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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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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0일 23시 43분 등록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1 (한비야 지음, 금토, 1996)

한비야..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숭의여고를 졸업하고 5년간 음악다방 DJ와 영어소설 번역 등의 일을 하다가 특별장학생으로 홍익대학교에 들어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에 유학해 유타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국제홍보학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국제홍보회사인 버슨-마스텔라 한국지사에서 근무했다. 맹렬한 프로정신으로 능력을 발휘해 차장으로 고속 승진했으나 어느날, 걸어서 세계일주라는 어릴 때부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배낭을 메고 나서서 7년간 세계를 돌았다. '여성동아', '필' 등의 잡지에 여행기를 장기연재하고 '동아일보'에 연재칼럼을 집필했고, 각종 언론매체에 여행기와 여행담을 다수발표하고 있다.

<추천의 글> 비야는 정말 부러운 자유인 - 조안 리 (스타 커뮤니케이션스 사장)

비야는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이다. 일을 하면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찰싹 달라붙어 수없이 물어보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 자기 앞에 닥친 새로운 일들을 겁내지 않고 왕성한 호기심으로 극복해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려운 세계여행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 비야야말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여성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배움이고 자기 성숙이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국 자신을 깨우치는 일이다. 세계 여행을 하면서 중간중간에 연락을 해오고 몇 년에 한번 짧게 돌아와 내 앞에 나타날 때마다 비야는 그만큼씩 성숙해져갔다.
우리에게 지금 비야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서문-내 이야기> 나의 세계여행을 있게 한 세 가지 계기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날 문득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여행을 훌쩍 떠난 것이 아니다. ‘쪼는’ 직장 상사가 꼴 보기 싫어 사표 내던지고 홧김에 떠나는 여행은 더더욱 아니다. 미국에서 늦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때부터 그 계획은 착실하고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다.

내가 세계일주를 꿈꾸게 된 것은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 덕분이다. 중앙 일간지 기자였던 아버지는 일찍 들어온 날이면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 4남매를 모아 놓고 우리나라 지도와 세계 지도에서 나라 이름, 도시 이름, 산과 바다 이름 찾기놀이를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국제간 역학관계나 분쟁지역 이야기를 수없이 들려 주셨다.

처음엔 오기와 자존심 때문에 시작한 공부가 내 인생에 귀하고도 귀한 교훈을 남긴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일에 최선을 다했다면 나타나는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나 미련이 없다는 것을. 내가 이 기간을 통해서 얻은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란, 목표는 자신의 능력에 약간 버겁다 싶을 정도로 높게 잡고, 계획은 치밀하게, 실천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후부터 지금까지 나의 인생원칙이 되었다. 이 원칙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세계여행은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여전히 꿈으로만 남아 있을지 모른다.

위튼씨는 한국에 파견된 미국무성 소속 비군속 공무원. 한국에 파견된 지 한달도 못 된 그분이 내가 DJ로 있던 음악실에 드나들면서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우리 부부는 네가 자랑스럽다. 그렇지만 우리가 너에게 투자하려고 생각한 데는 변함이 없단다. 4년 동안 공부한 뒤 더 하고 싶으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도록 하렴. 비야가 원래 공부하고 싶은 학문은 언론학이라고 했던가? 우리 집이 있는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티에 아주 좋은 언론전공 프로그램이 있다는데, 대학원 공부는 우리가 시킬 수 있도록 해 주렴. 알았지?”
그 4년 뒤, 나는 유타대 언론대학원 국제홍보학 전공 학생이 되었다. 이분들이 주신 개인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중 영어 외에 두 가지 언어를 습득할 기회가 있었던 것도 후에 세계일주 여행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어, 일본어)

이름난 관광지나 유적지, 소문난 자연경관이나 눈요기가 될 만한 장소들은 나중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니까 이번에 긴 시간이 있을때, 그리고 체력이 뒷받침해주는 동안 발로 뛰는 여행, 땀냄새가 물씬 나는 여행, 사람들의 살냄새를 찾아다니는 인간탐험을 해 보자고 생각했다.

언제 어디로가 정해진 다음 일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였다. 이 단계의 첫 번째는 돈에 대한 계획이다. 세계 여행의 경비가 얼마가 들든 간에 처음부터 모아야 했다. 목표는 2천5백만원, 모을 수 있는 기간이 3년이니 1년에 850만원, 한달에 65만원 정도는 저축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체력관리. 다행이 난 건강체질이라 아무거나 잘 먹고, 많이 먹고, 한번 자면 죽은 듯이 자고, 자고 나면 개운하다. 이런 기초 위에 나는 등산과 요가 또는 맨손체조를 덧붙였다. 매주 산에 가서 10시간 이상 걷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매일 30분간 체조를 하려고 노력했다.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이 여행을 위해 책도 나름대로 많이 보았다. 가고 싶은 대륙이나 문화권 중심으로 일반 서적이나 사진첩은 물론 고등학교 교과서부터 대학 논술집까지 여러 가지 다양한 관점의 책을 읽으려고 했다.
3년 다니기로 한 직장이니 더 열심히 일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때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물론 일이 아니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일을 떠나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따뜻한 정을 주고받는 사람이 여러 명 있다는 것이 흐뭇하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내가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분이 조안 리 사장님이다.
이 분은 내가 햇병아리로 미국계 홍보회사에 들어갔을 때 그 회사의 높고 높은 사장님이셨다.
지금은 에세이집을 써서 더 유명해진 조안 리 사장님은 사업가로서는 빈틈없는 비즈니스 우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더없이 정이 많고 자상한 큰언니 같은 분이다.

홀로 떠나는 여행. 이것은 내 자신과의 여행이다. 여행이란 결국 무엇을 보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니까.
여행 중에는 참 많은 일이 벌어진다. 그 사건마다에서 얻은 경험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만들어 간다. 멕시코에서 두달간 장맛비를 맞고 다니다보면 서너시간쯤 비를 맞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네팔의 20박21일 등산을 하고 나면 하루 14시간 산행은 차라리 휴식이다. 7박8일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나면 서울 부산간 기차여행은 눈깜빡할 사이다. 인도 슬럼가에서 납치당할 뻔했던 사람에게는 서울 밤거리는 안방처럼 편안하다. 그러고 보면 여행은 간을 키우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한계의 지평선을 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1. 테헤란 반정부 지도자와 10일간의 사랑

아버지는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였다. 그러나 언론탄압의 서슬이 퍼렇던 박정희정권 시절, 소신을 펴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한 소위 반정부 언론인이었다. 밖으로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분이었지만 안으로는 언제나 따뜻한 인간애를 소중하게 여기셨다. 나를 비롯한 네 자식에게 항상 큰 꿈을 가질 것을 당부하셨던 아버지. 돌아가신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웅으로 살아계신다.

아버지는 어렵사리 다시 KBS에 입사했지만 곧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우리는 학교 등록금마저 제때 내지 못할 만큼 어려워졌다. 등록금 납입기한이 지난 종례시간이면 이름이 불리곤 했지만 우리는 그런 걸 부끄럽게 여겨본 적이 없다. 오히려 돈도 밥도 될 수 없는 말, ‘약자의 편에 서서 정의롭게 살아라’ 하시던 아버지의 말을 귀중한 재산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오마르의 눈은 그때의 아버지 눈빛, 그 호랑이 같이 당당하게 빛나던 눈빛을 꼭 닮아 있었다.

2. 이란, 억압받고 있는 불의 나라

이란은 참으로 신나는 여행지다. 내게는 세계의 어느 오지 못지않게 흥미로운 곳, 지식의 오지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원시종족이나 아마존 정글, 남미의 빙하지역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기 때문에 막상 현지에 갔을 때는 낯익혔던 것들을 직접 겪고 확인한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중동여행길, 특히 이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낯선 것이 주는 감동이 대단히 크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고 싶은 일에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보이면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 여행 원칙이며 내 인생의 대 원칙이기도 하다.

이란 국경에서 일본 아이를 만났다. 이름은 야스오. 삿뽀로 대학 3학년인데 1년간 휴학을 하고 막노동을 해서 모은 돈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중이었다. 요즈음 일본에는 이런 휴학 배낭족이 대단한 붐이라는데 정말 어딜 가나 일본 학생 여행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우리 젊은이들도 이렇게 자유롭고 용감하게 세계에 도전해보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라도 자기 인생 계획의 큰 목록(학업, 직장, 결혼) 속에 장기간의 여행을 집어넣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정말 여행이 하고 싶은 사람은 그 목록들 사이에 휴학이나 휴직 등으로 과감하게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전쟁터 아프가니스탄, 사진찍다 총살 직전까지

한참 내전중인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게 된 건 땅이 있는 한 육로로 다닌다는 내 여행원칙 때문이다. 투르크메니스탄에 가려고 국경도시 마샤드까지 가서야 투르크메니스탄에는 외국인은 반드시 비행기로만 입국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약이 올랐지만 제 나라 제 마음대로 한다는데 어쩔 수 있나. 부랴부랴 다시 지도를 펴놓고 길을 찾아보니 아프가니스탄 서북쪽 도시를 거치면 육로로 투르크메니스탄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헤라트에도 금요모스크라는 아름다운 회교사원이 있다. 정교하고도 우아한 무늬와 밝은 파랑과 초록이 적당히 조화된 타일로 만든 사원을 돌아보고는 건물을 찍는 체하면서 길거리 사람들을 찍었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카메라에 담아가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리반은 유적지만 겨우 눈감아 줄 뿐 거리나 사람들 사진 찍는 것은 일절 금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사진을 찍다가 정말 목숨을 잃을 뻔했다.

4. 커피 한 잔이면 어린이 3명 살릴 수 있다

이번 중동과 아프리카 지방을 여행하면서 내게는 새롭고 중요한 관심분야가 생겼다. 바로 난민문제! 이전에는 나는 난민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르완다나 캄보디아의 끔찍한 이야기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먼 나라의 뉴스거리로만 여겼었다. 그러다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만난 미국의 한 의대생으로부터 자기가 몇 달간 일했던 르완다 난민촌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기회가 있었다.

놀랍게도 생명을 살리는 데 들어가는 돈은 난민 1인당 하루 80원. 800원이면 어린 목숨 하나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커피 한 잔으로 세 명을 살리고, 레스토랑 저녁 한끼로 50명의 아이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여기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5. 울며 넘은 투르크메니스탄 국경

이 나라의 첫인상은 ‘텅 비어 있다’다. 호텔도 비어있고 길거리도 비어있고 가게 선반들도 텅텅 비어있다. 꽃무늬 모자를 쓰고 다니는 투르크 족이나 털모자를 쓰고 다니는 러시안 계나 다 따뜻한 눈길이나 미소 없이 얼굴이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다.
국경에서 돈을 바꾸고 일주일이 지나자 달러값이 딱 배로 뛴다. 보통 월급쟁이 한달 봉급이 두루마리 휴지 열통값.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는 데도 경제가 영 엉망이다. 공산주의의 후유증에 독재정치의 해독이 겹쳐 어느 나라보다 생활환경이 열악하다.

6. 사마르칸트의 귀한 사랑, 배금자 목사님

부하라가 심플하면서도 품위있는 옛날 미인이라면 사마르칸트는 화려하고도 세련된 현대 미인이라고 할까. 훨씬 도시적이고 컬러풀하다.
왜 이런 곳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또는 우리에게 알려지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중앙아시아를 다니는 동안 나는 진짜 오지 여행을 하고 있구나 하는 즐거움을 함께 맛볼 수 있었다.

남은 생을 남을 위해 살기로 작정을 하신 분. 자신을 위해서 쓰는 돈과 시간은 아까워하면서도 주일이면 아무도 찾지 않는 고아원과 양로원을 돌며 일일이 노인과 어린아이들에게 안수기도를 해 주시는 배목사님. 그들 가운데는 병자도 많아 자칫하면 병이 옮을 수도 있을텐데.
높고 높은 곳에서 낮고 낮은 곳까지 다 살아 본 배목사님은 내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삶, 주어진 삶 안에서 길을 찾고 최선을 다하는 삶, 그런 삶이 바로 아름다운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

7.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입에 물고
봄나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을….
나는 언제부터인가 노래를 하라고 하면 구닥다리 한국 뽕짝을 부른다. 그래도 내 노래는 어딜 가나 항상 인기만점. 가장 한국적인 노래가 가장 국제적이었던 것이다.

8. 눈물범벅 터키 꼬마친구가 준 이별의 지우개

터키는 여러모로 아주 특이한 나라다. 국민의 95%가 회교도인 점에서는 중동의 일부로 볼 수 있으나 지리적으로는 국토의 3%가 유럽쪽에, 97%가 아시아쪽에 붙어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이스탄불은 세계의 동서남북을 잇는 교차로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동쪽으로는 이란 인도 중국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서쪽으로는 유럽대륙, 남쪽으로는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를 거쳐 아프리카로, 북쪽으로는 흑해를 넘어 거대한 러시아가 있다.
인류 역사상 찬란한 꽃을 피웠던 수많은 문명이 터키를 거쳐가며 전 국토에 그 흔적을 뚜렷이 남겨놓았다.

9. 산산산 단풍단풍단풍, 산 속 고운 인심

나는 한국에서도 매주 한번씩은 반드시 산에 올라야하는 산중독자. 여행 중에는 그게 잘 안된다. 가이드북을 보고 찾아간 곳이 유스펠리. 흑해 연안 트라브존과 에르줄룸 중간쯤 되는 곳이다.
산 밑 마을로 가는 길은 영락없는 내설악. 산에는 노란 아스핀과 붉은 단풍이 한창이다.
시커먼 돌산에 노랗고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단풍, 계곡에 콸콸 흐르는 물, 푸른 하늘과 흰구름, 신선한 공기, 가난하지만 웃으며 사는 산동네 사람들.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산에 오니 정말 살맛이 난다.

10. 터키혼탕, 남자 마사지사의 스펀지같은 손길

나는 세계에서 가장 이름값을 하는 도시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예루살렘과 이스탄불을 들겠다. 그중의 하나, 이름도 신비로운 이스탄불은 볼거리가 많기도 하지만 사람을 느긋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물가가 싼데다 여행정보의 요충, 각 대륙을 여행하는 장기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들은 여기서 밀린 일도 처리하고 필요한 물건도 구입하며 이곳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한다.

11. 아프리카 첫날, 케냐에서 강도에게 목졸려

이야기를 이번 여행의 처음으로 되돌아가자. 나는 3년간 세계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낸 후 제일 먼저 네팔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그래서 반년 가까이 네팔, 방글라데시, 인도를 돌았다. 그 다음 북미 끝 알래스카에서 남미 끝 칠레까지 육로로 1년간 여행했다.
그런 후 이번에 세 번째로 아프리카 케냐에서 시작해 1년 반에 걸쳐 동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를 훑어보고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중국 국경을 거쳐 돌아왔다.
이 책은 이 세 번째 여행 이야기다.

새로운 대륙의 여행 계획에 들떠있는 내게 아프리카는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다. 거리에 나서자마자 두 명의 흑인이 나를 덮친 거다. 아프리카 첫날 그것도 백주 대로에서 강도를 만나다니. 가게고 뭐고 숙소로 뛰어들어와 사시나무 떨 듯 떨리는 손으로 청심환주머니를 찾았다.
이번 강도미수사건을 통해서 이제부터 긴 기간 아프리카, 중동 등을 혼자 돌아다니면서 좀더 신중하라는 옐로카드를 받은 셈이다.

12. 한국딸에 애정 쏟는 맘바마을 엄마

여기서는 여자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쉴새없이 일을 한다. 반면 남자들은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비싼 청량음료나 맥주를 마시며 놀기만 한다. 그런데도 재미있는 건 놀기만 하는 남자들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은데 비해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쁜 여자들은 언제나 명랑하다는 사실이다. 저녁에 여자들이 모이는 부엌에 가보면 웃음소리와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생기가 저절로 솟는다.

13. 킬리만자로 산신령, 내 한국병 고쳐주다

이 킬리만자로 등반은 단순히 아프리카 최고봉을 올랐다는 성취감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소중한 교훈을 내게 주었다. 우선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빨리빨리 해야할 것과 천천히 해야할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 못지않게 빨리빨리를 외쳐왔던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무엇이든지 조금씩 늦게 시작했다. 대학도 늦게 다니고 첫 직장에도 늦게 들어가고 결혼도 이미 늦었고. 이런 늦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은 더욱 조급해지고 무엇이든 속전속결 빨리빨리 해치우려고 해왔다.
그런데 내가 킬리만자로 등반을 하면서 평소처럼 ‘남보다 빨리, 남보다 먼저’를 외쳤다면 나는 아마 정상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실제로 중요한 건 남과 비교해서 내가 얼만큼 왔는가가 아니라 내가 지금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힘을 제대로 축적하면서 알맞은 속도로 가고 있는가라는 것이라는 중요하고도 고마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

또 한 가지. 나는 내 몸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닷새간 등반을 잘 견뎌준 다리, 두통을 일으키지 않아준 머리, 높은 고도에서도 먹을 것을 잘 소화시켜 준 위, 산소부족을 잘 견뎌준 폐, 마지막 여덟시간 지옥길에 터지기 직전까지 갔던 내 심장, 그리고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등산 중에 있어야 했으나 고맙게도 등산 후로 미루어진 생리.

14. 잔지바르 해변 잊지못할 남자 조나단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객이든 현지인이든 늘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과 짧게는 하루, 길게는 몇 주씩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데 어떤 인간관계나 그렇듯 첫눈에 마음에 드는 사람, 한참을 지나야 좋아지는 사람, 아무리 좋아하려고 해도 끝내 좋아지지 않는 사람, 처음에는 좋았다가 나중에는 빨리 헤어지고 싶은 사람 그리고 무리하게 여정을 바꾸어서라도 될 수록 길게 함께 있고 싶은 사람 등 가지가지다.
어떤 경우든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내 여행경험을 풍요롭고 값지게 해주지만 특히 외로운 여행길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건 마치 한여름 땡볕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바람부는 시원한 그늘에 앉아 마시는 찬 맥주의 첫모금과 같다고 할까. 짧았지만 조나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조나단에게 내가 그런 사람으로 남게 되기를 바란다.

15. 인생은 유한하나 여행은 무한하다

우리나라 대기업 최고급 간부가 어느 날 자유를 위해 갑자기 일개 여행사 해외가이드로 뛰어들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아저씨는 한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인생은 단 한번 사는 거고 게다가 얼마큼 살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오. 이런 귀한 인생을 누구 눈치 보거나 체면 따지면서 낭비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최대한 즐기면서 살아야 하오.”
지금은 중요하게 여겨지는 ‘남들과의 비교’는 나중에 인생을 되돌아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들에 얽매여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리 일생에 일부러 노력하지 않으면 여행 조건이 딱 갖추어지는 기회는 없다. 태어나서 30세 정도까지는 시간은 있지만 돈이 없고 30세부터 60세까지는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으며 60이 넘어서는 돈과 시간은 있지만 여행할 힘이 없다고 강조했다. 조건을 기다리다가는 좋은 세월 다 보내고 늙어서 후회하기 십상이니 어느 때라도 적은 돈만 있으면 시간을 내 여행이라는 또 하나의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차분하게 말했다.

16. 말라위 소년들 "누나 콘돔 가지고 다녀요?"

오버랜드 트럭이란 대형 화물트럭에 20명 정도를 싣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투어트럭이다. 런던에서 출발해 나이로비까지, 혹은 케냐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하는 식으로 짧게는 몇 주일, 길게는 몇 달씩 다니는 그룹여행의 일종. 승객들은 보통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인데 스스로 음식도 해먹고 텐트에서 자며 최소한의 경비로 여행을 한다.

17. 우유만 마시고도 용맹스러운 마사이 사나이들

마사이 사람들은 치아가 하얗고 튼튼해 늙어 죽을 때까지 모두 자기 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뿐인가. 마사이 족은 대부분 작대기처럼 길고도 가는 다리에 호리호리한 몸매인데도 아주 단단해서 교통사고가 나면 차는 다 찌그러져도 그 차에 타고 있던 마사이 족의 뼈는 안 부러진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주식인 우유 덕분이라고 믿고 있는데 얼마간은 과학적 근거도 있는 것 같다.

18. ‘남녀평등 좋아하시네’ 보란족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

에티오피아로부터 넘어오는 여행객 중에 노르웨이에서 왔다는 남자 대학생은 아무리 보아도 얼굴이 동양 사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한국에서 입양간 아이로 이름도 킴이다.
킴은 대부분의 한국 아이들처럼 자기도 어렸을 때는 노르웨이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는 건 물론 뭇매도 수없이 맞았다고 한다.
노르웨이 인구가 고작 4백만~5백만인데 입양간 한국인 아이들이 6천명 정도나 되니 노르웨이에서는 적지 않은 소수민족 집단이란다.
남의 나라에서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라준 킴과 같은 한국아이들. 핏덩이인 자기를 버린 생모와 고국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찾고 싶어하는 착한 한국의 끈끈한 핏줄. 불모의 땅 한가운데 초라한 여관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도 초롱초롱 빛나는 킴의 눈빛이 아프게 내 가슴을 찔렀다.

가부장제 사회가 어디나 그렇듯 여기서도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곳 풍습으로는 결혼 때 남자가 소 다섯 마리를 주고 여자를 사 온다. 결혼 상대를 고르는 건 신부측이 아니라 신랑 아버지다. 남자들은 소만 많으면 셋이든 넷이든 아내를 얻을 수 있으니 아내가 많다는 건 곧 재산이 많다는 것이다. 여자의 가치가 소 다섯 마리를 넘지 못하니 남자들은 아내 때리기를 밥먹듯 한다. 마치 가축 정도의 소유물로 아내를 생각하는 것 같다.

19. 답답하게 고추를 어떻게 가리고 다녀?

에티오피아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나라다. 우선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유일하게 수천년 역사에 한번도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2차대전 중에 이탈리아에 강점당한 적이 있으나 그때도 강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쟁 중이었다고 이 나라 사람들은 말한다. 백인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덕분에 사람들이 친절하면서도 당당하다.

에티오피아 여행은 모든 게 생소하다. 우선 하루도 24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이며 그 시작은 우리의 아침 6시. 이들이 0시라고 하면 그것은 아침 6시를 말하는 거다. 달력도 국제적인 그레고리안 달력을 쓰는 게 아니라 줄리어스 시저 때부터 써 온 줄리안 달력을 쓰고 있어서 1년이 13개월에 한 달은 30일, 그리고 맨 마지막 달은 5일이나 6일로 되어 있다.
서양력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했으나 그 탄생 연도를 달리 잡고 있어서 연도도 다르다. 예를 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1996년 6월 5일이 에티오피아 달력으로는 1988년 9월 13일이다. 한국달력으로는 88올림픽이 한창인 셈이다.

20. 말라리아보다 더 무서운 라면결핍증

그날 점심은 최서기관 집에 차려놓은 진수성찬을 위가 허락하는 만큼 많이 먹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과 부담없이 수다를 떨다가 오후 늦게 배가 꺼지기를 기다려 약속한 라면까지 잘 먹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벌써 메슥거리던 증세도 덜하고 골치도 훨씬 덜 아팠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멀쩡하게 일어나 시장에 갈 수 있을 만큼 기운을 되찾았다. 10일이나 꼼짝않고 누워 있어 병이 나을 때가 된 건지도 모르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라면 덕분인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앓던 병은 말라리아 예방약 부작용이 아니라 라면 결핍증이었나 보다.

21. 우울한 사람은 에티오피아 시미엔산으로 가라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시미엔산 최대의 전망대인 미에트고트와 기드게르고트. 거의 모든 산들이 발아래 있는데 두 세시간 정도 천 미터도 넘는 낭떠러지 가장자리를 걷는 아슬아슬한 길이다.
그날 나는 선경 속을 헤매는 천사였다. 온통 눈 가는 데까지가 수백수천가지 모양의 바위 산들. 자세히 뜯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잘 생겼고 합쳐놓고 보면 또 장엄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마치 전 세계 산들을 모두 모아놓은 것 같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미엔산.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이런 모습일까.

22. 큰인물, 자유 에리트리아 미남 대통령

에리트리아가 내 아프리카 여행의 종착지다. 아프리카 대륙의 50개도 넘는 나라 중에 내가 발로 걸으며 몸으로 체험한 나라는 겨우 다섯 나라에 불과하지만 반년 동안 아프리카를 돌아다니다 보니 이 대륙이 뼛속 깊이 각인되어 아프리카가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아프리카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언제나 불안한 정치상황, 거기에서 비롯되는 끊임없는 내전, 반복되는 기아현상, 창궐하는 에이즈, 무능한 정부, 식민지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민들, 일을 열심히 해도 끼니를 잇기 힘든 절대적인 빈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프리카의 미래는 어두운 듯하다.
그러나 다른 잣대로 보면 탄자니아의 로즈엄마, 케냐 마사이 족의 올레파리, 보란 족의 아저씨들, 에티오피아의 시믈렛 가족 등이 있는 따뜻한 아프리카는 분명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고운 마음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물처럼 꼭 필요한 햇빛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3. 눈물로 헤어진 이집트 시골 식구들

비행기를 타면 빨리 간다는 이점밖에 없다. 그러나 육로나 해로를 이용하면 서서히 변해가는 경치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들어가는 느낌을 확실하게 가질 수 있다. 국경선에 세워진 ‘우리나라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간판을 보며 짜릿한 성취감을 맛보는 건 육로여행자만의 커다란 즐거움이다. 그래서 나는 육로여행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에리트리아에서 이집트까지는 부득이하게 이 원칙을 지킬 수 없었다.

24. 나일강 달빛여행

이집트 수도 카이로는 과일 칵테일 같은 도시다. 원맛이 섞여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술 칵테일이 아니라 아무리 여러 종류가 섞여있어도 각각의 맛을 잃지 않는 과일 칵테일.

이집트 여행 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건 돛단배를 타고 보름달 아래서 지내는 3박4일 나일강 항해였다. 플루카라는 순전히 바람의 힘으로만 가는 이 돛단배 여행은 3박4일 식사까지 포함해 우리 돈으로 1만5천원. 싸기도 하려니와 여유있게 나일강 위를 떠다니며 충분히 나일강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25. 세상에 태어났으면 페트라는 꼭 가보아야 한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가 아프리카 대륙에 붙어있어 문화적으로는 중동이면서도 지형적으로는 아프리카에 속해 있다면 본격적인 중동의 시작은 시나이반도다. 이 곳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이 만나는 곳일 뿐 아니라 수에즈 운하가 유럽과 아프리카를 이어주고 있으니 세 대륙이 만나는 로터리라 할 수 있다.

페트라! 요르단, 아니 전 중동지방에서 최고 최대 최상의 유적지. 눈물나도록 아름답다는 곳.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성궤를 찾아서 편 촬영지가 바로 페트라다. 중동지방을 여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페트라에 대한 질문을 주고 받는다. 페트라를 보기 전에는 “페트라가 정말 좋으냐?” 이고, 보고 나서는 “페트라는 정말 좋더라”다.

26. 베두인은 목숨은 내놓더라도 손님은 내주지 않는다

예루살렘은 이상한 매력이 있는 도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기독교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기독교의 성지로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3/4이 아랍인 지구다. 그뿐인가. 예루살렘의 상징인 황금지붕은 바로 회교도 최고의 성지인 회교 사원이라는 사실을 아시는가. 예루살렘은 이 지역 모든 종교의 성지이자 모든 민족의 고향이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에는 온갖 문화와 종교, 역사의 시간대가 널려있다. 아랍지역에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가게들에서는 이들에겐 일상용품이나 내게는 신기하기만한 물건들은 팔고 있다.

베두인은 이집트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는 사막에서 양이나 염소, 낙타들을 키우며 사는 유목민의 총칭. 정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에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며 명예와 체면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뿌리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베두인이라는 데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손님대접이 융숭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일단 자기 집에서 차를 마신 사람은 그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식사를 한 사람은 하루 밤 하루 낮을, 하룻밤 묵은 사람은 사흘 밤 사흘 낮을 집주인이 책임을 지고 지켜주어야 한다. 그 손님이 쫓기는 사람이라면 그를 쫓는 사람과 목숨을 건 한판 싸움도 불사할 정도로 손님을 중하게 여긴다.

27. 칠겹살 시리아 여자들과 알몸으로 사우나에

시리아는 김일성 사망 때 3일장동안 조기를 게양할 정도로 북한과 각별한 사이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여행비자는커녕 경유비자도 안 내준다.

국경에서 버스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다마스쿠스. 나는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이 이름에 큰 매력을 느껴왔다. 다마스쿠스라는 이름에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깃들여 있는 것 같았다. 기원 전 5000년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도시. 기원전에는 페르시아의 중심지, 알렉산더 대왕 때는 그리스의 중심지, 로마시대에는 동방의 중심지, 그리고 회교도의 시대에는 아랍의 중심지인 다마스쿠스. 요충 중의 요충인 이 다마스쿠스가 보고 싶어서 나는 직장여성으로 보이도록 평소에는 입지도 않던 긴 원피스를 입고 머리 드라이까지 하고 얌전을 떨며 국경을 넘은 거다.

28. 모스크바, 강도보다 더 무서운 경찰

어느 나라나 도착해서 처음 얼마동안은 생소함으로 당황하게 되는데(사실은 이 당황하는 며칠간이 여행의 묘미다) 러시아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러시아 사람들의 무표정, 무관심, 무반응은 혹독하기 이를 데 없다. 우선 사람들은 웃지를 않는다. 옆을 보지도 않는다. 지하철 안에서도 부동자세. 열심히 연습한 러시아 말로 한껏 미소를 띠고 물어보아도 본 척도 않는다. 그 정도는 또 다행. 물어보기도 전에 “야 네 즈나-유”(난 그런 것 몰라!) 소리를 꽥 지르며 지나가기도 한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물어보는 데는 이제 프로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누구에게 물어봐야 구박을 안 당하나 눈치를 살피는 딱한 신세가 됐다.

경찰은 엉뚱한 생트집을 잡아 결국 수십달러를 뜯어내더라는 이야기. 세계를 놓고 미국과 힘을 겨루던 초강대국의 면모가 오늘날 참으로 한심스럽게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실수 때문인가, 옐친의 무능 때문인가.
각오는 했지만 한겨울의 모스크바는 춥긴 또 왜 그리 추운지. 준비해간 옷이란 옷은 몽땅 껴입어서 움직임도 둔하게 밖에 나가면 10분도 지나지 않아 이빨이 저절로 딱딱 마주치고 골이 띵하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에는 콧속에도 살얼음이 가득한데 눈만 오지않으면 젖먹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시장에 나오는 엄마들도 많다. 동토의 나라에서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체력단련을 해야하나보다.

29. 시베리아 횡단열차 7박8일 동으로 동으로

새삼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날 반갑게 맞아 줄 식구들과 가까운 친구들.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과 내가 아끼는 사람들. 그들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돌아가서 편히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나도록 고맙다.
교통지옥, 물가지옥, 공기오염지옥. 내가 사는 서울은 이렇게 지옥으로 표현되곤 하지만 내게는 천국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니까. 이 기차가 쉬지 않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리고 있으니 나는 곧 나의 천국에 닿을 것이다.

30. 얼어붙은 바이칼 호 날씬한 자작나무

나흘째가 되자 기차에 있는 사람들은 지겨움을 참지 못해 지친 얼굴이 되었다. 남자들은 모두 알코올에 절어있다. 이들은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눈을 뜨면 45도 보드카를 마시고 벌겋게 취해있다가 잠들고 잠이 깨면 다시 보드카를 마셨다. 나도 이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매일 여러잔의 보드카를 마셨는데 그러고나니 맥주는 순하디 순한 보리음료 같은 맹물맛이었다.
몇 시간마다 잠깐씩 서는 기차역을 기다렸다가 기차가 서기만하면 완전무장을 하고 뛰어나가 땅구경을 했다.

이레째, 기차는 국경을 넘어 내몽골 초원을 달렸다. 지금 누가 내게 지구는 둥근가 평평한가 물으면 망설이지 않고 평평하다고 대답할만큼 이 초원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여기가 우리의 선구자들이 말달리던 드넓은 만주 벌판. 우리 민족의 기개와 기상이 서려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 괜히 콧등이 찡한 한편, 이 땅이 예전에는 우리 땅이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아침 6시 35분에 북경에 닿는다는 걸 몇 번 확인하고도 전날 밤부터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역에는 한자로 ‘북경역’이라고 쓴 붉은색 네온사인만이 피로 도장을 찍은 듯 선명하다. 총길이 9,500킬로미터, 178시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 북한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꿈꾸었던 아버지와의 다짐을 한 조각 이루어냈다는 작은 만족감이 가슴을 채웠다.

31. 황해는 누렇지 않다

갑판에 나와 바다를 본다. 누가 이 바다를 황해라 했나. 이름같으면 누런 색일텐데 검은 듯 짙은 청색이다. 언제나 자신있게 도전하고 힘있게 헤쳐나가는 젊은이들의 색깔.
내일이면 집에 가는거다.
멀리서 붓으로 점을 찍어 놓은 듯한 작고도 까만 우리의 무인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이 책은 1994년 12월부터 1996년 3월까지의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5년동안 50여개국의 오지를 민박 여행한 경험의 일부이며,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를 16개월 동안 누비고 다닌 이야기이다.
그때 나는 뭘 하고 있었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정신없이 깨지고 있는 중이었을 꺼다.
그땐 그랬다 치고.. 10년쯤 전, 지금의 내 나이에 한비야라는 사람은 세계여행을 하는 중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또 깨지게 했다.

혼자 떠난 오지 여행..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강인함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벌렁거려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때 태어난 큰애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사회과부도를 펴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 한 마디 던지는 것 뿐.
“얘들아, 나중에 이 책 꼭 읽어봐라.”
아, 한 가지 더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라면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지난 며칠동안 라면을 매일 끓여먹었다는 것.

몇 달 전, 강연회에서 만난 한비야님은 환하고 밝고 당당한 목소리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해 주었었다.
월드비젼을 통해 긴급구호 활동을 실천하는 중이라고.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정점에 있다고.
그리고 또 들려주었다.
세계지도를 가슴에 품고 살라고. 전 세계를 무대로 살라고. 대한민국은 베이스캠프라고.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되라고. 타인과 더불어 행복하라고.

나는 그때, 그런 꿈같은 얘길 자신 있게 떠들 수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른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 행복한 시간이었고, 이 책을 읽으며 그때를 떠올릴 수 있어서 기분 좋았다. 게다가 이 책은 시리즈다. 4권까지 있으니 당분간은 아름다운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 기분이 좋다. 2권엔 무슨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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