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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9일 11시 18분 등록

서양의 지혜

B.A.W. 러셀 / 정광섭 옮김 / 동서문화사

 

 

I. 저자에 대하여 / B.A.W. 러셀

 

 러셀.png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철학자, 사회학자, 논리학자

출생-사망 1872 5 18 (영국) - 1970 2 2

본명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출생지 영국 잉글랜드 몬머스셔 트렐렉

주요수상 노벨문학상(1950)

주요저서 《수학원리》(3, 1910∼1913, 공저) 《철학의 제문제》(1912)

 

 

1872.5.18 '20세기의 지성'버트런드 러셀 태어나다

 

출생

 

1872 5 18일 러셀은 할아버지 존 러셀 경이 영국 수상을 역임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버트런드 러셀의 아버지 John Russell, Viscount Amberley

러셀의 가문은 몇 세기 전 튜더 왕조가 세워지며 권력을 얻어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휘그 당을 세운 가문이었으며, 영국 정치사의 중요한 사건, 1536-40 년 수도원 해체, 1688-89년 명예 혁명과, 1832년 영국선거법개정(Great reform act) 에 참여하였다.

러셀의 부모는 당시 정치사상의 극단적인 쪽이었다. 러셀의 아버지 존 러셀 은 무신론자였으며,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생물학자(Douglas Spalding)와 자신의 아내간의 정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부모 양쪽 모두 당시 사회 분위기에 앞서가는 "산아제한"의 지지자였다.[12] 아버지 존 러셀의 무신론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에게 러셀의 대부를 부탁하는 데서 명확히 드러난다.[13] 밀은 러셀의 탄생 이후 얼마 안 가 사망하지만, 그의 저술은 러셀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부모의 양육

 

러셀에게는 프랭크와 레이첼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으며 이중 레이첼은 1874년 어머니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난뒤에 세상을 떠났다. 1876년에는 아버지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프랭크와 버트런드 러셀은 조부모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영국 수상을 역임했던 그의 할아버지는 1878년세상을 떠났는데,러셀은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탄 친절한 할아버지로 기억한다. 유년기의 대부분동안 러셀은 할머니인 러셀 백작 부인의 돌봄을 받았다.

 

할머니의 교육

 

당시 러셀 백작부인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종교이외의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여 다윈사상의 지지자였으며, 버트런드 러셀에게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에 대한 시각을 키워주었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성서 이야기인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23:2/새번역)는 러셀의 좌우명이 되었다. 당시 러셀이 살던 Pembroke Lodge도 종교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분위기였는데, 러셀의 형 프랭크는 저항했으며, 버트런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생활했다.

 

고독

 

러셀의 사춘기 는 굉장히 고독했으며, 그는 몇 차례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러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종교와 수학이었으며,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그는 집에서 몇 명의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 그의 형 Frank 는 러셀에게 유클리드기하학을 가르쳐, 러셀의 삶을 극적으로 바꾼다.

 

무신론

 

또한, 이 기간 중에 그는 퍼시 비셰 셸리의 저술을 찾게 된다. 그의 자서전에 그는 "나는 내 생각이나 기분을 말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서, 모든 여가 시간을 그의 저술을 읽으며, 마음 깊이 새기는 데 보냈다. 나는 셸리의 저술을 알게 된 것이 정말 환상적이라고 느꼈으며, 내가 인간으로서 그를 만났다면 큰 동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기록한다. 15세가 되며 러셀은 기독교의 교리가 합당한가에 대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으며, 18세에 그는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대학 시절과 첫번째 결혼

 

러셀은 1890 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G.E. Moore와 아는 사이가 되었으며, Alfred North Whitehead에게 Cambridge Apostles를 추천받으며 영향을 받는다. 러셀은 수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케임브리지의 Wrangler 1893년에 졸업하고 1895 Fellow가 된다.

 

러셀은 17세에 처음으로 퀘이커 교도였던 Alys Pearsall Smith와 만났으며, Pearsall Smith 의 가족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러셀을 "존 러셀 경의 손자" 로 알고 있었으며, 이후 러셀과 같이 대륙을 돌며 여행하기를 즐겼다. 그들과 함께 러셀은 1889년 파리 박람회에 참가해 에펠 탑이 만들어진 직후 에펠탑에 올라본다.

 

이후 그는 청교도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Alys와 사랑에 빠지며,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94 12 13일 결혼한다. 그들은 1901년 같이 자전거를 타며, Alys가 러셀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묻자,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며 파경에 빠진다. 러셀은 Alys의 어머니가 잔인하게 그를 조종하려고 하였기에 싫어했으며, 이후 1921년까지 별거하며 형식적으로만 부부로 남아있다가 이혼한다. 이 기간동안 러셀은 Ottoline Morrell과 배우 Constance Malleson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과 열애 관계에 빠진다.

 

초기 활동

 

러셀은 1896, 자신의 전 생애에 걸친 정치,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출간하고, 이어서 같은 해에 런던 경제 대학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1937년 이곳에서 다시 '권력의 과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그는 1902 Sidney Webb, Beatrice Webb 에 의해 세워진 Fabian society coefficients dining club 안의 사회 개혁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이후 그는 트리니티 대학에서 수학의 기초 원리를 연구하며, 집합론의 기초를 뒤흔드는 러셀의 패러독스를 발견한다. 1903년 그는 수리논리학에 대한 첫번째 저작인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 을 발간하며, 여기서 수학은 매우 적은 수의 공리에서 유도될 수 있음을 보여, 논리주의의 주장에 큰 근거를 실어준다.

 

1905년에 그는 철학 저널 Mind에 에세이 "On Denoting"을 싣고, 이후 1908년 왕립학회 회원이 된다. 이후 Principia Mathematica 1권을 화이트헤드와 함께 1910년 출간하며 수리철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

 

1910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공학도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곧 그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들어오게 되며, 러셀은 그를 천재이며, 자신의 논리학의 후계를 이을 사람으로 평가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매료된 러셀은 많은 시간을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공포증과 우울증을 돌봐주는데 보내게 된다. 이것이 상당히 러셀의 기력을 소모했지만, 러셀은 굽히지 않고 비트겐슈타인에게 학문을 하도록 권유했으며, 1922,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저작 중 하나인 논리철학논고를 출판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1918 1차대전 전쟁 포로로 잡혀있는동안 그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재해석한 Logical Atomism 의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중 활동

 

1차 세계대전중 러셀은 몇 안되는 전쟁 반대론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1916년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고되며,100파운드의 벌금을 선고받는다. 러셀은 감옥에 가기를 희망하여 이를 내기 거부했으나,정부에서는 러셀의 책들을 압수해 경매에 부쳐 벌금을 징수하였다. 압수된 서적은 러셀의 친구들이 구매했으며, 러셀은 "케임브리지 경찰에 의해 압수됨" 이라는 낙인이 찍힌 킹 제임스판 성서를 기념품으로 간직한다.

 

러셀은 1919년 복직되었으나, 1920년 강사직에서 물러났고, 이 대학에서 1926 Tarner Lecturer 로 활동하다, 1944-1949년 까지 Fellow 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미국이 영국편으로 참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강연을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것에 대해서는 브릭스튼 감옥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1918 9월 석방된다.

 

 1차 대전후 활동

 

1920 8월 러셀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미친 영향을 조사하기 위한 1920년 영국 대표단에 뽑혀 갔다.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1시간에 걸친 토론을 했으며, 회고록에서 레닌의 "악마적인 잔인성" 을 발견했고, 레닌의 성품을 "독선적인 교수" 에 비교하며, 실망감을 표시했다. 이후 증기선을 타고 볼가강을 내려가기도 했다. 러셀의 연인이었던 도라 러셀도 러셀과는 별개로 러시아를 같은 시기에 방문했는데, 그녀는 러시아 혁명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하지만 러셀의 경험은 이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철회하게 했고, 자신의 경험을 "The Practice and Theory of Bolshevism"에서 회고하며, 영국으로 돌아갈 때 동료 24명이 러시아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대해 반대 의견으로 설득하려고 한 이야기를 싣는다. 일례로, 러셀은 오밤중에 들은 총성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비밀경찰의 총살이라고 주장하지만, 동료들은 자동차 엔진 소리였을 거라고 흘려듣는 장면이 있다.

 

이후 러셀은 베이징에서 1년간 도라와 함께 철학 강의를 한다. 러셀은 그곳에 희망을 품고, 중국이 새로운 궤도에 올랐다고 보았다. 당시 그곳에 있던 학자들 중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있다. 중국에 머무르는동안, 러셀은 천식으로 심하게 고통받았는데, 일본 신문에는 그의 사망설이 돌았다. 이 커플이 일본을 방문할 때, 도라는 "일본 신문에서는 죽은 버트런드 러셀씨는 일본 기자들께 인터뷰를 하실수 없답니다." 고 응답했는데, 당시 일본 언론의 반응은 이 응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21 8 26일 귀국 당시, 도라가 임신 6개월 차였기에, 러셀은 이혼을 서두르고, 1921 11 27일 결혼 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1921 4대 러셀 백작인 존 콘라드 러셀 과, 캐더린 러셀이 있다. 러셀은 일반인을 위한 물리학, 윤리학, 교육학 서적을 출판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으며, 이 당시 러셀이 T.S.앨리엇의 부인이었던 Vivienne Haigh-Wood 과 정사관계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2차대전

 

러셀은 처음에는 히틀러를 패배시키는 것보다 전 세계에 걸친 전쟁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아, 나치 독일에 대한 재무장을 반대했으나, 1940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전 유럽을 장악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영구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에, 자신의 시각을 바꾸게 된다. 1943년 그는 "정치적으로 상대적인 평화주의"를 제창한다. 전쟁은 언제나 거대한 악행이지만, (히틀러의 나치 독일 같은) 특정하고 극단적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덜 나쁜 악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활동

 

이후 1944년 귀국하여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45년 원자폭탄이 발명되자, 그는 수소 폭탄의 발명을 예언하고 핵무기 반대 운동과 함께 세계 평화 운동을 벌였다. 《서양 철학사》, 기독교 비평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비롯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수학자로서 출발하여 <수학 원리>를 통해 수리 철학 및 기호 논리학에 공헌하였다. 철학·정치·교육·인생 등에 관한 평론도 있다. 주요 저서로 <수리 철학 서설> <정신의 분석> <서양 철학사> <권력> 등이 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

 

자신의 진실을 시대의 진실과 융합시키고자 책을 쓰고 몸소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이런 진실된 인간의 탄생은 영국이라는 제국주의 나라,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수상을 두 번씩이나 역임한 귀족 집안 출신이어서 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러셀은 평범하거나 비참한 상황에서 저항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권위와 사회제도에 억압당하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박차고 나와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 예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단호하게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할 때, 러셀은 왕실에서 하사 받은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지만 가장 강력하게 여성해방 운동의 선두에 섰다. 이 일로 귀족들과 반대자들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잠시 내려놓고 벌거숭이가 되어 진실과 더불어 행동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를 이렇게 회고한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1872년 오늘, 영국의 웨일스에서 출생한 그는 초대 러셀 백작이자 영국 수상을 두 차례 역임한 존 러셀 경의 손자이다. 어린 시절 양친을 잃은 러셀은 조부모의 보살핌 아래서 성장했는데, 이 유년기가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고독한 소년이었다. “어린 시절을 통틀어 내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정원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었으며 따라서 내 존재의 가장 강렬한 부분은 항상 고독했다.” 

그리고 그 고독 속에서 뭔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소년이었다. “삿갓조개, 말미잘, 바위, 모래, 고깃배, 그리고 등대. 삿갓조개를 잡아당기면 바위에 착 달라붙는다는 사실이 내게는 무척 인상 깊었으므로 애거서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줌마, 삿갓조개들도 생각을 해요?” 그녀의 대답은모른다였다. “그럼 배워야지요.” 내가 응수했다.”

철학자의 탄생을 예감케 하는 일화다. 이 배우고 싶은 소년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과 도덕, 과학을 공부한다. 특히 수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서 1903년 서른 살에 자신의 최초의 저작인 <수학의 원리>를 출간했고, 1918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의 징역형을 산다.

 

감옥에서 그는 귀족집안 출신답게 비교적 자유롭게 집필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수리학 개론> <정신의 분석>을 집필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서양 철학사> 1945년과 1950년 사이에 쓴 걸작이다. 그는 98세까지 장수 하면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다양한 분야에 4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저술가이기도 하다.

 

"인간의 영혼은 모두 고독하다" - 러셀의 신비한 경험

 

당대의 지성답게 수많은 거물들과 교류하였다.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영국의 계관시인 엘리엇과 같은 뛰어난 제자들, 화이트헤드와 같은 선배이자 친구와 더불어 수많은 당대의 인물들이 그와 교류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도 각별한 사이었던 <수학원리>를 같이 저술한 화이트헤드와의 만남이 있었다. 화이트헤드의 부인이 병상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러셀은 신비한 경험을 한다. 누구나 인생의 결정적인 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이 경험으로 러셀은 평생의 신념인 평화주의자로 변신해 버렸다.

 

 “그녀는 고통 때문에 모든 사람과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된 듯 보였는데 바로 그때, 인간의 영혼은 모두 고독하다는 느낌이 느닷없이 나를 사로잡았다. (……) 갑자기 발 밑에서 땅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다른 영역에 들어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5분의 시간에 나를 스친 생각은 이러했다. 인간 영혼의 외로움은 견디기 힘들다. 종교적 스승들이 설파한 것과 같은 지고의 강렬한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그 외로움을 간파할 수 없다. 이 동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들은 모두 해로우며 잘해본들 무용하다. 따라서 전쟁은 잘못된 것이고, 사립학교 교육은 옳지 않으며, 폭력에는 반대해야 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각 개인이 가진 외로움의 응어리 속으로 파고 들어가 호소해야 한다.”

러셀은 영국의 백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 좌파, 회의적 무신론자로 자처하면서 학문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정치적인 활동과 대중 계몽, 교육에 힘을 쏟았다. 반전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에서부터 쿠바 위기와 중국-인도 국경분쟁에도 적극 개입하였다. 그리고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보수적인 귀족 사회에서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평생 세 번의 결혼과 또 다른 여인들과도 사랑을 나누었다. 자서전을 보면 러셀이라는 한 인간이 얼마나 순수하게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 놀랄 지경이다. 성적인 호기심에 눈을 떠 사춘기 시절에 자위를 하던 때의 심경, 아내와 여인들과의 사랑, 애증에 대한 솔직한 묘사에는 인간의 욕정과 사랑의 경계선상에서 사랑을 품고 나아가는 한 사내의 진정성이 온전히 녹아 있었다. 또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가 돋보인다.

러셀이 남긴 철학자로서의 업적 중에 하나인 <서양 철학사>라는 책의 제목도 중요하다. 서양 철학자들은 서양 철학사라고 하지 않는다. ‘서양이라는 단어 대신에세계 철학사내지는철학사라고 명시함으로서 서양 중심의 사고방식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러셀은 동양의 거대한 정신 세계를 인식하고 <서양 철학사>를 저술했다. 시와 소설,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서양 철학사에서 영국의 시인 바이런에 독립된 장을 할애했고 칸트나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과 동등하게 다루었다.

 

이제, 잠들게 된다면 아무 미련없이 편히 자련다"

 

이제 늙어 종말에 가까워서야

비로서 그대를 알게 되었노라

그대를 알게 되면서

나는 희열과 평온을 모두 찾았고

안식도 알게 되었노라

그토록 오랜 외로움의 세월 끝에

나는 인생과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노라

이제, 잠들게 된다면

아무 미련없이 편히 자련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주요 저작

 

1912. 철학이란 무엇인가(권오석 역, 2008) / 철학의 문제들(박영태 역, 2000)The Problems of Philosophy. London: Williams and Norgate.

1916.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이순희 역, 2010) Principles of Social Reconstruction.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19. 수리철학의 기초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 London: George Allen & Unwin. (ISBN 0-415-09604-9 for Routledge paperback) (Copy at Archive.org).

1922. 러셀 북경에 가다(이순희 역, 2009) The Problem of China.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25. 상대성 이론의 참뜻(김영대 역, 1997) The ABC of Relativity. London: Kegan Paul, Trench, Trubner.

1925. 나는 믿는다(What I Believe. London: Kegan Paul, Trench, Trubner.

1926. 러셀의 자녀교육론 On Education, Especially in Early Childhood.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27. An Outline of Philosophy.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27.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재황 역, 1996) Why I Am Not a Christian. London: Watts.

1927. Selected Papers of Bertrand Russell. New York: Modern Library.

1928.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김경숙 역, 2008) Sceptical Essays.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29. 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김영철 역, 1997) Marriage and Morals.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30. 행복의 정복 / 러셀의 행복론(황문수 역, 2001) The Conquest of Happiness.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35. 게으름에 대한 찬양(송은경 역, 1997) In Praise of Idleness.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35. 종교와 과학(김이선 역, 2011) Religion and Science. London: Thornton Butterworth.

 _. 런던 통신 1931-35(송은경 역) Mortals and Others: American Essays 1931-1935

1938. 권력 (안정효 역, 2003) Power: A New Social Analysis.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40. 의미와 진리의 탐구(임병수 역, 1990) An Inquiry into Meaning and Truth.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45. 러셀 서양철학사(서상복 역)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and Its Connection with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48. 인간과 그 밖의 것들(송은경 역, 2005) Human Knowledge: Its Scope and Limits.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49. 권위와 개인(이종익 역, 1997) Authority and the Individual].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50. 반속적 에세이 Unpopular Essays.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59.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곽강제역, 2008) My Philosophical Development.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59. 서양의 지혜 Wisdom of the West, edited by Paul Foulkes. London: Macdonald. George Allen & Unwin.

1961. 사실과 허구의 교차로(고정식 역, 1993) Fact and Fiction.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61. 인류에게 내일은 있는가(고정식 역, 1991) Has Man a Future?,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51–1969. 러셀 자서전(송은경 역, 2003) 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3 vols.. London: George Allen & Unwin. Vol 2 1956

1969. 러셀의 철학노트(최혁순 역, 1990) Dear Bertrand Russell... A Selection of his Correspondence with the General Public 1950–1968, edited by Barry Feinberg and Ronald Kasrils.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소중한 삶을 여는 인생노트 / 러셀 인생노트

파이의 역사

일반인을 위한 철학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Bertrand Russell's Best edited by R.E. Egner

연구서 러셀(신일철 역, 1982) Bertrand Russell, by A. J. Ayer (1972), reprint ed. 1988: ISBN 0-226-03343-0

 버트란드 러셀(최혁순 역, 1984)Bertrand Russell and His World, by Ronald W. Clark (1981) ISBN 0-500-13070-1

 

 

II.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즐거운 지식

 

머리말

 

P11 이 책의 목적은 탈레스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서양 철학의 개설과 아울러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역사적 상황을 상기시켜 주는 몇 가지 일들을 말하고자 하는 데 있다.

 

P12 서양 철학은 모두가 그리스 철학이다.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와 우리를 맺어주는 유대를 단절하면서 철학 사상을 즐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프롤로그

 

P14 철학자들은 어떤 일을 하는가? 이것은 정말로 이상한 질문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하지 않는 것을 처음 밝힘으로써 그 해답을 찾는 것이 좋겠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는 너무나 잘 이해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증기기관의 작용은 기계학과 열역학에 속한다. 또 우는 인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작용하는질 잘 안다. 이는 해부학과 생리학에서 연구하는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변의 운동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천문학에서 다루는 문제이다. 이렇게 잘 정의된 모든 지식은 과학의 이런저런 분야에서 속한다.

 

P14 우리는 철학과 다른 종류의 사색을 구별해야 한다. 철학 자체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우리의 영혼을 구하지도 못한다. 그리스인들의 주장처럼 그 자체를 위한 일종의 관광여행이다

 

P15 실제로 미지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책을 바탕으로 신비적이거나 다른 근원적인 영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물러나서 스스로를 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과학적, 사색적 방법이다.

 

P16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연구할 때, 우리는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제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철학을 다루는 방법이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1장 소크라테스 이전

 

P18 철학은 누군가가 하나의 총괄의 의문을 갖는 데서 시작된다. 과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맨 처음 이외 같은 호기심을 분명히 나타낸 국민은 그리스인이었다. 오늘날의 철학과 이 지적 활동을 낳은 어머나. 곧 그리스 문명의 발흥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눈부신 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일인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불과 20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리스인들은 예술 문학 과학 및 철학 분야에서 서양 문명의 총체적 기준을 정하는 갖가지 걸작들을 놀라울 정도로 연이어 탄생시켜 나갔다.

 

P18 철학과 과학은 기원전 6세기에 밀레토스의 탈레스에서 시작되었다.

 

P19 메소포타미아에서 셈족의 대제국이 수메르인들을 몰아내고 들어앉았는데, 셈족은 이들에게서 서형문자를 배웠다. 종교 면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복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별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일도, 이와 관련이 있는 마법이나 점술의 풍습도 이런 목적을 위한 것들이었다.

 

P22 이것은 그리스 정신의 긴장 상태를 상징한다. 한편에는 질서 바르고 합리적인 면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인 면이 있다. 전자는 철학, 과학, 예술을 낳았고, 후자는 풍년 기원과 결합된 비교적 원시적인 종교 속에서 나타난다.

 

23. 니체는 이 두 요소를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어느 것이나 그 중 한 가지만으로는, 그리스 문화가 비상하게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P27 최초의 과학적 철학자들이 밀레토스에서 생겨났다.

 

P30 원초의 물질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질료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질료를무한한 것’, 곧 사방팔방으로 퍼지는 무한의 물질이라고 부르고 있다. 거기에서 세계가 생기고 결국은 그 속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P31 아낙시만드로스는 이와 같은 논중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 나아가서, 인간이 바다의 어루에서 파생되었다고 중장했으며, 물고기의 화석을 관찰하고 상어가 그 새끼들을 기르는 방법을 관찰하여 이를 지지했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우리에게 물고기를 어족들이 우리와 같은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P32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해답이 아니라 제기된 문제이다.

 

P35 피타고라스학파에 따르면 영혼은 일련의 윤회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P35 피타고라스학파는 과학적인, 그중에서도 특히 수학적인 전통을 낳았다.

 

P36 음악의 발견이 모든 것은 수라는 관념과 서로 통했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P39 피타고라스학파의 신념에는 오르페우스교적 요소가 있었지만, 그들이 믿는 최대의 신은 아폴로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 아폴로적 성격이 유럽의 합리주의 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를 구별해 주기 때문이다.

 

P40 다툼이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추진 원리이다. “다툼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사라지면 좋겠다는 호모의 말은 잘못이다.

 

P41 “만물은 불의 교환물이며 불은 만물의 교환물이다. 이는 물건이 황금의 교환물이고, 황금이 물건의 교환물인 것과 전적으로 같다.”

 

P48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 이상이 파르메니데스의 논의의 전반적인 경향이다.

 

P51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에 이들을 원소라고 했다. 이것은 물 공기 불 흙으로 구성된 유명한 4원소 이론인데, 이는 약 2000년 동안 화학을 지배했다.

 

P53 전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옮아가는 일은 없다. 이상이 완전한 엘레아학파의 유물론이다.

 

P58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대중들로부터 눈총을 받았고바보라 불렸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로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P60 올림픽 경기는 그리스인들이 육체에 가치를 부여한 살아있는 표시였다. 이것은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인간은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도 가지고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사상가들은, 현대 세계가 중세의 스콜라 철학적 전통에서 이어받은 것과 같은 상아탑적 지식인은 아니었다.

 

P60 그리스 인들은 실험자로서는 실패한 사람들이었다. 실험은 손을 더럽히는 일이며, 이와 같은 여흥은 노예들에게만 어울리는 것이라고 그리스인들은 흔히 생각하고 있었다.

 

P61 모든 것은 확대되어갔고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목표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놀라운 자신감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의 유명한 코러스에 나오는불가사의한 것은 많이 있으나, 인간 이상의 불가사의는 없을 것이다라는 대목이다. 이런 정감은 후세에 이르면 없어지지만, 근대의 르네상스에 다시 소생한다. 이탈리아의 인문 주의자 알베르티의 저서에 안간의 지위에 대한 거의 비슷한 견해가 나온다. 이와 같이 활력에 찬 시대는 자기를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신념에 대해서는 자칫 오만해지기 쉽다. 사람들에게 선의 형상을 상기시킨 사람은 이세기 말엽에 출현한 소크라테스였다.

 

P67 피타고라스 수학의 또 하나의 커다란 유산은 소크라테스가 수용하여 더욱 발전 시긴 이데아 이론이다.

 

P68 현실의 그 어떤 도형도 마음 속 이미지의 충실한 모사일 뿐이다.

 

P81 1성질에는 형태와 크기와 물질이 있고, 2성질에는 빛깔이나 소리와 맛 등이 있다. 2성질은 제1성질로 설명되는데, 1성질은 원자 자체에 속한다.

 

P82 소크라테스가 경멸하면서 대단한 녀석들도 아닌데 대단해 보이려는 녀석들이 있다고 말한 것은 그들을 가리켜서 한 말이다.

 

P83 궤변론자들은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지식은 시시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쓸모 있는 의견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그 어떤 진리가 있다. 실제적인 문제를 처리할 때,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성공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정반대이다. 궤변론자들이 견실한 습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자기 성찰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P85 ‘소피스트라는 말 자체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P85 소크라테스는 형식을 갖추지 않고, 학생이 스스로 깨우치도록 유도했다.

 

P85~86 오늘날 철학자는 전통과 인습을 뒤집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과 견해에 무조건 동의하지 않는 비타협자로서 차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다.

 

2장 아테네

 

P88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위대한 세 사람은 모두 아테네와 연관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그곳에서 태어났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배우고 가르쳤다.

 

P90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제국주의를 시샘해서 일으킨 전쟁은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계속되었고, 아테네의 완패로 끝났다.

 

P91 우리는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곧잘 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갑자기 아무데서 멈추어 서고, 때로는 계속에서 몇 시간이고 사색에 잠겼다. 동시에 그는 몸이 튼튼했다. 군대 시절부터 그 누구보다 더위와 추위를 잘 견뎠고, 그 누구보다 마시거나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또한 그가 싸움터에서 용감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P93 소크라테스는 이 윤리 문제를 토론 형식을 취해 명확히 하려고 했다. 질의응답으로 사물을 발견해내는 이와 같은 방법은변증법이라고 불리는데, 소크라테스가 이 방법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은 아니지만 이 방법의 대가였다.

 

P96 죽음은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그것을 꿈을 꾸지 않는 잠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세의 삶으로, 거기에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르페우스나 무사이오스나 헤시오도스나 호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그들은 질문을 했다고 해서 결코 사람들을 죽이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100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정신을 이성의 빛에 비추어, 혼자서 사물을 생각할 수 있도록 단련시키는 이이었다.

 

P102 실제로 철학적인 저서가 깊이가 있기 위해서는 문체가 난해하고 서툴러야 한다는, 거의 전통에 가까운 생각이 여기저기에 깔려있다

 

P103 소크라테스가 대화편에서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다소 언급해야겠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정작 자신의 철한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주로 플라톤의 저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올 수 있었다.

 

105. 이데아 이론은 원래 피타고라스의 것이다.

 

P105 철학자는 무엇인가라고 하는 물음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이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다. 그러나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두 철학자는 아니다.

 

P110 제아무리 열심히 정확한 직선을 그리려 해도, 그것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완전한 직선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P112 플라톤은 이상 국가의 시민을 관리자, 병사, 시민의 세 계급으로 나눈다. 정치 권력을 휘두르는 소수의 엘리트 국가가 처음으로 설립되면, 입법자는 관리자를 임명하고 그 후에는 관리자의 혈통이 뒤를 잇는다. 그러나 하층 계급출신이라도 뛰어난 관리자의 혈통을 뒤를 있는다. 그러나 하층 계급 출신이라도 뛰어난 자리면 지배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고, 관리자의 임무는 입법자의 의지가 실시되는가를 지켜보는 것이다. 플라톤은 관리자가 이를 확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이 어떻게 고육받아하 하고, 어떻게 정신과 육체 생활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계획을세운다. 그들은 정신과 육체 교육을 받는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음악, 즉 뮤즈신이 지키는 예술을 가르쳐야한다. 육체 건강을 위해서는 체조’, 즉 팀이 필요없는 운동을 가르쳐야 한다. 음악 교육 또는 교약 교육을 하는 이유는, 신사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118. 교사의 역할은 학생이 자기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일이다.

 

P119 교육이란 교사의 인도를 받으면서 혼자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P121 참다운 학습을 낳는 것은, 이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은 학생과 교사의 상호 작용이다. 이런 뜻에서 학습은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123 소크라테스는 그를 전문가로 치켜 세워, 이와 같은 문제에는 권위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므로 윤리적 조언을 드려 다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가장한다.

 

P123~124 윤리 제쳐놓고 볼 때, 소크라테스는 논리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를 설명하는데 성공 한다. 우리는 신성한 것의 형상’, 즉 신성한 사물들을 신성하게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 있다. 좀더 익숙한 말을 사용하자면, 우리는 지금

 

P133 지식이란 논증에 의해 지지된 올바른 판단이다. 논증이 없는 곳에 지식은 없다.

 

P141 철학자로서 플라톤만큼의 넓이와 깊이에 이른 사람은 없고,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도 전혀 없다.

 

P150 동방의 천문학자는 현상을 기록하는 일에 만족한 반면, 그리스의 사상가는 현상을 만족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P155.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 형식의 연구를 분석론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검사를 위해 풀어헤치는 것이 논증의 구조이다.

 

P157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적 위압에 감히 맞서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화석 상태로 계승하기에 이르렀다.

 

P159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 가운데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율이다. 이것은 질료와 형상의 이론과 결부되어 있다. 인과율 관계에서는 진료적인 면과 형상적인 면이 있다. 형상에 그 자체가 세 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천째, 한정된 의미에서의 형상적인 면, 말하자면 배치가 있다. 둘째, 방아쇠를 당기면 총이 발사되는 것처럼 변화를 현실에 나타나게 하는 동인이 있다. 셋째, 변화가 달성하려 하고 있는 목표 또는 목적이 있다. 이들 네 개의 면은 각기 질량인, 형상인, 동력인, 목적인 이라고 불린다.

 

P167 윤리적 문제는 우리가 인간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물을 때 생긴다.

 

P177 비극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감을 세탁해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카타르시스를 뜻하는데, 자기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대리 경험하면 영혼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비극에는 치료의 의도가 있다.

 

3장 헬레니즘

 

P188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은 페르시아 침입에 대항해서 싸웠고, 기원전 4세기 초에 페르시아 대왕의 제국은 이미 덩치만 크고 쓸모가 없는 거목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볼 수있다.

 

P189 그리스에서 박트리아까지, 나일 강에서 인더스 강까지 세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알렉산더 한 사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는 그리스인에게 한낱 마케도니아의 군주에 지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그리스 문명을 짊어질 사람으로 보았다. 실제로 대왕은 실력을 보였다.

 

P201 스토아 철학자의 철학 전체를 통해서 중심적 관심을 이루고 있던 가장 중요한 논점 가운데 하나는 결정론과 자유 의지의 문제이다. 이 철학의 문제는 여러 시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제논은 엄연히 법칙이 자연을 비지배한다고 보았다. 그의 우주론은 주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견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제논에 의하면 근원이 되는 실체는 헤라클레이시토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이다. 여기에 다른 기본 요소가 불리되는데, 그 방법은 아낙사고라스의 이론과 조금 가깝다. 결국 거기에는 대규모적인 횃불이 나타나 모든 것이 이 원시의 불로 돌아가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이론처럼 새로 시작 된다. 세계가 그 궤도를 달릴 때 적용되는 법칙은 역사의 모든 세밀한 부분까지 재배하는 어떤 최고 권위에서 나온다. 모든 것은 미리 정해진 방법으로 어떤 목적 때문에 일어난다. 최고의 힘이나 성스러운 힘은 세계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래에 스며드는 수분과 같이 세계에 고루 스며드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신은 내재하는 힘이며, 그 일부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부에 살아 있다. 이런 견해는 근대에 들어와서 스토아학파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스피노자의 철학적 저술을 통해서 유명해졌다.

 

p205 물질적 소유물을 잃는 것은 언제나 어느 정도까지 보상할 수 있으나, 자존심을 잃으면 인간 이하로 전락하고 만다.

 

p207 중동은 알렉산더의 영향으로 헬레니즘화 되었고, 서방에서는 로마가 그리스 유산의 전수자가 되었다.

 

P214 이론이 섞인 것이 신플라톤주의라고 불렸고, 그리스도교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이는 어떤 뜻에서 고대와 중세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리하여 고대 철학을 종말을 고하고 중세 철학이 출발하게 된다.

 

P217 영혼은 영원하지만, 그것은 누스가 되는 경향이 있고, 다라서 영혼의 실체까지는 잃지 않아도 개성은 잃게 된다.

 

P220 그리스인의 실패가 뛰어난 지력에서 생긴 일종의 자만심 때문이었다고 하면, 로마임은 상상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4장 초기 그리스도교

 

P 222 서방의 철학 활동은 교회의 지도와 보호하에서 번성했다.

 

P223 과거의 전통으로 살아남은 것은 교회의 손으로 보존되었고, 철학은 그리스도교와 그 수호자가 통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학문의 한 부분이 되었다.

 

P225 유대인들은 구세주가 앞으로 그들에게 지상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나사렛의 예수를 구세주로 받들고 있었다.

 

p228 초기 그리스도교는 사실상 개혁된 유대교로, 그것은 마치 프로테스탄티즘이 처음에 교회 내부의 개혁 운동을 벌인 것과 같다.

 

P233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 그 옛날 로마의 원로원 의원 일족이 해왔던 것과 거의 동일하게 다수의 예속 평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P233 서로마 제국 최후의 그리스도교 시대에 교회 권력의 강화에 노력한 중요한 세 성직자가 있다. 세 사람은 모두 후세에 성인 칭호를 받았다. 암브로시우스, 헤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두 4세기 중엽에 2~3년 차이로 태어났다.

 

P234 신학적 뼈대는 거의 아우구스티수가 만들었고,종교 개혁에 이르기까지의 가톨릭교의 신학적 뼈대는 거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었고, 개혁된 종교의 지도 원리도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었다. 루터 자신도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 사제였다.

 

P239 "시간도 세계도 함께 만들어진 것"

 

P241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은 세 겹의 현재이다. 현재라고 부르기에 어울리는 현재는 진실로 있는 오직 하나뿐이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으로 살아있고, 미래는 현재의 기대로서 살아 있다. 이 이론에 나름대로의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시간에 대한 주관적 성격을 인간의 정신적 경험의 일부로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인간은 창조된 존재로서 정신적 경험을 하기 때문 때문이다.

 

P246 미신적 전통은 미신을 가지지 않는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할 것이다. 진취적 기상보다 금욕을 높이 평가하는 전통에서는 시대의 도전에 대응하는 건설적인 정치적 조치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철학 문제는 그 배후에 있는 역사적 학식의 모든 재료가 없어도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사를 보는 관점은 대부분의 의문이 이전에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과거에 현명한 해답이 제시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5장 스콜라 철학

 

p256 로마의 중앙 정권이 쇠퇴함에 따라, 서로마 제국의 여러 나라들도 미개 시대로 빠져 유럽은 전반적인 문화의 쇠퇴기로 들어갔다. 이른바 암흑 시대는 대체적으로 600년에서 1000년까지로 계산된다.

 

P258 정치 권력의 중심이 없었기 때문에, 교황권은 동방 교회가 자기 영역 안에서 강력한 존재로 있었던 것 이상으로 훨씬 강해졌다. 원래 라벤나의 처분은 어떤 뜻에서 보아도 합법적인 처리는 아니었다. 이에 대해 무엇인가 좀더 그럴듯한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한 수도사가 어떤 문서를 위조했는데 이것이 콘스타티누스 황제의기부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문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교령으로, 황제가 서로마에 속했던 모든 영토를 교황청에 양도한다는 내용이 남겨 있다. 이와 같이 해서 교회의 속세의 권력이 확립되어 중세 내내 유지되었다. 이 위조의 정체가 폭로된 것은 15세기가 되어서였다.

 

P263 이성과 계시는 진리의 독립된 근원으로, 겹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정한 경우에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면, 이성은 계시 이상으로 신뢰되어야 한다. 참다운 종교는 참다운 철학이며, 반대로 참다운 철학은 참다운 종교다.

 

P271 마호메트가 선언한 새로운 종교는 몇 가지 점에서 신약성서에 첨가된 신비주의를 떨쳐 버린 채 구약 성서의 엄격한 일신교로 돌아갔다.

 

P273 페르시아에서 이슬람교는 인도의 수학을 가까이 했고, 원래 인도의 것이라고 불려야 할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했다.

 

P275 헨리는 당시 로마에 있었는데, 교황을 위협해서 굴복시켜 손수 제왕의 왕관을 썼다. 그러나 그의 승리도 삼일천하였다. 11년 뒤인 1122, 교황 칼리스투스 2세는 보름스 협약에 의해 다시 서임식의 권한을 손에 넣었다.

 

P277 스콜라 철학은 하나의 운동으로 결론이 사전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 철학과는 다르다. 그것은 정통 신앙의 궤도 내에서 작용해야 한다.

 

P282. 초기의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둘 다 설립자의 계율을 지키고 있었다.

 

P286 이성이 사실을 처리할 수 있는 곳에서는 계시가 덤이며, 계시가 사실을 처리할 수 있는 곳에서는 이성이 덤이다.

 

p290 아리스토텔레스가 르네상스까지 철학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아퀴나스의 번역 덕분이다.

 

p294 최고의 힘이 신의 의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 안에서는 지식을 지배하는 것이 의지라고 둔스는 주장한다

 

P296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봉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 존재론은 불가능하다. 실재는 단수인 개체 사물에 속하고, 이것만이 직접 확실한 지식을 낳는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정교한 기구가 넘쳐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한다는 것을 헛되도다라는 오컴의 말을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이런 뜻에서다. ‘실재물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더욱 유명한 말의 근본도 이것과 같다. 이 격언은 그의 저서에는 없지만오컴의 면도날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P307 그리스 사상에는 죄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 교도는 지상의 삶을 소중한 내세의 준비로 보고,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실천적인 죄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인간을 정화시키기 위해 부과된 시련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초인적인 과제였다. 이 시련을 견뎌 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이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스인에게 덕이란 덕 자체의 보상인 반면, 그리스도 교도는 신이 덕을 가져야 한다고 명하기 때문에 덕을 가져야 했다.

 

p310 르네상스의 사상가는 인간을 중심적 지위로 다시 끌어들인다. 인간의 활동이 인간의 활동 자체를 위해 존중되는 것도 이와 같은 풍조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과학적 탐구 또한 새롭고도 엄청난 발전을 거두게 되었다.

 

6장 근대 철학의 융성

 

P316 언론과 비판의 자유가 있어서, 인쇄 문자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마음껏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P320 르네상스 운동의 선두주자는 피렌체이다. 아테네 이외의 그 어느 곳도 이 정도로 균형을 이룬 예술가나 사상가를 낳은 곳은 없었다.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는 그 중 몇몇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모두 피렌체 사람이었으며, 나중에 출현한 갈릴레이도 마찬가지였다. 단테의 추방을 초래한 피렌체의 내분은 마침내 메디치가의 지배로 끝났다. 1400년 이후부터 잠깐의 중단 기간을 제외하면, 이 상인 귀족의 가계가 300년 이상이나 이 도시를 지배했다.

 

P324 (군주론)에서는 교황의 권위 문제를 몇 마디 경건한 상투적인 말로 회피했다. (로마사론)에서는 교황권을 오히려 비판적으로 보고있다.

 

P328 그의 비판은 솔직했지만 때가 되어도 그는 종교개혁에 분명한 찬성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p337 그 어떤 명확한 비례를 얻으면, 일종의 미적 만족이 생기는 모양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비례의 존재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완전함을 보장하게 된다.

 

p339 인간은 어는 정도 그 수학적 기능을 사용하거나 연마할 수 있다면, 신의 지위에 한층 접근하게 된다.

 

p345 정통 스콜라 철학자는 망원경을 비난했다. 망원경이 이와 같이 그들의 독단의 잠을 깨웠기 때문이었다

 

P346 1687년에 나온 <자연 과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그는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설명하고, 이어 역학의 연역적 설명을 그리스식으로 전개했다. 1법칙은 갈리레이의 원리를 일반화해서 말한 것이다. 모든 물체는 방해받지 않으면, 전문용어로 말해서 등속으로, 일직선으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 2법칙은 힘을 비등속 운동의 원인이라고 정의하여, 힘이 질량과 가속도의 곱에 비례한다고 규정했다. 3법칙은 모든 작용에는 서로 동등한 반작용이 있다는 원리이다. 천문학에서 뉴턴은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가 첫걸음을 내디딘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하게 설명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물질의 그 어떤 두 분자 사이에는 그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P351 인간이 빠지기 쉬운 여러 가지 오류에 대한 베이컨의 설명은 그의 철학 가운데 가장 빛난다. 우리는 네 가지 타입의 정신적 약점에 빠지기 쉽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것을우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P354 대학이 개선해야 할 주요 결점 가운데 하나가 '무의미한 말을 자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P356 어느날 평소보다 더 추워져서 데카르트는 어느 오두막으로 들어가, 타일을 바른 아궁이 옆에 앉았다. 적당히 몸이 따뜻해졌을 때 그는 명상을 시작했는데, 그날 그의 철학 전체의 윤곽을 분명히 마음 속에 떠올렸다.

 

P357 그는 무엇보다도,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논쟁을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P359 신이 우리를 일관되게 헤매개 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의심하는 자가 인정하는 것도 자기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기본 공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바탕이 된다. 여기에 바로 형이상학의 분명한 출발점이 있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P363 데카르트는 물질과 정신은 서로 다른 실체이며, 각기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호 작용을 미칠 수 없다고 인정했다.

 

P368 신과 우주, 즉 모든 사물의 총체는 동일하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유명한 범신론이다. 스피노자의 설명에 신비주의의 흔적을 조금도 볼 수 없다는 것은 강조되어야 할 점이다. 문제 전체가 놀라울 만큼 교묘하게 조립된 한 조의 정의와 공리에 입각한 연역 논리의 연습일 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철학사상 가장 돋보이는 체계적 구성의 한 예일 것이다.

 

P369 “정신의 본성은 어떤 무시간의 관점에서 사물을 지각한다

 

p370 인간은 전체에 더욱더 순응해 가면서 그에 알맞은 자유를 얻는다. 자유란 바로 독립 또는 가기 결정이며, 이것은 신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p370 "자유인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P374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 관한 이론은, 앞서 말했듯이 단자에 의해서 실체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P380 사상이란 가끔 그 영향을 의식적으로 보지 않고 느낄 수 있다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비코의 저서는 그다지 널리 잃긴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철학의 많은 발전의 싹을 품고 있다.

 

P385 일상 언어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탐구를 하기 위해 한층 날카로운 언어 도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과학과 철학이 할 일이다.

 

7장 영국 경험론

 

P388 종교개혁의 결과로 유럽 북부에서 정치와 철학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새로운 사상이 태동했다.

 

P390 이 시대부터 영국인은 타협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성향을 이어받는다. 사회 문제상, 이것은 개혁보다는 오히려 개선에 대한 관심을 뜻한다.

 

P391 개인주의라는 이론은 대체적으로 합리론적 이론이며, 이성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P394 <인간오성론>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정신의 한계와,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탐구의 한계를 제시하려는 솔직한 시도를 보게 된다.

 

P395 경험론의 새롭고도 특징적인 것은, 이들 감각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것이다.

 

P396 복합 관념은 실체와 양태와 관계로 세분된다. 실체는 그것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의 복합 관념임에 반해, 양태는 실체에 의존한다. 관계는 로크 자신도 이제 막 안 것처럼, 실제로는 조금도 그가 말하는 뜻에서의 복합관념이 아니다. 관계는 그 자체가 한 부류이며, 비교하는 정신 작용에서 생긴다.

 

P 400 로크 시대 이후의 일반적인 국가 권력은 개인이 희생한 대가로 방대하게 성장했다.

 

P407 버크리가 사물 자체 같은 건 전적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이것을 로크의 경험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거부하고 있는 점은 매우 옳다. 이것이 버클리 관념론의 요점이다. 우리가 정말로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신 내용뿐이다.

 

P409 우리가 존재지각되는 일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는 한, 의심의 여지는 전혀 없다.

 

P410 사람은 그의 눈으로 보는 것이지,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 그의 주장은 옳다

 

P415 흄은 우선 어떤 철학자들은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이른바자아를 깊이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자아의 존재와 존재 안에서의 자아의 연속성을 느끼고 있다고 여겨, 논증의 증거 이상으로 자아의 완전한 동일성과 단순성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다.

 

8장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P427 낭만주의 운동과 계몽 운동의 관계는 어느 면에서 아폴로적인 태도와 대조되는 디오니소스적 태도를 상기시켜 준다.

 

P427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특별한 미덕이었다. 빈곤이란 본질적으로 농촌적인 것이다.

 

P429 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낭만주의 운동은 하나의 영향을 두 가지 반대 방향으로 미쳤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첫째는 이성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우리가 착수하고 있는 문제에 조금이라고 진지하게 머리를 돌리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은 영원히 해결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품게 했다는 것이다.

 

P433 낭만주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은 장 자크 루소이다.

 

P435 낭만주의 운동의 형성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 것 중 하나가 루소가 이성에 반하여 감정을 옹호한 것이다.

 

P437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로 승진하여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P438 칸트는 흄이 한 것처럼 경험에 의해서 개념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개념으로 경험을 설명하려고 했다.

 

P440 칸트는 명제를 서로 구별하는 방법과 함께 다른 분류 기준을 도입한다. 원칙적으로 경험과 무관한 지식을, 그는 아프리오리(연역명제)라고 부른다. 나중에 경험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아포스테리오리(귀납명제)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이들 두 분류가 서로 교차한다는 것이다.

 

p443 칸트는 이와 같은 경험의 근원을 가상 또는 현상과 대조시켜서 '사물 자체' 또는 '누메나(Noumena,실체)'라고 부른다. 칸트의 이론은 사물 자체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P445 의지는 행동이 인식의 이론적 과정과 대비된다는 뜻에서, 실천적이라고 한다.

 

P454 변증법은 몇 가지 점에서의 형상에 접근하는 소크라테스적 노력을 생각나게 한다. 선의 형상에 대응하는 것이 헤겔의 이른바절대적 정신이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이 특정한 가설을 타파하고 마침내의 형상에 이르는 것처럼, 헤겔의 변증법도절대적 정신에 이른다.

 

P455 절대적 정신'은 그 자체가 사고하는 관념이라고 헤겔은 생각한다.

 

P463 변증법에 관한 한, 헤겔이 상당한 통찰력으로 정신의 작용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만큼 정신 작용은 변증법적인 틀을 따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지적 발전에 대한 심리에 공헌한 변증법은 어느 정도까지 빈틈없는 관찰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헤결 학설은 비코가 1세기 전에 말하기 시작한 역사의 중요성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P468 세링이 헤겔의 체계를 비판한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자, 셸링은 소극적 철학과 적극적 철학을 구별한다. 스콜라 철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소극적 철학은 개념이나 보편, 본질 등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사물의본질을 다룬다. 한편 적극적 철학은 현실의 실존, 또는 사물의실재에 관계된다.

 

P473 구별 / 언뜻 똑같아 보이는 것이라면 몇 번이고 복제 가능하지만, 하나하나가 다른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은 각각이 다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물건이 다른 물건과 다르기 위해서는 각각이 존재하는 시간 또는 공간이 달라야 하고 현상의 세계에 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P476 니체의 저서는 무엇보다 먼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특히 스파르타가 그린 이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최초의 저서 <비극의 탄생>(1872) 그는 그리스 정신의 아폴로적 성향과 디오니소스적 성향 사이의 유명한 구별을 제시했다.

 

P477 삶의 엄격하고 가차 없는 현실 공격적으로 받아 들인다.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그도 의지의 우위를 인정한다. 더 나아가 견고한 의지를 선한 사람의 둘도 없는 특징으로 보는 데 반해,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여러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니체는 두 가지 타입의 인간과 그 각각의 도덕을 구별한다. 그것은 지배자와 노예이다. 이 구별에 입각한 유리학설은 <선악의 피안> (1886) 이라는 책에서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배자의 도덕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선이 독립 관용, 자기 의존 등을 배포하고 있다. 사실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위대한 영혼을 가진 인간의 모든 덕목이다. 반대의 결함을 비굴, 비애, 용기 없음 등으로 이들은 악한 것이다.

 

9장 공리주의 이후

 

P480 관념적 철학과 그 비판자들은 물질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던 세상에서 발전했다.

 

P484 마르크스의 약간 감정적인 이론은 이와는 달리 나름대로 헤겔의 철학에 근원을 둔 비타협적 이상주의를 유지해 간다. 여기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목표는 폭력적 수단으로 현존 질서를 완전히 변혁하는 일이다.

 

P 485 모든 사람에게 읽고 쓰고 셈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사회문제가 처리되지 않는다.

 

P489 인권과 만찬가지로 자유도 그에게 약간 형이상학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였다.

 

P490 정치 문제에서 그는 사람들은 논중에 의해서 설득되며, 행동하기 전에 합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이것과 병행하는 것이 교육의 효능을 지나치게 믿는 신념이다. 이들 편견의 표적이 된 것이 제임스 밀의 아들 존 스튜어트 밀(1806~73), 아버지의 교육 이론은 그에게 가차 없이 해를 입혔다. “나는 한 번도 소년이었던 적이 없다고 그는 나중에 불평했다. “크리켓을 한 일은 한 번도 없다그 대신 그는 세살 때부터 그리스어를 배우고,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로 때 아닌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서운 경험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21세도 채 되지 않아서 신경 쇠약이 되었다.

 

P493 <자유론>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이것을 해리엇 테일러와 함께 썼는데, 그녀는 전남편이 죽은 후, 1851년에 벤담과 결환했다. 이 에세이에 밀은 사상과 토의의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여, 시민의 생활에 간섭하는 국가 권력의 한계시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특히 그리스도교가 모든 선의 원천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반대한다.

 

P495 그러나 사회 분야에서 이 경쟁은 약간의 규칙에 따라야 하는데 반해, 다윈주의 자연계의 경쟁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적자생존 이론은 정치 용어로 번역되어, 20세기 독재권의 정치적 사고의 몇 가지를 움직였다.

 

P495 기존 종교가 지지하는 창세기이야기와 대립했다. 이 때문에 다윈주의자와 전 종파의 정통 그리스도 교도 사이에 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P496 논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인간과 원인류의 조상이 같은가라는 문제가 사람들의 감정을 몹시도 자극했다.

 

497. 오언의 지도를 받아 확대된 운동은 공동 조합제도를 낳고, 초기의 노동 조합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P499 마르크스의 역사적 사와 발전관도 헤겔에서 나왔다. 이 진화 방식은 변증법과 결부되어 있는데, 미르크스는 이것을 헤겔로부터 그대로 채택하고 있다. 역사 과정은 변증법 적으로 진행된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의 해석은 방법상 철저하게 헤겔적이다. , 추진력은 두 가지 경우,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헤겔이 볼 때 역사 진로는절대자를 향해 노력하는 정신의 점차적 자기 실현이다. 마르크스는 정신 대신에 생산 양식을 놓고, ‘절대자대신에 계급이 없는 사회를 놓는다. 일정한 생산 조직은 이윽고 이 조직과 결부된 각종 사회 계급 사이에 내부적 긴장을 낳게 된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모순은 분해되어 더 고차원적인 종합 명제가 된다. 변증법적 투쟁이 취하는 형식은 계급 투쟁이다. 이 싸움은 사회주의하에서 계급이 없는 사회가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P502 새로운 계시의 방문을 받은 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영예로운 말은 반동이라는 두 글자이다.

 

P504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19세기가 낳은 위대한 마지막 체계이다. 그 호소력의 크기와 영향 범위는 주로 그 행동 계획의 혁명적 요소뿐만 아니라, 그 유토피아적 예언의 종교적 성격에 의존하고 있다.

 

P516 그가 종교적인 신앙을 갖는 것은, 이들 신앙에 의해서 만족이 생긴다고 그가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가 행복한 것은 신앙 때문이다.

 

10장 현대 철학

 

P527 사건이 일어난 뒤에 알게 되는 것처럼 철학의 발전을 이해하기란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변화의 중요성을 특이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더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헤겔적인 착가일 것이다.

 

P528. 오늘날 통용할 수 있는 기준은 단 한 가지 유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뿐이다.

 

P531 결국 유토피아적 환상을 구축하는 사람들이 끊임없디 꿈꾸는 것 같은 목표를 그리지 않아도 된다.

 

P533 ‘관념론철학자들은 헤겔식으로 모든 탐구 부문을 하나의 커다란 포괄적 체계로 정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P540 그에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따라서 존재해야 하는데 , 그는 이것을 있을 수 있는 것, 있어야 하는 것, 있어라는 공식으로 표현했다.

 

P554 사람은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와 몸의 안녕을 얻는다.

 

P555 이 파국으로 진보에 대한 확신은 희박해지고, 의심의 풍조가 나타났다. 이 풍조로부터 세계는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P558 비합리주의의 주된 철학적 특징은 최근 프랑스와 독일 철학에서 매우 지배적인 역할을 해 온 실존주의 이론의 부활에서 볼 수가 있다.

 

P559 오늘날까지 서양 문명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술과 그 기술이 낳은 과학적, 철학적 전통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들 힘은 아직은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P560 우리는 그의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말할 있다. 이 말은 사르트르가 자기 철학에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객관적 인본주의와는 대조적이며, 실존주의는 기껏해야 주관적 휴머니즘을 제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실존주의 철학자가 사르트르의 말을 빌린다는 것은 다소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들 염려가 있다.

 

P562 우리가 자유라고 느껴도 거기에는 어떤 근심하는 기분이나 공포의 기분이 따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현존재의 단계가 이성이 지배되는 데 반해, 자아 존재는 기분에 지배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P565 실존주의자는 우리의 비판을 요점에서 벗어났다고 거부 할 것이다. 우리가 합리론적 기준을 사용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P569 실증주의 입장의 또 다른 문제는 모든 철학적 사고를 횡설수설이라며 거부한다는 점이다.

 

P570~571 실증주의 운동은 다른 종류의 많은 유파를 낳았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유파는 영국 철학을 과거 수십년 동안 지배해 온 언어분석파이다. 그것은 논리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통적인 철학적 혼란은 언어의 조잡한 사용법의 결과라는 원리에 서 있다. 모든 의문은 올바르게 공식화하면, 명확한 대답이 나온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철학적 의문이 언어의 부주의한 남용에서 생긴다는 것이 분석의 과제이다.

 

맺는말

 

P575 지식의 습득 외에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이 자기 것이 된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진지한 숙고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P581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억지로 조성된 비평이 가로막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증 받을 수 있다. 인간에게 성찰하지 않는 삶은 정말로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III. 내가 저자라면

 

서양의 지혜는 그리스인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단언 한다,

그들의 과학적 전통과 철학이 손을 잡고 문명의 새로운 기류를 만들어 냈다고 진단 한다.

비록 그리스인들이 성공적인 것만은 아닐지라도, 서양 문명의 지혜에 가장 핵심은 이들의

진취성과 개방성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그러나 그리스인들도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들의 뛰어난 지력에서 생긴 일종의 자만심 때문이었다면, 로마인은 상상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실패 했다. 그리스인들의 지적 유산도 로마인 손에 들어오면 그다지 셈세하고 우아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스인의 전통 철학은 본질적으로 계몽과 해방의 운동이다. 정신을 무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스 철학은 알지 못한 것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세계에 접근해야 한다고 제시 했다. 그 수단은 로고스이며, 그 동경은 의 형상하에 지식을 추구하려고

한 일이다. 사심을 떠나 탐구 자체는 윤리적으로 선한 것이라 여기고, 종교적 신비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선한 삶에 이른다는 것이다. 탐구의 전통과 함께 거기에는 감상적인 아닌 일종의 밝은 인생관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휼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 했다.

 

저자의 지적은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고, 그의 지적 섭렵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크고 넓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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