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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6일 11시 37분 등록

2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파블로 네루다>

ü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 탐독했다.

ü  네루다는 매일 두 편 이상의 시를 쓰며 지냈고

ü  네루다에게 시는 민중과 소통의 통로였고,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민중시인이라는 별칭은 네루다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상이 되었다.

 

<본문 전>

ü  이 책에 수록된 회고랄까 추억은 듬성듬성하다. 간혹 잊어버린 일도 있다. 바로 그런 게 인생이다. 우리는 듬성듬성 꿈을 꾸기 때문에 힘든 삶을 견뎌 낸다. … 내 인생은 시인의 여러 경험으로 이루어진 삶이다.

 

<1: 시골 소년>

ü  칠레의 숲: 칠레의 숲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 (16).

ü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17).

ü  아마도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25).

ü  야생초 향기를 풍기는 이런 역 이름을 발음해 보고 맛깔스러운 음절에 매료되었다. 이런 아라우카 이름은 항상 감미로운 사물을 의미했다 (28).

ü  울창한 산림과 끝없는 해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 영혼, 바꿔 말해서 내 시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땅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33).

ü  아주 오래 전 어릴 적 일이다. 글을 배운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인데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올라 몇 자 적었다. 운율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일상 언어와는 다른 것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 아무튼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깊은 불안, 일종의 고뇌와 슬픔에 사로잡혔다 (36).

ü  아버지는 건성으로 받아 들고 대충 훑어본 후에 되돌려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어디서 베꼈니?”… 내 기억으로 첫 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 때 처음으로 무책임한 문학 비평의 쓴맛을 보았다 (36).

ü  내 독서열은 밤이나 낮이나 식을 줄 몰랐다 (37).

ü  미스트랄은 세계 문학에서 러시아 소설만큼 뛰어난 작품도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러시아 소설가들의 암울하고 섬뜩한 비전을 접하게 되었고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의 작품을 애독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작가들을 좋아한다 (37).

ü  세 자매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요리 솜씨였다. 그 여자들에게 식탁이란 신성한 문화유산의 보존이었다. 세월이 가로막고 거대한 바다가 가로막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프랑스 문화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43).

ü  이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개인 신상 기록 카드도 보관하고 있었다. 이 카드에는 방문한 날짜와 제공한 메뉴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메뉴를 보관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다시 우리 집에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똑 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으려는 거예요 (43).

 

<2장 도시의 방랑자>

ü  수줍음이란 마음의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겹의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 (56).

ü  내성적인 내 성격은 필요 이상으로 오래 지속되었다. … 사람들이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수록 쉽게 우정을 맺을 수 있었다 (57).

ü  그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시인들과 화가들은 너나없이 파리를 동경하고 있었다 (58).

ü  광기와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66).

ü  나라는 사람은 너무나 단순하다. 이것이 내 장점이자 약점이다. … 아무튼 나는 누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72).

ü  우리 시인들은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며 산다. 부자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며 사업 수단도 뛰어난데 다만 이런 천재성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이다 (73).

ü  매일 시를 두 편 이상 썼다. 오후에 해가 질 때면 우리 집 발코니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칠 수 없는 장관이 펼쳐졌다. 색깔과 빛이 중첩되어 주황색과 붉은 색의 부채처럼 펼쳐지는 노을이었다. … 이 첫 시집이 바로 1923년에 출판된 <황혼일기>이다 (77).

ü  첫 시집에 실린 작품 가운데 한 편이 저 미숙한 책을 박차고 나와 홀로 자신의 길을 가는 것 같다. 이 시가 바로 <작별>이다. 지금도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이 시를 외우고 있다 (78).

ü  창작이란 부단한 연찬을 통해 비록 참신성과 자발성은 떨어질지언정,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바퀴와 같은 것이다 (78).

ü  나는 별을 보고 도취했다. 우주적, 천상적 도취였다. 그 즉시 책상으로 달려가 정신없이 써 내려갔다. 마치 누군가 불러 주는 말을 받아 적는 것 같았다 (79).

ü  영감을 믿지 말아야 했다. 이성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은 좁은 길로 나아가야 했다. 겸손을 배워야 했다. 찢어 버린 원고도 많았고 다시 써야 하는 원고도 많았다. 이 원고는 10년 후에야 비로소 책으로 출판되었다 (80).

ü  번뜩이는 우수에도 불구하고 실존의 기쁨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내가 아끼는 시집이기도 하다 (80).

ü  한편 칠레는 변하고 있었다. … 프티부르주아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역동적이고 선동적인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 그러나 그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좌에 앉자마자 라틴아메리카의 전형적인 통치자로 변하고 말았다. … 이와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지도자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고, 중앙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전국에 9~10개의 노동자 신문을 창간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82).

ü  레카바렌은 칠레 노동 운동 지도자이자 공산당 창설자로 20세기 칠레 정치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82).

ü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83).

ü  : 나는 말을 사랑하고 말에 집착하고 말을 추적하고 말을 물어뜯고 말을 용해시킵니다. 그토록 말을 사랑합니다. … 말을 분쇄합니다. 말을 치장합니다. 말을 해방시킵니다. … 아주 오래된 말도 있고 최신식 말도 있습니다. … 우리는 패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자였습니다. 저들은 황금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황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갔지만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우리들에게 말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85).

 

<3: 세계의 길>

ü  나는 대학생 백일장 대회 1등상을 수상하고, 인기 있는 시집을 발간하고, 저 유명한 망토를 걸치고 다녔기 대문에 문단 안팍으로 약간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20년대 칠레의 문화계는 몇몇 용기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유럽에 의존하고 있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에 젖어든 엘리트들이 아메리카 대륙 각국에서 활개를 쳤고, 과두 지배 계급 출신의 작가들은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100).

ü  1989년 버마는 국명을 미얀마로 바꾸고, 수도 명칭도 랑군에서 양곤으로 개칭했다. 2005년에는 수도를 내륙 지방 핀마나로 이전하였다 (102).

ü  당시 스페인은 프리모 데 리베라에게 독재 정치의 첫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이후 독재 정치라는 과목을 섭렵하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내 시집 <지상의 거처> 첫 부분에 실린 시를 이해하기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105).

ü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1870~1930): 1923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1930년까지 통치한 스페인 독재자. 아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1933년 스페인 팔랑헤 당을 창설했다 (105).

ü  남아메리카의 촌동네 출신의 보헤미안들이 알고 있는 파리, 프랑스, 유럽이란 몽파르나스, 라로통드, 르돔, 라쿠폴을 잇는 200미터 남짓한 거리와 서너 곳의 카페가 전부였다. 남아메리카 출신 가운데는 아르헨티나인들이 수도 가장 많았고 싸움도 자주 했으며 돈도 제일 많았다 (106).

ü  알바로: 이것저것 모르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에다 왕성한 탐구심과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이기에 뉴욕 아니면 갈 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때가 1925년이었다. … 끊임없이 제임스 조이스를 강의하던 알바로, … 알바로의 관점은 자기만의 영역에 살면서 음악, 회화, 서적, 무용을 관람하러 다니는 대도시인의 시각이었다. … 이런 알바로는 우리가 보기에는 모든 시골 사람들이 꿈에 그리는 도회적인 인물, 시골티를 완전히 탈피하고 해외여행, 공연장, 새벽까지 문을 여는 카페, 눈 덮인 대학교 교정이 생활화된 도회적인 인물이었다. 알바로는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내 꿈은 식물처럼 사는 것이다. 한곳에 눌러앉아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한다. 그래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기에… (118).

 

<4: 빛나는 고독>

ü  새로운 노래가 총부리에 쫓길 때, 봄베이 변두리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밤마다 도로 옆에서 잠을 잔다. 그렇게 자고 태어나고 죽는다. 집도 빵도 약도 없다. 문명국이라고 자부하는 영국이 식민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식민지 신민들에게 학교, 공장, 주택, 병원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오직 감옥과 빈 위스키 병만 산더미처럼 남겨 놓고 떠난 것이다 (124).

ü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127).

ü  오늘은 영광스러운 날이다. 우리는 인도 국민회의파 (1885년에 결성된 인도의 다수파 정당) 집회에 참석했다. 인도 전역에서 해방 투쟁의 기운이 드높아지고 있었다. … 나는 간디를 만났다. 판디트 모틸랄 네루도 만났다. 네루 또한 해방 운동 지도자이다. 그리고 네루의 아들 자와할랄 네루도 만났다 (127).

ü  네루는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는 반면 간디는 독립의 예비 단계로서 단순한 자치를 주장한다. 간디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잇지만 여우처럼 영리한 사람으로 실천적인 인물이다. 과거 라틴아메리카의 키리오요 지도자들과 유사한 정치인이며 쉴 새 없이 각종 위원회를 진두지휘하는 탁월한 전술가이다. … 간디는 지칠 줄 모르는 성자인 반면 네루는 혁명을 주장하는 학자다 (128).

ü  내 시에 대한 평론을 몇 편 읽어 보니 동양 생활이 시 작품에, 특히 <지상의 거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고 있다. 사실 그 시절에 쓴 시는 <지상의 거처>에 수록된 작품이 전부다. 아무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동양 생활이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는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다 (131).

ü  실제 동양에 가 보면 흔히 말하는 동양의 신비주의란 서구인이 직면한 불안, 노이로제, 혼란, 기회주의의 부산물임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발생한 부산물인 것이다. 그 무렵 인도 사람들은 단전호흡이나 하며 명상에 잠길 만한 여유가 없었다 (131).

ü  명상 센터는 미국인과 라틴 아메리카인을 포함하여 대부분 서구 출신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싸구려 형이상학으로 포장한 이국적인 부적과 주물을 도매금으로 팔아넘김으로써 값싼 시장을 착취했다. 이런 사람들은 입만 열면 다르마와 요가를 들먹였으며,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종교 수련에 열을 올렸다 (131).

ü  이런 이유로 동양은 불행에 시달리는 거대한 인간 가족처럼 느껴져서 내 양심상 동양의 신이나 의식에만 몰두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창작한 시는 폭력적이고 낯선 세계에 이식된 이방인의 고독을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131).

ü  영국인들도 고유의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규모 가게 종업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전문직 종사자, 지식인, 수출업자를 거쳐 맨 꼭대기에는 대영제국의 귀족 문관과 은행가들이 앉아 있었다 (134).

ü  그러나 이런 배척 때문에 나는 오히려 행복했다. 저 편견에 사로잡힌 유럽인들은 별다를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잠시 들렀다 가는 식민지 관리와 함께 살려고 동양에 온 것이 아니라 그 세계의 오랜 정신을 경험하고 불행한 인간 가족과 함께 살려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134~5).

ü  내 사생활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상냥하던 조시 블리스는 점점 생각이 많아지고 격정적으로 변해 가더니 나중에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나는 그녀 곁에 영원히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맨발과 검은 머리에 꽂은 하얀 꽃을 애틋하게 사랑했다 (135).

ü  표범 같은 조시 블리스를 버마에 버렸다는 게 무척이나 가슴 아팠다. 배가 벵골 만의 파도를 가르고 출발하자마자 나는 <홀아비의 탱고>라는 시를 썼다. 핏속에서 쉼 없이 분노의 화산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잃어버린 여인, 아니 내가 잃어버린 여인에게 바치는 비극적인 시였다. 그날 밤은 왜 그리도 광막하게 보였으며 대지는 왜 그리도 외로워 보였던가! (136).

ü  아편: 아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아편을 경험하고 그 맛을 알 필요가 있었다. 나는 수없이 아편을 피워 댔고, 마침내 그 맛을 알게 되었다. 아편은 몽환도 환영도 발작도 일으키지 않았다. 은근하게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 어떤 움직임이나 소리도 한데 어우러져 느긋한 쾌감을 안겨 주었다. … 아편은 뜬소문처럼 이국 취향에 함몰된 사람들이 향유하는 천국이 아니었다. 착취 당하는 사람들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아편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참한 사람들이었다. … 아편굴은 파탄으로 가는 지름길이 확실했다. 거부와 식민지 지배자들의 아편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결국 식민지 피지배자들이었다. … 침묵과 무기력이 어두컴컴한 실내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른하게 누워 잠시나마 불행을 잊고 피곤을 떨쳐 버리려는 것이다. 몽롱한 침묵은 아편굴이라는 물웅덩이에 가라앉은 부서진 꿈의 침전물이다. … 그 이후 다시는 아편굴을 찾지 않았다. 이제 아편이 뭔지 알았으니까. 나는 연기 속에서 아른거리는 그 무엇을, 손에 쥘 수 없는 그 무엇을 만져 보았다 (138).

ü  실론. 전 세계 큰 섬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1929년경 그 섬은 인도나 버마와 동일한 식민지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자기들만의 구역과 클럽으로 성을 쌓고 살았다 (139).

ü  매일 저녁 턱시도를 차려 입는 영국인들과 내가 범접할 수도 없는 광대한 세계를 형성한 힌두교도 사이에서 나의 선택지는 고독뿐이었기에 그 시절이 일생에서 가장 외로운 때였다. 그러나 나는 그 때를 가장 빛나던 시기로 기억한다. 마치 어마어마하게 밝은 번갯불이 창문 밖에 머물면서 내 운명의 안팎을 속속들이 비춰주는 것 같았다 (139).

ü  이런 바다의 보물을 살육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에서 잡아 올린 생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토막으로 팔았다. 바다 깊은 곳에 사는 신성한 동물을 살육자의 칼로 토막 내서 피묻은 상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139).

ü  며칠 전 누이가 공책 한 권을 갖다 주었다. 이 공책에는 오래 전에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쓴 시가 적혀 있었다. 그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청소년기의 우울을 보고 다시 말해서 내 젊은 시절의 모든 작품들에서 발산하는 문학적 고독을 보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141~2).

ü  웰라와타에서 살던 그 시절에 나는 진정한 고독을 알게 되었다. … 내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식탁 하나와 의자 둘, 일과 개와 몽구스 그리고 낮에는 집안 일을 해주고 밤이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던 소년이 전부였다 (142).

ü  이런 고독은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고독이 아니라 감옥의 벽처럼 단단한 고독이었다. 아무리 벽에 머리를 박고, 아무리 고함을 치고, 아무리 울어도 달려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142).

ü  목소리에 흘리고 북소리에 취한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왔다.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흥에 젖어 대지에서 분출하는 신비한 리듬에 취한 채 길을 걸었다. … 정장 차림의 영국인들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는 도중에 음악을 듣느라 늦었습니다.” 실론에서 25년을 지낸 그 사람들은 점잖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음악이라니요? 원주민들에게도 음악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이러한 분리는 비인간적인 고립을 의미하며 아시아인들의 삶과 가치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를 의미한다 (143).

ü  식민 지배자들은 싱할리족 농민의 오두막집에 불을 지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 오두막을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은 영국인 관리는 도덕심을 갖춘 사람으로, 이름은 레너드 울프였다. 울프는 소각 명령을 거부하여 해임되었다. 영국으로 돌아간 울프는 <정글 마을>을 저술했다. … 진정한 동양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문학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는 책인데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주관적 소설가인 그의 아내 버지니아 울프의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144).

ü  시집 <지상의 거처>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무지 작업 속도가 붙지 않았다. 내 세계 칠레는 소식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주변의 낯선 세계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도 없었으므로. 이처럼 허공에 뜬 내 삶의 이야기가 이 시집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표현되어 있다 (149).

ü  아무튼 내 문체는 한결 정제되었고, 반복되는 광적인 우수를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 문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대기가 스며들지 않은 시는 죽은 시다.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 (149).

ü  시적 리얼리즘의 거장 프루스트는 그가 사랑하고 또 증오한 빈사 상태의 사회를 비판적을 묘사한 이 소설에서 수많은 예술품, 그림, 성당, 여배우, 책을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이처럼 소설 곳곳에서 프루스트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고 있지만 유독 뱅퇴이유 소나타의 매력만큼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하며, 그 때마다 다른 묘사에서는 볼 수 없는 강렬한 문장을 구사했다. 프루스트의 글은 내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오래 전에 망실한 감정을 되살려 주었다 (150).

ü  매일 밤 나는 소나타를 들으며 살았다. 나를 휘감는 그 소나타의 영원한 슬픔, 그 장려한 우수에 몸을 내맡겼다 (151).

ü  지금까지 내 시를 파헤친 비평가들은 방금 고백한 영향을 밝혀내지 못했는데, 이는 <지상의 거처> 대부분을 웰라와타에서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는 기체 같고 향기로운시가 아니라 서러운 지상의 시이지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복이라는 테마는 내가 즐겨 듣던 프랑크 음악의 수사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51).

ü  크루지 역시 바타비아에서 진짜 하려는 일이 무언지 털어놓았다. 유럽 여자들을 권세 있는 아시아인들의 침실에 들여보내 주는 국제적인 조직이 있었다. 그녀는 마하라자, 즉 샴 왕국의 왕자와 돈 많은 중국인 무역상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젋지만 점잖은 중국인을 선택했다고 한다 (157).

ü  나 또한 인간의 신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근엄한 중국인 무역상은 마치 나비를 채집하듯이 여자 속옷을 수집한 것이다.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159).

ü  중국인들을 음식의 3대 요소로 맛, 향기, 색깔을 꼽는다 (164).

ü  비티비아에서 새로 얻은 집은 프로볼링고 거리에 있었다. … 이곳에서 나는 <지상의 거처>를 탈고했다. 외로움은 점점 깊어만 갔다. 결혼을 하고 싶었다 (166).

 

<5. 가슴 속의 스페인>

ü  1932년 두 달에 걸친 여행 끝에 다시 칠레로 돌아왔다. 칠레에서 원고 더미 속에 묻혀 있던 <열광적인 투척병>과 동양에서 집필한 <지상의 거처>를 출판했다. 193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임명을 받고 그해 8월에 부임했다 (169).

ü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영사로는 얼마 근무하지 않았다. 1934년 초에 바르셀로나 영사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177).

ü  당연하지만 스페인 시인들과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은 서로 차이가 있었다. 이런 차이는 항상 자부심이나 상대방에 대한 오해를 수반한다. 내 세대의 스페인 시인들은 라틴아메리카 시인들보다 우의도 좋고 단결력도 강하고 쾌활했다. 이와 동시에 우리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이 더 세계적이고, 다른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178).

ü  각광받는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 이 사람을 보고 그 유명한 스페인의 시기김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실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다른 사람을 시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암울한 20세기 초에 그의 시집은 찬란한 빛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둔자 행세를 하고 살면서 자기 명성을 가린다 싶으면 닥치는 대로 비난을 퍼부었다 (182~3).

ü  후안 라몬 히메네스 (1881~1958):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스페인 시인. 1914년에 출판된 시집 <플라테로와 나>로 문명을 얻었다 (182).

ü  일간지 <엘솔> 일요일판에서는 밴댕이 속 같은 평론을 기고하여 매주 나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 따위 일에 상관하지 않고 살기로 마음 먹었다. 한마디도 응수하지 않았다. 공격적인 비평에는 절대 대응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런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183).

ü  그 무렵 우리들은 마침표가 없는 글을 썼으며, 제임스 조이스 작품을 읽고 더블린의 모습을 상상했다. … 아무튼 우리가 발행한 잡지 <카바요 데 바스토스>는 당대를 뒤흔들었다 (184).

ü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1936 7 19일 밤에 시작된 셈이다. … 그런데 로르카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86).

ü  나는 로르카 작품의 메타포가 가지는 힘에 매혹되었으며 그가 쓴 모든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187).

ü  시란 정태적인 물건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시를 창작한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시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로 형성됩니다 (188).

ü  스페인은 항상 검투사들의 경기장이었고 무수한 피가 뿌려진 땅이었다. 잔혹하게 희생물을 죽이는 장면을 우아하고 화려하게 포장한 투우장에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어둠과 빛 사이의 필사적인 투쟁이 반복되고 있다 (190).

ü  시간이 흘러갔다. 우리는 전쟁에서 지고 있었다.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 편에 섰다. 로르카는 이미 그라나다에서 피살당했다. 에르난데스의 시는 저항시로 변모했다. … 이곳에서 우여곡절 끝에 내 시집 <가슴 속의 스페인>이 출판되었다 (191).

ü  제지술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이상야릇한 재료로 만들었는데도 그지없이 아름다운 종이가 탄생했다. 이 시집이 아직도 몇 권 남아 있는데, 기묘하게 만든 종이와 인쇄술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91).

ü  내 영사 생활도 끝이 났다. 칠레 정부는 공화군 편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나를 해임했다 (192).

ü  파리에 도착했다. … 그 광장에 프랑스 작가 알레흐 카르펜티에르가 살고 있었다. 내 생전 그렇게 중립적인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자기 견해를 밣히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굶주린 늑대처럼 파리로 달려드는 나치에 대해서도 아무런 견해가 없었다 (193).

ü  프랑스에서는 운이 좋았다. 프랑스 문학의 두 거장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과 오랫동안 절친하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두 사람은 확고한 역사 의식으로 양심의 편에 선 사람들이었다 (193).

ü  시인들이 앙케트 조사에 솔직하게 대답한다면 금방 비밀이 들통 날 것이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비밀 말이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데도 각자 나름의 방식이 있다 (193).

ü  낸시 큐나드와 함께 시 전문 잡지를 발행하기로 합의했다. “세계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지지한다라는 잡지 제목은 내가 정했다 (194).

ü  지성사에서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 사건도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흘린 피는 한 시대의 시를 요동치게 만든 자기장 같았다 (195).

ü  그 무렵 스페인 내전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고, 세계 대전이라는 새로운 비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은 그 규모와 잔혹성, 그리고 영웅적인 투쟁 면에서는 비교할 데가 없으나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유럽을 떠나 조국 칠레로 돌아가야 했다 (195).

ü  낸시도 반격했다. 어머니가 상속권을 박탈한 그해 12, 영국 귀족들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빨간색 표지에 흑인 남자와 백인 귀족 처녀라는 제목이 붙은 소책자를 받았다. 나는 이보다 더 신랄한 글을 본 적이 없다. 그 중 몇 구절은 스위프트 글만큼이나 통렬했다. 흑인을 옹호하는 낸시의 주장은 큐나드 부인과 영국 사회의 뒤통수를 내리친 격이었다 (196).

ü  백인 귀부인인 당신이나 당신 가족이 훨씬 힘이 강한 부족에게 납치되어 구타당하고, 쇠사슬에 묶여 영국에서 먼 이국땅으로 노예로 팔려가서 열등한 인간으로 조롱당하고 채찍을 맞으며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당신 인종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흑인들은 이보다 더한 폭력과 잔혹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에 걸친 이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은 가장 훌륭하고 늠름한 운동선수가 되었으며 다른 어떤 음악보다 더 보편적인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백인들은 그와 같은 고초를 당하고도 이렇게 우뚝 일어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 이제 누가 더 훌륭합니까? (196~7).”

ü  낸시는 그 뒤 다시는 영국에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낸시는 박해당하는 흑인의 대의를 온몸으로 껴안았다 (197).

ü  내 친구 낸시 큐나드는 1969년 파리에서 죽었다. … 임종시 그녀의 몸무게는 35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다. 해골이나 다름 없었다. 자기 몸을 갉아먹으며 이 세계의 불의와 오랜 투쟁을 벌여 온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갈수록 깊어지는 외로움과 돌봐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죽음뿐이었다 (197).

ü  스페인 내전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찌만, 스페인 민중들의 저항 정신은 전 세계는 감동했다. 이미 국제의용군이 스페인에서 싸우고 있었다. 1936년 마드리드에 있을 때 군복을 입고 도착한 국제의용군을 보았다. 나이나 머리 색깔이나 피부색도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대의를 위해 한데 모인 것이다 (198).

ü  1937년 파리에 머물던 우리의 과제는 세계 반파시즘 작가 대회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이 대회는 마드리드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내가 아라공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이 일을 하면서부터였다. 아라공의 놀라운 조직력과 업무 처리 능력을 보고 처음부터 감탄을 금치 못했다 (198).

ü  아라공이 진정으로 특출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인식하게 되었다 (198).

ü  반파시즘 작가 대회는 현실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소중한 답장이 도착했다. 한 통은 아일랜드 민족시인 예이츠의 답신이었고, 또 한 통은 위대한 스웨덴 여성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의 답신이었다. 이 두 사람은 너무 고령이어서 사방으로 포위된 채 끊임없이 공습을 당하고 있는 마드리드까지 여행하기에는 무리였지만 스페인 공화국을 끝까지 옹호했다 (199).

ü  많은 사람들에게 스페인은 수수께끼였고, 그 시대 역사의 본질을 드러낸 나라였다 (202).

ü  가면과 전쟁: 우리 집은 양 진영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무어인들과 이탈리아군이 진격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마드리드를 방어하는 세력이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다. … 하지만 소장하고 있던 가면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 동양에서 가져온 유일한 기념품이었는데신화로 채색한 나무 조각이었는데아메리카 태생의 나에게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꿈, 관습, 악마, 신비를 보여 주던 찬란한 신화의 산물이었는데…. 우리 집에 있던 서른 개의 아시아 가면, 다시 말해서 아시아 신들은 죽음의 춤이라는 마지막 춤을 추며 승천했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휴전 기간이었다. 전세는 이미 몇 번이나 뒤바뀌었다. … 그리고 포격으로 날아가 버린 창문을 통해서, 그 낯선 창문을 통해서 대학 캠퍼스 저 너머로 펼쳐진 평지와 고성을 바라보았다. 스페인이 텅 빈 것 같았다. 내가 초대한 마지막 손님들이 영원히 떠나 버린 것 같았다. 가면이야 있건 없건 군가를 부르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사이에 황홀한 기쁨, 믿기 어려운 방어, 죽음, , 이 모든 것들이 내게는 이미 끝난 일이었다. 잔치가 끝나고 정적만이 내려 앉아 있었다. 마지막 잔치가 끝난 뒤사라진 가면과 더불어, 방바닥에 나뒹굴던 가면과 더불어, 우리 집에 무단 침입한 저 병사들과 더불어, 내가 사랑하던 스페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205~6).

 

<6: 쓰러진 사람들을 찾아서>

ü  나중에 칠레로 돌아와서 공식적으로 입당한 후에야 당원 증명서를 발급받았으나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나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207).

ü  이념적 혼란과 무분별한 파괴를 목격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9).

ü  이 같은 무리들이 마드리드 밤거리에서 준동하고 있을 때 오로지 공산주의자들만이 세력을 조직하고 군대를 창설하여 이탈리아인들, 독일인들, 무어인들, 팔랑헤 당원들과 대적하였다.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은 반파시즘 투쟁과 저항을 지탱해 주는 정신적 힘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209).

ü  시는 언제나 평화적인 행위이다. 밀가루가 있어야 빵을 만들 수 있듯이, 평화가 있어야 시인도 있다. 불장난을 좋아하고 전쟁을 즐기는 승냥이 같은 인간들은 시인을 태워 죽이고 찔러 죽이고 물어뜯어 죽인다. … 바이런은 그리스에서 반전투쟁을 벌이다 죽었다. 스페인 파시스트들은 위대한 시인 로르카를 살해함으로써 내전을 개시했다. … 그러나 시는 죽지 않았다. … 시를 괴롭히고 길거리로 끌고 다니고 침을 뱉고 조롱거리로 만들고 목 졸라 죽이려 들고 추방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총알을 난사해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갓 씻은 해맑은 얼굴을 보이고 갓찧은 쌀알 같은 웃음을 짓는다 (210).

ü  유용한 공공재로서 시는 힘, 애정, 기쁨, 진정한 본질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갖지 못한 시는 소리야 나겠지만 노래하지는 못한다. 알베르티 시는 항상 노래한다 (212).

ü  다시 삼등칸을 타고 조국 칠레로 돌아왔다. … 나치스 돌격대원 복장을 하고 팔을 높이 쳐들어 파시스트처럼 경례를 하는 소규모 집단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 칠레, 브라질, 멕시코의 특정 지역에 가면 독일계 후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회 영역은 혜성같이 출현한 히틀러와 독일 천년왕국 신화에 쉽게 현혹되었다. … <칠레의 여명>이라는 잡지의 편집자로 일할 때는 문학적 무기 (다른 무기는 없었다)를 총동원하여 이 나라 저 나라를 집어삼키고 있는 나치를 겨냥했다 (213).

ü  창작에 전력투구하기로 다짐했다.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덕분에 나는 훨씬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이제 우울한 시는 쓸 수 없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우수에 찬 주관주의나 <지상의 거처>에 담긴 고통스러운 애상은 막을 내렸다 (214).

ü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 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의 노래>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214).

ü  그런데 집필을 하려면 작업실이 필요했다. .. 결국 다른 여러 출판사의 도움으로 1939년 이슬라네그라에 작업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215).

ü  역사적 사건, 지리적 환경, 우리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모두 아우르는 총괄적인 시를 반드시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슬라네그라의 거친 해변과 대양의 사나운 물결 덕분에 나는 이 시의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215).

ü  그러나 곧 이슬라네그라에서 나와야 했다. 세상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탈출하고 있다는 섬뜩한 소식이 칠레까지 전해졌다 (215).

ü  칠레의 정권도 바뀌었다. 칠레 민중이 스페인 민주의 투쟁 정신을 본받은 덕분에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칠레 인민전선 정부는 나를 프랑스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고귀한 임무를 완수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포로가 된 스페인 사람들을 칠레로 데려오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내 시는 빛줄기처럼 아메리카에서 뻗어나가 누구보다도 더 영웅적이고 고초를 겪은 저 사람들 사이로 퍼지게 될 것이다 (215~6).

ü  내전에서 패배하고 포로 생활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눈물과 웃음과 고독과 낭만이 묻어나는 소설감이었다. 그 중에서도 몇몇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221).

ü  외로운 두 사람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 우정을 다지게 되었다. 매일 저녁 서로 만나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가르피아스가 멕시코로 떠날 때,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서로의 고독을 위로하면서 두 사람은 이토록 깊은 교감을 나눈 것이다 (223).

ü  마침내 우리는 위니펙 호에 승선했다. .. 그들은 어부, 농부, 노동자, 지식인들로서 힘과 영웅심과 노동의 표본이었다. 나의 시는 투쟁을 통해 그들에게 조국을 찾아 주는데 성공했다. 한없는 자부심을 느꼈다 (226).

ü  신문을 사 들고 바레느쉬르센 거리를 걷고 있었다. … 나는 신문을 펼쳤다. 바로 그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 모든 사람들이 예상하던 일이었다. … 거대한 혼돈이 양심을 뒤덮고 있었다 (226).

ü  참담한 출정이라는 사실만은 어떻게 감출 도리가 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전쟁이나 다름 없었다. 국수주의자들은 거리를 쏘다니며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적은 라발 일당과 같은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아니라 프랑스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 (227).

ü  짐승만도 못한 무리들이 아라공을 죽이려고 파리 전역을 들쑤시고 다니는 동안 아라공은 칠레 대사관에 나흘 동안 머물면서 밤낮없이 글을 썼다. 마침내 칠레 대사관에서 소설 <지붕 칸의 여행객들>을 끝마쳤다. 닷새째 되던 날 아라공은 군복을 입고 전선으로 향했다. 독일과 두 번째 전쟁을 치르러 나선 것이다 (227).

ü  암울한 시절 나는 혁명과 같은 지각 변동은 두려워하면서도 전쟁이라는 치명적인 독소가 숨쉬는 공기와 먹는 빵에 스며들어도 수수방관하는 유럽인들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익숙해졌다. 위대한 도시 파리는 야간 공습이 두려워 매일 밤 소등했다. 700만이라는 인구가 공유하는 저 암흑, 찬란한 빛의 도시라고 자부하던 도시에 드리워진 저 짙은 어둠이 아직도 내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27).

ü  긴 여행: 한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는 지금, 그 동안의 긴 여행이 헛고생이었을까? 나는 다시 한 번 새로 발견한 땅 위에 홀로 남게 되었다. … 지금 나는 또다시 고뇌와 고독에 휩싸여 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돌아갈 것이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어디를 향해 침묵하며 또 어디를 향해 소리칠 것인가?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을 제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오직 내 손으로 공들여 만들어 놓은 공허뿐.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것, 가장 근원적인 것, 가장 강렬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이 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인간의 마음을 탐구했을 뿐이다. 인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도시를 바라보았으니 텅 빈 도시만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것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러자 세상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영원해졌다. 이제 우리는 대지 위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한정 소유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신비도 찾지 않는다. 우리들이 바로 신비이기 때문이다 (228~9).

 

<7: 멕시코, 꽃과 가시의 땅>

ü  멕시코로 발령이 났다. 수많은 고통과 혼란을 겪은 탓에 고뇌에 짓눌려 버린 나는 1940년 아나우악 고원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알폰소 레예스가 누차 강조한 바 있는 공기가 청명한 지역에서 숨을 쉬게 된 것이다 (231).

ü  나는 몇 년 동안 시장을 돌아다녔다. 멕시코의 참모습은 시장에 있기 때문이다 (231).

ü  멕시코는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마법의 나라이다. 멕시코의 고대 유물과 역사가 마술적이고, 음악과 지리 또한 마술적이다 (232).

ü  멕시코 여러 고장을 지나서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야 족이 출현한 땅, 유카탄 반도에 도착했다. 이 유카탄 반도는 역사에 시달리고 과도한 경작에 시달린 땅이다 (233).

ü  멕시코의 지적 생활은 회화가 지배했다. 멕시코 화가들은 역사와 풍물, 시민 항쟁, 격렬한 논란의 대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시가지를 뒤덮었다 (235).

ü  과테말라를 방문하기로 마음 먹고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 과테말라 사람들은 입을 막고 살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40~1).

ü  젊은 시인들이 나에게 시 낭송회를 부탁했다. 그리고 우비코에게 전보를 보내 집회 허가를 받아 냈다. … 나는 기쁜 마음으로 시를 낭송했다. 저 거대한 감옥에 창문을 내는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241~2).

ü  이 세상에 소금 같은 사람들이 멕시코에 모였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이미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점령한 히틀러 군대가 연전연승을 하고 있을 때,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자유를 찾아 멕시코로 망명했다 (244).

ü  키쉬는 어떻게 해서 내가 네루다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 “내가 열 네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문학을 못 하게 막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를 발표할 때 아버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필명을 사용했다. 어떤 잡지에서 네루다라는 체코인의 이름을 보고 필명으로 사용한 것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체코인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작가로서 아름다운 발라드와 로망스를 창작하였으며, 프라하의 말라스트라나에 기념 동상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244~5).”

ü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국가는 여러 민족이 혼합된 혼혈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인종주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는 과거 식민 시대의 잔재물이다. 모두들 정상에 오르고 싶어 하지만, 이 정상이란 극소수의 백인 속물들만이 순수 아리안 족이나 위선적인 관광객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뽐내며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곳이다. 다행히도 이런 편견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이고 국제연합은 흑인과 몽골족 대표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 종족이라는 나무에 지성이라는 수액이 타고 올라감으로써 다양한 색깔의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란 것이다.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어느 날 총영사직을 영원히 사임했다 (251).

ü  멕시코는 아메리카의 시금석이다. 이 멕시코에서 지혜와 신비와 빛의 근원인 태양의 돌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52).

ü  시민 운동은 간헐적이었고, 그나마도 매우 어려웠다. 사회의 각 부문은 왕좌를 중심으로 계층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254).

 

<8: 암담한 조국>

ü  외무부는 서둘러 내 사직서를 수리했다. 자청해서 총영사직을 사임한 덕분에 아주 즐거운 일이 생겼다. 칠레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은 자기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뿌리 뽑힌 사람이 맛보는 좌절감은 어떤 형태로는 영혼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향 땅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발을 딛고, 내 땅을 만지고, 내 땅의 소리를 듣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의 물소리와 그림자를 느끼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양분을 흡수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255).

ü  그러나 칠레로 돌아가기 전에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내 시는 한층 더 두터워졌다 (255).

ü  페루에 잠시 머무는 동안 마추픽추 유적을 찾았다. … 정상에 오르자 높고  짙푸른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에 둘러싸인 고대 석조물이 보였다 (256).

ü  나 자신이 초라한 미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득한 옛날 내가 여기에 살면서 밭이랑을 갈고 돌을 다듬은 것만 같았다. 나는 칠레인이자 페루인이고 아메리카인이라고 느꼈다. 저 험준한 봉우리에서 영욕의 세월을 거친 유적을 돌아보며 나는 추후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시집 <마추픽추 산정>은 이렇게 태어났다 (256).

ü  1943년이 저물어 갈 무렵에 산티아고로 돌아와 장기 분할상환 조건으로 집으 ㄹ한 채 구입했다.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진 이 집에 책을 쌓아 놓고, 다시 고단한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시 조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섰다. 거친 자연의 아름다움, 여성들의 매력, 동료들의 작업, 동포들의 지혜를 찾아 나섰다 (256).

ü  칠레는 변한 것이 없었다. …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이 결단으로 인해 영광스러운 순간도 맛보았고 핍박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어떤 시인이 그런 일을 후회하겠는가 (256~7).

ü  지금 이야기하려는 일이 있은 지 몇 년 뒤, 나와 인터뷰한 쿠르치오 말라파르테 (이탈리아 소설가)는 신문 기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공산주의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칠레 시인이라면 파블로 네루다처럼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캐딜락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아니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257).”  

ü  이처럼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이 1945 3 4일 나를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다 (257).

ü  시 덕분에 고단한 삶을 사는 동포들과 한데 어울릴 수 있었고, 그들은 나를 둘도 없는 형제처럼 받아 주었다 (257).

ü  나는 이런 북쪽 출신이 아니라 정반대의 남쪽 출신이다. … 이런 나에게는 단지 이러한 달나라 같은 사막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뒤바뀔 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 의회에서 지역민의 여론, 소외감, 지역 이익을 대변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258).

ü  사막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나는 사막의 언어, 다시 말해서 침묵을 이해할 수 없었다 (259).

ü  초석 기업들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문자 그대로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영국인, 독일인을 비롯하여 각국의 침탈자는 초석 광선을 독점하고, 회사 이름을 지명으로 사용했다 (259).

ü  1945년에는 상황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내가 보기에는 예전처럼 노동자들을 몰살하는 시절이 되돌아온 것 같았다 (260).

ü  초석 광산의 수많은 노동자는 대부분이 문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를 신뢰했다 (260).

ü  여기저기 수백 번도 넘게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 때마다 항상 요구하는 것이 있었다. 내 시를 낭송해 달라는 것이었다 (261).

ü  내 시와 삶은 아메리카 대륙의 강처럼 흘러갔다. 남반구의 깊은 산속에서 발원하여 쉼없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칠레의 거친 물살처럼, 내 시는 그 물살에 떠내려가는 어느 것 하나도 배척하지 않았다. 열정을 흡수하고 신비한 세계를 천착하며 민중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었다 (262).

ü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262~3).

ü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주는 시인이 있어.” 1945 7 15, 나는 칠레 공산당에 가입했다 (263).

ü  우리 아메리카에서 위대한 독재자는 한결같이 거대한 공룡이었다. 태고의 땅에 세워진 막강한 봉건 제도에서도 살아남은 동물이었다. 이에 반해 칠레의 유다, 곤살레스 비델라는 폭군 흉내나 내는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고, 공룡으로 치면 유해한 도마뱀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칠레에 해약을 끼칠 만한 힘 정도는 있었다. 적어도 역사를 후퇴시킬 수는 있었다 (264~5).

ü  곤살레스 비델라라는 인간은 곡예사였다. … 경찰 국가가 수립된 것이다. 칠레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다운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지하 투쟁을 전개하며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265).

ü  예전에도 수차례 그러했듯이 실제로는 상류 지배 계급이 막강한 경제력을 동원하여 다시 한 번 칠레 정부를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 우리 손으로 선출한 대통령이 미국의 비호를 받는 흡혈귀 새끼가 되어 버린 것이다 (265).

ü  우리 시인들은 본래부터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연기를 내뿜는 불길이다. 이러한 불길로 나는 창작에 전념했다. 내가 경험한 일을 고대 아메리카 역사와 결부시켰다. 도망 다니며 숨어 지내던 바로 그 해, 가장 중요한 내 시집 <모두의 노래>를 탈고했다 (266).

ü  칠레의 최남단, 남미의 최남단을 향해 출발했다. 안데스 산맥을 넘을 작정이었다 (269).

ü  아르헨티나 동지들이 약속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271).

ü  원시림이 죽어 가고 있었다. 나는 원시림의 통곡에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마지막 절규를 내뱉는 원시림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여기에 온 것 같았다 (273).

ü  로드리게스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주도권을 장악한 사람 특유의 솔직 담백함이었다 (275).

ü  나는 지금도 그 사람 편이다. 그 사람을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로드리게스는 자유를 찾아가는 한 시인을 위해서 원시림에 6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뚫으라고 명령한 작은 황제이다 (276).

ü  나는 몇 번씩이나 바위 위로 굴러 떨어졌다. 내가 탄 말도 코와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우리는 굴하지 않고 거대하고 장엄하고 또 험난한 길을 꿋꿋이 나아갔다 (279).

ü  저 원시림 한가운데 무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시야가 탁 트였다. 산기슭에 둥지를 튼 작고 아담한 초원이었다. 맑은 물, 푸르른 풀밭, 야생화, 강물 소리, 파란 하늘 그리고 수목이 그다지 울창하지 않아 햇살이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279).

ü  우리 일행은 마술로 펼쳐 놓은 듯한 그 초원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신성한 장소에초대 받은 손님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그 뒤에 참여한 의식으로 더욱 강렬해졌다 (279).

ü  그러나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의식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농부 일행은 모자를 벗어 들고 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 춤을 추는 우리 일행을 곁에서 바라보던 나는, 어렴풋하나마 낯선 사람끼리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비록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으나 서로 부탁하고 응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80).

ü  한참을 더 가서 국경 근처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나와 조국을 갈라놓을 국경이었다. 국경선 근처의 계곡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문득 불빛이 보였다. 사람이 사는 것이 분명했다. 가까이 가 보니 낡고 허름한 오두막집이 몇 채 있었다 (280).

ü  우리가 길을 떠난 이후 처음 들어보는 사람 목소리였다. 향수와 사랑을 담은 노래였다. 지나간 청춘을 애달프게 생각하고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고 속고 속이는 인생을 한탄하는 노래였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누군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수배자라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내 시도, 내 이름도 몰랐다.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어쨌거나 우리는 불가에 앉아 함께 먹고 노래했다. 그리고 어둠 속을 걸어서 방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온천수가 흐르고 있었다. 산속에 흘러나와 우리를 따듯하게 감싸 주는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280).

ü  우리는 신나게 첨벙거리며 몸을 닦고, 긴 여행에서 쌓인 피로를 씻어 냈다. 새벽에 일어났을 때는 상쾌했다. 새로 태어나 세례를 받은 기분이었다. … 우리는 말을 타고 노래를 부르며 길을 나섰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를 더 큰 세상으로 떠미는 바람이었다 (281).

ü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돈을 주려고 했다. … 그러나 단번에 거절했다. 우리를 접대한 것, 그 뿐이다. ‘그 뿐이다라는 이 말은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같은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81).

ü  이제 나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 오두막 벽에 조국이여, 잘 있거라. 나는 이렇게 떠나지만 항상 너와 함께하리다라고 썼다 (281).

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새 신분증을 만드는 일이었다. … 아르헨티나 경찰은 칠레 정부의 요청으로 나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284).

ü  그러나 프랑스에서 내 신분은 다시 문제가 되었다. 위조 여권으로는 조사가 철저하기로 소문난 파리 경찰청을 속일 수 없었다 (284).

ü  그 때 뛰어난 천재성 못지않게 친절한 마음씨를 가진 피카소가 나타났다. 피카소는 얼마 전 생애 처음으로 연설을 했다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그 연설에서 내 시를 이야기하고, 칠레 경찰의 추적을 받던 내가 행방불명되었다고 얘기했다. 천재성을 자랑하는 이 현대 회화의 미노타우로스는 이제 내가 직면한 사소한 문제까지 걱정하고 있었다. 피카소는 당국자들과 대화하고, 많은 사람들과 전화 통화를 했다. 나 때문에 그리지 못한 걸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피카소의 황금 같은 시간을 빼앗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285).

ü  그 무렵 파리에서는 평화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대회장에 나타나 시 한 편을 낭송했다 (285).

ü  내 서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프랑수아 지루 부인의 집에도 머물렀다. … 지금 생각났는데 부인은 피카소 그림을 한 점 소장하고 있었다. 내가 본 피카소 그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 내가 보기에는 현현의 순간을 그린 작품 같았다하루는 피카소가 나를 만나러 이 집에 왔기에, 그림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 … 피카소는 매우 진지하게 그림을 살펴 보았다. 비상한 집중력으로 그림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었는데, 얼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우수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앞으로 다가갔다 뒤로 물러섰다 하며 10분도 넘게 자기 작품을 감상했다. … 거대한 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피카소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괜찮은 작품이야.” (287).

ü  그 무렵 소련 문학의 거장 세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시인 니콜라이 티호노프, 극작가 알렉산드르 코르네이추크 (이 사람은 우크라니아 주지사였다) 그리고 소설가 콘스탄틴 시모노프였다 (288).

ü  내 시를 읽고 또 번역하던 일리야 에렌부르크는 뿌리가 너무 많다고, 내 시에 뿌리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투덜거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뿌리가 많아?” 에덴부르크 말이 사실이다. 내 시는 개척지 땅에 뿌리 내렸고 한 번도 그 땅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내 인생도 긴 순례였다 (290).

 

<9: 망명의 시작과 끝>

ü  1949년 추방 위기를 모면하자마자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 행사에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되었다. … 목적지는 진주처럼 빛나는 차가운 발트해 연안의 고도이자 새롭고 고귀하고 영웅적인 도시 레닌그라드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293).

ü  나는 백여 년 전에 죽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전설적인 일화를 남긴 알렉산드르 푸슈킨을 만나려고 그곳에 갔다 (294).

ü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첫 인상은 광활한 땅이라는 것이었다 (294).

ü  교조주의 (사회적 리얼리즘)가 소련 예술계를 장기간 지배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소련 문단에서는 교조주의를 항상 결점으로 간주했으며, 교조주의와 정면 대결도 불사했다는 점 또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296).

ü  주지하듯이, 생명은 계율보다 강인하다. 혁명은 생명이나, 계율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이다 (296).

ü  모스크바와 시골에서 자주 만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터키 출신의 위대한 시인 나짐 히크메트였다. 괴상한 터키 정부가 18년 동안이나 감방에 가둬 둔 전설적인 작가였다 (296).

ü  열렬한 반교조주의자 나짐 히크메트는 소련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보냈다 (297).

ü  문학에서 새로운 형식, 즉 기존 형식의 혁신은 관습적인 틀을 넘어서거나 깨드려야 한다. 하지만 문학이 어떻게 철저하고 광범위한 혁명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이 경험한 승리, 갈등, 인간적인 문제, 풍요, 진보, 성장을 핵심적인 주제에서 제외할 수 있단 말인가? (298).

ü  모스크바는 겨울 도시다. 아름다운 겨울 도시다 (298).

ü  작가의 작업도 저 얼음 낚시꾼의 작업과 공통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고 조소를 이겨 내야 한다. 또한 깊은 강물을 찾아 적절한 낚싯바늘을 던지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 다음에 아주 조그마한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던지고 추위와 고통을 견뎌 내면 시간이 갈수록 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300).

ü  1950년 갑자기 인도에 가게 되었다. 파리에 있을 때 졸리오 퀴리가 나를 부르더니 한 가지 일을 맡겼다. 뉴델리를 방문하여 다양한 정파의 인사들과 접촉해 보고 인도 평화 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현지에서 강구해 보라는 것이다. 졸리오 퀴리는 세계 평화 대회의장이었다 (301).

ü  그 해 <나무꾼이여 깨어나라>라는 시로 파블로 피카소, 나짐 히크메트와 함께 국제 평화상을 받았다는 점도 작용한 것 같다 (301).

ü  내 삶은 항상 이런 식이다. 한쪽에서는 몽둥이로 패고, 다른 한쪽에서는 진정하라며 꽃다발을 건네준다 (303).

ü  내가 만난 사람들은 작가, 철학자, 힌두교 승려, 불교 승려로서 가식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소박한 인도인들이었다. … 대원칙은 모든 경향의 사람들이 동등하게 참여한다는 것이다. 나도 동의했다 (304~5).

ü  중국은 혁명 이후 두 번 방문했다. 첫 방문은 1951년이었다. 쑨원의 미망인 쑹칭링 여사에게 레닌 평화상을 전달하기 위해 일행과 함께 중국을 찾았다 (309).

ü  우리 일행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전설적인 횡단 열차에 오르니 무한하고 신비한 공간을 항해하는 배를 탄 기분이었다. 달리고 또 달려도 차창 밖 풍경은 온통 노란색이었다. … 눈에 보이는 것은 단풍이 노랗게 물든 은색 자작나무 뿐이었다. 이어 툰드라 지대와 타이가 지대가 나타났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처럼 보였다 (309).

ü  그 당시 나는 위대한 혁명에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악한 의도로 전개되고 있는 여러 사건들의 구체적인 실상은 간파할 수 없었다. … 그 비극은 20차 전당대회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311).

ü  1956년 개최된 이 대회에서 후르시초프는 스탈린 독재 체제의 죄악상을 비판했다 (311).

ü  우랄 산맥을 지나 시베리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311).

ü  우리는 이르쿠츠크에서 내렸다. 몽골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유명한 바이칼 호를 구경하러 갔다 (312).

ü  거기서 우리는 몽골로 날아갔다. … 울란바토르 주변은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처럼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였다 (313).

ü  이곳 저곳을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던 중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에 발을 딛게 되었다. 이제는 열렬히 사랑하게 된 이 나라는 바로 이탈리아다. 나는 보는 것마다 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올리브유, , 포도주에서 이탈리아인의 질박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 (318).

ü  이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마틸데 우루티아와 함께 카프리 섬에 도착한 후에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322).

ü  세상에는 남 몰래 키워 온 사라의 산물, 흔히 얘기하는 사생아가 있듯이 내 작품에도 그런 시집이 있는데, 바로 <대자의 노래>이다. … 1952년 나폴리에서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324).

ü  이 시집이 익명으로 나온 이유는 내가 원했기 때문이다. 이 시집 때문에 그 무렵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델리아 델 카릴이 상처를 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델리아 델 카릴은 격동의 시기에 꿀처럼 달콤하고 강철처럼 강인한 실로 내 손을 묶어 놓은 상냥한 반려자였다. 지난 18년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동반자였다. 그러나 느닷없는 정열로 불타오르는 이 시집은 유순한 그녀가 보면 돌팔매질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익명을 고집했던 근본적이고, 개인적이고, 존경할만한 단 하나의 이유이다 (325).

ü  망명 생활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1952년이었다. 우리는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 칸에 도착했다 (327).

ü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329).

 

<10: 여행과 귀환>

ü  1952 8월부터 1957 4월까지는 회고록에 상세하게 기록할 만한 일이 없었다. … 산티아고에서 쉰 번째 생일을 맞이했는데, 세계 각지에서 유명한 작가들이 찾아 주었다. … 델리아 델 카릴과는 완전히 헤어졌다 (337).

ü  이 기간의 끝 무렵, 오래전에 내가 살았던 실론의 콜롬보에서 개최되는 평화 대회에 초청받았다. 그때가 1957 4월이었다 (338).

ü  그날 밤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둔중한 부에노스아이레스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 마침내 위층 가장 구석진 감방에 수감되었다 (339).

ü  나는 파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 역시 그 누구도 파문시키지 않을 것이다. … 사람은 사람일 뿐, 그 외의 어떤 규칙이나 호칭이나 딱지를 붙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341).

ü  내가 생각하는 투쟁이란 모든 투쟁을 끝내기 위한 투쟁일 뿐이며, 강력한 대응이란 모든 강력한 대응을 끝내기 위한 강력한 대응이다. 나는 지금까지 오로지 한 길을 추구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길이 우리 모두를 영원한 사랑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341~2).

ü  우리는 인류애라는 숭고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발전할 수 있다. 그 어떤 시련도 이런 희망을 꺾을 수 없다 (342).

ü  인류의 대의, 반핵 투쟁을 위해 다시 콜롬보로 날아갔다 (342).

ü  어느덧 우리는 실론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나는 스물 두 살 때 실론에서 살았다. 외롭고 쓸쓸한 생활이었다. 그때는 낙원 같은 자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음울한 시를 썼다 (343).

ü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실론 정부가 후원하는 평화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방문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회에 참석했다. 가끔은 샛노란 가사를 걸친 승려들도 눈에 띄었다. 부처님의 제자답게 정중하고 명상적인 사람들이다. 이 승려들은 전쟁, 파괴, 죽음을 반대함으로써 평화와 조화라는 싯다르타 고타마 왕자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이런 태도는 우리 아메리카 국가의 교회, 공식적이고 호전적인 스페인 교회를 닮은 우리 아메리카 교회와 얼마나 다른가 (343~4).

ü  우리는 무사히 버마의 랑군에 도착했다. 그때로부터 만 30년 전, 무명이었던 나는 버마에 체류하면서 시를 썼다. …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깨끗하게 반짝거렸고, 거리는 활기가 넘쳤으며, 영국 상품이 가게 진열장을 채우고 있었다 (345).

ü  그런데 이제 랑군은 텅 비어 있었다. 진열장은 황량했고, 거리에는 쓰레기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 독립 투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민중 봉기로 자유의 깃발을 세운 다음에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 (346).

ü  내가 보기에 중국은 수수께끼 같은 나라가 아니었다. 현재 강력하나 혁명적 추동력을 얻고 있기는 하나, 이미 수천 년 동안 건설되었고, 항상 건설 중인 나라로 보였다. 인간과 신화, 즉 전사와 농민과 신들이 들락거리는 거대한 탑 같았다 (347).

ü  사실 스탈린 시대의 실상이 폭로되자 아마두는 융통성을 잃고 경직되었다. .. 그러나 나는 부질없는 종파주의자는 아니었다. 타고난 성격과 칠레인다운 기질 탓에 가능하면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350).

ü  20차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 보고서는 우리 혁명가들을 새로운 상황으로 내몬 해일이었다 (350).

ü  내가 이런 중국과 거리를 두게 된 이유는 마오쩌둥이 아니라 마오쩌등주의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마오-스탈린주의, 사회주의 신에 대한 우상 숭배 때문이었다 (353).

ü  스탈린의 경우, 나도 개인 숭배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은 우리에게 히틀러 군대를 물리친 승리자, 인류의 구원자로 보였다. 이러한 스탈린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는 미스터리이며, 우리들은 아직도 수수께기로 여기고 있다 (353~4).

ü  그런데 땅도 하늘도 광대한 이 혁명 중국에서 그것도 대낮에, 한 인간을 신화로 만드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혁명적 의식을 독점하게 만드는 신화, 즉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한 사람의 손아귀에 맡겨 버리는 신화였다. 나는 이처럼  쓰디 쓴 약을 두 번씩이나 삼킬 수는 없었다 (354).

ü  아이칭은 중국에서는 훌륭한 요리를 가늠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고 일러 주었다. 첫째가 맛이요, 둘째가 향이며, 셋째가 색이다. … 맛은 훌륭해야 하고, 향기는 감미로워야 하며, 색깔은 입맛을 돋우고 조화로워야 한다. … “이 식당만의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리입니다.” (355).

ü  다시 소련으로 돌아왔을 때, 남부 지역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357).

ü  우리는 소련의 아브하즈 자치공화국의 수도 수후미에 와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훔치러 온 전설의 고장 콜키스가 바로 이 곳이다 (358).

ü  이제 우리 일행은 전설의 땅이자 힘겨운 노동의 땅을 향해 날아갔다. 도착한 곳은 아르메니아였다. 멀리 남쪽으로 눈 덮인 아라파트 산이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경에 의하면, 바로 이 산에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다 (360).

ü  귀국길에 모스크바에 들렀다. 나에게 이 도시는 사회주의의 장려한 수도, 즉 수많은 이상이 실현된 장소일 뿐만 아니라 절친한 친구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363).

ü  시인의 일이란 대부분이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일이다 (372).

ü  사회주의 혁명 40주년 기념일에 모스크바에서 열차를 타고 핀란드로 향했다 (373).

 

<11: 시는 직업이다>

ü  전쟁과 혁명 그리고 대규모 사회 변동을 경험한 우리 시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은 땅에 시를 경작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보통 사람들은 고독 속에서 또는 대중 집회의 군중 속에서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이 시대와 직면해야만 했다 (375).

ü  나는 1904년에 태어났다. 1921년 시 한편을 잡지에 발표했다. 1923년 첫 시집 <황혼 일기>를 출판했다. 그리고 1973년 현재, 이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다. 첫 시집을 출판한 지도 어언 50년이 지났다 (387).

ü  언어와 한 평생 같이 살다 보면 친근감이 몸에 베어 언어를 잡아당겨보고, 탐구해 보고, 머리카락과 배를 뒤져 보게 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스페인어를 다루었다. …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387).

ü  가끔 발음을 기준으로 라틴아메리카인과 스페인인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언어 감각에 있다. 바로크 시대의 스페인 시인 공고라가 애용한 고도의 압축미는 우리 라틴아메리카인의 정서에는 잘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바람직하지 못한 면도 있지만, 공고라의 영향을 받지 않은 스페인어 시는 없다 (387~8).

ü  스페인어는 세르반테스 이후 아름답게 정제되어 은은한 기품을 지니게 되었다 (388).

ü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도움을 준 시인이 바로 맨해튼에 살던 윌트 휘트먼이었다 (388~9).

ü  우리 시인들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 우리가 민중과 강고한 유대를 맺고,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 투쟁한다는 단서가 붙을 때만 (391).

ü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 (391).

ü  시인의 생활 수준으로는 너무 높은 거 아니냐고 질책하는 비평가들을 한 번 초대하고 싶다. … 저작권료를 받으며, 적어도 몇몇 작가들은 신성한 노동으로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다. 비평가는 이런 시인의 자부심을 널리 알려야 한다. 다된 밥에 재만 뿌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391).

ü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392).

ü  행동하는 시인으로서 나는 자기 도취와 싸웠다. 따라서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갈등은 나라는 존재 내부에서 해결되었다 (392).

ü  나는 가진 것 없이 맨몸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었다 (393).

ü  내 시의 길이를 재는 사람들도 있다. …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아니 시행이규칙을 누가 정해 놓았다 말인가? 모든 결정권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 있다. 피와 한숨 그리고 있는 지식과 없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결정한다. 이 모두가 시라는 빵에 들어가는 것이다 (394).

ü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합리와 비합리라는 양극단은 시 내부에서 부단히 다투고 있으며 한번은 이쪽이 승리하고 다음 번에는 저쪽이 승리한다. 하지만 시 자체는 결코 패하는 법이 없다 (394).

ü  우리 시인들은 독자를 찾아나서야 한다. 독자가 있는 곳이라면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거나 우주선을 타고 하늘을 비행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394).

ü  시란 인간의 심오한 감성에서 우러나온다. 바로 이런 감성에서 예배와 찬송이 우러나왔고, 나아가서 종교가 탄생했다. 시인은 갖가지 자연 현상과 대담하게 맞섰고, 원시 시대에는 사제라는 이름으로 직책을 유지했다 (394).

ü  오늘날 시민사회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고대의 사제 행세를 하고 있다. 옛날에는 어둠과 결탁을 했다면, 이제는 빛과 함께 해야 한다 (395).

ü  나는 독창성을 믿지 않는다. 독창성이란 급속도로 몰락해 가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개성을 믿는다. 예술 창조에서 어떤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든, 또 예술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개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395).

n  저작권 말이다. 서구 사회의 패권주의의 산물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데 말이다

ü  그러므로 탁월한 시인이 되려면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을 고수하고, 자연, 문화, 사회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395).

ü  내 경우에는 나만의 고유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는데,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이 어조도 차츰 강화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주지하듯이, 내 초기 시집에서는 감정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95).

ü  그러나 40년 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시는 감정보다 한층 본질적인 영역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통제된 자발성을 믿는다. 이를 위해 시인은, 이를테면 긴급 상황에 대비한 비상 용품처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품목은 단어, 음성, 비유에 대한 형식적, 실제적 정보이다 (396).

ü  그리고 감정이라는 품목도 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한다는 말인가? 감정이 생길 때,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종이 앞에서 그 의식을 기억해 낼 수 있는데, 감정보다 훨씬 더 선명하다 (396).

ü  나는 상당수의 시집에서 시인은 장차 직면할 문제, 인류에게 필요할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396).

ü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집도 장난감처럼 지어 놓고, 그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다 (399).

ü  조상이란 기독교의 것이든 이교도의 것이든 인간의 종교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모양이다 (402).

ü  각종 문학상에서 받은 상금으로 고가의 희귀 서적을 구입할 수 있었다. 내 장서량은 상당한 규모에 이르렀다 (403).

ü  진정 이 세계는 전쟁을 쓸어 낼 수 없고 피를 씻어 낼 수 없고 증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실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 나는 여전히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다. 또한 사람들이 고통을 딛고 일어나, 피와 부서진 유리를 딛고 일어나 서로를 이해하리라고 확신한다 (406).

ü  인생이란 동반자가 필요해. 자질구레한 인생사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 말이야.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내 숨통을 조르는 것 같아 (411).”

ü  거창한 계획을 구상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바로 출판의 전당이었다. … 보레츠사는 불굴의 정신으로 꿈을 현실로 변환시켰다 (414).

ü  한꺼번에 일곱 가지나 되는 신축 계획을 설명하면서 중간중간에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적 사실이나 인생을 논한 서적 얘기를 끼워 넣었다. “진정한 영웅은 돈키호테가 이날 산초 판사였죠.” 보레츠사에게 산초 판사는 민중적 리얼리즘을 대변하는 목소리, 시대와 세계의 진정한 중심이었다 (414).

ü  헝가리는 삶과 시, 역사와 시, 시간과 시인이 서로 얽혀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나라이다. … 헝가리 시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문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416).

ü  이탈리아 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창공의 별처럼 빛나는 찬란한 유산 앞에 내놓아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업적을 쌓아야 하는 부담을 떠안고 있다 (418).

ü  콰지모도는 유럽인답게 학식, 균형 감각 등 모든 지적 무기를 적절하게 활용한다. … 콰지모도는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인간이다. 세계를 전투적인 동서진영으로 나누기는커녕 오히려 문화적 경계선을 지우고, 동서 진영 누구나 시, 진리,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게 현대인의 지고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시인이다 (418).

ü  인간의 손과 작품 사이에, , 오장육부, 피와 일 사이에는 틀림없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론은 없다 (420).

ü  나는, 가슴 깊이 사무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그토록 수려한 시를 쓴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애증의 갈등을 겪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따름이다 (422).

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문인들 사이의 갈등은 지구 어느 곳에서나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문단에서는 자살하는 문인이 많다. 혁명 러시아에서는 시기심 많은 자들이 마야코프스키를 얼마나 궁지에 몰아넣었던지, 결국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427).

ü  최근 라틴 아메리카 각국에서는 소설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룰포, 바르가스 요사, 크르타사르, 푸엔테스, 그리고 칠레의 작가 도노소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도처에서 이들의 작품을 읽고 있다 (428).

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는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콜롬비아 소설가, 후안 룰포는 <페드로 파라모>를 쓴 멕시코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녹색의 집>을 쓴 페루 소설가, 훌리오 코르타사르는 <팔방미인>을 쓴 아르헨티나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을 쓴 멕시코 소설가, 호세 도노소는 <대관식>을 쓴 칠레 소설가이다 (428).

ü  나는 이 작가들을 거의 다 만나 보았는데, 매우 건전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왜 정치적 증오와 들끓는 시기심을 멀리하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한적한 곳을 찾아 자기 나라를 떠나는지, 날이 갈수록 더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자발적인 망명을 떠나는 이유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들 작품이 갈수록 우리 아메리카 대륙의 진실과 꿈을 잘 표현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428).

ü  극도에 달한 시기심 때문에 내가 겪은 여러 가지 일을 이야기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광고해 주고 있었다. 마치 내 이름 광고만을 전담하는 회사를 차린 것처럼 (428~9).

ü  우리 시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거창한 허무주의, 즉 어설픈 니체식 냉소주의 를 내세워 범죄좌의 탈을 뒤집어 썼다. 이 덕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범죄자가 되거나 자기 파멸로 치달음으로써 인생을 망쳤다 (430).

ü  내 작품에 대해 훌륭한 비평을 해 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러시아인 레프 오스포바트의 책을 첫 손에 꼽고 싶다. 이 젊은 비평가는 내 시를 읽으려고 스페인어까지 배웠는데, 시에서 의미와 운율 이상의 그 무엇을 보고 있다. 즉 자기가 살고 있는 북극의 빛으로 조망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전망을 부여하고 있다 (433).

ü  알론소의 <파블로 네루다의 시와 문체>는 여러 면에서 매우 가치 있는 비평서이다 (434).

ü  나를 초현실주의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리얼리즘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시인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들 반쯤은 옳고 반쯤은 틀렸다 (434).

ü  시의 분자란, 꽃가루처럼 가볍든 납덩이처럼 무겁든 세상의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다가 밭고랑이나 사람 머리 위에 떨어진다. 이러한 씨앗들이 봄기운을 만나면 꽃이 되고, 전장에서는 탄환이 된다 (434~5).

ü  나는 책을 보면,… 책등만 봐도 즐겁다. 그러나 학파와 유파라는 딱지는 싫다. 학파나 유파에 따라 분류하지 않은 책 자체가 좋다. 삶도 마찬가지다 (435).

ü  나는 윌트 휘트먼과 마야코스프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긍정적인 영웅을 좋아한다. 이 시인들은 어떤 공식에 의거하여 영웅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결코 쉽지 않은 창작 작업을 통해서,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들어와 빵과 꿈을 나눠 먹는 친근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435).

ü  사회주의 사회는 재촉하는 시대의 신화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는 재화보다는 광고 포스터를 더 가치 있게 여기고, 본질을 곁가지로 치부한다. 그러나 작가의 당면 과제는 좋은 책을 쓰는 일이다 (435).

ü  시의 영예는 거리에 나가서 이런저런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반역자라고 불러도 놀라지 않는다. 시는 반역이기 때문이다 (436).

ü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내 시를 링 위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종종 시와 더불어 나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영광을 찬양했다 (436).

ü  사실 나는 <포도와 바람>을 약간 편애하는데내게 가장 소중한 책이다 (437).

ü  내 책들 중에 <에스트라바가리오>내 취향으로 보면, 진실의 소금 맛을 지니고 있는 대단한 책이다 (437).

ü  <소박한 것들에 바치는 송가>에서는 사물의 원천, 시원을 노래했다 (437).

ü  부르주아지는 갈수록 현실과 동떨어진 시를 요구한다.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는 시인은 말기에 접어든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인물이다. 차라리 자기 자신을 작은 신이라고 믿는 우이도브로 같은 시인이 훨씬 더 편하다. 이러한 믿음 혹은 태도는 지배 계급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시인이 이처럼 자기만의 신성한 영역을 떠받들고 있는 한, 매수하거나 억누를 필요가 없다. 이런 시인은 하늘에 안주함으로써 스스로를 매수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휘황찬란한 길을 가더라도 발 딛고 있는 땅은 흔들리고 있다 (438).

ü  우리 라틴 아메리카에는 수천만에 달하는 문맹자들이 있다. 이처럼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삶은 우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봉건주의가 남긴 일종의 특혜이다. 7천만 문맹자를 고려할 때, 라틴 아메리카의 독자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438).

n  7천만의 문맹을 안고도 칠레는 이미 세계 문학 속에서 그 빛을 달하고 있다. 문맹률이 지극히 낮은 우리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ü  결국 <마추픽추 산정>의 광고에는 작가 이름이 빠졌다. 도대체 이 신문은 150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그 긴 세월 동안 진실을 존중하는 법도, 사실을 존중하는 법도, 시를 존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439).

ü  전 세계에서 출판된 작품의 대가로 시인이 물질적 편안함을 누리는 꼴은 도저히 못 봐 주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든 음악가든 화가든 이런 편안함을 누릴 권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439).

ü  언젠가 () 집에서 노동조합원 회의가 열리고, 광부와 농부는 쉼터로 사용할 것이다. 내 시는 이렇게 복수할 것이다 (440).

ü  내 책은 항상 똑 같은 것을 다룬다. 언제나 똑 같은 책을 쓴다. 친구들이여, 나를 용서하기 바란다. 이 순간, 새 날로 가득한 새해에 나는 그대들에게 시, 언제나 동일한 시밖에 줄 것이 없다 (441).

ü  세월은 흘러간다. 사람은 소진되거나 꽃을 피우고, 고통을 당하거나 환호성을 올린다. 세월은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하고 새 생명을 보내 주기도 한다. 이별이 좀 더 잦아지고… (441).

ü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체 게바라가 가난한 나라 볼리비아에서 공공연하게 암살된 것이다. 게바라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는 서늘한 전율을 일으키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수많은 추모사는 한결같이 게바라의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삶을 다루었다. 격정에 사로잡혀 쓴 추모시가 세계 도처에서 남발되었다. 그러나 격정만이 능사는 아니다 (442).

ü  이런 추모시는 직설적인 항의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역사의 심오한 메아리도 담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시가 내 머릿속에서, 내 피 속에서 무르익을 때까지 고민할 것이다 (443).

ü  그 위대한 게릴라 지도자가 일기장에서 언급한 시인은 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가슴이 뭉클했다 (443).

ü  노벨상을 받기까지 사연도 참 많았다. 오래 전부터 노벨 문학상 후보로 내 이름을 거론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이루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1963년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라디오에서는 내 이름이 스톡홀름에서 오르내리고 있으며, 가장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라고 떠들어 댔다 (443).

ü  오로지 땅만이 본질을 간직한 채 영원히 존재한다 (446).

ü  사실, 지구라는 이 행성에 사는 작가들은 한 번쯤 노벨 문학상을 꿈꾼다. 노벨상에 대해 겉으로 아무런 내색을 안 하는 작가도, 심지어 노벨상을 거부하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448).

ü  특히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는 각기 후보를 내세워 수상 전략을 짜고 로비를 벌이기 때문에 실제로 노벨상을 받을 만한 작가들이 이 상을 놓친 경우도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소설가 로물로 가예고스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가예고스의 작품은 위대하고 또 화려하다 (448).

ü  아무튼 나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450).

ü  엄격한 의전 절차에 따라 진행된 시상식은 매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비일상적인 행사를 감싸고도는 엄숙한 분위기는 이 세상에 늘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명인사들의 수상식 장면은 작은 시골 학교의 상장 수여식과 퍽이나 유사했다 (457).

ü  19세기 초, 그러니까 1810 9월에 남아메리카 대륙 곳곳에서는 스페인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거나 계획했다 (459).

ü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이르기까지 연쇄적으로 발생한 독립 운동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459).

ü  백 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계속 흐르며 새로운 봄이 우리 아메리카의 끝없는 공간에 넘실거린다 (462).

ü  시인 나짐 히크메트는 터키 감옥에서 13년인가 14년을 보냈다. 이 회고록을 쓰고 잇는 이 순간에도 예닐곱 명의 파라과이 공산주의자들이 12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다. 종신형을 언도받은 이들은 바깥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463).

ü  13만 청중 앞에서 자기 시를 낭송한 경험이 있는 시인은 이미 예전의 시인이 아니며, 이전과 똑 같은 생각으로 시를 쓸 수도 없다 (465).

ü  스탈린상 수상자 결정은 만장일치제였다. 그렇지만 내부적으로는 수상자 선정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심사위원 중 누군가 합의 사항에 대해 스탈린의 재가를 받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470).

ü  스탈린은 체계적으로 신비를 조장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나치게 수줍음을 타는 사람, 즉 자신에게 갇힌 죄수였다 (470).

ü  많은 사람들이 나를 확고한 스탈린주의자라고 믿었다. 파시스트와 반동분자들은 스탈린에 대한 서정적 주석가로 묘사해왔다. 특별히 기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혼돈의 시대에는 평가도 가지각색이기 마련이니까 (472).

ü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 문제에 대한 적들의 주장이 여러 면에서 옳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참담한 심경이었다. 처음에는 갈피를 잡기 어려웠고 양심의 고통도 뒤따랐다. 일부는 환멸을 느낀 나머지 느닷없이 적들의 논리를 수용하여 전향하였고, 일부는 공산당이라 할지라도 세계에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스스로 책임을 인정할 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례로써 20차 전당 대회의 충격적이 폭로를 받아 들였다 (472).

ü  지금까지 내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내 눈에 비친 스탈린은 어둠 위에 떠 있는 스탈린, 내가 전혀 알지 못한 암담한 폭정 위에 떠 있는 스탈린이었다. 이런 스탈린은 선량하고 원칙을 지키는 인물, 수도사처럼 소박한 사람, 러시아 혁명의 굳건한 수호자로 보였다 (472~3).

ü  붉은 군대는 스탈린의 이름을 외치며 히틀러라는 악마의 소굴을 분쇄했다 (473).

ü  그러나 나는 이 권력자에게 단 한 편의 시를 헌정했을 분이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쓴 시 <그 사람의 죽음에 부쳐>였다. … 크렘린 키클롭스의 죽음은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인간 밀림이 전율했다. 내 시는 이러한 세계적인 경악을 포착했다 (473).

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인들은 선택해야 했다. 그 선택은 장미꽃 침대가 아니었다. 잔혹하고 부당한 전쟁, 지속적인 억압, 자본의 침투와 같은 불의가 갈수록 분명하게 드러난다. 쇠망기에 접어든 자본주의는 조건부 자유, , 폭력, 할부 판매를 미끼로 유혹한다 (473).

ü  현대 시인은 침몰하는 선박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맨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주의로, 이성의 꿈으로 도피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젊은이의 자발적이고 파괴적인 폭력에 매료되어 즉흥주의자가 되었다 (474).

ü  나는 우리 당, 칠레 공산당에서 소박한 사람들을 만났다. 개인적인 허영심이라든가 폭압적인 권력이라든가 물질적인 욕망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나는 이처럼 공공의 선, ,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어 행복했다 (474).

ü  겸손에서 배울 점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회의주의에 안주하여 인류이 고통을 외면하는 자만심에서는 배운 게 아무것도 없다 (474).

ü  피델 카스트로는 아바나 입성에 성공하고 두 주 뒤에 카라카스를 잠시 방문했다 (474).

ü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쿠바 혁명의 젊은 지도자를 열렬히 환영했다 (475).

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카스트로의 연설은 일종의 계시 같았다. … 제아무리 훌륭한 노동운동가와 정치인들이라도 연설할 때 내용이야 어떻든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을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카스트로의 연설은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럽고 가르치는 투의 언어를 구사했다. 카스트로는 가르치면서 자신도 배우는 것 같았다 (475).

ü  체 게바라와 첫 만남은 전혀 달랐다. 아바나에서 만났다 (477).

ü  체는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전쟁, 전쟁우리는 항상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데, 전쟁을 한 번 치르고 나면 전쟁 없이는 못살아. 날마다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이지.” … 나는 이 말에 경악했다. 전쟁은 위협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그 날 헤어진 이후로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 뒤, 체는 볼리비아 산악 지대에서 전투를 벌였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체를 생각한다. 영웅적인 전투를 벌이면서도 무기 곁에 시집 놓을 자리를 항상 마련해 둔 명상의 사나이가 눈 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479).

ü  쿠바 혁명이 성공을 거두자 수많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별안간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말뿐인 희망을 붙들고 절망의 세월을 보낸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책 어느 갈피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479).

ü  그런데 생면부지의 쿠바인 피델 카스트로가 느닷없이 나타나 희망이라는 놈이 날아가지 못하게 머리채인지 발목인지를 붙잡아 자기 집 식탁에, 아메리카 민중의 가정에 앉혀 놓은 것이다 (479).

ü  그때부터 우리 라틴아메리카인들은 현실이 된 이 희망의 길을 따라 전진했다. 그러나 항상 가슴 조이며 산다. 지극히 강대하고 지극히 제국주의적인 이웃나라가 쿠바를, 희망을 짓밟으려고 한다 (480).

ü  오래 전부터 페루 작가들은 (그 중에는 내 친구들도 많다) 나에게 훈장을 수여하라고 페루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 내 시 <마추픽추 산정>은 페루인 삶의 일부가 되었다. 아마도 내가 페루인들의 가슴 밑바닥에 잉카 시대의 거대한 돌덩어리처럼 잠들어 있는 감정을 잘 표현한 모양이다 (480).

ü  나는 페루에서 훈장을 받았다. 이번 훈장은 영사적 수행의 보답이 아니라 시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칠레와 페루 국민 사이에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 과거에 흘린 피를 위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운동선수, 외교관, 정치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마음의 국경에서 자유로운 시인도 나서야 한다 (481).

ü  19세기 말에 발발한 태평양 전쟁, 일명 초석 전쟁( 1879~1884)을 말한다. 초석 산지를 둘러싸고 볼리비아와 칠레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촉발된 이 전쟁에서 페루는 볼리비아와 연합하였으나 패배했다. 그 결과 볼리비아는 태평양 연안의 아타카마 사막을 칠레에 빼앗기고 내륙 국가가 되었다 (481).

ü  그 무렵 미국도 여행했다. 그곳에서 국제 팬클럽 대회가 열린 것이다 (481).

ü  노골적인 반제국주의 시가 미국 청중 사이에서 메아리치고 있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이곳 뉴욕에서는 물론이고, 워싱턴과 캘리포니아에서 학생과 일반인들이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내 시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미국에 있는 우리 민중의 적은 바로 미국 민중의 적이라는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482).

ü  방문 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아무래도 이 자리를 빌려서 경의를 표해야 겠기에 이야기하련다. 미국 작가들은 나에게 입국 비자를 발급하라고 끈질기게 정부를 압박했다. 국무성을 찾아가 내 입국을 계속 거부하면 펜클럽 명의의 비난 성명서를 발표하겠다고 위협한 모양이다 (482).

ü  시적이고 정치적 투쟁으로 점철된 미국 방문을 마치고 칠레로 돌아오자마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미국에서 그렇게 쿠바 혁명을 지지하고 옹호했는데도, 이번 방문을 굴종과 배신이라고 비난하는 쿠바 작가들의 편지였다 (482~3).

ü  그 무렵 우리 라틴아메리카 공산주의자들은 심각한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484).

ü  칠레 공산당은 내부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 차이를 극복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이 분열의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485).

ü  나 역시 <대장의 노래>를 쓸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이 시집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 시집 덕분에 나는 시집 한 권을 통째로 쿠바 혁명에 헌정한 최초의 시인이 되었다 (485).

ü  나는 혁명, 특히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간혹 오류와 불의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아무도 피할 수 없다. … 나는 지금도 쿠바 혁명과 쿠바 민중과 고귀한 혁명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또 칭송한다. 결점 없는 사람은 없다. 나도 많다 (485).

 

<12: 희망과 고난의 조국>

ü  예전 무정부주의자들은 흔히 (오늘날의 무정부주의자들도 미래에 그러겠지만0 무정부적 자본주의자라는 아주 안락한 도피처로 흘러 들어 갔다. 이 도피처는 정치적 저격수, 사이비 좌파와 가짜 독립 투사들이 모여 드는 곳이다. 억압적인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를 가장 위험한 적으로 여기며, 일단 조준하면 대부분 목표물을 정확하게 타격한다 (487).

ü  사회 변혁의 위험은 개인주의적 반항이 아니라 조직적인 대중과 광범위한 계급 의식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487).

ü  극단주의자보다 수천 배나 위험한 존재가 스파이다 (488).

ü  라틴아메리카를 휩쓴 낭만적 혈기와 난잡한 게릴라 이론은 어떤 면에서는 위험 속으로 뛰어들고 또 이런 형태를 숭배하는 경향을 촉진했다. 어쩌면 이런 시대는 체 게바라의 영웅적인 죽음과 더불어 막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489).

ü  물론 체 게바라의 경우처럼, 강력한 지도자의 자질을 겸비한 위대한 게릴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게릴라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남보다 더 용감하고 운이 더 좋고 사격 솜씨가 더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잘 이끌어 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489).

ü  공산주의자들: 당에 입당하고 나서 십 수 년이 흘렀는데, 지금도 만족스럽다. 공산주의자들은 가족처럼 지낸다. 풍파에 시달려 피부는 거칠어졌어도 마음만은 따뜻한 사람들이다…. 어딜 가나 공산주의자들은 매를 맞는다. 오로지 공산주의자들만 얻어맞는다. … 무정부적 자본주의 만세, 릴케 만세, <코리돈 (동성애를 다룬 소설)>을 발표한 앙드레 지드 만세, 온갖 종류의 신비주의 만세, 무엇이든지 다 좋고, 다 영웅이다. 무슨 신문이든지 다 발행해야 한다. 누구든지 출판할 수 있다. , 공산주의자는 예외다. … 카니발 만세, 급진 좌파 변장, 자선 단체 사모님 변장그러나 공산주의자가 입장하지 못하게 주의하라. … 공산주의자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다. 우리는 주관적인 것, 인간의 본질, 본질의 본질을 걱정하자. 그러면 우리 모두가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누린다. 자유란 얼마나 위대한가! 공산주의자는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우리는 본질을, 본질의 본질을 걱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이렇게 지난 몇 해가 지났다. 재즈 시대가 지나가고 소울이 유행했다. 우리는 추상화를 이해하려고 허우적거렸다. 몸서리치는 전쟁이 일어나 목숨을 앗아 갔다. …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민중은 조직화되고, 게릴라전과 파업도 여전하다. 쿠바와 칠레는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수많은 남녀가 인터내셔널가를 부른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이제 중국에서도, 불가리아에서도,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있다. 시급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 행위를 금지시켜야 한다. 정신의 중요성을 좀 더 강조해야 한다. 자유 세계를 좀 더 찬양해야 한다. 몽둥이를 더 휘둘러야 한다. 달러를 더 뿌려야 한다. 몽둥이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는 하나 헤르만 아르시니에가스의 독설도 두렵다. 이대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 한편 태양계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이 낡은 체제를 제외한 모든 것이 변화하려고 몸부림친다. 이 낡은 체제는 중세의 거대한 거미줄에서 태어났다. 쇠보다 단단한 거미줄에서. 그러나 변화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변화를 쟁취하고, 변화를 꽃피운 사람들이 있다…. 제기랄! 속절없이 봄이 와 버렸네! (493).

ü  1969년에는 1년 내내 이슬라네그라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 겨울은 자욱한 안개 속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매일 지피는 벽난로가 한결 운치 있게 보였다. 해변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모래 때문에 주변 세계가 한결 고즈넉했다 (494).

ü  나는 시가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정의라든가 시 경향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학에 관한 논의는 죽기보다 싫다. … 월트 휘트먼은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부가적인 요소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나 벌거벗은 창조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 (495).

ü  그 해 나는 노트를 몇 권이나 바꾸었다. 여기 어딘가에 초록색 글씨로 메워 놓은 노트가 있을 것이다. 내가 채워 나간 노트는 책이 되었다. 마치 변신을 거듭해서 움직이지 않던 것이 움직이는 것으로, 유충이 반딧불이로 변하듯이 (495).

ü  정치 활동은 늘 천둥처럼 느닷없이 다가왔다. 집필을 중단하고 군중 속으로 돌아갔다 (496).

ü  나는 군중에게 인생을 배웠다. 시인의 타고난 수줍음으로, 수줍은 사람의 두려움으로 군중에게 다가가지만, 그 품에 안기는 순간 나는 본질적인 다수의 한 부분으로, 거대한 인간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으로 변모한다 (496).

ü  고독과 군중은 이 시대 시인이 떠맡아야 하는 기본 의무이다. 고독 속에서 내 삶은 풍부해졌다 (496).

ü  1분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다 (496).

ü  1969년 어느 날 아침, 당서기와 몇몇 동지들이 바닷가의 내 은신처로, 이슬라네그라의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 달라고 부탁했다. 예닐곱 정당이 참여할 인민연합의 예비 후보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496).

ü  나는 우리 당이 제안한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면서 당의 방침을 명백하게 밝혔다 (497).

ü  아옌데가 인민연합의 유력한 후보로 부상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나는 당의 사전 승인을 받고, 재빨리 후보 사퇴 성명서를 준비했다 (499).

ü  미국 회사가 칠레산 구라에 대해 수입 금지 조치를 취하자 유럽 전역이 술렁거렸다 (505).

ü  칠레에서는 지인과 낯선 사람 수백 명이 칠레 구리를 지키기 위해 국제 해적단에 맞서고 있는 나에게 격려 편지를 보내 주었다 (505).

ü  칠레에 대한 인지도도 놀랄 만큼 향상되었다 (505).

ü  전 세계 사람들은 칠레가 진정한 독립국을 향한 획기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인민 연합 정부는 타인의 손에 놀아나던 구리 광산을 당당하게 국유화함으로써 칠레의 주권을 확립한 것이다 (506).

ü  칠레로 돌아와 보니, 거리와 공원의 초목은 새 단장을 하고 나를 반겼다 (506).

ü  나는 이런 선전물의 어조와 그 의미를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등장하기 직전 유럽에서 살아 봤기 때문이다.총력을 기울여 낭설을 유포하고,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 필요하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장래의 일을 부정하고 증오하는 것이었다. 저들은 인간 삶의 본질을 바꾸려고 들었다 (507).

ü  우익 반동 세력은 필요할 경우에는 무자비산 테러리즘을 동원했다 (507).

ü  지배 계급이 제정한 법률은 계급에 따라 적용이 달라진다 (507).

ü  아옌데가 승리하자 지배 계급은 길길이 날뛰었다. 자기네들이 심혈을 기울여 제정한 법률이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곧이어 주식, 보석, 현금, 금화를 싸 들고 아르헨티나, 스페인, 그리고 멀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도망갔다. 민중이 두려운 나머지 북극이라 할지라도 한달음에 내달렸을 것이다. 나중에 그들은 돌아왔다 (508).

ü  그 무렵 과두지배 세력은 헤진 옷을 수선하여 파시스트 복장을 만들었다. 구리 광산 국유화가 단행된 이후, 미국은 더욱 철저한 봉쇄 정책을 펼쳤다. 미국의 국제전화전신회사 (ITT)는 전임 대통령 프레이의 동의를 얻어 기독민주당을 우익 파시스트의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508).

ü  파시즘은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며, 절대적인 복종만 요구할 뿐이다 (510).

ü  1964, 기독민주당의 후보 프레이가 대통령에 당선될 무렵에는 상황이 많이 변했다. 아옌데와 맞붙은 프레이의 선거 운동은 전례 없이 험악한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511).

ü  미국 CIA는 섬뜩하고 잔인한 구호가 난무한 이 대통령 선거에 2천만 달러를 퍼부었다 (511).

ü  아옌데가 당선되고 한 달 후, 아직 대통령으로 취임하지 않았을 때, 살디바르 장관은 칠레가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는데, 그 원인은 아옌데 당선에 대한 국제적인 반응에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는 바로 이렇게 씌어지는 것이다. 최소한 살다바르 같은 비뚤어진 기회주의 정치인은 이렇게 쓴다 (512~3).

ü  (칠레에) 작은 대통령은 수없이 많지만 위대한 대통령은 발마세다와 아옌데 두 명뿐이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출신 배경은 동일하다. 여기 칠레에서는 귀족이라고 부르는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이다 (514~5).

ü  두 사람 모두 평범한 과두지배 세력이 보잘것없이 만들어 버린 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다. 발마세다는 초석을 외국 기업에 넘기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다가 자살했다. 아옌데는 칠레의 또 다른 지하 자원인 구리를 국유화했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 … 두 경우 모두 군이 사냥개 역할을 했다. 발마세다의 경우에는 영국 기업이, 아옌데의 경우에는 미국 기업이 이 같은 군부의 만행을 조장하고 후원했다 (515).

ü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발마세다는 사람을 사로잡는 웅변가였다. 그러나 거만한 성격이어서 갈수록 일인 통치자로 변해 갔다. … 주변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났기 때문에, 또 그만큼 고독했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다. 발마세다를 도와주어야 할 민중은 힘이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예언자나 몽상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위대한 꿈은 꿈으로 남았다. 그가 죽은 후 포악한 외국 기업인들과 크리오요 국회위원들이 초석을 차지했다. … 수많은 민중이 전장에서 흘린 피는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515).

ü  아옌데 시대의 민중은 발마세다 시대처럼 어수룩하지 않았다.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강력한 노동자 계급이 존재했다. 아옌데는 집단적인 지도자였다. … 바로 이런 이유로 아옌데가 짧은 시간에 이룩한 업적은 발마세다의 업적보다 더 위대하며, 나아가서 칠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업적이기도 하다 (516).

ü  불멸의 국민적 가치를 지니는 아옌데 정부의 정책과 업적은 칠레 해방을 원치 않는 적들의 분노를 샀으며, 그 비극적인 상징이 바로 대통령 궁 폭격으로 나타났다 (516).

ü  나는 지금 이 회고록의 몇 줄을 위대한 동지 아옌데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 지 사흘 후에 서둘러 쓰고 있다. 저들은 살해 행위를 은폐하고 비밀리에 매장했다 (516).

ü  그러나 외국 언론들의 견해는 다르다. 공중 폭격 직후, 수많은 탱크들이 작전에 돌입했다. 단 한 사람, 칠레 공화국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노린 대담한 작전이었다. 아옌데는 불꽃과 연기로 뒤덮인 집무실에서 혼자 당당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절대 사임하지 않을 것이기에 기관총을 난사해야 했다. 시신은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비밀리에 매장했다. 무덤까지 가는 길에 동행한 사람은 오직 한 여인, 전 세계인의 애도를 한 몸에 안은 여인이었다. 시신은 칠레 군인들이 난사한 기관총에 맞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저들은 또다시 칠레를 배신했다 (517).

 

IP *.204.15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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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06.17 09:55:42 *.12.21.21
차곡 차곡 채워짐이 맞어. 언니의 인용문 정리는 탁월해! .......예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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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7 10:11:17 *.204.150.153
파하하하. 인용문 정리 예술이란 것도 있어? ㅎㅎㅎ

다른 사람 인용문까지 살펴보는 너야말로 진정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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