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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6일 11시 47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김용규씨는 철학자인가보네요. 포털 사이트에 대번에 그렇게 뜨네요. 책 왼날개를 읽어요. 이건 철학자 김용규씨가 스스로 쓴 자소서겠지요? 독자들의 마음에 취직하기 위해서, 미지의 세계인 철학과 신학으로 안내하는 급수 높은 여행가이드가 초짜 여행객에게 라포를 형성하기 위한 걸 테지요.  

 

철학자.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빌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함께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보편적 주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고민하고 추구해온 사람들의 이론을 살려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와 가치있는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있다.

 

그는 전문가들과의 논담보다는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철학자이다.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의 폭넓은 만남이 바로 그가 책을 집필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그는 책을 쓸 때마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방식을 고민하며 스스로 질문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하는가?’ 이 책에서 그는 디아트리베라는 고대의 수사학을 채용했다. 고상한 전문용어를 사용해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피하고 생동하는 일상용어를 사용해 독자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는 인문주의를 지향하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그는 철학과 신학을 문학, 역사, 미술, 음악 등과 아울러 한편의 대서사시가 되는 철학 내러티브를 창안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에 나 자신을 온전히 실현하려면 보편적 가치에 대한 생각과 그것이 스며든 문화 예술적 감수성이 요구된다. 그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철학 내러티브는 창조의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사유와 다양한 자양분을 제공한다.

 

지은 책으로 <철학카페에서 문화 읽기>, <도덕을 위한 철학통조림 시리즈1~4>, <설득의 논리학>, <영화관 옆 철학 카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데칼로그>, <기적의 양피지>, <알도와 떠도는 사원>(공저), <다니>(공저) 등이 있다.

 

유명한 사람이니 인터뷰 기사가 있겠죠? 자기 소개서를 읽고 궁금한 걸 메모했어요. 내가 면접관이라도 된 기분이네요. 만약 내가 이 분을 직접 만난다면 여쭤보고 싶은 질문이요. 첫째, 왜 다른 철학자들처럼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대신 대중과 소통하는 철학자가 되려고 하셨나요? 이런 저자로 있으려는 이유나 계기가 있으셨나요? 둘째 저서 목록을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어요. 거꾸로 읽는 동화 이야기가 많았어요. 철학통조림은 또 어떻구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 도 들리는 말에 의하면 딸에게 주기 위해서 3년 동안 작업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딸을 기르는 과정이 철학자 아버지의 관심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나요? 셋째, 현재 매월 한 번씩 철학카페로 유명인사를 초청해서 강연회를 하고 계신데요, 이걸 진행하는 과정이 재미있으신가요? 앞으로 또 어떤 만남의 계기 또는 장을 만들어보고 싶으신가요? 넷째, 책 왼날개 자기소개서에서 흥미로운 구절은 철학의 본분이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하고 변화를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것하고 인문주의를 지향하는 철학자라는 말이었어요. 어찌 보면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철학자가 내린 철학의 정체성에 대한 나름의 답이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인문주의라는 말은 저한테는 좀 낯섭니다만. 올해 인문학 책을 읽고 있거든요. 우리 말고도 요즘 인문학 고전을 읽으려는 움직임도 많습니다. 도대체 인문학과 철학이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기르고 주말에 한 잔 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습니까? 다섯째, 이건 진짜 궁금한데요, 너무 무식한 질문이라 얼굴보고는 못 물어볼 것 같아요.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면 목사 자격증을 따는 건가요? 목사자격증 소지자신가요? 그리고 기독교신자이신 거지요? 그러니까 이 책은 기독교신자가 대답하는 자기소개서 인거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철학과 신학 전공자이니 그걸 소개할 수 있는 언어와 사고 틀을 가진 거고요. 저는 그렇게 이해했어요. 여섯 째 800페이지 분량이 연구원 커리큘럼의 일상다반사려니 했지만 상당히 부담스러운 페이지입니다. 선생님의 고심 덕분에 읽기가 어렵지만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는 무슨 말씀인지 못알아먹겠는 게 많았어요. 근데 궁금해졌어요. 읽기도 힘든 이 두꺼운 책을 쓴 이는 도대체 어떻게 이걸 썼을까? 그러니까 저는 아침 먹고 오전에 도서관에서 썼다. 나는 올빼미 족이라 밤새 쓰고 아내와 딸에게 토스트를 구워주고 나는 자러 갔다 이런 집필 일상이 듣고 싶습니다. 하하 

 

작년 7기 연구원들의 사전 인터뷰 저자였다고 들었어요. 하반기에는 이 분을 모셔서 강연회도 열었다고 했구요. 우리 8기는 <한시미학산책>의 정민교수님이었죠. 정미교수님을 레이스 기간에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그 분은 일종의 화두 같은 느낌이거든요. 이건 순전히 거위효과라고 생각해요. 거위가 알에서 나올 때 처음 본 이를 향해 엄마라고 생각하는 거요. 우선 7기 연구원의 인터뷰 기사를 리뷰해서 답을 찾아보고, 그 다음에 다른 걸 해보고, 또 영 해소가 안되면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보기로 했어요. 그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매월 말에 월 1회 진행이 된다네요. 그 때 한 번 가서 책과 사진, 기사로만 본 철학자 얼굴을 직접 보고 싶어요. 대학로 마로니에가 노랗게 물들어 있겠죠? 아름다울 것 같아요.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그는 날카로우면서 둥글둥글하다. 한 번 직접 만나 보고 싶은 철학자다. 작은 이야기와 큰 이야기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썼다는 맺음말을 읽어보니 그는 인류문명 전체를 염려하고 있다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와 목차

 

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물음에 대해 답을 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5부인데 1부에서 신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고 나머지 부분에서 대답한다. 1부가 전체적인 문제제기에 속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신은 존재다, 창조주다, 인격적이다, 유일자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전체 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부분도 질문을 먼저 던지고 답을 찾아간다. 예를 들어 2부 신은 창조주라는 부분에서 올 수 있는 질문 존재란 무엇인가?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가 각각 장의 제목이 된다. 질문과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다보면 그 대답에 이르게 된 기독교나 철학사 안에서의 여러 탐색이 소개된다. 따라 갈 수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없는 게 더 많은 나같은 저급 독자, 비기독교인들을 위해 요컨대’ ‘정리하자면으로 나중에 정리를 해 두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한 디아트리베 기법 덕분에 내용은 못 알아들어도 문맥을 통해 저자의 친절함이나 안타까움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 미켈란젤로가 그린 노인은 누구인가 / 에로스의 날개

신인동형성 / 신론과 존재론 그리고 서양문명

2부  신은 존재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 지성도 넘고 신비도 넘어 /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 그리스인들과 존재 / 자연의 사다리에서 존재의 사다리로 / 존재의 계층구조에서 사회적 계층구조로 / 존재는 창조주다 / 히브리인들과 존재 /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

존재의 바다와 퍼텐셜’ / 신의 모습 상상하기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나 /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길’ / 페일리의 시계를 망가뜨린 사람들 /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나 / 메타노이아 신비적 형태에서 일상적 형태로

3부  신은 창조주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 안에 있나

위대한 생애, 불멸의 학문 / 고백인가, 증언인가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태초는 언제인가? / 무에서 유가 어떻게 나오는가? / 무수한 우주가 존재한다고? / 앨런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 / 리오타르의 다윈적 이성과 상호이해 / 영원이란 무엇인가 / 시간이란 무엇인가 / 시간의 끝에 영원이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와 프루스트의 회상’ / 천지란 무엇인가 / 무로부터의 창조 /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조의 여섯 날이 글자 그대로 ‘6인가 / 말에서 육신으로, 진리에서 행위로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풍요한 부자가 무엇이 필요하여? / 신의 작업에는 어떤 이유가 없다 /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 / 다윈과 기독교 /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나

천 년이 지나간 어제같은 문제 / 눈먼 시계공과 눈뜬 하나님 문제 /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 / 창조의 목적은 구원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세네카의 운명’ / 바울의 예정’ / 칼빈의 섭리’ / 아테네의 신 / 눈얼음 계곡 건너가기 /예루살렘의 신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 / 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 강한 섭리, 약한 섭리 / 기도는 왜 하는가 /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 두려움과 떨림 /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5부  신은 유일자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일자 / 플로티노스의 일자 /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들 /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 삼위일체 논쟁 /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 /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 삼위일체가 진정 의미하는 것 /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구약의 신이냐, ‘신약의 신이냐 / 유일신이 왜 질투하나 / 아브라함은 구원받았는가

유신론은 극복되어야 하나 /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 /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2)   장점과 보완점

 

풍부한 문학, 미술이 나와서 좋았습니다. 대신 그게 칼라 화보가 아니어서 아쉬웠어요. 3만원이 넘는 책값이 칼라화보가 들어가면 5만원 넘어가려나 칼라프린터기 잉크 도착을 자축하며 출력해서 붙여볼까 했어요.

 

그가 이야기 하는 방식이 대화체여서 좀 쉬웠다기 보담은 덜 어려웠어요. 저자소개에서 이 기법은 고대수사학에서 차용한 건데 디아트리베라 라고 부르는 거라는군요. 바울 서신 같은 게 이렇게 씌어졌다네요. 그럼 편지체인가봅니다. 그의 다른 저서들도 이런 말투로 씌어졌나 궁금해서 집 근처 화도진 도서관에 가서 저서들을 훑어보려다 말았어요. 늘 나의 게으름이 문제입니다. 나는 실물을 내 손으로 만져보는 걸 좋아하는 듯 해요.

 

신학, 철학은 멀리 떨어져 있는 걸로 생각했는데 문화 전반에 걸친 인용과 대화체가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기가 훨씬 수월하다고 싶었어요. 펼쳐나가는 게 이해가 안되더라도 요컨대이후에서 짧고 쉬운 입말로 개념을 넌지시 일러주니 친절했어요.

 

 

3)   감동적인 장절

 

(1)   신과 연관지어진 삶을 나무로 비유한 것이 잘 와닿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이름이 굳이 신이 아니라 진리같은 걸로 바꿔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런 연결성을 느끼는 상태에서 행복했다. 그리고 어떨 때는 동맥경화나 반신마비를 불러오는 뇌출혈, 자기만 불리는 이상세포의 역할을 내가 해서 전체가 잘 돌아가지 않게 할 때가 있다. 나의 경험과 김용규씨가 말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수프를 국으로 하듯 어쨎든 내 안에 있던 경험 중 비슷한 것을 가지고 이해하려 한다.    

 

57 구약성서에는 신의 말씀과 뜻을 따르는,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좆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과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시편 1:3)하면, 말씀과 뜻을 따르지 않는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시편 1:6)’와 같아서 망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에는 같은 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일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물론 비유입니다. 그렇지만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과 같은 탁월한 존재론적 표현이 담긴 종교적 비유지요. 우리가 앞으로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틸리히가 이미 갈파했듯이 이 같은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닌 비유들이 구약과 신약에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60 조지 마테슨

 

나를 떠나는 일이 없는 사랑이여,

내 지친 영혼을 당신의 초원 안에서 쉬게 하소서.

당신께서 주신 나의 생을 당신께 도로 바치나이다.

바다와 같은 그 깊음 속에서

내 생이 보다 풍요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길을 비추는 이시여

꺼진 내 등불을 당신에게 바치나이다

내 마음이 당신으로부터 다시금 빛을 받아 그 찬란한 빛에 의해

더욱 밝고 아름다워지기 위해서입니다.

 

60 톰프슨 <하늘의 사냥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노라,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노라, 세월의 아치 저  편으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노라, 내 마음의 미로를 통해

그리고 눈물의 안개 속으로 그를 피해 숨었노라

그리고 흐르는 웃음의 시냇물 속에

전망이 툭 트인 희망의 가로수로 달려갔노라

그러다가 거대한 공포의 심연 속으로

떠밀려서 쏜살같이 거꾸로 추락했노라

쫒고 또 쫓는 저 힘찬 발을 피해

그러나 서두르지 않는 추적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로, 위협하는 긴박감으로

그 발소리가 들렸노라. 아니 그보다

애통하는 목소리가 들렸노라

네가 나를 배반했기에 만물이 너를 배반하느니라.” 

 

(2)   존재의 바다 비유가 풍부하고 아름답다.

 

171 당신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존재의 바다 비유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차츰 드러나겠지만 존재의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가르침들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예컨대 우리는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선 신이 암암리에 사람처럼 생겼으리라는 끈질긴 망상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바다가 우주마저 포괄하고 초월할 만큼 무한하다는 점에서 신은 없는 곳이 없다는 오랜 주장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요. 이와 동시에 신이 유일하다는 교리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선포가 아니라, 존재의 바다가 무한히 광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포괄하며 그의 바깥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바다가 현재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처럼 그 자신은 무형이지만 모든 유형적 존재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형체가 없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교설을 이해할 수도 있지요.

 

(3)   역동적 의미의 동사 존재하다

 

144 히브리어로 존재를 의미하는 동사는 하야(hyu)입니다. 당연히 이 말도 정지적 개념인 있다는 뜻만이 아니라 그 역동적 개념인 있게 되다(생기다)’ 또는 있게 하다라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이 말이 신과 관련해 사용되는 경우에는 현존하다라는 의미뿐 아니라 생성하다작용하다라는 사역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157 정리할까요?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사과)을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스스로 생성, 작용하는 존재가 아니고야 다시 말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고야 어떻게 본질과 존재를 피조물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이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인들이 하야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

 

(4)   철학을 하는 과학자

 

210 한마디로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던 것겁니다. 위대한 두 거인의 이러한 학문적 취향이 그들 이후의 서양 학문을 크게 두 줄기로 갈라놓았지요.

 

(5)   다윈의 진화론 관련 여러가지가 모두 재미있었다. 밑줄을 거의 다 그었다. 특히 진화가 창조의 방법이라고 했던 것과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이야기. 신중한 성격이었던 다윈의 성격, 비글호의 탐사여행 등 그의 인생에도 흥미가 생긴다. 그이 이후에 사회진화론자들의 열정적인 시행착오를 읽으면서 인류가 겪을 수 있는 무서운 무지 생각없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어디서나 근본주의자들은 열정과 밀어붙이는 힘을 함께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이런 요소가 내 안에도 많은 것 같고. 서가에 이기적인 유전자책이 있다. 그럴 읽어봐야겠다.

 

456 신은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기독교가 이미 오래 전부터 확보했다는 것과 약간의 장애물만 제거하면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 약간의 장애물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겠지요?

 

458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 가운데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논란이 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그것들이 지닌 경이로운 복잡성, 정밀성은 태초의 6이라는 어느 시기에 일회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자연이 오랜 세월 동안 부단히 진화한 결과라는 주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화가 어떤 외부적 원인이 설계한 특별한 목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자체 메커니즘에 의해 자발적이고 맹목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화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자연은 단지 우연한 돌연변이이의 결과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며, 신의 목적 있는 설계에 대한 장구한 환상도 마치 일출 후 사라지는 안개처럼 말끔히 걷히리라는 것이, 도킨스를 비롯한 다윈 추종자들의 주장입니다.

 

480 , 그럼 전통 기독교 교리가 지지하는 창조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물론이고, 동방정교와 서방 가톨릭이 고대로부터 취하는 일관된 관점은 창조의 목적을 구속사와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과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신성에 참여시키는 만물의 신성화를 위해 창조가 이뤄졌다는 주장이지요. 여기에는 분명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각함으로써 기독교의 창조론을 유대교의 창조신앙과 구분 지으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483 기독교가 탄생했을 때 초기 교부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구약의 신신약의 신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차이점을 극복하는 것이었어요. 내용으로 보자면 창조의 신구속의 신’,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사랑과 은총이 넘치는 보편적인 하나님사이에 놓인,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본질적 간격을 해소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기 때문에 차라리 이 둘을 아예 분리 시키자는 발상이 자연스레 흘러나왔습니다.

 

(6)   세네카의 운명, 바울의 예정, 칼빈의 섭리가 정말 있을까? 이게 기독교적 패러다임의 문제인지 객관적인 진실인지 궁금했다. 구원이 이성이 아니라 은총의 부분이라는 것을 좀 더 이해하고 싶다기 보담 겪어보고 싶다. 근데 그러자면 개종해야하나? 싶을 만큼 운명, 섭리, 예정은 아름다운 개념인 듯 하다. 이것도 그러하고, 또 한편으로는 운명을 내가 바꾼다는 말도 그렇다. 두 가지는 대립적이면서도 비슷한 필수 방향인 듯 하다.    

 

(7) 신은 인격적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기도에 대한 부분. 이런 대화를 하고 싶어진다.

 

559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또한 신과 만나고 신의 사역에 동참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기도를 신과 인간의 대담으로 규정했습니다.

 

559 우리의 의구심에 부응하기 위해 이야기의 초점을 간구기도와 중보기도에 맞춰 볼까요? 자신의 소원을 비는 간구기도와 다른 사람을 위해 비는 중보기도는 감사기도나 경배기도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지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간구 또는 중보 기도에 당연히 신이 응답해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560 신은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

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신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전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기도를 통해 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절대성과 독립성이 손상되지요.

 

561 신의 섭리에 의한 강제는 선한 목적과 의도에 따른 것이어서 신의 인격성을 더 잘 드러낸다는 말이지요.

 

575 기독교의 대답을 요약하면 신의 강제적 섭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유익하다는 것이지요. 왜냐고요?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원하던 응답을 받으면 받은 대로, 또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한 대로 그 결과를 자신을 향한 신의 섭리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신의 예정에 대한 약한 섭리론 ßà 세상의 악,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 결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573 간단히 설명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그릇됨이 전혀 없고 전지전능한 신이 오직 자신의 섭리로만 인도하고 통치한다면 인간은 신이 자기 형상을 따라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신이 부리는 자동이형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반론이지요. 이런 생각을 가진 학자들은 신의 섭리에 대해 신이 아직 모든 결과를 알지 못한 채 자유로운 피조물들의 반응에 따라 결과가 나오도록 조종해 놓은 것이라는 이론 우리는 이것은 약한 섭리론이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을 내세웁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느 쪽 주장이 옳은 것 같나요?

 

(8)   키르케고의 실존3단계와 자식살해의 두 부류의 아버지 중 아브라함 부분. 그런데 만약 남편들의 자녀 살해가 윤리적 상태이든, 종교적 상태이든 그것에 동의하지 않거나 동감하지 않는 그 어머니들은 어땠을까? 부자, 부녀 관계 말고 이 사안에 대해서는 부부관계도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590 그런데 바로 여기에 당신과 나의 서글픈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누구나 아가멤논, 옙다, 브루투스 같은 이성적, 윤리적 영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성의 소리란 인간이 매번 자신의 실존적 나약함을 극복해야만 따를 수 있는 엄숙한 윤리적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키르케고르의 말대로 윤리는 주인공의 허약한 어깨에 거대한 책임을 지웁니다. 따라서 이 쇳덩러리 처럼 무거운 짐을 지지 못하고 쓰러지는, 나약한 우리들은 뉘우침을 거쳐 죄의식이라는 더깊고 새로운 절망에 다시 빠지게 되지요. 더 깊은 절망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이 절망은 네로같은 향락주의자들이 견뎌야 하는 절망보다 휠씬 더 크고 깊습니다.

 

594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이처럼 무한한 자기 체념을 통해 <종교적 단계>에 섰던 맨 처음이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아브라함을 내세웠습니다. …물론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을 제 손으로 바쳐야한다는 점에서는 두 부류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겠지만 두렵고 떨리는그 일 앞에선 정신과 영혼은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그 기막히고도 위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이 노인의 입에 물려 있던 천 근 쇳덩이 같은 침묵과 머리 위로 쏟아지는 끓는 쇳물 같은 고뇌에 대해 노인을 대신하여 자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당시 아브라함의 입장에 선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고 묻지요. 어찌 보면 이 노인의 여정이 세계와 삶의 부조리 때문에 날마다 불안에 떠는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601 그가 보기에 아가멤논과 옙다와 브루투스는 개인의 한계를 초극하는 보편적 윤리는 갖고 있었지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초인적 신앙은 없었지요.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603 칼이 번쩍이는 순간까지도 그는 믿었다. 하나님이 이삭을 요구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604 자 이제 생각해 볼까요?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신에게 바치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들 이삭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였지요.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전부였지요자신의 모든 불안과 불신이었습니다. …그것은 삶에 스며드는 부조리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전율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이었습니다.

 

608 키르케고르에게 종교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사유하는 것아 아니라 종교적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는 겉치레로 살지 마랄라고 외쳤지요. 인간이 되려면 인간처럼 살고, 기독교인이 되려면 기독교인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609 아브라함에게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성과 도덕을 통해 얻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구원과 은총이지요.

 

(9)   삼위일체와 유일성이 배타성이 아니라 포괄성을 의미한다는 부분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의 개념 안에 정말로 포괄성, 다양성을 가미하고 있다면 다른 것들이 공존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만 그 부분이 이해가 안되어 관련부분을 모아 두었다. (삼위일체든 사위일체든 이게 뭐 그리 중요하지 싶으다.)

 

715 내 생각에 존재의 바다라는 비유는 그것을 유물론적인 개념으로 간주하려는 위험성만 제거한다면 우리가 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비유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잠시 언급하자면 대강 이렇습니다.

:어떤 무한한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데, 그것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의해 무수한 물방울들이 생겼다가 없어진다. 게다가 무작정 출렁이는 것이 아니고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된 자신의 의지를 이루기 위해 출렁인다. 따라서 그 안의 모든 물방울은 잠시 존재하는 동안에도 그 바다의 뜻과 의지에 의해서만 이끌려 간다. 이 무한하고 역동적인 바다가 바로 신이다.

 

만일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삼위일체를 이해하려 한다면, 그 내용은 이렇겠지요 :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 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일자)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물들을 생성, 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정신)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영혼)이다.

 

어때요?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나뉨 속에서도 연합해 있고’,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분되는 셋이라는 주장이 보다 자연스레 이해되지 않나요? 적어도 내게는 이렇게 존재의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 생각하는 것이 삼위일체를 이해하거나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도 한 번 그리해 보라는 것이지요.

 

730 17세기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이자 성직자이기도 했던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유명한 장편소설 제목으로 또 20세기 중반 할리우드 스타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의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시는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지요.

 

누구든지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만일 흙덩어리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된다면

대지는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고

만일에 모래펄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의 땅이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여라.

어느 누구의 죽음일지라도 그 역시 나를 감소시키느니

나는 인류 속에 상호침투된 존재이기 때문이러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를 위하여 조문할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기에

 

731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단일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성이 단일성으로, 단일성이 삼위성으로 축소되는 일 없이 결합한통일성입니다. 이 통일성 안에는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자유와 평등과 사랑으로 이룩되는 인간 공동체의 원형이 담겼지요. 그것은 성격상 무규정성과 무제한성에서 오는 일자의 획일적포괄성과 통일성을 훌쩍 뛰어넘는 것으로, 삼위일체 신의 이종사랑에서 나오는 공동체적포괄성과 통일성이지요. 전자가 수동적, 소극적 성격을 가졌다면 후자는 능동적 적극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라는 말인데요, 이같은 내용이 우리가 나누는 이 이야기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이 장의 서두에서 신의 유일성이 곧 배타성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 이후 지금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무엇인가요?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지 결과지요. 따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741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지만,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12, 13세기에는 십자군이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끔찍한 살육과 약탈을 저질렀지요. 16세기에는 유럽의 가톨릭교도가 한 손에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총칼을 들고 중남미 각국에서 숱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17세기 이후에는 청교도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정복과 선교를 위해 온갖 만행을 드러냈지요. 그들은 하나같이 신의 유일성을 내세우며, 신의 이름으로 남자를 학살하고, 여인을 강간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거처를 방화한 다음, 제단을 쌓고 예배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로 이런 인면수심의 만행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에서 나온 배타성과 폭력성으로 비판받는 사례지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이교도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그리하듯이 그때 역시 신앙을 자신들의 세속적 탐욕에 이용하는 불순한 세력(성직자, 정치가, 상인)이 선동해서 저지른 반그리스적이고 반신앙적인 만행이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최선의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라는 오랜 격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십자군을 일으키며 신의 뜻이시다라는 구호로 민중을 선동했던 중세 성직자들이 그랬듯이, 신을 왜곡하여 빌미로 삼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쉬운 선동 방법이지만 동시에 가장 나쁜 방법이기도 하지요.

 

782 기독교 입장에서 종교적 다윈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가능한 한 덜포기하면서 타 종교의 신앙을 되도록 더인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자신의 가치관, 제도, 관행을 어느 정도 포기하지 않고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 없다는 의식에서 나온 궁여지책이지요. 그러다 보니 근래 활발하게 진행되는 다원주의적 연구와 논의 가운데는 그간 기독교 역사 속에서 행해진 숱한 폭력과 만행을 지적하면서 그 모든 악행의 근원인 신의 유일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신의 유일성에 대한 오해나 무지에서 비롯되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자세히 알아본 바에 따르면, 기독교가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본디 차별적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의 바탕이니까요. 따라서 단순히 논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종교적 다원주의에 관한 건전한 연구와 논의는 신의 유일성을 어떻게든 보존하면서가 아니고 어떻게 신의 유일성을 근거로 하여다른 종교와의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 낼 것인가에 모아져야 합니다.

 

(10) 니코스 카잔스키 우화.

 

마지막에 나는 당신입니다라고 말한 상태의 이 수도자는 삼국유사에서 해산기 있는 여인을 수행처로 들인 그 사람과 비슷한 상태인가 헤아려본다. 이 상태의 정반대는 데카메론에서 나의 악마를 잠재우기 위해 시골처녀의 지옥이 필요하다는 그 수도사 ??

 

773 니코스 카잔차키스 <성자 프란체스코>의 우화. 내 생각에 이 이야기는 신을 객체로 인식함으로써 신으로부터 역시 객체가 된 인간의 소외와 절망을 무엇인지, 나아가 구원이 무엇인지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평생을 바쳐 완전함에 도달하고자 애를 쓴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밤낮없이 신에게 기도했지요. 그러다 마침내 죽음의 날이 다가와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안에서 거기 누구시오?”라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지요. 수도자는 접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소리가 대답했지요. “여기는 둘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돌아와 가난, 단식, 끊임없는 기도, 울음 등 모든 고행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운명의 시간이 와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문을 두드렸지요. “거기 누구시오?”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접니다수도자가 대답했지요.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둘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떨어져 전보다 더 치열하게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백 살 노인이 되어 죽은 그가 다시금 천국의 문을 두드렸지요. “거기 누구시오?” 또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 수도자는 황급히 대답했지요. “당신입니다. 주님, 당신이에요그러자 즉시 문이 열려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어때요? 재미있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신과 주체 객체의 관계에 있는 한, 소외되고 절망하게 되며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해줍니다.

 

(11) 이 책을 저술한 철학자 김용규씨의 관점을 소개한 맺음말에서 몇 구절

 

804 한갓 작은 이야기들이 진리로 정당화됨으로써 제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되었지요. 그리고 곧바로 보편성 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각기 자신의 한 계를 넘어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각종 다른 영역에 침범하여 주인으로 행세하여 폭력을 행세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후반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신랄하게 고발한 이른바 근대성의 실체인데 그것이 연출한 가장 비극적 장면을 우니는 샤워실 안으로 가스를 주입한 아우슈비츠, 굴뚝으로 독극물을 투입한 구소련의 굴락, 여인들과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머리 위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확인하고 전율했지요.

 

806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과 세계와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주며, 우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공포로부터 방어먹이 되어주던 모든 것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기희생과 헌신을 이끌어 내서 인간과 세계를 가치 있게 하던 신은 죽어 버렸고, 인류애와 연대를 통해 사회를 진보시킬 이성과 주체도 소멸해 버렸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바다를 갈랐던 모세의 지팡이는 부러졌고, 유토피아를 향해 치켜들던 레닌의 팔은 잘렸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들을 차례로 몰아내고,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됨으로써 시대마다 유혹했던 공인된 처방들이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휴지조각이 되어 버린 겁니다.

 

806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곳에서 이제 당신과 나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로서 모든 당혹스러운 일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입니다. 전자는 전근대적 개념이고 후자는 근대적 개념이지요. 탈근대적 이야기 안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닙니다. 그래요 바우만이 이름 붙인 유동하는 공포지요.

 

808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요컨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되지요. 칸트의 유명한 경구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는 거지요.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첨부합니다.

 

신-인용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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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8 12:03:53 *.86.237.73

화요일 12시 마감이었는데 저는 목요일 12시에 완성본을 올렸습니다.

화요일 출근때까지 책을 다 못 읽은 상태였어요. 인용문 타이핑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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