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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7일 13시 07분 등록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영웅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이윤기 옮김/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조세프 캠벨Joseph Campbell(1904-1987)

비교신화학자.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조셉 캠벨은,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소년시절, 북미대륙 원주민의 신화와 아서왕 전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친 그는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호를 두루 섭렵한다.

1904년 3월 26일, 뉴욕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6살(1910년) 때 남동생 찰리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드 쇼」를 보러 갔다가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디언을 몰아냈던 기병대장이 아닌, 아메리카 인디언에 매혹되었고, 그 후 인디언에 관한 책을 즐겨보고 수집품을 모으고,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가 이사한 지역, 뉴욕의 뉴 로셀에서 고립 도서관의 어린이 서가의 인디언 신화에 관한 책은 모두 다 읽었고, 11세에 성인 도서 서가 출입을 허락받아 공부를 계속해 나간다.그 후에 그는 독서를 통하여 많은 지식과 다양한 문화,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데, 그의 다독( 多讀) 습관은 이때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1919~1921년 뉴 밀포드에 있는 캔터베리 예비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생물학이었다. 1921년 다트머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하였다. 2학년 때, 그는 멜레코우스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 The Romance of Leonardo da Vinci』를 읽고 인문학에 눈을 뜨게 되고, 1922년 콜럼비아 대학 영문과로 전입한다. 1922년. 그 해는 바로 T. S. 엘리엇이 장편시『황무지』를 발표한 해이며, 제임스 조이스가 소설『율리시즈 Ulyssess』를 발표한 해이다. 이 두사람의 문학작품은 캠벨의 저서에 자주 등장한다. 특히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 Finnegans Wake』(1939)는 자주 등장한다. 캠벨의 저서 <신화의 힘>이 1982년에서 1984년의 강연을 녹화한 후에 출판사에서 엮어서 발표한 것으로 본다면 처음 접한 시기와 강연에서 인용한 시점까지 상당한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의 작품이 캠벨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셉 캠벨의 학위 연구주제는 ‘성배의 전설’에 관한 것이었다. ‘성배’의 상징과 의미와 성배를 찾아나서는 ‘영웅’의 행동들은 그 해석이 신화와 민담의 천상의 보물을 찾아서 귀환하는 영웅의 이야기와 닮았다. 이 이야기는 그의 저서 <신화의 세계>에 1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래는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엮은 책, <신화의 힘>에 나오는 대목이다.

[244] 모이어스 : 특별히 좋아하시는 영웅이 있는지요?캠벨 : 어릴 때는 두 영웅이 있었어요. 하나는 더글러스 패어뱅크스, 또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지요. 나는 이 둘을 합친 것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오늘날에는 없습니다. 특정한 영웅을 좋아하지 않아요.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요즈음은 그를 화가, 과학자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셉 캠벨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통해서 인문학을 접했다는 게 놀랍다. 조셉 캠벨의 말대로 누군가 한 사람이 저서를 모두 읽고, 그리고 그가 읽었던 것들을 모조리 읽는다면 어떤 하나의 관점을 획득하게 된다는 데, 캠벨이 읽었다던『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 The Romance of Leonardo da Vinci』는 그런 면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더글러스 패어뱅크스는 영화배우로 서부영화에 많이 출현했다.1924~1926년 육상팀의 주자로 0.5마일 경주에서 콜럼비아 대학과 뉴욕시의 기록을 세운다. 그는 그 당시에 자신이 우승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을 때, 단지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그가 설명하는 신화의 이미지처럼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알고 있다, 느꼈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또한 이때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기도 하였다.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에는 켄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학생이었으며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단원이었던 진 어드먼을 만나 1938년 결혼한다.


또한 캠벨은 1940년 콜롬비아 대학의 인도 연구 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와 알게 되었다. 캠벨은 침머의 소개로 융학파가 주관하는 종교, 신화, 정신분석학 논문집인 『볼링겐 시리즈』의 편집자로도 활동한다. 1942년과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1943년, 침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침머 부인의 부탁으로 침머교수의 인도 문화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여 책을 발간하기도 한다. 이 작업은 12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때 『인도의 예술과 문명』『왕과 시신』『인도철학』『인도 아시아의 예술』을 출판한다. (이때의 작업이 신화을 연구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신화를 다룬 그의 다른 책에서 인도와 불교에 대한 수많은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전 4권)을 펴냈다.

1987년 10월 3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2. 책에 밑은 그은 부분들 (인용)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13] 재미삼아 귀를 기울여보는 콩고 주술사의 잠꼬대 같은 주문이나, 점잖은 취몰 읽어보는 알 듯 하고 모를 듯도 한 노자 경구집의 얇은 번역본이나, 이따금씩 깨뜨리고 보는 견고하기 그지 없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법이나, 기괴한 에스키모 요정 이야기의 빛나는 의미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즉 변화 무쌍한 듯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

* 이 책은 그 일정한 패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을 현대에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13] 아울러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도전적이리만치 끈질긴 암시를 던진다. 말하자면, 아무리 읽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끝나는 듯이 보이지만, 마치 우리의 삶이 자식들에게 이어져 계속 이어져나가듯이. 그리고 우주가 계속 존재하듯이 끝이 없다.

 

[14]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의 발로라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호의 불가사의한 고리.....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는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14]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심연에서 유해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16]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래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너무 빨리 모태를 떠난다 . 미완성인 상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18] “많은 사람이 저 자신과 어머니가 짝이 되는 꿈을 꾸었거나와 이에 괘념치 않는 자, 그 팔자가 순탄하리라.”

- 소포클레스, <Oddipus Tyrannus>


[24]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이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C. G. 융은 후반기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이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꺽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27] 전통적인 통과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神命)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이것은 장인(匠人)에게나 왕에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의를 거부하는 신성 모독 행위로 개인은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하나의 단위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아 하나가 부서져 여럿으로 분열하면서 각개 충돌(서로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로 치달았다. [28] 오만에 빠진 폭군의 자아는, 그의 사업이 아무리 번창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 그의 말에 저주를 내린다. 대개는 제어가기 어려운 자신의 충동적 소유욕의 그림자인, 예상했던 주위의 공격에 스스로 놀라고 겁을 집어먹고, 만나는 족족 싸우고 격퇴시키는 이 입지전적인 독재자의 에고는, 아무리 세상사에서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 고하는 사자(使者)다. 그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는 절규가 있다(담 머로 들리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서 들리는 비참한 절규다). 빛나는 칼을 든, 일격으로, 일거수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땅을 자유롭게 할 대속자인 영웅을 부르는 절규다.

* 춘향전에 이몽룡의 시에서는 촛대의 촛농은 백성의 눈물과 같다고 했다. 이몽룡은 사람들이 애타게 찾는 영웅이 아닐까.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29]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 영웅은 새 것을 좋아하나 보다. 낡은 것은 죽고, 새로 태어난 것을 찬양하는 것이 계속 나온다. 이전 세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는 말일까?

‘새 술은 새 부대에’?

 

[30]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역을 평생토록 우리 내부에 간직한다. ..... 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어서 의식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 우리들 자신의 또 한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황금 씨앗은 마르는 법이 없다. 우리가 상실해 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생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30] 영웅이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因果)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적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 심상>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직정이되, 정신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33]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 이렇게 본다면 모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모두 영웅이다. 이 책의 첫 번째 단락에서 세계의 어느 지역의 주술사의 말이나 신화 속의 주인공의 이야기는 사람만 다를 뿐이지 같은 패턴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35]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단테의 신곡<지옥편>의 일부

[37]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과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안팎으로 이 미궁을 안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아, 미노타우로스와 맞설 용기를 심어주는 미궁 탈출의 단서와, 괴물을 만나 도륙한 다음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7]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서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ㄴ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38]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이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니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저긴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의 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38]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 놓은 실만을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2. 비극과 희극

[42]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에 거덜날 운명에 놓여 있다.

 

[42]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katharsis, purgatorio)되고가 하는 사람이면 누구가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43]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 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 어려서 서유기를 읽다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영혼이 방황하다가 내 몸을 빌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하고. 그리고 나는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 태어났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 지금의 내 삶은 이것으로 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 얼마나 좋은가. 순환하는 삶이라고는 하나, 한 번의 삶으로 그 순환의 일부로 참여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좋은가. 한번의 삶이면 충분하다. 마치는 날, 어느 시인의 말처럼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3. 영웅과 신

[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 지상적(地上的)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살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磨損)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여전히 눈앞에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살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은 힘으로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54]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神的)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54] 성자 시므온의 글에는 다름과 같은 구절이 있다.

‘여럿이 되신 하나이시되, 나문이 없는 하나 그대로시니, 이 모두가 그리스도시라.’

‘나는 내 집에서 그 분을 뵈었다. 일상의 사상 가운데서 그 분은 뜻밖에 나타나시어 나와 하나가 되시고 내게로 들어오시고, 내게로 뛰어드시는데 가운데에 걸리시는 일이 없어 흡사 불이 쇠를 눅이듯 하고, 빛이 유리를 지나는 것 같더라. 이어 그 분은 나를 불같이, 빛같이 만드셨고 나는 내 앞에 보이는 것, 멀리서 보이는 것으로 변했다. 이 기적을 그대에게 설명할 바를 알지 못하니 ...... 나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며 신의 은총을 입음으로써 신이라’

 

[55]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4. 세계의 배꼽

 

[55]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을 나타내는 듯하다.

*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그랬다. 모든 생명체는 연금술을 행하고 있다고.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어 그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변형시켜서 자신의 생명에너지로 쓰고 있다 했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서 우주의 기운을 받아서 그것으로 한순간 변화를 시킨다. 그러니 모든 것은 연금술이라고. 그 시리즈를 만든 만든 만화팀은 고대의 연금술을 연구했을 것이고, 서양철학을 깊이 연구했을 것이고, 그리고 각 나라의 비전을 연구했을 터이다.

 

[58] 심연의 물을 상징하는 용, 즉 우주적인 뱀의 머리가 있는데, 심연의 물은 생명을 창조하는 신적인 에너지이며, 불멸하는 존재의 세계 형성자인 데미우르고스(造物主)다. 생명나무, 즉 우주 자체는 바로 이곳에서 자라난다. 생명나무, 즉 우주는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에 뿌리 내리고 있다. 황금빛 태양새는 이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있고, 마르지 않는 샘이 뿌리 쪽에서 용솟음친다.

* 우주의 중심 = 신의 배꼽 = 생명나무가 자라는 곳 = 생명의 근원

 

[58]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조본의 신비인 것이다.[62]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62] 직관은 짝짝으로 된 상대적 반대 개념을 초월한다. 미덕은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완화시켜 범개인적 중심성을 지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고통이나 쾌락, 미덕이나 악덕, 우리의 자아 혹은 남들의 자아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초월적인 힘은, 미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62]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 헤라클레이토스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69] 옛날 옛적, 직심스럽게 빌면 더러 이루어지는 것도 있던 시절에,

* 번역자 표현일까? 저자 표현일까? 지금은 같이 기도한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런 표현을 넣으셨을까?

 

[71]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기는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72] 소명은 언제나 변영의 신비 mystery of transfiguration,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으레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면과 정서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72] 이러한 소명을 받는 장소로 전형적인 곳은 깊은 숲속, 큰 나무 아래, 샘가..... 운명의 힘을 전하는 전령관은 혐오감을 주는 참으로 하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 단테의 신곡은 첫 번째 구절이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이다.

 

2. 소명의 거부

 

[81]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의 주체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무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81] 미노스 왕처럼 ........ 무슨 집을 짓건 그가 짓는 것은 죽음의 집이다. 자기의 미노타우로스를 숨기는 퀴클롭스 식 미궁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면서 파멸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82] 미래한 생과 사의 부단한 연속만은 아니다. 개인이 가진 현재의 이상과, 미덕과, 목적의 체계가 어떻든 이득이 마땅이 하는 것이고 또 보장되어 있다. 미노스 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희생을 드려야 하는 신의 수소를 사유물로 취했다. 그는 자기 상상력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앞세웠다.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맡여진 생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실패했고, 우리가 보았듯이 엄청난 불운을 겪어야 했다. 신성(神性)이 그 자신의 적이 된 것이다.

 

[82]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3. 초자연적인 조력

[93] 소명을 거부하지 않는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 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護符)를 준다.

 

[96]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 어떤 이를 이것을 ‘세린디피티’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이것을 ‘동시성’이라고도 한다.

[96] 대자연(Mother Natu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96] 러시아 원정에 즈음해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것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는 없을 것이다.”

[98] 보호자인 동시에 위험한 적이며 모성적이기도 한 이 후견과 방향제시의 초자연적 원리는 그 내부에서 무의식의 모든 다의성을 통합한다. 따라서 의식적인 개성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체계 및 우리가 따르는 안내자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한 후원은 우리의 이성이 헤아리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4. 첫 관문의 통과

 

[105] 자신을 안내하고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망에서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 ‘권투라는 것은 자신의 주먹으로 자신 주변의 원을 뚫고 나가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아 오는 것이다.’ - 가르노기 시로키의 ‘Go' 중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뚫고 밖으로 나가는 모험을 해야 한다.

 

[106] ‘이렇게 네가 나를 만났으니 마땅히 싸워야 한다.’

만약 사람에게 지면, 이 괴물은, ‘나를 죽이지 마십시오. 의술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하고 애원한다. 이렇게 되면 이 괴물과 싸워이긴 사람은 용한 의사가 된다. 그러나 이 반인 반수의 괴물(이상한 것)이란 뜻인 <치루위>라고 불리어진다)이 기기면, 진 사람은 죽음을 당한다.

* 열심히 코피가 나게 공부하다 죽은 사람은 그 괴물을 물리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보다.

결국은 많은 의사들이, 많은 법률가들이 싸움을 하고 이겨서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 성경에서는 야곱과 천사의 씨름이 나온다. 야곱은 천사와 싸워 이겨서 축복을 얻어냈다. 어떤 신적인 존재와의 싸움은 죽거나 혹은 무엇인가를 얻어내거나 하는 것인가 보다.

 

[111]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119] 현상계의 마력이 무너지자 그는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신(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신적인 정령)이 된다. 종국적인 이름과 형태가 아닌, 마음속의 이름과 형태를 초월한 단순한 이름과 형태를 알게 될 때 세상이 그렇게 되듯이 그 역시 진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119] 쿠사의 니콜라스는, 인간의 시야로부터 하느님을 가리는 <낙원의벽>은 <짝짝의 대립물의 일치>로 이루워져 있는데 그 문에는 <극도로 이성적인 정령>이 지키고 있어서 <이 이성적인 정령이 종복당할 경우에만 빗장이 풀린다>고 쓴 바 있다. 한 짝을 이루는 대립물(즉 존재와 비존재, 생과 사, 미와 추, 선과 악, 희망과 공포의 기능을 통합하고 방어와 습득 행위를 일으키는 기관을 연계시키는 그밖의 양극성)은 여행자를 향해 서로 부딪쳐 오는 바위이며, 영웅은 항상 이 길을 지난다.

 

5. 고래의 배

[120]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덜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123]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산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에서는 케이크 하나로 우주를 보여주는 것이 나온다. 거기에서 우주를 본 사람은 자신의 미미함을 깨달아서 미쳐버리는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123] 사람들 가운데엔 그저 물리적으로 신전 수호자 앞을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괴물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될 수는 없다. 침입자가 이 성전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한 얻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괴수들을 그저 괴물로만 본다.

* 절의 입구에서 사천왕문을 지날 때의 두려움...영화 인디아나존스 1탄에서 에서 장애물을 통과할 때, 신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라는 자각과 함께 회개하고 신을 경배하려고 몸을 굽혀야 하는 것처럼...그래서 성배를 지키는 위험물인 신이 숨결(칼바람)을 무사히 통과해간다.

 

[124]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이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제2장 입문

 

1. 시련의 길

[132]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133]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딸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도리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를 강화하고 잇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143] 고대의 상징 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갈은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산회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재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겨짐으로써 이 적대자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143] 시련의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주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 그런가하면, 주위에 있는 것은 머리가 많은 휘드라이기 때문이다. 절단한 곳에다 비방을 쓰지 않는 한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나타난다.

[151] 여신은 생의 불길로 늘 붉다. 지구, 태양계, 먼 우주의 은하까지 이 여신의 자궁 안에서 팽창한다. 왜냐하면 이 여신이 세계의 창조자, 영원한 어머니, 영원한 처녀이기 때문이다. 이 여신은 포옹하는 것을 포옹하고, 자양하는 것을 살지게 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다.

* 어린이 그림책 <우리도 가끔은 하느님이예요>에서는 할머니는 손녀 ‘테아’에게 이야기를 해주면서 여신을 등장시키고, 그 여신의 이름을 ‘테아’라고 붙여준다. 아이는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것을 이해한다.

 

[152] 여신은 또 때가 되면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 여신은 자궁이며, 무덤이며, 제 새끼를 먹는 돼지다. 이렇게 해서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우주적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선>과 <악>을 통합한다.

 

[153]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 그 연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6] “나는 왕도라고 합니다. 티라의 왕이시여! 내가 바로 왕도입니다. 가십시오, 물을 떠서 형제들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대와 그대의 자손에게 왕위와 왕권이 영원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가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왕도가 그렇다니? 아니, 인생이 그렇다는 뜻이다.

 

3. 유혹자로서의 여성

 

4. 아버지와의 화해

 

[170] <화해 atonement>, 즉 <하나되기 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신(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171]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77]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 품 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산>과 <악>을 표상하고 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178]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184] 오라, 오 디튀람보스 Dthyrambos,나의 이 남성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라.


[190] 코란은 <어디로 돌아서든, 거기엔 알라 신이 계시도다>라는 말로 이를 암시하고 있다. 힌구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 속에 숨이어 있어서 그 영혼이 빛을 발하지 않으나, 뛰어난 지력을 가진 명민한 자의 눈에는 보인다.>


[193] 야훼는 폭풍 속에서 욥에게 대답하면서도 자신이 한 일이 윤리적으로 변호할 생각은 없고 욥에게, 하늘에서 하는 식으로 땅에서도 해야 한다면서 자기 존재를 과정해서 말하기만 한다.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

네 팔이 하느님의 팔 만큼 힘이 있단 말이냐?

너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같단 말이냐?

그렇다면 권위와 위엄으로 단장하고권위와 영화를 걸치고

너의 분노를 폭발시켜 보아라.

건방진 자가 보이거든 꺽어버려라.

불의한 자는 짓밟아버려라.

땅굴 속에 가두어버려라.

땅굴 속에 가두어버려라.

렇게 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아주리라.

네가 자신의 힘으로 헤어날 수 있으리라고.”


[196]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가납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 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空)의 무량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신의 은혜 안에서 중생을 돕는 존재로, 중생의 존재 안으로 삼투한다. 따라서 광대한 부처의 정신적 왕국 도처에서 그에게 하는 기도는 모두 가납된다.

[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 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적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휴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211] 이 자아는 스스로를 저 자아에게 넘기고, 저 자아는 스스로를 이 자아에게 넘긴다. 그래서 두 자아엔 서로 얻음이 있다. 그는 이 형상으로 저 세계를 얻고, 저 형상으로는 이 세계를 경험한다. 이것은 이슬람 밀교에도 알려져 있다. <30년간 위대한 신은 나의 거울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내 거울이자 말하자면 예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고 위대한 신은 그 자신의 거울이다. 요컨대 나는 나 자신의 거울이다. 신은 내 입으로 말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213] 보살 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삼과, 삼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별반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도 있다.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貪賑癡)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끈다>는 뜻이다.


[217] <서양은 판단은, 자기 확신의 필요성 때문에 현재까지 곡해되어 왔다고 하는 편이 안전하다.> [223]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부터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가기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6. 홍익

 

[226] 샘은 세계의 배꼽이고, 불타는 물은 파괴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며, 돌고 있는 침대는 세계의 축이다. 만상이 잠드는 성(成)은, 꿈속에서 의식이 도달하는 궁극의 심연이다. 꿈은 개인의 삶이 미분화 에너지 속으로 해소되는 지점이다. 해소되어 버리면 곧 죽음이다. 불이 꺼진다는 것 역시 죽음을 상징한다.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은 음식은 끊임없이 생명을 부여하고 형체를 만드는 우주적 근원의 권능을 상징하다.

[249] 개인적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국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空)에 대한 자각이다.

* 예전에 보았던 애니메이션에서 말하는 우주의 끝에 도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250] <눈이, 말이, 마음이 하릴 없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이를 남에게 가르칠 방도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도 같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까지 초월해 있다.>이것은 최고의, 그리고 궁극적인 시련이다. 영웅의 시련일 뿐만 아니라 신 자신의 시련이기도 하다.


제3장 귀환

 

1. 귀환의 거부

[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헤를 임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 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이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천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 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 러시아 전설....불새를 가지고 돌아오는 셋째 왕자.


[269] 그러나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4. 귀환 관문의 통과

[282]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 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 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288]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294] 반지는 또, 일상의 현실은 저승의 현실의 배반하지 못한다는, 생시의 믿음을 재확인시켜준다. 이 반지는, 두 세계를 통합하려는 영웅의 희망을 상징한다.

 

[294]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5. 두 세계의 스승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 묵시를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305]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도가도비상도?


[305] 의미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306]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즉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 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307]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이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6. 삶의 자유

 

[307]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삶의 자유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에서


[308] “사람이 마치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고 새 것을 입는 것처럼,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그 ‘실재’도 낡은 몸뚱이를 버리고 새 것으로 옮겨가신다. 칼이라고 해서 이를 벨 수 없고, 불이라고 해서 이를 태울 수 없으며, 물이라고 해서 이를 적실 수 없고, 바람이라고 해서 이를 시들게 할 수는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고, 적실 수 없고, 시들게 할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니, 이것은 모든 존재의 심연에 두루 퍼져 불변이요, 부동이다. 따라서 이 ‘실재’는 언제나 하나이니라.”

 

[308] “그러므로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313]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 <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제4장 열쇠

[319]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은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319]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야 한다.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제1장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326] 신화가 꿈과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화와 꿈은 같은 근원(즉 환상이라는 무의식의 샘)에서 유래하고 그 문법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의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327]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사실은 모든 생각과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총체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332] 신 역시 스스로 하강하여 이 현상계의 고난에 몸을 맡겼다. 신은 인간의 삶을 떠맡고, 인간은, <대립물이 합일하는> 순간, 즉 신과 인간이 서로의 먹이로 각각 하강하고 상승하는 길목으로서의 태양의 문턱에서 만나는 순간에, 제 내부에 있는 신을 방면한다.


2. 우주의 순환

[333] 개인의 의식이 잠이 들어 바다로 하강하고, 다시 거기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신화의 매타포에서도 우주는 시간을 초월한 배후에서 떠오르고, 원기를 회복하다 다시 소멸된다.

 

[333]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 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이 말을 이 책에서 많이 봤지만, 옮겨적은 이 순간 이상하게 느껴진다. 나는 아직 우주가 끝나는 것을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고, 현대의 과학은 그것을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끝날 것이라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순환한다는 것은 종교에서나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잠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신화학자 캠벨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려고 이렇게 넣었을까? 문명 그는 그의 수많은 연구에서 개인의 한 살이와 같이, 생명체들의 한 살이와 같이, 우주 또한 그 순환을 반복한다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그것을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익숙하게 많이 들어봤다는 이유로 이것을 지식의 측면에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직관적(혹은 선험적)으로 깨닫는 부분인 듯 하다.

 

[339] 잠의 심연 속에서는 에너지가 재충전되지만 일을 하다보면 이 에너지는 고갈된다. 우주의 생명도 고갈되면 재생되어야 한다.

우주 발생적 순환은, 현현의 세계로 나아갔다가 미지의 침묵이 지배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되돌아온다.

* 이시영의 만화 <지구에서 영업중>에서는 여러 신들이 나온다. 그중에서 잠을 자는 신, 꿈꾸는 자. 미래를 보는 자가 특히 흥미롭게 나온다. 작가 이시영은 꿈과 잠과 우주와 인류의 문제를 나름대로 엮어서 신과 인간의 삶을 엮어 놓았다.

 

[339] 보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추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다.

의식 상태에 있는 만물이 공유하는, 자기 인식의 본질.

현상계는 이 안에서 소멸한다.

이는 평화요, 행복이요, <둘이 아닌 것>이다.

 

[341] 오래된 이중에서도 오래된 이는, 항상 옆 얼굴로만 나타난다. 즉 저쪽 면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옆 얼굴인 것이다. 이 얼굴은 <마크로프로소포스Makroprosopos> 즉, <거대한 얼굴>이라고 불린다. 세계는 그의 흰 수염 가닥으로부터 나아간다.

 

3. 허공에서 - 공간

 

[342] “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 토마스 아퀴나스

[347] 하늘과 땅이 서로 나뉘기 전에는 모든 것이 혼돈이라고 불리어지는 어둠의 거대한 덩어리였다. 여기에서 다섯 요소의 정기가 형상을 갖추니, 이어 다시 노인故老으로 변했다. 첫 번째 나타난 현인은 누런 노인이니 곧 흙의 주인이고, 두 번째는 붉은 노인이니 곧 불의 주인이었으며, 세 번째로는 어두운 노인이니 곧 물의 주인이었다. 네 번째로 나타난 것은 나무 왕자로 나무의 주인이었고, 다섯 번째는 쇠 어머니(金母)이니 곧 쇠붙이의 여주인이었다.* 중국의 신화 조형물의 다섯 현인의 인격화


4. 공간의 내부에서 - 생명


[348] 회임에서 생산이,생산에서 생각이,생산에서 기억이,기억에서 의식이,의식에서 욕망이,언어가 풍부해졌다.언어는 어렴풋한 인식 안에 있었다.언어가 밤을 만들었다.큰 밤, 긴 밤,낮은 밤, 아주 높은 밤,두껍게 느껴지는 밤,만져지는 밤,보이지 않는 밤,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밤.무에서 출산이,무에서 생산이,무에서 풍요가,생산의 힘,살아 잇는 숨결,숨결은 빈 공간에서, 우리의 위에 있는 대기를 생산했다.대지 위에 떠 잇는 대기,우리 위에 있는 거대한 창공은 새벽과 동거했다.그리고 달이 생겨낫다.우리 위의 대기는 빛나는 하늘과 동거했다.이어 태양이 생겨났다.달고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하늘의 큰 눈처럼이어 하늘은 빛이 되었다.이른 새벽과 이른 낮이 되었다.한낮, 하늘에서 쏟아지는 한낮의 빛이 되었다.우리 위의 하늘은 하와이키와 동거하여 땅을 낳았다.[353] <공간은 넓게 펼쳐진 것이 아닌, 오목한 형상으로 끝이 없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 무한 위로 떠 있는 껍질이다.>

[354] 한 처음의 우주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자아Self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바로 그다>하고 소리쳤다. 여기에서 <나>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늘날에도 누가 말을 건네오면 <응, 나>라는 말로 서두로 사은 연후에야 자기가 만난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두려웠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두려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내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는 불행했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로 인함이다. 그는 짝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남녀가 부둥켜 안고 있는 형상만큼 커졌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이 형상을 둘로 나누었다. 형상은 남편과 아내로 나뉘었다. ...... 그래서 이 인간의 몸은(안내의 걷기 전에는) 쪼개진 강낭콤의 반쪽 같았다. ......

드디어 그는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생각햇다.

(내가 만물을 지었으니, 내가 곧 창조로다.)

이로부터 그는 <찬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신화 체계에 따르면, 우주에 있어서는 개체이든 창조적인 어버이든 그 영속적인 근본은 하나이며 따라서 동일하다. 그래서 이 신화에서는 조물주를 자아라고 부른 것이다. 동양 신비주의자는 자기 재부로 명상해 들어감으로써, 원초적인 양성 상태인 이 심오하고 영속적인 존재를 만난다. * 위의 이야기는 이집트 신화의 일부

 

[355] 그는 두려웠다. 사림이 혼자 있으면 두려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내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데?」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는 짝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남여가 부둥켜 안고 있는 형상만큼 커졌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인 이 형상을 둘로 나누었다. 향상은 남편과 아내로 나뉘었다.


[357] 애정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이러한 것을 체험한 남성이나 여성은 쇼펜하우어의 이른바 <도처에 널린 아름다움에 대한 앎>을 손에 넣은 셈이다. 바야흐로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모습으로 둔갑해서 이 세상을 한유하며>, <오, 놀랍도다, 놀랍도다>로 시작되는 우주적 합일의 노래를 부르는 경지인 것이다.

 

5. 하나에서 여럿으로

[359] 이들은 모두 랑기와 파파의 포옹에 갇혀 있었다......「... 그 둘을 떼어 놓는 편이 좋겠다. 하늘을 우리 머리 위에 있게 하고, 땅은 우리 발 아래 있게 하도록 하자. 자 하늘은 우리에게 낯선 존재이게 하고, 땅은 우리를 보살피는 어머니로 우리 가까이 있게 하도록 하자!」 .... 이제 마테-마후타는 머리를 어머니 대지에다 파묻고, 발을 아버지 하늘에 버친 채 있는 힘을 다해 등과 사지를 펴고 있다. 랑기와 파파는 서로 떨어져 비명을 지르며 자식들을 원망한다. ..... 그러나 타네 마후타는 몽을 구부리지 않는다. 부모의 원망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래로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 위로 하늘을 밀어올리는 것이다.


[365] 비록 살해당하여 해체되었으나 티아마트에게도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싸움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혼돈의 괴물인 티아마트는 스스로 자신을 해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타아마트의 형해는 각각 그 놓여야 할 곳으로 이동한다. 마르둑과 그의 뒤를 잇는 신들은 티아마트라는 존재의 부분에 다름아니다. 이 창조된 형상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은 강력한 무기에 의해 위험과 고통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조의 현실이란 중심점에서 보면, 티아마트의 육신은 자발적으로 이에 응한 것이다. 따라서 그 육신을 도륙한 손은, 희생자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대리인의 손에 지나지 않는다.*예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잔을 돌리지 않았다.[호모 루덴스]에서 디오스소느는 죽고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 데, 죽음은 모두 의도되고 자발적적인 죽임인 듯하다.


[365] 여기에 신화의 근본적인 모순, 즉 이중 초점의 모순이 있다. 우주 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덧없는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것은 전쟁 구호와 고통의 비명이다. 신화는 이 고뇌(시련)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는 안으로, 뒤로, 그 주변으로 본질적인 평화(천상의 장미)를 거느리고 있다.

6. 창조의 민화

[368] 강가에서 여자가 그에게 물었다.「저희들은 어떻게 되나요? 언제까지 살아 있게 되나요? 저희 삶에는 끝이 없나요?」....「아닙니다. 제가 이 돌멩이를 던져 보겠습니다. 만일 이 돌멩이가 떠오르면, 우리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만, 가라앉으면 영원히 죽어 서로의 죽음을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여자는 돌멩이를 던졌고, 돌멩이는 가라 앉았다. 노인이 말했다.「그것 보아라. 네 운명은 네가 골랐다. 인간에겐 끝이 있을 것이다.」


[372] 이 어리석음 뒤로는 단일한 원인(제 자신의 살을 찢는 둔한 자)이 세계의 이원적 결과(선과 악)의 틀에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 현명한 형과 어리석은 동생이 나오는 창조 신화에서


제2장 처녀의 잉태

1. 우주의 어머니

 

[374] 그녀(힌두 신화에 나오는 이 세계의 어머니)는 세계의 경계를 이루는 틀, 즉 우주적 알의 껍질인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자가번식하는 절대자를 움직여 창조의 행위를 유발하는 유혹자인 것이다.

 

2. 운명적 모태

[380] 우주적 여신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바귀의 가면을 쓴다.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392] 「시바는 파괴의 신입니다. 시바는 세계의 파괴자입니다. 시바가 좋아하는 것은, 시체의 악취가 풍기는 무덤 안에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그는 썩은 시체를 좋아합니다. 썩은 시체는 그의 살벌한 가슴과 같은 것입니다. 시바의 옷은 살아 잇는 뱀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시바는 가난뱅이입니다. 더구나 시바의 근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처녀가 대답했다.「그분은 당신과 같은 인간의 마음 저쪽에 있습니다. 가난뱅인지는 모르나 그분은 부(富)의 원천입니다. 무서운 분인 동시에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뱀으로 만든 옷이든 보석으로 수놓은 옷이든, 입는다면 마음대로 벗기도 할 것입니다.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시바는 내 사랑이십니다」그러자 청년은 본모습을 그러냈다. 그가 바로 시바였다.


4. 미혼모의 민화

 

제3장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시절


[400] 전설을 만든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영웅들을 단순한 인간에 국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 이러한 관점은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400]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22] 신화적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이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이,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 늘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구나.

기존의 것에서 새로운 것을 연 학자나 예술가를 찬양하는 것은 그가 새로운 시대를 도래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가 암흑으로 뛰어들어서 그 경계를 넓혔다.

사과나무의 애벌레 한 마리가 기어서 다른 나무로 옮겨간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가 하겠지만 그것은 암흑의 세게로 나아가 새로운 땅에 도착한 것이어서 그렇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애벌레는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애벌레나 사과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1년에 걸친, 애벌레 생의 최대 기간 동안 이루어진 사업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일이란 신의 관점으로 보면 이 애벌레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422] 변모, 유동성, 일정하지 않은 무겐ㄴ, 살아 잇는 신의 특징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윽고 흩어지기 우해 존재한다.

* 이 책 2부의 우주를 세계로 해석해야 읽어야겠다.

 

4. 애인으로서의 영웅

[431]이 다채로운 쿠훌린의 모험에서, 가장 웅변적이고 가장 극적인 것은, 바퀴와 사과가 구르면서 영웅에게 내어주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길이다. 이것은 운명적인 기적의 상징이며 교훈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437] 자기 치적의 은총을 초월적이며 근원적인 존재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황제는 마땅히 자기가 누릴 바를 누린다는 입체적인 환상을 품는다. 이런 자는 더 이상 두 세계의 중재자일 수 없다. 인간의 시각이 평형 상태의 인간적인 측면으로 기울어질 땡, 천상적 능력의 체험은 그것으로 끝난다. 한 사회를 관류하던 사상도 사라지고, 오직 힘만이 그 사회를 동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황제는 도깨비 같은 폭군이 되며, 세계는 이 손 안에서 구원되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6. 구세주로서의 영웅

 

[438] 내가 동, 서, 남, 북 어느 한쪽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땅은 내 몸이다. 나는 거이에 있다. 나는 모든 곳에 두루 있다. 내가, 땅 밑, 하늘 위, 아니면 계절 속에, 바다 저쪽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러한 것들은 모두 내 몸이다. 지하 세계, 하늘, 계절, 바다가 모두 내 몸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

 

[441] 실제로 용의 살해자와 용, 제관과 제물은, 뒤집어 보면 결국 하나다. 이 하나인 세계에서는 대립물의 양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과 거인이 끊임없이 싸우는 세계는 이쪽 세계인 것이다. 어쨌든 용(아버지)은 어디에든 있다. 消散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 탈환으로 늘어만 간다. 용(아버지)은 우리 삶이 걸린,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인가, 여럿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가 거기에 있는 한 그는 하나이지만, 여기 자식들 안에 있을 때는 여럿이다.」

[442] 아들은 아버지를 시해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해소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종말 그리고 재개(再開)의 비밀이다.

* 우주가 또 한 번 한 살이를 시작하는구나. 세계의 종말은 영원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어.

 

7. 성자로서의 영웅

[443] 나폴리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신비스러운 체험을 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잉크와 펜을 선반에 얹어버리고 『신학대전』의 마지막 장이 다른 손에 의해 완성되게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쓰는 시대는 끝났다. 나는 나에게 계시된 것을 써왔고, 가르쳐왔지만, 내가 보기엔 참으로 하잘 것 없다. 이제 바라건데, 내가 가르치는 시대가 끝났듯이, 내 삶 또한 그러하기를.....”

 

[444] 그들은 형상의 영역을 떠나 고귀한 존재의 화신이 하강하는 곳, 보살이 머물렀던 곳, <거대한 얼굴>의 옆모습이 <현현하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신비에 싸여 있던> 옆얼굴이 드러나면, 신화는 부차적인 언어이며, 침묵이 궁극적인 언어가 된다. 정신이 신비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침묵 뿐이다.

* 사부님께서 돌아가셔서 이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보이지 않은 옆얼굴이 보이는 세계로 들어가면 침묵 뿐이라.......

 

8. 영웅의 죽음

 

[445] 영웅의 전지 마지막 장은 죽음, 혹은 (저승을 향한) 떠남의 장이다. ...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제4장 소멸

1. 소우주의 끝

[458] 놀랄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손가락으로 고바르단 산을 들어올릴 수 있고, 자기 몸을 우주의 엄청난 영관으로 채울 수도 있는)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제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458]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2. 대우주의 끝

[468] 개인이라는 창조된 형상이 결국은 소멸되고 말 듯이 우주 역시 소멸된다.

 

에필로그 : 신화와 사회1. 변신 자재자

[477] 신화의 해석에는 최종적인 체계가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신화 체계는, <진실을 말하는 고대의 해신 프로테우스와 같다. 이 해신은, <땅에서 기는 모든 생물, 물 속에 사는 모든 생물, 심지어는 타오르는 불꽃에서도 말을 시킬 수 있고, 그와 똑같이 변신할 수도 있다.>

* 신화는 어떤 형태로든 변신할 수 있다.

 

[478]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2. 신화, 제의(祭儀), 명상의 기능

 

[479]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이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479] 개인은 이 모두일 수가 없다. 따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벌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479] 출생, 세례,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신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인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의 정체를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

[480]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서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혹은 도피)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481]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482] 토템의 깃발을 날리는 국가 개념은, 유아기의 상황을 지우기는커녕 유아적 자아를 강화, 확대시키고 있다.

[482] “나는 저것이 아니다. 저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죽은 내 어머니도 아니고, 내 아들도 아니다. 내 몸은 병들거나 나이를 먹는다. 내 팔, 내 눈, 내 머리,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내 마음이 아니다. 내 직관력이 아니다.”

이러한 명상을 통해 입문자는 자기의 심층에 이르고, 마침내 그 껍질을 뚫고 엄청난 자각에 이른다.

 

[482]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이 단계가 끝나면 입문자는 본질 자체처럼, 고삐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돌게 된다. 뿐인가? 세계라는 것 역시 그 본질이다. 개인의 본질, 세계의 본질.... 이 둘은 하나다. 이때부터 은거, 은둔은 필요없다. 영웅이 어디를 떠돌든, 그가 무슨 짓을 하건 그는 자기늬 본질적 실재에 머문다. 그에겐 세상을 보는, 완전성에 이른 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분리 및 은둔이 있을 수 없다. 사회적 참여가 결국에는 개인의 내부에 있는 전체를 깨닫게 하듯이 추방으로 인한 유랑이 영웅을 전체에 내재하는 자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 표적의 중심에 이르면, 이기주의나 이타주의의 문제는 사라진다. 개인은 율법 안에서 자기를 잃고, 주우의 전적인 의미와 동일하게 재생한 것이다. 세계는 그를 위해,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오 모하메드여, 네가 없었으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리라.’


3. 오늘날의 영웅

 

[484] 그 당시엔, 모든 의미는 집단적인 것에, 위대한 익명의 형식에 귀착되었으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개인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이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 인간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486] 우리는, 새로운 상징이 보이게 됨에 따라, 이 상징이 지구의 갖가지 요소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는 알고 있다. ..... 따라서 우리는, 갖가지 상징을 통해 동일한 구원이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알아야 한다. 『베다』의 말씀처럼,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언표한다」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인간

* 제임스 조이스는 하루동안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면서 그 안에서 율리시즈 이야기 속의 괴물과 사람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사람을 보면서 신화 속의 괴물을 연상할 수 있다면, 이제는 인간을 보면서 그 안에 신도 함께 보아야 한다.


[487] 동물의 세계도 아니고, 식물의 세계도 아니고, 천체의 기적도 아닌,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88]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적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토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테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역자 후기


[489] 명저에 걸려 있는 고압전하가, 여유로운 정신으로 사상을 대하여야 할, 그러니까 사상(事象)이 덜 여문 독자와의 만남에서 예사롭지 않은 방전현상을 일으키고, 이 방전 현상의 체험이 독자로 하여금 그 감독의 여신으로만 사물을 파악하게 하는 편집증적 색안경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489] <명저의 해독>이란 명저에 대한 심술궂은, 극단적 찬양이 될 터이다.


[490]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토마스 만


3. 내가 저자라면

1)책에는 탄생, 모험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온다. 많은 부분이 신화의 일부를 옮겨서 이야기를 하고나서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설명을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이야기는 저자가 첫 구절에서 세계의 모든 이야기들이 같은 패턴이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주인공의 이름만 다를 뿐, 디테일한 사건만 다를 뿐 거의 같은 패턴으로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언급한 신의 탄생과 죽음이, 어느 나라의 왕자의 이야기가 헛갈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이, 우주의 삶과 죽음이 비슷해 보인다.

 

어쩌면 저자는 인간의 한 살이나, 우주의 한 살이를 비슷하게 구성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서 세계의 자궁(무덤)으로 들어가는 순환을 겪는다. 이는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은 그 과정을 겪는다. 유한한 존재들은 다 그러하다. 그런데 이것을 우주까지 확장시키면 어떠한가? 저자는 소우주의 끝이라는 장에서는 인간의 죽음이 우주의 끝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연이어서 대우주의 끝에서는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이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은 모든 것 속에 내재해 있고, 인간은 그 신성을 안에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을 작은 우주의 끝이라고 한다면 그 부분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대우주에 대한 부분은 아직은 모르겠다.)

 

2) 이 책은 1부 영웅의 여정과 2부 우주의 순환을 나누어서 다룬다. 이 책의 2부를 읽을 무렵 궁금했었다. 왜 2부를 나누어 두었을까? 1부에서는 영웅이 조력자와 동일한 인물이며, 자신이 만난 괴물과 신과 악과 동일한 것임을 이야기하고서는 다시 2부에서 우주를 중심으로 다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를 생각했다.

1부의 신화나 상징은 개인이나 종족에 관한 것으로 해석하고, 2부에서는 좀더 확장하여 그 시각을 개인에 국한 시키기 말고, 그 인간 전체를 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것으로 가져보면 어떨까를 궁리했다. 1부가 개인에게서 밖으로 뻗어나가는 방식으로 본다면, 2부는 세계에서 개인으로 수렴하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고나서 에필로그에서 저자의 당부가 눈에 들어 온다. 과거의 신화를 오늘날의 것으로 해석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상징 자체를 읽어내어 오늘날의 영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신화체계는 종교라는 것으로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집단인 국가나 민족은 견고해서 우리를 잘 가두고 있다. 이러한 견고한 틀에 갇혀 있어서 더 이상 신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막아버리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 단락에서 현대의 영웅은 소명에 응하여 사회를 구원하라고 이르고 있다.

 

3) 그림만으로 이 책을 꼼꼼히 보고 싶다.

많은 삽화들이 대립물을 모두 포함하여 한 몸에 나타내는 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신의 속성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삽화들이다. 이 삽화들을 따라 그려보고 싶다. 이 책은 대립물의 융합으로서의 신의 모습과 창조자로서의 신의 모습,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각국의 신의 모습을 나타낸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서 인간의 욕망, 궁금증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조셉 캠벨의 다른 책, <신화 이미지>를 보고 싶어졌다. 물론 삽화 때문이다.  

 

4) 저자는 너무나 방대한 내용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인용하고 있다. 우파니샤드나 이집트 신화, 힌두신화, 크리스트교의 예화를 접해본 것이 이 책이 처음인 사람들에겐 입문서는 아닌 듯 하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각기 제 나라의 전래동화나 신화, 제례의식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석이 많아서 좋았다. 그러나 그 주석조차도 일부는 어렵다. 역자가 이 책에 대해서 언급하기로는 볼링겐 시리즈 중에 하나이고, 입문서라고 하던데, 이 책은 꼭 논문같다.

 

이 책에서 소개된 신화들을 잘 보여주는 그림책이나 삽화를 더 추가한다면 입문서라고 하면서도 어렵게 읽히는 것을 조금 보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캠벨의 저서를 읽기 전에 다른 것을 먼저 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커버하는 범위가 너무나도 방대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 점 때문에 전에 어디선가 보았던 이야기들을 이 책에 내용과 연결시켜서 다시 해석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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