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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9일 08시 54분 등록

A. 뚱보 선생 연암 박지원의 자기 소개서

 

나는 1737년 음력 2월 5일 서울 서쪽 야동이라는 곳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나의 6대조 할아버지께서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윤 훌륭한 분이셨고, 그 외의 선조들께서도 대사헌이나 판서등 높은 벼슬을 하셨다. 나 역시 원한다면 꽤 괜찮은 벼슬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벼슬길에 나서 봐야 당파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이 싫었다.

내 할아버지도 이런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마흔이 넘도록 과거 시험을 보지 않으셨으며, 아버지는 아예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이런 집안 분위기는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과거 시험에 집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러던 내 삶에 전환점이 왔다. 16살에 이보천 어른의 딸과 혼인을 했다. 그와 다불어 나의 학문의 길이 열렸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꽤 늦은 나이였으나, 나는 장인어른께 맹자를 배웠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 했다.

장인어른께서는 세상에 욕심이 많은 분이 아닌 꼿꼿한 선비셨고, 나 또한 이런 점을 배우려 했다. 본

격적인 학문은 아내의 숙부되시는 이양천 어른을 만난 뒤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상살이는 우울했다.

글재주가 있다고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삶이 만족스러울 수도 없었으니까.

18, 19 무렵 광문자전같은 이야기를 쓰면서 그 우울함을 달래 보았다. 그러다가 19살 때 스승이신 이양천 어른께서 돌아가셨다.

이후 나는 여러 벗들과 함께 북한산 등지를 돌면서 글 공부를 했다. 양반전 우상전 같은 짤막한 이야기 아홉편을 지었다.

세상의 잘못된 것들을 꼬집고 내 마음가짐을 바로잡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가슴 속의 응어리를 씻어주는 데에는 글 쓰는 것 만한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으로 내 글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훌륭하다는 평을 해 주었고, 그 때문에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23살 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24살엔 할아버지마저 별세하셨다. 할아버지는 벼슬없이 지내던 아버지를 대신한 실질적인 보호자셨다.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나는 울적한 마음에 금강산을 유람하기도 하고 여러 벗들과 사귀며 세월을 보냈다. 31살에 아버지 마저 돌아가셨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된 것이다. 삶은 더욱 아득해졌다. 32살에는 백탑 (서울 탑골 공원) 근처로 이사하면서 젊은 학자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들이 있어서 나의 학문과 삶이 넉넉해 질 수 있었다. 아마도 나의 삶에서 두 번째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다. 특히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같은 이들은 때로는 벗처럼 때로는 제자처럼 나와 함께 해주었다. 어려움은 계속 되었다. 36살엔 살기가 어려워져 식구들을 처가로 보내고 서울에 혼자 남았다. 이때부터 여러 벗들과 더욱 가깝게 지냈다. 42살에 나는 황해도 연암골로 몸을 숨겼다. 내 호가 연암인 것은 바로 이 까닭이다. 내가 연암골로 간 것은 나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던 홍국영이 세도가에 오르자 내 신변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연암골에서 자연과 벗하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44살이 되던 1780년에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내 세 번째 터닝포인트가 시작된 시점이다.

8촌 형인 박명원이 사신이 되어 중국으로 가는 길에 함께 가게 된 것이다. 나는 언젠가 중국에 가보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나와 함께 공부하던 내 친구들도 이미 중국에 몇차례 다녀온 까닭이다. 난 50이 되었을 때 정조의 부름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선공감이라고 하는 토목 공사등을 맡던 관청의 하급관리였다. 일반 사대부를 생각하면 늦고 또 낮은 직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때 중국을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것들, 그령 벽돌을 구워쓰는 법 등을 제안하고 큰 보람을 느낀다. 학문은 세상에 쓰일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다시 불행이 닥쳤다. 나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시집와서 이제껏 고생만 하다간 아내가 하염없이 불쌍하고 그 이후 사람들은 내게 재혼을 권했지만 나는 이후로 쭉 혼자 지냈다. 그 뒤로 몇몇 작은 벼슬을 하다가 안의현감으로 부임했다. 경상도 안의현이라는 곳의 원님으로 가게 된 것. 비록 큰 고을은 아니었지만 고을을 맡아서 해보니 할 일이 정말 많았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가령 둑 공사를 할 때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은 없을까 연구해 실천에 옮기기도 했고 백성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재판도 했다. 내가 57살 되었을 때 내가 쓴 열하일기 내용이나 문장이 보통 사람들이 쓰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전에 쓰던 중국의 문체에 비해 젊잖지 못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나보다.

정조께서 나서서 내 잘못을 뉘우치라고 할 정도였다. 나는 내심 못마땅했지만 반성의 글을 써야 했다. 그런 일들이 있긴 했어도

나는 안의현감을 하며 참 행복했었다. 내 봉급을 털어서 굶주린 백성들을 돕기도 했고, 벽돌을 구워서 관가 건물을 짓기도 했으며, 여러 작품들을 써내었다. 61살에는 다시 충청도 면천군의 군수가 되었다. 나는 이 때 백성들의 농사일을 살피고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과농소초’라는 책을 썼다. 마침 임금께서 농사 관련 서적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농기계나 농사 짓는 법등을 체계적으로 적은 책이다. 또한 백성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 하여 골고루 소유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의 ‘한민명전의’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나는 69살에 생을 마쳤다. 이렇게 적고 보니 대단한 삶도 아니다. 부자로 떵떵거리며 산 것도 아니고 큰 벼슬을 하며

세상을 호령하지도 않았다. 그저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글로 쓰고, 또한 실제 생활에서도 이를 실천해보고자 애를 썼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나를 그저 글 잘 쓰는 문인으로 안다면 참 서운한 일이다. 나는 남들보다 열심히 책을 읽었고 또 골똘하게 생각하고자 애썼다. 또 생각한 것들은 기회가 닿는대로 실천에 옮ㅂ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가하면 누님의 죽음 앞에서는 슬픔을 이기지 못했고 백성들 앞에서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자 애썼다. 언젠가 홍대용 선생 집에 갔을 때는 중국을 통해 양금이라는 악기를 처음 보고 즉석에서 음을 맞추어 연주해 보기도 했다. 나는 비록 곤궁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팍팍한 삶을 산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꿈꾸던 이상은 어쩌면 영원히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말과 생각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고,

그로 인해 그 이상에 조금씩 다가서게 되리라 믿는다.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의 생각 수업 참고]

 

 

B 지난주 저자 조사하다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서 올립니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다산은 ‘불의 남자’, 연암은 ‘물의 남자’다. 두 사람의 인생이 보여주듯 사주팔자 역시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지만 성격은 판이했다.

둘은 교류한 적도, 저서에서 상대를 언급한 적도 거의 없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씨는 이 점에 주목했다.

명리학을 연구하면서 두 사람의 사주팔자를 풀어본 그는 “다산과 연암은 운명 자체가 서로 접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완벽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사주팔자의 관점에서 두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먼저 다산 정약용의 사주팔자부터 살펴보면 음력 1762년 6월 16일 사시(巳時·오전 9시 30분∼11시 30분)에 태어났다.

그의 사주팔자를 적은 표에서 보듯 일간은 정화(丁火), 즉 불이다.

태어난 해와 달, 시간에서도 천간 혹은 지지에 불의 기운이 들어 있다.

 

 

불은 계몽을 뜻한다. ‘목민심서’ 등 다산의 주요 저서는 모두 계몽을 위해 쓰였다. 고

지식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것이 불의 성질이다. 다산이 ‘애절양’ 같은 시를 지은 것도, 암행어사를 잘 해낸 것도

 불의 성질 덕으로 분석할 수 있다. 확 타오르다가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불기운이 강한 사람은 굴곡이 많다고 한다.

다산은 정조 때 확 타올랐다가 정조 사후 소멸했다. 불이 많은 사람은 생김새가 깡마르고 왜소한 경우가 많은데, 다산 역시 그러했다

 

 

연암 박지원은 음력 1737년 2월 5일 축시(丑時·오전 1시 30분∼3시 30분) 생이다. 연암의 경우 본인과 아들이 말하는 태어난 시간이 다른데, 여기서는 본인의 말을 따랐다. 일간은 계수(癸水), 즉 물이다. 태어난 달과 시의 천간,

 태어난 날의 지지 모두 계와 해(亥)로 물을 뜻한다. 말 그대로 연암은 물이 넘칠 정도로 많은 사람이다.

 

 

물이 많은 이는 성격이 유연하고 유머러스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생 자체도 기복이 심하기보다는 물처럼 흘러간다.

여행 다니고 다양한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보듯 중국에서도 인종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친구가 됐다. 물의 사주를 가진 이에겐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많은데,

연암의 사상과 문체는 지금 시선으로 봐도 독창적이다.

물의 사주는 생김새가 퉁퉁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연암 역시 덩치가 컸다.

 

 

 

흥미로운 건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관운(官運)과 재산과 여자 등을 뜻하는 재성(財星), 부모와 스승 등 자신을 도와주는 것을 뜻하는 인성(印星)이 강하지 않다는 점이다. 고 씨는 “오행을 두루 갖춘 사주를 좋은 사주로 본다.

다산과 연암 모두 하나의 기운에 치우친 데다 ‘나’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좋은 사주라고 할 수 없다”고 풀이했다.

‘나’가 강한 사주는 주변과 충돌하기 때문에 ‘나’를 도와주는 기운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다산은 정조 사후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관직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펼치진 못했다.

연암은 34세 되던 해 더는 과거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50대 이후 음서제로 관직에 올랐지만 오래 하진 않았다.

 

 

다산과 연암 모두 스승이 없었고 부모의 영향력도 크지 않았다. 연암은 노론으로 집안은 좋았으나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연암은 50대 초반에 상처한 후 재혼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양반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고 씨는 내년 초 그가 운영하는 지식공동체 남산강학원에서 ‘사주로 풀어본 다산과 연암, 그리고 정조’를 주제로 강의하고 이와 관련해 책도 낼 예정이다. “사주팔자로 보면 다산은 정조를 ‘생(生)’하고 정조는 연암을 ‘극(剋)’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 사람의 인생 역시 그러했다. 이들의 관계를 사주팔자로 분석하면 역사의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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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찔러드는 글귀' 와 ' 내가 저자라면'  은  6시까지 첨부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과제가 늦어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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