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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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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6일 05시 56분 등록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팔팔이 중에서도 기독교인이 참 많고 그들의 모범적인 삶과 확고한 신앙은 저를 감동시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제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전혀 인정할 수 없는 신념 체계를 가진 자들에게 관용을 보이는 것, 그리고 그들이 다수인 세상에서 무신론자라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잘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는 일입니다.

 

이 책을 읽기를 포기하는 이유가, 마치 이 책이 저의 무신론적 입장을 흔들까봐 "두려워서"라거나 이론적 반박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저의 무의식이 읽기를 "회피"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저는 더 이상 거론할 가치가 없는 "억지"들을 읽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읽기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감기가 너무 심합니다.ㅜㅜㅜㅜ

 

 

조금 단 코멘트들에서나마 연구원들과 지식 공유가 되기를 바라며. 과제를 다 마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1부  신이란 무엇인가?

 

27 결론부터 말할가요?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신은 그렇지요. 구약성서에 나오는 처지창조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고 그들에게 신은 영입니다.

 

37 특히 스파르타의 청년들은 피타고라스의 계율에 따라서 몸에 군살이 붙어서는 안 되었지요. 그들은 열흘에 한 번씩 행정감독관 앞에서 의무적으로 나체를 검사받았는데, 군살이 있는 사람은 금식을 해야 했습니다. 또한 학교이자 체육관이라 할 수 있는 아테네의 김나지움에서는 모두들 나체로 체조를 해야 했어요. 소녀들도 수치심과 연약함을 없애기 위해 집 밖을 나체로 활보하도록 허락했으며, 축제 기간에는 무대에 올라 소년들 앞에서 나체로 춤추고 노래하게 했습니다.

 

47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은 이같이 다원적이고 심층적인 이유에서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규칙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모방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탐구했고,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그리스로 보내 고대 미술품들을 모사해 오게 했지요. 그 결과 성서 이야기를 다룬 이들의 작품에도 그리스 문화가 자연스레 혼합되었습니다.

 

48 그리스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와서야 신인동형설과 신인동감설에서 벗어났습니다.

 

50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을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고 규벙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축약해서 보통 부동의 운동자또는 원동자라고 하지요.

 

56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을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분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57 신은 왜 자신의 선포를 스스로 어기고 아담과 하와를 즉각 죽이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나중에 다른 기회를 통해 죄에 대해 살펴볼 때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요, 아무튼 신이 곧 존재라는 가르침에서 신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상실, 곧 사망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일 뿐이지요. 신은 영이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은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킨 겁니다. 이처럼 성서는 낙원추방의 서사에서부터 존재론적 합축성을 이미 내포한 것이지요.

 

2부  신은 존재다

 

68 “있는 자(Qui est)” 라는 이 명칭은 신의 가장 고유한 이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è 프랑스어인데,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사람 아닌가? 아니면 라틴어와 구조가 동일?

 

75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해 오던 질문, 신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로 신이 어떤 식으로 있지 않은지, 둘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지, 셋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이름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원칙에 따라 신에 대해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 나갔는데요.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은 신은 있는 자(Qui est)” 또는 존재자체(ipsum esse)”라는 것이지요. 그는 8세기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가 한 다음 말을 인용해서 자신의 뜻을 더욱 분명히 했습니다.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 이 명칭,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è 왜냐하면, 신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가운데, 어쨌듯 지금 세계는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 존재를 만든 신이 분명 존재하긴 할 것이므로 신은 존재들자체로 증명되는 것이다.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è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들이지.

 

1장  존재란 무엇인가

 

81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상 일종의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82 구약성서에서 신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은 (El)’ 입니다. 히브리어 엘은 신약에서는 그리스어 테오스에 해당하는 말이지요. 우리말 가톨릭 성서에는 하느님으로, 프로테스탄트 성서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83 신이 자신의 이름을 감춘 이유는 사실 신에게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지요.

 

84 내가 그분을 파악하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당신도 이미 알다시피,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그저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있지요. 예컨대 사과는 사과로 있고 책상은 책상으로 있습니다. 이때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본질과 존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세상 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규정되고 한정된 존재물에만 붙일 수 있지요. 우리가 어떤 것을 사과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사과이게끔 하는 사과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고 한정되었기에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사과라고 부른다면 잘못이지요. 많은 사람이 어려워하는 존재론도 사실은 이처럼 아주 단순한 원리에서 시작합니다.

 

85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pan)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85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하지요.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97 어쩌면 이런 현상이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로서는 영원히 뛰어넘기 어려운 벽인지도 몰라요.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이며, ‘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 까닭인 것입니다.

è 대전제가 틀렸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는 돈오 없이는 신에 관한 미지의 세계는 정복되지 않겠지.

è 이에 관한 우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고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환상에 대한 우화.

 

104 당신도 알다시피, 기원전 5세기쯤 그리스인들은 세상 모든 존재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물음으로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105 파르메니데스는 이 말을 오직 존재가 있고 비존재는 없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을 그가전하려뎐 의미 그대로 풀어 쓰면 오직 벼하지 않는 것만 있는 것이고 변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가 되지요. 이 같은 사유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거쳐, 후일 기독교 안으로 들어가 신은 불변한다라는 선포를 낳았습니다.

è 변하는 것은 지금은 존재하는 듯 보여도곧 다시 없어질 수도 있으므로” (존재 유무의 변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변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è 그럴싸해 보이지만 존재의 외연을 확장하면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 순간 존재한 것이기는 하다고 볼 수도 있다. 변화하는 것도 주체를 바꿔가면서 영향력을 후세에 남긴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고. 지나친 단순화에 따른 사변적 논리 전개가 모순을 낳는다.

 

106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은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그는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인식과 존재는 동일하다라고도 주장했지요.

이처럼 존재비존재그리고 진리거짓을 이분법적으로 날카롭게 구분한 일, 이것이 바로 파르메니데스가 서양철학사에 남긴 공적입니다.

è 여기서 모순이 드러나는 것이다.

무와 유. 이분법에서 신은 유의 한 면만을 가지고 있다. , 신은 전체가 아니다. 반쪽짜리 세상일 뿐이다. 신이 정말로 존재 그 자체라면, “비존재존재까지 품을 수 있어야 한다.

è비존재존재. 라는 개념이 역설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음수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음수 역시 수이다.

è 그렇다면, 내가 무시하고 있는 이빨요정이나 드래곤도 비존재의 세상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지. 굳이 신을 존재한다고 우긴다면(그것이 정신이라는 상징성의 이름이든, 산타클로스와 같은 효용론의 산물이든) 신은 그 자체의 원리에 의해 비존재그 자체가 될 것이다. 신은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인 것이다. 신은 비존재로서 존재한다.

 

113 우리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더욱 중요한 것은 플라톤의 분여이론에 의해서 존재와 존재물간의 차이와 상호관계가 분명해졌다는 점이에요. 존재(이데아)는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존재물(사물)들에게 본질존재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입니다. 그리고 존재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받은 존재물들은 단일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존재만이 진리의 근거입니다만, 존재물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존재를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 더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불완전하게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나 언급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고 단지 불완전한 지식, 곧 플라톤이 말하는 사견(doxa)’이지요.

è 신은 존재, 즉 원형이다. 그런데 원형이 여러가지라는 것은 모순이다. 가령,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도 있고, “책상이라는 이데아도 있으며, “이라는 이데아도 있다. 이들 이데아들은 신 아래의 중간 신인가? 이들 존재는 본질이 아닌가? 파르메니데스의 이론과 플라톤의 이론이 연결되는 것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리 신통해 보이진 않는다.

 

114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우주

è 곧 신은 존재다라는 대전제로부터 연역법으로 중간전제를 하나씩 이끌어내면서 신의 성격을 확립시켜 가고 있다. 그런데 이 논리들이 정말 참인가?

è 정작 신이 왜 존재인가 에 대한 설명은 부실한 것 같다. 그저 신은 존재다라는 말의 회귀논리만 되풀이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신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신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이다.”

è 존재와 본질은 실존주의에서 다루는 개념인 줄 알았는데 이 둘의 대립은 실존주의의 발명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신과 역사를 함께 할 정도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줄 몰랐다.

 

125 따라서 교황과 국왕의 권위가 신성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이, 적어도 프랑스대혁명(1789)까지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진리였습니다.

è 내 그럴 줄 알았다.

 

127 근대적 직업관의 근간이 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소명의식역시 이 같은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소명의식이란 모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각각 특정한 부름을 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이 무엇이든 설령 아무리 비천한 것일지라도 거기에 충실한 것이 신에 egks 인간의 의무라는 인식이지요.

 

132 플로티노스는 세계가 일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어요. 왜일까요? 영원불변하는 일자가 어떻게 다른 어떤 것을 생성할 수 있을가 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생성하지 않던 일자가 뭔가를 갑자기 생성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화한다는 뜻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이런 의문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에 대해 플로티노스는 유출(deriva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답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유출은 마치 빛이 발광체의 주위로 번지듯이, 뜨거운 물체가 주변으로 열을 퍼뜨리듯이, 향기가 그 주변으로 퍼져 나가듯이 매우 신비롭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140 아마 당신도 눈치 챘을 겁니다. 이 글에서 성부를 일자로, 성자를 정신으로, 성령을 영혼으로만 바꾸면 이 시구들은 곧 기독교의 창조론을 노래하는 시가 되고요. 또한 물질이 영혼에 의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설명하는 플로티노스의 이론을 읊은 것이 되기도 하지요. 이처럼 두 이론은 서로 밀착되어 있습니다.

 

146 이처럼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는 영원불변한 것인 동시에 생성/작용하는 실재입니다. 이 실재의 생성과 작용이라는 활동을 통해 모든 존재물은 그의 피조물로 창조되고, 또한 그의 백성으로서 행복과 구원으로 인도되지요. 그의 백성이 신에게 기원하고 순종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겁니다.

è 왜 순종해야 하나? 창조 행위를 하여 이 세상에서 태어난 것과 태어나지 않은 것 간의 가치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왜 나를 창조한 자에게 순종해야 하지?

 

148 , 이런 관점에서 보니 이전과 비교해 뭔가가 달라졌지요? 놀랍게도 불변과 변화’, ‘존재와 생성이 더는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개념쌍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도 이 말은 우리의 논점에 맞춰서 다시 생각해 보면 여전히 긱이합니다. 존재는 생성/작용할 대에만 존재일 수 있고, 불변하는 것은 변화할 때에만 불변할 수 있다니!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듯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한 걸까요?

 

150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이 공간적으로 또는 탈시간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에 비해 히브리인들은 시간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특히 존재에 대한 사유가 그렇지요. …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시간화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파악했고, 히브리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파악했지요.

è 실존적이라는 용어가 여기에서 과연 필요충분하게 합당한 표현인가? 실존이라는 개념에는 시간이 포함되나? 그렇다면,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시간의 유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시간이 있는 현실을 살아가는 개념이 실존이고, 영원하기 때문에 초월적인 것이 이상?

 

155 이후 중세신학자들은 대립하는 두 극단도 신에서는 하나로 만난다는 관념을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의 대립의 일치와 같은 용어를 통해 자연스레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라고 해서 신에게 적용되는 부동의 운동이라든지, ‘하나인 모두같은 개념들에 담긴 이중적 논법이나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들은 오히려 그러한 개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또는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종교적 미덕이라고 여김으로써, 신에 관한 개념이 인간정신으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더욱 탁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56 내 생각에는 괴테가 나긴 아래의 글에도 영원불변하는 그리스적 존재 개념과 부단히 생성/작용하는 히브리적 존재 개념이 대립의 일치를 이룬 구절이 숨어 있어요. “영원한 것은 계속해서 모든 것 안에서 생기하네같은 구절이 그것인데요. 이는 영원한 것은 불변하고 불변하는 것은 생기할 수 없기 대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존재도 무로 돌아갈 수는 없다네!

영원한 것은 계속해서 모든 것 안에서 생기하네.

존재함으로써 당신 자신을 행복하게 하시길!

존재는 영원하다네, 왜냐하면 그것은 법칙들이기에.

존재하는 소중함을 보존하시길,

그로부터 모든 것이 나오는 법이기에.

 

157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사과)을 그것(사과)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159 여기서 잠깐 앞에서 별다른 언급 없이 불쑥 사용한 존재의 장이라는 용어를 설명하고 넘어갈가 합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요.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장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우주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물이 여기서 생겨나고, 여기서 존재하며, 여기서 소멸하는 무한한 신적 근원을 뜻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한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라는 비유에 해당하는 셈이지요. 그런데 만일 당신이 현대물리학에 약간의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다면 곧바로 이러한 의미 있는 의문을 던질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말한 존재의 장이란 양자물리학자들이 퍼텐션이라고 부르는 소립자의 장을 말하는가? 현대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야말로 바로 그것에 의해 만물이 생성되고 존재하며 소멸하는 장이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현대의 양자물리학자들도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장과 유사한 이야기를 퍼텐셜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하지요. 예컨대 독일 뮌헨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 소장 한스 페터 뒤르는 고전물리학자들과 달리 세계가 원자와 같은 입자들이 모여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플로티노스의 일자처럼 아직 나위지 않은 온전한 무엇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분화해서 하위구조를 만들어 냄으로써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믿지요. 그리고 그 온전한 무엇의 바탕이 되는 소립자들은 물질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물질이라기보다는 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통상적 의미에서 보면 비물질적인 소립자의 장에 의해 우주가 탄생했고 지금도 유지되며, 매순간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162 하지만 그것은 언제든지 물질로 현실화될 가능성이나 경향성을 가졌으므로, 어쨌든 유물론적입니다.

è 저자가 객관성을 잃지 않아서 다행이다. 솔직히 조마조마했다. 억지논리를 주장할까봐. 물리학과 신학이 비슷한 점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과학적인 신의 증명이라고 볼 수 없다.

 

164 최고의 본질()이 어떤 시간과 장소에도 항상 존재하면서, 동시에 어떤 시간과 장소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 그것이 모든 시공 안에 존재하면서 어떤 시공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제기된 반론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어때요? 당신이 제기한 의문도 충분히 해결되었나요? 바로 이런 이유로 누군가가 퍼텐셜이 곧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스피노자와 아인슈타인이 믿는 신, 곧 우주와 신이 하나인 범신론에서의 신을 말하는 것일지언정,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 야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요.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같은 말을 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포괄한다라고 표현했는데, 내 생각에는 참 탁월한 묘사입니다.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이니까요. ‘관통하며 포괄한다는 말은 물 위에 떠 있는 어떤 사물(예를 들어 축구공)을 물이 포용하듯이 밖에서 포괄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물 위에 뜬 물방울들을 물이 포용하듯 안팎으로 침투해서 포괄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안셀무스는 유지하고, 뛰어넘고, 감싸안고, 관통한다고도 묘사했지요.

è 물분자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물과 물방울은 부분과 전체를 의미한다. 축구공과 물은 다른 물질이지만 축구공 속의 축구공이라고 생각해보자. 축구공 하나와 축구공 전체, 혹은 축구공이라는 관념.

è 이런 식으로 신을 어떻게든 정의해낸다고 하자. 그래서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하여 이 신을 숭배하고 신에게 자신의 소명을 묻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이 둘 사이의 커넥션은 어떻게 이를 것이지?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기만 하면 바로 무릎을 꿇을 기세다.

 

172 , 물론 당신은 여기서 이렇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존다! 지난 2000년을 두고 많은 뛰어난 학자가 그렇게 주장해 왔다고 하니,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이론들을 모두 인정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야훼, 곧 존재로서의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는 없지 않은가! 당신이 말하는 존재의 장이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조차 아니라면,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신은 신자들의 마음과 신학자들의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많은 사변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è 정확히 내가 궁금해하는 바를 잘 짚어주었군. 더욱 흥미를 유발시킨다.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181 안셀무스

1 ) 신은 정의 상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다.

2) 가장 완전하다는 것은 그 어떤 결핍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 만일 어떤 것이 안간의 정신에만 존재한다면, 이는 실제적 존재가 결핍된 것이다.

4)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

 

182 가우닐로 그가 내놓은 비판의 핵심은 우리의 정신에 존재하는 관념이 무엇이든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이는 700년쯤 후에 칸트가 데카르트를 반박하며 그대로 되뇐 내용이기도 한데요. 가우닐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설령 누군가가 모든 재물과 행복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지만 누구도 본 적이 없어서 사라진 섬이라고 불리는 가장 완전한 섬을 상상한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 섬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무슨 이야기냐고요? 좀 다르게 말해 볼까요? 만약 우리가 날개 달린 말인 페가수스나 아름다운 꼬리의 인어공주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185 가우닐로의 데카르트에 대한 반박

개념의 영역과 현존의 영역은 다르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존재의 현존이 개념상 필연적이라 해도 실제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것. 현존이란 사실의 문제이므로 경험으로 판단해야지, 사고로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190 토마스 아퀴나스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것” =

è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존재라고 불렀을 때부터 이런 논리를 예측할 수 있다.

 

191 칸트에 의하면, 인ㅇ간의 이성은 경험세계에만 적용할 수 있도록 한계지어졌어요. … 모든 무한소급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지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칸트가 제시한 원칙이지요. … 이를 칸트는 우주론적 증명에는 변증법적 월권의 그물망이 감추어져있다고 표현했습니다.

è 칸트, 정말 마음에 든다!

 

192 칸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존재의 사다리를 인간 이성의 한계 부분에서 무참히 잘라 끊어 버렸지요.

 

194 그런데요, 어쩔 수 없이 예외를 하나 두고자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번째 길이 그것이지요. 이유는 18세기에 이른바 페일리의 시계 유추라는 이름으로 한 차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이 해묵은 논증이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지적 설계 문제를 둘러싸고 기독교의 창조론을 공격하는 대니얼 데닛이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과 이에 맞선 알리스터 맥그래스나 필립 존스 같은 기독교 지식인들에 의해 또다시 논쟁에 휩싸였기 때문입니다.

 

198 칸트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은 내재적으로만 사용되는데, 최고 존재[]의 인식을 위해서는 이러한 원칙의 초월적 사용이 요구된다. 하지만 우리의 지성은 이러한 초월적 사용을 위한 아무런 장비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201 신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좋은 것만을 준다는 가르침은 신의 침묵에 부단히 절망하는 우리의 경험상 믿기 쉬운 말은 결코 아니지요. 그렇지 않나요? 솔직히 나는 그런데, 당신은 어떤가요? 아마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같은 의심은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단 하나의 예를 만날 때 순식간에 사라지지요. 보세요! 적절한 예 하나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교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수사학적 논증법으로서 예증법이 지닌 힘이자 페일리의 논증이 가진 설득력의 비결이지요.

 

그렇지만 수사학은 어디까지나 대중을 위한 설득의 기술일 뿐입니다! 페일리의 논증이 일반인들이 아니라 지식인들 심지어 상당수의 성직자들 에게까지 널리 퍼진 데는 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페일리의 시계 유추를 비판한 흄, 칸트, 밀 같은 철학자들은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뿐 페일리가 설명한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던 것이지요. … 이 때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것입니다.

 

206 과학자가 페일리의 이론에 대해서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보이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è 틀렸다. 저자는 신앙과 과학의 쌍비론을 고수하여 자신이 객관적인 양 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자의 오류 = 매우 신학의 협소한 부분과 과학의 대의적 부분을 비교하여, 과학이 마치 신학의 협소한 부분에 대한 반증인데 이 협소한 부분은 신학이 정식 채택하지는 않았으므로 허수아비 이론이라는 식으로 넘어가고 있다.

è 페일리의 지적 설계론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니라는 주장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è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신이 모든 것의 창조자다가 신앙의 핵심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진화론은 바로 그러한 신의 개입이 오류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신의 존재에 대한 정면반박이다. 결코 물리신학에 대한 반박이 아닌 것이다. 신앙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처럼 굴고 있다.

 

206 다윈의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신은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여지를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è 그러면 다윈이 왜 그토록 뭇매를 맞았는지 설명을 해보자.

 

215 칸트 한마디로 요약해,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모든 종류의 논증이 부질없다는 이야기지요.

 

217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라는 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습니다.

 

219 1076 <프로슬로기온>을 발표할 당시 안셀무스가 놓인 상황이 바로 1916년의 아인슈타인, 1930년의 디랙과 같았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이론적으로 증명되고 심리적으로 확신하였지만 경험적으로 검증할 길이 없는 아름다운 생각들을 각자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è 정말 어이가 없는 비교다. 하하하하. 기가 막히네.

è 안셀무스는 무슨 돈키호테인가?

è 어떻게 하면 검증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는 소위 <유물론의 세계>와 안셀무스의 신이 같은 선상에 놓였단 말인가? 입자가속기를 만들 돈이 없어서 힉스입자를 발견하지 못할 지언정, 신은 전 세계 기독교인의 재산을 다 털어도 증명할 방법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다 실패했다.

è 이러한 사상적 옹졸한 때문에 이 책은 기독교인들에게 위안 삼아 거론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명저는 될 수 없을 것이다.

è 저자는 <만들어진 신>을 대충 읽어보았으며,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거나.

 

224 독일의 현대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운 것>에서 이러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에 형용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를 뜻하는 라틴어 누멘을 변용해 누미뇌제라는 득별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굉장한 신비로서, ‘전율과 외경을 불러일으키는 굉장함’, ‘압도적 권위와 위엄’, ‘절대타자로서의 신비등을 말하지요. 어때요? 혹시 당신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지요?

 

226 평소처럼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 니콜라스 성당에서 축하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중간 갑자기 어떤 것에 의해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지요. 그는 무엇인가를 보고 들었는데 그것이 그에게 심히 영향을 미쳤고 그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그 이후 그는 지난 15년 동안 계속해 오던 저술을 멈추고 더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è 난 딱 보면 알겠는데, 저자는 정말 모르겠는가? 이게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가?

è 이건 누미뇌제도 뭣도 아니다. 아퀴나스는 말년에 깨달은 것이다. 이런 고도의 논리의 탑 위에 신의 황금보좌를 세우는 것보다, 아예 신이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 훨씬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모두 헛된 것을 옹립해온 헛된 것이었음을!

è 와우, 정말 짜릿한 이야기군. 꼭 소설 요소로 써봐야겠다. 과학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없을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7(?) 동안 집에 틀어박혀 증명해낸 수학자. 만약 실패하였더라면? 사실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것도 과학에서는 문제를 푸는 방법이지. 신학자로서 신이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해도 그리 상심할 필요는 없을텐데. 그가 만약 과학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228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론에 맞추어 신이 있는 세상도 참이라고 말하고자 하다면, 정신분열증 환자의 환상도 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개인에게 그 환상은 현존하는 것이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상, 동일한 현상을 고전역학으로도 상대성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성 이론이 고전역학보다 조금 더참이라는 것을 안다. 상대성이론의 모순을 반박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오기 전에는.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증명을 통해 진화한다고도 볼 수 있다. 과학적 패러다임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 중, 무엇이 더 참인지 부등호를 얼마든지 설정할 수 있다.

 

232 이러한 경험이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의미의 중심점이자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쿤의 용어로 말하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è 쿤의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매우 매우 확장적인 용어로 쓰고 있다. 그러나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나온 엄밀한 의미의 패러다임은 아니다.

è 전혀 관련성 없는 신학 문제에 과학 용어를 남발하여, 마치 과학과 신학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의도적으로 심어주려는 것 같다.

è 정말 우스운 것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변환(과학 혁명)과 다윈의 진화론이 의미하는 바가 지금 당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진리가 아닐 수 있다.”라는 것이다. 고전역학이 진리라고 믿지만 그것은 현존을 파악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앞으로 다른 진리로 대체될 수 있다. 다윈의 진화론이 해낸 가장 큰 업적은 신이 자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였다 <믿음>을 종식시켰다는 것이다. 다윈을 원숭이로 그려 조소하였던 당시 사람들까지 부인하지는 못하겠지? 신을 믿는사람들에게 신이 없다는 것을 돈오하게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불가능하나? 신자들에게 신의 존재는 지나치게 각인된 대전제다.

è 다위니즘의 핵심 : 의지를 가진 존재가 탄생하기 위해 의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235 팡세

신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è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믿고자 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망상의 기전이므로.

è 이상하지 않은가? 왜 신은 믿고자 하는 자에게만 보이는가? 신이 삐져서? 자기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노나? 그러면 참 옹졸한 신이구먼.

è신은 가장 위대한 존재다.” 자신을 믿는 자를 믿게 하는 것보다 믿지 않던 자를 믿게 하는 자가 더 위대하다. 그러므로 파스칼의 신보다 더 위대한 신이 있다? 그러면 파스칼의 신의 존재 양식에 모순이 되므로(가장 완벽한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은 없다.

è 수학사에서는 파스칼이 훗날 수학 대신 신학에 빠져들어 재능을 썩힌 것을 얼마나 안타까워 하는지 아는가?

è 이 말은, 후퇴의 기록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겠는가? 무신론자나 회의론자들에게 그럼 너희는 믿지마. 나는 믿을 테고,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망상환자라는 것을 실토하는 셈이다. , 말이 좀 심하게 나가네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무슨 황희 정승처럼. 꼭 융도 자서전의 마지막에 모든 대립 논리가 그렇듯이 양쪽 다 참이다.”라고 허허롭고 관용적이고 엣지없이 슬쩍 넘어서려고 한다. 무딘 칼날로는 어떤 진리도 조각할 수 없다. 차라리 자신이 좋아하는 쪽의 칼을 날카롭게 갈아서 상대의 목을 베어버려라! 합당한 칼질이라면 장중하게 목을 내어놓겠다. “, 난 그런 줄 몰랐네.” 이러면서. 진리라는 것이 편을 가를 일은 아니지 않은가? 부디 나에게 당신의 진리를 납득시켜 봐라! 나는 자신있다.

 

3부  신은 창조주다

è 감상적이기만 할 뿐.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 안에 있나

 

250 십자가 곁에서 슬픔에 잠긴 성모가

죄 없는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처럼

바닷가에서 당신은

죄 많은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è 자식을 위해 눈물 흘리는 어머니상. 좀 지겹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 나는 현대 미국주의 도덕률에 길들여져 있어서 적당한 선의 미덕을 가진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 부모와 자식 관계가 좋다. 그것이 현재 미국의 스테레오 타입을 형성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매우 마음에 든다.

è 그런 의미에서 내 어머니의 쏘 쿨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일부만. 우리 어머니는 사실 쿨하다기 보다는 독재자에 가깝다.

 

254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입장을 견지한 초기 라틴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와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라고 믿는 것을 바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려고 안달이 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è 결국 테르툴리아누스보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더 우위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든 신의 존재를 변증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è 어쨌든 대전제로 신은 무조건존재한다. 어째서 신학자들은 신이 없을 수 있다는 가정은 결코 하지 않는가? 그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신이 없다는 가정을 하는 순간, 과학자가 되어버리나? 하늘에서 천둥이 내리치나?

 

266 하지만 결국 그는 그 모든 것이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è 내가 무신론자인 것도 다 신의 뜻이다.

è 스티브 잡스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276 우리이게 흥미로운 것은 창조와 함께 시간이 생겼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신기하게도 현대 천체물리학이 내세우는 우주론인 빅뱅 이론과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è 아이큐 100 이상의 사람에게 창조론의 가설을 주면서 세상의 창조 이전에 시간이 없었고 시간이 함께 창조되었다는 가설이 그리 어려울까? 매우 당연한 관념이며 이것이 과학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 신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è 대단히 많이 이루어지는 어이없는 착각은, 사람들은 성서의 내용이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쓴 것이므로 곧 신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이 태초에 시간을 만들었다고 성서에 쓰여 있는데 과학으로 증명해보니 실제로 빅뱅이 있었다. 그러므로 정말로 신이 있는 것이다. – 이런 논리가 가능하냔 말이다.

 

277 과학과 신학의 대화?

è 대화 후 신학은 사라진다.

 

286 그래서 <빅뱅과 우주론적 논증>의 저자 더글러스 래키는 우리는 가상입자를 존재하게 하는 요동처럼, 빅뱅을 진공 속의 요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요동이 자발적이라면 진공으로부터의 우주 창출도 자발적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양자요동에 의해 무에서 유가 자발적으로 생길 수 있는 것처럼, 빅백동 외부에서 가해진 어떤 외부적 원인(예컨대 신>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말이지요.

과연 이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니지요. 이 같은 주장은 언제나, 해결되지 못하는 근원적 문제를 하나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자요동이 일어나는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이나 최초의 물질이 형성되는 양자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 무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래서 그것들은 또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그건 아직 모른다라고만 대답하고, 신학자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그 원인이 바로 신이다라고 말합니다.

è 신학자들이 무지의 세계를 무조건 으로 치부하고 더 이상 탐험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리차드 도킨스의 반박.

è 최초의 상태가 절대적 무일 필요는 없다. 이미 시간이 그 순간 탄생할 텐데 절대적 무가 무슨 소용인가? 완전한 무에서 우주가 탄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저 빅뱅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거의 무에 가까운 상태를 가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진공에서 물체가 생겨나는 것은 가 맞다.

 

286 다른 모든 이론이 그렇듯이, 과학 이론도 더는 연역될 수 없는 가정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 물음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지요. 설사 언젠가 그 궁극적 가정들을 설명할 증거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 새로운 증거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계속 되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그때마다 그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 원인이 바로 신이다라고 답하겠지요. 이런 이유로 모든 궁극적인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경험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è 이것은 과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원래 열린 체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è 모르는 것은 정말로 모르는 것일 뿐인데, 그것의 이름을 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가?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존재가 아니라 과학이 아직 모르는 미지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 아닌가?

è 게다가 과학은 증명할 수는 없어도이론적으로 훌륭한 패러다임들, 유물론적 믿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믿음이 신에 대한 믿음과 다른 것은, 증거가 나오면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 신앙적 믿음이 아니다. 증명되기 전의 기호와 확신은 있을 수 있어도.

è 결국, 현재 인격신의 자리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발판이 없다는 것을 이 정도라면 저자도 알고 있을 텐데? 결국 남은 것은 범신론적 신의 자리만 남아있다. 그런데 이런 신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다. 등가원리에 의해서 의지가 없는 신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으므로 둘은 동일한 상태이다. A=B. 융이 싫어하는. 그런데 과학은 가장 간단한 것을 진리로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아마도 신은 없는 것이다. 이걸 두고 과학이 신의 부재를 증명하지 못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우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과학을 정말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è 과학은 산타클로스의 부재도 증명하지 못한다. 다만 산타클로스가 없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짜 산타클로스의 증거가 나타날 확률이 0이 아니므로(블랙 스완, 양자역학적 확률). 그러면 정말 산타클로스가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일까??? 칼 세이건이 신의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신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유보하겠다고 말한 것은 섹시할 정도로 확실한 과학자의 입장이다.

è 신이 있기만 하다면신이 당신 편일거라는 환상을 버려라.

 

293 스탠퍼트 대학의 러시아 출신 물리학자 안드레이 린데에 의해 처음 제기된 이 이론에 의하면, (다중 우주 해석론) 우주는 아주 작은 시공거품에서 시작합니다. 그 속에서는 모든 사건이 인과적을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이 갑자기 팽창하여 하나의 우주가 되지요. 그런데 그것이 포함된 전체 우주는 마치 부글거리며 끓는 죽과 같아서 이 같은 시공거품이 한나가 아니고 무수히 많이 생성되었다가 또한 소멸하는 카오스입니다. 그것을 다중우주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 시공거품들 가운데 초기 상태가 우연히; 우리가 사는 데 적합하게 발생하도록 조율된 하나가 팽창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95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 : 우리가 우주에서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옳지만, 우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무지를 덮어 두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 우주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우주에 대해 조사하고 그 구조를 자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출현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우주가 살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è 프리먼 다이슨은 다위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과학자라 하더라도 다위니즘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좋은 예이다. 앞서 말했듯이, 의지를 가진 것을 만들기 위해 의지가 필요하지 않다. “우연이라는 것은 의지가 결부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의지없이 이 세상은 그냥 존재할 수 있다. 확률의 땅에서는 그 무엇도 존재 가능하다! (그래서 신도 존재 가능할까? 이건 우스갯소리지만, 만약 이 확률론적 우주론에 입각하여 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세계의 우주에서만 차라리 인정하겠다.) 60억명의 인구 중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기적인가, 아니면 기적이 아닌가? 당신이 수만마리의 정자 중 한 마리로서 난자와 만나 태어난 것은 기적인가, 기적이 아닌가? 당신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부모는 어쨌든 자식을 낳게 되어 있었고, 그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다. 결과론적 확률의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è 과학적 하수에 속하는 다이슨과 같은 이의 발언에 기댈 정도로, 저자는 desperate한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수집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결과이겠지만. 아래 다이슨이 자연 과학 지식을 토대로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게 우리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라는 발언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과학자의 옹호가 절실하였나?

è 책을 대충 읽는 독자들에게는 저자의 그러니 과학과 신학은 유사성이 있어요. 그런데 신학이 먼저였거든요? 그러니 신학이 참 용하지요? 그러므로 신은 있습니다.”라는 뉘앙스를 풍길 따름이고, 신자들은 책의 허술함과 상관없이 역시 신은 있어라며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겠지. 솔직히 책의 내용이나 제대로 외울지나 의문이다.

 

301 그러니 당신은 설사 앨런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나란히 서서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라고 똑같이 말한다고 가정해도, 그 말을 통해 각자 전하려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두 사람이 똑같이 물이다!”라고 외쳐도 홍수로 물난리를 만난 사람이 이 말을 외칠 때와 사막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소리 칠 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것과 같지요. 하나는 이제 죽었다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살았다라는 의미입니다.

è 이 비유는 적절한 것 같다.

 

311 이러한 다원적 이성에 의한 원칙들에 의해서 리오타르는 지식에 대한 정당화사회적 정의에 대한 정당화도 새롭게 구축되길 바라지요. 물론 이 원칙들만으로 리오타르의 원대한 소망을 이룰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나는 적어도 이러한 사유 모델이 오늘날 시도되고 있는 과학과 종교 간의 대화와 소통에는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로버트 자스트로가 풍자했듯이, 언젠가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른 과학자가 그 꼭대기 바위에 앉아서 이미 수백 년을 기다린 여러 신학자의 환영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è 꿈 깨쇼.

è 과학과 신학의 만남 : 제우스의 번개가 사실은 전기적 반응임이 밝혀진 후 제우스가 사라졌듯이, 기독교적 신도 결국 사라진다. 다만 상대성 이론이 발견된 후에도 우리 실생활에 적용되는 과학은 고전역학의 직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과학의 다위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앞으로도 대부분일 것이므로, 종교는 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è 종교가 살아남는 방법은 대중의 과학에 대한 무지에 있다! 대화는 무슨

è 과학과 종교의 합일치점은 종교의 소멸이다.

 

è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상은, 신학이 과학에게 하는 행태가 한의학이 ()의학에게 하는 행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신학은 처음에는 과학을 부정하다가 과학에서 발견해낸 부정할 수 없는 근거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 그래놓곤 아직 과학이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바로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우긴다. 한의학은 요즘 양의학의 개념들과 기구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무분별하게 들여오고 있다. 전인적 치료를 표방하는 한의학에서 레이저 시술 기기나 CT 촬영을 수주하기 위해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로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 참 우습다. 그래놓고 양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으며 이 부분은 한의학으로 고칠 수 있으므로 한의학이 양의학보다 더 위대하다고 한다. 한의학이 기를 다스린다며 과학적 실험으로 증명은 하지 않는 모습과, 신학에서 신은 영적인 차원이어서 과학 너머에 있다면서도 변증법적 증거에 목매달고 신앙 변증론자들에게 열광하는 모습이 비슷하다.

 

è 융의 책을 읽고 궁금했던 점. 왜 영원한 것이 가치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 :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신의 특성이 영원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신의 특성을 닮은 영원성이 가치를 지닌다. 영원하면, 얼마나 지겹겠냐동양권에서도 영원성에 대한 가치 부여의 예를 찾을 수 있나? 세월이 가는 것을 한탄하는 것 빼고. 개념으로서의 영원성.

 

327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영원은 신에게 속하는 동시에 값어치 있는 것이고 시간은 인간에게 속하는 동시에 세속적이고 부질없는 것이지요.

 

334 아우구스티누스는 먼저 우리의 몸은 어쩔 수 없이 물리적 시간을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신적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343 따라서 푸르스트의 사상에서의 [무의지적] 기억은 기독교 사상에서의 은총처럼 초자연적 역할을 한다.

è 끔찍한 해석이군. 엄청난 비약. 이렇게 따지면 기독교가 아닌 게 없겠다.

è 하긴, 기독교의 사람들은 모든 상황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니까. 그렇게 학습되어 있다는 것이 비종교인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소름끼치는지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351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늘이 우리가 보는 우주공간을 뜻하는 것이 앙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이 거처하는 하늘은 시공과 그것을 지배하는 모든 물리적 법칙을 벗어난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소망들을 허용할 수 있는 신의 전지전능성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표현했지요. “우리가 기도하는 성부가 우리의 소망을 허용하실 수 있는 권한을 가지셨다는 것이 당신은 하늘에 게시다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일부 과학자들이 여러 가지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우주에는 신이 없다고 외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지요.

è 도대체 어떤 과학자가 그런단 말인가? 초등학생이면 모를까?

아빠, 하나님은 어디에 있어?”

, 아들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에잇, 거짓말! 하늘은 대기권일 뿐이고 저 바깥은 우주인걸?”

이런 의미에서 과학자가 신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마, 아니겠지? 차라리 황새가 아기를 물어온다고 뻥을 쳐라. 그러면 과학자가 대답해 주겠지.

è 스스로 하나님이 있는 하늘이 상징임을 말하고자 한다면, 하나님 자체도 상징에 불과하다고 왜 인정하지 않나?

 

è 마치 평소 한의학에 상종할 가치를 못느끼던 ()의사에게 한의학이 의학을 까대는 책을 읽으라고 시킨 것 마냥 짜증나서 못읽겠다. 일일이 논박하자니 엄청난 시간 낭비 같다. 그것이 비단 입장의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이건 비논리다.

 

356 è 러셀과 같은 대놓고 무신론자인 사람의 이론을 끌어다가 신학을 옹호하다니. 양자역학적 확률론은 신의 기적이 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저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인 것, 이걸 두고 , 과학이 신을 증명하네요~??” 라고 해석하는 것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357 어때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1600년 전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떻게 현대의 양자물리학 이론과 꼭 맞아떨어지는 사유를 할 수 있었을까요?

è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임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그저 인간의 사유로서 그리 어려운 사유가 아니다. 그리고 설사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통방통하여 연역적으로 추론해낸 사실이 기적적으로맞아떨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신을 증명하는 데 사용될만한 기적인가?

è 양자역학의 대부 보어는 과학적 깨달음이 곧 동양의 음양 사상과 합일점을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가문의 문장을 태극 무늬로 꾸몄다. 그러면 동양 사상에 따라 기독교적 신은 없는 것인가?

 

367 아우구스티누스 :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피조물은 선한 신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è 선한 신이 있으면 악한 신은 어디에 있나요? 악한 것은 누구 소관인지?

è 왜 스리슬쩍 신에게 의지를 덧칠하는 것인지? 신이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도 연역이 안되는데? 이 중요한 부분을 왜 스리슬쩍 넘어가시나?

 

è 다시 말해, 기독교의 신은 이진법 중 1에 해당하는 신이다. 즉 극한의 신인데, 2차원의 단일직선 축의 한 쪽으로만 극한으로 가는 신이다. 그렇다면 다른 축의 극한으로 가는 신 즉, 이진법의 0인 신이 따로 존재해야 한다.

è 만약 신이 모든 것의 극한이자 모든 것을 포함한다면, 신은 선의 극한이자 악의 극한이다.

 

371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과 세계가 불온전하게 될 가능성, 곧 타락할 가능성을 가진 이유는 그것들이 신에 의해서창조되었으나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무로부터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è 그러면 가 곧 신이겠군. 그러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è 모든 것의 창조자가 신이라고 했으면서 이제는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한다. 무를 재료로 창조되긴 하였으나 만든 것은 신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러니까 신이 만들었는데 왜 불완전한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겠지.

 

373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루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와는 전혀 다릅니다.

è 그거야, 과학이 밝혀낸 마당에 진짜 그 하루라고 우길 수야 없었겠지. 빅뱅 이전에는 이 하루가 그 하루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400 일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충족적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이 급기야는 자기 바깥으로 넘쳐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 같은 철학적 사변이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을 통해 기독교로 흘러들어오면서 자애롤운 아버지라는 원시 기독교적 관념이 유출 논법으로 설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신은 자애로운 아버지같이 선하므로 아무런 이유나 조건 없이 모든 좋은 것을 퍼뜨린다는 것이지요. 이후 고대와 중세의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마크로비우스나 단테 같은 문인들마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è 하나님이 자애롭고 착할 것이라는 생각의 기원. 매우 논리가 빈약하다.

è 책의 전체를 보면, 신을 만들어낸 것이 결국 인간의 관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17 까지 다윈의 진화론에 관한 설명

è 저자가 무엇을 선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며, 독자층마저도 대부분 종교인이기 때문에 진화론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리고 자연이 더는 워즈워스가 불과 얼마 전까지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라고 노래한 낭만적 공간이 아니라, 테니슨이 표현한 대로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 지배하는 살벌한 공감으로 변해버렸다.”라고 맒하는 부분에서는 확실히 객관성을 상실했다. 어찌되었든, 진화론은 나쁜 것 이라는 인식을 감정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429까지 다위니즘에 대하여

è 다위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은 없이 변죽만 울리고 있다.

 

437 è 다윈이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이유에 대해 과거사부터 들먹이고 있다. 다윈은 그저 과학자일 뿐인데 말이 안나온다.

 

444 – 445 하지만 호트의 주장과 같이 진화론 이후에 나온 과학자나 신학자의 변증을 지지하는 것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닙니아. 신다윈주의 진영의 리처드 도킨스나 터프츠 대학의 인지과학자이자 철하자인 대니얼 데닛 같은 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같은 주장은 진화론에 덜미가 잡힌 기독교인들이 억지로 꿰맞춘 궁여지책으로 보일 테니까요. 그래서 내 생각에는, 이 문제를 공정하게 다루려면 진화의 원리를 창조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DT는 이론이 전통 신학 안에 있었는지를 먼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è 저자 역시 과학적 발견 앞에서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 땜빵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454 진화 원리가 신이 지속적 창조를 위임한 것이라는 주장.

è 신이 일하기 귀찮아서 진화론적 우연에 기대어 생명을 만들기도 하고 내키면 직접 창조하기도 한다는 주장. 그저 믿기 위해 믿는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되네. 여기에 무슨 논리가 있나.

 

è 이 책이 기독교에 대한 회의에 빠져 다시 믿음의 근거를 찾고 싶어하는 기독교인들에게조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믿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조차 논리가 허술해 보일 것 같다.

 

정말 신에 대해서 모든 내용을 다 담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던 것이라면, 저자가 대답해야 하는 것은 신의 존재와 우리가 그 신의 존재에게 무릎을 꿇는 행위 사이의 인과관계를 해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신의 특성에 따른 존재론적 대전제로부터 신의 인격은 연역적으로 유추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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