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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6일 10시 49분 등록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1. 저자에 대하여

□■□ 걸어온 길 - 더불어숲 홈페이지(http://www.shinyoungbok.pe.kr/)참고

신영복(申榮福)

호(號) : 위경(葦經), 소당(紹堂), 우이(牛耳), 쇠귀

 더불어 숲.jpg

 

1941년 경남 밀양 출생

1963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년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

2006년 8월 정년퇴임

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석좌교수

 

「저서」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88년)

․ 엽서 (1993년)

․ 나무야 나무야 (1996년)

․ 더불어 숲 1권 (1998년 6월)

․ 더불어 숲 2권 (1998년 7월)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년 8월)

․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년 4월)

․ 신영복의 엽서 (2003년 12월)

․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년 12월)

․ 처음처럼: 신영복 서화 에세이 (2007년 1월)

․ 청구회 추억: Memories of Chung-Gu Hoe (2008년 7월)

․ For the First Time: 처음처럼(영문판) (2008년 8월)

․ 신영복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2010년 12월)

․ 변방을 찾아서 (2012년 5월)

여럿이 함께.jpg

신영복 저자에 대한 정보는 아주 많다. 나는 많은 정보들 중 저자 소개 글에 토대로 삼고 싶은 한 인터뷰를 찾았다. 그것은 ‘희망의 인문학 캠페인 중 <정재승이 만난 사람들-신영복>’ 이다. 봄부터 시작된 ‘희망의 인문학 - 정재승이 만난 사람들’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주인공이 바로 인문학자, 성공회대 교수 신영복이었다.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대담의 내용을 정리해보자.

<청년시절 20년의 감옥생활, 인간에 대한 이해의 기간>

그는 청년 시절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20대 후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시기이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감옥에서 있던 셈이다. 그는 감옥에서 느꼈던 인간에 대한 이해, 그것이 우리가 천착해 있는 인문학적 내용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59학번이다. 그가 대학교 2학년 때 4.19가 있었고 3학년 때 5.16군사 혁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 학생들의 저항과 반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학생서클 운동의 1세대였던 그는 통일혁명당이란 게 없었는데 그것이 이유가 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무기징역까지 받을 줄 몰랐는데, 받고 나서 엄청난 충격이 휩사였다고 했다. 거기다 사형구형이라고까지 해서 깜짝 놀랐단다. 현역으로 육군 중위였기 때문에 군사재판을 받았다고 했다. 68년 김신조 사태가 일어났고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나포되어 북한에 억류되기도 했던 때다. 삼선개현, 한일회담, 독도문제가 거론되며 복잡한 상황에 그는 감옥에 들어갔다.

감옥에서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조금씩 자기 문제를 사회적 관점, 역사적 관점으로 보게 된 때도 그때라고 한다. 역사적 격동기에 감옥에서 인생을 보낸 수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자신도 그 중 하나라고, 그것이 자신의 팔자라고 생각했단다.

 

<한 달에 한 번 쓸 수 있는 엽서, 정신의 해방구>

신영복 교수가 감옥에 있을 당시엔 편지를 한 달에 한번씩 엽서를 신청해서 쓸 수 있었다. 교도관의 감사하에 썼다. 생소한 감옥에 던져졌으니 충격적인 생각을 안할 수 없었을 거다. 그 생각들을 적어 가족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사색적이고, 산문이긴 하지만 시적인 편지들을 받은 가족은 그가 아직 정신적으로 무너지진 않았다는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한달에 한 번 밖에 못쓰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퇴고를 다하고 썼다고 한다. 교정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그것이 모여 결국 『엽서』라는 영인본이 나왔다.

 

<고리끼가 그랬듯이, 감옥생활은 나의 대학생활>

그는 근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존재론적 패러다임이라고 본다. 자기의 주체성을 완강히 지키며 상대를 타자화시키고 자연까지 대상화 한다. 이걸 청산하고 뛰어넘는게 탈 근대라고 여긴다. 우리 시대가 당면한 과제라는 생각에서 관계론을 이야기 하는데 인간적 관계를 가장 밀도 높게 경험한 게 감옥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여름에는 칼 잠을 잤단다. 옆으로 누워서 말이다. 수용인원이 많으니까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되는 곳이었다. 그 사람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 인간적인 관계를 잘못 파악하는 경우도 참 많았단다.

 

<감옥에서 자살하지 않은 건 햇빛과 가족, 친구들 때문>

교도소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참 많을텐데 신영복 교수는 어떻게 참았을까? 그는 무기징역을 받고 추운 독방에 앉아 있을 때, 왜 자살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다.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기 때문이다.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두가지 였는데 햇빛 때문에 안 죽었다. 그때 있었던 방이 북서향인데, 2시간쯤 햇빛이 들어온다. 가장 햇빛이 클 때 신문지 펼쳤을 때 정도였다. 햇빛을 무릎에 올려 놓고 앉아 있을 때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안죽었단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비록 20의 감옥이 삶 속에 있지만 결코 손해는 아니란다. 태어나지 않은 것과 비교한다면 말이다.

그 다음에는 그가 자살하면 굉장히 슬퍼할 사람들이 있었다. 부모,형제, 친구. 자기의 존재라는 것이 배타적 존잰성이 아니다. <어린 왕자>에 보면 리비아사막에서 어느 비핼ㅇ사가 불시착을 하는데 살아날 가망성이 없으니 모래톱을 파서 시체가 들어갈 무덤을 준비하며 조난당해 죽는 죽음을 준비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질문을 한다. 너만 죽는 건 아니야. 너의 소식을 기다리는 가족들도 조난자야.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자살하지 않았다.

<대상을 객관화하는 존재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자 왕따 면해>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인간관계가 되지 않는다. 공감, 동정 모두 좋은 품성이지만,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ㄷ.ㅏ 물질적 도움은 되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선 ‘내가 가여운 입장에 있구나’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잔인한 것이다. 그래서 동정하고 동정 받는 관계는 대칭적 관계가 되지 못한다.

근대 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사회적 윤리, 똘레랑스가 바로 그것이다.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똘레랑스라는 프랑스 중심의 근대적 사고가 돋라한 문화가 그 정도이다. 감옥에서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공감과 애저에서 머물러서는 안되고, 관용으로 자기 변화가 이어져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인간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살아갈 환경과 처지까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드럽게 하는 것이 그의 관계론이다. 머리에서 가슴, 더 나아가 발까지 가야 사람과의 관계가 잘 맺어질 수 있다.

 

그는 ‘여럿이 함께’ 하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는 말을 했다.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건축적 의지를 허물고 우리들의 역량만큼 만들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단다. 앞으로의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전적으로 신뢰하고 여럿이 함께 가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의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늘 제가 이야기를 하는 입장이었거든요. 사실, 이야기하고 듣고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구도는 누군가 아는 사람이 누군가 모르는 사람에게 깨우쳐주는 구도는 없습니다. 모르는 건 아무리 얘기해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아는 이야기는 내가 겪은 사진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앨범에 비슷한 사진을 뽑아서 보시면 됩니다.’ 모두 아는 이야기라는 거죠. 감옥만 감옥이 아니라, 처하고 있는 상황은 비슷합니다. 내가 보여드리는 그림,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림이 공감하는 거에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요. 작은 약속도 하고요. 그게 바로 이런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살아가는 삶의 골목에서 작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노력을 지금부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정재승이 만난 사람들 - 성공회대 석좌교수 신영복> 전문

hhttp://inmun.yes24.com/articles/commonview/10?articleNo=120&sortgb=0&pageNumber=1

 

저자가 매력적이다. 눈물이 났다. 20년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했다. 특히 자살하지 않은 이유로 햇빛과 가족, 친구, 형제라고 했는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나를 돌아봤다. 내가 힘들 때 타인이 같이 힘들어해주면 나는 늘 속으로 타인이 나의 어려움을 어떻게 알아, 그저 하는 소리겠지 했다. 그런데 신영복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생각하는 ‘관계’에 대해,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정을 주는 관계에서 벗어나 깊고, 오래되고, 진한 정을 나누고 싶다. 신영복 교수님의 다른 책들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그의 책을 읽고 눈물 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가슴이 뭉클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을 내면서

p5 원래 교양 과목으로 개설되었을 뿐 아니라 고전 강의라기보다는 오늘날의 여러 가지 당면 과제를 고전을 통하여 재구성해보는 강의였습니다.

 

p6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서론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迂遠)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p16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p17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까지 하지요. 이러저러한 이유로 근본적 담론 자체가 실종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8 나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한 달에 세권까지 가능했음)

 

국어사전 290쪽

p19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 봉건 사회, 일제 식민지 사회, 전쟁, 북한 사회주의 사회, 20여 년의 감옥 사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살아오신 분입니다.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의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 선생님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켰던 해방 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p20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 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화두(話頭)와 ‘오래된 미래’

p21 5천 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명이 세계에는 없습니다. 이집트만 하더라도 고대 문자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해독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 고대 문헌은 마치 현대 문헌처럼 친숙하게 읽히고 있습니다. 전승과 해독에 있어서 세계 유일의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지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p22 이 시기는 흔히 축의 시대(axial era)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의 백화제방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3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전제하고 그 모델을 현재와 현실 속에 실현하려고 하는 소위 건축 의지가 바야흐로 해체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지적 상황입니다. 설계 도면을 파기하는 것이지요. 모델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실천을 받아오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교조적이거나 관념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해서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p24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입니다. 작은 거인이나 점보 새우와 같은 모순된 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

 

천지현황과 I am a dog

p25 그러나 고전 강독에서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고전으로부터 당대 사회의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모색이 담론의 중심이 됩니다.

 

p26 서당에서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록지대자야’(麋鹿之大者也)가 그 한 예입니다. 미록지대자야란, 미麋는 사슴 중의 큰놈이다라는 뜻이지요. 미는 ‘큰사슴 미’ 자거든요. 당연히 麋, 鹿之, 大者也라고 띄어 읽어야 맞지요. 그런데 아침에 책방 도령의 글 읽는 소리를 듣자니 麋鹿, 之大, 者也로 읽더라는 겁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책방 도령의 읽는 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麋, 鹿之, 大者也로 바르게 끊어 읽더라는 것이지요. 스스로 깨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걸려서 그제야 깨닫는 그런 비능률적인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매우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p27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밝녀하기만 하면 어학은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원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차이에서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p27 사상은 시간적인 존재 형식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존재 형식도 갖습니다.

 

p28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논리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고전 독법의 참여점(Entry point)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p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p35 동양 사상이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은 베버가 옳게 지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주의를 현세적 향락과 체면의 문화로 규정하고 있는 논리적 무리인 것이지요.

 

동양사상은 비종교적이고 현실주의적입니다.

 

p36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면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辵)과 수(首)의 회의(會意)문자(文字)입니다. 착(辵)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p37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서양의 철학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이 조각은 턱을 고이고 앉아서 묵상하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묵상적인 자세가 상징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p39 경기도 이천의 도자기 마을에서는 도자기가 익고 난 다음 가마를 열면 맨 먼저 도공이 망치를 들고 들어가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모조리 깨트린다고 합니다. 열을 잘못 받아서 변색이 되었거나 비뚤어진 것은 가차 없이 망치로 깨트리는 거지요. 예술가 특유의 고집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문에 쌓이는 도자기 파편으로 산천이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그릇이 진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생성의 질서가 깨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진흙이 그릇이 되고 그릇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릇이 그릇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즉 자기를 고집한다면 생성 체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p41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는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 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논어』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인(仁)은 기본적으로 인(人)+인(人) 즉 이인(二人)의 의미입니다. 즉 인간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人間), 즉 인(人)과 인(人)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혹시 여러분 중에 간(間)에다 초점을 두는 ‘사이존재’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존재에 중심을 두는 개념입니다. 동양적 구성원리로서의 관계론에서는 ‘관계가 존재’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이존재’와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p42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을 인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에서 인간은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 동시에 전체입니다.

 

모순의 조화와 균형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2 오래된 시(詩)와 언(言)

인류의 정신사는 어느 시대에나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모색해가게 마련입니다. 농본 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노인들의 지혜와 희생이 역사의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p52 『시경』은 동양고전의 입문입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國風)에 줌고합니다. 『시경』의 국풍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53 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

기다리는 임은 오시지 않고 그립기가 아침을 굶은 듯 간절하구나.

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

저기 기다리는 님 오시는구나.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으셨구나.

방어 꼬리 붉고 정치는 불타는 듯 가혹하다.

비록 불타는 듯 가혹하더라도 부모가 바로 가까이에 계시는구려.

-「강둑에서」, 『시경』

 

p54 먼저 시국에 대한 인식입니다. 방어의 꼬리가 붉다는 것은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방어는 피로하면 꼬리가 붉어진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왜 피로한지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어쨌든 방어는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왕실여훼(王室如燬)’란 정치가 매우 어지럽다는 뜻이지요. 전쟁과 정변이 잦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왕실이 불타는 듯 어지럽더라도 그러한 전쟁이나 정쟁에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지요. 관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부모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근심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내의 논리지요. 소박한 민중의 삶이며 소망입니다.

 

p55 비 개인 긴 강둑에 풀빛 더욱 새로운데

남포에는 이별의 슬픈 노래 그칠 날 없구나.

대동강물 언제나 마르랴

해마다 이별의 눈물 물결 위에 뿌리는데.

- 정지상의 「송인(送人)」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p56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사회의 애환은 무엇일까? 그것이 나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 되어 있는가?

 

p57 나에게 모과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뜻 깊은 만남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변함없는 우정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오얏을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라오.

-「모과」

 

이 시는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기린 시라 하였으나 완벽한 연애시라 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남녀간의 애정 표시로 과일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p58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p59 척피호혜 첨망부혜 부왈 차여자 행역숙야무이 상신전재 유래무지

척피기혜 첨망모혜 모왈 차여게 행역숙야무매 상신전재 유래무기

척피기혜 첨망형혜 형왈 차여제 행역숙야필해 상신전재 유래무사

-魏風, 「척호(陟岵)」, 『시경』

 

p59~60 고향을 떠난 삶이란 뿌리가 뽑힌 삶이지요. 나는 사람도 한 그루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의 정서는 3천 년을 사이에 둔 아득한 엣날의 정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산에 올라 아버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아버님 말씀일 들리는 듯.

오! 내 아들아. 밤낮으로 쉴 새도 없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머물리 말고 돌아오너라.

산에 올라 어머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어머님 말씀일 들리는 듯.

오! 우리 막내야 밤낮으로 잠도 못 자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버림받지 말고 돌아오너라.

산에 올라 형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형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내 동생아. 밤이나 낮이나 집단행동 하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너라. -「산에 올라」

 

p61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魂)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p62 공자도 그 나라의 노래를 들으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다고 하였지요. ‘악(樂)여(與)정(政)통(通)’이라는 것이지요. 음악과 정치는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p62~63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 초부립’을 대구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p65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가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정호승의 시 <종이학>이 있습니다. 비에 젖은 종이는 내려놓고 학만 날아간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길러야 하는 것이지요.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은 무서운 규제 장치입니다

p68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기록은 물론 자연에 대한 기록에서 시작합니다만 이러한 문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발전합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p70 군자는 무일(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p71 무일편은 주공의 사상이나 주나라 시대의 정서를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편을 통해 가색의 어려움, 즉 농사일이라는 노동 체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산 노동과 유리된 신세대 문화의 비생산적 정서와 소비주의를 재조명하는 예시문으로 읽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p72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p74 주공은 일반삼토, 일목삼착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밷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 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p75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러나 그대로 반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역 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초사>>의 낭만과 자유

p78 <<시경>>의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 세계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p80 유배되어 초췌한 몰골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 굴원에게 어부가 유배당한 이유를 묻습니다. 굴원이 밝힌 유배의 이유는 다소 엉뚱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다 부패했는데 자기 혼자만 깨끗했기 때문에 추방당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맑은 정신이어서 추방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굴원이 자신의 결백함과 정치적 정당성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81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p82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여우언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타비적 협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것이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 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p83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왔끼 때문입니다.

p84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3 <<주역>>의 관계론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그릇이 집집마다 있었지요. 여러분도 물 긷는 그릇을 한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서로 비슷한 그릇들을 가지고 잇을 것입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물 긷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지만 또 안경이라고도 할 수 잇습니다. 물사과 현상을 그러한 틀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역>>은 동양적 사고의 보편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닷물을 뜨는 그릇

p87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라면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 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p89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經과 전傳

p92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효爻와 괘卦

p93 나는 여러분이 효와 괘를 이러한 사물 또는 사물의 변화를 담지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주역>> 읽기의 기초 개념

위位와 응應

p101 자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 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p103 나는 물론 중간을 매우 선호하는 편입니다만 그 선호하는 이유가 무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햐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죽간의 가쭉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p107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지천태

p110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 구조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억압당한 역량을 해방하고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줍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잠재적인 역량을 해방하는 일입니다.

p111 띠풀을 뽑듯이 함께 가야 길하다.

띠풀을 뽑듯이 떨기로 가야 길하다는 뜻입니다. 띠풀은 잔디나 고구마처럼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풀입니다.한 포기를 뽑으려 하면 연결되어 있는 줄기가 함께 뽑힙니다.모든 시 은 ‘여럿이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국가의 창건이든, 회사 설립이든, 또는 전위 조직의 건설이든 많은 사람들의 중의를 결집해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p113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이리라.

되돌아 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이것은 천지의 법칙이다.

p116 동료를 경계하지 않고 진실로 결속해야 하고 이해관계로 결속하기 보다는 초기의 이념적 목표를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 등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비

p119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p122 비단 감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을 먹지 않고 씨 과실로 남기지요.

p123 가장이 어려울 때 좋은 아내가 생각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수미제

p127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응, 즉 인간관계를 디딤돌로 하여 재기하는 것이지요. 작은 실수가 있고, 끝남이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 등등을 우리는 이 단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p129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매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새악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p130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131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마으이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p133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라는 사실입니다.공 의 사상이 자서주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거산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공자의 인 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에 대한 담론이든 민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그 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춘추전국시대

배움과 벗

p142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학습은 그 자체가 기쁨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의 학습이 적어도 수능 시험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노예제 사회에서는 학습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학습에 대한 언급이 <<논어>> 첫 구절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 변동기임을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p144 어쨌든 ‘학이시습지’의 습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時)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옛것과 새로운 것

p147 우리는 흔히 과거란 흘러가 버린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과거는 추억의 시작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몇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분의 주인공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아픔 때문에 다시 고통받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등불처럼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옛 친구를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나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허약하고 잘못된 것이지요.

 

그릇이 되지 말아야

p150 君子不器 - 「위정(爲政)」

이 구절의 의미는 대단히 분명합니다. 여러 주(註)에서 부연 설명하고 있듯이 그릇이란 각기 그 용도가 정해져서 서로 통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p151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ㅇ르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자본가는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기를 철저하게 거부해왔던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p153 법은 최소한의 도덕입니다. 따라서 법에서 적극적 가치를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덕치주의는 법치주의에 비해 보다 근본적인 관점, 즉 인간의 삶과 그 삶의 내용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154~155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156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p157 얼굴 생김새가 미인이기 때문에 호감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람의 사상이 인간적인 매력이 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미인론의 일환으로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소와 예와 인간관계에 관한 논의입니다.

 

p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으 ㄴ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공존과 평화

p160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p163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p165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미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p166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는 이웃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 선생이 『상서』의 한 구절인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의 뜻은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것으로 미모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하고 건강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p168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

p170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 군사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를 버려라”. “만약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는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p172 번지가 인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이다.” 이어서 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란 지인이다.”

 

p174 모든 지식은 사람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는 법입니다. 문제는 타인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한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p175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정직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

p176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p17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빈천의 역사를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 일입니다.

 

p178 과거 청산은커녕 과거가 은폐되고 있는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지요. 그 과정과 역사는 완벽하게 망각되고 오로지 그 결과만을 바라보게 하는 사회를 살고 있지요.

 

이론과 실천의 통일

p179 글자의 구성도 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

 

p181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이론을 이끌어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현장 활동가들은 대단히 완고합니다. 자기 경험만을 고집합니다. 생산직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인(匠人)적인 자존심으로 자기 방식을 고집합니다. 경험적 지식은 매우 완고합니다. 따라서 경험주의를 주관주의라고 합니다.

 

p182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83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p185 사람이란 지혜롭기보다는 어리석기가 어렵습니다. 지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숨기고 어리석은 척하기가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p186 우리는 지(知)와 우(愚)에 대하여 보다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우가 그냥 우가 아니라 대지를 품고 있는 우라고 했습니다만, 사실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야말로 지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p188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p188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p189 학생이란 위치 즉 교단 아래에 턱 괴고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는 선생의 일거수일투족 너무나 잘 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집단적 타자인 대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p190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p191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p193 고대 사상을 오늘의 시제에서 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서 어떠한 의미로 진술된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사상은 역사적 산물입니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묻히는 것이지요. 당시의 가치, 당시의 언어로 읽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입니다.

 

광고 카피의 약속

p195 그 언어를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을 떨어트려놓아 아쉬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지요.

 

p198 형식을 먼저 대면하고 내용은 결국 만나지 못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p200 지에서 호로, 호에서 낙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p201 그러나 지자와 인자 그리고 물과 산이라는 개념은 우리들의 인간 이해에 대단히 깊이 있는 관점을 제공해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공자의 모습

p203 흔히 『논어』가 갖는 최대의 매력은 그 속에 공자의 인간적 풍모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p204 공자의 인간적 면모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의 묘비명이나 예찬문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의 반대자의 견해를 통하여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지요.

 

p207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5 맹자의 의義

궁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활 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두 발을 딛는 자세와 어깨와 팔의 각도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과정과 자세의 정진 여부가 중, 부중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p212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15 단 한 권의 고전을 택하려고 하는 경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단연 <<맹자>>가 천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 p214~215 참고)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p217 맹자의 민본 사상이 표명되어 있는 장은 여민락장與民樂章이다.

(한 국가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그 다음이 사직이며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에 들게 되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에 들게 되면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무도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그를 몰아내고 현군을 세운다. 그리고 좋은 제물로 정해진 시기에 제사를 올렸는데도 한발이나 홍수의 재해가 발생한다면 사직단과 담을 헐어버리고 다시 세운다.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테면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p218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뵈었을 때, 왕은 연못가에 서서 고니와 사슴 등 갖가지 새들과 짐승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현자들도 이런 것들을 즐깁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현자라야만 이런 것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현자가 아니면 비록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즐길 수 없습니다.

p219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p221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전쟁을 할 때,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칼날이 부딪치면 갑옷을 벗어던지고 무기를 끌면서 달아나는 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백 보를 달아나 멈춘 자도 있고, 오십 보를 달아나서 멈춘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십 보 달아난 자가 백 보 달아난 자를 보고 겁쟁이라 비웃는다면 어떻습니까?

왕이 대답했습니다.

“안 되지요. 백 보는 아니지만 그 역시 달아나기는 마찬가지지요.”

맹자가 말했습니다.

“왕께서 그러한 이치를 아신다면 왕의 백성들이 이웃 나라 백성들 보다 더 많아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농사철을 놓치지 않으면 곡식은 먹고도 남음이 있으며, 촘촘한 그물로 치어까지 잡아버리지 않는다면 물고기는 먹고도 남을 만큼 많아질 것입니다. (봄여름같이) 초목이 자라는 시기에 벌목을 삼가면 목재는 쓰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곡식과 물고기와 목재가 여유 있으면 백성들은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에 아무런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 유감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왕도 정치의 시작입니다. 다섯 묘 넓이의 집 안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친다면 쉰 살이 넘은 노인들이 따뜻한 비단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닭, 돼지, 개 등의 가축을 기르게 하여 (새끼나 새끼 밴 어미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여) 그 때를 잃지 않게 한다면 일흔이 넘은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한 집마다 논밭 백 묘씩 나누어주고 (전쟁 등으로)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다면 한 가족 몇 식구가 굶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교육을 엄격히 하고 효도와 공경의 도리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준다면 (젊은 사람들이 물건을 대신 들어주기 때문에) 반백이 된 노인들이 물건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노인들이 따뜻한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서도 천하의 왕이 될 수 없었던 자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풍년이 들어 곡식이 흔한 해에는 개와 돼지가 사람들의 양식을 먹고 있는데도 나라에서는 이를 거두어 저장할 줄 모르고, 흉년에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뒹굴고 있어도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할 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이것은 내 탓이 아니라 흉년 탓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이는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칼이 죽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왕께서 죄를 흉년 탓으로 돌리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모든 백성들은 왕에게로 귀의해올 것입니다.”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

p225 성선설의 요지는 모든 사람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우물에 빠지는 어린아이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p228 사실 나는 사회 원리로서는 측은지심보다는 수오지심이 더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측은지심은 인간 이해와 관련된 정서라 할 수 있고 수오지심은 즉 부끄러움은 인간관계 즉 사회 문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살 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

p229 맹자가 말하였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불인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화살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갑옷이 화살에 뚫려서) 사람이 상할까 봐 걱정한다. 무당과 장인도 역시 그러하다 (무당은 당시 의사였기 때문에 사람의 병이 낫지 않을까 걱정하고, 장인은 관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지 않아서 관이 팔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므로 기술의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仁에 거居하는 것이 아름답다. 스스로 택해서 인에 거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p231 인을 행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며, 무례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 남의 부림을 받으면서 남의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마치 활 만드는 사람이 활 만드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같고, 화살 만드는 사람이 화살 만드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열심히 인을 행하는 것만 못하다. 인이라는 것은 활 쏘는 것과 같다. 활을 쏠 때는 자세를 바르게 한 후에 쏘는 법이다.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과녁에 맞지 않은 까닭을)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p232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反求諸己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p233~234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p236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측은함으로 말하자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p239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p240~241 자본주의 사회란 사회의 일반적 부문에 있어서의 인간관계가 일회적인 화폐 관계로 획일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일회적 화폐 관계가 전면화되고 있는 인간관계는 사실상 인간관계가 황폐화된 상태이며, 인간관계가 소멸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타자화되어 있는 상태이며 ‘불인인지심’이 원척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지요.

p241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깍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합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들려준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보았지요. 물론 잘 아는 젊은이였지요.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들의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참으로 충격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모스크바의 지하철이건 서울의 지하철이건 젊은이들이 만들지는 않았찌요. 노인들이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똑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모스크바의 젊은이와 서울의 젊은이가 판이한 대답을 하는 까닭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똑같은 사실관계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는 까닭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p242 모스크바의 젊은이와 판이한 우리나라 젊은이의 대답은 인간관계가 세대 간에 어떻게 단절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대 간의 관계가 그만큼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는 종횡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p243 <<맹자>> 7편 중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p245 일월이 모든 틈새를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는 학과라고 할 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p248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p249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맹자는 참으로 명쾌하고도 단호하게 답변하여 군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인仁을 짓밟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짓밟는 자를 잔殘이라 합니다. 잔적殘賊한 자는 일개 사내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일개 사내일 뿐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6 노자의 도와 자연

진정한 연대란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하방 연대입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입니다. 노동, 교육, 농민, 환경, 의료, 시민 등 각 부문 운동이 각자의 존재성을 키우려는 존재론적 의지 대신에 보다 약하고 뒤처진 부문과 연대해 나가는 하방 연대 방식이 역량의 진정한 결집 방법이라고 생각하지요. 중소 기업, 하청 기업, 비정규직, 여성, 해고자, 농민, 빈민 등 노자의 물처럼 낮은 곳을 지향하는 연대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방 연대에는 보다 진보적인 역량이 덜 진보적인 역량과 연대하는 것도 포합됩니다. 덜 진보적인 역량은 더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대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만 이러한 연대 담론에 있어서 노자의 생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도道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p253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이 노장 老莊 사상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지배 담론과 비판 담론이 일정한 길항 구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 進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p254 제도와 문화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생성과 변화 발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언어와 인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철저하리만큼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인간과 문화와 자연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깨트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25장)의 논리가 그것이지요. 여기서 법法은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p255 인위적 규제는 이러한 질서를 거역하는 거세 지나지 않습니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구간에 묶어두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인의예지와 같은 도덕적 가치는 인위적 재앙으로 보는 것이지요.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 의지 建築意志에 대한 비판입니다.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해채론이며 바로 이 점이 노자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부국강병이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부문의 자생력을 길러내고 꽃피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장기적인 재생산성을 법가에게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었지요.

p256 진한 이후의 제도 폭력이 지배하는 역사적 조건에서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저항적 지반이 광범하게 형성된 것은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할 것과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노자의 반문화 사상이 지배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자기 잡게 됩니다.

노자가 보이지 않는 <<노자>>

p260 왕필의 노자주가 지금까지 <<노자>> 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p261 무를 본으로 삼고 유를 말로 삼는 귀무론이 <<노자>>독법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왕필의 노자주가 <<노자>>를 가장 정확하게 읽고 있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되 도가 아닙니다

p263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

p263 상常, 욕欲, 묘妙, 요 등의 의미를 분명하게 한 다음 전체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읽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 장의 핵심적인 개념은 무와 유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는 선언입니다. 제 1장의 핵심 개념은 무와 유이고 그것이 같은 것이라는 선언이지요. 그러므로 ‘무無는 천지지시를 이름 함이며 유有는 만물지모를 이름 함이다”가 올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264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무와 무명은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유와 유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명을 붙여서 읽거나 무명을 이름 붙이기 전으로 해석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섣부른 절충도 피해야겠지만 지나치게 차이에 주목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못 됩니다. 논의의 핵심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지요.

p269 도道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반적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 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p269~270 우리가 제1장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도의 세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임은 물론이며,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1장에서 노자는 개념적 사유, 즉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분에 대한 인식이며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일 뿐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무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동체이며 통일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p270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p270~271 도는 천지 만물의 생성과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노자의 철학적 체계입니다.

인위는 거짓입니다

p272 <제2장> 이 장은 상대주의의 선언이며, 이 장의 핵심 개념은 무위입니다.

널리 알려진 미를 미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혐오스러운 것이다.

널리 알려진 선을 선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p272~273 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p274 인위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위’僞는 인人+위爲입니다. 거짓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개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곤충으로 분류하는 것이지요. 그 인식에 있어서 자연을 왜곡하여 거짓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산을 깎고 물을 막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그 실천에 있어서 자연의 운동 법칙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위와 작위 그 자체가 바로 거짓인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거짓인 셈이지요.

p276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功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p277 결론적으로 <<노자>> 제2장은 인식론이며 실천론입니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를 반성하고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선악의 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OX식의 이분법적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저급한 인식을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유무有無, 난이難易, 고저高低, 장단長短은 비교할 것이 아니지요. 굳이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요. 더구나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뼈를 튼튼히 해야

p278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해야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도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하게 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할ㄴ다.

무위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면 혼란이 있을 리 없다.

p280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학입니다. 한 사회의 물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근감임은 물론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p282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옷처럼 만물을 감싸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혼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천하는 무사로써 얻을 수 있으며, 감히 천하를 앞지르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p282~283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생선의 비유는 일상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소위 국가와 사회를 경영하는 방식을 반성할 수 있는 정문일침의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p283 <<노자>> 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입니다. 혼란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과 피세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것이란 점이 다를 뿐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p284 제8장.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 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어쨌든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목표 설정에 무리가 있거나 아니면 그 경로의 선택이나 진행 방식에 무리가 있는 경우에 다투게 됩니다.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무리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지요. 쟁이란 그런 점에서 위의 다른 표현이고 작위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 되는 것을 노자는 ‘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에는 ‘전국위상 파국차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라를 깨트려서 이기는 것은 최선이 못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전국, 즉 나라를 온전히 하여 취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뜻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작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85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나는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대단히 풍부한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288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은 물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낙수가 댓돌을 뚫는 이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쉬지 않고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다수여야 합니다. 양적으로 우세해야 합니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의 원리입니다. 불벌중책, 많은 사람이 범한 잘못은 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지요.

p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처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빔이 쓰임이 됩니다

p292 제11장.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에만 눈을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숨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즉 유의 배후로서의 무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찻잔 한 개를 고를 때 무엇을 보고 고르지요? 모양이나 질감, 색상, 무늬를 보고 고릅니다. 말하자면 유를 보고 고르는 셈이지요.

p293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의 있음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p294 없는 듯이 있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잇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하지요.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우리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이 장을 읽을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스스로 신뢰하도록

p295 제17장.

p297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인 셈이지요.

p298 노자의 자연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가진 자연이 아닙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so’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며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백성들의 삶은 한강이나 북한산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수많은 세월을 겪어온 것입니다. 장구한 역사를 겪어온 가장 자연스러운 가치와 질서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존중해야 하고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노자의 도이고 노자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p299 제45장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듯 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p300 돈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는 별로 없는 듯이 차리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헙수룩하게 차려입어도 개의치 않지요. 많이 아는 사람도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지요. 의상의 경우에 대성의 경지, 즉 최고의 완성도는 잘 모르기는 하지만 아마 정장 차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자유롭고 헐렁한 코디네이션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필은 “사물에 맞춰서 채우되 아끼거나 자랑하지 않으므로 비어 있는 듯하다”고 주를 달아놓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p301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맷돌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 세계의 소통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연상 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히 의미의 소통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p302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p303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많은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옮겨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놓을 필요가 없다. 밳어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며 풍속을 즐거워한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하지 않는다.

제 80장.

p304 노자 사상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동動보다는 정靜을, 만滿 보다는 허虛를, 교巧 보다는 졸拙을, 웅雄보다는 자雌를, 그리고 진進보다는 귀歸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데 있습니다.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노자 사상은 장자, 열자 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 측에서도 <<노자>>를 계속 읽고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7 장자의 소요

고기를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견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p309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외편 <추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물 아 ㄴ개구리는 장자가 당시의 제자백가들을 일컫는 비유입니다. 교조에 묶인 굽은 선비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합니다.

p310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 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수많은 담론의 와중에서 우리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결국 패권 경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장자>> 독법의 핵심적 과제라고 생각하지요.

p311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p316 루쉰의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장자 사상이 권력에 봉사한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원요오디었을 뿐이며 <<장자>>는 권력 그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사상으로 평가됩니다. 특히 유묵의 천명 사상이나 천지론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장자 사상은 반체제적인 부정 철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체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체제 부정의 해방론이라는 평가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p317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318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p320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반 생명적인, 반자연적인 그리고 반인간적인 모든 구축적 질서를 해체하려는 것이 장자 사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신의 자유입니다.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

p321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적 관점에 서면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에서만 본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여 이것을 (혜시는) ‘저것과 이것의 모순 이론’이라고 하는 거시다. 생과 사, 사와 생 그리고 가와 불가, 불가와 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는) 모순 관계에 있다. 가가 있기에 불가가 있고 불가가 있기에 가가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입니다

p325 ‘포정해우’의 이야기는 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도에 관한 이야기임은 물론입니다. 장자 사상의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평가됩니다.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것을 체득하고 있는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p326 생각건대 인의가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입니다.

소와 말의 발이 네 개 있는 것 이것이 천天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인人이다.

“그러므로 인위로써 자연을 멸하지 말며, 고의로써 천성을 멸하지 말며, 명리로써 천성의 덕을 잃지 말라. 이를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일러 천진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라 한다.”

p327~328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술독을 안고 노래했다는 일화가 수긍이 갑니다. 인간의 상대적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개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p329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p330 기계에 대한 장자의 주장은 근대성에 대한 반성적 의미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331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p332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p333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자가 우려햇던 당시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p334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만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땜누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모르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p334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p335 이 구절의 진의는 다름 아닌 각성입니다. 엄정한 자기 성철입니다. 천하가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불치병자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고 자식만이라도 자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참담할 정도로 가슴을 적십니다. 엄중한 자기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누구보다도 ‘선생’들이 읽어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선생들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배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지요. 자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거나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을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미혹을 반성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한 사회, 한 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 그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답습할까 봐 부단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회 발전은 그러한 경로를 거치는 것이지요.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p337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 (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책의 한계에 관해서 이보다 더 명쾌한 비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p338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과 색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과 성일 뿐이다.

쓸모없는 나무와 울지 못하는 거위

p338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p339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쓸모가 있으면 천수를 다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쓸모가 없으면 취직이 안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재材와 부재에 대한 현실적 고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자가 제기한 재와 부재의 논의는 이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가 중간에 서겠다고 한 것은 중간 지점인 절충의 자리에 서겠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간도 사실은 도와 비슷하지만 도는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 장자의 결론입니다.

p340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어야 하고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능력과 경쟁력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조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각성이 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342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빈 배

p343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p343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나비 꿈

p344 어느 날 자웆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얼 물화라 한다.

p345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장자가 꾸는 꿈이며 둘째는 나비가 꾸는 꿈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9만 리 장공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 개별적 사물과 그 개별적 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깨달음이 바로 ‘제물론’입니다.

p347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돈과 일곱구멍

p349 유명한 ‘혼돈칠규’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날마다 구멍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체적인 전체를 분하고 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체적 연관이 소멸되고 남는 것은 분별지와 분별상이며, 개아로서의 존재들입니다.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참다운 지식

p350 지식이란 의거하는 표준이 있은 연후에 그 정당성이 검증되는 법인데 (문제는) 그 의거해야 하는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p351 지식이란 한마디로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명名입니다. 그 명의 실체가 되고 있는 실實과 비교하여 명실名實이 부합할 때에 지식은 합당한 것이 됩니다.

p353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입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입니다.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며,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知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仁입니다.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p355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제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p356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패권적 질서와 지배 계층의 사상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 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층 민중의 이상을 처음으로 제시하였습니다. 투철한 신념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대중 속에서 설교하고 검소한 모범을 보였으며,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묵자가 죽은 후에도 200여년 동안 여전히 세력을 떨쳤지만 그 후 2천 년이라는 긴 망각의 시대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묵가는 좌파 사상의 좌파 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준 역설적인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됩니다

p362 사상은 자각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자각적이라는 의미는 개인을 그 사상의 담당자로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의 개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인으로서의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상의 담당자로서의 개인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각적 체계로서의 사상과 그 사상의 담당자로서의 개인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기보다는 사상의 사회적 존재 양식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으로서의 묵자와 순자, 한비자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요. 사상은 개인에 앞서서 반드시 ‘사상적 과제’가 먼저 존재합니다. ‘누구의’ 사상이기에 앞서 반드시 ‘무엇’에 관한 사상이게 마련입니다.

p363 사상이란 일정한 사회적 조건에서 생성되는 것이지만 그 사회적 조건이 변화하면 사상돠 사상사의 장으로 물러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상을 사회 역사 속에 해소시킬 수 없는 이유가 방금 이야기한 그 자각적 체계 때문입니다.

묵자의 검은 얼굴

p364 첫째로 하층민의 이미지입니다. ‘묵’墨이란 우리말로 먹입니다만, 묵자의 묵은 죄인의 이마에 먹으로 자자刺字하는 묵형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가란 형벌을 받은 죄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p365 둘째로는 근검 절용하며 실천궁행하는 모습입니다. 검소한 실천가의 모습입니다.

p366 맹자에 따르면 “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천 년 만에 복권된 <<묵자>>

p370 묵자는 겸애兼愛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交利라는 상생相生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連帶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p373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혼란의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p375 그렇다면 겸상애와 교리지법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묵자가 말하기를, 그것은 다른 나라를 자기 나라 보듯이 하고, 다른 가 보기를 자기 가 보듯이 하고, 다른 사람 보기를 자기 보듯이 해야 한다.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마라

p378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p379 단 한 줌의 의로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p382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워야?

p386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다. 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화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하다

p388 묵자의 소염론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은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면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p390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所用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생산 규ㅗ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큰 문제는 아니지요.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운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p391 묵가를 설명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뭊가 사상의 철학적 방법론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묵가의 조직과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묵자 사상의 철학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삼표’ 三表의 원문

p392 무엇을 삼표라고 하는가. ...... 본本, 원原, 용用이 그것이다. 어디에 다 본 할 것인가? 위로 옛 성왕의 일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어디에다 원할 것인가? 아래로 백성들의 이목을 살펴야 한다. 어디에다 용할 것인가? 나라의 법과 행정이 시행되어 그것이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합치하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를 소위 판단의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한다.

p392~393 묵자의 삼표는 첫째는 역사적 경험이며, 둘째는 현실성이며, 셋째는 민주성입니다.

p394 묵자의 이러한 사상이 바로 천지天志가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 이외의 어떤 것도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묵자의 비명 사상 非命思想입니다. 이 삼표론 역시 <비명>편에 있습니다. 비명이란 하늘이 정한 운명과 숙명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화복은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며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은나라와 하나라의 시를 인용하여 “천명이란 폭군이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묵자의 천은 인격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자의 도와 같은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상애상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형식으로 그의 사상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지요.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 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정통적 천인 도덕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자의 탁론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유가의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정통 유가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순자의 천론이고, 순자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천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과 인은 서로 감응하지 않는 별개의 존재입니다. 천은 자연이며 음양일 뿐입니다. 천은 천명, 천성, 천리가 도리 수 없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입니다.

하늘은 하늘일 뿐

p405 순자의 사상 영역도 물론 광범위합니다만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그의 법제 사상입니다. 그리고 성악설등 그것과 관련된 것에 한정하기로 하겠습니다.

p406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울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이 무슨 일이낙 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천지와 음양의 변화이며 드물게 나타나는 사물의 변화일 뿐이다. 괴상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두려울 것은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요순 같은 성군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걸주와 같은 폭군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르게 응하면 이롭고 어지럽게 응하면 흉할 뿐이다. 농사를 부지런히 하고 아껴 쓰면 하늘이 가난하게 할 수 없고, 기르고 비축하고 때맞추어 움직이면 하늘이 병들게 할 수 없으며, 도를 닦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p407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하여 겨울을 거두어가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이 먼 길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 넓이를 줄이는 법이 없다. 군자는 소인이 떠든다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땅에는 변함없는 규격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능동적 참여

p408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합니다. 천天이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천론은 당시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천문학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개인의 사상이란 크게 보아 사회적 성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지요.

p409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인문 세계의 창조와 관련하여 순자는 결국 유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순자가 비록 하늘을 물리적 천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결코 하늘을 단순화하거나 그 존재를 격하시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신비스러운 작용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p410 그렇기 때문에 학파는 결국 관점과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성악설의 이해와 오해

p413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과 예론, 제도론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p417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禮란 기르는 것이다

p418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p421 순자의 예론의 기본적 내용은 법과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 법과 제도가 안정적으로 작동케 하기 위해서 교육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도량과 분계가 안정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교육에 의하여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론입니다. 순자는 이미 사람은 예의와 분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할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매우 긍정적 인간관을 피력해두고 있습니다.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p422 나는 말한다.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을 받아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컴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단단히 구부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p424 쑥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함께 검어진다.

인간의 도덕성은 선천적인 것도 아니며 개인의 수양의 결과물도 아니며 오로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순자는 개량주의적 이기보다는 개혁주의적입니다.

p425 그에게 일관되고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사실입니다. 순자를 성악설의 주창자로만 알고 있던 우리들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울 정도의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보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에게서 훨씬 더 깊이 있는 인간주의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순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도와 인심입니다. 천도와 천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자의 도는 천지의 도가 아니라 사람의 도일 뿐입니다. 순자의 이론에는 또한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예와 악이 함께하는 까닭

p426 ‘완전한 예’란 마치 훌륭한 음악처럼 천지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악론의 핵심 내용입니다.

p427 <악론>

무릇 음악은 사람의 감정에 파고듦이 깊고, 사람을 감화시키는 속도가 빠르다. 그러므로 선왕이 형식을 신중히 하신 것이다. 음악이 조화롭고 평온하면 백성이 화락하되 질탕한 데로 흐르지 아니하고, 음악이 엄숙하고 장중하면 백성이 정직하여 어지럽지 아니하다.

음악이란 사람을 다스리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음악이란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이며, 화목하게 하는 것이며, 사람의 정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왕이 음악을 만든 것이다.

순자는 법과 제도적 통제가 가져올 폐단을 경계했던 것이지요. 나아가 사회의 질서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공감과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를 계승한 법가의 이론이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가 단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p428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10 법가와 천하 통일

우리가 법가 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과 법치주의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구사회의 종법 구조가 이완되고 보수적 저항성이 약화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공간을 충분히 향유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공간은 일차적으로 과거의 관념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미래사관과 변화사관이 그것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이 과거의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구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개념입니다. 법치주의는 이러한 개혁성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의 법치주의는 먼저 성문법의 제정과 신상필벌 원칙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발전입니다. 군주의 자의적 폭력에 대한 제도적 규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적 예측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p432 <오두>편의 한 구절

송나라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밭 가운데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토끼가 달리다가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후로 그는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토끼는 다시 얻지 못하고 송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지금 선왕의 정치로 오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 그루터기를 지키고 있는 부류와 같다.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수주대토’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 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 방식도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이라는 것이지요. 시대를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지요. 법가는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옥중에서 사약을 받은 한비자

p436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의 대표입니다.

p439 나는 법가의 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개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법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앙이 강조한 행제야천입니다. 법제를 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한 나라 약한 나라

p441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된다.

p444 법가는 법 지상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이 지상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공개성, 공정성 그리고 개혁성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 세가지의 내용은 법가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서로 통일되어 있는 하나의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고적 사관이 아닌 변화사관에 입각하여 낡은 틀을 허물고 새로운 잠재력을 조직해내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의 내용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그만큼 단호한 권력이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의 두 자루 칼

p446 임금이 신하를 제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수단(자루)이 있을 뿐이다. 두 가지 수단이란 형刑과 덕德이다. 형과 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덕이라 한다. 신하 된 자는 형벌을 두려워하고 상 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형과 덕을 행사하게 되면 뭇 신하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고 그 이로움에 귀의한다.

그런데 세상의 간신들은 그렇지 아니하다. 자기가 미워하는 자에게는 임금의 마음을 얻어서 즉 임금을 움직여서 죄를 덮어씌우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는 역시 임금의 마음을 얻어서 상을 준다. 상벌이 임금으로부터 나가지 않고 신하로부터 나가면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신하를 따르고 임금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임금이 형덕을 잃은 환란이 그와 같다. ....... 호랑이가 개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발톱과 이빨이 있기 대문이다. 만약 발톱과 이빨을 개에게 내어주어 그것을 쓰게 한다면 호랑이는 반대로 개에게 굴복당할 것이다.

p447 체體로서의 법과 그 체의 기반 위에서 용用으로서의 술術을 활용함으로써 군주가 세勢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한비자의 주장입니다. 법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고, 술은 신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라의 쇠망을 알려주는 일곱 가지 징표

p450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가 크다는 것은 공권력을 무시하는 권력 집단이 많다는 뜻입니다. 권력 집단이 어떤 분야의 어떠한 집단들인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대부의 영지가 크다는 것은 국가는 채무가 많고 기업이나 개인에게는 돈이 많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업 특히 금융 부문의 채무를 공적 자금으로 갚고 있는 것도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지요. 나라를 황폐하게 내버려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는 구절은 우리나라의 비주체적이고 비자립적인 구조를 지적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탁과 발, 책과 현실

p451 정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 발을 본뜨고 그것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 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을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p452 나로서는 나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뜻으로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차치리가 참 어리석고 우습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웃지 않았어요.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로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 바로 깨달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은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은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론 제자백가의 공리공담을 풍자하는 글입니다. 학문이나 이론의 비현실성과 관념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해서도 따가운 일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송나라 사람 예열에 관한 이야기도 같은 뜻입니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 부류

p454 이 구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유가와 협객입니다. 유가의 비현실적 공리공담과 협객의 불법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변설은 임금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협객의 불법적 행위는 법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것입니다. 법가로서는 마땅히 엄금해야 할 일입니다.

한비자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의 부류를 ‘오두지류’라 했습니다. 두란 큰 벌레를 뜻합니다. 첫째가 학자입니다. 이유는 선왕의 도를 빙자하고 인의를 빙자하며, 용모와 의복을 꾸며서 변설을 그럴듯하게 하며 법을 의심하게 하고 임금의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둘째가 언담자로서 세객입니다. 거짓으로 외력을 빌려 사복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대검자로서 위 예시문의 협객입니다. 국법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네번재는 근어자로서 임금의 측근입니다. 뇌물로 축재하며 권세가들의 청만 들어주고, 수고하는 사람들의 노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재는 상공지민을 들고 있습니다. 비뚤어진 그릇을 만들어, 즉 사치품을 만들어 농부의 이익을 앗아간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교사巧詐는 졸성拙誠보다 못한 법

p456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사상과 시대, 사상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그것의 분리가 바로 관념화의 과정이고 물신화의 과정입니다.

p457 교사가 졸성보다 못하다는 이 말의 뜻을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읽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더라도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나는 <<한비자>>의 이 한 구절만으로도 한비자는 매우 정직하고 우직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 문장은 뛰어났지만 말은 더듬었다는 기록도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p458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가를 위한 변명

p460 모든 사상은 다른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파란만장한 역사적 전개 과정의 일환으로 출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철학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제약해서는 안 되는 것이징. 그런 점에서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천하 통일과 이사

p464 이사는 기원전 221년, 진왕 정을 보좌하여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모든 권력을 군주에게 집중시키는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의 기틀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때까지의 사회 구조였던 봉건적 지방분권제도를 청산합니다. 군현제를 실시하고, 법령을 새로 개정했으며, 도량형 문자를 통일합니다.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의 통일을 꾀했던 일도 이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집니다.

p465 진의 통일과 이사를 이야기하면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방금 언급한 분서갱유입니다. 통일 직후 강력하게 추진되는 중앙집권적 개혁 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봉건제 복원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반동적 움직이에 대하여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사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분서갱유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야만적인 처사라고 비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기>>에 이사가 진언한 분서 관련 내용을 보면, 책을 불사르되 첫째로 박사관이 주관하는 서적은 제외했습니다. 그리고 의약 점복 종수 등 과학 기술 서적도 제외했습니다. 사관에게 명하여 진의 전적이 아닌 것은 태우고,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책을 거두어 태우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대규모의 분서는 항우가 함양궁을 불사를 때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분서의 규모가 아니라 분서의 이유입니다. 이사의 건의에는 다음과 같은 분서의 이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지금의 것은 배우지 않고 옛것만 배워 당세를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와서는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나가서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비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저잣거리에서 시서를 이야기하거나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를 모두 멸족시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중략)

11 강의를 마치며

불교 ․ 신유학 ․ 『대학』 ․ 『중용』 ․ 양명학

우리의 고전 독법은 관계론의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담론이었습니다. 이러한 담론은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주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p472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입니다.

 

p474 ‘불’은 붓다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깨닫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개닫는다는 뜻으로 읽는것이지요. 바로 연기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 한 개라도 그것이 서로 연고나되어 있다면 무한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개달음의 의미는 바로 이 연기의 구조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붓다가 설하는 법이 바로 이 연기의 세계를 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이지요.

 

p478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연기는 결과이며 나무는 원인입니다. 연기가 인연으로 생겨난 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인연으로 생겨난 과입니다.

 

도전과 응전

 

『대학』 독법

p487 『대학』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첫재 명덕을 밝히는 것, 둘째 백성을 친애하는 것, 셋째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세가지를 3강령이라합니다. 그리고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8조목입니다.

 

p492 『대학』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게에 대한 체계적인 논리입니다. 이러한 체계적 논리의 최상엔에 놓여 있는 것이 ‘명덕’입니다. 『대학』의 최고 강력은 명덕입니다.

 

p493~494 불교 철학이 모든 것을 꽃으로 승화시키는 뛰어난 화엄학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덧없이 만드는 무상의 철학인 것과 마찬가지로, 해체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거대한 집합표상을 해체하는 통절한 깨달음의 학이면서 동시에 개인을 탈사회화하고 단 하나의 감성적 코드에 매달리게 만드는 일탈과 도피의 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용』 독법

p496 천하에는 바른 도가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이 바른 도는 역사적 전통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검증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주자가 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중용>>에서도 일관된 통합적 사상 체계를 뼈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먼저 성과 도와 교의 통일입니다.

교는 도에, 도는 성에, 성은 천명이라고 하는 객관적 원리에 수렴되는 체계입니다. 개인은 거리낌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법칙과 그것과 통일되어 있는 유교적 원리에 의하여 사회화되어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천명, 즉 궁극적 원리인 도의 대원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라는 동중서의 주장을 들어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학에 대한 심학의 비판

p503 우리가 이 심론에서 긍정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은 바로 ‘주체적 실천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인식의 실천의 결과물이라면, 그리고 그 실천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목적의식적 해우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신유학에 대한 심학의 문제 제기는 매우 정당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고전 독법에서 문명 독법으로

p506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이 강의가 고전 독법을 관계론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점이 일관되게 관철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대단히 편의적인 관점으로 옳겨가기도 하고 실천적 과제와 유리되어 진행되기도 했다는 반성을 금치 못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 강의를 다시 재조명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검토와 재조명이 끊임없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바다에 이를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고전 독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독법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근대성을 반성하고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문명사적 과제와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시 부연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양산하는 물질의 낭비와 인간의 소외, 그리고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보다 근본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당면한 문명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슴에 두 손

p508 강의 중에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기억되지만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p509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510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입니다.

 

p514~515 탁타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이었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다.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3. 내가 저자라면

그가 말하길 요즘 청년들도 감옥 밖의 재소자가 아니냐고 했다. 우리도 갇혀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 했다. 미셸푸고가 『감시와 처벌』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서 인용했다. “감옥이란 밖에 있는 사람이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하게 하는 정치적 공간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다. 우리 시대의 청년들도 보이지 않는 감옥에 있는게 아닌가, 반문했다.

청년 실업, 비정규직, 빚진 대학생활 등 청년들이 겪고 있는 감옥이 이런 것들일까? 피상적 관계 속에서 마음 나눌 곳도 없이 올라가려는 희망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상태. 그의 책 『강의』는 청년들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알게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한 단어로 줄이자면 바로 ‘관계’이다. 관계에 관한 모든 내용을 잘 엮었다. 중요성, 방법, 근거 등 관계에 대한 고전 독법을 이야기 했다. 끝까지 한 줄기를 가지고 나가는 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강의가 더 길었다면 다른 동양 고전들도 넣었을 것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긴 했다. 더 길게 쓸 수 있었다면 저자의 매력적인 생각과 철학이 더 잘 담길 것 같다.

그의 사상, 실천적 지식을 한 손에 들고, 단숨에 읽었다는 것이 조금 미안하다. 더 오랜시간 음미하고, 돌아보고, 내 삶에 적용하고 싶다. 저자 조사를 통해 그를 알고, 그래서 책을 더 조용한 공간에서 천천히 읽으려고 애썼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러면 우선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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