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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10일 21시 24분 등록
완당평전1, 2
: 유홍준 저 / 학고재 / 2002년 2월

 



■ 저자의 목소리: 인용
- ‘[]’ 안의 숫자는 page를 지칭한다.
- ‘인용’에서 별다른 표기가 없을 경우, 저자의 말이다.
- ‘*’ 표시는 간단한 설명과 나의 느낌이다.

1권


서장 저 높고 아득한 산

[11]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16] 정옥자 교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적 활동을 오늘날의 대학문화에 비교하여 문 · 사 · 철(文史哲)을 정공필수로 하고 시 · 서 · 화(詩書畵)를 교양필수로 삼았다고 했는데 추사는 이 모든 분야에서 ‘올 에이(all A)’를 받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었다.(정옥자, ‘조선 후기의 문풍과 진경시’, ‘진경시대’, 돌베개, 1998)

[24] ...... 완옹(阮翁,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基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 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와 미불(米芾)을 따르고 이북해(李北海, 唐의 李邕)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의 신수(神髓)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에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박규수전집’, ‘유요선이 소장한 추사유묵에 부쳐’)

제2장 영광의 북경 60일(24~25세: 1809~1810년)

[61] 특히 박제가의 제자로 조선 500년 역사상 보기 드문 영재(英才) 완당 김정희가 출현하여 연경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 두 경사(經師)를 알게 되고, 여러 명현들과 왕래하여 창조 학문의 핵심을 잡아 귀국하자 조선의 학계는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빠른 진전을 보여 500년 내로 보지 못했던 진전을 보게 되었다.
- 후지츠카 지카시

[61]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일자는 김정희이다.
- 후지츠카 지카시

[87] 담계는 “옛 경전을 즐긴다”고 말했고 운대는 “남이 그렇다고 말해도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지를 않는다”고 하였으니 두 분의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한 것이다.(전집 권6, 다시 소조에게 자제하다)

제3장 학예의 연찬(25~34세: 1810~1819년)

[109] 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에 있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마음에 있네.
옛 것을 고찰하여 현재를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 옹방강

[138] 완당의 학문세계는 자신이 쓴 글의 제목인 ‘실사구시설(實事求是設)’로 요약된다. ......
그러나 실사구시라는 구호는 청나라 고증학을 연 고염무가 주창한 표어로, 그 연원은 완당의 ‘실사구시설’ 첫 문장에 나오듯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나오는 말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완당은 바로 이 명제를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삼았다. 완당이 이 글을 쓴 것은 1816년, 31세 때이다.

[139] “학문하는 방도에는 굳이 한(漢) · 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


[170] 완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분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었다 서출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신 것, 추재 조수삼, 우선 이상적, 역매 오경석 등 역관 출신의 중인들과 깊이 교류한 것,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희원 이한철 등 중인 출신 화가와 도화서 화원들과 어울린 것, 당시로서는 천민이었던 스님들과 인간적으로 교류했던 것 등, 그의 삶과 행동에서 그런 신분적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다. 완당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신념이기도 했다. 그는 ‘인재설(人才設)’이라는 글을 지어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였다.

하늘이 인재를 내리는 데는 애당초 남북(南北)이나 귀천의 차이가 없으나, 누구는 이루고 누구는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전집 권1, 인재설)

제5장 완당 바람(50~55세: 1835~1840년)

[269] ...... 이런 글을 통하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완당이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라는 칭송이 빈말이 아니며, 그가 단지 국제적인 사조에 휩싸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소화하여 체화 · 육화 · 토착화시킨, 진실한 의미의 국제파 학자였다는 사실이다.

[275] ...... 그러면 진정한 변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분명한 개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서 고전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청나라 사람들은 입고출신(入古出新)이라고 했다.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입고출신! 사실 이것은 고증학의 기본정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조선의 연암 박지원이 주창한 법고창신(法古創新)도 같은 맥락이었다.

[284-285] 완당이 이와 같이 동시대 중국의 예술사조와 그 대표적 예술가에 대하여 훤히 알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학문적 · 예술적 정보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는 도록이 있는 것도 전시회가 열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알 수 있었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이 점을 혹자는 완당이 중국을 사모함이 커서 그랬다며 완당을 사대주의 · 모화주의(慕華主義)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맹목적 사대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국제적 시각의 확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사실 정보력은 그 자체가 힘이다. 완당의 정보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느 한 채널을 통해 얻은 편협하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완당이 그런 정통한 정보력으로 청나라 학예계를 파악하고 그들과 동시대적 지평에서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펴나갔다는 것은 바람직한 국제성 · 세계성의 확보였다.
더욱이 완당이 그들을 열심히 좇아 모방하면서 그 현대적 흐름에 동참하는 한편,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성과를 동시에 이루어 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295] 완당은 이처럼 청나라 서예를 받아들이면서 국제거인 지평에서 새로운 서예를 추구해나가며 벗과 제자, 심지어는 선배에게까지 영향을 주며 가히 일파(一派)를 이루어갔다.
이재 권돈인, 자하 신위, 눌인 조광진, 우봉 조희룡, 황산 김유근, 초의스님 등이 중년부터 그와 일파를 이룬 서화가들이었다. 이것이 날이 갈수록 그 세를 확대하여 곧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게 되고 그 바람은 가히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이 되었다. 완당의 주위에는 어느새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304-313] ‘예림갑을록’: 묵진 8인, ‘예림갑을록’: 화루 8인
* 제자들에 대한 김정희의 가르침. 간결하고 명쾌하며 핵심을 찌른다.

[312] 하나하나 가져다 읽어보니 말씀은 간결하나 뜻이 원대하여 경계하고 가르치심이 지성스럽다.
얻은 자로 하여금 부르르 떨며 정진하게 하고 읽은 자로 하여금 두려워 고치게 하는 것이 있다. 근원과 끝을 연구해 풀어내고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리어 바로잡으셨으니 모든 그 잘못된 길을 벗어나 바른 문을 두드리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비유하면 팔공덕수(八功德水, 달고 차고 맑고 가볍고 깨끗하고 냄새 없고 색이 없고 마셔도 탈 없는 물)에 대중이 목욕하여 다 함께 청정함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우리 선생님께서 내려주심이 너무 많지 않은가.
- 고람(古藍) 전기(田琦)

[317-318] 난초그림의 뛰어난 화품(畵品)이란 형사(形似)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화법만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다.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전집 권6, 석파 난권에 쓰다)

제6장 제주도 유배시절(상)(55~59세: 1840~1844년)

[379]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배형이 갖는 미덕은 결과적으로 학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은 18년의 유배생활이 낳은 결과였고 원교 이광사의 글씨도 22년 유배의 산물이었듯이, 완당은 제주도 유배생활 9년간 자신의 학문과 예술 모두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395]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시을 알게 된다.”
- 공자(孔子)
* 어려워지면 사람이 보인다. 나를 알고 사랑해주는 진심을 갖은 사람이 보인다.


2권


제7장 제주도 유배시절(하)(59~63세: 1844~1848년)

[435]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造化, 자연)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완당 제하다.
* 유재(留齋)에 대한 풀이글이다.

[443-444] 지 · 필 · 묵 · 벼루를 이렇게 따지고 고르다가 어떻게 완당이 붓 한 번 대볼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완당 자신은 글씨를 쓰는 데서 이 모든 것이 생활화 · 체질화되어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징그럽고, 어찌 생각하면 그랬기 때문에 남이 하지 못한 무언가를 이룩했고, 당대의 최고, 나아가 국제무대에서도 최고, 역사 속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역시 최고를 이룩한 몸동작 하나라도 무언가 달랐던 것이다.
완당이 이렇게 지 · 필 · 묵에 까다로웠던 데는 확고한 예술철학이 있었다. 그는 생동하는 글씨를 위한 아홉 가지 조건을 하나의 계율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첫째는 생필(生筆)이니, 토호(兎毫)가 둥글고 건강해야 하며, 반드시 쓰고 나면 거두어 넣어두고 쓸 때를 기다려야 한다.
둘째는 생지(生紙)이니, 새로 협사(篋笥)에서 꺼내야 펴지고 윤기가 나서 먹을 잘 받는다.
셋째는 생연(生硯)이니, 벼루의 먹을 다 쓰고 나면 씻어 말려 젖거나 붇지 않게 해야 한다.
넷째는 생수(生水)이니, 새로 맑은 샘물을 길어와야 한다.
다섯째는 생묵(生墨)이니, 쓸 때마다 갈아 써야 한다.
여섯째는 생수(生手)이니, 공부를 중간에 쉬어서는 안 되고 항상 근맥(筋脈)을 놀려 움직여야 한다.
일곱째는 생신(生神)이니, 마음이 화평하고 거슬림이 없어야 하며 신(神)은 편안하고 일은 한가해야 한다.
여덟째는 생목(生目)이니, 자고 쉬고 각 일어나서 눈은 밝고 몸은 고요해야 한다.
아홉째는 생경(生景)이니, 때는 화창하고 기운은 윤택하며 궤(?)는 조촐하고 창은 밝아야 한다.(전집 권7, 잡저, 김석준에게 써서 보여주다)

[454] 이런 자세로 고전 중의 고전을 무수히 임모하면서 완당은 마침내 추사체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한나라 때 예서를 집대성한 ‘한예자원(漢隸字源)’에 수록된 309개의 비문 글씨를 임모하고 또 임모하고 해서 팔뚝 아래 다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 꾸준한 노력과 참을성을 완당은 이렇게 이렇게 말했다.

팔뚝 아래 309비를 갖추다.
腕下三百九碑

[454-455] 완당은 그런 정신과 자세로 고전을 익혔다. 그래서 훗날 완당은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33신)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464] ... 완당의 임서(臨書)는 옛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필법으로 쓴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이론적 근거는 옹방강 · 완원을 위시한 중국인들에게서 얻은 것이나 작가로서의 발전은 그의 천품(天品)과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 청명 임창순의 ‘한국 서예사에 있어서 추사의 위치’ 중에서

[465] 전통적인 글씨가 의관을 단정히 차린 도학군자(道學君子)와 같다면 완당의 글씨는 예절과 형식을 무시한 장난꾼처럼 보였을 것이다. 곧 그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그대로 붓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작자의 개성이 살아 있고 붓을 잡았을 때의 작자의 감정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점과 획의 운용이 강철 같은 힘을 가졌고, 공간 포치에 대한 구상은 모두 다 평범을 초월한 창의력이 넘친다. 그대로 현대화와 공통되는 조형미를 갖추었으니 이는 과거의 어느 작가도 시도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지이다.

[465-466] 청조의 학문이 수입된 이후 박제가 · 신위 같은 사람이 일으키지 못한 서법의 혁신을 완당은 어떻게 대담한 시도로 성공하기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첫째, 앞 사람들에 비하여 완당은 보다 더 풍부한 자료와 그 원류에 대한 깊은 연구를 쌓은 동시에 끊임없는 임모에서 배태된 것이나 곧 서학(書學)의 길을 터득해가지고 거기에 그의 천부적 창의력이 합해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다음으로 또 중요한 것은 그의 사회적 불우이다. 그의 새로운 스타일의 서체는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완성되었다.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며 험준하면서도 일변 해학적인 면을 갖춘 그의 서체는 험난했던 그의 생애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조정에 들어가서 높은 지위를 지키며 부귀와 안일 속에서 태평한 세월을 보냈다면 글씨의 변화가 생겼다 할지라도 꼭 이런 형태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청명 임창순의 ‘한국 서예사에 있어서 추사의 위치’ 중에서

[466-467] 많이 썼을 거예요. 아마도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고 쓰고...... 그 실력과 그 학식에 그렇게 써댔으니 일가를 이루지 않고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데 완당이 제주 유배지에서만 그렇게 썼냐 하면 그렇지가 않았죠. 아시다시피 평소에도 좀 많이 썼습니까. 또 글씨 주문은 좀 많았습니까.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왕이건 친구건 제자건 관리건 주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별로 문제 되지 않았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는 계기가 추사체의 비밀이겠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고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3의 계기를 차단해버린 셈이죠. 즉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괴이한 개성이 나온거 아니겠어요.
- 동주 이용희

[472] 문체(文體)의 종류는 열세 가지인데 그 문이 되는 것은 여덟 가지로, 이른바 신(新) · 이(理) · 기(氣) · 미(味) · 격(格) · 율(律) · 성(聲) · 색(色) · 이다. 신 · 이 · 기 · 미는 문의 정(精)의요, 격 · 율 · 성 · 색은 문의 추(粗)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 추를 놓아버리면 정이란 것을 어디에 부치리요.
배우는 자가 옛사람에 대하여 반드시 처음에는 그 추를 만나고 중간에는 그 정을 만나고 마지막에는 그 정한 것만을 쓰며 그 추한 것은 버려야 하는 법이다. 지금 그 추를 만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 정을 만나서 그 정을 쓰며 그 추를 버리는 데 이를 수 있겠는가.(전집 권8, 잡지)

[473] 완당의 인생과 예술은 이렇게 농익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관조하면서 사물의 존재방식을 관찰함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것은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면서 자기를 찾아내는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것은 분명 제주의 유배생활이 안겨준 완당의 변화였다. 아픔과 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에, 아니면 그것을 극복하며 구도자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486] 완당은 이런 아들 상우에게 난초를 쳐 보이고서는 이렇게 화제를 썼다.

난초를 그릴 때는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마음속에 부끄럼이 없게 된 뒤에 남에게 보여줄 만하다. 열 개의 눈이 보고 열 개의 손이 지적하는 것과 같으니 마음은 두렵도다. 이 작은 기예도 반드시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비로소 시작의 기본을 얻게 될 것이다. 아들 상우에게 써 보인다.

제8장 강상(江上)시절(64~66세: 1849~1851년)

[527] 완당의 일생은 보통 다섯 단계로 나뉘어 이야기되고 있다.
1.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2.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3. 관직에 나아가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4. 55세부터 63세부터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5.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간의 만년기(晩年期)

[579] 서법에 충실하면서도 또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다.

제10장 과천 시절(67세~71세: 1852년~1856년)

[681] 일독 이호색 삼음주(一讀 二好色 三飮酒)
첫째는 독서(공부), 둘째는 여자(섹스), 셋째는 술.

[682-683] 평생을 버티고 있던 힘이
한 번의 잘못을 이기지 못했네.
세상살이 삼십 년에
공부한다는 것이 복임을 바로 알았네.

[710] 이제 완당은 더 이상 개성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시비를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 평범성 · 보편성과 관용의 그릇 속에 그 뜨거웠던 학문적 · 예술적 열정을 원숙하게 익히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귀양살이 10년이 그에게 선물한 더 없이 값진 가르침이었다.

[711] 그러나 완당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관용의 미덕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열정과 관용은 선택이 아니라 불 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여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완당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낱 기(奇)와 괴(怪)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모르고 취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는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완당은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이제 과천시절 그의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712]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

[715] 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천희해(遊天戱海)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

[727] 다시 정리하여 동양 서예사의 대맥에서 말한다면, 남북조 시대에는 왕희지 · 왕헌지가 있고, 당나라에는 구양순 · 저수량이 있고, 송나라에는 소동파 · 미불이 있고, 원나라에 조맹부가 있고 명나라에 동기창이 있다면 청나라 시대에는 완당 김정희가 있는 것이다.



■ 저자와 나의 대화: 소고


■ 나의 목소리: 저자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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