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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1일 03시 01분 등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이처럼 거대한 책인 줄 모르고 시간을 너무 짧게 잡았습니다. 두 번에 나누어서 읽고 싶습니다.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번에 2부 후반대까지 읽었고 다음에 3, 4부를 읽겠습니다. 가능하면 원래 예정되어 있던 <그리스인 조르바>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차라투스…> 1부에 핵심적인 내용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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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조사는 이전의 <즐거운 지식>에서 했던 니체 조사로 대체합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29 차라투스트라는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의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그의 정신과 그의 고독을 즐기며 10년 동안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드디어 그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일어나 태양 앞으로 나아가 태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대 거대한 천체여! 그대에게 그대가 비추어줄 것이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어떻게 될까!

10년 동안 그대는 여기 나의 동굴로 떠올랐다. 나와 나의 독수리와 나의 뱀이 없었다면 그대는 그대의 빛과 그대로의 행로에 지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아침 그대를 기다리고 그대의 충일을 빼앗고 그 대신 그대를 축복했다.

보라! 나는 꿀을 너무 많이 모은 벌처럼 나의 지혜에 지쳤고 나는 나를 향해 내미는 여러 손이 필요하다.”

==>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 의 의미심장함.

==> 단테의 신곡의 첫 구절과 상통한다. 서른이 인생의 반절쯤 되니까.

 

30 나는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려고 하거니와 인간들의 명칭에 따르면 나는 그대와 마찬가지로 몰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è 역주 : 몰락 고독(철저한 인식)한 생활을 떠나 인간 세계로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31 성자는 말했다. “왜 나는 숲 속과 황야를 헤매었던가? 인간을 몹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닌가? 지금 나는 신을 사랑한다. 인간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너무나 완전한 존재로 보이는구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키리라.”

 

33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구나.”

 

33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34 인간에 대해서 원숭이는 무엇인가? 웃음거리, 또는 비통한 수치다. 그리고 초인에 대해서는 인간이 그러할 것이다. 곧 웃음거리, 또는 비통한 수치다.

 

34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에게 간청한다, 대지에 충실하고 당신에게 초지상적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독을 배합하는 자들이다.

 

35 , 이때 영혼 자신도 메마르고 처참해지고 굶주리고 있었다. 그리고 잔인성은 이 영혼의 쾌락이었다.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도 나에게 말해다오. 그대들의 육체는 그대들의 영혼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그대들의 영혼은 빈곤, 더러움, 가련한 쾌감(주석 : 자기만족)이 아닌가?

è 죄의식의 세 가지를 굉장히 잘 짚어내었다.

 

그렇다., 인간은 더러운 흐름이다. 더럽혀지지 않은 채 더러운 흐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è 바다. 베아트리체.

è 베아트리체. 그레첸이 도피할 남자의 아이를 낳고 모멸 속에서 아이를 배에서 키우고 죽이는 죄를 저지르면서 해탈하는 과정, 과 바다의 닮은 점.

 

37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놓인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고 무서워서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의 사랑스러움은 그가 과도이며 몰락이라는 데 있다.

è 인간이 궁극적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정 반대. 오히려 목적이 아니라는 것에서 위대함을 찾는 아이러니. 인간은 인간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 원숭이와 인간과 초인.

è 최근에 나는 결과와 과정의 대결에 심취해 있다. 이 부분이 아이러니로 여겨지는 이유는, 정적인 지점(원숭이, 인간, 초인)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 항상 목적 또는 목적이 성취된 지점이 가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조원을 번 상태가 가치있는가, 아니면 10조를 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가치있는가?

è 그런데 과정은 늘 목적을 염두해두어야 하는가? 나는 그게 매우 궁금하다.

è 이 부분을 주석은 생명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데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라고 확정 짓는다. 과학 언어로서 정확히 진화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적절하지 않다.

 

38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영혼을 낭비하는 자를, 감시받기를 원하지 않고 보답도 하지 않는 자를. 그는 항상 증여하고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è 노원 : 인생을 낭비할 자유.

 

39 나는 사랑한다, 상처가 났을 때에도 그 영혼의 깊이를 잃지 않고 사소한 체험 때문에 멸망할 수 있는 자를. 이렇게 해서 그는 즐거이 다리를 건너간다.

è 주석 : 실패했을 때도 절망하지 않으며, 작은 체험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è 주석이 많은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해석의 기회를 놓치게 한다.

è 사소한 체험 때문에 멸망할 수 있는 자 : 이것은 언어 그대로이다. 정말로 멸망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따위가 아니다. 황진이에게 멸망당한 스님은 멸망하였기 때문에 해탈을 얻는다.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을 만큼, 또 만물을 자기 안에 간직할만큼 넘쳐흐르는 영혼을 가진 자를. 이렇게 해서 만물은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

 

40 (군중)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자랑스러운 것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자랑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그들은 교양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들을 목자보다 뛰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자랑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가장 경멸해야 할 자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것은 바로 최후의 인간이다.

è 경멸 : 일반적으로 금기시 되는 것.

è 그러나 사람들은 경멸을 터부시함으로서 정말로 경멸해야 할 대상을 상실한 채 현재에 안주하게 되었다.

è 흔히 이상주의는 청소년기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스스로를 부양해야 하는 어른이 되어서까지 경멸을 유지하는 것은 사치다. 우리는 안주하기 위해 쳇바퀴를 열심히 돈다. 돌아야 겨우 현재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므로.

 

41 “우리는 행복을 발명해냈다.”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거린다.

그들은 살기 어려운 지방을 버렸다. 온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 사람에게 몸을 비비고 있다.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è 주석 : 최호의 인간 초인의 반대어로 독창성 없는 교양에 자족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41 병에 걸리는 것과 의심을 품는 것은 그들에게는 죄다. 그들은 걸음걸이도 조심한다. 돌에 걸려서, 또는 인간에게 부딪쳐서 비틀거리는 자는 바보다.

 

42 때때로 복용하는 소량의 독 이 독을 마시고 그들은 즐거운 꿈을 꾼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량의 독을 마시고 즐거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은 아직도 일하고 있다. 일은 일종의 오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오락이 몸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들은 이제는 가난해지지도 못하고 부자가 되지도 못한다. 어느 것이나 너무 귀찮기 때문이다. 아직도 지배권을 탐내는 자가 있는가? 아직도 복종하는 자가 있는가? 어느 것이나 너무 귀찮은 것이다.

목자는 없고 짐승 떼가 있을 뿐! 만인은 평등을 원하고 만인은 평등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자는 자진해서 정신병원으로 간다.

예전에는 온 세상이 미쳤었다.” 가장 세련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거린다.

그들은 영리하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조소에는 끝이 없다. 그들도 다투기는 하지만 곧 화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장을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낮의 쾌락과 밤의 쾌락이 따로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건강을 존중한다.

우리는 행복을 발명해냈다.”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거린다.

è 건강을 존중한다.

이 말이 계속 반복된다. 치열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존을 해칠까봐 조심한다.

è 지금 이 문단 하나가 내 가치 체계 전 영역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었다. 조목조목 내가 도그마로 생각하던 도덕률들이다. 니체는 실험적으로 도덕들을 뒤집어보다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을까?

기존의 서구적 가치를 궁극의 도덕률로 가감없이 받아들였던 나에게 뼛속을 관통하는 번개같다.

 

44 차라투스트라는 대답했다.(방금 줄을 타다가 익살꾼의 방해로 떨어져 죽게 된 줄 타는 사람에게) “친구여, 내 명예를 걸고 말하거니와 당신이 말한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마도, 지옥도 없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의 육체보다 더 빨리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사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당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당신의 말은 내가 생명을 잃더라도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매와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춤추는 것을 가르친 짐승과 같소.”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위험한 일을 당신의 천직으로 삼았고, 이 천직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천직 때문에 파멸을 맞이했습니다. 나는 손수 당신을 묻어드리겠소.”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을 때 죽어가는 사람은 이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차라투스트라의 손을 잡고 감사를 표시하려는 듯이 손을 움직였다.

 

46 사람의 생존은 무시무시한 것이고 결국 아무 의미도 없구나. 사람에게는 한 사람의 익살꾼조차도 운명이 되는구나.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싶다. 존재의 의미는 초인, 인간이라는 검은 구름을 뚫고 번쩍이는 번개다.

 

50 보라, 저 선량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그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그들의 가치표를 부숴버리는 자, 그 파괴자와 범죄자다. 그러나 그는 바로 창조하는 자다.

보라, 저 모든 신앙의 신도들을! 그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그들의 가치표를 부숴버리는 자, 그 파괴자와 범죄자다. 그러나 그가 바로 창조하는 자다.

è 노원이 사람들을 살해하여 얻은 반도덕적 행위로 예술품을 창조하는 행위는 극단적 적용의 한 예다.

창조하는 자는 동반자를 구할 뿐 시체를 구하지는 않는다. 또한 짐승떼나 사자를 구하지도 않는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표에 적어 넣을 창조의 협력자를 구한다.

창조하는 자는 동반자, 같이 수확을 거둬들일 자를 구한다. 창조하는 자 앞에서는 만물은 익어서 수확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백 개의 낫이 없다. 따라서 그는 이삭을 쥐어뜯으며 화를 낸다.

창조자는 동반자, 낫을 갈 줄 아는 자를 구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파괴자, 선과 악을 경멸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수확하는 자요, 축제를 벌이는 자다.

è 노원과 김이상의 관계

è 낫을 든 자를 구한다. 시체를 수확하여 다듬어 축제에 쓸 고기로 만들어 내어놓을 수 있는 자.

 

51 나는 목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무덤 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는 대중과 맒하지 않으리라. 내가 죽은 자와 말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나는 창조하는 자, 수확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와 힘을 합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무지개를 보여주리라. 초인에 이르는 모든 계단도.

혼자서 숨어 사는 자와 둘이서 숨어 사는 자에게 나는 나의 노래를 들려주리라. 그리고 일찍이 듣지 못한 말을 들을 줄 아는 자 그의 마음을 나는 나의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리라.

 

나는 나의 목표를 향해 가리라. 나는 오직 나의 길을 갈 뿐이다. 나는 주저하는 자와 게으른 자를 뛰어 넘으리라. 나의 길이 몰락의 길이 되도록!

è 몰락 : 이 책에서 몰락이 가장 먼저 쓰인 부분은, 차라투스트라가 인간 세계로 내려오면서

[나는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려고 하거니와 인간들의 명칭에 따르면 나는 그대(태양)와 마찬가지로 몰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è 태양의 몰락. – 이것은 자연적으로는 필연적인 것이긴 한데, 인간에게 지혜를 준 대가로 몰락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주석에서는 고독(철저한 인식)한 생활을 떠나 인간 세계로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 하산하는 것이 몰락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

è 그러나 그게 다일까?

è <배트맨 다크나이트> 에서 배트맨이 위기에 처하자 그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말한다.

왜 떨어질까?”

è To seek misfortune.

è 물범이 있는 바다로 뛰어드는 첫 번째 펭귄?

è 몰락은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인가?

 

51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정오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è 왜 정오의 태양인가? 정오의 날카로움. 정오에 태양은 완벽하다.

è 랭보 : 깨어보니 정오였다.

 

54 인내력 있는 정신은 이와 같은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짐을 싣고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정신의 사막을 달린다.

그러나 가장 쓸쓸한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획득하고 정신의 사막을 지배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정신은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정신은 마지막 주인, 최후의 신에게 적대하려고 하고 정신은 승리를 위해 이 거대한 용과 격투하려고 한다.

정신이 이미 주인으로 여기지 않고 신이라고 부르지 않으려는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그대는 마땅히 해야 한다” – 이것이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바란다고 말한다.

è 용은 초자아. 도달의 정점. 결과.

è 사자는 자아. 초자아로 다가가는 밧줄. 과정. 그런데 아래를 읽어보면 오히려 초자아가 아닌 또 다른 가치의 창조를 바란다. 새로운 세계를 원한다.

è Tomorrow will come.

그대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황금빛으로 빛나며 정신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유린 동물로서 비늘마다 그대는 마땅히 해야 한다!”가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천 년 동안의 가치가 이 비늘에서 빛나며 따라서 모든 용 가운데서 가장 힘센 용은 말한다. “여러 사물의 모든 가치 그것이 내 몸에서 빛난다라고.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창조된 가치 그것은 바로 나다. 사실상 이제는 나는 바란다는 있어서는 안 된다!” 용은 이렇게 말한다.

è 바란다 : 지금의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바란다 는 열린 체계다. 창조.

나의 형제들이여, 무엇 때문에 정신에 사자가 필요한가? 왜 체념과 외경심으로 가득 찬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짐승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새로운 가치의 창조 이것은 사자도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획득 이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유의 획득과 의무 앞에서도 서슴지 않는 신성한 부정 이를 위해서, 나의 형제여, 사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의 획득 이것은 인내심과 외경심이 깃들인 정신에 대해서는 가장 무서운 획득물이다. 참으로 그것은 정신에 대해서는 강탈이며 강탈하는 짐승의 소행이다.

è 강탈. 무엇으로부터의 강탈인가?

è 강탈. 남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타인에 대한 도덕률을 뛰어넘을 때 창조가 가능하다. 그것이 강탈하는 사자의 소행. 사자는 지배자.

è 노원의 살인. 이 경우는 지나치게 극단적이지만.

일찍이 정신은 그대는 마땅히 해야 한다를 가장 신성한 것으로서 사랑했다. 잊는 정신은 그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하기 위해 가장 신성한 것에서도 미망과 자의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강탈을 위해 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말하라. 사자조차도 하지 못한 일로서 어린애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왜 강탈하는 사자는 다시 어린애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어린애는 순결이며 망각이고 하나의 새로운 출발, 하나의 유희.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신성한 긍정이다.

è 초월적 경지에서 모든 것을 re-set한다. 물리적 어린애가 분재의 철사줄로 변형되어 자라나다가,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어 철사줄을 모두 끊어내고 새로운 출발로서 자라나는 것과 같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세 가지 변화를 나는 그대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었고, 낙타는 사자가 되었고, 사자는 어린애가 되었는가를.

 

59 나는 허다한 명예도, 거대한 재산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비장에 염증을 일으킨다. 그러나 적당한 명성과 조촐한 재산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

è 현재의 직업은 참 적당하다.

 

62 , 나의 형제들이여, 내가 창조해낸 이 신은 다른 모든 신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 인간의 광기였다!

이 신은 인간이었다. 게다가 인간과 자아의 초라한 부분이었다. 자신이 재와 작열로부터 그것은, 이 유령은 나에게 다가왔고 정녕! 피안으로부터 나에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나의 형제들이여,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고뇌하는 나 자신을 초극했다. 나는 나 자신의 재를 산으로 갖고 가서 더욱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보라! 이때 유령들은 나를 피해 달아났다.

이러한 유령을 믿는 것은 이제 나에게는 고뇌일 것이며, 쾌유한 나에게는 가책이 되리라. 이제 나에게는 고뇌요, 굴욕이 되리라. 나는 배후세계론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배후세계를 창조한 자들. 그것은 고뇌요, 무능력이었다. 가장 괴로워하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덧없는 행복의 광기였다.

è 앙드레 지드의 생각도 비슷. <좁은 문>에서 그는 알리사가 제롬을 거부한 채 가장 성스러운 삶을 살다가 요절하는 어리석음을 안타깝고 아름다운 문체로 그리고 있다. 알리사는 제롬의 인생을 희생시켰는데(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지 못함), 그런 의미에서 반전된 사자다.

 

63 그리고 이 가장 정직한 존재, 즉 자아 그것은 육체에 대해 말하고, 그것은 시를 쓰고 몽상하고 부러진 날개로 날아갈 때에도 육체를 원한다. 그것은, 자아는 점점 더 정직한 말을 할 줄 알게 된다. 그리고 정직해질수록 자아는 육체와 대지를 찬양하고 존경하는 말을 더 많이 찾아낸다.

 

64 차라투스트라는 병든 자에게도 상냥하다. 정녕 그는 병든 자들의 그들 나름의 위안과 배신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들이 병으로부터 회복되고 추구하는 자가 되어 보다 건강한 육체를 획득하기를 바랄 뿐!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병으로부터 회복되고 있는 사람이 지난날의 환상에 연연하고 밤중에 몰래 그의 신의 무덤으로 기어가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나에게는 여전히 병이며 병든 육체로 보인다.

 

66 그러나 각성한 자, 잘 아는 자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육체이며 육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혼은 육체에 속하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육체는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가진 다양성이고 전쟁이며 평화이고 짐승의 무리이며 목자다.

 

67 그대는 자아(ich)’라고 말하고 이 말을 자랑한다. 그러나 보다 위대한 것은 그대는 믿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대의 육체이며 그대의 육체의 커다란 이성이다. 이 거대한 이성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위한다.

감각이 느끼고 정신이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 안에 목적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감각과 정신은 스스로 모든 사물의 목적임을 그대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감각과 정신은 이와 같이 허영심이 강하다.

è , 생의 그 순간 순간을 음미하는 것이 가치이고 목적이다.

è 조셉 캠벨. I don't believe people are looking for the meaning of life as much as they are looking for the experience of being alive.

Life is without meaning. You bring the meaning to it. The meaning of life is whatever you ascribe it to be. Being alive is the meaning.

è 육체 = 살아 있음

 

그대의 육체에는 그대의 최선의 지혜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성이 있다. 그리고 왜 그대의 육체에 그대의 최선의 지혜가 꼭 필요한가를 도대체 누가 알 것인가?

è 뭔 소리지?

 

그대의 자기는 그대의 자아와 이 자아의 자랑스러운 도약을 비웃는다.

 

자기는 자아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고통을 느껴라!” 이때 자아는 고뇌하고 더 이상 고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숙고한다. 그 때문에 자아는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는 자아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쾌락을 느껴라!” 이때 자아는 기뻐하고 더 자주 기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숙고한다. 그 때문에 자아는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è 사고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사고하게 되는 것을 비판한 것 같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는 한마디 하고자 한다. 그들이 경멸하는 것, 그것은 그들의 존경이 시킨 일이다. 존경과 경멸, 가치와 의지를 창조한 것은 무엇인가?

 

창조적인 자기가 스스로 존경과 경멸을 창조하고, 쾌락과 고통을 창조한다 창조적인 육체가 스스로 자신이 지닌 의지의 손으로 정신을 창조한다.

 

그대들의 어리석음과 경멸에 있어서도, 그대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그대들의 자기에 이바지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의 자기 자체가 죽음을 원하고 삶에 등을 돌렸다고.

 

이미 자기는 가장 바라고 있는 일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창조하는 것을 성취할 힘이 없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창조하는 것은 자기가 가장 바라는 일이며, 자기의 최고의 정열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가 이 일을 성취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러므로 그대들의 자기는 몰락을 원한다. 그대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è 이 때의 몰락은 다른 의미인 듯하다. 죽음을 향해 가다. 소멸로의 몰락.

 

그대들의 자기는 몰락을 원하고 따라서 그대들은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대들은 이미 그대들을 넘어서서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대들은 삶과 대지에 분노한다. 그대들의 경멸의 곁눈질에는 무의식적인 질투가 깃들여 있다.

나는 그대들의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대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는 결코 초인에 이르는 다리는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71 많은 덕을 갖는 것은 뛰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과중한 운명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사막으로 가서 자살을 했다. 여러 덕의 전투, 그리고 그 싸움터가 되는 것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형제여, 전쟁과 전투는 악인가? 그러나 이러한 악은 필연적이며 그대의 여러 덕 사이에서 일어나는 질투, 불신, 비방은 필연적이다.

è 모순되는 여러 덕을 가진 사람은 자기 분열을 일으킨다.

 

보라. 그대의 덕들이 각기 얼마나 최고의 위치를 탐내고 있는가를. 그대의 덕들은 각기 그대의 정신 전체를 요구하고 그대의 정신을 자신의 전령으로 삼으려 한다. 그대의 덕은 분노와 증오와 사랑에 있어서 그대의 힘 전체를 요구한다.

 

72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여러 덕을 사랑해야 한다. 그대는 여러 가지 덕으로 말미암아 파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è 이 챕터가 환희와 정욕에 대하여. 부분인데환희와 정욕이 어디에 있나.

 

72 이 책에서 최고의 부분 중 하나!

 

창백한 범인에 대하여

 

그대들 재판관들이여,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제물로 바친 짐승이 머리를 숙이지 건에 죽일 수는 없는가? 보라, 창백한 범인이 머리를 숙였다. 그의 눈에는 엄청난 경멸이 나타나 있다.

나의 자아는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나의 자아는 나에게는 인간에 대한 커다란 경멸이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재판하는 것은 그의 최고의 순간이다. 숭고한 자를 비열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지 마라.

è 주석 : 재판관 = 제물을 바치는 제관

범인 = 희생물로 바쳐진 짐승.

범인이 자기의 죄를 시인하는 것을 머리를 숙인다는 말로 표현했다.

è 탁월한 해석이다! ,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니체 대단하다. 도덕률에게 지내는 제사에 제관은 재판관이요, 제물은 범인이다.

è 주석 : 창백한 범인이 나의 자아는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임을 고백하는 자기 인식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재판이고 이것이 그의 최고의 순간이다. 이 순간에 있어서 그를 숭고한 자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 인식을 했기 때문이다.

è 재판이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 재판관은(타인, 군중) 그를 이전 도덕률에 대한 제물로 희생하지만, 범인 역시 스스로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 스스로를 죽이고(재판), 새로이 태어난다. 인간을 죽이고 초인으로 태어난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 고뇌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구원도 있을 수 없다. 하루 빨리 죽는 것 이외에는.

 

74 어떤 표상이 창백한 인간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가 이 표상을 행동화했을 때 그는 그의 행위에 필적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표상이 행동화된 다음에는 그는 이 표상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을 항상 한 행위의 행위자로 보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광기라고 부른다. 그에게 있어서는 예외가 본질로 변한 것이다.

 

들어라. 그대들 재판관들이여! 그 밖에도 또 하나의 광기가 있다. 그것은 행위 이전의 광기다. , 내가 보기에는 그대들은 이 광기의 영혼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구나!

붉은 옷을 입은 재판관은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왜 이 범인은 살인을 했는가? 그는 강탈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그의 영혼은 피를 원했다. 강탈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도의 행복을 갈망했다!”

그러나 그의 빈약한 이성은 이러한 광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피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때 너는 적어도 강탈하려는 생각을 품지 않았단 말인가? 복수를 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라고 그의 빈약한 이성은 말했다.

è 이야~~~~~

è <알려지지 않은 신>의 노원의 생각과 매우 비슷하다. 이 책이 이런 내용일 줄이야. 충격적이다. 당연한 귀결인가?

è 주석 : 단도의 행복 = 생의 의지와 관련된 파괴욕, 살인욕. 왜 파괴욕과 살인욕이 생의 의지와 연결될까? 오히려 나는 죽음을 경험한 후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덤으로서의 인생에서 자유를 쟁취하고 거기서 살인욕이 분출되는 것으로 그리려고 했는데. 죽음을 경험한 후 생을 느끼게 되고 진정한 생의 의지를 알게 된다 라고 해석? 말이 돌고 도는 것 같다.

 

76 그대들의 착한 자의 여러 가지 점이 나에게 구토를 일으킨다. 그러나 정녕 그들의 악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나는 바라고 있다. 그들이 창백한 범인들처럼 광기를 갖고 파멸하게 되기를!

è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 파멸을 바라는 것은, 그들에게 일말의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76 정녕 나는 바라고 있다. 그들의 광기가 진리, 또는 성실, 또는 정의라고 불리기를. 그러나 그들은 오래 살기 위해서 게다가 가련한 안일 속에서 살기 위해서 그들의 덕을 갖고 있을 뿐이다.

è 이 책을 너무 늦게 만났다.

 

나는 강가에 있는 난간이다. 나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붙잡아라!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지팡이는 아니다.

è 왜 강가에 있는 난간이지? 난간은 안전장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에서 핵심은, 이 난간 덕분에 우리는 강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강에 뛰어들 때에는 이 난간을 붙잡고 뛰어내린다.

è 너무 작위적 해석인데. 더 이상의 설명은 없네.

 

76 모든 책 중에서 나는 오직 피로 쓴 책만을 사랑한다. 피로 쓰라. 그러면 그대는 알게 되리라. 피가 정신임을.

è 주석 :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는 신체의 활력을 상징.

 

77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책을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미워한다.

è 주석 : 겉으로는 책을 읽지만 정신에는 아무런 능동성이 없다.

 

독자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은 이미 독자를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다. 독자가 한 세기를 더 산다면 정신 그 자체가 악취를 풍기리라.

 

피와 잠언으로 쓰는 자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è 니체는 성공했고, 나는 그가 극도로 부럽다.

 

77 산맥에서 첩경으로 가려면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가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는 발이 길어야 한다. 잠언은 산봉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잠언을 듣는 사람은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다.

 

78 나는 이미 그대들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는 없다. 발 밑에 깔린 구름, 내가 비웃는 이 검고 무거운 구름 바로 이것이 그대들에게는 뇌운이다.

è 주석 : 내가 이미 넘어선 구름(삶의 고뇌)은 그대들에게는 공포의 근원이다.

그대들은 고양을 열망할 때 위를 쳐다본다. 그러나 나는 이미 높은 곳에 도달했기 때문에 내려다본다.

그대들 중에 웃으면서 동시에 고양된 자가 있는가?

가장 높은 산에 오르는 자는 모든 비극적 유희, 비극적 성실성을 비웃는다.

 

용감하고 태연하고 비웃고 난폭하라 지혜는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지혜는 여자이며, 언제나 전사만을 사랑한다.

è 괴테 : <파우스트> 여성적인 것이 구원한다.

 

그대들은 나에게 말한다. “삶은 감당하기 어렵다라고. 그러나 그대들이 아침에는 긍지를, 저녁에는 체념을 갖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è 주석 : 어려운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서이다. 아침과 저녁을 인생의 초기와 만년으로 보라.

è 주석이 부족하다.

è 왜 그대들은 초인에게 삶은 감당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는가? 초인이 용감하고 태연하고 비웃고 난폭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을 견디는 것은 힘들고 초인이 말한 바로 그 육체에 얽매여 삶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라고 말한다. , 삶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보라. 왜 당신들은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을 것처럼 삶에 뛰어들었다가 죽을 때가 되어 아쉬운 듯 체념하는가? 무엇이 빠졌지? 삶이 뭐였지? 이렇게 죽는 건가? 그대들이 놓친 것이 뭐냔 말이다. 바로 뒤 이은 글을 보라! 확실하다!

 

(바로 뒤이은 글)

삶은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이와 같이 연약한 태도를 보이지 마라! 우리는 모두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귀여운 한 쌍의 나귀. 그 몸에 한 방울의 이슬이 떨어져도 흔들리는 장미의 꽃봉오리와 우리는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è 진실로 아름다운 문장이 아닌가? 삶의 고통을 긍정하고 사랑한다.

è 한 쌍의 나귀를 만들고 싶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옳다.

è , 사랑을 하게 된다.

è 주석 : 인간은 자기와 관련되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그것이 싫은 것일지라도 결국은 애정이나 애착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고해와 같은 삶을 사랑하게 된다.

è 필연적인 것은 싫은데? 그러나 자기라고 바운더리를 인정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하게 되리라. 아니면 자기와 이혼하게 되겠지. 그러면 된다.

 

79 사랑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광기가 있다. 그러나 광기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이성도 있다.

그리고 삶을 좋아하고 있는 나에게는 나비와 비누 방울과 인간 가운데서 나비나 비누 방울 같은 자들이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경쾌하고 어리석고 우아하고 활발한 작은 영혼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투스트라는 눈물을 흘리게 되고 노래를 부르게 된다.

내가 신을 믿는다면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è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베토벤이 죽을 때 –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경쾌한 템포.

가벼운 삶에 매료되다.

 

그리고 나는 나의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이 악마가 진지하고 철저하고 심원하고 장엄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중력의 요정이었다. 요정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물이 낙하한다.

우리는 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웃음에 의해서 죽인다. , 중력의 요정을 죽이자!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나는 나를 줄곧 달리게 했다. 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나는 밀려난 다음에야 움직이기 시작하는 일은 없었다.

이제 나는 가벼워졌고 이제 나는 날고 이제 나는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이제 나를 통해서 신이 춤을 춘다.

è 반다해 : “나랑 놀자.”

 

80 산 위의 나무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왜 그렇게 놀라는가? 인간은 나무와 다름이 없다. 인간이 높고 밝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 뿌리는 그만큼 강력하게 땅 속으로, 아래쪽으로, 어둠 속으로, 깊은 곳으로 악 속으로 뻗어 나가려고 한다.”

그렇다, 악 속으로!” 젊은이는 외쳤다. “당신은 어떻게 나의 영혼을 꿰뚫어 볼 수 있었소?”

 

차라투스트라, 당신은 진리를 말했습니다. 나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한 이후로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신용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요?

è 주석 : 양심이 앞서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 è 주석이 훌륭하다.

나는 너무 빨리 변했습니다. 나의 오늘은 나의 어제를 부정합니다. 나는 올라갈 때 가끔 계단을 뛰어넘습니다. 어떤 계단도 이런 행동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è 주석 : 자기가 놓인 상황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è 주석 탁월하다.

위에 오르면 나는 언제나 혼자입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고독의 혹한이 나를 떨게 합니다. 도대체 나는 높은 곳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요?

나의 경멸과 나의 동경은 함께 성장합니다. 내가 높이 오라가면 갈수록 나는 올라오는 자를 더욱더 경멸합니다. 도대체 그는 높은 곳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요?

나는 나의 상승과 좌절을 얼마나 부끄러워하는가! 나는 나의 헐떡거리는 숨을 얼마나 비웃고 있는지! 나는 날아다니는 자를 얼마나 미워하는가! 나는 높은 곳에서 얼마나 지쳐 있는가!”

è 정확히 내 이야기다. 그리고 김이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è 그리고 니체의 과거일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제2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젊은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옆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나무는 여기, 산봉우리에서 쓸쓸하게 서 있다. 이 나무는 인간의 짐승을 굽어보며 드높이 자랐다. 이 나무가 말을 하고 싶어도 이 나무의 말을 알아듣는 자는 하나도 없으리라. 그처럼 드높게 이 나무는 자란 것이다. 이제 이 나무는 오직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다. 이 나무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릴까? 이 나무는 구름이 있는 자리에 인접해 있다. 그는 최초의 번개를 기다리고 있을까?

차라쿠스트라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젊은이는 격렬한 몸짓을 하며 외쳤다. “그렇습니다, 차라투스트라, 당신은 진리를 말했습니다. 나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했을 때 나의 몰락을 열망했습니다.

è 주석 :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은 모험을 감행하려는 의지다. 그러므로 자기 이상의 강자를 만나면 몰락이 불가피하다.

è 불가피한 게 아니고 몰락하기 위해서 오른다. 그게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간에. 우리는 무엇인가 더 초월적인 것을 만나기 위해 산을 오르지 않는가?

è 난 어릴 때부터 왜 공부해야 하는지?”왜 살아야 하는지?”가 궁금했었는데 어딜 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내렸던 결론은 공부를 하는 이유는,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답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 답을 알기 전까지는 일단 공부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간 단계에서 내가 얻은 해답은 과학적 해답이었는데, , 진화론적으로 유와 무의 이진법 상 나는 현재까지 살아남았고 그것이 생의 의지처럼 보인다”. 마치 지렁이가 직사광선을 피해 기어가듯이 나는 진화론적 생의 의지를 가진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답을 찾는 것을 그만두었는데, 확실히 언제나 더 오를 산이 있다.

è 진화론적 해석은 도그마처럼 보이지만, “생의 의지란 결과론적 해석이다. 우리는 자의적으로 죽을 수도 있다. 스스로를 해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다. 자유의지의 결과물을 해석하는 것이 과학의 의무이지 과학의 도그마에 맞춰 사는 것이 삶의 의무는 아니다. 우리는 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오른다. 왜 오르지? 뭔지 모를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서.

è 나는 오른다. 왜냐하면, 산이 거기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내가 기다리던 번개입니다! 보라, 당신이 우리들 앞에 나타난 다음에는 나는 도대체 얼마나 초라해졌는가? 당신에 대한 질투가 나를 파멸시켰습니다!” 젊은이는 이렇게 말하고 통곡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안고 그와 함께 떠났다.

è 이게 끝인가?

è 번개에 타기 위해 산에 오른다. = 낙타가 짐을 싣고 오르듯이.

è 번개의 피뢰침으로 간택되기 위해서는 산을 올라야 한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검은 구름이 충분해질 때까지.

è 그리고 탄다. 철저하게. 재가 된다.

è 여기서 끝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자신의 탄 재를 모아서 다시 활활 불태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면, 구름을 아래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된다.

 

심장을 찢기는 것 같구나. 그대의 말보다도 그대의 눈이 그대의 온갖 위험을 더 잘 나타내고 있구나.

아직도 그대는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를 모색하고 있다. 그대의 모색이 그대를 잠들지 못하게 하고 너무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대는 높은 곳에서 자유롭게 지내려고 한다. 그대의 영혼은 별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대의 사악한 충동도 자유를 갈망한다.

그대의 들개들은 자유를 바란다. 그대의 정신이 모든 감옥을 파옥하려고 할 때 들개들은 지하실에서 쾌락을 열망하며 짖고 있다.

è 악마에게 영혼을 팔 위험.

è 영혼과 사악한 충동은 분리되나? 들개를 풀어서는 안되나?

 

정의와 자유를 획득한 자는 다시 자기 자신을 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게는 아직도 감옥과 곰팡이가 허다하게 남아 있다. 그의 눈은 좀더 순수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è 그런데, 그 정의와 자유는 어떻게 획득하나? 여기서 갑자기 스리슬쩍 정의가 튀어나오는데 정의가 도대체 무엇이지?

è 늘 헷갈린다. 도덕률과 도덕률이 만나는 회색 지대. 기존의 도덕률을 부정하라고 하면서 늑대를 풀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변죽 지방에서 변죽만 울리고 있으면 안 된다.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늘 변죽에 매몰되어 시간을 낭비하곤 했었다.

è 공자가 말한 종심과 비슷하게 생각해도 될까?

è 청년을 책망하는 투로 봐서는, 자유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사하는 것인 듯 보인다.

 

그렇다. 나는 그대의 위험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사랑과 희망을 기울여 그대에게 간청한다. 그대의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마라!

그대는 아직도 그대가 고귀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대를 원망하며 악의에 찬 시선을 던지는 다른 사람들도 아직은 그대가 고귀하다고 느끼고 있다. 고귀한 자는 만인을 방해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착한 자들에게도 고귀한 자는 방해물이다. 착한 자들이 고귀한 자를 착한 자라고 부르더라도 그들은 이와 같이 부름으로써 고귀한 자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è 이의 적절한 예를 나는 알고 있다. 전상국 <우상의 눈물>, 학교의 조직 우두머리를 반장이 착함의 미덕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내용이었다.

 

고귀한 자는 새로운 것,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고 한다. 착한 자는 옛 것을 원하고 옛 것을 간직하려고 한다.

è 주석 : 새로운 덕 = 정신의 참된 자유에 도달한 경지, 말하자면 어린애의 경지

그러나 고귀한 자가 착한 자가 되는 것은 그의 위험이 아니다. 오히려 뻔뻔스러운 자, 비웃는 자, 그리고 부정하는 자가 되는 것이 그의 위험이다.

è 주석 : 고귀한 자는 좌절되었을 때 통속화되기보다는 성격 이상자가 될 위험이 크다.

è 고귀한 자의 위험이 고귀함이 좌절되었을 때 겪을 위험을 의미하나? 좌절은 필연적인가?

 

84 , 나는 고귀한 자를 알고 있었는데 그는 최고의 희망을 잃었다. 그런데 이때 그들은 모든 높은 희망을 비방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덧없는 쾌락에 싸여 뻔뻔스럽게 살았고, 오늘을 사는 것 이외에는 거의 목표가 없었다.

정신도 쾌락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때 그들의 정신의 날개는 찢겼다. 이제 이 정신은 기어 돌아다니고 이것저것을 물고 더럽힌다.

일찍이 그들은 영웅이 되려고 했다. 이제 그들은 탕아가 되었다. 그들에게 영웅은 원망과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사랑과 희망을 기울여 그대에게 간청한다. 그대의 영혼 속의 영웅을 버리지 마라! 그대의 최고의 희망을 신성한 것으로 간직하라!

 

85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 자기 마음속에 야수를 품고 다니면서 쾌락에 빠지든가, 자기 자신을 갈기갈기 찢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쾌락은 자기 몸을 찢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인간이 되지 못했다. 이 무서운 자들은, 그들이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라고 설교하고 스스로도 떠나간다면 얼마나 좋으랴!

여기에 황혼의 결핵 환자들이 있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이미 죽음을 서두르기 시작하고 피로와 체념의 가르침을 동경한다.

è 자식. 자식이란, 두려움이다. 자식의 삶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한다.

è 주석 : 인간 = 독립된 자유로운 인격

 

86 “분만은 노고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왜 낳는가? 우리는 오직 불행한 자를 낳을 뿐이다! 그들도 역시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이다.”

è 내 생각과 동일하다. 나에게도 이런 점이 있었구나.

 

86 페이지 전문

 

그들의 지혜는 말한다. “살아 있는 자는 바보다. 따라서 우리도 마찬가지로 바보다! 그리고 이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엄청난 어리석음이다!”

삶은 고뇌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데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그대들의 종말을 준비하라!

그리고 덕에 대한 그대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그대는 자살해야 한다! 그대는 이 세상으로부터 몰래 떠나가야 한다!”

육욕은 죄다.” 죽음을 설교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자도 있다. “우리는 육욕을 버리고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

분만은 노고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왜 낳는가? 우리는 오직 불행한 자를 낳을 뿐이다! 그들도 역시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이다.”

동정이 필요하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가져가라! 나로 하여금 나이게 하는 것을 가져가라! 그러면 나를 속박하는 삶의 힘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만일 그들이 충심으로부터 동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이웃 사람들이 삶을 혐오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사악하다는 것 이것이 그들의 참된 선의일까.

그러나 그들은 삶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이 그들의 쇠사슬과 선물로써 다른 사람들을 더욱 확고하게 속박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고 삶은 심한 노동이며 불안이라고 생각하는 그대들도 삶에 몹시 지친 것이 아닌가? 그대들도 죽음의 설교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한 것이 아닌가?

è 삶의 짬밥

심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것, 새로운 것,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그대들은 모두 그대들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며, 또한 그대들의 근면은 도피이고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

그대들이 삶을 보다 더 믿었더라면, 순간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경우는 적었으련만. 그러나 그대들의 마음속에는 기다리기에 충분한 내용이 없다. 그리고 게으르기에 충분한 내용조차도 없다.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구나. 그리고 대지는 죽음에 대한 설교를 들어야 마땅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구나.

è 순간에 자기를 맡김 죽음에의 충동.

è 정점을 찍지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삶을 거부하는 생명들.

è 기다리기에 충분한 : 초인의 낙뢰를 기다리는 것. 천둥이 칠거라는 비전.

è 게으르기에 충분한 : “그래도 혹시 뭔가(비전)이 생길지 모르니조금만 더 죽음을 유예하는 게으름.

 

88 나는 그대들의 마음속에 깃들인 증오와 질투를 알고 있다. 그대들은 증오와 질투를 모를 만큼 위대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증오와 질투를 부끄러워 하지 않을 만큼은 위대해지려무나!

è 반다해에게 적용.

è 리처드 도킨스를 예로 들자면,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전사로 level 2에 해당한다.

 

그대들의 사상을 위해서! 그리고 그대들의 사상이 패배하더라도 그대들의 성실성은 이 패배를 넘어서서 승리의 함성을 질러야 한다!

 

89 그대들에게 나는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권한다. 그대들에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승리를 권한다. 그대들의 노동은 전투이고 그대들의 평화는 승리이기를!

 

89 좋은 구실이 있으면 전쟁조차도 신성해진다고 그대들은 말하는가?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훌륭한 전쟁은 모든 구실을 신성화한다고.

è 이는 전쟁을 위한 전쟁을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만큼 훌륭한 전쟁을 하라는 의미다. 훌륭한 전쟁을 할 정도라면 그 구실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그 전쟁을 하는 사람에게는. 구실의 가치를 판별하는 자는 외부에 있지 않다. 오로지 전쟁을 하는 자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전쟁의 퀄리티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전사의 열정이 구실을 신성하게 만든다.

 

89 “선은 무엇인가?” 그대들은 묻는다. 용감한 것이 선이다. “선은 아름답고 동시에 감동적인 것이다.” 어린 소녀들이 이와 같이 말하게 하라.

사람들은 그대들에게 무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들의 마음은 순수하다. 나는 정감을 나타낼 때 그대들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을 좋아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만조를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간조를 부끄러워 한다.

è 주석 : 전사는 정감이 없기 때문에 냉정한 것이 아니고 넘칠 듯한 정감이 있으면서도(만조) 이를 밖으로 나타내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사실은 정감이 풍부한 듯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정감이 메마르고 냉정하다(간조).

è 아니다. 주석은 틀렸다. 정말로 정감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순수할 때, 정감은 억눌리는 것이 아니다. 정감은 없다. 없다. 없다. “정감이 없다고 보여져서 없다고 해석하는 것은 정말로 정감이 없는 것이다.

è ? 정감은 용기를 말살하기 때문이다.

è 초인이 누군가를 사랑하여 아이를 지어주었을 때, 초인은 그녀를 떠난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는가? 결코 초인은 사랑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착한것이다. “착한 것은 고귀한 것이 좌절하여 중력으로 눌러 붙은 것이다. 사랑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이 장면에서 독자들과 관객들은 초인이 그래도 사랑이 있기를, 사랑의 단서를 보여주기를희망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è 철저하게 묵살해야 한다! 기대를 말살해야 한다! 초인은 사랑 없이 죽는다. 차라리 비전을 좌절당한 채 무표정하게 죽는 편이 훨씬 낫다.

è 만약 레 미제라블에서 청년 지도자 앙졸라가 마지막에 삶에 대한 정감을 나타내며 안타까워 했다면 그 누가 앙졸라를 사랑하겠는가? 그는 그저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는 사랑에 고뇌하는 마리우스를 꾸짖고 혁명의 깃발을 손에 쥐고 꼬그라져 죽어야 한다!

 

90 악의를 갖는다는 점에서 오만한 자와 허약한 자는 일치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다. 나는 그대들을 잘 알고 있다.

è 전쟁에서 승리한 자 = 오만한 자, 전쟁에서 패한 자 = 허약한 자

è 주석 : 오만한 자는 경멸과 조롱이라는 악의를 갖고 있고 허약한 자는 경쟁심과 질투라는 악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악의의 동기와 질은 다르다.

è 아니다. 허약한 것의 악의는 그런데 있지 않다. 나는 언제나 약함이 악함을 낳는다고 생각해왔다. 허약하다는 것은 패한다는 것이다. 패함이란 무엇인가? 사상적 패함이란, 사상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뤄내는 의지가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가 이미 악의이다. 의지를 포기하는 것. 그러니 오만한 자들은 허약한 자들을 경멸한다. 경쟁심과 질투는 힘이다. 이것은 가장 강력한 힘이다. 주석은 잘못 되었다.

è 니체가 말하려는 것은, 오만한 것은 승리한다 하더라도 패한 것과 동일하게 악하다는 것이다. 바로 뒤 이은 말을 보라. 악의만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언제고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다.’ 서로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고.

 

(뒤 이은 말)

그대들은 증오해야 할 적만을 갖고 경멸할 적은 갖지 마라. 그대들은 그대들의 적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대들의 적의 성공은 그대들의 성공이기도 하다.

è 헤겔. 정반합.

 

반항 그것은 노예의 미덕이다. 그대들의 미덕은 복종이기를! 그대들의 명령 자체가 복종이기를!

è 의지에 대한 복종

 

훌륭한 전사들에게는 그대는 원한다보다는 그대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말이 더 달콤하다. 따라서 그대들은 좋아하는 일체의 것을 미리 명령받지 않으면 안 된다.

è 앞서 말한 사자와 용의 일화를 말하는 듯하고 일견 모순되는 듯 보이지만 아니다.

è좋아하는 일바라기 위해서마치 마땅히 해야 하는 것처럼 굴어서 이루어내라는 뜻이다.

 

삶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은 최고의 희망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대들의 최고의 희망은 삶의 최고의 사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그대들의 최고의 사상을 나에게서 명령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상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이와 같이 그대들은 복종하고 싸우는 삶을 살아라! 오래 산다는 것에 무슨 보람이 있을 것인가! 아낌받기를 바라는 전사가 있을 것인가!

나는 그대들을 아끼지 않으나 그대들을 충심으로 사랑한다. 싸우고 있는 나의 형제들이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è 아끼지 않는다. 아낀다 = 없어질까봐 두려워한다. , 그들의 죽음을 침통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한다. 이것은 가능한 이야기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 나라를 구하기를 원하였다.

è 죽음의 불사.

 

95 커다란 영혼들에게는 자유로운 삶이 활짝 열려 있다. 정녕 적게 갖고 있는 자는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소유되는 경우도 적다. 조촐한 가난(청빈)을 찬양하라!

 

95 숲과 바위는 그대와 함께 품위 있게 침묵할 줄 안다. 다시 그대가 사랑하는 나무처럼, 넓은 가지를 펼치고 있는 나무처럼 되어라. 말없이 귀기울이며 이 나무는 바다 위에 솟구쳐 있다.

 

97 시장과 명성을 떠난 곳에서 모든 위대한 일이 일어난다. 옛날부터 시장과 명성을 떠난 곳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들이 살고 있었다.

달아나라, 나의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나는 그대가 도가리 떼에 마구 쏘이는 것을 본다. 달아나라, 사납고 강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98 그러나 그대 심오한 자여, 그대는 작은 상처에 대해서도 너무 깊이 고뇌한다. 그래서 상처가 낫기도 전에 똑 같은 독충이 그대의 손 위로 기어다녔다.

이 훔쳐 먹는 자들을 죽이기에는 극대는 나에게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존재다. 그러나 그들의 유독한 모든 부정을 참고 견디는 것이 그대의 운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2 순결을 지키기 어려운 자에게는 순결을 단념하라고 권고해야 한다. 순결이 지옥 곧 영혼의 진흙과 음탕에의 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더러운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나에게는 최악의 것이 아니다.

진리가 더러울 때가 아니라 진리가 얕을 때에 인식하는 자들은 진리의 물속으로 들어가기를 꺼린다.

è 주석 : 인식을 지향하는 자들은 그것이 진실인 한 더러운 것이라고 해서 피할 수는 없다 .다만 천박한 문제는 도외시한다.

더러운 것과 얕은 것(천박한 것).

è 더럽고 깊은 것이 존재하는가? 바다는 더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깊다고 해서 더러움이 면죄부를 얻는 것은 아니다. “더럽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세속적 더러움을 의미할 뿐, 그것이 진리라면 더러움이란 형용사는 필요 없다. 진리는 진리일 뿐이다.

è 말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 이해한 이후에 언어는 버려라.

 

103 벗에 대하여

내 곁에는 언제나 여분으로 또 한 사람이 있다.” 은둔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언제나 하나 곱하지 하나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 둘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나를 상대로 언제나 대화에 너무 열중한다. 만일 한 사람의 벗도 없다면 어떻게 견딜 것인 것?

은둔자에게는 벗은 언제나 제삼자다. 제삼자는 두 사람의 대화가 깊이 가라앉는 것을 막아주는 코르크로 만든 부표다.

è 이 코르크가 김이상이다. 김이상의 별명으로 코르크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104 그대는 그대의 벗 앞에서 어떤 옷도 입지 않으려는가? 적나라한 자신을 벗에게 주는 것이 그대의 벗의 영광일까? 그러나 이때, 벗은 그대를 악마에게 넘겨주고 싶어한다!

자기 자신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자들은 분노를 일으킨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적나라한 상태를 두려워하는 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그렇다, 만일 그대들이 신이라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옷을 부끄러워해도 좋으리라!

è내 생각에 넌 못생긴 거 같다.”고 말하면 상대는 분노하겠지. 혹은 자신의 약점을 이용하는 벗 때문에 스스로 분노.

 

107 각 민족은 선악의 표를 내걸고 있다. 보라, 그것은 각 민족이 초극해 온 것을 기록한 표다. 보라, 그것은 각 민족의 권력에의 의지의 목소리다.

è 주석 : 자기를 보존하려는 생명에의 의지는 단지 자기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많은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증대하고 초극하려고 한다. 따라서 생명에의 의지는 곧 권력에의 의지가 아닐 수 없다.

 

110 정녕 많은 사람의 이익을 빙자하여 자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교활한 자아, 사랑을 상실한 자아, 그것은 군중의 기원이 아니라 그 몰락이다.

 

111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에 대한 사랑보다는 가장 멀리 있는 자들, 미래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더 고귀하다. 나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는 일과 유령에 대한 사랑이 더 고귀하다.

è 주석 : 미래의 사람들 = 초인

 

114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나의 형제여, 그대는 고독해지려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에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가? 잠시 멈춰 서서 내 말을 들어보라.

추구하는 자는 길을 잃기 쉽다. 모든 고독은 죄악이다.” 군중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대는 오랫동안 군중에 속해 있었다.

군중의 소리는 아직도 그대의 마음속에서 울리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대가 나는 이미 그대들과 동일한 양심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비탄이며 고통이리라.

보라, 고통 자체를 낳은 것도 바로 그 동일한 양심이었다. 그리고 이 양심의 마지막 꺼져가는 빛은 아직도 그대의 우수 위에서 빛나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자기 자신에의 길인 우수의 길을 가려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대의 권리와 힘을 나에게 보여달라.

그대는 새로운 힘이며 새로운 권리인가? 최초의 운동인가?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인가? 그대는 별들을 강요하여 그대의 주변을 돌게 할 수 있는가?

아아, 드높은 곳을 지향하는 갈망은 얼마나 많은가! 야심가들의 경련은 얼마나 많은가! 나에게 보여달라, 그대는 갈망에 사로잡힌 사람, 야심가는 아니라는 것을!

è 하늘에 뜬 별이 아니라 위성의 모체로서의 별(항성).

è 초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야심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 청년을 봐라. 그 청년은 야심가가 아닌가? 자신의 야심에 짓눌려 흐느끼고 있지 않은가.

, 풀무 이상의 일을 하지 못하는 위대한 사상이 얼마나 많은가. 이 사상은 부풀게 하고 더욱더 공허하게 만든다.

그대는 그대를 자유롭다고 말하는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대의 지배하려는 사상이며 그대가 굴레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인가? 자신의 예속을 포기하자마자 자신의 마지막 가치조차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è 주석 : 속박으로부터 해방된다고 해서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으로부터의 자유는 창조적인 자유는 아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그것이 차라투스트라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러나 그대의 눈은 나에게 명백하게 말해야 한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è 주석 : 무엇을 창조하기 위한 자유인가를. è 주석들이 정말 주옥같네! 자유는 목적이 없어서는 안 된다. 자유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자유를 쟁취하는 순간 허무해진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선과 악을 부여하고 그대의 의지를 그대의 머리 위에 율법처럼 내걸 수 잇는가?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대의 율법의 재판관이 되고 복수자가 될 수 있는가?

홀로 자기 자신의 율법의 재판관 및 복수자와 지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렇게 해서 황량한 공간에, 그리고 얼음같이 찬 고독의 기식에 하나의 별이 던져진다.

è 별의 맹아는 이렇게 생성된다.

 

오늘도 그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고뇌하고 있다. 그대 유일한 자여, 오늘도 그대는 그대의 용기와 그대의 희망을 남김없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고독은 그대를 지치게 할 것이며 언젠가 그대의 긍지는 비틀거릴 것이며 그대의 용기는 부서지리라. 언젠가 그대는 외치리라. “나는 혼자 있구나!”

언젠가 그대는 극대의 높이를 보지 못하고 낮음만을 너무 가까이 보게 되리라. 그대의 고상함은 유령처럼 그대를 두렵게 하리라. 언젠가 그대는 외치리라. “모든 것은 거짓이다!”

고독한 자를 죽이려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다. 이 감정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감정 자체가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는 살해자가 될 수 있는가?

나의 형제여, 그대는 이미 경멸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대를 경멸하는 자들에게조차도 공정하려고 하는 그대의 정의의 고뇌도 알고 있는가?

그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억지로 그대를 다시 배우게 했다. 그들은 그대의 이러한 행동을 격렬하게 책망한다. 그대는 그들에게 접근했으면서도 통과했다. 그들은 그대의 이러한 행동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그들을 넘어서 간다. 그러나 그대가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질투의 눈은 더욱더 그대를 작은 사람으로 본다. 한편 날아가는 자는 가장 미움을 받는다.

어떻게 그대들이 나에게 공정할 수 있으랴! 나는 그대들의 불공정을 나의 몫으로 선택한다.”그대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불공정과 오물을 고독한 자들에게 던진다. 그러나 나의 형제여, 그대가 하나의 별이 되고자 한다면, 그대는 그들이 이렇게 하더라도 그들을 여전히 비춰 주어야 한다.

그리고 착하고 의로운 자들을 조심하라!(주석 : 기독교도) 그들은 자기 자신의 덕을 만들어 내는 자들을 십자가에 매달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고독한 자들을 증오한다.

신성한 단순성도 조심하라! 이러한 단순성에 대해서는 단순하지 못한 것은 모두 신성하지 못하다. 이러한 단순성은 불놀이를 좋아한다. 화형의 장작더미를.

그리고 그대의 사랑의 여러 가지 발작을 조심하라. 고독한 자는 그를 맞이하는 사람에게 너무 빨리 손을 내민다.

그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손이 아니라 앞발을 내밀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대의 앞발에 발톱이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그대가 마주치는 최악의 적은 그대에게는 언제나 그대 자신이리라. 그대 자신이 동굴과 숲속에서 그대를 기다리며 잠복하고 있다.

고독한 자여, 그대는 그대 자신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리고 그대의 길은 그대 자신과 그대의 일곱 악마가 있는 곳을 지나간다!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이단자, 마녀, 예언자, 바보, 회의자, 부정한 자, 악한이 되리라.

그대는 그대 자신의 화염으로 그대를 불태워버리려고 해야 한다. 그대가 우선 재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대가 새로워지기를 바랄 것인가!

고독한 자여, 그대는 창조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대는 그대를 위해 그대의 일곱 악마로부터 하나의 신을 창조하려고 한다.

고독한 자여, 그대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사랑하고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만이 아는 그러한 경멸을.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고자 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경멸할 줄 몰랐던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 것인가!

è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직설적으로 해석해도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è 직설적 해석 : 만약 남녀의 관계라고 생각해보자.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동시에 여자가 변절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경멸한다. 이 경멸을 끝내는 방법은 여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갖게 하는 것이다. 창조.

è 여자의 관점에서 봐도 그러하다. 남자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창조(출산)에 대해 여자는 근본적인 이해력을 보인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는 경멸할만한 구석도 있다 더 나은 버전 2.0을 원한다. 그러면 자신과 남자가 배합된 아이를 낳으면 된다.

그대의 사랑과 함께, 그리고 그대의 창조와 함께 나의 형제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 후에 비로소 정의는 절름거리며 그대를 따라오리라.

è 주석 : 후세가 되어서야 그 진가를 인정하리라.

나의 눈물과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의 형제여.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창조하려고 하고, 따라서 파멸하는 자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è 데미안 : 알은 세계다. 새가 날기 위해서는 알을 깨야 해. 새는 날아간다. 그 이름은 아브락삭스.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è 독일과 프랑스 애들은 다 이런 식이다.

 

119 여자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다. 그리고 여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일은 한 가지 해결책을 갖고 있다. 이 해결책은 임신이다.

è 니체가 바로 이렇게 이야기해주네. 신기하다.

 

120 남자는 여자에게는 수단이다. 목적은 언제나 어린애에 있다. 그러나 남자에게 있어 여자는 무엇인가?

è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위의 예와 상통.

 

참된 남자는 두 가지를 원한다. 곧 위험과 유희를. 그러므로 남자는 가장 위험한 장난감으로서 여자를 원하고 있다.

 

127 저 남자는 천사의 덕을 갖춘 시녀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한꺼번에 한 여자의 시종이 되었고, 게다가 이제 그는 다시 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è 난 왜 이 구절이 잘 이해되지?

è 여자 때문이라기 보다 여자와 결혼 때문.

 

130 나의 죽음을 나는 그대들에게 찬양하게 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을.

è 주석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예로 들었다.

è 나는 노원의 죽음에 대해서도 비슷한 예를 구상하고 있다.

 

135 정녕 이와 같이 증여하는 사랑은 모든 가치를 강탈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기심을 건전하고 거룩하다고 말한다.

è 주석 : 증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빼앗아야 한다. 이것은 건전한 이기주의이며 창조적인 이기심이다.

è <양들의 침묵>에서 범죄자는 여자들을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든다. 만약 그 옷이 천상의 예술품이라면?

 

136 악과 선에 대한 모든 이름은 비유다. 이 이름들은 명백하게 밝히지 않고 오직 암시할 뿐이다. 이러한 이름들로부터 지식을 얻으려는 자는 바보다.

 

139 의사여, 그대들 자신을 도우라.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자를 목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대의 환자에게는 최상의 도움이다.

아직도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오솔길, 천 개의 건강,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아직도 인간과 인간의 대지는 무궁무진하며 발견되지 않았다.

깨어나서 귀를 기울여라, 그대들 고독한 자여! 미래로부터 은밀하게 날개를 퍼덕이며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날카로운 귀에는 좋은 소식이 들린다.

그대들 오늘날의 고독한 자여, 그대들 이탈자여, 그대들은 언젠가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 그대들 자신을 선택한 그대들로부터 선택된 민족이 탄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민족으로부터 초인이.

정녕 앞으로 대지는 치유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대지의 주변에는 새로운 향기가, 쾌유를 초래하는 향기가 감돌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

 

140 그대들은 아직도 그대들 자신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 이때에 그대들은 나를 만났다. 신도는 누구든 이렇다. 그러므로 신앙은 보잘것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정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정녕 나의 형제들이여, 그때 나는 전혀 다른 눈으로 나를 버린 자들을 찾으리라. 그때 나는 전혀 다른 사랑으로 그대들을 사랑하리라.

그리고 언젠가는 그대들은 나에게는 벗이 되고 하나의 희망의 어린애가 되어야 하리라. 그때 나는 세번째로 그대들 곁에 있으리라. 그대들과 함께 위대한 정오를 축복하기 위해서.

그런데 위대한 정오는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를 연결하는 길의 중간 지점에 서 있을 때, 그리고 저녁을 향해 가는 그의 길을 그의 최고의 희망으로서 축복하는 때이다. 저녁을 향해 가는 길은 새로운 아침을 향해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때 몰락하는 자자기가 저 너머로 건너가는 자임을 알고 자기 자신을 축복하리라. 그리고 그의 인식의 태양은 그에게는 정오의 태양이 되리라.

모든 신들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이 언젠가 위대한 정오에 있어서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è 주석 : “인류의 최고의 자기 성찰의 순간, 인류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며 우연과 성직자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 무엇을 위해서?’라는 물음을 처음으로 전체적을 내세우는 정오…..” (니체<이 사람을 보라>에서).

è 정오. 앞서 말했듯이 랭보의 시에서도 <정오>가 나온다. 온갖 유희의 시험이 있은 후 깨어보니 정오가 된다.

è 정오와 몰락. 태양이 정오를 찍었기 때문에 이제 태양은 몰락한다.

è Drop to fly. 새가 처음 나는 것을 배울 때, 새는 낙하한다.

 

2_

 

è 사실 핵심은 1부에서 전부 다루어졌다고 생각된다.

 

149 신은 가상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가상이 그대들의 창조적 의지보다 앞서서 달리지 않기를 바란다.

è 주석 : 신은 인간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초인은 인간이 그의 의지에 의해 창조해야 할 것이다. 가상이 이러한 의지를 마비시켜서는 안 된다.

 

151 모든 불변자 그것은 오직 비유일 뿐이다. 그리고 시인은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한다.

è 주석 : “모든 덧없는 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괴테의 말에 대한 대구. 시인들은 거짓말을 한다는 말은 괴테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è , 불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유의 세계에나 있다. 덧없는 것이 불변하는 것과 상통하나?

è <파우스트> 복습해야 겠다.

 

152 창조하는 것 이것은 고뇌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뇌와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è 이것 역시, 여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è 창조를 출산이라고 본다면, 이 출산을 위해서 여자는 산통을 겪으며 많은 변신(남산만하던 배가 꺼진다)을 해야 한다. 제왕절개를 하는 여자의 부푼 자궁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정말로 변신하는 존재임을 눈으로 깨닫게 된다.

è 이불의 <변신> <몬스터> 작품은 영원히 내 뇌리에 남을 것이다.

 

그렇다, 그대들의 삶에는 허다한 쓰라린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대들 창조하는 자들이여! 이렇게 해서 그대들은 온갖 무상을 대변하고 시인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è 주석 : 창조는 낡은 것을 초극하는 것이다. 창조는 낡은 것의 사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낡은 것의 사멸이 무상한 듯하지만 향상의 한 단계로서 의의를 획득하게 된다.

è 그런데 삶의 아이러니는 무엇인 줄 아는가? ? 라는 질문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 ? . ? . ?...

è 이 경우, “무상하면 안되나? “의의가 있어야 하지? 여기에 대답을 했다고 치자. 정말 힘겹게 합당하고 납득할만한 대답을 했다고 치자. 거기에 는 또 따라붙는다. 틀림없다.

è 무상과 권태.

è 조셉 캠벨이 옳을 지도. 그냥 “Being alive is the meaning.” 이것 이상의 의의를 찾으려고 하면 ?”라는 무한 차원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그냥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거예요. .

è 그런데 왜 의미가 있어야 하지?

è 그런데 ?”는 무엇에 대한 질문일까?

è ? 그래야만 하는가? 에 대한 답은 존재하기 힘들지만, “?” 우리 인간이 이렇게 존재하는가? 에 대한 답은 가능하다. 다차원적인 답이 가능한데, 가장 근본적인(가장 저차원) 대답은 진화론(존재의 유무에 대한 이진법)이다. 그리고 다른 여러 철학 사조들이 조금 더 높은 차원의 답을 보유하고 있다. 사부님은 베르그송을 좋아하시는 듯하다. 그의 창조적 진화(사실 나는 무작위적인 계급의 스펙트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는 진화론의 한 단계 상부 설명인 듯하고. 기타 다른 설명의 층위가 가능할까?

è 니체도 사실 진화론의 변주인 셈이다. 진화론에 어설프게 의지를 삽입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è 정보이론에 관한 과학책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의 생의 의지는 DNA에 기반한 것 이외에 정보이론의 의지로 치환될 수 있음을 알았다. 나는 그 당시의 깨달음으로부터 얼마만큼 더 진화하였나?

è 진화는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다.” 이것이 진화.

è 그런데 굳이 살려고 할 필요는 없다. “진화고 나발이고 나는 일단 내 뜻대로 행동할 것이고(자살하든지 살든지) 이 의지의 화석을 해석하는 것이 과학의 몫이다.” 이것이 자유의지.

è , 모든 진리가 결과에 대한 귀납적 추론이다. “죽은 후에야 그 인생을 평가할 수 있다.” 이게 최고의 진리는 아닐까?

è 어느 순간부터 과학이 철학을 앞서서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읽어야 할 책은 철학책이 아니라 물리학과 생물학책인지도 모른다.

 

155 정녕 나는 동정을 베풀면서 행복을 느끼는 자비로운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수치심이 없다.

è 매우 지당한 말이다.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 대상은 수치심을 느낀다. 동정한다는 것은 우월감의 표효이다. 도와줄 거라면 차라리 냉정한 투자라고 생각하라.

è 어디인지 잘 생각은 나지 않는데, 딸의 기구한 팔자 앞에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자 딸은 어머니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156 커다란 은혜는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라 복수심을 일으킨다. 그리고 작은 선행은 잊혀지지 않을 때에는 양심의 가책이 된다.

 

170 나의 증오가 아니라 나의 구역질이 나의 생명을 굶주린 듯이 먹어치웠다! , 나는 천민도 재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가끔 정신에 싫증이 났다.

è 소설쓰기 강론에서 예가 나온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책을 읽고 있던 여자는 건너편의 야시시한 동기를 보고 자존감을 고양한다. 그런데 그 여자 역시 가방에서 푸르스트의 책을 꺼내는 것을 본 순간, 기존의 여자는 독서의 의지를 상실한다.

è 천민에 대한 니체의 증오는, 그의 사상이 사랑받지 못한 데에서 느낀 상처를 상기시킨다. 그의 사상이 너무 고매하여 극소수의 초인 예비자만을 열광시키는 것이 필연이었다고 치자. 그래서 그것을 니체가 감수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이러한 니체라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고 이 천민들에게 오해받을 지언정자신의 책이 열광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그러면 그는 행복한 곤란 속에 빠졌겠지. 어쩌면 천박한 행복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177 나는 평등을 설교하는 이러한 자들과 혼합되고 혼동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정의는 나에게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또한 인간은 평등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초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è 여기서 니체의 평등은 가치의 평등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의 평등 역시 인간 1인당의 기본적인 평등을 전제로 하여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è 빌 게이츠는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했다.

è 평등은 최소한의 평등을 의미한다. 그 이외의 옵션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차라리 개인적인 모든 옵션을 비교평가할 잣대가 없으므로 인간은 서열화가 불가능하다 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다. 그러나 한 가지 가치 기준을 놓고 보았을 때 확실히 서열화는 가능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 기준은 매우 정형화되고 획일화되어 있다는 것(, 외모, , , ).

è 그래서 두 가지 전략이 가능하다. 옵션을 특화시켜서 가치를 창출하거나, 아니면 획일화된 가치를 좇아 분주히 매진한다(부와 명예). 만약 인간이 평등하다면 노력할 필요가 있겠는가? 생활수당이나 받으며 살면 그만이다.

è 모두가 알고 있으나 회피한다. 평등이란 개념은 자기 이익을 위한 카드의 한 패로 사용된다. 자기 위안에도 도움을 준다.

è 그러나 사실, 초인이 평등을 부정하는 것. 초인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거부 또는 실패하는 것에는 중생들은 초인을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비관주의 때문이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이해력이 비슷하다. 니체의 사상을 군중 전체로 확대한다면 어떻게 되나?

 

182 그러나 그대들은 내가 보기에는 그대들의 덕에 있어서 한결같이 민중, 시력이 약한 민중이다. 정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민중이다.

정신은 스스로 삶 속으로 파고드는 삶이다. 이 삶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지식을 증대시킨다 그대들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던가?

그리고 정신의 행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향유를 뿌리고 눈물로 맑게 하여 산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대들은 이미 이것을 앍 h있었던가?

그리고 장님의 맹목성, 그의 탐구와 모색은 그가 주시했던 태양의 힘을 입증해야 한다 그대들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던가?

그리고 인식하는 자들은 산을 재료로 해서 건축할 줄 알아야 한다! 정신이 산을 옮기는 것만으로는 보잘것없다 그대들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던가?

그대들은 오직 정신의 불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정신 그 자체인 모루를 알지 못하고 망치의 잔인성을 알지 못한다!

정녕 그대들은 정신의 긍지를 알지 못한다! 게다가 정신의 겸손이 일단 말을 시작한다면 그대들은 그 겸손함을 견뎌내기 어려우리라!

사실상 그대들은 그대들의 정신을 눈 구렁에 던져본 적이 없었다. 그대들은 이렇게 할 만큼 충분히 뜨겁지는 못하다! 따라서 그대들은 눈의 냉기의 황홀함을 알지 못한다.

한편 내가 보기에는 그대들은 무슨 일에 있어서든 정신을 너무 믿는다. 그리고 그대들은 흔히 지혜를 저열한 시인을 위한 구빈원과 병원으로 만든다.

è 이런 것을 Woo-Woo soft-skills talks

è 그런데 서로들 모두가 이게 아니라고 한다.

è 니체의 고독과 메마른 비통함이 절절히 느껴진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지? 니체의 편인가, 아니면 니체의 맞은 편인가?

 

183 그대들은 결코 독수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정신의 경악에 따르는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새가 아닌 자는 심연 위에 둥지를 틀어서는 안 된다.

내가 보기에는 그대들은 미온적인 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심원한 인식은 차갑게 솟아오른다. 정신의 가장 심오한 샘은 얼음처럼 차다. 뜨거운 손과 뜨거운 생동을 하는 자들에게는 청량제다.

내가 보기에는 그대들은 의젓하며 뻣뻣하고 꼿꼿하게 서 있다. 그대들 유명한 현인들이여! 아무리 강한 바람, 강한 의지라도 그대들을 쫓아내지는 못한다.

돛이 둥글게 부풀어 사나운 바람에 떨면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그대들은 한 번도 보지 못했는가?

이 돛처럼 사나운 정신에 떨면서 나의 지혜는 바다를 건너간다, 나의 사나운 지혜는!

그러나 그대들 민중의 하인들이여, 그대들 유명한 현인들이여, 그대들이 어떻게 나와 함께 갈 수 있을 것인가!

 

190 지혜는 아름다운가? 내가 무엇을 알랴! 그러나 가장 늙은 잉어도 지혜를 미끼로 유혹할 수 있다.

지혜는 변덕스럽고 반항적이다. 가끔 나는 지혜가 입술을 깨물고 난폭하게 머리를 거꾸로 빗는 것을 보았다.

è 엄청나게 공포스러운 장면이다! 영화로 생각해봐라! 돌로레스 크레이브에서 거울 속에 자기 뒷통수가 보이는 것 이상으로 공포스러운 장면으로 쓰일 수 있겠다!

아마도 지혜는 심술궂고 불성실하며 요컨대 여자다. 그러나 지혜가 자기 자신을 나쁘게 말할 때 오히려 지혜는 가장 유혹적이다.”

내가 삶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삶은 심술궂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대는 누구 얘기를 하고 있지?” 삶은 말했다. “아마 내 얘기지? 비록 그대가 옳다 하더라도 그 말을 면대해서 나에게 말하다니! 그러나 이젠 그대의 지혜에 대해 말해주게!”

, 이제 그대는 다시 눈을 떴다. , 사랑하는 삶이여! 그리고 나는 다시금 끝없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è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괴테와 니체.

왜 이들은 여성적인 것을 말했나? 여성적인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괴테와 니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갈망의 대상 그래서 갈망하는 삶이 구원의 요체인가? 아니면, 정말로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의 어떠한 점이 구원이 되는가? 괴테의 그레첸과 같이. 여자의 몸은 남자가 정욕을 버리는곳으로 생각된다. 바다는 그 더러움을 정화시키고 새로운 세계로 창조한다. 그래서 구원인가? 괴테는 그렇다 치고, 니체에게 여성적인 것은 무엇인가? 변덕스러움, 알 수 없음? 이 경우 갈망을 의미하나? 사랑과 증오의 삶과 지혜.

 

196 도대체 나는 어떻게 이 일을 견뎌냈는가? 나는 어떻게 이러한 상처를 이겨내고 극복했는가? 나의 영혼은 어떻게 이 무덤으로부터 다시 살아났는가?

그렇다. 나에게는 상처 입히지 못하는 것, 묻어버리지 못하는 것, 바위라도 뚫고 나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의 의지다. 이 의지는 묵묵히 변함없이 세월을 뚫고 걸어간다.

나의 의지, 나의 옛부터의 의지는 내 발을 이용하여 그 걸음을 내딛는다. 나의 의지의 생각은 꿋꿋하고 상처 입지 않는다.

나는 나의 발꿈치만이 상처 입지 않는다. 가장 참을성이 강한 자여, 그대는 언제나 살아 있고 변함이 없다! 그대는 언제나 온갖 무덤을 뚫고 나왔다!

그대 속에는 나의 청춘의 구제받지 못한 것이 살아 있다. 그래서 그대는 삶으로서, 그리고 청춘으로서 희망을 품고 여기 노란 무덤의 폐허 위에 앉아 있다.

그렇다. 그대는 아직도 나에게는 온갖 무덤을 파괴하는 자다. 건강하라, 나의 의지여! 그리고 무덤이 있는 곳에만 부활이 있다.

 

201 그리고 인식하는 자여, 그대도 나의 의지의 오솔길이며 발자국이다. 정녕 나의 권력에의 의지는 그대의 진리에의 의지조차도 발로 삼고 걸어간다.

진리를 향해 생존에의 의지라는 말을 쏜 자(쇼펜하우어)는 물론 진리를 적중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욕구할 수 없고, 한편 이미 현존하는 것은 새삼스레 생존을 욕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è 생존에의 의지와 권력에의 의지

è 생존에의 의지가 왜 없겠나. 생존하려면 부단히 달려야 한다. 매트 리들리의 붉은 여왕을 생각하라.

è 다만 의식이 있는 생명체에게 생존은 관성이다. 니체의 말은 이 뜻이겠지.

 

오직 삶이 있는 곳, 거기에 의지도 있다. 그러나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권력에의 의지다!

살아 있는 자에 있어서 삶 자체보다도 그 밖의 많은 것이 더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를 통해서 말하는 것은 권력에의 의지다!

 

201 정녕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무상하지 않은 선과 악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은 언제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다시금 초극하지 않으면 안 된다.

è 영원한 것(괴테 무상한 것)은 비유다. – 라던 앞의 설명과 일치.

 

202 그대들 평가하는 자들이여, 선과 악에 대한 그대들의 평가와 말로써 그대들은 폭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들의 숨겨진 사랑이며 그대들의 영혼의 광휘, 전율, 범람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가치로부터 보다 강한 폭력, 새로운 초극이 자라난다. 이것에 의해서 알과 알 껍질이 부서진다.

è 주석 : 입법자, 평가자들은 스스로 창조한 가치에 의해 타인을 지배한다. 이것은 바로 권력에의 의지의 표현이다.

 

205 그러나 영웅에게는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격렬한 의지로써는 획득할 수 없다.

 

206 근육을 느슨하게 하고 의지의 마구를 풀고 서 있는 것, 이것이 그대들 모두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대들 숭고한 자들이여!

 

 

 

<내가 저자라면>

 

니체의 사상 어디에서 니힐리즘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 이체는 오히려 극한 생의 의지를 표명하지 않는가? 신이 곧 희망인가? 신은 죽음을 의미한다. 신을 죽이는 것은 부정의 부정으로 곧 긍정이다.

 

니체를 말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졌다. “나도 읽었다라고. 그만큼 대단한 책이다. 만약 파우스트 이전에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그 충격의 여파가 더욱 컸으리라. 그러나 고전들의 주제는 대개 비슷하다. 특히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대철학가들은 준험의 산맥의 봉우리들처럼 봉화를 주고 받았다.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의 설교에서 핵심 내용이 모두 드러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동기. 그의 철학 사상. 그 철학 사상을 위해 가져야 할 태도. 방법. 만약 책이 1권으로 끝났더라면 훨씬 충격의 잔향을 크게 남겼을 듯하다. 2부로 가면, 좀 지루해진다. 물론 철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 그러나 1부에서 100km쯤 파들어갔다면, 2부에서는 5km 지지부진하게 파들어 간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정도의 두께감에서 끝냈더라면 훨씬 짧고 강렬했을 텐데.

 

만약 니체가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여 초인이 등장하는 소설을 한 권 써냈다면, 훨씬 잘 읽혔으리라. 참 다행이다. 니체가 소설을 쓰지 않아서. 왜냐하면 니체의 이 책은 내가 준비하는 <알려지지 않은 신>과 맥락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척추에 낙뢰를 맞는 것 같았다. 지난 1년 수업을 통해 내가 도출해낸 소설의 스토리가 니체의 초인과 매우 흡사했다. 이것은 꽤 필연적인 결과였다. 자유의 극한은 기존의 질서를 초극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내가 이 책에서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당연히 현재 세뇌된 도덕률과 상반되는 부분 때문이다. 나는 초인이 아니다. 오히려 초인의 반대편에 서 있거나 적어도 군중을 옹호해야 하는 쪽에 속해 있다. 나는 평등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군중의 가능성은 믿는다. 내가 할 수 있으면 남도 할 수 있다. 니체는 이를 부정한다. 고독으로 상처받은 영혼이 보인다. 그러나 동정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니체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정말로 니체와 제임스 조이스와 헤겔을 이해하지 못해서 교과 과정에 실리지 않는가? 아니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청소년들은 깊이 갈망하고 있다. 그들은 탐구한다. 그들은 궁금해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와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커버린 후에는 생활에 매몰되어 아무도 답을 알려고 하지 않고, 아무도 답을 모른다. 답은 자유에 있는데 자유는 선민을 키우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군중이 키워진다.

 

청소년들에게 읽혀야 한다.

위험한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중, 니체를 언급하는 일부의 초인 추종자들이 있다. 그들은 로마 시대의 물고기처럼 니체의 문신을 품고 살아간다. 가령, 이상은이 이름을 이채로 한다든지, 니체의 책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전율한다든지, 차라투스트라를 100번 읽어야 한다고 조언한다든지그들은 모두 표식을 가지고 있다. “나도 읽었다라는. 그들은 모두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의 패턴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금 다르다. 그들에게는 기대되는 바가 있다.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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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북리뷰를 하다가, 우연히 과거의 나의 북리뷰를 다시 보게 되었다. 부끄러웠다. "가장 좋은 것"을 뽑아내지 못한 채, 얕은 의식을 잔뜩 배설해두었다. 마치 꿈속을 헤매인 듯이.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한 결과들인데 이제 와서 보니 부족하기 이를 데 없다.

 

그저 나는 오만했다. 그러나 일부러 표현을 다듬어야 할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세련됨은 언제고 가능할까? 종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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