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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14시 08분 등록


'신동엽'. 연구원을 시작할 무렵, '1년간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확인하면서야 알게 된 그 이름 앞에서 나는 사실 조금 부끄러웠다. 시인 신동엽은 모르고, 개그맨 신동엽만 알았다고 한 누군가의 말이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다시 그의 이름을 저만치 멀리에 밀어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코 앞에 과제가 닥치고서야 그의 이름을 급한 마음을 다독이며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무식한 건 나뿐이었던가 보다. 그를 기억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자료들을 이리저리 잘 모아두었다. 우리는 연구원 북리뷰팀 모임에서 좋은 '저자에 대하여'를 위한 조건을 정해두었다. 그 첫번 째 조건은 베껴온 자료가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 적을 것'이었다. 아~ 잘 알지도 못하는 이의 생애에 대해서 내가 무슨 견해를 가질 것이며 어떤 분석을 할 수 있을까? 이런 핑계를 바닥에 깔고 이번에는 나 자신의 언어 대신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정리해놓은 자료를 통해 민족시인, 신동엽을 살펴볼까 한다.

제일 먼저 살펴볼 것은 약력을 통해 살펴본 신동엽의 생애이다. 개인 홈페이지(http://my.dreamwiz.com/garaya/)에 나름의 기준으로 잘 정리해놓은 자료가 있어서 그것을 빌려왔다.


1. 태어날 당시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남.

2. 유년 시절
신동엽의 유년 시기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수탈정책을 극도로 강화하여 헐벗고 굶주림이 지배하는 절대적 빈곤의 시대였다.

부여초등학교 시절에 신동엽은 과묵하고 내향적 성격이었다. 곧잘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고, 6년간 내리 우등상을 탈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 6학년 때 '내지성지참배단'의 그 학교 대표로 뽑혀 보름간 일본을 다녀 오기도 했다.

3. 전주사범 시절
1943년 입학. 그 절대적 빈곤의 시대에 가난한 수재들이 열망하는, 또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사범학교다(학비가 훨씬 적게 들고 의무적이지만 초등학교에 발령이 나기 때문에). 신동엽은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문학,종교,사상서에 파묻혀 살았다. 일제의 무리한 근로봉사와 굶주림으로 건강을 잃어가던 이 시기가 비로소 민족의식에 눈뜬 시기라고 추정해 봄직하다. → 재학 중의 8·15해방 : 그 당시 그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그 후, 1948년 남한 총선을 반대한 동맹 휴학 가담으로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또, 그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 학생들에게도 끌려가 심한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좌·우익에게는 '중립'으로 여겨지는 그의 소박한 '민족주의'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이데올로기보다 민중 자체가 더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범적인 식민지 학생이나 혼자만의 문학세계에 빠져있던 모습과는 다른 내면의 변화를 나타낸다.

4. 단국대학 시절과 6·25
1949년 사학과 입학. 그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진정한 민족주의가 좌절된 정치적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恨)의 서정으로 표현한 <나의 나>를 쓴 것이 이 때이다.(발표는 1962년 6월)

6.25 전쟁은 신동엽의 정신과 육체에 치명적 손상을 입힌 시기이다. 7월부터 9월까지 부여에서 인민군의 강제부역을 함으로써 수복 후 부산으로 도피, 12월 방위군으로 징집됨. 군간부들의 부정부패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이듬해 2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귀향한다. 오랜 요양을 필요로 한 이 귀향길에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민물의 날게를 생으로 잡아 먹는 바람에 뒷날 간디스토마로 고생하다 간암으로 요절하게 된다.

→백제 사적과 갑오농민전쟁 전적지 답사 : 대전 전시연합대학 재적 중. 이는 그가 1960년대 대표적 참여 시인이 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반봉건·반외세의 갑오농민전쟁에서 그는 '적'을 인식하게 되는 확실한 역사의식을 가진다.

5. 졸업 후
1953년 졸업 후 서울에서 친구의 헌책방 일을 하며 자취를 했다. 여기서 소설가 현재훈과 아내 인병선을 만난다.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부여에서 신혼집을 차렸으나 가난은 여전했다. 아내의 양장점 개업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자 구상회 등 문학지망생들과 어울려 시인이 될 꿈을 키운다.

그 후 보령농고에 취직하였으나 디스토마가 발병해 각혈과 고열에 시달리게 되면서 가족과 헤어져 본가에서 요양한다(폐결핵으로 오인하여). 이때 시쓰기에 몰두해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를 썼고(1959년 조선일보에 20여행이 삭제되어 실림), 이 시로 인해 시인 박봉우와 만나 참여시인으로서 둘도 없는 지기가 되었다.

6. 서울 생활
교육평론사 재직, 본격적인 시인으로서의 삶의 시작. 1960년 [교육평론]에 <싱싱한 瞳子를 위하여>를 발표, 미래 지향적 태도를 보인다.

7. 4.19 혁명 시기
4.19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1960년대 대표적 참여시인이 되게 했다. <학생혁명시집>엮어 4.19의 정신을 자유와 정의로 읽고, 승리와 그 감격을 노래했다. 그러나 미완의 혁명은 쓰라린 좌절도 함께 가져다 주었다.

→명성여고 교사로 재직 : 1961년. 이로써 사망할 때까지 8년동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혁명의 좌절로 인한 정신주의에 몰두한 시기로 정신사적 시론 <時人精神論>을 발표(1961.2), 무정부주의·동양적 정신주의·민족주의를 나타낸 시관을 보여준다.

8. 5.16 이후
4.19의 좌절로 더욱 정신주의에 침잠한다. 정지척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1962년 건국대학원에 입학, 정신주의로 도피해 버티고자 한다. 이 때 쓴 시는 참여시 성격이 강한 작품에 동양적 형이상학으로서의 정신주의가 지배하고 있다(시집<阿欺女>).

그 후 <주린 땅의 指導原理>(1963.11)에서야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정신주의 우세로부터 돌아와, 현실 참여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띠게 된다.

9. 6.3 사태
1964년 굴욕적 외교인 한일회담 일정합의와 정보기관의 학원사찰로 인한 학생 시위. 그러나 계엄 선포와 많은 학생들,정치인,언론인이 구속되는 결과를 낳고 좌절한다.

→이로써 신동엽은 정신주의의 안주에서 현실로 뛰쳐나오게 된다.(한일 협정 비준반대 서명참여).적극적 현실 참여로 나온 <발>,<4월은 갈아엎는 달>등이 발표된다.

10. 절정기
1967-1968. 개인 시사에서의 절정기.

→1967년 : 참여시의 극점인 <껍데기는 가라>(1월), 대작 <錦江>(12월)을 발표, 1960년대 참여시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 하게된다

→1968년 : 시인으로서의 삶이 절정에 이른 시기.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의 한 해 동안 가장 왕성하게 창작을 했다. <봄은>(2월), 오페레타<석가탑>, <술을 많이 마시고 난 어제밤은>(6월), <여름고개>(8월), <散文詩1>(11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등 많은 유작이 창작되었다.

이 해 그를 확고한 참여시인으로 평가했던 김수영의 죽음을 체험한다.

11.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사망. 3월 간암 진단을 받은 후, 퇴원하여 한약으로 버티면서 신체가 망가지고 혼수상태의 사경을 헤메며 투병하다 문병 온 남정현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다음으로 찾은 자료는 문화관광부 홈페이지(http://person.mct.go.kr)의 문화인물자료관에서 찾은 그의 삶과 대표적인 작품에 대한 자료이다.


신동엽(申東曄)
1930~1969/민족시인

생애 및 업적
신동엽은 1930년에 태어나 1969년 간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시집 "아사녀" 한 권과 서사시 "금강"을 합동 시집으로 냈을 뿐이다. 살아생전 발표한 시는 20여편에 불과하고 몇 편의 산문을 간헐적으로 선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데뷔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비롯하여 '발', '껍데기는 가라'등의 의미와 영향력은 작품의 양과는 무관하게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타계한 이후 생전에 발표한 시와 사후 추모 특집으로낸 시 등을 묶어 "신동엽전집"이 간행되고 특히 80년대 이후에는 성숙해져가는 민주 민중운동과 더불어 그의 시는 민족의 현실적 문제를 일깨워가는 중요한 전거가 되었고 그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활발하게 진전되어 백 여편에 이르는 논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김수영과 더불어 시에서의 참여 문제 즉 구체적인 현실과 역사를 시적 제재로 과감하게 도입하여 형상화하고 일제시대 이래 우리 시에서 제외되거나 기피되었던 현실의 문제를 복권시킴으로써 시도 우리 삶과 역사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이며 사랑이다. 좀더 구체적인 현실과 관련지어 말하면 민족의 평화로운 통일이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삶에 대한 강렬한 희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런 삶의 원형을 우선은 원시공동체적 삶에서 찾지만 그런 삶이 이후에 전개되는 역사적 과정에서 생기기 마련인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를 타파하는데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봉건시대의 착취 관계는 물론 자본주의 시대 이후의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도 생태적으로 거부한다.

또한 착취와 피착취의 민족단위 형식인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도 근본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의 시적 형식은 저 유명한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편이지만 그것의 서사적인 형식은 서사시 '금강'이었다. '금강'은 민족현대사의 하나인 갑오농민전쟁을 중심제재로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들여다보고 있다. 더 쉽게 말하면 우리 민족이 근대사회로 이행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근대적 자아 성취의 결정적 계기를 갑오농민전쟁으로 보았으나 제국주의 외세의 간섭으로 좌절되는 비극을 이후의 6.25, 4.19, 5.16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다시 확인하여가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도는 '금강'에 등장하는 가공인물 '신하늬'를 통해 관찰하고 있다.

신하늬라는 인물을 통해 이미 역사에 편입된 갑오농민전쟁을 호출하여 그 사건을 재구성하고 또 그 좌절의 원인을 살펴봄으로써 이후의 역사에서는 그 좌절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되겠다는 뜨거운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지와 성취는 그가 살았던 삶이 문제적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우리 현대사적 비극인 6.25 당시 그 비극의 상대적 주체인 남과 북에 동시에 가담하고 동시에 그로부터 이탈한다. 물론 6.25 이후 부여에 인공이 선포된 3개월 동안의 일이지만 당시는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으로서 이른바 인공에 협력하고 다시 부여가 수복되었을 때에는 처형을 피해 산으로 갈 수밖에 없던 삶을 살았다. 또한 그러한 삶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해 국민방위군으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이 텆 집으로 귀환하는 중에 닥친 극도의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 날로 먹은 참게에서 참게를 숙주로 한 간디스토마균에 감염되어 결국 몇 년 후 간암으로 타계하기에 이른다.

6.25를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으로 본다면 그 수난의 와중에 그는 동시에 양쪽편이고 동시에 양쪽편이 아닌 이중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삶의 딜레마는 그의 작품 속에서도 어김없이 관철된다. 데뷔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는 물론 데뷔 이후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진달래 산천'도 그렇고 그 이후의 작품에서도 이른바 민족이 양편으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형태의 삶을 못 견뎠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표현을 빌면 그 어느 편에도 가담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야만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민족사의 큰 물줄기로 보자면 민족의 과거와 미래를 온전히 기억하고 또한 그것의 현재를 언제나 선지자적 안목으로 통관하며 이를 바람직한 모습 하나로 통합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삶과 시를 관철해나간 진정한 의미의 민족시인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시인정신론이란 글에서 '하나의 시가 논의될 때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이야기해놓은 그 시인의 인간정신도와 시인혼이 문제되는 것이며 "철학, 과학, 예술, 정치, 농사 등 현대에 와서 극분업화된 이러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인식을 전체적으로 한 몸에 구현한 하나의 생명이 있어, 그의 생명으로 털어놓는 정신어린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가히 우리시대 최고의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가 타계한 후 3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건 데 그 말의 모범 사례를 본인이 먼저 솔선하여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삶과 시는 정녕 조국의 이 산하에 봄이면 지천으로 피어나는 꽃들과 향기로운 풀들과 어울려 민족사의 진전과 함께 영원할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가 감히 불러주는 민족시인이란 이름과 함께.



이렇게 두 자료를 옮겨 놓고 다시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보니 정작 원하던 자료가 걸렸다. '시 서너 편을 소개하고, 그의 약력을 간략히 알리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며 신동엽과 관련된 다른 사이트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는 이 사이트에는 그야말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자료의 양이 조금 많아서 앞의 두 자료와 순서를 뒤바꾸거나 일부 자료를 삭제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어차피 별로 읽는 사람도 많지 않은 리뷰라서 그냥 편하게 올린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문학은 수도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괴로움이요, 영원한 부정이요, 영원한 모색이다.

안이하게, 세계를 두 가지 색깔의 政體 싸움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軍事學的, 盲目技能學的 고장난 기계하고는 전혀 인연이 먼 연민과 애정의 세계인 것이다.

- 이른바 '참여시' 논쟁에서 선우휘에 답하는 글 중에서 <신동엽 전집/ 창작과 비평사>

시인 신동엽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망명지>에 업데이트를 해야한다고 생각은 해오고 있었지만 막상 그에 대해서 쓰려고 하면 쉽게 쓰여지지 않는 탓에 시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시작조차 할 수 없었던 까닭이야 일단 과문(寡聞)한 탓으로 돌려야 하겠지만 그 안에는 '감히'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던 탓이 더욱 크다. 그만큼 내 안에 시인 신동엽에 대한 존경심은 외경의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겁없이 그에 대해 글 한 줄 덧대어 보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역시 피해갈 수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인터넷 페이지들이 생각외로 적다는 판단에서였다. 대개는 그의 시 서너 편을 소개하고, 그의 약력을 간략히 알리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 안타까움에서이다.(물론 앞으로 소개하겠지만 좋은 사이트도 존재한다.)

내가 신동엽 시인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어떤 계기로 그를 알게 되었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아마도 시를 좋아하던 친구의 소개가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이야 세월이 많이 좋아져서 신동엽을 비롯해 김수영 등 여러 좋은 시인과 작가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배울 수 있지만 내가 고등학생이던 무렵에는 그런 이들의 시를 드러내놓고 읽는다는 것 자체가 '문제적 자아를 지닌 학생'으로 찍히는 첩경이었다. 다행히도 여러 문제아들과 함께 뒹굴면서 우리들은 신동엽, 김수영, 신경림, 김지하, 문병란, 양성우 등의 시집을 읽었다. 우리들은 작은 동아리를 만들어 <늘 깨어있는 글>이라는 언더그라운드 잡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돌려보면서 토론하고, 카페를 빌려 시낭송회를 개최하기도 했었다. 그때가 1987년, 1988년 무렵의 일이었다. 우리들은 카페와 성당 지하의 주일학교 교실을 빌려 다른 학교 문예 서클 학생들까지 초빙해서 함께 시를 읽으며 고민했었고, 그 멤버들이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은 87년 연말 대선을 앞두고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서울지역고등학생 운동연합'의 농성 현장에서 였다.

우리는 신동엽 시인을 통해 하늘을 보았고, 잠시나마 열린 하늘을 통해 자유의 푸르름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가슴시린 하늘은 모두의 가슴에 때로는 가슴 뜨거운 희열로, 때로는 상처로 자리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들은 그때 하늘을 보았던 것인가?

이야기하는 쟁기꾼, 신동엽 시인의 유년기

신동엽은 일제의 수탈이 한창이던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해 7월엔 함경남도 단천에서 군민 수천 명이 삼림조합에 반대해 군청과 경찰서를 습격했고, 그 와중에 일본 경찰의 발포로 1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고, 8월에는 평양 고무농장 노동자 1,800여명이 임금 인하 조치에 항의하는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독자였던 그의 부친 신연순에게는 전처 소생의 남매가 있었으나 아들이 돌을 넘긴 얼마 후 사망해 신동엽은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시인의 모친은 신동엽을 낳은 뒤로도 아이를 일곱이나 낳았지만 모두 딸이었고, 그 중 위로 셋은 일찍 죽고 만다. 아이가 태어나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기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던 데다가 아들로는 그 하나였기 때문에 그의 부모가 신동엽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지금은 부여시 한 복판이 된 그의 생가엔 얼마전까지만 해도 시인의 부친이 생존해 거처하고 있어서 생가를 찾는 이들에게 고인이 된 시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고 한다.

어려서 형제를 여럿 잃은 그의 유년 시절은 친구들과 뛰어놀기 보다는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을 적이 더 많았다고 한다. 어린 신동엽은 자신의 이복 누이인 신동희(1928년생)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고 하는데, 이는 태어나자마자 친어머니를 잃은 누이에 대한 애처로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를 마치 위인전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처럼 비유하는 것 같아 부적절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정이 많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와 알고 지낸 동료 문인들의 일반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1937년 부여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그는 6년간 내리 우등상을 타며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6학년 되던 1942년 4월에는 부여 국민학교 대표 자격으로 일본 '내지 성지참배(內地聖地參拜)'라는 것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부모가 거는 기대는 컸다. 가난한 집 수재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신동엽 역시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학비가 들지 않는 전주 사범에 진학했다. 사범학교는 지방학생들 모두에게 기숙사 생활을 시켰고, 학비를 모두 관에서 지원해주었기 때문에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사범학교는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초등 교원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엄격한 규제를 통해 그들이 요구하는 교원을 양상하고자 숱한 제약과 통제를 가하는 곳이기도 했다.

더욱이 일본은 1941년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내지(일본)인들에게 조차 극도의 내핍 생활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 무렵이었으니 비록 관에서 제공하는 식사라 할지라도 형편없는 것이었다. 신동엽의 아버지는 학교측에 사식원을 제출해보기도 했지만 학교측의 답변은 '국난시라 인고단련을 해야한다'며 이를 허가해주지 않았다. 결국 생각다 못한 그의 아버지는 한 달에 서너 차례씩 음식을 만들어 자전거에 싣고 부여에서 전주를 왕복했다고 한다. 신동엽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찾아온 분단상황과 남한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은 같은 민족끼리의 좌와 우로 갈린 내분을 불러 일으킨다. 이 와중이었던 1948년 신동엽은 이유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전주 사범을 퇴학당하고 만다. 이 해에는 남한 단독선거 반대 전국 총파업시위가 벌어졌고, 제주도에서도 단정 수립에 반대하며 4·3항쟁이 일어났다. 그런 중에 학교 공부보다는 이런저런 독서를 즐겨하던 그를 두고, 좌우 양측에서 밀고 당기기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매우 컸으리라 생각된다. 서로가 극심하게 대립하는 동안 중도의 길을 택한 사람은 양측으로부터 배척당하기 마련이고, 해방 정국에서 그런 길을 모색하려 했던 정치가들 - 여운형, 김구, 김규식 등 - 은 암살당하기 까지 하는 판국이었다. 어쨌든 그가 퇴학당한 것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참여했기 때문인 것 같다.

분단과 한국전쟁, 국민방위군 사건과 신동엽

전주 사범을 중도에 그만두긴 했지만 그에게 초등학교 교원 자격은 인정되어 인근의 어느 국민학교에 발령을 받고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임 사흘 만에 전주 사범 시절 그와 대립하던 사람이 마침 같은 학교에 와 있었던 까닭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 그의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밭 600평을 팔아 신동엽으로 하여금 단국대 사학과의 등록금으로 주었다. 박봉우 시인의 회상에 의하면 그가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대학도 이름을 잘못 알고 찾아갔다가 귀찮아서 그냥 그 학교 원서 사 가지고 온" 탓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대학에 들어간 신동엽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땅에 들이닥친 외세에 의한 분단 현실에 대해서 고민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고향인 부여로 피난갔다가 그곳에서 인민군에게 붙들려 7월부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강제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뒤 그는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그해 12월엔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여러 곡절 깊은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그가 휘말려든 것이다. 원래 국민방위군이란 것 자체가 중국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면서 이승만 정권이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자 혹시라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될지 모를 젊은 장정들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서 급조해낸 일종의 예비군과 같은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엄동설한에 소집된 장정들에게는 피복이나 식량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그나마 지급되어야 할 물품들은 중간 관리자들이 모조리 착복해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장정들은 살인적인 추위 속에 두 사람 앞에 하나씩 지급되는 가마니 한 장씩을 덮고 자야했다. 그 결과 소집된 50만 명의 젊은 장정들 중 무려 5만명이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전체의 80% 가량이 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신동엽도 이 때 국민방위군에 소집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음은 물론이다. 이듬해 2월 다시 귀향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그는 민물게를 생으로 잡아먹는 바람에 간디스토마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 상한 그의 간은 영영 회복되지 않아 결국 그가 나이 40세도 안되어 요절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신동엽 시인을 두고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 시인이라고 평한다. 그는 외세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기엔 좌우의 극심한 갈등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연이어 들이닥친 한국전쟁이 그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와 아픔을 남겨주었는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깨우칠 수 있는 일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면서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는 '국군이 북한 괴뢰군을 잘 막고 있으니 서울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의 발표를 믿고 시민들이 피난 보따리를 내려놓던 그 시간에 정부는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다리를 폭파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후의 사태가 정부의 발표를 믿고 미처 피난가지 못한 국민을, 국민을 버리고 피난가 버린 정부가 처벌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수복후 서울시민을 도강파(渡江派)와 비도강파(非渡江派)로 분류하고 피난가지 않은 사람들을 부역자라는 이유로 처벌했다. 그리고 1950년 7월14일 이승만은 한 장의 서한을 통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에게 넘겨 준다. 이것이 바로 '대전협정'이다. 이 날 이후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현재까지 미군이 가지고 있으니, 이는 주권 국가의 수치다. 시인 신동엽은 그런 시기를 살아왔던 것이다.

시인의 사랑과 생활

전쟁 기간 동안 '대전 전시 연합대학'을 졸업한 신동엽은 전쟁이 끝난 1953년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친구의 헌책방을 일을 도우며 자취 생활을 했다. 그 해 초겨울 어느 따뜻한 날 신동엽은 당시 이화여고 3학년생이었던 단발머리 소녀 인병선(印炳善)을 이곳에서 만난다. 그녀는 남편 신동엽과 사별한 이듬해인 1970년 <여성동아>에 「당신은 가신 분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시인과의 첫만남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우리가 만난 것은 내가 여고 졸업반이던 해 겨울 어느 따뜻한 날이었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서 한낮이 되자 나는 집 근처 책방으로 신간 서적을 사러 나갔다. 가끔 들러 주간지와 월간지를 사오던 서점이었다. 몇 가지 뒤적이다 찾는 것이 눈에 띄지 않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방 주인에게 "○○ 없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바로 등뒤에서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 책은 아직 못 갖다 놓았읍니다만 그 대신 이건 어떨까요?" 그리고 내 어깨 너머로 책 한 권을 빼들었다. 나는 책을 따라 자연히 그와 마주섰다. 그리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속 깊이 “아!”하고 부르짖었다. 그 크고 빛나는 눈! 비록 작달막한 키에 빛 바랜 허름한 군복점퍼를 걸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처럼 빛나는 눈을 본 일이 없었다. 그 눈빛은 너무 깊고 넓어 나의 온 가슴을 채우고도 남는 것 같았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의 해후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나를 그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 것 같으면 맵찬 눈매를 한 소녀가 가끔 들러 대중잡지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예지 아니면 사상지 그리 어려운 학술 서적만 사가더란다.

인병선은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고, 두 사람은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해서 부여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은 매우 가난했고, 아내 인병선이 양장점을 개업하면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신동엽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인의 꿈을 키우며 보령농고에 취직한다. 그러나 간 디스토마가 발병해 각혈과 고열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병을 폐결핵으로 생각했으므로아내와 헤어져 본가에서 잠시 요양하게 된다. 그는 이 때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창작하여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하게 된다. 이때 예심 심사위원을 맡았던 시인 박봉우는 그의 시를 심사하면서 흥분한 나머지 본심 심사위원에게 "굉장한 장시입니다. 문단이 깜짝 놀랄 겁니다."라며 추천했지만 본심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우리 시단의 시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동엽의 시는 20여 행을 삭제하는 조건으로 입선되었다. 시상식날 나타난 신동엽은 바지 저고리에 조끼를 입은 완전 촌놈의 행색이었는데, 박봉우 시인은 그가 혼자서는 도저히 여관을 찾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자신의 자취방에 데려다 재웠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박봉우와 신동엽은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문단에 데뷔했다고 해서 그의 생활이 갑자기 달라질 것은 없었다. 부인 인병선의 회고에 따르면 "결코 훌륭한 남편감은 아니었"다. 그는 못 하나 제대로 박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집안 일을 챙기거나 생계 문제에 신경 쓰기 보다는 마음맞는 지기들과 술을 마시거나 그렇게 잘 했다는 노래 부르며 어울리기를 즐겨했다. 그러나 자식들의 회고에 따르면, 신동엽은 아버지로서는 더 없이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밤이면 어김없이 한두 번씩 건너가 세 아이들의 이불을 고쳐 덮어주곤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인은 "....일찍 가시려고 그랬을까. 평생 쏟을 사랑을 한꺼번에 쏟으려 한 것일까, 그의 가정에 대한 사랑은 지니치다 싶게 지극한 것이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꾸준하게 다닌 직장이 바로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일이었다. 교육평론사를 그만두고 그는 교직을 물색하던 중 자리가 쉽게 나지 않자 소개는커녕 사전통고도 없이 명성여고 교장실로 뛰어들어가 심태진 교장에게 다짜고짜 자신의 시작품들을 스크랩해놓은 노트를 던져두고 나왔다. 이를테면 그것은 "저는 이런저런 사람인데, 읽어보고 국어 교사로 씀직하면 한 번 써보시오"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화 끝에 그는 1961년부터 이 학교의 야간부 국어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교사로서 신동엽은 매우 성실한 스승이자 제자들에게 인기도 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그의 맏딸 신정섭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재직하고 있던 명성여고 교지의 앙케이트란 같은 것을 보면 부친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으며, 시험문제를 출제하더라도 완전 주관식 문제를 출제해 '무엇무엇에 관해 논하라'는 식이었다. 그의 집엔 학생들이 자주 놀러 왔고, 그때 배운 학생 중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틈나는대로 찾아오는 이도 있다고 하니 그의 가르침이 단순히 입시 위주의 교육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신동엽은 비록 집안 소소한 일에는 등한한 편이었지만 장자로서의 책임감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부여 친가에서 밑의 동생들을 차례로 데려다 공부를 시키거나 취직시키는 등 자식된 도리를 다 하려 노력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시인이 된 녹두장군. 신동엽

신동엽의 체구는 잘 알려진 대로 작은 편이었고, 어려서는 굶주림과 가난을, 국민방위군 시절을 거치면서 영양실조와 간 디스토마까지 앓아 매우 병약했다. 그러나 신동엽의 쏘는 듯한 안광 만큼은 매우 또렷하게 빛났다는 그의 외모에 대한 묘사를 듣노라면 녹두장군 전봉준의 인상이 떠오른다. 1969년 3월 중순, 40세의 신동엽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았고, 그동안에도 그는 술을 마셨다. 결국 입원치료 일주일만에 병원측에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퇴원을 지시했다. 그리고 며칠 후인 4월 7일, 신동엽은 문병 온 작가 남정현의 품에 안긴 채 마지막 숨을 거둔다.

우리들은 신동엽과 김수영을 다만 참여시의 양대 산맥쯤으로 생각하지만 두 사람의 시세계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김수영의 경우엔 별도로 다루도록 하겠지만 김수영이 도회지 출신(종로6가)으로 도시적 감수성의 시를 썼다면 신동엽은 농촌 출신으로 농촌 공동체적, 자연친화적인 시풍을 지녔다. 주제면에 있어서도 김수영이 모더니즘적 전통에서 출발해 '자유'의 문제를 탐구했다면 신동엽은 이것을 민족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시에 드러나는 서정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시어들은 그의 실제 삶 체험에서 녹아든 것이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신동엽은 외세 강점기인 일제 말기에 태어나, 외세의 대리전쟁이랄 수 있는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엔 밀려드는 외세의 문물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인 우리의 현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한 시인이었다. 그가 오늘날 참여시의 원조격으로 분류되는 탓에 그의 시어가 지닌 농밀한 서정성을 등한히 하는 경향도 있지만 그의 시가 지닌 품격은 단지 그가 참여적인 강한 메시지를 담은 시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 자체가 지닌 높은 문학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신동엽의 작품세계를 논하는데 있어 그의 시가 지닌 참여 의식을 배제할 수는 없다. 당시 우리 문단은 분단 이후 김수영이 일찍이 한탄한 바 있듯이 "알맹이는 다 가 버리고 쭉정이만 남은 상황"에 다름아니었다. 신동엽의 데뷔 작품인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시 문단의 시풍과 매우 다르다는 이유로 20여행이나 삭제되는 수모 끝에 당선 아닌 입선으로 문단에 나오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50년대 전후의 한국 시단은 마치 90년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창궐했던 포스트 모더니즘 논의들과 마찬가지로 알맹이는 빠진 채 허무니, 실존이니를 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국적불명의 외래사조들이 넘쳐나는 시기에 신동엽의 전통적인 서정을 노래한 듯이 보이는 시는 시대에 뒤처졌거나 오히려 신선하게 여겨지도록 했다. 신동엽은 이런 문단의 분위기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4월 혁명 무렵의 신동엽은 문단에 데뷔한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였지만 그에게 있어 암울하기만 했던 역사 체험(이미 이전에 그는 <진달래 산천>, <새로 열리는 땅> 등을 발표)이 극적인 분수령을 맞이한 순간이기도 했다. 4월 혁명은 김수영은 물론 신동엽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4월 혁명은 오래지 않아 그 숨이 끊어져 버렸다. 김수영은 다시 음울한 어조로 돌아갔고, 신동엽 역시 깊은 침잠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신동엽도 김수영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바퀴를 굴리기 위해서는 시인의 풍자와 예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치명적으로 느낀 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신동엽이 본격적인 참여시인의 면모를 드러내게 된 계기는 1964년 6.3 사태를 겪으면서였다. 그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서명에 참여하고 <발>, <4월은 갈아엎는 달> 등을 발표한다. 그리고 1967년엔 그의 대표작인 <껍데기는 가라>와 <금강(錦江)>을 발표한다.

민족문학의 수립과 진정한 민족시인. 신동엽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말들이 만들어진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문학평론가 채광석을 필두로 민족문학 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우리 문학과 평단이 그런 인식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였다. 그런데 신동엽은 그런 이론들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시 창작을 통해 민족문학을 정립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전문>

신동엽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껍데기는 가라>를 두고 어떤 이는 "어떤 사회과학자의 명쾌한 논문도 이 시의 선명한 메시지에는 미치지 못하리라"라고 평가하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4월 혁명도 그 알맹이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라고 말한다. 문학은 다른 예술과 달리 기본적으로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다. 다른 예술도 매한가지겠지만 특히 문학을 다른 예술 분야와 경계 짓도록 만드는 부분은 타 장르의 예술에 비해 이성에 호소하는 바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성이 설명치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바를 그의 직관과 감각으로 단번에 찔러 버린다. 시인에게 내려진 최고의 상찬 중 하나인 예언자적 숙명은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이 시는 혁명을 배반한 자들, 또는 외국의 허접한 이론과 문화들을 그 외피(껍데기)로 뒤집어 쓴 자들을 모두 밀어내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이들에 의해 "한라에서 백두까지" '쇠붙이(무기와 분단, 외세)'를 내몰자고 선언한다. 그 주체는 바로 "향그러운 흙가슴"을 지닌 이들이다. 신동엽은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과 현실의 어려움에 대해 굴하지 않는 정신을 담아 시를 창작해냈다. 강한 메시지를 지녔음에도 그의 작품들은 메시지에 함몰되지 않고 신경림이 말한 것처럼 "민중적 서정성"을 획득한다. 우리 문학은 그를 통해 김지하를 비롯한 후대의 많은 시인들로 하여금 좀더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는 터전을 얻었다.

1987년이 저물고, 새롭게 밝아 버린 1988년의 어느 겨울날. 우리들은 차갑고 어두컴컴한 지하 골방에 앉아 지나간 1987년의 흥분을 곱씹어야 했다. 1987년에 우리가 품었던 희망은 거짓이었을까. 동족을 학살한 주모자인 전두환과 그 충실한 추종자였던 노태우를 구속시키고, 민주주의와 통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민간정부를 수립하자는 당시의 투쟁의 목표는 과연 성공했던 것일까. 우리는 담요 한 장을 덮고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덮히며 생각했다. 우리를 억압하는 체제와 질서를 우리는 전복시키지 못했다. 우리는 비약(飛躍)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체제와 억압은 시민의 저항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더욱 야비해지고 교묘해질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의 정부로, 문민 정부로, 그리고 국민의 정부로 얼굴만 교체해 가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하지만 껍데기만 바뀌었을 뿐 그 알맹이는 여전하다.

진정한 민족 시인이었던 신동엽의 외침, "껍데기는 가라"는 여전히 유효한 구호인 것이다.


위의 자료가 실린 사이트(http://windshoes.new21.org)에는 신동엽 외에도 다양한 시인과 작가의 작품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자료들로 개인 홈페이지를 구축한 제작자의 노력에 감사를 표한다.

자~ 약력과 작품에 이어 저자의 삶도 살펴 보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제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작가는 역시 그의 작품으로 말하는 법이 아니던가. 민족시인이라는 껍데기의 안쪽에서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그의 목소리로 그를 만날 시간이 되었다.




아니오

아니오
미워한 적 없어요,
산마루
투명한 햇빛 쏟아지는데
차마 어둔 생각 했을 리야.

아니오 기뤄한 적 없어요,
능선 위
바람 같은 음악 흘러가는데
뉘라, 색동 눈물 밖으로 쏟았을 리야.

아니오
사랑한 적 없어요,
세계의
지붕 혼자 바람 마시며
차마, 옷 입은 도시계집 사랑했을 리야. (시집 阿斯女, 1963)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52人詩集, 1967)

鍾路五街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어리선 먼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ㅇ낳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거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東西春秋, 1967년 6월호)

달이 뜨거든
아사달, 아사녀의 노래

(아사녀)
달이 뜨거든 제 얼굴 보셔요
꽃이 피거든 제 입술을 느끼셔요
바람 불거든 제 속삭임 들으셔요
냇물 맑거든 제 눈물 만지셔요
높은 산 울창커든 제 앞가슴 생각하셔요.
(아사달)
당신은 귀여운 나의 꽃송이
당신은 드높은 내 영원의 꿈
울다 돌아간 가여운 내 마음
당신은 내 예술 만발케 사랑 준 영감의 근원.
(이중창)
우리들은 헤어진 게 아녜요
우리들은 나뉘인 게 아녜요
우리들은 딴 세상 본 게 아녜요
우리들은 한 우주 한 천지 한 바람 속에
같은 시간 먹으며 영원을 살아요

잠시 눈 깜박 사이 모습은 다르지만
나중은 같은 공간 속에 살아요
꼭같은 노래 부르며
한가지 허무 속에 영원을 살아요
(1968, 오페레타 「석가탑」 제 5경에)

祖國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병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신록 피는오월
서부사람들의 은행 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걸이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꿋한 설악처럼 하늘늘 보며 누워 있지 않은가.

무더운 여름
불쌍한 원주민에게 총 쏘러 간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간이역 신문을 들추며
비통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
이방인들이 대포 끌고 와
강산의 이마 금그어 놓았을 때도
그 벽 핑계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꽃피는 남북평야에서
주림 참으며 말없이
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

조국아
한번도 우리는 우리의 심장
남의 발톱에 주어본 적
없었나니

슬기로운 심장이여,
물 속 흐르는 맑은 강물이여.
한번도 우리는 저 높은 탑 위 왕래하는
아우성소리에 휩쓸려본 적
없었나니.

껍질은,
껍질끼리 싸우다 저희끼리
춤추며 흘러간다.

비 오는 오후
뻐스 속서 마주쳤던
서러운 눈동자여, 우리들의 가슴 깊은 자리 흐르고 있는
맑은 강물, 조국이여.
돌 속의 하늘이여.

우리는 역사의 그늘
소리없이 뜨개질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나니.

조국아,
강산의 돌 속 쪼개고 흐르는 깊은 강물, 조국아.
우리는 임진강변에서도 기다리고 있나니, 말없이
총기로 더럽혀진 땅을 빨래질하며
샘물 같은 동방의 눈빛을 키우고 있나니.
(月刊交學, 1969년 6월호)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高大文化, 1969년 5월)

마려운 사람들

마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무서워 보이는 것이리

구름도 마려워서
저기 저 고개턱에 걸려 있나
고달픈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고요한 전날 밤
역사도 마려워서
내 금 그어진 가슴 위에 종종걸음치나

구름을 쏟아라
역사의 하늘 벗겨져라

오줌을 미국땅 살 만큼의 돈만큼만
깔겨봤으면
너도 사랑스런 얼굴이 (思想界, 1970년 4월호)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잔잔한 바다와 준험한 산맥과 들으라
나의 벗들이여
마즈막 하는 내 생명의 율동을

미웁던 것이나 귀엽던 것이나
이제는 잘 있으라 나는 가련다

생각하면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랑의 법열과
또한 얼마나 많은 인간의 추악을 보았단 말인가

단풍든 고덕산에 함께 올라
저 멀리 서해바다와 저 멀리 지리산 줄기를 더듬으며
소리 질르며 놀던 학우들의 이름이여

아츰 저녁으로 웅장한 한강철교를 지나 통학할 때
시대의 풍운아처럼 차린 청년에게
수집은 추파를 던지던 수많은 여생도들의
인사 없이 사귀인 그리운 얼굴들이며

첫사랑의 불타는 정열을 나에게 쏟아주고
그리고 이내 나를 배반하고 가버린
요염한 눈 모습이여
가시지 못할 내 마음의 여신이여

단장의 비명을 울리며 전기고문 받던
그래도 나에게 위안을 잊지 않던
이름없는 영웅 내 감방의 친구여

나는 추억하나니
괴로웠던 것이나 행복했던 것이나
이제 와서는 내 마음을 현혹케 하는
온갖 영상들

꽁지벌레처럼 쫓아다니는 학정자의 학살을 피하여
서울로 망명할 때
남부여대의 피난민이 오르내리는 천안고개
호젓한 소롯길에서
우리 함께 붉은 까치밥을 따먹으며 길 걷던
영리한 소녀 잊지 못할 얼굴이여

불덩어리 번갯불처럼 쏟아지는 기총소사 밑에서
나의 팔에 안겨 언덕을 넘어서던
누나 잃은 소년이여
까무러쳤던 얼굴이여

탈옥수의 심정으로 채쭉에 끌려 남하할 때
찬 눈을 뭉쳐 먹어가며 넘던 문경새재 고개에서
기한과 피로에 반죽음이 되어 조국을 원망하던
낯설은 수만 청년의 떼직이여

눈보라 휘몰아치는 날
낯선 집 돌각담 밑에 내 지쳐 쓰러졌을 때
행주치마 바람으로 나와 깜밥과 동김치를 쥐어주던
따뜻한 인정의 아가씨여, 따뜻한 아가씨의 얼굴이여

다만 만백성이 만백성을 위하여 평화스러이 노래 부르며
일하는 아름다운 나라가 보고 싶었기에
불태워 보낸 젊음이었노라, 혀를 깨물어
분류처럼 내달려온 젊음이었노라
피비린 낙동수를 반참삼아
주먹밥 먹던 교육대에서
탐욕의 희멀건 눈으로 가련히 두리번거리던
무고한 젊은이의 피눈물이여
조선사람들의 병들었던 모습이여

나는 회상하나니
이 온갖 희락과 질곡의 골짜기를
그리하여 또 다시 만날 수 없는 인연의 벗들에게
상상 속에 향연을 베풀어 호소를 보내나니

사람과 소가 죽어 나자빠져 뒹구는
낙동강 나루터에서나
눈물을 짜가며 건너던 뼈시린 냇물에서나
하루하루의 피곤을 풀어보는 주막집에서나
알지 못하는 새에 정의가 깊어가던 해후의 길벗
그 처녀들의 환영이여

경부선 열차지붕
싸장사하는 수많은 전재민들 틈에 끼여 된서리를 맞아가며
또는 시나브로
인가와 도로를 피하여 밤을 새우던 산중에서
우러러보던 별이여, 눈물로
우러러보던 북극성이여

한강 보오트장에서 화창한 남산공원에서
그대들이 마주친 인상깊은 미모의 대학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여, 사모해서는 아니될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들이여

지금쯤 어디메 산맥에서 푸른 영을 타고 있을
멕고모자 그늘 아래 웃음 웃던 얼굴이여

오다 가다 말없이 지나친 뭇 얼굴들
내 시 낭동에 우뢰 같은 박수를 보내주던 군중들
내가 아는 그리고 내가 모르는
온갖 연분 있는 사람들의 심장이여

나는 가련다
아름다운 처녀지 우에 자유스러이 피어나려던 내 청춘은
노망든 독재자와 이방권력에 의하여 무참히 꺽이어버렸다
초야의 신부처럼 감격에 부풀었던 나의 희망은
억울히도 짓밟혀버리었다.

자유로운 하늘이여
자유로운 원시림이여
공화국기와 태극기가 번갈아 올라가는
죄없는 나의 고향 아득한 한촌이여

나는 본 일이 있는 그리고 비록 나를 못 봤을지언
하나도 ㅇ니요 백도 아니요 십만도 아니요 더 많은
그리운 사람들의 마음이여

나의 발바닥과 손길과 숨결이 스쳐간
나무며 돌이며 벌판이며 아름다운 강산이여

들으라 마즈막 하는 내 생명의 율동……
지금도 살육의 제단에서 고혈에 포화가 되어
수무족도하는 여름밤의 부나비떼를 보노라
그러나 들으라 나의 벗들이요
먼동 트는 대지요
내 그대들의 추억을 지니고서 어찌 미련없이 떠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벗들이여 나는 똑똑히 보았노라
산월달이 된 자유의 여신을
그리하여 탄생될 자유의 여신을 그대들에게 부탁하며
나의 청춘은 어린 산아를 위하여 피가 되려 하노라
독재정치의 희생이 도니 내 생명은
신성한 평화를 위하여 주춧돌이 되어지리라

들으라 잊지 못할 나의 벗들이여
나는 추모하는 뭇 벗들이여
나 대신 그대들의 정열은 갓난 아들 조국에 바치라!
이것만이 내 생명의 율동이 요구하는 벗들에 향하는
마즈막 바램이어라.




'탈정치화'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는 세상이 변했음을 알리는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말인 동시에 이를 사이에 두고 앞과 뒤의 세대가 다름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 말의 앞에 선 세대들은 '왜 그것도 모르느냐'고 묻기도 하고, 뒤의 세대들은 '그런 것을 왜 알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문화교양지'를 표방하며 새롭게 창간한 '소문'은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와 나눈 인터뷰를 잡지에 실었다. 손석희 교수는 한국현대사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5.18 광주 민주화 항쟁도 모르는) 1학년 학생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왜 이것도 모르느냐고 꽤 다그쳤죠. 그러다 기말고사 끝나고 방학이 됐는데 수강생 하나가 교수실로 찾아왔어요. 자기가 고등학교 내내 필기한 서브노트를 가져와 보여 주면서 '난 이렇게 공부 열심히 했는데 왜 나에게 모른다고 하느냐'고 항변하더군요. 그 학생 공부 열심히 했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모르는 것에 대해 다그치지 말라고, 억울하다는 거죠. 그 일로 내가 반성했어요. 요즘 학생들 '탈정치화'되어 있다고 몰아붙일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 환경이 주어져 있지 않은 거죠."

유명한 누구의 입을 빌어 나의 무식함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마땅히 알아야 할 진실이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존재조차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흐르는 세월에 쓸려 왕창 변해버린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난 세대의 문학이 생명력을 갖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시를 즐기기 위해서 그 시인과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작품 속에서 시대를 넘어 흐르는 정서를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시인, 신동엽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의 시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나의 투정에 사부님은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1연에서의 '4월'은 4.19 혁명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2연에서의 '동학년 곰나루의 아우성'은 동학 혁명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3연에서는 '아사달 아사녀가 부끄럼 빛내'는 순수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4연의 내용은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과 정의와 자유, 민주에의 열망을 확인하고 이것을 억압하는 모든 비본질적 요소(독재, 폭력, 외세 등)가 사라지기를 희망하며 쓴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사이트에서 발견한 '껍데기는 가라'의 '시분석'을 읽으며 나는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럼에도 가슴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이 떠올랐다. 해설에 난도질 당한 시는 펄떡 이지 않았다. 묵직한 해설의 족쇄를 끌고 힘겹게 걸음을 딛는 시는 반쯤 죽어있었다. 그 당시의 시는 아름답지도 눈부시지도 않았다.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어려울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해설이 사라진 시를 마주하고 보니 시인의 터질 듯한 목소리를 오히려 잘 들을 수 없었다. 시의 태생을 모르니 날이 선 표현들은 어느새 뭉툭해졌고, 안으로 파고들지는 못한 채 거죽만 긁어댔다. 그토록 바라던 솔직한 시 앞에서 해설을 그리워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 가운데 나는 시를 몰아서 읽었다. 빠르게 달리는 차 속에서 몇 편을 읽었고, 마루에서 돌아가는 청소기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또 몇 편을 읽었다. 때론 흐느끼고 때론 절규하던 시인은 소란한 주변 소리에 묻혀 그저 데면데면하게 주춤거렸다. 그러다가 한 순간 시인은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내 심장을 꿰뚫었다.

鍾路五街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어리선 먼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거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東西春秋, 1967년 6월호)

지하철 속의 붐비는 퇴근길 풍경이 흐릿해졌다. 갑자기 사방을 빗소리가 가득 채우는가 싶더니 나는 순식간에 벌거벗은 채로 종로5가 한복판에 서있었다. 동대문을 묻는 낯선 소년의 애처로운 눈동자가 선뜻 내 턱 밑에 다가와있었다. 저 멀리로 내의 차림의 그녀가 보였다. 땡볕 아래 온종일 등짐을 져 나르던 소년의 아버지가 나를 쓰게 바라보았다. 나는 어느새 그가 그린 세상에 들어와있었다.

신동엽에게 흐르는 강물이 민족이었고, 쇠붙이는 분단과 외세였다지만 나는 그 세상의 안 쪽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서있었다. 그러던 내게도 밥벌이에 찌든 가장의 고단함과 그 종로5가의 서늘함은 생생하고 또 절절했다. 이것이 바로 그 태생과는 무관하게 시대를 넘어 흐르는 공감이고 시의 힘이었다.

책의 삼분의 이를 넘어서면서 발견한 한편의 시로 인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좀더 진해졌다. 나의 현대사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어설픈 시대의식에 대한 자책감이라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왜 시를 읽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나는 조금 가까워졌다. 몰아 읽는 대신 한편씩 아껴서, 쪼개고 나누는 대신에 온 마음으로 시를 읽는 재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재미를 알았으니 행하는 일만 남았다. 목을 메우고 차오르는 신동엽의 슬픈 맛을 보았으니 눈가를 간질이고 코끝을 때리는 프로스트의 아름다운 맛도 보아야겠다. 시가 땡기다니…… 정말 가을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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