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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7일 22시 02분 등록

오르한 파묵

Ferit Orhan Pamuk

(1952 6 7, 이스탄불 출생)

 

터키 출신의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노벨상을 받은 가장 젊은 작가 2명 중 한명이다.그의 책은 천백만부가 팔렸고, 60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현재 콜럼비아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친다.

 

이스탄불에서 부유한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어려서 이혼하였다. 이스탄불의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였는데 이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그의 유년기 꿈과 연속선에 있던 것이다. 그러나 파묵은 3년 만에 자퇴를 하고 프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저널리즘으로 전공을 바꿨다. 파묵은 <소설과 소설가>에서 자신이 18세부터 30세까지 밤을 새면서 소설들에 심취해서 읽었다고 회고하였다. 22세에서 30세 동안, 파묵은 어머니와 살며 그의 첫번째 소설을 쓰며 출판사를 알아보았다.

 

1982년 역사가인 Aylin Türegun과 결혼하였고 그녀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동안 파묵도 그 대학의 연구교수로 지냈다. 그 곳에서 파묵은 <검은 책>을 집필하였다. 그들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다. 부부는 2001년 이혼했다. 2010년 파묵은 소설가이자 부커상 수상자인 키란 데사이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자신을 신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문화적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무슬림(Cultural Muslim)으로 칭한다. 파묵은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1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과 30만 명의 쿠르드인이 터키 당국의 손에 학살당했는데도 터키는 지금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그 사건에 대한 공개 언급이나 토론을 금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여 터키내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 발언의 목적이 자국의 언론의 자유를 위함이었다고 말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파묵은 암살 시도를 겪기도 했다. 법정에서 파묵은 6000리라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터키 및 국제 문학상을 여러차례 수상했으며, 2006 10 12일에 터키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5년도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타임 100 list)에 선정되었다. 2005 11(54) 2008 6(4)에는 미국의 포린 폴리시와 영국의 프로스펙트 잡지가 인터넷으로 진행한 앙케이트에서 세계 100대 지식인에 선정되었다.

 

 

 

 

 

 

 

 

소설과 소설가

(The Naï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1.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11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

è 이 책의 첫 번째 문장. 데일 카네기의 책 첫 페이지가 주었던 충격과 비슷했다. 소설의 위대한 매력.

 

12 나는 40년 넘게 소설을 읽어 왔습니다. 나는 소설을 읽는 데도 여러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역시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소설은 가볍게 대할 수도 있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이성을 내맡길 수도 있지요. 우리는 소설을 때로는 논리로, 때로는 눈으로, 때로는 상상력으로, 때로는 이성의 아주 일부분만으로,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때로는 책이 원하는 대로, 때로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읽습니다. 젊은 시절 한때 나는 소설에 완전히 몰입하여 읽었습니다. 심지어는 일종의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에, 그러니까 열 여덞 삶과 서른 살 사이에,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과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치 화가가 산, 들판, , , 바위 들로 뒤덮인 형형색색의 복잡하고 생동감 있는 풍경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그려 내듯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è 즐기면서 심취한 시간이 있다. 특히 뒷부분에서 그 시기가 17살에서 30살 사이로 약 13년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일 만시간의 법칙이 적용된다.

 

15 이러한 순간에는 마치 전혀 낯선 곳에 떨어진 겁먹은 동물처럼 나의 지각의 모든 문이 활짝 열렸고, 머릿속은 아주 빨리, 아주 다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들어가려는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손에 들린 소설의 세부 사항에 전력을 다해 주의를 기울이고, 상상 속 단어들을 그림으로 전환하고, 소설에서 묘사하는 모든 것을 눈앞에 떠올리기 위해 발버둥 치곤 했습니다.

 

18 우리는 한 페이지 뒤에서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시장과 마주하게 되고, 곧 그의 성격을 알게 되지요. 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갑니다. 풍경화를 멀리서 볼 때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풍경 속 사람들의 생각과 미묘한 분위기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중국 산수화 속 바위산, , 소나무 숲 사이에 작게 그려진 어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이윽고 그의 눈을 통해 거대한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됩니다.(중국화는 이렇게 감상하도록 그려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풍경화가 그 안에 있는 인물의 생각, 감정, 지각을 반영하려는 의도로 그려졌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20 이 운전자 비유는 단지 독자뿐만 아니라 소설가에게도 적용됩니다. 어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사용하는 기교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에서 하는 온갖 작업과 계산도 잊고, 소설 예술이 제공한 기어, 핸드 브레이크, 버튼 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중에 새로 발명된 것도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로 씁니다. 소설 쓰기에(그리고 독서에도)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유의 독자와 작가를 소박한 사람

이라고 부릅시다. 이것과는 정반대되는 감성, 그러니까 소설을 읽거나 쓸 때 텍스트의 인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자에 마음을 빼앗기고, 소설을 쓸 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보루지요.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입니다.

또는 ‘naïve’한 동시에 ‘sentimentalisch’해야 하기도 하지요. 이 분류는 1795년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가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처음을 ㅗ제기했습니다. 실러가 천진함과 순수함을 잃고,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현대 시인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한 독일어 단어 ‘sentimentalisch’는 사실 감상적인이라고 옮겨야 합니다.

 

23 일곱 살에서 스물두 살 사이에, 장차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 소박한 화가로 남았고, 어쩌면 그 사실을 깨닫고 그림을 그만두었던 것 같습니다.

è 작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처음부터 확고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는 노벨 문학상을 탄 후에도 글보다는 그림을 더 잘 그렸으리라고 회상하였다. 그만큼 확고하지 않은 정체성 때문에 떨어지는 작품 수준에 면죄부를 준다거나 정체성 그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겪는 보편적인 현상. 웬만해서는.

 

26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전체 풍경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 머릿속으로는 항상 배후 어딘가에 있을 어떤 모티프, 아이디어, 의도, 숨은 중심부를 찾습니다.

2.     우리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합니다. …소설을 읽으며 희열을 느낀다는 말은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3.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작가가 설명한 것 가운데 어디까지가 경험이며,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궁금해합니다.

4.     우리는 계속해서 궁금해합니다. 현실이 이러한 것일까? 소설에서 설명하고, 보여 주고, 묘사한 것들이 지금 우리가 삶을 통해 아는 현실과 같은 것일까?

5.     우리는 이러한 난관주의 아래 (소설 예술의 심장부에는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적절한 형태를 부여한다면, 현실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 적절한 단어, 정확한 비유, 상상과 이야기의 힘, 문장의 축적, 산문의 비밀스럽고 솔직한 시와 음악을 가늠하고 음미합니다. 스타일이 주는 희열과 과제는 소설의 심장부에 있지 않고, 심장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6.     우리는 주인공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들을 통해 작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 소설을 읽을 때 도덕은 풍경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소설 주인공을 겨냥해서는 안됩니다.

7.     우리 머릿속에서 이 모든 작업이 동시에 행해지는 사이, 한편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떠올리며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특히 문학성 높은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텍스트와 맺은 밀접한 관계는 우리 독자들에게 마치 사적인 성공처럼 다가옵니다. …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이 공ㅂ검 관계를 해치는 속성을 숨기고 묵인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느라 분주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믿기 위해, 작가가 말하는 모든 것을 그가 원하는 만큼 믿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가의 어던 집요함, 고집, 그리고 강박관념이 옳지 않게 보일지라도, 책에 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계속 읽고 싶기 때문입니다.

8.     우리 기억도 한편으로 전혀 쉬지 않고 열심히 작동합니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 준 세계에서 의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우리는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그러려면 소설의 모든 세부 사항을, 마치 나무의 모든 잎사귀를 기억하는 것처럼,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작가가 부주의한 독자를 도와 주기 위해 소설을 단순하고 가볍게 만들지 않은 다음에야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9.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 무의식적으로 소박하게 또는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작업입니다.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34 나는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 사이에, 바로 이러한 희망에 사로잡혀 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내 방에서 밤을 새워 가며 읽었던 모든 소설을 나에게 우주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파묵 씨, 당신은 이런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39 소설을 사랑하고 소설을 습관적으로 읽는 것은 논리와 상상력, 이성과 몸이 서로 충돌하는, 중심부가 하나뿐인 데카르트 주의 세계의 논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의미입니다. 소설은 서로 모순되는 사고들을 우리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고, 동시에 이해하게 만드는 특별한 구조입니다. 이 점은 이전 강연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41 내 말을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지길 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소설 예술은 독자와 작가 간에 허구에 대한 완벽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 완전한 상상의 산물도 아니고, 완전한 실재도 아니라는 건ㅅ은 독자도 작가도 알고 합의한 것입니다.

è 소설이 허구임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는데, 파묵은 마치 회화에서 원근법이 당연하게 여겨지듯 소설의 허구도 개발된 도구라고 말한다.

 

50 안나 카레리나가 야간열차에서 느꼈던 것들은 우리가 경험한 어떤 것들과 우리를 매료시킬 정도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다르기도 합니다. 삶에서 연유하는 이 세부적인 감각은 오로지 경험으로만얻을 수 있기에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인생 경험을, 자신의 감각적 세계를 설명했다는 것도 우리는 머릿속 한구석에서 알고 있습니다. 플로베르의 사랑받는 인용구 내가 보바리 부인입니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일 겁니다. 플로베르는 여자도 아니고, 결혼하지도 않았고, 주인공과 비슷한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감각적인 경험들을(그녀의 불행, 화려한 삶에 대한 갈망, 지리멸렬한 시골 생활, 중산층의 현실과 환상 사이의 가슴 아픈 간극을) 그녀처럼 경험했고, 그녀처럼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관점을 보바루 부인의 관점을 통해 설득력 있게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이 모든 재능과 역량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로 실제 있었던 일처럼 보이는 이 모든 세부 사항들이 사실은 플로베르의 상상일 수도 있겠다고 우리는 때로 느끼곤 합니다.

 

51 세부 사항들이 정확하고 분명하고 아름답게 묘사될 때면 우리는 맞아, 정확히 이래, 바로 이거야.”라고 감탄합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상상 속에서 장면을 떠올리고 작가에게 열광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가 모든 것을 마치 실제 경험한 것처럼 설명할 수 있으며, 전혀 경험하지 않았던 것도 실제 경험한 것처럼 우리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도 느낍니다. 이러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작가의 역량이라고 합시다. 이 역량은 정말로 멋진 것이며, 소설가의 존재를 잠깐이 아니라 전적으로 잊고 소설을 읽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재미없는 일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환기하고자 합니다. 그 어떤 소설을 읽건 내내 작가를 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설의 감각적 세부 사항들을 항상 우리의 경험과 비교하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소설 읽기의 기본적인 즐거운 가운데 하나는 마치 기차에서 소설을 읽는 안나 카레니나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상상에 의존한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소설, 판타지 소설, 공상과학 소설, 철학 소설, 연애 소설, 그리고 이것들의 혼합인 다른 많은 소설도 사실주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소설가가 쓰고자 하는 시대의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둡니다.

 

53 유사성은 우리로 하여금 문학을 통해 모든 인류를 상상하게 하고, 세계 문학에 대한 생각으로 이끕니다. 하지만 마신 커피 잔을, 떠오르는 태양을, 첫사랑을 모든 소설가가 각기 다르게 경험하고, 가기 다르게 표현합니다. 이러한 상이성은 소설가의 모든 등장인물에게 이어져, 작가 고유의 문체와 서명을 이루는 배경이 됩니다.

 

55 나의 독자들이 나의 등장인물들의 모험을 보며 내가 경험한 일이라고 생각해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 주장에 반박하여 나를 보호할 허구에 관한 이론이 내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소설 이론이 실재로부터 상상의 독립성을 지켜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어떤 독자가 나의 소설에서, 그것들을 나의 것으로 만든나의 진짜 삶의 경험을 감지했다고 말하면, 나는 내 영혼에 대한 은밀한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그 고백을 다른 사람들이 읽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러웠습니다.

 

문 하나를 여는 것에서 옛 애인을 기억하는 것까지, 인간적인 온갖 세부 사항을 포괄하는 이 감각적인 순간들은 소설에서 다른 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영감의 순간들을, 개인적인 창조성의 지점들을 구성합니다. 덕분에 작가가 경험에서 직접 얻은 지식 또는 흔히 말하는 소설의 세부 사항이라는 것도 상상력과 분리하기 어려운 형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58 나는 여기서 소설 쓰기와 읽기가 주는 즐거움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 의해 완전히 망쳐진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1.     전적으로 소박한독자들 :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소설이라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텍스트를 작가의 자서전 또는 경험담을 약간 고친 연대기라고 생각합니다.

2.     전적으로 성찰적인독자들 :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작가의 가장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했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모든 텍스트가 철저한 계싼 아래 만들어진 허구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런 사람들을 절대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설 읽는 즐거움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61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적은 폐쇄적 / 반폐쇄적인 전통 사회에서는 소설 예술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소설 예술이 발전하게 되면 소설은 인간의 사적인 특징, 감각, 선택 들에 대한 치밀하게 구성된 문학 서사를 제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끔 이끕니다. 전통적인 서사를 제쳐 두고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신, 황제, 장군, 군대, 국가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와 선택도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나는 끊임없이 소설을 읽으며 자유와 자신감이라는 감각을 충격적으로 경험했습니다.

è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소설에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나?

 

62 등장인물의 눈으로 볼수록 세계는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쉽게 이해됩니다. 소설 예술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은 이 친근함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진짜 주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아니라, 세계의 속성입니다. 주인공들의 삶, 세상 속에서 그들이 차지한 위치,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순간순간 보고 느끼는 방식 등이 순문학 소설의 소재가 됩니다.

 

65 19세기 들어 과학이 발견해 낸 자연의 법칙과 그 후 등장한 실증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소설가들은 현대인의 비밀스러운 영혼을 탐구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 여기게 되었고, 인상적인 주인공, 일관된 캐릭터,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대표하는 유형을 창조했습니다. 포스터는 19세기 소설의 성공과 특징을 논한 <소설의 이해>라는 대단히 영향력 있는 책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다양성이라는 주제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그들을 분류하고 그들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설명했습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던 이십 대에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캐릭터가 현실 삶에서는 포스터가 문학에서 강조한 것만큼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했지만, 소설에서 중요하다면 삶에서도 중요할 게 틀림없으며, 어차피 난 인새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훌륭한 소설가는 톰 존스, 이반 카라마조프, 보바리 부인, 고리오 영감, 안나 카레니나,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잊지 못할 주인공을 창조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곤 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이것을 나의 과제로 삼고 글을 써 왔지만 아직 나의 소설 제목에 주인공의 이름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70 나는 소설 주인공이 나와 닮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온 힘을 다해 동일시하려고 노력합니다. 소설 속 세계를 그들의 논으로 보기 위해 그들을 상상하면서 서서히 실체를 완성해 나갑니다. 소설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개성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71 소설을 써서 생활비를 벌기 시작한 이래 25년이 흘렀지만, 어린 시절에 하고 놀았던 놀이와 유사한 직업을 가지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종종 생각합니다. 소설 창작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고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내게는 항상 아주 즐거운 일입니다.

 

75 하지만 소설을 쓸 때 부딪치는 과제와 진정한 즐거움은 소설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캐릭터를 파악할 때 얻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소설 주인공과 동일시하여 아니면 적어도 우리 영혼의 일부만이라도 동일시하여 잠시나마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비로소 느낄 수 있습니다.

 

79 소설 예술의 내부 구조에서 비롯된 황금의 법칙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야기와 별로 관계가 없고 사람이나 사물이 없는 풍경 묘사라 할지라도 소설 독자들은 주인공의 감정적정신적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차창 밖을 내다본 안나 카레니나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그냥 우연일 수 있습니다. 기차는 어떤 풍경이든 지나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안나의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며 우리는 젊은 여성의 심리 상태를 짐작합니다. 모스크바의 무도회에서 잘생긴 장교와 춤을 춘 후 안나는 기차 침대차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안나는 안정감을 주는 집과 가족에게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창밖 풍경, 두려운 힘을 가졌지만 아름다운 자연에 쏠려 있습니다.  좋은 소설에서는, 그러니까 위대한 소설에서는 풍경이나 다양한 사물에 대한 묘사, 짧은 일화, 약간의 일탈, 이 모든 것이 소설 주인공의 심리 상태, 기질, ‘캐릭터를 우리에게 환기시킵니다. 어떤 소설을 나뉠 수 없는 신경관들로,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바다라고 상상해 봅시다. 이때 각각의 점 안에는 소설 주인공의 영혼의 일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맙시다.

 

단어, 그림, 사물

 

89 나에게 소설 쓰기란 사물과 이미지로 둘러싸인 풍경 속에서 소설 주인공들의 생각과 감각을 감지해 내는 기량이라고 지난번 강연에서 말했습니다. 이 기량은 어떤 소설가의 예쑬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작가의 가장 좋은 예는 도스토옙스키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을 때면 가끔 항상은 아니고 우리 인간이 놀라울 정도로 심오한 경지에 다다랐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삶과 인간 그리고 인간 정신에 관해 아주 깊이 있는 지식을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이 지식은 무척이나 익숙한 동시에 무척이나 대단해서 때로 우리가 목격한 것이 두려우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우리에게 주는 지식이나 지혜는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 또는 단어적인 것입니다. 소설과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는 톨스토이 역시 때로 같은 강렬함으로 깊은 곳에 도달합니다. 이 두 작가는 같은 시기, 같은 문화 속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항상 비교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주는 지식은 대부분 시각적인 것입니다.

 

92 이제 우리의 진짜 주제로 돌아가, 내가 제일 강조하고 싶은 생각을 말하겠습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입니다. 소설은 주로 우리의 시각적 지능, 즉 사물들을 눈앞에 떠올리고 단어를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호소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문학 장르와 비교했을 때, 소설은 우리의 평범한 인생 경험과 때로는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감각에 대한 기억에 의존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소설은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냄새, 소리, , 감촉에 의해 일깨워진 느낌들도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흉내 낼 수 없는 풍부함으로 묘사합니다.

 

101 소설을 쓰고 싶다는 창조적인 충동은 시각적이 것들을 단어들로 표현하려는 의욕과 열정에 의해 더욱 활기를 띱니다. 당연히 모든 소설의 배후에는 개인적, 정치적, 도덕적 충동 또한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충동들은 다른 방법으로, 예를 들면 회고록이나 인터뷰, , 언론 노출 등으로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110 그 밖에 프루스트가 평생을 바친 자신의 유명한 소설에 대해 나의 소설은 그림이다.”라고 했던 말을 상기합시다. 소설 중반부쯤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들 가운데 한 명인 유명 작가 베르고트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풍경화 <델프트 풍경>에 나오는 황색의 작은 벽을 가리켜 어떤 비평가가 귀한 중국 미술품처럼 아름답다고 호평한 것을 신문에서 읽게 됩니다. 몸져누워 있던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구석구석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그림을 보러 갔습니다. 그리고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황색의 작은 벽면을 보고, 후회에 젖어 생의 마지막 말을 합니다. “내 최후의 작품들은 모조리 무미건조하단 말이야. 이 황색의 작은 벽면처럼 거듭 덧칠해서 문장 자체를 값진 것으로 했어야 옳았어.”

많은 프랑스 소설가가 그랬듯이, 예술 특히 그림에 아주 관심이 많았던 프루스트가 작가인 베르고트의 입을 빌려 자신의 느낌을 반영한 관점을 피력한 듯합니다. 하지만 먼저 프루스트씨, 당신이 베르고트입니까?”라고 질문하며 미소를 지어 봅시다.

내가 좋앟나ㅡㄴ 위대한 소설가들이 왜 화가처럼 되고 싶어하는지, 왜 그림에 질투를 느끼는지, 왜 화가처럼 쓰지 못했다며 후회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설 창작은 단어에 앞서 먼저 그림으로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그림을 단어로 표현하면서 독자들도 상상을 공유하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소설가는, 호라티우스의 화가처럼 뒤로 물러나 그림을 멀리서 편히 볼 수 없기 때문에(그러려면 소설을 한 번 더 읽어야 하니까요.) 묘사한 세계의 세부 사항에 숲이 아니라 난무에 각각의 순간에 화가보다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림은 우리에게 실재의 직접적인 묘사 또는 모방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어떤 그림 앞에 있을 때는 단지 그림에 속해 있는 세계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라는 그림 앞에서 느꼈던 것처럼, 그림의 객관적 실재성과 물성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 거기에 속한 사물에 대한 묘사와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에서는 작가의 묘사들을 우리 상상 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해야만 세계와 거기에 속한 사물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라고 합니다. 소설 예술은 먼저 그림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단어로 설명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13 이 무렵 나는 일곱 살부터 꿈꿔 왔던 화가의 꿈을 접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이 결정은 행복해지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어릴 때 그림을 그리면서 지극히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 이 즐거움이 갑자기 그리고 한 번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로 사라졌습니다. 그 후 35년 동안 소설을 쓰면서도 사실 내가 그림에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때는 더 천진하고 소박하며, 소설을 쓸 때는 더 성숙하고 성찰적이라고 느낍니다. 소설은 오로지 이성으로 쓰고, 그림은 오로지 재능으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선을 긋고 색을 칠하면 내 눈은 내 손의 결과물을 거의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나의 이성은 이 모든 것을 아주 나중에양 이해하곤 했씁니다. 소설을 쓸 때도 이와 같은 흥분에 휩싸이고 나서 한참 후에야 나 자신의 숲 속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곤 합니다.

 

114 빅토르 위고에서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까지 소설 외에 그림에서도 행복을 느낀 작가는 많습니다. 격동적인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스트린드베리는 <하녀의 아들>이라는 자전적 소설에서 그림 그리는 것이 자신을 아편을 피운 것처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게한다고 말했습니다. 소설에서도, 그림에서도 가장 숭고한 목적은 이렇나 행복일 것입니다.

 

박물관과 소설

 

125 소설이 일상생활의 경험과 감각을 묘사하고, 삶의 본질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작업을 통해 독자를 일깨운다는 얘기는 앞에서 여러 차례 했습니다. 동시에 소설은 인간적인 감정, 우리 주위의 평범한 일상, 제스처, , 태도 들에 대한 강력하고 풍부한 기록 보관소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식하지 못했던 다양한 소리, 단어, 일상 구어, 냄새, 모습, , 물건, 색깔은 오로지 소설가들이 이것들을 인식하고 단어로써 주의 깊게 배치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어떤 사물 또는 그림을 봤을 때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이야기와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카탈로그의 도움으로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사물들뿐만 아니라, 이미지, 대화, 냄새, 이야기, 신념, 감각 등이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묘사되고 보존됩니다.

 

126 유르스나르는 콩 요리 접시 좀 건네줘,”, “누가 문을 열어 놨어?”, “조심해, 비가 온다잖아!”처럼 일상생활에서 곧장 끄집어내어, 문체와 스타일의 변형을 겪지 않은 평범한 대화가 소설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만약 소설을 소실이게 만든 것이, 인생의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평범한 일상생활을 관찰하여 얻은 결과 가운데 두드러지는 면을 추출해 상상력으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유르스나르의 말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소설 예술이 겨우 19세기야 완성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대화가 가진 힘과 설득력이 없는 소설을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소설 세계의 기초가 되는 일상 언어는 평범한 순간과 임의의 감각을 구성하는 천연의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상 대화가 반드시 세세히 기록되어 페이지마다 배치되고 한 단락당 한 문장씩 쓰여, 소설 풍경을 지배할 필요는 없습니다. 프루스트에게서 배워야 할 수많은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127 마치 박물관이 사물을 보존하는 것처럼, 소설은 인간의 평범한 생각과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건너뛰곤 하는 이성의 불연 속성을 구어로 표현함으로써 언어의 묘미와 색과 냄새를 보존합니다. 소설은 단어, 표현, 관용구만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상 대화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기록합니다. 우리는 조이스의 작품을 읽을 때면 일상 언어의 묘미와 언어유희를 발견하고,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를 바라볼 때처럼 행복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조이스 이후로, 포크너에서 울프까지, 헤라믄 브로흐에서 가브리엘 마르케스까지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내적 독백을 통해 우리 머릿속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 주기보다는, 언어가 우리 삶에 미치는 아름다움과 기이함을 관찰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일상 언어의 포착은 산문 소설을 정의하는 중요한 기준이고, 이러한 점에서 최초의 터키 소설은 1896년에 출판된 레자이자데 마흐무트 에크렘의 <마차 열애>입니다.

 

131 하지만 친절한 독자들의 호의적인 말들은 시간이 흘러 역사와 함깨, 죽음과 함께 공동체가 흩어지면 소설도 잊힐 거라는 느낌을 줍니다. 역사는 대부분 그런 방식으로 흘러왔으니까요. 소설의 지속성, 작가의 불멸성 같은 인간의 허영심에 뿌리 깊이 연결된 주제는 이제 그만두고, 소설과 박물관에 대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133 하지만 잠시 후 책에서 눈을 떼고 다시 고개를 든 아이셰는 제이넵도 가방에서 프루스트의 그 책을 꺼내 읽는 것을 보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아이셰는 제이넵처럼 옷을 입는 아이도 읽는 책을 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프루스트를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133 이스탄불에서는 단체관광이 막 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관광객들이 호텔 방에 놓고 간 책들을 모아서 파는 고서점에 가면 형형색색의 포켓북 사이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찾을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읽을 수 있었던 책들만 놓고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134 소설 읽기와 상상하기에 투자되는 노력의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고 특별해지고 싶은 바람이 숨어 있습니다. 이 감정은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사는 소설 주인공들과 동일화되고자 하는 바람고도 맞물려 있습니다. 조이스의 <울리시스>를 읽을 때, 우리는 먼저 우리와는 차별되는 주인공들과 동일화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습니다. 그들은 우리와는 삶, , 환경, 공포, 장래희망, 전통, 모든 면에서 다르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주 어려운책을 읽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겁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우리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조이스 같은 어려운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우리 두뇌 한구석에서는 조이스 같은 작가를 읽고 있는 우리 자신을 축하하느라 분주합니다.

 

136 발자크, 스탕달, 디킨스가 19세기에 발견했고,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소설 예술은 역사가 150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대한 19세기 소설이라고 합시다.) 나는 이 위대한 작가들이 프랑스어권과 영어권 독자들의 가슴에 불멸의 상징이자 언어의 깃발로서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150년 후, 미래 세대가 내가 그들의 책에서 느꼈던 즐거움을 느끼리란 확신은 없습니다.

 

중심부

 

148 하지만 우리가 풍경 속 숲, , 강이 가진 매력에 얼마나 휩싸이건, 나무와 절벽의 경이로움, 기이함, 아름다움에 얼마나 매료되건, 그 풍경에는 각각의 나무와 사물을 다 합친 것 이상의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때로는 명백하게, 때로는 이성의 한구석에서 어떤 불안감과 함께 느낍니다.

 

151 만약에 소설 창작에 신비로운 요소가 있다는 것일 믿어야 한다면, 중심부가 어디에 있는지를 추측하려고 애를 쓰며 읽는 경험 많은 독자가 그러하듯이 경험 많은 소설가 역시 소설을 써 나갈수록 중심부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며, 이 중심부를 찾아서 명확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집필 과정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작업이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154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마치 집에 있는 듯한 안전하고 평온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장르 소설을 읽습니다. 위대한 순문학 소설을 찾는 이유는 세상에서 길을 잃은 듯이 느끼고 삶의 의미를 알려 줄 지혜를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우주와의 관계가 단절된 현대인은 (이제 소박한 독자에서 성찰적인 독자로 변모한) 스스로 나아갈 바를 찾기 위해 소설을 읽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실러가 그랬듯이, 어떤 정신 상태와 문학 형식을 연결 짓겠다는 뜻입니다. 청년 시절 나는 정신적인 결핍감 때문에 형이상학, 철학, 종교뿐만 아니라 문학도 읽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이십 대에 거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흥분해서 중심부를 찾으며 읽었던 소설들 대부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에서 삶의 의미 또는 세상의 중심부를 탐색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들의 작가, 예컨대 톨스토이, 스탕달, 프루스트, 토마스 만,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울프에게서 얻은 통찰로 나 자신을 계발하고, 나의 세계관과 도덕적 감수성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155 소설을 써 나갈수록 중심부가 서서히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아는 어떤 소설가들은 별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과다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캐릭터가 피상적이고 어떤 인물이 불필요한지 하는 문제들은 중심부를 발견해서 명확해지고 나면 결정합니다. 세세한 세부 사항 역시 소설을 재검토할 때 보충합니다.

 

157 <전쟁과 평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중심부는 때로 이야기의 세부에서 빛나는 아름다움과 투명함과 함께 거대한 파노라마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율리시스>처럼 소설의 기법이나 형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율리시스>의 중심부는 플로이나 이야기에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주제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인간 정신의 작동을 시적으로 규명하여 지금까지 전혀 주목받지 못햇떤 우리 삶의 일부분을 조명하고 명확히 밝힌 희열에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일단 조이스 같은 스케일의 작가가 소설 심장부에 특정 기법을 통해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나면 같은 방법을 되풀이해 봤자 독자에게서 겨로 같은 효과를 불러올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조이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코프너의 가장 뛰어난 소설인 <음향과 분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가장 강력한 면은 주인공들의 생각과 내면을 보여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주인공들의 내면 독백이 얼우러지면서 나타나는 세계와 삶에 대한 새로운 그림입니다.

 

164 내 생각에 한 소설가가 창작자이자 예술가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소설 형식을 수수께끼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해답이 바로 그 소설의 중심부인 수수께끼! 가장 솝가한 독자라도 이렇나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의 의미, 즉 중심부를 찾으려면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챌 것입니다. 순문학 소설에서 수수께끼는 살인자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진정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보르헤스가 <모비딕>을 읽을 때 했떤 것처럼! 이처럼 복잡하고 섬세한 문학적 수준에 도달했을 때는 소설의 주제가 아니라 형식이 가장 커다란 호기심의 대상이 됩니다.

 

164 소설가가 실러가 말한 소박한 정신 상태에서 완전히 멀어져 성찰적으로 되는 가장 좋은 예는, 자신의 소설을 독자의 눈으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우리가 그린 풍경화를, 호라티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약간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다가가기를 반복하면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때 그림을 보는 사람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중심부라고 하는 것도, 사실 우리 자신이 만든 허구라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소설 쓰기라 세상 또는 삶에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부를 설정하고, 그것을 풍경 속에 독자와 상상의 체스 게임을 두면서 숨겨 두는 것입니다. 소설 읽기는 같은 작업을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독자와 작가 앞에 놓인 것은 오직 소설 텍스트뿐입니다. 일종의 즐거운 체스판인 것이지요! 모든 독자는 그 텍스트를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원하는 곳에서 중심부를 찾습니다.

 

169 톨스토이가 대화 도중에 아주 단순한 공식을 언급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에서 주인공이 지나치게 악한 사람이라면 약간 선한 면을 더해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라면 약간 나쁜 면을 더해야 한다.” 나 역시 같은 소박한 태도로 이와 비슷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소설을 쓰다가 중심부가 아주 명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는 그것을 약간 감춥니다. 반대로, 중심부가 너무 깊숙하게 감춰져 있으면 약간 드러내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어떤 소설에서 중심부의 힘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지 않고, 독자들이 찾아 나서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균형감 있고 세부 사항까지 잘 조율된 어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중심부를 완전히 찾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 역시 완전히 버리지 못합니다.

 

에필로그

 

이 책은 내가 소설에 대해 아는 것들과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총체입니다.

 

177 하지만 나의 진짜 고민은 소설이 우리에게 끼치는 옇야, 그리고 소설가들이 어떻게 쓰고, 소설은 어떻게 쓰이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소설 독자로서의 경험과 소설가로서의 경험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소설들을 읽고, 그런 소설을 직접 써 보려고 애쓰면서 소설에 대해 가장 잘 배우게 됩니다. 니체의 인간은 예술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예술 작품을 창조하려고 애써야 한다.”라는 말은 지당하게 느껴집니다.

è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카뮈의 <이방인>은 라벨의 <볼레로>와 구성이 비슷하다. 파묵은 소설이 시각적 예술이라고 말한다. 음악은 어떠한가? 나는 음악에서 감명을 많이 받는데 음악을 닮은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177 나의 관점은 오늘날 내가 소설을 이해하는 방식과 궤를 같이합니다. 스물두 살 때 어느 날 갑자기 가족과 친구와 아는 사람들에게 화가가 되지 않겠어요, 소설가가 되겠어요!” 라고 말하고 진지하게 첫 소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어쩌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끔찍한 미래로부터 모두들 나를 보호하려 했습니다.(독자층이 한정된 나라에서 소설 창작에 인생을 바치겠다니!) “오르한, 사람은 스물두 살 때 인생을 알 수 없단다. 나이를 좀 먹고 인생을, 사람들을, 세상을 경험해 봐. 그런 다음에 소설을 써!” (그들은 내가 단지 소설 한 권만을 쓰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말에 크게 분개했고,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은 우리가 인생을, 사람을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예요. 다른 소설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써 보고 싶기 때문에 쓰는 거라고요!”

è 오르한은 지극히 비관적인 전망 속에서 소설가의 길을 시작했다. 나는 의사라는 직업이 있고 내 집이 있는 상황에서도 소설가로서의 길이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è 낭만적이지 않은 삶은 의미가 없다. 낭만이란? 의지가 낳은 충동을 따를 용기.

 

180 2009 10울에 호미 바바를 만나러 뉴욕으로 가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이 강좌에 참고할 책 두 권이 있었습니다. 천 번째 책은 이제는 유행이 지났다고 확신했던 포스터의 <소설의 이해>입니다. 한때 대학 영문과 교수요목에 포함되었떤 이 책은 이제 문예창작과에서 읽힙니다. 거기선 글쓰기가 정신적으로 철학적인 행위가 아니라, 어떤 기술로 취급되더군요. 이 채을 다시 읽은 후, 이 책이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180 자신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점차 모든 인가넹 대해 논의할 수 있음을 감지한 최초의 위대한 작가는 물론 미셸 몽테뉴입니다. 그가 계발한 기법 덕분에, 그리고 20세기 초에 확립된 시점 기법을 비롯해 오늘날까지 근대 소설에서 발전된 다른 많은 기법 덕분에, 우리 소설가들의 처 번째 임무가 주인공들과 동일화하는 것임을 이제는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쓰면서 나도 몽테뉴의 낙관론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나의 소설 창작 경험에 관하여, 소설을 쓰고 읽을 때 실제로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솔직하게 얘기한다면, 모든 소설가에 대해 그리고 소설 예술 전반에 대해 논의할 수 있으리라 믿는 난관론에 나는 기대고 있습니다.

 

 

 

 

 

 

 

 

내가 저자라면

 

막상 책을 손에 넣고 나니 얆아서 마음에 들었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읽은 후여서인지, 책의 내용은 표지가 떠들어댄 것처럼 획기적인 것은 없었다. 노벨상 수상자이고 하버드에서 강연한 내용도 기존의 소설 기법과 특별히 다르지 않음을 확인시켜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겠다.

 

그러나 책의 첫 한 마디는 강력했다.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 원문이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 삶이 아니라 제2의 삶은 아니었을지? 두 번째 삶이란 죽고 나서 다시 사는 생의 느낌이 강하고, 2의 삶이란 다른 차원의 삶을 의미한다. 혼합 우주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나는 당연히 두 번째 의미로 이해했다. 전율을 느꼈다.

 

파묵이 18살부터 30살까지 고시 공부를 하듯 소설을 읽었다는 대목 그는 소설을 읽었다고 표현했다 에서 고승덕스러운 자라고 생각했다. 이미 나에겐 파묵이 닦아온 시간들이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파묵은 30세에 정말 글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는 맨땅에 헤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을 써야 한다. 일단 안나 카레니나부터 시작해야 할까? 난 그녀의 이름이 지금껏 카레나인 줄 알았던 사람이란 말이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고서도 그래도 나는 그림에 더 재능이 있었같은 망언을 하는 걸 보니, 어떤 직업에 정체성의 적을 두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임을 깨달았다. 특히 파묵처럼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소설가라는 직업에 딱히 명예를 부과하지 못하는 처지라면. 파묵은 자신이 소설을 쓰겠다고 공언하였을 때 자신의 가족들이 어떻게 뜯어말렸는지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22살의 파묵은 더없이 훌륭한 답변을 했다. “소설을 이해할 수 있고 그 비슷한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쓰는 거라구요!” 그는 그리그를 떠오르게 한다. 자국의 음악제를 열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23살에 이를 실현해낸 음악가. 절실하면 당장 해야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파묵 잘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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