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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3일 03시 13분 등록

<북리뷰 2-1주차>

 

2013.6.02.

: 서 은 경

 

 

 

(No. 8)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 고려원 (2002)

 

 

 

 

 

 

                                                                              표지사진.jpg

                                                                                 @ 1992년 출간 @

 

 

 

 

 

 

신화의 힘은

현대를 살며 길을 잃고 헤매는

무수한 사람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옛 사람들의 격려의 어깨동무.

 

 

신화를 통해 우리는

과거, 그들의 삶을 엿본다.

신화는

현대의 우리에게

내면 성찰의 길을 안내해준다.

 

 

 

자신을 들여다 보라!

 

내 안에 있는

자기만의 천복을 찾고

하루하루를 생생하게 살아서 삶의 길을 가라.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미래의 누군가에게 어깨동무가 되어줄

또하나의 신화를 쓰는 것이다.

 

 

 

 

 

 

 

 

 

 

1. 작가 소개

 

 

 

 

  빌 모이어스 (Bill Moyers)

 빌 모이어스.jpg

 

 

 

*

1934년 출생. 미국의 유명 저널리스트이다. 78세인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 중이다. CBSPBS 방송에서 우리 시대의 저명한 사상가들을 초청해 세상의 문제를 함께 나누는 대담 프로를 진행,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시대의 고민들을 날카롭게 질문하고 알기 쉽게 풀어가는 시사 진행의 탁월함을 가진 언론인이다.

 

과거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을 10, 에미상을 30회 이상 수상한 경력이 있다. 자신이 민주당 성향의 진보주의자임을 숨기지 않는 그는 존 F. 케네디 행정부와 린든 B. 존슨 행정부 시절엔 정계에 투신해 백악관 공보비서관을 맡기도 했다. 최근 들어 그는, 미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거침없이 분석해 날카로운 평론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조셉캠벨.jpg

                                                                                                                  @ 대담 나누는 빌 모어스조셉 캠벨’ @

 

**

빌 모이어스는 1985년 이루어진 조셉 캠벨과의 대담 녹화를 정리하여 1992<신화의 힘>을 공동 출간했다. <신화의 힘>은 단순히 방송 대담 녹화 인터뷰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는 공동저자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과 8 여 년 간을 지적 교류를 하였고 <신화의 힘>에는 그들의 깊이 있는 대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조셉 캠벨 (Joseph Compbell)

 

 

 

 

                                   조셉 캡벨.jpg 

                                         (1904~ 1987)

 

 

조셉 캠벨!

인류의 역사적 시간과 세계 곳처의 공간, 인간 정신의 내면까지 종횡무진하며 종교학, 신화학에 깊은 흥미와 연구 성과를 남긴 비교종교학자이자 신화 연구의 대가. 동양신화, 서양신화, 원시신화, 창작신화, 영웅신화 등 신화의 전 분야를 아우르는 연구와 해석이 탁월하다. 사상적으로는 융의 심리학,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만의 문학 세계의 영향을 받았다.

 

 

*

1904326일 미국 뉴욕 화이트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부모님의 로마가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6살 때, 부친을 따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이드 웨스트 쇼(미국의 인디언 정복과정을 다룬 쇼)’를 본 후, 일생동안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관심이 그를 따라 다닌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버팔로 빌이 분장한 위풍당당한 연방 기병대장을 동경했지만, 캠벨은 오히려 토벌되는 인디언에 대해서 강한 흥미를 품었다. 그 때부터 그는 뉴욕자연사 박물관 등을 찾아가 인디언 문화에 관한 자료를 찾고, 인디언에 대한 책을 방대하게 읽는다.

 

그의 인문학적 흥미와는 무관하게,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다트머스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한다. 그러다가 1925, 다시 컬럼비아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 학사와 석사를 취득한다. 1927, 캠벨은 보다 깊은 공부를 위해 컬럼비아대학의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는 2년 동안 파리대학뮌헨대학에서 공부한다.

 

그리고 1929년에 미국으로 돌아와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만, 대학 측의 반대로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때마침 그 시기는 미국에 대공황이 찾아와 경제적 불황이 미국인들의 생활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시기였다. 대학에서 떠난 캠벨은 이후 5년 가까이 칩거생활을 한다. 1929년 뉴욕, 우드스톡의 허름한 오두막을 빌려 그는 하루 9~12시간의 독서와 사색, 습작하며 제 2의 도약기를 준비한다.

1934년에 캠벨은 미국의 명문 여자대학인 새러 로렌스 칼리지에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고, 1972년 퇴직할 때까지 38년 동안 재직한다. 그리고 1938년에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한다.

 

 

 

**

캠벨은 어려서부터의 관심사였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지속해 명성을 얻는다. 그의 대표작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4부작 <신의 가면>(1959-1968)을 비롯하여 <신화와 함께 하는 삶>(1972), <신화의 이미지>(1974), 그리고 최후의 역작인 총 25권의 <세계 신화 지도>(1983-1989) 등을 펴낸다.

 

그리고 조지프 캠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1988)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캠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한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조지프 캠벨은 19871030,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 아내인 진 에드먼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지프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하여 출간하고 있다.  ***

 

 

 

 

                                                                      * * * * *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문장들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신화의 힘> 고려원 (1992)

 

 

편집자 베티 플라우어즈의 말

 

대담자 빌 모이어스의 서문

[14]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17]

캠벨에게 영웅 역정의 끝은 영웅의 자기 확장이 아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21]

삶의 본질은 삶이라고 하는 것이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냥이라는 행위는 희생물을 바치는 제사가 되고, 사냥꾼은 그 동물이 회생하여 다시 한 번 제물이 되어 달라고 비는 마음으로, 죽은 동물의 영혼과 화합을 기도하는 일련의 몸짓을 보인다.

 

[23]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그는 이것을 <영원의 가면>이라고 이름한다.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31]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 살아있음의 황홀, 삶은 의미가 아니라 살아있음을 느끼는 이 몸둥아리다.’ 죽는 순간, 삶은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몸에서 느끼는 삶의 경험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33]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은 나의 스승이었어요.

--> 토마스 만<토니오 크뢰거>

 

[34]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 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인간이 지닌 불완전을 그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를 알지요?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바로 토마스 만의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 작가는 불완전한 인간의 상처를 더듬는 일을 하는 존재다. 작가는 가장 아래의, 저변을 향할 수 있어야 한다. 불완전의 미학. 불완전에로의 애정. 바로 인간미다.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다, 몸은 조그만데 머리는 터무니없이 크니,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일곱 난쟁이를 그려낸 월트 디즈니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는 우스꽝스런 강아지를 보세요.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 겁니다.

 

[35]

) 완전한 것은 보고 있으면 조금 싫증이 난다, 이 말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 선생님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고는 인간 사이에 있는 공통점이 신화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를 이해했습니다.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과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이 기나긴 삶의 길에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생 영원의 의미를 이해하고, 영원을 접하고, 신비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도움이 필요합니다.

 

[36]

) 그러니까 신화가 그 실마리라는 것이지요?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삶의 경험이라고 하기로 합시다. 마음은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답니다. 꽃의 의미를 무엇이지요? 선 이야기에는 꽃과 관련된 석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석가는 그저 꽃 한 송이를 쳐 듭니다. 그런데 좌중에 딱 한 사람이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석가를 향해 웃어 보입니다. 석가라는 분 자신은 '이렇게 해서 오신 분라고 불립니다. 여기에는 의미가 없어요.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것이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는 경험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37] (감동구절-결혼)

결혼을 예로 들어볼까요? 결혼이 뭐지요? 신화는 결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이랍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오랫동안 연애하던 사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아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예요. 상대를 잘못 짚은 거지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 내면적으로 통하는 제대로된 상대와 결혼하는 것. 영적 동일성.

 

)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38]

그건 결혼이 아니라니까요. 감히 말합니다만, 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실제의 둘은 둘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임을-깨닫게 됩니다.

 

[39]

제대로 된 관계라면, 자기네들의 관계를 상호 간의 인간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 희생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의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결혼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이랍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고 하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고 하는 제물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되는 것이랍니다.

--> 정말 맞는 말이다. 자아를 바쳐야... 관계를 위해 에고를 바치고 자기를 초월하는 것.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것. 바로 연금술적 단계’.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 수련이다.

 

[41]

뉴스를 한번 보시라는 겁니다. 문명화한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자행하는 파괴적이고 범죄적인 행위도 뉴스로 등장해 있을 겁니다.

 

) 젊은이들은 의례를 통하여 한 겨레 혹은 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의례를 베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사실입니다.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사춘기의 의례가 필요하다. 어린이의 몸은 더 이상 어린이의 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딸에게 사춘기 의례를 해 줘야 겠다. 그래야 아빠도 딸이 5살 꼬마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려나..... -.-!

--> 딸은 스스로 사춘기, 변한 존재라 말하고 아빠는 딸이 어린애로 남기를 바라는 것에서 오는 갈등. 이것을 어떻게 풀까?

 

[43]

재미있는 것은, 많은 교수들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이 삶의 가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학문(문화인류학, 언어학, 종교학 등을 말합니다)에는 전문화 경향이 뚜렷해 보입니다. 한 방면에서 어엿한 전문가가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한 전문학자가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알면 이런 경향이 있다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44]

나는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났어요.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 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낸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 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 카톨릭의 문제가 아니다. 단군왕검 신화 속에도 의례가 있고, 김금화씨의 무당 굿에도 의례가 있다. 한국에서도 신화 속의 의례에서 산다.

 

[45]

그러다가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버팔로 빌이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그걸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고 만 겁니다.

--> 인디언의 신화. 자연과 나게 하나인 신화. 단군왕검처럼 수직 상승의 신화가 아니라 평평한 수평선의 신화이다. 수직신화와 수평신화... 수평신화를 가진 문명은 수직신화를 가진 문명에 의해 멸해갔다. 수평신화가 더 정신적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을 좀더 알고 싶었지요. 우리 부모님은 너그러운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인디언에 관해 쓰여진 그 시절의 책을 사 볼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창세, 사망과 부활, 승천, 처녀 수태, 뭐 이런 건데...

 

푹 빠졌지요. 나에게는 이것이 바로 비교신화학에 입문한 계기였던 셈입니다.

--> 똑같은 모티프라고? 나는 수직과 수평으로 느꼈는데... 좀더 자세히 비교해 봐야겠다.

(알아봐야 할 과제)

 

[47]

신화적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 것을 벗어 던지고 새 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지요. 사람들은 그 친구를 보고 일어서는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입고 있는 법복, 그 친구가 맡고 있는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

 

[48]

군복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방기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를 섬기기 위해 사회적으로 조직된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백인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원시 미개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 많이 보아오셨을 테지요. 백인의 문명이 유입되면서 그들의 사회는 분열하고, 타락하고, 병들고 맙니다. 신화가 사라지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우리가 지켜야 할 신화. 신화는 문화이고 문명이다. 힘 센 문명이 늘 힘 약한 문명을 점령했다. 우리 민족의 신화. 우리가 지켜야 할 신화,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야 할 신화!!

 

[49]

신화는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 줍니다.

 

[52]

의식을 머리가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 여기는 것은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일부이지요. 데카르트파 사람들은 머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게 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체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 대륙의 합리주의.

 

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 속에 살다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숲속에는 식물의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담즙은 우리가 먹은 음식에, 우리 의식에 도움이 될 만한 게 들어있는지 없는지를 압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단순한 기계적 술어로 번역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 잠에서 깨어나면 제일 먼저 의식이 내게 들어온다. 그리고 주변의 소리가 들린다.

 

[53]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는 관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영적인 의식을 나누고자 하지만 이게 안 됩니다. 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끌어줍니다.

 

[54]

아니예요.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60]

) 그러니까 새로운 신화가 옛 이야기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이군요. 영화 <스타워즈>를 보면서, 자기는 권품 천사, 능품 천사와도 싸운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 제 막내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번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기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우리에게 어떤 수단이든지 다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과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말끔하게 정의해줄 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62]

그러니까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그 종교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그래요, 아주 잘 가지고 놀지요-나 같은 작자는 성인들의 경험에 견줄 수 있을만한 경험은 평생 해보지 못하고 말 겁니다.

 

[63]

) 하지만 위대한 성인들도 동초서초, 말하자면 여기저기에서 끌어다 쓰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여기에서 꾸어 오고, 저것은 저기에서 꾸어오고 해서 소프트웨어를 꾸미지 않았던가요?

 

[64]

그것을 일러 종교의 발전이라고 하지요. 그것은 성경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는 하느님도 많은 하느님 중 가장 힘이 센 하느님에 지나지 않았어요. 당시의 하느님은 어떤 동네의 종족신이었답니다. 그런데 6세기에 유태인들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문득 이 세계의 구주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성서의 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합니다.

 

옛 전통을 가꾸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것을 쇄신하는 길입니다. 구약 시대의 세계는 근동을 중심으로 겨우 몇 백 마일 되는 크기의 3층짜리 케이크에 지나지 않았어요. 당시 사람들 중에는 아즈텍 문화라는 게 있는 줄 안 사람은 물론 심지어 중국이 있는 줄 안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계가 바뀜에 따라 종교도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 우리는 지금도 종교를 변모시키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랬으면 좋겠지요만.....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에서 봅니다. 거기에서는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받고 합니다. ?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들은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를 열어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 고리는 폐쇄 회로인 것이지죠. 각기 우리야말로 선택된 백성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67]

가령,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에 가면,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에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는 한솥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신화가 무엇이지요? 사전적인 의미를 좇자면,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면 응당, 신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이어서 나와야 합니다. 신은 인간이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신화학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유파가 있습니다.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유럽의 신화학 역사를 보면 이 두 신화학 체계의 상호 작용이 눈에 띕니다. 대개의 겨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신화학 체계입니다. 반면 자연 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신화학인 것이 보통이지요.

 

[68]

그런데 성서적 전승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납니다.

--> 자연을 통제하고 자연을 악마로 간주하고 통제.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 인디언, 아프리카 신화.

 

[71]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혹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70](의문구절)

미합중국은 전쟁이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 세계 최초의 국가입니다.

--> 그 많은 인디언을 죽여놓고, 인디언의 땅을 뺏아놓고 이런 말이 나오는가?

 

이것(국장)을 제정한 양반들은 에덴의 낙원 이래의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2의적인 관심과 현세적 관심에서 초탈한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의 이성적인 마음이 비치는 맑은 거울에서 반사되는 빛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결과적으로 국장을 제정한 사람들에 대한 성서 하느님의 특별한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류의 가능성에서 온전하게 해방된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하느님에 대한 앎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계시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75]

둘이 있을 경우, 이것이 상호 관계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됩니다. 첫째는 이것이 저것을 지배하는 방법, 둘째는 저것을 지배하는 방법, 셋째는 조화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 마음이 진리를 떠나 있지 않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진리를 떠나있지 않은 사람은 마음을 가다듬기만 하면 곧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77]

캠벨 인도가 열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 건국 초기의 국부들이 종교의 편협성을 용납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겠고요?

 

그럼요. 그래서 그들은 에덴 동산 이후 인간이 타락했다는 교설을 용납하지 않았어요.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누구에게만 특별한 계시가 내리는 일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죠.

 

 

[80]

그러나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신화에는 네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81]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 됩니다.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 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83]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89]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 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 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칠흑같은 암흑에서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90]

가령 독수리와 뱀이 싸우는, 우리 주위에 아주 흔한 이미지를 하나 예로 들어봅시다. 뱀이라고 하는 것은 땅에 붙박여 사는 동물입니다. 독수리는 영적인 비상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이 두 동물의 싸움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늘 상 체험하는 갈등과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이지요, 이 양자가 하나가 되면 놀랍게도 의 이미지가 됩니다. 용이라면 날개 달린 큰 뱀이 아니던가요? 이 세계에 이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폴리네시아 신화를 읽건, 이로쿼이즈 인디언 신화를 읽건, 이집트 신화를 읽건 그 이미지는 동일해요. 어떤 신화에든 여기에 관련된 똑같은 문제가 등장합니다.

--> 아이러니, 음양의 조화....

 

[91]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트 파스키난스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93]

우리의 경험은 송두리째 우리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있어요. 프로이트는 굉장히 상세한 꿈도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는 말을 하고 있어요. 꿈은 우리들 자신에 대한 영적인 정보가 무진장하게 발현되는 현장입니다.

 

 

[95]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개인적인, 심층의 어두운 체험입니다.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 사회적 페르소나의 갈등... 부적응.... 고통과 번뇌의 시간.... 나는 이제 바닥 치고 올라왔다. 또다시 심연으로 들어갈지언정.... 나선형으로 돌며 영웅의 여정을 갈지니....

 

[105]

(성경에서) 왜 타락의 책임을 여자가 져야 되는 겁니까?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하는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106]

대극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비롯되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낙원의 동산이라고 하는 신화적인 꿈의 시간대에서 쫓겨납니다. 초시간대인 이 시간대는 시간이 없는 곳, 남성과 여성이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곳입니다. 이 낙원에서 남성과 여성은 그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남성과 여성이 사과를 먹습니다. 이 사과가 바로 대극에 관한 인식입니다. 이 사과를 먹음으로써 이 둘은 대극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지요.

 

여기에서 대극은 남녀뿐만이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은 하나의 대극에 지나지 않아요. 또하나의 대극은 인간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과 악마는 제 3의 대극입니다...... 이 대극을 인식하게 되자 선악의 분별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이브는 단지 이원성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을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기독교에서의 이브, 여자의 의미는 좀 더 연구 필요. 여러 종교 및 여러 신화와 비교 분석 필요.

[108]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109]

신 혹은 창조자가 모신인 종교에서는 이 세상이 모두 이 모신의 몸입니다. 몸 아닌 곳은 없습니다. 이 세상이 모신의 몸이어도 남성신이 없는 것은 아니고 어딘가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것은 한 원리의 두 측면에 불가합니다.

 

우리 시공의 장에 있는 만물은 이원적입니다. 신의 화신은 남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우리들 자신이 바로 신의 화신입니다.

 

[110]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두려움을 느꼈더랍니다.

 

[111]

그래서 이 자기가 부풀어, 둘로 나뉘어 각각 남성과 여성이 되어 가지고는 이 세상을 낳았더랍니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하는 체험이랍니다.

 

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산도라고 하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는 단계를 거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 딸이 처음 태어났을 때의 표정... 두려움에 찬 얼굴, 그리고 울음... 이름을 부르자.. 울음 멈추고 쫑긋.

 

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의 비롯됨입니다.

--> 정말로 이 지점에서 업식을 끊고 고통을 잊는 방법이 바로 , 자아를 버려야... 그래야 집착과 욕망이 녹아내리고 나는 너와 하나가 된다.

 

[112]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만치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 바탕되는 관념, 무의식의 원형.

 

[126]

민담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듣고 즐기는 겁니다. 그러나 신화는 영적인 교시를 위한 것이지요.

 

[127]

문명은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중세의 문명은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 십자가 위에서의 구속, 구속의 영광을 통하여 사람을 성사에 이르게 하는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132]

초월자는 모든 사유의 카테고리를 초월합니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은 카테고리입니다. ‘하느님라는 말은 모든 사유를 초월해 있는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라는 이 말 역시 사유를 통해서 생긴 것입니다.

--> 바로 칸트가 말하는 복합관념이다.

 

 

[138]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지요.

 

선악의 관념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관념이었는데 이게 유태교와 기독교로 흘러 들어왔어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 맡은 역할을 해 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고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세속성-상실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140]

영웅의 행동 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초월의 장을 나서면 대극의 장으로 들기 마련입니다. 인류는 선악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 정당함과 부당한, 이것과 저것, 빛과 어둠까지 알게 하는 지혜의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 시간의 장에 있는 모든 것은 이원적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그러하고,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상상력 속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한 쌍의 대극은 남성과 여성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영역과 전쟁의 영역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에로스(사랑)과 타나토스(죽음)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대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 내가 이것을 깨닫기 까지 지난 10년의 어둠의 시간이 있었는데.... 우리 딸에게는 조금 더 빨리 이것을 깨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 지혜로운 이야기와 경험으로.... (딸에게 주는 비법 책)

 

[143]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81]

그러나 그런 산은 도처에 있다.

이것은 진짜 신화적인 깨달음입니다. (블랙 엘크)는 국지적인 숭배상인 하아네이 산과, 세계의 산이라고 하는 암시적 의미를 확연하게 갈라 놓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바로 악시스 문디를 말합니다. ‘악시스 문디는 중심점,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을 말합니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런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 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

-->블랙엘크, 수우족 소년. 9살 때 이런 경험.

 

[182] (나는 이 문장이 좋아)

<신화적 홀로서기>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4. 희생과 천복

 

[185]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 그 생명수는 불교에서의 감로수이고.... 자기 스스로 깨달은 자...천상천하 유아독존

 

 

[194]

샤르뜨르 대성당은 걸어 다니면서, 앉아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면서 명상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성당은 보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 그런데도 계속해서 성당에 가시는지요?

 

그게 바로 신화에 속하는 일입니다.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신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 잡아 줍니다.

 

--> 나의 신화체험...

꿈 속에서 북한으로 넘어가기. 2때 본 타지마할의 저녁 노을, 그리고 7년 전 방문, 분노로 되지 않는 것을 배웠고..... 달라이 라마님은 나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께 하고 계시다. 에너지장의 연결.....

 

 

[197]

그러나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 그래서 나는 사회적 신화인 기독교 사상이 나와 맞지 않는다. 나는 자연과의 조화,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보는 문화에서 살았고 그러한 문화가 더 내게 맞다.

 

[198]

오늘날 예술가들이 맡은 일을 고대 사회에서는 샤만이 맡았던 것이군요. 하지만 우리가 건성으로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 같은데요?

 

우리 사회에서 사제들이 맡던 역할을 맡았었지요..

 

샤먼은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곳을 다녀온 사람들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 곳의 소식을 전해 줍니다.

--> 나 또한 나의 책,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에서 그곳 이야기를 전할거야.

지난 10여 년 동안 암흑 속에서 심리학책을 읽고 또 읽고.... 세상이 열리게 한 체험. 그리고 변경연... 나는 나를 믿어 의심치 않고 싶다. 나만의 이야기로 세상과 접선하는 신화를 만드는 거야. 마술을 걸자.

 

[201]

사회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

 

)인류의 농경화로 고대 사회의 재배 및 수확에서 맡게 되는 여성의 몫이 커짐에 따라 여신 숭배 종교가 대두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마력이 대지의 마력을 버티어 주게 된 거지요.

 

[209]

구세주 성격을 지닌 주인공의 죽음과 부활은 이런 전설의 공통적인 모티프로 등장하지요.

 

누구든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해요.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이 두 가지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216]

죽음의 신은 춤의 신인 동시에 섹스의 신이기도 하지요.

 

하이티의 부두 교 전승에 따르면 죽음의 신 게데는 동시에 섹스의 신이기도 해요.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는 사자의 신이자 사자의 심판자인 동시에 생명을 생성시키는 신이기도 해요. 이것은 죽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217] (감동구절)

젊은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반드시 죽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죽음없이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것이지요.

 

아이를 보거나 낳으면 곧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아이는 새 생명입니다. 앞 세대는 이제 생명의 보호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 차례를 맞는 것이군요.

 

탄생과 죽음 앞에서 우리가 깊은 심리적 연상에 빠져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 그래서 내가 행복하게 아이를 배고 기쁘게 아이를 낳고 난후, 내가 빠져 나가는 것 같은 깊은 우울감에 시달렸던가? 나는 죽고 엄마로 태어나는...

)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자기네들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그리스 신화 판도라의 상자, 사랑과 집착..... 삼국유사 수달의 뼈.....

 

 

쇼펜하우어 왈 <명편 에세이>에서

사심없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고뇌와 고통에 인류가 참가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자신을 제일 자연의 이법(理法)으로 여기는데 자기 보존을 포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 하와이의 팔리 절벽에서 어느 자살하려는 청년 구한 경찰관 사례.

 

[218]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거야 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219]

영웅이라는 것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 기독)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불교) 보살, 대자대비

[223](마음에 안드는 구절, 번역의 문제인가?)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겁니다.

--> 이건 좀.... 살아있음 경험의 절실히 하기 위해 전쟁을 좋아한다는 말은 너무도 섬뜩하다. 이 말을 독재자가 따서 쓰면 무서운 전쟁합리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질 듯. 켐벨이 서양인이라 그런가? 아무튼 무섭다.

 

 

[225]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단테의 <신곡> (감동 구절)

우리가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난다.

몸은 시들어 가는데, 삶의 주제들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세 마리의 괴물 만난다.

시적 통찰력의 화신 베르길리우스Virgil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을 무사히 통과하게 해줌.

이 지옥의 미궁이라는 곳은 자만과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

--> 단테를 만나고 싶다.... 마구 읽고 싶다.

220

그래서 나는, “그래. 조이스라는 양반이 진짜 하고 싶어하던 말이 이것이었구나.” 하고는 조이스 관련 간의록에다 <로마서> 1123절 이렇게 메모하는데! 그 때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229] (감동 대목)

다른 수피 신비주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금욕과 죽음을 통하여, 신비주의자에게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자기의 욕망을 반영시키는 일, 이것이 정통 신앙 사회의 기능이다.”

 

) 오늘날 이런 경험을 차단시키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민주주의지요. 민주주의가 뭡니까? 다수의 의견은 정치는 물론 사고에서도 효과적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는 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그러나 사고의 경우, 다수는 항상 그릅니다.

 

영적인 문제에 관한한 다수라는 것은 항상 먹을 것, 살 데, 자식들, 재물 이상의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요.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 읽어보셨습니까?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天福)을 좇아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230]

) 브롱크스빌의 음식점, 한 가족의 대화

 

엄마 왈

토마토 쥬스는 먹기 싫다는 데 뭘 그래요? 싫다는 건 하게 하지 말아요.”

 

아빠 왈

저 좋은 것만 하고 인생을 살 수는 없는 법이야. 저 좋은 것만 하고 세상을 살려고 했다가는 굶어죽어. 나를 봐! 나는 하고 싶은 일은 평생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어.”

 

나는 그 친구 말을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세상에, 여기에 바비트의 화신이 있었군.” 하고 중얼거렸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천복을 한 번도 좇아보지 못한고 산 셈입니다.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31]

<그림> 운명의 바퀴-프랑스 14세기

: 바퀴의 테를 잡고 돌기. 천복을 좇는 것.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이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혼 서약에도, 성할 대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 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그대가 나에게 줄 재물도 아니요, 그대가 나에게 줄 사회적 지위도 아닌 오직 그대만 좇으리다... 뭐 이런 대목이 있지요. 이게 바로 천복을 좇는 것입니다.

 

[232]

천복거리를 찾은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233]

프로베니우스의 책, 뉴욕 서적상 외상 편지. 4년 뒤 책값 갚음.

뉴욕의 우드스턱, 임대료20달러/1

 

[234]

천복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 어에서 배운 겁니다.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산스크리트 말3가지

-샤트sat / 치트cit / 아난다ananda

(존재) (의식) (천복or황홀)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35]

) 선생님은 천복을 좇는 그 순간 순간에, 혹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에게는 그러 때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캠벨 늘 하지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을 열릴 것이다.”

 

 

 

5. 영웅의 모험

 

[237]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 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조셉 캠벨

 

 

[238]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40]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겁입니다. 그럴 수 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니까요.

 

[241]

처녀에서 어머니가 되자면 변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모라는 것은 많은 위험을 거치는 굉장한 변화이지요.

 

삶을 미리 사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지요. 오토랑크는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를 자기가 속한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보호받아 마땅한 영욱적인 행위로 본다고 지적하고 있어요.

 

영웅의 시련, 시험, 난관의 의미

이 사람이 정말 영웅인지 아닌지, 이 사람이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 정말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지의 여부, 용기 지식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누군가가 예비해 놓은 어떤 관문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 나는 시련, 시험, 난관을 통과하고 내 스토리를 써서 세상과 교감하는 전업작가가 된다,.

 

[246]

영웅의 2가지 종류

1. 스스로 여행형

오디세우스

아테나 왈, “가서 아버지를 찾으라말합니다. 아버지를 찾는 일은 젊은 영웅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아버지를 찾는 일은 곧 자신의 이력, 자기의 이름, 자기의 근본을 찾은 일입니다.

 

2. 타의에 의한 여행형

군대 징집

그럴 생각 없는데도 생사의 갈림길 경험해야 하고 제복 입어야 하고 민간인 시절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 컬트신화-파에리 산의 여왕(변모의 기적)

영화---스타워즈(기술자 솔로,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를 구출하고 영웅됨)

 

[257]

신화는 내어 놓은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肉化)의 길일 겁니다.

 

[261]

원시인들의 입문의례

유아가 자아를 죽이고 성인으로 거듭나는 모티프와 관계가 있어요.

 

입문의 시련은 소녀에게 가해지는 것보다 소년에게 훨씬 가혹합니다. 왜냐하면 삶이라는 것이 여성을 편애하기 때문이지요. 소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해야 합니다.

 

초경을 경험하면 소녀는 벌써 어른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은 알고, 아기를 배고, 어머니가 되는 일 뿐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 됩니다. “아버지를 찾아 가라는 신화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는 신비의 아버지일수도 있고, 육신의 아버지일수도 있어요.

 

동화는 어린이들의 신화예요. 신황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신화가 있어요. 나이를 먹게 되면 튼튼한 신화가 필요해집니다.

 

[262]

하인리히 침머 박사

그는 인생은 꿈, 혹은 거품이라는, 다시 말해서(마야)라는 힌두교 관념을 강의하고 있었어요.

 

[265]

욕망, 성취, 후회... 즉 과거와 현재, 미래이지요.

 

[280]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감동구절)

천복을 찾아내되, 그 천복을 따르는 걸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

--> 아이들, 아이들 속에 갇혀있는 용을 깨우기.

6명의 아이들의 자기 성장, 천복 찾기 환타지.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바로 용.

하지만 나는 동양적 의미의-, 미르-용을 타고 지하수로 바다로 옥상 물탱크로

다닐거야.

[281]

우리들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람들은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보다 넣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 냅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282]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서구 문화권에서 용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중국의 용은 달라요. 중국의 용늪의 생명력인데, 때가 되면 괴성을 지르면서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인간에게 최상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물인데, 용은 바로 이 물.

 

그러나 서구 이야기에 나오는 용은 뭐든지 모아 자기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용은 자기의 암굴에서 금덩어리, 혹은 잡혀 온 처녀 같은 것을 지키키도 합니다. 그저 지키기만 하는 거지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지요. 우리는 이런 사람을 자린고비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서 나오는 삶이 없어요. 주는 삶이 없어요. 그저 남에게 빌붙어 돌면서도 죽자고 자기 삶의 방식에만 매달립니다.

--> 중국의 용, 미르... 상하이 도시를 흐리는 황포강, 미르. 상하이 고층 건물을 휘감으며 날아다니는 미르들...... 한국은 용에 대한 다른 관념이 있을까? 용에 대한 관념이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박혀 있을까? 서양동화를 많이 보아서 아이들의 사고가 참으로 많이 서양화 되었는데...그래도 기본적인 집단 무의식 속에 있으니 동양적인, 한국적인 바운더리 내에 있겠지? 난 초등 영어동화, 영어 유치원 등등의 영어책 위주의 사교육을 보면서 이 부분이 참으로 연구하고 싶다.

상하이 미르를 타고 건물 마다 뚫린 구멍을 통과하며 상하이 하늘을 날으고 싶다. ...상하이 그 무더웠던 그날들.... 상하이가 그립다.

 

[283]

융 왈(서양 입장에서 보면.....)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여자는 자기 용을 죽인 것이지요.

 

[284]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285](의문 부분)

서구인들은 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위대한 서구적 진실일 것이라 믿어요.

--> 이 이야기를 하면서 동양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을 켐벨은 한다. 그 예로서 동양의 대학교 수업과 학생들의 연구 방식과 서양의 방식을 비교하며 동양적인 방식을 좋지 않게(?) 설명한다. 나는 이 대목이 걸린다. 좀더 구체적이었으면 좋겠지만.. 이 책이 방송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고 서양인의 관점에서 자기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방송 시청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한계가 아닌가 싶다.

 

그대는 그대의 운명에 깨어 있는가라는 햄릿의 문제는 자기의 운명에 깨어 있지 못했다는 거지요. 햄릿은 운명을 너무 커서 도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운명이 햄릿을 다스려 버렸던 거지요.

 

[286]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인간이 사는 한 살이-유아기, 성인, 죽음-의 이미지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직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핑크스의 저주도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의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 아버지, 할머니의 죽음... 죽음에 대한 공포체험이었다... 또 뭐가 있을까.

 

[291]

욕망과 공포라고 하는 이 무서운 계곡을 벗어나야 성취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291]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3가지 변모:

1.낙타~어린아이, 소년(내게 짐을 실으라)

책임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과 수업 받는 복종의 시기.

2.사자~청년(용을 죽여라)

낙타가 사자로 변모, 등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사자의 힘은 그만큼 강해짐.

사자의 일, 용을 죽이는 것. 용의 이름은 그대의 미래

낙타인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사자인 청년은 이것을 벗어

던지기 때문에 까달음에 이를 수 있다.

3.다시 아이로 변모(그저 충동에 따라 살기)

 

[292]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가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낙타에게 그대의 미래는 낙타를 순치하는 수많은 강제(must)인 겁니다. 낙타는 이 순치를 통하여 인류의 동물에서 문명화한 인류의 동물로 변모합니다. 그러나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295]

주인공은 자기가 전혀 보호받을 수 없는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바야흐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95~298] (주목 민담)

이로쿼이즈 인디언의 민담 중 (여자가 구혼거절 민담 모티프/수중 여행 모티브)

 

...여자는 자기가 그 동안 물 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자가 물 속에 있었다는 것결혼을 통하여 여자가 합리적, 의식적인 세계에서 무의식의 강박 충동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299]

결국 개성이 의지로 통제가 가능한 영역에서 초개성적인 충동의 영역으로 함몰된 상태.

이것은 개인에 따라 통제가 가능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노인의 손을 잡고 물 밖으로 나온 여자는 물가에 서 있는, 그 노인과 똑같은 수많은 노인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천상계의 권능자들인 천둥의 신들이다.

 

여자는 물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 물 밖 역시 인간 세상은 아닙니다. 여자는 수많은 구혼자를 거절함으로써 초월적인 세계로 들어와 있는데, 물 밖 역시 여전히 초월적인 세계이기는 마찬가집니다. 이제부터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자기 힘의 부정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긍정적인 측면을 이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자가 천상계의 권능자들을 섬기다가, 이들을 이용하여 심연의 부정적인 권능자들을 쳐부수고는 소낙비를 타고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납니다.

--> “소낙비를 타고....” 재미있는 발상이다. 나의 집 이야기의 모티브는 무엇으로 해야 할까? 모티브잡기.

 

[299]

모험에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이 둘 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에요. 우리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길이 아닌, 우리의 길을 쫓고 있어요.

 

[304]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

그가 말하는 피난처, 바로 니르바나(해탈)’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조화롭고, 중심이 온전하고,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이 된다는 것이지요.

 

보살,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신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곧 삶이라는 인식을 통해서, 고통을 해소시킵니다.

[305]

고통에서 놓여 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 <끝나지 않은 길> 이 책의 글귀. 나는 고통이 삶이라는 것 받아들이고.....많이 울고 고통에 허우적거리다가.......아주 아주 뒤에 고상한 존재가 조금씩 되어갔다. ㅎㅎㅎ

 

고통의 원인은 당신에게 있다. 당신이 그 고통을 비롯되게 했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운명에의 사랑. 운명이 곧 우리의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306]

부처는 인생은 고해라고 했고 조이스는 인생이라는 게 우리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겨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프로이트 왈

-우리 삶이 오점투성이인 것은 다 부모 탓이다.

마르크스 왈

-우리 삶이 이렇게 열악한 것은 우리 사회의 상류계급 탓.

 

하지만 탓해야 할 것은 우리들 자신밖에 없어요. “까르마()‘라고 하는 인도의 개념이 아마 이 문제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겁니다. 우리 삶은 우리가 지은 업의 열매. 그러니까 우리 자신밖에는 탓할 것이 없다.

 

 

 

6. 조화여신의 은혜

 

우리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만치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 주기를 요구합니다.

 

[315] (아버지의 의미)

어머니는 여기에 있으니까요.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아버지로부터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이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영어에서는 아버지와 화해atonement'라는 말이 있어요.

이 화해는 곧 하나되기at-one-ment랍니다.

 

[316] (관심 이야기)

아버지 탐색이라는 모티프가 중요한 모티프로 떠오른 이유

여신숭배는 주로 농경 사회와 밀접한 관계, 대지와 아주 밀접. 만물을 낳고 기르는 에너지의 화신은 당연히 여성의 모습. 여신이 가장 중요한 신화의 이미지가 되는 곳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화권.

 

[320]

아기를 생성시키는 행위는 우주적인 행위.

 

기원전 4천년경, 농경문화권이 외침을 당함. 셈족 침략자들은 유목민, 인도 유럽계 민족은 가축 치는 농경민, 둘다 본디 수렵민족. 문화는 다분히 동물 지향적. 죽이는 민족.

 

그래서 호전적인 신들이 나오기 시작.

 

[324]

성서 히브리인들은 다른 민족을 공격할 때마다 예외없이 여신들을 쓸어 버립니다. 구약성서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가나안 여신은 혐오감바로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인도나 유럽계 신화에서는 볼 수 없는 겁니다. 인도 유럽계 신화를 보면 제우스는 여신들과 결혼합니다. 이로써 이 양자는 함께 신 노릇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성서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예이긴 하나, 우리 서구인들의 여성 경시 풍조는 다분히 성서적 사고의 산물일 겁니다.

 

[341]

어머니는 모든 자식을 고루 사랑합니다. 멍청한 자식도 사랑하고, 똑똑한 자식도 사랑하고, 말썽꾸러기도 사랑하고, 착한 자식도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자식의 성격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지요. 그래서 여성 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격합니다.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질서나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실제로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속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기능하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62]

여성은 이 남자가 자기와 사랑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테스트한 겁니다.

중세의 사랑놀음은 욕정의 노름이 아닌 겁니다.

 

[363] (감동 문구)

) 사랑은 내 앞에 있는 것이군요. 아모르는 내 앞에 있는 길이기 때문에 눈과 눈이....

 

바로 눈과 눈의 만남인 거지요. 그래서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 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은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

 

[364]

눈과 눈이 만나는 순간의 짜릿함, 그 이후에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사랑의 고통과 고뇌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중세의 창의 상징적인 이미지와 관련된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창에 상처를 입지요? 이 세상에 그 상처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그 창으로 상처를 문지르는 방법뿐이다...

 

[366]

<황무지>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번도 해 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대로만 하고 살았다.

 

[368]

개인주의가 꽃피는 유럽, 성배 전설이 있는 유럽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성배>

자비 혹은 연민의 표현, 다른 인간을 향한, 자연스러운 가슴의 열림.

 

융박사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중세의 낭만적인 전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

 

[377]

근사한 연애 관계, 그걸 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

 

성실한 태도가 분산되니까. 그러나 결혼 관계에 성실하게 임한다고 해서 이 성실 자체가 다른 데 대한 애정,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금지시키지는 않지요. 중세의 연애 이야기를 보면 어떤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도 다른 여성과의 관계, 자기에게 성실한 여성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많은 건, 그런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

 

 

[378]

사랑과 도덕성의 관계

사랑은 도덕성에 도전하지요.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대,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 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사랑은 곧 신의 임재입니다.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신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곧 신이 아닙니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사랑은 고통을 모른다고 했어요. 이 말은 트리스탄의 사랑 때문이라면 지옥의 고통도 기꺼이 받겠다는 말고 다를 것이 없어요.

 

<고린도 전서>

바울 왈,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딘다

 

)

페르시아 신화-악마는 하느님을 너무 사랑했기에 지옥으로 떨어졌다.

 

사탄=이기심

이기심 때문에 사탄이 인간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겁니다.

 

[381]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8.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384]

서구인의 사고방식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동양의 사고방식

원시적인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신들을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이자 에너지의 공급자.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니다. 신은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

 

[422]

(Aum)

우리 귀가 들을 수 있는 만상이 체현하는 우주 에너지의 소리.

태어난, 존재하게 되기, 사멸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감.

 

역자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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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책 소개와 평가

 

(1)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편집자 베티 플라우어즈의 말

대담자 빌 모이어스의 말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天福

5. 영웅의 모험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8. 영원의 가면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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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캠벨의 저서 <신화의 힘>은 미국의 P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1988)을 정리, 편집하여 만들었다. 구술 대담 형식 그대로 책으로 정리하여 엮어놓은 것이라서 책 내용의 구성미는 떨어진다.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어떤 것은 그 분량이 넘쳐나고 또 어떤 것은 독자의 궁금증에 비하여 답변이 아쉽게 끝나는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신화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8장의 소제목을 뽑아서 각 장의 주제에 대한 메시지는 아주 명확하다. 질문자 빌 모이어스는 이 책을 끌고 가는 마부다. 각 주제 별로 독자가 알고 싶은 궁금증을 콕 짚어서 질문한다. 그리고 조셉 캠벨은 그의 질문에 답을 하며 풍성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각종 사례들과 더불어 들려준다. 빌 모이어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으로 각 주제와 내용을 깊이 있게 이끌고 간다.

 

이 책은 TV 대담프로를 정리하여 만들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신화 분야에 대한 저명한 학자의 진지하고 생생한 성과물을 일반 시청자와 독자에게 보다 쉽게 전달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2) 감동적인 장과 절

 

*

1<신화와 현대 세계>에 나오는 결혼에 대한 그의 생각나의 결혼관에 대한 신뢰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어서 사랑, 결혼, 성에 대한 또 한 명의 멘토를 만난 느낌이었다. 1장의 결혼에 대한 그의 생각은 7<사랑과 결혼 이야기>에서 중세 연애 이야기의 예로 이어지면서 더욱 뚜렷한 메시지를 전한다.

 

 

[37] (감동내용-결혼)

결혼을 예로 들어볼까요? 결혼이 뭐지요? 신화는 결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이랍니다.

 

.......감히 말합니다만,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 희생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의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이랍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고 하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고 하는 제물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되는 것이랍니다.

 

 

 

 

**

그리고 2<내면으로의 여행>에서 들려주는 성경 속 타락 이야기와 삶의 대극 이야기가 흥미롭다. 나는 어려서부터 불교 집안에서 자랐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지식과 해석이 젬병이다. 로마카톨릭 집안 출신이자 동서양 신화연구가인 그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는 다른 어떤 성경해석보다 쉽고 이해가 잘 된다.

 

[106] (흥미내용-성경 속 대극)

대극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비롯되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낙원의 동산이라고 하는 신화적인 꿈의 시간대에서 쫓겨납니다. 초시간대인 이 시간대는 시간이 없는 곳, 남성과 여성이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을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의 비롯됨입니다.

 

 

***

이 외에도 5<영웅의 모험>에서 융의 심리학, 니체의 철학, 스핑크스 수수께기, 이로쿼이즈 인디언의 민담으로 풀어내는 영웅의 무의식, 자기를 깨고 나오는 자각 등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그리고 6<조화여신의 은혜>에 담긴 아버지 탐색과 아버지의 의미도 재미있게 읽었다.

 

이미 조셉 캡벨에 대한 신화 해석, 천복, 영웅 여정 등 그의 이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는 나는,  그가 들려주는 기독교 성경의 이야기’, ‘각종 신화와 민담이야기에 눈길이 갔다. 그리고 저명한 철학자, 심리학자, 소설가의 사상과 작품을 따 와서, 그의 신화 해석과 버물려 요리한 해석이 맛깔스럽니다.

 

 

 

 

 

 

 

(3) 내가 저자라면

 

나는 이 책이,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 신화를 아우르고 인간 삶의 핵심을 꿰뚫는 아주 명쾌한 해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는 점에서 빌 모이어스와 조셉 캠벨에게 감사하다.

 

*

하지만 이 책은 미국 방송의 미국인 시청자를 대상으로 방영되고 조셉 캠벨, 그가 미국인이고 서양인이라는 점에서 나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1<신화와 현대 세계>에서 그는 유럽의 신화학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두 개의 신화학의 체계를 설명한다.

 

 

[67]

대개의 겨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신화학 체계입니다. 반면 자연 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신화학인 것이 보통이지요.”

 

 

[68]

그런데 성서적 전승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납니다....”

 

 

**

그렇다. 자연 지향적인 신화와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미국 대륙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땅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들어선다. 그들은 친구를 도와 양식을 나눠주고 길을 안내해준 원주민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죽인다. 그리고 인디언들의 피가 뿌려진 그 땅 위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한다.

 

이러한 미국 모습에 조셉 캡벨도 서양인과 인디언 사이에 벌어지는 삶의 대극의 부조리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같은 장의 70쪽에서 미합중국 국장에 그려져 있는 피라미드 그림해석한다.

 

 

[70]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고 하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미합중국이 좋은 예입니다. 미합중국은 애초에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열세 개의 조그만 식민지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무시하고 오로지 상호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을 함께할 것을 결의하면서 태동합니다.

 

이때의 결의를 그대로 반영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국장입니다. 나는 이 국장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1달러짜리 지폐에 그려져 있으니까 늘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셈이지요. 이 국장은 미합중국을 성립시킨 이상주의를 그대로 증언합니다.

 

먼저 왼쪽의 피라미드를 보세요. 피라미드에 네 개의 측면이 있습니다......(중략)......그러니까 피라미드의 아랫 부분에서는 너와 내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면 네 개의 모서리는 하나가 되어 만나고 이 만나는 자리에는 활짝 열린 하느님의 눈이 있습니다.

 

모이어스) 이것을 제장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아니라 이성()의 신이었지요.

 

그렇지요. 미합중국은 전쟁이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 세계 최초의 국가입니다.

 

 

***

정말 오 마이 갓이다.

나는 위의 대목을 읽는 순간 조셉 캠벨의 한계(?)를 본 듯 의문이 들었다. 그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인간의 내면 정신의 세계를 여행하고 동서양의 신화를 연구한 학자로서의 위대함은 있지만, 그의 미합중국 성립에 대한 해석지구촌의 새로운 신화 필요에 대한 사고는 정말이지 섬뜩하다. 어찌해서 미국이 전쟁이 아닌이성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인가? 그것은 유럽에서 건너온 서양인들의 시각일 뿐이다.

 

조셉 캠벨이 해석했듯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내가 자연인지 자연이 나인지 구분하지 않고 내 안의 초월적인 에너지를 느끼며 사는 인디언들의 신화 세계는 위대하다. 그가 말하는 영웅의 여정 역시, 내 안의 천복을 발견하고 나의 자아를 초월하여 천상천하 유아독존( )‘의 느낌으로 일체 유심조( )’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조셉 캠벨이, “우리에게는 개인을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 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그런데, 그 예로 미합중국을 들어서 이야기 한 것은 그 역시 성서적 사회 지향적 신화학의 전승의 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란 다분히 미국적이고 서양인적인 신화 체계의 인물임을 절감한다.

 

나는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미국은 이성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인디언의 땅 위에 뿌려진 피 위에 세워진 나라라고. 서양인, 그리고 조셉 캠벨의 안중에는 어쩌면 삶 속에 함께 살아있는인디언은 없다. 그들에게 인디언은 단지 옛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속의 한 사례로서의 영웅일 뿐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가 이미 저 세상으로 갔으니 물어볼 수도 없고 이야기의 맥락을 다시 물어 볼 수도 없고 참으로 씁쓸하다. 나만의 삐딱 선을 탄 생각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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