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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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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5일 15시 06분 등록
"완당 김정희의 괴졸(怪拙)한 변화이야기"


유홍준 저 | 학고재


1. 책이 내게로 왔다.(감상)

완당평전을 접하기 전 내가 김정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고작 추사체의 창시자라는 사실인데 유홍준 교수가 서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추사의 삶은 전혀 모르고 그의 작품이라고 해야 학교 다닐 때 외웠던 달랑 ‘세한도’ 하나만 기억한다. 고맙게도 이 책을 통해 그의 글씨와 그림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인간 김정희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를 하게 되었다.

추사에 대한 세간의 평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글이 거의 압권이다. 이것보다 추사에 대한 평을 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추사의 글씨체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번 변했다. 젊어서는 그 당시 모더니즘적이었던 동기창의 글씨를 따랐었고, 중년에 중국에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의 글씨를 열심히 써서 쓸데없이 기름지고 두껍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다 중년을 지나면서 중국의 구양순을 비롯한 여러 대가의 글을 다 익히더니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여러 대가의 장점은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하였다.’

내가 만난 김정희는 자존심 강하고, 완벽주의적이고 정열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애’의꽃말을 갖고 있는 수선화를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완당은 70평생 동안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고, 팔뚝 아래에 삼백 아홉 개의 옛날 비문 글씨를 다 깊이 익혔다. 경학, 고증학, 시, 불교 등으로 입고(入古)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개성을 만들어내는 출신(出新)으로 동시대에 일가를 이루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구천구분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일분을 마저 성취해야 하며,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고 말하면서 죽기 3일 전까지 붓을 드는 불꽃 같은 열정을 보여준다.

또한 완당은 가문의 몰락, 친족의 잇따른 변고, 두 차례의 귀양 등 온갖 고난을 꿋꿋이 초연하게 헤쳐나가는 의지의 한국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가문이 몰락하고 귀양길에 올라 굴피집에서 병든 몸을 이끌고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하물며 귀족의 집안으로 태어나서 이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나약해지고 삶을 포기하기 십상이 아닐까?

그러나 완당은 그런 어려운 과정 속에서 인생의 깨달음과 깊이를 알게 된다. 이러한 각성은 그의 예술세계에 그대로 반영된다. 기름지고 부(富)티가 줄줄 흐르는 중년의 글씨는 제주도 유배시절에는 기름기가 다 빠지고 명상적이면서 경쾌함마저 느껴진다. 강상시절에는 개성을 발견하여 추사제의 괴(怪)의 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말년에는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졸(拙)함을 보여주며 어린아이와도 같은 글씨를 보여준다. 그렇게 완당은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고, 승화시켜 나갔다. 아~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완당평전을 읽으면서 계속 되새김질 했던 화두는 세계화(Globalization)와 한국적 정체성의 관계였다. 양자의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추사체이다. 본문에 보면 서법에 충실하면서 또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가 추사체라고 한다. 국제적 서법과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완당 개성의 체취가 묻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화와 한국성의 조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청명 김호석의 해석은 이 물음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해준다. ‘첫째, 완당은 보다 더 풍부한 자료와 그 원류에 대한 깊은 연구를 쌓은 동시에 끊임없는 임모에서 배태된 것이니 곧 서학(書學)의 길을 터득해 가지고 거기에 그의 천부적 창의력이 합해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다음으로 또 중요한 것은 그의 사회적 불우이다. 그의 새로운 스타일의 서체는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완성되었다.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며 험준하면서도 일변 해학적인 면을 갖춘 그의 서체는 험난했던 그의 생애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제적인 조류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항상 세계를 객관적으로 제대로 이해해야 하며, 완당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되돌아본 것처럼 우리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늘 생각해보고 시대 환경에 맞게 재해석해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형태적이거나, 아이디어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요, 상(象)의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추사체의 정신이 아닐까?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무려 389개에 달하는 도판을 보는 재미다. 도판을 보면서 ‘금강안 혹리수’는 턱도 없지만 예술작품을 보는 눈이 이전보다 커진 느낌이 들었고, 특히 추사체의 진화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완당의 작품 중에서는 보정산방, 검가, 향조암란, 일금십연재, 토위단전, 잔선완락루, 판전이 인상적이었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난초 그림도 멋스럽다.

두 권의 책을 통해 완당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완당에 대해 잘 모르는 이유는 완당이 그만큼 내공이 깊고 상당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일독 이호색 삼음주(一讀 二好色 三飮酒)’를 읊으며 풍류적인 삶을 살다간 선구자이며,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국제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물론 완당이 청나라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고 또한 앞을 내다보는 혜안과 사회적인 실천력이 다소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역사 500년 동안 완당 같은 대가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특히 오늘날 국제화 시대에서 완당이 보여준 삶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2. 역지사지(易之思之)-내가 저자라면

유홍준의 완당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유홍준과 완당 김정희가 비슷한 스타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우리 국토 면적을 10배쯤 확장시킨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완당 김정희가 중국 연경을 드나들며 선진 학문을 습득하고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는 등 철저하게 현장을 누비며 고증학적 방식으로 연구한 실천적 학자의 모습을 보여 준 것처럼 이 책도 발로 뛴 흔적이 역력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처럼 곳곳에 답사의 흔적이 보이고 3권의 방대한 참고자료가 이를 방증한다.

또 하나 두 사람의 공통점을 들자면 바로 ‘학문에 대한 열정’이 아닐까 싶다. 완당은 70평생 동안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글쓰기에 정진했고 금석학, 경학, 시,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깊이 있게 학문을 연구했으며 임종 3일 전에는 붓을 들고 ‘판전’이라는 졸(拙)한 명문을 남길 정도로 격정적으로 학문에 대한 애정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유홍준 교수도 무려 14년이라는 준비를 통해 완당평전을 준비해왔으며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할 정도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책 곳곳에 나오는 도판의 수록 과정과 제 3권의 소스를 보고 생각해보면 그의 학문에 대한 접근 방법과 태도가 범상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저자는 책 출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처음에는 완당이 미웠다. 그러나 점차 이해하게 됐고 만년의 완당을 보면서는 인간으로서의 숭고한 모습이 느껴졌다.’ 정황을 추론해 보건대 유홍준 교수의 벤치마킹 대상은 분명 완당이었으며 이 책의 저술 방식도 완당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판단된다. 또 ‘내가 만용을 부렸다고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겠다’고 저술에 대해 후회하면서도 ‘지금 희망이 있다면 3-4년 후에 완당평전을 중국이나 일본 버전으로 다시 써보고 싶어요’ 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그만큼 그에게 완당은 각별하다. 개인적인 취향도 취향이려니와 세계 속에서의 한국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그에게 있어서 완당만큼 좋은 소재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1권과 2권의 느낌이 사뭇 달랐다. 1권이 다소 지루하고 문체도 딱딱한 반면에 2권은 유홍준 교수의 특유의 문체가 살아나는 듯 맛깔스럽다. 완당의 추사체가 빛을 발하는 시기여서 그런지 수록된 도판도 생동감 있고 나의 미의식을 자극한다. 1권에 수록된 시대가 완당이 제주도 유배를 가기 전의 기록이 많아서 일 수도 있겠지만 초반 이야기 전개의 딱딱함은 이 책의 옥의 티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당평전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보다 깊게 완당을 연구하는 입문서로 잘 쓰여진 책이다. 옛 것을 알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입고출신의 흔들리지는 않는 철학이 잘 스며든 명작이다.

한 위인에 대해 이같이 상찬을 하여 평전을 저술하니 완당은 인복이 아직도 여전히 많다. 무척 부러울 따름이다. 나는 누가 평전을 써 줄만한 인물이 애당초 못되니 자서전 쓰는 쪽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될 듯 싶다.



3. 책에서 끌어다 쓰기(인용)


[서장] 저 높고 아득한 산

추사는 정동적인 순미(純美), 우미(優美)가 아니라 반대로 추(醜), 미학 용어로 말해서 미적 범주로서의 추미(醜美)를 추구했다. 즉 파격의 아름다움, 개성으로서 괴(怪)를 나타낸 것이 추사체의 본질이자 매력인 것이다. (P12)

원래 글씨의 묘(妙)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감히 비유해서 말하자면 불가(佛家), 도가(道家)에서 세속을 바로잡고가 훌쩍 세속을 벗어남과 같다고나 할까. – 유최진 ‘초산잡저’ (P14)

추사는 평생 많은 문자도장을 새겨 작품 첫머리에 찍는 두인(頭印)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 중에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는 것도 있다. 즉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P14)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게 되는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 박규수 전집 ‘유효선이 소장한 추사유묵에 부쳐’ (P24)


[제1장 출생과 가문] –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봉사손

채제공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 세상에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P43)


[제2장 영광의 북경 60일] – 옹방강, 완원 두 경사(經師)와의 만남

특히 박제가의 제자로 조선 500년 역사상 보기 드문 영재 완당 김정희가 출현하여 연경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 두 경사(經師)를 알게 되고, 여러 명현들과 왕래하여 청조 학문의 핵심을 잡아 귀국하자 조선의 학계는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빠른 진전을 보여 500년 내로 보지 못했던 진전을 보게 되었다. – 후지츠카 (P60)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이다. – 후지츠카 (P61)

담계는 “옛 경전을 즐긴다”고 말했고 운대는 “남이 그렇다고 말해도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지를 않는다”고 하였으니 두 분의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한 것이다. –전집 권6, 다시 소조에 자제하다 (P87)


[제3장 학예의 연찬] – 진흥왕 순수비와 무장사비를 찾아서

그뿐만 아니라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요즘의 천류(淺流) 해외파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추사는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을 한편으로는 자기 몸으로 익히고 한편으로는 자기 현실에 적용시켜 그렇게 이룩한 성과를 연경학회로 전했다. (P104)

또 추사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조선 서화계에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고람 전기 같은 중인 출신 서화가들에게 고차원의 문인적 이상이 담긴 글씨와 그림을 지도하며 예단을 이끌었다. 이리하여 조선 지식인 사회 한쪽에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풍과 예술사조가 생겨났다. 이를 후대 사람들은 ‘완당바람’이라 불렀으며 이렇게 일어난 완당바람은 날로 그 세를 더하여 가히 일세를 풍미하게 된다. (P104)

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에 있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마음에 있네.
옛 것을 고찰하여 현재를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 옹방강의 서찰을 4주 16자로 제찬한 글귀 (P108)

그러나 실사구시라는 구호는 청나라 고증학을 연 고염무가 주창한 표어로, 그 연원은 완당의 ‘실사구시설’ 첫 문장에 나오듯 ‘한서(漢書’ 하간헌왕전에 나오는 말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P138)

“학문하는 방도에는 굳이 한(漢), 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 (P139)

이 집에 들어오면 항상 비가 오는 것 같으니
번거롭게 물소리 그릴 것 없다.
갠 숲엔 아침 햇빛이 상쾌하고
으슥한 구렁엔 밤에도 맑은 빛이 난다.
정중한 명산의 좋은 별장이요
티끌 세상의 정이 아니로구나.
솔바람이 서늘하게 뼛속에 스며드니
시의 꿈은 언제고 이렇게 깨끗하구나 - 황산, 동리와 더불어 석경루에서 자다 (P147)

만약 형이 때때로 끌어내주지 않으면 가슴속의 글자가 장차 두레박줄이 없는 메마른 우물이 되었을 것이고 썩어서 버섯을 이루었을 것이고 묵어서 나비가 되었을 것이외다. (P148)

대저 없어져가는 것을 보존함은 인(仁)이요, 희미해져가는 것을 지킴은 의(義)이며, 천하에 흩어진 것을 찾아서 간행함은 신(信)이요, 세상이 좋아하는 바를 공개하는 것은 혜(惠)이다. (P165)

하늘이 인재를 내리는 데는 애당초 남북(南北)이나 귀천의 차이가 없으나, 누구는 이루고 누구는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 전집 권1, 인재설 (P170)

훌륭한 문의 묘(妙)는 남의 것을 따라 흉내나 내는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영기(靈氣)가 황홀하게 찾아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러 와서 그 괴괴하고 기기함을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P171)

아암이 다산에게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암은 다산에게 차(茶)를 가르쳐주었다. 이후 다산은 차 삼매경에 빠져 결국 다산으로 이사와 다산초당 앞에 차 달이는 다조가 놓이게 되었으니 정약용이 다산으로 됨은 모두 아암의 영향인 셈이다. (P182)


[제4장 출세와 가화] – 운외몽중, 황청경해, 예당금석과안록

(다산이 지은)시의 원제목은 <수선화>이고 부제는 “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향각에서 수선화 한 그루를 부쳐 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청자였다” 로 되어 있다. (P229)


[제5장 완당바람] – 해외묵연, 원교필결후, 예림갑을록

그러나 등석여와 이병수는 옛것에 너무 몰입하여 새로운 글씨로 나아가지 못했다. 양주팔괴가 고전을 무시하고 개성만 추구한 것이 병통인 것과 정반대 현상이었다. 그러면 진정한 변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분방한 개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서 고전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청나라 사람들은 입고출신(入古出新)이라고 했다.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입고출신! 사실 이것은 고증학의 기본정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조선의 연암 박지원이 주창한 법고창신(法古創新)도 같은 맥락이었다. (P275)

한 서예가의 글씨가 변해가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편지 글씨와 해서작품에 가장 잘 나타난다. 편지 글씨란 그가 작품이라는 의식을 갖지 않고 쓴 것이기 때문에 그 서예가의 필법이 거짓 없이 드러나며 해서작품에는 그렇게 변화된 결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P289)

이상적은 스승 완당이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정성을 다해 중국에서 책들을 구해줌으로써 완당이 <세한도>를 그려 그의 따뜻한 정에 답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특기할 만한 사항은 완당의 양반 제자와 역관 제자들 중에는 유장환, 민태호, 남병길, 강위, 오경석 등 개항과 개화기 때 진보적 지식인으로 활동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P296)

삼전법(三轉法)
난을 치는 데는 반드시 붓을 세 번 굴리는[三轉] 것을 묘(妙)로 삼는데, 지금 보건대 네가 한 것은 붓을 한 번에 죽 긋고는 바로 그쳤다. 그러니 모름지기 붓을 세 번 굴리는 데에 공력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 – 전집 권2, 상우에게 (P316)

요컨대 인품과 교양과 지식과 필법 그리고 끊임없는 수련, 이것이 완당이 말하는 난초 치는 비결이다. (P316)

난초그림의 뛰어난 화품(畵品)이란 형사(形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화법만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다.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P316-317)

그는 법첩의 원조격인 왕희지 글씨를 바탕으로 국풍화(國風化)한 서체를 개발하여 마침내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으로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했다. 이것은 겸재 정선의 동국 진경산수와 그 문화적 성격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P323)


[제6장 제주도 유배시절(상)] – 세한도를 그리며

완당은 이렇게 하인들과 양봉신과 뜻밖의 인편을 통하여 서울집의 소식과 물품을 받았다. 이런 것을 보면 완당은 인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승 박제가를 만난 것, 연경에서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것, ‘예림갑을록’의 여러 제자를 만난 것, 죽음에서 벗 조인영의 구원을 받은 것, 초의와 권돈인 같은 평생의 지우를 얻은 것 모두가 큰 인복이 아닐 수 없다. 제주도에서도 그 인복은 끊이지 않았으니, 제자인 소치 허련이 세 차례나 건너와 수발을 들었고, 강위, 박혜백 같은 제자가 유배지로 찾아와 벗해주었으며, 나중에는 장인식이라는 지인이 제주목사로 부임해와 크게 도움을 받기도 했다. (P359)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배형이 갖는 미덕은 결과적으로 학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은 18년의 유배생활이 낳은 결과였고 원교 이광사의 글씨도 22년 유배의 산물이었듯이, 완당은 제주도 유배생활 9년간 자신의 학문화 예술 모두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P379)

<세한도>는 완당의 마음속의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완당 해서체의 대표작으로 예서의 기미가 남아 있는 반듯한 이 해서체는, 글씨의 우림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심금을 울리는 강도가 아주 진하다. 그리고 이 <세한도>에 더욱 감동케 되는 것은 그러한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과정에 서린 완당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완당의 예술세계가 이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음이 이 그림의 본질이다. (P398)

<세한도>소장자의 이동과정을 보면 우리는 명화의 소장처 변동과정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미술사적 내용을 이루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면 안 되는가를 ‘실사구시’적으로 말해주고 있음을 절감케 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구나, 세한도 같은 삶이여! (P408)


[제7장 제주도 유배시절(하)] – 수선화를 노래하며

그러나 안타깝게도 완당조차도 당시 일어나고 있는 서세동진(西勢東進)의 서구 제국주의의 본질을 모르고 있었으니, 아뿔싸! 조선에 또 누가 있어 미구에 일어날 셔먼호 사건 같은 것을 알고 대비했겠는가! 완당은 여전히 문명의 이상적 모델을 청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완당의 상식으로는 그 엄청난 역량을 갖고 있는 청나라가 한낱 서번의 영이, 불랑, 미리견의 공격에 무너지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동주 선생은 ‘완당바람’에서 우리가 근대화의 모델을 잘못 설정할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P423)

대둔사의 현판 글씨는 대단히 기름지고 부(富)티와 자신감이 넘치는 윤기가 있다. 이에 반하여 귀양 와서 쓴 화암사의 <무량수각>은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마른 듯 순진무구한 원형질이 드러나며 대단히 명상적이다. 박규수가 말한, 완당 중년 글씨의 병폐라던 ‘쓸데없이 기름진’ 것이 귀양살이 7년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군살을 털어낸 듯한 경쾌함도 있다. 또 어찌 보면 대둔사 글씨에는 중국 글씨의 냄새가 남아 있는데 귀양 와서 쓴 글씨에는 화강암의 골기(骨氣)가 느껴지니, 앞의 것이 국제적 유행 감각이라면 나중 것에선 완당 개성의 체취가 느껴진다. (P431)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造化,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완당 제하다.
- 남병길의 호인 유재(留齋) 현판 (P434-435)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라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구양순이 <구성궁 예천명(九成宮醴泉詺)이나 <화도사비> 같은 글씨를 쓸 때 정호(精豪)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전집 권8, 잡지) (P438)

서수필은 쥐털로 만든 붓으로, 그 중에서도 쥐수염만으로 만든 붓을 제일로 친다. 그 이유는 붓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어야 하는데 쥐수염은 바로 그 조건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쥐수염은 길고 빳빳하지만 쥐가 놀랄 때마다 움직이기 때문에 또한 사뭇 부드럽기도 하다. 특히 큰 배 갑판 밑에서 사는 쥐는 항시 갑판 마루의 삐꺽 소리마다 수염이 쭈뼛쭈뼛 움직이기 때문에 부드러움과 강함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그런 배에서 잡은 쥐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이 일품 서수필이다. 이 붓은 완당의 힘있고 변화 많은 글씨에 가장 어울리는 붓이었을 것이다. 이런 서수필은 지금도 중국에서 제작되는데 좋은 것은 한 자루에 몇백만 원 한다. (P439)

그러므로 고결(古訣)에 이르기를 “먹물은 깊이 배고, 빛은 짙게 빛나서, 모든 붓털이 한꺼번에 힘을 쓴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묵법과 필법을 아울러 말한 것이다. (P440)

생동하는 글씨를 위한 9가지 조건
1. 생필(生筆)이니, 토호(兎豪)가 둥글고 건장해야 하며, 반드시 쓰고 나면 거두어 넣어두고 쓸 때를 기다려야 한다.
2. 생지(生紙)이니, 새로 협사(篋笥)에서 꺼내야 펴지고 윤기가 나서 먹을 잘 받는다.
3. 생연(生硯)이니, 벼루의 먹을 다 쓰고 나면 씻어 말려 젖거나 붇지 않게 해야 한다.
4. 생수(生水)이니, 새로 맑은 샘물을 길어와야 한다.
5. 생묵(生墨)이니, 쓸 때마다 갈아 써야 한다.
6. 생수(生手)이니, 공부를 중간에 쉬어서는 안 되고 항상 근맥(筋脈)을 놀려 움직여야 한다.
7. 생신(生神)이니, 마음이 화평하고 거슬림이 없어야 하며 신(神)은 편안하고 일은 한가해야 한다.
8. 생목(生目)이니, 자고 쉬고 각 일어나서 눈은 밝고 몸은 고요해야 한다.
9. 생경(生景)이니, 때는 화창하고 기운은 윤택하며 궤(几)는 조촐하고 창은 밝아야 한다.
- 전집 권7, 잡저, 김석준에게 써서 보여주다 (P444)

완당이 이 글씨를(배잠기공비) 사랑함은 형태미가 많이 드러나는 후한 시대의 예서보다 순박하고 고졸함이 살아 있는 전한 시대의 예서를 더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서예사에서는 이를 ‘유전입예(由篆入隸)’의 글씨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전서법에 연유해서 예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P452)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P455)

청조의 학문이 수입된 이후 박제가, 신위 같은 사람이 일으키지 못한 서법의 혁신을 완당은 어떻게 대담한 시도로 성공하기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첫째, 앞 사람들에 비하여 완당은 보다 더 풍부한 자료와 그 원류에 대한 깊은 연구를 쌓은 동시에 끊임없는 임모에서 배태된 것이니 곧 서학(書學)의 길을 터득해 가지고 거기에 그의 천부적 창의력이 합해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다음으로 또 중요한 것은 그의 사회적 불우이다. 그의 새로운 스타일의 서체는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완성되었다.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며 험준하면서도 일변 해학적인 면을 갖춘 그의 서체는 험난했던 그의 생애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청명 김호석의 해석 (P465)

하늘나라 도리천은 어떤지 모르겠소만 이 세상에 과연 더위 없는 하늘과 모기 없는 땅은 없는지요. 더위도 무척 심하지만 모기가 더욱 심하군요. 병마사의 청사에도 모기가 많다는데 하물며 이 게딱지굴 같고 달팽이집 같은 데는 어떠하겠소. 옛날 모기는 그래도 예(禮)를 알았는데 지금 모기는 예를 알지 못하여 늙은이에게 마구 덤벼드니 역시 지금 모기는 옛날의 모기와 같지 못해서인가요. – 전집 권4, 장인식에게, 제9신 (P499)


[제8장 강상(江上)시절] – 노호(鷺湖)의 칠십이구초당에서

강상시절 완당 글씨의 특징을 보면, 흔히들 제주도 귀양살이 때부터 본격화됐다는 추사체의 파격미나 개성미, 이른바 ‘괴(怪)’가 완연히 드러남을 실감할 수 있다. 특히 글자의 구성에서 대담한 디자인적 변형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제주도 유배 이전은 물론이고 유배중의 글씨와도 완연히 다른, 그야말로 능수능란한 추사체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추사체의 진면목은 제주도 유배시절이 아니라 강상시절부터라고 할 수도 있다. (P566)

청명 선생의 지적대로 완당의 이런 글씨에는 세상의 이치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허망 속에서 나오는 조롱 같은 것이 서려 있다. 인생을 순탄하게 걸어온 선비나 법도를 정확하게 지키는 모범생은 절대로 쓸 수 없는 글씨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중국인 왕씨가 말한 대로 이렇게 변화가 많은 글씨이면서도 한나라 예서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완당이 이처럼 글자의 형태를 기굴하게 변형시키면서 파격의 미를 추구한 것은 단순한 파격이 아니라 글자의 의미를 형상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검가(劍家)>라는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아마도 무인(武人) 집안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 현판 글씨를 보면 칼 검(劍)자에서는 수염을 휘날리는 장수의 모습이 연상되고 집 가(家)자에서는 육칸대청의 골기와 집의 위용이 느껴진다. (P574)

이 글씨에는(잔서완락루) 전서, 예서, 해서, 행서의 필법이 다 갖추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쾌한 운필이 아니라 오히려 중후한 맛을 풍긴다. 글씨 전체의 구도를 보면 위쪽은 가로획을 살려 가지런함을 나타냈고, 하부는 여러 가지 형태의 세로획을 들쭉날쭉하게 써서, 고르지 않지만 전체의 조화는 잘 이루어져 있다. 이런 구도는 일찍이 다른 서예가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다. (P577)

미술작품은 꼭 실물을 보아야 정확히 감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실물 크기가 어떠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P578)

서법에 충실하면서 또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P579)

“가우디의 본질은 형태가 아니라 구조입니다.”
- 건축가 서혜림, (P582)

완당의 글씨 또한 가우디의 건축에 비유하여 말하자면 추사체의 본질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과 글씨의 구성의 힘에 있는 것이다. 예술은 그렇게 예술로서 통하고 대가는 대가로서 통하는 것이다. (P583)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人力)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 전집 권6, 석파 난권에 쓰다 (P584)

가장 주의할 것은 마음이 거칠어도 안 되면 또 빨리 하려 해도 안 되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는 식은 절대로 안 된다. 하품하던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 전집 권6 (P584)


[제9장 북청 유배시절] – 변방의 찬 하늘 아래서

서쪽 방에 봄이 오니 어여쁜 게 봄이로세.
바람 불 때 바람 불고 비 올 때 비가 오네.
육국 정승의 황금도장 그게 뭐람.
성동(城東) 쪽 두 이랑의 밭보다 못하네.
- <울 밖에서 봄갈이를 보고 부질없이 써서 보서에게 보이다> (P629)


[제10장 과천시절] –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일독 이호색 삼음주(一讀 二好色 三飮酒)라는 현판이다. 내용이야 씌어 있는 대로 첫째는 독서(공부), 둘째는 여자(섹스), 셋째는 술이라는 뜻이다. (P681-682)

평생을 버티고 있던 힘이
한 번의 잘못을 이기지 못했네.
세상살이 삼십 년에
공부한다는 것이 복임을 바로 알았네.
(P683)

본래 창작자는 외로움을 깊이 타는 법이다. 열정이 강한 예술가일수록 그 외로움의 깊이는 더하다. 온 정열을 달구어 망아(忘我)의 경지에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육신은 파김치처럼 흐느적거리고 정신은 공허해진다. 마치 관객들이 다 돌아간 뒤의 텅빈 무대만큼이나 허전하다. 더욱이 창작자들은 세평(世評)에 시달리며, 또 그것에 무척 신경쓰기도 한다. 그래서 곁에서 그 불안감을 씻어줄 격려와 칭찬을 원하곤 한다. 작품 발표 이전에 측근에게 보여주는 것은 비평을 바라서가 아니라 사실은 위안을 얻으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열정적인 예술가들은 대개 그 외로움을 받아줄 대상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P694)

추사의 재능은 감상(鑑賞)이 가장 뛰어났고, 글씨가 그 다음이며, 시문이 또 그 다음이다. – 홍한주 ‘지수염필’ (P699)

서화를 감상하는 데서는 금강역사 같은 눈[金剛眼]과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酷吏手]과 같아야 그 진가를 다 가려낼 수 있습니다. – 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33신 (P699)

강상시절에 완당이 글씨에서 새롭게 발견한 경지는 ‘괴(怪)’의 가치였다. 즉 개성의 구현이었다. 그런데 과천으로 돌아온 지금 완당은 졸(拙)함을 말하고 있다. 기교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교를 감추고 졸함을 존중하는 것이니, 이는 곧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즉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는 의미의 졸이다. (P712)

옛사람이 글씨를 쓴다는 것은 바로 저절로 쓰고 싶어서 쓴 것이다. 글씨 쓸 만한 때는 이를 테면 왕헌지의 산음설도(山陰雪棹)에서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는 그 기분인 것이다. 때문에 가고 머무는 뜻에 따라 조금도 구애받는 것이 없으며, 서취(書趣) 역시 천마(天馬)가 공중을 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지금 글씨를 청하는 자들은 산음에 눈이 오고 안오고를 헤아리지 않고, 또 왕헌지를 강요하여 곧장 대규의 집으로 향해 가는 식이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 전집 권8, 잡지 (P714)

진나라 사람은 운(韻)을 숭상하고
당나라 사람은 법(法)을 숭상하고
송나라 사람은 의(意)를 숭상하고
원, 명나라 사람은 태(態)를 숭상했다.
- 양헌 ‘평서결’ 중국 서예사 요약 (P726)

이 논리를 청나라에 이끌어 말하면, 청나라 사람은 학(學)을 숭상했고 그들이 지향한 글씨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이며 개성으로서의 괴(怪), 즉 고전에 입각한 근대정신의 감성적 표현이었다. (P727)

다시 정리하여 동양 서예사의 대맥에서 말한다면, 남북조 시대에는 왕희지, 왕헌지가 있고, 당나라에는 구양순, 저수량이 있고, 송나라에는 소동파, 미불이 있고, 원나라에는 조맹부가 있고 명나라에 동기창이 있다면 청나라에는 완당 김정희가 있는 것이다. (P727)

본래 최고의 명품은 ‘값이 없는 것(priceless)’이다. (P746)

근 20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틈을 내어 봉은사에 다시 이 글씨를 보러 갔는데 그날은 <판전> 글씨가 아주 어린애 글씨처럼 보였다. 나는 행여 오래 보고 있으면 저 대교약졸의 그윽한 멋이 떠오를까 기대하며 명상하듯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나 왠지 완당이 8살 때 부친에게 보낸 편지 글씨와 대단히 닮았다는 느낌만을 받았을 뿐이다. 글자의 구성도 그렇거니와 획의 뻗침도 그렇게 느껴졌다. 참으로 신기한 느낌이었다. (P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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