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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0일 05시 15분 등록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9기 연구원 6주차(13.6.10)

신화와 인생(조지프캠벨, 갈라파고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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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소개 : 조셉캠벨

원명 Joseph Campbell

1904 3 26일 뉴욕 출생

1925년 콜럼비아 대학교 졸업

1927년 콜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석사과정 수료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1949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발표

1959~1967 <신의 가면> 1~4 권 집필

1987 10 31일 호놀룰루에서 사망

조셉 캠벨(Joseph Campbell.1904.3.26∼1987.10.30)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뉴욕 주 화이트플레인스 출생.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맨하탄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즐겨 찾았다. 그 중 특히 박물관 한켠에 있는 토템 기둥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문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캠벨은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이후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신화적 인물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영웅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다. 또한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큐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그는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4)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캠벨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로마가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관련서를 탐독했다.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1927년 캠벨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이후 2년 동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공부한다. 1929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만, 대학 측의 반대로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때마침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불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캠벨은 이후 5년 가까이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 그리고 습작에 몰두한다.

   1934년에 캠벨은 미국의 명문 여자대학인 새러 로렌스 칼리지에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고, 1972년 퇴직할 때까지 38년 동안 재직한다. 그리고 그 와중인 1938년에는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한다.

   캠벨은 어려서부터의 관심사였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지속해 명성을 얻는다. 그의 대표작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은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주저인 4부작 <신의 가면>(1959-1968)을 비롯하여 <신화와 함께 하는 삶>(1972), <신화의 이미지>(1974), 그리고 최후의 역작인 총 2 5권의 <세계신화지도>(1983-1989) 등을 펴냈다.

   하지만 조지프 캠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신화의 힘’(1988)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캠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조지프 캠벨은 1987 10 30,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 아내인 진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지프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신화와 인생

들어가는 말

1. 바로 이 장이라는 곳이 동양의 신비주의와 서양의 과학이 만나는 곳이다.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네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캠벨 철학의 근간이다. 물질이란 없다. 모든 것이 장이다. 그러한 구별과 제한은 단지 우리 마음 속에만 있을 뿐이다.(7)

⇒ ‘신화의 힘’ review 때 문뜩 적었던 글 귀가 떠오른다. ‘내 안에 신이 있고 신 안에 내가 있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이다.; 문장으로 듣고 읽고 생각하면 그럴 듯 한 말이지만, 이를 깨닫는 것이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수십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2. 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신들은 우리를 향해 열 걸음을 다가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11)

신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간절히 원해야 하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3. 그 한 걸음, 여정의 그 영웅적인 첫 걸음은 여러분의 울타리 바깥으로 또는 그 가장자리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는 가끔 심지어 도움을 받고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발걸음을 먼저 내딛어야만 한다. (11)

4. 영웅의 여정은 탄생에 비유되어 왔다. 처음에는 안전한 장소에서 따뜻하고 아늑한 상태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신호가 오고, 그것이 점점 강렬해지면,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지나도록 거기 머물러만 있으면 썩어버리게 된다. 피와 찢어짐과 고통이 없다면 새로운 생명도 있을 수 없다.

씨앗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그저 씨앗일 뿐이지만, 씨앗이 썩어 몸통이 문드러지면 여기에서 싹이 돋아나고 나무가 자라고 결국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죽음이 없이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5.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조지프는 종종 이렇게 묻고 나서 곧 스스로 답하곤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분이죠.”(11)

6.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 (12)

7. “너희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못한다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2)

8. “식물, 바위, , , 그 모두는 살아 있다. 그것들은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의 필요를 이해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할 무기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한 때를 알고, 그때가 되면 스스로를 드러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13)

9. 이 집과

                                이 의자와

                                                             이 페이지도 마찬가지리라.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10. 나는 조지프가 즐겨 인용하던 영지주의도마의 복음서한 구절을 기억한다. “장작을 쪼개면 그곳에 내가 있고, 돌을 들어올리면 그곳에 내가 있느니라.” (13)

초대교회가 겪어야 했던 또 하나의 주요 이단은 '영지주의(Gnosticism)'였다. 이들은 에비온파와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특징들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유대교 전통보다는 희랍 사상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물질을 만든 저급한 신으로 보았다. 그들은 구약과 신약의 단절성을 과도하게 강조하였고 그리스도의 인성에 타격을 줄 만큼 신성을 강조하였다. 선한 그리스도의 영이 악한 인간의 육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설명하는 기독론은 가현설(假現說)로 이해된다. 그리스도가 입은 육신은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실제로 인간의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육을 영의 감옥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영을 가두고 있는 육을 제어하고 영을 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으로 과도한 금욕주의를 적용하였다. 또 그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밀한 지식을 추구하였으며, 예수는 그 지식을 매개하는 중재자로 생각하였다. 구원의 방법으로서 지식을 중시하는 것은 영지주의에 희랍철학의 영향이 감지되는 부분이다. 영지주의는 결코 통일된 운동이 아니었으며, 지역과 지도자들에 따라서 다양한 양상을 띠는 종교적 혼합주의의 특징을 다분히 보여주었다. 기독교 신학과 삶의 양태 안에는 항상 영지주의적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으며, 영과 육을 구별하는 금욕주의적 특징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지주의 (기독교의 교파, 2006.11.30, ㈜살림출판사)

11. 여러분의 지금 모습 그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 누릴 특권이다.(19)

12. (인생의)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20)

인생에 의미가 없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왠지 모르게 다 부질없고 소용없다는 듯한 부정적인 느낌이 있다. 아니면 내가 색안경을 끼고 그렇게 보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영웅의 여정이라는 것도 개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초탈해서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인간이다. 그런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서라도 자신의 인생을 알차고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13.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라(21)

14.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21)

15. 현재의 형상에만 매달리면, 우리의 다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 (23)

16. 파괴가 있은 다음에 창조가 있다.(23)

17. 모든 과정은 우선 뭔가를 깨뜨리는 것과 연관된다. 생명이 움트기 위해서는 반드시 흙이 부서져야만 한다. 씨앗이 죽지 않는다면 식물이 생길 수 없다. 빵이란 결국 밀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24)

캠벨의 책을 접하고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면 죽음을 어렴풋이나마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먹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인데, 그저 대충대충 살 수 없지 않겠는가.

18. 이 세상은 우리의 짝이며, 우리 역시 이 세상의 짝이다.(25)

19.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 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 (27)

20.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21.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 여러분은 지난 날을 내팽개쳐라.

난 나의 지난 날 전부를 내팽개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지난 날 또한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으므로…. 대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지난 날의 나를 사로잡은 생각, 돌처럼 딱딱해져버린 나의 생각들을 내팽개치는 것이다. ‘어제의 나를 이룬 생각들을 파괴해버리면서 오늘의 새로운 나가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파괴 없이 탄생은 없다.

22. 여러분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31)

상당히 부담스럽고 걱정된다. 보통의 사람들이 다니는 길 , 명예, 나약한 양들을 사나운 늑대들로부터 지켜주는 단단한 울타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내가 속한 조직, 그 안에서의 진급, 승승장구, 나를 인정해주는 상사 을 걷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에서도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그저 내가 원하는대로 한다는 것 또한 꽤 부담스러운 과정과 시간들이다. 하지만, 남들의 길을 따라가면 내 길은 없고, 남들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 어려움을 알기에, 부담스럽고 막연하고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로, 내가 아는 선에서 그리고 내 방식대로 항해를 시작해야만 한다. , 이 항해가 얼토당토않는 식인종들이 살고 있는 해골섬으로 향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이도 배우고 시도하고 생각하는 치열한 자기학습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해골섬을 만나더라도 오디세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꿋꿋하게 살아남아야 진정 영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3. 여정의 목적은 공감이다. 

24. 여러분은 반드시 희열(bliss)을 느끼고 돌아와 그것을 통합시켜(서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35)

25.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되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37)

26. -시간의 장(수많은 대립자들이 있는)에서 달의 의식과 생명을 나타나내는-은 이브를 보고 그녀가 지루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뱀이 말했다. “이것 봐, 이 나무에는 아주 재미있는 게 있거든, 그 멍청한 노인네는 신경 쓰지 마. 그냥 한 입만 먹으면 진짜 뭔가를 알게 될 거라니까.”

27. 뱀으로 말하자면 동산에서도 가장 똑똑한 존재였다. 아담과 이브는 시간의 장 속으로 내던져졌다.

27. 처음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아트만(자아)만이 있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가 아닌 다른 존재는 있지를 않았다……. 그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것과 같은 크기가 되었다. 그 자신을 둘로 떨어지게 하였다. 거기에서 남편과 아내가 생겨났다. 성자 야자발키야도 몸은 과일()을 두 쪽으로 나눈 것 같이 절반이라 하였다. 나머지 절반은 대공인 여자로 채워지는 것이니, 그는 여자와 하나가 되었으며, 거기에서 인간이 나게 되었다…… 그녀는 암소가 되었다. 그는 수소가 되어 그녀와 결합하였으니, 거기에서 소가 나왔다. 그녀가 암말이 되자, 그는 수말이 되어 그녀와 결합하였다. 그녀가 암탕나귀가 되자, 그는 수탕나귀가 되어 그녀와 결합하였으니, 그로부터 단단한 발굽이 있는 짐승들이 태어났다. 그녀가 암염소가 되자, 그는 숫염소가 되었다. 그녀가 암양이 되자, 그는 숫양이 되어 그녀와 결합하였다. 그로부터 염소와 양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그는 개미에서부터 모든 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양성 양성의 성교를 통해 만들었다.[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44)

28. 결혼이란 자웅동체를 재건하는 것이다.(44)

29. 최초의 사람들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팔과 다리는 각각 네 개씩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생긴 두 얼굴이 서로 반대편을 향하여 붙은 채로 둥근 목 위에 달려 있었습니다. 귀는 네 개고 생식기는 둘이었지요.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이것들에서 미루어 짐작이 가 줄 압니다.” (45)

3.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최초의 인간들은 남성-남성 과 남성-여성 그리고 여성-여성의 세 종류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운 힘을 가졌다. 신들은 그들의 위력을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제우스는 그 인간들을 모두 두 동강 내기로 결심했다. 마치 사과를 절여서 저장하려고 할 때 절반으로 쪼개듯 말이다…… “그래서 본래의 몸이 갈라졌을 때, 그 반쪽은 각각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고 다시 한 몸이 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서로 목을 끌어안고 꼭 붙어 있으려고 하였으며, 또 서로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 이렇듯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먼 옛날부터 그들 속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본래의 몸뚱이 부분을 다시 한데 모아 둘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즉 서로 분리되어 있는 우리들 각자는 한 인간의 나머지 절반입니다. 마치 넙치처럼 한 쪽 면만 갖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의 다른 반쪽을 상상 찾는 것입니다.(46)

결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그리고 플라톤의 <향연>

47. 나는 한참 뒤에야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아주 은근한 표시를 했다. 곧 졸업할 그녀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한 것이었다. 바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의미심장한 것이기도 했다. (47) 대해

슈팽글러의 서구의 몰락읽어봐야겠다

48. 나 자신의 그런 투사(投射)의 배후에는 뭔가가 있었다.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서 이런 투사가 나온 것일까? 그 투사는 내 깊은 삶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 투사는 여러분 자신의 삶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다.

49. (남성의 경우) 투사 형성 요인은 아니마 또는 아니마로 표상되는 무의식이다. 꿈에서건 환상에서건, 공상에서건, 그녀(아니마)가 나타날 때는 인격화된 형태를 취하고, 따라서 그녀가 구현하는 요인들이 여성적 존재의 모든 뛰어난 특성들을 보유하고 있음을 예시한다. 그녀는 의식의 발명품이 아니라, 무의식의 자발적인 산물인 것이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의 대체 형상도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어머니의 이미지를 그토록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장엄한 성질들은 그런 아니마의 집합적 원형-모든 남자 아이들 속에 새로이 현현되는-으로부터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48)

50. 여러분의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는 이성異姓에 대한 반응으로 알 수 있다.(49)

51. ‘아가페자비요 신적이자 영적인 것이고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향한 것이며, ‘에로스는 욕정이요 자연적이자 육적인 것이고, ‘섹스의 충동,욕구, 기쁨이라는 것이다. …… ‘아모르는 오른쪽 길(승화시키는 영, 정신, 인간 공동체)도 아니며, 바로 앞에 있는  , 눈의 길이며 눈이 심장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51)

52. 사랑에 눈을 뜨는 순간, 어떤 것이 명백히 외부로부터 영원히 그의 영혼 속으로 옮겨 갔고, (조이스의 말이다.)(……) 그의 영혼은 그 부름을 받고 뛰었다. 살며, 과오를 범하며, 타락해 보고, 승리하고,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는 거다!”(52)

53. 사랑이 멀리 있으면 삶도 멀리 있다. 사랑은 정확히 삶만큼 강력하다.

54. 전념한다는 것은 범위를 좁히는 것이며, 그런 전념이 실패로 끝나면 여러분은 보다 넓은 (삶의) 기반으로 물러나, 그걸 부여잡기 위한 힘을 얻는 것이다. (54)

55. 여러분이 견뎌 내는 재난은 그 무엇이건 간에 여러분의 성격, 여러분의 됨됨이, 여러분의 삶을 향상시킨다. 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야말로 여러분 자신의 본성을 자발적으로 샘솟게 할 기회이다.(55)

56. 신화학이란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에서 인간 영혼의 경험, 행동, 성취에 관한 은유를 간직한 이미지들이 조합된 것이다.(57)

57. 여러분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아직 꼬마임을, 그리고 자신의 옛 경험이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인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중요한 테마 가운데 하나다.(57)

“제임스 조이스(사진)는 말년의 역작 ‘피네간의 경야’에 대해 100년 후에 대중화될 작품이라고 말했어요. 60여 개 언어, 6만여 단어로 이루어진 가히 인류의 문화유산이라 할 이 작품은 신조어 등 언어 유희가 특징인데 이 언어 유희는 현재 한국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조이스가 17년이라는 세월을 쏟아 부어 1939년 펴낸 ‘피네간의 경야’는 비록 책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그동안 ‘결코 읽을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요, 복잡한 미로’로 통할 만큼 일반인의 접근은 용이치 않았다. …… 그러나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20세기의 걸작이라면 ‘피네간의 경야’는 포스트 모던 시대인 21세기의 걸작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지요. 이 작품에 도전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젊어지는 기분이 들었지요.
……
‘율리시스’가 깨어있는 시간의 사건을 서술한 ‘낮의 책’인 반면 ‘피네간의 경야’는 잠자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밤의 책’이다. 4부로 이루어진 작품은 1938    3 21일 월요일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주인공인 이어위커라는 인물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인간의 출생, 결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 “조이스가 조어로 만든 제목에 주제가 들어있어요. ‘핀(fin)’은 불어로 ‘끝’이라는 뜻이고 ‘네간(negan)’은 어게인(again)이라는 뜻인데 끝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부활의식을 의미하지요. ‘웨이크(wake)’는 사람이 죽으면 밤샘을 하는 경야(
經夜)를 의미하는데 술을 사랑하는 벽돌공 피네간이 사다리에서 추락해 죽자 조문객들이 모여들어 떠들썩한 술판을 벌이지요. 그러다 피네간의 얼굴 위에 위스키가 엎질러졌을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부활해 조문객과 축제를 벌입니다. 조이스의 조국 아일랜드처럼 한국도 장례를 축제로 치르지 않습니까. 조이스는 조문객들이 나누는 인간의 원죄, 부부의 갈등, 형제의 다툼 등을 인간 보편적 문제로 승화시켜 세계 각국 언어로 써내려갔지요.……
작품에 사용된 60여 개 언어를 일일이 확인하기 위해 사전만 수십 개를 활용했다는 그는 “결국 이 작품은 인류사, 세계사를 한 권의 책으로 응축시킨 전무후무한 소설이자 꿈의 메커니즘을 이용해 시공간을 넘나든 상상력의 보고”라고 말했다.

- 국민일보(2012.11.15) 역자 김종건 명예교수의 인터뷰기사 발췌

58.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는 사회에 봉사한다.  이것은 종속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우리는 내면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해방이다.(58)

59. 힌두교에서 비슈누 신에 대한 종교는 곧 사랑의 종교다. 비슈누 식으로 사랑을 분석해 보면, 사랑에는 다섯 가지의 단계와 함께 그 각각의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이 하나씩 있다. 깨달음을 찾고 성취하는 모든 훈련은 이 경로의 에너지로부터 수행될 수 있다.

사랑의 첫 번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이것은 두려움의 종교. 여러분은 신의 존재에 대해 아직 자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것은 저기 있지만, 당신은 여기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사고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를 헌신할 만한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다.

두 번째 단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 우리가 즉 서구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이 두 번째 단계의 사랑의 모델은 친구 대 친구, 가령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라든지, 또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어떤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행동으로서 사랑을 경험할 때마다 여러분은 제1단계에서 벗어나 제2단계로 진입하는 셈이다.

세 번째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이것은 친구 대 친구의 사랑에 비해 훨씬 친밀하고 강력한 사랑이다. 이것은 성스러운 힘이 여러분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자각되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사랑의 네 번째 단계는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로, 여기서는 자웅동체의 또는다른 한쪽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신을 발견하고, 이제는 이 친밀하면서도 가장 오래 지속되는 종류의 관계 속에서도 신이 발견된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의 다섯 번째에 이르는데, 이것은 강박감에 사로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서는 오로지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된다. ‘르 포(광인)’, 즉 사랑에 몰두한 까닭에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62~64)

60.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해야 할 일들(예를들면 가사일)을 멋지고 작은 의식儀式으로 바꿀 수 있고, 인생은 그런 크고 작은 행사들 위에서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다. (66)]

 

61. 고결한 마음을 위해서는 결혼은 우선 반드시 영적이어야 하며, 물리적 완성은 그 다음이어야 한다.(67)

62. 책임이 사랑의 구성요소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책임감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68)

63. 내 생각에 결혼이란 상대방을 책임지고 사랑함으로써 상대방과 진정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69)

64. 반면 여러분의 삶이나, 심지어 여러분의 삶에 대한 사랑이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며, 그 상황이 변화될 수 없는 것이거나, 그렇게 헌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71)

65. 결혼은 여자가 주도하고 남자가 따라가는 것이다.(72)

66. 아내를 고르려면 그 여자의 어머니를 먼저 봐야 한다.(72)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찌 그것뿐이랴. 남자를 고를 때도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먼저 보아야 한다….. ^^:::

67. 여자의 삶(생명)샤크티(sakti), 즉 에너지이다. 남자는 그 에너지에 올라타 달리는 방법을 배워햐 하며, 삶을 향해 직접 지시해서는 안 된다…… 남자는 여자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72)]

68. 내 생각에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쩌면 성배가 아닐까 싶다. 성배는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방식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하나님을 넘어선다.(74)

69.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행동이 자신과 그 타인이 사실은 하나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데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타인과 별개라는 이차적인 자아의식 때문에 행동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토대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더 크고 더 참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 누군가의 생명을 목숨걸고 치키는 현상에 대하여…(77)

70.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 신화는 우주의 지도 또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가령 우리 아버지와 하늘과 어머니 대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화는 특정한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지지하며 정당화 한다.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십계명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화는 우리가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삶의 여러 단계를 통과하고 감당할 수 있게 해준다.(80)

71.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돈이 있건 없건 간에. …… 돈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돈을 잃을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83)

72 여러분이 단순히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해 학위과정을 밝고 있다면, 그런 열등감은 벗어던져라. 왜냐하면 열등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86)

73. 쇼펜하우어 말마따나, 여러분이(지금까지 지내 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그 삶 자체가 어떤 (일관적인) 줄거리를 이룬 듯 여겨질지 몰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그 과정을 겪어 온 과정은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뜻밖의 일 뒤에 또 뜻밖의 일이 뒤를 따르는 식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여러분은 비로소 그것이야말로 완벽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내 지론은,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에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90)

74. 사실 여러분이 경험하는 삶도 바로 그런 식이다. 그 무엇도 고정적인 것은 없으며, 그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가능성이며, 모든 것이 단서이며,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이로운 일이다.(97)

75. 내가 있던 학교는 아름다운 곳이었고 일자리도 훌륭했지만, 나는 뭔가 선로에서 이탈한 느낌이었다. 나는 곧바로 좌절감에 빠져들었다.(98)

⇒ 30년이 넘게 살면서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본 적이 얼마나 있을까 돌아보게 된다. 유아기와 아동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청소년기와 성인기에는 내 생각이 확립되고 그에 맞게 살아야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학은 그저 부모님의 권유에 맞춰 준비하였고, 그것도 성적이 안되, 그냥 성적에 맞춰 들어가게 됐다. ‘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한 시기는 아마도 입대 전후였을 것이고, 몇 번의 탈피를 거듭했지만 언제나 그 자리였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그런 느낌을 가진 자리…… 또 한번의 탈피를 하고 있는데, 과연 이 자리는 내 자리일까. 일상과 꿈 사이의 아찔한 줄타기는 시작되었다.

76.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주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99)

77. 성배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높은 영적 성취다. (103)

78. 무엇이 여러분을 영적 성취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가? 나는 내 삶이 언제 중심에서 멀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바로 내 삶의 진정한 중심잡기로부터 나를 탈선시키는 어떤 업적이나 시스템과의 관계에 내가 과도하게 집착할 때이다.(104)

79. 성배 전설에서 말하는 황무지란 뭔가(의례적으로) 마땅히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또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 역시 내게는 황무지이다. (104)

80.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105)

81. “결국 모든 삶은 전체의 실현, 즉 자아의 실현이다.”(107)

82. 반면 진정으로 창의적인 방법이 하나 있으니, 나는 이를 종교와 반대되는 예술의 방법, 다시 말해 이러한 권위 있는 질서를 전복시키는 방법이라고 지칭한다.(108)

83. 내 경험은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나는 내가 성배의 성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84. 영웅의 여정은 항상 부름으로 시작된다…… 모험에의 소명(부름)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소명에 따르면, 낮의 장벽을 통과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때,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 여러분은 문턱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111)

85.(그런 뒤) 여러분은 자신이 출발했던 바로 그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또 만드는 마지막 경험에 도달한다. 이 경험은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첫번째는 성스러운 결혼두번째는 아버지와의 화해세번째는 신격화’(영웅은 자기가 바로 그것, 즉 붓다의 이미지, 진리를 아는 자임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불사약 빼앗기로 앞에 열거한 것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깨달음이다.(115)

⇒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 1938년 스위스 화학자 알버트 호프만이 발명한 강력한 환각제.

“ LSD의 부적절한 사용은 나를 사회 문제를 야기시킨 사람으로 만들었다.”(알버트 호프만)

86.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116)

87.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귀환함으로써 이 세계에 은혜를 베풀게 되었는데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면,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 가능한 반응은 세가지이다. 첫 번째는 망할 것 같으니, 나는 다시 숲으로 들어가겠어. 은둔, 귀환의 거부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그들은 무엇을 원할까?” 여러분은 공무를 담당하게 되고, 보석을 포기하게 된다.)

88. 세 번째 가능성은 여러분이 되돌아온 그 영역 중에서 여러분이 주려는 것을 최소한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국면을 일부나마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맞추거나 그것에 비례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이른바 삶의  은혜로 가공하고 전달할 수단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감과 인내가 필요하다. 벽에 금 간 곳을 찾아낸 다음, 오로지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여러분의 보석을 주는 것이다.(117)

89.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는 거장들의 재능이네 어울리는 자유다. 니체는 우주적인 춤의신이 묵직하게 한 곳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쾌활하게, 가볍게, 이 위치에서 저 위치로 돌고 뛰어 다닌다고 주장했다.(119)

90. 융은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그 중 전반은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힌두인들이 말하듯 “’마르가(marga)’를 따라가서” – 여기서 마르가란 길, 즉 여러분이 겪은 인간 경험의 발자취를 말한다. – 여러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삶으로 가는 시기이다. 그러고 나서 완전한 해방이 찾아온다. 분노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완전한 해방이 찾아온다. 분노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121)

94. 삶의 첫 4분의 1은 학생의 삶이며, 그다음 4분의 1은 순종으로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기간에 해당된다……. 그 다음 4분의 1인 집주인의 삶이다. 책임 속으로 움직이는 darma , 즉 여러분이 사는 사회질서 이 법칙으로 표현된다. …… 전형적으로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니체가 구분한 단계에 따르면, 낙타는 짐을 잔뜩 싣고 나면 제 발로 일어나 사막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사자로 변신한다. 사자의 임무는 "너는 할지니"라는 이름의 용을 죽이는 것이다. 이 자기발견의 사자기 용을 죽이고 나면, 용 속에 묶여 있던 모든 에너지는 이제 여러분의 것이 된다 (122)

95. “원시 부족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거의 언제나 신비와 율법의 수호자이며, 그 부족의 문화적 유산은 이러한 신비와 율법 속에 표현되어 있다.” – (126)

⇒ 노년기는 황금기이며, 달콤한 시기이다. 진정한 성취의 시기이며, 열매를 맺는 시기이다.

96. 의례의 기능이란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의 의미에 집중케 하는 것뿐이다.(128)

97. (왜냐하면) 여자에게 시련은 갑자기 덮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피할 방도는 전혀 없다. 소녀가 처음으로 월경을 하게 되면, 그 소녀는 그제야 여자가 되는 것이다.(133)

98. 반면 남자는 문제를 찾아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처럼 소년은 남자임을 드러내야만한다. 반면 소녀는 여자임을 깨달아야만한다. 삼이 그녀를 압도하는 것이다. (134)

99. 언젠가 켄터키에서 이른바 자신의 것 일곱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제의에 참석했던 일을?...... 그 제의는 정말이지 효과를 발휘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참가자들은 각자의 마지막 보물을 포기하는 순간 모크샤(moksa)’, 즉 해방을 실제로 경험했다. (137)

100. 일찍이 나 자신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져 버림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포기한 보물을 향한 우리의 감정일 실제로 바꿔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집착 없이도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더욱 증대시킨 것이었다. 정말이지 놀라웠다.(138)

⇒ 남의 떡이 커보인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구가 더 커진다. 학창시절 사지선다 형 문제에서 정답을 찍었다가 왠지 오답이 정답인 것 같아 오답을 찍으면, 결국에는 틀려버리고 마는 것….. 재미있는 심리이다. 결국 사람들의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101.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이는 오직 뿌리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기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아니다.”노자(142)

102. 일본에는 이른바 하라키리(할복)’, 즉 의례적 자실로서는 최상급의 사례가 있는데, 이는 흥미로우면서도 섬세한 의식이다.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크게 실패한 사람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장소에서 하라키리를 실시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그를 불명예에서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147)

103. 내가 보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여기, 즉 여러분이 살아 있는 이 유일무이한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04.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은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149) 

105. 불교의 중심 사상은 집착 없는 공감이다.(151)

 

의식의 두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106. “요가란 마음속에서 일어난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다.”(155)

107. 요가의 사고방식은 바람을 가라앉히고 물을 다시 평온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면 그 물결은 빛과 그 그림자까지 깨뜨리고 흩어 놓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흐트러진 형대로 서로 부딪친다. 물이 잠잠해져서 침전물들이 깨끗이 가라앉고 수면이 맑게 빛나는 거울처럼 되어야 흔들리는 물결 위에 흩어졌던 그림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저 높은 곳의 구름과 맑은 하늘, 물가에 서 있는 나무의 그림자, 잠잠해진 맑은 물속 깊숙이 모래바닥과 물고기들의 모습까지도 그러고 나면 물결치던 수면에서 조각조각 왜곡된 파편들에 불과하던 것이 오직 하나의 이미지로 지각될 것이다.

108. (쿤달리니는) …… 또아리를 튼 암컷 뱀의 형상으로서, ‘징그럽고 불쾌한뱀이 아니라 섬세한봄질을 지닌 뱀 여신이며, 이 뱀은 움직임 없는 수면의 형태로 척추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미묘한 중심,(우리 몸의) 일곱 개의 고리 중 첫 번째 고리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요가의 목적은 이 뱀을 깨워서 대가리를 들게 만들고, 척추의 섬세한 신경이나 통로를 거쳐 (수행자의) 머리의 왕관에 있는 이른바 천 개의 꽃잎이 달린 연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 뱀 여왕은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가장 높은 연꽃의 중심으로 오르면서, 그 사이에 있는 다섯 개의 고리를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각각의 고리를 통해 수행자의 정신세계와 자아를 깨울 것이며,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근본적인 변형을 이루게 될 것이다.(157)

109. ‘차크라(chakra)’는 바퀴 라는 뜻이다.  차크라는 또한 연꽃이란 뜻의 파드마(Padma)’로도 불린다.

110. 1차크라인 물라다라, 뿌리 받침은 척추이 맨 밑에 위치 한다. 이 단계에서의 세계관은 분명한 사실들에 의해 통제되는 활력없는 유물론으로 이루어진다. 이 단계에서는 삶에 대한 어떤 열망도 없고, 확장해 나가려는 뚜렷한 충동도 없다. 2차크라는 스바디슈타나, 그녀의 특별한 집은 성기 단계에 있다. 이 단계에서 쿤달리니가 활발해지면, 삶의 전체 목표는 섹스에 있게 된다. 3 차크라인 마니푸라, 빛나는 보석의 도시는 배꼽의 여기서는 에너지가 폭력으로 바뀌며, 그 목적은 세계를 소모하고 지배하여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 그리고 자신의 소유로 바꾸는 것이다.  (힘을 향한 의지를 주장한 아들러의 학설) (158~159)

111. 낯은 단계에 있는 이 세 개의 차크라들은 소박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양상들로 이루어져 있다.(159)

112. 4 차크라인 아나하타는 부딪치지 않음이고, 심장의 높이에 있다. 이것은 종교적 삶의 시작이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깨달음이며, 그 이름은 곧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소리를 지칭한다. 그것은 에너지의 소리이며, 그 소리가 현시가 아닌 바로 우주다. 따라서 이는 사물보다 앞서는 소리이다. 심장 차크라는 영적 차원으로 가는 입니다.(161)

113. 5 차크라는 비슈다, 정화됨이며 후두 높이에 위치한다. 이것은 에너지가 유래하는 동물적 시스템을 물리치려는 영적 노력이 차크라이다.  6 차크라는 아나, 명령의 연꽃으로 미간에 위치해 있으며 이른바 천국의 차크라, 즉 육신을 갗춪 형체의 세계에서는 가장 높은 차크라이다. (162)

114. 쿤달리니가 제 6 차크라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바라본다. 이 하나님이 바로 형체를 지닌 브라흐만이다. 7 차크라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신을 지나서 초월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형체를 지니지 않는 브라흐만이다.(164)

⇒ <차크라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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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및 내용 발췌 http://bushytail.blog.me/50172276124, 칸쵸쵸님 블로그 >

 

117. 의식 그 자체는 이러한 어둠의 단계 아래에, 꿈의 이식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176)

118. “(무의식의 장에서) 사람은 더 이상 별개의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의 정신은 넓어지고, 인류의 정신은 융합된다.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통적인 인류의 무의식으로 융합되는 것이다.”(178)

119. 만물을 로 파악하며, 그것들의 삶을 깨닫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종교적인 명상에 함축되어 있는 최고의 진술이다.(185)

120. (에너지와 의식 이란 지칭에 대하여…) 결국 나는 이 두 가지 단어가 결국 똑 같은 것을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즉 하나뿐인 참뜻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을  점점 확신하게 된다.(186)

121. 내 생각에는 세 가지 상태의 존재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상태. 또 하나는 여러분이 잠시 멈춰서 그것에 관해 분석하고 생각하는 상태. 여러분이 그렇게 할 때, 자연은 살아 있는 대상이 아니다.  여러분이 분석을 하고 있는 동안, 여러분의 본성은 여러분을 재촉하지 않는다. 그렇게 분석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여러분은 이제 자연처럼 살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 이는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통제력, 더 많은 유연성을 지닌 상태다.(186)

122. 융은 영혼의 구조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를 외부 세계와 연결해주는 심리학적 기능 네 가지를 구분한 바 있다. 바로 감각, 사고, 감정, 직관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감각이란 뭔가가 존재함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사고란 그게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감정이란 그 가치를 우리에게 평가해 알려 주는 기능이다. 직관이란 우리가 그 대상이나 그 상황에 내재된 가능성을 예측하게 해 주는 기능이다. 따라서 감정은 가치에 대한 내부의 안내자이다. 하지만 그 판단은 보통 외부적인, 경험적인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188)

 

123. , 우주는 한 몽상가가 꾼 꿈이며, 그 꿈속에 모든 사람 역시 꿈을 꾸고 있다고 말이다.(쇼펜하우어) (189)

124. 인도에서는-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삶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며, 이것 역시 삶이 불완전하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 따라서 여러분은 차라리 불완전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감수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191~192)

125. (교토 사원이 주는 숭고함에 대해…) 따라서 힘과 공간 두 가지가 숭고함을 연출하며,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 자아는 위축된다. 이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여러분 자신이 더 작아질수록, 여러분은 더 많은 숭고함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193)

126.  그 신은 반드시 심리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따라서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이 저 바깥에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99)

127. 다시 말하자면, 우주의 법칙이 우리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부 우주도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국 외부의 우주와 내부의 우주는 똑 같은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우주로부터 태어났음을 실제로 아는데, 왜냐하면 은하계는 태초의 우주로부터 형성되었으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태양 역시 그 은하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구는 그 태양의 위성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는 그 지구에 있는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는 이 지구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지구의 기관이다. 우리의 눈은 바로 이 지구의 눈이고 우리의 지식은 이 지구의 지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바 이 지구는 우주의 산물이다.

128.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단 하나의 단어이며, 이는 사실상 부적절한 단어다. 이 단어는 항상 인격화를 내포하고 있으며, 누군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한 오로지 남성 인격화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제한된 어휘가 우리를 옭아매고, 우리를 묶어 두고 있는 것이다.(202)

특정 종교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정치(이념)와 마찬가지로 종교란 어떤 이에게 굉장히 민감한 부분 (심지어는 역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기 때문에 가타부타 뭐라 말하기는 뭐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종교에 대한 캠벨의 사상에 동의 한다. 결국 하나의 존쟁에 대해 우리가 다양하게 부르고 정의하고 믿고 있다는 것, 그리고 history와 같이, ‘하나님의 이미지 또한 남성중심의 문화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종교와 정치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나의 자세는 앞으로도 고민해봐야 부분이다.

129. 일본 나라에 가면 거대한 불상이 있다. 거기에 두 개의 무시무시한 형체가 수문장 격으로 서 있다. 이것들이 바로 케루빔(거룹)이다. 그 중 하나는 입을 열고 있고, 다른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다. 즉 대립자의 쌍인 것이다. 하나는 죽음의 두려움을 표상하고 다른 하나는 삶에 대한 욕망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유횩은 결코 붓다를 흔들지 못한다.(204)

130.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에는 자아를 놓아 버려라. (205)

131. 시간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단 한 번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에덴동산의 비밀을 찾아내야 한다. – 로렌 아이슬리(206)

132. 즉 광신자는 자기 마음을 청결히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오히려 세상을 청결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209)

133. 불교에서 삶의 목표란 니르바나(열반)적인 삶의 경험을 유지하는 것이다. (반면) 이슬람이란 바로 순종’,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과 숭배다.

134. 지옥이란 여러분의 삶의 경험의 구체화이며, 여러분이 집착하는 곳, 바로 황무지다. 지옥에 있으면 여러분은 어찌나 스스로에게 매여있는지, 은혜가 들어올 수 없다.(215)

135. 만약 지옥이 황무지라면, 연옥은 여러분이 고통의 장소를 떠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연옥 : 카톨릭 교리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살아 있는 동안 지은 죄를 씻고 천국으로 가기위해 일시적으로 머무른다고 믿는 장소. 개신교는 저승이 천국과 지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적 사고를 고수,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136.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219)

137 역사적 예수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와 동일시 했다. 이것은 붓다의 의식이다. 그는 자신의 자아로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서 살아간 것이다.(222)

138.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노력해야 할 일은 바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과 사랑이 보다 더 크고 더 큰 지평을 얻게 하는 것이다. 쿤달리니가 나타날 때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즉 그 몸이 점점 더 광휘와 의식으로 채워지는 것이다.(222)

139. 대죄란 본인이 충분히 숙고한 다음에 저지르는 죄이며, 완전한 본인의 의지로 저지르는 죄이다.(225)

140. 이제껏 자신(랜슬롯)이 교회로부터 받은 깨달음을 훨씬 능가하는 또 다른 깨달음을 그 귀네비어와의 관계를 통해 경험한 랜슬롯이었으니, 하긴 어떻게 감히 그 경험을 회개할수 있었겠는가?...... 즉 그는 간통을 뉘우칠 수도 없었고, 간통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배를 목격할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회개할 수 없는 랜슬롯, 결국 용서받을 수 없다)(228)

141. “하나님은 과거에도 인간이 되고 싶어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고 싶어 한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다. 이처럼 영속하는 성육신을 위해, 하나님은 이른바 성령- 삼위일체 가운데 제 3위격- 이 사람 안에 거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만약 세상 속에 거하는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바로 인간 속에서 찾으면 된다. 이것이 융이 내놓은 욥에게 보내는 회답의 핵심이다.(236)

142.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  여러분이 믿지 않는다면 나는 믿는다.”….. 내 믿음이 무엇이냐 하면, 어느 누구도 궁극의 환희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립자의 쌍을 초월한 것이므로,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경험했다면, 그곳에는 이미 어느 누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37)

이를 이해하는데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

143. 탄생 없이 당신이 무엇을 구하거나 파악한다면, 어떤 식으로 하든 그것은 소멸해 버릴 것이다.

144. 따라서 십자가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들이 우리에게로 내려온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통(십자가를 놓음, 즉 가로지름)인 것이다. (242)

145.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 그가 아버지에게 간 것, 성령, 이 모두는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어떤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할 일이었다.  영웅의 죽음과 부활은 오래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위한 모델이다.(246)

146. 동물계도 아니고, 식물계도 아니며, 천상의  기적도 아니고, 이제는  오로지 인간 자신만이  중대한 신비다. …… 하지만 인간은 로서가 아니라 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종족이나 인종이나 대륙이나 사회 계급이나 세기의 그 어떤 이상이나 일시적 제도조차도, 소진됨이 없고 다방면에 걸친 놀라운 신성한 존재, 즉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삶의 척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44)

147. 자기보존은 그저 삶의 제2법칙에 불과하다. 삶의 제1법칙은 여러분과 타인이 하나라는 것이다.(248)

148.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지 아니하니,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님이라.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250, 영지주의)

149. 기독교 신화를 영지주의적으로 읽으면 보편적인 뜻을 지니게 된다.(250)

150. 복음서는 재미있는 물건이다. 서로 맞지가 않기 때문이다. 불운하게도 무려 네 명이 썼고, 더군다나 제각기 다르게 썼기 때문이다.(254)

151.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니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쁨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본인이 알건 모르건 간에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나의 암브로시아의 샘은 어디일까?! 아직은 마련하지 못했다. 성스러운 공간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니르바나의 경지에 오른 것일까?! ……

152. 어른이 되고 나면, 여러분은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반드시 재발견해야 한다.(260)

153. 여러분의 삶이 놀이가 아니라면, 또는 여러분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다면, 그때는 그만 두도록 하라!(262)

154. 여러분은 언제든 필요할  때마다 그런 봉인 프로그램을 가져야만 한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하루에 한 번, 또는 한 시간에 한 번씩이라도 말이다……그것이 제공하는 바는 여러분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이 시간의 장으로부터 해방되는 여유공간이다.(263)

155. 성스러운 공간은 초월에 대해 투명한 공간이며, 그러한 공간 안에 있는 만물은 명상을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266)

156.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고, 모든 것이 성스러운 광휘라면,  어떻게  우리는 무지나 잔인함이나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과 나의 경우, 우리는 라고 합니다.”(271)

157.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말해 여러분은 항상 생각을 하고 있으며, 또한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여러분은 과연 어디 있는 것일까?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너머, 즉 여러분이자신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일별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가 비롯되는 원천의 장이다.(272)

158. (붓다의 이미지) 오히려 동양에서는 그런 존재 너머에 있는 것, 즉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그러나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한 어떤 존재, 의식 그리고 기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273)

사실, 나로선 가장 수긍이 가는 시각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서 정의하는데 무언가를 본 것 같이 구체적인 묘사와 언급이란게 말이 안되지 않는가…. 신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일종의 체험. ‘……’와 같은 그런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부분은 내가 건드리기 가장 꺼려하는 부분이다. 일단 내가 논리적으로 종교를 믿는 이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고, 나 또한 그럴 준비도 안되어 있고, 중요한건 종교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주제다. 내가 조금 비겁한가?! _

159. “길에서 붓다를 만나거든 그 붓다를 죽여라.” 이는 다시 말해서 불성에 관한 여러분의 개념이 그 정도로까지 구체화 되었다면, 그런 구체화를 취소하라는 이야기다. (274)

160.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의 신을 죽여야 한다.(274)

161. 불교 사상에서 두 가지 큰 줄기를 구분해야 한다.  첫 번째는 개인의 구원이라는 이상에 전념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도적인 자기수양을 제시한다. 두번 째는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이상을 제시함과 동시에 대중의 귀의와 보편적인 세속 참여라는 보다 발전된 원칙을 제시했다. 여기에 첫 번째는 히나야나, 둘 중 더 작은 배(hina) 또는 수레(yana)’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마하야나, 모든 사람이 탈 수 있는   (mahat) 배 또는 수레'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62 하지만, 마하야나의 등장과 함께 이른바 니르바나(열반)’삼사라’ – 존재의 순환, 즉 환생의 순환-간의 구분조차 이원론이며, 그 둘은 사실상 하나라는 관념이 대두했다. , ‘니르바나는 여기 있으며,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뜻이다. …… 왜냐하면 만물이 곧 붓다이기 때문이었다. ‘삼사라라는 단어는 시간의 흐름을 말하며, 오고 가는 모든 것들과 함께 디오니소스적 시간의 경과에 참여하는 것을 지칭한다. (279)

디오니소스적이란 몰아적(沒我的) 도취이고 열광이며 생성의 근원에 있는 깊은 에너지이다. 그와 반대로 아폴론적은 개체화의 원리에 근거를 두는 관조(觀照)이며, 꿈을 미적인 가상(假象)으로서 영원화하는 것이다. 니체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나온 대립개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디오니소스적 (파퓰러음악용어사전, 클래식음악용어사전, 2002.1.28, 삼호뮤직)

163. 아발로키테시바라 – ‘자비를 품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 ///. 아키발로키테시바라는 종종 두 명의 여성 형상을 옆에 대동하고 나타나는 남성으로 그려지는데 타라(tara)’라고 하는 그 여성들은 보디사트바의 눈에 흐르는 자비의 눈물을 의인화 한 것이다. …… 즉 타라는 이 세계에 자비를 흩뿌리는데, 내가 볼 때 이것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164. 보디사트바(보살)는 가르침을 전할 때 자신의 말을 듣는 자들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지혜의 자아에게 전해져 그 자아를 깨우고 삶으로 불러낸다.(282)

165. “여러분 모두의 길은 (인간의) 이식과 깨달음을 확장하는 데 있어 타당한 길입니다.” …… “ 계속 명상하십시요. 즉각적인 깨달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정신은 천천히 깨달음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283)

166. 보디사트바 만주스리(문수보살)은 이른바 판별의 검을 들고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판별이란 유한과 영원 간의 판별과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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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 image from http://blog.daum.net/mtkoi55/530 >

영원은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여러분이 뭔가를 욕망하고 뭔가를 두려워할 때, 그것이 바로 유한이다. 유한과 영원을 판별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의 주위를 밀폐 봉인하게 되면, 여러분은 스스로 안에서 변하지 않는 정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그 정적인 장소는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 않고 굳건히 타오르는 불길이다.(285)

167. 하지만 여러분이 그 정점을 잃는다면, 여러분에게는 오로지 자기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된다…… 니체는 우리가 반드시 자기 힘의 4분의 3만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판별이다(286)

168. 하지만 그 두 가지(니르바나 와 삼사라)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몰두함 없이도 자신의 정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똑 같은 세상을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두가지를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다.(287)

169. 스리 라마리슈나는 칼리 여신에게 귀의했다.  칼리라는 단어는 검다는 뜻과 시간이라는 뜻 모두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문물이 산출되고 또 돌아가는 수수께끼의 검은 심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칼리다.

본명은 가다다르 카토파댜야(Gadādhar Chattopādhyāya). 벵골주()의 브라만 집안에서 출생. 천성이 쾌활하여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었고, 유년시절부터 종교적인 신비감이나 무아(無我)상태에 빠져들곤 하였다고 한다. 9세에 브라만의 상징인 신성한 끈을 받고 의례(儀禮)를 주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1855년 캘커타 교외에 칼리 여신을 모시는 새 사원이 건립되자 그곳의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형식적인 성직에 만족하지 않고 3년간을 고행했다. 1864년 말 토타프리라는 수행자의 설교에 큰 감화를 받고는 자기 이름을 라마크리슈나로 고치고 행자(行者) 생활로 들어갔다. 1866년 말에는 이슬람교, 1874 11월에는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각각 그 계통의 스승에게 배우고 체험한 후, 모든 종교에 똑같은 진실성이 있음을 깨달았다. 1875년경 케샤브 찬드라 센이 그에 관한 이야기를 발표한 뒤부터 캘커타 상류사회의 남녀가 앞을 다투어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몰려왔다. 저서는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어록(語錄)이 출간되었다. M.뮐러와 로망 롤랑이 그에 관한 저술을 썼으며, A.헉슬리는 어록의 영역본 《라마크리슈   나의 복음》에 서문을 썼다. 그는 신과의 일체감으로 자기를 신의 화신이라 생각하였고, 세계의 다양성을 결코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제자들은 인도 각지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각국과 영국 ·미국 ·프랑스 및 남아메리카 등지에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설립, 그의 종교를 계승하였는데, 그 중 특히 비베카난다는 스승의 종교사상을 널리 소개하여 세계 여러 곳에 전파시켰다. 라마크리슈나의 업적은 힌두교의 전통을 현대에 살려 인도 사람들의 자신감을 고취시킴과 동시에 모든 종교의 조화를 설파, 인류협동의 이상을 드높였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의가 부여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마크리슈나 [Ramakrishna Paramahansa]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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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여신, image from google>

170. 어떠한 관념도, 어떠한 개념도, 어떠한 이름도 최후의 장애물이다. 어떠한 종료가 됐든 그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는 사람도 최후의 장애물이다……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시적인 것은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영원한 것은 단지 은유에 불과하다.” …… ‘모든 것에는 하나님, 천국, 지옥, 그 전체가 포함된다. 따라서 여러분이 천국에 가기 위해 살아가는 한, 여러분은 그런 정점을 찾지 못할 것이다.(288)

171.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290)

172. 여러분은 사물을 다르게 생각하기를 포기하게 되고, 그리하여 여러분은 이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그것이다.’하고 깨닫게 된다. 여러분은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라고 우선 말함으로써 이것은 그것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294)

173. “신을 예배하려는 자는 우선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할지니….” 탄트라의 격언(294)

174. 하늘나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깨달음 속에 있다. 우리 이웃 속에 , 적들 속에, 자신 속에 편재하는 신들의 현존에 관한 깨달음 속에.(296)

175. 따라서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 즉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바의 의미는 여러분의 합리 체계를 떠나, 항상 만물 사이로 움직여 나가는 놀라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리라.(297)

176. (매번 약속에 늦는 아내 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느끼게 된) 심리학적 변화, 이처럼 이전까지만 해도 애써 견뎌 내야 했던 것을 이제는 알고,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299)

177. 모든 종교 훈련의 목표는 심리학적 변화다. …… 여기서의 핵심문제는 여러분의 마음에서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300)

178. 만약 여러분이 사회적 의무를 수행한다면, 그것을 결코 여러분의행위가 아니다. 다만 사회가 그런 의무를 부과했을 뿐이며, 여러분은 스스로의 삶에서 차단시킨 것이다.

179. 의무는 여러분의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남들이 여러분에게 부과할 분이다. 의무는 곧 다르마다. 다시 말해 다르마는 사회적 다르마로 이해해야 한다.(302)

180. 선과 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어느 편을 드는가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다.(302)

181. (5백마리의 물고기를 살리겠다고 놓아준 뒤 펠리컨들이 몰려들어 물고기를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결국 펠리컨에게 좋은 일은 피라미에게 나쁜 일이었고, 그리하여 승려는 자기도 모르게 어느 한쪽의 편을 들게 된 셈이었다. 그는 중도를 지키지 못했다. (303)

182.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 없이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슬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304)

나는 이 시각에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관점을 바꿔 슬픔에서 탈출할 수는 있겠지만, 사회적 의무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자유 (또는 니르바나)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사회적인 약속과 법칙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이와 같은 모든 것이 초탈한 심리학적 변화를 겪는다면 지금의 사회의 모습은 마치 보디사트바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차지 않을까……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듯하다. 모든 사람이 열반의 경지에 오를 수도 없으면 오를 필요도 없다는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183.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304)

184. 오히려 우리(서양)자아 행동을 위한 가치판단과 결정을  내리는-가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프로이트는 자아(에고)현실 원칙이라고 일컬었다. 이것은 여러분이 현실’(진실이 아니라)과 연관을 맺도록 해 준다. 다시 말 해 여러분의 삶의 개별적 환경, 그리고 그런 환경과 여러분의 관계가 바로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서양문화에서는 자아, 즉 가치평가 원칙이 발달했다. 가령 어머니가 이렇게 묻는다. “어떤 아이스크림 먹을래, 자니? 딸기? 아니면 바닐라?” “바닐라요그러면 아이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얻는다.

185. 반면 동양에서는 이와 반대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시킨 일만 하게 되며, 오로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앞에 놓아 준 것만을 갖게 된다……. 결국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자아의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아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자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개인적 가치평가라는 것도 없다. (307)

부정적으로 보면 동양을 비하하는 것으로까지 보일 정도의 생각이다. 집단은 있고 개인은 없다는 식이다. 저자가 인종차별적 성향(또는 편견)이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이는 오래된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전 시각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맞을 수도 있는 생각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동양도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의식 또한 높아졌다. 과거처럼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국가나 사회, 가족 등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이 같은 생각은 결국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저자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이런 생각을 재정립했을지도 모르겠다.

186.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지만, 동양에서 벌어지는 모든 충돌은 초자아와 이드 간의 충돌이다. 여기에서 자아 원칙이라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역시 인정할 수 없다.

187. 지혜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두 가지 모두 세상의 견해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310)

188. 힌두교에서는 모든 힘, 샤크티(에너지,위대한 여성의 본질이자 이름)’가 여성형이다. 여성은 그 힘의 전체성을 표상하며, 남성은 그 여성의 대행자로 묘사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느끼는 힘 융 식으로 말하자면 아니무스-은 사실상 여성의 힘이 특화된 상태, 다시 말해 그 힘이 응용된 상태인 것 같다.(312)

189. 힌두교에서는 태양이 여성이고 달이 남성이다. 달은 태양 속에서 태어나며 태양 속에서 죽으며, 매달 태양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 비록 인도에서는 남성지향적 행동 체계에 대한 예배가 직접 시바에게 향한 것이지만, 이는 사실상 칼리 여신을 향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가 결국 그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인도에서는 칼리가 가장 위대한 신이다.

문득 든 생각. 힌두교에서의 에너지는 샤크티, 즉 여성의 에너지이며, 모든 예배는 칼리여신을 향한 것이라고 한다면…… 현재 인도에서 자행되고 있는 남존여비와 같은 관습적 문화적 현상은 어찌 설명될 수 있는가. 상당히 모순적 아닌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서, 나는 이 책에  대한 몰입도를 잃고 있다. 과연 이러한 모든 설명들이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 현실이 참혹함 그 자체라면 이 모든 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http://www.inewspeople.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92 <= 인도여성 인권에 대한 기사

 

190. 힌두교의 입장에서는 여성이 샤크티’, 즉 척추를 따라 올라오는 뱀의 힘이며 삶의 에너지의 본질이다. (316)

191. 그녀의 자궁은 공간의 장이며, 그녀의 심장은 시간의 맥박이고, 그녀의 생은 우주적 꿈을 반영하는 우리들  각자의 삶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피안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의 매혹하는 힘이다. 성서로 치자면 그녀는 이브이다. 인류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 즉 바위, 나무, 짐승, 새와 물고기, 태양과 달과 별들의 어머니로 확장된 이브라고 할 수 있다.(317)

192. 남성 = 사회의 질서, 여성 = 자연의 질서 / 남성의 일은 생명과 관계하는 것이다. 여성의 일은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319)

193.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자체다.” 여성은 그것 자체이고, 남성은 여성의 역사를 만들고 역사 그 자체인 곳의 장을 꾸며 줄 뿐이다. (320)

194. “여성의 여행은 없습니까?” (326)

195. 여성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생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삶을 산출하며, 그러나 나서 말년의 단계에 가서는 삶을 육성하고 삶을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말년에 접어든 남자는 말년에 접어든 여자에 비해 훨씬 내향적이다.(326)

196. 내가 알기로는 여성들이 이처럼 비인습적인 삶의 방식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분야는 물론 학계를 제외한다면 예술계 뿐이다…… 그들의 성취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반면, 예술가의 성취는 오히려 과정을 중요시하므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328)

197. 문학을 통틀어 여성의 모험을 다른 작품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여성은 이미그것이며, 여성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각하느냐 뿐이기 때문이다(329)

198. 즉 여성에게 주어진 본성 속에는 여성이 다루어야 할 훨씬 더 무거운 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녀에게 생리가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되며, 그때부터 소녀는 여성이 된다.(330)

199. 어머니는 그런 식의 어떤 성취를 토대로 하여 자녀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표상할 뿐이다. (334)

200. 베누스(아프로디테)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 제우스와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아프로디테 판데미아는 세속적 사랑의 여신이며, 크로노스에 의해 잘린 우라노스 성기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 우라니아는 순수한 사랑의 여신이다.(448)

201. (그러므로)나는 주요한 여성의 힘과 미덕이 바로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이기적 고립의 결여, 다시 말해 참여에의 포용이다. 우리는 모두의 존재 기반이기도 한 보편적 공통성에 대한 포용성이 바로 공감이다. 자발적 감정을 인식하고, 포용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힘이다.(338)

202. 그 모두가 사랑일 때, 세상 모두는 반드시 사랑이어야만 한다. 무엇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342)

 

의식의 세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203. 환영 幻影 이라는 뜻을 지닌 인도의 마야(maya)’는 환영을 창조하는 힘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가상 둘 다와 관련된다…. 마야는 매혹이자, 매력, 특히 여성적 매력으로 경험된다. …...” 마냐의 모든 형태 중에서 여성의 형태가 가장 훌륭하다.”(345)

204. 우주 기원의 본질이자 여성성과 개인성의 본질인 마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힘을 지녔다고 한다. 1. 차단하는 힘, 2. 투사하는 힘, 3. 드러내 보이는 힘.

205. 예술의 첫 번째 기능은, 경험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동산 문의 수문장들 욕망과 두려움 을 지나쳐 그 안에 위치한 깨달은 삶의 나무까지 데려가는 것이다. (348)

206. 예술은 곧 변모의 경험이다.(349)

207. 삶의 목표는 환희다.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351)

208. 조이스는 이른바 적절한 예술부적절한 예술을 구분한다. ‘적절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실제로 예술에 속하는 바를 의미한다. 반면 부적절한 예술이라는 것은 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봉사하는 예술을 말한다. 적절한 예술은 정적인 것이며, 따라서 심미적으로 도취되는 반면, 부적절한 예술은 활동적이며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여러분을 욕망으로, 아니면 두려움과 혐오로 이끈다는 의미다(352)

209. 조이스는 적절한 예술의 도움을 받아 아퀴나스에게도 나아간다. 그는 라틴어를 사용해서 심미적 대상이 세가지 순간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인테그리타스(integritas)’, ‘콘소난티아(consonantia)’, 그리고 클라리타스(claritas)’ 이다. ( 순서대로 전일성 / 조화 / ) (353)

 

210. 삶의 크나큰 복잡성을 이해하고, 우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맨 처음 배워야 할 말은 시너지(상승작용)이다. ‘시너지는 전체 체계의 행동이며, 그 각 부분의 행동에 의해서는 예측되지 않는다. …… ‘시너지와 에너지의 관계란 곧 통합과 분화의 관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354)

211. 왜냐하면 꽃잎들은 어떤 식으로건 서로에 대해 개별적인 것으로, 또는 서로에 대해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 전체 체계는 붓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저 일어나는, 그렇게 오는(타타가타, tatagata)’것 뿐이다. (프라티탸 사무파다  = 의존적 기인 또는 상호적 발생)(355)

212. “예술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다.”(358) 하나는 자연, 즉 저 바깥에 있는 세계고, 또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본성)의 세계다.

213. 예술의 기능이란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소진 가능한 것을 열어젖힘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광휘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과 똑 같은 광휘- 가 환히 비치게 하는 것이다. (358)

 

214. 자아가 해체되면 신경망에는 오로지 생명,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만이 남게 된다. 중국과 일본의 선사들은 이 상태를 '무심(無心)'의 경지라고 불렀다. 이에 해당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용어에는 '해방'을 뜻하는 모크샤, 깨달음을 뜻하는 보디, 그리고 욕망의 바람을 초월한 경지를 뜻하는 니르바나가 있다. 조이스는 "미적 쾌감으로 된 침묵의 밝은 정지상태"에 대하여 말하는데, 그 상태에서는 심미적 이미지의 선명한 광휘가 파악된다. 그리고 이때 마음은 이미지의 총체성에 사로 잡히고, 조화에 매혹 당한다. "그 신비로운 순간의 마음을 셸리는 시들어 가는 석탄불에다 아름답게 비유했어"라고 그는 말했다.

따라서 심미적 도구는-즉 심미적 도취를 유발하는 아름다움의 리듬의 도구-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이다.(360)

 

215. 여러분이 이런 내적 깊이를 달성하면 온 세상이 열리고, 여러분이 삶에서 하던 놀이는 이 광휘로 가득 차게 된다. 성배의 성은 장() 속에 있는 것이다. 성배는 여러분이 이런 밀폐 봉인된 장을 경험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완전한 환희와 영적 성취의 감각이다. 이는 마치 석유를 탐사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러분은 파이프를 꽂아 넣고, 그 파이프가 석유를 건드리면, 그제야 그 지역 밑이 온통 석유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우선 그걸 발견하기 위해 어디론가 내려가야만 하며, 그곳이 바로 이 돌입의 장인 것이다.(362)

 

216. "나는 신앙을 상실했다고 했어" 스티븐이 대답한다.

"하지만 내가 자존심마저 상실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부조리를 버린 후, 비논리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부조리를 포용한다면, 그게 어떻게 해방이 될 수 있겠니?"(361)

 

217. 예술가란 예술 작품을 완성한 사람이지, 단순히 완성하려는 의도를 품었다고 해서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다.

218. 심미적 도취의 경험은 미술과 연관되어 있다. 반면 배관 일에 유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일을 하면서 심미적 도취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219. 예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오랜 속담이 있다.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372)

220. 책 한 권 쓰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373)

221. 여러분이 아는 것에 근거하여 행동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단순히 자신의 지식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여러분은 그것을 움직임으로 변환시켜야 한다. 예술에서는 이것이 전부다.(373)

222. 인도의 춤에서는 몸 전체가 따로 따로 논다. 눈이 하는 어떤 일이 있고, 손이 하는 어떤 일이 있고 하는 식이다., 그러다가 이런 부분들이 다시 합쳐지면서 우리는 예술 속에서 자연의 변모를 얻게 된다.(376)

223. ……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 작품이 되어버린 것이다……”나처럼 되어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화에서 영원히 창조적이고, 영원히 실존을 강요하며, 이 현상의 변화에 영원히 만족하는 원초적 어머니인 나를! – 니체(377)

224. (슈펭글러의 저의처럼) 장식으로서의 예술의 가장 좋은 사례는 건축으로, 완성된 구조물은 그때부터 초시간적이 되고만다. 거기 그냥 놓여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모방으로서의 예술이고, 춤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춤은 재현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삶의 한 순간과도 비슷하다. (377)

225. 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실 예배이기 때문이다.(379)

226. 여러분이 직장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여러분의 고용주는 여러분을 더 높은 지위로 승진시키려 할 것이다. 여러분은 이전보다도 더 많은 것을 직업에 바쳐야 하며, 여러분은 더 많은 봉급을 받겠지만, 새로운 책임으로 인해 여러분의 자유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내 조언을 이렇다. 승진을 받아들이지 마라. 기본 수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위에 더 많은 무더기를 얹어 놓지는 마라. 왜냐하면 자신의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작업에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결국 대학 행정부에 소속되고, 그러면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소비하고 만다.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381)

227.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381)

228. 즉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그러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간에 그 시간 동안은 거기 앉아 있어야 한다. (382)

229. 창조적 모험은 항상 무모하다.

230. “당신의 문제는 시적 요소가 스스로를 드러낼 기회조차 갖기 전에 비판적 요소를 끌어냈다는 점입니다.” (프리드리히 실러가 슬럼프에 빠진 어느 젊은 작가에게……)(383)

231.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 ‘전방위적 글쟁이또는 즐기는 글쟁이’, ‘자유로운 작가(사실 아직까지 정해진 것은 없다. 그저 현재의 마음상태가 이정도이다.)’가 되고 싶어하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연구원지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자유롭게 춤추듯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위적인 글이나 구조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흐름대로, 원하는 문체와 시각대로 쓰려고 노력했다. 완전한 구조의 잘 다듬어진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시각으로 그리고 원하는 설정으로 글을 써보려고 했다. 남들의 시선은 되도록이면 차선에 두었다. 한마디로 내 입맛대로쓰려고 했다. 나는 연습생에 불과하다. 이리도 써보고 저리도 써보고 되도록 마음속 깊숙이에 자리잡은 그 무언가를 끄집어내어 토해내는 느낌으로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초보자인 나에게 저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굉장한 힘이 된다.

232. 말 그대로 문을 계속 붙잡아 열어 두고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들이야 계속해서 나타나겠지만, 여러분이 일찍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하려면 그 문은 계속 열어 두어야 한다.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문장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비판을 미루어 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다 죽여 버려라. (385)

233.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385)

234.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385)

235. (고갱)의 여정은 영웅의 여정이었지만, 그로 인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는 그야말로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여러분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는 예술가로서는 승리를 거두었다.(389)

236. (제임스 조이스) 12년이 걸려서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완성했다. 그는 본래 1904년에 에세이를 의도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정작 이것이 소설로 발전해서 출판된 것은 1916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와중에 더블린 사람들을 탈고하고 율리시스를 쓰는 중이었으니, 나중 책을 쓰는 데에만 7년이 걸렸다. …… 그는 16년 동안이나 피네간의 경야를 썼고, 그게 나왔을 때의 서평은 정말이지 난리가 아니었다. “도대체 이 작자가 뭘 하는 거야? 이 사람 미쳤나? 미친 작품을 그냥 우리 앞에 내놓은 것 아닌가?” ‘피네간의 경야의 초판본은 출간 직후 2개월이 지나도록 안 팔리고 남아 있기만 했다. 나는 권당 56센트씩을 주고 양장본 4권을 샀다. 책이 안 팔리고 남아 있자 출판사는 인쇄비라도 뽑기 위해 안달하고 있었다. 물론 저자는 한 푼도 못 받았고 말이다……. 그는 내 삶에 있어서 모범은 될 수 없겠지만, 예술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범은 될 수 있으리라. 토마스 만은 조이스야말로 20세기 최고의 소설가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조이스가 내 놓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 (391~392)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의 상당수는 이렇게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 고흐도 그랬고, 니체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그렇고. 조이스도 그렇다. 천재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대중성을 포기해야하는 수도 있는 것 같다.

237. 여러분은 이 안에서 마야의 투사하는 힘과 드러내 보이는 힘을 볼 수 있는가? …… 여러분 스스로가 곧 마야를 만들어 내는 존재이며, 여러분의 태도가 붓다의 태도일 때 여러분은 그 드러내 보이는 힘을 여는 사람인 것이다.(401)

238. 조이스의 비법은 어디에서나 상징을 보는 것이다.(403)

239.진정한 상징은 우리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가며, 원주의 다른 지점으로 데려가지는 않는다. 상징을 통해서 인간은 효과적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 다른 사람들,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 토머스 머튼 (405)

 

240. 여성의 생리주기와 달의 주기의 일치는 인간의 삶을 구조화하는 물리적 현실이며,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면서 관찰되어 온 신비한 현상이다. (407)

241. 위대한 물리학자 에이빈 슈뢰딩거는 놀라우면서도 탁월한 저서인 나의 세계관이라는 책에서 이와 똑 같은 형이상학적 시각을 보여준 바 있다. “우리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사실은 어느 하나의 단일한 존재의 측면, 또는 양상인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 단일한 존재를 서구의 용어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반면,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흐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411)

242. 1855년 시애틀 추장이 한 연설 (p.415~418) : 감동적인 장절

243. 이 세상은 우리의 짝이며, 우리 역시 이 세상의 짝이다.(419)

244. 그들은 생각을 뛰어넘어 무한한 우주로 날아간 다음, 불모지인 달을 여러 번 선회한 뒤 먼 거리를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우주비행사들은)자신들의 목적지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반가운 광경이었는지 몰랐다고 말한다. 즉 이 지구라는 행성은 마치 무한한 우주라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 같았다!”라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는 뚜렷한 이미지가 있다. 이 지구는 온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의 오아시스며, 삶의 의례를 위해 따로 떼어 놓은 특별한 종류의 성스러운 숲인 것이다. 그리고 이 지구의 어느 한 부분이나 구획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이제는 성소, 따로 떨어진 축복받은 장소인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이제 하늘에서 태어난 땅이 얼마나 작은지를, 그리고 그 소용돌이치고 빛을 내며 아름다운 구의 표면에 자리잡은 우리의 위치가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를 직접 보게 되었다.

⇒ ‘연금술사에서의 주인공도 결국 자신이 떠난 그 자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게 되었다. 모든 외부로의 여행은 곧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마찬가지로 달 탐사의 가장 큰 수확은 그들이 떠나온 땅인, 바로 그 지구를 달의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245. 이 세계는 거대하지만, 우리 안에서 바다처럼 깊다 (릴케) (420)

246. 외부로의 여행으로서의 달 로켓 비행은 결국 우리 자신을 찾아 외부로 나간 것이다.

247. “내 입에서 마시는 자는 누구나 나와 같이 될 것이라. 내가 그가 되고, 감추어진 것들이 그에게 드러나리라. …… 만물이 나이니, 나로부터 만물이 생겨났고, 나에게 만물이 이어지리라. 장작을 쪼개면 그곳에 내가 있고, 돌을 들어 올리면 그곳에 내가 있느니라.”(424)

248.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425)

249. 신화는, 또는 달리 말해서, 신화와 종교는 위대한 시이며, 그와 같이 인식할 경우에는 십중팔구 사물과 사건을 관통해서 서로 완전하며 전체인 어떤 존재 또는 영원의 편재를 가리킨다. …… 따라서 모든 신화가 삶의 현대의 삶에 맞도록 가공하기 위해 반드시 성취해야만 하는 첫 번째 조건은 한때는 끔찍하면서도 매혹적이었던 우리 자신과 우주-우리가 곧 그 귀와 눈과 정신으로 작용하는-의 경이를 향한 지각의 문을 정화하는 것이다. (426)

250.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주관적 의미에서 보자면 오래되고, 영원하고, 끊임없는 신화이며, 기억되는 과거나 투사되는 미래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이는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즉 특정한 민족들의 아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것이 신화인 것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를 이 아름다운 행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각자 자기 나름대로, 모두와 (경계없이) 하나가 되어-의 중심으로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427)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와 인생

<차례>

들어가는 말 :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도입의 단계 :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의식의 세 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 캠벨이 애설런 연구소에서 한 달간 했던 강의내용을 바탕으로 캠벨의 사상을 대표할 수 있는 저서의  인용문들이 곁들여진 일종의 강의록이자,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이기도 한 책이다. 1983년 당시 그의 강의를 들은 다이언 k 오스본이 강의 필기내용을 바탕으로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인생을 둘러싼 모든 것들 , 종교, 신화, 사랑, 예술 등 에 대한 캠벨의 전반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다. 상당히 불친절한 구조를 띄고 있는 책이긴 하지만, 그런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캠벨을 이해하기 좋은 책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그의 기본 사상과 그에게 영향을 준 많은 다른 예술가들의 에피소드와 사상들 또한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엮은 이 다이안 k 오스본이 왜 이런 불친절한 목차와 분류로 이 책의 전개를 가져갔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달간 열린 강의에 대한 강의록을 바탕으로 했다 하면, 거기에도 사이사이 수업의 순서나 소분류가 있었을텐데 말이다. 크게  네개의 목차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의 구성을 아래와 같이 재변형 시키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1. 도입의 단계 : 삶에 대하여 (캠벨의 잠언들)

2. 의식의 첫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사랑과 결혼에 대하여

돈과 직업에 대하여

캠벨의 우드스탁에서의 침묵의 5

종말과 죽음에 대하여

3. 의식의 두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신이란

기독교

인두교

불교

인간과 종교()

여성과 종교

깨달음이란

4. 의식의 세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진정한 삶의 체험

예술가의 삶에서 엿보는 희열 제임스 조이스

인생과 신화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상당히 부적절하다고 본다. 저자 조셉캠벨이 신화학자, 비교종교학자로 알려져 있는 이유로 책의 제목을 신화와 인생으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책의 원제만 보더라도 이 책의 제목 신화와 인생은 큰 방향성을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든다. 원제 [A Joseph Campbell Companion : Reflections on the art of living] 만 보더라도. 이 책이 신화와 인생을 엮은 책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삶의 예술에 대한 고찰’, 즉 예술로서의 삶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인지도와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한 신화와 인생이란 제목은, 독자들의 괜한 오해와 실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제목은 어떨까.

 조셉캠벨, 인생을 말하다’ ‘삶의 예술에 대한 고찰 : 비교종교학자 조셉캠벨의 인생강의등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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