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신재동
  • 조회 수 2943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5년 6월 30일 10시 26분 등록
◎ 인용

연담 김명국

이징으로 대표되는 인조 연간의 관학파적 화풍은 동시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이신흠, 윤의립, 조직, 송민고 등의 유작을 보면 앞시대의 호방한 절파화풍이 변질되어 사실상 이제는 절파하고 말하기 힘든 얌전한 그림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것이 인조 연간 회화의 대종을 이루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김명국은 기질상 지배층의 절도 있는 규범과 몰개성한 화풍에 자신을 내던질 수 없었다. 그의 호방한 기질은 오히려 더 개성적인 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것을 알아주는 비평적 안목을 갖춘이가 주위에 없었던 것은 그의 불운이었다.
(p. 33,34)

김명국이 일본에 갈 당시 일본 화단에서는 선승화(禪僧畵)가 일대 유행이었다. <달마도> 같은 유형의 일격(逸格)이 높이 평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명국의 필치와 기질은 일본 화단에 잘 맞아떨어졌다.
일본에서 김명국은 왜인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의 취미에 맞기 일필휘지로 신들린 듯이 그림을 그려주었다. 이내 그에 대한 평판이 일본 전체에 퍼져 그의 그림을 보러 온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p. 34)

김명국의 이런 불성실하고 거친 태작들은 그의 성격에도 기인하겠지만 남태응의 말대로 당시의 회화적 환경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김명국은 화단의 흐름을 거역하고 홀로 개성을 지키면서 술과 그림으로 살아가는 예술적 오만이 태작을 남발하는 부정적 요소로서 작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그의 결정적인 예술적 걸함이었다.
(p. 44)

상복(喪服)을 입고 건(巾)을 뒤집어 쓴 채로 지팡이를 비스듬히 집고는 등을 돌린 채 걸어가는 이 인물은 저승길로 걸어가는 연담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한 화가가 <죽음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사실은 연담 이전에도 없고, 연담 이후에도 없는 오직 연담만이 보여준 그의 뛰어난 개성이다.
........................................
연담 김명국, 그는 죽음 앞에서 <죽음의 자화상>을 그린 인생의 달인(達人)이었고 그림의 신필이었던 것이다.
(p. 51)

그는 시류 속에 편안히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낭만적 반항의 표정일지언정 자기 자신을 지켰다. 그 점에 연담의 큰 매력과 미덕이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연담은 훗날 17세기 조선시대 화단에서 가장 개성적인 작가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것이 김명국의 영광이다. 세상이 바뀌고 반세기도 안되어 숱한 찬사 속에 그는 다시 태어난 셈이다.
(p. 51)


공재 윤두서

그러나 그가 보인 한계라는 것이 꼭 인간적 역량이나 일깨움의 모자람 탓이었을까에 대해서는 한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간혹 한 인간의 영광과 시대정신의 영광을 혼동하듯이, 한 인간의 한계와 시대 상황의 한계를 혼동하곤 한다. 사실 공재의 한계란 그의 한계가 아니라 숙종시대의 문화적 성숙도의 한계라고 말해야 옳다.
(p. 57)

본래 자화상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의 자의식 없이는 그려지지 앟는 장르이다. 『거장들의 초상』을 쓴 마누엘 가써는 본래 사람얼굴은 묘사의 변용이 심하여 기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바뀌는 것인데,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자신의 얼굴 중에서 유일하게 적절한 한 형태를 잡아 불변의 증명에 착수한 것임에 주목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공재가 '불변의 증명'으로 제시한 자신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꿋꿋한 선비로 살아가고자 했던 의지와 자신의 뜻을 좀처럼 실현하지 못한 선각자의 쓸쓸한 고독이었다.
(p. 60)

<짚신 삼기>와 <나물 캐기>는 모두 농민을 주제로한 그림으로, 그림의 주인공이 바로 서민이다. 회화에서 그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반드시 그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이제까지 조선시대 화회에 나오는 인물의 주인공은 선비와 신선 아니면 고작해야 미인 정도였다. 공재가 그린 낮잠 자는 선비, 담소하는 선비, 거문고를 타는 선비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서민의 모습이란 동자와 마부, 뱃사공 또는 일하는 농부나 어부 등이 배경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물 캐는 아낙네와 짚신 삼는 농부가 선비의 자리, 신선의 자리를 밀어내 당당히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것은 회화적 혁명이다.
(p. 96)

그러나 <나물캐기>와 <짚신 삼기> 두 그림은 아직 속화로서 박진감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두 그림의 배경 처리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주이공의 리얼리티가 그만큼 약하게 나타난 것이다. 즉 두 작품의 서민들은 종래의 선비 또는 신선과 자리만 교체되었울 뿐, 인물의 삶을 나타내는 그들만의 배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 점을 두고 후대 사람들은 공재의 후배 되는 관아재 조영석, 그 후배 되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의 속화와 비교하여 공재는 아직 관념의 태를 확연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p. 96)

그러나 공재가 간접적으로 조선 후기 휘화 전체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다. 특히 속화는 그가 개척한 바를 관아재 조영석과 단원 김홍도가 계속 발전시켜 마침내 가장 조선적인 장르로 완성된다. 또 그가 시도한 문인 화풍은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등으로 이어져 마침내 조선적으로 정착되었다. 또 그가 시도한 동국진체(東國眞體)는 백하(白下) 윤순(尹淳)과 원교 이광사(李匡師)에 의해 완성을 보았다. 그런 미술사적 신경지의 선두에 공재 윤두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p. 107)


관아재 조영석

더욱이 관아재의 인물화는 종래의 관념적인 산수인물도나 화본풍의 고사인물도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설중방우도> <이 잡는 노승> 같은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현실 속의 인물을 현장감 있게 그렸다. 나아가서 그는 <장기 두기> <새참> <절구질> 같은 이른바 속화에까지 그 소재를 넓혀가며 현실성을 더해갔다. 그러면서도 조영석은 이 세속의 소재를 결코 속되지 않게 하나의 회화로 품격을 유지하는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가 이룩한 이런 예술 세계는 한마디로 사실정신과 선비정신의 만남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p. 119)

논지인즉, 그림은 시로서 다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담아내는 독자적 기능이 있으며, 또 산수화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거기에 화가(인간)의 마음이 더해지기 때문에 그림이 더 위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관아재는 그림 속에서 인문정신을 찾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p. 140)

이제까지 우리나라 산수화에 나타나는 인물은 모두 중국 화본에서 제시한 인물묘사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선비 · 신선 · 나그네를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중방우도>에는 조선의 선비가 당당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는 겸재 정선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이 그림의 소재로 승격되고, 거기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등장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한국회화사상의 일대 사건이며 쾌거이다.
(p. 168)

그 대신 관아재는 소품에서도 몇몇 명작을 남겼다. 그 예로 나는 <쉬어가는 노승>과 <이 잡는 노승> 두 작품을 들 수 있다. 두 작품 모두스님을 그린 것인데, 소나무 등걸에 풀썩 주저앉은 노승의 기운 빠진 모습과 나무 아래서 옷을 들추어 이를 잡는 - 사실은 이를 털어내는 - 모습이 아주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스님은 이를 잡아도 스님인지라 죽이는 살생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털어낸다는 표현에서는 웃음조차 나온다. 그리고 이런 장면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에서 화가로서 그의 시각이 지녔던 일상성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p. 170)

그는 그림이란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사실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은 화보 속의 인물이 아니라 대개 현실 속의 인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그린 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도화서 화원들이 그리는 원법(院法)에 선비화가들의 문인화에 배어 있는 유법(儒法)을 발현하여 그림의 격조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
(p. 180)


겸재 정선

이하곤의 입장에서는 진경산수의 진면목은 남종산수화의 한 이상인 흉중구학(胸中丘壑)을 그리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에 형사를 무시할 수 없지만, 그 대상에 얽매이지 말고 강약의 변용, 과장과 생략이라는 살활조종을 통해 전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점은 겸재 입장에서도, 이병연 입장에서도, 김창흡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진경산수의 미학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형상을 통해 전신으로 나아가는 이형사신(以形寫神)에 있다.
(p. 223)

<금강전도>에서 완성된 겸재 화풍의 중요한 특징은 대담한 구도의 변형과 필묵의 농담 대비로 요약될 수 있다. 이제까지 그의 금강산 그림이 기본적으로 대상의 충실한 묘사에 있었다면 여기에 이르러서는 사실(寫實)에서 사의(寫意)로 대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겸재 진경산수의 가장 큰 매력이며 미학이다.
(p. 259)
IP *.111.251.128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