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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8일 01시 43분 등록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보고서 -C. FRED ALFORD-


< 책에서 캐낸 글맥 >

* 책의 핵심내용 정리
① 한국인이 악을 믿지 않는 이유는 어떤 것을 악이라고 부르면 자신에게 가깝고 소중한 모든 것을 악이라 부르게 되는 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② 이는 한국인의 자아개념과 관련 있다.
③ 한국인은 악을 믿지 않지만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④ 한국인이 악의 개념을 쓸 수 있다면, 아마 세계화를 악이라 부를 것이다.
⑤ 악의 개념은 경험을 이해하거나 악을 회피하는데 중요하지 않다.
⑥ 나는 도를 따르기 때문에 악의 개념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에서는 이름이란
실재의 손님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⑦ 현실은 매우 모호하므로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여러 해석이 필요하다.
⑧ 계몽은 이전에는 문화적으로 모순적이라고 여겼던 요소들을 결합하는 생활방식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세계화는 파괴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새로운 계몽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⑨ 우리는 계몽이 엄청난 것이라거나 우리를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 그 새로운 가능성을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1. “관계를 말해주면...”
나의 관심은 악의 부재가 아니라 그 부재의 의미에 있다. 블랑쇼는 ‘부재의 의미에 주목하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곧 어떤 문화가 가지고 있지 않은 개념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들보다 중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진정한 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 이를테면 무관함, 절대적 소외와 비관련성에 대한 두려움, 순수한 고독, 절대적 차이 등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들의 악에 대한 정의라면 정의이다.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악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문화생활을 해가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악을 규정하는 것이다. 한국적 두려움은 스스로에게 타자가 된다는 두려움이다. 세계화는 한국인들이 더 이상 자신을 식별할 수 없는 세계, 한국인들이 스스로에게 타자가 되는 세계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대상은 아름답고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라 아름다운 즉, 조화로운 관계이다. 개인보다 관계에 충실한 한국적 미학은 언제나 사회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한국적 미학은 자유보다 책임을 중시하게 마련이며, 나아가 칸트 보다 훨씬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도덕과 미학의 범주들을 결합하게 된다. 관계를 미학으로 바라보면 한국에 악이 부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악은 나쁜 타자가 아니라 조화의 부재일뿐이다. 이 때 윤리는 푸코를 포함한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미학에 가까워진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경험이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이유는 그의 가족이 그를 그렇게 간주했고, 가족의 지위와 안락을 위한 도구로서 그를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 철저한 소외의 경험을 왜 그냥 끔찍하다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서구의 악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동양에서의 악의 부재에 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2. 자아는 연속이 아니라 대립이다.
‘한국인은 집단적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나’를 행위의 중심으로 삼지 않고 ‘우리’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집단속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고민한다.’ 개인적으로 볼 때 한국인은 서양인과 다르다. 그들은 자신을 개인으로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개인적 가치를 결여하고 있다. 비록 모든 전문가들이 그 집단적 자아를 유교의 유산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대다수는 집단적 자아를 장애물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가치로 간주했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이 과도기 시점에서 우리에게 특히 필요한 것은 잃어버린 개별성을 되찾는 일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각 개인의 개별성을 성장시키고 충족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윤 태림, 1994-

한국인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정서적 안정, 위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 등이 모두 한국인의 자존심을 결정하는데, 이것은 흔히 ‘기분’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기분은 그냥 자아의 상태라기보다는 사회 속의 자아의 상태를 가리킨다. 인류학자 빈센트 브랜트(1971)는 한국문화는 공동주의의 관점만이 아니라 대립하는 가치들의 갈등,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긴장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의 일부 심리학자들은 서양의 경우 개인이 먼저 출발했고 나중에 집단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서구인들은 한국의 집단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철저하게 집단성을 취하므로 서구와 같이 개인들이 뭉친 집단 개념과는 다르다. 한국인들은 분리된 개인이 아니므로 한국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개인주의적 경쟁은 실상 개인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가족들 간의 경쟁이다. 개인은 늘 자기 자신 그 이상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본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성물이며, 그 구성물은 무엇보다 대립물의 갈등과 충돌의 산물이다. 음양과는 달리 이 대립물은 산뜻하게 통일되지 않으며, 이따금 그것 때문에 개인과 사회가 갈라지기도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명백한 사실은 그것이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그 두 가지는 하나의 자아 속에 거의 동시에 공존한다. 마치 한 순간에는 공격적으로 질주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멈춰서서 곤경에 처한 다른 운전자를 도와주는 것과도 같다.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갈등 자체를 중심에 놓는 것이중요하다. 본성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개인주의-집단주의의 연속선으로는 그 복잡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그 많은 한국 단편소설의 작가와 작품들이 자기비하와 자기경멸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자기 회의는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좋은 것이지만, 자기이해가 자기변화를 이끌어낼 때만 그럴 수 있다. 외국과 국내 독재자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회의를 무기력하게 경험한 듯하며, 마치 자기 자신까지 포함하여 아무 것도 변화시킬 힘이 없어진 것처럼 느끼는 듯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 알고, 느끼고, 상상하는 모든 것은 내면화된 자아-대상 표상으로부터 나온다. 거기서 자아는 타자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아는 타자에 대한 앎에 대립적인 한 이미지가 아니다. 자아는 많은 타자와의 만남을 반영하는 내면화된 이미지들이다. 그 타자란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의 여러 측면일 수도 있는데, 그 타자들 하나하나가 자아의 각기 다른 차원들과 짝을 이룬다. ‘모든 인격은 복수의 인격이다. 즉 한 인격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인격들이 있다.(노먼 브라운, 1966)’ 우리는 누구나 심리적으로는 집단주의적이다. 우리의 심리는 무수한 짝들의 미로를 이루고 있다. 다만 차이점은, 어떤 문화에서는 다른 문화에서보다 개인이 ‘자아-대상’과 더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추상적인 관계가 개인적 자율성에 더 잘 부합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3. 한국인들은 왜 늘 ‘우리’라고 말하면서 ‘나’로 행동할까?

고립된 자아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기 것이라고 말한다.
토크빌은 사람들이 서로 단절된 사회는 사람들을 자율적이면서도 자유롭게 만들 가능성이 오히려 더 적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는 개인주의가 집단주의를 지탱하기보다는 집단주의가 개인주의를 지탱한다는 것을 우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의식이란 본래의 자아에 대한 의식이 아니다. 본래의 자아 같은 것은 없다. 자의식은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 속에 있는 자아에 대한 의식이다. 여기에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자신의 관계를 더 잘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인들보다 더 자의식이 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벤저민은 아버지의 권위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사랑으로 보완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래야만 자녀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남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그래야만 강력한 자아와 강력한 초자아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집단적 자아와 강력한 자아는 실상 서로 모순되는 게 아니라 보완적이다. 한국에서 보는 것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율적인 집단적 자아’다. 이는 심리적 갈등만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까지 치료하는 처방이다.

오늘날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원인을 잘 알 수 없는 불편함, 공허함, 불만족을 호소하며, 어떻게 해도 행복이나 안락함, 성취감을 느낄 수없다고 토로한다. 저강도의 만성적인 우울증이 만연하며, 예전에는 의지가 부족한 것으로 여겼던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해지는 상태가 일상적인 것이 된다. 그런 증상들을 치료하기 위해 ‘화학적인 감금’을 만들어주는 약이 생겨났다. 그 약은 자아를 짓누르는 대신 조각내고, 히스테리 대신 늘어지게 하며, 우울증대신 공허함을 준다.

4. 악은 무관함이다.
죄와 벌의 의미는 단지 악한 자들이 벌을 받는 데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삶의 고통에 대해서도 의미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한다. 이유 없는 고통보다는 차라리 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고통을 겪는 게 낫다는 이야기다. 그 의미는 반드시 도덕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우주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사회적 설득이다. 추상화된 원칙으로 일반화된 사회관계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칙이 큰 사회로 일반화 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즉, 대면 사회를 넘어서도 세계가 무의미해지지 않으리라는 희망이다. 그 믿음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다. 즉, 대규모 사회가 가족과 촌락처럼 계속 존속하리라는 믿음이다. 이는 추상화된 사회에 대한 믿음,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종국적으로는 균형을 이루리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지금 젊은이들이 가장 큰 회의를 품는 것도 바로 이 믿음이다.

한국에 악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는 현실적 관계가 긴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관계가 전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관계를 다른 관계들과 구별할 수 있어야만 악을 일반화하는 게 가능하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라면 그래서 모든 관계가 가족관계에 기초하고 있다면 악은 생각할 수 없다. 악이 있다면 가족 자체가 악이라고 말하는 셈이 된다. 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비슷한 신경증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관계를 가족관계의 견지에서 보는 것은 가치 선택이며, 세계를 풍부한 의미로 짜여진 인간관계망으로 만들고자 하는 결정이다. 자아가 중첩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이 항상적인 연결 상태에 있으며, 정이 도처에 존재하는 세계는 신경증의 세계가 아니다.

5. 한국인들은 악을 믿어야 할까?
한국에서 귀신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원리에 따라 활동하며,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초자연의 세계는 더 높은(혹은 더 낮은) 세계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거의 모든 측면들이 충실하게 반영된 유사적인 세계다. 이 유사성에는 악과 타협하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 샤머니즘에서는 현실 세계로의 침투성이 뛰어난 세계에 영혼들이 존재하며, 죽은 자가 영혼들 사이를 자유롭게 떠돈다고 말한다. 일상생활의 세계와 영혼의 세계는 하나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둘도 아니다. 이 둘이 아니라는 견해는 미신이 되지 않고 추상화되면서 한국에 악의 개념이 부재하는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세계관이 된다.

한국인들은 알고 보면 양면성에 대해 더 관용적이며, 따라서 모든 강렬한 감정적 관계의 한가운데에 있는 애정과 증오를 더 잘 관리하는 것 같다. 한국인들은 양면성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풍부하기 때문에 악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 말을 하지 않더라도 모든 긴밀한 관계가 양면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인들은 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기 위해 악을 간과하는 반면, 서구인들은 악을 친밀한 관계의 바깥에 내놓기 위해 악을 창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더 두텁게 방어하고 양면성을 더 용납할 수 없는 측은 오히려 서구인들이다.

나는 한국에서 악의 부재가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한 바 있다. 그것은 악이 워낙 가까이 있어 사랑하는 것들을 만지는 것처럼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란 결국 가족, 세계이다. 서구에서 악이라는 것을 통해 부정하고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악은 세계가 하나라는 무서운 생각, 세계를 만들고 지배하는 신이 실은 피조물의 행복에 관해 전혀 무관심하며 오히려 겁만 주는 악의적인 존재라는 공포스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해준다. 한 마디로 악은 서구를 괴롭혀왔던 신정론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악을 신의 대립물로 간주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한다. 어느 것보다도 귀중히 여기는 것이 지닌(한국-우리, 서양-신) 악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 답은 두 가지 즉 부정과 분리지만, 문제 자체는 하나다.

6. 세계화는 악이다.
세계화는 20세기 벽두에 있었던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전혀 새로운 점도 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통합력을 과신한다. 한국의 신체가 그 근본구조를 변화시키지 않고도 외국의 생각을 소화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환상이며, 사대주의에 대한 자기도취적 방어다. 강대국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강대국을 섬기고 강대국에게서 취할 것을 취하겠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파편화는 최근의 경제 위기에 못지않게 위협적이다. 민족주의는 하나의 해결책이지만 그다지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배워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7. 세계화는 계몽인가?
‘사유에는 이원론적 구분이 필요하므로 이원론적인 사유는 어쩔 수 없습니다. 다만 서구가 저지른 잘못은 이원론을 실체화하여 각 대상들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든 것이죠.’ -김용욱-

세계화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인간들에게 새로운 선택을 준다. 세계화는 통합이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추가해주고 병렬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낡은 문화가 튼튼히 존재해야만 과도기적 대상을 통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추가하는 방식으로 새 문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영토적 단위가 단절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자성을 보존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독자적 정체성은 사람, 물자, 생각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교차로의 형식을 취하게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교차로에 서서 지나치는 민족들의 삶으로부터 이것저것을 조금씩 고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계몽으로 이어지는 실험이 되려면 틀과 형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선택과 배제의 원칙만이 아니라 유형이 필요하다. 세계화는 삶이 아니라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정은 여전히 새 한국 속의 옛 한국적 요소로 존재한다. 한국인들은 선택의 원칙을 잃었기에 상실감을 느낀다. 외국인이 간섭해도 좋다면 나는 정을 권하고 싶다.

< 감상 >

‘악은 나쁜 타자가 아니라 조화의 부재일뿐이다.’

전반부에서 보이는 한국적 특성에 대한 긍정적 시선(‘자율적인 집단적 자아’와 같은 표현)은 세계화에 대한 주제로 이어지면서 비약을 초래한다. 급기야는 한국의 핵심을 고수해가면서 세계화를 병행시키려는 의도는 허구이자 환상일 뿐이며 그 한계가 바로 IMF 위기로 나타났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리고 한국인은 세계화를 대할 때 과거 식민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울 수 없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결국 한국적 핵심을 포기하는 즉, 몸도 마음도 깔끔하게 서구화를 시켜야 한다는 눈에 띄지 않는 주장으로 슬며시 나아간다.

‘한국인들은 세계화라고 하면 예전에 겪었던 제국주의 시대,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한 시대를 생각한다.... (중략) 남한 이 세계 경제에 문호를 개방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새 한국 속에 옛 한국의 핵심을 온존하게 보존하면서 그런 태도를 위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한국인들이 아직도 그럴 수 있다고 믿는데, 이제 위장으로는 안 된다. 사회 규범, 생각, 제도 등을 쇄신함으로써 과거의 관습들과 근본적으로 결별해야 한다.’

이쯤 되면 처음 전반부에 언급했던 한국인의 사고체계와 심리 특성에 대한 긍정적 시선에 대해서도 그 진정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타자로부터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용해야 하며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부정할 것은 부정해야 한다.’

그리고 저자는 세계화가 이전 제국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큰 차이점이 있다고 했는데 아직은 그 실체를 잘 모르겠다. 궁극적으로는 종속이 아닌 수렴이 되어간다고 보는 것인지 계몽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부정하더라도 세계화의 진행과정에서 세계는 승자와 패자로 나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다고 하면 비약일까? 저자는 세계화는 서구의 문화가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이 이끄는 전달수단이자 매체일 뿐이라며 그 의미를 축소시키고 되지도 않는 분리를 선택하려 한다. 세계화란 애써 문화침탈(식)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럼 도대체 한국 신체의 근본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서양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즉, 세계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저자의 생각은 그의 어렵고 때로는 모호한 표현처럼 잘 알기 힘든 때가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저자는 선택의 원칙을 잃었기에 한국인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하고 ‘정’의 요소들에 새로운 가치 부여를 통해 그 해결의 열쇠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난해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세계화를 피해갈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과거와의 단절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과거로의 회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제 3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계와의 단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맹목적인 세계화도 아닌 우리식의 세계화란 무엇일까? 가능하기라도 한 것인가?

그러다가 저자가 피해의식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정말 몸도 정신도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제 3의 길이란 자아가 붕괴되지 않을 정도로 강할 때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다. 즉, 세계화의 핵심은 한국적 정체성의 굳건한 토대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존재가 튼튼히 선 상태에서 관계(세계화)로 나아갈 때 우리는 제 3의 길을 만들 수 있고 새로운 창조의 길이 열린다. 우리는 그러한 잠재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태일 뿐 현 상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주장에 대해 마음껏 대들지 못한 것은 그의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을 떠나 많은 부분이 우리의 환부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만 놓고 보면 우리 사회는 희망적이질 않다. 혼란과 위기의 상태이다.

첫째, 예전에는 집단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의 갈등과 대립이 두드러지지 않았고 저자의 말처럼 보완적 관계에 놓여있었을지 모르지만 작금의 한국 사회는 심한 갈등 양상을 띤다는 점이다. 그것은 집단간의 갈등은 물론, 동시에 내적으로는 집단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의 대립이자 괴리이다. 급기야는 개인은 물론 집단까지 극단적 대결구도에 놓이거나 철저히 유리되기도 한다. 그 속에서 자아는 어느 때보다 통일되지 못하고 깨지기 쉽고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

둘째, 우리 사회 속에 관계가 지속되고 세계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종국적으로는 세계가 균형을 찾을 거라는 믿음이 깨어져 있다. 그 희망이 깨져있고 사회적 설득력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불량식품을 만들어도 음식찌꺼기로 죽을 끓여 아이들에게 먹여도 내 자식이 아니니까 상관없다는 것, 혹은 어떤 식으로든 그 피해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단선적 사고가 우리를 황폐화시킨다.

그리고 저자의 지적처럼 ‘집단주의’의 탈을 쓰고 자행되어 온 우리사회의 투명성 부재와 병폐는 도려내야할 환부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한국적 특성 때문이라고 갖다 붙인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식민잔재의 미청산, 국가주도 경제개발 등의 역사적 특성이 집단주의와 결합된 병폐이지 그 자체가 우리의 특성 때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를 바로 세우고 이러한 환부를 도려내는 작업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제 3의 세계화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 생각한다.

결론 부분에 동의하기 힘들어 험담을 많이 늘어놓은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정성과 지식이 녹아들어간 저작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 내가 저자라면 >

당연히 이렇게 글을 쓰지 않는다. 처음에는 친근감을 가지고 보다가 점점 불쾌한 느낌이 든다. 후반부로 갈수록 결국 서구 우월주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 느껴진다. 서구 중심적 세계화의 필연성을 좀 더 정교하게 설명하려든다는 목적의식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전혀 감추어져 있지 않다. 말 그대로 세계화야 말로 낡은 인습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을 ‘계몽’시켜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적지 않은 반발감이 느껴졌지만 저자의 심리학적 지식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학자가 왜 이렇게 깊이 있게 정신분석학까지 공부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튼 저자는 한국인의 심리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차분하고 끈질기게 제시해 주었다. 전반부는 정말 많은 공감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그런데 그 악의 개념을 세계화로 연결시킨 것은 나의 이해력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매끄럽지 않았다. 다분히 작위적이었다.

별로 적을말이 없지만 많이 생각해 볼 문제일것 같아 정리해본다. 저자는 서양은 죄의식 문화라 하고 한국을 포함한 동양은 수치심 문화라고 규정한다. 죄의식이 잘못한 행동에 대한 심리적 후회라면 수치심이란 잘못된 혹은 부족한 존재(자기)에 대한 자기비판(심하면 자기혐오)의 감정이다. 죄의식은 그 행동에 대해서 벌이나 용서를 받으면 해소되지만 정작 수치심은 그 해소가 쉽지 않다. 타인들이 자신에 대한 평가가 복원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자기평가가 수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차이를 단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문화의 차이라고 언급했는데 비교종교학적 차원에서도 접근했더라면 좀더 풍성한 관점을 제시해 주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외국인 저자라면 나는 어떤 시선으로 한국(인)을 바라보았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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