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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9일 02시 58분 등록

저자에 대해서

 

버트런드 러셀

영국의 철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역사학자, 사회비평가.

20세기의 대료적 논리학자.

 

1872 5 18일 출생.

 

사실 타 대학의 교양 수업으로 수학 과목을 들을 때, 그 과목의 교수님이 러셀의 비화를 이야기해준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안좋은 선입견이 있었다. 그래서 러셀의 저작은 무의식 중에 회피하게 되었다. 이번에 저자 조사를 하면서 그 비화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워낙 저명한 인사라서 바이오그래피에서도 삭제된 것인지(분명 러셀이 맞긴 맞는데)… 다만 그의 저술이 너무나 훌륭했고 이제는 과거의 경직되었던 윤리관도 조금 헤이해졌으므로 이제 러셀을 긍정적으로 평가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가문은 몇 세기 전 튜더 왕조가 세워지며 권력을 얻어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휘그 당을 세운 가문이었으며, 버트런드 러셀의 할아버지 존 러셀 경은 영국 수상을 지냈다. 러셀의 부모는 매우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들이었다. 러셀의 아버지 존 러셀은 무신론자였으며,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생물학자와 자신의 아내간의 정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부모 양쪽 모두 당시 사회 분위기에 앞서가는 "산아제한"의 지지자였다.

 

러셀에게는 프랭크와 레이첼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다. 이중 레이첼은 1874년 어머니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난뒤에 세상을 떠났다. 1876년에는 아버지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기관지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프랭크와 버트런드 러셀은 조부모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할머니의 교육 당시 러셀 백작부인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 ,종교 이외의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여 다윈 사상의 지지자였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성서 이야기인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23:2)는 러셀의 좌우명이 되었다.

 

러셀의 사춘기 는 굉장히 고독했으며, 그는 몇 차례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러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종교와 수학이었으며,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그는 집에서 몇 명의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 그의 형 프랭크는 러셀에게 유클리드기하학을 가르쳤다. 15세가 되면서 러셀은 기독교의 교리가 합당한가에 대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으며, 18세에 그는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종교가 어떤 순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사회악을 더 끼치며 전쟁 등의 세계의 고통을 야기한다고 생각했다.

 

러셀은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곧 수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케임브리지의 Wrangler 1893년에 졸업하고 1895 Fellow가 되었다. 그는 17세에 처음으로 퀘이커 교도였던 Alys Pearsall Smith와 만나 사랑에 빠져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94 12 13일 결혼한다. 그러나 곧 파경을 맞이하여 1921년까지 별거하며 형식적으로만 부부로 남아있다가 이혼한다. 이 기간 동안 러셀은 Ottoline Morrell과 배우 Constance Malleson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과 열애 관계에 빠졌다.

 

러셀은 1896, 자신의 전 생애에 걸친 정치,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출간하고, 이어서 같은 해에 런던 경제 대학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1902 Sidney Webb, Beatrice Webb 에 의해 세워진 Fabian society coefficients dining club 안의 사회 개혁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이후 트리니티 대학에서 수학의 기초 원리를 연구하며, 집합론의 기초를 뒤흔드는 러셀의 패러독스를 발견하였다. 1903년 그는 수리논리학에 대한 첫 번째 저작인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 을 발간하며, 여기서 수학은 매우 적은 수의 공리에서 유도될 수 있음을 보여, 논리주의의 주장에 큰 근거를 실어주었다.

 

1905년에 그는 철학 저널 Mind에 에세이 "On Denoting"을 싣고, 이후 1908년 왕립학회 회원이 된다. 이후 Principia Mathematica 1권을 화이트헤드와 함께 1910년 출간하며 수리철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

 

1910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공학도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곧 그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들어오게 되며, 러셀은 그를 천재이며, 자신의 논리학의 후계를 이을 사람으로 평가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매료된 러셀은 많은 시간을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공포증과 우울증을 돌봐주는데 보내게 된다. 이것이 상당히 러셀의 기력을 소모했지만, 러셀은 굽히지 않고 비트겐슈타인에게 학문을 하도록 권유했으며, 1922,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저작 중 하나인 논리철학논고를 출판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1918 1차 대전 전쟁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그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재해석한 Logical Atomism 의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중 러셀은 몇 안되는 전쟁 반대론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1916년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고되며, 100파운드의 벌금을 선고 받는다. 러셀은 감옥에 가기를 희망하여 이를 내기 거부했으나, 정부에서는 러셀의 책들을 압수해 경매에 부쳐 벌금을 징수하였다. 압수된 서적은 러셀의 친구들이 구매했으며, 러셀은 "케임브리지 경찰에 의해 압수됨" 이라는 낙인이 찍힌 킹 제임스판 성서를 기념품으로 간직한다.

 

러셀은 1919년 복직되었으나, 1920년 강사직에서 물러났고, 이 대학에서 1926 Tarner Lecturer 로 활동하다, 1944-1949년 까지 Fellow 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미국이 영국편으로 참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강연을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것에 대해서는 브릭스튼 감옥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1918 9월 석방된다.

 

19208월 러셀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미친 영향을 조사하기 위한 1920년 영국 대표단에 뽑혀 갔다.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1시간에 걸친 토론을 했으며, 회고록에서 레닌의 "악마적인 잔인성"을 발견했고, 레닌의 성품을 "독선적인 교수" 에 비교하며, 실망감을 표시했다. 이후 증기선을 타고 볼가강을 내려가기도 했다. 러셀의 연인이었던 도라 러셀도 러셀과는 별개로 러시아를 같은 시기에 방문했는데, 그녀는 러시아 혁명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하지만 러셀의 경험은 이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철회하게 했고, 자신의 경험을 "The Practice and Theory of Bolshevism"에서 회고하며, 영국으로 돌아갈 때 동료 24명이 러시아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대해 반대 의견으로 설득하려고 한 이야기를 싣는다. 일례로, 러셀은 오밤중에 들은 총성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비밀경찰의 총살이라고 주장하지만, 동료들은 자동차 엔진 소리였을 거라고 흘려 듣는 장면이 있다.

 

1921 8 26일 귀국 당시, 도라가 임신 6개월 차였기에, 러셀은 Alys와 이혼을 서두르고, 1921 11 27일 도라와 결혼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1921 4대 러셀 백작인 존 콘라드 러셀과, 캐더린 러셀이 있다. 이 시기에 러셀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물리학, 윤리학 등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1930년 도라는 셋째 아이인 딸 Harriet Ruth를 출산하였다. 그의 형 프랭크가 1931년 죽자, 그는 러셀 백작 3세가 되었다. 러셀은 회고하기를 이 백작이라는 칭호는 호텔룸을 잡기에 유용했다고 한다. 그와 도라의 결혼 생활도 결국 종말로 치달았는데 이유는 도라가 미국 저널리스트인 그리핀 베리와의 사이에 두 명의 자녀를 더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1932년에 이혼하였다. 그리고 1936년 러셀은 세 번째 부인으로 옥스퍼드대 학생이던 스펜스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콜래드 세바스티안이라는 아들이 있으며 훗날 진보당의 대표적 정치가가 되었다. 1952년 러셀은 스펜스와 이혼하고 네 번째 부인 에디트 핀치와 결혼하였으며 이 결혼은 러셀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러셀의 큰 아들 존은 정신병을 앓았으며, 존의 아내 수전 역시 정신병이었기 EAONSE 러셀과 에디트는 이 둘 사이의 세 손녀들에 대한 법적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이 세 손녀 중 둘은 훗날 정신분열병으로 판명되었다.

 

러셀은 처음에는 히틀러를 패배시키는 것보다 전 세계에 걸친 전쟁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아, 나치 독일에 대한 재무장을 반대했으나, 1940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전 유럽을 장악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영구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에, 자신의 시각을 바꾸게 된다. 1943년 그는 "정치적으로 상대적인 평화주의"를 제창한다. 전쟁은 언제나 거대한 악행이지만, (히틀러의 나치 독일 같은) 특정하고 극단적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덜 나쁜 악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1944년 귀국하여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45년 원자폭탄이 발명되자, 그는 수소 폭탄의 발명을 예언하고 핵무기 반대 운동과 함께 세계 평화 운동을 벌였다. 《서양 철학사》, 기독교 비평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비롯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수학자로서 출발하여 <수학 원리>를 통해 수리 철학 및 기호 논리학에 공헌하였다. 철학·정치·교육·인생 등에 관한 평론도 있다. 주요 저서로 <수리 철학 서설> <정신의 분석> <서양 철학사> <권력> 등이 있다.

 

 

 

 

 

 

 

 

 

 

 

 

 

 

 

 

 

 

 

 

 

20 사이 사실은 그 당시 그리스 사람들의 정신이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정신은 질서 정연하고 합리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마구 날뛰는 본능적인 다른 면이 있다. 전자는 철학과 예술과 과학을 일으켰다. 후자는 생산력을 숭배하는 의식에서 연유하는 매우 원시적인 종교로 나타나고 있다. 이 두번째 요소가 호메로스의 시에서는 아주 잘 억제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훗날 특히 그리스 사람들이 동방 세계와의 접촉을 새로이 재개하게 되었을 때 이 격련한 본능적 요소가 다시 표면에 드러나게 된다. 이 본능적 요소가 트라키아 지방의 신이었던 디오니소스 즉 박카스 신의 숭배와 제휴했던 것이다. 이 원시적인 야만성을 근원적으로 순화시키는 감화력을 발휘한 사람이 바로 전설적 인물인 올페우스인데, 그는 술과 야수성에 도취한 박카스교의 여자 사제들의 손에 온몸이 갈가리 찢겨 죽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올페우스의 교리는 금욕주의적 경향이 있으며 정신적 황홀의 경지를 강조한다. 올페우스는 이를 통해 “열광적 열중”, 즉 신과의 합일의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다른 방도로는 찾을 수 없는 신비로운 지식에 도달하기를 바랐다. 이처럼 순화되고 품위를 갖춘 올페우스교는 그리스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첫번째 영향은 피타고르사에게 나타났는데, 피타고라스는 올페우스교를 받아들여 자신의 신비철학에 조화시켰다. 이 이후로 올페우스교의 여러 가지 요소가 플라톤의 철학과 대부분의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의 철학 가운데 순수하게 학문적인 내용이라 인정할 수 없는 부분에 흘러 들어갔다.

è 수식어들에 일부 동의할 수 없기는 한데,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사건건 태클을 걸지 않고 이해하는 쪽으로 읽어보려 한다. 러셀은 올페우스쪽으로 취향이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순화된 것보다 더 많은 원시적 요소가 올페우스교의 전통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요소들이 참으로 그리스 비극의 원천이다. 언제나 공감이란 격렬한 감정과 정열에 들뜨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법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본질이 카타르시스, 즉 감정을 정화시키는 일이라고 설명한 건 정곡을 찌른 말이다. 어쨌든 그리스 정신이 이 세계를 단호하게 변혁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 정신의 이 양면성 덕분이었다. 니체는 그리스 정신의 이 두 요소를 아폴로적 원리와 디오니소스적 원리라고 불렀다. 이 두 요소 중의 어느 하나만으로는 그리스 문화의 엄청난 폭발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무렵 동방 세계에서는 신비적 요소가 최고의 권위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동방의 신비적 요소가 지닌 마력에만 사로잡히지 않게 한 것은, 학문의 전통을 세운 여러 학파가 이오니아 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학문을 하는 침착한 정신만으로는 신비에 사로잡힌 정신이 그럴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어떠한 지적 혁명도 일으킬 수 없다. 지적 혁명에는 진리와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탐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스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건 올페우스교의 영향인 것 같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철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앞에서 나는 일반적 물음을 제기하는 일이 바로 철학과 과학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반적 물음을 제기하는 일은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는 일인가. 일반적 물음의 답을 찾는 일은 가장 넓은 의미로 보면 무심한 관찰자에게는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질서를 찾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è 물음은 모든 학문의 발상지다.

è 여기에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 아는 고대부터 동양에서는 서양의 그리스 철학과 같은 자연의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이 미약하였음(최소한 문헌으로 잘 남아있지 않는 듯)이 신기하였다. 왜일까? 왜 “무심”하였던 것일까? 러셀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서양에서는 올페우스의 기운이 강하였고 우리에게는 신비적 요소에의 탐닉 성향이 더 짙었기 때문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에는 그저, “무심”했던 것이 아닐까?

è 생명이 탄생하는 최적의 조건과도 같이, 철학이 태어나기 위한 최적이 조건이 그리스에 형성되었던 것일 수 있다. 민주정치와 노예제도로 일할 필요 없는 자들, 올페우스적 가치가 추앙받는 분위기… 우리는 그 생명(철학) 탄생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22 인간이 이 세계에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첫째로 자연의 여러 가지 힘을 인간의 뜻에 따라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러니까 마술은 원시과학인 셈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와는 다른 근원에서 자라나왔다. 종교가 자라나온 근원은 자연으니 규칙적인 변화를 거스르거나 벗어나는 결과를 얻으려고 시도하는 일이다. 종교가 나름대로 구실을 하는 건 기적의 영역인데, 이 기적의 영역에서는 인과 관계가 폐기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고 방식은 원시인의 사상에서는 한데 뒤섞여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혀 다른 사고 방식인 것이다.

è 마술과 종교의 차이. 매우 명확한 사고. 훌륭하다.

 

23 그리스 철학이 전개되어 온 단계들을 살펴보면 어느 단계에서나 여러 가지 이원론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들이 글을 쓰거나 토론을 벌여 온 주제들은 어느 단계에서나 이런저런 형태의 이원론의 틀 속에서 논의되어 오고 있다. 그 모든 이원론의 바탕에는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깔려 있다. 그리스 사람들의 사상에서 이 구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원론은 선과 악의 이원론과 조화와 투쟁의 이원론이다. 다음에는 현상과 실재의 이원론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대단히 활기를 띠고 있는 이원론이다. 이에 더해서 정신과 물질을 가르는 이원론, 자유와 필연을 나누는 이원론도 있다. 이 밖에도 이 우주의 무수히 많은 사물이 단 한 가지 것으로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여러 가지 것으로 만들어졌는가, 단순한가 아니면 복잡한가 하는 우주론적 물음이 제기되었으며, 마침내는 혼돈과 질서의 이원론, 무한과 유한의 이원론까지 제기되었다.

 

24 헤겔이 변증적 과정에 대해 자시 식의 생각을 갖게 된 최초의 계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경쟁하는 이론을 가지고 실제로 보여준 엎치락뒤치락 하는 토론 과정을 주의깊게 살펴 본 일이었다.

 

25 만물은 물 – 밀레토스의 탈레스 ….. 그는 기하학적 규칙들이 같은 종류의 문제 전체에 걸쳐 일반적으로 적용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 일반성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 사람들만이 도달한 독창적인 생각이다.

 

26 탈레스의 견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계가 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모든 물질이 실은 한 가지 물질로 만들어진다는 견해는 참으로 훌륭한 과학적 가설이다.

28 귀류논법 – 아낙시만드로스. 인간은 훨씬 더 짧은 기간에 자립할 수 있는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하였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30 신비주의가 감내하기 어려운 ㄴ압력으로 사회를 내려누르지 않는 곳에서는 학문적 사색이 시작될 가능성이 한층 높은 법이다. 그러니까 그리스 철학에 밀레토스 학파 이후에 나타나는 많은 학파가 그들 나름의 신비주의 색채를 띄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학파가 밀레토스 학파 덕분에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해야 한다.

 

밀레토스 학파는 그 당시의 어떠한 종교적 운동과도 전혀 결속되어 있지 않다. 정말이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하나같이 당시 널리 퍼져 있는 종교적 알력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그들의 괄목할 만한 특징들 중의 하나다. 이는 피타고라스 학파와 같은 학파에 대해서조차 옳은 말인데, 피타고라스 학파는 원랠는 종교와 대립하지 않았던 학파이다. 그리스 사람들의 종교 생할은 대체로 각양각색의 도시 국가들이 지니고 있는 관습들과 결합되어 있었다. 철학자들이 철학자로서의 길을 개척해 나가면서 그들이 살고 있던 도시 국가의 국가 종교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은 못 된다. 이런 일은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자립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닥치기 쉬운 운명이기 때문이다.

 

32 피타고라스 학파 – 그들은 이 세상을 철학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야말로 사람이 이 무상한 세계에 태어나는 우연성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며, 그래서 이 삶의 방식만이 출생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고 보았던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인간의 영혼이 순환하는 윤회에 얽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è 모든 사상들은 유한한 생을 초월하는 개성적인 방식들의 하나

 

33 피타고르사그 음악에서 발견한 몇 가지 수학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모든 사물의 근본이 수에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기는 아 주 쉬웠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들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수적 구조를 알아내야 한다. 인간은 이 세계의 숫적 구조를 파악하자마자 이 세계를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정말 지극히 중요한 생각이다. 이 생각이 지닌 중대한 가치는 헬레니즘 시대 이후부터는 일시적으로 빛을 일게 되었으나 후세에 학문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고대의 학문적 원류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자 또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주로 실제적인 필요에 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동기에서 수학을 연구하는 일도 피타고라스에서 처음 나타난 걸 볼 수 있다. 이집트 사람들도 얼마간의 수학적 지식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그건 피라미드를 세우고 토지를 측량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 사람들은 헤로도투스의 말에 따르면 “탐구 그 자체를 위해서” 수학적 문제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피타고라스가 그 중에서도 최초의 인물이었다.

 

34 è 무리수를 폭로한 사람을 죽일 정도로 학문의 신념이 종교화되었던 이유? 왜 현재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는가?

 

35 나중에 우리 앞에 이데아론 즉 형상론이나 보편자론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ㄴ이론도 실은 피타고라스 학파가 수학 연구에 열중하다가 만들어 낸 것이다. 수학자가 삼각형에 과한 어떤 정리를 증명할 때 그가 언급하고 있는 대상은 어디엔가 실제로 그려져 있는 특정한 삼각형이 전혀 아니다. 확실히 그 대상은 수학자가 정신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성의 대상과 감각의 대상을 가르는 구별이 생기게 된다.

è 피타고라스는 서양 지혜의 원류급

 

36 또한 피타고르사 학파 사람들이 지닌 신념들 속에는 올페우스적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주신이 아폴로였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들의 신앙이 지닌 이 아폴로적 성격에 의해서 서양의 이성주의적 신학이 동양의 신비주의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è 올페우스와 아폴로는 무슨 차이가 있나? 앞서서도 용어가 혼동되었다.

è 디오니소스 > 올페우스 > 아폴로? : 정도의 차이?

è 디오니소스 = 동양의 신비주의?

 

36 크세노파네스의 주된 공격 목표는 인간의 형상을 본따서 신들을 만들어 모셔 놓은 올림푸스 산의 판테온 신전을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이었던 듯하다. 그는 한편으로는 올페우스교의 부흥에 따라 고개를 드는 신비주의에도 반대하면서 피타고라스를 조롱하기도 하였다. 철학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받은 다음번 철학자는 역시 이오니아 사람인 헤라클레이토스이다. …… 그는 살모가 죽음이 우주의 구석구석에서 영원히 명멸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 “시간은 장기놀잉를 하는 어린애라 할 것이니, 그 판의 전권이 그 손에 달려 있다”고 쓰고 있다. 또 분별력이 둔한 자들을 업신여겨 조롱하면서 “말을 듣고도 귀머거리처럼 못 깨닫는 바보들에게는 말이란 저들이 있을 때 없다는 걸 증명해 주는 증거일 따름이다” 또한 “제 말과 글의 뜻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을 가진 자들의 눈과 귀는 인간에 대한 사기꾼 증인이다”라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신랄한 어투로 경멸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가치있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전심전력을 다해 많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걸 일깨워 주려고 “금을 찾는 사람은 많은 땅을 파헤치고도 정작 금은 조금밖에 얻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일이 너무나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당나귀는 금보다 지푸라기를 원하게 마련이다”는 말로 깨끗이 처리해 버린다.

 

“사람들은 어떻게 대립의 상태가 그대로 조화의 상태일 수 있는가를 깨닫지 못한다. 그건 활대와 할시위의 조화와 마찬가지고 서로 대립하는 긴장들의 조화다.

 

그러므로 투쟁은 이 세계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의 원리이다. “호메로스가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 투쟁이 사라져 버리기를!’ 하고 기원했던 건 잘못이었다. 그는 자신이 우주의 멸망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만일 이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우주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다”라는 말은 군대의 좌우명으로서가 아니라 이와 같은 논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견해는 우주의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는 근본 물질을 필요로 한다. 그는 세세한 점에서는 밀레토스 철학자들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원리에 관해서는 선배 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불을 근본 물질로 선택했다. 이 사실은 “상품들이 금으로 바뀌고 금이 다시 상품들로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은 불로 바뀌고 또 불은 모든 사물로 바뀐다”는 말이 알려 준다. 상품에 빗댄 이 직유는 그의 이론의 요점을 보여준다. 기름 등의 불꽃은 고정된 사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름이 빨려 올라가는 동안 연료인 기름은 불꽃으로 변형되고, 이 연소 과정에서 검댕이 생겨나 내려앉는다. 그러고 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사건이 이런 식의 변화 과정이며, 따라서 이 세계의 어떤 사물도 계속 똑 같은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사람은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새로운 밀우 계속 흘러 오고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러한 예를 들어 자기의 이론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후세의 철학자들은 “만물은 유전한다”는 유명한 말을 그의 말이라고 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흘러다니는 자들”이란 별명으로 헤라클레이토스 학파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è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에 열광하면서 짜라투스트라를 이름으로 따온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구나. 불을 신으로 모시는 조로아스터 교의 페르시아 이름인 짜라투스트라.

 

헤라클레이코스의 대립 이론 – 대립자들에 관한 이론 – 은 이 예를 통해서 서로 갈등하고 있는 특징들이 실은 하나의 상황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들이라는 걸 일깨워 준다. 이런 생각이 가장 또렷하게 표현된 진술들 중의 하나가 “선과 악은 하나다”라는 진술이다. 이 말의 뜻이 선과 악은 그게 그것이라고 동일시해야 한다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이와 반대로 내리막길이 아닌 오르막길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악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선의 개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요컨대 산비탈을 없애 버림으로써 오르막길을 없앤다면 그와 동시에 내리막길도 없어져 버리는 법이다. 선과 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말일 것이다.

è 헤르만 헤세. 데미안. 아브락삭스.

è 이 당시 헤세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선과 악의 개념. 니체의 사상이 나치에 쓰인 것과는 별 상관이 없나?

 

“이런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으로 유지되는 이 세계는 어떤 신이나 어떤 인간이 만들어 낸 게 아니다. 그래도 이 세계는 영원한 것인데, 이는 이 세계가 타는 데에도 사그라지는 데에도 한도를 갖춘 앞으로 언제까지나 영원히 타는 불이기 때문이다.

è 니체의 영겁회귀

 

37 그러므로 투쟁은 이 세계를 살 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의 원리이다.

 

38 이런 생각이 가장 또렷하게 표현된 진술들 중의 하나가 “선과 악은 하나다”라는 진술이다. 이 말의 뜻이 선과 악은 그게 그것이라고 동일시해야 한다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이와 반대로 내리막길이 아닌 오르막길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악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선의 개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요컨대 산비탈을 없애 버림으로써 오르막길을 없앤다면 그와 동시에 내리막길도 없어져 버리는 법이다. 선과 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말일 것이다.

 

40 헤라클레이토스는 크세노파네스와 마찬가지로 올림푸스적 종교든 올페우스적 종교든 당시의 종교를 모조리 비웃었다. 사람은 종교의 의식과 희생을 통해 선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는 일이 지닌 피상적이며 원시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간파했다. “헛된 짓인데도 저들은 피로 몸을 더럽힘으로써 자신을 정화시킨다고 여긴다. 이런 짓은 진흙탕에 들어가 흙탕물로 발을 씻는 짓이나 매한가지다. 누구나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미쳤다고 간주해 버릴 것이다.” 종교의 이 측면으로부터는 좋은 것은 전혀 나올 수 없다.

 

그렇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이 지혜로워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보는데, 그건 사물들을 근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기본 원리를 파악하는 길이다. 이 근본 원리는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조화를 이룬다는 원리이다. 사람들은 서로 대립하는 것들의 조화가 도처에 나타나고 있는데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è 데미안의 사상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것 저것 많이 보고 들어 배웠다고 해서 진정한 이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이런 견해를 헤겔에서 다시 보게 될 텐데 헤겔의 견해의 원천은 헤라클레이토스이다.

 

41 헤라클레이토스는 보편 원리 즉 로고스는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는 것인데도 많은 사람이 눈이 멀어서 이를 보지 못하고 저마다 자기 특유의 지혜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여론은 결코 보편 원리가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일반 대중이 공통 원리를 알아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경멸하였다. 그는 귀족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에 잘 어울리는 귀족 정치주의자로서 최고의 인간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찬양하였다.

è 이해는 되지만, 최고의 인간이 누구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최고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객관성이 상실된다.

è 최고의 인간이 공리주의적 선을 행하리라는 법은 없다. 어리석은 군중을 최대한 일깨우는 것만이 방법일 것이다.

 

42 선배 철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비판은 이전의 모든 이론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약점을 지적하는 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는 이 약점은 모든 사물이 어떤 기본 재로로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주장하면서 그와 동시에 허공이 있다고 주장하면, 이 두 견해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발견하였다. 파르메니데스는 물질에 관해서는 “그것은 존재한다”(it is)라고 기술할 수 있고, 허공에 관해서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it is not)라고 기술할 수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전의 철학자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서술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에는 물질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평할 수조차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러한 언어 사용에 반대하여 물질에 관해서는 오직 “그것은 존재한다”는 표현만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è 파르메니데스가 좀 많이 나가긴 했지만, 그가 오류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공은 존재하는가? 0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가? 없다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은 모순이지만, 그 개념은 존재한다. 개념으로서의 “무”는 존재한다.

 

44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비판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에 대해 올바르게 논평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주목할 가치가 있다. 사물들이 불로 이루어진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견해는 실은 그의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불꽃을 예로 사용하여 이 세계의 어떤 것도 영원히 정지해 있지 않다는 것, 즉 모든 것이 과정에 있다는 중요한 개념을 다채롭게 설명하는 맥락에서 이 말은 은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의 맥락에서 “그것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it is and is not)와 같은 진술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실제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기본 신조에는 언어를 토대로 하여 세워진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이미 암암리에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45 이 역설의 요점을 명백하게 드러내 놓고 검토해 보면, 실제로 누구도 도저히 주장할 수 없는 것은 그것 (사고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it is not)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것도 아니다(it is not a certain kind)라는 말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가령 내가 잔디는 빨갛지 않다 라고 주장한다면 잔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잔디는 빨간 것들로 이루어지는 종류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과 헤라클레이토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가운데 양극으로 대립하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플라톤 이외에도 원자론자들이 이 두 가지 대립하는 관점을 종합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원자론자들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는 불변의 기본 입자라는 생각을 받아들였고,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는 끊임없는 운동이란 생각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이루어진 두 개의 대립하는 사상의 종합은 나중에 헤겔이 변증적 과정을 암시받았던 몇 가지 고전적 실례 중의 하나다.

 

è 엠페도클레스 –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사상을 전수받음. 질량보존의 법칙의 선구자 같은데.

 

48 엠페도클레스는 지금으로서는 무엇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알아냈는지 말할 수 없지만 빛이 전파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달빛이 간접적인 빛 즉 반사 광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생명에 관한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은 이 순환 이론과 결합되어 있다. … 동물체의 여러 부분이 적자 생존의 원리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연한 조합에 의해 결합체들을 만들어 낸다. … 따라서 최적자 생존이라는 진화 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시기인 셈이다.

 

종교에 관한 엠페도클레스의 견해들은 올페우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종교에 관한 견해들은 그의 철학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엠페도클레스가 종교에 대하여 쓴 글 속에서 자신의 세계에 관한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견해들을 고수하고 있는 점만큼은 상당히 흥미롭다고 하겠다. 이처럼 어떤 사람의 신념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일은 아주 흔히 일어나는데, 특히 자신의 신념들에 대해 비판적 검토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정말이지 누구도 이와 같이 서로 충돌하는 신념들을 동시에 승인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제 믿고 있던 신념과 전혀 상반되는 신념을 혹시 서로 모순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도 한번 해보지 않고 잘도 믿고 살아간다.

 

54 하지만 자신감이란 터무니없는 오만에 빠지기 쉬운 법이다. 기원전 5세기 말엽에 나타나 이러한 사람들에게 훌륭한 삶의 표준을 깨우쳐 주기 시작한 인물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è 소크라테스의 출현이 가지는 시대적 의미 해석

 

57 아낙사고라스가 무신론자였다고 상상하는 건 잘못일 것이다. 하지만 신에 대한 그의 생각은 철학적인 개념이라서 아테네의 국교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불경죄 혐의를 받은 것도 그가 갖고 있던 신에 대한 비정통적 견해 때문이었다. 그는 신을 모든 운동의 원천이 되는 능동적 작동 원리인 누스와 같은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è , 인격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60 후기 피타고라스 학파는 천문학에 관해서 매우 대담한 가설을 전개하였다. 이 가설에 의하면 이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중앙의 불이다. 지구는 이 우주의 중심에 있는 불의 주위를 돌고 있는 혹성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면이 언제나 중앙의 불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불을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è 왜 태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지구의 자전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에? 태양 역시 중앙의 불로부터 나오는 빛을 반사하고 있는 하나의 혹성이라고 보았다. 이 가설은 나중에 아리스타르쿠스(기원전 3세기에 활약)가 제창한 태양 중심설 쪽으로 크게 접근한 이론이었다. 하지만 후기 피타고라스 학파가 천문학 이론을 전개할 때 가정한 우주의 형태에는 곤란한 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옛날 견해로 되돌아가 버렸다. 다른 문제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가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잘못된 견해가 – 옳은 견해 대신에 – 그 출처조차 까맣게 잊혀져 버린 오랜 후세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사물들의 구성에 관한 이론의 성장에 관해서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이 그 이전의 많은 철학자가 간과해 버렸거나 오해했었던 한 가지 특징을 제대로 인식하였다. 허공 즉 진공에 대한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운동은 허공 없이는 만족스럽게 설명될 수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나중에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퇴보된 견해로 되돌아가 버렸다. 후세에 물리학 이론이 발전할 수 있도록 제대로 방향을 잡아 놓은 생각은 원자론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è 리처드 파인만은 인류가 멸망하고 새로운 인류가 탄생한다고 했을 때, 이들에게 단 한가지 지식을 알려줄 수 있다면 알려줘야 할 것은 “이 세계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류의 과학도 원자를 발견한 이후 폭발적으로 발전하였다.

è 한 사람의 “훌륭한” 철학자의 잘못된 생각이 과학을 수 천년 퇴보시킬 수 있다.

 

64 이 논증(제논)의 결론에 어떤 잘못이 있는가를 밝히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논증이 피타고라스 학파의 단위에 대한 기본 신조를 비판하는 논증으로서 완벽하다는 건 아주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단위 개념을 버릴 때에만 제논의 결론이 어떤 과오를 범하고 있는가를 밝힐 수 있는 무한 급수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71 소피스트들은 인간이 도저히 참다운 지식에는 도달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지식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해 버렸다. 사람에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쓸모있는 의견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 생각에는 약간의 옳은 점이 있다. 실제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성공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점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소피스트들은 적당히 통할 만한 실제적 조처에 관심을 두었는데, 소크라테스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2. 아테네의 철학

76 페리클레스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사로잡혀 있던 미신으로부터 벗어난 정신과 내성적이면서도 온화한 성격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약간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무르익게 된 것은 페리클레스 덕이었다.

 

81 이 사실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사상의 주된 노선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언제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참다운 지식이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 그러니까 사람이 저지르는 악행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지이다. … 그러니 덕은 곧 지식이다. 최고선으로서의 덕과 지식을 연결시키는 건 그리스 철학 전체에 걸쳐 보이는 특징이다. 기독교 윤리는 이와 정반대이다. 기독교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수한 사랑인데, 이 사랑의 감정은 아무래도 무지한 사람에게서 더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83 즉 어느 누구도 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의 무지를 폭로하고 다니는 동안에 적을 많이 만들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델파 신전이 내린 신탁의 참다운 의미 즉 오직 신만이 현명하고 인간의 지혜란 하찮은 것이며,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지혜가 보잘것없는 것임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 인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체하는 사람들의 가면을 벗기는 일에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평생 가난에 쪼들렸지만, 그래도 기어이 신탁대로 살고자 노력했다.

 

86 대학의 고유한 임무는 학생들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습관을 익히게 하고, 어느 주제를 대하든 활용할 수 있는 규범들과 기준들을 이해하도록 하는 일이다.

 

89 프랑스 논리학자 고브로가 플라톤의 철학은 일종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유일한 형이상학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도 이 사실임에 틀림없다.

 

91 예술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한갓 의견을 갖는 데 그치는 반면, 아름다운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지식은 반드시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식의 대상은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ㅇ삼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 지식이라는 말은 전혀 지식이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은 일단 이루어졌다 하면 영원히 확실하게 확정되므로, 혹시 오류일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조금도 할 필요가 없는 진리이다. 이와 반대로 의견은 오류에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의견은 존재하는 것에 관한 지식도 아니고 또 아무 것도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의견이란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대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생각임에 틀림없다.

 

92 우리는 철학을 모르면 이 이야기 속의 동굴에 갇힌 죄수처럼 세상을 살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오직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들 즉 사물의 현상만을 보며 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자가 되면 이성과 진리의 햇빛 아래서 동굴 바깥에 있는 진짜 사물들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실재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진리를 드러내 보여주고 알 수 있는 힘을 주는 빛은 선의 형상을 상징하고 있다.

è Reality?

모두가 자신이 진짜라고 한다.

(1)   철학을 논하는 사람들에 대해, 철학 전체를 싸잡아 “형이상학”적 놀음이라 칭하는 “현실주의자들”

(2)    철학을 모르는 이들은 “진짜”를 모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들

 

92 이데아론 즉 현상론

 

95 누구나 두 개의 사물에 대해 거의 똑같지만 완전히 똑 같은 건 아니다라는 말은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개의 사물이 거의 똑같이 않으나 완전히 똑같지 않은 건 아니다라는 말은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말이다. 이 비판은 형상론의 약점을 훤히 보여주고 있다.

è 탁월한 설명이다.

è 두 개의 명제는 상황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으므로.

 

98 관리자들의 사회 생활과 경제 생활의 방식은 엄격한 공산주의라고 할 수 잉ㅆ다. 그들은 작은 집에서 각자 생존에 필요한 것만을 소유한다. 그들은 집단으로 모여서 간소한 음식을 먹는다.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평등하고,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의 공동의 처가 된다. 통치자들은 일정한 수효의 통치자를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 몇몇 정해진 축제일에 – 플라톤의 주장에 의하면 제비뽑기에 의해서 – 필요한 만큼의 남자와 여자를 뽑아서 모임을 갖게 하는데, 이 모임의 진정한 목적은 튼튼한 아이를 낳게 하려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데려다가 친부모나 친자식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도록 양육한다. 허가를 받지 않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로 간주되고, 불구자나 열등아로 태어난 아이들은 없애 버린다. 플라톤은 이렇게 되면 사사로운 감정은 둔해질 것이고, 공공심은 강해질 거라고 생각하였다. 가장 우수한 아이들은 철학 교육의 대상자로 선발된다. 철학에 통달해야만 마침내 통치할 능력을 제대로 갖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è 나쁘진 않은데, 실현은 불가능하겠다.

 

99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103 그렇다면 교육은 교사의 지도 아래 학생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108 아테네의 법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대화편 <크리톤>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데, 이 대화편은 그가 도망해서 처형을 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법률은 설혹 부당하다 할지라도 법치의 평판이 나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법치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은 언제나 법치가 정의롭지 못하게 운용될 때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è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의 선언문에서는 “무엇이 위헌인가?”에 대한 간디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헌법이 자신을 옹호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존엄을 훼손할 때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은 위헌이 아니며, 오히려 헌법 자체가 위헌이라는 주장.

 

소크라테스는 권위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일관성 없는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도주라는 손쉬운 해결책을 일축해 버렸다. 그는 타협을 거부함으로써 부득이 처형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로 인해 그는 자유 사상의 순교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생애의 최후의 몇 시간 동안에 보여준 모습이 서양 문학의 걸작 중의 하나로 꼽히는 <파이돈>에 묘사되어 있다.

 

112 서두의 농담조 이야기가 점차 드러내 놓은 문제는 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테아에테투스는 … 지식은 아에스테시스라고 정의한다.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위의 정의가 염두에 두고 있는 건 감각 기관의 지각이다. 지식이 감각 지각이라는 견해는 실제로는 사람은 저마다 만물의 척도라고 보는 프로타고라스의 신조와 같은 것이다. 사람의 감각 지각은 주어진 사물을 나타난 그대로 지각하므로 틀릴 수 없다. 토론이 계속되는 동안에 지식은 감각 지각이라는 정의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게 명백해진다. 우선 첫째로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바와 같이 사물은 언제나 생성의 과정에 있으니 어떤 사물도 참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지각되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감각 지각이란 사실은 지각자와 지각 대상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이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도 반드시 어떤 결정이 내려져야 하는 문제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누구의 의견이나 동등하게 훌륭하지는 않다는 것, 다시 말하면 전문가가 문외한보다 더 훌륭한 심판관이라는 것을 인정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이런 철학 사상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좀처럼 동의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이 저마다 만물의 척도라는 자신의 주장에 따라 그 사람에게는 프로타고라스의 이론이 옳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토론의 결론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유전한다는 이론에 입각해서 지식이 무엇인가를 밝히려 한다면 우리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든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되기도 전에 다른 사물로 변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è 러셀은 정말 정리를 잘한다! 그가 이렇게 철학사를 정리해 준 것이 무척 고맙다.

è “네 말도 옳고, 내 말도 옳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의견이 가지는 한계. , “네 말은 틀렸다.”라는 상대의 말도 옳아야 하기 때문에 모순이 된다.

è 매우 멋진 지적이다.

 

114 그건 감각 지각이든 논리적 추론이든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지식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è “논증에 의해 입증된 옳은 지식”이라는 부분을 비판한 문단 : 매우 놀라운 문단이다.

 

116 변증론의 기능은 이러한 여러 가지 형상이나 “최고의 종류”에 대해서 어떤 것들이 서로 결합하고 어떤 것들이 서로 결합하지 못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는 이미 보았듯이 서로 결합하지 못하지만, 운동도 정지도 제각기 존재와는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운동도 존재하고 정지도 존재한다. 또한 운동은 정지 아닌 것 즉 운동 그 자체와 같다. 같음이나 동일 그리고 다름이나 차이 역시 – 존재와 마찬가지로 –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는 형상 즉 최고의 유개념이다. 어떤 것이건 그 자체와 동일하면서 그 밖의 모든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비존재와 얽혀 있는 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운동은 존재하는 것이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운동이지만 정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비존재는 존재와 같은 수준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비존재는 완벽한 추상 개념 즉 존재하지 않음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건 뻔하다. 여기서 말하는 비존재는 이러이러한 비존재,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러이러한 것이 아닌 존재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플라톤은 비존재에 관한 난문제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었다.

è 비존재는 존재하는가?

è 운동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è 정지도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è , 운동과 정지는 “존재”와 제각기 결합할 수 있다.

è 운동의 비존재는 정지가 아니다. 정지의 비존재도 운동이 아니다. 가령, 운동과 정지를 정의할 물체가 없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è 비존재는 절대적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이러한 비존재 상태, 즉 이러이러한 것이 아닌 존재 상태를 의미한다. 가령, 운동이 비존재하는 상태.

è 그러므로 이러한 협소한 의미의 비존재는 존재한다.

è 신이 비존재하는 세상은 “존재”한다. 신의 비존재는 존재이다.

è 뜬 구름 잡는 철학처럼 보이지만 사실 정말 중요한 사유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두려움을 느낀다.

 

이상의 통찰을 기초로 삼으면, 우리는 오류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옳은 판단을 내린다는 건 그것이 존재하는 사실 그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른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고, 그래서 오류를 범하게 된다.

è 그것이 존재하는 사실 그대로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è 확실한 경우도 있다. 의학에서는 병을 진단하는 것과 확진하는 것이 다르다. 환자의 징후와 여러 영상매체(CT MRI )을 통해서 거의 확정적인 진단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환자를 확진하는 것은 병리학적 진단(, 세포를 보고 진단)하는 것이다.

è 천문학에서는 예측한대로 계측되었을 때 그것이 존재하는 사실 그대로라고 판단하면 된다.

è 그런데 이러한 도구가 없는 경우에는? 아직 우리는 오류를 확정할 수 없게 된다. 진단은 있으되, 확진은 없는 것.

è 정신병동에 갖힌 메시아에 대한 소설을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새로운 메시아가 세상에 나타났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해서 그는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어 정신병동에 감금된다. 진실은? 기적은 상식으로 이해될만한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소설 전반에서.

 

옳은 판단과 마찬가지로 그른 판단 즉 오류도 전혀 무섭거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독자는 놀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떻나 문제건 그 해답을 알기만 하면 이와 마찬가지로 무섭거나 신비로울 것이 전혀 없는 법이다.

è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접했을 때, 수학의 전설이 무너짐에 경악하지 않은 자가 있었을까? 아마 러셀도 괴델의 경우를 생각하며 이 문단을 쓰지 않았을지.

 

118 플라톤의 기하학 이론 – 이 이론이 보여주고 있는 변형 이론은 실은 현대의 물리학 이론을 선도한 이론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정말이지 플라톤의 기하학적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의 물질주의적 원자론보다 훨씬 더 진보된 이론이다. 기본 삼각형들은 분명히 현대 물리학에서 핵자 즉 소립자라고 부르는 것들과 대등한 것이다. … 모든 것이 기하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견해를 데카르트가 고수했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며, 아인슈타인 역시 방식은 다르지만 이런 견해를 지지했었다.

è 데모크리토스의 물질주의적 원자론과 플라톤의 기하학적 원자론

è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거시적 물질이 더 깨질 수 없는 구성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 는 사유에서 나온 것. 플라톤은 그 구성단위들이 어떻게 작용하여 거시적 물질이 되는가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플라톤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사유를 전개해 나간 셈이다.

è 사실 작은 단위에서 물질성은 사라지고 개념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더욱 우위에 있다고 판단한 러셀의 의견은 일리가 있다.

 

120 두 번째로 중요한 사실은 플라톤이 수들은 더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 수 2는 두 개를 하나로 치는 모든 묶음의 집합 즉 두 개의 사물을 원소로 하는 모든 집합의 집합이다. 요컨대 우리는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세 개의 사물과 두 개의 사물을 더할 수는 있지만, 누구도 수 3과 수 2를 더할 는 없다.

è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 0이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è 플라톤,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플라톤을 이해해낸 러셀도 정말 대단하군.

 

123 역사적으로 볼 때, 논리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은 오히려 장애물이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주된 원인은 추종자들 대부분이 그의 이론에 대해 노예처럼 맹종하는 교조주의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 책임을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르네상스 시대에 일어난 학문의 부흥 운동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벗어나 플라톤으로 복귀하자는 것이었는데, 이 방향은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일어났던 정치적 변화가 지닌 중대한 의의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고전 시대는 실은 이미 오래 전에 종말을 고했었다.

 

134 인력, 척력, 중심을 찾아간다 등의 말은 목적론적 사고의 잔재라 할 수 있는데, 이런 말은 대략 350년 전까지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 이론이 반박되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목적 원인이란 말의 사용에 따르는 곤란한 문제점은 앞에서 살펴본 잠재성이란 말을 사용할 때 부딪치는 위험과 아주 흡사하다. 돌멩이는 떨어지려는 경향이 있기 대문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건 사실은 아무런 설명도 제시하지 못하는 말이다.

 

135 목적론적 견해는 궁극적으로는 우리 주위의 자연 환경이 어떤 종류의 질서에 따라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로부터 힘을 얻고 있다.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경우에나 필연성과 목적성이 둘 다 작용한다고 보았다. 특히 물리 과학이 심각한 후퇴를 보게 되었는데, 이 퇴보는 방법의 면에서 플라톤에로 복귀했던 갈리렐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회복되었다. 수학자에게는 목적성이란 생각이 생물학자에게만큼 쉽게 떠오르지 않는 법이며, 따라서 플라톤이 이 목적성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서 놀랄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목적론은 궁극적으로 의인적 설명이나 신학적 설명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결함이 있다.

è 플라톤은 수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자였다.

 

136 아리스토텔레스는 엘레아의 이성주의 철학자들에 대립하는 경험주의 철학자들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경험적 절차에는 무언가 신뢰할 수 없고 깔끔하게 정돈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수가 흔하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

 

피타고라스 시대 이래로 무로부터 수학적 세계를 구축해 보려고 했던 수학자들은 바로 이 두번째 사실 즉 불연속적인 것들을 가지고 연속성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걸 간과하는 수가 많았다.

è 불연속적인 점이 모여 연속적인 선을 형성한다는 가정 때문에 제논의 역설이 탄생한다.

è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속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경험적으로" 참이므로 이 것을 대전제로 삼아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137 이 정의는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엄청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의 문제에 대한 결론치고는 다소 빈약한 결론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문제를 분석하다 보면 그 결론이 의외로 놀랄 만큼 단순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답인 경우가 많다.

 

……

 

물체의 위체에 대한 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우주 속의 어떤 물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것은 이치에 닿는 물음이지만, 우주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라느 흥미로운 결론을 가져온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하고 있는 분석은 실은 언어적 분석에 훨씬 더 가깝다.

 

150 유클리드가 이집트의 왕으로부터 두세 번의 평이한 수업으로 기하학을 가르쳐 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수학에는 왕도가 없다는 유명한 대답을 했던 건 이 때문이다.

 

153 사람이 어떤 견해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그 견해에 대해서 초연하게 공평무사한 태도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찾아보기 힘든 미덕이다.

 

154 오늘날 사용되는 미학이라는 용어는 18세기 독일의 바움가르텐이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어쨌든 참다움이 곧 아름다움이라고 읊은 키츠의 시구가 표현하고 있는 감정은 완전히 그리스적인 감정이다.

 

수학을 하다가 느끼게 되는 수학적 구조의 우아함과 경제성 같은 관념은 그 본성으로 보아 미학적 관념이다.

 

3.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159 마케도니아가 추진한 영토 확장의 결과로 이처럼 자신만만한 인생관은 한꺼번에 부서졌다. 당시의 철학은 이 사실을 반영하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염세주의와 불안감을 띠는 경향이 있다. 이제는 플라톤 같은 시민 귀족들의 자신만만함을 더 이 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è 영토가 커졌는데 오히려 자신감을 상실하다니 아이러니.

 

163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최고선은 쾌락이다. 쾌락 없이는 훌륭한 삶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에는 정신적 쾌락과 같은 비중으로 육체적 쾌락도 포함된다. 정신적 쾌락은 육체적 쾌락을 관조하는 데 있으며, 참으로 중요한 어떤 의미로도 육체적 쾌락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정신적 활동의 방향에 대해서는 아주 잘 제어해 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관조의 대상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반면에, 육체적인 애착은 우리에게 큰 부담이 된다. 여기에 정신적 쾌락의 유일한 장점이 있다. 이런 견해에 입각해서 보면 덕있는 사람이란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신중한 사람이다.

 

170 그러나 역시 박해란 언제나 박해하는 쪽이 약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느 사회건 질서가 확고하게 잡혀 있고 자신만만하다면 이교도를 박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178 삼위의 세번째이자 마지막 요소는 영혼인데, 영혼은 사실상 내면과 외면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영혼은 그 내면에 있어서는 누스를 향하여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영혼이 외면을 드러낼 때에는 감각의 세계로 하강하게 되는데, 실은 영혼 자신이 이 감각의 세계의 창조자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신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것관느 달리, 플로티노스의 이론은 범신론을 부정하고 소크라테스의 견해로 되돌아 간다. 그러나 그는 자연이란 영혼이 아래쪽으로 유출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어도, 그노시스교도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자연이 사악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플로티노스의 신비주의는 오히려 반대로 자연은 아름다우며, 사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사물들의 배열 구조상 그런 것이라고 아주 허심탄회하게 인정한다. 이처럼 편협하지 않은 시각을 후세의 신비가들이나 종교 교육자들은 갖추지 못했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세에 전념하고 있었던 이런 사람들은 아름다움과 쾌락을 천박하고 사악한 것으로 저주하게 되었다. 정신이 이상한 광신자들을 빼놓고는 어느 누가 이처럼 무서운 신조를 얼마만큼이나 실행에 옮길 것인 것 심히 의심스럽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함을 숭배하는 잘못된 생각이 수백 년 동안이나 줄곧 지배했다. 기독교는 아직도 쾌락은 죄악이라는 괴상한 생각을 공식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181 그리스 사람들의 실패가 탁월한 지적인 힘에서 비롯된 어떤 오만탓이었다면, 로마 사람들은 순전히 상상력의 결핍 때문에 실패했다. 이 무기력한 정신 상태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드러나 있는데, 로마 제국의 제정 시대의 기념비적인 건축만큼은 그런 점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스 정신과 로마 정신의 차이를 그리스의 사원과 로마의 공회당(바실리카)을 대비시킴으로써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의 지적 유산이 로마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와서는 그 예리함과 우아함이 훨씬 감소하고 있다.

 

그리스 사람들의 철학적 전통은 본질적으로 계몽과 해방을 추구한 운동이다. 그리스 철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의 정신을 무지의 질곡에서 해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철학적 전통은 이 세계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게 함으로써 미지의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한다. 그리스의 철학적 전통을 계속 유지시킨 것은 로고스이고, 그리스 철학이 열망하는 것은 최고선의 형상의 인도를 받아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공평무사한 탐구 그 자체"를 윤리적으로 선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 까닭은 인간은 종교적 신비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공평무사한 탐구의 성과를 이용해서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공평무사한 탐구의 전통에 더해서 그리스 철학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부정적 감정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맑고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고 방식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류는 이 참신한 활력을 다소 자의식에 빠져들었던 스토아 철학이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 자리를 굳혔을 때에 얼마간 잃어 버린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서양 문명을 이끄는 지성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는 최상의 것들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두 그리스 철학자들의 전통에 근원을 두고 있다.

 

4. 초기 기독교 철학

 

186 기독교와 유태교는 신의 선민이 있다는 교리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의 선민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이 두 종교는 이 세계가 신의 창조에 의해 시작되어 신의 마지막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똑 같은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197 우리는 그(아우구스티누스) <참회록>에서 그가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는 평생 동안 어린 시절에 저지른 우연한 실수에 대한 가책으로 괴로워했다. 그의 실수란 소년 시절에 순전히 장난스런 기분으로 이웃집 정원에 있는 배나무의 배들을 따먹은 것으로 실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죄에 대한 그의 병적인 편집성은 이 비행을 크게 확대시켜 아예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열매를 맺는 나무와 관련있는 일에 간여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짓으로 여기게 되었다.

è 어릴 때 잠자리 꼬리에 실을 묶어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던 남자가 성인이 된 후 그 기억을 회상해낸 후 죄책감에 몸져 누운 이야기. Depression episode? 그는 아마도 기독교인이 아니었을까?

 

204 이와는 달리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는 성직자들은 두 인격식 즉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신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가 있다는 의견에 찬성하였는데, 이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노시스파를 선구자로 하는 견해이다. 네스토리우스파의 교리는 주로 소아시아와 시리아 지방의 신도들이 신봉하였다. 이 신학상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431년에 에페서스에 종교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시릴 주교를 편다는 파벌은 회의장에 먼저 도착하여, 네스토리우스 주교를 지지하는 대표가 모두 회의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 편에 유리하게 날치기로 가결해 버렸다. 이 이후로 네스토리우스의 교리는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오직 하나의 인격신이 있을 뿐이라는 견해가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시릴이 죽은 후인 449년에 에페서스에서 열린 종교 회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인격이 하나일 분만 아니라 본성도 한 가징리 뿐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나중에 단성론 이단이라고 규정된 교리이다.

 

217 이 당시 교회는 주로 두 가지 어려운 문제로 괴로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것은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관례와 성직자의 독신 생활에 관해 단안을 내리는 문제였다. … 그러나 권력의 맛이란 더욱 큰 권력욕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도덕적 전통이 없으면 그들 자신의 사리 사욕을 채우는 경향이 있다.

 

225 아벨라느는 1079년에 태어났으며, 로스켈리누스보다 비중이 더 큰 철학자이다. 그는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후에 교편을 잡았는데, 신학과 연루된 사건에 한동안 휘말렸다가 1113년에 다시 교육자로 되돌아갔다. 엘로이즈와의 연애 사건은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났었다. 아벨라르의 삼촌 캐농 풀벨은 격노하여 분별없이 사랑에 빠진 아벨라르르 거세시킨 다음, 두 연인을 각기 다른 수도원에 피정을 보내 버렸다. 아벨라는 1142년까지 살았는데 교사로서 큰 인기를 누렸다.

è 거세 당하는 역경 속에서도 잘 살아남았다니 신기하다.

 

231 이런 까닭에 종교의 원리들이 이성에 의해 취급될 수 있는 한도까지는 비종교인과 더불어 논의하는 일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계시가 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아퀴나스 철학은 지식의 근원에 대해서 이렇게 분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지식을 얻는 두 가지 출처를 동일한 발판 위에 서 있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웬일인지 합리적 지식이 추구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신앙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추론을 하기 전에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진리는 자치권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성의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계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말에는 약간의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아퀴나스에게는 이성과 계시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없고, 그래서 철학과 신학 사이에도 아무런 대립이 없었겠지만, 실제로 계시의 진리라는 건 사람마다 자의적인 것이라서 이성과 계시는 서로 상대편의 토대를 허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이성이 사실들을 제대로 잘 다룰 수 있는 경우라면 계시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으며, 이 역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신학이 사실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이른바 자연 신학이다. 자연 신학은 물론 신을 다루기는 하지만, 1원인이나 최초의 시동자 등등의 주제와 고나련해서 신을 다룬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신학이라 불렀던 것인데, 이는 형이상학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아퀴나스는 기독교 신자라서 교리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도 전개하였다. 이 신학은 오직 계시를 통해서나 접근할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룬다. 이 신학에서 아퀴나스는 초기의 기독교 사상가들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자기가 대체로 승인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과 구원에 관한 견해에 의존하고 있다. 참으로 은총과 구원의 문제는 이성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문제이다. 교리 신학이 그리스의 철학 정신과 완전히 배치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교리 신학과 비슷한 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퀴나스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넘어선 형이상학을 전개한 것은 신학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독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 공평무사한 건축가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개의 사물의 실존이 어떤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개개의 사물은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러므로 개개의 사물을 형성하는 원료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아퀴나스에게는 신이 모든 실존의 원천이다. 유한한 사물은 오직 우연히 실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유한한 사물은 자신의 실존을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어떤 것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의존하게 마련인데, 이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어떤 것이 신이다.

è 신은 필연적인가?

 

이런 내용이 스콜라 철학의 언어를 살펴보면 본질과 실존이란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사물의 본질이란 대체로 말해서 성질 즉 어떤 사물을 그 사물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존이란 어떤 사물이 실제로 있다는 그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레게(1848~1925)는 언어의 의미에 관해서 뜻과 언급을 구별할 때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시사했었다. 우리는 언어와 관련핸서 두 가지 물음에 부딪치는데, 하나는 어떤 낱말이나 문자으이 뜻이 무엇이냐는 것이고, 이와 전혀 다른 또 하나는 그 낱말이나 문장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이 실제로 있느냐는 것이다.

 

238 오캄의 철학은 프란치스코회 소속 철학자들 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경험주의 쪽으로 더 밀고 나아갔다. 둔스 스코투스는 이성적 사고의 영역에서 신을 쫓아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적 형이상학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었다. 오캄은 이와 달리 노골적으로 형이상학에 반대한느 태도를 취했다. 오캄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및 이들의 추종자들이 시도했던 것과 같은 일반적 존재론은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개체 즉 개개의 사물이 실재성을 갖는 것이고, 이 개체만이 직접적인 지식과 확실한 지식을 형성시킬 수 있는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전개한 교묘한 설명 장치가 존재를 설명한느 일에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오캄의 "적은 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더 많ㅇ은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라는 말을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 기본 방침은 그의 책에 있는 말은 아니지만 후세에 "오캄의 면도날"이라고 불리면서 전해 내려왔다. 여기서 말하는 있는 것이란 물론 전통적 형이상학이 논해 온 형상(이데아), 실체 등등의 것이다. 그들은 "오캄의 면도날"을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유효하게 쓰일 수 있는 경제의 원리로 파악했었다. 그들은 어떤 현상에 대해 단순한 설명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도 복잡한 설명을 추구하는 것은 쓸모없다고 보았다. 오캄은 이렇게 개체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람의 말을 연구하는 논리학의 영역에서는 의미에 관한 어떤 종류의 일반적 지식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이 지식은 개체에 관한 지식처럼 직접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추상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게다가 추상을 통해 도달한 것은 사물로서 실존한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이런 까닭에 오캄은 철저한 유명주의자였다. 논리학은 엄밀하게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보면 언어상의 도구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용어의 의미에 대해 연구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 오캄은 11세기의 초기 유명주의자들의 견해를 확장한 셈이었다. 사실은 벌써 오래 전에 보에티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은 어휘를 분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240 중세 사상의 가장 위대한 종합은 단테의 저작에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단테가 <신곡>을 집필했던 시기에 실은 중세 시대는 해체되기 시작했었다. 따라서 우리는 단테의 책에서 아퀴나스가 일으킨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전면적 부흥 운동과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연루되어 있는 겔프당과 기벨린당의 당파 싸움을 회고하면서, 전성기가 지나 버린 세계의 개관을 보게 된다. 242 ㅠ정치 이론의 분야에서는 이 전통적 정치 이론이 마르시글리오와 오캄에 의해서 논파되었다. 중세 사람들을 벌벌 떨게 했던 여러 가지 공포 가운데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던 교회의 권력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독단적인 교리를 믿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느끼자마자 그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오캄의 의도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의 학설이 종교 개혁가들에게 미친 결과임은 확실하다.

 

248 이 이성과 신앙의 분리는 그와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 활동과 종교적 활동을 엄밀하게 분리하여 제각기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일을 위선이라고 보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일 것이다. 실제로 굉장히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실제적 신념들이 자기의 종교적 신념들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둘 다 유지했고 또 지금도 이런 사람은 많이 있다. 이 일은 위선이기는커녕 오히려 종교가 지금까지 의심의 공격으로부터 제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었다는 것이 아주 확실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신학은 변증의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이성적 토론이 지켜야 하는 규칙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6. 근대 철학의 발흥

 

253 중세의 생활은 신에 관한 선입견에 의해서 지배되었음에 비해서, 문예 부흥 시대의 사상가들은 인간에게 훨씬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운동은 인본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새로이 대두한 커다란 대세들 가운데 두번째 운동이다.

è 리처드 도킨스는 무신론자들의 세력화를 주장하면서 무신론자라는 용어가 상기시키는 ""을 배제하기 위하여 다른 용어를 제안하였다. 그 중 하나가 "인본주의자" humanist였다. 이러한 제안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던 것.

 

252 오캄의 비판 이후 두 세기 동안에 과학 분야에서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발전은 코페르니쿠스가 태양계에 관하여 태양 중심 체계를 재발견한 사실이다.

 

254 사람들은 정보의 광범위한 전파와 더불어 자신이 살고 있는 지구에 관해서 전보다 더 정확한 생각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일은 발견을 목적으로 한 일련의 항해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발견의 항해는 서양 사람들의 욕구와 모험심에 새로운 배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이 모험적 개척은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의 향상과 아울러, 고대의 천문학을 되살려 이용함으로써 가능했었다. 15세기까지는 배가 대서양의 해안선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지 못했었는데, 이는 그런 항해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항해자를 안내해 줄 만한 지표가 없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일이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침반이 항해에 이용되자 먼 바다로 항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이후부터 모험가들은 새로운 땅과 항로를 찾기 위해서 대양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è 어떤 방식의 학문이 후세의 발전에 더욱 이바지 하였는가를 평가하는 것은 항상 후향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판단 기준은 없을까?

 

263 에라스무스는 사람은 누구나 신과 직접 접촉할 수 있으므로 신학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개신교의 견해이다.

 

274 (티코 브라헤 à 케플러)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설파했던 바와 같이, 우주의 운행을 지배하고 있는 한도 즉 로고스는 숨어 있는 법이니,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 바로 탐구자의 임무이다. 동시에 이 임무를 위해서는 괜히 주제와 관련없는 원리를 보호하기 위해 관찰된 현상들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276 이 점에서 실증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많은 공통성이 있는데, 물리학과 관련해서 관찰 사실들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취급한느 완고한 천박성은 특히 앙리스토텔레스와 닮았다고 하겠다.

 

284 보통 때보다 더 추웠던 어느 날 데카르트는 추위를 피해 시골 작은 집에 들어가 흙으로 만든 화덕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웬만큼 몸을 녹이자 사색을 시작했는데, 그 날 해질 무렵에는 자신의 철학 체계 전체의 윤곽을 분명히 그릴 수 있게 되었다.

 

290 그러나 이 전통적 교육은 스피노자의 발랄한 지성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라틴어를 통해서 그는 학문의 위대한 부흥을 일으킨 사상가들과 새로운 과학과 철학을 발전시키고 있는 사상가들의 저작에 정통할 수 있었다. 스피노자는 머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정통 기독교 안에 머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데, 이 이탈은 유태인 공동체를 대단히 당황스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또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비타협적 태도를 지니고 있어서, 어떤 이유에서든 종교를 맹렬히 거부하는 언행은 그 당시 네덜란드에 널리 퍼져 있던 일반적인 관용의 분위기를 뒤엎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낳았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결국 성서에 나오는 모든 저주를 받고 유태인 사회에서 추방당했다.

 

스피노자는 본래 약간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어서 이 사건 이후 완전히 고립된 처지가 되었다. 스피노자는 그 때부터 몇몇 사람들과만 교우 관계를 유지하며 조용히 살았는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렌즈를 갈아주는 일 이외에는 온통 철학적 사색에 몰두하면서 지냈다. 이렇게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나중에는 그를 찬미하는 수많은 유력한 인사와 서신왕래를 하게 되었다.

292 스피노자는 홉즈와 달리 사상의 자유의 주창자였다. 국가는 사상의 자유가 있는 경우에만 제 기능을 올바르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형이상학과 윤리 이론으로부터 나온 귀결이다. 스피노자는 <신학 정치론>에서 사상의 자유를 아주 강조하면서 논하고 있다.

è 모든 철학적 견해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유래된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견해 때문에 유태계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였다.

 

293 스피노자의 범신론

 

294 사물들을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정신의 본성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이 일을 잘 하면 잘 할수록 더욱더 완벽하게 신과 - 또는 같은 말이지만 우주와 - 일치되어 간다고 보았다. 스피노자가 "사물들을 시간과 무관한 영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정신의 본성이다"라는 유명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 말은 실은 정신이 사물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말로부터 나오는 논리적 귀결이다.

è 필연성??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시간과 무관한 영원의 관점 = 필연성? 혹은 필연성에서 필연적으로 연역되는 논리??

è 필연성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순간 속의 영원에는 동의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나는 이 논리 단계가 이해가 안되는데 러셀은 여기에 관한 비판은 하지 않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기대를 걸었었는데 약간은 실망이다.

 

우리는 <윤리학>의 나머지 제4부와 제5부에서 통상적 의미로 윤리학이라 부를 만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볼 수 있다. 그는 사람이 외부의 여러 가지 영향력과 원인에 얽매어 있는 한 노예 상태에 있다고 본다. 실제로 이 상태는 모든 유한한 것이 처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사람은 신과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한 더 이상 그러한 영향력에 지배되지 않게 되는데, 그 까닭은 우주 전체는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사람은 점점 전체와 동조를 이루어 감에 따라 그 정도에 맞는 자유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독립 즉 자기 결정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오직 신에게만 옳은 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방도는 이러한 신과의 동화이다.

è K L에게 말한다. 너와 함께라면 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법인데, 자유로운 사람의 지혜는 죽음에 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è 매우 마음에 든다.

 

한편 스피노자는 악을 소극적인 것 즉 결핍의 상태로 여기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전체로서의 신 즉 자연은 악일 수 없다고 보았다.

è 여기서 바로 비존재의 존재 문제가 거론되는 것이다.

è 결핍 = 비존재. 비존재는 존재하는가? 무엇이 비존재하는 상태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전체"는 이러이러한 비존재를 포함해야 한다. , 신은 결핍의 상태까지 포함한 전체여야 하는 것이다. 신은 선이자 동시에 악이어야 한다.

 

298 그러므로 만일 두 개의 단자가 모든 점에서 정확하게 똑같다면 그 두 개의 단자는 참으로 그게 그것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동일성 원리 즉 "식별할 수 없는 것들은 동일하다"는 원리가 그의 철학에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점을 명확하게 해주는 데 있다. 이런 까닭에 누가 두 개의 단자는 오직 위치만 다를 수 있다고 느슨하게 말하면 이는 전혀 무의미한 말이다.

 

305 이성주의자가 상상을 혼란된 생각의 근원이라고 기피하는 대목에서 비코는 반대로 발견의 과정에서 상상이 하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명료한 개념에 도달하기 전에 상당히 막연하고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 관하여 생각한다는 것이다.

 

7.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

 

311 개신교 신학은 개인의 양심에 맡겨 두어야 할 문제를 교회가 법률로 정하는 건 부적절한 일이라고 강조했었다. 이와 똑같은 개인주의가 경제와 철학의 영역에도 퍼지게 되었다. 경제학에서는 개인주의가 자유 방임의 주장으로 나타나서 19세기의 공리주의에 의해 합리적으로 설명되었다. 철학에서는 개인주의가 지식론에 대한 관심을 전면에 부상시켰는데, 이 이후로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가 지식론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혔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하나, 그러므로 나는 실존한다"는 명제는 철학에 스며든 개인주의의 전형적인 표현이라 하겠는데, 이 명제는 누구나 자신의 실존을 지식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320 공리주의 윤리학이 행복을 바라는 속된 욕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 때문에 공리주의 윤리학을 얕잡아 보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리주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상적 목표를 추구하는 준엄하고 거만한 개혁가보다 동포의 운명을 더욱 많이 개선시켜 준다는 건 아주 확실하다.

 

327 데이비드 흄은 에딘버러에서 태어나 12세에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하였다.그는 관례적인 인문학 과정을 배운 다음에, 16세가 못 되어 대학을 떠나 얼마 동안 법률을 공부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흄의 진정한 관심은 철학에 있었으며, 결국에는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한동안 사업을 시도해 보기도 했으나, 1734년 프랑스로 건너가 3년 동안 머물렀다. 그는 재산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시의 경제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알뜰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생활 방식을 조절하였다. 그는 학문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이처럼 검소한 절약 생활을 꾸려 나갔다.

 

흄은 프랑스에 있을 때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인성론>을 썼다. 나중에 전개되었던 그의 철학의 골격을 보여주는 이 책을 완성했을 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이 책은 그가 해외에서 귀국한 직후에 런던에서 출판되었는데 처음에는 실패작이라는 것이 중평이었다. 이 책은 철학적 내용에서 그렇다기 보다는 약간 무모하다 할 정도로 솔직한 논조에 드러난 저자의 젊은 혈기가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 책에 전개되어 있는 기성 종교의 원리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논의도 이 책의 인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홈이 1744년 에든버러 대학의 철학 교수에 취임하지 못한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è 나도 걱정된다.

 

330 - "불행히도 확신에 찬 이 모든 주장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로 내세웠던 바로 그 경험과 상반되고 있다. 게다가 앞에서 설명한 방식에 의해서는 우리가 결코 '자아'의 관념을 확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관념이 도대체 어떤 인상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아라는 인상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아라는 관념이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이런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에게 사람의 정신은 서로 다른 지각들의 다발이나 집단이며, 이 지각들은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서로 연이어 발생하므로 끊임없는 유동이나 운동 속에 있다고 감히 확언하는 바이다."

è 사람의 인식은 구름 속에 떠다니는 것들 무작위적으로 선택되는 것들이라는 현대의 인지 이론과 상통한다. 대단히 현대적임,

 

334 그런 다음 그는 필연적 결합이란 없다는 걸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나서 "무엇이든 무언가는 생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è 현재의 지구는 필연인가? 에 대한 부정의 대답이 될 수 있다.

è 다원우주. 라이프니츠와는 상관이 없었을까?

 

8. 계몽 운동과 낭만주의 철학

 

338 낭만주의 운동은 계몽 운동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점에서 아폴로적 심성에 상반되는 디오니소스적 심성을 연상시키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낭만주의의 뿌리는 문예 부흥 시대에 고대 그리스를 다소 이상화시켜 동경했던 생각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에 프랑스 사람들은 이성주의 사상가들의 다소 냉정하고 초연한 객관적 사고에 반발하려는 목적으로 감정을 숭배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홉즈 이래로 이성주의자의 정치 사상은 사회적 안정과 정치적 안정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또 그렇게 주장하였음에 비하여, 낭만주의자들은 위험스럽게 사는 편을 지지하였다.

 

342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유물주의자들은 솔직하게 무신론을 주장한다. 그들은 어떠한 종교일지라도 사람에게 해를 끼치도록 교묘히 꾸며진 거짓말이라고 간주했으며, 지배자들과 성직자들이 자기네 이익을 위해서 무식한 사람들보다 신자들을 더 쉽게 부릴 수 있기 때문에 종교를 퍼뜨리고 권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 유물주의자들은 종교와 형이상학적 사변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일종의 지상 천국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과학과 이성이 만들어 내는 통로를 인류에게 보여주고 싶어했었다.

 

345 루소 - 윤리에 관해서도 루소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은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주는데 반해서, 이성은 사람들을 타락시킨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è 루소의 "자연스러운 감정"은 아이를 양육하기 싫다는 감정이었던 것 같은데, 이것은 그저 비양심의 근거이지 않을까? 루소는 이성이 "아이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해"라고 주장하는 것을 무시함으로써 가장 타락한 철학자로 생각되는 것 아닌지?

è 타락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떠한 타락을 의미하는지?

è 차라리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다른 것을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354 è 칸트가 진짜 안읽힌다.;;;; 이상하다. 니체 읽을 때 칸트 괜찮았는데…@,@

 

현상은 범주들에 따르게 마련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원인과 결과의 범주에 따른다. 이에 반해서 사물 자체 즉 본체는 원인과 결과라는 범주의 제약을 받지 않는데, 칸트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결정론과 반대되는 자유 의지론을 인정할 때 직면하는 딜레마를 피할 수 있게 된다. 칸트는 사람이 현상의 세계에 속하는 한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에 의해서 결정되게 마련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도덕적 행위자로서는 사물 자체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자유 의지를 갖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355 그러나 칸트의 윤리의 요지는 칸트의 주장대로 사람의 행위에서 가치있는 것이 오직 마음이나 동기의 상태뿐이라면, 아무리 추악한 일일지라도 누군가가 일단 자신의 의무라고 받아들이고 즐거운 기분으로 그 일을 수행하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일으킬 수 있는 비참한 결과들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칸트의 윤리 이론을 알았다면 그는 칸트에게 무지가 죄악의 가장 중요한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고 훈계할 것이다.

 

361 이리하여 헤겔은 변증적 원리에 의거하여 모든 진행의 종착점인 절대자가 유일한 실재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헤겔이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생각은 당연히 전체의 부분들은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는 진정한 실재성이나 의미를 가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 세계의 부분들은 우주 전체와 관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참으로 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명제는 절대 관념은 실재한다는 명제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직 전체만이 참답다고 보아야 한다. 부분은 어떤 것이건 단지 편파적으로 참다울 뿐이다. 어쨌든 절대 관념에 관한 헤겔의 정의는 전혀 쓸모가 없을 정도로 명료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절대 관념의 근본적 성격은 아주 단순하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 관념은 제 자신에 관해서만 생각하는 관념이다.

 

368 역사적 상황에 관한 헤겔의 인식을 보면, 그는 절대자가 언제나 우리의 눈앞에 전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철학적 체계를 세우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셈인데, 그의 견해에 의하면 철학적 체계는 항상 사건이 일어난 뒤에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 헤겔은 <법철학>의 머리말에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땅거미가 졌을 때만 날기 시작한다"는 말로 아주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69 좀더 최근의 근세 철학자들 중에서는 스피노자가 전체만이 궁극적인 실재라는 견해의 대표자이다. 피타고라스의 전통에 따르는 수리 물리학자들 역시 우주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 최고의 공식을 탐구하는 일을 똑 같은 신념에 의거하여 추진하였다. 라플라스의 이론과 같은 우주론에서 절정에 도달한 뉴턴 물리학의 굉장한 발전은 이 신념에 입각한 탐구 성과의 실례를 보여주었다. 우주 전체의 체계에 관한 관념주의자들의 생각이 옹호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관념주의자들의 생각이 단지 애매하고 막연한 말로 표현되기는 했을지라도 그들의 착상이 노리고 있는 목표를 알아보려는 노력을 해보지도 않은 채 통째로 깨끗이 잊어 버리는 건 위험한 일이라 하겠다.

è 현재에도 우리는 대통일 이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è 관념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데

 

373 실존주의의 원리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이 원리의 내용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먼저 어떤 것이 있다는 걸 알고 난 다음에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표현을 찾는다면 이 원리는 개체를 보편자보다 앞세운다는 말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플라톤보다 앞세운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의지가 이성보다 선행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에 관해서 사람은 지나치게 과학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372 예부터 내려오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계시를 믿는 사람들이 존중하는 격언인데, 어떤 점에서는 이 사람들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앙의 자유를 실제로 행사해 보고 싶은 사람은 아주 진기한 생각 즉 매우 불합리한 생각을 믿어 보는 게 신앙의 자유를 실감나게 느끼기에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è 아주 유쾌한 조소이자 해석이다.

 

375 쇼펜하우어는 이미 젊은 시절에 자신의 철학적 견해에 도달했었다. 그의 주저인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는 그가 갓 30세가 되던 해에 나왔다. 이 책은 처음에는 완전히 무시당했었다. 이 책에는 칸트의 "사물 자체"를 신중히 존속시키고 있는 일종의 수정판 칸트 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달리 사물 자체를 의지와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그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경험된 세계가 칸트의 의미에서 현상들로 구성된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현상들을 일으키는 원인은 알 수 없는 사물 자체 즉 본체가 아니라 본체적 의지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정통적인 칸트의 견해와 아주 가까운 생각이다.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칸트는 의지를 본체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의 의지를 발동시키면 그 의지에 대응하는 것이 경험의 세계에 반드시 있어야 할 텐데, 나의 신체의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말이 난 김에 지적한다면 이 점에서 칸트는 심신 문제에 관해서 부수현상론을 결코 넘어서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본체와 현상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전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쇼펜하우어는 신체가 그 실재성의 근거를 의지에 두고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본체의 세계 즉 사물 자체의 세계에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범주들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본체로서의 의지는 이 세 가지 어느 것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시간과 무관하고 비공간적인 것인 셈인데, 이 생각에는 의지의 유일성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내가 실재하는 한, 다시 말해서 나를 의지의 면에서 보면 나는 이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이런 생각은 단지 현상에 사로잡혀 있는 환상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이와 반대로 나의 의지가 실은 유일한 보편적 의지라고 주장하였다.

è 요즘 대두되는 양자역학적 의식관과 비슷하다. 일명 "시크릿"

è 철학은 발전과 부활을 거듭하는 듯?

 

377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결국은 이 세계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투쟁으로부터 도피할 길을 마련했다면, 니체는 그와 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실 니체의 사상을 요약하기란 수비지 않다. 그는 일상적 의미로는 철학자가 아니어서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체계적인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아마 니체는 말 그대로의 귀족적 인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해서 증진시키려고 노력한 것은 최고 수준의 인간, 다시 말하면 가장 건강하고 강건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지닌 탁월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다른 사람의 비참한 처지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강인함을 강조하게 되므로 동정과 연민을 표준으로 삼는 기독교 도덕과 상당히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 생각만을 니체 사상의 전후 맥락에서 떼어 내어 부각시키면서 그를 20세기에 등장한 정치적 독재자들의 대변인으로 간주했다. 물론 독재자들이 니체로부터 상당한 암시를 받았다는 건 인정해야 하겠지만, 니체를 너무나 피상적으로 이해한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을 니체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일이다. 왜냐하면 니체가 자기 나라의 정치적 변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더라면, 그는 독일의 정치 체제에 격렬히 반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è 그 가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1889년에는 그가 학생 시절에 걸렸던 성병의 말기 증세가 나타나 정신 이상을 일으켰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è 매독인가?

 

그러고 보면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 기질의 분출로서의 열망을 아폴로적 성향이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 대해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다.

 

9. 공리주의 철학과 그 이후

 

385 아담 스미드가 상품 생산과 관련하여 논했던 노동의 분업은 얼마 안 되어 지적 탐구의 분야에서도 거의 같은 정도로 퍼지게 되었다. 학문적 탐구도 19세기를 지나면서 말하잠녀 산업화되었던 것이다.

 

390 밀의 주장 반박 - 누구도 사실 명제, "이다"(is)를 포함함고 있는 진술에서 당위명제, "해야 한다"(ought)를 포함하는 진술을 연역해 낼 수 없다는 건 이미 오래 전에 흄이 지적했다.

è 흄이라는 횽이 지적하였다.

 

395 이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마르크스가 영향을 받은 두번째 종류의 사상, 즉 그가 이해한 헤겔의 철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건헤겔이 그랬던 것처럼 개체가 아니라 전체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정면으로 대결해야 할 문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고립된 경제적 불만들이 아니라 경제 체제라고 역설하였다. 이 점에서 특히 마르크스는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의 자유주의와 개혁 조치들과 철저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신조는 주로 헤겔주의에 따르고 있는 철학적 이론들과 아주 굳게 제휴하고 있다. 이 사실이 왜 영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전혀 인기를 얻지 못했는가를 알려 주는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영국 사람들은 대체로 철학으로부터 큰 감명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è 마르크스는 헤겔의 영향을 받아 전체주의를 지향하였고, 그 결과 "전체"를 싹 다 바꿔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회의 발전에 관해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역사적 견해도 헤겔의 철학에서 자라 나온 것이다. 이 진화론적 접근은 그가 헤겔로부터 수정없이 받아들인 변증적 방법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역사의 진행 과정이 변증적 과정을 거치면서 전진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398 반동 분자의 의미는 글자 뜻 그대로 진보의 반대쪽으로 가는 사람 즉 진보를 방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변증적 과정은 이런 반동 분자는 언젠가 때가 되면 제거된다는 것을 보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진보는 결국에는 승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생각은 마르크스주의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폭력에 의해 제거해야 한다는 이론적 근거로 사용되게 된다.

 

마르크스의 글들은 흔히 일종의 의분과 강직한 윤리적 어조를 띠고 있는데, 이런 어조로 말하는 것은 그의 말대로 모든 상황에서 변증적 과정이 필연적 진로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면 앞뒤 조리가 맞지 않는 일이다. 나중에 레닌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국가가 반드시 소멸하게 되어 있다면 소멸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에 관해서 야단법석을 떠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è 멕베스의 아이러니. 왕이 되는 것이 신탁이고 필연적이라면 굳이 왕이 되려고 스스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è 헤겔과 다윈이 마르크스에게 가서 이런 방식으로 적용될 줄 누가 알았으랴?

 

400 한편 프랑스의 철학계를 보면, 백과사전파의 철학 운동이 후계자인 오거스트 콩트에게로 이어졌다. 철학적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과학을 존중하고 기존의 종교를 반대하였던 콩트는 모든 과학을 수학에서 출발하여 사회 과학에서 정점에 이르는 순서로 배열함으로써 학문에 관한 전체적 분류 체계를 마련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같은 시기의 영국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에 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으면서도 형이상학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콩트는 우리가 경험에 의해 직접 주어지는 것을 가지고 철학을 시작해야 하며, 현상의 배후로 넘어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자신의 철학을 실증 철학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사용되는 "실증주의"라는 이름은 콩트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콩트는 자기를 끝내 천재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달하여 다소 짜증을 내는 편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에 대한 밀의 우정은 결국에는 식어 버렸다.

è 자신이 생각하는 수준보다 자신을 낮게 평가한다면 짜증이 나겠지. 특히 자신을 본인보다 하수로 취급하는 것이 분명한 친구와는 잘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철학자는 자존심.

 

401 이 점에서 보면 비코는 콩트보다 훨씬더 현실주의적 사상가였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비코는 인률의 역사가 세련된 우아함과 문명화된 성취의 시기로부터 새로운 야만의 시기로 되돌아 갈 수 있고 또 실제로 되돌아 가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는 로마 세계의 붕괴에 뒤따르는 중세의 암흑 시대가 그러한 실례라고 보았다. 아마 비코는 20세기의 상황도 똑 같은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404 퍼스는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하버드 대학의 수학 교수였으며, 퍼스 자신도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수 년간씩 두 차례 대학에서 강의를 한 것을 제외하면, 생활이 영구히 보장되는 학문 연구직에 있었던 적이 전혀 없다. 그는 연안측지국의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과학에 관한 저술이외에도 광범위한 철학적 주제들에 관해서 수많은 논문을 줄곧 써냈다. 퍼스가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사회가 그에게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표준들을 무시하였다는 사실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그 밖에도 퍼스의 생전에는 그의 친구와 몇몇 학자를 제외하면 그가 천재임을 인정해 준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진정으로 퍼스를 충분히 이해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퍼스가 그토록이나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도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은 사실은 철학적 탐구에 매진한 그의 목적 의식이 얼마나 투철했는가를 알려 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퍼스는 생애의 마지막 25년 동안 가난과 나쁜 건강 상태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철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è 멋진 사람이군!

 

405 파히만 퍼스의 견해는 오히려 비코의 기본 신조, "진리는 사실이다"는 노선과 일치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 노선에 따르면 진리성이란 우리가 어떤 진술에 의거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제임스가 퍼스의 이 모든 생각으로부터 추려냈던 실용주의는 퍼스의 의도와는 현격하게 달리 사람은 저마다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기본 신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으나, 실은 퍼스의 의도는 비코의 이론을 원용해야 훨씬 더 훌륭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è 퍼스는 우리가 "오류 가능주의"를 전제한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과정"을 설명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è 제임스가 이해한 퍼스 : 진리는 반드시 실제적 성과를 일으켜야 한다.

è 실제 퍼스 : 진리에 의거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이기 때문에). 퍼스는 진리가 탄생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반응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진리 그 자체가 "팩트"라는 것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제임스는 진리가 실제적 성과를 내야지만 진리라고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퍼스는 가설이 연역 과정이나 귀납 과정관느 근본적으로 다른 제삼의 논리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으며, 이 논리적 과정을 항상 생생한 의미를 지닌 용어를 지어내는 자신의 방식에 따라 abduction (가역假驛)이라 불렀다.

è abduction은 흔한 의학 용어이기도 하다. 외전(바깥으로 돌림)을 의미하는데, 외삽(extrapolation)과 비슷한 연상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외삽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이다.

è abduction : 삼단논법에서 대전제는 확실하나, 소전제는 개연적(probable)인 것.

 

퍼스는 이 과정을 통해서 어떤 진술이 약간의 특정한 현상을 설명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가설로 채택된다고 보았다. 이 과정 중에서 그 진술을 전제로 삼고 약간의 특정한 현상을 설명하는 일이 연역의 문제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가설을 승인하는 일은 결코 연역의 문제가 아니다.

 

406 퍼스는 그 당시의 수확과 과학의 내용은 물론이고, 과학과 철학의 역사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처럼 광범위한 식견을 갖춘 퍼스의 눈에는 과학이 일종의 실재주의로 이해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기초를 미리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

è 모든 물리학자들의 가설이자 꿈

 

407 제임스의 실용주의

è "의식은 실존하는가"라는 논문

의식 / 실존 /

 

왜냐하면 그가 "순수경험"이라 부른 것을 넘어서는 실제로 아무 것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렇게 되면 아는 과정 즉 인식 과정은 순수 경험의 여러 부분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이해해야 한다.

è , 실존하는 경험으로 통해서만 의식이 생성된다.

"의식은 실존하는가"에 대한 대답 = 실존만이 의식이다

 

이 논문에서 제임스는 주관과 객관(대상)을 원칙적으로 나누는 전통적 이원주의가 인식론 분야에 적절한 이론이 나오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시도하였다.

 

408 이에 대한 러셀의 반박 : 원래 탐구 활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것에 관해서 탐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영역과 - 어떻게 이해된 세계든 - 이 세계의 영역이 필연적으로 범위가 일치한다면, 누구나 안락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으면서 실제로 이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è 안락 의자 속의 사람에게는 안락 의자 정도의 경험이 세계의 전부가 된다.

 

이 방법이 결국 도달하는 귀결은 대강만 말하면 아무런 실제적 차이를 일으키지 않는 구별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방침이다.

è 등가원리는 라이프니츠와 제임스, 아인슈타인, 앨런 튜링에 이르기까지 역사가 꽤 길구나.

 

411 칸토르의 크기가 다른 무한에 대한 증명

è 자연수의 무한대 집합 < 소수의 무한대 집합

è 그러나 무한히 매치시킬 수 있지 않나? 어떻게 크기가 다르다고 증명한단 말인가? 무한에 무한을 곱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è 선분을 무한한 점의 집합으로 본다면 선분 역시 무한 집합이다. 그러나 선분은 길이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면 더 긴 선분이 더 큰 무한 집합인가?

è 더 크다는 것과 무한이라는 말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일까?

 

413 <수학 원리>는 특정한 수를 "어떤 특정한 집합과 동등한 모든 집합을 원소로 하는 집합"으로 정의했다. … 그런데 아마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결론이 이 정의로부터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정의에 의하면 수들을 더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è 이는 플라톤이 "수는 더할 수 없다"고 간파한 것과 같은 내용 - 이라고 러셀은 주장하였다. 그런데 과연 플라톤도 같은 뜻으로 한 말이었을까?

 

수학을 취급했던 프레게의 방법은 그로 하여금 하나의 문장의 두 측면, 즉 문장의 뜻(sense)과 언급(reference)을 구별하도록 만들었다. 이 구별은 수학의 등식들이 그저 공허한 반복 진술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러니까 프레게는 등식의 양편에 놓인 두 개의 표현은 둘 다 동일한 대상을 언급하면서도 의미는 다르다고 보았던 것이다.

è 매우 맞는 말이다. 탁월하다.

F(x) = 블라블라블라라고 하였을 때 왼쪽은 언급이며, 오른쪽은 뜻이다.

 

414 제 자신을 원소로 하지 않는 모든 집합의 집합

è 이 집합은 제 자신의 원소에 속하는가? 속하지 않는가?

(1) 속한다 à 오류 : 이 집합의 원소 특징은 "자신을 원소로 하지 않는 집합"이므로

(2) 속하지 않는다. à 오류 : 그러면 "자신을 원소로 하지 않는 집합"이 되므로 "모든 집합"이라는 설정 상, 반드시 원소가 되어야 한다.

è 재밌네.

 

10. 현대 철학

 

422 그러나 과학적 방법 일반과 관련 있는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해 두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그건 가설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제거하는 것은 과학에서 설명이 하고 있는 기능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도 모든 것을 통째로 동시에 설명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실증주의자들은 우리가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든 가설을 버리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해 보면 자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과학을 연구해 나갈 것인가. 과학에 남게 될 모든 것은 베이컨 식의 분류 작업뿐일 텐데, 이 일은 이미 밝혔듯이 그리 많은 성과를 얻지는 못한다.

 

424 브래들리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업을 닦고 저술을 했으며, 유물주의를 비판적으로 거부한 다음 헤겔의 절대 관념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을 연상시키는 절대자에 도달하는 걸 목표로 하였다. 브래들리가 논의의 전개 과정에 채용한 변증적 방법은 헤겔이 주장했던 유기체적 성장의 원리가 아니라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을 연상시키는 절대자에 도달하는 걸 목표로 하였다. 브래들리가 논의의 전개 과정에 채용한 변증적 방법은 헤겔이 주장했던 유기체적 성장의 원리가 아니라 플라톤과 엘레아 학파의 전통에 속하는 논증에 사용되는 무기였다. 참으로 브래들리는 어느 정도 지적 일원주의라 할 수 있는 헤겔의 철학을 반박하고자 애썼다. 헤겔의 지적 일원주의에는 인식과 존재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생각은 궁극적으로 소크라테스와 피타고르스 학파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견해이다. 브래들리는 이성적 사고와 그 범주들을 생생한 감정과 경험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하였다. 우리가 실재에 관하여 논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단계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는 어떠한 사고든 언제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왜곡이라고 보았다. 사고는 현상들만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실재하는 것에 분류와 결합의 이질적인 체계를 부여함으로써 실재하는 것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래들리는 우리가 사고 과정 중에 반드시 모순에 얽혀들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신조를 <현상과 실재>에서 설명하고 있다.

è 상당히 플라톤과 비슷한 것 같다.

 

427 베르그송이 주장하는 진화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과정이며, 그래서 글자 뜻 그대로 창조의 과정이다. 이 신조는 그의 저작들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창조적 진화론>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가 가정하고 있는 진화 과정은 완전히 예술적 창조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예술가가 어떤 종류의 창조적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력이 자연에 작용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적 변화는 지금까지 실존하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특성을 이룩하려는 끈질긴 창조적 충동을 통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è 창조적 진화론이라니엄밀해져야겠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어설픈 융합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면

è <아티스트 웨이>에서 창조성을 생명체에 내재된 특성이라고 보는 것과 상통한다.

 

431 (프로이트) 이 점에 대해 실증주의라는 편견 때문에 즉각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은 과학적 방법에서 가설이 하는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34 화이트헤드 - 그의 이론은 여러 철학자의 짬뽕 같다.

 

441 실존주의자들은 이 명백한 결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키에르케고르가 사고의 실존적 양식이라 불렀던 것과 같은 종류의 사고에 의존한다. 그들은 이성주의가 이 세계에 대해 밖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생한 경험의 직접성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한 사람의 생생한 경험의 직접성은 내부에서 실존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들의 지론이다.

 

이 명백한 난문제에 대하여 실존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은 다른 취급 방법을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첫째로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는 실존주의자가 사변의 대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나 의의는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이 가능한 한 재미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목적이란 가공의 산물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밖에도 사고의 실존적 양식이라는 개념 그 자체에 심각한 약점이 있다. 어떤 것이 실존한다는 생각을 반성해 보면 항상 우리는 일정한 종류에 속하는 것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존 그것만을 따로 떼어낸다는 것은 잘못된 추상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헤겔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443 하이데거의 철학은 정도를 아주 멀리 벗어난 별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내용이 지극히 몽롱하다. 누구나 그의 언어 사용에 대해서는 큰 혼란에 빠져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사변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무가 실제로 있는 것으로 역설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444 사르트르에 이러르 인간적 자유에 관한 실존주의적 견해는 극한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매 순간마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니 인생에는 전통과의 연결이나 개인의 생활에 이미 일어난 사건과의 연결은 전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새로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셈이다. 그는 이 불쾌한 진리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세계를 합리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자기 보호를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점에서는 과학을 신뢰하는 사람이나 종교적 신앙에 의지하는 사람이나 똑같다고 본다. 그는 양쪽 다 실재로부터 도피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불행하게도 과오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세계는 과학이 파악하고 있는 것과 다르며, 종교를 보아도 신은 이미 니체 시대 이래로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니체의 초인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런 근원으로부터 자신의 무신론을 이끌어 냈다.

è 매우 마음에 든다.

 

444 필연성에 관한 이성주의자들의 견해는 앞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이론적 과학의 영역을 지배한다.

è 그것은 고전주의 과학에서만 그러하고 이후의 과학은 결코 필연성의 과학이 아니다.

 

445 요컨대 이성주의자들은 자연의 진행 과정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는 데 반해서, 실존주의자들은 자신의 기분에 탐닉함으로써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451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원자주의

 

맺음말

 

453 정말이지 어떤 주제에 관해 그저 많이 읽기만 한다고 해서 곧바로 그 주제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는 건 아니다. 어떤 주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과 더불어 반드시 필요한 일은 그렇게 모은 가지각색의 자료에 대해 상당히 치밀하게 반성하는 것이다.

 

458 우리는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지식을 선과 동일시하려고 했던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이 이론은 너무 이성주의에 치우친 이론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 이론에는 절대로 근야 지나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주장이 담겨 있다.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이 아는 지식의 양은 거의 내놓을 게 없을 정도로 적다고 아주 기꺼이 인정했다. 따라서 지식과 관련해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사람은 반드시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것이라 하겠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선과 동일시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탐구였다.

 

458 그런데 예외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건 다른 사람이 스스로 탐구하고 싶어하지 않는 주제에 관해서는 그가 판단을 보류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해 주는 일이다.

è 언제까지???

è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지 않은 채 오류를 주장한다면?

 

정말이지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사람에겐 살 가치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저자라면

 

러셀은 맺음말에서 이 책을 철학의 백과사전이라기보다는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으로 활용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그의 책은 엄밀하고 깊은 이해에서만 가능한 쉬운 설명에 성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양 철학사를 한 권으로 꿰뚫을 수 있는 그의 저작은 참으로 고마운 것이다.

 

책은 정주행의 방향대로 착실하게 나아간다. 특히 그리스 철학에 관한 저자의 깊은 이해는 감명을 주기까지 한다. 앞선 철학이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후대의 철학은 앞선 철학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예습과 복습이 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잇고 있으며 큰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게 하고 있다.

 

특히 철학자 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한 집중적인 토의, 그리고 이와 비견될만한 인물들과의 적절한 대비 등을 통해 이해력을 증진시키고 있다. 러셀은 굉장히 차분하게 내용을 개진해 나가고 있으며 그의 글은 번역글임에도 불구하고 리듬감이 느껴진다(이는 번역자의 노고이기도 할 것이다). 그만큼 템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책을 읽으면서 러셀이 지향하는 철학관이 어떠한 것인지 뚜렷하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부감이 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러셀의 지향하는 바와 비슷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러셀의 논조가 감정적으로 흥분되어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서 상당한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각 철학에 대한 저자의 깊은 이해와 해석, 그리고 비판에 있다. 철학을 백과사전식 설명으로만 나열한 책이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러셀은 본인 스스로가 전체를 개괄하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각 철학관의 한계에 대한 매우 합당한 비판을 내놓고 있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무릎을 치게 만드는 지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도 매우 자주.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이 책을 읽고 지금껏 고민해왔으나 이내 잊어버리곤 했던 생각들이 사실은 철학의 문제였으며, 그것도 매우 유구한 역사를 가진 중요한 문제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철학에 답이 없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더 옳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모두 옳다"는 견해의 모순)을 알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엄밀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실존적 경험으로 느끼게 되었다.

 

철학 자체가 어렵고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책 자체는 읽는 데 무척 에너지마 많이 소모된다. 그러나 이 책이 거의 최선이었다고 생각되며, 앞으로 여러 번 정독할 필요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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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9 11:44:29 *.68.172.4

25 또한 탈레스는 자석이 쇠를 움직일 수 있으므로 영혼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퀀텀 브레인> 존 홉핕드는 의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특정 유형의 신경망이 '스핀 유리'라는 특정 유형의 자기계와 수학적으로 똑같음을 입증해보였다. 탈레스와 가설의 맥락이 동일하다! 무언가를 움직일 수 있는 자연의 가장 단순한 속성이 바로 의식의 기본단위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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