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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9일 04시 17분 등록
 

열하일기중 하-박지원

빅지원지음/ 리상호 번역/ 보리출판사


박지원 연보

1737년 음력 2월 5일

반남 박씨 함평 이씨 사이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휘는 지원, 자는 중미, 호는 연암이었다.

1752년 (16세)

관례를 올리고 유안재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장인 유안재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숙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문장 짓는 법을 배웠다.

1754년(18세)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사람들을 청해 재미잇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울증을 고쳐보고자 했다.

1755년(19세)

연암의 학문을 지도했던 영목당 이영천이 40세로 별세했다.

1756년(20세)

봉원사에서 윤영을 만나서 허생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1757년 (21세)

시정의 기이한 인물이나 사건을 듣고 ‘방경각외전’을 섰다. 떠돌이 거지 몰락한 무반, 농부 따위의 이름 없는 하층민을 주요대상으로 삼았다.

양반전, 광문자전, 예덕 선생전, 김 신선전, 우상전, 민 노인전, 일곱 편만 남아 전한다.

1759년(23세)

어머니 함평 이시가 59세로 돌아가셨다. 큰딸이 태어났다.

1760년(24세)

할아버지 박필균이 76세러 돌아가셨다. 조부의 신중한 처신과 청렴한 생활은 연암에게로 큰 영향을 끼쳤다.

1766년(30세)

장남 종의가 태어났다. 홍대용이 중국 문인들과 나눈 필담을 정리해 ‘건정동회우록’을 냈는데 박지원이 거기에 서문을 썼다. 홍대용과 중국 사람들의 우정을 예찬하고 청을 무조건 배격하는 사라들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1767년 (3세)

아버지 박사유가 65세로 돌아가셧다. 삼청동에 있는 무신 이장오의 별장에 세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1768년(32세)

백탑 근처로 이사해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들과 가까이 지냈다.

1769년(33세)

이서구가 쓴 문집의 서문 ‘옛 사람을 모방해서야’를 썼다.

1772년(36세)

식솔들을 처가로 보내고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살기 시작했다. 가까이 지내던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여러 벗들과 더욱 여러 벗들과 더욱 친하게 사귀었다.

박제가가 문집 <초정집>을 펴내자 법고장신의 문학론을 담아 서문을 썼다.

1778년 (42세)

사은진주사 일원으로 북경으로 떠나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전송했다.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홍국영의 견제를 피해 연암골에 은둔하였다. 초가삼간을 장만하고 손수 뽕나무도 심었다.

1779년 (43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규장각 검서로 발탁되었다.

1780년 (44세)

홍국영이 실각하자 서울로 돌아와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렀다. 삼종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을 따라 북경으로 갔다. 5월에 더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열하에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했다.

돌아오자마자 <열하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둘째 아들 종채가 태어났다.

1781년 (45세)

박제가가 쓴 <북학의>에 서문을 섰다.

1783년(47세)

벗이었던 담헌 홍대용의 53세로 죽었다. 손수 염을 하고 담헌이 중국에 만난 벗 손유의에게 부고를 전했다. ‘나의 벗 홍대용’을 썼다.

1787년(50세)

부인 전주 이씨가 51세로 죽었다. 박지원은 그 뒤로 죽 혼자 지냈다.

1788년 (52세)

부인이 죽은 지 1년 만에 만ㄷ며느리 덕수 이씨가 죽었다. 끼니를 끓여 줄 사람이 없어 주위에서 다시 처를 얻으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연암이 벽돌을 구워 쓰는 것이 견고하고 비용도 줄일 수 있다고 제안하여 중국제도에 따라 가마를 제작하고 벽돌 크기로 중국의 제도를 따랐다. <열하일기>에 쓴 그대로 하여 비용을 절감했으나 그때는 쓰지 못했고, 후에 수원성을 축조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해 성을 쌓았다.

1790년 (54세)

삼종형 박명원이 66세로 돌아가셨다. 누구보다 연암의 뛰어난 재질을 아끼고 사랑했던 형이었다.

1791년 (55세)

한성부판관에 임명되었다.

겨울에는 안의 현감으로 부임했다.

1792년 956세)

삼종질 박종악이 우의정에 임명되자 취임을 축하하면서 ‘천하사람의 근심을 앞질러 근심하시오’를 썼다.

1793년 (57세)

<열하일기>로 잘못된 문체를 퍼드린 잘못을 속죄하라는 정조의 하교를 받고 ‘답남직각공철서’를 썼다.  임금의 문책을 받은 처지로 새로 글을 지어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벗 이덕무가 53세로 죽었다. 정조가 이덕무의 행장을 짓도록 하여 ‘형암 행장’을 썼다.

흉년이 들자 자기 녹봉을 덜어 백성을 구했다.

벽돌을 구워 관아에 새로 정각들을 지었다.

지나친 수절풍습을 비판한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를 썼다.

1794년 (58세)

아전들이 포탈한 곡식을 원래대로 채워 창고에 곡식을 10만 휘나 쌓아 두게 되었는데, 호조판서가 그것을 팔 것을 제안하나 수입이 생길 것을 꺼려 곡식을 다른 고을로 옮겨 버렸다.

1796년 (60세)

안의현 백성들이 송독비를 세우려 하자 자기 뜻을 몰라서 하는 일이라며 크게 꾸짖고 세우지 못하게 했다.

안의 현감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왔다. 종로구 게동에 벽돌을 사용하여 계산초당을 지었다. 아들 박종채가 머물렀고 손자 박규수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제용감주부에 임명되었다가 의금부도사로 전보되었다.

1797년 (61세)

7월 면천군수에 임명되자 임금을 알현하게 되었고 이대 문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나누었다. 정조의 명령으로 ‘서이방익사’라는 글을 쓰게 됐다.

1799년 (63세)

봄에 흉년이 들자 안의에서 했던 것처럼 봉록을 덜어 백성을 구휼했다. 농서 <과농소초>를 섰다. ‘부자들의 토지를 나누어 주어라’가 부록으로 붙어있는데 중국에 갔을 때 본 것들과 우리나라에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을 묶어 14권의 책으로 엮었다. 정조가 이 책을 보고 농서대전을 박지원에게 편찬케 해야겠다는 말을 하였다.

1800년 (64세)

6월에 정조가 승하했다.

8월에 양양부사로 승진했다.

1801년 (65세)

봄에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왔다.

1805년 (69세)

박지원은 10월 20일 가회방 재동 집의 사랑에서 69세 나이에 죽었다. 홍대용이 그랬던 것처럼 반함하지 말고 다만 깨끗하게 씻어 달라고만 유언을 남겼다. 연암의 묘지는 경기도 장단 선영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문장들

열하일기 (중)

태학관에 머물면서

8월 9일 을묘일 사시 태학에 들어묵었다.

사시전까지의 사연은 북방여행기에 썼고,

오후부터의 사연은 태학관에 머물면서 에 쓴다.

이날은 몹시 더웠다. 

****우리나라 벼슬하는 양반들이란 타고난 천품이 교를 부려 중국 사람들을 볼 때는 그가 만족이고 한족이고 간에 언제나 멸시하는 버릇과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아주 습성으로 굳어져 그가 어떤 정인인지 또 관직이 무엇인지도 알아줄 리 없이 따뜻하게 맞아 줄 턱이 없을 터이요, 비록 마주 대면을 시키더라도 사람 대접을 않을 터이니 나로서는 실로 딱한 사정이었다.(24P)

***내옹관은 황제가 내리는 요리 세 그릇을 가져왔다. 한 그릇은 설고(카스텔라 같은 백설기 떡)요, 한 그릇은 돼지고기요, 한 그릇은 과일 종류이다. 설고와 과일은 누런 나무 쟁반에 담았고 돼지고기는 은접시에 담았다. 예부 낭중이 곁에 있다가 이것은 황제의 아침 수랏상에서 물려 내린 것이라고 했다. (33P)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한 구석에 붙어있지마는 네 가지를 자랑할 만합니다.

유교를 숭상하는 거이 첫째요, 홍수가 없는 것이 둘째요, 고기와 소금을 딴 나라에서 자져오지 않는 것이 셋째요, 여자가 개가를 하지 않는 것이 넷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6P)


***전족의 내력을 본다면 적국에서 사로자아 온 여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도 세상 운수라고 해야 할지 명나라 시절에는 그 부모들까지 벌을 주었고, 청조에 와서도 금버이 엄하건마는 필경은 없애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남자들은 말을 듣는 편이지마는 여자들은 할 수 없습니다.

“보기도 흉하고 걷기도 불편할 텐데 대관절 무슨 까닭일까요?”

“오랑캐 여자들과 분간없이 섞이기가 부끄럽다 하여 그럴 것입니다.” (40P)


***남당 때 포로로 붙들려 온 장소랑이 송나라 궁궁에 한 번 들어오자 송나라 궁녀들은 서로 다투어 가면서 장소랑의 자그마한 발 맵시를 본떠 저마끔 천으로 공공 동여 외시 같은 발 맵시가 아주 풍습이 되고 말앗지요. 원나라 시절에는 이를 법으로 금했으나 시행이 못되고 보니 오랑캐여자들이 한족 여자들의 전족을 음탕한 것이라고 비웃는 것은 좀 원통한 일입니다. 이것이 소위 발이 당하는 재액이지요.(40P)


***“대문 앞을 지나도 들른 적이 없었는데, 일흔살에 사내아이를 낳았으니 등에 땀이 흐를 지경”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원래 웃음을 참지 못하는 성질이라 사흘을 두고 허리가 휘도록 웃은 일이 있었다. 오늘 아침 나는 만리 변방에 와서 뜻하찮게 여러 되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먹게 되니 만약에 여기서 술판 수수께끼라도 내놓으라면 응당 ‘등에서 진땀이 흐를 지경’이란 말이 적당할 것 같았다. (53P)


8월 13일 기미일 진새벽에는 비가 좀 뿌리다가

아침 나절에는 맑게 개었다.

****밤이 되어 기공을 찾아가 한 잔을 내놓은 즉 기공은 배를 주기ㅗ 웃으면서 이것은 술이 아니요 여지즙이라고 했다. 이내 소주 대여섯 잔을타고 보니 빛은 고와지고 맛은 맑게 향기가 곱절이나 났다. 대체로 여지 향기는 술기운을 타서 냄새를 더 풍기게 된 가닭이다.

아가 꿀물을 마시고는 향내 이야기를 하고 여지즙을 맛보고는 취한다고 떠드는 자야말로 매화나무를 쳐다보기만 하고 목을 축이는 자라해야 할지 뜨물에 취해서 건주정하는 자라 해야 할지.

이날 밤 달은 찢어지게 밝아 기공과 함께 명륜당으로 나가 난간 아래를 거닐었다. 나는 달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달의 몸뚱이는 언제나 둥글어 햇빛을 빙 둘러받고 보니 이 때문에 지구에서 본 달은 찼다가 기울다가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밤 저 달을 온 세게가 온 세계가 한목으로 본다고 치면 보는 장소에 다라서 달은 살찌고 여위고 깊고 옅음이 잇지 않을까요? (69P)


***“얼음 속에는 누에가 살고 불 속에는 쥐가 살고 물 속에는 고기가 살아 가지각색 생물들은 어디나 붙어 있는 곳이 저들로 보아서는 다 당입니다. 만약에 달에도 세계가 있다면 오늘 이 밤에 두 명의 달세계 사람이 난간머리에 마주 서서 달빛 아닌 땅빛이 차고 기우는 이야기를 아니 한다고 누가 알겠습니까?(73P)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렷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무릇 생물들의 성질이란 사람이나 다름없이 고달프면 쉬고 싶고, 답답할 때에는 시원한 데를 찾고 싶고, 구부러드 s놈은 펴고 싶고, 간지러우면 긁고 싶고 본즉 비록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먹는다 하더라도 때로는 제 맘대로 신을 풀기 위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말도 반드시 이따금 굴레와 고비를 풀어놓아 물역 같은 시원한 곳에 놀게 하여 답답증을 풀도록 할 것이니 이것이 말하자면 생물의 성질에 따라 그 뜻을 맞추어 준다는 것이다. (81P)


북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서

***본편은 박지원이 열하에서 여정을 완료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던 중 의 잡관과 소감을 역시 일기체로 서술한 것이다.


8월 15일 신유일, 날씨는 맑고 좀 선선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여 진사 한 자리도 얻지 못하고 보니 비록 태학에서 글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이번 참에 뜻밖에도 고국을 떠나 만리 변방에 와서 엿새 동안이라도 태학관에 묵은 것은 마련되었던 운수 같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일까보냐.

우리나라 인사들 중에 멀리 중국으 각 지방을 유람한 자로 신라에는 고운 최치원이 있고, 고려 시대에 와선ㄴ 익재 이제현 등이 비록 서촉 비장과 강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닌 일이 있지마는, 이곳 새북지방은 아무도 온 사람이 없었다. (96P)


8월 16일 임술일. 말이 맑았다.

***수레 속에 있던 부인들은 뒤창을 열고 서로들 머리를 내놓는데 구름같이 틀어 올린 머리채 위에는 갖은 보물꽂이로 다 치장해 금빛깔 꽃이며 비취 구슬들은 데릉데릉 한들한들, 요염하기는 꿈만 같고 이쁘고 곱기는 맑은 냇물에 놀란 기러기라고 할까 싶은데 얼른 창을 닫더니 그만 가 버린다. 모두 세 사람으로 다들 예왕의 첩들이라고 했다.(99P)


8월 17일 계해일. 날이 맑고 따뜻했다.

***성인은 주고 받는 데 삼가기를 정당한 이유가 없이는 팃검불 하나도 남을 주지 않으며 정당한 이유가 없이는 팃검불 하나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체 팃검불이란 물건은 세상에도 가장 작고 가장 가벼운 물건으로서 만 가지 물건 속에서 손으로 곱을 것이 못 되거늘 어재서 팃검불 하나를 가지고 주고받고 하는데 무슨 이치를 따지겠는가? 이같이 성인의 심각한 발언이 있었으니 여기에는 너무 심한 결벽성이 큰 의리에 구애된다는 감이 없지 않지마는 나는 오늘 오미자 한 알을 증험 삼아 성인의 팃검불 하나에 대한 이론이 과연 심한 말이 아님을 알겠다. (115P)


***이럴 적에는 비록 몇 알 안 되는 오미자일 망정 산더미 같은 화가 될 수 있으니 이렇고 보면 천하에 하찮고 작고 가벼운 물건이라고 핑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춘추시절에는 종리땅 여자가 초나라 여자와 뽕나무로 해서 다툰 사단이 드디어 두 나라의 전쟁에까지 이르렀다. 이 일을 서로 비교해 볼 때에 몇 알 오미자는 성인이 말한 한 낱의 팃검불보다도 벌써 많다고 할 것이요, 옳고 그른 논쟁은 초나라 여자의 시비에 다름이 없을 것이다. (116P)


***나는 학문이 원래 거칠고 옅어 처음부터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고 외밭에서 신발을 고치는 조심’을 할 줄 몰랐다. 멀쩡한 부랑자의 봉변을 제 스스로 취했고 보니 어지 부끄러울 일이 아닐까 보냐. (116P)


8월 19일 을축일. 개었다가 더러는 비가 뿌리고 저녁 때는 활W가 개어 몹시 더웠다.

***대체 학문이란 것은 신중히 생각하고 사물을 밝게 분별하고 자세히 묻고 넓게 안다는 것이다. 덕성만을 가지고 함부로 추어올릴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묻고 배움과 연결시킨 것이다.

우 임금 같은 이가 ‘착한 말을 한 자에게는 절을 하고 촌음을 아꼈던 것’과 안자의 ‘허물을 반복하지 않으며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 행위 쯤으로는 아직도 그 심성이 완전하다고 평할 수 없을 터인바, 이는 그들이 학문하는 극치에서 볼 때 아직도 객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객기를 없애는 데는 반드시 자길ㄹ 이기고 옳은 심성에 돌아와야 할 것이다. 자기란 개개인의 사욕이다. 마음을 바로잡는데 있어서 만약 조그마한 사욕이라도 비치게 될 때는 성인으로서는 이것을 도적이나 원수를 대한 것처럼 아주 뽑아 없애고야 만다. (123P)


***자기를 이긴다는 것도 자기를 이긴 후에야 타고난 심성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 ‘회복’이란 말은 조금도 부족이 없다는 말로, 일식이나 월식처럼 다시금 둥글게 회복되는 것이요, 도 잃어버린 물건을 찾음과 같이 한푼쭝도 축이 안 난다는 말이다.

이렇기 때문에 만약 삼달덕(지 인 용)이 완성되지 못햇다면 이러한 학문은 비록 관공의 의리와 용맹이라도 자기를 이기는 실천이 없이는 타고난 심성이 회복된 듯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24P)


경개록(傾蓋錄)

***“오랜 벗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낯설기만 하고 우연히 마주한 이라도 마음이 통하면 오래 사귄 벗과 같다.”고 했지마는 한 마디 이상 되는 이야기는 다 주워 모아 여기서 경개록이라고 한다.

***키는 7척이요, 태도나 모양은 엄전하고도 맑으며 두 눈알이 반짝반짝하며 안경을 쓰지 않고도 아직도 잔 글시와 작은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쉰살이나 되어 보일 만치 정정하였다. 그러나 머리털은 죄다 세고 대체로 만만스럽고 부드럽고 화락해 보이는 사람이다. ....북경으로 돌아와 그에 대한 평을 들었느데 그를 백거이에 견주었다. (139P)


황교문답

****황교는 서장 지방에서 성행하는 불교의 종파로서 라마교의 별칭이다. 본편에서는 박지원은 이 허황한 사교의 내력에 대하여 비상한 호기심으로 그의 자료적인 지식을 섭렵하는 한편 당시 청국 왕조가 이같은 사교를 정치도구로 삼아 인근 이족들을 회유함으로써 자기의 봉건 통치체제를 강화하고 있는 기밀을 폭로하고 있다.


****내가 열하에 이르러 아무 소리없이 천하의 형세를 다섯 가지로 살펴보았다. 황제가 해마다 열하에 주재를 하니 열하로 말하자면 장성 밖에서도 쓸쓸한 벽지이다. 천자는 무엇이 부복해서 이런 새외의 쓸쓸한 벽지에 와서 거처를 할까? 명목은 피서라고 하지마는 실상은 천자 자신의 변방을 방비하고 있는 것인즉 여기서 몽고의 강한 품을 알 수 있을 것이다.(152P)

****황제는 서번의 승왕을 스승으로 삼아 황금 전각을 지어서는 거기에 왕으로 좌정시키고 있다. 천자가 무엇이 답답하여 이런 떳떳하지 못한 굴욕적인 예절을 쓰고 있을까? 명목은 스승으로 모시면서 실상은 호아금 전각 속에 가두고 하루라도 나라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고 본즉 서번은 몽고보다 더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가지 일은 벌서 황제의 심정이 괴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153P)

***<서경>에 이른 대로 도덕을 따르는 것은 길하고 역리(逆理)를 좇는 것은 흉할 것이외다. 이것이 바로 우리 도의 인과입니다. 여기서 도덕과 역리는 원인이요 길흉은 결과입니다. (179P)


***황교라면 활로의 도를 말함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연금술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천지간ㅇ에는 별스런 세상, 별스런 사람도 있어서 그 도야말로 명색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맑고도 참되고 평안하고도 일없이 사는 것이 그들의 생이라면 때를 맞추어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그들의 죽음이랍니다. 세상에 났다고 그리 좋아할 것이 없고 죽는다고 해서 슬플 것도 없이 번갈아 가면서 환생을 하여 억만 년을 변함이 없다고 하며 벼슬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도 모르는 듯 모르는 것도 깨달은 듯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도록 혼돈하여 자연의 면모 그대로 지켜 난리나 살벌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 세상을 꿈속같이 여깁니다. (185P)


***내가 열하의 지세를 살펴보니 대체로 천하의 정수리 같아 보였다. 황제가 어정거리면서 북쪽으로 이 지방까지 온 것은 다름이 아니다. 정수리 골통을 깔고 앉아 몽고의 산멱을 틀어잡을 따름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몽고는 벌서 매일같이 튀어나와 요동을 쥐고 흔들었을 것이다. 요동이 한 번 흔들리면 천하의 왼팔이 끊어지는 것이요 천하의 왼팔이 끊어지면 하황은 천하의 오른파로서 한쪽팔만 움직일 수는 없을 터인즉 내가 본 바로는 서번 지방 여러 오랑캐들이 부스스 나오기 시작하여 섬서, 감숙 지방을 엿볼 것이다. (197P)


행재잡록(行在雜錄)

**천자가 여행하는 곳을 행재(行在)라고 한다.

****명나라는 우리의 형제국가이다. 형제 나라가 우리나라에 주는 선물 같은 것은 그것이 비록 대수롭잖은 물건일지라도 마치 하늘에서 덜어진 것인듯 그 영광이야말로 전국에 퍼뜨리고 경사야말로 만대를 전할 만할 것이요, 도 다듯한 말 한 마디와 몇 줄 되는 글월 한 줄이라도 높기는 비와 같이도 감격스러운 터이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ud제국가인 대문이다. 형제국가란 무엇인가? 중국을 두고 말함이다.  즉 역대 조정과 임금들이 승인을 받은 나라이다. (231)


***예부의 상주문

예를 치른 뒤에 액이덕니는 사신에게 앉으라 하고 차를 마시며, 그 나라는 여기서 거리가 얼마나 되고 무슨 일로 중국에 왔는지 물었습니다.......애이덕니는 사신에게 구리쇠 부처와 서장 향품과 서장 모직물 등을 준 해당 사신들은 머리를 조아려 사례를 하였습니다. 사신들에게 준 구리쇠 부처 따위 물품목록을 하람하시도록 문건으로 적어 여기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건륭 45년 8월 12일 (237P)


***소위 구리쇠 부처는 높이가 한자 나마 됭 이는 호신불이라고 한다. 중국의 에절로는 멀리 여행하는 자에게 서로 선사하여 반드시 이를 지니고 아침저녁으로 공양한다. 서장 풍속에 해매다 조공을 하는 데느 부처를 첫째로 쳐주어 방물을 삼는다. 이 구리쇠 부처도 말하자면 법왕이 우리 사신을 위하여 여행의 무사를 비는 폐백 턱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한번 부처와 인연을 갖는 일이 잇고 보면 평생 누가 되는 것이다.(239P0


망양록

***음악의 악전적 원리문제, 음악의 정치적 문학적 의의, 음악의 발달자 등을 중심으로 해박한 전문지식을 경도한 장황한 토론이다.

동양음악에서 오음(五音)이란 서양 악전에서 음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각 음의 개별적 명칭은 궁, 상, 각, 치, 우의 다섯 음이다.  궁, 상, 각, 치, 우의 오음은 양악의 도, 레, 미 ,솔, 라 음계에 비교할 수 있다. (260P)


***태곳적 당우(唐虞)시대에 백성들의 풍속이 너그러울 적에는 그들의 귀에는 음악이 소(순임금의 음악), 호(탕임금이 지었다는 음악>같은 곡조였으니 이로서 그들은 무엇을 배척하는 가를 알 수 있는 일이요, 주나라 폭군이었던 유왕, 여왕의 시대에는 백성들의 풍속이 음탕하여 그들이 즐거워하는 음악은 상(桑), 복(濮)의 악곡이었으니 이로써도 그들이 무엇을 배척하는가를 알만한 일입니다. 요즘 세상 잡극에서도 서상기를 놀 때는 하품을 하고 놀다가도 모란정을 놀면 정신이 번쩍 나서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런 것이 시정의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의 풍속이 시대를 따라 변하고 있다는 증거가 충분히 될 것입니다. (267P0


***넓고 깊고 우람찬 소리를 옛날부터 일러서 궁음이라 하고, 높고도 찌어지듯 빠르고 급한 소리를 옛날부터 상음이라 했고, 정확하면서도 뚝 그치는 소리를 옛날부터 각음이라 했고, 빠르고도 급히 쳐드는 소리를 옛날부터 치음이라 했고, 가라앉고 가는 소리를 옛날부터 우음이라 했습니다.

소리가 난다는 것은 다 칠정을 거쳐 나는 것입니다. 또 변궁, 변상, 변각, 변치, 변우 소리가 있습니다. 율은 소리에 따라 어울려 사람의 마음에 느끼는 바 바르고 삐뚠 데 다라서 음이 움직이고 율이 따라 맞고 조가 따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269P)


****오음은 다 바른소리입니다. 소위 넓고 크고 깊고 우람차고 높고 빠르고 급하다는 것은 다만 여러 가지 소리의 본질을 형용한 데 불과한 것이요, 그 작용인즉 바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궁음도 아니요, 상음도 아니요, 각음도 아니요, 치음도 아니요 우음도 아닌 간음이란 것이 사이에 잇으니 이것이 즉 간성입니다.

오음은 반음으로 변하고 또다시 절반을 쪼개어 반의 반음으로 되는데 이러고도 근본되는 율을 잃지 않을 대는 맑고 탁한 음이 서로 어울리고 높고 낮은 음이 서로 응하여 음이 서로 이어지고 보가 생긴 뒤에야 그 음악의 선악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270P)


****금(琴)이나 슬(瑟)이 다 잇습니다. 제 친구 홍대용의 자는 덕보요, 호는 담헌인데 음률에 능하여 금슬을 잘 툴 줄 압니다. 우리나라 금슬은 중국과 다르고 타는 방법도 역시 다릅니다. 옛날 신라 시대에 이 악기를 만들엇더니 검정 학이 와서 춤을 추엇다고 하여 이르을 현금(玄琴)이라고도 합니다. 또 가야금이란 것이 있어 큰 거문고의 반을 쪼갠 폭이나 되고 줄은 열두 줄인데 타는 법은 중국의 거문고 타는 모양과 비슷합니다. 담헌은 처음으로 구리쇠줄 양금의 소리를 고르어 가야금에 맞추게 되었는데 요즘은 금슬을 타는 악사들이 많으 본을 떠서 모두들 현악이고 관악에 맞추고 있습니다. (276p)


***방사 위한진이 휘종의 손가락을 재어 대성악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위한진은 본래 죄를 지어 군졸이 된 촉당 사람입니다. 그는 거룩한 임금으 타고난 품성은 천지음양과 한 몸뚱이로 목소리를 율이 되고 몸은 척도가 된다 하여 휘종에게 청하여 가운뎃 손가락 길이로 황종률을 정하고 이로서 천지와 음양의 정리에 맞춘다고 하였습니다. (289P)


****위한진같이 못된 자가 비록 음률을 감상할줄은 알앗다 하더라도 송조에는 악곡을ㄹ 지을만한 덕이 없었고 그 당시의 인사들 도한 위한진만치도 재주를 지닌 이가 없어 도리어 거구로 위한진에게 아첨을 해 붙었고 본즉 주작 배척한 아첨꾼들의 모둠이요, 죄인들의 찌거기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91P)



***대체로 중국의 악공은 진(晉)날 때 망했고, 악기는 수나라 때 망했고, 잡곡과 여라지 놀음이 아악을 어지럽게 만든 것은 당나라 현종 장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293P)


***춘추시대에 세상은 비록 어지러워Td나 지나간 엣날이 그리 멀지 않았고 한 이래로 비록 큰 난리가 자주 일어났으나 환난은 나라 안에서 있었기 때문에 악공이고 악기고 옮겨 가지 않았고 제도는 그대로 남았으며 나라를 차지한 자도 창과 칼을 버리고 먼저 악기를 찾았습니다. (294P)


***현종 때에 와서 현종은 음률을 잘 알앗고 본즉 다시 좌우교방을 두고 황제의 이원제자라고 불러 몸소 악공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가르쳤습니다. 천보 연간의 전성기에는 매양 잔치를 배설하고 고창, 고려, 천축, 소륵 등 여러나라의 음악과 코끼리춤, 말춤에 이르기가지 잡동사니로 섞어 벌였습니다. 이래서 역대를 드고 내려오던 전통음악은 흔적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안녹산의 날리 통에는 드디어 난장판이 되었는바, 이는 당나라 현동이 음률에 밝았던 탓이라고 할 것입니다. (297P)


***음악의 덕이란 게절 따라 나오는 벌레나 새에 비할 수 있고, 음악의 재주란 시정에 비할 수 있고 음악의 사업이란 역사에 비길 수 있고 음악의 이름이란 시호에 비길 수 있습니다.

“시정이란 무슨 뜻입니가?”

“저자에서는 화목을 볼 수 있고 우물터에서는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물건을 서로 교역하는데 팔고 사는 두 편 뜻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 저자의 도덕이요, 뒤에 물을 길러 온 자가 먼저 온 자를 원망하지 않고 그릇을 벌여 놓아 차례를 기다리다가 제 뜻에 찰 때에 돌아가는 것이 우물터의 도덕입니다. 대체 역사의 본질은 정직하여하고, 시호란 것은 잘잘못을 들어 밝히는 것입니다. (300P)


***시를 노래하는 데 이르러서는 옛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유쾌한 사람은 안 웃을 수 없고 슬픈 자는 안 울 수 없고 배고픈 자는 밥을 안 욀 수 없고 목마른 자가 물을 안 외칠 수 없어 여기는 허위와 가식이 없고 무리나 부자연이 없습니다.

이같이 마음에 한번 감촉되자 비록 즐거우면 음탕해지고 너무 슬프면 병이나는 폐가 없지 않지마는 모두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소위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심없는 생각’이란 말이 이것입니다. 시 삼백편은 다 사람의 감정으로부터 직접 우러나오는 바일 것입니다. (301P)


****무릇 형첵 있다는 것은 굵직한 흔적을 보임으로서 모두 언어로 형용할 수 있고 문자로 형용할 수 있고 문자로 기록할 수 있지마는 형제가 없다는 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아득한 경지에서 개우쳐 교양을 줄 수 있고 황홀한 속에서 활도을 합니다. 감추면 종용하고 소리를 내면 일매지고 소라가 아름답게 모일 때는 예절에 맞고 소리가 적중하는 것은 활소기기와 같고 조율하기는 말몰기과 같고 음을 빌리기는 글자 만드는 법식과 같고 음계는 수학과 같아서 털끝 사이에서 감돌고 핏줄을 따르다시피 퍼집니다. 들려올 때는 어렴풋하게 마중이라도 학 싶고 사라질 때는 가물가물하여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더듬었자 얻을 것이 없으며, 보앗자 눈에 뜨이는 것이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뼛골이 살살 녹도록 하고 창자속이 달콤하도록 하여 가다가도 되돌아서서 못 잊는 것만 같고 끊어졌다 다시 이어 댈때는 갑자기 딴 생각이라도 내는 듯합니다. (312P)


***가지것 맑고 보니 향내도 없으며, 지극히 적고보니 그림자도 없으며, 지극히 빽빽하고 보니 틈서리도 없으며, 지극히 크고 보니 바같이 없으며, 지극히 화목하고 보니 흩어짐이 없으며, 지극히 아름답고 보니 빛깔조차 없으며 지극히 신비로우니 마음도 없으며, 지극히 현묘하고 보니 말이 없는바 대체 가볍고 민첩한 언어로써도 이를 형용할 수 없거늘 더구나 글자 나부래기나 가지고야 될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는 상고 이래로 당초에 <악경>이란 것은 없었던가 봅니다. (312P)


***공자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 잡앗다는 그것이 곧 악학(樂學)입니다. 원래 음악의 본질은 시에 속한 것이요, 음악의 이용은 예에 속한 것입니다. 언어로 사람을 가르칠 때는 세상 물정이 너무 노골화하고, 문자로서 사람을 가르칠 때는 오묘한 이치를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악이란 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빠르되 가쁘지 않으며, 나타나되 불거지지 않으며, 깊숙하되 충충하지 않으며 온순하되 강직할 수 있으며, 꼿꼿하되 구부릴 수 있으며, 낮았다 높았다 감격스럽고 흐느끼고 간곡하여 이것이 사람에게 영향을 줄 때는 소름이 끼치도록 두렵기도 하고, 벌벌 떨리도록 놀랍기도 하고, 갑작스레 없어졋다가 슬그머니 생각나게도 합니다.(313P)


***옛날에는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반듯시 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이 곧 학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증점(曾點)의 비파와 안회의 거문고가 있는 데는 공자를 모셨고, 문왕의 사당 청묘에서 세 번 읊으면 문왕을 보는 듯하다는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음이란 것이 소리의 문리라면 육률이란 소리의 듯일 것입니다.

몸은 각각인데 똑같이 맞는 것은 소리의 덕행이요, 잡티없이 순수하여 뽑아 낸듯이 드러내는 것을 일러서 아(雅)하다는 것으로 아하다는 것은 소리의 광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14P)


***고려가 비록 나라는 작고 백성은 가난하다손 치더라도 기름진 곡식들은 족히 조상의 제사를 지낼 만하고 생산되는 실과 삼은 족히 제복을 갖출만하고 산에서 나는 쇠와 바다에서 나는 소금은 자급자족할 만하니, 어찌 형제 국가의 재물에 욕심을 내고 천지 나라 관리들에게 시끄러운 폐를 끼쳤겠습니까?(335P)


곡정필담

***본편은 실로 박지원의 세게관과 사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하다.

특히 본편의 서두에 나오는 지광설, 지구 원형설, 지동설, 물질의 본체, 생물의 기원 및 진화에 관한 철학적 과학적 견해는 연암이 지닌 진보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어, 탁월한 연암사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348P)


**무읏 물건이 크면 귀신이 붙고 물건이 오래되면 정기가 어리는 법입니다. 늙은 조개가 구슬 빛을 토하여 밤에도 번쩍이는 것은 정기가 모여드는 까닭입니다. 이 땅덩이는 크다고 할 수 있고  오래되었다고 할 t 있어 허공에 박힌 보옥 같은 구슬이고 보매 한없이 큰 정기가 응당 절로 밝은 빛을 낼 것입니다. 비해서 사람으로 치면 점잖은 이가 도덕을 닦아 쌓고 보면 자연히 박으로 꽃다운 영채를 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늘에 가득 찬 저 수없는 별들을 보면 모두가 몸에서 뿜는 빛이 번쩍이고 있습니다. (358P)


***하늘은 원래 모난 물건을 만들어 낸 것이 없습니다. 비록 모기다리와 비록 궁둥이와 빗방울, 눈물방울조차 둥글지 않은 물건이 없어 이제 보아 산과 물과 대지와 일월성신이 모두 하늘이 만든 것이지만 아직 모난 별들을 본 적이 없은즉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의심할 게 없습니다. (362P)


***만약에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난다면 반드시 이렇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밝은 것을 내세우고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아 누구나 가리지 않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보면 꿈을 꾸어 담장 쌓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고 현몽에 따라 낚시꾼도 만날 수 있어서 같이 사업을 하는데도 서로들 마음이 맞았으매 그렇게들 성공을 하였습니다. 만약에 저들 제왕이 자기 스스로 이런 어진 신하를 구하지 않았다면 어찌 하늘이 내려주는 뛰어난 인재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381P)

☆☆☆현명한 군주는 현명한 신하를 알아보고, 어진 군주는 어진 신하를 알아보고, 방탕한 군주는 방탕함을 일삼는 신하를 옆에 둔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면 언제나 열 손가락에 피가 났다고 자랑하는 것이 일수요, 대를 이어서 즉위한 임금이 갖은 호사와 계집질에 빠지는 것은 판에 박은 놀음입니다. 이래서 천하에 무슨 일이고 모두가 황제의 집안일이 된지는 이미 오래되었는바, 이는 천고에 바꿀 수 없는 법칙같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짐(朕) 이란 글자 한 자를 지워버렸을 때는 당장에 요순같은 임금이 될 것도 같을 것이요, 만약에 짐자 한 자가 그대로 있다면 누가 감히 그 앞에서 소매춤으로부터 손을 그집어 내기라도 하겠습니까? (384~385P)


***세상일이란 매양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느냐 못 건너느냐 하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논어>를 읽다가도 ‘공자가 강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물을 못 건너는 것은 하늘의 마련이다.’ 란 구절에 이르러 미상불 세 번 탄식하였고, ‘항우가 오강을 못 건넜다’는 구절에 와서는 미상불 세 번 탄식했고, 신하 유수가 강물을 건너라고 세 번 외쳤다. 는 구절을 대하고 미상불 세 번 탄식을 하였으니 이만해도 아홉 번 탄식한 것으로 벌써 가 태부의 여섯 번 탄식보다 많은 갑소이다. (399P)


***절강 지방에서는 ‘머리 깎는 이발관’에다가 ‘좋은 세상의 즐거운 일’이란 간판을 붙여놓았다지요. (400P)


***한나라 세태를 본든 것이 적지 않습니다마는 한나라때는 술을 먹어도 섬하 소주 같은 독주를 마셔 기가 사납고 술이 곤드레 만드레 억병 취하면 노래하는 놈, 우는 놈, 춤추는 놈, 욕질하는 놈 모두 천진 그대로 발작을 하였습니다.

송조에 와서는 한나라의 술 재강을 물려 먹으면서도 서로들 쳐다보고는 술 맛이 좋다고 하면서 몸을 똑바로 하고, 비록 종일토록 마셔도 질서가 문란한 적이 없었으나 참말 천진스러운 본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401P)


***명나라는 참말 처음부터 끝가지 버젓하고 광명으로 일관하여 하나도 구차한 데가 없었습니다.(401P0


***** "곡정은 말했다.

“나라를 세우는 원칙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씀인지요?”

“오제(五帝)는 음악이 각각 다르고 우왕, 탕왕, 무왕 삼왕은 예절이 각각 다르니 한나라는 

충성을 숭상하고 은나라는 질박을 숭상하고 주나라는 문화를 숭상했음과 같은 것입니다.“ (428P)


***목전에 급급하게 서두는 것은 모두가 늘그막 준비입니다. 누에가 늙으면 절로 고치를 짓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비단옷을 입히고자 목적한 것은 아닙니다. (435P)


***내가 서울을 떠나서 여드레만에 호아주까지 왔을 때 그대로 말 위에 앉아서 혼자 생각하기를 본디 학식이 없는 나로서 기회를 얻어 중국 땅에 들어가 만약 중국의 고명한 선비를 만난다면 장차 무엇으로 질문을 들이대어 한 번 애를 먹여 볼까 하고는 드디어 옛날 들은 지식 주에서 고삐를 잡고 안장 위에 앉은 채 졸면서도 무려 수십만 자의 말을 풀어서 가슴속에는 글자 없는 글씨를 쓰고 허공에 소리 없는 글을 읽어 하루에도 몇 권의 책이 되었다.

용한 생각도 하룻밤이 지나면 스러져 죽고 말았지마는 이튿날 다시 하늘을 쳐다보고 그려 볼 때는 새로운 생각이 겹쳐 떠올랐다. 이야말로 참말 먼 길에 좋은 길동무가 되고 위로할 거리가 되었다. (440P)


산장잡기(山莊雜記)

***본편에 수록된 각편들은 박지원 문학에 있어 사실적 묘사의 극치를 이루어 한 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박지원 특유의 자유분방한 필치로 된 산문형식은 문학사적으로 한문체 산문 형식에서 to 기원을 지었다고 볼 만큼 이례를 보여주고 있다.


****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서

때마침 초생달이 산마루턱에 걸려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 빛이 사늘하기는 숫돌에 갓 갈아 낸 칼날처럼도 벼려졌다. 이윽고 달이 재너머로 차츰 기울어 가자 아직도 뾰족한 두 끝은 산 너머서 솟은 듯만하였다.

북두칠성은 만 나마 관 안에 꽂혔는데 벌레 소리 사방에서 일고 몰아치는 바람은 소슬한데 숲과 골짝은 한목으로 소리를 쳤다.

짐승같이 생긴 바위, 도깨비처럼 생긴 절벽은 수없는 병장기를 한목으로 늘어세운 듯, 두 산 틈으로 쏘아 붙이는 냇물은 싸우듯이 울부짖는 소리가 쇠말이 뛰고 금북을 치는 듯만 하였다. 하늘 저편에서 대여섯 차레 맑게 학 울음소리가 들렸다. 길게 뽑아 넘기는 피리 소리 같기도 한데 더러는 말하기를 거위 소리라고도 했다. (447P)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

물은 두 산 틈에서 나와 바위와 마주쳐 판가리 싸움이 벌어지면 놀란 파도 성난 물결 우는 여울 흐느끼는 돌창이 굽이를 치고 뒤번지면서 울부짖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듯 언제나 만리장성을 부서뜨릴 기세로서 만대 의 전차, 만 마리 군마, 만 틀 대포, 만 개의 쇠북쯤으로는 그 야단스러운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450P


***대체 물소리란 듣기에 달린 것이다. 연암 산골 내가 사는 집 문앞에는 큰 개울이 있어서 해바다 여름철이 되어 소낙비가 한 번 지나가면 개울물은 갑자기 불어서 언제나 수레소리, 말 달리는 소리, 대포소리, 북소리를 듣게 되어 필경에는 아주 귀탈이 날 지경으로 귀에 젖어 버린다. (450P)

***나는 언젠가 문을 닫고 누워 소리 나는 종류에 따라 이를 사물에 비교해 들어보았다. 깊숙한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하니 이는 청아한 취미로 들은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분노하는 소리로 들은 것이요,  개구리가 저마끔 우는 소리는 발칙스러운 것으로서 들은 것이요, 수없는 대가치가 서로 마주 어울려 내는 듯한 소리는 성난 소리로서 들은 것이요, 벼락소리, 천둥소리 듯한 갓은 공포심으로 들은 것이요, 찻물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소리는 취미로 들은 것이요, 거문고가 궁성, 우성에 맞게 나는 듯한 소리는 슬픔으로 들은 것이요, 종이문창에 풍지 우는 듯한 소리는 의심스럽게 들은 탓이다. 무엇이나 올바르게 듣지 못하고 더구나 가슴속에 무슨 딴 생각을 먹고 있으면 그것이 귀에서 소리가 되는 것이다. (451P)


****다들 말하기를 요동볼은 넒고 펀펀하기 때문에 물소리가 요란하게 나지 않는다고 하지마는 이는 물소리 속을 모르는 말이다. 요동땅 강물들이 물소리는 안 내는 것이 아니라 밤에 건너지 않았던 것이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은 외곬으로 위험한 데에만 쓸려 무시무시하여 눈 가진 것을 걱정이라도 할 판인데 귀에야 무엇이고 들릴 가닭이 있을 것인가? 오늘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을 볼수 없은 즉 위험은 외곬으로 듣는 데만 솔려 귀는 언제나 무서워 부들부들 떨면서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오늘에야 이치를 알았다. 마음의 눈을 감은 자는 육신의 귀와 눈이 탈이 될 턱이 없고 귀와 눈을 믿을수록 보고 듣는 힘이 밝아져서 더욱 병통이 되는 것이다. (452P)


***한번만 까닥하면 강물 바닥인지라 물로 당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마음을 삼으니 이때야 내 마음 속에는 벌서 한 번 떨어질 것을 각오한 바라, 내 귓속에는 드디어 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이나 물을 건너는 데도 마치 의자 위에서 앉고 눕고 기동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452P)


***소리와 빛깔은 외게로부터 듣고 보는 데 따르는 것이라 이는 언제나 귀와 눈에 탈이 되어 이렇게도 사람으로 하여금 독바로 보고 듣는 힘을 잃어버리도록 만든다.(453P0


코끼리 이야기

****코끼리는 범을 마난면 코로 때려 눕히니, 그 코로 말한다면 천하에 적수가 없고 쥐를 만나면 코를 댈 자리도 없어 하늘을 쳐다보고  멍하니 설 뿐으로 이렇다고 주기ㅏ 범보다 무섭다고 하면 아까 말한 소위 하늘이 낸 이치에 맞다고는 못할 것이다. (474P)

요술구경

****내가 “눈이 있어도 시비를 분별못하고 참과 거짓을 살피지 못한다면 이는 눈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요술쟁이에게 속는 것은 눈이 헛보아 그런 것이 아니라 밝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탈입니다.”

햇더니 조광련은

‘아무리 잘해도 요술쟁이가 있더라도 장님에게는 눈속임질을 할 수 없을 것이니, 눈이란 과연 떳떳한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오늘 길을 걸어오는 도중에 두 눈이 별안간에 맑아지고 동자막이 절로 열려 천지가 광대하고 산천이 헝클어지고 만물이 눈을 가로막고 별별 의심이 가슴에 복받쳐 손, 발, 코, 귀의 감각은 거꾸로 뒤틀려서 옛날의 정상스런 버릇을 잃어버리고 보니 우리 집이 어디인지 아득하게 잊어보려 저 혼자는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선생은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리면 바로 네 집으로 갈 것이다. ”라고 했다.

이로써 말해본다면 눈이란 이같이도 밝은 것을 자랑할 거리가 못 도비니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질을 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497P)


***세상에서 말하기를 조비연은 너무 여위고 양옥환은 너무 살이 졌다고 하는데 무릇 너무 라고 함은 벌써 심하고 과하다는 말입니다. 이미 살찌고 여윈 것을 말하면서 선뜻 과하다고 평한 것은 벌서 절세가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지마는 두 임금은 눈이 홀려서 여윈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497P)


***요술하는 술법이란 비록 천변만화를 하더라도 겁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무서울 만한 요술이 있다면 충성을 가장한 큰 역적과 덕행을 가장한 ‘점잔’일 것입니다. (500P)

***호광같은 정승은 중용으로 요술을 삼고 오대시대의 풍도(風道)는 명철한 것으로 요술을 삼았으니 웃음 속에 칼을 품은 것은 오늘 본 입속으로 환도를 삼키는 것보다도 더 무섭지 않을 까요?(500P)


열하일기 (하)

피서록(避暑錄)

***수류운재로서 황제가 거처하는 이 지역을 통칭해서 피서산장이라고 한다.

***강희 황제는 글을 쓰기를

“.....오직 이곳 열하만이 길은 서울과 가깝고 땅은 황야에 자리잡아 지세가 높고 낮고 멀고 가까운 거리를 헤아리며 자연과 산천의 기세를 맞추어 소나무를 의지하면 tjworkjk 되고 물을 끈데는 정자가 되었다. 모두가 사람의 힘으로는 도리 바가 아니요 곷다운 벌판을 빌려 절로 만들어진 것이다.

서가래를 새기고 기둥을 단청할 비용이 필요없고 숲과 물이 가진 자연 그대로의 담박한 정신을 즐길 수 있다. 고운 물새는 푸른 물결을 희롱하는데 사람을 피하지 아니하고 사슴들은 석양빛을 띤 채 떼를 지어 출몰한다. ...먼빛으로 자줏빛 아지랑이에 싸인 아름다운 풍광을 절로 열어 놓았으니 이것이 피서산장의 경치다.“

강희는 늘그막에 대부분 열하에 있었던 것이다. (22~23P)


****꽃시절도 마지막

동산의 가을

주렴 긑에 걸린 달은

갈구리 같네.


기러기 한 마리는

북으로부터 

그림자는 동남으로

바다로 드네.(60P)


****유감

맑은 가을 비추는

물 위의 달빛

회남당 갈대숲을

굼길에 도네.


풀숲에 비 내릴 제

포구는 적막

바람에 꺾인 고목

강물에 둥실


외로운 배 댈 곳 없이

천지는 넓고

정처없는 이내 신세

운수 같고야.


한없이도 쓸쓸한

아득한 그곳

끝없이 먼 길에

시름만 나네. (62P)


****눈물을 지우면서

이별을 하매

평생에 다시 만날

기약없고나.


하찮은 물건이되

정성이라오.

물건 볼 때 사람 보듯

잊지 말아 주.(80P)


***왕추사(청나라 강희 시대 문인인 왕평)가

명나라 은상국이 통악원 뒤들에 심은 버드나무를 보고 지은 시

3

화가와 시인들은

한목으로 사라졌고

아름드리 푸른 숲도

엉성해진 옛 성일레라.


언덕 기슭 누운 가지

저녁 눈 속 비껴 섰고

다락 속은 어두 컴컴

찬 기운 띠었고나.


둘레가 적막하매

낙엽도 조심조심

석양에 집을 찾는

먼 곳까지 외롭고야.


가여운 버들 꽃이

흙 묻을까 걱정이다.

혹시 내년 봄바람에

한목 날지나 말지라. (99~100P)


***과친왕 윤례의 시


푸른 전나무 잎은

고생살이 나머지요

매화꽃은 곱잖앙도

향기로 한복 보네.


구외이문

***열하에 내왕하는 동안 장성 밖 지역에서 들은 기이한 이야기들을 별반 순서나 정리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수록한 잡록.


****고려구슬

중국 사람들은 조선 진주를 보물로 여겨 고려구슬이라고 한다. 빛깔은 담박하며 희기는 옥돌 같다. 요즘 중국 사람들이 모자 앞이마에 한 알씩 박아 모자의 앞뒤를 표시한다. 조선 진주는 8푼쭝 이상이라야 보물로 삼고 있다. 황제가 가진 조선 진주는 7돈쭝이나 되는데 꿈자리가 시끄럽고 가위 눌리는 것을 막는 보배로 여긴다.

황후가 가진 조선진주는 6돈 4푼쭝인데 모양이 흰가지 가타다고 한다. 건륭 30년(1765)에 황후가 이 진주를 잃버러렸는데, 당시 회회족 출신 첩 황후가 이 진주를 나의위졸(황제의 거둥에 호위하는 의장병)의 집에서 찾아냈다고 황후를 참소(讒訴)하여 황후를 폐위시켜 냉궁(冷宮)에 가두었다고 한다. (149P)


***양귀비의 당집

장성 밖 어느 길가에는 양귀비의 당집이 있었는데 안녹산의 소상까지 함께 깎아 놓아 마두들이 들어가 구경을 했더니, 양귀비의 상은 산사람처럼 요염하고 안녹산의 상은 뚱뚱하게 생긴데다가 베를 가리지 않은 채 희떡 드러내놓아 볼썽없이 추악했다고 말했다. 이런 음탕스러운 당집을 헐지 않는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경계하는 뜻인지? (158P)


****동의보감

우리나라 서적으로서 중국에 들어가 출판 한 것이 매우 드무나 홀로 <동의보감>25권이 널리 유행하고 있다. 그 판본은 아주 정묘하였다.

동의(東醫)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의(醫) 자 위에 동(東)자를 붙인 것이다. 보감(寶鑑)이란 햇빛이 뚫고 비치는 곳에는 어둠을 헤치고 살을 쪼개고 베듯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 잡으면 환하게 밝아 거울과 같음이다. 뛰어난 명의는 병을 고치는데 병이 들어 눕기 전에 고치는 것이요 병이 다 든 후에 고치지는 않는 것이다.

편작은 말하기를 “사람들의 병통은 질병이 많은 것이요, 의원의 병통은 치료방법이 작은 것”이라고 했다.

그중에도 정미롭지 못한 자는 이론이 자세하들 못하고 한 가지에 집착하는 자는 올바른 치료법을 해치고 있으니 사람의 병을 치료코저 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을 치료코저 하면서도 사람의 뜻과 통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80여종을 인용하였는데 모두 우리 중국 서적이다. 그중에 조선 것으로 찬술된 부분은 세 종 뿐이다. 옛 사람들이 이미 이룬 법칙을 따라 용하게도 신통스럽게 이를 밝히고 두 족 어간에 결함과 부족을 보충하여 사람의 몸뚱이에 가위 광명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 책이 다 오나성되어 궁정에 바쳤더니 국수(國手)로 추천하였다. (185~187P)


****나약국의 국서

하늘과 땅은 넓고 커서 한 사람이 혼자 주재할 바 못 도리 것이요, 우주는 광대하여 한 사람이 독차지 할 바가 못 됩니다. 천하는 천하 인민의 천하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닐 것입니다.

하늘이 살기를 내면 귀신이 울부짖는 법이요 땅이 살기를 내면 용과 범이 달아나 숨는 법이요 사람이 살기를 내면 천지가 뒤집어지는 법입니다. 요순은 도덕이 있으매 온 세상이 조공을 하였고 우 임금과 탕임금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니 만국이 손을 잡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또 진시황은 자주 흉노를 정벌하다가 그의 몸은 썪은 고기가 되었고 거란은 중원 땅을 한 번 유린하다가 몸은 소금에 절인 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194P)


***주한과 주앙

인조 때 찬성 민형남이 나이 일흔이 넘어 손수 과실나무 접을 붙으니 같은 마을에 사는 여러 젊은 명관이 이를 웃으면서 말했다.

“공께서는 아직도 백 년 계획을 세우시나요?”

민공은 대답했다.

“바로 그대들을 위하여 선물로 남길 것이네!”

그 후 민공은 아흔 네 살이 되어 여러 명관들과 제삿날 과일을 손수 따서 제사에 부조했다고 한다. (207P)


***강선루

우리나라 성천에 있는 강선루 현판은 명나라 만력 때 미만종 중조가 쓴 글씨다.


오문중이 지은  담원시


주인은 본디부터

마음이 맑아

맑다는 이름으로

뒤원 이름 지었네.


때로 자리 만들어

바둑 두다가

손님 위하여

술병을 내네.


한가한 구름은

대밭 여울로

지는 해는 솔문을

비쳤어라.


축대에 올라서

달맞이할 새

흐르는 달빛이

귓속질하네. (21P)


황도기략

***코끼릿간(象方)

코끼릿간은 선무문 안 서성 북쪽 담장 아래 있다. 코끼리가 80여마리 있는데, 이 코기리들은 큰 조회 대 오문에서 의장으로 서기도 하고 호아제가 거동할 때 의장에도 쓴다. 코끼리는 몇 품의 녹봉도 받는다.

조회 대 백고나이 오문으로 다 들어오면 코끼리가 코를 마주 엇대어 서서 아무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

코끼리가 죄(물건을 다치거나 사람을 상하는 따위다)를 범하면 칙명이라 하고는 매를 친다. 엎드려 매를 맞는 것이 사람과 다름없다. 매를 다 맞고 나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하며 봉급을 깎아 벌 받는 코끼릿간에 넣어둔다. (311P)


***오룡정

물결도 맑은 넓은 못에 금벽 단청 그림자가 어른거릴 제 멀리 바라다 보이는 금오교 다리 위를 오가는 거마와 행인들은 가마득하여 신선 사는 데만 같아 보인다.

뒷날 오중사람들과 놀면서 서호의 경치를 물엇더니, 서호를 못 봤다면 오룡정이 바로 그 경치의 일부라고 했다. (327P)

어느 맑은 아침 말 한 번 왔더니 돋는 햇발을 받아 더욱 아름다웠으나 정자 아래 있는 수없는 연 줄기에 연꽃이 없음이 한스러웠다.

역관들의 말을 들으면 오룡정 광경은 비록 아침 저녁 그 경치가 달라지지마는 그래도 한여름 연꽃철 만은 못하고, 여름 연꽃철도 역시 한겨울의 얼음놀이보다는 못하다고 한다. (328P)



공자묘를 참배한 감상

****태학

내가 얼마 전에 참배한 열하의 태학은 이 태학을 본뜬 것이다. 지금에 두루 공자묘를 구경하고 명나라 적 옛 제도와 비교하여 생각할 때 태화전은 비록 조금 모자라는 것 같기는 햇으나 제도의 정제된 품은 비슷햇다.

태학에는 이륜을 강론하는 당이 일곱 개가 있어 희강당, 솔강당, 수도당, 성심당, 정의당, 승지당, 광업당이라 한다. 여러 생도들이 공부하는 처소다. (349P)


***학사

한나라 태학은 1800칸에 생도가 3만명이나 되엇고, 당나라 때는 6200칸이라고 하였으니, 당시 학사의 넓이와 생도의 수효는 뒷날 세상과 비교할 게 아니었다.

여기에서 넉넉히 본받아도 좋을 일은 이곳 서재와 학사들이 텅텅 비어있다면 응당 먼지에 파묻히고 잡풀이 돋앗을 터인데 어디고 씻고 닦아 맑게 정돈하지 않은 데가 없어 탁자들은 가지런하고 문과 창은 밝아 종이를 바른 지는 비록 오래되었으나 하나도 찢어지고 떨어진 데가 없다는 점이다. (351~352P)


***문승상 사당기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위엄과 무력이라도 한낱 지사의 절개를 꺾지는 못한다. 이야말로 지사 한 사람이 버티는 절개가 백만명의 군대보다도 강한 것이요, 만대를 통하는 떳떳한 도덕과 규범은 당대에 한 나라를 차지하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매 이 역시 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왕이 주 임금을 정벌한 것은 무왕이란 개인이 이를 정벌한 것이 아니라 즉 정의를 차지하고서도 무왕은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대하여 의심이 없었고 사람에 대하여 기탄이 없었고 적국에 대하여 원수가 없었고, 천하에 대하여는 ‘나’를 없애고 ‘도’가 있는 곳을 따라 나아갔을 뿐이었다. (363P)

후세에 와서는 천하를 차지한 자는 역시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았다고 하지 않는자가 없지마는 다만 확고한 자신이 없었던 까닭에 하늘을 믿지 못하게 되고, 하늘을 믿지 못했던 까닭에 사람을 꺼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무릇 자기 힘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 자는 모두 자기의 강적일 것이므로 언제나 그들이 뜻있는 동지를 규합하여 옛날대로 회복할 것을 의심해서 차라리 그 사람을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63P)


양엽기

**양엽이란 말은 옛날 사람이 감 잎사귀에 글자를 써서 항아리 속에 두었다가 기록했다는 고사를 본받아서 한 말이다. (376P)


**** 융복사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부리는 하인 한 명 없는 집안의 가난한 선비들일지라도 아직 자기 발로 장터에 나가 막 굴러먹는 장사치들을 상대로 물건 값을 흥정하는 것은 좀스럽고 더러운 일로 치는 터이니, 이런 광경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이 찾는 물건들이란 대개 골동그릇이며 새로 발간된 서적이며 법서, 명화, 관복, 염주, 향낭, 안경 등으로서 함부로 남에게 시켜 군색스러운 일을 하느니 차라리 이녁 손으로 유쾌하게 선택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몸소 물건을 선택하면서 오가는 데 있어서도 역시 그들의 소박하고 솔직한 데를 볼 수 있었는바 이래서 중국 사람들은 저마끔 물건을 감상할 줄 안다. (394P)


***석조사

정갈하고도 그윽하여 그야말로 티끌 한 점 움찍도 않는 선림(禪林)의 정계로서 이러 sep를 처음 보았다.

거처하는 방들은 다들 정결하고 자리들이 잘 정돈되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감회에 잠겨 거닐면서 발길을 못 돌리도록 하였다. (395P)


***이마두의 무덤

서양선교사들의 무덤으로 동서 양쪽에 쭉 묻어 둔 무덤이 전부 70여 분이다. 무덤 둘레는 네모로 담을 쌓아 바둑판처럼 되었는데 거의 3리 어란이 모두 서양 선교사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406P)


동란섭필

***중국의 향시(鄕試) 규정은 첫째 시험이 사서(四書)인데 산문 세 편과 성리론 한 편을 하루 동안에 마치고, 둘째 시험은 경문 네편과 배율 한 편을 하루 동안에 마치고 셋째 시험이 책(策, 문제에 다라 자기 정견을 서술한 논문) 다섯편을 역시 하루에 치르는 데 모두 천여자 씩은 된다.

회시(會試)규정도 역시 향시와 같다. 전시(殿試)는 단 한번 시험에 책 한 편을 역시 일주야 동안에 짓는데 반드시 글은 만여 작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격식에 맞는다고 한다. 또 이 격식에 하나도 틀리지 않아야 한림에 들어갈 수 있다.

향시나 회시의 다섯 편 책문에서 세 편은 엣날 역사에서 제목을 정하고 두 편은 시사로 제목을 설정한다. 전시는 시사문제 뿐이다. (416P)


***고려 때는 송나라 장삿배들이 해마다 자주 예성강(황해도 배천군에 있는 강이름)에 닿았으며 백화가 몰려들었다. 고려왕은 예절을 차려 대우했으므로 당시에 서적들은 훌륭히 갖추어졌고 중국의 기물로서 안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오늘 우리나라는 뱃길로 중국 남방과 통상을 하지 못하므로 문헌에는 더구나 캄캄하며 삼왕의 서적을 몰랐던 것도 전부 이 까닭이다. (417P)


***소동파가 고려를 미워하는 것에는 까닭이 있다. 당시에 고려는 외곳으로 거란과 친하고 있으면서도 특별히 중국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가끔 송나라 조정을 찾아갔다. 중국 인사들이 고려의 충정을 알뜰하게 보아주지 않고 혹시 조정형편을 엿보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한 것은 괴이쩍은 일이 아니다. (456P)


보유 금료소초

***<서양수로방>이란 책도 극히 정미로우나 시험해 보니 그리 효력이 없었는데, 이는 대체로 사방의 기후 풍토가 다르고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기품과 성질이 다른 까닭이니, kdans만 따라서 약을 준다는 것은 조괄의 병법이야기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연히 <향조필기>를 들추다가 <금릉쇄사>와 <요주만록>이 기록된 것을 보았는데 원서가 모두 의학 관계 내용은 아니었다. 이상의 기록은 전부가 경험에 관계된 기록이므로 나는 몇 십 가지 법을 베끼고 이 밖에 잡록과 필기 중에 실린 옛날 방문을 아울러 초록하여 ‘금료소초’라고 한다. (486)

 

***송나라 효종은 게를 많이 먹고 이질을 앓았다. 이질을 막는 단벌 방문으로 새로 캔 연뿌리를 잘게 갈아서 더운 술에 섞어 먹으니 과연 나았다.(488P)


****붉은 막이 덮인 눈병을 치료하는 데는 흰소라 한 마리를 껍질을 벗기고 황련 가루에 버무려서 하룻밤 이슬을 맞히면 소라의 살은 녹아서 물이 된다. 이 물을 눈에 떨어뜨린 즉 붉은 막이 절로 사라진다. (488P)


***구기자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켜고 책을 읽으면 시력을 더 좋게 할 수 있다. (489P)


***절골된 뼈를 잇는 방법으로는 새 기왓장을 불로 달구어 잘 말린 자라 반 냥쭝을 뜨거운 대로 물에 적셔 자연동과 유향, 몰약, 채과자인을 꼭 같이 등분하여 가늘게 가루를 내어 한 푼 반씩 술에 타서 복용하되 상체가 되었을 때는 밥 먹은 뒤에 먹고 하체가 상했을 때는 식전 공복으로 먹는다.(491p)

****바늘이 뱃속에 들어갔을 때는 참나무 숯가루 서돈쭝을 우물물에 타서 먹어도 좋고, 또 지남석을 항문에 대두면 끌어당겨 나온다. (491P)


여명기의 거인 박지원

연암의 저작들은 조선 인민들이 자기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고귀한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연암의 작품들 중에서도 이 <열하일기>는 벌써 그 양에 있어서 오늘 남아 있는 연암의 저작 전집 중 거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분량이요 그 내용에 있어서 연암의 사상과 예술을 가자 d집중적으로 또 다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열하일기>는 이미 표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저자가 다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열하일기>는 표제만 얼핏 보아 일종의 여행일기로 간주되기 쉬우나 이는 잘못이다. 본서는 향용 개념으로서의 일기나 기행문이 아니다. 작가는 이 기행문체를 이용하여 자기 작품을 종합하는 편성의 체계를 삼았을 뿐 여기 포괄된 작품들의 형식은 오늘로 보아 기행, 평론, 소설, 시, 오체르크(실화문학), 펠레톤(사회의 부정적 현상을 야유하거나 조소하는 방법으로 비판하는 형식의 신문 기사), 르포르타주(기록문학), 스케치, 수필, 상화 등 동서고금의 문학장르를 있는 대로 구사하였고 그 내용에 있어서 정치, 경제, 천문, 지리, 철학, 역사, 과학, 기술, 종교, 미술, 음악, 연극, 언어, 의학, 서지학 등 거의 백과사전적으로 광범한 테마를 망라하였다. (5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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