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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4일 19시 22분 등록

<삶을 바꾼 만남> 정민 지음, 문학동네, 2011년 초판, 591

 

1.   저자에 대하여

 

충북 영동 출생.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무궁무진한 한문학 자료를 탐사하면서 살아있는 유용한 정보를 발굴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대한 연구는 <다산의 재발견><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다산선생 지식경영법><미쳐야 산다>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에 관심을 가져 <마음을 비우는 지혜><<내가 사랑하는 삶><한서 이불과 논어병풍><죽비소리><돌 위에 새긴 생각><다산어록청상><성대중 처세어록><죽비소리>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글 속 서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 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문화의 모든 것을 담은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를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미학산책>과 어린이를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을 썼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

 

2012년 초에 한 번 직접 뵌 적  있다. <한시미학산책>은 연구원 레이스 지정 도서였다. 두꺼웠다. 한양대 연구실로 찾아가서 정민교수가 늦게 시작한 한문공부를 한 스승님이 남겨주신 옥편을 직접 만져보았다. 신뢰로운 인상이었다. 그리고 충청도 사투리가 약간 섞여 있었다. 나는 저자조사를 하면서 이 책 <삶을 바꾼 만남>을 꼭 읽고 싶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정민교수님 인터뷰를 마치고 만나러 갔던 이와 결혼을 했고, 그 다음 주에 사부님이 하늘로 가셨다. 정민교수는 안식년을 보내고 새로운 책을 출간하셨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으니 좋다. 어떤 제자가 될 건가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황상은 열다섯살에 받은 삼근계의 가르침을 원형 그대로 잘 간직했다. 날마다 시서를 곁에 두고 살았고 초서했다. 그건 다산의 해배 이후, 장례 이후를 지나, 아들인 정학연의 죽음을 지나 황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다산을 연줄로 해서 과거시험을 봐서 출세하려고 하기보담 욕심없이 비탈밭을 개간하고, 시를 쓰면서 살았다. 종종 저자의 담박하고 간결한 글을 읽을 것 같다. 왜 나의 선생님은 그 분을 만나보라 하셨던가 가끔 생각하면서 시작했다가 용맹정진중인 이 학자의 신간을 펴들고 감탄하리라.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와 목차

 

40주간 연재된 글을 모아서 책을 엮었다. 첫번째 글의 임팩트가 강하다. 두번째 글부터 시대순으로 진행했다. 다산의 강진 유배 직후부터 황상의 죽음까지, 다산과 황상, 그리고 다산의 아들과의 교류, 행적을 다루었다. 여러 사람의 시와 문집, 편지글을 읽어서 추적한다. 시의 아름다움이 주제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간적이고 특별한 만남이 삶을 변화시키는 예를 중심으로 살폈다. 따로 꼭지글의 제목을 적을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2)   장점 및 보완점 평설

 

정민교수의 다른 책들처럼 서술이 간결명확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이 책은 1 1칼럼을 1년 가까이 모아 펴냈다. 한 주제의 일 주일치 글은 그 자체로 완결성 있고 빼어나다. 원고지 40~50매 분량의 글을 매주 써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저자도 밝히고 있다. 1 1 1칼럼을 훈련하고 있는 나는 이 학자의 작업방식에 감탄한다. 그는 여러 권의 질 높은 책을 동시에 작업한다. 그의 저서 목록을 보면 연암의 글을 세밀히 읽고, 다산의 글을 촘촘히 짚어갔다. 그가 작업하는 방식도 18세기 전방위지식인 다산의 공부법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리라. 나도 매주 쓰는 칼럼의 완성도를 높이고 싶다. 또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게 쓰고 싶다.

 

다산은 유배지 18년을 사는 동안 다섯 수레의 책을 저술했다. 본인이 과골삼천의 용맹정진을 한바탕 위에, 시골 아전의 자식들을 체계적으로 공부시켜 드림팀을 만들어 최고의 학술집단을 가동했다. 가장 어둡고 추운 곳에서 활활 타오르던 다산의 정신적인 힘에서 근원한다. 그 힘이 무엇일까? 나도 흠모한다.

 

황상은 열다섯에 주막집 서당에서 다산에게서 들은 삼근계의 가르침을 죽을 때까지 실천했다. 그는 저는 둔하고, 꽉 막히고, 답답한데 저도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물었다. 스승은 아무 상관없다며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면 너도 나처럼 이룰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스승이 일러준 대로 시인을 초서하고 시를 썼다. 그걸 평생동안 했다. 공부를 떠나 농사짓는 동안에도 시서를 손에서 놓은 적은 없었고 스승과 헤어진 뒤, 죽고난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스승의 가르침은 뼈에 새기고 골에 새긴 채였다. 뛰어난 제자들이 모두 떠나 다산학단이 무너진 뒤에도 황상은 제자됨을 오롯이 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자는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실질적인 자료를 가지고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반짝이는 18세기의 만남의 교훈과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되살려 준다. 그건 다음과 같은 한문 원문을 우리들이 알아보기 쉬운 글로 잘 번역하고, 크로스하여 여러 저자의 편지와 문집을 읽어서 퍼즐을 맞추는 어려운 작업을 기꺼이 맡은 학자로서의 저자의 공력이다.   

 

내가 산석에게 문사 공부할 것을 권했다. 산석은 머뭇머뭇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이요, 둘째는 막힌 것이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 데 있다. 둘째, 글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이 들뜨는 데 있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 파는 사람은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 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지.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작 빛나게 된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해야 한다. 틔우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지런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지런 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나는 당시 동천여사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 내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동자로 관례로 치르지 않았다.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 동안 독서를 그만두고 쟁기를 잡고 있을 때에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37쪽 임술기)

 

다산선생을 무조건 칭찬한 게 아니라 편지글을 통해 지나치게 깐깐하고 삐치고 요구적인 모습조차 잘 그려놓았다. 다산이 다산초당을 열어 절에서 온이를 보내고, 게으른 사내종을 해고한 뒤, 건강이 나빠지자 맞아들인 소실 홍임모녀에 대한 부분도 그러했다. 한 인물에 대해 입체적으로 그렸다. 또한 이 책의 주된 텍스트 외에도 그 이후에 발견된 치원소고 책의 존재에 대해서도 잘 밝혀놓았다.

 

그는 머리말에서 내 삶에서 한 번의 만남으로 삶이 변하는 운명적인 만남이 가능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헤아려보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 책을 덮고 났을 때 내게 남은 질문 황상은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을까?’와 동일한 숙제다. 생각해보겠다. 

 

 

3)   감동적인 장절 30여개

 

단 한 번으로 삶 자체가 업그레이드되는 만남, 그런 만남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 황상(1788~1870)이다.

 

다산과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의 시작과 끝을 정리하는 일은 내 몫일 수 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어찌하겠는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와버린 것을.

 

바라기는 일 글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 지, 내 삶에서 그런 만남을 가지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헤아려보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2 일흔여섯의 노인은 손에서 공부를 좀체 놓지 않았다. 다리 부러진 돋보기를 코끝에 비스듬히 걸치고 끊임없이 베껴 쓰고 메모하고 정리했다. 평생 그렇게 베낀 책이 키를 넘겼다.

아름답다.

 

13 내 스승이신 다산선생님께서는 이 곳 강진에 귀양 오셔서 스무 해를 계셨네. 그 긴 세월에 날마다 저술에만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열다섯 살 난 내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리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네.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느니라. 너도 이렇게 하거라.” 몸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으로로 이르시던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하다네. 관 뚜껑을 덮기 전까지야 어찌 이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 날로 나는 죽은 목숨일세.

 

13 과골삼천

처음 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두 무릎을 땅바닥에 딱 붙이고 공부에만 몰두하다 보니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추사가 먹을 갈아 벼루 여러 개를 밑창 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복사뼈에 세 번씩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여기서 처음 들었다

다산은 대단한 사람이다. 독종이다.

 

34 선생님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꽉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습니까?

 

그렇구나.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너는 그 세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가르치면 한 번만 읽고도 바로 외우지. 정작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소홀히 넘어가는데 있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금세 파악해낸다. 바로 알아듣고 글을 빨리 짓는 것은 좋은데, 다만 재주를 못 이겨 들떠 날리는 게 문제다. 자꾸 튀려고만 하고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못하고 대충 하고 마니까 오래가지 못한다.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 파면 구멍이 뚫리게 되지. 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구멍이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꽉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않아 힘들고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룩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질반질 반반해져서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하면 된다.   

위의 글은 정민교수가 아래의 임술기를 읽기 편하도록 풀어쓴 글이다. 나는 아래의 원문이 더 좋다.

 

37 임술기

내가 산석에게 문사 공부할 것을 권했다. 산석은 머뭇머뭇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이요, 둘째는 막힌 것이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 데 있다. 둘째, 글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이 들뜨는 데 있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 파는 사람은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 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지.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작 빛나게 된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해야 한다. 틔우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지런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지런 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나는 당시 동천여사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 내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동자로 관례로 치르지 않았다.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 동안 독서를 그만두고 쟁기를 잡고 있을 때에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위의 글 보다 황상이 직접 쓴 이 글이 더 좋다. 담백하다.

 

어째서 황상은 평생을 가르침을 간직하며 실현하며 살 수 있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첫째, 황상은 세상 욕심이 별로 없다. 출세나 과거에 대한 미련이 없다. 모든 인간관계에 이해득실이 끼면 그 사귐은 깨끗이 오래가질 못한다. 뛰어난 제자 한 사람은 서울로 상경했다가 30여년을 추사의 식객으로 지내며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일흔에 응시한 과거에서 떨어진 후 우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황상은 다신계가 흩어진 와중에도 다산의 두 아들과 사귐을 이어갔다. 아버지 다산을 대하는 지극한 마음과 행동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 되었으리라. 그가 추사 김정희의 서문을 자기 시집에 받고 싶어했던 건 이름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평생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게다가 추사도 황상을 찾아왔다가 헛걸음을 한 적이 있었다. 둘째, 황상의 시에 대한 이야기에도 나오는데 그의 담박하고 도타운 인품이 뒷받침을 하는 것 같다. 그의 시가 아름답다면 꾸며서가 아니라 평생 스승의 가르침대로 4시인의 시를 읽고 초서하고 글을 짓고, 또한 농사지으며 욕심없이 살아간 그 생활이 우러나기 때문일 듯 하다.     

 

39 소년은 스승이 써준 글을 평생 어루만지며 살았다. 나중에는 종이가 너덜거려 누더기가 다 되었다. 이를 본 정학연은 1854년 다산을 성묘하러 온 황상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 글을 다시 친필로 써주었다. 아버지가 열다섯 살의 제자에게 써준 글을 52년 뒤에 그 아들이 다시 써주었다. 그리고 8년 뒤 ,일흔다섯의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임술기를 썼다. 써준 마음과 간직한 사연, 다시 쓰는 정성이 모두 뜨겁고 붉다.

 

정민선생이 쓴 한자학습서를 구해 읽으시오.

 

63 (통감절요에 대한 평)

아이가 글을 읽는 것은 대개 9년이다.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가 그때다. 하지만 여덟 살부터 열한 살까지는 아는 것이 어리석어 책을 읽어도 맛을 모른다. 열대여섯살쯤 되면 이미 음양에 대한 기호가 생겨 여러가지 물욕으로 마음이 나뉜다. 실제로는 열두 살때부터 열네 살까지 3년간 독서한다.  

64 결국 초등학교 5,6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3년동안 평생 공부의 기초를 닦아야 한다.

다음에 아이를 기를 때 참고하자. 에릭슨의 성실에 대한 것과 통한다.

 

68 일정 수준에 오른 뒤에는 매일 일과를 주어 기초를 다졌다. 초서도 꾸준히 시켰다.

나도 매일 공부하고 매일 초서할 수 있기를 바란다.

 

73 제자의 소식이 한동안 뜸하면 스승이 먼저 소식을 보냈다. 안 보면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곁에 두고 점검하며 동무하여 함께 바람을 쐬러 다녔다. 

 

91 이름 모를 새는 없다. 네가 그 이름을 모를 뿐이지. 모르면 찾아야 한다. 찾아 알면 다시는 잊지 않게 되는 법. 떠도는 지식을 네 것으로 만들려면, 그때그때 찾고 확인해야 한다.

 

99 한편 생각해보니 세 해의 귀양살이는 하늘이 나의 교만스러운 마음을 깨뜨려주려고 내린 선물이다.

 

222, <유아에게 부침>

 네가 닭을 친다고 들었다. 양계는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양계에도 또한 우아하고 조속하고 맑고 탁한 차이가 있느니라. 능히 농서를 익히 읽어 좋은 방법을 가려 시험해 보도록 해라. 색깔별로 갈라도 보고, 횃대를 다르게도 해 보아라. 닭이 살지고 번식하는 것이 다른 집보다 나아야 하나. 또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보기도 해야지. 사물로 사물에 얹는 것이야말로 독서하는 사람의 양계니라.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못 보거나, 기를 줄만 알고 운치는 모르면서 부지런히 애써 골몰하여 이웃 채마밭 노인과 아침저녁으로 다투는 것은 다만 세 집만 사는 작은 마을의 못난이의 양계일 것이니라. 네가 어떤 것을 편안해할 지 모르겠구나. 이왕 닭을 치려거든 백가서를 가져다가 닭에 관한 내용을 초록해서 차례를 매겨 <계경>을 짓도록 해라. 육우(당나라의 문인) <>이나 유득궁의 <>처럼 한다면 또한 한 가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속된 일을 하면서도 맑은 운치를 띠려면 모름지기 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이 단락이 좋다. 일상의 공부법, 계경. 이번 주 칼럼에 썼는데 이걸 읽다가 나는 태교편지를 쓰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을 긍정하고 더 열심히, 제대로, 야무지게, 쓸모있게 써복로 작정하였다. 증상놀이와 집착의 와중에 읽은 다산선생의 글이 내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이게 책 읽는 맛이구나.

 

223 네 삶의 모든 부분을 공부의 과정과 일치시켜라. 세상 모든 일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228 다산의 두 아들은 계경을 짓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집에서 기르는 온갖 가축 사육에 관한 정보를 모두 정리해서 <종축회통>이란 두꺼운 책으로 묶었다고 한다.

 

230 내가 수년 이래로 독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하루에 백 번 천 번을 읽는다고 해도 안 읽은 것과 다름없다. 무릇 독서는 뜻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해서 근원이 되는 뿌리를 얻어야 한다. 인하여 차례를 갖추어 글로 짓는 것을 날마다 일상으로 해야 한다. 이렇게 한 다면 한 종류의 책을 읽어 곁으로 백 종류의 책을 살피는 것을 아울러 얻게 될 것이다. 인하여 본래 읽던 책의 의미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꿰뚫어 알 수가 있게 될 터이니 이것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사기>의 자객열전을 읽다가 조제를 올리고 길을 나섰다는 구절과 만났다고 치자. 조제가 뭐냐고 네가 스승에게 묻겠지. 스승은 남을 전별할 때 올리는 제사다. 그런데 굳이 조()라고 한 이유가 무어냐고 묻겠지. 스승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뒤에 집에 돌아와 사전에서 조자의 본뜻을 살펴보고 또 사전을 바탕으로 다른 책에까지 옮겨가서 그 뜻풀이를 살펴 뿌리를 캐고 지엽을 주워 모으도록 해라. <통전><통지><통고> 같은 책을 보며 조제의 예법을 검토해서 차례를 매겨 책을 만든다면 썩지 않을 책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전에는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도 모르던 네가 이날부터 엄연히 조제의 내력에 대해 훤히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비록 큰 학자나 거유()라 할지라도 조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너와 겨루지 못할 것이니 어찌 크게 즐겁지 않겠느냐. 주자의 격물 공부도 단지 이와 같았을 뿐이다. 오늘 한 가지 사물을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을 궁구하는 것도 모름지기 이처럼 해서 시작하게 된다. ()이란 것은 밑바닥까지 끝장을 본다는 뜻이다. 밑바닥까지 끝장을 보지 않는다면 또한 아무런 보탬이 없게 된다. 

이 부분이 매우 마음에 든다. 일상의 공부법, 격물치지.

 

297 언제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재 머무는 공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다산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는 얼마나 더 머물지도 모를 이학래의 사랑채 바깥 채마밭에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사시장철 푸른 대나무의 소쇄한 기상을 울타리 삼아 둘러두고 싶었다.

310 다산은 이곳에 머물면서 묵재에서의 경험에 비춰 끼니로 주인집에 폐를 끼치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대숲 속에 밥을짓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솥을 건 행주, 즉 임시부엌을 만들었다. 이어 매화, 도화, 동배과 모란, 작약과 수구화, 왜석류와 치자, 백일홍과 월계화, 접시꽃과 국화등 초당에 심은 꽃나무를 차례로 노래했다. 약초로 자초와 더덕도 있었다. 처마 밑에는 포도나무 시렁이 있고 돌샘물을 가둬 만든 둠벙에는 미나리를 길렀다. 다산은 이처럼 풍요로운 꽃밭 속에서 모처럼 깊은 안식을 느꼈다. 그 에너지가 이후 조선 학술사의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경이로운 저술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다산이 머무는 거처를 꾸미는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매료된다. 셋집이든 남의 집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집을 가꾸며 사는 모습이 멋지다. 이런 게 있어야 그 많은 작업량이 감당이 되리라.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채소밭과 유실수, 그리고 꽃밭을 가꾸는 당사자가 다산이 아니라 사내 종이거나 나중에 내침을 당한 소실인가 싶은 거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통일신라시대 승려가 사전에 딸린 종의 노동에 기인해 수행했던 것과 같은 한계일 수도 있다. 흠을 잡자면 그렇다. 내가 너무 자급자족을 강조하는가? 

 

315 다음 시는 제목도 길지만 5 160, 8백 자에 달하는 장시다. 다산초당의 리모델링 과정을 하나하나 꼼꼼히 적었다. 기록을 의식하여 작정하고 쓴 시다.

341 종을 내쫒는 글을 남겼다.

일상에 대한 기록을 매우 꼼꼼히 남겼다.

 

351 1801 11월에 강진에 내려간 다산이 여유당으로 돌아온 것은 1818 9 15일이었다. 마흔에 내려가 쉰일곱의 늙은이가 되어 올라왔다. 강산이 두 번 바뀐 세월이었다. 다산은 1818년에 목민심서를 마무리 지었다. 처음 양미간에 잡털이 무성하고 눈에 초점도 없던 초당 제자들은 그사이에 조선 팔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최고의 학술집단으로 변모해 있었다.

다섯 수레의 책을 실어서 올라갔다. 대단한 정신력이다. 버림받은 외롭고 힘든 18년 세월동안 아무도 못해낼 일을 해냈다.  

 

413 스승께서 세상을 뜨신지 벌써 10년입니다. 그동안 선생님 기일마다 멀리 두릉 쪽을 바라보며 곡을 했습니다. 살아생전 선생님 산소에 절 한 번 올리고 두 분과도 이 세상 마지막 인사를 나눌 참으로 올라왔습니다. 산골에 묻혀 살아 인편을 얻지 못해 답장도 못 올렸습니다. 송구합니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 나도 이러고 싶다.

 

413 왠 부챈가?

지난번 내려갈 때 선생님께서 주신 부채입니다. 선생님 생각날 때마다 이걸 매만지며 살았습니다.

말을 듣던 두 형제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학연은 손을 내밀어 황상의 투박한 손을 맞잡았다.

 

505 김명희 <서치원고>

그가 말했다. “예전에 들으니 스승께서 두보, 한유, 소동파, 육유 네 분은 천고에 우뚝하다. 이 네 분을 버리고 시를 한다면 바른 법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주변의 작가는 거들떠보지 않고 마음을 쏟아 이 네 분의 시만 읽은 것이 50여년 입니다.”

50년간 네 번에게 마음을 쏟은 것은 멀리는 두보나 한유, 소동파와 육유와 비슷해지기를 구하고, 가까이는 다산과 비슷해지기를 구한 것이다. 하지만 누구와도 비슷해지지 않고 치원의 시를 이루었으니 시가 살아있는 사물임을 알 수 있겠다. (김명희)

그러니까 원칙대로 공부를 했는데 저 네 시인과 다산과 전혀 다른 자신만의 시풍을 만들어냈다. 추사 김정희는 황상의 시에 대해 시어는 담백하지만 기상이 기운찬 시라고 말했다. 이 북리뷰 방식의 공부도 그럴건가?

 

529 늙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노학생이 사는 암자라 노학암이라고도 했다.

아름다운 노년이다.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글을 열며 맛난 만남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다. 그런 만남을 그저 흘려 보내놓고 자꾸 딴 데 가서 기웃대며 불운을 탓한다.

내게는?

모닝페이지를 만난 후로 매일 일어나서 글을 쓰게 되었다

법륜스님을 만난 후로 매일 절을 하고 나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단 한 번으로 삶 자체가 업그레이드되는 만남, 그런 만남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 황상(1788~1870)이다. 내가 황상을 처음 안 것은 예전 임형택 교수 논문에 잠깐 인용된 [삼근계]란 짧은 문장 때문이었다. 글이 가슴을 쳤다. 당장 수소문해서 황상의 <치원유고> 복사본을 손에 넣었다. 앞뒤 맥락을 알고 읽으니 더욱 뭉클했다. 이후 틈날 때마다 그의 글을 찾아 읽었다.

 

다산과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의 시작과 끝을 정리하는 일은 내 몫일 수 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어찌하겠는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와버린 것을.

 

이 책에서 살핀 황상의 삶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어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지금의 눈으로가 아닌 당시의 시선에서 볼 때도 그랬다.

 

더벅머리 소년이 스승이 내린 짧은 글 한 편에 고무되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가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사제의 정리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사람들은 아무도 스승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학생은 있어도 제자가 없다. 물질적 교환가치에 의한 거래만 남았다. 마음으로 오가던 사제의 도탑고 질박한 정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슬퍼한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

 

이 책은 인터넷 연재 방식으로 1년간 집필되었다. 매주 40~50매 가량의 원고를 써나가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바라기는 일 글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 지, 내 삶에서 그런 만남을 가지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헤아려보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2 일흔여섯의 노인은 손에서 공부를 좀체 놓지 않았다. 다리 부러진 돋보기를 코끝에 비스듬히 걸치고 끊임없이 베껴 쓰고 메모하고 정리했다. 평생 그렇게 베낀 책이 키를 넘겼다.

 

13 내 스승이신 다산선생님께서는 이 곳 강진에 귀양 오셔서 스무 해를 계셨네. 그 긴 세월에 날마다 저술에만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열다섯 살 난 내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리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네.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느니라. 너도 이렇게 하거라.” 몸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이로 이르시던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하다네. 관 뚜껑을 덮기 전까지야 어찌 이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 날로 나는 죽은 목숨일세.

 

13 과골삼천

처음 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두 무릎을 땅바닥에 딱 붙이고 공부에만 몰두하다 보니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추사가 먹을 갈아 벼루 여러 개를 밑창 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복사뼈에 세 번씩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여기서 처음 들었다.

 

14 그는 평생 송나라 때 시인 육유의 시를 사숙했다. 이 또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일흔 가까운 노인이 1천 수가 넘는 육유의 시집을 또박또박 다 베껴 쓴 뒤, 감회를 누를 길 없어 시를 쓴다.

 

17 세상에 그저 이루어지는 관계는 없다. 가는 정 오는 정이 켜켜이 쌓여 관계를 만들어간다. 진심과 성의라야지, 다른 꿍꿍이가 들어앉으면 중간에 틀어지고 만다. 다산이 강진 18년 유배 기간 동안 키운 제자는 수없이 많았다. 이들 중 끝까지 스승을 진심으로 한결같이 섬긴 제자는 황상 한 사람 뿐이었다.

 

18 문하는 흩어져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유독 황군 제불만은 어렵게 지내시던 초년부터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시던 그날까지 시종일관 법도를 넘어섬 없이 자세에 조금의 차이가 없었다. (정학연)

 

20 매번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기일에는 옷을 단정히 하고 북쪽을 향하여 곡을 했다. 나이가 일흔에 이르러서도 절 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28 나는 이처럼 욕스럽고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예서 공부를 단 하루도 쉬어본 일이 없다. 의리의 정밀하고 미묘함은 파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더구나….한나라 때 유학자인 마융과 정현은 비록 권세가 한 세상에 무거웠다고는 하나 바깥채에서는 제자와 강학하고, 아채에서는 소리하는 기생을 두고 놀았다. 번잡하고 화려하며 부유하기가 이와 같았다. 경전을 궁구함에 정밀하지 못할 것이 당연하다. 그 뒤로 공안국과 가규 같은 분도 모두 유림 가운데 뛰어난 분이지만 심기가 정밀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논한 내용이 분명치 않고 가물가물한 것이 많다.

나는 요즘 내가 너무 행복하고 따뜻하고 편안하고 배가 부른 것 같다.

 

궁함을 안 뒤라야 저서할 수 있음을 비로소 알겠더구나. 반드시 지극히 총명한 인시가 곤경한 지경을 만나, 하루 종일 흙덩어리처럼 안장서 사람 말소리나 수레나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리 않게 한 뒤에야, 경전과 예학의 정밀한 뜻을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법이다. (1802 4월 아들에게 쓴 편지)

 

29 공부는 곤궁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너희도 명심하라 공부는 너희 같은 폐족이 하는 것이다. 목숨 걸고 해야 한다.

  

34 선생님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꽉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습니까?

 

그렇구나.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너는 그 세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가르치면 한 번만 읽고도 바로 외우지. 정작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소홀히 넘어가는데 있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금세 파악해낸다. 바로 알아듣고 글을 빨리 짓는 것은 좋은데, 다만 재주를 못 이겨 들떠 날리는 게 문제다. 자꾸 튀려고만 하고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못하고 대충 하고 마니까 오래가지 못한다.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 파면 구멍이 뚫리게 되지. 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구멍이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꽉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않아 힘들고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룩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질반질 반반해져서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하면 된다.   

 

37 임술기

내가 산석에게 문사 공부할 것을 권했다. 산석은 머뭇머뭇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이요, 둘째는 막힌 것이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 데 있다. 둘째, 글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이 들뜨는 데 있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 파는 사람은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 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지.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작 빛나게 된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해야 한다. 틔우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지런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지런 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나는 당시 동천여사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 내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동자로 관례로 치르지 않았다.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동안 독서를 그만두고 쟁기를 잡고 있을 때에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39 비록 크게 이룬 것은 없지만 스승의 말씀만큼은 조금의 부끄러움 없이 실천에 옮겼다. 이런 제자를 만나는 것은 오히려 스승의 행운이다.

 

39 소년은 스승이 써준 글을 평생 어루만지며 살았다. 나중에는 종이가 너덜거려 누더기가 다 되었다. 이를 본 정학연은 1854년 다산을 성묘하러 온 황상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 글을 다시 친필로 써주었다. 아버지가 열다섯 살의 제자에게 써준 글을 52년 뒤에 그 아들이 다시 써주었다. 그리고 8년 뒤 ,일흔다섯의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임술기를 썼다. 써준 마음과 간직한 사연, 다시 쓰는 정성이 모두 뜨겁고 붉다.

 

47 읍내 사람은 더불어 우환을 함께한 자들이고 다산초당의 여러 사람들은 오히려 조금 편안해진 뒤에 서로 알게된 자들이다. 어찌 읍내 사람과 같다고 하겠는가?

 

48 황상과 황경은 형제지간이었다. 아버지 황인담은 강진의 아전이었다.

 

52 자식의 서재에 삼사재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사납고 거만함을 멀리하고 비루하고 속됨을 멀리하며, 신의를 가까이한다는 의미다.

 

53 주막집 봉놋방 좁은 서당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네 가지 마땅함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담백한 생각, 장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이 그것이다.      

 

55 다산은 어린이학습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을 통해서 문심혜두를 여는 일이라고 부었다. 문심은 글자 속에 깃든 뜻과 정신이고, 혜두는 슬기구멍이다. 문심을 알고 혜두가 열려야 공부머리가 깬다. 머리가 깨지 않으면 백날 공부해도 헛공부다.

 

정민선생이 쓴 한자학습서를 구해 읽으시오.

 

63 (통감절요에 대한 평)

아이가 글을 읽는 것은 대개 9년이다.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가 그때다. 하지만 여덟 살부터 열한 살까지는 아는 것이 어리석어 책을 읽어도 맛을 모른다. 열대여섯 살쯤 되면 이미 음양에 대한 기호가 생겨 여러 가지 물욕으로 마음이 나뉜다. 실제로는 열두 살 때부터 열네 살까지 3년간 독서한다.  

 

64 결국 초등학교 5,6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3년 동안 평생 공부의 기초를 닦아야 한다.

 

67 주역, 서경, 시경, 예기, 논어, 맹자만큼은 숙독해야 한다. 하지만 이리저리 궁리하고 살펴 따져 깊은 뜻을 얻는다고 해도, 떠오르는 대로 메모하고 기록해야만 실제로 네 것이 된다. 그저 소리 내어 읽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68 일정 수준에 오른 뒤에는 매일 일과를 주어 기초를 다졌다. 초서도 꾸준히 시켰다.

 

73 제자의 소식이 한동안 뜸하면 스승이 먼저 소식을 보냈다. 안 보면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곁에 두고 점검하며 동무하여 함께 바람을 쐬러 다녔다.  

 

78 비가 와서 길이 진창인데도 굳이 제자를 불렀다. 밀가루 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보내온 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황상은 아전의 자식이었다. 아전의 자식이 아전의 포학을 고발한 내용이어서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간 공연한 사단을 만들기 쉬웠다.

 

83 학질로 끙끙 앓는 와중에도 황상은 여전히 초서에 물두했다.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이것을 전해들은 다산은 학질 끊는 노래긴 시를 지어 전해 주었다.

 

91 제비는 짝이 죽으면 새끼양육을 포기하고 만다. 혼자서는 새끼에게 먹이를 공급하는 일이 불가능한 까닭이다.

 

91 이름 모를 새는 없다. 네가 그 이름을 모를 뿐이지. 모르면 찾아야 한다. 찾아 알면 다시는 잊지 않게 되는 법. 떠도는 지식을 네 것으로 만들려면, 그때그때 찾고 확인해야 한다.

 

99 한편 생각해보니 세 해의 귀양살이는 하늘이 나의 교만스러운 마음을 깨뜨려주려고 내린 선물이다.

 

102 다산은 날마다 과제를 주어 이를 채우는 정과실천의 방법으로 제자들을 지도했다.

 

104 부는 과거 시험의 주요과목이었다. 다산이 황상에게 부를 짓게 한 건 과거 시험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스승은 세상에 내보내려고 그에게 부를 짓게 했는데, 열여덟 젊은이는 이미 티끌세상에서 눈길을 거둔 채 피세둔자의 숨어사는 삶을 예찬한다.

 

106 부는 형식성이 엄격한 시보다 짓기가 수월하고, 구문을 얽기가 쉬웠다. 초학들이 자신의 어휘력을 향상시키고, 좀 호흡이 긴 서사를 펼치는 힘을 기르기에 아주 효과적이었다.

 

114 다산의 검광이 돌연 혜장을 무찔러왔다.

 

121 두 개의 견월첩

유학자인 다산과 승려인 혜장의 교유를 두고 쓸데없는 말 말고 그 행간에 오간 마음의 본체를 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130 원은 과수원이요, 포는 채마밭이다.

 

132 평소 원포 경영의 꿈을 지녔던 다산은 4년째 주막집 골방에 갇혀 답답하게 지냈다. 노파가 해 주는 밥을 먹으면서도 작은 땅뙈기라도 얻어 직접 채마밭을 일구고 싶은 욕망을 가눌 수가 없었다.

 

137 다산은 결코 만만한 스승이 아니었다. 한없이 자애롭다가 새치름 삐지기도 잘했다. 나무랄 때는 만정이 똑 떨어질 만큼 매서웠다.

 

138 신혼부부에게 각방을 쓰라고 강요한 편지다.

 

147 부쳐온 시는 돈좌하고 기굴해서 내 기호에 꼭 맞는구나. 기쁨을 형언할 수 없다. 이에 축하하는 말을 하고 나 스스로도 축하한다. 제자 중에 너를 얻어 참 다행이다.

 

166 다산의 정수사 나들이는 벗 김이재가 고금도에 귀양 와 쓴 현감이후송덕비를 보려 함이었다. 그는 차마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168 다산은 한창 과거 시험 준비를 할 나이에 폐족이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 자식들을 연민했다.

 

170 채소를 기르더라도 그냥 길러서는 안되고 관련 서적을 꼼꼼히 살피는 한편 이런저런 고사를 섭렵해서 메모해두라고 한 아버지의 당부가 시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177 솜옷엔 진흙이 잔뜩 묻었고

허리가 아픈 지 펴질 못하네

종을 불러 말 모양을 보자 했더니

새끼 나귀 갈기가 겨우 났구나.

 

동백은 이른 꽃이 벌써 피어서

다시금 내 시를 채워주누나.

잡서야 모두가 보잘 것 없어

오로지 주역만 가져왔다네

 

내 이제 네 공부를 가르치리니

돌아가 네 아우의 스승 되거라.

 

179 몇 년만의 상봉이 어색했던 부자는 승방에 들어앉아 공부의 채비를 갖추었다.

(보은산 고성사)

 

184 다시는 갖지못할 시간일 것이니라. 간절하게 공부해야 한다.

산사에서 부자는 밤낮없이 주역과 예기를 공부했다.

 

187 부자간에 오고간 질문들과 대답들이 하나하나 속기록으로 남았다. 꼼꼼한 기록정신의 산물이다.

 

209 두 사람이 색성을 따라 신월암을 거쳐 상원에 도착했을 때 혜장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시장하겠다며 금방 차려내온 밥상에는 황이와 심백, 아강 등의 버섯과 채소가 갖은 빛깔을 뽐냈다. 맛있게 먹었다. 방 안에는 토종 연꽃을 심은 화분이 놓여 한겨울에도 푸른 잎을 뽐냈다.

기록의 힘

 

222, <유아에게 부침>

 네가 닭을 친다고 들었다. 양계는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양계에도 또한 우아하고 조속하고 맑고 탁한 차이가 있느니라. 능히 농서를 익히 읽어 좋은 방법을 가려 시험해 보도록 해라. 색깔별로 갈라도 보고, 횃대를 다르게도 해 보아라. 닭이 살지고 번식하는 것이 다른 집보다 나아야 하나. 또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보기도 해야지. 사물로 사물에 얹는 것이야말로 독서하는 사람의 양계니라.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못 보거나, 기를 줄만 알고 운치는 모르면서 부지런히 애써 골몰하여 이웃 채마밭 노인과 아침저녁으로 다투는 것은 다만 세 집만 사는 작은 마을의 못난이의 양계일 것이니라. 네가 어떤 것을 편안해할 지 모르겠구나. 이왕 닭을 치려거든 백가서를 가져다가 닭에 관한 내용을 초록해서 차례를 매겨 <계경>을 짓도록 해라. 육우(당나라의 문인) <>이나 유득궁의 <>처럼 한다면 또한 한 가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속된 일을 하면서도 맑은 운치를 띠려면 모름지기 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223 네 삶의 모든 부분을 공부의 과정과 일치시켜라. 세상 모든 일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228 다산의 두 아들은 계경을 짓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집에서 기르는 온갖 가축 사육에 관한 정보를 모두 정리해서 <종축회통>이란 두꺼운 책으로 묶었다고 한다.

 

230 내가 수년 이래로 독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하루에 백 번 천 번을 읽는다고 해도 안 읽은 것과 다름없다. 무릇 독서는 뜻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해서 근원이 되는 뿌리를 얻어야 한다. 인하여 차례를 갖추어 글로 짓는 것을 날마다 일상으로 해야 한다. 이렇게 한 다면 한 종류의 책을 읽어 곁으로 백 종류의 책을 살피는 것을 아울러 얻게 될 것이다. 인하여 본래 읽던 책의 의미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꿰뚫어 알 수가 있게 될 터이니 이것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사기>의 자객열전을 읽다가 조제를 올리고 길을 나섰다는 구절과 만났다고 치자. 조제가 뭐냐고 네가 스승에게 묻겠지. 스승은 남을 전별할 때 올리는 제사다. 그런데 굳이 조()라고 한 이유가 무어냐고 묻겠지. 스승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뒤에 집에 돌아와 사전에서 조자의 본뜻을 살펴보고 또 사전을 바탕으로 다른 책에까지 옮겨가서 그 뜻풀이를 살펴 뿌리를 캐고 지엽을 주워 모으도록 해라. <통전><통지><통고> 같은 책을 보며 조제의 예법을 검토해서 차례를 매겨 책을 만든다면 썩지 않을 책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전에는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도 모르던 네가 이날부터 엄연히 조제의 내력에 대해 훤히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비록 큰 학자나 거유()라 할지라도 조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너와 겨루지 못할 것이니 어찌 크게 즐겁지 않겠느냐. 주자의 격물 공부도 단지 이와 같았을 뿐이다. 오늘 한 가지 사물을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을 궁구하는 것도 모름지기 이처럼 해서 시작하게 된다. ()이란 것은 밑바닥까지 끝장을 본다는 뜻이다. 밑바닥까지 끝장을 보지 않는다면 또한 아무런 보탬이 없게 된다.  

 

 231 자신이 자식의 앞날을 막고 말았다는 자의식에다가 워낙 시어머니 같은 성격 때문에 다산의 아들 노릇하기도 결코 쉽지 않았다.

 

240 선생님 이 참에 제가 아예 우이도로 건너가서 손암선생을 모시고 삼동을 나고 오렵니다. 이곳은 번잡해서 뜻을 온전히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손암선생의 건강도 여의치가 않으니 아예 제가 한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개도 잡아드리고, 그 밑에서 공부도 좀 하다가 오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황상이 정약전을 생각하여 정약용에게 하는 말

 

242 모름지기 인생에서 귀한 것은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네. 어찌 꼭 얼굴을 맞대면해야만 하겠는가?

 

243 재주많은 자는 반드시 삼가고 두터움이 없는데 그 지은 글을 살펴보니 경박하고 안일한 태도가 조금도 없더군. 그 사람됨 또한 알 수 있을 것 같네. 부디 스스로를 갖추고 무겁게 하여 대인군자가 될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권면해주시게나. 

 

245 네가 간직하여라. 편지에 온통 네 이야기뿐이니 네가 그 편지의 임자다. 게다가 형님의 친필이 아니더냐. 거처에 모셔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어, 형님의 당부를 뼈에 새겨야 하리.

정약용 형제의 일이, 그 집안의 일이 궁금하구나.

 

249 남녘땅에서 어여쁜 사람을 만나니

 

252 당시 황상은 삼베에 쌓인 인장 세 과를 선물했다.

 

256 네 아들이 내 손자와 무에 다르겠느냐? 와서 내 축하를 받아라.

 

257 1806년 가을, 다산은 동문 밖 주막을 떠나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중간에 잠깐 고성암에서 1번의 겨울을 난 것을 빼고는 주막집에서 5년 가까운 세월을 지낸 셈이다. 이학래의 집에서 1년 반 가량 지냈다. 이학래는 침착하고 꼼꼼한 성품으로 편집과 정리에 탁월한 솜씨가 있었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해배시까지 스승의 작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가장 많이 주었다.

 

268 너희에게 준 것이 없다. 받지도 않겠다. 죽거든 삼일장으로 장례를 끝내라. 마지막 부탁이다. 시묘도 할 것 없다. 그저 보내다오. 꼭 그래야 한다.

 

275 앞뒤 사정을 말씀드리기에는 스승의 분노가 너무 컸다. 황상은 아버지의 유명을 어기고 산소로 나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황상이 두 달간 시묘살이를 하는 것으로 장례를 둘러싼 사제간의 소동은 겨우 진정되었다.

아버지와 스승 사이의 갈등에서 죽은 아버지가 아니라 산 스승을 따랐다. 깐깐하다. 황상이 곤란했을 것 같다. 아버님이 하지 말라는데 굳이 시키는 게 이해가 안된다. 

 

285 사람이 이 두 가지 가운데서 택하는 것은 다만 그 성품에 따른다. 하지만 하늘이 몹시 아껴 잘 주려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청복이다. 그래서 열복을 얻은 사람은 아주 많지만 청복을 얻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297 언제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재 머무는 공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다산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는 얼마나 더 머물지도 모를 이학래의 사랑채 바깥 채마밭에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사시장철 푸른 대나무의 소쇄한 기상을 울타리 삼아 둘러두고 싶었다.

 

302 윤종하의 병구완도 한시름 놓게 되고, 집안 아이들 교육문제도 한꺼번에 해결해볼 셈이었다.

 

310 다산은 이곳에 머물면서 묵재에서의 경험에 비춰 끼니로 주인집에 폐를 끼치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대숲 속에 밥을짓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솥을 건 행주, 즉 임시부엌을 만들었다. 이어 매화, 도화, 동배과 모란, 작약과 수구화, 왜석류와 치자, 백일홍과 월계화, 접시꽃과 국화등 초당에 심은 꽃나무를 차례로 노래했다. 약초로 자초와 더덕도 있었다. 처마 밑에는 포도나무 시렁이 있고 돌샘물을 가둬 만든 둠벙에는 미나리를 길렀다. 다산은 이처럼 풍요로운 꽃밭 속에서 모처럼 깊은 안식을 느꼈다. 그 에너지가 이후 조선 학술사의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경이로운 저술로 쏟아져 나왔다.

 

315 다음 시는 제목도 길지만 5 160, 8백 자에 달하는 장시다. 다산초당의 리모델링 과정을 하나하나 꼼꼼히 적었다. 기록을 의식하여 작정하고 쓴 시다.

 

325 아홉 계단의 밭에는 무, 부추, 늦파, 올숭채, 쑥갓과 가지를 심었다. 아욱과 겨자, 상추도 심었다. 특히 토란을 많이 심었는데 토란과 쌀가루를 넣어 끓인 옥삼죽을 다산이 특별히 즐겼기 때문이다. 절로 나는 명아주와 비름나물, 구기자와 고사리, 쑥도 있었다. 노루가 뜯어 먹을까봐 가시덤불로 밭 둘레를 막고 말이 헤집고 다닐까봐 바자울은 더 높게 쳤다. 조경 일도 만만치가 안았다. 당귀와 작약을 심고, 부양과 수구화, 모란과 동청에 파초까지 옮겨 심었다. 복사꽃 살구꽃과 포도넝쿨도 있었다. 연못 위 언덕에는 바닷가에서 주워온 갖은 모양의 괴석들을 늘어세웠다.

 

325 구경 왔던 혜장이 놀란 표정을 짓고 돌아가서는 대뜸 심부름하는 아이 편에 연못에 심으라며 연뿌리를 보내주었다.

 

327 그가 특별히 아꼈던 꽃은 작약과 국화다.

 

329 다산은 작약 1백 뿌리를 심은 곳에 작약단이란 이름을 붙였다.

 

333 국화는 특별히 빼어난 점이 네 가지가 있다. 꽃을 늦게 피우는 것이 하나요, 오래 견디는 것이 하나이며, 짙은 향기가 하나요, 곱지만 야하지 않고, 깨끗하나 쌀쌀맞지 않은 것이 하나다. 여름에는 잎 구경, 가을에는 꽃 구경, 낮에는 자태 관찰, 밤에는 그림자 감상

 

334 실학을 한다면서 꽃에 탐닉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지자, 꽃에 대한 탐닉이야말로 정신을 살찌우고 마음을 길러주는 자양이 된다고 대답한다.

 

335 황상은 스승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이따금 들러 황량하던 산속 집이 눈부시게 변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스승이 자신에게 준 제황상유인첩에서 그려 보인 광경이 하나둘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후 일속산방에서 하기가 더 쉬웠으리라. 모델이 있으므로

 

337 황상의 호는 치원이다. 그가 호를 치원이라 함은 작약을 아껴 작약단을 마련한 스승과 달리 치자꽃을 몹시 사랑하여 집에 치자 동산을 꾸몄기 때문이다.

 

340 승려를 백련사로 돌려보내자 집주인인 윤규노가 다산에게 사내종을 하나 들이자고 말한다. 밥과 빨래도 하고 채마밭도 건사하려면 늘 상주하며 도울 일손을 하나 두어야 한다고.

다산의 원포경영, 아름다운 집은 종에 의해 건사되었나보다. 종을 내친 이후에는 홍임모녀를 들였다. 스스로 제 손으로 하지를 않고. 이게 신분제 사회 아래에서 한계가 아닐지. 

                                                                                                                       

341 종을 내쫒는 글을 남겼다.

일상에 대한 기록

 

343 후에 살펴보니 행실은 말을 살피지 않고, 맡긴 일은 태만했다. 먼지가 쌓이고 잡초가 돋아나도 청소하거나 물 뿌리는 법이 없었다. 쑥대와 명아주대가 무성하고, 가시풀은 우거졌다. 독사가 꼬여 아이들이 깜짝깜짝 놀랐다. 채소와 외는 말라버리고, 꽃은 꽃송이를 피우지 못했다.

 

351 1801 11월에 강진에 내려간 다산이 여유당으로 돌아온 것은 1818 9 15일이었다. 마흔에 내려가 쉰일곱의 늙은이가 되어 올라왔다. 강산이 두 번 바뀐 세월이었다. 다산은 1818년에 목민심서를 마무리지었다. 처음 양미간에 잡털이 무성하고 눈에 초점도 없던 초당 제자들은 그사이에 조선 팔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최고의 학술집단으로 변모해 있었다.

 

353 18년간 강진에 있으면서 어느새 다섯 곳에 열여덟 마지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행장에 자기들은 모은 곗돈 35냥을 넣어드렸다. 그리고 스승 소유의 땅을 계답으로 삼았다.

 

357 강행군으로 인해 건강을 해쳤다. 풍을 얻어 반폐인 상태가 되었다.

 

357 안되겠습니다. 병 수발도 들고 세끼 끼니도 챙겨드릴 조신한 여자를 하나 들이십시다.

그녀는 종을 대신해 살림을 모두 살고, 아이도 낳았구나.

 

358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다산은 한 두 해를 더 버티다가 1812년을 전후해서 그녀를 초당으로 들였던 듯 하다. 그렇다면 1818년 상경 당시 홍임이의 나이는 대여섯살 정도였을 것이다.

 

374 다산의 상경 길에 강진 제자 몇이 동행을 했다. 대부분 스승을 모셔다 드린 후 강진으로 내려갔지만, 이청은 스승 곁에 눌러앉았다. 당장 다산이 진행중이던 작업이 적지 않았고 이청만큼 그 작업을 맵짜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서울에서 스승의 그늘 아래 과거에 당당히 급제해서 이름을 날리고 벼슬도 해 볼 야심을 품었다.

인지상정

 

375 처음에 그들은 스승이 이제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났으니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려는 것은 시간문제로 여겼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그간 스승을 보필해온 자신들에게도 머지않아 좋은 일이 생길거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다산은 그런 제자들의 기대를 애써 외면했다. 열심히 공부하란 말만 했다. 사실 이들이 다른 연줄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다산의 처지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현실 정치로 복귀하리라는 희망은 물론, 제자들을 위해 후광이 되어줄 처지도 못되었다.

 

379 제자들은 이후 서울을 들락거리며 스승이 자신들의 뒷배를 봐줄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차츰 스승에게 실망하기 시작했다.

 

381 편지의 수신자는 기숙 윤종삼과 금계 윤종진의 아버지인 다산초당의 주인 윤구노였음이 분명하다.

신세를 졌으니 이런 청탁을

 

385 스승의 이러한 미온적인 태도는 다산초당의 제자들로서는 참으로 서운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당에 걸 대나무발 세 개의 청죽 서른 개를 약속대로 올려보내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를 상정해서 기일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당부했다. 이런 일에서 그 사람이 드러나는 법이라고 쐐기를 박기까지 한 것은 더 얄밉다.

 

386 아버지 황인담의 장례 때 벌어진 소동이 남긴 앙금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아버지 장례 이후 황상의 삶이 그만큼 팍팍했기 때문이다.

 

387 황상은 겉으로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스승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을 새기고 또 새겨 자신의 삶 속으로 옮겨오는 일에만 마음을 쏟았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자 그도 읍내를 떠났다. 아전으로 백성의 고혈을 빨며 탐욕스럽게 사는 삶을 견딜 수가 없었다.

 

387 해배 후 10년이 흘렀다. 다산은 연락조차 없는 제자에게 전하라며 한 통의 편지를 썼다.

 

390 머잖아 내 부고가 가거든 굳이 먼 길을 올라올 것도 없다. 연암과 함께 다산으로 가서 산속에서 한 차례 곡을 하고 그치도록 해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은 나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올라와 얼굴을 보여달라는 내용이다.

 

390 이들은 가정을 꾸린 가장이었다. 평생 다산 밑에서 조수 노릇만으로 만족하기에는 다산이 심어준 꿈이 너무 컸다. 그간의 혹독한 훈련으로 중앙 학계 어느 누구와 맞겨우어도 식견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실력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91 초당 제자들이 차례로 등을 돌린 데 이어, 사의재 시절부터 따르며 다산 작업의 모든 실무책임을 전담하다시피 한 이청마저 등을 돌리자, 다산은 몹시 침통했다. 그후 이청은 언젠가부터 아들 학연과 잦은 왕래가 있던 추사 김정희 집에 식객으로 들어가 버렸다.

 

398 스승의 땅을 몰래 팔아먹은 제자도 나쁘지만 다산의 품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다그치고 요구했지만 제자들을 향한 배려는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제자들은 과거를 깨긋이 단념하고 학문의 길에 인생을 내걸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막내 윤종진이 마침내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로 이름을 올린 것은 다산 사후 무려 31년이 지난 1867년의 일이다. 조선 최고의 학술 집단으로 드림팀의 위용을 자랑하던 다산학단은 이렇게 와해되고 말았다. 스승의 상경 이후 사제간 학문의 고리는 끊어졌고 경제적 수수관계만 남은 채 오랜 시간이 흐른 결과였다.

 

399 1836 2 22일은 다산의 회혼연이 열리는 날이었다. 스승은 일흔다섯, 황상은 마흔아홉이었다. 편지를 받고도 7년 후였다.

 

404 규장전운 1

중국 붓 한 자루

중국 먹 한 개

부채 한 자루

연배 한 개

여비 돈 두냥

다산의 꼼꼼함이 이러했다. 그는 제자가 먼 길을 돌아갈 때 배를 곯을까봐 여비까지 따로 챙겨두었다.

 

405 규장전운을 왜 넣었는지 아는가? 먹과 붓도. 이제라도 그간 접어두었던 시 공부를 다시 하란 뜻이네. 더우면 부채를 부치고, 힘들면 담배도 한 대 피우게. 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란 뜻이네.

 

409 그는 꺼이꺼이 울면서 다시 마재로 향했다. 서둘러 떠난 탓에 임종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사무쳤다. 이후 그는 장례의 모든 절차를 자식처럼 곁에서 지켰다. 그러고는 상복을 갖춰 입고 낙향했다.

 

413 스승께서 세상을 뜨신지 벌써 10년입니다. 그동안 선생님 기일마다 멀리 두릉 쪽을 바라보며 곡을 했습니다. 살아생전 선생님 산소에 절 한 번 올리고 두 분과도 이 세상 마지막 인사를 나눌 참으로 올라왔습니다. 산골에 묻혀 살아 인편을 얻지 못해 답장도 못 올렸습니다. 송구합니다.

 

413 왠 부챈가?

지난번 내려갈 때 선생님께서 주신 부채입니다. 선생님 생각날 때마다 이걸 매만지며 살았습니다.

말을 듣던 두 형제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학연은 손을 내밀어 황상의 투박한 손을 맞잡았다.

 

420 이는 우리 두 집안 노인의 성명과 자손을 기록한 것이다. 정학연은 침침한 눈으로 천 리 먼 길에 써서 보낸다. 두 집안의 후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신의를 맺고 우의를 다지는 계를 삼고자 한다. 아아 제군들은 삼가 잃어버리지 말진저.

 

420 사제의 인연이 자식대로까지 이어져 스승의 아들과 제자가 집안의 이름으로 계를 맺고 자손끼리도 이 아름다운 만남을 이어가기로 한 정황계의 사연은 달리 예를 찾기가 어렵다.

 

424 1849 4, 정학연은 추사 김정희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사연은 놀라웠다.

 

시를 음미해보니 두보를 골수로 하고 한유를 근골로 한 것이었습니다. 다산의 제자를 두로 꼽아보아도 이청 이하 모두 이 사람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431 근심스런 낯빛은 하나도 없고

언제나 순박한 마음뿐일세

묻노라 그대 어이 이럴 수 있나

품은 생각 담백해 문제없다네

 

434 정학연 형제는 친형제의 의리로 대했다.

 

434 황상은 세번째 상경에서 추사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추사는 황상이 몹시 궁금했다. 황상은 추사가 자신의 시문에 평을 남겨주기를 바랐다. 이름을 날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외길로 온 자신의 일생 성취를 그에게 당당히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438 소승이 오늘은 모처럼 계율을 파할까 싶습니다만

40년만의 상봉이니 술 이나 한잔 하시잔 말씀이올시다.

 

445 이후 황상과 초의는 부쩍 접촉이 잦았다. 황상이 그해 겨울 초의행을 지어 보내오자, 초의는 기뻐서 황상에게 일속암가를 답례로 지어보냈다.

 

448 큰 나무 한 그루의 그늘이 이리 넓었다.

 

462 감역은 궁궐이나 관청의 건축과 수리를 관장하는 선공감에 소속된 관원으로 종구품의 가장 낮은 관직이었다. 하지만 다산의 아들 정학연이 음직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다는 말은 집안에 둘러싸인 폐족의 멍에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벗겨주었다는 뜻이 된다.

다산의 아들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인생이었겠다.

 

469 허리가 시고 저리는 심각한 요통으로 일어서기도 걷기도 다 힘든 상황이었다. 차리리 돋보기 쓴 채 초서하는 일은 견뎌도 바깥 걸음을 하는 것은 힘에 겨웠다. 그 와중에도 황상은 1천 수가 넘는 육유의 시를 깨알만한 크기로 일일이 베껴 썼다.

시 공부를 다시 시작

 

486 이십대의 젊은이로 헤어져 환갑을 훨씬 넘기고서야 이리 만납니다. 말끝의 울림이 허망했다. 이학래는 벌써 근 서른 해 가까이 추사의 식객으로 과천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488 다산은 시 제자로 황상을 첫손에 꼽았다. 학문에서는 이학래가 가장 두각을 드러낸 제자였다. 한 사람은 손님으로 한 사람은 식객이 되어 둘은 추사의 객방에서 슬프게 만났다.

 

490 이학래가 부로는 합격점에 들었지만 시에서 등수에 들지 못해 끝내 최종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우물에 떨어져 죽었다.

 

497 스승께서 내 호 지음 이제야 깨닫나니

내 촌스러움 걱정하여 본받게 하신 걸세

서리에도 변치 않고 눈 속에서도 푸르거니

재목감이 못 되어서 새김과 찍힘 받지 않지.

열 송이 꽃, 씨도 열 개 헛된 꽃이 없으니

말을 실천함과 같아 즐거워할 만하다.

 

498 신가, 즉 새벽노래를 앞세우고 상여가 나간 뒤에야 누가 스승의 가르침을 돌아보겠는가? 이런 염량의 세태에서 황상은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만을 아로새기며 이 적막한 삶을 맑게 건너가리라고 새삼 다짐했다.

 

505 김명희 <서치원고>

 

황군 제불은 젊어서 시에 힘써 나이가 이제 칠십이 다 되어간다. 늙어 더욱 시에 힘을 쏟아 시가 점점 좋아졌다.

 

그가 말했다. “예전에 들으니 스승께서 두보, 한유, 소동파, 육유 네 분은 천고에 우뚝하다. 이 네 분을 버리고 시를 한다면 바른 법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주변의 작가는 거들떠보지 않고 마음을 쏟아 이 네 분의 시만 읽은 것이 50여년 입니다.”

 

50년간 네 번에게 마음을 쏟은 것은 멀리는 두보나 한유, 소동파와 육유와 비슷해지기를 구하고, 가까이는 다산과 비슷해지기를 구한 것이다. 하지만 누구와도 비슷해지지 않고 치원의 시를 이루었으니 시가 살아있는 사물임을 알 수 있겠다.

 

50년간 네 분에게 마음을 쏟아 여기에 목숨을 걸고, 이것만 보면서 침식을 함께 했으니, 이른바 다른 것을 보고도 마음이 옮겨 가지 않은 것이다이는 두보나 한유에게 압도되지 않고 아울러 다산의 시도 아닌 것이니, 네 분을 잘 배우고, 또한 다산을 잘 배웠기 때문이다.

 

508 스승을 배웠지만 스승과 조금도 같지 않고, 사가를 배웠으되 하나도 닮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제대로 배우고 훌륭힌 익힌 결과가 아닐 수 없다고 칭찬했다. 또 얼핏 보면 조어가 생경하고 표현이 거칠어도 그 안에는 기운이 생동하고 참된 힘이 흘러넘친다고 높였다.

 

511 탱정열월, 즉 우레를 버팅기고 달을 찢는 듯한 기상을 갖추고 있다.

 

512 화려하게 꾸미는 표현은 거들떠보지 않아 시어는 담백해도, 그 안에 깃든 기운만큼은 기교에 찌들어 시든 기운을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하다. 명아주나 비름 같은 거친 음식을 먹으며 살아도 마음에 떳떳한 기운이 넘치니 도는 날로 기름지다.

 

518 황상이 강진군 대구면 백적동으로 처자를 이끌고 들어온 것은 다산의 해배 직후인 1818년의 일이었다. 이후 30년간 집 짓고 땅을 일궈 농사를 지으며 일가가 살았다. 예순둘이었던 1849년에 황상은 가족과도 떨어져 지낼 자신만의 공간을 가꿀 작정을 했고, 그래서 지은 것이 일속산방이다. 그러니까 일속산방은 백적동에 들어온 뒤 30년이 지난 시점에 집 뒤편 골짜기 언덕에 새롭게 지은 한 칸 짜리 작은 산방을 가리킨다.

 

521 혼자만의 거처 일속산방에서 완공된 것은 1855년이나, 공사를 시작한 것은 1849년 두릉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521 힘써 일한 지가 30년이인데 일찍이 하루도 시서를 폐한적이 없었다.

 

525 현재는 30년 전에 만들어진 당전 저수지로 인해 유허 바로 앞까지 수몰되어 접근이 어렵다.

 

527 이것으로 좁쌀 한 톨 속에 허다히 많은 도서와 엄청나게 큰 세계를 품고 있어 드넓어 여유가 있음을 알수 있겠다. 그럴진대 천하이 사물 중에 좁쌀 한 톨보다 큰 것이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으로 좁쌀 한 톨의 뜻을 말하련다. 혹 불가의 겨자씨에서 취하고, 장자의 손가락 하나에서 취하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처사는 우리 유가의 사람이지 불가나 노장의 학문을 한 사람이 아니다.

 

529 늙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노학생이 사는 암자라 노학암이라고도 했다. 꽃밭에 둘러싸인 작은 암자에서 젊은이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백발의 노인임을 자부한 내용이다.

 

532 황상은 이곳에서 나무 심고, 벌을 치고, 차를 마시며 지냈다. 시를 짓고, 초서를 하고, 손자들을 가르쳤다. 만년의 삶이 이만하면 넉넉하고 안온했다.

 

533 일속산방을 마련한 기쁨도 잠시, 1849년 무렵부터 시작된 남린과의 송사는 길게 끌며 황상의 피를 말렸다. 그는 황상이 수십년 황폐한 돌밭을 일궈 개간한 토지와 집이 원래 제 땅이라고 우겼다. 당장 내놓고 떠나든지 돈으로 변상하든지 선택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534 당시 황상은 남린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확인서 같은 것을 써주어 극단적 사태를 막아보려 했던 모양이다.

 

535 과연 정학연의 예상대로 남린은 그 문서를 증거로 황상이 마치 빚은 진 채 안 갚고 달아나려 했다는 식으로 죄과를 둘러씌웠다.

 

538 놀랍고 참담한 속에서도 황상은 흔들림없이 시작에만 몰두했다. 날마다 시를 짓고, 일정한 분량이 모이면 작은 책자로 만들어 정학연에게 보냈다. 이 일로 정학연이 화를 벌컥 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올라온 치원의 시집들은 일부는 추사 형제에게, 또 일부는 권돈인에게 가고, 두릉에도 잔뜩 쌓여 있었다.

 

538 당시 그는 일속산방에서 쫒겨나 성가한 손자에게 얹혀 지냈던 모양이다.

 

541 호사다마 (好事多魔)라 했던가? 재앙은 늘 큰 기쁨 끝에 잇따르곤 했다. 슬픔은 혼자 오는 법이 없고 기쁨은 겹쳐 오지 않았다. 삶은 느닷없어 좀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542 황상은 노경에 닥친 참혹한 시련을 오롯이 시로 견뎠다. 돋보기를 쓰고 초서를 계속하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시를 쓸 때만 안온했다. 손자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 행복을 느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544 황상 자신이 이재 권돈인과 추사 형제의 좌석에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정학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45 저는 집안이 단소하고 지혜가 부족하와 취할 만한 재주가 없어 나무로 치면 재목이 못되고 그릇에 비긴다면 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준마들 무리 속에 노둔한 말이 내달을 수 없음을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남이 밀쳐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 깊은 골자기에 숨어 지내며 쟁기와 보습으로 농사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556 마지막 마디를 쓸 즈음 사라진 만년의 10년간을 채워줄 황상의 시집 <치원소고>가 새로 발견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글을 닫으며

 

군산에 다녀왔다. 치원소고라는 황상의 새로운 문집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한달 전부터 소장자를 설득해서 여러 차례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마침내 보여주겠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조짐이 아주 좋았다. 연말부터 꿈만 꾸면 그 책이 보였다. 펼쳐서 보면 면의 내용까지 생생했다.

연구자의 간절함.

 

황상은 여든셋에 세상을 떴다. 중간 삼사십대 작품이 거의 없고 칠팝십대 작품도 빠진 상태다.

 

출발이 산뜻했다. 황상의 영령이 돕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예순여덟부터 세상을 떠난 여든 셋까지의 만년시였다. 

 

작은 퍼즐 조각들을 맞춰 한 사람의 생애를 복원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어디선가 깊이 간직되어 있던 자료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사라진 조각들을 채워주는 것은 아무래도 신통하다. 이토록 많은 황상 관련 자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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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5 14:40:27 *.51.145.193

18세기 조선의 모든 text가 저자의 머리 속에 있는 듯 합니다.

사부님과 수업을 같이하며 저자에 대해 감탄했던 일이 생각나네요...

항상 꾸준하신 누님을 보고 또 한 번 마음을 다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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