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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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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6일 10시 55분 등록

강의

* 신영복 지음, 돌베개, 2004.12.13

1. ‘囹圄(영어)의 스승(저자에 대하여)

 

■ 신영복 (1941~)

 

2008년 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통해 그를 처음 만났다. 새로웠다. 그예 그를 잊지 못해 감동을 써 둔 글을 가져왔다. 이 책에서는 유난히 이 책에 대한 인용구가 많다. 그만큼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감사.JPG

 

무릎을 쳤다. 공감각과 철학과 물리학적 함의를 일합에 정렬시켜버리는, 그래서 가히 모국어의 속살에 다다른 그 표현의 벼락.

 20대 후반, 폭력적 군사문화에 대표적 희생양인 신영복 선생은 증거없는 범죄혐의를 받고 국가보안법에 의해 20년이 넘는 징역살이를 하면서 분노와 복수의 서슬퍼런 칼을 세우기도 했겠거니 생각했다. 왠걸 그는 차갑고 축축한 숨막히고 갑갑한 징역을 살며 '바람은 꽃들의 웃음'이라며 면벽수행자의 여유있는 웃음을 배우고 있었다.

 

그가 가족에게 절절한 심정으로 보냈던 엽서, 편지는 그 문체와 표현만으로도 우리시대의

고전이라도 좋을 만큼 사유의 심소에서 내 뿜는 정열이 이만저만한게 아니다. 책의 기획과 교정 그리고, 내용의 손질까지 도서기획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읽을 수 있었던 아버지와의 서신교환, 징역 사는 둘째 아들이 아픔으로 남아있는 어머니의 마음 위에 그대로 포개어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엽서, 이건 또 어떠랴 형수님과 계수님의 절절한 일상 속의 고민을 감옥의 생활과 대치시키며 한올 한올 풀어가던 그 현명함.

 

지면의 협소함과 시간의 촉박을 면벽수행하며 머리로 썼다 지우는 행위를 무한히 반복하여

단 한 글자의 수정 없이 벼락같이 써 내려간 엽서를 볼 때는 아예 그가 인간으로서의 품위보다는

수행자의 엄숙함을 지닌 연꽃 같은 선비의 향을 느낀다.  

 

나는 그의 품성이 그리워진다. 과거의 경험과 체험으로서 '그리워진다'는 동사는 비로소 성립될 수 있으되 나는 그에 대한 관념적 추체험으로 그의 품성이 그립다. 그의 글에서 모든 것이 진실이랄 수 없으나 그 마음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지점에서는 어느덧 이 사람이 나에게 많이 들어와 있구나 싶을 정도로, 길을 가다 만나면 그는 나를 모르되 내가 오래 그를 알았던 이유로 무례하게 악수를 청할 정도로, 그리워져 있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감옥과 사색이라는 전혀 상반의 단어가 이리도 어울리는가 싶을 정도다.

다소 비약인가? 그에게서 간디의 비폭력 저항이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독립이 느껴지는 건.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 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을 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출소 후,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를 역임하였고 2006년 말에 정년 퇴임하였다. 퇴임 당시 소주 포장에 들어가는 붓글씨를 그려주고 받은 1억 원을 모두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하였다.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을 하고 있다

 

육군 교관으로 장교였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된 후 충격을 받고 ',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마침내, 그 고뇌와 사색은 20년 내내 이어져 완전히 '인간성이 개조'되는 내적 자기혁명을 이루어 낸다. 신영복은 교장의 아들로 성장하여 민중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남다른 애착은 없었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밑바닥을 살아온 기층민중과 24시간을 맨 살을 부대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통해 자신이 지식청년으로서 가지고 있던 창백한 엘리트주의적 관념성과 '먹물성'을 통절히 비판하고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 감옥에서의 삶은 서로가 알몸으로 부대끼며 가식 없이 숨김없이 사는 탓에, 한 방에서 오래 살다 보니 서로의 과거와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번은 목수출신이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책이나 이론으로 배운 세계가 현실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인식 틀을 깨부순 것이다. 무엇보다 10여 년간 교도소에서 노동을 하면서 목공, 영선, 제화공, 재단사 등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인간 개조론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2]

 

특히, 감옥에서의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관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연하게 책에서나 보아온 분단과 전쟁의 피투성이 현대사의 이야기를 직접 이를 경험한 빨치산과 투사들을 통해 생생히 들음으로써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화석'처럼, 살아있는 역사체험을 한다. 또한, 한학자 출신의 사상장기수로부터 동양고전과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서구사상에 매몰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자존을 깨닫고 고전학습에 몰입한 나머지 이후 성공회대에서 동양철학도 강의할 수 있게 된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다. 이도 감옥에서 여러 장기수 선생으로부터 지도 받은 결과라 한다. 한문 서체로 익힌 필법은 한글에도 응용해 민중 정서에 맞게 민체, 연대체, 어깨동무체라는 글씨체를 창안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감옥 20년의 삶이 완전히 인생을 바꾼 진정한'나의 대학시절'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의 동무들은 그가 출소하자 ', 너 하나도 안 변했네'라고 감탄했다 한다. 그의 삶의 철학과 신념은 변함없이 "더불어 숲"을 이루는 것이었기에.

 

2. ‘강의(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 책을 내면서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6)

 

Ü E.H carr가 이야기한 역사의 정의,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에 저자는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을 더했다.

 

서론

 

□ 그러나 유년 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p. 16)

 

□ 이른바 근대기획이 우리 사회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미국 문화와 유럽 문화를 다투어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치장하려고 하였지요. (p. 16)

 

Ü 영혼 없는 모방, 비판 없는 모방

 

□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켰던 해방 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p. 19)

 

Ü 역사의 곡절은 여기서 한번 심하게 꺾였다. 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들이 청산을 위한 입법의 주체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반민특위의 해체 과정에서 벌어졌다. 이에 대하여서는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가 한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어서 다소 길지만 아래에 인용한다.

 

‘1949년 반민특위 활동의 실패 이후 아직 한국에서 제대로 과거 친일파 처벌과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벌어진 각종 국가폭력의 피해와 의문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 등 과거청산 작업을 수행해 보지 못했다. 물론 90년대 들어서 관련 피해자와 사회운동 단체들이 줄기차게 제기되어 입법화된 5.18 특별법은 법률적ㆍ제도적 수단을 통해 과거의 반인륜적 범죄나 학살범죄를 청산하려는 모범적인 시도로서 평가를 받고 있지만, 피해 당사자는 물론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다. 그래서 지난 한국 현대사는 과거청산의 실패의 역사라 볼 수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청산되어야 할 세력이 권력을 잡아서 거꾸로 양심세력을 완전히 거세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기억을 조작해온 역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에서 역대 한국 정부는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결여, 그리고 반복되는 역사왜곡과 망언에 대해 강력한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도덕적 명분을 결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과거는 흘러갔다"는 담론은 과거청산 작업의 현재, 미래적 의미를 계속 폄하한다. "과거는 해석의 대상이지 진실규명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일부 학자들의 비판 역시 일면의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영복이 주장하듯이 시간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이다.(신영복, [강의], 돌베개, 2004, 149) 미래는 현재, 혹은 과거와 무관한 그 무엇도 아니고 또 완전히 새것도 아니다. 현재 혹은 과거를 거론하지 않은 채 밀레니엄을 운운하는 한국사회의 담론들 상당부분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미래를 들먹이며 과거청산을 거부하는 논리 역시 단지 과거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아니라 현재 혹은 미래에 대한 입장 및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미래와 공동체 구성에서도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일본과 여타 국가 간의 과거청산, 그리고 자국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다. 특히 일본과 중국, 한국관의 관계가 우호적인 관계로 변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도 일본의 침략과거사 은폐에 기인한다.’

 

5천 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명이 세계에는 없습니다. 이집트만 하더라도 고대 문자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중국 고대 문헌은 마치 현대 문헌처럼 친숙하게 읽히고 있습니다. 전승과 해독에 있어서 세계 유일의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 밖에 없지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P. 21)

 

Ü 겸손 하라. 그리고 또 겸손 하라.

 

□ 사회 변혁기의 사상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사회 변혁기는 사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이 주류를 이룹니다. (P. 21)

 

□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전국시대에는 다시 7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진나라로 통일되는 역사적 격동기입니다. 이 시기는 흔히 축의 시대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의 백화제방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고대 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22)

 

Ü 법가, 도가, 유가, 불가, 신학, 시학, 이데아론, 형이상학, 존재론, 우주론 등 인간의 사유 대부분은 이 시대의 소산이다. 2천여 년 그 사유에 숟가락만 얹어 놓고 사유의 발전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못한 것은 인류의 부끄러움이다.

 

□ 우리의 고전 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p. 23)

 

Ü강의의 주제

 

□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전제하고 그 모델을 현재와 현실 속에 실현하려고 하는 소위 建築(건축)意志(의지)가 바야흐로 해체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지적 상황입니다. 설계 도면을 파기하는 것이지요. 모델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실천을 받아오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교조적이거나 관념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해서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입니다. (p. 23)

 

Ü 언젠가 캠벨도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 (p. 23)

 

Ü 이와 관련하여 철학자 김용규는 에서 수많은 인용과 사설을 소개했다.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본질과 존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세상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신은 무규정자이자 무한정자여야 하며 당연히 그에게는 그를 규정하거나 한정할 어떤 본질이 따로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354~430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 분은 신이 아니다.’

 

존재는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일자 OULON MOUNOQENES 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으며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 교설 중에서

 

□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p. 24)

 

Ü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책상이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책상 존재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의자가 있기 때문에 책상이 존재하며 책상 위에 책이 있기 때문에 의자도 책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맞는가? 참 어렵다.

 

□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p. 26)

 

Ü 무식한 방법이지만 일면 동의하는 바다.

 

□ 동양이라는 어휘 자체가 공간적 의미입니다. 서양에 대한 동양이란 뜻입니다. (p. 27)

 

□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을 일어서게 하고 두 사람의 차이에 주목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본질적인 것이 드러날 것 같습니까?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척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Ü 개인과 사회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이래서 중요해진다. 자신의 시선으로 보는 타인과 사회적 편견과 관습으로 바라보는 다른 사회의 문화, 종교, 사상은 필연적인 이해의 왜곡을 동반한다. 그래서 안다고 힘주고 다니면 안 되는 것이고 아는 체하지 말아야 한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비종교적이고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p. 30)

 

Ü상상할 수 없는 것은 경험할 수도 없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이와 같이 가능한 상상력의 범위는 가능한 경험의 범위와 같다.’ 흄의 경험론이다. 칸트 역시 신의 존재를 인간의 이성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것은 위의 말과 매우 유사한데 과학의 세계에서는 신은 없으며 신의 세계에서는 과학이 없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칸트의 명제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자. 그가 인간의 이성을 판단할 때 이성의 범위를 검증하는 도구로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예로 들었다.

 

‘삼각형은 세 각을 갖고 있다. Vs 삼각형은 세 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경험적으로 검증해 보지 않고도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것. 분석판단. Vs ‘이 사과는 빨갛다경험적으로 검증하지 않고는 빨간지 파란지 알 수 없는 것. 종합판단

 

초국적 금융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이 말하자면 대립면을 상실한 질주입니다.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존재론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패권주의적 질주는 자기의 목표를 부단히 허물어버리는 모순 운동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입니다. (p. 32)

 

□ 그러나 최근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대륙에 대한 콜럼버스의 관심입니다. 과도하게 축적된 초국적 자본이 자본주의 시장권에서 분리되어 있던 동구권과 러시아 대륙에 이어서 다시 광범한 중국 시장에 쏟는 관심, 이것이 주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33)

 

Ü 단선적이며 일차원적 관심이다. 저급한 관심이기도 하겠다. 그들이 동양의 사상이 궁금해 중국에 진출했겠는가.

 

□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P. 34)

 

Ü 이 컴팩트한 정의가 새삼 새롭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낭비 체제를 프로테스탄티즘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스 베버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를 개진한 것이기보다는 자본 논리를 합리화하는 맥락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동양 사상에 대해 저급한 이해의 층위를 드러냈을 뿐이지요. (P. 35)

 

□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것입니다. ()에 대한 ()입니다. 그에 비하면 동양의 ()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 beaten pass 입니다. ()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의 회의문자입니다. 착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p. 36)

 

□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p. 37)

 

Ü 서양의 모순을 동양은 극복했지만 서양 사상의 전체에 대해 동양사상이 우월한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서양 사유의 발전 또한 인간의 고뇌와 신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극복 과정이라는 점에서 빛나는 사상의 열매를 맺은 것은 사실이다. 이제 신영복 선생님으로부터 동양을 배운다.

 

□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生住異滅(생주이멸)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p. 39)

 

Ü 캠벨은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하면 만유신론이라고 매도합니다. 하지만 이 만유신론이라는 말은 사람을 오도하는 말입니다. 이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 신학적 입니다. 이것은 정의 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 신학,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근대 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39)

 

Ü 그러나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다. 제 속도가 아닌 인간의 삶, 수천 년 이어온 그 속도를 찾아가는 삶, 반자연적인 모든 것에 맞버티는 삶.

 

□ 고도 성장과 과잉 축적이 이러한 생기의 장을 파괴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봄 여름에는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지 않고 촘촘한 그물로 하천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 (맹자) 것이지요. 동양 사상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 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40)

 

Ü 현실주의란 지극히 공동체적 인간의 모습이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 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 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논어에 德不孤(덕불고) 必有隣(필유린) 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p. 41)

 

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실존시켜 주는 것은 자신이 아닌 타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스스로 입신하여 양명하는 일을 자신의 업적으로 여기는 일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와 나를 둘러싼 존재들의 가치를 폄하시키는 일이다.

 

□ 관계망의 의미,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관계론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p. 42)

 

Ü 옛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보고 제 부모를 연계해서 보던 시각이 바로 이런 장의 개념이겠다.

 

□ 인간은 어디까지나 天地人(천지인) 三才(삼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p. 43)

 

자연이 가장 안정적인 시스템, 그래서 노자는 자연을 최고의 자리에 두는 것이지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지요. 人法地(인법지) 地法天(지법천) 天法道(천법도) 道法自然(도법자연) (p. 44)

 

□ 사상이란 다른 사상과의 모순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체계가 완성된다는 원칙론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p. 44)

 

Ü 먹기 위해 싸고 싸기 위해 먹는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고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사랑은 미움을 동반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랑했기 때문이다. 채우기 위해 버리고 채우려 버린다.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이 빌어먹을 순환은 저주에 가깝지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형이다. 그 소모적 삶을 끊임 없이 반복하는 인류의 행위는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가는 길이다.

 

□ 미래담론은 대부분이 20세기의 지배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저의를 내면에 감추고 있습니다. (p. 45)

 

□ 새로운 문명사적 담론은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뛰어넘는 지점에서 모색되어야 마땅합니다. (p. 45)

 

□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迂遠(우원)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p. 47)

 

Ü 길게 가려면 같이, 천천히, 끝까지 가야 한다.

 

오래된 ()()

 

□ 시경은 동양고전의 입문입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선 300여 편이 넘는 시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시의 내용이나 형식이 같지 않고 또 작시의 목적과 과정도 판이합니다. (p. 52)

 

□ 시의 정수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 52)

 

Ü 진정성을 획득하는 일은 삶을 온전하게 통틀어 이루어내야 하는 나의 과제다.

 

cf가 보여주고 약속하는 이미지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는 본질에 있어서 허구입니다. (p. 53)

 

Ü 사실과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 듯 하지만 그것들이 삶에 진정성을 높여주는 일은 없다. 눈을 현혹시켜 어리석은 판단을 유도한다. 그렇게 유도하는 것을 좋게 유혹한다고 말하고 매력적으로 포장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 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

기다리는 임은 오시지 않고 그립기가 아침을 굶은 듯 간절하구나.

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

저기 기다리는 님 오시는구나.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으셨구나.

방어 꼬리 붉고 정치는 불타는 듯 가혹하다.

비록 불타는 듯 가혹하더라도 부모가 바로 가까이에 계시는구려. (p. 53)

 

□ 비 개인 긴 둑에 풀빛이 고운데               雨歇長堤草色多

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이야 언제나 마르려나                  大同江水何時盡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보태나니.           別淚年年添綠波

 

情意(정의)()이 되고 언이 부족하여 ()가 되고 가가 부족하여 ()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樂曲(악곡)은 없어지고 歌詞(가사)만 남은 것입니다. (p. 55)

 

□ 시경의 시는 약 3천여 년 전의 세계 최고의 시입니다. 은 말 주초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 중엽인 기원전 6세기까지 약 600여 년 간의 시와 가를 모아 기원전 6세기경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p. 56)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p. 56)

 

Ü 현란한 수사에 자신의 삶이 녹아 있지 않으면 그 글만큼 처량한 것이 없다. 늙은 창녀의 짙은 화장 같다.

 

□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思無邪(사무사) 평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 (p. 58)

 

Ü 자연을 토대한 현실주의를 기반하고 삶의 진정성과 사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치마 걷고 진수라도 건너가리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남자가 그대뿐이랴.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치마 걷고 유수라도 건너가리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가 그대뿐이랴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p. 58)

 

Ü 이 시를 입에 담고 씹어 보니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내 연인이라면 뒤에서 꼬옥 안아 주리라.

 

□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62)

 

Ü 문학은 허구를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그 허구가 사실보다 사실에 가까울 수 있다.

 

□ 위정자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한다. 고 쓰고 있습니다. 草尙之風(초상지풍) 草必偃(초필언)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 (p. 62)

 

誰知風中(수지풍중) 草復立(초부립) 을 대구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p. 63)

 

김수영의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고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로.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Ü 여기 운동가가 있다.

 

영차 영차 박달나무 찍어내어 물가로 옮기네

! 황하는 맑고 물결은 잔잔한데

심지도 거두지도 않으면서 어찌 곡식은 많은 몫을 차지 하는가.

애써 사냥도 않건만 어찌하여 뜨락엔 담비가 걸렸는가.

여보시오 군자님들 공밥일랑 먹지 마소 (p. 63)

 

□ 조선 사회의 지배 계층인 양반의 시각과 계급적 입장에 의하여 시가 선별적으로 소개 (p. 63)

 

Ü 플라톤은 이어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끊기고 막스베버는 이어지고 칼 막스는 끊기고

 

□ 시의 세계와 시적 정서, 나아가 시적 관점은 최고의 정신적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64)

 

□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 (p. 65)

 

□ 임화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인들 대부분은 문학적으로 호흡하는 세계가 매우 넓었다는 (p. 65)

 

□ 국화 옆에서 서정주

 

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 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듯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진정성이기도 합니다. (p. 67)

 

□ 군자는 無逸(무일, 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p. 70)

 

Ü 서경의 주공편

 

□ 생산 노동과 일하는 사람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어려움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중국 문화와 중국 사상의 저변에 두터운 지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정서 (p. 71)

 

Ü 실제 중국의 하방운동은 위정자들이 농촌과 공장에서 직접 일을 하도록 하여 현재의 중국 관료의 신임을 얻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마오와 저우런라이의 아이디어다.

 

□ 주공은 一飯三吐(일반삼토), 一沐三捉(일목삼착)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 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 (p. 74)

 

Ü 사기에 소개된 전국시대의 4대 재상이 3천명의 고문단을 운영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기원이라 할 수 있겠다. 주공의 인기는 대단했다.

 

□ 황제, 전욱, 제곡, , , , , , , 주공으로 이어지는 중국 황제의 계보 (p. 74)

 

□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p. 75)

 

□ 농본 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할머니 가설 grandmother hypothesis, 할머니들은 자기의 자녀가 아니라 자기의 자녀가 낳은 자녀 즉 손자손녀를 돌보고 자녀 양육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가족 집단을 번창시켰다는 것이지요. (p. 77)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p. 77)

 

Ü 대부분의 삶들이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수동적 삶을 산다. 직장인 그렇고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들이 그렇다. 월급을 위해 변화의 계기를 반납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식민지적 의식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끊임 없이 자문하자.

 

난숙하게 발전한 낭만문학 (p. 78)

 

□ 굴원의 이소가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아에 비유되기도 하고 단테의 신곡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전쟁 영웅을 기리는 서사시이거나 인간 이성의 구법 여행을 표현한 작품은 아닙니다.

 

Ü 호메로스와 단테 사이의 유사점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굴원은 유사할까.

 

□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 (p. 81)

 

□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다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 신욕자 필진의 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p. 82)

 

Ü 이것 참 갈수록 태산이라 하더니 이제 본격적인 자기 검열에 들어가야 하는가.

 

□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p. 83)

 

□ 오늘날과 같은 강고한 억압구조 속에서는 그 숨겨진 물리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길들여짐으로써 맹목이 되어버린 보이지 않는 포섭 기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목할 수 있는 초기 방식의 하나로서 낭만주의적 관점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p. 83)

 

Ü 이제 파편화된 개인에서부터 변하지 않으면 철옹성 같은 비인간적인 사회구조를 바꿀 수가 없겠다. 그래서 약자의 연대가 필요하다.

 

□ 중국의 전쟁사는 언제나 남의 패배와 북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지는 것을 패배라고 하고 그것을 敗北(패배)라고 씁니다. 북에게 졌다는 것. 유일하게 남방이 북방을 물리친 정권이 바로 현대 중국입니다. 호남성 장사의 마오가 이끈 중국공산당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중화 이를 테면 남방 정권입니다. (p. 83)

 

1972년 닉슨에게 마오가 준 선물은 놀랍게도 초사라는 사실 (p. 84)

 

□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p. 84)

 

주역의 관계론

 

□ 판단 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p. 87)

 

□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이면서 동시에 연역지 입니다. (p. 90)

 

Ü 귀납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공자도 죽었다. 석가도 죽었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죽는다.

 

연역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 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p. 92)

 

□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 (p. 92)

 

Ü 시대가 낳은 걸작이다. 인류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철학적이고 깊은 사유의 알곡이다.

 

□ 세상에는 수많은 사물이 있고 사물과 사물이 관계하여 이루어내는 사건이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상사태 또는 공황 상태라는 표현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물이 사건으로 발전하고 사건이 사태로 발전하는 여러 가지의 경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p. 93)

 

Ü 이 복잡다단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비책이 주역이다.

 

□ 주관적인 판단 형식은 근본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철학적 사유에 기초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서구적 판단 형식과 주역의 판단 형식의 차이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관계론적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94)

 

□ 어느 경우든 우리의 인식 틀이 의외로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논리 구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논리로 짜여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단순한 인식 구조를 반성하자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이러한 우리들의 인식 구조에 비하여 주역의 판단 형식은 객관적 세계의 연관성을 훨씬 더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 (p. 95)

 

Ü 단순한 사유를 가지고 복잡한 문제를 풀려 했으니 잘 풀린 턱이 있었겠는가. 함부로 덤비지 말 일이다.

 

□ 칸트나 헤겔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규정하고 있는 범주들과는 그 수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범주를 갖게 되는 셈입니다. (p. 96)

 

Ü 러셀은 서양의 지혜에서 이를 언급했다.

변증법의 근원은 칸트의 범주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칸트는 각 그룹의 제3의 것은 서로 대립하는 1 2를 결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단일성은 어떤 의미에서 복수성의 반대임에 반하여 총체성은 다수의 단위를 포함하며 이것이 처음의 두 관념을 하나로 결합한다.

독일의 관념철학은 헤겔의 손에서 최종적인 체계적 모양을 갖추었다.’

언급했듯이 단일성과 복수성, 총체성 사이의 개념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을 주역은 설명하고 있다는 말인가.

 

□ 효의 명칭은 아래에서부터 초효 ~ 상효로 읽습니다. (p. 96)

 

감중련한 손가락 (p. 98)

 

Ü 부처의 손가락은 주역의 감괘를 표현하고 있다. 천지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

 

□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입니다. 그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역지사지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입니다. 당파성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p. 100)

 

Ü 그렇다면 처지는 맹목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쟁취하고 벗어나야 하는 것인가. 처지에서 출발하라. 미래의 모습, 특히 사회가 마련한 허황된 미래의 모습 예들 들면 당신도 xx될 수 있습니다.’ ‘하면된다라는 무대뽀적 선동에 자신을 투사하면 지금의 처지를 혐오하게 될 터. 그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가 건물에 눌립니다. 고층 빌딩은 지기를 받지 못하는 건축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p. 101)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고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p. 101)

 

Ü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여백이다.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뒷걸음 걸어 앞서 간 나의 발자국을 지켜보는 풍경이 필요하다.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p. 102)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의 사상입니다. (p. 102)

 

Ü 우주에 내 아닌 것이 없으며 내 것인 것이 없다.

 

□ 경쟁으로 인한 긴장이 가장 첨예하게 걸리는 곳이 선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두가 전체 국면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두는 겨우 자기 한 몸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한 처지입니다. (p. 103)

 

Ü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1등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정상의 세계인가 말이다. 만년 2등이 1등을 하고 난 뒤 이제됐어네 글자를 남기고 자살하는 고등학생이 빈번한 사회다. 그네들의 인생은 사회가 책임질 것인가. 책임지지도 못할 미친 부러움과 비교의 맥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실위도 구요 불응도 구다. 그러나 실위이더라도 응이면 무구이다.

 

Ü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주역의 구괘를 말한 적이 있다.

하짓날 녹각이 빠진다는 것은 주역의 구괘에 해당하는데 이때 음 하나가 새로 생기므로 보음하는 약재가 될 것이요, 동지에 미각이 빠진다는 것은 주역의 복괘에 해당하므로 양 하나가 새로 생기게 되어 보양 하는 약재가 될 것입니다. 쓸모가 현수하게 다르지요.’

이건 매우 수학적이다. 과학적이라는 말이다. (+)하지 (–)녹각 = (-)보음, (-)동지 (-)미각 = (+)보양

 

□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 (p. 105)

 

1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나 반대로 상하의 열대지역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p. 107)

 

Ü 우리도 그 역사의 한 편이라 봤을 때 사상의 한 축을 담당해 나가고 있다. 고 생각하자.

 

□ 지천태

태쾌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온다. 길하고 형통하다. (p. 108)

 

단에 이르기를 태괘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오기 때분에 길하고 형통하다. 이것은 천지가 만나고 만물이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하가 만나고 그 뜻이 같다. 내괘는 양이고 외괘는 음이다. 안은 강건하고 바깥은 유순하다. 군자가 안에 있고 소인이 바깥에 있다. 군자의 도는 장성하고 소인의 도는 소멸한다.’ (p. 109)

 

Ü 주나라 건국이 역성 혁명으로 이루어진 국가이기 때문에 이 태괘를 가장 윗자리로, 좋은 괘로 추앙한다는 설이 있다.

 

□ 경복궁의 교태전은 天地(천지)交態(교태)입니다. 천과 지가 서로 교통하여 태평하다는 뜻. (p. 110)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을 치르지 않은 사회가 두고두고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p. 110)

 

Ü 혁명은 공동체 발전의 동력이다.

 

멀리 있는 사람도 포용하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는 사람도 포용하고 멀리하거나 버리지 않으며 붕당이 없으면 중도를 행함에 짝을 얻으리라.’

 

황하를 맨몸으로 건너듯이 초기 단계에서 요구되는 과단성도 잃지 말아야 하고 남아 있는 사람 즉 주변에 있는 비주류도 멀리하지 말아야 하며 특히 붕망 즉 붕당이 없어야 한다. (p. 112)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한번 겪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p. 113)

 

□ 천지비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괘를 비괘라 이름하고 그 뜻을 막힌 것으로 풀이합니다. 천지폐색의 괘입니다. (p. 117)

 

Ü 땅의 기운은 아래로 하늘의 기운은 위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교통하지 못하는 괘. 만나지 못하니 소통이 불가하고 관계는 벽이 되는 것. 현재의 구도를 주역은 배반하고 있다. 변화의지가 없다면 주역은 모두 폐색의 괘로 본다. 5천년 전 텍스트가 나에게 일침을 놓는다.

 

천지는 서로 교통하지 못하고 막혀 있다. 군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유덕함을 숨김으로써 난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관록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벼슬에 나아가서는 안 된다.’

 

식민지 상황은 물론이고 해방 후의 현대사를 통하여 줄곧 이러한 상황을 경험. 역사의 경험에서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지요. (p. 119)

 

Ü 주역볼수록 대단하다.

 

주역은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괘를 불변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p. 120)

 

Ü 명명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명명하는 순간 그것은 관계가 막혀 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산지박괘에서는 상구가 최후의 양심, 최후의 이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뿐만 아니라 한 사회, 한 시대의 양심과 이상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메시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희망은 있는 법, 그런 점에서 박괘는 64괘 중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을 상징하는 괘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는 변증법을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p. 123)

 

Ü 이런 해석이 가능하구나. 해석의 힘이다. 절망에서 희망을 보는, 길이 없는 절벽을 오를 때 퇴로는 없고 앞으로의 길도 없다. 죽음과 맞닥뜨린 상황에서도 길을 모색하는 등반가의 상황은 주역의 산지박괘다.

 

□ 화수미제

비록 모든 효과 득위하지 못했으나 음양 상응을 이루고 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 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p. 127)

 

Ü 끝까지 감동이구나. 주역.

 

□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인가? 그러한 완성태가 존재하는가? (p. 128)

 

Ü 이 질문들을 보라. 기가 막힌다. 내 이 물음에 답할 날을 고대하니 그 또한 기가 막히는구나.

 

□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Ü 우리가 과정이라니, 눈물 겹다. 결국 과정이다. 우리는 과정이다. 그러니 우열이 없다. 좋고 나쁨이 없다. 잘하고 못함이 없다. 우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결과의 언어다. 과정은 그 언어를 쓰지 않는다. 과정의 언어는 그냥 최선이다.

 

□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129)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p. 129)

 

Ü 주옥 같은 말들이 쏟아진다. 두렵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p. 129)

 

Ü 생산수단의 노동자 환원은 마르크스의 이념과 유사하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한다. 진부한 사회주의 담론, 계급 담론이 아니라 인간적인 길을 위해서라면 그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窮卽變(궁즉변) 變卽通(변즉통) 通卽久(통즉구) (p. 130)

 

Ü 주역의 요약

 

□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p. 131)

 

Ü 내 잘났네 하지 말 일이다. 다른 데는 통하지 않을 그 賤技(천기)를 가지고 말이다.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 (p. 132)

 

□ 서산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 있을 때 자신의 영정에 쓴 시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p. 133)

 

Ü 과거는 다시 돌아오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만 변하는 것도 또한 없다. 내가 저것이 되기 까지 거쳐 왔던 무수한 인연에 오로지 감사로 대할 뿐.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 춘추전국시대의 특징

1. 철기의 발명으로 기원전 5세기의 제2의 농업혁명기 : 우경으로 황무지가 개간,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급증, 토지 관념의 변화 à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상업의 발달 à 세력화 à 모든 사회적 가치의 붕괴,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 되는 시기 =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의 현대 자본주의 패권주의적 경쟁과 동일

 

2. 구 사회 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 : 천자의 토지 소유권이 제후와 대부에게 넘어가는 토지 소유권의 하이 현상이 광범하게 일어남 à 주 왕실의 물적 토대 약화

 

3. 제자백가의 백화제방의 시기 : 주 왕실 붕괴 후 왕실 관학을 담당하던 관료들이 민간으로 분산 à 지식인 계층을 형성, 패권 경쟁을 위한 정치 기구의 확충과 전문적 지식에 대한 수요 증대 à 정신노동의 상품화 (공자의 사설 학숙은 이러한 수요에 부응한 관리 소개소의 성격)

 

□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時制(시제)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을 이유로 들어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 할 수 없는 것 (p. 141)

 

學而(학이)

학습은 사회적 신분 상을 위한 것. 노예제 사회에서는 학습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 학습에 대한 언급이 논어의 첫구절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 변동기임을 짐작케 하는 것 (p. 142)

 

□ 붕의 개념, 친우라는 것은 수평적 인간관계입니다. 계급사회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새로운 인간관계가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p. 143)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반성하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있지나 않았는지 반성한다 (p. 144)

 

Ü 이 세계는 분명 지금의 세계와는 다를 것. 그 세계가 궁금하고 그리로 가고 싶다.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 그런 점에서 사회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인간관계의 사회적 존재 형태가 사회 구성체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인간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요.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p. 145)

 

□ 계급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입니다. 자본 제도의 핵심은 위계적인 노동 분업에 있습니다. 생산자에 대한 지배 체제가 자본 제도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불가역적 구조 변혁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 (p. 146)

 

Ü 노예제, 봉건제 사회의 인간관계는 주군관계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는 자본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와의 위계 관계다. 주식회사의 생리는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주권의 개수로 권리와 소유 정도를 나타낸다. 주권의 개당 얼마라는 돈으로 환산되고 이를 묶으면 자본이 된다. 그 사이에 인간은 없다. 인간관계라 하기에도 부끄러운 지배체제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산다.

 

□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溫故(온고)보다는 知新(지신)에 무게를 두어 고를 딛고 신으로 나아가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p. 149)

 

□ 옛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에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p. 150)

 

Ü 나는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자인가.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나중에는 누군가의 스승이 되고 싶다. 받은 만큼 돌려 주고 싶다.

 

君子不器(군자불기)

막스베버는 전문성과 직업적 윤리의 거부로 이해, 분업의 거부, 뷰로크라시를 거부, 이윤 추구를 이한 경제학적 훈련 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을 거부하였다고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양 사회가 비합리적이며 근대사회 형성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는 원인 (p. 151)

 

Ü 베버의 논리는 동양 전체에 확대하여 해석할 경우 오류지만 한반도 조선에 초점을 맞춘다면 맞는 논리 일 수도 있다. 선비인 양 하며 장인바치질 하는 것이 기품에 맞지 않는다며 노동을 거부하고 천박하게 보았던 시선은 베버의 시선에서 걸려 든다.

 

□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p. 151)

 

Ü 자본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한 확대재생산의 수단, 인적 자원화 시키기 위해 사회적으로 학습 강요하는 사회가 되었다.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요구되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을 신자유주의적 자본 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 읽는 것이 바로 오늘의 독법 (p. 152)

 

Ü 이 나라 교육 시스템은 자본가를 위한 생산자 양산에 목적을 두고 있다. 베버의 효율과 전문성에 충실한 것이다. 이는 자본과 전문성을 갖추지 않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체제 지배자들을 위한 헌신적 교육이다.

 

정치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 (p. 154)

 

□ 집단적 타락 증후군,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분위기,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 생각합니다. (p. 156)

 

Ü 나만 아니면 돼. à 집단적 타락 증후군

 

상품미학에 이르면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주목되지 않습니다. (p. 159)

 

Ü 필요 없는 물건을 사는 것. 그 물건 산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것.

 

() ()() 커가는 것을 보는 기쁨,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159)

 

子曰(자왈) 君子和而不同(군자화이부동) 小人同而不和(소인동이불화) (p. 160)

 

□ 정체성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표현에 의하면 관계 맺기와 차이 짓기, 즉 디페랑스 difference 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통체적 이기 때문에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법, 즉 개념적 방법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인식 과정의 불가피한 방법 상의 문제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p. 161)

 

Ü 내 생각, 의사, 사유를 내 아닌 사람은 어떻게 이해 하는가. 내 사유는 문자, 언어의 폭에 가두어져 제한될 텐데 이것이 첫째 장벽이다. 의사 전달 받는 사람도 그 사람의 사유의 깊이에 따라 왜곡 될 것 아닌가. 이것이 두 번 째 장벽이다. 왜곡과 오해로 가득한 세상에 자신의 소리를 외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 논어의 이 화동론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p. 162)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p. 163)

 

Ü 비로소 명확해진다.

 

대륙적 소화력,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해왔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이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이 되는 강력한 대륙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 (p. 163~164)

 

Ü 지양 : 손을 들어 위로 올린다.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하다. 독일어로 aufheben 아우프헤븐. 변증법 관련 개념이며 자체를 부정하면서 오히려 한층 더 높은 간계에서 긍정하는 것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의 논리에 기반,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구성 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p. 164~165)

 

Ü 극과 극은 이래서 통하는 것이구나.

 

()의 원리는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세계사적 과제 (p. 166)

 

德不孤(덕불고) 必有隣(필유린) (p. 166)

 

Ü 허생전에서 허생이 섬으로 들어갈 제

사람 없는 빈 섬에 누구와 함께 살 것입니까? 하니 허생은

덕이 있는 곳에 사람이 붙는 법이거든 덕이 없음을 걱정할 일이지 사람 없는 걱정이야 할 것 없네!’ 하였다.

 

相好不如身好(상호불여신호) 身好不如心好(신호불여심호)

 

Ü 백범의 말을 인용한다.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 (p. 168)

 

□ 안연에게는 인이란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답변하였고 중궁에게는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한편 사마우에게는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p. 173)

 

Ü 이것이 중용의 개념이다. Dynamic equilibrium point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 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인식의 혼란을 가져오는 엄청난 정보의 야적은 단지 인식의 혼란에 그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폄하하게 할 뿐입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파는 사회이며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회입니다. (p. 175)

 

Ü 자본은 인간을 배반한다.

 

□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p. 176)

 

Ü 공자는 말한다.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겠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빈천의 역사를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 일입니다. (p. 177)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청산되지 않는 한 한 개인의 부귀와 빈천의 온당한 의미를 읽어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천민 의식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는 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p. 178)

 

Ü 천민의식에 대한 반성. 역사와 사회와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사유의 빈약함.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런 사유의 부재로 인한 인간 행동의 극단을 보여준다. 역사와 인간에 대한 몰이해가 인류에게 어떤 죄악을 끼치는지 똑똑히 보아라.

 

()하되 ()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하되 학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Ü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 사의 ()은 어린아이의 두개골에 있는 봉합 부분 즉 숨구멍을 의미한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두뇌와 마음 심을 합한 것이 사라는 것입니다. (p. 179)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에 있습니다.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이 보편적인 것임에 비하여 사는 특수한 것 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 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p. 182)

 

□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182)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 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p. 183)

 

Ü 이 그릇의 차이를 보라. 용도가 다를 수 있지만 크기는 확연하다.

 

□ 사람이란 지혜롭기 보다는 어리석기가 어렵습니다. 지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숨기고 어리석은 척하기가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p. 185)

 

Ü 지의 궁극적 형태다.

 

大智(대지)를 품고 있는 ()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란 것이지요. (p. 186)

 

Ü 일찍이 뉴턴은 자신의 지적 수준을 해변의 모래알에 비교했다. 부처도 갠지스강의 모래알 만큼의 우주에 대해 자각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 187)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다. 퇴각할 때는 후미를 맡았다. 그러나 막상 성무에 들어올 때는 내가 감히 후미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말이 나아가지 않아서 뒤쳐졌다고 하였다. (p. 187)

 

Ü 맹지반이라는 자 절정 고수다.

 

無私(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 수 있는 법입니다. (p. 188)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p. 188)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겸허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p. 189)

 

거짓말의 수명은 상당히 긴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필요가 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190)

 

□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p. 191)

 

바탕이 문채보다 승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p. 194)

 

Ü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뜻

 

□ 반품과 a/s 자체가 또 하나의 상품으로 등장하여 허구적인 약속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역설적. (p. 197)

 

Ü 상품미학의 형식적 과도함 사용가치의 본질을 흐린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힘입니다. (p. 198)

 

Ü 정확하다.

 

□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p. 199)

子曰(자왈) 知之者(지지자) 不如好之者(불여호지자) 好之者(호지자) 不如樂之者(불여락지자)

 

()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 (p. 200)

 

子曰(자왈)  智者樂水(지자요수) 仁者樂山(인자요산) 知者動(지자동) 仁者精(인자정) 知者樂(지자락) 仁者壽(인자수) (p. 201)

 

□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 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202)

 

□ 보수와 진보 억압과 자유라는 두 개의 대립축 사이에 공자학파의 사상적 본령이 있다는 주장. 이러한 재야성이 공자의 인간과 사상을 원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203)

 

중도주의는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정치 논리 (p. 206)

 

Ü 좌우 대립의 중도를 지킨다는 것은 보수다. 현재의 체제를 공고히 하겠다는 말과 같다. 변함을 바라는 자는 중도를 따라서는 안 된다.

 

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 不亦樂好(불역락호)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p. 207)

 

Ü 관계, 또 관계

 

맹자의 ()

 

()()의 사회화 (p. 212)

 

만약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대부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사인이나 서민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 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p. 213)

 

Ü 우리 뜨끔하지 않는가. 위 아래는 물론이고 좌우 모두 돈을 쫓아가는 이 사회에 맹자가 돌아왔다면 무슨 소리로 일갈하겠는가. 위와 같다.

 

만약 의를 경시하고 이를 중시한다면 남의 것을 모두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실 일이지 어찌 ()를 말씀하십니까? (p. 214)

 

Ü 오늘날의 세대를 정확히 짚어낸다.

 

□ 오늘날로 말하자면 의란 국제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정책 제안이 아니었던 것 (p. 216)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 테면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사직단은 비유하자만 로마교황청입니다. 그로부터 임금의 권력이 나오는 당시 최고의 종교적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와 성역마저도 가차 없이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민본사상입니다. (p. 217)

 

Ü 맹자 멋지다. 나는 맹자가 마음에 든다.

 

□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손바닥 위의 물건을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p. 224)

 

□ 공자의 천명은 맹자의 천성으로 이어지고 다시 송대의 신유학에 이르러서는 천성이 곧 천리라는 주자 성리학으로 계승됩니다. (p. 227)

 

□ 맹자가 말하였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불인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할까 걱정한다. 무당(의사)과 장인(관 만드는 사람)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기술의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에 거하는 것이 아름답다. 스스로 택해서 인에 거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p. 230)

 

□ 인이라는 것은 활 쏘는 것과 같다. 활을 쏠 때는 자세를 바르게 한 후에 쏘는 법이다.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과녁에 맞지 않은 까닭을)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p. 231)

 

□ 신은 호흘이라는 신하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왕께서 대전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로 지나갔는데 왕은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에 쓰려고 합니다고 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를 놓아주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지할까요?

흔종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셨다 (p. 235)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군자가 금수를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군자 푸줏간을 멀리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p. 236)

 

Ü 내가 보았다. 적어도 내가 본 후로는 그것을 다시 취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명쾌하다. 인지상정이다.

 

□ 식품에 유해생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p. 237)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p. 240)

 

□ 러시아 청년 :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지 않았느냐. 그래서 자리를 양보한다. ‘

한국 청년 :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p. 241)

 

Ü 이를 두고 싸가지 없다 이른다.

 

□ 자본주의 사회는 종횡으로 단절되어 있다. (p. 242)

 

Ü 종축은 세대간 소통이며 횡축은 불특정 다수의 이웃들이다.

 

□ 맹자가 말하기를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 일월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p. 243)

 

Ü 流水之爲物也(유수지위물야) 不盈科不行(불영과불행) 채워야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비워야 담을 수 있다. 스승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知者不博(지자불박) 博者不知(박자부지) (p. 244)

 

□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참된 스승의 모습 (p. 248)

 

Ü 석봉의 어머니가 되지 못해도 그리 되려 노력은 해야지.

 

□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맹자는 참으로 명쾌하고도 단호하게 답변하여 군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인을 짓밟는 자를 적이라 하고 의를 짓밟는 자를 잔이라 합니다. 잔적한 자는 일개 사내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의 무왕이 일개 사내일 뿐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렀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p. 249)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p. 250)

 

Ü 원인은 내 안에 있으며 답도 내 안에 있다.

 

노자의 도와 자연

 

□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노자는 인위적 규제를 반대합니다. 인위적 제도나 규제는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책이 되지 못하며 도리어 혼란과 불의를 가중시킬 뿐이라는 기본적 입장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p. 254)

 

Ü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질료, 헤라클레이토스는 불, 피타고라스는 수,  파르메니데스는 존재. 연암은 먼지. 노자는 자연

 

□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의지에 대한 비판입니다.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해체론이며 바로 이 점이 노자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255)

 

진한 이후의 제도 폭력이 지배하는 역사적 조건에서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저항적 지반이 광범하게 형성된 것은 역사의 필연적 과정.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재앙으로 규정하는 노자의 반문화 사상이 지배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p. 256)

 

□ 자본주의 역사는 자본 축적의 역사이고 자본 축적은 모순의 누적 과정입니다. (p. 256)

 

□ 해체주의자로서의 노자가 생환 (p. 257)

 

Ü 인위를 거부하고 제도와 허식을 부정한다.

 

□ 노자 상편은 도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p. 258)

 

□ 백낙천의 노자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 법

이 말을 나는 노군에게 들었노라

만약 노군이 지자라면 무슨 까닭으로 스스로 5천 자를 지었나. (p. 259)

 

玄之又玄(현지우현) (p. 262)

 

도라고 부를 수 잇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 (p. 263)

 

Ü 무의 의미는 ‘0’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무.(저자)

 

□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p. 264)

 

Ü 식물과 동물에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지배욕이다. 학자들이 자신의 이름과 학명을 붙여 존재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 등에 식은 땀을 흘릴 일임을 알지 못하는가.

 

천지지신

   만물지모 (p. 267)

 

Ü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서술이 아니라 통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서술 방식 (저자)

 

□ 검은 색과 붉은 색을 혼합한 색이 바로 현이라는 것. 검은 색은 무, 붉은 색은 유를 의미 (p. 268)

 

□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p. 269)

 

Ü 캠벨은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다고 했다. 또한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칸트의 말마따나,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이 아니지요.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성을 초월합니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을 초월합니다.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될 수 없습니다. 차상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언표하는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입니다.’ 라고 표현 바 있다. 일견 캠벨은 노자의 세계관을 따른다.

 

□ 이름이란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라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더구나 개미라는 이름은 개미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p. 269)

 

Ü 이것이 핵심이다. 잗다란 개념을 우리끼리 설정해 놓고 그것이 진리, 사실인양 행세하는 것이 우리 사는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를 해체하고 지금 여기, 존재와 이 세계 너머의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 노자의 사상이다.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이 서양의 사유입니다. 개념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p. 270)

 

Ü 그들이 존재를 이야기할 때 본질과 형상으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그 본질이라는 것이 어찌 우리가 가진 언어의 한계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p. 270)

 

Ü 그래 생각해보니 하이데거는 노자보다 생각이 짧았던 건가. 존재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 조차 어렵다고 본다면 하이데거도 할 만큼은 했다.

 

道無水有(도무수유) 도는 없고 물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형인 도체가 유형인 도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 형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단순할 지 모르지만 그 어머니 때문에 복잡한 경우와 같은 것이지요 (p. 271)

 

Ü 이것은 약간 이데아적 사유 같기도 하다. 유는 결국 무의 가시적 형태이기 때문에 현묘하고 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우리의 개념 너머에 있는 체계이기 때문에 현묘한 것. 맞는가.

 

□ 미와 오, 선과 불선의 구별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선언

널리 알려진 미를 미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혐오스러운 것이다. 널리 알려진 선을 선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p. 272)

 

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p. 273)

 

Ü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인의예지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지요. 예악, 명분, 문물, 등에 대한 반성과 반문화적 관점이 노자 전편을 일관하고 있습니다. 자연이야말로 최고, 최선, 최미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p. 273)

 

인식의 상투성을 반성하고 나아가 실천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 (p. 274)

 

Ü 일면 좌파적인 생각이다. 노자는 현재의 지배체제를 승인하지 않는다.

 

有無相生(유무상생) 難易相成(난이상성) 長短相較(장단상교) 高下相傾(고하상경) 音聲相和(음성상화) 前後相(전후상) (p. 275)

 

Ü 차이는 상대적인 것.

 

□ 차별적 인식이 특히 어려움, 없음, 짧음, 낮음 등의 의미를 부당하게 폄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자연의 본성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위적인 구분이 초래할 수 있는 혼란을 경계 (p. 275)

 

Ü 그렇구나 자연은 길고 짧음이 애초에 없었고 우등과 열등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비교 언어는 인간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기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P. 276)

 

Ü 도대체 인류는 이런 통찰을 어떻게 이루어 냈는가. 질투가 날 지경이다.

 

□ 선악의 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ox식의 이분법적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저급한 인식을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p. 277)

 

Ü 니편, 내편. 좋은 놈 나쁜 놈이 어디 있는가. 안중근은 한국에서 의로운 자이지만 일본에서는 망국의 테러리스트다.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독립 투사들이지만 미국에서는 희대의 테러리스트다. 누구의 기준이 맞을까. 옳을까. 선할까. 악할까.

 

□ 외환 제도나 시장 가격이란 고도의 수탈 메커니즘이 아닐 수 없습니다. (p. 279)

 

Ü 그네들은 절대 손실을 보지 않는 구조다. 공멸하면 했지 자멸하지 않는 구조다.

 

□ 소비가 미덕 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p. 280)

 

Ü 동의한다. 전적으로. 자가 증식하는 세포는 암이다. 자본은 태생적으로 interest 라는 기묘한 시간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가 증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는 암적일 수밖에 없다.

 

□ 일련의 작위를 경계,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옷처럼 만물을 감싸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p. 282)

 

Ü 아 그렇구나 벗으면 벗겨지는 대로 입으면 입는 대로 제 속성을 간직하며 let it be 하는구나.

 

□ 노자의 제3장은 은둔과 피세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改世(개세)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것이란 점이 다를 뿐입니다. (p. 283)

 

□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세 가지.

1.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

2. 다투지 않는다는 것 :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작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가고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하기도 하고 할수 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3.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 :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p. 286)

 

Ü ()()()()는 이러했다. 노자는 도를 설명하기 위해 물을 꼽았다. 물의 세 가지 원리는 도를 설명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이로써 노자는 중국 사상사에서 최고의 철학적 담론 자리에 등극한다. 사회학과 정치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철학적 논리로써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66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 以其善下之(이기선하지)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p. 289)

 

□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가 이로운 것은 ()()이 되기 때문이다. (p. 292)

 

Ü +=. 공학적 이해인가. 존재=존재물+본질과 어찌 보면 일맥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한 개의 상품의 있음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p. 293)

 

Ü 주옥 같은 말씀이다.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 종단의 거대한 소유 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무소유가 가능한 것은 소유가 ()이 되기 때문이지요. (p. 294)

 

Ü 찬란해 보이는 성스러움 안에는 알지 못하는 더러움이 있다. 무소유에는 소유가 들어 앉아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있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하지요. (p. 294)

 

Ü 바람, 그 걸리지 않는 시원함.

 

□ 최고의 정치는 무치 (p. 295)

 

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정치 없는 위민

 

□ 변화하는 이유는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이러저러한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가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집단적으로 터득해갑니다. 그래서 나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297)

 

Ü 삶은 현실을 세밀하게 알아가는 과정인가.

 

□ 자연은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며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p.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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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p. 299)

 

□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p. 300)

 

還童(환동),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 법까지도 미련 없이 버리는 경지.

大辯若訥(대변약눌) 최고의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 (p. 301)

 

□ 화자의 연상 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p. 302)

 

Ü 내 생각, 의사, 사유를 내 아닌 사람은 어떻게 이해 하는가. 내 사유는 문자, 언어의 폭에 가두어져 제한될 텐데 이것이 첫째 장벽이다. 의사 전달 받는 사람도 그 사람의 사유의 깊이에 따라 왜곡 될 것 아닌가. 이것이 두 번 째 장벽이다. 왜곡과 오해로 가득한 세상에 자신의 소리를 외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 Progress is simplification 라고 했습니다. (p. 304)

 

Ü 걷어내고 비우는 것이다. 거친 욕망을 잠재우고 자연이 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다. 축적은 없고 즐거움은 남긴다.

 

□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p. 304)

 

□ 분서갱유도 사실은 노자를 계승한 것 (p. 305)

 

Ü 인의예지가 인위였기 때문에 모든 제자 백가들의 논리들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라 판단. 현대 중국의 문화혁명 또한 이와 유사하다.

 

□ 노자의 철학은 귀본의 철학입니다. 본은 도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人法地(인법지) 地法天(지법천) 天法道(천법도) 道法自然(도법자연) (p. 305)

 

장자의 소요

 

□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p. 309)

 

□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p. 310)

 

장자의 逍遙遊(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무한한 소요유의 추구를 표방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 이 부분이 바로 장자의 철학과 사회학의 접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311)

 

Ü 소요유 :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

 

□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다. (p. 313)

 

Ü 장자는 일면 아킬레우스적이다.

아킬레우스는 삶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주 열렬히 사랑한다. 다만 그는 현재를 사랑할 뿐이다. 지금의 감정과 지금의 움직임만 사랑한다. 오로지 거기에만 충실하다. 매 순간이 그에게는 삶이고 전부다. 살인도, 분노도, 눈물도, 사랑도, 연민도, 그는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 무슨 철학자들처럼 공평하게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니라 자연처럼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고통도 기쁨만큼 즐겁다.’ 그런 아킬레우스가 누군가로부터 죽음의 운명을 들었다. 아킬레우스는 나에게 왜 죽음을 이야기하지?’

 

□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p. 317)

 

Ü 우리는 필사의 찰나이고 부분이다. 그리고 우주 대업의 과정일 뿐이다. 우리가 과정이라니, 눈물 겹다. 결국 과정이다. 우리는 과정이다. 그러니 우열이 없다. 좋고 나쁨이 없다. 잘하고 못함이 없다. 우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결과의 언어다. 과정은 그 언어를 쓰지 않는다. 과정의 언어는 그냥 최선이다.

 

□ 장자는 초월의 경지를 네 가지로 나눈다.

1. 극히 현실적인 常識(상식)()

2. 칭찬이나 모욕에 초연한 송영자 같은 사람

3. 열자와 같이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15일이면 돌아오는 사람

4. 절대 자유, 성인, 신인, 지인 (p. 318)

 

□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로 규정 (p. 319)

 

Ü 한번 읽어 봐야겠다.

 

□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식을 조감하는 일,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는 것. (p. 319)

 

Ü 한 단계, 차원을 높여 올라서서 관망하거나 조망하는 일. 자신의 스탠스를 객관화 시켜 볼 줄 아는 시선.

 

□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관점에 서면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에서만 본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여 이것을 저것과 이것의 모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과 사, 사화 생, 그리고 가와 불가, 불가와 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는 모순 관계에 있다. 가가 있기에 불가가 있고 불가가 있기에 가가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p. 322)

 

Ü 이것은 노자의 사상과 많이 닮아 있다.

 

□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 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 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p. 324)

 

Ü 나는 이 글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쟁이, , 장인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뼈를 베지 않기 위한 그네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어떠했겠는가. 나는 그 경지에 진정 이를 수 없는 것인가.

 

□ 저 뼈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데다 넣으므로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p. 324)

 

□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가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p. 326)

 

□ 소와 말의 발이 네 개 있는 것 이것이 ()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이다. (p. 326)

 

Ü 천은 자유고 인은 부자유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을 피하려는 둔천의 형벌이다. 천인 합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천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술독을 안고 노래했다는 일화가 수긍이 갑니다. (p. 327)

 

()()()(),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 (p. 328)

 

□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p. 329)

 

Ü 제주 해녀 할머니들이 산소를 메고 스쿠버 다이빙을 하지 않는 이유는 100개의 해삼을 캔다면 다른 사람이 캐지 못하고 1년 내내 캐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제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뜨리는 것이지요.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지출)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p. 331)

 

Ü 노동의 맛과 의미를 모르는 이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p. 332)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p. 334)

 

Ü 이 엄정한 자기 성찰과 냉철한 자기 검열의 인간상에 존경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사회와 국가와 문명은 비판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권력과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자기 검열 없는 부끄러움의 자랑인 것이다. Shame on you!

 

□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일 뿐이다.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p. 339)

 

Ü 이건 좀 어렵다.

 

□ 중간이란 절충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양쪽 모두를 부정하는 것 (p. 340)

 

Ü 나쁜 사람에게도 착한 것은 위선이다.

 

□ 오늘날의 도는 상품 생산에 유용한가 아닌가 하는 차원을 뛰어 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 (p. 340)

 

과일 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 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 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 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 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p. 342)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p. 343)

 

Ü 자유롭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 삶이 결국 과정이고 필멸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삶이 지속되는 순간 순간이 자유롭지 않다면 안타깝지 않겠는가.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라 한다. (p. 345)

 

Ü 9만리 長空(장공)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 (저자)

 

□ 우리의 인식이란 분별상에 매달리고 있는 분별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346)

 

Ü 나 아닌 것 없고 나인 것이 없다. 채워지고 버려지고 먹고 싼다. 존재가 거듭되고 생이 거듭된다.

 

□ 모든 ()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p. 347)

 

□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 interpenetrate 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 (p. 347)

 

□ 별 부스러기 회 (p. 348)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흘,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 줍시다. 날마다 구멍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체적인 전체를 분하고 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체적 연관이 소멸되고 남는 것은 분별지와 분별상이며 개아로서의 존재들입니다.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 (p. 349)

 

Ü 이것도 조금 어렵다.

 

□ 지식이란 의거하는 표준이 있은 연후에 그 정당성이 검증되는 법인데 (문제는) 그 의거해야 하는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p. 350)

 

□ 지식에 대한 몇 가지 논의

1. 지식에 있어서 과연 객관적 입장이 있는가의 문제 (조지어천)

2. ()() ()() () : 지식이란 어떤 것을 기다린 연후에 그 진리성 여부가 판명된다는 뜻. 지식이란 무엇인가?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 그 명의 실체가 되고 있는 실과 비교하여 명실이 부합할 때에 지식은 합당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소대자는 실을 가리킵니다.

변증법에서 이론은 실천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검증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천의 조건이 변화하고 실천의 주체가 변화하는 경우 검증은 매우 복잡한 것이 됩니다. (p. 351)

 

□ 오늘날의 지식이 하는 일이란 대체로 정권을 유지하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하거나 나쁜 짓을 하고도 그것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을 대행하는 일

 

장가 도척에게 도적질에도 도가 있냐는 질문을 한다.

도척은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입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입니다. 늦게 나오는 것이 ()입니다.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입니다. (p. 353)

 

Ü 도적질도 철학이 필요하거늘.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 357)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사상은 자각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자각적이라는 의미는 개인을 그 사상의 담당자로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p. 362)

 

Ü 국문학자 정민은 창의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듣고 나면 당연한데 듣기 전에는 미처 그런 줄 몰랐던 것이 창의적인 것이다.’

 

□ 사상이란 일정한 사회적 조건에서 생성되는 것이지만 그 사회적 조건이 변화하면 사상도 사상사의 장으로 물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상을 사회 역사 속에 해소시킬 수 없는 이유가 방금 이야기한 그 자각적 체계 때문입니다. (p. 363)

 

□ 묵자의 차별성

1. 하층민의 이미지 : 묵가란 형벌을 받은 죄인들의 집단을 의미. 혁명적 상황에서 묵가는 통치 권력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좌파 조직의 좌파 사상이었으며 묵적이란 이름은 그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것.

 

2. 근검 절용하며 실천궁행하는 모습 : 검소한 실천가의 모습. 맹자에 따르면 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 (p. 365~366)

 

□ 백성들은 세 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자는 입을 것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 묵자는 기층 민중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

겸애,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라는 상생 이론을 선언하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p. 370)

 

□ 진, 한 이래 사회적 격동기가 끝나고 토지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 중심의 신분 사회가 정착되면서 묵가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는 평등주의 사상이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난 후인 19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유교 사회의 붕괴와 때를 같이하여 재조명됩니다. 묵자의 기구한 운명은 민중들의 그것만큼이나 장구한 흑암의 세월을 견뎌온 셈입니다. (p. 371)

 

□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혼란의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p. 373)

 

□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p. 374)

 

□ 그렇다면 겸상애와 교리지법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묵자가 말하기를 그것은 다른 나라를 자기 나라 보듯이 하고 다른 () 보기를 자기 가 보듯이 하고 다른 사람 보기를 자기 보듯이 해야 한다. (p. 375)

 

□ 묵자가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때가 기원전 100년경이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찾아온 동방박사가 망명 묵가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p. 376)

 

Ü 사실의 개연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

 

□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p. 382)

 

□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제국주의적 팽창 과정이었습니다. (p. 383)

 

□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p. 386)

 

□ 우리의 사유는 사실판단에 기초 위에서 가치판단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실판단의 기초가 되는 지각과 경험이 없으면 그 주장이 망상에 빠지게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가치판단이 없는 지각과 경험만으로는 사실을 일컬을 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무엇을 삼표로 삼는가. (), (), ()이 그것이다.

 

묵자의 삼표는 첫째 역사적 경험이며, 둘째는 현실성이며, 셋째는 민주성입니다. (p. 392)

 

Ü 명확하고 간단하다. 간디는 진보는 단순성이라 했다.

 

□ 묵자에 대한 장자의 평가.

실천 행위는 과도하였으며 절제는 지나치게 엄정하였다. 묵자와 금활리의 뜻은 좋지만 실천은 잘못 된 것이다. 스스로 고행을 자초하여 종아리에 살이 없고 정강이에 터럭이 없는 것으로 서로 경쟁을 벌이게 할 뿐이다.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39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 순자는 법가의 시조 (p. 405)

 

□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유가의 정통적 천인 도덕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천과 인은 서로 감응하지 않는 별개의 존재입니다. 천은 자연이며 음양일 뿐입니다. 천은 천명 천성, 천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입니다.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울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이 무슨 일인가 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천지와 음양의 변화이며 드물게 나타나는 사물의 변화일 뿐이다. 괴상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두려울 것은 없다.’ (p. 406)

 

Ü 법가는 다소 존재론적 사상을 저변에 두고 있음이 느껴진다.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하여 겨울을 거두어가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이 먼 길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 넓이를 줄이는 법이 없다. 군자는 소인이 떠든다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땅에는 변함없는 규격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p. 407)

 

Ü 시제를 참고하여 이 사상을 인식한다면 대단히 파격적이다. 천지가 서로 관계를 주고 받으며 인의예지를 실현해 나가야 하는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이 아니었겠는가.

 

□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인본주의적 관점입니다. (p. 408)

 

Ü 아르키메데스적이고 피타고라스적이며 존재론적이고 기하학적 사유 구조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느낌도 있다.

 

□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지인이란 장자의 경우와 달리 천도와 인도의 구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p. 409)

 

Ü 인간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유한을 알아야 무한에 들 수 있다는 융의 사고와 유사하다.

 

□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p. 413)

 

Ü 막스 베버와 이웃해 있다.

 

□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의 본성 (p. 414)

 

□ 자본주의 제도가 바로 역사의 종말이라는 주장에서 종말은 최고라는 의미.

이기적 인간 본성론은 근대사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 논리이고 자본의 자기 증식 논리이고 자본 축적 논리입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담론이지요. (p. 416)

 

□ 멜서스의 인구론은 사회 개혁의 열망을 잠재우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과학이라는 옷을 입히는 것 (p. 417)

 

Ü 사회다윈주의와 연결되어 전쟁을 부추기기도 했다. 지배들로부터 우생학적 우월감을 제공하여 열광케 한 주장이다. 곧이어 마르크스의 급진적 계급론은 이와 대조를 이루었다.

 

□ 욕구가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탁월한 인문 철학 (p. 421)

 

Ü 법가는 단순한 법치주의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사랑이 근거한 인문적 법치를 주장했다.

 

□ 푸른 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된 것이지만 물보다 차다. (p. 422)

 

Ü ()()()()() ()()()() 氷水(빙수)()() ()()()(), 이 말은 순자에서 나온 말이었구나.

 

곧은 나무를 휘어서 바퀴가 되게 하는 것을 유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바퀴가 예전처럼 다시 펴지지 않는 것도 이 유의 효과입니다.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 조직이 바로 예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p. 423)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에 절도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p. 428)

 

법가와 천하 통일 (한비자)

 

□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 또는 변화사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守株待兎(수주대토)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p. 432)

 

법의 공개성이야말로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440)

 

匹夫匹婦(필부필부)라 하더라도 반드시 상을 내리고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림 (p. 440)

 

Ü ()()()()

 

□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된다. (p. 441)

 

현재 우리 사회에는 범죄와 불법 행위라는 두 개의 범죄관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등은 범죄 행위로 규정되고 선거사범, 경제사범, 조세사범 등 상류층의 범죄는 불법 행위로 규정됩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p. 443)

 

Ü 상류층이란 물적 권한과 법적이고 행정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텐데 그 권한은 결국 인민에게서 나오는 것을 인지한다면 매우 우스운 일이다. 권한을 줬던 사람들이 핍박 받고 권한을 받았던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자신들이 잠시 가지고 있는 권리로 사면 받는다.

 

□ 한비자 법의 기본 성격 1. 법의 성문화, 2. 전국적으로 공포된 공지법, 3. 전국적인 법의 통일성 (p. 444)

 

□ 정나라에 차치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잊은 것을 알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p. 451)

 

Ü 탁이란 책입니다.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저자)

 

송나라 사람 예열은 대단한 능변가로서 흰 말은 말이 아니라는 변론으로 직하의 변자들을 꺾었다. 그러나 그가 흰 말을 타고 관문을 지날 때 말의 통행세를 물지 않을 수 없었다. (p. 452)

 

모든 사상은 다른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파란만장한 역사적 전개 과정의 일환으로 출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철학 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제약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p. 460)

 

□ 춘추전국시대, 임금을 죽인 것이 36,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52 (p. 462)

 

Ü 개판이었군

 

□ 군현제를 통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은 1911년 신해혁명 때까지 이어진다. 그야말로 초안정 시스템 (p. 465)

 

강의를 마치며

 

□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 (p. 472)

 

□ 대방광불화엄경 :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 (p. 473)

 

□ 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은 것,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 한 개라도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무한히 크고 넓은 것 (p. 474)

 

화엄학의 핵심이 바로 연기론

불교에서는 깨닫는 것, 즉 각이란 연기의 망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잇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 즉 업을 깨닫는 일입니다. (p. 475)

 

수많은 사건들의 극소수만이 그 극소수의 극히 작은 부분들만이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들은 우리가 그 전체를 볼 수 없는 거대한 과정 위에서 생멸하는 작은 점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은 점들에 대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성을 부여합니다. (p. 476)

 

Ü 그래서 자본주의가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겠다. 공동체적 관념과 연기론적 관념이 있었다면 부끄러워 한 시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이 비정상의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다.

 

□ 불교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 제석천의 그물망, 중중무진의 영상이 다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p. 477)

 

□ 인과 과는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을 ()()()()라 합니다. (p. 478)

 

Ü 나 아닌 것이 없고 나와 같은 것이 없다.

 

□ 문명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사상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불교의 전래와 17세기 이후 서구 사상이 도입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p. 481)

 

Ü 그 또한 대륙적 소화력으로 ()() 되었다.

 

□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망이라 하지 않고 도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망이라고 할 정도로 중화주의는 초민족적 세계관이며 문화주의적 세계관이었습니다. (p. 481)

 

□ 해탈에는 일체의 사회적 관점이 없습니다. 모든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업적에 대하여 일말의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 무정부적 해체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p. 483)

 

대학

 

대학은 修己治人(수기치인)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유가 사상 중에서 가장 깊이 있는 내용 (p. 486)

 

格物(격물) 致知(치지) 誠意(성의) 正心(정심) 修身(수신)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 (p. 488)

 

Ü 대학 사상의 메커니즘

 

□ 테러란 기본적으로 거대 폭력에 대한 저항 폭력입니다. 거대 폭력이 먼저 거론되어야 하는 것 (p. 492)

 

중용

 

□ 정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도요, 용은 천하의 정한 이치이다. 이 편은 바로 공문에서 전수한 심법이나 자사는 그것이 오래 되어 어긋나게 될까 봐 염려하였다. (p. 495)

 

□ 중은 미발의 상태이지만 근본을 점하고 있는 본체론적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발하여 중절을 이룰 때 그것을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의 개념이며 ()는 절도에 맞게 노력하는 ()를 의미합니다. (p. 498)

 

□ 너를 묶는 그물을 찢어라 (p. 503)

 

Ü 공자, 육경도 존숭할 필요가 없다.고 양명은 선언했다. (저자)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적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p. 505)

 

Ü 창신은 분명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과정이겠으나 그것은 아플 수 있고 괴로울 수 있다. 발 디딘 곳이 현실이므로 그러하다.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p. 505)

 

인성의 고양은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

바다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고전 독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독법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근대성을 반성하고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문명사적 과제와 연결된다는 의미 입니다. (p. 507)

 

□ 상품문화는 우민화의 최고 수준 (p. 507)

 

□ 우리의 시각을 여기의 현재에 유폐시키지 않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친 전체적 조망과 역사 인식을 갖게 하는 것 (p. 507)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

1.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 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

2.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

3.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p. 509~510)

 

□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p. 511)

 

種樹郭橐駝傳(종수곽탁타전)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p. 515)

 

Ü 탁타는 지극히 엄정한 자기 검열의 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과 자신이 하지 않아야 할 최대한의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3. ‘갇힌 자의 열린 사유(내가 저자라면)

, 이 책은 씹어 삼키고 싶었다. 단어 하나 하나를 흘려놓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올 한 해 비판적 글 읽기를 하지 못했다. 누군가 말하길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지적 자립이 더딘 소아적 책 읽기라고 했었다. 그러나 나는 태산준령 앞에 삽 자루 하나 들고 다 퍼 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비판적 책 읽기는 내 삽 자루가 8부 능선에 다다른 뒤에나 가능할 것 같다.

 

이 책 역시 나는 비판 없이 읽어 내렸다. 비판 하고 싶지 않았고 비판할 지적 체계가 갖추어 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비판적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존재론적 사유를 존중하지 못하는 저자의 태도는 다소 거리가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가 서두에 말한 대로 時制(시제)’를 고려해야 하는 일이다. 저자는 20년 하고도 20일을 영어의 몸이었다. 사건은 군부 독재하에 일어난 일이며 이 군부 독재라는 정치 상황은 미국의 패권적 자본주의에 100% 영합하는 정권이었다. 저자는 육체가 해방된 이후에 보았던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정도로 자본화 되어 있는 사회이지 않았겠는가. 그가 천착할 수밖에 없는 사상은 결국 관계론적 입장이 고도로 설파되어 있는 고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읽는 내내 저자와 저자가 소개하는 제자백가들에게서 캠벨이 어른거렸다. 서양의 관계론의 수좌는 캠벨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존재라는 개념이 과정 속에 있으면서 존재 간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유라든가 짐승과 물과 바다가 형제지간 이라는 만유신론을 뛰어넘는 관념이 그러했다.

 

책의 구성은 러셀의 서양의 지혜와 가깝다. 러셀과 신영복, 신영복과 러셀. 닮아 있다. 참여 지식인의 모습이 그러하고 철학사적 집대성의 노력이 그러하다. 서양철학사와 서양의 지혜를 편찬하며 서양의 관념을 한 줄로 꿴 러셀은 동양 고전을 집대성하여 강의한 신영복과 일맥한다. 러셀 역시 시기와 철학자 별로 구성하였고 신영복 역시 그러했다. 철학사적 관점과 역사에 대한 인식의 진보성에서 서양에 서양의 지혜가 있다면 동양에 강의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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