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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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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7일 11시 24분 등록

구본형의 신화읽는 시간

 

이 책은 개인의 무의식 속 원초적 욕망과 억제된 사회적 질서 사이의 깊고도 끈질긴 다툼을 새로운 차원의 인간 에너지로 만들어보려는 실험이다. 나는 이것을 신화경영이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프롤로그

1. 신화 독법讀法에 관하여

 

11. 그리스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추상적인 개념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의인화시켜 신이라 불렀다. 그렇게 해서 신과 인간의 행적은 장대한 서사시가 되었다. 신화 속의 신들은 ‘몸을 입고 나타난 자연과 우주의 힘’이었던 것이다.

 

11. 신화는 인간을 벗긴다.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인간의 원시를 보여준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날것들을 신에게 뒤집어씌운 이야기다. 동시에 인간의 미덕과 통찰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상징을 통해 벌거벗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msn036.gif어려서 신화를 읽을 때, 신은 전지전능한 줄만 알았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 가지는 모든 감정 -기쁨, 질투, 복수, 미움, 사랑 등-을 가지고 있었다. 왜? 신은 인간과 똑같은 감정들을 가지고 있을까. 도대체 신은 인간과 같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12. 신화를 읽을 때 우리는 그 독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신화라는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와 같다. 만일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전혀 다른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신화는 원시적 인간이 꾸며낸 어리석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내면에 이르는 미로인 신화를 읽을 때는 몇 가지 기초적인 독법을 이해해야 한다.

 

12. 첫째, 신화는 은유다. 그 표현의 너머를 보아야 한다. 그래서 신화는 시詩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가 호메로스의 시 속으로 흘러들어 표현을 얻었던 것을 기억하라. 시적 흥취는 우리 내면에서 ‘영혼을 이끄는 어떤 음악적 상태’를 느낄 때 고조된다. 신화속에 나오는 시적인 이미지는 원래 우리 안에 있던 것이 현현한 것이다. 조셉 캠벨이 표현한 것처럼, ‘예수가 승천했다’라는 말은 예수가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가 내면화되어 만물의 시작점인 우리의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msn036.gif 신화를 사실 그대로가 아닌 그 너머를 봐야 한다.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13. 둘째, 신화는 자연과 우주를 반영한다. 자연과 우주가 바로 우리의 본성이다 다만 내면에 깊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 자연은 선악을 넘어서 있다. 옳고 그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왜곡된다. 무수한 삼라만상이 옳고 그름을 넘어선 영역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며, 정의롭다.

인간들만이 어떤 것은 그르고 어떤 것은 옳다고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 <단상 102편>

 

msn036.gif 세상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한다. 즉 자연은 있는 그대로를 나타내지 아름답고 추하고 그런 것은 인간의 분별심에서 나온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이 나의 사고수준을 나타내준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 것, 분별심을 경계해야 한다.

 

13. 셋째, 신화는 원시적 사고가 지어낸 어리석은 미신이 아니라 갖가지 문화에 의해 왜곡되기 전 인류의 원형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의식이 억압하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우리의 내면을 통찰하게 하는 통로다. 신화는 영적 순례이며 산드크리트어로 길이라는 뜻을 가진 ‘마르가marga'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신화다. 꿈은 개인화된 신화이고, 신화는 인류 전체가 꾸는 공통의 꿈이다.

신화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신은 그를 찾는 이에게는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기를 원하는 반면,

진심으로 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기를 원한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그를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파스칼 <팡세>-

 

14. 모든 종교가 ‘과거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라’고 말하듯이 모든 신화는 자신의 과거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변화의 정수다. 신화는 모험을 통한 변화의 이야기다. 나의 신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없는 평범한 삶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내 안에 신의 세계를 구현해가는 과정이다. 스스로 주도하고, 고난과 맞서고,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작은 왕국 하나를 건설해가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 모든 신화는 바로 이 무수한 모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나’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을 시작하도록 부추긴다.

msn036.gif 신화속에 나오는 인물은 내 속에 모두 존재한다. 다만 그러한 모습이 드러난 경우도 있고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의 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게 삶의 목적이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살아있음을 떨림을 느끼는 것. 내 안의 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삶이다.

 

2. 신화 속 ‘야생의 사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17. 지극히 어렵고 위험한 작업인 자아의 발견과 자아의 성장이라는 모험이 시작됨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18. 신화는 고쳐지지 않은 문명의 원판이며 야생의 사유다. 야생의 사유가 없는 문명은 아스팔트이며, 가면이며, 생명이 다했거나 애초에 생명이 없이 만들어진 조화에 불과하다.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인간의 신화는 만들어져왔고 살이 붙어왔다.”

-조셉 캠벨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23. 행복 속에는 희망이 없다. 이미 행복한 사람은 희망하지 않는다.

희망은 결핍과 불행과 고통 속에서만 자라나는 환각이다. 그러니 희망이 있어야 할 자리는 모든 불행, 모든 악덕, 모든 결핍이 있는 곳이다.

msn036.gif희망은 사람을 속인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희망을 갖는 것보다 있는 현실을 직면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삶이다. 희망한다는 것은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지 않는다. 도피의 성향을 보여주는 반증反證이다. 희망하기보다는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삶을 즐기는 것. 있는 현실에서 꿈을 이루어가야 한다.

 

24. ‘모든 선물을 다 받은 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판도라는 스스로가 신의 종합선물상자였다.

 

25. 단명하여 필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들은 모두 판도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들의 선물 꾸러미인 인간선물상자. 판도라 그 자체가 탐구되어야 한다. 판도라는 여자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삶 자체를 상징한다.

msn036.gif 생로병사. 태어난 자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판도라에 담긴 인간의 모든 감정이 바로 인간 삶 자체를 나타낸다.

 

25. 자기가 아버지와 동일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증폭이며, 자각이다. 세계와 자신, 삶과 여인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우리는 고난과 시련에 이르게 된다. 삶 속에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미해결 수수께끼들이 바로 우리가 풀어내야 할 크고 작은 모험들이다.

 

25.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는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우리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 우리가 꿈꾸는 욕망 속에는 자기중심적이고, 악취가 진동하고, 탐욕적이며, 음탕한 흥분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살 속 조직세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삶의 낭패를 경험하게 되고, 인간에게 또 자신에게 넌더리가 나기 시작한다.

 

26.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우리를 낫게 하고, 우리를 타락하게 한 것이 우리를 청결하게 하고, 단명한 것이 영원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의 순수한 정신은 타락한 정신 속에 있다

-중국 선불교의 육조 혜능-

msn036.gif 나를 괴롭히는 것이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나를 성장시킨다. 그 당시에 피하고자 했던 일들이 꼭 일어나야 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한다. 일어나야 할 일은 그냥 일어나게 되어있다. 피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기도문이 생겼나보다. ‘나의 뜻대로가 아닌 신의 뜻대로 하소서’. 이 말은 내가 원하고자 하는대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주의 질서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과 샘처럼 고이는 시간 크로노스

 

31. 그리스 신화는 ‘자식을 잡아먹는 아버지’라는 끔찍한 상징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적이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는 과거를, 아들은 현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현재는 과거가 자신을 막아 현재일 수 없게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 제 아비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게 될 운명’이라는 신탁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시간은 만물을 먹어치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투스<크로노스>>

 

34. 카이로스kairos는 주관적인 시간이며, 질적인 시간이며, 화학적 시간이며, 집중된 시간이며, 심리적 시간이다

 

34. “불변함이란 반反자연적이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변하게 마련이다. 완벽하게 동일한 일관성을 유지하는 사람은 죽은 자들뿐이다. ”

- 영국작가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34. 인간은 시간의 연속선상에 있지만, 점처럼 도약하며, 깨달음이 일어난 그 순간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성숙할 수 있다. 직선이 점들의 집합이듯이 크로노스의 시간은 카이로스적 시간들의 집합이다. 카이로스 시간의 정수는 ‘지금이라는 점點’이다.

msn036.gif 지금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오지 않는 미래를 두려워하는가. 지금 이 순간은 그토록 기다렸던 ‘다음에’, ‘내일’이다. 살아가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삶은 누가 빨리 가서 도착하는 속도가 아니다. 삶은 방향성이다. 어떤 방향은 바로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매일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다.

 

35. “지금을 즐기게. 내일이란 말은 가능한 한 믿지 말고”

-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송가Odes> 1권 11장. 카르페 디엠 Carpe Diem

 

35. 진심으로 그 순간을 즐긴 것만이 황홀한 영상으로 기억된다. 그러니 되돌아오지 않는 지금을 진심으로 아끼고 즐기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경영이다.

 

36. ‘지금 경영’의 원칙 몇가지

(1). 하루를 빡빡하고 잡다한 일정으로 가득 채우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그날의 중요한 일 한두 가지로 구성되게 계획한다. 바쁜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머슴일 뿐이다. 무엇에 시간을 충분히 슬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시간의 주인이다.

msn036.gif바쁜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머슴일 뿐인다. 그냥 기계이고 기계 부속품인가. 톱니 바퀴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안된다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 나도 한때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오만한 생각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내가 빠지면 잘 안되고 큰일날 것 같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다른 톱니바퀴대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알아갔다. “내 삶을 살아야겠다. 남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한 것은 모두 개나 주고 쓰레기통에 버리다” 내 삶은 자유로웠다. 자유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고 자신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 살아 있음의 떨림을 기뻐한다. 시간을 연속된 선으로 이해하지 않고, 점들로 인식한다. 그리고 각 점마다 그것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보려고 한다. 각 지점에서의 인생을 시처럼 살려고 애쓴다. 시는 몰입이며 황홀이다. 그 감수성으로 지금에 심취한다.

 

*이 순간의 햇살을 즐기자. 어차피 가져갈 수도 없는 시간이니.

*멈춰라 시간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란 말이냐?

 

msn036.gif얼마나 멋진 말인가. 어차피 가져갈 수도 없는 시간이니. 이 순간 내가 살아있음의 떨림을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인생을 살아가는 첩경이다. 어차피 이 순간은 내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니. 그 점들을 충만하게 느껴보는 것.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란 말이냐.

 

애욕, 그 엉큼한 환락과 헌신하는 사랑 사이 아프로디테

 

43. 아프로디테가 거품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발상이다. 욕정은 거품처럼 커진다. 서로 탐닉하는 사람들은 거품 속에 있다. 모든 것이 부풀러져 보인다. 눈에 콩깍지가 기어 스스로 들뜨고 상대를 들뜨게 만든다. 감정적 탐닉에 빠져들어 둘만의 황홀경을 벗어날 수 없다.

 

msn036.gif눈에 콩깍지가 씌어진다는 것은 호르몬의 작용이라 한다.


첫째, 도파민(dopamine)이다. 뇌 속의 도파민 수치가 올라가면 극단적인 집중력뿐만 아니라 결코 흔들리지 않는 동기부여와 목적지향적인 행동이 생긴다. 흥분현상뿐만 아니라 연인들이 말하는 다른 여러 기분이 생기는데, 강해진 에너지, 신경과민, 불면, 식욕상실, 떨림, 두근거리는 가슴, 가빠지는 호흡, 광증, 고민, 두려움이 여기에 포함된다.


둘째, 노프에피네프린(norepinephrine)이다.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e)이라고도 한다. 이 노르에피네프린은 도파민 분비에 따라 이어서 분비되는 화학물질로 연인의 기분이 고조되는 현상의 원인이 된다. 물질이 작용하는 뇌의 부위가 어디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이 흥분제의 수치가 높아지면 흥분과 과도한 에너지, 불면증, 식욕의 상실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노르에피네프린의 수치증가는 연인들이 애인과 함께 보낸 달콤한 순간들이나 애인의 세세한 것까지 기억할 수 있는, 즉 추억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

 

셋째, 페로몬(pheromone)이다. 이 페로몬은 이성에게 성적 자극신호를 보내는 물질이다. 과학자들은 겨드랑이에 있는 내분비선에서 분비된다고 추측하고 있다.


넷째, 옥시토신(oxytocin)이다. 옥시토신은 뇌하수체 후엽에서 분비되어 신장자궁을 수축시키고 분만을 유도하는 호르몬이다. 옥시토신은 임신 중에는 황체호르몬(프로게스테론)의 영향으로 자궁에 작용하지 않고 있다가 출산 시에 황체호르몬의 양이 급격히 감소하면 뇌하수체 전엽에서 분비되는 젖분비자극 호르몬인 프로락틴과 함께 뇌하수체 후엽에서 분비되며 아기가 태어난다.


중요한 사실은 옥시토신은 출산 시에만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분비되며 이때는 사랑의 묘약으로 작용하여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모가 아기에게 강한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는 것도 이 호르몬의 작용이며 여성이 남성에게 모성본능을 느낄 때도 옥시토신은 왕성히 분비된다. 또한 스위스 취리히대 에른스트 페르 교수팀은 옥시토신을 코에 뿌리면 상대에 대한 신뢰감이 증대된다는 연구결과를 '네이처'지에 발표하였다.


이 호르몬을 통해 호감이 가는 이성을 만났을 때, 안고 싶고 보호해 주고 싶은 감정을 조절하게 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호르몬과 아이를 낳기 위해 필요한 호르몬이 같다는 사실 놀랍지?

위의 4가지 호르몬 뿐만 아니라 암페타민(amphetamine), 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 바소프레신 등의 호르몬도 사랑의 호르몬으로 분류된다.


- 사랑의 단계에 따른 호르몬의 분비

미국의 룻거스 대학(Rutgers University) 피셔 헬렌 교수는 이성간의 사랑에 따른 화학물질의 분비를 연구하여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랑은 갈망으로 시작해서 홀림을 거쳐 애착으로 끝나는데, 남녀는 각 단계에서 서로 다른 화학 물질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사랑의 첫 단계인 갈망은 성적 욕구를 갖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작용하는 것은 뇌하수체 전엽에서 분비되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다. 이들은 생식 기능과 성적 욕구에 관여한다.


다음으로 홀림은 연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찬 시기다. 페닐에틸아민, 세로토닌, 엔도르핀,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이 왕성하게 분비된다. 페닐에틸아민은 열정적인 사랑의 감정을 자극하는데 유효기간이 2~3개월로 짧다. 노르에피네프린은 육체적인 쾌감을, 도파민은 만족감과 자신감을 주어 사랑을 유지시킨다.


세 번째 단계인 애착은 더욱 끈끈한 관계를 맺는 시기다. 이 시기에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관여하는데, 옥시토신은 정서적인 친밀감을 바소프레신은 배려의 마음을, 엔도르핀은 안정감을 갖게 해 준다.

피셔 교수는 사랑의 단계마다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이 달라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호르몬이 높게 유지되는 기간은 2년 정도라고 분석했다. 오래된 연인 사이에서 열정이 사라지고 덤덤한 관계로 바뀌는 이유가 호르몬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48. 육체의 맛이다. 또한 그 사랑 속에는 자신의 맑은 정신과 영혼을 바쳐 상대방을 구하는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모든 것이 섞여 있는 사랑, 누구든 한 번은 그 격정적 사랑 속에 뛰어들고 싶어한다.

 

49. “너(여자)는 내(남자)속에서 산을 찾고,

나는 너의 몸에서 배船를 찾는다.

-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서로찾기>

 

49. 미칠 것 같은 육체의 그리움으로 서로의 몸이 부딪히지만, 만남은 잠시의 불길이고, 사랑에 갇히지 않는 사랑을 그리워하는 남자와 사랑으로 사랑을 잡아두려는 여자는 엇박자의 고통 속에서 서로를 헛되이 찾아 나선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미지의 항구로 떠나갈 수 있는 배를 찾고, 여자는 남자에게서 움직이지 않는 산을 찾는다.

 

49. 사랑이란 새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경과 슬픔과 고통이라는 물로 수없이 세탁되어도 변하지 않는 천과 같은 것이다. 사랑은 또한 불길이다. 불은 태운다. 가슴을 데우기 위해 사랑해야지 그 사랑이 절대 집을 태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사랑은 가슴을 데우는 것이지 집을 태우는게 아니다 라는 표현이 언중유골이다. 막장 드라마는 가슴을 태우고 불내고 집도 태워서 재가 되더라. 사랑은 거품같을 것이다. 결혼과 연애의 차이는 책임의 유무다. 연애는 하다기 헤어져도 가슴앓이만 하면 된다. 둘만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결혼은 관계와 관계의 결합이다. 남녀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과 가족간의 관계이기에 책임이라는 문제가 따른다. 특히 부부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부모는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책임질 의무가 있다.

 

50. 처음에는 난롯가의 불꽃이더니 이윽고 겉을 태우는 불길이 되었다가 마침내 속가지 깊이 타오르는 불덩이가 된다. 그것이야말로 지켜볼 만한 굉장한 것이며, 은총이다. 사랑의 방정식은 그래서 매우 특별하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아니라 무한대다. 둘에서 하나를 배면 하나가 남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서로에게 서로를 바치기 때문이다.

 

50. 사랑은 보증서 없는 헌신이다. 우리의 사랑이 서로의 가슴 속에 더 큰 사랑을 키워 내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자신을 모두 바치는 것이다. 사랑은 믿음을 가진 행위다. 믿음이 적은 사랑은 사랑이 적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중에서-

msn036.gif 대부분 사람들은 사랑을 받으려는 수동적, 노예적 사고에 얽매어 있다.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을 하는 것, 주인된 사고를 갖는 것이다. 전화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하세요. 왜 전화안했냐고 하지말고, 볼일 있으면 그냥 하면 되지. 왜 전화 했니 안했니로 말타툼하는 것을 보면, 사랑은 받는 것에만 익숙해졌다. 사랑을 한다고 하면 손해본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사랑을 스스로 할 줄 알면 시간낭비를 막을 수 있으면 주인된 삶을 살 수 있다.

 

변화, 도 다른 나를 창조하는 무한 에너지 제우스

 

54. 오비디우스가 신화를 하나의 개념, 즉 변신 이야기로 파악한 것은 ‘변화와 변신’을 인간 세상의 작동 원리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변화는 익숙한 것을 파괴함으로써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환경과 조건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삶을 강요한다. 우리는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 과거의 나로부터 변신해야 한다. 결국 변신이란 주어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나를 바꾸어가는 진화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54. 평범한 내 속에 위대함이 씨앗처럼 들어 있다는 것,. 언젠가 그것이 발아라는 것이란는 희망, 나는 이 창조적 변신을 믿기 때문이다.

 

55. 인도의 창조 신화를 통해 ‘창조적 변화로서의 변신’이라는 개념.

처음에 우주는 인간의 모습을 한 ‘자아self'였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두려워졌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두려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아는 생각했다. ’내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 외에는 아무도 없는데,‘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러나 불행했다. 왜냐하면 혼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는 형상만큼 커졌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자신의 형상을 둘로 나누었다. 형상은 남편과 아내로 나뉘었다. 그는 아내와 교합했고 그래서 인간이 태어났다. 아내는 그가 싫어졌다.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가까이 함께 있으면 싸우는 이유다. 아내는 암소로 변해버렸다. 그러자 그가 수소로 변해 암소와 교합했다. 그래서 소가 태어났다. 이제 아내는 암말로 변해 달아났다. 그는 수말이 되어 아내와 교합했다. 그래서 말이 태어났다. 이렇게 하여 작은 개미에 이르기까지 작으로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만들어졌다. 드디어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물을 지었으니, 내가 곧 ‘창조’로구나.” 그리하여 자아는 창조로 불리게 되었다.

msn036.gif 인도 신화 자아이야기의 변신이 재미있는 이야기다. 결국 나는 신이라는 말.

 

56. 자기를 경영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변형시켜 새로운 인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바로 자기 창조다. 자신 안에 무엇인가를 잉태하여 자꾸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에 물리면 저것을 만들고, 저것에 물리면 그것을 만들고, 그렇게 이것저것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도 심심하면 마침내 전혀 다른 자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자아가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msn036.gif조성모의 가시나무새 노래 가사 생각이 난다.

 

조성모 - 가시나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없네

 

58. 인간은 기존의 자아를 버리면 어떤 사람으로도 변신하여 살아볼 수 있다. 세상은 무대이고 우리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자기경영은 연출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알고 있는 자아를 버려 새로운 자아에 이르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약하여 자신이 그리는 새로운 인물이 되어볼 수 있다.

msn036.gif 나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 의해 검증될 수 없다.

내가 소중한 이유는 내가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웨인 다이어의 <행복한 이기주의자>

 

58. 우리는 늘 자신을 재창조 할 수 있다. 재창조되어 다양하게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속에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의 현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이름과 가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가면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 결국 가면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멕시코이 토토나카 원주민들은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잠시 해방되어 새로운 영혼과 만날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msn036.gif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처음의 가면은 가면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면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 되어버린다. 가면이 삶의 필수적이면 가면이 곧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는 생존하는한 각자의 이름과 가면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는 항상 이들과 공존하며

결국 가면이 곧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멕시코 시인중에 '옥타비오 빠스'-

 

59. 달이 그림자를 버리고 날마다 새로워지듯, 자아는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지루해 못 산다. 창조 중의 으뜸은 자신을 변화시켜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창조를 자아에 적용한 자들만이 변신에 성공한다.

 

59. 변화경영의 정수는 ‘새로운 자아의 창조’에 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보다 높은 정신적 차원에 도달하는 과정을 ‘각성detachment’과 ‘변용transfiguration'으로 이해했다. 각성이란 물러남withdrawal이다. 외적인 세계로부터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세상의 절망으로부터 내면에 존재하는 평화의 영역으로 물러선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신적 차원을 획득하게 된다.

msn036.gif변화를 하다보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다 보면,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눈을 돌리다 보면, 세상의 어느 하나 배울 것 천지다. 느낄 수 있고, 사물 현상 너머를 볼려고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61. 깊은 인생으로 들어가는 세 번째 문 -넘어섬, 나를 넘어 세상과 타인을 위해 살다.

나를 넘어서지 못하면 위대해질 수 없다. 모든 위대함은 나로 시작하지만 결국 나를 넘어선 우주로 다가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깊은 인생으로 들어서는 세 번째 관문은 스스로 별이 되는 일이다. 나와 우주의 화해이며 통합이다.

msn036.gif 내가 별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나는 원래 별이었다. 별에서 왔으면 별로 살아갈 수 있다. 나를 반짝반짝이게 하는 것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것. 내 안의 광맥을 계속 파보고 실험해보는 것. 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아무도 아닌 자’에서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모험 오디세우스

 

69. 신과 인간의 다른 점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진짜 이름을 가슴 깊숙이 품고 그 이름으로 권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한다. 진짜 이름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되어 그럭저럭 살고 있는 것이다. 살고 있으나, 그 속에 내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모험을 시도할 때 자기혁명은 시작된다.

 

70. “나의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였다. -카를 융-

 

“나의 인생은 살아 있음의 떨림, 즉 천복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조셉 캠벨-

 

“단순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세 가지 열정이 내 삶을 지배했다.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지식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70. 내 속에 들어가 나를 탐구할 것을 허락하노라. 내면의 모든 것들 모든 핏줄의 비밀을 파헤쳐 나의 진짜 이름을 알아내리라.

 

 

자기애, 다른 사람의 눈 속에서 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 나르키소스

 

74. 삶은 과학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화처럼 움직인다.

msn036.gif 내가 노력하면 노력한 대로 댓가를 받는 것이 선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어릴적의 생각들은 서서히 녹아져갔다. 노력한다고 해서 다 이룬다고 할 수 없다. 노력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공부한다고 해서 공부한 것만이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세상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솔로몬에서도 삶을 움직이는 것은 운運이라고 했다. 운이 언제 나에게 올지 모르니, 결과에 연연함을 벗고 나는 단지 할 뿐이다. 되든 안되든, 일의 결과는 신이 우주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뿐이다.

 

75. 영혼은 서로를 비추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이 짝을 차지 못하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사랑은 시작한다. 몹시 사랑하는 상대의 눈 속에서 나를 볼 수 있을 때, 그 모습이 아름다워 스스로 도취하게 될 때, 그 사랑은 서로를 높여준다. 서로의 눈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나르키소스는 호수를, 호수는 나르키소스를 못 견디게 그리워할 때, 냉혹한 자기애가 상대의 눈 속에서 녹아내려 사랑이 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 나 자신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둘의 사랑은 온전한 것이다. 이 경이로운 자기 체험을 지혜의 원천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존재는 더 높은 곳으로 고양된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진실일 수밖에 없다.

msn036.gif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속에 있는 자기모습을 사랑한다. 그러니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을 이해하는 길은 상대방을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들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76. ‘다른 사람의 눈 속에서 나를 찾아보기’는 중요한 자기경영의 원칙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비추는 호수로 인식하게 될 때 나와 그 사람의 경계가 없어지며, 그의 눈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나를 보게 된다. 사랑이라는 경험이 우리를 영적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이때 우리는 꽃핀다. 긴 겨울이 봄이 되듯이 저주가 축복이 된다.

 

배고픔, 너의 죽음으로 공양된 나 에리직톤

 

82. 과거에 먹은 그 무수한 음식이 지금의 배고픔을 상쇄해주지 못한다는 점, 이것이 바로 인간이 끊임없이 밥에 매달리는 이유다. 과거이 포만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 똥이 되었기 때문이다.

 이 구절을 읽고 깨달았다. 인간이 그토록 밥에 매달리는 이유는 바로 즉시성, 사라짐에 있고, 현재성 현재의 배고픔은 현재 바로 충족되어야 한다. 현재의 포만감이 미래를 위한 저축이 될 수 없는 이유다. 현재의 배고픔이 과거의 포만감으로 채울 수 없다.

 

83. 배고픔의 상징성 중 하나는 자신을 몰아쳐 끊임없이 성공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듯, 성공과 승리를 먹어치운다.

 

83. 고약한 괴물이 있었다. 그러자 그 괴물을 잡아먹으려는 또 하나의 괴물인 아귀가 나타났다. 아귀는 피골이 상접하고 사자 갈기처럼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첫 번째 괴물이 놀라 시바Siva 신에게 달려가 자비를 구했다. 그러자 시바 신이 아귀에게 첫 번째 괴물을 잡아먹지 말라고 했다. 아귀가 항변했다.

‘그럼 나더러 어찌 하라는 것이오. 나는 배고파 죽겠소.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나는 이 괴물을 먹어야겠소.“ 그러자 시바 신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배가 고프면 너 자신을 먹어라.”

아귀는 발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차례로 먹기 시작했다. 결국 아귀가 있던 자리에는 얼굴 하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시바 신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삶이다. 내 너를 ‘키르티무카Kirtimukha'라 부르리라. 누구도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내게로 올 수 없다. 키르티무카는 ’영광이 얼굴‘이라는 뜻이다.

 

84.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산다. 삶은 다른 것을 죽여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생명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이 고뇌를 단박에 끊어버린 인물이 바로 키르티무카인 것이다.

msn036.gif 내가 살아있음이 다른 생명에 대한 폭력. 10여년전 우연히 법회를 들으러 갔었다. 스님 말씀중에 “여러분은 다른 생명을 먹고 살아가는 것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몰랐었다. 내가 다른 생명을 먹고 살아간다는 것을. 야채도 결국은 살아있는 생물이었고, 생선이나 육류도 한때는 이 땅에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나는 어느 생명을 해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구나.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생명체들의 희생이 있기에 가능했구나.

 

msn036.gif밥 먹을 때 하는 기도

 

물 한방울 속에도 천지의 은혜가 깃들여 있고,

밥 한톨 속에도 만인의 노고가 스며 있으며,

한 올의 실타래 속에도 베짜는 이의 땀이 서려 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음식을 먹고, 이 옷을 입고

부지런히 수행정진하여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모든 사람의 은혜에 보답하겠읍니다.

위글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밥 먹을때 하는 게송으로

소심경의 오관계를 현대적으로 정리한 것 입니다.

그대로 번역 한것은

이 음식이 이 곳에 이르기 까지 수고한 모든 이들의 공덕을 하나하나 헤아려 봅니다.

이 공양을 응당히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나의 덕행을 살펴봅니다.

이 음식을 먹는 뜻은 나의 허물과 탐진치를 멀리하고

마음을 바르게하는 것을 으뜸으로 합니다.

다만 이 몸이 말라 병들지 않도록 약으로 먹습니다.

그리고 이 음식을 받는것은 응당 도업을 이루기 위합입니다.


85. 키르티무카, 다른 것을 먹을 수 없어서 자신을 뜯어먹어야 했던 아귀,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자아라는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괴물, 그를 통하지 않고는 각성도 대오도 부처도 없다는 괴물.

 

85.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우주를 보려면,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중에서

 

85. 우리 삶의 목적은 세속의 성공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삶의 기쁨으로 순간순간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 죽어준 것들에게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다.

msn036.gif 나를 위해 죽어준 것들에 감사하고, 그 생명을 먹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죽는 날까지 삶이 기쁨으로 삶의 떨림을 느끼는 것이다.

 

86. “너를 죽여 먹음으로써 내가 살아나는 오늘, 기쁨으로 오늘을 다시 한 번 살아보리가.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이 되어보리라.”

msn036.gif나도 누군가의 기쁨이 되어 보고, 나도 누군가의 가슴속에 빛나는 별이 되어보리라.

우리는 고유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하나의 별이고,

우리는 우리의 길이 있고 그 길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다.

 

 

분노라는 이름의 야수를 길들이는 법 아킬레우스

 

95. 격노는 인성을 빼앗고 후회할 행동을 하게 한다. 더욱이 어떤 분노의 기억은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월과 함께 익어갈 뿐이다. 그 기억이 아무리 희미해지더라도 언제고 다시 분노의 불길로 치솟아오를 불씨를 품고 있다. 모든 일을 잘못 처리하도록 만들고, 평소의 밝음을 한순간에 내팽개치게 하고, 다정한 친구에게 평생 안 볼 것처럼 욕설을 퍼붓게 만드는 분노라는 짐승을 우리는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95. “남자다움이란 오직 용맹함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남자다움은 분노를 이기고 자신에게 악을 행한 자를 사랑하는 데 있다. ” - 페르시아의 위대한 스승인 아부 가나파르는 바그다드의 한 감옥에서 자신을 때리는 사람에게 말했다.

 

97. “ 만일 누군가가 나를 가혹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행위이며, 그의 버릇이고 그의 性情성정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나의 성정이 있다. 나는 나의 성정이 훨씬 인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성정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스로 분노를 금하는 8계

제1계 스스로 터득한 것

분노는 퍼부어지는 대상보다 그것을 담고 있는 양은그릇에 더 해를 끼치는 산酸과 같다.

그나마 밴댕이 속 같이 얇은 양은그릇에 구멍 내지 마라.

 

제2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워온 것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때에,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목적을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화를 내기란 대단히 어렵다. ‘적절함’을 생각하다 보면, 분노가 사라지고 웃음이 터진다.

 

제3계 빌리 그레이엄에게 배워온 것

머리가 뜨겁고 가슴이 찬 상태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반대로 머리가 차갑고 가슴이 뜨거운 상태에서만 일은 이루어진다. 앞에 있는 자에게 두껑이 열릴 만큼 화가 났을 때는 이놈을 반드시 ‘엿 먹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 머리가 차가워지고, 가슴이 뜨거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기다리면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분노는 사라진다.

 

제5계 집안일을 돕다 공감하게 된 것

마음 위에 일어나는 불기를 더하지 말고 오직 길가를 스치는 바람으로 여겨라.

 

제6계 시인 오마르 워싱턴에게 배워온 것

화를 내되 잔인해지지 말라. 화를 너무 참으면 똥을 오래 참는 것과 같다. 가끔 방귀를 뀌어야 시원하다.

 

제7계 어찌어찌 이놈저놈에게 얻어들어 스스로 터득한 것

남과 다툴 때 화를 내기 시작하면 그때는 벌써 진리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다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인식하고, 분노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마라. 자신의 모짐과 결별하고 피와 화해하는 신성한 의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모든 순간은 다 마지막이다. 그러므로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마지막 인사는 그것을 미워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이다. 지금 말이다.

 

제8계 양수리 연못에서 배운 것

분노는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화해야 한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니 흐린 물웅덩이도 신비한 연못이 된다. 오직 바보들의 마음속에서만 살아가는 분노도 꽃이 될 수 있다. 분노가 갈 곳이 없으면 실망과 좌절로 남게 된다. 그러나 분노를 나를 위한 좋은 변화에너지로 바꿔내면, 뜨거운 가슴으로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 된다. 분노에게 길을 터주어 연꽃을 피우는 정기가 되게 하라.

msn036.gif 분노에 당하지 마라. 분노의 노예, 상황의 노예가 되지 말지어다. 상황을 통제하는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지, 상황에 지배당하는 노예가 되지 말라. 그래서 늘 나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 깨어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새삼 되새겨본다.

 

혐오, 뒤집으면 엄청난 창조 에너지 피그말리온

 

110. 세상을 혐오하는가?

사랑할 만한 나만의 세상 하나를 만들자.

그러면 그 세상을 사랑하게 되리라.

 

삶을 혐오하는가?

사랑할 만한 삶 하나를 만들자.

그러면 못 견디게 그 삶을 사랑하게 되리라

 

운명을 미워하는가?

미칠 듯 빠져드는 운명 하나를 만들자.

그러면 순명의 삶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리라.

 

우리가 미워하고 혐오한 것이 사실은 깊은 곳에서 샘솟는 사랑이었을까

아마 그러하리라. 더욱 더 그러리라 믿게 되었다.

 

희망 없는 일의 무수한 반복, 그 부조리를 넘어서는 힘 시시포스

 

117. 인간은 인간 자신의 어둠과 끊임없이 대결을 벌여야 한다. 이 대결을 팽팽하게 끌고 가려면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 반항과 자유, 그리고 열정이 그것이다.

* 반항하라. 쉽게 평화를 갈구하지 마라. 나와 세계 사이의 팽팽한 대립에 굴복하지 말고 대결하라.

* 자유로워져라. 희망과 내일이 없는 조건 곳에서 삶의 순순한 불꽃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하라. 이것이 자유의 원리다.

* 열정을 가져라. 열정이란 주어진 모든 것을 소진하는 것이다. 삶을 필사적으로 불태우고 최대한 많이 살아라.

나의 삶, 나의 반항, 나의 자유를 최대한 느끼는 것. 이것이 최대한으로 사는 것이다.

 

118. “이렇게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이 듦과 내 영혼의 위대함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이 좋다고 느끼게 한다.” -오이디푸스 왕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다 채우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유한한 운명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떨림에 감사하게 된다. 주어진 삶. 그것이 무엇이든 정면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인간의 삶이다.

 

 

아름다움, 모든 것이 결국 너에게 굴복하나니 헬레네

 

120. 종종 학자들은 아름다움을 재는 단위는 ‘헬렌helen'이며, 1밀리헬렌은 ’배 한 척을 띄울수 있는 아름다움‘일고 농담처럼 말한다.

 

124. 여자는 아름다움이 깃든 집이다. 여자를 쳐다보는 순간 악마는 잽싸게 남자의 머리카락을 꽉 틀어잡는다.

 

124. 수도자의 살이 아직 뼈에 붙어 있고 그 맥박이 고동치는 한, 상상 속의 이미지가 그의 마음에 폭풍을 일으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127.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성聖과 속俗, 선과 악, 절제와 욕망, 이성과 충동 등과 같은 대극적 가치의 공존을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라는 상징어로 불렀다. 그리고 그 갈등과 대립을 인간의 필연 조건으로 생각했다.

“인간은 동굴의 좁은 입구를 통해 만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인식의 좁은 동굴 문을 박살낸다면, 만물은 그 자체의 무한한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낼 것이다.”

우리를 가두는 좁은 인식의 문을 깨뜨리는 것. 이것이 파괴다. 과거의 우리는 깨어지지만, 우리의 인식은 새롭게 개안한다. 그러므로 파괴는 부활이다.

 

허영, 사랑하는 것을 숨기고 아껴두지 못하는 자의 비극 니오베

 

134.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하면 할수록 천하고 비속하고 상스러워지는 것을 보변, 지식이 현명함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님이 확실하다. 그것은 아마 남의 지식에 떠밀려서 자신의 판단력은 오그라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msn036.gif많은 지식을 가지면 좋겠다. 그러나 그 지식으로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지식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컴퓨터와 같다. 내 삶에 적용하고 사회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에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지식이어야 한다. 책속에만 있는 지식은 차라리 배우지 않는게 낫다. 배우면 바로 삶에 적용해야 한다. 배움은 독행이 따라야 한다. 진실한 행동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시간낭비다.

 

식물에게 물을 너무 많이 주면 죽어버리고, 등잔에 기름이 너무 가득하면 불이 꺼진다. 마찬가지로 정신작용에서 공부와 지식과 재료가 너무 과하면, 아는 것이 잡다하게 너무 많아서 거기에만 사로잡히게 되니, 사리에 맞게 자력으로 풀어볼 힘을 잃게 된다. 지식의 무게 때문에 학자는 허리가 굽어지고 곱사가 되는 것이다. -몽테뉴 < 수상록 >

 

135. 그는 기억력은 채워졌지만 이해력과 양심은 비어 있고, 여기저기 다니며 새가 곡식을 쪼아먹듯 마음에 드는 문장을 도둑질해오는 자에 불과하다. 그것을 소화하여 제 살로 만들지 않는 한 그는 결코 현명해질 수 없다. 학식을 오로지 자랑거리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매끄럽게 말하는 법을 배운 자와 같이 자신의 것은 늘 비어 있게 마련이다.

학식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지 말고, 배우고 익힌 것을 조용히 자신에게 들려주어 그 가치를 스스로 체험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으로 지식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지식은 말로 자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지식을 자랑하면 정신이 썩고, 학문이 잡다하면 혓바닥은 훈련되지만 행위는 빈약해진다.

 

135. 자기를 잘 경영한다는 것은 진정 사랑하는 것을 가슴의 가장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하고 아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이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처럼 위험한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은 곧 보물을 잃고 말 것이다.

 

136. 물의 세 가지 자기경영 원칙

첫 번째, 배움은 차츰차츰 쌓여가는 것이며, 쌓여 넘쳐야 비로소 통달하게 된다는 말이다. 매일 하면 쌓인다. 쌓이면 넘는다. 그것이 매일의 힘이다. 흐르는 물은 매일 그렇게 조금씩 나아간다. 매일 읽고 매일 써라. 매일 하지 않으면 물은 대지의 어딘가에 스며들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결코 강을 이루지 못할 분 아니라 작은 개울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msn036.gif 삶은 무의식, 카르마, 습관이다. “네가 밥 먹고 뭐하는지 내게 가르켜줘. 그러면 네가 뭐하는 사람인지 가르쳐줄게” 라는 니코스카잔차키스의 말이 떠오른다. 하루살이의 삶은 삶의 우선순위에 시간을 공양하고 투자한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영원으로 사라지기에.

 

두 번째, 물은 오직 제 뜻 하나에만 복종하는 자유라는 이름의 오만이다. 세상의 인정을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라. 세상이 나에게 기대하도록 허락하지도 마라. 세상이 인정을 구하다 보면 정신은 비루해지고, 나의 자유는 얽매일 것이며, 나는 그들의 기대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스스로 행할 수 있도록 회초리를 들고 다그쳐야 한다.

msn036.gif 세상의 인정을 구하는 자는 눈치보기 바쁘다. 자유로움은 내면의 소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내면이 이끄는 삶은 결코 남이 하는 소리에 무심하다. 나는 나의 삶을 살고, 그들의 두뇌로 생각하고 그들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기에. 관심과 간섭은 구분되어야 한다.

 

세 번째 원칙, 흐르는 물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잡사에 무심하다. 오직 바다를 향한 열정밖에는 없다. 강물의 꿈은 바다다. 그 꿈을 잊은 적이 없다. 바다에 닿으려는 강의 꿈을 마음에 담아두자. 바다를 꿈꾸었다면 푸른 열정으로 흘러야 한다. 자나 깨나 바다를 그리워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잊어버리도록 한다.

그렇게 강물은 낮은 곳으로 향하는 하나의 원칙에 의지하여 한 번도 쉬지 않고 앞을 막는 구덩이를 메우고, 바다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평화 속에서 생을 마친다.

 

거짓이 만들어내는 역설적 생산성 바투스 영감과 헤르메스

 

145. “죄악에는 허다한 도구들이 있지만 그 모든 죄악의 공통점은 거짓말이다.” -호메로스

msn036.gif 선한 거짓말과 악한 거짓말이 있다. 어떻게 사용할지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말한마디로 천냥빛을 갚는다’는 말은 선한 거짓이다. ‘혀 세치가 너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는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지만, 남을 비방하는 혀는 몸이 온전치 못할 것이라는 경구다.

145. ‘진실은 빛과 같아 눈을 어둡게 한다. 반대로 거짓은 아름다운 저녁노을처럼 모든 것을 멋지게 보이도록 한다.“ -카뮈-

 

147. 겨우 ‘메이드 바이 잡스 Made by Jobs’인 기기에 의존하지 말고, ‘메이드 바이 갓Made by God'인 진짜 두죄 속 메모리를 뒤져 체득한 경험과 지식으로 구라를 빚어야 한다. 그래야 구라가 싱싱한 생명을 얻게 된다.

msn036.gif 기억을 잃어버린 시대, 스마트폰이 자리 잡으면서 전화번호조차 기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정보만 있고 기억이 없다. 잡다한 정보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쓸데없는 곳에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가.

 

“거짓이란 곧 변장한 진실일 뿐이다. ” -바이런-

 

148. 진실과 거짓도 서로 같은 것이 아니지만 진실은 거짓을 밝힘으로써 존재하고, 거짓은 진실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므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삶은 거짓과 진실의 실로 짜여진 직물과 같아 거짓은 어두움으로, 진실은 밝음으로 각기 삶을 채색하게 된다.

 

 

탐욕에게 먹이를 주는 자들의 최후 미노스와 미다스

 

153. 정치권력자로서 서임의식을 치르면 신의 대리인이라는 겉옷을 입은 것이니,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면 신의 분노를 사 재앙을 당하게 되리라. 이것이 미노스의 신화가 품고 있는 상징성이다.

 

154. 권력은 음식과 같다. 만들어지기까지는 신선한 재료로 요리되지만 만들어지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절대 권력일수록 더 심한 악취를 내게 되어 있다. 수없이 많은 권력자들이 탐욕의 희생물이 되어 굴욕을 당한다. 공직에서 쫒겨나고, 잡혀가고, 정치적 생명을 잃어도 , 한 번 권력의 자리에 앉고 나면, 만인의 재산을 개인의 이익인 양 탐하지 않는 지도자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기 어렵다.

탐욕은 바로 권력자와 부자 들을 가두는 벗어날 수 없는 라비린토스인 것이다.

 

159. 탐욕관리 한도를 정해두고 실천 강령.

첫째, 살까 말까 할때는 사지마라. 돈이 굳는다. 그러나 할까 말까 망설일때는 해라.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새로운 경험은 삶의 지평과 다양성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지루한 삶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msn036.gif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말할까 말까 할 대는 말하지 마라.

줄까 말까 할 때는 줘라.

먹을까 말까 할 대는 먹지 마라.

-서울대 행정대학원장 최종훈 교수의 인생 교훈-

둘째, 일 년에 책을 한 권 내지 못하면 강연도 하지 말라. 책 한 권의 내용은 일 년 우려먹으면 족하다.

 

셋째, 책으로 돈 벌 생각 하지 마라. 시장이 눈치를 보게 되면, 상인이지 작가가 아니다. 그러나 독자가 잘 읽을 수 있도록 가장 손쉬운 소통 방식을 찾아내라. 운이 좋아 잘 팔리면 좋고, 안 팔려도 그만이다. 그러나 좋은 책을 쓰기 위해 정성을 다해라. 이 부분에서만은 탐욕과 과도함을 맘껏 즐겨라. 오만해져라.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오만이 아니라 위로 오르려는 오만이어야 한다. 맘껏 까다로워지고 맘껏 괴팍해져도 좋다. 나는 이 일이 좋다. 이 일을 하다 순직하려 한다.

 

넷째, 돈 버는 데 시간을 지나치게 쓰지 마라.

다섯 째, 인생을 기쁨으로 즐길 만한 시간을 늘 확보해두고, 각 사건마다 카이로스의 시선으로 ‘지금’을 즐겨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몰입 시간의 양을 늘려라. 자유가 늘어난다.

 

여섯 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비문을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두어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사랑과 집착, 그 미묘한 경계 위에서 카밀라

 

167. “사랑은 악마이며, 사랑처럼 사악한 천사는 없다” -세익스피어-

 

168.

만일 주위의 모든 사람이 이성을 잃고 너를 비난할 대도

고개를 떨구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면,

만일 모두가 너를 의심해도 너 자신을 믿을 수 있고

그들의 의심 또한 수용할 수 있다면,

만일 네가 기다릴 수 있고 기다림에 지치지 않으며

남에게 속더라도 남을 속이지 않으며

미움을 받더라도 미워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너무 착한 척, 너무 잘난 척도 하지 않는다면,

 

만일 네가 꿈을 꾸되 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생각하되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며

만일 네가 성공과 실패를 만나게 되더라도

이 두 협잡꾼들을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다면,

만일 네가 말한 진실들이 악인에 의해 왜곡되어

어리석은 자를 옭아매는 덫이 되는 것을 참아낼 수 있다면,

인생을 다 바쳐 이룬 일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더라고

몸을 굽혀 낡은 연장으로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만일 네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을 걸고

한 번쯤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할 수 있다면,

설령 잃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리고 잃은 것들에 대하여 탄식하지 않는다면,

만일 네 심장과 두뇌와 힘줄이 임 오래전에 쇠하였더라도

너를 위해 쓸모 있도록 하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오직 의지만이 “견뎌내라!“ 할 때까지 견딜 수 있다면,

 

만일 네가 군중과 이야기하면서도 천박해지지 않고,

왕과 함께 거닐면서도 평범함을 잃지 않으며

적이든 친구든 너를 해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모두가 너를 존경하더라도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만일 네가 용서할 수 없는 1분의 시간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60초로 대신할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너의 것이며

비로소 너는 한 사람의 어른이 될 것이다. 내 아들아!

 

- 러디어드 키플링, <만일>-

 

과도함을 덜어내는 황금률, ‘메덴 아간’ 네메시스와 솔론

 

175. 과도함은 언제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환경과 조건이 된다. 달이 차면 그 과도함을 이기지 못해 이울기 시작하고, 겨울이 살을 에는 추위로 절정에 달할 때 봄이 다가오는 것처럼 하나가 가득 차 그 힘이 절정일 때, 이미 그것은 새로운 국면으로 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178. “절대권은 매우 매력적인 자리이긴 하지만 한 번 그 자리에 앉으면 거기서 내려올 길이 없다”

“나이는 하루하루 늙어가지만 배움의 길은 나날이 새롭다” -솔론-

 

179.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있는 기둥에는 ‘메데 아간Meden Agan'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솔론의 말로 전해지는데, 그 말은 ’어떤 것에도 지나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181. 우주는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은, 세상의 질서를 깨고 우주의 균형을 전복시키는 행위들을 징벌하는 것이다. 즉, 과도함과 지나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네메시스가 우리를 부추길 때마다 과도함을 경계해야 한다. 이럴 때 필요한 버림의 방식 중 하나가 바로 변화다. 변화란 한 상태에서 극점에 이르는 것을 경계하여 얼른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182. 그러므로 변화는 끊임없이 두 개의 세계를 넘나든다. 늘 변하는 세계와 불변의 질서 사이를 말이다. 변화에 성공한 사람은 어제의 나를 십자가에 매달 수 있으며, 미래의 나와 화해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어제의 영웅은 내일의 폭군이 될 수 밖에 없다. 하나가 무르익으면, 그 경게에서 다른 새로운 기운이 만들어진다.

미래는 새로운 기운 속에 숨겨져 있다. 무엇을 추구하든 그 정점의 끝에서 관성으로 더 나아가는 것은 과도함이다. 그곳이 막다른 곳이다. 정점에서 그 곳을 버리고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메데 아간을 기억하자.

msn036.gif초생달은 달이 차오름이요. 보름달은 달이 기울어짐을 의미한다.

 

파멸로서의오만과 창조 에너지로서의 오만 마르시아스

 

탐욕이 집착을 만들고, 집착은 과도함을 낳고, 과도함은 오만을 통해 질주한다.. 그리고 파멸, 판도라의 마음상자의 뚜껑이 열리면서 ‘탐욕-집착-과도함-오만-파멸’의 연쇄반응이 작동하게 되었다.

 

190.

아폴론이여,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와 마르시아스를

그 사지의 덮개 속에서 벗겨냈을 때처럼

그대의 영감을 불어넣어주소서.

-단테, <신곡, 천국, 제 1곡 중에서>

 

단테의 시선으로 볼 대, 예술의 신 아폴론은 질투 때문에 마르시아스를 죽인 편협한 신이 아니다. 예술가의 껍데기를 벗겨 새롭게 태어나도록 도와 신의 경지로 이끄는 영감의 산파가. 끔찍한 엽기적 장면이 여기서 일대 전환을 이루어, 그 일에 죽고 그 일에 사는 입신入神의 경지로 오르는 새로운 탄생 의식으로 바뀌어버렸다. 중세 사람들이 신의 경지에 이르려는 욕망을 파멸에 이르는 휴브리스라고 판단할 때, 르네상스 사람들은 그 오만을 순수한 예술가의 정신과 영혼의 힘으로 해석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다시 인간 중심의 이야기로 재해석되기에 이르렀다.

 

190.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서전 속에서 인간은 인생을 통해 저마다 맞서 싸울 적을 결정하는데, 자신은 신을 그 적으로 삼았다고 밝힌다. 비록 그것이 파멸을 뜻할지라도 그는 신과 싸우게 되어 기뻤다고 밝힌다. 비록 그것이 파멸을 뜻할지라도 그는 신과 싸우게 되어 기뻤다는 것이다. 또한 신을 흙을 빚어 세상을 창조했지만 자신는 어휘를 빚어 상상력으로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은 지금처럼 땅 위를 기어다니는 인간을 만들었지만, 그는 꿈을 이루는 공기와 상상력으로 시간의 횡포에 항거하는 더 영적인 인간을 빚어냈기에 신의 인간은 죽지만, 자신이 만들어 낸 인간은 살리라고 외쳤다. 그는 영원한 그리스인이었다.

 

191.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매우 독특한 시선으로 휴브리스를 파악한 사람이다. ‘신의 경지에 이르려는 오만’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인 휴브리스는 그에 이르러 ‘성공한 체험의 우상화’라는 역사학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토인비에 따르면 역사의 진보는 대단히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창조적 소수들은 자신의 과거 성공 체험을 우상화함으로써 더 이상 창조적이지 않게 된다. 스스로의 고거를 맹신하고 그 성공의 법칙을 절대적 진리로 고착화시킴으로써 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191. 결국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오만이 있다. 하나는 과거의 성공을 우상화하는 오만이다. 그 끝은 파멸이다. 모든 성공한 것들의 파멸 속에는 우상화되니 오만이 숨어 있다. 이때 오만이 성장을 멈추게 하는 치명적 악덕이다. 도 하나의 오만은 신으로부터 가혹한 징벌을 당하더라고 ‘신의 경지에 다다르려는 오만’이다. 이는 껍질이 벗겨지는 산고의 고통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창조적 진보를 계속하게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192. 신을 닮으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은 신이 우리에게 준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삶을 바쳐 그것이 빛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192. 오만을 경영하는 원칙

 

첫째, 인간은 누구나 한 분야에서만은 신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 주어진 존재일지 모른다.

주목해야 할 곳은 우리의 어둡고 둔한 부분이 아니라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인간은 이곳을 통해 우리 안에 심어진 신적인 영광에 도달할 통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하면 쉽게 오만에 빠지고, 부족하면 열등감에 시달리게 될 분이다. 아직 배우는 사람일 때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대신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면 오만을 경계할 수 있다. 배울 때는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

 

셋째, 그러나 어는 정도의 수준에 올라왔을 때는 목표 수준을 높이 잡고 이에 도달하기 위해 오만을 성장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자신을 끝까지 올리기 위해서는 하늘로 오르려는 꿈을 가져야 하는데, 이때 ‘신에게 닿으려는 마리시아스의 오만’이 강력한 성장 에너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초점화된 집중, 이것이 창조적 오만이며, 마르지 않는 휴브리스다. 위대한 오만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부분에서만 전력을 다하여 신과 싸우려는 자세다.

 

다섯째, 오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는 안다. 작지만 조용하고 분명한 마음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는 다시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올리기 위해 작업장으로 향해야 한다.

 

여섯째, 마흔세 살이었다. 글이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다. 그 후 매일 아침 날마다 글을 쓰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 나도 글을 잘 쓰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여전히 쓰고 있고, 죽을 때까지 쓸 것이며, 쓰다가 조용히 순직하고 싶다.

 

천박한 속물들에게 조소하라 미노스와 체세나 추기경

 

 

196. 교황의 의전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은 교황의 발아래 자신의 얼굴을 벽화에서 지워달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그러자 교황 바오로 3세는 이렇게 말하며 그 청을 거절했다.

“내 아들아, 주님은 나에게 하늘과 땅을 다스릴 열쇠만 주셨다. 지옥에서 나오고 싶다면 미켈란젤로에게 가서 말하거라.‘

 

msn036.gif 미켈란젤로는 소심하지만 무시무시한 복수를 한다.

체세나 얼굴을 지옥의 수문장 얼굴속에 그려넣었다. 그의 귀는 미노스를 닮은 당나귀귀를,

그이 성기는 뱀에게 물렸다.

“니가 천국에만 있었어도, 내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사람인 내가 지옥에서 너를 구원하기란 불가능하구나.‘ 하고 발뺌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을 무덤에서 나오는 영혼을 돌보는 수도자의 모습으로 표현했거든요.

스승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옷을 입히는 제자 볼테라는 391명 인물상에 옷을 입혔다.


204. 조소는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지나치게 이기적인 사람이나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반항의 시절, 혹은 대책 없는 얼간이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골육상쟁의 신화가 되풀이되는 이유 로물루스와 레무스

 

209. 권력은 핏줄을 알지 못하며, 부는 혈육을 버린다. 누구나 원하는 것,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것을 가진 자는 극히 적을 때, 인간은 경쟁적으로 그것을 얻기 위한 싸움에 돌입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자를 승리자라 일컬었다. 승리자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210. 키루스2세는 크세노폰의 사유체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기원전 6세기 중엽에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왕으로 인류 최초로 인권헌장을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한다.

 

213. 키루스 2세는 인간이란 복종하기 싫어하는 동물이라고 이해했다. 복종하기 싫어하는 인간을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인물이 바로 키루스 2세였다.

 

213. 자기를 경영한다는 것은 먼저 가치를 배우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그 행위가 자신의 가치체계에 부합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익을 보면 먼저 그것이 정읠운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돈은 되지만 그것이 가치에 위배되는 행위를 요구한다면 거기서 물러서야 한다. 이것이 자기경영이다.

 

내가 나의 잔혹한 독재자였으니 팔라리스

 

218. 가장 잔인한 자는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상처 입은 사람이며, 가장 가혹한 자는 불안에 떠는 심약함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잔혹한 제거는 불안에 떠는 나약한 자들의 극단적인 무기였으니, 추격당하고 쫓기는 자가 필사적으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심되는 상대를 먼저 무차별적으로 제거하려는 데서 잔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218.

시인이란

“격렬한 고통을 가슴 속에 품고 있으나

탄식과 비명이 입술을 빠져나올때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불행한 사람“

- 철학자 키르케고르-

 

219. 시인은 세상의 슬픔을 제 슬픔으로 공명하는 자들이며, 구원을 노래하되 스스로 구원자가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자들이다. 이것이 시인의 비극이다. 삶이 곧 시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의 비명, 그것이 바로 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슬픈 조건이며 동시에 위대한 조건이다. 잔인함과 가혹함을 준 것은 신들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거름으로 쓸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220.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빠스는

어린 빠스는, 무화고의 검은 껍질 속에는 빨간 꽃이 감춰져 있었다.

무화과를 먹는 것이 태양을 먹는 것이며, 또한 어둠을 먹는 것이기도 하다고 시적인 생각을 했다.

 

220. 예의 따윈 버리세요.

그냥 손가락으로 시를 잡고,

한 입에 넣고 입 안에서 터트려요.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과즙을 핥으세요.

시는 막 딱 좋게 익어서 당신만 준비되면

언제라고 먹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나이프, 포트, 스푼,

접시, 냅킨, 테이블보 따위는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시는 가운데 속도,

줄기도,

딱딱한 껍질도,

큰 씨도,

작은 씨도,

껍질도 없어서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거든요.

-이브 메리엄Eve Merriam, <시를 먹는 법> How to eat a Poem

 

222. 변화란 무엇인가? 나를 가둔 청동황소의 문이 밖에서 잠긴 것이 아니라 잠겨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나를 가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가 나의 독재자였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안으로부터 청동황소의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잔인한 형구를 푸른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다시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나를 풀어줌으로써 진정한 내가 하는 것.’ 이것이 한 개인이 변화를 경영해가는 방법이리니, 입안에서 터져 턱을 타고 넘쳐흐르는 과즙을 즐기듯 삶을 즐기리라.

 

대화와 소통이 실패하는 곳을 채우는 힘, 폭력 아가토클레스

 

226. 마키아벨리는 가장 정력적이고 타락한 교황 알렌산테르 6세의 사생아였으며, 교황군의 총사령관이었고, 용병재장이었던 테사레 보르자를 염두에 두고 <군주론>을 썼다.

 

227. <군주론>은 다스리기 위해서 읽기보다는 나를 다스리려는 자들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해 읽을 때 훨씬 재미있다. “나는 어떻게 쉽게 당하기만 하는 대중속의 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자기를 잘 경영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속성에 얽매이지 않는다. 권력을 휘둘러 사람들을 패는 무자비한 독재자이 ‘가끔의 선심’에 안심하지 않으며, 거짓 선지자의 목소리에 감읍하여 울며 광란하는 지지자가 되지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대하는 분노한 자로서만 머룰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교사巧詐에 넘어가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타인의 명령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군중이 되지도 않는다.

 

227. 대화는 먼저 자신과의 소통이며, 타인과의 연결이다. 나아가 세상 속의 공존이다. 대화라는 뜻의 ‘다이얼로그dialogue'는 그리스의 어원을 가지고 있다. ’다이어(dia, 통하여) + 로고스(logos, 말)‘로 합성되어 만들어진 것이니, 직역하면 ’말을 통하여‘라는 뜻을 가진 단어쯤 될 것이다. 이 단어는 원래 대화, 독백, 방백, 침묵 모두를 뜻하는데 주로 ’독백‘을 의미할 때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현재는 두 사람 이상이 나누는 언어 소통을 뜻하는 다이얼로그가 그리스 시대에는 독백의 의미로 주로 쓰였다는 것이 재미있다. ’대화‘라는 의미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 이전에 자신과의 소통이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화란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놓고 서로의 느낌을 나누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러니 대화를 통하지 않고는 삶을 나눌 수 없다.

 

228. 대화의 원칙과 경영

대화의 제1법칙: 공명

가장 이문이 남는 대화 비법은 듣기다. 잘 들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나의 입장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공명하는 것이 첩경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공명하면서 몰두할수록 신기하게도 나 자신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된다. 그럼으로써 나의 정체성도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출 때는 겉을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나를 비추어볼 때는 그 속을 볼 수 있다. ‘감어인鑑於人’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경어인鏡於人’이라고 하기도 한다. 둘다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본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통해 나를 더 잘 알게 되었으니 지혜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대화의 첫째 자세는 상대의 주파수에 나를 맞추어 서로 공명하는 것이다.

 

대화의 제2법칙: 최소한의 개입, 그리고 최대한의 퍼포먼스

대화가 가능하려면 듣기에 이어 말하기가 주고받기로 교환되어야 한다. 대화는 자신의 입장 고수와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가장 좋은 상급이 대화는 말하기에 대해 아무런 부담 없이 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터져나오는 경우다. 나는 그저 상대의 이야기에 몰입한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이 순간 나의 말하기란 그 사이 막간에서 터져나오는 박수갈채 같은 것이다.

 

230. 잘 경청함으로써 나를 알게 되고, 잘 말함으로써 그 사람이 나를 통해 자신을 알도록 도울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유익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오이디푸스

 

237.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입문>에서 인류는 세 번의 치욕을 겪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코페니쿠스의 지동설, 두 번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 세 번째 가장 ‘민감한 상처’를 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아가 자신의 집안에서조차 주인이 아니며, 자신의 정신생할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대한 초라한 정보만을 접하고, 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정신분석학이 보여주지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의식되지 않는 것, 즉 무의식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며,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나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238. 프로이트에게 가장 중요한 상징이 바로 이 오이디푸스 신화다. 오이디푸스가 알지 못하는 일, 즉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결국 ‘내가 모르는 나’를 추적하는 과정이었다. 나의 존재의 근원이면서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을 찾아나서는 것을 상징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범인이 밝혀졌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진실은 그것을 아는 자에게 고통을 줄 뿐’이라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지적은 정확했다. 내내 진실을 외면해오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빼버린다. ‘내가 모르는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다. 육신의 눈을 빼버리자 ‘참 나’에 대한 내면의 눈이 떠지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눈을 찌르고, 추방당함으로써 그 불행을 정점까지 끌어올렸다. 불행의 절대적 의미를 완성했던 것이다. 더 이상 그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게 되자. 그를 그렇게 몰아세웠던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그 장벽 너머로 들어선다. 그가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느끼게 되자 비로소 그는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39.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세상의 일이며, 그렇다고 실망할 것도 없는 것이 삶이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당장 고통스럽고 힘들 때도 있지만, 인생 전체로 보아 그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닐 때가 더 많았다. 오히려 내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졌을 때보다 더 좋은 결가를 가져다준 운명의 친절한 안배였다는 생각도 든다.

 

239. 인간은 어디에 있든 신이 있으라고 한 자리에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 아름다움으로 가는 길은 열려 있다.

자기도 모르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그 길에서 만나는 무수한 자아에 감탄하고, 스스로 펼쳐지는 가능성에 놀라워하는 삶이면 좋겠다. 매일 살아 있음으로 기뻐하고 매일 새로운 자신을 창조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는 인생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불복종, ‘자기만의 길’을 걸어 ‘모두의 길’을 터놓은 힘 안티고네

 

247. 루쉰의 소설집 <고향> 중에서

 

내가 말하는 소위 희망이라는 것 또한 내 손으로 만들어낸 우상 아닌가.

……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대지 위에 난 길과 같은 것이다. 애당초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247. 자기혁명은 종종 사회가 인정하는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안티고네처럼 ‘자기만의 법칙’을 따름으로써 세상의 일반적 법칙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허용범위의 일탈이다. 일탈은 대가를 요구한다. 고독이라는 벌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는 큰 길을 가는 대신 자신의 오솔길을 헤쳐갈 때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바로 자기를 혁신하려는 사람들이 마주치게 되는 고통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혁명가는 자기 안에 자신만의 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신의 이름을 뭐라 부르든 신의 법칙과 자신의 법칙을 동일시하는 것. 이것이 고독을 이기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신의 비호를 받으며 자신의 길을 간다. 그리고 승리한다. 그 후 자기혁명가는 사회로 귀환할 수 있게 된다. 그때 비로소 자기만의 법칙이 일반을 위한 성공의 법칙으로 더해지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영웅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영웅은 자신의 성공을 사회와 더불어 나눔으로써 자신이 걸었던 가시밭길을 다른 사람도 걸을 수 있는 길로 만들어놓는다. 다른 사람이 걸음으로써 길이 아니던 것이 길이 된다. 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나도 모르는 나’, 그 미로 속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실타래 아리아드네

 

255. 일상에서 뼈를 깎는 노력 없이 즐거운 변화를 가져다둘 수 있는 것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술이고 하나는 사랑이다. 필부도 술을 마시면 하늘이 동전만해지고, 누구나 짝을 만나면 사랑에 들뜨게 되고 심장이 달아올라 안하던 짓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하게 된다.

 

256. 산산이 부서지는 이 살믈 구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그것은 삶의 부조리에 대한 구역질 나는 감정과 생각들을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으로 변환시키는 마법이다.

 

 

‘사유 불능’, 생각 없음에서 퍼져나가는 ‘일상의 악’ 다이달로스

 

264. 생각이 사라지고 정보가 주가 되었고, 오락과 채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람들과의 연결은 혁명적으로 증진되었으니, 우리는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을 버려두고, 만남 중에 수시로 스마트폰을 보며 서로의 존재를 모독하고 서로의 부재不在를 확인한다.

 

265.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에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통해 1961년부터 1962년까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이야기체로 풀어냈다.

(2) 양심이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여건에 제약된 것이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했다.

(5) 아이히만의 특징은 ‘순전한 무사유’ 즉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 아렌트는 경고한다.

“사회적 환경에 제약된 양심을 품고 이상주의로 무장된 인물이 생각할 수 없는 사유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얼마나 가공할 일이 벌어지는지 아이히만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6)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악의 평범성’, 그것은 바로 ‘생각하지 않는 죄’에서 비롯된다. 시키는 일을 그저 따르는 자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갖지 않음으로써 주도적 삶도 사라졌다.

 

268. 정보는 많아졌으나 내 마음은 더 공허해지지 않았나 싶다.

간단한 스마트폰 이용 규칙,

*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가능한 한 꺼내지 말 것.

* 10분 보고, 30분 생각할 것.

* 메모리는 신이 만들어준 머릿속에 저장할 것.

 

이별, 닿는 순간 사라지는 이 미칠 듯한 부재 오르페우스

 

272. “오르페우스는 아내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손 끝에 닿는 것은 바람뿐이었다. ” 에우리디케는 사라진다. ‘닿는 순간 사라지는 이 미칠 듯한 부재不在’, 이것이 바로 모든 예술가들의 비극이다.

 

273. ‘은둔의 철학자’인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표현대로 “그녀는 그녀를 숨기는 이름 아래, 그녀를 숨기는 베일 아래, 예술, 욕망, 죽음, 밤이 지향하는 몹시도 어두운 지점”인 것이다.

 

275. 삶은 에우리디케처럼 사라질 것이다. 붙들 수 없는 것이다. 삶을 통해 얻었던 진귀한 체험들과 보석 같은 깨달음 역시 얻었다고 믿는 순간 사라져보리고 마는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할 수 없다. ‘에우리디케의 얼굴에 머물던 오르페우스의 마지막 시선’ 그 시선으로 살 수 밖에 없다. 에우리디케 안에 죽음으로써, 모든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영원한 우주와 연결되는 삶을 노래해야 한다. 그것이 단명한 삶을 시로 노래로 살아내야 하는 필멸의 인간이 지닌 운명이다. 그러니 그 순간에 공명하여 울리는 유리잔이 되리라. 무수한 삶의 떨림으로 울리다 깨어지리라.

 

275.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모든 것이므로 특별하고, 특별할 수밖에 없다. 만일 ‘오늘만의 삶’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산다면 매일 이별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276.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것은 단명한 것들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 그럴 것이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피워내는 몰입, 그리고 이내 사라지는 안타까움, 삶이 일회성이야말로 우리를 빛나게 한다.

 

우주의 에너지를 불러들일 나만의 ‘탯줄’을 찾아서 안타이오스

 

280. 운명이 나를 집어던지게 하라.

던져질 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리니.

추락이 나의 재생이고

칭송이 나의 파멸이다.

 

자기를 경영한다는 것은 힘의 원천으로부터 끊임없이 에너지를 받아내는 것이다. 힘을 잃을 때마다 거기에 닿음으로써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 우리는 안타이오스의 땅처럼 떠나 있으면 안 되는 힘의 원천이 무엇언지 알아야 한다. 나를 풍요롭게 하는 그것, 나를 살게 하고 내가 살아서 빛내야 하는 그것, 그것을 발견해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284. 자기를 경영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자신의 힘의 원천에 끊임없이 맞닿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내 내면의 혈류를 타고 끊임없이 피로 흐르는 내 힘의 원천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아직 미친 듯이 나를 다 써본 적이 없다. 젊었을 때도 무엇엔가 미치고 싶었으나 그때는 미쳐야 할 그것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미친 듯이 빠져드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겨우 천직을 찾아냈다.

 

284. 나는 ‘변화’라는 주제에 탐닉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천천히 오래갈 수 있었으면 한다. 평생을 매일 조금씩 그렇게 애쓰고 즐길 수는 있을 것 같다. 나에게는 변화라는 주제가 내 에너지의 젖줄이고, 내 발이 딛고 서는 땅이다. 나는 여기를 떠나지 않으리라. 이곳에서만은 나만의 깨달음 하나를 얻고 가리라.

 

 

고난, 교활함을 통찰로 발효시키는 삶의 여정 오디세우스

 

293. 조르바는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 관찰력과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자신의 영혼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대담성과 결정적 순간마다 인간의 뱃속보다 더 깊고 깊은 샘 속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야수적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글쓰기는 성스러운 투쟁이었고, 메토이소노, 즉 성스러운 변신의 작업이었다.

296. 인간은 ‘메토이소노,’ 즉 성화聖化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카잔차키스는 주장한다.

 

296. 인간은 다른 것들을 죽여 그것을 먹고 그 먹이가 똥으로 변하는 동안 살아가며, 자신의 살아 있음과 인생 여정으로 스스로의 삶이 무엇이었느지를 증명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복수, 필요해서 너를 사랑한 자를 믿지 마라 메데이아

 

308. 남자들이여, 여인을 배신하지 마라. 메데이아가 찾아가리라.

여인들이여, 그대를 필요로 하는 남자를 믿지 말라.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은 이아손 같은 자들이다.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필요로 하는 남자를 사랑하라. 그에게 당신이 필요하지 않아도 그는 당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외눈과 백 개의 눈 사이, 불균형을 다스리는 통섭의 눈

아르고스와 폴리페모스

 

314. 시선에 대한 사유를 ‘시선경영’이라고 불러보았다.

시선경영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은 자신에 대하여 절대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광대무변한 우주에 좋은 것들이 넘쳐나도 자신에게 주어진 밭 한 뙈기를 고생해 갈지 않으면 배를 채울 한 알의 곡식도 얻을 수 없다. 그 많은 일들 중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나만이 알 수 있다. 자신을 명민한 눈으로 오래 지켜본 다음에야 세상에서 꼭 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낼 수 잇다. 100개의 눈도 죽으면 공작새 꼬리의 장식품이 되는 것처럼, 내면을 향한 시선을 잃게 되면 그 눈은 자신의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없다.

 

315. 시선경영의 두 번째 원칙은 사물의 다양한 면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선을 갖는 훈련을 일상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을 가진 사람들은 훨씬 더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성공이란 늘 특별한 것이고, 특별한 생각을 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답만을 구하려 하지 말고 ‘왜’라고 묻고,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가는 수련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특별한 시선과 다양한 질문을 포용할 수 있는, 정신적 폭이 넓은 사람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315. 100개의 눈으로부터 수집된 다양한 정보와 지식들을 이리저리 연결하고 분류하여 균형을 잡아낼 수 있는 통섭능력이 필요하다. 100개의 눈을 통해 채집된 정보와 지식들이 우리 안에서 대통합을 이룬다면 더 높은 차원의 전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지식의 대통함은 생물학자 에드워즈 윌슨에 의해 ‘통섭consilence' 이라는 개념으로 재조명받게 되었다. 통섭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세기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윌리엄 휴웰이다. 그는 ’컨실리언스‘가 ’서로 넘나든다‘라는 의미라고 이야기하고, 강의 비유를 들어 이 개념을 설명했다. 수많은 개울이 모여 강을 이루는 것처럼 먼저 밝혀진 학문적 발견들이 하나둘 합쳐져 하나의 커다란 지적 대융합의 강을 이루게 된다는 뜻이다.

21세기는 지식의 시대다. 지식의 시대에는 배움에 끝이 없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지식들은 그 큰 줄기를 잡아 서로 통하게 될 때 학제와 분야별 벽을 넘어 소통할 수 있게 된다.

통섭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을 제공하는 발효와 같은 현상을 동반한다. 통섭은 술과 같다. 단순히 포도를 물과 섞거나 다른 것들과 섞어 갈아놓은 포도주스 수준이 아니라, 좋은 통에서 오래 숙성시킨 포도주와 같다. 재료가 서로 섞여 발효하게 되면 전혀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듯, 통섭은 원재료의 단순배합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게 해준다. 통섭은 지식 사회의 양적 통합뿐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317. (1) 무엇이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연결하여 통합하자.

인간의 내면적 꿈과 욕망을 건드려줄 때 자생적인 열정이 생기고 추진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318. (2) 직부와 취미라는 불균형, 현업과 미래의 천직 사이의 불균형을 연구해보자.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직무에 나의 취미를 연결하여 통합시켜보자.

(3) 좋은 직업은 밥과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 즉 ‘좋은 직업= 밥+ 존재’ 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고독한 길을 적어도 10년은 걸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10년을 걷다보면 한 분야에서 두드러진 전문가가 되고, 팬과 마니아가 생기게 된다. 자신의 고유 틈새시장을 장악하게 되면서 밥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드디어 밥과 존재가 화해하게 되는 좋은 직업, 즉 천직을 얻게 된다. 존재에서 시작하여 밥을 통섭해가는 루트다.

 

에필로그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나는 인간

321. 다른 사람의 파멸 위에 자신의 생명이 지탱되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323.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주라는 호랑이는 자신의 계획대로 우리를 이끈다. 우연이 운명이 되어 삶을 지배한다.

 

324. 인간은 함께 힘을 합쳐 운명에 도전한다. 결과는 운명이 결정하지만 삶의 과정은 우리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다. 삶에 대한 지혜를 얻은 자들이 긴박감 속에서 선의를 가지고 협력할 때만 생기는 기적이다.

굽이굽이 전개되는 인간 의지와 운명의 뒤엉킴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우주적 존재라는 각성을 가지고, 위대한 삶의 순간들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운명에 맞서 모험을 떠나고, 살아 있는 동안 매순간을 살아 있음의 감탄으로 채우려고 애쓸 때, 운명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 우리는 삶을 후회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삶다운 삶을 매순간 즐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때 자신의 삶이 유일한 이야기로 전환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로소 한 사람의 삶이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는 동물이다. 자신의 인생으로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지 고뇌하는 동물이다. 짐승처럼 살 수도 있고, 신처럼 살수도 있다. 그래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는 개념 체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계에서 온다”라고 말한다. 즉 신화는 마음이 거처하는 것, 체험에서 있는 곳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신화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너머 그 사실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

 

326. 이 사건은 융이 어렸을 때 겪었던 에피소드- 식당에 있는 둥근 식탁판의 한 가운데가 짝 갈라졌다. 대포가 발사되는 듯한 소리여서 뛰쳐나가서 무슨일인가 봤다. 70년동안 마를 대로 마른 통나무 판이 습도가 높은 여름철에 꽝하고 터져버렸다. 그때 융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안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무슨 뜻이 있을 거야.”

융은 그 자신 외에 다른 무엇인가가가 그와 함께 있다는 의미심장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 순간 별들과 끝없는 우주, 그 장엄한 세계의 숨결이 그에게 닿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또한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나 영겁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영혼이 보이지 않게 몰래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했었다고 술회한다.

 

327. 하나의 dndusd한 사건, 그저 오래된 나무 식탁이 느닷없이 쩍 갈라지는 그 굉음을 통해 정신세계의 일각에서 인식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터져 갈라진 틈새로 지금껏 보아왔던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의 한 조각을 얼핏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정신의 눈이 열렸다. 외적이고 현세적이고 역사적인 의시그이 세계를 만들던 환영의 힘들이 흩어지고 우리의 시야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와 놀라움으로 가득 찬 내적 차원의 향해 열리게 된다.

 

이것은 마치 독일의 문인 토마스 만이 표현한 대로 ‘달의 문법Moon Grammar'으로 세상을 이해하게 된 것과 같다. 한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은 다르다. 달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태양 아래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영혼에 더 잘 어울리는 빛은 달빛이다. 그날 융은 우연히 달빛 속의 세상으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인식의 동굴에 갇혀 있는 어제의 나를 깨부수는 것이 의식혁명이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우주적 나를 통마무 판이 갈라지고 얼음 호수가 깨짓듯, 벼락처럼 그렇게 깨달어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자기혁명이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모든 대극이 녹아 융합되는 장엄한 신화의 세계로 자신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328. 우리안에 신이 있다. 신은 우리 안에 자신을 숨겨두었다. 인간은 신이 선물한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담고 태어난 모순덩어리지만, 영웅적인 내면 여정을 통해 갈등과 충돌을 대통합하여 위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동물이다. 그 이야기는 삶이라는 잉크로 쓰여진다. 삶만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위대한 손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전체적 뼈대를 논하라.

 

개인의 무의식 속 원초적 욕망과 억제되고 사회적으로 교육받아온 깊고도 끈질긴 다툼을 새로운 차원의 인간 에너지로 만들어보려는 실험이다. 저자는 이것을 신화경영으로 보고, 신화에 담겨진 상징적인 의미를 우리 삶의 감정으로 풀어냈다.

 

프롤로그 두 개에서 신화독법과 신화 속 ‘야생의 사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신화독법에 관해 저자는 말한다. “신화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날것들을 신에게 뒤집어씌운 이야기다. 동시에 인간의 미덕과 통찰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상징을 통해 벌거벗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사람에 갖는 모든 감정들과 느낌들이 신화이야기에 나온다.

신화의 독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화는 그저 원시적 인간이 꾸며낸 어리석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내면에 이르는 미로인 신화를 읽을 때는 몇 가지 기초적인 독법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신화는 은유다. 그 표현의 너머를 보아야 한다. 그래서 신화는 시詩인 것이다. 조셉 캠벨이 표현한 것처럼, ‘예수가 승천했다’라는 말은 예수가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가 내면화되어 만물의 시작점인 우리의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둘째, 신화는 자연과 우주를 반영한다. 자연과 우주가 바로 우리의 본성이다 다만 내면에 깊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 자연은 선악을 넘어서 있다. 옳고 그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왜곡된다. 무수한 삼라만상이 옳고 그름을 넘어선 영역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며, 정의롭다.

인간들만이 어떤 것은 그르고 어떤 것은 옳다고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 <단상 102편>

 

셋째, 신화는 원시적 사고가 지어낸 어리석은 미신이 아니라 갖가지 문화에 의해 왜곡되기 전 인류의 원형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의식이 억압하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우리의 내면을 통찰하게 하는 통로다. 신화는 영적 순례이며 산드크리트어로 길이라는 뜻을 가진 ‘마르가marga'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신화다. 꿈은 개인화된 신화이고, 신화는 인류 전체가 꾸는 공통의 꿈이다.

신화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신은 그를 찾는 이에게는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기를 원하는 반면,

진심으로 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기를 원한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그를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파스칼 <팡세>-

 

종교가 ‘과거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라’고 말한다. 그렇듯이 모든 신화는 자신의 과거를 벗고 새롭게 태어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정신적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변화의 정수다. 신화는 모험을 통한 변화의 이야기다. 나의 신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없는 평범한 삶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내 안에 신의 세계를 구현해가는 과정이다.

 

‘모든 선물을 다 받은 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판도라는 스스로가 신의 종합선물상자였다. 단명하여 필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들은 모두 판도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들의 선물 꾸러미인 인간선물상자. 판도라 그 자체가 탐구되어야 한다. 판도라는 여자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삶 자체를 상징한다.

저자는 판도라에서 나오는 감정을 총 29장으로 구성했다. < 시간, 애욕, 변화, 자아에 대한 무지, 자기애, 배고픔, 분노, 혐오, 매너리즘, 아름다움, 허영, 거짓, 탐욕, 사랑과 집착, 과도함, 파멸로서의오만과 창조 에너지로서의 오만, 비웃음, 골육상쟁의 피, 잔혹함, 폭력, 자기운명 사랑하기인 아모르파티, 불복종, ‘나도 모르는 나’, 미로 속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실타래, 사유 불능, 이별, 탯줄, 고난, 복수, 불균형> 이 모든 것이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이다. 신화속에 등장하는 신들의 감정을 통해 인간사회, 즉 현실에서 어떻게 풀어가고 나의 에너지로 승화할지에 대한 예들을 제시한다.

 

목차

 

프롤로그

1. 신화 독법讀法에 관하여

2. 신화 속 ‘야생의 사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과 샘처럼 고이는 시간 크로노스

애욕, 그 엉큼한 환락과 헌신하는 사랑 사이 아프로디테

변화, 또 다른 나를 창조하는 무한 에너지 제우스

‘아무도 아닌 자’에서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모험 오디세우스

자기애, 다른 사람의 눈 속에서 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 나르키소스

배고픔, 너의 죽음으로 공양된 나 에리직톤

분노라는 이름의 야수를 길들이는 법 아킬레우스

혐오, 뒤집으면 엄청난 창조 에너지 피르말리온

희망 없는 일의 무수한 반복, 그 부조리를 넘어서는 힘 시시포스

아름다움, 모든 것이 결국 너에게 굴복하나니 헬레네

허영, 사랑하는 것을 숨기고 아껴두지 못하는 자의 비극 니오베

거짓이 만들어내는 역설적 생산성 바투스 영감과 헤르메스

탐욕에게 먹이를 주는 자들의 최후 미노스와 미다스

사랑과 집착, 그 미묘한 경계 위에서 카밀라

과도함을 덜어내는 황금률, ‘메덴 아간’ 네메시스와 솔론

파멸로서의오만과 창조 에너지로서의 오만 마르시아스

천박한 속물들에게 조소하라 미노스와 체세나 추기경

골육상쟁의 신화가 되풀이되는 이유 로물루스와 레무스

내가 나의 잔혹한 독재자였으니 팔라리스

대화와 소통이 실패하는 곳을 채우는 힘, 폭력 아가토클레스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오이디푸스

불복종, ‘자기만의 길’을 걸어 ‘모두의 길’을 터놓은 힘 안티고네

‘나도 모르는 나’, 그 미로 속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실타래 아리아드네

‘사유 불능’, 생각 없음에서 퍼져나가는 ‘일상의 악’ 다이달로스

이별, 닿는 순간 사라지는 이 미칠 듯한 부재 오르페우스

우주의 에너지를 불러들일 나만의 ‘탯줄’을 찾아서 안타이오스

고난, 교활함을 통찰로 발효시키는 삶의 여정 오디세우스

복수, 필요해서 너를 사랑한 자를 믿지 마라 메데이아

외눈과 백 개의 눈 사이, 불균형을 다스리는 통섭의 눈 아르고스와 폴리페모스

 

에필로그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나는 인간

찾아보기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83. 고약한 괴물이 있었다. 그러자 그 괴물을 잡아먹으려는 또 하나의 괴물인 아귀가 나타났다. 아귀는 피골이 상접하고 사자 갈기처럼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첫 번째 괴물이 놀라 시바Siva 신에게 달려가 자비를 구했다. 그러자 시바 신이 아귀에게 첫 번째 괴물을 잡아먹지 말라고 했다. 아귀가 항변했다.

‘그럼 나더러 어찌 하라는 것이오. 나는 배고파 죽겠소.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나는 이 괴물을 먹어야겠소.“ 그러자 시바 신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배가 고프면 너 자신을 먹어라.”

아귀는 발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차례로 먹기 시작했다. 결국 아귀가 있던 자리에는 얼국 하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시바 신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삶이다. 내 너를 ‘키르티무카Kirtimukha'라 부르리라. 누구도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내게로 올 수 없다. 키르티무카는 ’영광이 얼굴‘이라는 뜻이다.

 

84.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산다. 삶은 다른 것을 죽여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생명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이 고뇌를 단박에 끊어버린 인물이 바로 키르티무카인 것이다.

 

85. 키르티무카, 다른 것을 먹을 수 없어서 자신을 뜯어먹어야 했던 아귀,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자아라는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괴물, 그를 통하지 않고는 각성도 대오도 부처도 없다는 괴물.

 

85.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우주를 보려면,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중에서

 

85. 우리 삶의 목적은 세속의 성공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삶의 기쁨으로 순간순간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 죽어준 것들에게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다.

 

86. “너를 죽여 먹음으로써 내가 살아나는 오늘, 기쁨으로 오늘을 다시 한 번 살아보리가.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이 되어보리라.”

 

136. 물의 세 가지 자기경영 원칙

첫 번째, 배움은 차츰차츰 쌓여가는 것이며, 쌓여 넘쳐야 비로소 통달하게 된다는 말이다. 매일 하면 쌓인다. 쌓이면 넘는다. 그것이 매일의 힘이다. 흐르는 물은 매일 그렇게 조금씩 나아간다. 매일 읽고 매일 써라. 매일 하지 않으면 물은 대지의 어딘가에 스며들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결코 강을 이루지 못할 분 아니라 작은 개울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두 번째, 물은 오직 제 뜻 하나에만 복종하는 자유라는 이름의 오만이다. 세상의 인정을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라. 세상이 나에게 기대하도록 허락하지도 마라. 세상이 인정을 구하다 보면 정신은 비루해지고, 나의 자유는 얽매일 것이며, 나는 그들의 기대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스스로 행할 수 있도록 회초리를 들고 다그쳐야 한다.

 

세 번째 원칙, 흐르는 물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잡사에 무심하다. 오직 바다를 향한 열정밖에는 없다. 강물의 꿈은 바다다. 그 꿈을 잊은 적이 없다. 바다에 닿으려는 강의 꿈을 마음에 담아두자. 바다를 꿈꾸었다면 푸른 열정으로 흘러야 한다. 자나 깨나 바다를 그리워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잊어버리도록 한다.

그렇게 강물은 낮은 곳으로 향하는 하나의 원칙에 의지하여 한 번도 쉬지 않고 앞을 막는 구덩이를 메우고, 바다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평화 속에서 생을 마친다.

 

324. 굽이굽이 전개되는 인간 의지와 운명의 뒤엉킴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우주적 존재라는 각성을 가지고, 위대한 삶의 순간들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운명에 맞서 모험을 떠나고, 살아 있는 동안 매순간을 살아 있음의 감탄으로 채우려고 애쓸 때, 운명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 우리는 삶을 후회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삶다운 삶을 매순간 즐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때 자신의 삶이 유일한 이야기로 전환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로소 한 사람의 삶이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는 동물이다. 자신의 인생으로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지 고뇌하는 동물이다. 짐승처럼 살 수도 있고, 신처럼 살수도 있다. 그래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는 개념 체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계에서 온다”라고 말한다. 즉 신화는 마음이 거처하는 것, 체험에서 있는 곳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신화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너머 그 사실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

 

 

인상적이고 탁월한 착안점

인간의 모든 감정을 판도라의 상자에 담아서 하나씩 꺼내어 신화속의 이야기와 연결했다. 신화의 상징성들을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감정들을 비교하고 비유함으로써 신화독법을 했다.

신화이야기 그대로 날것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야기 너머의 상징과 비유들을 현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부정적 감정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할 것인지.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지에 대한 저자의 경험과 통찰력들을 담아냈다. 글을 읽은 독자들은 과거의 자신을 벗고 새로운 자아, 내면의 자아를 찾아 모험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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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4:10:15 *.58.97.136

오미경, 몸은 좀 어때?

 

판도라 상자 속에 들락날락...

지난주 지지난 주, 학교일에 과제수행에, 서울 나들이에....많이 힘들었지?

 

천안에서 서울까지 매번 왔다갔다....대단한 열정의 오미경.!

 

이제 북리뷰에 본격적으로 '별'마크가 등장하네.

별이 된 스승님이자 별이 되고 싶은 오로라의 상징..

 

나도 별을 쓰고 싶은데

에궁... 자기한테 뺏겼다.

 

자기야...

영양보충 많이 하여 힘내고

금요일에 볼 수 있으면 꼭 보자....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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