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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일 09시 12분 등록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 카를융 지음, A.야페 편집, 조성기 옮김

-. 김영사, 2007

 

■ 저자에 대하여 - 카를융

 

1. 부모의 별거로 힘든 유년시절을 보내다. (1875 ~ 1886)

 칼 구스타프 융은 스위스 콘스탄스 호숫가의 작은 마을 케스빌에서 개신교 목사 요한 폴 아킬레스 융과 그의 아내 에밀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융은 유년기의 아버지는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어머니는 결혼생활의 실망으로 병을 얻게 되고, 여러 달 동안 병원 생활로 인한 부재는 융에게 힘든 유년기를 보내게 한다. 이러한 부모의 영향은 '사랑'에 대해 미심쩍은 느낌을 가지게 만들고, 자기 내부의 이중성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불안한 꿈의 형태로도 나타나 남들보다 일찍 사춘기를 경험한다. 하지만, 융은 항상 타올라야 하는 작은 불을 지키면서, 돌과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으면서 서서히 내적 안정을 찾는다.

 

2.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자아를 찾아가다. (1887 ~ 1900)

 융은 학교 등교길에서 지금 여기에 ''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주도적으로 자아를 찾기 시작한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용기를 얻고,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된다.

 중학교 시절 그는 그의 내면에 그의 일상적인 인격과는 또 다른 또 하나의 인격이 들어있음을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 인격들에게 이름을 붙였는데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인격을 제1인격, 실제의 모습을 제2인격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융은 전 생애에 걸쳐 1의 인격’(외적인격)2의 인격’(내적인격) 간의 대립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때 그는 쇼펜하우어와 칸트를 읽었으며 많은 종교서적도 읽었다. 그러면서 그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애를 썼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에는 자연과학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종교 현상에 대한 관심 또한 많았다. 그래서 그는 정신과를 전공하여 정신과 의사로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3.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1900 ~ 1919)

 1900 12월 졸업한 후 취리히대학 부속 부르크흴츨리 정신병원의 E.블로일러 교수(1857~1939)를 보조하는 보조의사이자 연구원이 되었다. 이 시기에 활발하게 정신의학을 연구하였다. 당시 정신의학은 정신과 환자들의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융은 정신과 환자들의 증상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탐색하면서 치료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1903년부터 사람들의 연상 속에는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1903 IWC 상속녀인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하였으며, 엠마는 그의 비서이자 연구를 돕는 내조자로 충실하였다.

 1904년경 정신병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인식하고 단어를 통한 연상실험을 창시하였다. 그는 단어연상법으로 S.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통해서 제기한 억압된 것, 즉 억압이론을 입증하고, 그것을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1906년 정신분열병의 증상을 이해하는 데에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907년 융은 오스트리아 빈에 살고 있는 프로이트를 찾아가 교류하면서 서로의 연구에 공감하며 친분을 나누게 되었고 자신의 연구업적들에 의해 프로이트의 두터운 신뢰와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에서 사용하게 되었고 융과 부르크흴츨리 병원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4. 프로이트와 결별하다. (1908 ~ 1919)

 1908 4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정신분석학회 제창자가 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발행하기로 결정한 기관지 《정신분석학정신병리학 연구연보》의 편자(編者)로 뽑혔다. 1909년에는 미국 보스턴 클라크대학의 초청을 받아 프로이트와 함께 미국을 여행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그는리비도라고 하는 개념을 성적(性的)이 아닌 일반적인 에너지라고 하였기 때문에 프로이트와 의견이 대립되어,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그 이후 자신의 심리학(분석심리학이라 일컬음)을 수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프로이드와의 결별 이후 융은 내면의 불확실성 속에 사로 잡혀 지내게 되지만, 융은 많은 꿈들과 비전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스스로 해석하기 위한 노력했다.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 시절 돌멩이로 집 짓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무의식이 가진 치유의 힘을 체험하게 되었다. 더욱 더 이 놀이는 사람들의 감정 뒤에 숨은 이미지의 의미를 깨달을 대 치유의 힘은 더욱더 활발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꿈속에서 만나는 많은 인물들의 이미지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는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해독하려 애썼다. 그러다 그 이미지들이 다른 이미지들과 더불어 각각 그림자, 아니마, 자기의 원형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5.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1920 ~ 1961)

 1920년 친구의 소개로 튀니지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유럽이 아닌 나라에서 유럽을 관찰했다. 유럽의 합리주의에서 벗어나 넓은 대륙의 초원으로, 잔잔한 바다로, 고원의 맑은 공기 속으로, 시선을 옮겨놓고 신의 응답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꿈과 환상을 통해서 얻은 체험 속에서 그는 개인들의 꿈과 환상들이 집단적으로 격어야 하는 체험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노년을 보내면서, 자신에 관해 불확실해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화성이 그 만큼 더 높아진다고 말했다. 이는 세상의 낯설음이 내면에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6. 저자에 대한 평가

 C.G. 융은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자신의 무의식과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분석 작업을 통해서 얻은 방대한 경험자료를 얻었다. 그러한 자료를 통하여 원시종족의 심성과 여러 문화권의 신화, 민담,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 종교현상들을 비교 고찰하였다. 그 결과, 인간심성에는 자아의식과 개인적 특성을 가진 무의식 너머에 의식의 뿌리이며 정신활동의 원천이고, 인류 보편의 원초적 행동 유형인 많은 원형(原型)들로 이루어진 집단적 무의식의 층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의 일방성을 자율적으로 보상하고 개체로 하여금 통일된 전체를 실현케 하는 핵심적인 능력을 갖춘 원형 즉, 자기원형이 움직이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의 학설은 병리적 현상의 이해와 치료뿐 아니라 이른바 건강한 사람의 마음의 뿌리를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고 모든 인간의 자기통찰을 돕는데 이바지하고 있으며, 시대적 문화, 사회적 현상의 심리적 배경을 이해하는 기초로서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신학, 신화, 민담학, 민족학, 종교심리학, 에술, 문학은 물론 물리, 수학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7. 출저

네이버 백과사전카를 융 http://100.naver.com/100.nhn?docid=124008

카를 융기억 꿈 사상책 저자 소개

변경연 7기연구원 강훈 북리뷰

http://www.bhgoo.com/2011/index.php?mid=r_review&search_keyword=%EC%B9%B4%EB%A5%BC+%EC%9C%B5&search_target=title&document_srl=114131

 

옮긴이 서문

 

9 융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한마디로 규정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

 

9 자기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 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10 카를 융은 죽기 2년 전 BBC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그때 기자가 융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수백만의 시청자들은 융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긴장하며 기다렸다. 융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신을 압니다.”

 

프롤로그

 

11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13 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떤 지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은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지점도 단지 막연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13 인간의 생애는 일종의 애매한 실험이다. 그것은 숫자상으로만 보면 거창한 현상이다.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불충분하여,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잇고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 그 자체라 할 만하다.

 

13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생명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허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13~14 엄밀히 말해 나의 생애에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영원한 불멸의 세계가 무상한 세계로 침투했던 사건들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적 체험들을 주로 이야기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나의 꿈과 환상 들이 포함된다. 그것들은 동시에 나의 과학적인 작업에서 원재료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글거리는 현무암 용암류와도 같아서 그것으로부터 가공될 돌이 결정되어 나오는 법이다.

 

14 다른 기억들, 즉 여행과 사람들 그리고 주변상황에 관한 기억들은 내적 사건들 앞에서 비치 바래고 말았다. 우리 시대의 역사는 많은 사람이 겪었고 그것에 관해 글을 쓰기도 했다. 그 역사를 알려면 그런 글을 참조하든지 거기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고 하면 될 것이다. 내 생애의 외적 사실들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다른 실체와의 만남, 즉 무의식과의 충돌은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거기는 항상 충만하고 풍성하여 다른 모든 것은 그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14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의 생애는 외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빈약한 편이다. 나는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공허하거나 실제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15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 일생을 사로잡은 꿈 - 유년시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26 추측컨대 그녀의 병은 결혼생활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당시 어머니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친척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었다. 어머니의 오랜 부재로 나는 무척 힘들었다.

 

26 그후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 말

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

기도 했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출

발하면서 함께 가져가야 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27 이런 소녀의 유형에 나중에 내 아니마(Anima)의 한 측면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생소한

느낌과, 그런데도 그녀를 처음부터 알아온 것 같은 감정은 나에게 훗날 여성적인 것의 본질을 나

타내는 여성상의 특징이 되었다.

 

27 부모가 별거하고 있던 시기의 또 다른 추억의 영상이 떠오른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무척

아리땁고 사랑스러운 절은 아가씨가, 어느 맑은 가을날 나를 데리고 황금빛 단풍나무와 밤나무

밑으로 산책을 나갔다. 우리는 라인강변을 따라 뵈르트의 작은성 근처에 있는 폭포 아래로 갔다.

햇살은 나뭇잎들 사이로 빛나고 누렇게 물든 잎들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 젊은 아가씨는 나중

에 나의 장모가 되었다. 그녀는 내 아버지를 존경했다.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28 어머니는 나에게 매일 저녁 올려야 할 기도문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밤에 대한 막연한 불안불안 있을 때 그 기도문은 나에게 다소 안도감을 주었으므로 나는 즐겨 기도를 올렸다.

 

      두 날개를 펴소서,

      오 나의 기쁨이신 예수님.

     당신의 작은 아이를 받아주소서.

     사탄이 그 아이를 삼키려 하면,

     아기천사들이 노래하게 하소서.

     그 아이가 다쳐서는 안 된다고.

 

34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그 발기된 남근상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요도의 입구를 눈으로 해석한 것이라든지 그 위에 있는 듯한 광원 같은 것은 남근상이라는 낱말의 어원을 시사하고 있다. 남근상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비슷한 팔로스는 빛나는, 찬란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무튼 그 꿈속의 남근상은 보통은 언급되지 않는 지하의 신으로 여겨진다.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39 오래된 그림이 또 하나 그 방에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 내 아들 집에 있다. 19세기 초 바

젤의 풍경화였다. 나는 종종 그 어둡고 외진 방에 몰래 들어가 그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몇

시간이나 그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아름다움이었다.

 

43 일곱 살에서 여덟 살까지는 블록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탑들을 세우고 나서 지진을 일으켜 무너뜨리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난다. 여덟 살에서 열한 살까지는 늘 전쟁그림,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포격을 가하고 해전을 벌이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리고 연습장을 모두 잉크 얼룩으로 가득 채우고는 그 얼룩들에 대해 개발한 해석을 하며 즐거워했다. 내가 학교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오랫동안 얻지 못했던 놀이친구를 드디어 거기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44 나는 물건들이 금방 커졌다가 금방 작아지는 불안한 꿈을 꾸곤했다. 예를 들어 상당히 먼 거리에 작은 공 하나가 있다고 할 때, 그 공이 점점 다가오면서 엄청나게 커져서 숨통을 누르는 물건으로 변한다. 또는 새들이 앉아 있는 전깃줄이 점점 더 굵어져 내가 잠에서 깰 때까지 나의 공포도 커져만 간다.

 

45 나는 그들과 장난도 치고 집에서는 결코 생각도 못했던 그런 일을 스스로 꾸미기도 했다. 물론 나 혼자 집에 있을 때도 온갖 것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로서는 나의 변화가 학우들의 영향 탓이라고 여겨졌다. 그들은 내가 되기를 바라는 것과는 다르게 되도록, 어찌해서든지 나를 유혹하거나 강요했다.

 

45 나의 밤기도는 낮을 잘 마감해주고 편안히 밤과 잠으로 인도해주는 종교의식적인 피난처인 셈이었다. 그러나 낮이 되면 새로운 위험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46 그 담 앞쪽에는 비탈이 나 있었는데 거기에 약간 솟은 돌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 돌은 나의 돌이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종종 그 돌 위에 앉아 생각의 유희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대게 이런 것이었다. ‘나는 이 돌에 앉아 있다. 나는 위에 있고 돌은 밑에 있다.’ 그런데 돌도 라고 말하며 내가 여기 이 비탈에 누워 있고 어떤 자가 내 위에 앉아 있다고 말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의문이 일어났다.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나인가, 아니면 내가 돌이고 어떤자가 내 위에 앉아 있단 말인가?’

 

47 나 자신의 불확실성은 기묘하고 매혹적인 어둠의 느낌을 동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돌이 나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몇 시간이고 돌 위에 앉아 돌이 나에게 내준 수수께끼에 사로잡혀 있었다.

 

48 온갖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다시 말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거나 나의 예민한 감정이 상했을 때, 혹은 아버지의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나 어머니의 병약함으로 내가 침울해졌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싸서 침대에 뉘어놓은 남자 인형과 곱게 칠해진 매끄러운 그의 돌을 생각했다.

 

49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결코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비밀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자신감이 그 비밀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가 자문해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50 의식의 차원에서 나는 기독교적 의미로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면서 늘 깎아내리거나 땅 밑에 있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항상 따라 붙었다. 종교적인 가르침이 나에게 주입되면서 이것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다라는 말들을 듣게 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렇긴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아주 신비로운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야.’ 

 

■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 학창시절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59 사태가 아주 나빠질 때는 다락방에 있는 나의 은밀한 보물을 생각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쓸쓸할 때도 나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비밀, 즉 프록코트에 높은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 인형과 돌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인간이 ㄹ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60 아주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60 신은 아주 힘센 노인과 같은 그런 존재였으나 무척 흡족하게도 너희는 어떤 형상이나 어떤 닮은 것도 만들지 말라고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비밀이 아닌 주 예수를 대하듯이 신과 그렇게 친밀해질 수는 없었다. 나의 다락방 비밀과의 어떤 유사성에 대해 어렴풋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61 아무도 나에게 수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못했고, 나는 그러한 의문을 조리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나의 어려움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61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격양시켰던 것은 a=b, b=c이면 a=c가 된다는 그런 공식이었다. 확정된 정의에 의하면 ab와 다른 것을 가리키므로 별개의 것이며 b와 똑같이 취급될 수 없는 것이었다. C 역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등식을 다루는 경우에는 a=a, b=b 등으로 말해지는 것인 것, a=b는 즉각 거짓말이나 속임수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67 나는 나 자신에게 분노했고 동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옳지 않은 일을 했으며 나 자신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그후로 부모님이 나를 염려한다거나 동정하는 어조로 나에게 말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67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돌 하나, 식물 하나, 그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형용할 수 없는 듯이 여겨졌다.

 

너는 누구냐?

 

70 ‘그래, 그러면 너는 누구냐? 너는 마치 자기가 대단하다고 내세우는 악동처럼 반응하고 있구나! 게다가 너는 그 사람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는 열두 살에 불과한 학생이지만, 그는 한 집안의 가장인 데다 집 두 채와 멋진 말도 여러 필 가지고 있는 세력가요 부자이지 않은가.’

 

71 마차는 그 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때 무엇이 나의 내부에서 일어났는지, 무엇이 나에게 그토록 강한 인상을 주었는지 표현할 수가 없다. 동경이라고 해야 할지, 향수라고 해야 할지, 재인식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 저거였어! 그래 저거였어!’라고 말이다.

 

72 어찌하여 내가 18세기에 속하는가? 그 무렵 나는 종종 1886년을 1786년 이라고 쓰곤 했다. 그런 일은 항상 설명하기 힘든 향수가 동반되면서 일어났다.

 

74 그러자 생각에 구멍이 뚫리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마비되는 듯한 느낌 속에서 단지 다음과 같은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말자. 무언가 무서운 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결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왜 안 되는가? 왜냐하면 너는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인가? 살인? 아니다. 그것일 수 없다. 가장 무서운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이 죄를 짓는 자는 저주를 받아 영원히 저주받는 운명이 된다면 부모에게는 몹시 비통한 일이다. 나는 부모가 그런 일을 당하도록 할 수 없다. 나는 어찌해서든지 더 이상 그것에 관해 생각해서는 안 된다!’

 

77 하느님이 그들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은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를 말로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전지한 하느님은 인류 최초의 부모가 죄를 범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80 하지만 나는 결국 다시금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분명히 하느님도 내가 용기를 내기를 바라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실행한다면, 하느님은 나에게 은총과 계시를 내려주실 것이다.’

 

80 나는 지옥의 불길 속으로 즉시 뛰어들려고 하는 것처럼 용기를 끌어모아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나는 내 앞에 대성당과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느님은 세상 저 위 높은 곳에서 황금보좌에 앉아 잇고, 보좌 밑으로부터 거대한 똥덩어리 하나가 화려하게 채색된 새 지붕에 떨어져 지붕을 산산조각내고 대성당의 벽들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

 

80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안도감과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저주를 예상했는데 그 대신 은총이 나에게 임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 임했다. 나는 행복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울었다. 내가 하느님의 가차없는 준엄함에 쓰러져 복종하자 하느님의 지혜와 선이 나에게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내가 계시를 체험한 것과도 같았다. 내가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81 아버지는 성서에 씌어 잇고 조상들이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을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아서 직접 임하시는 하느님, 성서와 교회를 넘어서 전능하고 자유로운 하느님, 당신의 자유를 인간이 누리도록 촉구하고, 당신의 요청을 무조건 실현하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견해와 신념들을 버리도록 강요할 수도 있는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

 

81 인간의 용기를 시험할 때 하느님은 비록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하느님은 용기에 대한 그런 시험에서 악한 어떤 것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도록 당신의 전능함으로 이미 보살피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그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81 하느님은 또한 아담과 이브를 그러한 방법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느님은 그들이 복종하는가를 알기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종교적 전통으로는 내가 거부하고 싶은 것도 나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은총을 가져다준 것은 복종이었다.

 

82 그 체험 이후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느님에게 맡겨졌다는 것과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의미한 일에 나 자신을 넘겨주는 셈이 된다.

 

85나는 <욥기>9 30절 이하,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음 옮긴이)에 빠지게 하시리니라는 구절 같은 데서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85 돌이 온갖 의혹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멈췄다.  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돌은 영원하며 수천 년 동안 살아 있다.’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이에 반해 나 자신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자연과 사원

 

89 속으로는 언제나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부모의 아들로서 학교를 다니고 다른 많은 아이보다 그렇게 썩 영리하거나 주의깊지도 않으며 근면하거나 단정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못한 아이였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어른으로 정말 늙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믿지 않고 인간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 대신 그는 자연과는 친밀하게 지냈다. 대지, 태양, , 기후, 살아 있는 피조물, 그중에서도 특히 밤과 꿈, 그리고 하느님이 내 마음속에 직접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과 가까웠다. 여기서 나는 하느님을 따옴표로 묶어놓았다.

 

91 나의 전생애에 걸친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간의 대립은 일반적으로 의학에서 말하는 그런 '분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2의 인격은 내 생애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내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했다.

 

두 인격의 어머니

 

99 어머니 역시 그 밉살스러운 아이들을 열등한 잡종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어머니의 잔소리를 액면 그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102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나에게는 모두 이야기했음이 틀림없다 어머니는 너무 일찍 나를 믿을 만한 친구로 만들어놓고 자신의 여러 가지 고민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104 그 순간이 다가왔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삼위일체교리를 공부할 차례구나. 하지만 이 부분은 넘어가기로 하자. 사실 나도 이 대목은 잘 모른다.” 나는 한편 아버지의 정직성에 감탄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깊이 실망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삼위일체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109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한쪽 면에만 매달려 유혹자와 파괴자의 손아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109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한쪽 면에만 매달려 유혹자와 파괴자의 손아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도 이렇나 사실을 인지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악의 기원

 

111 그러다가 드디어 1869년에 간행된 비더만의 <기독교 교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의 저자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여 자신의 견해를 소신있게 펼쳐나간 듯했다. 나는 그로부터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3 자아는 또한 온갖 자기자만과 오해, 기분, 감정, 열정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아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훨씬 많이 겪었다. 자아는 유치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이기적이고 고집이 세며, 애정결핍이며, 탐욕스럽고 공정하지 못하며, 민감하고 게으르며, 무책임하며 그외 나쁜 것들 투성이였다.

 

117 나는 파우스트의 행동방식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나로서는 파우스트가 그렇게 한쪽으로만 치우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좀더 현명하고 또한 더욱 도덕적이어야만 했다. 자신의 영혼을 그토록 경박하게 도박에 거는 것이 나로서는 유치하게 보였다. 파우스트는 분명히 허풍쟁이였다!

 

117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속아넘어간 악마라는 것은 마음에 썩들지 않았다. 메피스토텔레스는 백치 같은 아기천사들에게 속임을 당할 정도로 어리석은 악마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었다. 메피스토텔레스는 다른 의미에서 속임을 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그의 보증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좀 경박하고 특색없는 친구인 파우스트가 저승에서까지 속임수를 부린 것이었다. 거기서 그의 소년다움이 드러났으나 위대한 신비로 들어갈 수 있는 축성은 받지 못한 듯했다. 나 같으면 그에게 뭔가 연옥의 불길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118 그 책을 읽고 나는 파우스트가 일종의 철학자였으며, 철학에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으로부터 진리를 위한 개방성을 분명히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20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의 증명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 사람들은 이런 면에서 나에게 가능한 한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나 사실 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 어느 것도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런 것들로부터 나의 관념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121 그 무렵 나는 하느님은 적어도 나에게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경험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대성당과 관련된 저 경악스러운 일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나에게 밀려온 것이었고, 그것을 생각하도록 나는 아주 잔혹하게 강요당했다. 하지만 그런 후에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을 받았다.

 

121 악마가 본래부터 악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명백한 모순, 즉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도 원래는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123 나는 광범위하게, 어떤 체계도 없이 희곡, , 역사 그리고 나중에는 자연과학서도 읽었다. 독서는 재미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편안하게 기분전환이 되도록 해주었다.

 

128 ‘그럼,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너는 흥분하고 있구나. 물론 그 선생은 너의 천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다. 다시 말해 너와 똑같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도 너와 마찬가지로 의심 많은 사람인 것이다. 너는 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믿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며 소박하고 한눈에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아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131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나무들은 특히 신비로웠으며 나에게는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숲은 사람들이 생명의 심오한 의미와 그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131 돌은 존재의 끝없는 신비, 영혼의 진수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나는 돌과 나 자신이 서로 유사하다고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 그 양쪽에 다 신성이 깃들어 잇는 것이었다.

 

133 나는 생각했다. 이들은 모두 자기들이 받아 들이지도 않고 진정으로 알고 있지도 않은 것을 논리의 곡예로써 억지로 꾸미려 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자신들이 믿고 잇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사실은 체험이 문제인 것이다!’ 나에게는 그들이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는 있지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139~140 자연과학에서는 의미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었고, 종교학에서는 경험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었다. 자연과학은 제1의 인격의 정신적 욕구에 아주 잘 부합하였고, 그에 반해서 인문학이나 역사과목은 제2의 인격을 위한 일종의 유익한 시청각수업인 셈이었다.

 

144 예컨대 아버지는 내가 왜 자주, 될 수 있는 한 교회에 나가지 않으려 하는지, 왜 더 이상 성찬식에 참석하지 않는지에 대해 나에게 답변을 요구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나는 교회와 거리를 두면 둘수록 더욱 마음이 편해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오르간과 합창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149 점점 더 새로운 깊고 먼 산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다가 마침내 나는 산꼭대기에 서게 되었다. 산소가 희박한 익숙지 않은 새로운 공기 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넓은 조망 가운데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세계다. 나의 세계, 고유한 세계요, 그 비밀이다. 이곳에는 선생도 학교도 해답 없는 문제도 없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고도 있는 곳이다.’

 

151 아버지가 나에게 특히 사랑스럽게 여겨진 것은 바로 그의 결점과 부족함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152 말을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운명적인이상한 감정에 싸이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막 내 앞에 나타났는데도 마치 우리가 하나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와 함께 걷고 있구나.’ 나는 그녀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수줍음과 경탄이 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당황했으나 왠지 마음에 들었다.

 

■ 아름다운 시간들 - 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173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 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180 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운명에 꼼짝없이 매여 있음을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외로웠고 함께 대화를 나눌 친구도 없었다. 적어도 우리 주변에는 구원의 말을 해줄 만큼 신뢰가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182 신학자들은 하느님이 어떤 사물들은 의도를 가지고 배치하고 다른 어떤 사물들은 그냥 방임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정신의학자들은 물질에도 인간정신의 특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183 내 인생에서 지루하게 보낸 유일한 시기인 소위 학창시절(김나지움과정을 가리킴-옮긴이)이 끝나고, 대학과 학문의 자유를 향한 황금문이 내 앞에 열려 있었다. 나는 자연에 관한 진리를, 그것도 중요한 측면에 대해 듣게 될 것이었다.

 

185 어머니는 나오 함께 아버지 침대로 다가가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놀란 듯이 말했다. “이렇게도 모든 것이 빨리 지나가버리다니.”

 

189 번득이는 호수와 그리고 은빛 안개에 휩싸인 기슭 위에 한 개의 빛이 있었다.

 

이제 우리가 순풍을 맞아 까만 부리(이물이 부리 모양으로 생겼다는 뜻임-옮긴이) 돛단배를 타고, 돛을 부풀리는 미풍에 우리를 내 맡기네. 말 잘 듣는 수행원으로. 키르케여, 곱슬곱슬 고운 머리카락, 숭고한 선율의 여신이여!

 

그런데 그 빛나는 호메로스의 영상 뒤에서 미래에 대한 상념, 즉 우리 앞에 놓인 세계의 바다위를 나아가는 보다 큰 항해에 대한 생각이 불안하게 어렴풋이 떠오르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192 그 당시 내가 읽은 캉디드(프랑스의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소설로, 라이프니츠의낙천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쓴 작품임-옮긴이)의 글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 모든 것은 적절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그 정원이란 자연과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3 나는 철학 강의를 통해 마음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관해서 그 어떤 것도 들은 일이 없었다. 어디서나 마음은 암암리에 전제되어 있었으나, C.G. 카루스의 경우처럼 마음에 관한 진정한 지식은 없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들릴 수 있는 철학적인 사색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기묘한 관찰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195 나는 세계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느낌이었다. 나에게 불같이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질없는 것이며, 심지어 불안을 자아내는 원인이 되기까지 했다.

 

195 날씨나 지진을 미리 알아차리는 동물들도 있고, 어떤 사람의 죽음을 일러주는 꿈, 임종시에 멈춰버린 시계, 결정적인 순간에 부서진 컵 들도 있었다. 그것들은 그때까지의 나의 세계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일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러한 일들에 관해 들은 유일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195~196 내가 정말 어떤 세계에 들어와 살고 있는지 매우 진지하게 자문해보았다. 그것은 분명 도시의 세계였다. 그 세계는 시골의 세계, 즉 산과 숲과 강, 동물과 '신의생각(식물과 수정을 가리킴')들의 진실된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196 도시의 세계는 학문적인 지식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96 하지만 이러한 통찰은 나에게 위험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것은 우월감을 잔뜩 부추기고 근거없는 비판, 공격적인 성향으로 유도하여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그 옛날의 의혹과 열등감, 침울, 다시 말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끊어버리려고 결심했던 악순환이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199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이제 나의 제2의 인격은 차라투스트라였다. 물론 이것은 두더지의 흙두둑을 몽블랑산에 비교하는 격이긴 하지만 말이다.

 

201 <파우스트>가 나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그 문은 오랫동안 철저하게 닫힌 체로 있었다. 나는 소 두 마리가 도깨비마법에 걸려 그 머리들이 동일한 고삐에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한 늙은 농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부의 어린 아들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농부가 대답했다. "애야, 그런 건 말하는 게 아니란다."

 

201 사람들은 작가, 신문기자, 또는 시인 들에게만 그와 같은 무례한 행동을 허용할 뿐이다. 나는 새로운 관념이나 단지 특이한 측면까지도 오직 사실로써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사실들은 남아 있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책상 밑에 버려져 있지 않고 언젠가 어떤 사람이 그것을 만나게 되고, 그는 자기가 찾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202 철학자들은 온통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을 늘어놓고, 정작 사실들을 가지고 답변해야 할 때는 침묵해버리기 일쑤였다.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210 정신의학에서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흐름이 합류하여 그 합해진 물의 힘으로 스스로 물길을 내어 흘러갈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내가 사방으로 찾아헤매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경험의 장이 있었다.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었다.

 

211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도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가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211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강물이 합류하여 세차게 흘러가면서 먼 목적지로 나를 가차없이 실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통합된 이중성'이라는 고양된 감정에 힘입어 나는 마법의 파도를 탄 것처럼 시험을 치러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214 바젤에서 나는 언제나 파울 융의 아들이요, 조부인 카를 구스타프 융 교수의 손자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위 일종의 지식인집단에 속해 있었고 특정한 사회적 '동아리'에 들어있었다. 나는 여기에 반감을 느꼈다. 나 자신을 그런 식으로 묶어두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222 프로이트 자신은 정신의학자가 아니고 신경학자였지만 심리적인 문제를 정신의학에 도입했다.

 

225 나로서는 그녀가 평생을 통해 자기 죗값을 치르도록 일상생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더욱 뜻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녀는 운명에 의해 충분히 벌을 받았다. 그녀는 퇴원하면서 자신의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났다. 그녀의 속죄는 이미 우울증과 병원 입원으로 시작된 셈이었다. 그리고 자식을 잃었다는 것은 그녀에게 깊은 고통이었다.

 

229 사실상 그녀로 인해 나는 그 지방에서 마술사와 같은 명의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곧 두루 퍼져나가 그녀 덕분에 나는 개인적으로 돌보는 환자들을 처음으로 얻게 된 셈이었다. 내가 정신치료법을 시행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이 한 어머니가 정신이 병든 아들 대신에 나를 자기 아들로 삼은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232 그래서 나는 일종의 기습공격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그도 모르게 그의 어머니에게 그가 알코올중독으로 회사 직책을 더이상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서를 발급해주었다. 그를 해고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나의 충고를 따랐고, 아들은 물론 나에게 몹시 화를 냈다.

 

239 나는 바베트와, 그와 비슷한 다른 환자들의 사례를 열심히 살펴본 결과, 이제까지 정신병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사실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정신이 돈' 것들만은 결코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나는 그런 환자들에게도 그 배후에는 정상이라고 일컬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간주될 만한 '인격'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따금 이러한 인격 역시 주로 목소리나 꿈을 통해 아주 이치에 맞는 발언과 항변을 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몸이 병들어 있는 중에도 이런 인격이 다시 전면에 나타나 환자를 거의 정상으로 보이게까지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246 그녀의 환상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소녀시절에 당했던 근친상간으로 인해 그녀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굴욕을 느꼈지만 환상의 세계에서는 고양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소위 신화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근친상간은 전통적으로 왕과 신들의 특권이기 때문이었다.

 

꿈의 분석

 

249 물론 의사는 소위 '방법'에 관하여 알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규격화된 일정한 방식에 매이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론적인 전제는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한다.

 

250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250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 더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250 오늘날에는 예전과는 달리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위험이 자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즉 각 개인과 다수의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정신의 변이는 위험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어버리면 수소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

 

250 그런데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조건은 이른바 교육분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기 분석이다. 환자의 치료는 말하자면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를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교육분석에서 의사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환자도 이를 배우지 못한다. 의사가 배워 알지 못한 마음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환자 역시 마음의 한 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251 그러므로 교육분석에서 의사가 개념체계를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의사는 피분석자로서 분석이 바로 자기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교육분석은 실제적인 삶의 한부분이지 무조건 암기하여(문자그대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교육분석에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나 치료자는 나중에 그에 대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251 인생의 심각한 위기에서는, 다시 말해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 중대한 순간에는, 암시의 잔꾀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의사는 그 전존재가 도전을 받게 된다.

 

251~252 치료자는 자기 자신이 환자와의 대결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수시로 해명해야 된다. 우리는 의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체험하고 잇는가?" 하고 항상 자문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자기 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에 따라서는 치료 전체가 빗나갈 수도 있다.

 

253 꿈속에 내가 그녀를 그러한 방법으로 쳐다보아야만 했다면 현실에서는 아마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꿈은 의식적인 태도에 대한 보상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 꿈이야기와 나의 해석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상황이 즉시 변화되어 치료가 다시 진전되기 시작했다.

 

253 나는 의사로서 환자가 나에게 어떤 소식을 가져오는지 항상 자문해야 한다. 환자가 나에게 무엇을 예시하는가? 환자가 나에게 아무것도 예시하지 않는다면 나는 공격목표가 없는 셈이다. 의사는 그 자신이 고통을 당할 경우에만 효과를 얻는 법이다.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254~255 그는 분석자가 되기를 원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분석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우선 당신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듯합니다. 다신 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당신이 올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를 확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큰일입니다! 환자를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먼저 당신 자신을 분석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256 어린아이들은 똥이 색깔이 있고 냄새가 나기 때문에 그것에 호기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258 잠재성 정신분열증을 알아차리고 치료한다는 것은 의사들에게도 대개의 경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비전문가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 아닌가.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260~261 원형적인 상황(이 사례에서는 죽음이라는 상황이지만)과 관련하여 종종 관찰되는 전형적인 동시성 현상이다.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264 나의 환자들은 대부분 신자가 아니라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길 잃은 양들'이 나를 찾아왔다.

 

265 가벼운 바람은 어디든지 원하든 대로 가는 영이다.

 

271 그러므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일종의 구획 심리학을 계발한다. 감정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지성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경증을 앓고 있다.

 

272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불화

 

280 그는 언제나 의심하는 태도로 그것이 '억압된 성욕'임을 넌지시 시사하곤 했다. 성욕이라고 단적으로 판정할 수 없는 것은 '정신적 성욕'이라고 불렀다.

 

288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이럴진대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이 너무도 적은 심리학적인 사실들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덧없을 정도로 작은 의식이 어떤 것을 인식해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리비디의 변환과 상징

 

296~297 이쯤 되자 나의 흥미는 더해갔다. 나는 마룻바닥을 더욱 면밀히 조사했다. 마룻바닥은 석판으로 되어 있었다. 그중 한 개의 석판에 고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그 고리를 잡아당기자 석판이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그 밑으로도 아래쪽으로 향하는 좁은 돌계단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또 그 돌계단을 내려가 바위를 뚫어 만든 나지막한 동굴로 들어섰다. 바닥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 먼지더미 속에 원시문화의 유물들처럼 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깨진 도자기 조가들이 널려 있었다. 나는 매우 오래된 것이 분명한, 반쯤 삭아버린 두개골 두 개를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298~299 1층은 무의식의 제1표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깊이 내려갈수록  풍경은 점점 더 이상해지고 어두워졌다. 동굴 속에서 나는 원시문화의 유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의 내부에 있는 원시인의 세계, 의식이 다다를 수도 없고 해명할 수도 없는 세계였다. 선사시대의 동굴을 인간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기 전에는 대개 동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원시적인 마음은 동물의 혼의 활동과 가까이 접하고 있다.

 

301 프로이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무의식과 무의식의 직접적 표현인 꿈을 자연의 과정으로 여겼다. 이 과정에는 무엇보다 요술이나 속임수, 그리고 어떤 자의적인 것도 끼어들 수 없다. 나는 의식의 잔꾀가 무의식의 자연과정에도 확대된다는 가정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반대로 나날의 경험을 통해 오히려 무의식이 의식의 경향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저항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301 집에 관한 그 꿈은 나에게 기묘한 영향을 미쳤다. 그 꿈은 이전에 가졌던 고고학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게 했다. 취리히로 돌아온 후, 나는 바빌로니아의 유적에 관한 책을 찾아 신화에 관한 여러 연구논문을 읽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프리드리히 크로이처 <고대민족의 상징과 신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 글이 나에게 불을 댕겼다! 나는 미친 듯이 읽었고, 뜨거운 흥미를 가지고 산더미 같은 신화적인 소재와 그노시스트(영지주의) 저작 들을 두루 섭렵했다.

 

302 자연(본성)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삶들은 물론 신경증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그들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주어야 한다.

 

310 그러나 나는 고독해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소위 친구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미리 곰곰이 따져본 점이었다. 나는 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잇다는 것과 나의 확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희생' 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통찰로 나는 다시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나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말이다.

 

■ 내 안의 연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316 그 무렵 나는 이상하게도 명료한 정신상태 속에서 내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제 신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문을 열려고 하는가?" 그러자 갑자기 내가 무엇을 이뤄왔는지 의문이 생겼다.

 

316 나는 과거 민족들의 신화를 설명해왔다. 영웅에 관한 책을 쓰고 사람들이 옛날부터 그 속에서 살아온 신화에 관한 책도 썼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은 어떤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기독교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너 자신은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솔직히 말해, 아니오! 나는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잇지 않소." "그럼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인가?" "그렇소.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오."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너는 어떤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여기에 이르자 내 마음이 편치 않아졌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중단했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만 것이었다.

 

319 갑자기 시체가 움직이더니 살아났다. 그는 두 손을 풀었다. 나는 내가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320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둬보자." 그리하여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다.

 

320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하, 여기에 삶이 있구나!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내게 결여되어 잇는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성인이 된 남자와 열한 살 소년을 서로 이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그 시절과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돌아가 아이의 놀이를 하면서 아이의 삶을 한번 더 살아보는  수 밖에 없었다.

  이 순간이 내 운명의 전환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 놀이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이의 놀이를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 크나큰 체념과 굴욕감의 고통이 따랐다.

 

321 날마다 점심을 먹은 후 날씨만 좋은 나는 집을 지었다. 식사를 마친 직후부터 환자가 올 때까지 그렇게 했다. 저녁에 일이 일찍 끝났을 때도 다시 나의 작업장으로 갔다. 이런 과정에서 나의 생각은 맑아지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환상을 붙잡을 수 있었다.

 

322 물론 나는 내 놀이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자문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너는 종교의식을 치르듯이 작은 말들을 세워 완성해가고 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내 신화에 이른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는 확신은 느끼고 있었다. 건축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것은 한줄기 환상을 풀어놓았다. 그 환상은 나중에 상세히 기록해두었다.

 

322 이런 종류의 일은 내 인생에서 늘 되풀이되었다. 내 후반기 인생에서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림을 그리거나 돌을 다루었다.

 

322 나는 나를 다시금 안정시킬 필요를 매우 절실하게 느꼈고, 돌과 접촉함으로써 도움을 얻었다.

 

325 요가는 내가 안정되어 무의식과 더불어 다시 작업을 시도할 수 있을 때까지만 했다. 나 자신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자마자 나는 감정제어를 풀고 환상의 이미지와 내부의 소리가 새롭게 말하도록 했다. 인도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다양한 정신 내용과 이미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요가를 사용하고 있다.

 

 

326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만일 내가 감정에 나 자신을 내맡겼더라면 무의식의 내용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어쩔 수 없이 신경증에 걸렸을 것이고, 결국 무의식의 내용이 나를 파괴했을 것이다.

 

327 나는 그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자기들 것으로 삼았을 위험성이 있었다.

 

327~328 내가 이러한 시도를 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동기는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을 나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는 확신이었다. 돕는 자가 환자 옆에 있지 않느냐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필레몬과의 대화

 

332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도 그와 같이 하려고 했다.

 

332 나를 수행하여 그 암살을 주도한 갈색 피부의 원시인은 원시적 '그림자(그늘)' 화신이었다. 비는 의식과 무의식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가리켰다.

 

334 살로메는 하나의 아니마 형상이다. 그녀는 사물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님이다. 엘리야는 지혜로운 노인 예언자의 모습으로 인식의 요소를 나타내지만, 살로메는 애욕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두 형상은 로고스와 에로스의 화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341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옛 그리스 격언을 따른 것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347 내가 체험한 모든 것은 나의 실제적인 삶고 연결됨을 나는 항상 알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폭넓게 채우고자 노력했다.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였다.

 

 

■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361~362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 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세부적인 것은 단지 보충하거나 명료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기간에 무의식에서 솟아나봐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작업을 위한 원재료였다.

 

371 내가 연금술적 사고과정의 미궁에서 실을 찾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내 손에 실을 쥐어주는 아리아드네(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테세우스를 미궁에서 구하기 위해 실을 사용한 여인-옮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382 목수의 아들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고 세상의 구주가 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일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그 시대의 기대를 그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격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인간 예수 이외의 그 누구도 그와 같은 메시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387 <갈라디아서>2 20절 말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구절의 깊은 뜻이 그로서는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종교와 관련된 문제라면 어떤 것도 생각해보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믿음만으로 만족하려 했으나 신앙은 그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다. 지성의 희생은 흔히 이런 식으로 보답을 받았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태복음>19:11~12).' 맹목적인 수용은 결코 해답을 주지 못한다.

 

398 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찍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404 처음부터 탑은 나에게 성숙의 장소였다. , 그 안에서 내가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로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자궁, 모성적 이미지 장소였다. 탑은 내가 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405 볼링겐에서는 고요함이 나를 에워싸고 사람은 '겸허하기 그지없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산다.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생각들, 그에 따라 먼 미래를 내다보는 생각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여기서는 창조의 고통이 완화되며 창조성과 유희성이 거의 하나로 어울린다.

 

406  여기 돌이 있네. 보잘것없는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407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407~408 호수로 향한 세 번째 면에서는 말하자면 돌이 스스로 라틴어로 말하도록 했다. 이 말들은 모두 연금술에서 따온 인용구들이다. 다음이 그 번역문이다. 나는 고아 혼자다. 그런데도 어디서나 발견된다. 나는 하나의 존재, 그러나 나 자신과 대립하는 존재다. 나는 젊은이인 동시에 노인이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물고기처럼 깊은 곳에서 끄집어올려야만 하므로, 아니면 하얀 돌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숲과 산에서 나는 두루 쏘다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죽지만 시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카르마

 

420 어리석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철학자 파우스트는 자신의 어두운 측면, 자신의 음흉한 그림자 메피스토텔레스와 맞닥뜨렸다. 메피스토텔레스는 그의 부정적인 본성에도 불구하고, 자살 직전까지 간 의기소침한 학자와는 대조적으로 참된 생명의 혼을 나타내고 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대극이 여기에 극화되어 있었다.

 

  괴테는 나 자신의 갈등과 해결의 공식과 도식을 어느 정도 그려낸 셈이다. 둘로 나뉘어 있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가 합해져 나 자신 속으로 들어와 하나의 사람이 되었고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충격을 받고 이것이 나의 운명임을 인식했으므로 드라마의 모든 극적인 전환이 나 자신과 관련이 있었다. 이 장면에서는 내가 정열적으로 몰두하고 저 장면에서는 대결해야만 했다.

 

421 옛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421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421 사람들은 모두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찾던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우리도 그만큼 더욱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힘을 다하여 개인의 근원과의 단절이 심화되도록 부추긴다. 그러면 각 개인은 집단의 한부분으로 단지 '중력의 혼'(니체가 말한 집단 정신-옮긴이)을 따라가게 된다.

 

422 앞을 향한 개혁, 즉 새로운 방법 또는 '묘안'을 통한 개혁은 지금 당장은 확실하겠지만 길게 볼 때는 의심스러우며 어떤 경우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즐거움,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대부분 실재의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스승을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 여행

 

북아프라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433 드디어 떠오르는 태양의 동살이 비치고, 그때 무에진(회교 기도사)의 아침기도시간 알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는데 그 소리가 내 마음을 깊이 흔들어놓았다.

 

436 사실은 천사가 내 속에 살고 있었다. 천사는 오직 '천사의' 진실만을 이해할 뿐 인간의 진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천사가 나의 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 내가 그를 주관하게 된다.

 

437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와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즉 페르소나 (자아가 외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세계가 바라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옮긴이)를 위하여 인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449 산에서 흘러내리는 강을 바라보니 이런 견해가 생겨나게 된 외적 이미지가 어떠한 것인가 알 것 같았다. 분명 여기서는 모든 생명이 산에서 나왔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상으로 명백한 것은 없다. 나는 그의 물음에서 ''이라는 말과 함께 고양되는 감정을 느꼈고, 그 산 위에서 거행되는 은밀한 의식에 관한 소문을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누구든지 당신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오."

 

450~451 그 순간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확신감과 '위엄'이 어디서 나오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보존자인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고 지도록 돕고 잇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순전히 질투심으로 인디언의 순진함을 슬쩍 비웃고 우리가 그들보다 영리하다고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451 우리가 온갖 유럽의 합리주의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우리 자신을 한쪽은 넓은 대륙의 초원으로 다른 한쪽은 잔잔한 바다로 기울어지는 저 고적한 고원의 맑은 공기 속으로 옮겨 놓을때,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세계의식성을 버리고 그 대신 그 너머에 놓여있는 세계 무의식성과 더불어 끝이 없는 듯이 보이는 지평(시야)을 확보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견해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케냐와 우간다 아프라카의 고독을 겪다.

 

456~457 그 짐승들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며 풀을 뜯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맹금의 침울한 소리 외에는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까마득한 태초의 정적이요, 언제나 비존재의 상태로 있어온 듯한 세계였다. 나는 동반자가 더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혼자라는 느낌을 가져보았다. 그때의 나는, '이것이 그 세계다!'라고 인식하고 자신의 지식으로 그 세계를 방금 이 순간 실제로 만들어낸 최초의 사람이었다.

 

466 초콜릿빛 갈색 피부의 그녀들은 날씬한 몸매에 걸어가는 모습도 우아하고 느긋하여 아주 매력적이었다.

 

470 나는 아직도 원시 그대로인 땅에서 '신의 평화'를 만끽했다. 나는 헤로도토스가 말한 '인간과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일찍이 그와 같이 관찰한 적이 없었다. 온갖 마귀의 어머니인 유럽과 나는 수천 킬로미터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귀들이 이곳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전보도, 전화도, 편지도 방문도 없었다! 그것이 '부기슈 심리학 탐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였다. 나의 해방된 정신력은 큰 기쁨을 안고 태고의 광대한 곳으로 역류하고 있었다.

 

474 그러나 우리도 또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밝힌다든지 부활절 달걀을 숨긴다든지 할 때처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의식을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477 그래도 가장 의미있는 것은 적도의 어둠속에서 돌발적으로 첫 햇살이 섬광처럼 분출하는 순간이다. 그 생명력 넘치는 빛 속에서 밤은 사라지고 만다.

  이 평원에서 맞이하는 일출 직후에 나는 늘 야외용 접의자를 우산아카시아나무 밑에 갖다놓고 그 위에 앉아 있곤 했다.

 

478 그 무렵 나는 마음속에 태초로부터 빛에 대한 동경이 깃들어있다는 것과 태초의 어둠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절실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한 밤이 오면, 모든 것은 빛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그리움과 깊은 우수의 음조를 띠게 된다. 이것은 원시인의 눈빛에 들어 잇고 또한 짐승의 눈에서도 볼 수 있다. 짐승의 눈에는 슬픔이 베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짐승의 혼인지 혹은 저 태초의 존재가 표현하는 간절한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

 

478~479 이것이 아프리카의 분위기이며 그곳의 고독에 대한 체험이다. 그것은 태초의 어둠이며 모성적인 비밀이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태양의 탄생은 흑인들을 압도하는 경험이 된다. 빛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신이다. 그 순간이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순간의 원초적 체험이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490 인도의 정신성이 선과 악을 똑같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것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기독교인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에 빠진다. 이에 반하여 인도인은 선과 악의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거나, 명상이나 요가로써 이러한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490 인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완전성이 아니라 니르드반드바 상태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며 거기에 걸맞게 또한 명상을 통해서 형상이 없는 공()의 상태에서 이르려고 한다. 이에 반해 나는 자연과 정신의 이미지에 대한 생생한 관찰을 고수하고 싶다. 나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지도 않으며 나로부터도 자연으로부터도 그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내게는 형언할 수 없는 경이이기 때문이다. 자연, 영혼, 그리고 인생은 나에게 활짝 피어난 신성처럼 여겨진다.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에게 존재의 최고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491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491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495~496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뜻에서 그러하다.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테면 이성적 통찰로써,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496 둘은 모두 옳지만 인도적 의미에서는 부처가 보다 완전한 인간이다. 부처는 역사적 인격체이므로 사람들에게 좀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므로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사실 그리스도 자신도 스스로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내부로부터 자신도 스스로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내부로부터 자신에게 부과된 일인 것처럼 자신이 희생당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의 희생은 하나의 숙명으로 그에게 닥쳤다. 부처는 통찰에 따라 행동했다. 부처는 자신의 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죽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한 기간이 무척 짧은 것으로 여겨진다.

 

503 인도는 어떤 자취도 없이 나를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영원에서 다른 영원으로 옮겨가는 자취들을 나에게 남겨놓았다.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 환상들

 

생에 한계점에 이르러

 

513 나를 돌본 간호사가 후에 "당신은 밝은 빛에 감싸여 있는 듯했어요!"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녀가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자주 보게 되는 현상인 셈이었다. 나는 생의 한계점에 이르렀고, 내가 꿈속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지극히 인상깊은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융합의 신비

 

527 그런데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527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는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536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동시성현상과 예언적인 꿈, 예감들을 생각해보라!

 

539 신화는 과학의 맨 처음 형태다. 내가 사후의 일들에 관해 말할 때 나는 내적 감동으로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 관한 꿈과 신화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더이상 진전할 수 없을 것이다.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542 그 신화는 그의 눈앞에 다른 이미지를 가져다줄 수 있다. 그것은 유익을 주며 정신을 풍성하게 하는 사후세계 삶의 이미지들이다. 그가 이 미지들을 믿거나 약간만 신뢰하더라도 그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두 사람 다 불확실성 속에 있다. 그런데 전자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고 있고, 후자는 본능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이며 후자에게 이로운 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546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죽은 자에 비해 유리하다. , 명쾌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551 오직 이곳, 대극이 서로 부딪치는 지상의 삶에서만 일반적인 의식은 고양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형이상학적 과제로 여겨지는데 '신화화'가 없이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채워질 수 있을 뿐이다.

 

551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 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때에만, 앞에서 수를 예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555 그 대극은 죽음이 한 번은 자아의 관점에서, 또 한 번은 영혼의 면에서 표현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겠다. 전자의 경우 그것은 재앙으로, 악하고 무자비한 힘이 한 인간을 때려죽인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557 26년의 공백 끝에 아버지가 내 꿈에 나타나 심리학자에게 결혼생활의 갈등에 관한 최근의 견해와 인식을 물어왔으니 말이다. 그러서는 그 문제를 다시 받아들여야 할 시기가 다가왔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무시간적인 상태에서 아마도 더 좋은 통찰을 얻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변화하는 시간조건에서 몇 가지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만 했던 것이다.

 

558 시공간의 상대성 때문에 무의식은 지각만을 처리하는 의식에 비해 더 나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후의 생에 대한 우리의 신화와 관련하여 꿈이 주는 약간의 암시나 이와 비슷한 무의식의 자발적인 발현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있다.

 

단일성과 무한성

 

559 동양적 존재의 정신적 특성에 어울리게 출생과 죽음의 연속은 끝없는 현상이요, 목표도 없이 계속 굴러가는 영원한 운명의 수레바퀴로 여겨진다. 사람은 살고 인식학도 죽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오직 부처에 이르러 목표에 관한 관념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를테면 지상적 존재의 극복인 셈이다.

 

560 서양인으로서는 정적이기만 한 세계의 무의미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의미를 전제해야 한다. 동양인은 이런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이 그 전제를 구현한다.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

 

561 내가 먼 옛날에 살았고 거기서 지금도 여전히 대답할 수 없는 어떤 물음에 부닥쳤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잇는 일이다. 내게 부과된 과제를 풀지 못했으므로 다시 태어나야만 했다고 말이다. 추측하기로는, 내가 죽으면 나의 한 일들이 따라올 것이다. 나는 내가 한 일을 함께 가지고 갈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중요한 문제는 내가 생의 마지막에 빈손으로 서 있지 않은 것이다.

 

562 나의 존재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565 내적 이미지는 개인적인 회고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외적 사건의 기억에만 얽매여 있는 늙인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속에 갇혀 잇는 반면, 자신을 성찰하고 이미지로 바꾸는 회고는 '전진을 위한 후진'을 의미하게 된다. 내 인생을 통하여 이 세계 안으로 이끌었고 다시 이 세계에서 밖으로 인도하는 그 줄(노선)을 보려고 시도한다.

 

572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잇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572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잇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584 기독교를 믿는 민족들에게서 기독교는 잠든 상태에 있으며,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자신의 신화를 계속 키워나가는 일을 소홀히 했다. 신화적 표상의 은밀한 성장운동을 표현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아무도 그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조아키노다 피오레, 마이스터 에카르트, 야코프 뵈메, 그외 많은 사람이 대중에게 음험한 인물로 남았다. 섬광과도 같은 유일한 빛은 피우스 12세와 그의 신조였다.

 

584 우리의 신화는 벙어리가 되었고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잘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신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런 방면의 온갖 시도를 억압한 우리 자신에게 있다.

 

584 본래의 신화 표현양식에는 그 자체에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단서들이 충분히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은 말한 데서도 그것을 찾아볼 수 잇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순하라(개역성경에는 '순결하라'고 되어 있음-옮긴이)" 사람들이 뱀의 지혜를 어디에다 사용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비둘기의 순진함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너희들이 어린이처럼 되지 안하면...."이라고 했을 때 어린이가 실제로 어떠한가 생각해보는 삶이 누구인가? 승리자로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위해 필요한 나귀를 빼앗아오다시피 한 행위를 주님은 어떤 도덕적인 근거로 정당화했는가? 그리고 그후에 아이처럼 기분이 언짢아져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자는 누구인가? 불공평한 청지기 비유에서 어떤 도덕이 성립하는가?

 

588 심리학적 관점에 한해서 보면, 신의 표상은 심적 토대에서 현시된 것이며 이제 심한  분열의 형태로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열이 세계정치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벌써부터 이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 눈에 띌 정도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정신 내부의 대극의 합을 묘사하고 있다.

 

589 해결은 사람들이 그렇게 일컫는 바와 같이 '은혜'로 여겨진다. 해결은 대극의 대립과 쟁투에서 나오므로 그것은 대개 의식에 있는 것과 무의식에 있는 것이 섞인, 깊이를 알 수 없는 혼합물, 그러니까 일종의 상징이다. 쪼개진 동전의 반쪽 조각이 꼭 들어맞는 것과도 같다.(고대 풍습에 따르면, 친구와 헤어질 때 '후대의 표시'로 동전을 쪼개어 각각 그 반쪽을 가졌는데, 원래는 그 쪼개진 동전을 가리켜 '상징'이라고 했다고 함-옮긴이)

592 다시 말해 신은 인간의 현실로 들어서며 '인간'의 형상 속에서 인간과 함께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육화를 통해 인간, 즉 그의 자아는 내부적으로 ''으로 대체되며 신은 외부적으로 인간이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고 상응한다.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확인으로 신화적 용어의 결점이 드러난다. 신에 대한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관념은, 전지전능하고 한없이 자비로운 아버지요 세상의 창조주다.

 

594 인간은 성찰하는 정신 덕분에 동물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며, 그는 인간 본성이 특히 의식의 발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그의 정신을 통하여 증명한다. 의식의 발달을 통하여 그는 자연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세계의 현존을 인식하며 이를테면 창조주를 입증한다. 이로써 세계는 현상이 된다. 의식적인 성찰 없이는 그렇게 될 수 없는 법이다.

 

596 우리가 우주에서의 인간실존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하나의 관명을 가진다면, 다시 말해 마음의 통합성, 즉 의식과 무의식의 협력이 이루어지게 하는 근원인 그러한 관념을 가진다면, 신화적 진술에 대한 욕구는 충족되는 셈이다. 무의미는 생의 충만을 방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질병을 뜻한다. 의미는 많은 것을, 거의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도록 해준다.

 

596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잇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종의 '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잇는 것이다. '신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신과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방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말씀'은 우리에게 자연발생적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강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모두 인간적이며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다.

 

598 신의 경우 대극의 복합으로서 의미심장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진실과 허구, 선과 악이 다 될 수 있다.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600 그럴듯한 비밀의 필요성은 원시단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의 비밀은 결속을 위한 시멘트 역할을 해준다.

 

607 자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호조치의 도움으로 수천 년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아라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모든 대극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현상은 뜨거운 것과 찬 것, 높은 것과 깊은 것의 충돌 등에서 시작되는 에너지론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의식된 정신생활의 기초가 되는 에너지는 이런 현상들보다 먼저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의식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의식화되기 시작하면서 우선 마나, 여러 신, 데몬 등과 같은 형상으로 투사되는 듯이 보인다. 그것들의 누멘이 인생을 결정하는 힘의 원천으로 여겨지는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이러한 형태로 관조하는 한 실제로 그러하다.

611 내가 정신과 의사('마음의 의사'라는 의미임)로서 자연히 이와 같은 견해들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하면 나의 환자들로 하여금 건강한 바탕을 다시금 찾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최우선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많은 지식이 요구된다!

 

611 우리는 한 분야에서 인식한 것을 다른 분야로 옮겨와서 실제로 응용해볼 때 소위 발견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X광선이 물리학적 발견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의학에서 응용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숨겨진 채 남아 잇는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612 예컨대 내가 역사적이거나 신학적인 통찰을 정신요번분야에 응용한다면, 물론 그것은 다른 목적을 가진 전문분야에 한정된 채 남아 있을 때하고는 다른 조명을 받으며 드러날 것이고 다른 결론으로 이끌어질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며

 

619 여기서 문제는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 가장 먼 것과 가장 가까운 것, 가장 높은 것과 가장 깊은 것인데,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결코 언급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언어도 이 모순을 감당 할 수 없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부분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은 항상 너무 과하거나 너무 부족하다. 왜냐하면 오직 전체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619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린도전서>13:7).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우리는 소위 가장 깊은 뜻에서 우주 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희생제물이거나 수단과 도구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따옴표 속에 넣은 것은 그 말이 단지 열망, 선호, 총애, 소원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개체보다 우월한 전체, 하나인 것, 나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부분으로서의 인간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전체에 압도당하고 있다. 그는 찬성하거나 분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그 속에 갇혀 있고 에워싸여 있다. 언제나 그는 거기에 좌우되며 그것에 기인하고 있다.

 

620 사랑은 그의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천사의 혀로 말할지라도" 또는 과학적인 정밀성으로 세포의 생명을 가장 깊은 바탕까지 주의깊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랑에다 온갖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붙일 수 있겠지만 그는 단지 끝없는 자기기만에 빠질 뿐이다. 그가 한줌의 지혜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며 미지를 미지라고, 즉 신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열등함, 불완정성, 그리고 의존성을 시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실과 오류 사이에서 선택의 자유를 증언하는 것이다.

 

■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623 사람들이 나를 현명하다거나 '지자(知者)'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 강물이 아니다.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그들은 대개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623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이상 없기 때문이다." 강물을 길으려면 허리를 얼마만큼은 굽혀야 하는 법이다.

 

624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나의 차이점은, 내게는 '칸막이벽'들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고유한 특성이다. 다른사람들은 그 벽들이 너무 두꺼워서 그 뒤를 보지 못하므로 거기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느 정도 그 배후의 과정을 인지하는 편이어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 또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결론도 끌어 낼 수 없거나 자신의 결론을 믿을 수도 없다. 나로 하여금 삶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무의식 그 자체일 것이다. 어쩌면 어릴 적 꿈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아마도 무의식 그 자체일 것이다. 어쩌면 어릴 적 꿈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내 삶의 방향을 처음부터 결정해버렸다.

 

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626 사람들이 내적인 세계와 접촉하고 있는 한 나는 많은 사람과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나를 그들과 연결해주는 것이 이제는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록 사람들이 나에게 말할 것이 더이상 없다 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거기 있다는 사실을 배우느라 애를 먹었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 생동하는 인간성을 느끼도록 일깨워주었으나 그것은 그들이 심리학의 마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나타났을 때뿐이었다. 다음 순간, 탐조등이 그 빛을 다른 곳으로 향하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멍석한데 나만이 흐리멍텅하구나

 

629 나는 나 자신에 관해 놀라고 실망하고 기뻐한다. 나는 슬퍼하고 낙심하고 열광한다. 또한 나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합을 계산할 수는 없다. 나는 어떤 결정적인 가치나 무가치를 확증할 입장이 못 된다. 나는 나 자신과 내 인생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온전히 확신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확신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내가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디에 실려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토대 위에 존재하고 있다. 온갖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존의 견고함과 내 존재양식의 연속성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는 거칠고 잔혹하며 동시에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무의미와 의미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고 믿느냐 하는 것은 기질의 문제다. 만약 무의성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면, 더 높은 정신 발달 과정에서는 인생의 의미충족성이 점점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가 그렇듯이 아마도 양쪽이 다 진실일 것이다. 인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또는 인생은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가지고 있지 않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우세하여 전투에서 이겼으면 하고 마음 졸이며 희망하고 있다.

 

630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그는 가치와 무가치를 보았고 경험했으며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의미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인생을 충분히 보아온 노인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지능의 어떤 단계에서도 이 유형의 등장하며, 그것이 늙은 농부든 노자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든 동일한 유형이다.

  노년이란 그런 것이면서 또한 하나의 제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주 많다. 식물, 동물, 구름, 낮과 밤, 그리고 인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 등이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 불확실해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화성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 그렇다. 마치 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세계와 갈라놓았던 저 생소함이 나의 내면세계로 옮겨와서 나 자신에 대한 예기치 않은 낯설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 내가 저자라면

 

 스승님의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을 읽고 홈페이지를 찾았고, 그 안에서 연구원들이 보는 책 리스트를 보았다. 그 때 눈에 들어온 책이 '카를 융의 기억, , 사상'이었다. 아마도 작년 11월 한달 동안 이 책을 끼고 살았다. 아마도 나를 들여다본 최초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연구원에 들어오기 위해 '나는 누구인가'을 써내려 갈 때에도, 레이스를 달릴 때에도 카를 융의 책은 나와 함께 있었다. 그 어떤 자서전 보다 내면 깊숙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동시성현상과 예언적인 꿈, 예감 들을 생각해보라!' - 카를융의 '기억, , 사상' 536p

 

 내면의 무의식을 따라가는 것은 글을 쓰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 말하고 싶은 '똥쟁이'에 대한 이야기를 내면에서 끄집어 내 주었다. 이원화된 삶, 대극이 존재하는 세상을 어떻게 하면 연결시킬 수 있는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누군가 읽으면서 내 삶과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으면 좋은 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저자의 유아시절, 학창시절, 그리고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삶까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풍부하다. 그래서인지 내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삶을 돌이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오래된 미래를 나의 미래로 투영시켜 보았다.

 

 융은 평소 자신과 자기 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했다. 오랫동안 주저한 후에야 자서전을 내기로 했는데, 집필이 시작되고 나서, 융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점점 자신의 유년시절부터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들이 떠오르고, 그 일을 하루라도 중단하면 그와 동시에 불쾌한 신체적 증상이 따라왔다고 한다. 다시, 그 작업을 하면 금방 그 증상은 사라졌다고 한다. 이처럼 자서전을 쓰면서도 그는 무의식의 요구에 전심을 다하여,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깊은 사상들을 담아냈다. 마지막 출간하는 시점에서 일방대중의 반응을 두려워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를테면 자기로부터 점점 멀어져 결국에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애와 작업의 의미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고 바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생애의 가치가 어떤가 스스로 질문해본다면, 몇 세기의 사상을 놓고 나 자신을 평가할 수 것입니다. 그때 나는 '그래, 내 생애도 뭔가 의미가 있구나'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평가한다면 내 생애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사례를 통한 용어에 대한 설명, 내면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등, 각 단락마다 정리되어 있는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특히 '프로이트와의 만남'에서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부분은 전문 용어가 나오고,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미 융은 자신에 자서전에 요약하고 상세히 표현하는 것을 거절했다. 전적으로 자기 소관 밖의 일이고, 이미 먹은 것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식욕을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의식적으로 자서전을 썼다기 보다, 내면의 무의식에 충실하며 섬광 같은 영감을 받아 써내려 갔다. 그래서 수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자아를 찾아가려는 독자들에게 훌륭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두 번째 이 책을 읽으면서 삶이 더욱 풍성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 그대로 나의 이야기에도 전해졌으면 한다. 카를 융이 어릴 적 놀이를 하면서 운명의 전환점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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