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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1일 11시 58분 등록

조셉캠벨과 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역, 이끌리오

 

 

1. 저자에 대하여

 

캠벨씨가 자신에 대해 말해놓은 부분이 이 책 안에 있다.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내내 조이스의 소설을 읽어댔던 것이 자신의 천복을 따라간 거라는 것, 책을 읽어댄 것이 자신에게는 가장 큰 공부라는 것이었다. 2세기 가장 유명한 신화학자라고 한다. 촤르륵 내려가는 연보를 보도록 하자.

 

1904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

1915년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 깊은 관심(10)

1927년 컴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으로 문학석사 학위 취득(24)

1934년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교편(31)

1938년 대학원생 진 어드먼과 결혼(35)

1949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출간(45)

1959~1968 <신의 가면> 출간(55~60)

1971 <어디서나 읽는 융 이야기> 편집(68)

1984 <영혼이 닿은 우주 공간> 출간(70)

1985~1986년 다큐멘터리 <신화의 힘> 촬영(80)

1987년 하와이에서 83세로 운명.

 

괄호 속에 나이를 넣으면서 자연사 박물관에서 신화에 대한 첫 관심이 생기던 나이는 10, 춤 추는 사람인 아내와 결혼한 것은 35(대학원생이라면 나이차이가 10살은 났겠군), 대학에서 비교신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나이는 31살하면서 그의 삶을 상상해본다. 사라 로렌스는 이름은 여대같은데 뉴욕에 있는 남녀공학 대학이다. 존 레논과 결혼한 오노 요코가 다녔다. 내가 지금 읽는 <신화의 힘>의 바탕이 된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은 80살이 되어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죽음이 가까와질수록 더 단순하고 용감하고 솔직해지던 우리 할머니를 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신화에 대한 입문서 역할을 한다. 이 책은 연구원 커리큘럼의 1번 타자였다.

 

이윤기씨는 우리 나라에서 신화에 대한 것을 가장 많이 번역한 소설가다. 돐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 양반은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신화가 세계 여러 군데에서 반복되는 것에서 신화에 대한 첫호기심을 얻었다고 네이버에서 읽었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이윤기씨의 글은 주례문 단 한 편이다. 아들 앞에서 아내를 대접하고, 딸이 보고 남자가 아내를 저렇게 대한다는 본이 될까봐 아내를 잘 대한다는 사람,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는 공중을 향해 코를 팽 풀었고 호기를 부리려고 공짜 술을 샀다고 대놓고 말하는 그의 단순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윤기씨의 전작주의를 마음먹었다가 겁을 집어먹었다. 번역한 책이 너무 많아서다. 그가 쓴 소설뿐만 아니라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같은 두껍고 어려운 번역서를 200권쯤 읽어야 한다. 사람 좋은 할아버지 같은 웃음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는 2010년에 타계했다. 

 

촤르륵 연보

 

1947년 경북 군위 출생, 검정고시로 고등학교까지 마침

1971 14개월 베트남 참전 군인, 1년간 공사판 이씨로 삼

1975년 잡지 '학원' 기자. 여기서 미술전공 편집기자인 아내를 만남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31)

1978년 결혼(32-아내 25), 이후 번역가의 길을 감.

1991~1996년 미시간주립대학교 국제대학 초빙연구원(45~50)

집은 과천이고 집필실은 양평

 

제일 자세한 인터뷰

http://blog.naver.com/km10002002?Redirect=Log&logNo=60015107016)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개정판 옮긴이의 말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출간된 직후, 저는 독실한 기독교인 친구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이렇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인마 영웅이냐? 예수님이 어떻게 영웅들 중의 하나로 비교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응수했지요 “조셉 캠벨을 찾아가 따져라, 나는 번역한 죄밖에 없다.” – 4

 

한 문화 권역과 다른 문화 권역의 영웅, 혹은 구세주는 두 문화권이 교섭한 경험이 없는 경우에도 서로 비슷비슷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바닥,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 것, 원형이라고 부른 것이 서로 비슷비슷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캠벨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입니다. 5

 

초판 옮긴이의 말

 

6 캠벨의 사상과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대담자인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가 책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옮긴이의 말에다 몇 마디를 보태어야 하는 저로서는 대단히 난감하게 된 셈입니다. 저널리스트 특유의 감각으로 자그마치 8년 동안이나 캠벨과 교유하면서 작업을 해온 모이어스의 글은 신화에 대한 캠벨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요긴할 것으로 보입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는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고 이것을 분석하면서 신화와 종교에 관해 무수한 질문을 제기하던 그가,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뒤에 펴내는 이 <신화의 힘>에서는 바로 그 신화와 종교에서, 궁극적인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모습을 읽어내고는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휩쓸리면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캠벨의 자기 구원이 곧 우리의 자기 구원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만 캠벨이 그렇게 이르렀으니 우리도 그의 눈길과 용기와 깨달음을 길잡이 삼아 거기에 이르러야 하지 않을런지요? 7

 

빌 모이어스의 서문

 

8 “ 이 시각에도 현대판 오이디푸스의 화신과 미녀의 야수의 속편은 41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네 거리에서 교통 신호가 바뀌길 기다린다.”

 

9 여보시오, 조이스와 이그쥬가르쥬크가 모닥불 앞에 앉아 긴긴 밤을 함께 보내는 거 상상해보시오. 나도 한 자리에 끼고 싶구만.

 

그리스 신들 따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대단히 현대적인 견해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10

 

10 재판관이라는 위치가 단순히 직업적 역할만을 상정한다면 그 사람들은 굳이 검은 법복을 입을 필요없이 회색 양복을 입고도 재판정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강제력 이상의 어떤 힘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재판장의 권능이 의례화하고 신화화하는 것이다.

 

캠벨은 언젠가 인류는 ‘자기 내부에 식인종적이이고, 색적정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열정을 인류의 전염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루카스이 영화를 보고는 영웅의 역정을 용기있는 행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삶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살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 12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해 행동한다는 점이다. 조셉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확신한다. 12

 

해보기는 했다니 놀랍군.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일주일에 읽으라는 것이 아니고 평생 읽으라는 것이네 – 13

 

13 그는 뉴욕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당한다. 소년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13 그는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75년 전에 캠벨 소년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자리, 바로 그 자연사 박물관에서 거행된 영결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캠벨에 대한 추억에 경의를 표현했다. 13

 

캠벨이라는 인간이 지닌 보물을 만인에게 나누자는 나의 희망이 pbs 시리즈와 이 책을 만들게 한 것이다. - 14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말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끄는 일은 그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다. (아내 진에게 구혼할 때 이 방법을 쓴 것을 보면 딱 한 번은 예외를 허용하는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가르침의 방법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요.그는 독서와 삶에서 엄청난 기쁨을 누리고 살았는데 이것을 슬쩍 내비치는 솜씨 또한 절묘했다. 15

 

그는 자기 작업을 관류하는 중심사상이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임을 인정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적인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는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로군요” 그는 대답한다.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화라고 하는 것은 선험자가 그린, 내면적인 경험 지도 같은 것이겠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저널리스트가 내린 살풍경한 정의에 만족하지 않는 눈치를 보였다.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15

 

이렇게 해서 옛 모둠살이는 일찍이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데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16

 

18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하여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18

 

그는 반대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마음을 쏟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가르치는 일,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 중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21

 

캠벨의 무엇이 그토록 나를 끌었을까? 그렇다 지혜이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21

 

“글쎄요. 우리에게 종교적 이념 같은 게 있는 것 같지 않군요. 신학도 없고요 우리는 춤을 출 뿐이지요.”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었다.   

 

1) 신화와 현대세계

 

25 우리는 우리 몫의 살을 살기만 하면 됩니다. 삶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 몫의 삶을 살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아요.

 

신화는 삶의 경험이며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주는 가르쳐주는 것이며, 다른 민족, 다른 종교의 신화를 읽으면 상징의 메세지를 알게 된다는 캠벨의 말보다 그것의 예로 든 결혼 얘기에 귀가 솔깃하다.

 

캠벨 :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의하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異性)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상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것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예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결혼입니다. – 30

 

모이어스 : 제대로 된 상대를 어떻게 고를 수 있나요? - 31

 

캠벨 :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결혼은 영적수련입니다. -33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25

 

: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었습니까?

: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30

 

선생님께서는 결혼이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 수련이라고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32 캠벨 : 결혼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단계가 있어요. 첫번째 단계는 두 젊은이가 결혼하는 단계이지요 젊은이들은 이 자연의 충동을 좇아 생물학적인 성의 교합을 하고 자식을 낳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네 관계를 아이들을 통한 관계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실수를 범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제대로 된 관계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자기네의 관계를 상호간의 인간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결혼은 관계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 두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젊은이의 결혼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만약에 부부가 첫번째 단계에 머루고 있다면, 아이들이 집을 떠나는 것과 같이 해서 갈라서게 되지요.  

 

37 바로 그겁니다. 사춘기 의례가 필요한 까닭이 거기에 있지요. 원시 사회에는 이빨을 쪼아낸다거나 몸에 상처를 낸다거나 할례를 베풀거나 하는 사춘기 의례가 있었어요. 이러한 의례를 거치면 어린이의 몸은 더 이상 어린이의 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이 부분이 내가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이다. 사춘기 의례. 쓸 재간이 없으면 모으면 되지.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37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수 줄 알아요. 38

 

38 캠벨 : 나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어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 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낸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 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것입니다.

 

40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 번 빠져볼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히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고 있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 것, 책임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비 체험에는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엉뚱하게도 기계적인 방법으로 신비체험에 뛰어들려고 해요….심리적 해리를 통해서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진짜 체험이 아니예요. 44

 

48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54 캠벨 확실히 <스타워즈>에는 신화적인 원근법이라고 할 만한 게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크는 결국 자기 아버지의 가면을 벗기고야 말지요?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면과 함께 아버지가 맡았던 기계의 역할을 벗겨버립니다. 그의 아버지의 가면은 제복에 지나지 않지요. 그건 힘입니다. 국가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지요.

 

55 신화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비의의 메타포가 아버지를 의미하는 신화가 있고, 이 세계의 지혜와 비의의 메타포가 어머니를 의미하는 신화가 있을 경우, 각각에 맞는 다른 명령 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접근이 안됩니다. 양자는 완벽한 메타포일 뿐인데도 말이지요. 이 중 어느 것도 사실은 아닙니다. 메타포지요.

나는 어떤 메타포가 맞을까?

 

64 모이어스 : 우리에게는 어떤 신화가 필요할는지요?

캠벨 :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오늘밤에 무슨 꿈을 꿀 지 알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나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사상입니다. 이렇나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고 성인기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의 모든 문제, 심지어는 이 사회와의 관계, 이 사회가 지니는 자연의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고루 다루어진 신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화가 한결같이 이야기, 이야기가 한결같이 반영하는 신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말한 사회 역시 이 지구라는 사회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신화는 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래 신화의 바탕입니다. 그 바탕은 벌써부터 여기에 있어요.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78

 

 

2) 내면으로의 여행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  

 

: 몽상가, 심지어는 영적인 지도자, 영웅의 상당수도 신경증의 언저리를 맴돈다고 하지 않습니까?

 

: 그들은 모두 자기네의 방패막이가 되는 사회에서 뛰쳐나와 미지의 어두운 숲으로, 불의 세계로 원초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이지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지만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90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사적인 꿈은 신화적인 테마를 표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꿈은 신화의 아날로지 없이는 해석이 안됩니다. 융박사는 꿈에는 두 종류 즉 개인적인 꿈과 원형적인 꿈 혹은 신화 차원의 꿈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개인적인 꿈은 그 개인의 연상을 통하여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꿈이 그 사람 삶의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느냐 그 개인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느냐 이것을 알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때로는 꿈이 신화의 테미를 드러내면서 순수한 신화 세계의 이미지, 예를 들면 우리 내면의 그리스도 같은 이미지로 전해져 올 때도 있습니다. 91

: 우리의 내면에 잇는 원형적인 인격, 우리의 본질인 원형적인 자기를 드러낸다는 것이군요?

그래요. 그래서 꿈꾸는 시간이 대단히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는 시간은 사실은 시간이 아니고 존재의 상태 그 자체입니다. 91

 

태초의 초시간적 시간은 고의적인 살인혹은 공희제를 통한 공동의 범죄행위로 끝나버리는 것이지요.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있는 것이지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시작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이 이것이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92

 

: 여자를 죄인이라고 보는 관점은 다른 신화 체계에도 있습니까?  

: 내가 아는 한은 없어요. 가장 가까운 것이 판도라의 상자와 관련된 판도라쯤 되겠습니다만 이로써 생긴 것도 죄악이 아니라 말썽일 뿐이거든요. 97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100

 

모이어스 씨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 혹은 창조자가 모신인 종교에서는 이 세상이 모두 이 모신의 몸입니다. 몸 아닌 곳은 없습니다. 이 세상이 모신의 몸이라고 해서 남성신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 어딘가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것은 한 원리의 두 측면에 불과합니다. 생명에 성별을 두는 것은 훨씬 뒤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103

 

두려움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체험하는 것이랍니다. 105

 

: 원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바탕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원형이라는 술어가 근본적인 관념이라는 술어보다 나은 것 같군요…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한 까닭은 이 이 원형이라고 하는 것이 하의식에서 위로 솟아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의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리는 생물학적인 원리에 견주면 2차적인 것입니다.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이 원형 혹은 근본적인 관념은 각기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스니다. 옷이 이렇게 다른 것은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7

 

이와 다른 테마도 있어요. 즉 인간은 천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어머니 대지의 자궁에서 나왔다는 주제이지요. 이런 이야기에는 종종 사람들이 기어오르는 거대한 사다리 혹은 밧줄 같은 것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대지의 자궁에서 마지막으로 기어오르려는 사람들은 몸집이 대단히 크고 무거운 사람들입니다. 110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 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 시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자신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 113 

 

신화 중에는 믿을 만한 것도 있고 약간 터무니없는 것도 있을 수 있지요?

: 각각 다른 의미에서 모두 믿을 만한 것입니다. 모든 신화가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 114

 

모든 종교는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일 수도 있고, 저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은유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은유는 드러내기는 하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 데 있는 표현법입니다. 은유는 암시적인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117

 

; 재림 역시 메타포인가요

; 그렇고 말고요. 사람들이 나에게 재림을 믿냐고 물으면 나는 천국이나 마찬가지로 재림도 메타포(은유)라고 대답하고는 합니다. 재림과 대응하는 기독교의 메타포는 정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벗지 못한 채로 죽어 지복직관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즉 약점이 말끔히 씻기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약점이라는 것이 곧 죄악입니다. 죄악은 의식을 한정시키고, 의식으로 하여금 온당하지 못한 조건에 얽매이게 하는 약점인 것입니다. 119

 

어떤 음성을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듣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프로이트와 융은 둘 다 신화가 무의식에서 솟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면이나 선지자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구성원들은 서로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아니,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냐? 그러게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해낼 수 없어서 못하던 내 이야기가 아니냐?’이렇게 되자면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회의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듣는 선견자는 선견자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 122

 

만일 상징과 은유가 예술을 통해 되살아 나지 못한다면 삶은 신화에서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 오늘날은 누가 은유로 말합니까?

시인들이지요. 시는 은유의 언어니까요.

: 은유는 잠재적인 것을 암시하죠.

그렇지요. 그러나 가시적인 측면의 배후에 있는 실제성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 123

 

그노시스파 기독교에 따르면 야훼가 지닌 문제 중 하나는 자기가 메타포라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훼는 자신을 메타포가 아닌 실체라고 생각했다는 거지요. - 127

 

이건 동양 특유의 방법입니다. 아무리 현자라도 질문을 받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아요.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 억지로 입을 열게 하고 집어넣어 줄 수는 없는 거지요 - 130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 133

 

선악의 관념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관념이었는데 이것이 유태교와 기독교로 흘러들어 왔어요. 다른 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선악은 우리의 입장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됩니다. 이 참혹함이 ㅏ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 133 

 

 

 

3) 태초의 이야기꾼들

 

고대의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삶을 준비하는 고대인들이 부럽다. 나도 그렇고 다른 아이들도 그렇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부모는 그 교육시킬 돈을 벌기위해 이런 걸 배우거나 가르치지 못하지. 내게는 텔레비젼이 베이비시터이자 유모이자 친구에 샤먼이었다.

 

 

신화는 두 가지를 두루 섬깁니다. 젊은이를 이 세상과 만나게 할 때도 신화가 끼여들도, 이 삶에서 해방될 때에도 신화가 개입합니다. -142

 

 

영화가 우리 시대에서 신화시대의 의레에 해당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입문의레를 연출하는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게 문제입니다. 의례를 집전하는 사제자의 책임의식 같은게 그 같으 영화에는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게 오늘날의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제 손으로 그 의례를 만듭니다. 성인식이 바로 이런 의례의 현대판입니다. -161

 

또 사냥한 고기를 먹으면서 이것을 의례행위로 만든다.

 

부시맨의 삶 및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과 들소의 관계로 보아 이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의 관계는 서로 숭배하는 관계,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짐승이 화살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 사냥꾼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않다는 식의 자기희생적인 금제를 지킵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라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147

 

오늘날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한다면서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라고, 샤먼이 올랐던 세상의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으며 자신이 곧 그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신화적인 홀로서기라는 말 흥미롭다.

 

 

4) 희생과 천복

 

가장 즐겁게 읽은 부분이다.

 

사는 곳을 성화시키는 것, 이것이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177)

 

우리 천복의 정거장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180)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 보지 못한 보통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에 앉아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서도 안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 옮겨다니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 도움은 안됩니다.(190)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거죠 (213)

 

 

종교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217)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그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이 천복을 좇으면 어떻게 됩니까?

 

천복에 이르는 거지요. 중세의 필사본에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그런데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이게 바로 천복을 좇는 거지요.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늘 이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 밖에는 없어요.

 

-선생님께서는 언제 천복을 만났습니까?

 

어릴 때 일입니다. 나는 고집이 세서 누가 무슨 말을 하건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 우리 가족은 늘 나를 도와주었지요.

 

-부모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가르칠 때 나는 2주에 한 번씩 면담을 하곤 했지요. 가령 학생들과 독서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노라면 학생이 보이는 반응에서 뭔가 느껴낼 수 있지요. 자기 천복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거든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서 열립니다. '아 학생은 여기에 매달리게 해주어야겠구나' 이런 결심을 하곤 합니다. 나는 내 방에서 자기가 갈 길을 찾은 학생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224)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 테를 붙잡는 삶입니다.(225)

 

 

5) 영웅의 모험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되리라.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 229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안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이러한 모험의 구조와 모험이 지니는 영적인 요소는 태고의 성인식에서 충분히 예고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230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여행을 마쳐야 바로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230

 

굳이 말하자면 이 사람이 정말 영웅인지 아닌지 , 이 사람이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잇는 지 여부 ,정말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지 여부, 용기, 지식, 능력이 있는 지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예비해놓은 어떤 관문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233

 

여기에서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233

 

소년이든 소녀든 입문 의례는 유아기의 자아를 죽이고, 성인으로 거듭나는 모티프와 관계가 있어요. 소년에게 가해지는 입문의 시련은 소녀에게 가해지는 것보다 훨씬 가혹합니다. 왜냐하면 삶이라는 것이 여성을 편애하기 때문이지요. 소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해야 합니다. 초경을 경험하면 소녀는 벌써 어른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은 알고, 아기를 배고, 어머니가 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멀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 됩니다. - 253

 

신화라고 하는 것이 원래 이런 문제를 이해하게 되는데 필요하 기본 교육 자료였어요.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적당한 신화 교육을 베풀고 있지 못해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이 사회 안에서 행동 통일을 하는데 그렇게 애를 먹고 있는 거지요. 나에게는 하나의 이론이 있어요.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혔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회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이의 경우는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신화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262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화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운동선수가 코치를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분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예술가들도 제자를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264

 

저희 시대에는 그게 영화가 아닌가 싶은 겁니다. 264

 

내가 이른바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을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272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273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 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매지요.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275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게 그들의 구호였어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279

 

 

6) 조화여신의 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 가를 샅샅이 염탐한다. 이렇듯 서로 하나가 될 때 두 눈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이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 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난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이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을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귀로 드 보르네이유 (12세기 음유시인 중 1) (339)

 

음유시인들은 사랑의 심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지금의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개인 대 개인의 관계라고 생각하잖아요? 음유시인들은 아마 유럽 최로로 사랑을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일 거예요. (340) 지금 우리는 사랑을 당연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역사적인 배경이 일이었군. 신기하네

 

음유시인들이 알기로 아모르는개인적이었어요.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은 비개인적인 사랑이었고요. (341)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즉 이성에 의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요소, 개성적인 요소는 개입할 여지가 없었지요.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예요. 이웃이 누구이든 전혀 상관없이 사랑해야 하니, 이것도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요...결국 음유시인들은 아모르를 가장 고귀한 정신적 경험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아시겠지만 에로스는 일종의 사로잡히기예요. ...여기에 견주어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랑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343) 이런 사랑은 교회가 주장해온 사랑과는 극과 극이지요. 이것은 개성적인 사랑,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입니다. 나는 서구를 위대하게 한 것, 다른 전통과 전혀 다른 전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답니다. (343) 결국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용기가 교회 전통에 반하는 자기만의 경험에 뛰어들게 했겠군요. 그런데 이게 어재서 서구 문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 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이런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343)

 

전통사회의 결혼 풍습을 보면 대개의 경우 배우자는 당사자가 고르는 것이 아니고 집안이 고르게 되어 있어요....중세의 경우 결혼은 교회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했어요. 그러니까 음유시인들의 개인 대 개인의 사랑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일 수 있었어요. 이단일뿐만 아니라 간음, 정신적인 간음인 것이지요. 결혼이 사회에 의해 결정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음유시인들이 말한 이른바 눈과 눈의 만남에서 오는 사랑은 대단히 높은 정신적 가치를 지녔습니다. (345)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345)

 

마음과 마음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주관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영적인 화합을 깨뜨리고 들어가는 것 아닌가요?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격상 아모르적이기는 커녕 정치적, 사회적인 결혼도 교회적인 사고방식으로 합리화했어요. 그래서 개인적인 선택을 중요시하는, 내 식으로 말하면 자기 천복을 좇는 움직임이 생겼던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사랑이라고 해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사랑의 요약을 마신 뒤에 유모는 트리스탄에게 '그대는 죽음을 마셨다'고 말합니다. "죽음이라니...이 사랑의 고통 말이요? " 여기서 그의 말이 중요합니다. 결국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트리스탄은 이졸데에게서 진정을 사랑을 느끼지만 이승에서 그것을 성취할 길이 없어요. "죽음이라니...이 사랑의 고통이 죽음이라면 그것도 팔자소관이요. 죽음이라니....이 사랑이 발각되었을 때 내가 받을 벌이 죽음이라면 나는 달게 받겠소. 그대가 말하는 죽음이 화염지옥에서 받게 될 영원한 벌이라 해도 이 역시나는 받겠소. 어마어마한 뱃심 아닙니까? ....트리스탄은 자기의 사랑은 죽음보다, 고통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사랑을 선택하는데도 그래야 하지요. (346)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이거야 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이런 거지요...(349)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재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만 지혜를 구하려고 했다. 자기 손으로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서구식 개인주의는 이런 낭만적인 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경험을 지혜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자기 느낌의 경험에서 우러난 사랑이 서구사회에서는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겁니까? 그럼요. 그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50)

 

선생님께서는 결과가 어찌되든 상관하지 말고 우리의 천복, 우리의 사랑을 좇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351) 그래서 우리에게 머리가 있는 것입니다. 머리와 가슴은 전쟁을 치르면 안되지요. 상호부조해야지요. 머리는 참가하고 가슴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슴이 앞선다면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하겠지요. 중세 기사가 섬기던 다섯 가지 미덕. 첫째는 절제, 둘째는 용기, 세째는 사랑, 넷째는 충성, 그리고 다섯째는 예의바름입니다. 예의바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단정하게 처신하기를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홀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미덕과 동행해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야만적인 시대에 문명을 지향하는 힘이 있었어요. 중요한 것은 이 힘이 여성의 손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 사랑 놀음의 주도권을 쥐고 규칙을 만들고 허무는 권리가 여성에게 있었기 때문이지요. 남성은 여성의 요구에 따라 놀아나는 정도의 역할밖에는 하지 못했습니다....만일 한 남성이 한 여성을 바랄 경우 여성은 바로 기선을 잡아버립니다. 여성이 자기 몸을 기꺼이 내어놓는 걸 기술적인 용어로는 메르시(자비)라고 하지요. 여자가 남자에게 메르시를 베푸는 것입니다....그 여성이 베풀 수 있는 메르시는 여성이 그 후보자의 격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기에 필수적인 조건이 있어요. 신사적이어야 한다는 것, 즉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욕망은 절대로 들어설 자리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여성은 자기르 좋아하는 남성에게 사랑을 수용할 만한 가슴이 있는지, 사랑의 상대가 될 자격이 있는 지 여부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거지요.... 귀부인들은 상냥하면서도 경쟁심이 대단히 강합니다. 즉 다정하면서도 대단히 잔혹할 수 있지요. 글쎄요. 요즘에도 남성에게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스러운 가슴이 있는 지 여부를 시험하는 여성들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요.(353)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이라고 하시는데 정확히 무슨뜻입니까? 함께 고통받는다는 의미이지요. 고통(passion)을 함께 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그러니까 여성은 이 남자가 자기와 사랑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테스트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세의 사랑놀음은 욕정의 놀음이 아닌 거지요. (353)

 

자기의 일부를 허락하기 전에 애인을 죽음터로 내보내는 무자비한 여자를 프랑스 말로는 소바주라고 한답니다. 야만적이라는 뜻이지요. 시험도 해보지 않고 자신을 허락하는 여자도 역시 소바주라고 불립니다. 어쨎든 여기에는 굉장히 정교한 심리평가라고 할 수 있는 시험과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요. (354)

 

성배이야기의 테마는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이나 나라를 그 무대로 합니다.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 곧 황무지 아닙니까? 황무지의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성배는 뭐라고 할까?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358)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359)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하야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입니다. (359)

 

파르지발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왜냐? 그는 스승으로부터 기사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배웠거든요. 그는 그 가르침에 복종하고 성배 찾기를 떠나지만 실패하고 돌아옵니다. 이때부터 5년 동안이나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난 뒤에야 그는 다시 돌아와 왕을 치료하려면, 병든 사회를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 질문할 수 있게 됩니다. 질문은 자기가 속한 사회 규범의 표현이 아니라 자비, 혹은 연민의 표현입니다. 다른 인간을 향한, 자연스러운 가슴의 열림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인 겁니다. (360)

 

융 박사는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중세의 낭만적인 전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신화가 말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360) 낭만적인 사랑이야기가 개인주의 이야기 말고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두 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면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해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있게 상호 관련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모듬살이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됩니다...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61)

 

8) 영원의 가면 

 

3. 내가 저자라면

 

1)     책의 뼈대와 목차

2)     장점과 보완점

3)     감동적인 장절  

 

첫째, 영어로 bliss, 이건 천복이나 지복으로 번역된다. 인생은 모험이고 우주의 가락을 이해하지 못해도 맞춰 춤을 추면 된다는 캠벨씨 말이 흥미롭다. 그렇게 살고 싶어진다. follow your bliss!

 

둘째, 나의 전작주의 작가를 생각한다법륜스님, 캠벨, 김형경, 현경, 이상은 (노래), 이윤기, 파울로코엘료라고 후보자를 썼다. 캠벨을 시작했다.  

 

세째, 어린 아이들에게 그림책의 형태로 신화를 이야기해 주는 이 시대의 샤먼, 예술가의 길이 아름답게 보인다. 의례를 집전했던 샤먼의 사명감과 애정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을 생각한다. 이미 이런 사람은 많이 와 있을 거다. 그들의 그림책을 좀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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