가량은 영국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열광적으로 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모두가 미국측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안락을 포기할 각오가 돼 있지는 않았다. 미국군의 병사들은 대부분
서민(庶民)들이었다. 소농, 변경 개척민-한마디로 빈민계급이었다. 물론
간혹 부자들도 있었다.-조지 워싱턴, 찰즈 캐롤 등. 그러나 총을 든 것은 주로
서민층이었다.

혁명이란 말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 중의 하나는 '변화'이다. 미국 혁명은
미국인들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구시대의 유렵 국가들에게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오지 않았던
것이며, 또한 미국으로 하여금 "자유국가"라는 평판을 갖게 한 것이다.

오늘에 와서는 "헌법 회의"라 불리고 있는 필라델피아 회의는 4개월 동안을
지루하게 끌며 계속되었다. 각 주에서 모인 대표들 간에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큰 주가 작은 주보다 정부에 더 큰 발언권을 갖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각 주의 흑인노예 인구도 백인과 같이 간주해야 할 것인가?
의회가 흑인노예 수입을 중지할 권한을 가질 것인가? 그러한 많은 문제점
들과 기타 논의사항들에 관해 대표들은 긴 시간 동안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에 관해서만은 실제적으로 대표 전원이 일치된
의견이었다. - 민중이, 말하자면 재산이 별로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힘을 갖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어떤 점으로 보아도 새로운 헌법은 민중으로부터 오는 위험에서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 6장 총 하나, 도끼 하나
그리고 옥수수 한 자루, 그것이 무기였다. 치열한 전쟁-용기가 필요했으며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 남았던 싸움에서, 그 전쟁은 다른 예사 전쟁들과는
달랐다. 그것은 한 편에는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미지의 황야가 있는 보다 드릴넘치는 전쟁이었다.

1770, 혁명이 있기 전에 영국의 게이지 장군은 본국으로 부치는 편지에서
미국인들에 대해 "땅의 임자가 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열렬한 소망이며,
아무리 먼 곳이라도 좋은 땅을 찾아 방랑하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천성"
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은 파도가 밀리듯 서부로 서부로 밀렸다. 변경은 자꾸자꾸
더 먼 곳으로 밀려났다.

그들의 힘든 생활은 거칠고 강인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그들의 생활은 또한 적막하고도 외로운 것이있다.

서부인들은 인심이 후했다.
'네, 나도 우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둡시다. 당신이 내게
돈을 줄 권리가 있는 만큼 나도 당신에게 우유를 드릴 권리가 있습니다.'

황야와의 그러한 투쟁은 그들에게 자립을 가르쳐 주었다.
자신의 두 손으로 오로지 자신의 힘에만 의존해서 낯선 상황과 맞섰고,
그리고 정복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살 곳을
해결했다. 동부를 떠나면서 고향과의 관계도 끊었다.

개척자는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가 누구인가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배웠다.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 발명가가 된다. 동시에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개척자는 다방면의 기술자가 되었다.
그가 적응해야 했던 상황은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
적응했고, 따라서 이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개척자의 생활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그는 화려한 것을 혐오했다.
그는 꾸밈을 싫어했으며, 그의 태도는 직선적이었다. 그는 평등과 자유를
믿고 있었다. 그는 자주적이었고, 강한 자존심과 긍지를 갖고 있었고,
두려움을 몰랐으며, 지칠 줄 모르는 부지런함과 성공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황야에서의 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서부는 공동의 관심사를 가진 농민들로 이루어졌다. 서부인들은 가난했고,
빚을 지고 있었으며, 돈이 필요했고, 그들의 상품을 팔기를 원했다.

제 7장 이상하고 다채로운 변경 - 그 마지막
98 ˚ 선 서부 초원시대의 인디언들은 훨씬 더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한 군데 정착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들은 말을 타는 데 놀라운 솜씨를 갖고 있었다. 적으 무기를
피해서 말 양측 어느 쪽으로나 몸을 내려뜨리고 발꿈치로 말잔등에
매달려 몸을 숨길 줄도 알았다. 들소 가죽으로 만든 그들의 방패는 얼마나
단단하고 딱딱한지 바로 정면에서 공격하지 않는 한 어떠한 화살이나 총알도
뚫을 수 없었다. 그들은 100개의 화살 뭉치를 지니고도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릴 수 있었으며, 화살 다루는 솜씨가 어찌나 능란한지 항상 한두 개의
화살이 공중을 나르고 있었다. 화살을 쏘는 힘은 들소의 몸을 완전히
꿰뚫을 정도로 강했다. 완벽한 전투기계인 이들 초원의 인디언들은
한꺼번에 8개의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제 8장 공업의 북부
1860년까지 동북부 지방은 미국의 공업 중심지로서의 토대를 굳혔다.
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대규모의 사업을 할 수 있는
모든 기회가 있었다.

제9장 농업의 남부
날로 불어나는 공업제품의 물결, 그 일부는 남부로 갔다.
종전에 노예를 사용하던 州들은 노예사육 주들로 변했다.

백인목사에게 권장하는 설교문들을 속에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인님들 또는 주인 마님들께 잘못을 범하는 것은,
천상에서 그분들을 여러분 위에 높이 두신 하나님꼐 잘못을 범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다.... 여러분의 주인님들께서는 하나님의
감독자이시며, 만일 여러분이 그분들께 잘못을 범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음 세상에서 그 잘못에 대해 여러분을 엄하게 벌하실 것입니다...

노예제도의 보존에 교회가 공헌한 바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
그렇게 노예들이 마음 속으로 그의 주인을 신과 동일시하게 했던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제 10장 땅 주인과 돈 주인의 싸움
분쟁은 불가피했다. 그것이 반드시 그토록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오랜
전쟁이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서로간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 분쟁은 60년 이상 계속되었고 종국에는 '남북전쟁(the Civil War)'으로 끝을 내렸다.

양 지역 간의 분쟁은 공업의 북부와 농업의 남부 간의 상반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 '제 2차 미국혁명'으로 흑인노예제도는
무너졌다. 그와 함께 노예소유자들의 지배도 무너졌다. 400만의 인간이
더 이상 노예라는 이름의 굴레에 매이지 않게 되었다.
반면 북부의 자본가들을 그들이 지난 60년 동안 손에 넣기 위해 투쟁해
왔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었다.
상인들, 제조업자들, 은행가들은 그들의 장애물이었던 지주들과
싸워 이김으로써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뚜렷이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제11장 자원,인력,기계, 돈
수송에 혁명이 일어났다.

레일 하나에는 10개의 못, 1마일을 가는 데 레일이 400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총 1,800마일,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망치를 2,001백만 번 휘둘러야 된다는 계산이다!

빵이 면화를 이겼다. 서부의 광대한 농지가 농업 무대에 등장한 것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었다. 경작지로 개간된 토지 면적, 그것은
이탈리아, 독일의 경작 가능 면적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면적이었다.

제 12장 더 많은 자원, 인력, 기계, 돈
남북 전행 이후 미국은 세계 최강의 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런데 판사들이 산업부분의 트러스트와 지주회사 등에서 독점금지법의
위반자를 발견하기는 어려웠어도, 다른 영역에서는 교역을 제한하는 결합을
발견하기가 쉬웠다. 그것은 노동의 영역이었다.

제 13장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산업혁명은 노동자의 운명을 자본가의 손에 맡기도록 만들었다.
고용주는 공장과 값비싼 기계를 갖고 있었다. 근로자는 더 이상
자기가 먹을 양식을 생산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을 할 수 없었다.

정의의 사자들인 대심원의 대부분은 달리 생각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길고 격렬한 투쟁에서 미국 법원은 가진 자의 편이었다.

제 14장 무일푼에서 백만장자로
위에 열거되지 않은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의 자본가들은 아무런, 또는 거의
아무런 분쟁도 일으키지 않고 정복했다. 팡파르나 진격의 나팔소리 없이
약소국가를 침략하는 더욱 현대적인 제국주의 수법을 사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 나라들은 잉여자본의 조횽한 그러나 극히 효과적인
침투를 통하여, 미국의 '영향권'내로 들어 왔다.

17세기 초의 미국은 황금의 해 1929년의 미국과는 매우 달랐다.
야만인과 야수들만이 살고 있던 황야가 세계 역사상 전대미문의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제 15장 백만장자에서 무일푼으로
농장에서는 농작물이 산더비 같이 쌓이고 있었다. 가격은 하락했다. 풍요를
눈앞에 둔 기아였다.
미국이 앓고 있던 질병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자. 그것은 최고도로 발전한
최첨단의 자본주의였다.
이러한 고도로 발달된 최첨단의 자본주의가 미국 국민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몇몇 사람들이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배를 계속하는 한, 임금을 낮추고,
능률을 증진시키고, 경쟁자를 밀어내고, 가격을 고정시키고, 해외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벌이는 등,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싸울 것임을 의미한다.

지배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금융조작이다.
1932년 11월, 노동자는 실업으로 찌들어 있었고, 농민은 공황으로 허덕이고
있었고, 중산층은 은행의 파산으로 저축금을 잃고 경제적인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8일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제 16장 아무도 굶주리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낮은 생활수준을 보장했던 '보장'제도였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뉴딜 정책은 관념적인 혁명이었다. 그것은 경제적 혁명이 아니었다.

제 17장 다시 일자리를 주기 위해
진실로 요구되었던 것은 거대한 규모의 영구적인 공공지출계획에 즉각적으로
착수하는 것이었다. 국가의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완전히 이용하게 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윤제도의 폐지를 위한 영구적인 계획이 필요했었다.

제 18장 판매자도 주의하라.
구호와 경제 회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떠한 계획사업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점은 세 가지이다. 우리가 일을 하기 위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영 동력회사는 비싼 요금으로 적은 전력을 판매하는 것을 원칙으로 사업을
경영해 왔었다. 전력은 훌륭한 봉사자였다. 전력 사용의 증가는 계곡
주민들의 생활의 개선을 뜻하는 것이었다.
증권거래소가 공공의 기관이기보다는 사적 클럽이고, 그 책임은
고객인 일반투자가 전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클럽의 소속
위원들에 대한 것이라는 자세는 역사가 오랜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이미
깊이 뿌리박한 관습적인 것이었다.
임금.시간법은 그 법이 미치는 곳까지는 좋은 법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충분히 멀리 미치지는 않았다.

제 19장 세계적인 무법상태의 전염병이 번지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대병기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 20장 일자리와 평화
1929년의 대공황 이후, 전 세계의 독점자본은 두 가지 중 한 가지
방법으로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즉, 전시체제를 이용하거나
또는 공공사업,구호,농업원조 등에 대한 재정지출에 의해 존속했다.
전 경제는 전쟁추구를 가속화 시켰다.
사기업은 이미 오래전에 자유기업으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렸다.

민중, 그들의 경제적.정치적 활동은 배가되어야 한다.
그들은 일자리와 평화를 원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투쟁을 통해서 깨닫게 될 것이다.
일자리와 평화는 이윤만을 위한 생산제도가 아닌, 사용을 위한 생산제도
하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 소감
미국에 대한 섣부른 혐오감에서 나오게 만든 책이다.
민중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뭉친 저자 리오 휴버만은 슬쩍 가려진 이야기들을
꼼꼼하고 참으로 성실하게도 통계 수치와 그래프, 그림, 지도와 방대를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해서 소중한 책을 엮어 나갔다. 그가 힘쓴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그는 단 한번도 애국심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적어도 미국민중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느낄 수 있다.
쾌속성장과 추락 그리고 공황, 그리고 그 공황에서 벗어나고자
전쟁중독에 빠진 자들의 문전에 거지 나사로가 함께 살고 있었다.

서부로 서부로 정신없이 변경의 한계를 무너뜨리며 목숨을 걸었던
초기 개척이민들은 300년이 채 못되어 그들이 목숨과 바꾼 땅이
세계 무기고가 되어 가고 있음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도 인디언을 짓밟는 것도 개척중에 하나라고 불렀으니, 당연하다 여길까.

미국이라는 거대함 뒤에 가려진 민중의 역사가 던져주고자는 말은
스스로 투쟁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는 메세지인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서도 리오 휴버만의 아직 못다한 이야기들이
계속 될 것 같다.

민중의 면면은 감추어진 상처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평화와 일자리다.
그런데도 그것조차 투쟁하지 않으면 얻기 힘든 구조를 만든 부자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노력이 아니라 투쟁말이다.
미국의 제 2, 제 3의 리오 휴버만이 언젠가 노력으로도 민중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땅이라고 씌여진 책을 그는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다.
아니, 그는 너무도 뿌리깊히 알건 속속들이 알아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 단지 나의 바라는 바인 것이다.

♤ 내가 저자라면
그는 충분히 촛점을 맞추었다고 생각된다. 미국 민중에 대해.
그러나, 아쉽다.
인디언들이 서부에서 변경에 변경으로 쫓겨날 때 그것이 이미 벌어진
기정 사실이므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만을 유전자속에 익혀버린
미국의 후예답게 그것이 비열한 짓이었음은 표현하지 않는다.
정복해야할 대상중 하나라는 인상이 더 짙다. 철저히 개척자들의
입장에서 사건을 나열해서 그런가.

또, '극동에서의 기록은 덜 나빴다고 할 수 있지만, 충분히 나쁜 것이었다.'

전쟁에 대해서 이런 수사법을 쓴 것이 하나도 위트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생명이 달려 있는 것이 전쟁인데. 비록 나는 전쟁을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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