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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6일 12시 18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캠벨 / 민음사 / 이윤기 옮김

  * 저자에 대하여 *

  < 조셉캠벨의 어록을 통해 본 생애 >

  “Tat tvam asi. 네가 그것이다" - 산크리스트어

  “어떻게 나의 고통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의 고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보고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고통인 양, 즉각 몸을 던져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 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며,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 경험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무디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예들이 매일매일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곤궁해 처해 있고,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단 한 가지 생각 때문에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순간적으로 반응하여 생면부지의 사람을 돕는다. 이를 위해 때로는 자기 목숨을 버리기 까지 한다. …….” - 쇼펜하우어

  조셉 캠벨이 말하는 것을 듣거나 글을 읽어본 사람은 쉽게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인간 관계를 할 때 이러한 자비에 근거해서 움직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러한 영적 깨달음이야말로 신화와 종교를 표현하는 은유적 언어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신화와 종교의 상징과 에너지는 인류 공통의 상상력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근원적 자아는 현실 속에서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생명으로 활동한다. 신화에 나타나는 은유들은 바로 이 근원적 자아에 대한 직관으로부터 나온 표징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의례화된 표현들을 통해서, 교훈적인 이야기들과 기도, 명상, 연례 축제 등을 통해서 근원적인 자아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해당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로 모여 마음으로나 감성으로 근원적 자아를 알게 되고 이에 따라 살게 된다.”

 

조셉캠벨과 가까웠던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거의 독학으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여 경이로운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확신한다. 자신이 연구하는 어떤 주제에 때해 이야기할 때 그는 너무나도 몰두해서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며,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때로는 청중이나 친구들이 하는 질문이 놀랄 만한 사실들과 설명들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것은 그가 때때로 말했듯이 신화의 보고가 단지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만 땅위로 올라올 수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인간성에 관한 주제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그것에서 황금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조셉캠벨의 학문적 생애 >

  조셉캠벨은 온 생애를 신화와 상징 연구에 바쳤다. 그는 서로 다른 문화의 다양한 신화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와 동기를 탐구했다. 이 주제와 동기들은 다양한 신화들이 종교 체험의 단일한 지하수를 마시고 생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캠벨은 다양한 종교 전통들로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는 모든 문화가 공유하는 단일한 체험의 상이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비교종교학과 신화에 관한 수많은 책들의 저자이며, 뉴욕의 사라 로렌스 대학 교수를 지낸 캠벨은 1949년에 출간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고대와 현대의 영웅이야기들을 탐구하고. 그들의 도전과 경험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실로 옹근 사람임을 보여준다. 신화의 무시간적인 이야기들과 신화에서 볼 수 있는 잉태들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캠벨은 언젠가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 최근에 나타난 오이디푸스의 화신인 미녀와 야수의 계속되는 로맨스는, 오늘 오후에도 뉴욕 42번가 모퉁이에서 변신을 위한 빛을 기다리며 서 있다.”

자신이 진정 참되다고 생각한 학문을 연구한 학자로서 캠벨의 삶은, 신화적영웅의 여행과 투쟁의 삶과 비슷하다. 아일랜드 카톨릭계 뉴욕 사라인 그는 소년 시절 버펄로 빌의 섭부쇼에 매료되어 미국 인디언 문화와 경험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흡인력 있는 신화적 주제들의 꿈을 자각하고, 탐험의 긴 순례길에 나서게 되었다. 학문적 순례길에 그는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 과정에서 아르투리아 로맨스를 연구했고, 동양의 철학과 종교, 산ㅋ크리스트어에 관한 유럽 학문과 프로이드와 융의 작품들도 공부했다. 그는 이 모든 연구 과정에서 자신이 소년 시절 경탄해 마지않았던 미국 인디언 문화와 그 당시 믿었던 카톨릭 신앙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주제들을 재확인했다.

  < 조센캠벨의 종교적 생애 >

  조셉 캠벨 자신의 종교적 유산은 로마 카톨릭이었다. 그는 교회가 성인들에게 맞지 않는 문자적이고 실물적인 신앙을 가르친다고 느꼈을 때 신화연구자로서 공식적으로 교회를 떠났다. 스물다섯이 되었을 깨 캠벨은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카톨릭 교회로부터 떠났다. 나중에 캠벨은 카톨릭 교회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어느정도 누그러뜨렸는데, 그것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은유를 통해서보다는 구체적인 해석을 통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코 다시 미사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가 미사가 지닌 상징적 가능성을 깊이 이해했고, 자신이 행한 여러 강연들에서 그 점을 깊이 강조했더라도 말이다.

어떠한 종교 전통에 속하는 신자라 하더라도 만일 참된 신자라면 조셉 캠벨의 글을 읽음으로써 신앙이 감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성스러운 가르침들과 의례들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그 전통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캠벨과 카톨릭>이라는 페이의 글에 의하면 생애 말년에 “캠벨은 호놀루루에 있는 성 프란시스 병원에서 레이저 치료를 받았다. 그의 병실에는 다른 병실들과 마찬가지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상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의 병실이 있었던 것은 머리를 숙이고 피를 흘리고 있는 대개의 고난받는 그리스도 상이 아니라, 옷을 완전히 입고 머리는 똑바로 세우고 눈은 크게 뜬 채 마치 환희에 차서 신성을 받아들이려는 듯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시간 속으로 성육하고자 하는 영원의 열정에 대한 상징으로 캠벨이 자주 묘사했던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일자가 다양성의 세계로 뚫고 들어와서 확신과 기쁨에 찬 태도로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페이에 의하면, 캠벨은 그의 생애 마지막 몇 주간 동안 “기독교 상징의 심오한 의미를 실제로 체험했다.” 그녀는 캠벨의 부인이었던 진 어드만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에게 그 순간은 아버지와 하나 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신비적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에 따르면 병실에서 그는 “예전에 지적으로 이해했던 것을 감정적으로 경험했다. 카톨릭 병실에서 이러한 상징을 봄으로 인해 그는 유년 시절의 종교와 가졌던 갈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조셉캠벨은 확실히 시대에 발을 딛고 있는 인물이었으며, 생기 넘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위대한 존재의 신비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서 자기 자신을 거기에 완전히 내던진 인물이었다. 그러난 그는 빌모이어스와의 털레비젼 대담이 방송되어 처음으로 수많은 시청자들 아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전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는 부활을 경험했으며.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증인들이었다.

*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

  p.14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p.14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 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p.15 제대로 된 일반 신화학은 없어도, 사사롭고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한 미성숙 단계에 이다 뿐이지, 그래도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萬神殿)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p.22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 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p.23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좆으려 하지 않는다.

p.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p.29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 palingenesia>(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p.29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p.30 영웅이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과의 인과(因果)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심상(原型心象, Archetypal images)>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힌두와 불교 철학에서는 이 과정을 <비베카(?然, viveka)>, 즉 분리 discrimination의 과정이라고 한다.

 p.32 우리가 찾고, 동화(同化)해 나아가야 할 원형은, 인류 문화의 연대기를 통해 제의, 신화, 그리고 상상력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촉발해 온 기폭제이다.

 

p.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nas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p.33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p.35 이 의미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정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굴절하게 되는데,

p.37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p.37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을 한 타래 준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p.39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p.41 시공(時空)의 제약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하찮은 논리와 정서적 집착으로 찾아드는 죽음, 우리들이 흙으로 돌아가려 할 때 비로소 온몸을 흔들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이러한 재인식, 이 생명을 향한 우리의 가파른 중심 이동,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 amor fati>,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그 기쁨, 구원의 황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p.42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앤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超絶性)으로 읽히어야 한다.

p.43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기억)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 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p.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p.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地上的)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p.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原質神話, monomyth)의 핵심 nuclear unit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p.44 영웅 과업의 어려움, 계획이 원대하고, 수행이 신성할 경우 이 영웅 과업의 숭고한 의미를 장엄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부처의 고행에 대한 전설에 잘 나타나 있다.

p.48 구약성서는 이와 비교가 될 만한 행적을 모세의 이야기에다 기록하고 있다.

p.50  대양을 방불케 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p.51 개인의 운명을 담는 세계의 상징적 그릇인 수많은 이야기를 복합적인 모험의 형태로 소개해 보겠다.

p.55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 번 세계의 몸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화,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顯現)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단일한 생명력의 세 단계에 걸친 압축을 나타내면서 다양하게 변한다.

p.58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p.62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세계의 사원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은 늘 아름다운 것도, 늘 자비로운 것도 아니며, 덕이 높을 필요도 없다.

p.62 초월적인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p.65 신화의 제신(諸神)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p.65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p.80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우리는 이를 <모험에의 소명>으로 불렀다)는,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重心)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낙원일 수도 있고 위험의 도가니일 수도 있는 이 운명적인 영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양하게 표상된다.

p.81 현실 생활에서는 자주, 신화나 민간전승에서도 드물지 않게 소명에 응하지 않는, 조금은 답답한 경우를 우리는 만난다. 다른 데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명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p.93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 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護符)를 준다.

p.96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Mother Natu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p.98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그러나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알라 신뿐>이라는 말에서 보았듯이, 영혼을 닫은 자들에게도 초자연적인 안내자가 오는 예가 있다.

p.105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위 아래까지)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p.120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p.123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한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이다.

p.123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p.128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도 바로 이 국면이다. 이 국면은, 기적적인 시험과 시련을 다룬 세계의 문학을 창출해 왔다.

p.133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 지 않는 상징적인 것들(능히 여행 당사자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정화>에 이르는 길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 될> 때인 것이다. 굳이 현대적인 의미의 어휘를 쓰자면, 우리 개인이 가진 과거의 유아적 심상이 분리, 초월, 변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의 꿈에는 아직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위험, 괴물, 시련, 정체불명의 조력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인물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들의 형태에서 우리는 현재 상태의 모든 현상뿐만 아니라, 현상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취할 행동의 단서도 굴절되고 있음을 본다.

p.143 시련은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p.145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 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의 속 영원의 바다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p.150 만유의 어머니의 신화적 표상은 우주에 대해, 그 우주의 존재를 윤택하게 하고 지켜주는 최초의 여성적 속성을 부여한다.

p.153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p.153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p.157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p.159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대한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p.160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p.160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삶, 사는 행위, 삶의 구조, 특히 삶의 괄목할 만한 상징인 여성은 더 없이 순수한 영혼을 차마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p.170 <화해atonment>, 즉 <하나되기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 (신(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는 아버지가 자비로우며, 이 자비를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중심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신의 족쇄 바깥으로 이동하고,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p.171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p.176 네 힘에 의지하기 보다는 행운이 네 길을 인도하게 하여라.

p.177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준다.

p.177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 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p.178 입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p.192 창조적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腱)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p.195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shvara)이다. 이 분은 존재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고 해서 관세음보살, 즉 <대자비로 굽어보시는 주(主)>라고 불린다.

p.196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 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空)의 무량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空)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신의 은혜 안에서 중생을 돕는 존재로, 중생의 존재 안으로 삼투한다. 따라서 광대한 부처의 정신적 왕국 도처에서 그에게 하는 기도는 모두 가납된다.

p.196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상태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즉 <만물에는 불성(佛性)이 있으니>, (같은 말을 달리 하자면)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p.197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라고 하는 존재, 그의 형상. 혹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희망이다.

p.198 보살의 양성구유적(兩性具有的, androgynous) 성격, 즉 남성인 관세음과 여성인 관세음의 성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 남성과 여성의 성격을 두루 갖추는 예는, 신화의 세계에서는 그리 생소하지 않다.

p.200 창조의 신비를 상징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주 발생적 순환cosmogonic cycle의 시작에 해당하는데, 영웅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하여 낙원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신의 형상은 다시 나타나고, 지혜는 다시 원상으로 회복된다.

p.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 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적)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미는 우리 기를 꺽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p.211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의 지식이(따라서 우리는 이 몸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보살처럼 모든 모, 세상의 모든 육신으로 산다) 우리에게 주어졌다.

p.212 신이 우주 자체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전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존재, 즉 모든 인간이 한 형제임을 깨달은 존재다. 어느 경우든 유아기의 부모 상과 선악에 대한 관념이 억압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재생한 우리에겐 욕망도 공포도 없다. 우리 자체가 곧 욕망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신들, 보살, 부처가 우리에게, 세상이라는 연화를 든 우리의 후광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p.215 별, 어둠, 등잔, 환영, 이슬, 거품, 꿈, 섬광, 그리고 구름. 이런 것들을 마땅히 보이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p.215 - 216 보살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생각을 초월하는 진리(이는 언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공>이라고만 불린다)의 안쪽에서 다시 바깥의 현상계를 바라보면서 보살은 이미 안에서 깨달은 동일한 존재의 바다를 바깥에서도 지각한다.

p.217 세상으로부터의 출발은 오류가 아니라 여행의 첫 출발이다. 이 먼 여로에서 우주 순환의 심오한 적멸을 깨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p.223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p.232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아기적 환상은,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신화와 동화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 이러한 이미지와 더불어 안식을 찾는다는 뜻에서, 그리고 예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p.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공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드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神性))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空에 대한 자각이다.

p.250 생명의 원천은 개인의 핵이며.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 내부의 뚜껑을 열어젖힐 수 있을 때 그렇다.

p.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p.257 승리한 영웅이 여신이나 신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구원할 불사약을 가지고 원상 복귀할 대목이 되면, 영웅 모험의 이 최종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후원자에 의한 지원이 따르는 법이다.

p.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바타(devata: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p.269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럼 먼저 초인간적 상징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보고 나서, 이러한 문제를 통해 고대인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기로 하자.

p.269 영웅은 외부의 지원을 빌려 초자연적 모험에서 귀환하는 수가 있다. 말하자면 이 세계가 합세하여 그를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외보 세계가 이렇게 하는 것은, 지칠대로 지친 영웅에게, 힘겹게 도달한 지복의 당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p.270 어디에 있든지. 그가 살아 있는 한, 생명은 그를 부른다. 그가 속해 있던 모듬살이는 그 모듬살이를 더나 잇는 자를 질투하여, 영웅이 안주하고 있는 집 문을 두드리기 마련이다.

p.280 초자연적인 힘은 주인공의 시련에 끝까지 동참하다 마지막 단계에 나타난다. 영웅은 의식을 잃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원래 그가 살던 세계로 되살아난다. <불가사의한 도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웅은 자아를 지키는 대신 자아를 읽어버린다. 그러나 조력자의 은혜로 영웅은 자아를 되찾는다.

p.281 두 세계, 곧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삶과 죽음, 밤과 낮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영웅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암측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영웅은 그 모험을 완성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갇힘으로써 우리들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이 일을 닽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 생활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와 <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p.281 정상 상태로 깨어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p.291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대어야 한다.

p.297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말하자면 시가을 초월한 세계인 저승과 일상적인 세계인 이승을 두루 돌아다니는 자유(그것도 한 세계의 원리로 다른 세계를 오염시키지 않되, 한 세계의 선으로써 다른 세계의 존재를 깨우치면서)는 거장들의 재능에나 어울리는 자유다.

p.297 신화는, 이미 변모한 신비의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 내보이지는 않는다. 이 경우 변모의 순간은, 마땅히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고구되어야 할 귀중한 상징인 것이다.

p.298 신화란 신화는 이 한순간의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예수는 안내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에 수렴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받는 자들이다.

p.298-299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영원의 순간이, 자기 개인의 운명에 대한 카마르 알 자만의 로맨틱한 자각 너머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두 세계의 문턱을 넘나드는 훌륭한 통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심연을 꿰둟어보는, 심오한 참으로 심오한 眼識을 발견할 수 있다.

p.299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상징 체계이지 역사성은 아닌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역사성을 강조하면 혼란이 생길 뿐이다. 즉 암시적 메시지를 어지럽게 할 뿐인 것이다.

p.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p.307 우리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는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의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환상과, 삶과 죽음이 混在하는 불멸의 삶과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p.319-320 신화의 이미즈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빠진 聖畵는 그 영원히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p.322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웅 관계의 전 세계를 섣불리 펼쳐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p.327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사실은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p.331 구원은 초의식으로의 귀환과, 이에 따른 세상의 소멸에 있다. 이것은 우주 발생적 순환, 세계 현현의 신화적 이미지, 그리고 비현현 상태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중요한 테마 및 공식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탄생, 삶, 죽음은 무의식으로의 하강 및 회귀로 볼 수 있다.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을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자다.

p.332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p.333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개어 있음을 주기로 이루어져 잇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내가저자라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조셉캠벨의 첫 번째 저술이다. 이 책은 캠벨 자신이 채집한 영웅신화에 대한 낭만적인 대화를 한 결과물이다. 캠벨은 ‘영웅신화’연구를 통해 영웅여행의 단일한 양식이 존재하며, 모든 문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영웅 신화들은 이 본질적인 양식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다. 캠벨은 원형적인 영웅 여행의 기본 조건들, 단계를 그리고 결과들을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의 뜻을 거기에다 싣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일기 위해서는 고문집 편집자의 재주쯤은 갖추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하다.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서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라고 언급한 책의 머리말에서 캠벨은 책을 쓰게 된 목적과 의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캠벨은 자신이 독학을 통해 알아낸 신화에 나타나 있는 진리와 상징을 자신의 언어로 정리하고,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전설의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가 직접 그 신화와 전설 속에 나타나있는 상징과 이미지를 파악하고 그것이 캠벨이 말한 공통의 진리와 상징과 다름없음을 확인하게 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캠벨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캠벨이 들려주는 수 많은 다른 형태의 신화와 전설을 통해 공통의 상징과 이미지를 파악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읽어 내다보면, 독자는 미지의 세계에서 신나는 모험을 하고 있는 탐험가가 되기에 충분하다.

신화속에 영웅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탄생과 삶, 죽음 그리고 재탄생’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의 여정과 닮아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 삶의 순환적 구조에 대한 이해는 우주의 순환적 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이는 영성교육에 관심이 있는 요즘의 나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나는 교육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뭔가를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중요한 뭔가를 이제야 찾은 듯한데, 그것이 영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나는 종교인이 아니고 아이들에게 종교를 가르칠 수도 없다. 하지만 신화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삶의 목적을 인식하게 해주고, 영웅의 삶의 모습을 통해 자신도 영웅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함을 알겠다. 그리고 신화교육이 이론을 강조한 공허한 울림이 아닌 학생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꿈을 이루어 나가는 실천을 위한 교육의 도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양한 영웅신화의 모델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아이들이 원하는 자신의 신화 모델을 찾아 실천해 나가고, 신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디자인해 볼 수 있는 내용의 책을 써보고 싶다.

아쉬운 점은 캠벨이 전 세계의 신화와 전설을 채집했다고 하나, 동양의 신화가 매우 미약함을 느낀다. 특히 동양의 신화도 인도지역의 이야기에 치중되어있다. 동양의 정서가 우리의 기저에 깔려있음을 감안할 때 동양의 신화와 전설에 대한 다양한 제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양인임에도 동양의 정서와 문화, 역사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오늘날을 사는 많은 이들이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의 관점에서 세계인이기도 하지만 부분의 관점에서는 동양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다. 나무라는 전체는 뿌리라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자신의 뿌리를 인식해야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개성있고 아름다운 나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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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4.26 16:06:02 *.236.3.241
연주는 참 균형잡힌 시각을 갖췄다.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마음을 쓰려는
태도가 느껴진다. 영웅과 아이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현대의 영웅이 삶을 디자인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아이디어, 참 좋구나~~

캠벨이 생애 마지막에 기독교의 심오한 의미를 직접 체험했다는 스토리는
어디서 확인할 수 있을까? 어째 그런 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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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연주
2010.04.27 13:08:55 *.203.200.146
균형잡기...어떤 곳이든 항상 적용되어야 할 것인데...쉽지가 않아요~ㅎㅎ

캠벨이 생애 마지막 순간에 기독교의 심오한 의미를 체험했다는 것은 본인만이 확실하게 알터인데...
제가 본 자료에 의하면...그의 소울메이트였던 부인이 그랬다고 전해줬다는 거죠~
사실 캠벨이 체험했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체험인 동시에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성에 대한 체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좀더 자세히 근거자료를 찾아보도록 합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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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04.27 02:10:18 *.129.207.200
어디서, 참고한 것이야? 너희 집 도서관이야? 

조근조근 문체는 신경숙 같다. 게다가 영양가 있고, 감싸안아주는 것 같아. 글에 치유의 힘이 있어. 

영성 교육에 대한 방법을 신화에서 찾았구나. 연구원활동과 직업에서 연결점을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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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연주
2010.04.27 13:12:12 *.203.200.146
집의 도서관화...바램이죠 ㅋㅋ
참고서적이 몇권있는데...앞으로 리뷰에 함께 올려야겠어요~~ 일단 지금은 모르고...ㅎㅎ
"치유의 힘"이라는 말이 참 좋은 데요. 감사합니다^^
영성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고 적용시켜보는 일이 재밌을  것같아요~
모든 길은 통해있나봐요. 신화에 대한 책을 읽으니 그곳에서 힌트를 얻고~
오라버니처럼 책을 좀 자세히 꼼꼼히 봐야하는데...전 성격대로 대충보는 경향이 있어서 반성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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