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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8일 07시 22분 등록

문명과 수학

리처드 만키에비츠/ 이상원 옮김, 김홍종 감수


1. 저자에 대하여

 리처드 만키에비츠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책과 인터넷 서점에서 본 내용을 근거로 그를 소개한다.  그는 작가다. 동시에 이벤트 기획자이며 디자이너다. 수학의 문화적 측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란다. 이벤트 기획자라는 말에서 시선과 마음이 멈췄다. 어떤 이벤트를 말하는 것일까? 이벤트 기획자에게 수학이 어떤 도움을 줬을지 궁금하다. 

 그는 “수학 수수께끼 여행”으로 새천년상을 받았고 2000년 수학의 해 자문역이자 유럽연합이 지원하는 수학센터 네트워크 구축 컨소시엄의 일원이다. 옥스퍼드 대학과 개방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현재 미들섹스 대학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수학을 대중에게 알리고, 수학이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 해주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서문에 따르면 이언 스튜어트는 그를 외로운 투쟁가라고 했다. 이언 스튜어트는 리처드 만키에비츠를 네덜란드 화가 모리츠 에셔의 전시회에서 만났다. 모리츠 에셔는 수학자가 아니지만 그의 초현실적 예술 세계를 지배한 타일 문양, 비유클리드 기하학, 순수 수학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이고 시각적인 흉내 등은 모두 수학적이 주제들이었다. 리처드 만키에비츠는 그 전시회 개최와 무슨 관련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단다. 다만 수년 동안 수학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과감한 시도를 계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 <문명과 수학>이다. 그는 ‘이전에 이런 책이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을 썼다고 감히 외치고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p5 수학 하면 학교가 떠오른다는 것은 그럭저럭 참아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로지 그것뿐이라는 사실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를 만들어낸 힘, 인간 지성 활동의 주된 흐름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오싹할 정도로 무지하다는 현실과 대체 어떻게 싸워나아가야 할까


p6 수학이 과학 기술 분야의 선봉장이며 기술 발전의 중심적인 힘이고 인류 문화 발전의 주역이라는 데 대해 이제 조금씩 합의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사실 수학은 늘 그러한 존재였다. 다만 사람들이 이제야 그것을 깨닫는 것에 불과하다. 


p6 수학은 학창 시절 배웠다가 어른이 되면서 바로 잊어버리는 산수 공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수학은 최소한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학문이며 인류 문화의 흐름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수학은 그 5000년 동안 그저 영향력을 유지했을 뿐인 예술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 문화는 바로 그 수학이라는 직접적인 바탕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수학은 재능을 타고난 비교적 소수의 인물들이 그때까지 존재하던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양 제거해 버리고 함께 경이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협력 작업이었다. 


p7 수학적 사고와 여타 인간 행동 사이의 상호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학은 우리에게 지도제작법, 항해술, 예술 화법, 라디오, 텔레비전, 전화기 등을 가져다 주었다. 수학이 없었다면 비행기 운항은 지금처럼 효율적이지 못했을 것이고 위성 텔레비전 채널 수는 기껏해야 10여 개에 불과했을 것이며 오늘날의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 생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수학 혼자 그런 일을 다 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 그 일들이 전부 다 훌륭했다고 말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 엄청난 영향력에 대해서는 누구든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 이 책의 주제인 수학은 이렇게 인류 역사라는 양탄자에서 제일 길고 화려한 실오라기이며 인류의 성장과 가장 밀접하게 엮어져 있다. <문명과 수학>에서 우리는 명료한 설명과 인상적인 그림, 사진을 통해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머리말

p9 이 책에서는 위대한 문명들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수학 이야기들을 골라 담았다. 

 태초부터 수학은 인간의 모든 행동에서 분명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교역, 농경, 종교, 전쟁 등을 통틀어 수학의 영향을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다. 그럼에도 그 역사의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인류 역사에서는 과학, 철학, 수학의 진화가 위대한 통치자나 피비린내 나는 전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앞으로의 역사 연구가 균형을 잡는데 이 책이 미약하나마 공헌하게 되기를 바란다. 

 수학은 요령부득인 기호의 학문이 아니다. 수학은 개념의 학문이다. 공간, 시간, 수, 관계 등에 대한 개념 말이다. 


p10 모든 개념은 통찰력으로부터 생겨난다. 계산 기법이 발전하면서 수학은 시각적 학문으로 다시 태어났다. 혼돈 이론이나 복잡계 등이 보여주는 멋진 구조는 복잡한 상징들을 다 걷어내 버린 아름다운 수학의 풍경이다. 수학적 정밀함과 예술적 감각을 결합한 새로운 미학이 등장하는 것이다. 


1장 수학의 시작

p16 인류의 수학 활동의 시작을 증명하는 자료를 살피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수학 문화를 바라보기 전에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넘어가자. 


p17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10진법 체계는 10을 기준으로 한다. 즉 한 단위가 열 개 있으면 다음 단위 하나와 같아지면서 한 자리가 높아지는 식이다. 하지만 바빌로니아 수학에서는 60진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방식은 시간을 세는 방법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왜 60진법을 썼는지는 분명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방식은 계산에 퍽 편리했고 결국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시간과 각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p18 무한히 계속되는 수에 대한 설명은 남아 있지 않지만 루트2를 60진법의 1:24,51,10으로 표시한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이는 소수점 다섯 번째 자리까지 정확한 것이었다. 이 결과가 어떤 풀이 과정을 거쳐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원후 1세기의 그리스 수학자 헤로의 이름을 딴 이 방법은 근 200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같은 답을 내놓고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또한 피타고라스가 태어나기 1000년 전부터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응용했다. 


p21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수 계산이 재화의 상속이나 분배와 고날녀되어 이루어졌고 이 경우 분자가 1인 분수가 근사값에 비해 더 정확했으므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집트에는 화폐가 없었고 교역은 재화, 일반적으로는 빵과 맥주를 기준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린드 파피루스에서 빵 아홉 덩어리를 어떻게 열 사람에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온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p22 각뿔대의 부피 계산과 같은 것은 정말로 의미가 크고 그만큼 많은 관심을 끌었지만 이것이 그저 피라미드와 고나련된 특수한 사례인지 아니면 애석하게도 그만 사라져버린 광대한 지식의 일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수학, 그중에서도 특히 기하학은 이집트에서 전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집트 수학과 그리스 수학의 공통점이 아니라 그 경향과 깊이의 차이, 그리고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서로 다른 이해 방식을 보고 놀란다. 린드 파피루스의 아메스가 언급한 ‘모든 수수께끼와 비밀’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셈이다. 


2장 하늘을 관찰한 사람들

p24 초기 수학은 상당 부분 교역과 농경을 위한 필요에서 발달했지만 종교적인 의식이나 천체의 운행과도 크게 관련이 있었다. 달력 제작은 천문학자이자 사제인 이들의 일이었고 하늘의 시간표를 그리자면 특별한 수학이 발달되어야 했다. 대부분의 고대 우주설에서는 지구가 중심이었고, ‘행성’이란 태양, 달, 그리고 관찰 가능한 다섯 개의 별을 뜻했다. 나중에는 천왕성, 해왕성, 토성도 관찰되어 행성 대열에 합류했다. 지구 곳곳에서 다양한 문명이 천체의 움직임을 기록하며 달력을 만들었고 그 모두가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시간 사이클, 즉 달의 주기로 결정되는 음력과 태양에 따르는 양력의 조화 방법을 찾아야 했다. 


p27 그리스에서는 아리스타코스가 태양 중심의 우주 체계를 주장했다. 아마도 태양이 가장 무거운 천체라는 자신의 계산 결과에 바탕을 둔 주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그의 이론을 지지하지 않았고 태양 중심 우주론은 16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행성 이론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이 절대적으로 신봉되어 행성들은 일정한 속도로 원형 궤도를 도는 완전 운동 상태에 있다고 믿어졌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구체적으로 관측되는 다양한 속도, 감속 현상, 육안으로도 느껴지는 행성의 밝기 차이 등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다. 이론과 관찰 사이의 괴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전원 개념이 도입되었다. 즉 행성의 궤도는 더이상 지구 자체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기준으로 하되 그 중심이 종원을 따라 움직이는 원 궤도인 주전원 주위를 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행성의 일정한 속도는 다양하게 변할 수 있고 동시에 행성은 설령 완벽한 원형은 아니라 해도 원형의 궤도 안에 놓이게 된다. 이 체계는 톨레미의 연구에서 가장 완벽하게 설명되고 있다. 


3장 피타고라스 정리

p32 학교에서 누구든 배우는 수학 정리가 하나 있다. 오늘날 그 정리에는 피타고라스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 고대 세계에 이 정리가 알려진 것은 피타고라스가 태어나기 훨씬 전이었다. 이 정리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문명 속에서 나타난 고대 수학자들의 특성과 관심사를 비교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 수학 사료 중에서 가장 흥미로은 것이 ‘플림프턴322’라고 불리는 점토판이다. 이 점토판은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플림프턴 322에는 가로 네 칸, 세로 열다섯 줄로 숫자가 적혀 있는데 아마도 더 큰 점토판의 일부 조각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이 표가 피타고라스 삼각형을 만드는 세 수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바빌로니아인은 이미 기원전 1800-1659년, 피타고라스가 태어나기 무려 1000여 년 전부터 피타고라스 정리를 알고 있었던 셈이 된다. 


p37 즉, 유리수와 무리수의 관계는 수학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유리수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무리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후 2000년 이상이 흐르도록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4장 유클리드의 <원론>

p40 그리스인은 북쪽으로부터 남하하여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 사이의 땅에 자리잡은 침략자의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이들은 탐욕스럽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이웃 민족의 지식을 흡수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렇게 얻은 지식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아낌없이 전달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스 세계는 민족보다는 문화에 의해 경계가 지어진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을 계기로 그리스 역사는 두 시기로 나누어지기도 하는데 수학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 두 시기를 각각 아테네 시기와 알렉산드리아 시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 이전까지의 그리스 수학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최초의 그리스 수학자라고 하면 미렐투스의 탈레스(기원전 624?~548)을 들어야 할 것이다. 다양한 기하학 정리를 최초로 작도함으로써 유클리드의 위대한 연역 체계에 전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 받는 인물이다. 

 

p41 그리스 수학의 가장 위대한 유산을 하나 꼽으라면 당연히 유클리드의 <원론>이다. 명성에도 불구하고 유클리드의 일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심지어 출생지조차 불분명하다. 후대의 인물 프로클로스가 남긴 기록을 통해 유클리드가 프톨레마이오스 재위 시절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르쳤다는 점, 기하학을 쉽게 배울 방법이 없느냐는 황제의 질문에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고 대답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뿐이다. 


p44 유클리드에게 ‘수’란 곧 정수를 의미했다. 

 

5장 <산경십서>

p48 최초의 순수 수학 서적인 <주비산경>은 바로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방 제후들에게 조언을 하면서 천하를 떠돌아다닌 수많은 유랑 학자 중 한 사람인 공자가 살다간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분서갱유를 단행한다. 뒤이은 한나라 치하,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200년까지에 이르는 시기에 학자들은 요행히 화를 면한 자료를 찾아다녔고 기억을 더듬어 책을 새로 적어내는 일도 많았다. 그 유명한 수학책 <구장산술> 및 주비산경 주석본들이 모드 이 시대에 나왔다. 


p48~50 마방진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은 수학보다 점술과 더 많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3000년 당시 유 황제라는 사람이 황하에서 솟아오른 마범의 용으로부터, 그리고 황하 지류에서 발견된 거북의 등껍질에서 각각 하나씩의 그림을 얻었다고 한다. 


p50 <구장산술>은 중국 수학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책의 상당 부분은 토지를 구획한다든지 물건을 나눈다든지 거대한 건설 작업을 관리한다든지 하는 실젝적인 작업에 필요한 계산 문제로 채워져있다. 그리고 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이나 방정식 풀이법도 나온다. 


p51 바빌로니아인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도 0을 표기하지 못했다. 0이 있을 경우 산목의 배열에 빈 공간이 생겨 표시가 되었지만 답을 적을 때는 이것이 반영되지 못했고 따라서 답이 18인지 180인지 1800인지 문맥을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8세기가 되면 인도 책을 번역한 중국 책에서 0을 점으로 표기한 증거가 발견된다. 동그라미로 표기하는 0은 그보다 훨씬 늦은 13세기에야 나타나며 산목으로 쉽게 만들어지는 ‘네모형’ 0도 마찬가지였다. 


6장 수학수트라

p57 실제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경우 이론적 연구는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하면 주어진 크기보다 정확히 두 배 더 큰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옷감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정사각형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어떤 식으로 천을 오린 다음 합쳐야 가장 효율적으로 더 큰 사각형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작도법이 직접적으로 술바수트라스에 제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향으로 사고했던 증거는 존재한다. 

 값을 표시하는 십진법 체계에서 인도-아라비아 수는 그 무엇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에 잠시 인도 수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중략)


p59 인도 수학의 고전 시기는 500년대 전후로 시작되었다. 당시 인도의 대부분 지역은 굽타 왕조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굽타 왕조는 학문과 예술 연구를 적극 장려했다. 수학 연구의 중심은 왕국의 수도인 쿠숨 푸라, 북쪽의 우자인, 남쪽의 미소레 세 곳이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수학자는 <아리아바티야>를 쓴 아리아바타와 628년에 <브라마스푸타 싯단타>라는 책을 남긴 브라마굽타였다. 두 사람의 전공 분야는 수리 천문학과 방정식 해석이었다. 


p60 브라마굽타는 우자인 학파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였다. 그의 책 <브라마스푸타 싯단타>는 당시 천문학 연구의 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다. 수학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역법 계산과 천문학에서 발생하는 부정 해석이 다루어진다. 아리아바타는 유클리드의 <원론>에 설명된 계산법을 사용하여 선형 부정 방정식을 풀었다. 방정식이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풀릴 때까지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계수의 크기를 줄여 가는 것이다. 


결과를 증명하는 작업의 중요성은 바스카라 시대에 와서야 강조되기 시작했다. 


7장 지혜의 집

p64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새로운 일신교가 탄생하여 이후 기독교와 페르시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622년 예언자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도망쳐 메디나에 은신한다. 그로부터 겨우 8년 뒤 그는 군의 수장이 되어 메카로 개선한다. 무하마드의 계시에 감명받은 추종자들은 코란의 메시지를 전파하면서 코르도바에서 사마르칸트까지 이르는 이슬람 제국을 건설했다. 제국은 초기에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수도는 다마스커스였다. 


p64 대수학의 역사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저작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판토스가 쓴 <산술>이다. <산술>은 기하학적 증명을 빌리지 않고 수적으로 방정식과 부정 방정식을 푸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 수학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 


p66 아부 자파르 무하마드 이븐 무사 알콰리즈미라는 긴 이름의 수학자가 아랍 수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쓴 대수학 책 <복원과 축소의 과학>은 유럽 수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수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algebra는 책 이름의 일부인 al-jabr에서 나온 것이다. 알콰리즈미의 목적은 교역, 상속, 토지 경작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었다. 책 내용은 선형 방정식과 2차 방정식을 망라한다. 책 제목에 나오는 ‘복원’과 ‘축소’란 대수 계산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시대 아랍 사람, 특히 알콰리즈미는 교역, 상속, 토지 경작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학을 공부했고, 연구했다. 우리는? 우리는 교역, 상속, 토지 경작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가 뭔지 모른다. 그리고 이미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은 있다. 우리는 너무 끼워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수학의 실생활과 밀접하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어도 수학을 활용해서 실생활의 문제를 이전 시대와 같이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컴퓨터가 해준다. 이미 수학자들이 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해결해 줬다. 사실 그렇다. 중학생들이 수학 문제를 풀어서 우리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무언가를 발견해내거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경제적인 선택을 할 수는 있다. 수학적 사고가 분명히 들어간다. 승-승의 패러다임에서도 사용하는 것이 수학적 사고있다. 뒤에 나오겠지만 ‘제로섬 게임’ 같은 거다. 안장점을 찾는 것은 수학적 사고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학생들이 배우는 도형, 방정식, 함수 등은 우리 삶에 녹아있긴 하지만 아주 큰 영향력을 주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또 역으로 생각하면 엄청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0이 아주 자연스럽다. 자연수가, 유리수가, 무리수가, 실수가, 복소수가 자연스럽다. 미 발이된 견실사이기 때문이다. 수를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느낄 수 없다는 점이 문제인 것 같다. 진짜 중학생들이 ‘수학’이 실제적이고  우리 삶에 녹아 있으며 모르면 안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해 줄 수 있다면 내 책에 자신감이 생길 것 같다. 나도 계속 생각해보고 정리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8장 문예

p74 수학은 달력을 생산하고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는데 이 두 가지 모두가 천문학 지식을 필요로 했다. 라틴 유럽에서 과학이 다시 눈을 뜨게 된 것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접경 지대에서 일어났던 교류 덕분이었다. 


p75 아랍 세계의 서방 전초 기지였던 토렐도는 바그다드에 대적할 만한 학문 예술의 전당으로서 기독교도나 이슬람 교도, 유대교도가 함께 어울려 연구 성과를 집대성 하는 곳으로 성장했다. 

 유럽으로서는 사라진 그리스 수학을 되찾고 아랍과 인도의 고유한 연구 성과를 흡수할 결정적인 기회였던 셈이다. 


p78 신학적 견지에서 볼 때 수학은 대개 중립적이었으나 수학이 물리학과 결합되는 경우에는 우주론 교리에 대해 크나큰 위협을 제기했다. 


p79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별은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로저 베이컨은 “내게 권한만 주어진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저작을 몽땅 물태워버릴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경험적 관찰보다는 철학적 원칙에 더 의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를 퇴보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로저 베이컨은 그 선구적 사고 덕분에 옥에 갇혔다. 당시 여러 지식인들이 같은 운명을 맞았다. 윌리엄 오컴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격렬히 비난하면서 계시에서 얻는 지식으로서의 신학과 경험에서 얻는 지식으로서의 자연 철학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9장 르네상스기의 투시화법

p82 고전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것은 단순 모방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과 개념으로 새로운 분야를 연구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다. 


p83 수학과 예술은 독창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피에로는 예술과 수학이라는 양쪽 무대에서 모두 인정받는 드문 존재가 되었다. 


p85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눈이 세상을 보는 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따라서 작업의 중심은 관찰자의 눈이었다. 


p87 예술가들은 새로운 기법을 즉시 익혔지만 수학적 정밀성을 위해 예술적 측면을 희생시키려 들지는 않았던 셈이다. 


10장 부강한 국가를 위한 수학

p92 16세기의 유럽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전 두 세기 동안 유럽 대륙은 천재와 인재로 조용할 틈이 없었다. 14세기 중반의 흑사병은 인구 절반을 앗아갔고 사회적 지위와 부에 대한 극단적인 무관심을 낳았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은 국민들을 신체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탈진하게 했다.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되어 비잔틴 제국의 종말을 알렸다. 동시에 우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인본주의 전통의 발흥을 보게 된다. 인간의 자유와 교육에 대한 새로운 확신으로 고전을 존중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인쇄와 조각(동판) 기법의 발명으로 새로운 이념은 이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갈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은 대륙 바깥으로 눈을 돌렸고 새로운 땅을 발견하기 위한 항해와 정복, 교역이 발달했다. 항해를 위해서는 정확한 해도가, 무역에는 효율적인 회계 기법이 필요했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당시에는 충분히 발전되어 있지 못했다. 대수, 삼각법, 사영 기하학, 산술 등이 영역을 넓혀 뻗어가야 했다. 


p95 배를 가진 상인들은 큰 부자가 되었기에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도 괜찮을 듯.

돛을 높게 올리고 광석을 가득 실은 바다 위의 배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하학 지식을 통해 만들어지지. 

배에 필요한 컴퍼스, 도르래, 닻 등등은 모두 

 능숙학 기하학자가 발견한 것이라네. 

목수, 조각사, 가구 제작자, 석수

 칠장이, 화공, 금세공인 등

가지각색의 장인들 또한

 기하학에 나름대로 밎을 지고 있는 셈.

짐수레나 쟁기도 마찬가지로

 훌륭한 기하학이 만들어내는 것.

양복장이나 구두장이도 그렇다네.

 모양이나 유행이 어떻든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면 칭찬받을 수 없지.

베 짜는 사람들은 기하학적으로 천을 짜가고

 베틀은 상상력을 펼쳐가는 무대가 되네.

물레를 돌리는 바퀴나 맷돌질을 하는 돌,

 물이나 바람의 힘으로 돌아가는 풍차

이것은 모두 기하학이 만들어내는 것.

 혼자서 이런 것들을 고안해 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걸.

무게나 길이를 기준으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기하학적 증명이 없다면 확신할 수 없어.

시간을 재기 위한 시계란

 역사상 가장 영리한 발명품.

이제는 너무 흔한 물건이라 아무도 관심조차 없고

 무시당하기 일쑤이지.

하지만 시계가 부족하다면, 겨우 구경이나 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알게 되리

그렇게도 대단하고 그렇게도 인간에게 필요한 물건은

 없다는 것을. 마치 훌륭한 기하학이 그렇듯이 말야.

로버트 레코드, <지식의 오솔길>, 1551


위 인용 부분은 역사를 관통해온 수학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시각을 담고 있다. 실용적 도구로서의 수학과 미적 학문으로서의 수학이 그것이다. 레코드는 수학이 진리를 추구하는 고결한 학문이라고 여기면서 이성의 권위 위에 서야 한다는 믿음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널리 인기를 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아일랜드의 광산 및 통화 감독 일을 맡은 관리였지만 결국 감옥에서 최후를 맞이했으며 이는 정치적 갈등 때문으로 보인다. 


p98 존 네이피어는 직업 수학자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의 대지주 머치스턴 남작이었던 그는 영지를 관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틈틈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다가 결국 반 교황 신학 흐름에 합세하게 된다. 당시 인도-아라비아 숫자는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계산은 종이와 연필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좀더 빠른 시간에 긴 계산을 해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많았다. 네이피어는 네이피어의 막대, 그리고 로그라는 두 가지를 발명하여 계산을 훨씬 쉽게 만들었다.


p99 로그의 발명 역시 보다 빠르게 계산하려는 필요에서 생겨났다. logarithm이라는 단어는 logos와 arithmos를 결합하여 만들었다. 등차 급수와 등비 급수 간의 관계, 그리고 두 거듭제곱의 곱이 결국 거듭제곱의 합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점은 많은 수학자들을 매료시켰다. 네이피어는 이것이 어떤 거듭제곱에든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결국 1614년 <놀라운 로그 체계의 기술>을 출판하여 네이피어식 로그표를 정리하였다. 


p101 어떤 나라도, 어떤 시대도, 어떤 사람도, 어떤 아이도 아닌 지식이 승리하리

수를 위해서는 아이에게 처음부터 연설 부분을 가르쳐라.

수는 최고와 최저 사이의 차이가 너무도 심해

셈하는 기술이 없는 사람은 짐승이나 다름없게 된다. 

가장 짐승 같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니 더 멍청한 짓은 

인간이 인간에게 적합한 오로지 하나의 기술만 원한다는 점이다. 

다른 생명체들이 많은 일에서 인간을 밀어냈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수를 세는 것은 인간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생명체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셈하기를 인간과 짐승 간의 차이로 본다면

어서 셈하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여기 그 방법이 나와 있다. 

 군이이 되길 원하는가, 공무원을 꿈꾸는가

궁정이나 시골에서 살고 싶은가, 선거에 나갈 생각인가

물리학이나 철학, 법률을 공부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명심하라. 이 능력이 없다면 절대 칭찬받을 수 없으리니.

천문학이나 기하학,

우주론, 지질학, 기타 여러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감리로운 음악까지도, 모든 것이 이 능력 없이는

경지에 다다를 수 없으니, 

회계 감사관도 될 수 없고 참된 조사도 불가하고

수가 없다면 상식적인 판단도 불가능할 것.

하지만 상인이 되려 한다면 이 책을 뮤즈로 삼아야 마땅할 일 

정확히 내게 맞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에 

수공일을 하고 있다면 이 책의 내요잉 

ㅇ리에도 도움을 주고 마음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 

양치기가 아닌 한 수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맡은 일을 해낸다는 것은 

너무도 고달픈 일.

수에 모든 유익이 있으니 

수가 인간에게 어떻게 유용한지는

도저히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내 능력에서 벗어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수를 다루지 못했다면 인간은 그저 돌멩이에 불과했을 것.

토마스 힐스, <초보 산술>


11장 대수학과 기하학의 결합

p104 그리스 시대 이래 수학은 기하학과 대수학이라는 양대 부분으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크기를, 다른 하나는 수를 다루었다. 하지만 이 두 부분이 완전하게 나누어질 수 없는 노릇이었고 대문에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각 문명에서는 관심사에 따라 둘 중 어느 한 부분을 더 강조하게 마련이었다. 대수학의 발전, 그리고 대수학과 기하학의 상호관계는 삼차 방정식, 오늘날 ax^3+bx^2+cx+d=0이라고 흔히 쓰이는 방정식의 역사를 보면 잘 나타난다. 


p106 3차 방정식과 4차 방정식에 대한 해가 처음 발표된 것은 지롤라모 카르다노의 <위대한 예술>이었다. 하지만 해법 중 카르다노 혼자 발견해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처음으로 해법을 찾아낸 사람은 볼로냐 수학 교수였던 스키피오네 델 페로였다. 그는 자신의 해법을 출판하지 않고 제자였던 안토니오 마리아 피오르에게 전해 주었다. 스승이 남긴 유산으로 명성과 부를 차지해 보겠다고 작정한 피오르는 다른 수학자들과 문제 풀이 시합을 벌였다. 하지만 피오르는 오로지 한 가지 수단에만 의존하는 평범한 수학자였던 것 같다. 말더듬이라는 뜻의 타르탈리아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수학자 니콜로 폰타나 역시 3차 방정식 연구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말더듬 현상은 어린 시절 브레시아 시를 공격한 프랑스군의 검에 턱을 베인 탓이라 한다. 1535년 피오르와 타르탈리아는 수학 시합을 벌이기 위해 만났고 2월 12일 밤 타르탈리아는 3차 방정식 문제를 해결했다고 발표했다. 피오르가 낸 모든 문제를 풀어 낸 타르탈리아의 완벽한 승리였다. 피오르는 타르탈리아의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했다. 

 당시 3차 방정식은 단일한 방정식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중략)


p106~107 카르다노와 타르탈리아 이야기. 참고 


p109 순수한 기하학적 접근으로부터의 해방은 르테 데카르트의 <기하학>이 출판되면서 찾아온다. 


p110 데카르트는 대수학 계산을 기하학으로 변형시키는 고통을 감수했고 카르다노의 공식은 더 이상 ‘완전세제곱꼴’ 문제가 아닌 3차 곡선을 전환시키는 문제가 되었다. 데카르트는 자와 컴퍼스를 통한 작도라는 제약으로부터 기하학을 해방시킨 것이다. 표 좌축, 점이나 선의 각 사이의 거리 공식 등 오늘날의 많은 대수 기하학 개념들이 데카르트의 <기하학>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미래의 수학자들이 수학 문제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 다시 말해 언어를 제공했고 대수적 방법과 기하적 방법에 동등한 위치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2장 우주라는 태엽장치

p114 16세기가 되자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을 뒤흔들만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게 되었다. 이 혁명의 핵심적 역할은 수학이 담당했다. 정확한 수학적 모델이 물리적 실체에 대해 무언가 알려 줄 수 있을 것인가? 


p116 당시까지 루터교 도시였던 뉘렘베르크에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것은 순전히 당시의 코페르니쿠스 후원자였던 레티쿠스의 열정과 노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책이 나오기 직전 레티쿠스는 비텐베르크 대학으로부터 라이프니츠로 옮겨갔고 그리하여 인쇄는 루터교 공동 창립자 중 한 사람인 안드레아스 오시앤더에게 맡겨졌다. 바로 이때 오시앤더가 직접 썼을 것으로 여겨지는 그 유명한 서문이 들어가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진실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다양한 체계들의 비교란 그중 어떤 것이 계산을 더 쉽게 만드는지 판단하기 위함이라는 것, 실제 천체 운동은 다른 철학적 혹은 신학적 기준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 등이 서문의 요지였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늘 그런 생각을 마음속에 간직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서문은 연구를 지원했던 것으로 보이는 바티칸보다는 코페르니쿠스 시각에 대해 극력 반대했던 마틴 루터를 회유하려는 목적이 컸다. 출판 후 80여 년이 지났을 즈음 반개혁 운동이 확립되기전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연구가 바티칸의 이단 목록에조차 오르지 않았다는 점도 기억하고 넘어가야 한다. 


p118 열렬한 코페르니쿠스 지지자였던 요하네스 케플러는 익명으로 붙은 문제의 서문에 격분했다. 혹시라도 독자들이 그 서문을 코페르니쿠스의 것이라 생각하게 될까봐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천문학이라는 거인과 정면으로 대항해 싸울 용기는 케플러에게도 없었다. (중략) 케플러에 대한 이야기 꼭 참고 할 것. 


p122 <새천문학>의 업적은 행성들의 궤도가 타원이며, 태양은 그 타원의 초점 중 하나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케플러의 제1법칙이 된다. 


p124~126 한 세기 동안 굳건했던 세계관을 뒤집고 새로운 세계관을 일반 대중에게 교육하려면 더 많은 증거가 필요했다. 수많은 아리스토텔레스 신학자들이 소리 높여 이러한 변화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조심성 없는 갈릴레오가 특유의 독설과 선동적인 발언으로 조롱해마지 않았던 바로 그 신학자들이었다. 자기 선전에 능숙한 거만한 인물로 부와 명예를 추구했던 갈릴레오는 일단 후원이 끊기고 나자 학꼐에서도 믿을만한 친구를 찾을 수 없었다. 1616년 갈릴레오는 절대로 코페르니쿠스 식의 사고를 드러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나 1632년 <두 개의 세계 체계에 관련된 대화>를 내놓음으로써 약속을 정면으로 어긴 셈이 되었다. (중략)


p127 갈릴레오가 사망한 해에 태어난 아이작 뉴턴은 이전의 모든 요소들을 한데 모아 단일 이론으로 종합했다. 

뉴턴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집대성을 할 수 있는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에게 큰 복이었던 것 같다. 유클리드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잘 정리하는 것 만으로도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올바른 자신의 철학이 밑바탕이 되면 더욱 좋다. 거기다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발견까지 있으면 더 좋다. 그간 많은 수학자들의 발견과 희생 그리고 연구와 노력이 합쳐져 뉴턴에게 전해졌다. 뉴턴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합해졌다. 타고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p129 수학자들은 단순히 현상을 정당화하는 것 이상을 해냈던 것이다. 새로운 역학은 미적분이라고 하는 새로운 수학 분야와 함께 찾아왔다. 이제 그 발명 뒤에 숨은 이야기를 살펴보자. 

 

13장 운동의 수학

p132 미적분의 등장 이전에 면적과 접선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떤 시도가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p133 17세기 초반에 이르면 다양한 곡선을 만들어 그 길이, 곡선 아래의 면적, 곡선을 회전시킬 경우 나타나는 부피 등을 계산하는 데 대한 관심이 커졌다.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에 대한 다양한 역학적 관심이 이에 대한 동기를 부여했다. 수학적으로 물체의 중력 중심을 계산하는 것은 그 안정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했고 당연히 건축이나 조선 같은 분야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당시까지 아르키메데스의 두 가지 방법이 계속 사용되고 있었지만 불가분량 혹은 무한소를 포함하는 방법이 그 논리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기하학적 방법보다 더 쉽게 정답을 찾아준다는 인식이 커가기 시작했다. 

 

p136 미적분 이전 단계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방법론은 곧 수학의 새로운 분야로 결합되었다. 역사에서 흔히 그렇듯이 혁명적으로 등장할 무언가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확실하게 파악해 형상을 부여할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이 경우 미적분학의 발명은 뉴턴과 라이프니츠라는 두 사람의 몫이었다. 공동 발명이란 것이 늘 그렇듯 어느 한 사람이 실제로는 더 먼저일 것이라는 의심이 끊이지 않았고 누가 우선권자인가에 대한 논쟁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p138 뉴턴이 미분과 적분을 처음으로 다룬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기능이 서로에 대해 역의 관계라는 확고한 틀을 처음으로 확립했으며 무한 급수연구에서 다루어지는 함수의 범위를 엄청나게 확대시켰다. 


p141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신학, 법학, 철학, 그리고 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대학은 스무 살이라는 너무 어린 나이를 문제 삼아 그에게 법학 박사 학위를 주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뉘렘베르크로 가서 졸업을 하였다. 졸업 후에는 법학 교수직을 거절하고 대신 하노버 왕가를 위한 외교관이 되었다. 우주의 언어가 가진 논리와 토대에 깊은 관심을 보인 탓에 최후의 위대한 우주론자라고 불기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식으로 미적분학의 언어를 정리한 인물이 바로 라이프니츠이다. ‘미분’, ‘적분’이라는 용어도, dy/dx 라는 기호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p145~146 곡선으로 보이는 이 같은 것들, 그리고 곡선이 포함하는 표면은 곡선 표면과 입체 용적에 쉽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예비 공리들은 불합리하게 여겨질 정도로 많은 증명을 요구하는 고대 기하학 방법론의 지루한 연역 과정을 피해 가기 위한 전제가 된다. 불가분량 방법에 의해 증명이 간단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불가분량 가정이 다소 미흡한 면이 있고 그리하여 그 방법이 덜 기하학적이기 때문에 나는 다음 정리의 증명을 처음 합과 마지막 합, 그리고 발생 단계의 양과 극소량의 비율 정도로 줄이려 한다. 즉 이들 합과 비율의 한계로, 또한 가능한 한 짧게 그 한계를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불가분량 방법에 따라 같은 결과가 빚어지는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원칙이 증명되고 나면 마음놓고 그것들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나는 양이란 입자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직선을 작은 곡선들로 나누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단순한 불가분이 아니라 무한소로 나누어지는 양인 것이다. 정해진 부분들의 합이나 비율이 아니라 언제나 합과 비율의 한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증명의 힘은 늘 앞으로 제시될 예비 공리 방법들에 의존하게 된다. (중략)

뉴턴의 <프린키피아> 1권, 1분 일반주석 1726


14장 대양과 별

p148 지도 제작은 모든 초기 문명에서 이루어졌다. 목적은 건축, 조세, 전쟁 등 다양했다. 실용 수학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측량사라는 일은 가장 오래 된 직업 중 하나이다. 


p154 완전한 구에서 벗어나 있는 지구의 모습은 평면과 구를 넘어서 다양한 구형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한 삼각법 연구를 가속화했다. 


p155 교역을 위한 도구는 빠른 속도로 발달했다. 그리스에서부터 전해져 아랍인들이 완성시킨 아스트롤라베는 일종의 아날로그 컴퓨터였다. 하늘의 모습과 다양한 천체들의 궤도가 새겨진 원판을 돌림으로써 일몰과 일출 시간을 계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p156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더 정확한 측량을 요구하는 소리가 커지면서 해야 할 계산의 양도 늘어났다. 정확성을 기하려면 더 많은 숫자를 다루어야 했고 당연히 계산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17세기 이래 사용되기 시작한 로그는 중요한 실용적 의미를 지녔다. 항해사들은 꼐산을 용이하게 해 주는 삼각 함수표와 로그 표로 무장했다. 그런 표들도 인쇄 오자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계산자가 발명된 이후에는 그렇게까지 정확할 필요가 없는 계산에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계산자 사용은 18세기에 널리 확산되었다. 이때쯤이면 세계에 대한 인류의 지식은 톨레미 시절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도는 편구형의 행성에 불과했다. 20세기 후반부에 이르러 우리는 마침내 지구 표면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지점에서 지구를 바라보게 되었고 인공위성들이 지구의 지질학적 변화를 추적 기록하기 시작했다. 


15장 5차방정식

p158 16세기 수학자들은 대부분 우연히 복소수와 마주쳤다. 18세기가 되자 실수의 연장으로서 복소수 개념이 확립되었지만 그 수를 다루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오류가 자주 일어났다. 


당시 대수학에서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는 5차 방정식이 대수적 방법으로, 즉 한정된 개수의 대수적 단계로 해결 가능한가의 여부였다. 오늘날 우리는 학교에서 2차 방정식 푸는 법을 배운다. 3차와 4차 방정식을 위한 유사한 방법론은 16세기부터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5차 방정식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법도 발견되지 ㅇ낳았다.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통해 가능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 정리를 그저 해가 있다는 것을 보장하리 분 정확한 해를 구하기 위한 공식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 주지 못했다. 여기서 비극적인 운명으로 고통 받은 두 명의 수학 천재가 등장한다.

 닐스 헨릭 아벨은 노르웨이 작은 마을의 가난한 대가족 출신이었다. (중략)


p159 아벨은 1824년 5차 방정식이 대수적 방법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더 높은 차수의 방정식 역시 마찬가지라는 내용을 담은 논문을 출판한다.  


p160 아벨은 일반적으로 4차가 넘는 다항 방정식은 제곱근, 세제곱근 혹은 더 높은 제곱근의 근 같은 근 방식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특별히 어떤 외적 조건이 갖춰진 경우 풀이가 가능한지 그리고 해법은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는 갈루아에게 남겨졌다.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짧고 화려한 인생을 살다간 학자이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수학자였던 그는 불의라면 참고 넘기지 못하는 불같은 성품이었다. 자신보다 재능이 뒤떨어진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고 특히 정부 관료들의 옳지 못한 행동을 증오했다. 160~161 갈루아 이야기 참고 

p161 갈루아의 가장 훌륭한 연구는 그 운명의 결투일 전날 밤에 휘갈겨 쓴 쪽지 위에 남았다. 여백 부분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라는 말이 반복된다. 

그는 마지막으로 슈발리에에게 “정리들의 옳고 그름이 아닌 그 중요서엥 대해 야코비나 가우스의 공개적인 의견을 물어달라는”부탁의 말을 남겼다. 이른 아침 갈루아는 결투장으로 나갔다. 25걸음 거리에서 총을 소는 규칙이었다. 갈루아는 중상을 입었고 다음날 아침 스무 살의 아까운 나이로  병원에서 사망했다. 


p162~163 불과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학꼐는 가장 명석한 두뇌를 둘이나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p163 “독자를 늘 다니던 길에서 넓디넓은 광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명확함이 가장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갈루아는 더 이상 없다. 이제 의미 없는 비판은 그만두자. 단점은 젖혀두고 장점만 보도록 하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갈루아의 짧은 생이 담긴 열매는 60쪽 정도에 불과하다. 그 연구를 둘러싼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에콜 노르말과 에콜 폴리테크니크 지원자를 위한 수학 잡지 편집인은 갈루아의 사건을 두고 “보다 높은 지성의 후보자와 낮은 지성의 시험관은 함께 사라졌다. 모두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 나는 미개인이다”라고 했다. 


16장 새로운 기하학

p166 수학자들은 유클리드의 다섯 번째 공준에 대한 연구를 계속 했다. (평행선 공준)


p167 하지만 그(사케리) 자신은 이를 부인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의 목적이란 새로운 기하학 창조가 아니라 이 공준의 거짓을 증명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새로운 기하학을 버려 두고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후대 수학자들도 그의 연구에 주목하지 않았다. 


p167 다섯 번째 공준에 대한 수학자들의 집착은 단순한 논리적 증명을 뛰어넘어 보다 깊은 의미가 있었다. 물리적 공간의 본질 자체가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탄탄하고 일관된 수학 체계일뿐 아니라 공간 자체가 구성되는 방식이기도 했다.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선은 직선이었다. 이는 이론뿐 아니라 실제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고전 구면 기하학이 등장하면서 이것조차 정면으로 도전을 받았다. 구면 위에서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길은 점들을 연결하는 것은 호라고 하는 곡선이었다. 또한 구면 위에 놓인 삼가곃ㅇ의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컸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결국 기하학의 내적 자질과 외적 자질 이라는 것 사이의 차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외적 자질은 체계의 바깥에서 연역되는 것이고 내적 자질은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p168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는 완전한 비유클리드 체계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p168 19세기 초반 다섯 번째 공준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모두 수포로 돌아갈 무렵 수학자들에게 유클리드 기하학 외에도 모순이 없는 기하학이 정말로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싹텄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로바체프스키는 러시아 하급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략) 


p170 로바체프스키 방식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탄생한 공식 연도는 1829년이 된다. 


p170 로바체프스키의 새로운 공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무한히 긴 직선을 그렸다고 하자. 선 위에 있지 않은 점을 하나 고른다. 유클리드 공준은 이 점을 통과하면서 처음 직선과 평행한 선은 오로지 하나라는 것이다. 로바체프스키는 그 점을 통과하는 선은 하나 이상 존재할 수 있고 그 모든 선들이 교차점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본래 선과 ‘평행’하다고 하였다. 이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낯설게 보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기하학이 도출된다. 사실’평행각’에 의존하는 그런 기하학은 무수히 많다. 


p172 가우스는 좀 다른 방향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다. 곡면 위의 선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곡면의 ‘곡률’이 사용된 거리에 관련된다는 정리에 이르게 된다. 가우스는 곡률이 그 곡면이 존재하는 공간과 독립적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곡률은 곡면 위 삼각형의 각의 합에 관련된 내적 성질이었다. 이런 개념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p172 유클리드 기하학에는 논리적 모순이 없었지만 이제 그것은 가능한 수많은 기하학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p175 리만은 넉넉한 가정 형편은 아니었지만 베를린과 괴팅겐에서 훌륭한 교육을 ㅂ다았고 1854년에는 괴팅겐 대학의 조교수가 되었다. 조교수 임용을 위해 괴팅겐 대학은 시범 강의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것은 수학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시범 강의가 되었다. ‘기하학의 기초를 이루는 가설에 대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강의에서 리만은 가능한 한 가장 과으이의 용어를 사용하여 기하학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설명했다. 유클리드의 자와 컴퍼스로부터 참으로 먼 길을 온 셈이었다. 리만은 기하학은 다양체의 학문으로 정의했다. 

 리만에게 기하학의 핵심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되고 순서가 정해진 n쌍 원소의 집합이었다. 공간에 대한 그의 개념은 너무도 일반화된 것이어서 거의 ‘비-공간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고 변수들 간의 관계라면 무엇이든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 가능했다. 어떤 체계에 대해 거리가 정의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위상수학이라는 수학 분야에 들어온 것이 된다. 위상수학은 공간 영역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다룬다. 

 리만은 오늘날 모든 수학자들이 필수적으로 사용하게 된 도구들을 개발했는데 칭찬에 극히 인색한 가우스조차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훌륭한 수준이었다. 기하학에 대한 리만의 확장되 사고 안에서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곡률상수 0인 공간을 다루고 로바체프스키의 기하학은 곡률 -1인 기하학이며 구면 기하학은 곡률 +1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리만은 새로운 유클리드로 대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그 무엇보다도 구면을 통해 평면을 설명하는 아주 특별한 기하학을 먼저 연상시키게 되었다. 

 리만은 이후 이론 물리학 발전에 공헌했고 굽은 공간의 거리에 대한 그의 일반 연구는 궁극적으로 일반 상대성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유클리드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로써 우리는 진정한 우주의 기하학을 탐함할 수 있는 수학적 도구를 얻은 셈이었다. 


17장 대수학의 발전

p178 다양한 대수학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결국 수학 자체가 정말로 무엇인가에 대해 기본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p179 불굴의 의지와 명석한 두뇌를 가진 무명의 초등학교 교사 조지 불은 오늘날 최초의 수리논리학 분야 연구물로 인정받게 된 논문을 썼다. 


p179 그는 수학이 수와 크기의 학문이라는 그리스 시대로부터의 시각을 거부하고 대신 일관된 기호적 논리 체계라면 어떤 것이든 수학의 일부가 된다고 주장했다. 


p182 이 시기에 대수학만이 기하학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기하학 또한 공간 개념에서 벗어났다. 대수학과 기하학은 모두 순수하게 추상적인 대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고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한 산술 대수학이나 2차원 혹은 3차원 기하학은 특수한 경우에 불과했다. 


p183 여기서 이야기는 서로 읽힌 수많은 가닥으로 갈라지게 된다. 불의 수학을 뒤따른 학자들은 수학을 논리에 적용하면서 대수적 논리학을 발달시켰다. 반면 귀세페 페아노나 이후의 버트런드 러셀은 논리로부터 수학을 얻어내려 했는데 이는 논리주의라고도 부른다. 새로운 수학 구조가 너무도 많이 출현하는 것에 놀란 사람들은 전체 수학 구조를 떠받치는 탄탄한 기초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의 실용적 측면에 대해서는 23장에서 알아볼 것이다. 


18장 행동의 장

p186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이 확장되어 하나의 독립변수 이상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y=f(x)라는 평면 곡선뿐 아니라 z=f(x,y)라는 곡면도 연까 가능해졌다. 각각의 변수가 독립적으로 미분도리 수 있는 편미분 방정식이 도입된 덕분이었다. 운동하는 입자들의 상호작용은 그 운동 경로를 보여주는 미분 방정식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행성이 타원 궤도를 가진다는 초기의 뉴턴식 해는 태양과 달이 질점이고 각각의 행성은 서로에 대해 독립적이라는 과감한 단순화를 통해 나온 것이었다. 태양 중심 모델과 비원형 궤도에 대한 초기의 반감이 마침내 극복되지 모델을 더욱 정확하고 정밀하게 만들어야 했다. 한 가지 방법은 역동적 체계 내에서 에너지가 변화하는 방식을 살피는 것이었다. 이러한 퍼텐셜 이론은 에너지 보존이라는 물리학 개념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되었다. 


p187 이렇게 되자 수학적 분석은 극단적으로 복잡하게 되었다. 고려애햐 할 변수가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태양과 지구, 그리고 달만을 포함한 간략화 체계에서는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 없다는 관점에서 삼체문제도 많이 논의 되었다. 


p188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성과를 남긴 수학자이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가장 훌륭한 발견은 팔에 아이를 안고 또 뛰어 노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이루어졌다고 말하곤 했다. (아이가 13명이었음.  다섯 명만이 유아기를 살아서 넘김)

그를 평생 괴롭힌 것은 시력 악화 문제였다. 1740년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1771년이 되자 완전히 맹인이 되고 말았다. 

 오일러의 수학적 업적은 실상 수학의 전 분야에 걸쳐 있다. 지도 제작, 조선, 달력 제작, 회계 등 매우 실용적인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해석 수학과 해석 역학의 토대를 닦았다는 데 있다. 이 부 ㄴ야의 연구물로 <무한소 해석>(1748)과 <단단한 물체의 운동을 위한 이론>(1765), 그리고 미적분 계산에 대한 논문들이 있다. f(x)를 비롯한 함수 표기법은 모두 오일러가 만든 것이고 원지름에 대한 둘레에 비율 파이나 자연 로그의 밑인 e, 루트 마이너스 1을 나타내는 i, 합의 기호인 시그마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수 이론과 기하학 그리고 해석학이 자연 현상의 모델을 만드는 데 상보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 하였다. 


p189 많은 학문적 성과를 올리던 프랑스의 수학자들 중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 격동을 피해갈 수 있던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오귀스탱-루이 코시는 가족이 잠시 파리를 떠나 있었던 덕분에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 후 코시는 나폴레옹의 영국 공격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한 항만 건설 일을 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원했던 것은 수학 공부였다. 몇 차례 실패한 끝에 마침내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해석학 조교수 자리를 얻게 된다. 


19장 무한에 대한 이해

p196 역사를 통해 수학자와 철학자들은 무한이라는 개념과 씨름해 왔다. 실무한과 그 역인 무한소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열광적인 관심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미적분학 개념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19세기가 되면 마침내 이 문제가 전면에 부상한다. 수학의 많은 영역들은 일반적으로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축적되면서 발전하였지만 무한에 대한 연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이론 확립은 게오르크 칸토어라는 단 한 사람의 몫이었다. 무한 급수의 사용 증가와 그 가치에 대한 의문이 연구의 원동력 역할을 했다. 


p197 함수와 수의 자질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관심은 우연이 아니었다. 어떤 함수가 푸리에 급수와 같은 무한 급수로 표현될 수 있다면 이 급수들이 x의 모든 값에 대한 함수로 수렴되는지, 다시 말해 점별수렴인지의 여부를 증명하는 것이 중요했다. 각각의 급수를 모두 확인하는 것은 성가신 일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수렴 기준이 제안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어진 수에 접근하는 수들의 무한 급수라는 개념을 명백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코시는 실무한에 대한 그리스적 혐오를 지닌 인물이었고 결국 어떤 부분에서는 무리수를 유리수 급수의 한계로 정의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그 역으로 정의하는 식의 순환 논증의 늪에 빠져들었다. 카를 바이어슈트라스는 무리수가 극한에 의존하는 것을 탈피하고자 시도하면서 이를 급수의 극한이 아닌 급수 자체로 정의하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p203 1895년 칸토어는 완전히 새로운 수의 유형, 소위 초한기수라고 하는 것을 확립하는 찬란한 위업을 이루었다. 셀 수 있는 무한에는 알레프 널을, 셀 수 없는 첫 번째 집합에는 알레프 원이라는 기호를 붙였다. 그러면 초한수들도 이루어진 무한 급수가 생겨나고 각각의 초한수는 이전의 모든 집합을 포함하는 집합이 된다. 칸토어는 또한 알레프 원 집합은 실수 집합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연속체 가설이라는 것인데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다. 


20장 주사위와 유전자

p206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확률 연구는 17섹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상과 사건의 조합이나 순열에 대한 연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기원전 300년경 인도 자이나교 수학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자이나 교도들의 연구열은 종교에서 출발했지만 후대 학자들에게 연구의 동기를 부여한 것은 확률게임 분석이었다. 어떻게 가능한 결과를 예측하고 공정한 게임규칙을 세울 것인가가 문제였다. 확률이 통계와 결합되면서 물리와 사회과학 영역 양쪽에서 데이터를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론들이 개발되었다. 통계가 게임을 완전히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몽기에는 공공 정책을 실시하고 도덕적, 사회적 평등을 확고히 하기 위한 수학적 방식으로 통계가 인식되기도 했다. 

 

p207 확률 이론은 1654년 블레즈 파스칼과 피에르 드 페르마의 의견 교환을 통해 한층 복잡한 단계에 도달했다. 두 사람은 소위 ‘도박꾼의 점수 문제’라는 것에 대해 토론했다. 주사위 게임이 끝나지 않았을 때 두 도박군이 내가 돈을 어떻게 나눠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파촐리, 카르다노, 타르탈리아 등 르네상스기의 많은 이탈리아 수학자들이 이 문제로 고민했지만 아무도 완벽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페르마는 가능한 모든 결과를 열거한 후 전체적인 승자를 세는 방법을 선호했다. 게임의 수가 늘어나면 계산이 한없이 길어지기 때문에 파스칼은 기대값 방법을 주장했다. 


p209 천문학 관찰의 오류란 장비 문제만 아니라 별빛의 난류 대기층을 통과하면서 굴절되는 탓에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이 방법의 유용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1812년 라플라스는 대작 <확률의 해석적 이론>을 출판하여 당시까지의 모든 성과를 종합하였다. 이 책은 한 세대 동안 기본 교과서로 군림했다. 

 사회적으로 볼 때 확률 이론이란 ‘이성적인 행동을 계산하는 것’이었다. 1814년 라플라스는 확률이 그저 계산으로 표현된 분별에 불과하다고 했다. 계몽기의 수학자들은 계몽된 인간이라면 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마련이라고 믿었다. 결국 확률이란 일반 대중에게 자기보다 더 나은 인간의 분별을 최소한 모방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량화된 방법이었다. 확률의 목표는 인간 행동의 일반적 표준 수립에 있었던 것이다. 도박 연구도 불확실한 세계에서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한 도구 탐색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라플라스를 비롯한 학자들은 일정 규모의 배심원단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될 확률을 다루었다. 하지만 이 같은 프랑스 혁명의 이성적 사고에 모든 사상가들이 공감했던 것은 아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성이 확률이라는 순수한 가정보다는 관찰과 실험에 의해 더 잘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p211~212 철학적 논의를 펼칠 마음은 없지만 통계가 수학의 독립적인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관심사와 깊이 연결된 분석 도구로 발달했다는 점은 눈여겨보아야 한다. 

 1920년대에 이르자 통계는 더 정밀하고 정교한 방법론을 낳기 위한 정신 연구 분야로 수학자들의 인정을 받았다. 실험 설계나 분산 분석과 같은 피셔의 개념은 <실험 설계>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미국과 영국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실험실 상황에서 재현될 수 없는 변수들을 다루는 다양한 학문 분야의 실험 관행을 급속히 변화시켰던 것이다. 


21장 전쟁 게임

p214 사람들은 늘 게임을 즐긴다. 시대마다 인기를 누린 게임이 존재했다. 대부분의 게임은 기술과 운이 결합된 형태이고 정말 훌륭한 게임꾼은 여러 차례 거듭된 후 운명의 부침이 균형을 찾은 이후에 등장한다. 하지만 주사위 던지기 같은 것과 달리 운에 별로 의지하지 않는 게임도 있다. 게임 이론은 바로 이러한 순수 전략 게임을 대상으로 한다. 그야말로 죽기살기의 문제가 되는 게임도 있다. 시뮬레이션 전장에서는 전술상 실수의 대가가 훨씬 작기 때문에 군사 전략가들은 전술을 가다듬기 위한 전쟁 게임에 관심이 많다. 체스와 바둑 게임이 모두 전쟁 상황을 가상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게임이론이 최초로 적용된 분야가 새로운 종류의 전쟁, 아마도 인류 최후의 전쟁이 될 사건 분석이었다는 데 대해서도 놀랄 것은 없다. 


p216 게임의 가장 간단한 형태는 두 참여자가 두 가지 전략을 가지는 제로섬 게임이다. 참여자들은 완벽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승리를 위해 머리를 짜낸다. 전체 자원은 0이다. 즉 한 쪽이 얻으면 다른 한 쪽은 잃는 것이다. 제로섬 게임의 재미있는 예로 ‘케이크 나누기’가 있다.  많은 가정에서 흔히 발생하는 이 상황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두 아이가 케이크를 나누어 먹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더 큰 조각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해법은 두 단계 과정이다. 한 아이가 케이크를 절반으로 자르고 다른 아이가 먼저 자기 조각을 선택하는 것이다. 두 아이 모두 더 큰 조각을 가지고 싶어하며 서로 그런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최적의 해법이 나온다. 첫 번째 아이는 가능한 한 공정하게 케이크를 자른다. 어느 절반이 더 크면 다른 아이가 당연히 그쪽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이폰 만이 주창한 이른바 미니맥스 이론에 따르면 게임에 참여하는 양측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최적의 해법인 안장점이 존재한다. 참여자가 두 사람 이상으로 늘어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모두를 만족시키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참여자들의 이익관계 표를 기준으로 게임을 분석하는 책들은 아주 많으며 참여자의 수가 많아지면 표도 늘어나 결국 엄청나게 큰 행렬이 필요하게 된다. 

승-승 패러다임의 좋은 예


p220 기계는 사고할 수 있는가? 이것이 내게 제기하는 문제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문제는 ‘모방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게임 참가자는 남자(A), 여자(B), 질문자(C)의 세 사람이다. 질문자의 성별은 무엇이든 좋다. 질문자는 두 남녀와 분리된 방에 앉아 있으며  A와B중 누가 여자이고 남자인지를 구분해 내야 한다. 그리고  A의 임무는 C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목소리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응답은 서면으로 이루어진다. 수기가 아닌 타이핑이라면 더욱 좋다. 말소리가 즉각 타이핑되는 텔레프린터가 있다면 이상적이다. B에게 주어진 임무는 질문자를 도와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 여자라고요. 저 사람 말은 듣지 마세요’같은 말을 전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 남자 역시 같은 내용을 전달할 것이므로 이런 방법이 소용이 없다. 

 자, 이제 ‘기계가 이 게임에서  A 역할을 맡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질문자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은 사람이  A역할을 맡았을 경우와 비교해 어떻게 다른가? 이는 곧 ‘기계는 사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된다. 

 알랜 튜링 <기계는 사고할 수 있는가?>


22장 수학과 현대 미술

p222 20세기 초반 이십여 년에 걸쳐 등장했던 많은 새로운 예술 사조들이 수학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기하학 개념이나 용어를 받아들였다. 회화와 조각은 그 본성상 각각 2차원과 3차원의 예술적 표현에 매달렸다. 하지만 이는 세계와 인간의 존재를 완전하게 표현하는 데 한계로 작용했다. 새로운 기하학이 어떻게 새로운 표현 방법을 낳았을까? 


p224 철학자 칸트가 제시한 대상 인식과 대상 자체 사이의 구분 역시 입체파 화가들의 다면 형식에 동기를 부여했다. 수학이나 공간 영역을 넘어선 다양한 공식이 만들어졌다. 이는 플라톤의 이상적이고 신비적인 혹은 비이성적인 영역을 뜻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4차원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3차원 투사화법을 벗어나 현실을 탐구하도록 하는 해방의 의미였다. 이 해방감을 누린 사람들은 입체파뿐이 아니었다. 1909년 현대성과 산업주의, 그리고 기술을 선전하며 정치색이 가미된 전시회를 연 이탈리아 미래파 화가들도 여기 속했다. 움베르토 보치오니, 지노 세베리니, 지아코모 발라 등의 예술가들은 4차원에서 역동주의를 표현했다. 


p227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20세기 초반 예술에 미친 영향은 4차원에 비해 더욱 파악하기 어렵다. 문제는 비유클리드 공간을 표현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에서 생겨난다. 이탈리아의 수학자인 에우게니오 벨트라미는 로바체프스키 기하학을 표상하기 위해 의구라는 물질 모형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지식만으로도 예술가들의 영감에 불을 붙이기는 충분했다. 아마도 그 수학적 연구 성과는 4차원이라는 것이 제공한 예술적 자유보다 훨씬 덜 풍요로웠을 것이다. 예술가의 수학 및 과학 연구를 독려한 뒤샹 같은 화가들은 영향력은 컸지만 소수파에 속했다. 그럼에도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인식은 다다이즘의 시조인 헝가리 시인 트리스탄 차라나 초현실주의 창시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23장 기계 코드

p232 수학사를 살펴보면 산술과 기하학,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의 관계처럼 상대적인 중요성을 놓고 경쟁해 온 것들이 적지 않다. 또다른 쌍인 알고리즘 수학과 ‘해석적’ 수학에서도 이러한 역동적인 대립 관계를 볼 수 있다. 후자가 하부 구조와 ‘아름다운 정리’에 보다 관심을 가진다면 전자는 실제 답을 구하기 위한 과정을 이해하는 데 목표를 둔다. 


p234 컴퓨터의 발명은 대단히 실용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구체적인 과업으로 비지니스나 행정 관리, 암호 해독, 수리 물리의 방정식 풀이도 될 수 있었다. 프로그램 저장 컴퓨터는 소프트웨어로부터 하드웨어를 분리했다. 프로그램, 즉 필요한 계산을 실행시키기 위한 알고리즘을 처음 연구했던 것은 형식 체계를 다루는 논리학자들이었다. 


p235 현대 컴퓨터에서의 명령은 모두 결국 일련의 수들이다. 


24장 카오스와 복잡성

p240 19세기 말에 이르자 접선이 없는 연속 함수 등 여러가지 수학 괴물이 탄생했다. 

해석학으로부터 기하학 쪽으로 시각을 전환한 수학자들은 끔찍한 혼란으로만 여겨졌던 것이 실제 세계와 많은 유사성을 가진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수학 괴물은 새롭고도 노랄운 수학적 대상물로 가득찬 알라딘 동굴 앞을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p245 컴퓨터 성능이 향상되면서 과학자들은 좀더 복잡한 방정식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비단 매개변수가 더 많은 종류뿐 아니라 비선형 방정식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당시까지의 수학은 대부분 선형 방정식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지만 더 많은 복잡계를 정확히 모형화하기 위해서는 한계가 많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컴퓨터는 주어지는 방정식이 선형이든 비선형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놀라운 속도로 수치 계산을 하고 그래픽을 그려낼 뿐이었다. 이제 과학자와 수학자들은 새로운 디지털 실험실을 보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전까지 독립적이라고만 여겼던 변수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 것은 바로 비선형 방정식 덕분이었다. 물리학과 생물학 간에도 협력이 이루어지기 시작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로스앨러모스는 산하에 비선형 체계 센터를 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연구소는 핵 물리학이라는 주력 분야를 포기할 수 없었고 따라서 코완은 다른 장소를 찾아야 했다. 


p249 어째서 기하학은 ‘차고’, ‘메마른’ 학문으로 묘사되는 것일까? 그 한 가지 이유는 구름이나 산, 해안, 나무 같은 것의 모양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구름은 구가 아니고 산은 원뿔이 아니며 해안은 원이 아니다. 나무껍질은 부드럽지 않고 직선으로 나타나는 번개의 여행 또한 그렇다. 

 유클리드 기하학에 비해 자연의 많은 유형은 훨씬 덜 규칙적이고 단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은 그저 더 높은 차원이 아닌 전체적으로 완전히 다른 복잡성 수준을 가진다. 다양한 자연 유형들을 실제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히 크다. 

 이들 자연 유형의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유클리드가 ‘형태 없음’으로 인식해 제쳐두었던 형태를 연구하고 ‘무정형’의 정형성을 탐구하게 했다. 수학자들은 겁없이 도전을 받아들였지만 결국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는 이론을 개발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도망치는 길을 택하고 있다. 

나는 프랙털이라는 개념을 라틴어 형용사인 FRACTUS에서 가져왔다.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동사 FRANGERE는 불규칙한 조각들로 깨다, 부수다라는 뜻이 있다. ‘불규칙’과 ‘깨어진’이라는 두 가지 의미는 이 개념에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제껏 입상, 히드라 형, 울퉁불퉁형, 분지형, 해초형, 엉킨형, 비틀린 형, 주름형 등으로 불러왔던 많은 것들이 앞으로 양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분명 놀라고 또 기뻐하리라 생각한다. 

브누아 만델브로 <자연의 프랙털 기하학>, 1977



3. 내가 저자라면 

<<문명과 수학>>은 전체를 타이핑 하고 싶은 책이었다. 하지 그랬냐고? 핑계를 대자면 게을렀다. 결국 이 북리뷰에서는 10페이지마다 꼭 타이핑 하고 싶은 부분만 했다는 것을 밝힌다. 책을 쓰면서 많이 참고 할 책이다. 일단 내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내가 왜 대학수학을 배웠는지 깨달았다. 대학수학을 배우는 내내 힘들었는데,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물론 들춰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이긴 하지만 어느정도 확신이 든다. 수학은 계속해서 이전의 사실을 부정하며 발전해 왔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은 사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고, 우리가 생각해 온 것들에 대해 의심의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서 발견되기도 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그랬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생긴 것은 그것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의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전환, 혁명적인 발견은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 수학에 있어서 옳은 발견이 인정되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해야 한다. 

 수학을 이야기 하려면 문명과 역사, 시대적 상황 그리고 사람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수학은 그렇다. 수학은 숫자, 기호, 문자만의 학문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이자, 인간의 심리, 인간의 탐구심, 인간의 발명이 녹아 있는 살아있는 학문이다. 아름답고, 실용적이며, 추상적이고, 해석적이다. 수학은 그렇다. 한 인간을 잘 알면 우리는 그가 어떤 표현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이해 가능하다. 수학도 그렇다. 수학이 어떤지 알면 우리가 수학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수학을 배운 다는 것은 인류의 집단적 사고를 배운다는 의미이다. 카를 융의 자서전 북리뷰를 다시 찬찬히 찾아봐야겠지만 한 인간 내면에는 원시시대부터, 고대, 중세, 근대, 현대가 다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원시시대의 수학부터 교육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은 아주 먼 옛날의 수학적 도구를 알게 된 사람이다. 고등학교까지는 17세기 정도까지 배운 사람이다. 물론 16세기에 발견된 미적분을 다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내용을 보게 된다. 대학수학을 배운 사람은 19세기, 20세기 발견된 내용을 어느 정도 훑게 된다. 석,박사는 아마도 21세기 수학까지 다 배우는 거겠지?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시대의 수학적 사고를 교육을 통해 발현시키면 되는 것이다. 다 우리 안에 있다. 그 당시에는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발견되지 않은 수학적 개념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 후손들이 발견하겠지? 이 책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느꼈다. 내 책을 통해 학생들이 이런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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