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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5일 11시 55분 등록

<백범일지>
1 저자에 대하여-김구(1876. 07.11~1949. 06.26)
 
1876년 음력 7월 11일에 해주에서 태어났지만, 김구는 살면서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탄생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선생의 자서전은 상상 이상이었다. 처음에는 무협지를 읽는 듯이 어이없으면서도 유쾌했다. 위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남다르다 하더니 정말로 남다른 위인이었다. 나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힘든. 상편은 그렇게 재미를 더해 주었지만, 하편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이 전해졌다.


70평생을 살면서 독립된 하루의 날을 가지지 못한 김구선생의 평생 소원은 역시나 나라의 독립이었다. 지금은 그 분의 뜻이 반은 이루어진 셈이다. 나머지 반은 그의 아들 김신의 회고록을 보면 서 알 수 있다.
"아버님이 하늘에서도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일이 남북 분단과 긴장 관계이며, 가장 깊이 바라시는 일이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남북 화해 협력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때, 아버지의 신념과 실천이 더욱 새롭게 평가되리라는 것도 확신한다."
김구선생은 사는 동안 나라의 아들이었고, 나라의 아버지였다. 노모와 젊은 아내와 죽은 아이들을 돌 볼 수 없었고, 40이 넘어 얻은 인과 신이라는 아들 또한 자신의 슬하에서 키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세상이었다. 원대한 목적을 품고 먼 길을 가는 처지에 한신이 회음의 시정잡배에게 당했던 일을 상기하며 큰 꿈을 향해 뚜벅뚜벅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그 분을 생각하면 ‘황소걸음’이 생각난다. 그 분의 신념과 의지가 행동이 황소걸음을 닮았다.


그분의 일생을 그리고 삶의 의미를 나라의 독립과 자유에 바친 그의 삶이 헛되지 않은 역사를 후손들이 써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나의 자유스러운 하루를 그 분께 드릴 수 있다면 선물을 하고 싶다.


<김구의 생애>
1876년 7월11일 안동 김씨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878~79년 천연두를 앓음. 어머니의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벼슬자국이 생김
1887년 반상의 구분을 듣고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하기 시작함.
1892년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낙방되었음.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공부를 하지 않음.
1893년 동학에 입도, 김창수로 개명, 아기접주가 됨
1894년 동학군 이동엽의 공격으로 대패하고 3개월 동안 피신생활을 함.
1895년 고산리전투에 참가하나 패함.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하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함.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분노로 일본인 쓰치다를 죽임. 해주옥에 투옥되어 인천감으로 이송됨.
1898년 탈옥하여 마곡사의 중이 됨. 법명은 원종.
1900년 김주경의 친구 유완무와 그의 동지들을 만남. 이름을 구로 고침.
1902년 여옥과 맞선을 보고 약혼함. 기독교 믿기로 결심.
1903년 약혼녀 여옥이 병사. 안신호와 약혼했으나 파온.
1904년 최준례와 결혼.
1905년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사업에 매진함.
1907년 양산학교 교사. ‘하기 사범강습회’ 주최하여 교사양성에 매진
1908년 양산학교 중학부 개설. 학무총감 역임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한달여 만에 나옴. 보강학교 교장 겸임.
1910년 신민회 회의. 서울에 도독부설치, 만주 이민과 무관학교 창설등을 결의.
1911년 일본 헌병에게 체포. 종로구치소 수감. 15년 판결 받음.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됨.
1912년 5년형으로 감형. 연하를 백범으로 고침.
1914년 인천감옥으로 이감.
1915년 출옥.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로 감.
1918년 3녀의 사망 뒤 아들 인 출생. 김구의 나이 43세였다.
1919년 상해로 망명 후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됨.
1920년 아내가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옴.
1922년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의워능로 선출됨.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됨. 차남 신 출생.
1924년 아내 최준례사망.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선출됨.
1926년 국무령에 선출됨.
1928년 53세 <백범일지> 상권 집필시작.
1929년 <백범일지> 탈고. 상해 교민단 단장이 됨.
1932년 군무장에 임명함. 하지만 임시정부에서 이탈.
1934년 가흥에서 어머님과 아들 인.신 만남. 중앙군학관교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인특무독립군 조직.
1935년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해 한국국민당을 조직.
1937년 5개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
1939년 어머님 인후염으로 사망. 조선민족전선연맹과 협의하여 전국연합진선협회 결성.
1940년 임시정부 헌법 개정, 주석으로 선출됨.
1941년 <백범일지>하권 집필시작, 임시정부 <대한민국건국강령> 제정 발표.
1942년 임시정부 <3.1절 선언>발표 후 중.미.소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함.
1944년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
1949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 효창원에 안장.


2 내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백범 출간사


013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 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나는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출판할 것은 꿈도 꾸지 아니하였다. 나는 우리의 완전한 독립국가가 선 뒤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춰지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 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놓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다.


014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라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철학의 대강령을 적어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편을 주의하여 읽어주셔서, 저 마다의 민족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014~015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잇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n시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015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잇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023 삼각혼이란 세 성이 혼기의 자녀를 서로 교환하는 제도로


024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027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 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대목이다.


028 인근 양반들의 회유책이었는지 아버님은 도존위에 천거되셨다. 아버님은 양반들에게 잘 해주던 다른 도존위들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가혹하게 공전을 거두고, 가나하고 천한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부담하실지언정 가혹하게 하지 않으셨다.


>소위 어떤 자리를 얻게 되면 어깨와 목에 힘이 들어가고 자세가 달라지는 법인데, 김구선생님의 아버님 또한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2 시련의 사회 진출


039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061~062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집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062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이 구절이 나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구나!


063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의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실행.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판단, 실행, 계속….판단도 중요하지만 99그램의 생각보다는 1그램의 실천이 중요하고, 작심 3일보다는 지속적인 실행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삶의 중요한 철학임을 말해준다. 계속되는 실행….이 말 앞에 언제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065 “만고 천하에 흥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고 망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네. 종전에는 토지와 백성은 가만두고 군자 자리만 빼앗는 것으로 흥망을 논하였지. 그러나 지금의 망국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과 주권을 모두 강제로 집어삼키는 것이네. 우리나라도 필경은 왜놈에게 망하게 되었네. 소위 조정대관들은 전부 외세에 영합하려는 사상만 가지고, 러시아를 친하여 자기 지위를 견고히 할까. 순전히 이런 생각들뿐이라네. 나라는 망하는데, 국내의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들도 한탄하고 혀만 차고 있을 뿐 어떠한 구국의 경륜도 보이지 않으니 큰 유감일세.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었네.”


066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 세력은 온 나라에 차고 넘쳐 대궐 안까지 침입하여 대신들을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나라를 제2의 왜국으로 만든 것 아니겠는가? 만고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은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충성하는 일사보국 한 가지 일만 남아 있네.”


>지금 시대의 애국은 무엇일까? 거창하게 애국이라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어떻게 인생을 살다가 어떻게 인생을 마감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목숨이라면, 바람처럼 살아지는 삶이라 할지라도 어떤 의미를 남겨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인생은 이런 발자취에 대한 고민만을 하다가 몸부림치는 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30대의 거창한 포부는 현실의 무게와 나의 게으름과 의지의 박약으로 점점 기가 죽어가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을 환상 속에 남겨둔 채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오늘 죽을 것처럼 일하라”


3 질풍노도의 청년기


069 억울하기는 하였으나, 원대한 목적을 품고 먼 길을 가는 처지에 사소하게 잘못 만난 일을 마음에 둘 바 아니라 하여, 한신이 회음의 시정잡배에게 당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서로 위로하였다.


>나는 아직 원대한, 그리고 꼭 이루고 싶은 강렬한 소망의 부재로 작은 돌부리에도 넘어지나보다.


070 함경도의 교육제도는 양서지방(평안.황해도)보다 일찍이 발달해 있었다. 아무리 가난해서 게딱지만한 집을 짓고 살더라도 서재는 반드시 기와집으로 지었고, 그외 동네에는 도청이 있었다.


>놀랍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이제 나의 서재를 갖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계속적으로 실행할지 기대된다.


4 방랑과 모색


139 ‘나는 먼저 탈옥해서 단신으로 쉽게 달아나려다가, 그의 애걸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이중의 험지로 다시 들어가 위험지대를 다 면케 해준 것이었는데, 지금 내가 빈손으로 자기를 찾았을 줄 알고 금전상 해를 입게 될까 봐 거절하는구나. 그 사람의 그 행실인즉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173 “강화 김씨 댁에 있으면서, 선생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 허다한 노고를 겪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비로소 뵙게 되었으나, 세상에는 아주 조그마한 일도 크게 부풀려 전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소문과 실물이 용두사미인 때가 많고, 저 역시 소문과 달리 졸렬하기 짝이 없으니 매우 낙심될 것입니다.” 유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174 이름은 김구라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178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의 경국대강을 보고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사람의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탐관오리들이 비록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금수의 행실이 많으니, 이것은 참으로 오랑캐의 소행입니다. 또 지금은 임금이 스스로 벼슬 값을 매겨 팔고 있으니, 그것은 오랑캐 임금의 소행입니다.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저 대양 건너에 사는 각 나라에는 제법 국강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문명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공자.맹자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달된 법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계속 ‘오랑캐, 오랑캐’하면서 배척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소견에는 오히려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공맹에게서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179~180 “선생님이 피발좌임을 말씀하시는 드리는 말씀입니다. 머리털은 곧 피가 만든 것이요. 피는 곧 음식이 소화되어 만들어진 정액이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머리털도 자라날 수 없습니다. 설사 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서 매우 크고 훌륭한 상투를 위해 얹었다 손 치더라도 왜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또 녹의복건을 아무리 훌륭하게 입었다 하여도 왜인이나 양인들이 우러러 절하지도 않을 것이고 무릎 꿇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학문과 도덕을 공부한 상류층 사람들이 백성을 잔인하게 학대하는 최상의 도수부들입니다. 진실로 온 나라의 백성들은 거의 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이 이익을 좇으니, 자기의 권리와 위무는 모르고 마땅히 탐관오리와 토호의 업신여김과 학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중략)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바른 말이나 다른 생각이 있다면 왜놈이나 양놈이 무서워하라고 우리의 문화를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고유한 문화를 존중 받기를 원할 뿐이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교육이나 문화가 많이 발달하여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있지만, 우리와 문화가 다른 경제 후진국을 보며 그들의 문화를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 자신부터 검토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180 아, 슬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181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충격적이다. 나와 같은 불효녀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185~186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 학문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196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해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지금은 무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많은 것들을 착취하고 있는 세상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묘하게 빼앗긴 뒤에 눈물을 흘린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와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려면 제대로 알고 판단할 줄 아는 역사의식과 철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것도 없이 43년을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202 “작은아버지 보시기에 저의 난봉은 위험하지만, 난봉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게지요.”


203 내가 어리게 보았던 어린 아이들은 거의 다 장성하였다. 성장한 청년 중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는가 살펴보았지만,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까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의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215 국가가 합병의 치욕을 당한 당시의 인심은 매우 흉흉하였다. 원로대신과 내와 관리들 중 자살하는 자도 많았고 교육계의 배일사상이 극도에 달했다. 오직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농민들 중에는 합병이 무엇인지,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자도 많았다.


220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


221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225 그러고 보니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평소 우리 한인의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지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나의 제자로서 형사가 된 김홍식과 같은 학교 직원으로 있던 원인상등부터 밀고하지 않은 것이니, 그러고 보면 각처 한인 형사와 고등정탐까지도 그 야심에 애국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296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302 남의 조계지에 붙어 사는 임시정부니만치, 경무국 사무는 현재 세계 각국의 보통 경찰해정과는 달랐다. 그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307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나도 이런 고쳐지지 못하는 천성을 갖고 있다. 사람의 긍정적인 면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양면을 갖고 있고 이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심하게는 되지만 고쳐지지 않는 부분이다. 천성….어떤 면에서는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고약하다.


314~315 그런데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만주 동북 3성의 왕이라 할 수 잇는 장작림과 일본과의 협정이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붙잡히는 대로 왜에게 넘겨졌다. 중국 백성들은 한인 한명의 머리를 베어 왜놈 영사관에  몇십 원에, 심지어 3~4원에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어찌 중국사람들뿐이랴. 그곳 우리 한인들은 비록 중국 경내에 거주하였지만 처음에는 가가호호에서 해마다 독립운동 기관인 정의부나 신민부에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세금을 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박한 동포들드 우리 무장대오의 지나친 위력과 침탈을 당하게 되자 점차 반발심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이 자기 집이나 동네에 도착하면, 비밀리에 왜놈에게 고발하는 악풍까지 생겼다. 또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점차 왜에게 투항하는 풍습이 생기고 보니, 동북 3성의 운동 근거지는 자연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왜놈의 보호하에 만주국이 탄생하니 만주는 ‘제2의 조선’이 되어버렸다. 이 얼 마나 아프고 쓰린 일인가.


나의 소원


423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오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5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인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427~428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428 그러므로 어는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430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도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70년이 지난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들에 극한 동감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431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431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나도 우리나라가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기원하고 하나 덧붙인다면 행복지수도 가장 높은 나라가 되기를 기원한다.


432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432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처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가진 사람으로 바꾸고 싶다. 나도 가정을 가진 후 진정으로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미소가, 그들의 행복이 나의 삶에 동기부여를 해주는 면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3 내가 저자라면


김구선생의 일생을 이리 자세하게 들여다 본 것은 처음이었다. 다만 고지식해 보이는 안경 탓에 그의 신념과 인생도 그러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리도 엄청난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남다르고 특이한 그의 삶이 마치 무협지를 읽는듯한 느낌을 갖게 해서 재미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한 인간으로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의 삶을 만났을 때, 가슴이 아파왔으며 그 분의 삶을 나의 삶에 대입하기 시작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그 분의 일생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대목이다.


<목차에 대하여>
    교감원칙
    일러두기
    백범 출간사
    상권
    인.신 두 아들에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 시련의 사회 진출
3. 질풍노도의 청년기
4. 방랑과 모색
5. 식민의 시련
6. 망명의 길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6. 해방 전후의 대륙
7. 조국에 돌아와서
나의 소원


<좋았던 장과 절>


*백범 출간사와 인.신 두 아들에게 보내는 글이 인상적이다. 김구선생의 진심이 느껴졌으며 자식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의 유쾌한 어린 시절은 눈을 동그랗고 뜨고 웃음을 참으면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부분은 이 책이 주는 선물이다. 또한 책의 마지막 부분 ‘나의 소원’은 김구선생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인상적이었다. 교과서에서 재미없게 보던 구절이었는데 그때의 느낌과 대비되어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013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 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나는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출판할 것은 꿈도 꾸지 아니하였다. 나는 우리의 완전한 독립국가가 선 뒤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춰지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 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놓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다.


063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의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실행.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판단, 실행, 계속….판단도 중요하지만 99그램의 생각보다는 1그램의 실천이 중요하고, 작심 3일보다는 지속적인 실행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삶의 중요한 철학임을 말해준다. 계속되는 실행….이 말 앞에 언제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066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 세력은 온 나라에 차고 넘쳐 대궐 안까지 침입하여 대신들을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나라를 제2의 왜국으로 만든 것 아니겠는가? 만고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은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충성하는 일사보국 한 가지 일만 남아 있네.”


>지금 시대의 애국은 무엇일까? 거창하게 애국이라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어떻게 인생을 살다가 어떻게 인생을 마감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목숨이라면, 바람처럼 살아지는 삶이라 할지라도 어떤 의미를 남겨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인생은 이런 발자취에 대한 고민만을 하다가 몸부림치는 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30대의 거창한 포부는 현실의 무게와 나의 게으름과 의지의 박약으로 점점 기가 죽어가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을 환상 속에 남겨둔 채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오늘 죽을 것처럼 일하라”


423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오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5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인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427~428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428 그러므로 어는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430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도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70년이 지난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들에 극한 동감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431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431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나도 우리나라가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기원하고 하나 덧붙인다면 행복지수도 가장 높은 나라가 되기를 기원한다.


432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432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처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가진 사람으로 바꾸고 싶다. 나도 가정을 가진 후 진정으로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미소가, 그들의 행복이 나의 삶에 동기부여를 해주는 면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완점>


내가 감히 이 분의 발자국에 보완점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굳이 이야기를 한다면 너무 대의에만 치우친 자서전인데 인간적인 사사로운 감정선을 드나들었다면 더 울림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느끼는 비애를 더 세세하게 전달했다면, 같은 인간으로서 그의 걸음걸이가 더 위대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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