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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7일 21시 05분 등록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 - 프레데릭 불레스텍스 지음-


< 책에서 캐낸 글맥 >

I 첫 만남(13~17세기)
* 한국에 대한 최초의 기록
<몽골제국 여행기> 기욤 드 루브룩
가. 한국은 지리적 공간 속에서 나무도 먼 곳에 있고 서구인의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시대에 속해 있다. 어떤 먼 나라보다도 더 멀리 있는 곳으로 묘사되어 이상한 ‘타지’에 속해 있었다.
나. 고립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 ‘은둔자’라는 이미지가 주요 특징으로 자리 잡음.(이는 18세기에 이르러 ‘자연인’의 이미지와 ‘동양의 현자’의 이미지로 구체화되어 한국이라는 타자 인식에서 양대 기둥을 차지한다.)

* 한국에 대한 구체적 이미지
<하멜 표류기>
통과하기 어려운 길, 야생동물, 그리고 매서운 추위라는 세 가지 요소는 산으로 덮인 폐쇄된 나라 한국의 최초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쾌락의 동양과 연관된 주제들이 등장한다. 자유로운 풍습 속에서 어떤 도덕적 구애도 받지 않고 사는 착한 미개인들의 이미지도 떠오른다. 두 가지 이미지 모두 기독교의 엄격함이 지배하는 서구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것이다.

나태함, 부도덕성, 단순함 등 부정적 어조의 측면이 언급되었지만 가장 온화한 방법으로 가르침이 행해졌고 학업과 시험과 책이 숭상 받는 나라가 한국임을 기록했다. 여기서도 한국 사회는 서로 상반되는 양 극단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 된다. 폐쇄와 개방, 폭력과 온순함, 성스러움과 세속성, 미개인과 문명인 등... 한국의 이미지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는 하나의 핵심어는 바로 양면성(일종의 대비적 성격)이다.

II 동양의 끝, 한국에의 접근 (18세기)
* 중국 속에서 발견한 한국
‘착한 미개인’ 혹은 ‘자연인’의 신화적 형상에 동양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는 또 하나의 형상이 첨가된다. 그것은 바로 ‘동양의 현자’의 이미지다. 역사가 없는 미개인의 이미지에 유럽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이다. 볼테르는 18세기의 모든 학자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가장 위대한 중국 예찬론자였다.

* 계몽주의 시대의 한국 이미지-
1) <세계 풍속사론> 볼테르
비록 그의 저서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서구의 역사지만 볼테르는 ‘타지에 대한 감각’을 품고 있었고 왕족의 전기만을 늘어놓던 형식에서 벗어나 인간 공동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2) ‘아름다운 풍경의 나라’ - 라페루즈 항해기
최초로 한국을 회화적으로 묘사했고 그 역시 두개의 이미지 축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잘 가꾸어진 토양(논밭)이 있는 반면 척박한 산악지대, 논밭도 없는 눈 덮인 추운 협곡의 풍경으로 대비된다.


III 고요한 나라로의 방문(19세기)
* 제국주의, 선교사 그리고 한국
가. 프랑스 함대의 한국에서의 패전(병인양요) 이후, 국제무대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중국에 서 독립된 주체로 간주되었다.
나. 샤를르 달레의 <한국 교회사>
1. 친척이나 단체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는 상호부조와 모든 이를 극진하게 대접하는 자세
2. 게으름, 높은 어조, 열정적(육체적)인 사랑, 까다롭고 화를 잘 낸다.
3. 여성의 지위문제 언급 -열등한 피지배적 존재이자 존중되고 침범할 수 없는 존재

* 문호개방과 한국학의 성립
전통의 존중과 행복한 삶은 가족 안에, 모든 이별을 넘어서는 애정의 고리의 일체성에 있다. ‘존중과 일체성’ 이것이야말로 서영해가 프랑스인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한국 정서의 본질적 요소이다.

★한국 우화의 한국적 특징★
1. 배경에 있어 산이 숲을 대신한다.
2. 개인적 운명만을 다루는 프랑스 동화에 비해 사회의 공동체적 균형유지에 참여함으로써 신화와 같은 기능을 한다.


IV 세기 전환기의 한국 체험(20세기 전후) - 한국에 관한 본격적인 기행
* 체험의 시대
접근의 시대에 이어 체험(묘사와 서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묘사와 서술 기법은 무엇보다도 ‘관찰하기’, ‘민속학적 견지’, 바라보는 자의 문화와 바라보는 대상이 되는 자의 문화 간의 차이에서부터 기인하는 시각의 상징체계에 근거한다.

* 20세기 초, 한국에 관한 기행문
1) <한국에서> 장 드 팡주
잊을 수 없는 고요함으로 시작한 첫 부분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 끝을 맺는다. 오랜 제국의 나약해진 정신이 강조된 이 글에서 ‘무기력함’은 ‘패배’와 ‘고요함’은 ‘체념’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교라는 중국의 종교문화가 한국을 부동성 안에 가둠으로써 얼마나 많은 폐해를 가져왔는지를 설파한다. (한국에서 유교는 사회의 계층을 명확히 구분하고, 모든 사물을 경직된 도덕규범의 잣대로 해석함으로써, 관찰력과 진보정신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도교적 자연주의에서는 미신적 관행만을 배웠을 뿐이다.)

2) <은둔생활의 탐험> 앵거스 해밀턴
저자는 한국인과 한국이라는 공간의 독창성을 그 내면에서부터 보여주려고 한다. 다수의 작가들이 험준한 산악지형 때문에 한반도를 침투할 수 없는 곳으로 그리거나 금강산 깊은 곳의 오랜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데 반해, 해밀턴은 산과 인간, 인간적인 특성과 자연을 연결하는 가장 오래된 믿음과 결합된 독창적인 은둔생활의 영적 가치를 탐험한다.

* 극동지역의 여행기 속에 나타난 한국
여행객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에는 두 개의 상징적 가치를 지닌 요소가 지배적이다. 바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와 ‘은둔의 왕국’이다. 이 둘은 한국을 먼 곳에서만 바라보고, 인간에 관련한 이미지만 전달하던 시대의 ‘자연인’과 ‘동양의 현자’라는 예전의 표상과 연결되게 된다.

V 동양의 신비와 근대적 현실(20세기)
* 한국 안에서 들여다본 한국
<은둔의 나라> 피에르 로티
반도이기 때문에 대륙 기질의 중국과 섬의 기질의 일본과도 가까운 한국은 두 합쳐놓은 양국과 가까우면서도 중국과도 일본과도 멀며, 합쳐놓은 양국과도 멀다. 그의 글에서 나타난 한국의 이미지는 긴 잠의 마지막 순간들, 첫 새벽의 요란함에 당황해 갑자기 깨어난 한국의 그것이다. 불안정성(기후, 흰색 의상, 공간), 향연 속의 무력함, 죽음이라는 주제가 내포되어 있는 ‘은둔의 왕국’의 부동성과 고립이라는 이미지는 큰 곤충과도 같은 모습을 한, 쓰러져가는 구제국의 시대에 뒤떨어진 고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애처롭고 부드러운 한국> 조르주 뒤크로
산은 한국의 오래된 관습과 순박한 풍습을 보존해왔고, 정복자들은 한국의 중심으로 침투해 오지 못한 채 큰 길로만 질주했다.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굽이굽이 산등성이와 산속 오솔길들을 외부인들은 앞으로도 결코 짓밟지 못할 것이다.

이 세련되고, 꿈을 꾸는 듯 하고, 가난한 민족에게서는 사악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운명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한국인들은 ‘웃는 팔자를 타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는 팔자를 타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라는 속담에서처럼 스스로 위로한다. 옛 선조들의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만을 바랄뿐인 이들의 튀어나온 이마 위로 먹구름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 프랑스 현지의 눈으로 본 한국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 관련기사는 줄어들고 중국의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디외라프와는 여성들의 삶을 유추하면서 특히 ‘부동성’과 ‘조용함’ 속에 얼어붙어 있는 한국의 소외되고 우울한 모습을 강조한다. 이 시기의 저자들은 갈수록 한국인들을 여성적이고 소극적이며 조용하고 느린 사람들, 잠과 죽음 속에 빠져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조용한 모습이고 수동적이어서 구속을 받아도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 예술가의 눈에 비친 한국
백색은 우리의 영혼에 절대 침묵과 같은 역할을 한다.... 침묵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솟아오르는 기쁨으로 가득 찬 무이며, 더 잘 표현하자면 탄생 이전의 무, 시작 이전의 무이다. 빙하기의 대지는 차가운 백색의 모습으로 그렇게 메아리쳤을 것이다. -바실리 칸딘스키-

신인 폴 클로델은 한국을 단순한 기쁨과 하늘빛의 풍경이 아닌 대지의 에너지, 공간과 시간 사이의 에너지 간에 미묘한 교환이 일어나는 땅으로 보고 있다. 아시아에서의 체류경험을 통해 본질적이 요소에 중점을 두고 한국 땅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대지의 흐름이다. 한국은 고립되고 닫혀 일본과는 달리 한반도는 ‘최종적 결정체’이면서 오래전부터 대륙의 거대한 흐름에 참여하고 있는 땅인 것이다.

VI 두개의 한국(현대)
* 다른 시간 속에 놓인 두 개의 한국 : 전통과 현대
그림은 뭔가를 재현해내는 공간이 아니라 성찰의 공간이다. 한국의 화가들은 전통을 중시하면서 인간과 우주 간의 조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노력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 혹은 이러한 자연의 표현에서 출발한다. 빈 화폭에 대한 사랑, 한적한 공간, 명상의 공간에 대한 애착, 이러한 노력은 개인의 철학적 탐구로 이어진다. 오랜 시간 속의 엄숙함과 침묵.
-장 프랑수아 모지코나치, 1998-

한국이 이중으로 극단인 이유는 서구에서부터 먼 나라일 뿐 아니라 지리적 시간적으로 한국이 속해 있는 공간인 동양으로부터도 멀기 때문이다. 한국은 중국의 모델을 받아들였지만 중국과는 다르고, 일본에 영향을 주었지만 일본과도 다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둘 사이의 공간인 한국은 따라서 야만적이면서도 문화적인,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북쪽이면서도 남쪽인, 대륙이면서도 섬인, 오래되었으면서도 현대적인, 깊으면서도 표면적인 나라였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마치 음과 양 사이에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러한 양면적인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할 운명인 것처럼.

< 소감 >
표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는 대상’의 중심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함으로써 일정한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표상의 과정에 감정적, 정서적으로 지나치게 개입하게 된다. 거리두기와 중심이탈은 좀더 다양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얻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본문 중에서-

외국에서 보는 한국의 모습이 그 전체성과 진정성을 올곧이 담아낼 수는 없다 할지라도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특성을 잘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대상 표상과 자기 표상과의 수많은 반응과 교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누군가에게로부터 한국사를 배우기 위해 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말을 듣고 참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 책을 보니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왜 이런 작업을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을까? 물론 특정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 전체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인문학적 토양이 갈수록 척박해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런 작업은 우리 내부에서는 요원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먼저 이런 수고를 감내해준 저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15년이라는 시간동안 수많은 도서관, 고서점, 인물들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800여년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재구성한 저자의 노력에 존경을 표한다. 어쩌면 내부적 노력으로는 그 답을 좀처럼 찾기 힘들거나 아니면 편향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는 ‘한국적 정체성’에 대해 또 하나의 길잡이를 제시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막상 접근해보니 이것은 알면 알수록 오리무중이다.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예를 들어 한국적 특성 중에 ‘빨리 빨리!’로 표현되는 급한 성격 혹은 역동성이 과연 통시대적으로 맞는 말인가? 프랑스인에게 비추어진 한국인은 나쁘게 말하면 ‘게으름’에 빠져 있고 다소 좋게 표현하면 여유와 느림으로 묘사되는데 어느 것이 더 한국적 특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을까? 느림의 특성이 맞다면 지금 보이는 역동성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어렵다. 흑백논리에 익숙한 사고적 특성 때문이겠지만 두 가지 특성 모두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답을 떠올려도 무언가 개운하지가 않다.

저자의 말과 옛 프랑스 문헌들을 종합해보면 타자에게 비추어진 한국의 이미지의 핵심은 ‘양면성’인 듯싶다. 같은 동양이면서도 중국과 일본과는 또 다른 동양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국의 이미지는 양면적이 되었을까?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다시 재구성해보자.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북방계와 남방계가 섞여서 구성되었다는 설도 꽤 널리 알려진 학설이라고 알고 있다. 인류학적 특성은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 다른 특성들을 살펴보자.

첫째, 지리적 특성을 들 수 있다. 대륙과 바다(섬)의 연결통로인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성과 산과 평야의 대비가 이루어진 지형적 특성이 그 양면성을 이루는 배경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둘째, 경제적 특성을 들 수 있다. 완전 농경사회라고 보기 보다는 남쪽은 농경(논농사 중심)과 어로 중심이고 북쪽은 유목과 사냥이 중심을 이루는 이질적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했다.
셋째, 기후적 특성을 들 수 있다. 겨울과 여름이 확연히 구분되고 사계절이 공존하는 기후 특성도 부분적인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네째, 종교적 특성을 들 수 있다. 애니미즘, 샤머니즘 등 토속적인 무속신앙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가운데 여러 외래종교의 유입이 이루어진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적 특성을 살펴볼 때 자문화 중심주의나 자문화 열등주의를 버리고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외국의 눈에 비추어진 한국의 이미지를 알아보는 것은 무척 소중한 작업이 된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어렵다. 한국적 정체성의 본질적 특성이 무엇인지 더 고민과 공부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특성과 한계에 대한 균형감 있는 진단이 필요할 것 같다.

책의 후반부에는 유교와 현대성이라는 주제로 여러 글을 인용한다. 일부에서는 유교가 현대 문명 비판의 새로운 도구가 되어 유교적 인간주의로의 회귀를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시각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유교적 관습이 창의적인 사고를 억압하고 국가발전을 지연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도 보았다. 그리고 클로드 발레즈와 같은 사람은 유교와 현대성이라는 두 요소가 상충되지만은 않는다고도 하였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유교와 현대성은 쉽게 융화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과거 국가주도의 경제성장 시기에는 이러한 유교적 특성이 빠른 산업화를 만들어가는 핵심적 역할을 했겠지만 21세기 지식산업의 시대에는 유교적 특성은 오히려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 않나 싶다.

끝으로 한국의 이미지에서 ‘산’이라는 심상을 끄집어내어 세밀하게 이야기를 끌어간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한국적이라는 것을 너무 무형적인 가치와 심리적 특성에서만 찾으려 했던 내 생각이 짧았음을 느꼈다. 한국적 특성의 근원은 어쩌면 한국의 자연 속에 담겨 있는 것인데 허상만 쫓았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내가 저자라면 >
한국학에 대한 현재의 학문적 수준이 어느 단계에 도달해 있는지는 나는 하나도 모른다. 사실은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한국학이라는 분야가 아직 걸음마 단계이고 학문적 깊이가 깊지 않다면 좀더 애정을 가진 조언이나 분발을 촉구하는 비판도 실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는 것도 좋다. 그 침묵 속에서 성찰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몫이니까.

책을 읽으면서 아쉬운 부분은 별로 없었다. 혹시 책 읽는 것을 방해할까 싶어 대청 마루에서 발 뒤꿈치를 들어 조용히 다가오는 것 같은 저자의 모습에 매료될 뿐이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다가섬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깊은 애정도 느껴진다.

3단계로 계획되어 있는 이 연구의 다음 결과물이 무척 궁금하다. 한국성(koreanity)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다음 편이 기다려진다. 그러면서 어찌 보면 좀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의 할일을 스스로 해놓고 비교하기 위해 기다린다면 그런 느낌이 덜 한텐데 왠지 그의 작업을 검토해보고 그제서야 우리의 작업방향을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나의 이 느낌이 부디 기우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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