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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6일 11시 3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용규

 

철학자, 소설가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

자녀 1

저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설득의 논리학><기적의 양피지><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21

 

김용규가 생각하는 철학자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다. 따라서 그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고민하고 추구해온 사람들의 이론을 살려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와 가치 있는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있다.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쓸 때마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방식을 고민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작가란시대가 나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대신 말하는 자가 작가이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서양문명은 신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 게다. 저자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심층을 파악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서도, 열정과 희생으로 그것들을 지켜온 영웅들에 대해서도, 개인의 삶과 세계의 역사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도,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에 대해서도 서로 상반 대립하는 지식들의 종합과 충돌하는 문명들의 화해에 대해서도 신과 연관하여 교육하고 감화하는 시, 소설, 회화, 조각, 음악, 역사, 과학, 철학, 신학에 대해서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리된 책

 

<나의 의견>

 

저자는 말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왜 신인가?

그가 이야기하는 신은 최고의 가치, 절대적 가치를 의미한다. 즉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들의 정점을 말함인데, 진리, 선함, 아름다움, 생명, 정의, 위대함 등.

다시 말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치들의 최고 정점을 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정의한다. 나는 신을 모두 대치해서 읽었으나 그럼에도 종교적으로 치우친 느낌이 있다.

물론 내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의 없음이 가장 큰 몫을 하겠지만 말이다. 맺음말에 적혀있는 지금은 사냥꾼의 시대이다가 제일 마음에 와 닿기는 하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고자 한다. 그나마 사냥터에 규칙이 잘 되어 있고 터가 잘 보존되어 있으면 다행이나 그렇지 못함이 현실로 보인다. 저자의 말에 동의되는 부분은 우리는 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 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되는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이 꿈이다. 물론 혼자는 사냥꾼보다는 정원을 가꾸는 일에 무게중심을 싣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참조 : http://ch.yes24.com/Article/View/17049?Scode=050_002

          서양문화를 읽는 코드, 김용규 Humanist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파스칼, 팡세-

 

29 의인화된 신의 모습을 우리 의식에서 완전히 제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31 신은 전혀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오해하거나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7 인간이 신과 같은 불명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체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대해질 수는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대담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리스인들은 어려서부터 체조와 운동경기를 통해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운 육체를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41 이데아(idea)의 미란 가시적(可視的)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可知的)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썼습니다.

 

43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회화론>에서 “회화는 정신의 노동이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손재주와 눈가늠에 기대어 그리는 화가는, 앞에 놓인 모든 물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울과 같다.

 

44 에로스는 우리의 영혼을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향하게 하는혼의 전향을 가져오고,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을 향한 등정을 하게 하지요.

 

45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혼의 날개짓이고상승적 창조자입니다.

 

48 신과 인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신인동형설.

 

50 아이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을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고 규정

 

84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그저있는 것이 아니라무엇으로있지요. 예컨대 사과는 사과로 있고, 책상은 책상으로 있습니다.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규정되고 한정된존재물에만 붙일 수 있지요.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라야 합니다.

 

85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거시 뭐 그리 놀라운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87 최초의 지도 제작자이기도 했던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아페이론은 우선 시간적으로 “변화를 통해 형성된 것도 아니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죽음도 쇠퇴도 모르고”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것이지요. 동시에 공간적으로는 너무나 광대무변하여 크기를 측정할 수 없으며 “만물을 자신 안에 포괄하는”것입니다.

 

아닉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무한자)개념을 통해 신의 무한성을 처음으로 규정한 철학자인 것이다.

 

93 모든 시원이 그렇듯, 출발에서 벌어진 미세한 틈새가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간격이 되는 법입니다.

 

95 구약성서에 쓰인야훼에 대한 일반적인고도 자연스러운 해석은그는 있다(he is) ‘그는 존재한다(he exists)Ehsms ‘그는 현존한다(he is present)입니다.

 

97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존재를 망각하고존재물집착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이며, ‘에게서 돌아서서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 까닭인 것입니다.

 

99 신을존재로 그리고 인간을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그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101 신은 강하고 전능하고 영원하지만 어떤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물들 가운데가장 강한 자이고가장 능력있는 자이며가장 지속적인 자’, 최고의 존재물은 결코 아닙니다.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무규정자이고 무한정자이며, 원칙적으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대상인 신은 그가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 대로 단지존재지요.

 

104 기원전 5세기쯤 그리스인들은세상 모든 존재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물음으로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106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은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그는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인식과 존재는 동일하다”라고도 주장했지요.

113 플라톤의 분여이론에 의해서존재와 존재물간의 차이와 상호관계가 분명해졌다는 점이에요. 존재(이데아)는 단일하고 영원불면하며 존재물(사물)들에게본질존재그리고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입니다.

 

114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면하며 우주만물에본질존재그리고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며,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

 

118 자연에 대한 남다른 관찰력으로 ‘;자연의 사다리라는 존재물의 계층구조를 발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충실한 추종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러 사물의 본성을 살펴보면 당장 이런 점을 알 수 있다. 정확히 관찰해 보면 우리는 여러 사물이 계층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생명이 없는 물체들 위에 식물이 있고, 식물들 위에는 이성이 없는 생물들이 있고, 또 이성이 없는 생물들 위에는 이성이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 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123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外延) 인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頂點)

 

124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예시한 존재론적 계층구조라는 모호한 개념은 그의 영특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자연의 사다리라는 좀더 이해하기 쉬운 생물학적 위계질서와 결합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로 유입되어 가장 미소한 존재물로부터, 모든 가능한 단계를 거쳐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에 이르는, 무한한 수의 고리로 연결된존재의 대연쇄라는 신학적 개념으로 굳어졌지요. 그것이 중세를 지나 적어도 18세기 후반까지는 철학자와 신학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교육받은 일반인들의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 우주관이자 가치관이었습니다.

 

129 18세 소설 <파멜라>에는 부자는 최하위 노동자를 경멸하지 말지어다. 그도 자연의 연쇄 속에 있는 동등한 고리이니 동일한 목적으로 노동으로 동일한 관점을 합일되어 양자는 다 같이

신의 의지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30 존재가 영원 불변하는 실재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파르메니테스의 주장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거쳐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파르메니데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토에서 존재는 _그것을 플라톤처럼이데아로 부르든, 플로티누스처럼정신”으로 아우구스티누스처럼말씀으로 부르든 간에 불변을 본성으로 갖고 있고, 우리가 따라야 할 모든 진리의 근거입니다.

 

135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이 정신에서 영혼이 유출되는데요. 그 원리는 일자에서 정신이 유출될 때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 “정신이 변함없이 그대로인 채 영혼이 유출”되지요. 여기서 영혼이란 흔히 말하듯 불멸의 실체라기보다는 정신 안에 있는 형상이 현실화되는현실화의 원리이자운동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영혼에 의해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 등등_모든 물질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138 매슈 아널드(1822-1888)가 쓴 <에트나 산 위의 엠페도클레스>는 인간의 영혼은 신들이 공간에 매달아 놓아서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거울로 묘사되어 있어요.

 

여기저기로 빙빙도네

바람에 흔들거리는 겨울 같은 영혼은

수천 번 눈빛을 주는데도

결코 전체를 보지 못하네

한번 쳐다보고 다른 곳으로 내달리고는

최근 한 일은 뒤에 남겨두네

 

150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둔 탈 시간화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했고 히브리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실존적으로파악했지요.

 

151 개념을 산출하는 우리의 정신은 앵글의 노출시간을아주 길게열어 놓은 카메라와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변화하는 대상들로부터 불변하는 개념들을 얻어 내는 것이지요.

 

152 그리스적 사유 형식을 대변하는 논리학에는 시간 개념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153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 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 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시간을 매개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이 하나로 종합된 겁니다.

 

154 기독교 신학의 초석을 다진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도 <삼위일체론>에서 신의 속성을 설명할 때 그 이중적 논법을 사용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155 신은 성질이 없어 선하며, 양이 없어 크고, 결핍이 없어 창조적이며, 지위가 없어 통치자이며, 외관이 없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장소를 갖지 않아 어디든지 있고, 시간을 갖지 않아 영원하며, 변함이 없어 변화하게 하고, 아무 작용을 받지 않아 모든 작용을 한다.

 

157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어던 것(사과)을 그것(사과)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스스로 생성. 작용하는 존재가 아니고야 _다시 말해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야_어떻게 본질과 존재를 피조물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이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인들이 하야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

 

159 존재의 장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우주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물이 여기서 생겨나고, 여기서 존재하며, 여기서 소멸하는 무한한 신적 근원을 뜻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한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라는 비유에 해당하는 셈이지요.

 

160 신학자 판넨베르크와 나눈 대화에서 뒤르는 스스로 물질이 되는 능력을 가져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이 비물질적 장을 양자물리학자들은 퍼텐셜(Potential)”이라 부르고 신학자들은 신의 숨결이라 부른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학자가 신의 숨결이라고 일컫는 것에는 자연과학을 기술할 때 볼 수 있는 과정과 동일한 기본구조가 내포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양자물리학은 비물질적인 기본구조를 상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것이 비물질적이라고는 하지만 물질에 반대되는 무엇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실은 신의 숨결이니까요. 그렇다면 물질적인 것이란 신의 숨결이 응결되면서 아직 생명을 갖추지 못한 물질이 형성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숨결입니다.

 

163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불가시적이고 형상 없는 땅으로부터, 거의 무에 가까운 이 무형적인 것으로부터, 주님은 변화 가능한 만물을 지어내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우주가 생기게 되었나이다.

 

무와 물질의 중간에 있는_따라서 무는 아니지만 거의 무에 가까운_이 무형의 원물질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형상 없는 땅이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라고 할 수 있지요.

 

165 누군가가 퍼텐셜이 곧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스피노자와 아인슈타인이 믿는 신, 곧 우주와 신이 하나인 범신론에서의 신을 말하는 것일지언정,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 야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요.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같은 말을 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포괄한다라고 표현했는데, 내 생각에는 참 탁월한 묘사입니다.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이니까요. ‘관통하며 포괄한다는 말은 물 위에 떠 있는 어떤 사물(예를 들어 축구공)을 물이 포용하듯이 밖에서 포괄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물 위에 뜬 물방울 들을 물이 포용하듯 안팍으로 침투해서 포괄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안셀무스는 유지하고, 뛰어넘고, 감싸안고, 관통한다고도 묘사했어요. 요컨대 최고 본질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해 있고, 모든 것은 최고 본질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안에 있다는 겁니다. 이런 사유를 바탕으로 그는 신이 모든 장소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모든 공간에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한다는 듯으로)신이 어디에나있다고 말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또한 신이 모든 시간 안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모든 시간에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으로)’항상있다고 표현해야 한다고고 주장했지요.

 

166 신에 대한 모든 상상, 모든 형상화, 모든 규정과 언급은 사실상 부질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리기도 합니다.

 

177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이다.

 

178 실존(existence)은 어의만으로 보면 실제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신학자가 이러 SEMT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러나 키르케고르 이후 하이데서, 야스퍼스,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의미 있게 산다라는 특별한 의미로 간략해서 사용했습니다.

 

181 신은 정의상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다.

가장 완전하다는 것은 그 어떤 결핍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것이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한다면, 이는 실제적 존재가 결핍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

 

186 삼각형이라는 주어 개념에 세 각이라는 술어 개념이 이미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제를 라이프니츠는 이성적 진리흄은 관념들의 관계에 곤한 명제’. 칸트는 분석판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경험적으로 검증하지 않고는 이 사과는 빨갛다라는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지요. 이 같은 명제를 라이프니츠는 사실적 진리’. 흄은 사실의 문제에 관한 명제칸트는 종합판단이라고 불렀지요.

 

189 지상에서 시작해서 하늘까지 빈틈없이 연결된 존재의 대연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노스를 통해 형성된 이 형이상학적 사다리가 알고보면-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중추지요.

 

201 신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좋은 것만을 준다는 가르침은-신의 침묵에 부단히 절망하는 우리의 경험상-믿기 쉬운 말은 결코 아니지요.

 

204 다윈은 페일리식 논증을 깨부수고 무신론을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해 준 최초의 인물입니다.

 

206 허수아비 논증이란 상대방의 주장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그것을 허물어뜨리는 형식의 논증

 

210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던 겁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론자들은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인간의 정신에는 선천적 인식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고만으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212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 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즉 개념에 대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하는 일(즉 직관을 개념 아래 녛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

 

213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한마디로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고들은 진리의 땅에서 발붙이지 못하고 내쫓겨, 폭풍이 이는 험한 바다를 떠돌게 되지요. 그런데 그 바다는 또 광대무변해서 그 항해 역시 끝이 없답니다.

 

215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모든 종류의 논증이 부질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216 안건아 무한성에 이를 수 없음을 가장 명확하고 예리하게 보았던 철학자가 바로 칸트

 

217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후 근대 학문에서는 중세에 비해 경험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강조되어 진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지요. 현대논리학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진리는 타당할 뿐 아니라 건전해야 한다는 것인데, 타당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건전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22 흄은 기적을 불가사의한 것을 바라는 인간의 일상적 성향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하고 점차 의식이 계몽되면서 우리는 신비로운 것 또는 초자연적인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단정했지요.

 

225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중세에 쓰인 그 어떤 저술보다도 선명하고 정교한 논리적 구조물로서 마치 해맑은 수정덩어리들을 지상에서 하늘까지 쌓아 올린 거대한 성전과 같은 느낌이지요.

 

226 신부님, 당신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세상을 깨우치려고 시작한 그 같은 대작을 왜 치워 두고 계십니까? 아퀴나스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레기날드, 난 할 수가 없네, 내가 본 것과 내게 계시된 것에 비교해 볼 때 내가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처럼 여겨지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의 마지막 말입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며, 그 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227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Paradigm)이란 본디 그 자체가 신념가치체계이자 동시에 문제 해결 방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패러다임과 이를 통해 얻은 경험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둘은 사실상 서로 뒤엉켜 있는 하나의 혼합물이지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요? 시쳇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228 무엇을 무엇으로 본다(또는 경험한다)는 것을 말해 주지요.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종의 해석(interpretation)인 것입니다.

 

235 파스칼의 미완성 대작 <팡세>에 남긴 말

신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을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246 공기처럼 차고 넘치는 자유와 낭만이었습니다.

 

248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 다시 말해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성공적으로 절충하고 통합한 사람이었다.

 

250 십자가 곁에서 슬픔에 잠긴 성모가

죄 없는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처럼

바닷가에서 당신은 죄 많은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252 초이성적 계시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운 것이 고대 신플라톤주의가 초기 기독교에 공헌한 일이었습니다.

 

254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나의 결혼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나와 그토록 오래 산 그 여자가 내 곁을 떠났다. 그녀와 오랫동안 하나로 이어져 있던 내 마음은 고통 받고 상처입고 피를 흘렸다.

 

265 신율은 섭리에 의해 모든 상황과 여건이 성숙되어 초월적으로 실현되는 자율을 말합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자신의 신적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이 곧 신율

 

269 코너스 엘리엇(1888-1965) <목마른 구조>라는 시

 

우리는 경험했지만 그 의미는 놓쳤다.

그러나 그 의미에의 접근은

경험을 회복시킨다.

하지만 다른 형태로

 

275 “시간이란 한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사물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옵나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278 빅뱅이론은 1920년대에 벨기에의 성직자이자 과학자였던 조르주 르메트르가 처음 제시.

 

289 우주가 어떤 특이한 한 순간에 탄생했고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

 

301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발화된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 역시 그 언어가 속한 존재세계로 인해 가려지게 마련.

 

303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도 주장. 이것은 곧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304 바울은 믿음이 있으면 행위는 자연히 따라온다는 문법으로 말하고 있고, 야고보는 행위에 의해서 믿음이 완성된다는 문법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311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313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여, 단지 하나로 통합하거나 융합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진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19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 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

 

324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시간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누가 그것을 쉽고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나이까?

누가 그것을 사유 속에서 파악하고 그 답을 말로 표현할 수 있나이까?

하지만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시간보다 친숙하게 알고 언급하는 것이 없음 또한

사실이 아니옵니까?

우리는 시간을 말할 때도 확실히 그것을 이해하나이다.

다른 사람이 시간에 대해 말할 때도 그것을 이해하나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대체 무엇이옵니까?

누가 내게 묻지 아니하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나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물어 그것을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지 못하나이다.

 

 

331 ‘시간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신의 마음처럼 영원을 살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로 끝없이 분산되어 흘러가면서 그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고 말게 하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자는 것이지요.

 

338 셰익스피어의 작품<루크리스의 겁탈>

원하는 것을 얻은들 소득이 무엇이랴

그것은 꿈이요, 한 순간의 입김이다

덧없는 쾌락의 거품일 뿐,

누가 일주일의 고통을 주고 한 순간의 환락을 사랴

장난감 하나를 얻고자 영원을 팔아?

달콤한 포도 한 알을 얻기 위하여

덩굴을 모두 망칠 자가 누구랴

어떤 어리석은 거지가

당장 왕홀에 맞아 죽을 텐데 왕관을 만지겠는가?

 

353 현대 천체물리학자들도 대폭발 자체가 직접적으로 물질을 만들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대폭발은 엄청난 고열의 에너지 덩어리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우주의 확장과 더불어 급속히 냉각되면서 …”거의 무에 가까운 이 무형적인 것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지요.

 

377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밝힌 대로-창조가 오직 신의 의지에 따라 어떤 신비롭고 거룩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여섯 날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6일과는 결코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399 신은 도대체 왜 자족 상태를 향유하지 않고 물질세계를 창조했는가 하는 의문

 

418 사회다윈주의로 불리는 이 이론은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와 역사도 생존경쟁적자생존이라는 법칙에 따라 진화한다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을 토대로 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이 이론과 함께 자유,평등,박애라는 구호 아래 지상천국을 꿈꾸던 프랑스대혁명(1789)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인간사회 역시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 지배하는 원시적 공간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이 달라지면 관념이 변하고, 관념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지는 법이지요.

 

431 조지 허버트(1593-1633) <인간>

인간은 모든 것, 혹은 그 이상의 것인지라

나무이되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이고,

짐승이되 그 이상의 존재라네

이성과 언어는 인간만이 가진 것

 

450 “나무의 씨앗 속에 시간에 따라 점차 나무로 자라날 모든 것이 비가시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잠재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종자적 형상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때문에 생명체들은 이후 신의 섭리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지요.

 

474 탁월한 수학자이자 과학자이기도 했던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신과 인간의 차이를 무한과 유한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표현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피조물)은 동등하다.

 

502 인간은 로고스(이성)를 자기 정신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 안에 있는 로고스, 곧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

 

522 일반섭리(providential universalis)인 자연의 질서인데, 신은 모든 행위의 가장 우선적, 직접적 목적을 남겨 둔 채 자신이 창조할 대 부과한 법칙들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면서 역사한다는 것이지요,

 

543 신교과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왜냐고요? 일찍이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라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

 

577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 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내세운다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로 가라. 부단한 자기 체험과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606 어떤 자는 자신의 힘 때문에 위대했고 어떤 자는 자신의 지혜 때문에 위대했고 어떤 자는 자신의 소망 때문에 위대했고 어떤 자는 자신의 사랑 때문에 위대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누구보다도 위대했다. 무력(無力)이 본질인 그의 힘 대문에 그는 위대했다. 어리석음이 그 미밀의 본질인 지혜로 말미암아 그는 우대했다. 광기의 모습을 빌린 그의 소망 때문에 그는 위대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한 사랑 때문에 그는 위대했다.

 

622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이 유일신 신앙에서 나온 배타성이며, 바로 그 때문에 전 세계에서 참혹한 분쟁과 테러가 그치질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여전히 많으니까요.

 

641 프로티노스의 말

 

일자는 존재론적으로든 인식론적으로든 하드의 규정과 제한을 갖지 않음으로써 규정과 제한을 갖는 모든 존재물의 바탕이자 인식과 언명의 근거가 됩니다. 플로티노스는 모든 것이 일자로부터 나오는 이유는 그 안에 (그것을 제한하거나 규정하는)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659 삼위일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성부 성자 성령)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사고, 의지, 행동)에서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687 유례없는 혼란 가운데 동방교회에서는 카파도피아의 위대한 세 교부가, 서방교회에서는 기독교 사상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아우구스티누스가 나왔습니다. 혼탁한 강물이 범람하는 땅에서 달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자라는 법이지요.

 

710 기독교 사상가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진리를 언제나 좌로도 치우치지 않고 우로도 기울지 않는 황금의 중간 길(the golden middle way)”에서 찾곤 했습니다.

 

711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는 오직 관계에서만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나뉘지만 연합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720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사랑, 선물, 친교로 파악했고, 우리도 성령에 의해 서로 간의 친교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신과도 친교를 이룰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이 얼마나 보배로운 사유인가요! 우리는 이 같은 사유의 가치를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진리가 단지 교훈으로 선포된 종교가 아니라, 성육신을 통해 행위로 실천된 종교이기 때문이지요.

 

진리는 말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 안에 잠재되어 부단히 내려오는 바로 이 고귀한 사유를 감안 할 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내용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지침이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일을 한 겁니다.

 

732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베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지요. 다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상호 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747 대강 기원전8세기에서 기원전3세기까지 약 600년은 인류의 정신사(精神史) 에서 가장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자, 노자, 장자, 열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나왔고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가 완성되었고 부처가 생존해 있었으며, 이란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했지요.

또한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했으며, 투키디데스와 아르키메데스도 이시기에 활동했습니다.  바로 이때 팔레스타인에서는 엘리야와 이사야, 예레미야를 거쳐 제2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이 특별한 시기를 차축시대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인류 정신사에서 거대한 수레바퀴가 움직인 시대라는 뜻이지요. 이때 인류는 사유 속에서 처음으로 무제약성과 초월성을 경험하게 되었고, 개별적 사물들로부터 보편적 개념을 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류의 정신사에서 최초로 이성이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철학을 비롯한 각종 학문과 보편 종교가 생겨났지요.

 

762 아브라함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예수 이전에 살아서 역사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몰랐던 사람이라 g더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로고스를 알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지요. 실재로 그는 예컨대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곧 소크라테스처럼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라는 종교를 몰랐던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지요.

 

784 신의 삼위일체적 특성에서 인간 공동체 원형을 발견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몰트만의 방식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론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선포가 배타성과 폭력성 그리고 획일성에 대한 교훈이 아닌, 오직 포괄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백히 설명해 주기 때문이지요.

 

798 바오로3세는 내 아들아, 주님은 나에게 하늘과 땅을 다스릴 열쇠만 주셨다. 지옥에서 나오고 싶다면 미켈란젤로에게 가서 말해라라며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체세나는 지금도 여전히 지옥의 뱀에 붙들려 있습니다.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그가 유대교인이든 기독교도든 이슬람교도든_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지요.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그들이 배척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동력이 사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나 이기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교묘히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이슈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것이지요.

 

801 몰트만은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이 가진 포괄성과 통일성으로서의 유일성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유일자입니다.

 

805 21세기 포스트코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심리. 성적 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에 몰두하고 있지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해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806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들을 차례로 몰아내고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됨으로써, 시대마다 유효했던 공인된 처방들이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휴지조각이 되어 버린 겁니다.

 

우리가 변하는 동안 세계도 변했습니다.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 사회적 재난들이 삽시에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위험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입니다.

 

807 지금은 사냥꾼의 시대지요. 사냥꾼은 오직 한 명의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나 또는 많은 무리 중 한 무리의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우리로서 사냥터나 다른 동료야 어찌 되든 사냥감만 많이 잡으면 그만입니다. 그의 임무는 단지 살아남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세계는 점점 지옥이 되어 갑니다.

808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요컨데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되지요. 칸트의 유명한 경구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는 거지요. 이미 16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탐욕을 치료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틀의 처방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탐욕, 자기 사랑물질 사랑의 끈질긴 성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모두 죄로 몰아 금하는 기존의 교리와 사뭇 다른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이 모두 네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위에 있는 신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며,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이고, 넷째는 아래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810 세계화와 함께 시작된 지옥에서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우리가 어떻게 사냥도 하면서 정원도 가꾸고, 사냥터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811 알렉산더 포프의 <인간론>

 

인간의 지식은 그 입장과 위치에서만 합당하고

그의 시간은 하나의 찰나이며, 그의 공간은 하나의 점.

어던 차원에서든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라면

이른들 늦은들, 이곳인들 저곳인들 어떠리

오늘 복 받은 자 온전히 복 받고 있느니라.

천 년 전부터 복 받은 자와 다름없이.

 

 

3.       내가 저자라면

 

 

전체적인 느낌은 저자의 박학다식은 알겠는데…’황금의 중간 길에서는 벗어난 느낌이다. 기독교적인 마인드를 깔고 보는 독자에게는 괜챦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느낌이다.

마지막 맺음말에 저자의 생각들이 전체적인 글에서는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음은 나의 기질 탓 일까. 아니면 글의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한 탓일까 싶다.

저자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하듯이 왜 지금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가? 이야기해야 하는 가에 대한 연결고리가 부족한 느낌이다.

 

1부    신이란 무엇인가

 

2부    신은 존재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3부    신은 창조주다

3장    창조론이 왜<고백론>안에 있나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5부    신은 유일자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맺음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감동적장절

 

165 누군가가 퍼텐셜이 곧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스피노자와 아인슈타인이 믿는 신, 곧 우주와 신이 하나인 범신론에서의 신을 말하는 것일지언정,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 야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요.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같은 말을 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포괄한다라고 표현했는데, 내 생각에는 참 탁월한 묘사입니다.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이니까요. ‘관통하며 포괄한다는 말은 물 위에 떠 있는 어떤 사물(예를 들어 축구공)을 물이 포용하듯이 밖에서 포괄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물 위에 뜬 물방울 들을 물이 포용하듯 안 팍으로 침투해서 포괄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안셀무스는 유지하고, 뛰어넘고, 감싸 안고, 관통한다고도 묘사했어요. 요컨대 최고 본질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해 있고, 모든 것은 최고 본질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안에 있다는 겁니다. 이런 사유를 바탕으로 그는 신이 모든 장소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모든 공간에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한다는 듯으로)신이 어디에나있다고 말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또한 신이 모든 시간 안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모든 시간에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으로)’항상있다고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나는 비 종교인이다. 굳이 종교적인 색채를 따진다면 카톨릭에서 영세를 받았으나 냉담 중이고 매일 아침 108배를 하나 불자는 아니고 관심은 있어 산에 가면 절에는 꼭 가서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하고 불전함에 부처님 용돈을 투입하고 나오는 사람이다.

범신론이 내게는 딱 맞는 종교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옮겨보았다.

 

235 파스칼의 미완성 대작 <팡세>에 남긴 말

신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을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805 21세기 포스트코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심리. 성적 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에 몰두하고 있지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해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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